강원도의 힘 눈빛사진가선 17
엄상빈 지음 / 눈빛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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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4



‘수수하며 착한’ 이웃이 사는 강원도를 바라보다

― 강원도의 힘

 엄상빈 사진

 눈빛 펴냄, 2015.10.12. 12000원



  포근한 겨울 날씨는 더없이 반가운 선물이라고 느낍니다. 추운 날씨가 이어지다가 며칠쯤 포근한 날씨가 찾아들면 이불이며 빨래이며 마당에 내다 넙니다. 어른인 나는 이불이랑 빨래를 널며 하하하 웃습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신나게 뛰놀다가 ‘아, 겨울인데 덥네?’ 하면서 웃어요.


  매서운 겨울 날씨는 가없이 고마운 선물이로구나 하고 느끼고요. 포근한 날씨가 이어지면 어느새 파리가 깨어나기도 하는데, 다시 차가운 바람이 불면 파리는 감쪽같이 사라질 뿐 아니라, 풀잎이 더 싯누렇게 시들고 가랑잎도 더 바짝바짝 마릅니다. 한겨울에 웬 파리가 나다니나 싶어 파리채를 휘두르다가 요 녀석들도 겨울에는 좀 잠을 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뒤꼍이나 마당에서 잘 돋던 풀은 숨이 죽으니, 시든 풀을 밟으며 서걱서걱 사각사각 소리를 노래처럼 듣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지내는 우리 식구는 한겨울에도 무척 포근한 날씨를 누리기 때문에, 다른 고장에서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씨여도 이곳에서는 싸락눈조차 구경하기 어렵습니다. 눈을 구경하기는 어렵지만 한겨울에 동백꽃이나 장미꽃을 구경합니다. 참말 고흥에서는 한겨울에도 볕이 따사로운 날이 이레 남짓 이어지면 장미나무를 울타리에 심어서 키우는 이웃집에서는 장미꽃이 소담스레 벌어지기도 합니다. 아마 경상남도 통영이나 남해 같은 곳에서도 한겨울에 짙붉거나 새빨간 꽃송이를 소담스레 만날 만하리라 느껴요. 태평양을 거쳐서 부는 포근한 바람을 맞이하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빛살조각처럼 퍼지는 즐거운 기운을 맞아들입니다.



강원도 내 한 일간지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강원도민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순박하다’를 가장 많이 꼽았다. 도민들이 ‘타 지역 사람들이 도민들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한 질문에서도 역시 ‘순박하다’는 말을 가장 많이 꼽았다.




  엄상빈 님이 빚은 사진책 《강원도의 힘》(눈빛,2015)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강원도 사람들 이야기를 차분하면서도 포근하게 들려줍니다. 그저 사진일 뿐이라고 여긴다면 그저 사진이지만, 그저 강원도 이야기라고 여길 수 있으면 그저 강원도 이야기입니다. 우리 이웃이라고 바라보면 우리 이웃이요, 우리 할매요 할배라고 여기면 우리 할매요 할배입니다.


  강원도 사람들은 ‘순박’할까요? 그러면 ‘순박(淳朴)’이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에서 이 한자말을 찾아보면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순수하며 인정이 두텁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한자말 ‘순수(純粹)’는 “전혀 다른 것의 섞임이 없음”을 뜻해요. 그러니, ‘순박한 강원도 사람들’이라 할 적에는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티없고 살갑다”는 뜻이 되리라 느낍니다. 다른 한국말로 하자면 “수수하면서 착하다”요 “수수하면서 사랑스럽다”라고도 할 만합니다.


  문득 궁금합니다. 서울 사람들은 ‘수수하다’거나 ‘착하다’거나 ‘사랑스럽다’거나 ‘살갑다’고 할 만할까요? 부산이나 대구나 광주 사람들은 어떠할까요? 서울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을 놓고 강원도 사람들을 바라보듯이 ‘수수하네요’라든지 ‘착하네요’라든지 ‘사랑스럽네요’라든지 ‘살갑네요’ 하고 들려주는 말은 몇 사람이나 할 만할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모든 강원도 사람들이 다 ‘순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고장 사람들이 강원도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순박’하다고 말하는 사이에 강원도 사람들은 차츰 ‘순박’한 마음결이나 마음씨로 거듭납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 사람들을 가리켜 ‘차갑다’거나 ‘새침스럽다’거나 ‘날카롭다’거나 ‘바쁘다’거나 ‘안 착하다’ 같은 느낌을 말하는 동안 참으로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 사람들은 이러한 모습으로 달라지지 싶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새로운 말을 빚기도 하지만, 우리가 쓰는 말에 따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달라지기도 한달까요. 사진은 바로 이러한 흐름을 찬찬히 살피면서 찍습니다. 사진은 바로 이러한 삶자리를 가만히 돌아보면서 찍습니다. 사진은 바로 이러한 이음고리를 넌지시 밝히면서 찍습니다.



여기에 담겨 있는 30여 년 세월의 사진 속 주인공들이 바로 강원도민들의 순박한 자화상이다. 강원도 여기저기를 다니며 우연히 만난 우리의 이웃 아저씨들이고 아주머니들이다.





  전라남도에서 사는 우리 식구는 우리 이웃을 따사롭게 바라봅니다. 이웃도 우리를 따사롭게 바라봅니다. 그래서 내가 전라남도 고흥이라는 고장에서 사진을 찍는다면 ‘고흥 사람들’이나 ‘전라남도 사람들’을 엄상빈 님이 《강원도의 힘》이라는 사진책에서 강원도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듯이 ‘순박’하게 마주하면서 담을 수 있습니다.


  서울이나 부산에서 사는 이웃님도 서울이나 부산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을 얼마든지 ‘순박’하게 마주하면서 순박하게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찍히는 사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하는 사진이지만, ‘찍는 사람’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거듭나기도 하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사람들이 워낙 순박하기에 엄상빈 님은 강원도 이웃님을 순박한 숨결이 흐르도록 사진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엄상빈 님 스스로 순박한 마음결이나 마음씨가 되어 강원도 사람들을 이웃이요 동무요 한식구로 마주한다면, 강원도 사람들을 찍는 사진은 언제나 순박한 기운이 흐르는 따사롭고 착하며 수수하고 살가운 사진이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강원도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기에 ‘순박한 빛’이 흐르지 않습니다. 서울이나 부산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어도 얼마든지 ‘순박한 빛’이나 ‘따사로운 숨결’이나 ‘수수한 바람’이나 ‘짙푸른 노래’로 담을 수 있어요. 모델이 훌륭해서 사진이 훌륭할 수 있으나, 모델만 훌륭해서는 사진이 훌륭하지 않습니다. 모델이 좋고 나쁜가에 따라서 좋고 나쁜 사진이 나오지 않으니까요.





