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길 (반양장) - 박노해 사진 에세이, 티베트에서 인디아까지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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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13



커피잔 들고 웃음짓는 이웃을 그리는 ‘새로운 노동’

― 다른 길

 박노해 사진·글

 느린걸음 펴냄, 2014.2.1. 19500원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라오스, 버마, 인디아, 티벳, 이렇게 여섯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는 《다른 길》(느린걸음,2014)을 읽습니다. 글책이 아닌 사진책이지만 나는 이 사진책을 가만히 읽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눈으로 훑고 지나가는 어떤 모습’이 아니라 ‘어떤 모습에 깃든 숨결과 바람과 이야기’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인도네시아에는 자연이 길러준 것들을 거두어 채취경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약 1만 년 전 농경정착을 시작하기 전까지 인류는 수십만 년 동안 수렵채취로 살아왔다. 우리 삶에서 정말 소중한 것은 다 공짜다. 나무 열매도 산나물도 아침의 신선한 공기도 눈부신 태양도 샘물도 아름다운 자연 풍경도. (31쪽)



  사진책 《다른 길》을 빚은 박노해 님은 한동안 노동자였고, 한때 시인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박노해 님은 ‘일을 하는 사람’이고 ‘노래를 하는 사람’입니다. 노동자 시인이라는 길을 지나오면서 ‘일하는 기쁨을 노래하는 사람’으로 탈바꿈합니다. 기계처럼 똑같이 되풀이하는 하루를 쳇바퀴처럼 보내야 하는 나날이 아닌, 날마다 새롭게 삶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이야기를 짓는 길을 걷는다고 할 만해요.


  박노해 님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돌면서 수많은 사람들한테서도 이와 같은 일을 느끼고 이와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이와 같은 모습을 만납니다. 사진책 《다른 길》에 실린 ‘일하는 사람들’은 고된 몸짓이 아니에요. 쳇바퀴처럼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아닙니다. 날마다 똑같이 뒹굴면서 고달파야 하는 살림도 아닙니다.



마르야나(20)와 세 남매는 엄마 아빠를 따라 ‘리아르 가요’ 커피 농사를 이어가겠단다. “증조할머니가 심은 이 나무는 백 살이 넘었어요. 하얀 커피꽃이 피고 꿀벌이 날고 꽃잎이 떨어지면 빨간 커피 체리 안에 녹색 커피 생두가 반짝여요. 제 손으로 커피 체리를 딸 때마다 저 안개 너머에 지금 커피잔을 들고 미소짓는 누군가를 떠올리곤 해요.” (37쪽)



  스무 살 젊은이가 커피밭을 물려받아서 즐겁게 커피꽃을 바라보겠노라 이야기합니다. 스무 살 젊은이는 커피밭에서 ‘할머니가 낳은 어머니’가 심은 커피나무를 떠올립니다. 어쩌면 백 해 앞서 심었다는 그 커피나무는 인도네시아가 유럽 어느 나라에 식민지살이를 해야 하던 무렵 ‘슬픔하고 눈물’로 심은 나무일 수 있어요. 그러나 ‘할머니를 낳은 어머니’를 거치고 ‘할머니’를 거치며 ‘어머니’를 거치는 동안 이 커피나무 한 그루에 따사로운 사랑이 깃듭니다.


  어머니와 어머니와 어머니와 어머니, 또 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버지와 아버지는 커피나무를 늘 사랑으로 돌보았을 테지요. 이러한 사랑은 앞으로도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랄 테고요.



축구의 꽃은 동네축구에 있다. 펠레도 마라도나도 메시도 호날두도 박지성도 다 골목축구에서 탄생한 별들이 아닌가. (65쪽)


수확을 마친 농부 아빠가 아들과 놀아 주고 있다. “이 의자는 아이가 처음 말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이 목나는 아이가 첫걸음마 하던 날 만든 것이구요, 오늘은 대나무를 깎아 새장을 만들어 줄 거예요.” 아빠가 아이에게 주었던 것은 ‘시간의 선물’. 사랑은, 나의 시간을 내어주는 것이다. (69쪽)



  아이한테 놀잇감을 마련해 주자면 품을 들여야 합니다. 어버이는 ‘내 하루’를 틈틈이 쪼개고 나누어서 놀잇감을 짓는 일을 합니다. 아이는 아직 ‘어버이가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잘 몰라요. 그래서 어떤 아이는 어버이한테 ‘왜 장난감을 빨리 장만해 주지 않느냐’고 조르거나 닦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아이는 어렴풋하게나마 ‘어버이가 늘 하는 수많은 일’을 느낄 수 있어요. 어버이가 날마다 조금씩 짬을 내어 제(아이) 놀잇감을 짓는 몸짓을 알아챌 수 있어요.


  ‘어버이가 제 시간을 내어주는 선물’을 아이가 느껴요. 놀잇감 하나에서뿐 아니라, 밥 한 그릇에서도 느껴요. 옷 한 벌에서도 느끼고, 이부자리에서도 느껴요. 처마 밑 그늘에서도 평상에서도 마루에서도 마당에서도 물씬 느끼지요.



