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저널리즘 -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지음, 구자호.이기명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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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진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는가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7] 케네스 코브레, 《포토저널리즘 (5판)》



 사진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 또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읽기마저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가르칠 수 있는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나 지식인이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우치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익히는 사진찍기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사진읽기입니다.

 그러나 사진이든 사진찍기이든 사진읽기이든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듣는다든지 하면서 배우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도 사진이나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강좌나 이론 또한 사진이며 사진찍기이며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곰곰이 살피면, 사진뿐 아니라 사랑 또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아무개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없을 뿐더러 어떻게 해야 사랑이 된다고 알려줄 수 없습니다. 사랑편지를 쓰라느니, 만나면 어디를 가라느니 하고 도움말을 할 수는 있으나, 마음이 맞는 두 짝꿍이 이루는 사랑은 두 사람 스스로 두 사람 깜냥껏 이룰 뿐입니다.

 사랑만 스스로 깜냥껏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어머니 손맛’을 이야기하는데, 어머니들 스스로 어머니 손맛을 이루어지기까지 누구한테서 살림살이 비법을 배운 적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처음부터 어머니이지 않았고, 누구도 처음부터 어머니 손맛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내면서 차츰차츰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 손맛을 익힐 뿐입니다.

 학자가 되는 길이든 교사가 되는 길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논문을 쓰거나 책을 내놓아야 학자가 아닙니다. 대학원을 다녀야 학자로 설 수 있지 않아요. 내 배움길을 스스로 갈고닦으며 살피고 가다듬으며 비로소 학자가 됩니다. 교대를 나와 교사자격증을 땄다고 교사이지 않습니다. 배움터에서 아이들하고 부대끼는 가운데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교사다움을 익히고 받아들이면서 아주 천천히 교사가 됩니다.

 《포토저널리즘 (5판)》이라고 하는 ‘사진 길잡이책’은 사진과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를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살짝이나마 사진밭을 맛보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이 사진책은 ‘전문 사진기자가 되려는 사람한테 도움말을 건네는 책’이라 할 만하지만, 전문 사진기자이든 아마추어이든, 또는 집에서 꽃이나 강아지나 식구들을 찍으며 사진을 즐기든, 사진을 좀더 깊이 헤아리면서 좋아하고자 하는 이들한테 사진말을 나누어 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싶으면 읽는 책이요, 사진을 배우고 싶을 때에 ‘사진을 배우는 길’이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를 익히는 책입니다.

 “사진기자들은 제한된 시간 동안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 계속 촬영을 한다. 아마추어들은 몇 장의 스냅사진을 찍고 최상의 작품을 기대한다 … 많은 사진기자들이 필름을 다 쓰기 전에 촬영을 멈춘다. 필름을 남겨 두는 이유는 누군가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28, 3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기자와 아마추어를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나라밖에서 훌륭하며 알뜰히 사진기자로 뛰는 사람하고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잣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땅 사진기자들 가운데 ‘가장 나은 사진을 얻고자 쉬지 않고 찍는’ 사람은 퍽 드물거든요. 한국땅 사진기자는 너무 바쁜 나머지 취재현장에 오래 있지 않을 뿐더러(아예 취재현장에 안 오기 일쑤입니다), 미리 와서 살펴보지 않고, 행사나 사건이 끝난 다음까지 더 남아서 뒷모습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빨리 찍고 떠나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그림 될 만한 모습을 찍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예식장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진기자는 예식장 사진기사하고 닮았습니다. 주문받은 사진첩 하나에 넣을 사진만 착착 찍을 뿐, 혼인을 치르는 다 다른 짝꿍들한테서 느낄 다 다를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예식장에 미리 찾아와 온갖 모습을 두루 찍는다든지, 예식을 치르는 동안 벌어지는 갖가지 모습을 골고루 담는다든지, 예식을 마치고 나서 어우러지는 숱한 모습을 적바림한다든지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포토저널리즘 (5판)》에 나오는 “최고의 렌즈 테크닉과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도, 사진기자는 여전히 세금 인상을 위해 소집된 시의회와 지역구의 학교 수를 줄이기 위해 열린 회의의 차이를 독자를 위해 구별해 줘야 하는 어려움을 가진다(72쪽).” 같은 대목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문 사진기자들일수록 더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합니다. 전문 사진기자라 하는 분들이 사진강좌를 곧잘 열곤 하지만, 이런 분들한테서 사진을 배운다고 한다면, 아마추어이든 그저 ‘사진 즐김이’이든, 저마다 사랑하고 아끼며 가슴으로 받아들일 사진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대단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사랑할 자리를 찾고 깨닫고 느끼면서 이러한 모습을 꾸밈없이 담으며 좋아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그럴싸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요, 우리 삶에서 사랑스런 살붙이와 이웃을 살피고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이들 삶자락을 알뜰살뜰 담으며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