집중호우로 다 망가졌던 그 양배추밭에도 이듬해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파종을 하고 농사일을 이어가는 사진 속 주인공 농부처럼 은근과 끈기, 그리고 순박함이 바로 ‘강원도의 힘’이다.



  누구를 찍든 ‘누가’ 찍는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누구, 이를테면 멋지거나 훌륭한 모델을 찍더라도 ‘누가’ 찍는가에 따라 비틀리거나(편견이 되거나) 뒤틀릴(왜곡될) 수 있습니다. 순박한 사람들을 찍더라도 ‘누가’ 찍는가에 따라 안 순박하게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순박한 이웃을 사진으로 찍으려면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도 똑같이 순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수수한 이웃을 사진으로 담으려면 사진기를 손에 잡은 사람도 똑같이 수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랑스러운 이웃을 사진으로 옮기려면 사진기를 손에 든 사람도 똑같이 사랑스러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은 언제나 삶자리에서 찍습니다. 먼 자리도 가까운 자리도 아닌 삶자리에서 찍는 사진입니다. 그리고 사진은 사랑자리에서 찍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넋으로 사진을 찍지요. 마지막으로 사진은 꿈자리에서 찍습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삶을 사랑스럽게 짓겠노라 하는 꿈을 가슴에 품으면서 찍습니다. 삶자리와 사랑자리와 꿈자리를 생각하기에 《강원도의 힘》이라는 사진책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자그마한 사진책 한 권을 책상맡에 두고 오래오래 되읽으면서 우리 이웃이 살아가는 삶자리랑 사랑자리랑 꿈자리를 헤아리다가, 오늘 우리 식구가 지내는 삶자리랑 사랑자리랑 꿈자리에는 어떤 기운과 바람과 숨결이 흐르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4348.12.24.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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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세계사 - 분쟁과 빈곤의 지구촌, 이정용 사진집 오늘의 다큐 3
이정용 지음 / 눈빛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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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21



평화로운 마을에는 싸움도 가난도 없다

― 역설의 세계사, 분쟁과 빈곤의 지구촌

 이정용 사진

 눈빛 펴냄, 2015.1.23. 25000원



  날씨가 포근하면 아이들은 마당에서 맨발로 뛰어놉니다. 폭한 날에 아이들은 장갑조차 안 낍니다. 겉옷을 벗고 이마와 볼이 빨갛게 달아오르도록 뛰고 달리면서 신나게 놀지요.


  즐겁게 노는 아이들은 즐겁게 놀기에 평화롭고 사랑스럽습니다. 평화롭고 사랑스럽기에 이 아이들은 저희 어버이가 부자인지 가난뱅이인지 잘 모르기도 하지만, 굳이 따지지도 않습니다. 평화로운 몸짓과 마음으로 신나게 놀 수 있는 마을이라면 어디나 평화로운 기운이 흘러서 날마다 재미나면서 즐거운 이야기가 넘칠 만합니다.



자본주의가 됐든 사회주의가 됐든 모든 곳에 이 역설의 질서가 존재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갖지 못한 자들은 이 질서를 존중하도록 강요받았고, 그들 앞에 던져진 희망이라는 고깃덩어리를 위해 목숨까지 거는 행위를 서슴지 않는다. (6쪽)



  사진책 《역설의 세계사》(눈빛,2015)는 한겨레신문 사진기자 이정용 님이 지구별 여러 나라를 돌면서 담은 사진을 한자리에 묶으면서 ‘분쟁과 빈곤’이 어떻게 흐르는가 하는 대목을 보여줍니다. 스스로 찾아가서 두 눈으로 지켜보고 온몸으로 부대끼지 않고서는 알 길이 없는 ‘분쟁’하고 ‘빈곤’을 사진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신문이나 방송에는 지구별 ‘분쟁 소식’이나 ‘빈곤 소식’이 자주 오르내립니다. 커다란 나라가 쳐들어와서 고단한 나라 이야기가 신문이나 방송에 실리고, 한 나라가 여럿으로 갈린 채 치고 박고 다투고 서로 아픈 모습이 신문이나 방송에 실려요. 그리고, 이렇게 전쟁이나 분쟁이나 내전이 있는 곳에는 어김없이 ‘가난이나 굶주림(빈곤)’이 함께 있습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이 정치권력으로 갈린 이들이 전쟁무기와 전쟁과 군대에 힘을 쏟는 사이에 여느 사람들은 더더욱 살림이 쪼들리기 때문입니다. 살림을 가꾸는 데에 써야 할 돈을 고스란히 전쟁무기와 전쟁과 군대에 바치니 가난이나 굶주림은 그칠 수 없습니다.


  지구별에서 전쟁무기를 가장 많이 갖춘 나라는 어디일까요? 미국입니다. 전쟁무기가 가장 많아도 새로운 전쟁무기를 끝없이 많이 만드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미국입니다. 미국 못지않게 러시아하고 중국도 전쟁무기에 돈을 많이 씁니다. 일본도 전쟁무기에 돈을 무척 많이 씁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유럽 여러 나라도 이러한 흐름은 엇비슷합니다.


  사진책 《역설의 세계사》는 ‘역설’이 되는 지구별 아픔과 생채기를 사진으로 다룹니다. 지구별 곳곳에서 드러나는 분쟁이나 빈곤을 사진으로 가만히 보여주기도 하고, 지구별 곳곳에서 분쟁이나 빈곤이 드러나더라도 즐겁고 재미나게 삶을 짓고 살림을 가꾸는 사람들을 사진으로 넌지시 보여줍니다. 사진이 모든 것을 할 수 없다고도 할 만하지만, 사진기자 이정용 님은 사진으로 분쟁과 빈곤을 찬찬히 보여주면서, 분쟁과 빈곤이 이 지구별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수많은 이들이 ‘노예’가 되는 것을 무릅쓰고도 먼 타지를 찾는 이유는 자국의 열악한 노동시장과 임금을 들 수 있다. (33쪽)



  그러면, 분쟁이나 빈곤이 사라지도록 하자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전쟁무기를 없애야 하겠지요. 전쟁무기가 있으니 자꾸 전쟁이 터지고 분쟁이 생겨요. 전쟁무기부터 없어야 분쟁이 사라집니다. 전쟁하고 분쟁이 사라져서 전쟁무기에 퍼붓는 돈도 사라진다면 이제 살림을 북돋우는 길로 나아갈 수 있어요. 이때에는 빈곤도 사라질 수 있어요.