“제가 제일 닮고 싶은 사람은 울 아빠예요. 제 동생들도 절 닮고 싶다고 하면 좋겠어요. 하하.” 학교를 그만둬도 아이는 비참해하지 않는다. 공부는 학교에서만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느냐며 씨익, 앳된 얼굴에 맺힌 구슬땀을 닦는다. (129쪽)



  사진책 《다른 길》을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박노해 님은 아시아 여러 나라 아이들하고 어른들 말을 귀여겨들은 뒤 조곤조곤 옮겨적습니다. ‘커피잔을 손에 쥐고 웃음짓는 이웃’을 그리는 젊은이 말을 옮겨적고, ‘아버지를 닮고 싶은 아이’ 말을 옮겨적습니다. 아이가 자라는 결에 맞추어 새로운 놀잇감을 손수 깎아서 마련하는 어버이 말을 옮겨적어요. 꽃밭을 가꾸어서 꽃을 저잣거리로 가지고 가서 내다 파는 젊은이 말을 옮겨적고, 손수 짠 돗자리를 멧골부터 짊어지고 저잣거리로 와서 내다 파는 젊은이 말을 옮겨적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새롭게 일하는’ 이웃들을 만나서 박노해 님 스스로 삶을 새롭게 바라본다고 합니다. ‘저임금 노동’이 아니라 ‘즐거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바라보면서, 박노해 님부터 스스로 새로운 길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꽃을 기르는 마 모에 쉐(21)가 꽃 한 송이를 건넨다. “쭌묘에서 꽃밭을 가꾸는 것은 힘든 일이지만, 아름다운 꽃들은 제 손에 향기를 남기지요. 꽃을 든 사람들의 미소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그리고 부처님께도 가장 멋진 선물이 될 거예요.” (213쪽)



  너랑 내가 같은 길을 걷지 않으니 너랑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고 너는 도시에서 살기에 너랑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너는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고 나는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살기에 너랑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저마다 새로운 길을 걷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에도 커다란 도시가 있고, 공무원이 있으며, 부자가 있어요. 그리고 한국이나 일본에도 시골지기가 있고, 수수한 살림을 조촐하게 가꾸는 작은 사람들이 있어요.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해서 안달하는 사람도 있으나, 아주 적은 돈을 벌면서도 늘 웃음짓는 살림으로 기쁜 사람도 있어요.


  어떤 길이 길다운 길일까요? 더 좋은 길이나 더 나쁜 길이 있을까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길을 가야 할까요? 우리는 서로서로 다른 길을 가도 되지 않을까요? 아니, 우리는 저마다 제 나름대로 ‘새로운 길’을 갈고닦으면서 스스로 즐거울 이야기를 지을 수 있으면 아름다운 살림이 될 만하지 않을까요?


  구름을 등에 지고 해님을 마주보며 바람을 맑게 마시는 아시아 여러 나라 이웃들을 사진으로 마주합니다. 이 사진책이 아니더라도 이 지구별 곳곳에는 수수하면서 아름다운 살림을 가꾸는 이웃이 즐겁게 웃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곁에도 수수하면서 정갈한 삶을 짓는 동무가 기쁘게 노래하리라 생각해요.


  길을 생각합니다. 다른 길, 새로운 길, 즐거운 길, 기쁜 길, 웃음짓는 길, 노래하는 길, 꿈꾸는 길, 아름다운 길, 무지개 같은 길, 바람 같은 길, 푸른 길, 파란 길, 하얀 길, 금빛으로 출렁이는 가을논 같은 길, 숲내음이 물씬 흐르는 상냥한 산들바람이 부는 길, 수많은 길을 헤아려 봅니다. 우리가 선 이 길은 어떤 길인가요? 2016.8.9.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느린걸음 출판사'에서 고맙게 보내 주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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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징소리 - 이규철 사진집 눈빛사진가선 25
이규철 지음 / 눈빛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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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26



마음을 씻는 신명나는 소리를 나누는 잔치

― 굿-징소리

 이규철 사진

 눈빛 펴냄, 2016.3.13. 12000원



  나는 굿거리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학교에서는 ‘굿거리장단’을 가르쳤으나, 굿판을 본 적도 없기 때문에 굿판에서 흐른다고 하는 굿거리장단을 알 길이 없습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는 교과서로만 우리 옛 가락을 가르쳤습니다. 요즈음은 학교에서 동아리가 생기면서 북이나 장구나 징이나 꽹과리를 잡아 볼 수 있는 아이들이 퍽 늘었습니다만, 유신이나 새마을운동이 물결치던 무렵에는 한국사람이 한국노래를 한국가락으로 즐길 수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더 멀리 헤아린다면 일제강점기에도 한국사람은 한국노래를 한국가락으로 신명나게 즐기지 못하기 일쑤였습니다. 군홧발과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는 이 땅을 식민지로 억눌렀거든요. 신명나는 가락도 춤도 노래도 모두 움츠러들어야 했어요. 함께 일하고 함께 쉬다가 함께 놀고 함께 춤추면서 한껏 흐드러지던 품앗이하고 두레하고 마당놀이가 어느새 자취를 감추어야 했어요.


  어느 모로 본다면 한국사람으로 살면서 한국이라는 삶터에 걸맞는 살림을 제대로 누리기 어렵다고까지 할 만하지 싶습니다. 한겨레 옷이라는 ‘한복’은 설이나 한가위 같은 아주 큰 명절 아니면 입지 않는 옷이에요. 여느 때에 한복을 입고 일터에 다니는 공무원은 찾아볼 길이 없다 할 수 있어요. 시장도 군수도 국회의원도 모두 양복을 입을 뿐이에요. 교사도 공장 일꾼도 이와 같지요. 한복이든 ‘생활한복’이든 걸치면 ‘뭔가 수상쩍은 사람’으로 여기는 흐름마저 있기도 했습니다. 펑퍼짐하며 느긋한 옷을 좋아해서 이런 옷을 입어도 ‘뭔가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는 눈길이 있기도 합니다.