 기자들한테만 “만약 촬영 대상이 카메라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포토저널리즘적으로 뛰어난 기술도 내면을 드러내는 포트레이트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124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집에서 내 식구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된 우리들이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 아이가 ‘아이 참, 싫다는데 왜 자꾸 찍어요?’ 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면 어떤 사진이 나오겠습니까. 꽃이나 나무 사진을 찍는다 할지라도, 꽃이나 나무가 어떠한 터전을 좋아하고 반기는가를 살피지 않고 찍는다면 고운 꽃 사진 하나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문기자 사진이든 여느 생활사진이든 사진 한 장에는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너른 믿음과 가장 따순 손길을 담을 노릇입니다.

 마땅한 일이 마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우리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가 초중고등학교다운 적이란 없고, 언제나 입시지옥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대학교가 대학교다운 날이란 없으며, 늘 대기업 취직을 바라는 싸움터로만 구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배움터 모습이 언론에 옳고 바르게 나타나는 일이란 몹시 드뭅니다. 진보를 외치든 보수를 말하든, 참다운 우리 터전을 사랑하면서 우리 터전을 보여주는 목소리는 꽤 드뭅니다. “매체로서의 사진은 당연히 우리의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편집자들은 고의적이거나 은근한 무시를 통해 전체 인구 구성에서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중남미인, 아시아인, 모든 종족의 여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242쪽).”는 대목을 읽으며, 이 땅 진보나 보수가 얼마나 이 땅 너른 사람들 삶을 담아내는가를 살펴봅니다. 좌파가 진보이거나 우파가 보수이지 않습니다. 좌파는 좌파이고 우파는 우파이며, 진보는 진보이고 보수는 보수입니다. 저마다 우리 삶터를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참된 쪽으로 이끌어 갈 물줄기입니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른 물줄기가 아니에요. 사진이란, 또 사진찍기란, 그리고 사진읽기란 어떻게 해야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떻게 하면 그르다고 가를 수 없습니다. 참되고 착하며 고운 길을 걷는 가운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사랑과 믿음을 길어올리는 몸짓이 사진으로 됩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누구나 나 스스로 좋아하며 사랑하는 삶을 찍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을 담습니다. 나 스스로 아끼거나 돌보고픈 터전을 적바림합니다. “사진기자는 사진 콘테스트나 편집자 혹은 동료 사진기자들을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행복한 순간뿐만 아니라 슬픈 순간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한다(385쪽).”는 말마따나, 사진이란 내 모든 삶을 곱다시 담으며 즐기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이며, 삶을 즐기는 예술인 사진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를 어디 다른 데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삶을 즐기는 예술을 학교를 오래 다닌다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온다고 깨닫겠습니까.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찾으며 스스로 즐길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좀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책을 찾아 읽을 뿐이요, 나 스스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면, 내 사진은 아주 저절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진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알차게 일구고 있으면, 내 사진 또한 시나브로 알차게 일구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을 배우려면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진찍기를 제대로 하고 싶으면 스스로 내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사진읽기를 똑바로 받아들이려면 스스로 내 삶을 껴안아야 합니다. 사진 배움길이란 오직 이 하나입니다. (4343.7.14.물.ㅎㄲㅅㄱ)


― 포토저널리즘,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씀, 구자호·이기명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5.2.20./3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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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지음 / 들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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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는 가장 즐거운 멋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6] 김윤기, 《내 멋대로 사진찍기》


 우리 집에 디지털사진기가 두 대가 되었습니다. 형한테서 얻은 돈을 보태어 가까스로 한 대를 장만하여 쓰고 있었는데, 이 디지털사진기는 고작 한 해 반을 썼을 뿐이지만 부속품이 낡고 닳아 사진기값 1/5에 이르는 돈을 치르며 고치고 한 대를 새로 장만합니다. 사진기 수리점에서는 ‘사막에 다녀오셨어요?’ 하고 묻더군요. 오로지 인천골목길하고 헌책방하고 아이 세 가지만을 사진으로 담았으니 참 어이없는 물음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퍽 어릴 무렵부터 아빠 사진기를 갖고 놀았습니다. 백일이 지난 뒤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아빠가 늘 사진찍기를 하고 있으니, 사진기가 바닥에 놓여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와서 사진기를 만지작거렸고, 단추를 하나하나 눌러 보면서 ‘설명서 한 번 안 보고’ 사진기 다루는 솜씨를 웬만큼 익혔습니다. 이제 고작 스물석 달짜리 아이인데, 혼자서 제법 씩씩하게 사진기를 들고는 사진을 찍습니다. 찍힌 사진을 들여다본다든지, 사진을 주루룩 넘긴다든지, 옆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을 꽤 잘합니다.