  한국 사회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한국은 전쟁이나 분쟁 때문에 괴로운 나라는 아니라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국은 남녘하고 북녘이 갈렸어요. ‘분쟁’은 없으나 ‘분단’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남녘이나 북녘은 군대하고 전쟁무기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부어요. 군대하고 전쟁무기에 돈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으면 어떻게 될까요? 다른 곳에 쓸 돈이 없지요. 교육이나 복지뿐 아니라, 문화와 삶을 가꾸는 데에는 돈을 못 쓰고 말아요.



현재 타슈켄트에도 대형 쇼핑센터가 하루가 다르게 들어서고 있지만 사람들의 정겨운 삶과 향내가 있는 시장을 찾는 것은 한국이나 우즈베키스탄인들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105쪽)



  가까이에 있는 아픔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멀리 있는 생채기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다큐멘터리는 아픔과 생채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이러면서 기쁨과 웃음을 나란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픈 사람이 울기에, 울음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프면서도 아이를 낳고 아이를 돌보고 아이를 가르치기에, 울음을 그치고 아이하고 함께 웃으려고 합니다. 아이들은 눈물이 아닌 웃음을 물려받으면서 삶을 새롭게 짓도록 돕고 싶은 마음이니까요.


  사진책 《역설의 세계사》를 보면 총을 든 사람이라든지 총알에 유리창이 깨진 모습이라든지 아슬아슬하거나 안타까운 모습을 사진으로도 만날 수 있고,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하게 짓는 사랑스럽고 평화로운 모습도 사진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페루의 수도 리마 남쪽의 사막에서 시작된 이 도시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모래 언덕에서 시작하여 30여 년 만에 6만여 가구, 40여 만의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도시로 성장을 했다. 도시에서 쫓겨난 도시빈민들이 내 집 마련의 소박한 꿈을 안고 스스로를 조직해 건설한 비자 엘 살바도르는 남미를 대표하는 참여 민주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사람들은 이곳을 구원의 땅이라 부른다. (204쪽)



  아이들이 옷을 입습니다. 언니한테서 물려받은 옷도 입고, 어버이가 지어 주는 옷도 입으며, 가게에서 장만한 옷도 입습니다. 아이들은 어떤 옷이든 딱히 가리지 않습니다. 즐겁게 입고서 즐겁게 입으면 넉넉합니다. 아이들은 즐거운 삶을 꿈꾸고, 즐거운 놀이를 바라요. 우리 어른은 아이들한테 즐거우면서 평화로운 삶을 물려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어른다우면서 아름다운 사회를 이룰 만합니다.


  그러니까 말이지요, 분쟁이나 빈곤이 있는 나라에 무엇이 있어야 할까요? 분쟁이 없어야 하고 빈곤이 없어야 할 텐데, 분쟁이나 빈곤이 없어진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서야 할까요? 바로 평화가 들어서야 하며, 기쁘게 나누는 아름다운 사회가 들어서야 합니다. 연필 한 자루를 나누고, 교실을 정갈하게 가꾸며, 마을이 아름답도록 북돋아야 합니다. 가난하거나 굶는 이웃이 없어야 하며, 아프거나 괴로운 동무가 없어야 하지요.


  정치와 경제와 사회라는 테두리로만 바라보면 이 지구별은 온통 ‘역설’투성이입니다. 그렇지만 이 지구별을 이웃과 동무로 마주하고 꿈과 사랑으로 손을 맞잡으려는 마음으로 얼크러지면 언제나 ‘새로움’이 흐르리라 느껴요.


  사진책 《역설의 세계사》를 빚은 이정용 님은 이녁이 밟은 나라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 앞서 여러 나라마다 어떤 분쟁과 빈곤이 펼쳐지는가를 갈무리합니다. 이 같은 ‘신문보도 자료’나 ‘통계지표 소식’을 살피면, 분쟁국이나 빈곤국 모두 전쟁무기와 군대 때문에 괴롭습니다. 그리고 선진국도 전쟁무기와 군대가 너무 많아요. 지구별에서 전쟁무기하고 군대를 몰아낼 수 없을까요? 모두 함께 전쟁무기하고 군대부터 없앤 뒤에, 모두 손을 맞잡고 ‘한이웃(하나가 되는 이웃)’이 될 수 없을까요? 사진책 한 권을 바라보면서 평화와 사랑과 꿈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평화와 사랑과 꿈이 이 지구별에 가득하여 ‘역설’이 사라질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2.1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비평/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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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원점 - 남과 북에서 바라본 휴전선과 판문점
구와바라 시세이 지음 / 눈빛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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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19



평화로 하나될 남북을 꿈꾸는 사진

― 분단원점, 남과 북에서 바라본 휴전선과 판문점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

 눈빛 펴냄, 2013.7.27. 12000원



  1936년에 일본에서 태어난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1960년대부터 한국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이녁은 1960년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보도사진’ 한길을 걸었고, 《보도사진가》라는 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2015년에는 《격동한국 50년》이라는 이름으로 1965년부터 2015년까지 지켜본 한국 이야기를 사진책으로 갈무리하기도 했습니다. 이리하여 2015년에 ‘이해선 사진문화상’을 받았습니다. 지난 쉰 해에 걸쳐 한국 사회를 사진으로 찬찬히 짚으면서 밝힌 보람을 기리는 셈이라고 봅니다.