  요즈음은 판소리나 풍물을 이럭저럭 배우거나 가르치는 자리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굿은 배우거나 가르치기도 어렵지만, 여느 마을에서 여느 사람이 가까이에서 누리거나 마주하거나 즐기기에는 까마득해져 버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나고 자란 인천은 바닷마을이었기에 어릴 적에 조금만 눈을 돌려도 굿마당에 가 볼 수 있었습니다. 황해도에서 벌이던 굿도 인천에서 곧잘 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어요. 오늘 내가 아이들하고 새롭게 지내는 삶터인 전남 고흥에도 굿마당이 있습니다. 다만 우리 살림집이 있는 마을하고 굿마당을 벌이는 마을이 꽤 멀어서 군내버스를 타고는 찾아갈 길이 없습니다.



나는 도시에서 자라서 굿을 볼 수 없었다. 1993년, 우연한 기회에 만난 우리의 민간신앙 굿은 감동과 경이로움이었다. 몸으로 느껴지는 징소리와 구구절절 이어지는 사설, 무당의 행위에 울고 웃는 신명과 치유의 시간이었다. (3쪽)



  다큐사진을 찍는 이규철 님이 선보인 사진책 《굿-징소리》(눈빛,2016)를 읽습니다. 이규철 님은 도시내기로서 다큐사진을 찍는다고 하는데, 여느 도시내기로서는 이녁도 굿거리이든 굿마당이든 굿판이든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아니, 여느 사람들 여느 삶자리하고는 아주 멀리 떨어진 굿이라는 살림(문화)이라고 해야지 싶습니다.


  굿은 먼 옛날부터 언제나 여느 삶자리에서 여느 사람하고 가까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굿이 여느 삶자리나 여느 사람하고 멀어진 지는 얼마 안 됩니다. 아주 짧은 사이에 굿거리도 굿마당도 굿판도 여느 이야기에서 끝도 없이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신나는 놀이판’이 여러모로 많이 생겼다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마음을 달랠 만한 씻음거리’도 여러모로 많이 생겼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굿거리가 아니어도 텔레비전이나 노래방에서 흐르는 온갖 노래에 맞추어 몸을 흔들거나 소리를 지를 수 있어요. 굿마당이 아니어도 춤추고 술을 마시며 놀 만한 자리는 참으로 많습니다. 굿판이 아니어도 사람들은 자주 모이고 자주 어울릴 수 있습니다.


  사진책 《굿-징소리》는 굿을 처음으로 마주한 ‘오늘 우리(현대 도시 문명을 누리는 사람)’가 굿에서 무엇을 보거나 느낄 만한가 하는 대목을 사진으로 풀어낸다고 봅니다. 굿을 이끄는 사람들이 조용히 흙으로 돌아가면 아스라하거나 어렴풋하게나마 떠올리기도 어려울 굿마당 이야기를 사진으로 아로새긴다고 봅니다.


  고요한 손길로 정갈하게 차린 먹을거리를 상에 올립니다. 여느 때에 여느 사람이 여느 눈으로 볼 수 없는 어떤 님(이를테면 성주님이나 조왕님 같은)을 이 자리로 부릅니다. 삶과 죽음 사이를 잇는 다리를 놓습니다. 삶자리에서 사는 사람과 죽음자리로 떠난 사람이 어느 다리를 사이에 두고서 새롭게 만납니다. 이동안 굿이 한마당으로 펼쳐지고, 가락이 흐르고 춤사위가 흐드러지면서 삶자리와 죽음자리 사이에서 따사로우면서 슬픈, 구성지면서도 애닯은, 즐거우면서도 설운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사진가 이규철 님은 이러한 굿판을 ‘징소리’에 빗대어 사진을 엮습니다. 징을 드문드문 치면서 퍼지는, 때로는 빠르게 울리면서 퍼지는, 깊고 길며 묵직한 소리가 가슴을 똑같이 깊고 길며 묵직하고 건드리는 삶노래를 사진으로 한 장씩 담아서 엮습니다.


  마음을 씻는 신명나는 소리를 나누는 잔치를 가만히 떠올립니다. 마음씻이, 신명, 나눔, 잔치 같은 말마디를 하나하나 되새깁니다. 굿마당은 굿잔치도 되다가 굿놀이도 되곤 했다는데, 한마당이요 한잔치이며 한놀이로 사람들 곁에서 눈물과 웃음을 빚어내던 고즈넉한 소릿결이 묻어나는 사진을 새삼스레 바라봅니다. 2016.6.25.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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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밖 여고생
슬구 글.사진 / 푸른향기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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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12



‘평범한 여고생’은 “우물밖 여고생”이 되려 한다

― 우물밖 여고생

 슬구 사진·글

 푸른향기 펴냄, 2016.5.12. 14000원



  교실에 앉은 학생은 모두 비슷하거나 똑같아 보입니다. 줄을 맞춰서 앉고 똑같은 옷차림에 엇비슷한 머리 모습인 아이들은 ‘아이’가 아닌 ‘학생’이라는 이름이 붙으면서 ‘이름’이 아닌 ‘숫자’로 불리기 마련입니다. 더군다나 학생으로서 학교에 가서 교실에 들어서면 모두 똑같은 교과서를 펼치지요. 다 다른 숨결로 태어나서 다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아이들이지만 ‘학생이 할 일은 시험공부’라는 틀로 나아갈 수밖에 없구나 싶습니다.