 디지털사진기 한 대만 있고, 필름사진기조차 망가져서 못 쓰고 있는 동안에는 아이가 사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따로 사진으로 담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이가 사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우리 아이가 사진을 찍을 줄 안다고 하면 못미더워 합니다. 저러다 비싼 사진기 떨어뜨려 깨뜨리지 않느냐며 걱정합니다. 아이는 백일 무렵부터 이제까지 아빠 사진기를 한 번도 바닥에 떨어뜨린 적이 없으며, 늘 살몃살몃 다루어 줍니다. 어린 나날부터 어버이 곁에서 사진기를 갖고 놀았으니 스물석 달을 살았으면서 채 돌이 되기 앞서부터 사진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어버이가 농사꾼이면 어린 나날부터 호미질 가래질 쟁기질을 옆에서 지켜보며 농사일을 익힐밖에 없고, 어버이가 살림꾼이면 어린 나날부터 밥하기 빨래하기 씻고 닦기 같은 일을 늘 바라보며 익힐밖에 없습니다. 저마다 삶으로 헤아리고 삶으로 배우며 삶으로 스며듭니다.

 태국에서 짐차를 모는 일을 하는 김윤기라는 분은 사진찍기를 무척 즐긴다고 합니다. 어디를 다니든 사진기를 챙긴다고 하는군요. 당신은 스스로 ‘프로’ 아닌 ‘아마추어’라 얘기하고,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면 사진쟁이라고 밝힙니다. 당신은 《내 멋대로 사진찍기》라는 책까지 하나 써 냈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책을 내놓는 사람들은 으레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인데,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서 사진책을 낸 김윤기 님은 머리말에서 “사진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프로가 아마추어를 가르치는 그런 식이었다 … 사람이 다르면 사진도 다르고, 그 방법도 다를 수밖엔 없다. 길을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어디든지 가고 싶은 대로 자유로이 떠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7∼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김윤기 님 말마따나 사람이 다르면 삶이 다르고, 삶이 다르기에 사진이 다릅니다. 사진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더 낫거나 모자란 사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마다 제 삶을 사랑하는 만큼 제 사진을 사랑하기 마련이요, 저마다 제 삶을 좋아하는 만큼 제 사진을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나 놀이를 이야기한다면 누구나 손쉽고 따스하며 넉넉한 말씨로 들려줍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나 놀이를 다룰 때에는 언제나 살가우며 가슴이 뭉클하고 신나는 보람 하나를 베풀어 줍니다.

 좋은 사진이란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나누며 좋은 삶을 꾸릴 때에 태어납니다. 누가 좋다고 말하기 앞서 나 스스로 나부터 좋다고 느끼는 사진입니다. 누가 엉성하다고 따지기 앞서 내가 먼저 온몸으로 엉성하다고 느끼며 뉘우치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멋이란 내 나름대로 내가 사랑하는 삶을 일구는 멋입니다. 사진을 바라보는 맛이란 내 깜냥껏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귀며 어깨동무하는 맛입니다. 사진찍기는 온통 땀내 나는 삶이요, 사진읽기는 속속들이 살가우며 따스한 삶입니다.

 “완성에 이르지 못한 예술 사진처럼 쓸데없는 사진이 또 있을까? 무엇을 전하려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고, 막연한 느낌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그러나 주로 실패하는, 그런 사진을 찍는 데 필름을 마구 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34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윤기 님은 필름사진을 찍으면서 필름을 알뜰히 아낀다고 밝힙니다. 식구들하고 먹고사는 가운데 사진찍기에 더 많은 돈을 쓸 수 없기도 하지만, 스스로 더 좋아할 만하거나 더욱 사랑할 만한 사진이 나오기까지 더 생각하고 살피며 부대낀 다음 사진기 단추를 누르고 싶답니다. 사진기 단추를 더 많이 눌러 본다고 해서 당신 마음에 더 들거나 당신이나 둘레 사람이 흐뭇하게 여길 만한 사진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밝힙니다. “필름을 아껴 쓰는 것,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아마추어의 사진이란 절제 속에서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58쪽).” 하고 덧붙이는데, 곰곰이 따지면, 프로 사진쟁이이든 아마추어 사진쟁이이든 ‘나 스스로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어떤 매무새로 어떻게 담으려는가’에 마음을 쏟을 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크게 헤아려야지, 어떻게 찍든 잘 나오는 사진 하나 얻으면 그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란 부질없거든요. 우리한테는 예쁘게 찍은 사진 한 장이란 덧없거든요. 우리한테는 그럴싸하게 찍은 사진 한 장이란 쓸모없거든요.