  쉰 해에 걸쳐 ‘한국을 사진으로 찍는 손길’은 여러모로 애틋합니다. 한국에 있는 사진가 가운데 한국을 쉰 해 동안 찬찬히 지켜보면서 담은 분은 얼마나 될까요? 어느 모로 본다면,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 이웃을 찬찬히 바라보지 못하는 눈길은 아닐까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진가이기에 꼭 한국을 사진으로 찍어야 하지는 않습니다. 한국 사진가로서 ‘일본을 지켜보며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중국이든 인도이든 티벳이든 미국이든 프랑스이든 얼마든지 두고두고 지켜보며 사진으로 찍을 만합니다. 다만, 오늘 한국에서 구와바라 시세이 님 사진을 살펴보면서 이 한 가지를 한국사람 스스로 물어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먼저, 한국에서 사진을 가르치거나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국을 얼마나 잘 아는가 하고 물어보야지 싶습니다. 한국에서 사진을 비평하는 사람은 서양 이론이나 예술 이론에 앞서, 한국에 있는 이웃을 얼마나 알거나 한겨레가 걸어온 발자국을 얼마나 아는가 하고 물어보아야지 싶습니다.





서울에서 미군 전용버스를 타고 온 한국 기자들은 북측 인사들과는 거의 대화를 않고 있었다. 북측 기자가 나를 일본 기자라 보고 일본말로 말을 걸어오기도 했고, 일본 담배와 자기네 북쪽 담배와 바꾸자고 하는 일도 있었다. 그 북쪽 담배를 서울로 가지고 와서 잡지사의 편집부원들에게 나눠 주기도 했다.



  사진책 《분단원점, 남과 북에서 바라본 휴전선과 판문점》(눈빛,2013)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분단이 비롯하는 첫자리(원점)’로 판문점을 꼽으면서 판문점 둘레를 가만히 살핍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한국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기에 남녘에서도 사진을 찍고 북녘에서도 사진을 찍습니다. 이 대목에서 한국 사진가는 여러모로 슬픕니다. 한국(남북녘 모두) 사진가는 판문점에서조차 사진을 마음대로 찍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한국(남북녘 모두) 사진가는 남녘이나 북녘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하더라도, 남녘에서 북녘으로 간다든지 북녘에서 남녘으로 와서 사진을 찍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일본사람이기 때문’에 남녘과 북녘을 조금은 홀가분하게 드나들면서 두 갈래 눈썰미로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한국 사진가로서는 ‘마음만 있을 뿐’이요 ‘몸으로 움직여서 찍을 수 없’는 사진을 일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찍었다고 할 만합니다.


  《분단원점》을 살펴보면, 남녘에 있다는 ‘자유의 마을’을 담은 사진이 있습니다. 북쪽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이기에 이름부터 ‘자유의 마을’처럼 붙였을 테지요. 여느 사람은 드나들 수 없는 마을이라니,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일본 취재기자’라는 이름으로 들어갔을 텐데, 예나 이제나 남녘 정부에서는 북녘한테 ‘남녘은 이렇게 자유로운 곳’이라고 알리려는 뜻에서 이 마을을 비무장지대 안쪽에 꾸민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저 수수하게 살림을 짓습니다. ‘자유’ 마을이건 ‘안 자유’ 마을이건 아이들이 태어나고, 아이들이 뛰놀며, 아이들이 어버이 곁에서 웃어요. 고운 옷차림이든 허름한 옷차림이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정치권력자처럼 정치나 권력을 따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력이나 재산을 가리면서 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저 놉니다.


  그런데 남북녘에서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저마다 아이들한테 총이나 칼을 손에 쥐고 춤추도록 시킵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저쪽에 나쁜 놈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저 너머에 ‘이웃이 산다’거나 ‘동무가 있다’고 가르치지 않아요. ‘유사시(전쟁이 터질 때)’에 조금이라도 더 빨리 더 많이 ‘적군 죽이기’를 하라고 윽박지르지요.





북측 실태는 잘 알 수가 없지만, 한국의 ‘자유의 마을’은 세금이 부여되지 않는 특수한 마을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두 마을은 결국은 남북 간 최전선의 견본과 같은 ‘쇼윈도’라고들 했다.



  평화로 하나될 남북을 꿈꾸는 사진이 될 수 있을까요? 사진 한 장은 남북녘에 평화로운 바람을 일으킬 수 있을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 사진으로 남북녘에 골고루 평화로운 바람을 흩뿌리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요? 평화를 헤아리며 쉰 해쯤 사진을 찍으면, 남녘이나 북녘 모두 조금이나마 평화를 바라보아 줄 수 있을까요?


  《분단원점》에 실은 사진 가운데 ‘판문점 회담’ 사진을 보면, 남녘이나 북녘에서 ‘별을 단 군인’이 모여서 담배 연기를 내뿜는 모습이 있습니다. 이른바 ‘평화회담’이라고 할 터인데, 이런 모임자리가 그리 평화스러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름은 평화라 하지만, 막상 ‘전쟁 훈련을 이끄는 사람들’만 모임자리에 앉았기 때문입니다.


  여느 때에 늘 전쟁과 전쟁 훈련과 전쟁 무기만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평화회담’은 참말 평화로 나아갈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참다이 ‘평화회담’을 하자면 대통령이나 장교가 아닌, 수수한 여느 사람이 모여야 하지 않을는지요. 정치 우두머리나 군대 우두머리는 서로 눈치를 보면서 한 발짝도 물러설 낌새를 보이지 않습니다. 이와 달리 수수한 여느 사람은 어깨동무나 두레나 품앗이를 하지요.


  평화를 생각하자면, 평화를 찾자면, 평화를 노래하자면, 이리하여 평화를 이루자면 정치도 권력도 무기도 전쟁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른바 ‘계급장을 떼고’ 손을 잡을 수 있어야 평화회담을 할 만합니다. ‘돈도 이름도 힘도 내려놓고’ 모여야 비로소 평화로 가는 길을 이야기할 만하리라 느낍니다.


  사진이란, 사진 한 장이란, 사진책 한 권이란, “분단이 비롯한 첫자리”를 밝히는 사진책을 보여주려고는 사진가 한 사람이란, 바로 이러한 대목을 짚는구나 싶습니다. 분단이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바로 정치권력자한테서 비롯합니다. 분단은 어디에서 태어났을까요? 바로 군인과 전쟁 훈련과 전쟁 무기에서 태어나지요. 총도 칼도 대포도 미사일도 남북녘이 저마다 서로서로 겨누는 오늘날 모습에서는 어느 구석에서도 평화가 태어나지 못하고, 그저 분단만 흐를 뿐입니다.