  열일곱 살이나 열여덟 살에 ‘학생’이라는 틀을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학생이 아닌 ‘내 이름’으로 불릴 수 있을까요? 스무 살 나이가 될 무렵에는 똑같이 짜맞춘 틀에서 벗어날 틈이 생길까요? ‘평범한 학생’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서 ‘나다운 숨결’이나 ‘나답게 새로운 꿈’으로 나아가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학교에서) 인정결석 처리를 해 줄 수가 없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 말은 꼼짝없이 무단결석 처리를 받는다는 거였다. 결석 자체가 생활기록부에 주는 영향이 무척 크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과연 그걸 감내하면서까지 일본을 가야 할까 하고 며칠을 고민했다. (18쪽)


첫 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인천 행 비행기 안에서 든 생각은 하나였다. “난 우물 안 개구리였구나.” (42쪽)



  1998년 5월에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나 줄곧 이 고장에서 살았다고 하는 슬구(신슬기) 님은 2016년에 고등학교 3학년이라고 합니다. ‘평범한 학생’ 테두리에서 보자면 ‘입시생’이나 ‘고3 수험생’이라 할 테지만, 슬구 님은 두 가지 이름에다가 다른 이름을 스스로 지어서 붙입니다. 바로 “우물밖 여고생”입니다.


  “우물밖 여고생”은 그동안 우물에 스스로 갇혀서 지낸 줄 알아차린 여고생입니다. 그동안 우물에 스스로 얽매인 채 지낸 줄 몰랐으나, 이제는 우물밖이라고 하는 너른 삶터가 있는 줄 알아낸 여고생입니다. 우물에 머무는 삶이 아니라, 새로운 우물을 찾아나서는 삶이라든지 우물이 아닌 냇물이나 골짝물이나 샘물이나 바닷물을 찾아나서면서 꿈을 키우려는 여고생입니다.



이번만큼은 내 감정에 충실한 여행을 해 보는 거야. 살면서 맘만 먹으면 올 수 있는 게 제주 아니겠어? 일생에 한 번뿐인 여행도 아니니 너무 조급해 하지 말자. (64쪽)


끝내 별똥별은 보지 못했지만 괜찮다. 그보다 더 멋진 별과 달을 만났고, 그날의 바람과 공기를 느꼈고, 묘한 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으니까. 이거면 됐다. (71쪽)



  “우물밖 여고생”은 열일곱 살에 처음으로 알바를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고스란히 하면서 일삯을 받는 일이 얼마나 ‘안 만만한가’를 이때에 처음으로 온몸으로 느꼈다고 해요. 만 원도 천 원도 아닌, 이른바 백 원이나 십 원조차 거저로 나한테 오지 않는 줄 뼛속 깊이 느꼈다고 합니다.


  “열일곱 우물안 여고생”은 학교를 다니면서 꾸준히 알바를 했고, 차츰 일삯이 모여서 제법 목돈이 되었다고 해요.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알바를 했달 수 있는데, 시나브로 한 가지 생각이 꿈처럼 떠올랐다고 해요. 첫 생각은 “내 사진기 장만하기”였고, 이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여행 나서기”였다고 합니다.


  사진기를 장만해서 여행에 나서려는 생각은 ‘어머니하고 일본 여행’이었다는데, 어머니는 갑자기 함께 갈 수 없는 일이 생겼다고 털어놓았답니다. 이때에 슬구 님은 ‘스스로’ 생각하지요. 비행기표나 숙소 예매를 모두 취소하느냐, 아니면 혼자서 씩씩하게 떠나느냐. 이 갈림길에서 혼자 여행길에 나서기로 했고, 첫 걸음마처럼 첫 ‘나 홀로 여행’을 마치면서 “우물밖 여고생”으로 거듭나는 길에 섰다고 합니다.


  《우물밖 여고생》(푸른향기,2016)이라고 하는 사진수필책은 이렇게 태어납니다. 천천히 껍질을 깨듯이 찬찬히 우물밖 너른 터를 돌아보려고 하는 작은 눈길이 꿈길로 거듭나는 사이에 태어납니다.



하루에 몇 대 없는 버스를 놓쳐 두 시간을 길거리에서 보내야 하더라도 네가 화를 내지 않았으면 좋겠어. (82쪽)


왜 하필 지금 여행을 하냐고 물으면, 너는 왜 지금 여행을 하지 않느냐고 되묻고 싶다. (120쪽)



  사회에서는 흔히 말하기를 ‘학생은 공부만 하면 된다’고 합니다. 다만, 사회에서 흔히 말하는 ‘공부하는 학생’이라는 대목에서는 ‘어떤 공부’를 하면 되는가까지 건드리지는 않아요. 학교에 가서 교실에 들어가야만 ‘공부’라고 여기곤 하지만, 공부는 학교에서만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우물밖 여고생》을 쓴 슬구 님은 알바를 하는 동안 ‘알바를 하는 곳’에서 사회와 경제와 노동을 배웠습니다(공부했습니다). 알바를 해서 얻은 돈을 푼푼이 모아서 사진기를 장만하는 동안 기쁨이나 보람이나 즐거움이나 선물이 무엇인가를 배웠어요. 어머니하고 일본 여행을 다녀오려는 꿈은 스러졌지만, 나 홀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곁에 다른 사람이 없어’도 혼자서 하나부터 열까지 척척 살펴서 갈무리하는 살림을 배웠어요.