독일과 베트남은 통일되어 냉전은 이제 소멸되고 말았다. 더욱이 사회주의 국가와 맹주였던 소련도 와해되어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였건만, 한반도에서는 이제는 화석이 되어 버린 냉전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찍은 사진이 ‘역사를 바꾸’지는 않으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구와바라 시세이 님 스스로도 ‘역사를 바꿀’ 뜻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왜 쉰 해에 걸쳐 한국을 이토록 애틋하게 바라보면서 ‘끔찍한 분단’을 자꾸 사진으로 찍을까요?


  한국사람 스스로 여느 때에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삶을 새롭게 보여주려는 뜻으로 분단 사진을 보여주려는 마음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판문점 언저리 사진으로 엮은 《분단원점》입니다만, 한국 사회를 둘러보면 어디에서나 군인이 있고 군대가 있습니다. 남녘도 북녘도 군인옷을 입고 돌아다니는 젊은이가 많습니다. 해병대를 나왔다는 분들은 마흔이나 쉰이나 예순 살이 되어도 군인옷을 벗을 마음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군대를 나온 사내는 남녘이나 북녘 모두 군번에 따라 거수경례를 붙이는 바보스러운 계급 질서를 아직 그대로 이어갑니다.


  삶을 노래하지 않고 군대 이야기를 나누는 한국 사회입니다. 사랑을 가꾸지 않고 전쟁 무기를 더 키우려고 하는 한국 사회입니다. 꿈을 북돋우는 사회 얼거리가 아니라, 군부대를 더 늘리고야 마는 한국 사회입니다. 한국 사회가 분단과 냉전이라는 어리석은 껍데기를 벗지 못하는 까닭은 스스로 ‘전쟁 비용 투자’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탓이 아닐는지요. ‘전쟁 비용 투자’를 하지 않으면 전쟁이 난다는 두려움을 정치권력자가 퍼뜨리면서, 남녘도 북녘도 더욱 무시무시한 전쟁 무기와 훈련이 뿌리를 내리고, 이렇게 늘어난 전쟁 무기와 훈련을 버티느라 어마어마한 돈을 해마다 더 많이 쏟아부어야 하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북한을 방문해서 북한 쪽에서) 카메라를 가지고 북한 병사에게 렌즈를 향했지만 그들의 표정에서 긴박감은 보이지 않았다. 한국 쪽에서 판문점을 방문해서 북한 병사를 촬영했을 때에 보이던 날카로운 시선의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사진책 《분단원점》에 실린 ‘철길이 끊어진 곳으로 빨래광주리를 이고 가는’ 사진이 무척 곱습니다. 철길이 끊어진 풀밭에 넌 빨래가 눈부시게 빛납니다. 참말 이 사진처럼, 사람들은 늘 빨래를 하고, 밥을 짓고, 아기한테 젖을 물리고, 씨앗을 심고, 나락을 거두고, 집을 짓고, 두레를 하고, 일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은 멱을 감고, 감을 따고, 열매를 나누면서 삶을 짓고 살림을 가꿉니다. 남녘하고 북녘을 가로지르는 쇠가시울타리는 이처럼 수수한 여느 삶을 짓밟습니다. 그리고, 남북녘이 바라 마지 않는 평화란 바로 이처럼 ‘풀밭에 빨래를 너는 눈부시게 빛나는 삶과 살림’을 찾으려는 몸짓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제식훈련은 아무것도 낳지 않아요. 그러나 씨앗을 심고 김을 매는 손길은 삶을 낳습니다. 온갖 무기로 젊은이를 옥죄는 전쟁 훈련은 아무것도 낳지 않아요. 그러나 아이를 낳고 마을을 북돋우며 밥을 짓는 손길은 살림을 아름답게 낳습니다. 판문점을 열고, 쇠가시울타리를 걷고, 총칼을 녹여서 호미와 쟁기로 바꾸고, 지뢰 묻힌 땅을 짙푸른 숲으로 가꾸고, 군인 아닌 젊은 일꾼으로 이 나라를 살찌우려 할 적에 비로소 분단이나 냉전을 가뭇없이 녹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8.12.9.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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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풍경 눈빛사진가선 20
김정일 지음 / 눈빛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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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20



사진으로 아로새긴 ‘낡은 서울’ 한쪽 귀퉁이

― 기억의 풍경

 김정일 사진

 눈빛 펴냄, 2015.11.20. 12000원



  나는 서울에서 태어나지도 않았고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옛 서울이 어떤 모습인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작은아버지가 대치동에 있는 은마아파트에서 살았기에 곧잘 그곳에 나들이를 갔습니다. 할머니는 작은아버지 댁에서 함께 사셨기에 할머니를 뵈러 인천에서 서울 대치동까지 갔어요.


  내가 처음으로 떠올릴 수 있는 서울 대치동은 인천에서 ‘너무 먼’ 서울입니다. 인천역(하인천역)에서 전철을 타서 한참을 달린 끝에 신도림역에 닿으면, 신도림역에서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탑니다. 1970년대 끝자락하고 1980년대 첫무렵에는 인천하고 서울 사이에 복숭아밭이 제법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인천하고 서울 사이 전철길에서는 퍽 먼 데까지 아스라이 내다볼 만했습니다. 요즈음처럼 아파트가 우줄우줄 솟지 않았으니까요. 인천은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까지 몇 군데 아파트를 빼고는 5층이 넘는 건물이 드물었어요. 낮은 건물과 다닥다닥 붙은 골목집 마을이 사라질 무렵 비로소 서울로 접어드는구나 하고 알아차렸습니다. 여름에는 창문을 열며 바람을 쐬던 전철이고, 겨울에는 오들오들 떨며 손을 호호 녹이던 전철이었지요.


  그나저나 서울에서 땅밑을 달리는 전철을 타면 귀가 멍하며 답답했습니다. ‘서울사람’은 어떻게 땅밑으로 길을 내어 이런 끔찍한 전철을 타나 싶어서 ‘나는 서울에서 돈도 집도 준다 해도 살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무튼 전철을 타고도, 지하철로 갈아타고도 작은아버지 댁에는 안 닿았습니다. 어디에선가 전철을 내려서 택시를 타는데, 서울은 찻길에 자동차가 매우 많아서 조금 가다 서고 신호등에 걸리고 아주 괴로워서 택시 타지 말고 걸어가자고 아버지를 졸랐던 일이 새삼스럽습니다.



1982년 어느 날 신문 지면에, 지금으로 말하면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40여 개의 개발지구가 발표됐다. 투기의 시작이며 빈부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시발점이다. 이 신문 쪽지를 가지고 한 군데씩 지워 가며 촬영을 다녔다.



  사진책 《기억의 풍경》(눈빛,2015)을 읽습니다. 1984년에 한국방송공사에 들어가서 이곳에서 정년퇴직까지 했다는 김정일 님이 ‘재개발을 앞둔 서울’을 1980년대에 담은 사진을 그러모은 책입니다. 이 사진책에는 1981∼1983년 사이에 ‘서울 변두리’라고 할 만한 곳 모습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명동 사진도 몇 장 깃들지만, ‘아파트가 서기 앞서 자그마한 살림집’이 있던 서울 변두리를 가만히 보여주어요.


  사진책 《기억의 풍경》을 찬찬히 넘기며 ‘낡은 서울’이라고 할 만한 예전에 이 서울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았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주 마땅한 노릇인데, 높거나 큰 건물이 있는 서울도 있지만, 낮거나 작은 집이 있는 서울도 있습니다. 돈이 많거나 힘이 세거나 이름이 높은 사람이 모인 서울도 있을 터이나, 돈도 힘도 이름도 낮거나 작거나 여린 사람이 모인 서울도 있어요.


  그러니까, 누군가는 아파트를 새로 높이 올려서 이곳에서 살려 할 테고, 누군가는 아파트한테 보금자리를 빼앗기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아파트 투기나 재개발로 한몫 잡으려 할 테지만, 누군가는 이런 돈놀이하고 동떨어진 채 하루하루 살림을 찬찬히 잇습니다.



사실과 다른 로버트 카파의 스페인 전쟁 사진, 연출의 의혹을 가진 로베르 드와노의 프랑스 시청 앞의 키스 사진 등. 신뢰를 무너뜨린 이러한 사진이 도화선이 돼 뉴다큐멘터리 사진의 시대를 불러왔지만, 그렇다고 다큐멘터리 사진이 다 허위적인 것은 아니다. 한 동네를 찍고 뿌듯한 마음으로 귀가해 현상할 때의 그 설렘을 생각하면 그 말이 옳다고 지금도 난 생각한다.



  사진책 《기억의 풍경》은 ‘낡은 서울’을 떠올리도록 북돋우는 사진이 흐릅니다. 이 ‘낡은 서울’은 ‘수수한 서울’이면서 ‘수수한 한국’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보면 ‘서울 변두리’이지만, 다른 자리에서 살피면 ‘이 나라 어느 곳에서나 흔히 마주하는 이웃’입니다.


  함석 지붕이나 함석 울타리는 새마을운동 물결과 함께 골골샅샅 퍼졌습니다. 우물이 있는 집은 어느 도시나 시골이나 다 있습니다. 작은 마을에서 깔깔거리며 노는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어요. 다만, 골목놀이를 즐기는 아이들은 도시 한복판에는 없습니다. 도시 한복판에는 높직한 건물에다가 빼곡한 자동차와 끝없는 가게만 있지요.


  아이들은 자동차나 높은 건물하고 동떨어진 데에서 놉니다. 아이들은 빈터를 가득 채우면서 온통 웃음꽃입니다. 어른들은 하얀 기저귀를 그야말로 하얗게 빨아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기저귀가 나풀나풀 춤을 추는 곳에서는 수수한 사람들이 수수한 몸짓과 말짓으로 오순도순 새롭게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온통 배밭이던 압구정을 찍을 때는 친구와 배를 깎아 먹기도 했고, 도곡동 대치동을 찍을 때는 두엄 냄새가 지독했던 기억도 있다. 타워팰리스 자리에 있던 우물이 있는 집…….



  사진책 《기억의 풍경》은 흑백필름으로 흐르는 이야기입니다. 밝고 포근한 햇볕에 잘 마르는 하얀 기저귀를 보다가, 이 기저귀 둘레에서 노는 아이나 일하는 어른을 사진으로 보다가, 이러한 사진이 흑백이 아닌 무지개 빛깔이라면 어떠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낡은 서울도 변두리 서울도 아닌, 언제나 무지개 빛깔로 사랑스레 어우러지는 ‘작지만 작지 않’고 ‘낮지만 낮지 않’은, 그야말로 수수하며 투박한 사람들이 언제나 새롭게 짓는 아기자기한 살림살이를 꾸밈없이 마주하면서 보여줄 수 있으면 어떠했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골목마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놀던 내 어릴 적을 떠올리면, 아무리 가난하거나 고단한 살림살이라고 하더라도, 우리 어릴 적을 우리 어버이가 사진으로 모처럼 한 장 찍을 적에는 ‘흑백 아닌 무지개빛 필름’을 쓰셨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에는 ‘칼라 필름’을 쓰기 어려웠을 테지만, 1980년대로 들어선 뒤에는 어느 집에서나 ‘무지개 빛깔로 고운 필름’으로 사진을 찍었어요. 그리고, 이무렵 필름 한 통을 사진으로 다 찍기까지 으레 몇 달이 걸리고, 때로는 한 해 만에 필름 한 통을 사진으로 다 찍어서 어렵게 사진관으로 가져가서 찾지요. 더군다나 마을에 ‘사진기 있는 집’이 드무니, 사진기 있는 집에서 여러 집 여러 아이와 어른을 사진으로 찍은 뒤 ‘사진 찾는 값’을 모아서 필름을 맡기고 사진을 나누었어요.



그때 사진을 찍을 게 아니라 필름 값으로 한 평 한 평 땅을 샀어야 지금 더 성공했을 것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도 들었다.