  여행길에서 새로운 이웃하고 동무를 배웁니다. 나고 자란 곳에서만 바라보던 삶터가 아닌, 드넓은 새로운 삶터를 배웁니다. ‘시흥에서 보는 하늘’을 넘어서 ‘제주에서 보는 하늘’이나 ‘경주에서 보는 하늘’이나 ‘일본에서 보는 하늘’을 새삼스레 배워요.


  하나씩 새롭게 배우는 동안 하나씩 새롭게 사진으로 빚습니다. 천천히 새롭게 마주하는 삶과 사람과 사랑을 천천히 새롭게 사진으로 옮깁니다. 누구한테서 배운 사진이 아니라, 스스로 새롭게 배우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누구한테서 배운 글이 아니라, 스스로 새롭게 배우면서 쓰는 글입니다.


  남한테 예쁘게 보여주려고 하는 사진이나 글이 아닌, 스스로 새롭게 배우는 기쁨과 보람과 즐거움과 땀방울을 담는 사진이나 글입니다. 멋스럽게 선보이려고 하는 사진이나 글이 아닌, 스스로 즐겁게 맞이하는 하루를 그저 즐거운 마음이 되어 엮는 사진이나 글입니다.



추운 날씨 탓에 나뭇잎들이 얼어서 걸을 때마다 바스락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좋았다. 나뭇가지가 부서지는 소리는 특히 더. 그래서 나는 풀숲만 찾아 걸었다. (152쪽)



  《우물밖 여고생》은 우물밖으로 내디딘 첫걸음을 보여줍니다. 이 나라 ‘평범한 학생’이 서로 엇비슷하거나 똑같지 않다는 목소리를, 마음속에서 흐르는 목소리를, 교과서나 책에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스스로 온누리를 차근차근 디디고 밟고 서면서 느끼는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앞으로는 너른 바닷물 같은 목소리가 되고 싶은 꿈을 보여주고, 쉬잖고 솟는 샘물 같은 목소리로 살려고 하는 몸짓을 보여줍니다. 들을 적시는 냇물 같은 목소리로 자라는 숨결을 보여주고, 구수하게 끓는 밥물 같은 기운을 보여줍니다.



삶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하기 때문에 삶이 여유로운 것이다. (159쪽)



  우물밖으로 첫걸음을 내디딘 슬구 님은 이제 ‘생활기록부 성적이나 숫자’에서 조금은 홀가분할까요? 생활기록부에 ‘무단결석’이라는 글씨가 찍히더라도 이러한 굴레에 얽매이지 않을 수 있을까요? 또는 우리 사회나 학교에서 ‘나 홀로 드넓은 온누리를 배우려는 여행’을 하겠다는 ‘평범한 학생’한테 ‘삶 공부(체험학습)’를 하는구나 하고 받아들이도록 제도나 규칙이 바뀔 수 있을까요?


  사진기·세발이·연필·책을 벗으로 삼아서 나서는 고즈넉한 마실길은 슬구 님이 《우물밖 여고생》에서 밝히듯이 스스로 넉넉해지려고(여유로워지려고) 나서는 새로운 길입니다. 돈이 넉넉해서 나서는 여행이 아닌, 마음을 넉넉하게 가꾸려는 꿈을 사랑스레 품기 때문에 나설 수 있는 새로운 길이지 싶습니다. 이리하여 《우물밖 여고생》에 깃든 사진이나 글은 풋풋하면서 차분한 그림이 됩니다. 이제 막 너른 터를 맛본 풋풋함이요, 이 너른 터에 흐르는 바람을 듬뿍 마시는 차분함입니다.


  기쁜 열여덟을 기쁜 몸짓으로 맞이하면서 적바림한 사진과 글이, 기쁜 열아홉에도, 기쁜 스물다섯에도, 기쁜 서른 마흔 쉰에도, 오월바람 같은 따사로운 이야기꽃으로 늘 새롭게 깨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2016.5.26.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슬구 님(http://blog.naver.com/ssol_0520)한테서 고맙게 받아서 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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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 어느 다큐 사진가의 사진강의 노트 눈빛사진학개론 3
양해남 지음 / 눈빛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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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111



아줌마 사진가한테서 배운 ‘이웃을 찍는 기쁨’

―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양해남 사진·글

 눈빛 펴냄, 2016.3.10. 13000원



  지난 서른 해 남짓 다큐사진을 찍었고, 앞으로도 이 길을 즐겁게 걸어갈 양해남 님이 선보인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눈빛,2016)를 재미있게 읽습니다. 서른 해 남짓 사진길을 걸었는데에도 양해남 님은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이라고 책이름에서 밝혀요. ‘서른 살 젊은이’가 아니라 ‘서른 해 사진가’ 입에서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이 불거집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이를테면, ‘서른 해나 사진을 찍었는데에도 사진을 찍기 어렵다는 말인가?’ 하고 여길 수 있어요. 그리고, ‘서른 해뿐 아니라 쉰 해나 일흔 해 동안 사진을 찍어도 언제나 새내기 마음이 되어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해 볼 수 있어요.