  주민으로 주민을 바라보는 사진과 손님으로 주민을 바라보는 사진은 늘 다릅니다. ‘같은 서울사람’이지만 ‘낡은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사는 사람’으로서 이러한 서울을 바라볼 적에 이곳을 아로새기는 사진이란, ‘낡은 서울에서 안 태어나거나 낡은 서울에서 안 자랐거나 낡은 서울에서 안 사는 사람’으로서 이 삶터를 사진으로 아로새길 적에는 사뭇 다른 이야기가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그래서 ‘주민 아닌 사람’이 ‘서울 변두리’를 바라보는 사진을 적에는 한결 ‘객관성’을 살리는 다큐멘터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객관성을 살리면서 서울 변두리를 차분하게 바라보는 사진에서는 따스한 눈빛하고 손길이 흐르기는 하되, 구성진 마을 이야기나 웃음꽃이 피어나는 마을 노래까지 서리지는 못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진책 《기억의 풍경》을 보면, ‘낡은 서울’이면서 ‘서울 변두리’인 곳에도 공중화장실이 있었다고 하는 모습을 예쁘게 보여줍니다. 공중화장실 모습이 무척 예쁩니다. 빨랫대나 빨랫줄 모습도 무척 곱고요. 가게에 적힌 손글씨도 곱고, 안테나 생김새도 고우며, 지붕이나 대문이나 울타리도 하나같이 곱습니다.


  사진 한 장은 바로 어디에서나 그곳에서 삶을 짓는 사람이 있기에 찍을 수 있습니다. 그곳에서 삶을 짓는 사람이 없다면 ‘그곳에 갈’ 일이 없으며, 그곳에서 이야기가 태어날 일도 없습니다. 사진 한 장은 사람 사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이요, 사진 한 장으로 너랑 내가 서로 이웃이 되는 징검돌을 놓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새롭게 사진을 찍는 김정일 님은 이녁 스스로 이웃으로 사귀고 싶은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사진 한 장을 찍었을 테며, 이러한 사진은 언제까지나 곱게 흐르는 웃음노래가 되기를 빕니다. 서울이라는 얼거리에서 보면 낡거나 변두리인 곳이었지만, 한국이라는 얼거리에서 보면 그곳은 ‘낡은’ 곳이 아닌 ‘사람 사는’ 곳이요, ‘변두리’가 아닌 ‘우리 이웃’이 있는 자리입니다. 저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살가이 살림을 가꾸는 자그마한 집마다 산들산들 따사로운 바람이 붑니다. 4348.12.1.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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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 김기찬, 그 후 10년
김기찬 지음 / 눈빛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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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잡지 <포토닷> 2015년 11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02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사진을 찍는다

―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

 김기찬과 아홉 사람 글

 김기찬 사진

 눈빛 펴냄, 2015.8.27. 18000원



  사진을 어떻게 찍는가 하고 묻는 이웃이 있다면 나는 늘 한 마디를 들려줍니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하고. 잘 찍느냐라든지 잘 못 찍느냐는 대수롭지 않으니 처음부터 안 따집니다. 멋지게 찍느냐 안 멋지게 찍느냐도 대수롭지 않기에 처음부터 안 따져요. 값어치가 있는 사진이냐 아니냐도 처음부터 안 따집니다. 다만 늘 한 가지를 생각합니다. ‘따지기’를 하지 않고 ‘생각하기’를 해요. 사진기를 손에 쥔 나 스스로 ‘사랑’인가 아닌가를 생각합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고 이웃을 마주한 내가 언제나 ‘사랑’인지 아닌지를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 내가 너를 바라보는 눈길이 ‘사랑’으로 있도록 마음을 기울입니다.



내 사진 속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등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대낮에 남자들이 일 나가지 않고 집에 있을 리가 없다. (21쪽/김기찬)



  김기찬 님은 ‘골목안 풍경’이라는 이름으로 사진길을 걸었습니다. 《골목안 풍경》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책을 여러 권 선보였습니다. 김기찬 님은 이제 흙으로 돌아가셨기에 더는 골목을 거닐지 못하고 골목을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그러나 김기찬 님이 남긴 글하고 사진이 있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담아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눈빛,2015)라는 책이 태어납니다. 이 책에는 김기찬 님이 골목을 바라본 마음을 손수 적은 글을 앞자락에 싣습니다. 이러고 나서 뒷자락에는 김기찬 님 사진을 바라보는 아홉 사람 이야기를 싣습니다.


  한정식, 전민조, 김호기, 임종업, 윤한수, 최종규, 정진국, 이광수, 윤일성, 이렇게 아홉 사람이 김기찬 님 사진을 새롭게 읽으려고 합니다. 김기찬 님이 거닐던 골목을 새삼스레 걸어 보고, 김기찬 님이 거닐던 골목이 요즈음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살피며, 김기찬 님이 빚은 사진과 사진책이 어떠한 숨결로 우리한테 삶을 보여주는가 하는 대목을 헤아립니다.




골목안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하다. 작고 납작한 집들이지만 서로서로 껴안기도 하고, 바람 한 점 끼어들 틈 없이 바짝바짝 붙어 있어 어찌 보면 정겹기도 하다. 그런 집들이 동서남북으로 줄지어 서 있으니 자연히 골목길이 생겨난다. (27쪽/김기찬)



  사진은 어떻게 찍을까요? 사진은 누구나 이녁 삶대로 찍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찍고, 너는 네가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사진은 고스란히 삶입니다.


  김기찬 님이 찍은 골목안 풍경은 ‘골목안 풍경’일 뿐 아니라, ‘김기찬 님 마음자리 모습’이에요. 김기찬 님이 골목안을 ‘어머니 품’으로 느꼈다면, 김기찬 님 스스로 이녁 마음을 ‘어머니 품’처럼 되도록 보살피거나 가꾸거나 보듬으면서 삶을 지었다는 뜻이로구나 싶습니다. 골목안을 ‘포근하고 따뜻하다’고 느꼈다면, 김기찬 님 스스로 이녁 마음을 언제나 ‘포근하고 따뜻할’ 수 있도록 돌보거나 일구거나 어루만지면서 사진을 빚었다는 뜻이로구나 싶어요.


  다시 말하자면,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스스로 어머니 품이 되지 못한다면, 골목안 풍경을 어머니 품처럼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스스로 포근하거나 따뜻한 마음이 되지 않는다면, 골목안 풍경을 포근하거나 따뜻하게 찍을 수 없어요.




은행나무 골목은 언제나 즐겁고 인정이 넘쳐 나는 골목이다. 혜령이 할머니는 환경미화원이든 우편배달부 아저씨이든 땀 흘려 수고하는 분들에게 시원한 차 한잔이라도 대접하지 않고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분이다. 게다가 나 같은 사진쟁이에게까지 차 대접을 하니 참으로 송구스럽다. (35쪽/김기찬)



  사진을 찍는 수수께끼는 실마리를 풀기 아주 쉽습니다. 내 마음이 어두울 적에는 내 사진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이 밝을 적에는 내 사진이 밝을 수밖에 없어요. 김기찬 님이 빚은 사진은 ‘골목안 사람들이 사진기를 거스르지 않고 사진가를 따스하게 받아들여 주던 문화가 아직 있던 때’였기에 빚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김기찬 님이 빚은 사진은 ‘김기찬 님 마음이 그대로 골목안 풍경으로 드러나면’서 빚는 사진입니다.


  그래서 김기찬 님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김기찬 님이 밟은 골목’을 다시 밟더라도 ‘김기찬 님 흉내’조차 내지 못하는 어설픈 ‘따라하기 사진’만 찍습니다. 김기찬 님처럼 스스로 어머니 품이 되려 하지 않고서는 어머니 품 같은 사진을 찍지 못해요. 김기찬 님처럼 스스로 포근하거나 따스한 마음이 되려 하지 않으니 포근하거나 따스한 기운이 스미는 사진을 못 찍습니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골목을 사진으로 찍을 적에 ‘퀴퀴하거나 어둡거나 지저분하거나 낡’아 보이도록 찍습니다. 왜 이렇게 찍을까요?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사진기를 손에 쥔 분들 스스로 이녁 마음이 퀴퀴하거나 어둡거나 지저분하거나 낡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진은 ‘보여지는 풍경’이 그대로 드러나는 사진이 아닙니다. 모든 사진은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어떤 삶인가 하는 대목이 보여지는 이야기’입니다.





배우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을 해내기 위해서 겉치레를 하고 꾸며서 보여주지만 아디릉느 순진하고 정직한 동심 그대로이니 아이들 사진만큼 편안한 사진도 없다. (39쪽/김기찬)



  멋있어 보이도록 찍는 사진이라면, 이러한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다른 사람 눈치’를 살핀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그럴듯한 모습을 꾸며서 ‘남한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멋있어 보이는 사진’을 찍으려 합니다. ‘잘 찍은 사진’을 바라는 사람은 왜 사진을 잘 찍으려고 할까요? 이분들도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한테서 칭찬을 받거나 남보다 윗자리에 올라서려는 속셈이 있기 때문에 ‘잘 찍은 사진’에 얽매이고 말아요.



골목은 꼬불꼬불 산비탈에 길이 나 있어 다람쥐 쳇바퀴 돌듯 뛰어다니기에 알맞으니 다리가 튼튼하다. 다리가 튼튼하니 몸도 마음도 튼튼하다. 게다가 생활이 넉넉지 못하니 하기 싫은 과외공부가 필요없다. (41쪽/김기찬)




  김기찬 님이 어떤 사진을 찍었는가 하는 대목을 이제 새롭게 읽어야 합니다. 김기찬 님은 ‘좋은 이웃을 만났기에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았습니다. 김기찬 님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려는 마음이었기에 김기찬 님이 걷는 골목마다 ‘사랑스러운 이웃’을 만나서 사진으로 담을 수 있었어요.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찍는 사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일 때에 찍는 사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사진’을 못 찍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아닐 때에는 ‘사진’이라는 이름조차 쓸 수 없어요. 이른바 ‘작품’이나 ‘예술’이나 ‘기록’은 하더라도,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마음이라면 ‘작품·예술·기록’은 할 테지만 ‘사진’이 되지는 않습니다.


  자, 생각해 보셔요. 김기찬 님이 찍은 사진은 무엇일까요? 오직 사진입니다. 김기찬 님이 찍은 사진은 작품이나 예술이나 기록이 아닙니다. 김기찬 님은 ‘사진가’였고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기찬 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고스란히 담아서 골목안 이웃을 찍는 골목안 풍경을 이루었어요.



내가 이 돌담 마을에 애정을 갖는 것은 우선 돌담은 성벽보다 소박하고 예쁘기 때문이다. 성벽은 우람하지만 강제로 쌓여졌고 돌담은 우직한 농부들이 밭을 일구다 주워 놓은 돌로 내 집, 내 터 둘레에 바람을 막고 오붓한 내 살림을 꾸미기 위해서 쌓았기 때문이다. (93쪽/김기찬)




  김기찬 님은 성벽이나 문화재가 아닌 골목을 찍었고 돌담을 찍었습니다. 김기찬 님은 작품도 예술도 기록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사진을 찍었습니다. 김기찬 님은 공모전이나 상장이나 이름값을 바라지 않았어요. 김기찬 님은 언제나 이웃을 사랑하면서 생각했고, 즐겁게 골목을 천천히 거닐면서 이녁 마음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꽃송이를 돌보듯이 곱고 부드럽게 사진으로 찍었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기에 꽃송이를 어루만지는 손길로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넘실거리기에 숲에서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는 숨결로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따스하기에 서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두레를 하는 몸짓으로 사진을 찍습니다. 마음이 사랑으로 넉넉하기에 사진 한 장을 찍으면서 웃거나 울면서 가만히 노래를 부릅니다. 꿈을 노래하고, 삶을 노래해요. 너를 노래하고, 나를 노래하지요.


  사진책 《골목을 사랑한 사진가》는 오늘 우리한테 ‘사진은 어떻게 찍으면 즐거울까?’ 같은 수수께끼를 따사로이 풀어 줍니다. 이 도톰한 사진책은 오늘 우리한테 ‘사진은 어떻게 찍으면 다 같이 기쁠까?’ 같은 수수께끼를 아기자기하게 풀어 줍니다.


  사랑하면 됩니다. 사랑을 꿈꾸면 됩니다. 사랑이라는 마음이면 됩니다. 비싼 사진기나 값진 사진기나 좋은 사진기나 멋진 사진기가 아니라, 그저 사랑 어린 손길로 즐겁게 쥘 만한 사진기 한 대가 있으면 됩니다. 삶이 드러나고, 사랑이 드러나며, 사람됨이 드러나는 사진 한 장입니다. 4348.10.14.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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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11-07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으로 기쁘게 잘 읽었는데~ 숲노래님의 아름다운 느낌글로 더욱더
생생하고 즐겁고 감사합니다~~^-^

숲노래 2015-11-07 21:53   좋아요 0 | URL
우리 나라에서도 아름다운 사진책이
아름다운 손길과 사랑을 받으면서
오래오래 아름다운 이야기꽃을 피우는
바탕이 되면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생각해요.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