사진을 찍어 오면서 내가 멋지다고 생각되었던 곳은 이미 누군가가 일찌감치 표현을 했었던 장면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8쪽)


나는 일상적이고도 평범한 시간에 무게를 두고 사진을 찍습니다. 오솔길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하나의 솔방울도 나에게는 중요한 피사체입니다. (43쪽)



  사진책을 읽으면서 ‘사진·사진기’ 생각은 살며시 접고서, 다른 생각을 해 봅니다. ‘자동차·자동차 몰기’를 생각해 봅니다. 아침에 마당을 쓸면서 ‘자동차를 모는 사람’하고 ‘어떤 자동차를 모는가’ 하는 대목을 조용히 생각해 보아요.


  어떤 사람은 작고 값싼 자동차를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몹니다. 어떤 사람은 작고 값싼 자동차를 우악스럽거나 거칠게 몹니다. 어떤 사람은 크고 비싼 자동차를 우악스럽거나 거칠게 몹니다. 어떤 사람은 크고 비싼 자동차를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몹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몰면서 쉽게 다른 사람한테 삿대질을 하거나 빵빵빵 울려요. 어떤 사람은 자동차를 몰면서 한 번도 다른 사람한테 삿대질을 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빵빵빵 울리지 않고 가만히 기다립니다.


  작은 자동차를 몰기에 더 부드럽지 않고, 큰 차를 몰기에 더 우악스럽지 않습니다. 작은 자동차를 몰기에 더 거칠지 않고, 큰 차를 몰기에 더 사랑스럽지 않아요.


  어떤 자동차를 몰든지, ‘자동차를 모는 사람’ 스스로 어떤 마음이나 몸짓이나 생각이나 버릇인가에 따라서 사뭇 달라요. 자동차 손잡이만 잡았다 하면 마치 ‘자동차 경주’를 하듯이 달리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자동차 손잡이를 잡든 여느 때이든 늘 부드러우면서 사랑스러운 사람이 있어요.



아줌마 사진가는 나에게 사진으로 나눌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었습니다. 자신이 사진에 찍히는 것보다 누군가를 찍어 준다는 것은 작은 나눔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62쪽)


가장 기본인 교과서는 내 머리 안에 있습니다.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만의 작품세계를 추구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니까요. (88쪽)



  이제 ‘사진·사진기’를 헤아려 봅니다. 작고 가벼우며 값싼 사진기로 재미나며 훌륭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를 늘 새롭게 찍는 사람이 있어요. 작고 가벼우며 값싼 사진기로는 도무지 재미없고 안 훌륭하고 안 아름답고 안 즐거운 이야기를 늘 비슷하게 찍는 사람이 있어요. 크고 무거우며 비싼 사진기로 도무지 재미없고 안 훌륭하고 안 아름답고 안 즐거운 이야기를 늘 비슷하게 찍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크고 무거우며 비싼 사진기로 재미있고 훌륭하고 아름답고 즐거운 이야기를 늘 새롭게 찍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진기를 쓰느냐에 따라서 사진이 달라질까요? 네, 틀림없이 달라집니다. 그런데, 사진기마다 쓰임새가 달라서 어떤 사진기를 쓰느냐에 따라서 사진이 달라지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에 따라서 사진이 가장 크게 달라진다고 느껴요.


  양해남 님은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라는 사진책에서 이 대목을 넌지시 다룹니다. ‘찍히는 사람’을 ‘찍는 사람’이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서 사진이 달라진다고 말하지요. 그러니까, ‘찍히는 사람’을 ‘피사체’라고 하는 ‘사물’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찍히는 사람’을 ‘모델(내 사진을 빛내는 모델)’로 바라보느냐, 아니면 ‘찍히는 사람’을 ‘동무·이웃’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사진이 달라진다고 말해요.



지금 현재의 순간은 나에게만 주어진 소중한 시간입니다. 세상이 나에게 보여주는 유일한 광경일지도 모릅니다. 이제 온힘을 다해서 사진을 찍을 시간입니다. (121쪽)


하루 온 종일을 소비하면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한 장도 얻을 수 없다면, 그냥 포기를 하는 것이 아늘까? 아니면 다음 날도 찍고 또 그 다음 날도 찍어서 마음에 드는 사진을 얻을 때까지 도전을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까? (130쪽)



  우리는 어떤 마음결이 되어 사진기를 손에 쥘까요? 우리는 어떤 마음씨가 되어 자동차 손잡이를 손에 잡을까요? 우리는 어떤 마음바탕이 되어 밥을 짓거나 아이들 머리카락을 쓸어넘길까요?


  양해남 님은 ‘사진을 찍으려’고 우악스럽게 달려드는 몸짓은 안 반갑다고 밝힙니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을 ‘이웃’이 아닌 ‘사물(피사체)’로 바라보는 몸짓은 사진다운 이야기가 되기 어렵다고 하는 뜻을 밝힙니다. 그리고,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모델’도 아니라는 뜻을 밝혀요.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피사체도 모델도 아닌 ‘사람’이라고 하는 대목을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에서 꾸준히 밝힙니다.


  이리하여, 양해남 님이 찍는 사진은 다른 사진가들이 빚는 사진하고 대면 ‘많이 어려울(어렵게 찍을)’ 수밖에 없습니다. 양해남 님은 ‘찍히는 사람한테 허락을 안 받고 무턱대고 먼저 찍고 보자’는 생각을 할 수 없다고 해요. 왜냐하면 ‘그들(찍히는 사람)’은 ‘내 사진을 빛내는 소재’가 아니라 ‘나와 똑같이 사랑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가능하면 이런 후회를 줄이기 위해서 느리고 천천히 촬영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만일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냥 그 공간에 머무르는 편을 선택합니다. (166쪽)


내가 찍는 사진의 무게를 생각하면 남의 사진을 가벼이 볼 수 없습니다. 불과 125분의 1초라는 아주 짧은 순간에 완성되는 한 장의 사진이라도 모든 예술작품과 동일한 무게인 것입니다. (176쪽)



  사진길을 걸은 서른 해를 되짚으며 “나도 잘 찍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하고 털어놓는 양해남 님은 사진을 천천히 찍으려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쓸 만한 사진을 한 장조차 건지지’ 못하는 일이 있어도 서두르려고는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쓸 만한 사진 한 장 건지기’에 마음을 빼앗기기보다는 ‘반가운 이웃하고 동무를 만나는 삶’에 마음을 기울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줌마 사진가한테서 사진을 찍는 마음을 배우고, 아이들한테서 맑게 노는 마음을 배웁니다. 새봄에 푸르게 돋는 싹과 꽃을 바라보면서 새롭게 거듭나는 숨결을 배웁니다. 흙을 만지며 살림살이를 손수 지어 온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마주하면서 고요하면서 너그러운 넋을 배웁니다.


  사진가는 으레 ‘찍는 사람’으로 여기기 마련이지만, 사진가라고 하는 자리는 수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꾸준히 수없이 다시 마주하는 동안 ‘배우는 사람’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즐거움을 배우면서 즐거움을 사진에 담고, 아름다움을 배우면서 아름다움을 사진에 담으리라 느껴요. 사랑을 배우면서 사랑을 사진에 싣고, 기쁜 꿈을 배우면서 기쁜 꿈을 사진에 실으리라 느껴요. 맑은 눈짓을 배우면서 맑은 눈짓을 사진으로 옮기고, 밝은 웃음을 배우면서 밝은 웃음을 사진으로 옮기리라 느낍니다.


  “사진을 잘 찍고 싶은 마음”이란 바로 “살림을 기쁘게 가꾸고 싶은 마음”이요, “사람을 아름답게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며, “삶을 넉넉히 나누고 싶은 마음”이지 싶습니다. 2016.5.1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 글에 붙인 사진은 사진가 양해남 님과 눈빛 출판사한테서 고맙게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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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나타운 눈빛사진가선 16
김보섭 지음 / 눈빛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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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225



한때 ‘인천 한복판’이던 ‘중구’ 차이나타운

― 차이나타운, 인천 청관

 김보섭 사진

 눈빛 펴냄, 2015.10.1. 12000원



  인천 중구는 행정구역으로 ‘중구’인데, 길그림으로 살펴보면 ‘가운데에 있는 마을’로는 안 보입니다. 인천이 걸어온 길은 인천이라는 고장으로서 곧게 걸은 길이 아닌 탓입니다. 인천은 바다를 끼고 항구가 선 곳이면서 바닷길로 서울하고 이어지는 징검돌입니다. 오늘날에는 직할시를 거쳐서 광역시가 되었기에 땅으로 치자면 넓습니다만, 지난날에는 그저 자그마한 고을이었어요. 일제강점기에도 인천은 그리 크지 않은 고을이었습니다.


  인천이라는 곳에서 ‘중구’나 ‘동구’ 같은 이름은 오늘날에는 걸맞지 않은 이름이지만, 이 이름에는 인천이라는 곳이 걸어온 자취가 고스란히 남습니다. 길그림을 보면 ‘중구’가 맨 왼쪽, 이른바 가장 서쪽에 있습니다. ‘동구’는 중구 위쪽에 있어요. 인천 ‘남구’는 중구하고 동구 오른쪽인 동쪽에 있습니다. 인천 ‘서구’는 동구 위쪽인 북쪽에 있어요. 이제는 계양구나 부평구라는 이름을 쓰지만 예전에는 ‘북구’라는 이름을 썼고, 이 북구는 인천에서 동쪽 끝에 있다고 할 만합니다. 이런 얼거리이다 보니 인천 길그림을 살피면 ‘동서남북’이 모두 뒤죽박죽인 셈이라고 여길 만해요.


  오늘날에는 뒤죽박죽이지만, 인천이라는 작은 고을이 도시로 커진 일제강점기를 살피면, 그무렵에는 ‘인천 = 중구 + 동구’였다고 여길 만했습니다. 그때에는 그랬어요.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인천 중구는 일본사람이 살던 곳이면서, 중국사람도 건너와서 살고 서양사람도 나란히 살던 곳이었어요. 그무렵에도 중구 쪽에 한국사람이 살았지만, 일본은 ‘조계지’라는 울타리를 내세워서 한국사람이 섣불리 넘보지 못하게 했어요. 이러면서 한국사람은 ‘동구’라는 곳에 몰려서 살았지요. 잠은 동구에서 자고, 일은 중구에 가서 하는 셈이라고 할까요. 요즈음 인천에서 잠은 ‘인천에서’ 자고 일은 ‘서울에서’ 하는 틀하고 비슷한 모습이에요.


  어느 모로 본다면 ‘일제강점기 중구’ 자리는 일본사람이 ‘한복판에 선’ 곳이요, 여기에 중국사람도 한복판에 선 곳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전철역 이름에도 아직 이런 자국이 남았어요. ‘인천역’은 경인선 맨 왼쪽(서쪽)에 있는 끝 역이고, ‘동인천역’은 인천역 옆에 있는 곳인데, ‘동인천역’은 ‘이제 동쪽 인천이 아닌, 맨 서쪽에 있는 인천’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인천역’이라는 이름이 인천 중구에 있던 까닭은 그곳이 옛날에는 인천 한복판이었다는 뜻이고, ‘동인천역’은 인천 동쪽 끝자락을 가리켰다는 뜻입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동인천역에서 오른쪽으로 더 가면 ‘거기는 인천이 아니라’는 소리까지 됩니다. 옛날에는 그랬겠지요.



나의 기록은 1980∼2000년까지의 인천 화교들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많은 중국집들로 화려하지만 그 당시 인천 차이나타운은 여러 가지 이유로 쇠락해 있었다. 나는 사라져 가는 역사의 자취를, 화교 1세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고자 했다. (사진가 노트)



  일제강점기가 끝나고 해방이 되면서 인천이라는 고을이 차츰 커집니다. 일제강점기부터 들어선 수많은 공장은 더욱 많이 늘어났습니다. 서울 옆에서 서울에 자원과 물건과 사람(인력)을 대는 고을로 커집니다. 이러면서 ‘인천 한복판’은 중구 쪽에서 차츰 오른쪽으로, 그러니까 서울하고 가까운 쪽으로 움직입니다. 인천역이나 동인천역이 ‘인천 중구’에 있다고 하더라도, 중구도 ‘인천역·동인천역’도 ‘옛날 한복판(구도심)’일 뿐입니다.


  김보섭 님이 1980∼2000년 사이에 찍은 ‘인천 차이나타운’ 모습을 담은 사진책 《차이나타운, 인천 청관》(눈빛,2015)을 읽으면서 인천 발자취와 ‘중구’라는 이름과 ‘한복판(도심, 구도심, 신도심)’이라는 자리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나는 인천 ‘남구(도화동)’에서 태어났으나, 본적은 ‘동구(송월동)’이고, 어린 날이나 국민학교는 ‘중구(신흥동)’에서 보냈습니다. 집과 학교와 이웃집 사이는 언제나 두 다리로 걸어다녔고, 공항이 들어서기 앞서 배로 오가던 영종섬을 꽤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사진책 《차이나타운》은 인천 중구에서도 ‘북성동·선린동’ 두 마을을 찬찬히 살핍니다. 이 사진책에 붙은 이름은 ‘차이나타운’인데, 이곳을 가리키는 이름을 생각하니, 영어로 차이나타운뿐 아니라, ‘청관’이란 한자말도 썼고, ‘중국인거리’나 ‘중국인마을’이란 이름도 썼어요. 그냥 ‘북성동’이나 ‘선린동’이라고만 하기도 했어요.


  일제강점기에는 눈부시도록 북새통을 이루던 북성동이요 선린동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해방을 맞이하고 나서 새마을운동이나 경제개발계획 때문에 인천이라는 곳이 ‘서울 언저리 공업 위성도시’ 구실을 하는 동안에는 행정이나 경제 모두 ‘오른쪽으로(서울과 가까이)’ 갈밖에 없었으니, 그 눈부신 북새통을 이루던 북성동이나 선린동은 차츰 저물밖에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고속도로가 나고, 중구에 있던 온갖 시설이 다른 구로 옮기면서 ‘중구’는 ‘한복판’이라는 이름이 바래도록 더 크게 저물었을 테고요.


  나는 어릴 적에 ‘중구에 있던’ 여러 학교들하고 인천시청에다가 인천시외버스역이 모두 ‘다른 구’로 옮기던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학교와 행정기관과 여러 시설이 중구에서 다른 구로 옮기면서, 그야말로 인천 중구하고 동구는 나란히 비면서 엄청나게 조용해졌어요.


  요즈음은 ‘차이나타운 관광지’로 다시 북새통을 이루는 마을로 바뀌는 중구이지 싶습니다. 다른 도시에 있는 ‘중국인마을’도 관광바람이 불며 다시 북새통을 이루는구나 싶습니다. 그런데, 북성동이든 선린동이든 청관이든 차이나타운이든 중국인마을이든, 예나 이제나 똑같은 대목이 하나 있어요. 북새통을 이루었든, 눈부심이 저물었든, 새 관광바람이 불든, 작고 수수하게 살림을 짓는 사람들은 늘 그대로입니다.


  관광지 걸개천이나 붉은 등불이 주렁주렁 매달린 곳에서 몇 미터 안쪽으로 들어서면 조용하고 한갓진 골목이 나옵니다. 이곳에서는 얌전하면서 수수한 골목집이 어깨를 맞댑니다. 사진책 《차이나타운》에 나오는 사람들은 바로 이 조용하고 한갓진 골목집에서 얌전하면서 수수하게 살림을 짓는 여느 얼굴입니다.


  이제 와 돌아보면, 북성동이나 선린동에 살던 내 어릴 적 동무들은 ‘그냥 동무’였습니다. 화교도 뭐도 따로 아닌 동무이자 이웃입니다. 바다 너머에 있는 어떤 나라를 그리는 마음을 때때로 느끼더라도, 바로 이곳에서 오늘 함께 웃고 떠들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사이예요. 내 어릴 적 동무들하고, 내 어릴 적 동무들하고 놀던 골목하고, 내 어릴 적 동무들을 낳고 돌본 어버이(이웃 아저씨 아주머니) 모습을 작은 사진책 한 권에서 새삼스레 되돌아봅니다. 2016.4.2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사진책 읽는 즐거움/사진비평)


* 이 글에 붙인 사진은 '눈빛출판사'에서 보내 주어서 올릴 수 있었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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