 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쁘게 찍은 사진 한 장을 저잣거리에 내놓고 팔 생각입니까. 그럴싸하게 찍은 사진을 대문에 걸어 놓고 뽐내려 합니까.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더 아름답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진을 찍으려 애쓴다(83쪽).”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며 받아들이고자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 두 발을 내디딘 이 땅에서 우리 아름다운 삶을 즐기고자 사진을 찍고 일거리를 찾고 놀이감을 즐기며 사랑하는 사람하고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아름다운 삶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에는 아름다움을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윤기 님 책 《내 멋대로 사진찍기》는 김윤기 님이 살아가는 멋이랑 다른 이름난 사진쟁이가 살아가는 멋이랑 똑같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슷하거나 닮은 구석 하나조차 없는데, 누가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우거나 누가 누구 사진 틀거리를 배우거나 할 수 없음을 넌지시 들려줍니다. 사진강좌이든 사진학교이든 모조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이론이든 사진실기이든 하나같이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들었으면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붓을 들었으면 내 삶을 고즈넉히 살피면서 그림 하나 그리면 됩니다. 연필을 들었으면 내 삶을 맑고 밝게 껴안으면서 글 하나 적바림하면 됩니다. 춤과 노래와 몸짓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멋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멋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를 느끼며 비로소 문화이든 예술이든 삶 하나로 모두어지며 태어납니다. 사진은 누구나 ‘내 멋대로’ 찍고 ‘내 삶대로’ 좋아하며 즐기는 가운데 아름다움이라는 옷을 입습니다. (4343.7.11.해.ㅎㄲㅅㄱ)


― 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글·사진,들녘 펴냄,2004.2.23./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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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그리고 삶
최건수 / 시공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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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찍기와 ‘사진읽기’ 모두 즐길 노릇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3] 최건수, 《사진 그리고 삶》


- 책이름 : 사진 그리고 삶
- 글·엮음 : 최건수
- 펴낸곳 : 시공아트 (1999.3.20.)
- 책값 : 15000원



 (1) 사진을 언제까지 만들고 있는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아닌 사진을 ‘만드는’ 사람이 나날이 늘어납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은 ‘찍는’ 일만으로 모두 담아내어 보여줄 수 없다고 느끼는 사람들로서는, ‘찍는’ 틀을 벗어던지며 ‘만드는’ 쪽으로 접어들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면, 요즈음 만화쟁이와 그림쟁이들은 종이에 대고 펜이나 붓으로 그림을 안 그리곤 합니다. 셈틀을 켜 놓고 셈틀에서 펜마우스로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날 만화책이나 그림책에서 ‘종이 그림’을 만나기란 퍽 힘듭니다. 또한, 종이 그림을 그렸다 할지라도 다시 스캔을 뜨느니 뭐를 하느니 하면서 훨씬 번거로울 뿐 아니라, 종이에 그렸던 그림 느낌을 제대로 살리기까지 퍽 많은 손길과 손품과 돈까지 들여야 합니다.

 만화쟁이와 그림쟁이가 셈틀로 그림을 그린다면, 사진쟁이는 필름사진 아닌 디지털사진을 찍는다 할 만합니다. 요즈음은 필름 원판이 아닌 디지털 파일로 일을 하거나 사진을 마련하거나 책을 꾸미기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디지털 파일로 사진을 찍어 놓으면 나중 일이 수월합니다. 필름으로 찍은 사진은 따로 현상을 하고 스캐너를 돌리고 빛느낌을 살피고 하면서 손이 많이 가고 오랫동안 눈 빠지게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이와 달리 디지털사진은 처음 사진을 찍을 때에 빛느낌을 다 맞추어 놓고 찍으면 됩니다. 셈틀을 켜고 사진 풀그림을 돌려 이래저래 손질할 수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빨리빨리 온누리’에 걸맞는 문화나 예술이 디지털사진이 아니냐 싶기도 하지만, 주머니가 가벼운 사진쟁이들이 필름값 걱정을 덜며 어느 만큼 홀가분하게 즐기는 디지털사진이라 여길 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디지털사진이라고 반드시 홀가분하지는 않습니다. 필름사진은 필름값이 들지만, 디지털사진은 ‘셈틀 저장장치’가 있어야 하거든요. 필름값도 필름값이지만, 디지털사진 파일은 부피가 작지 않기 때문에 이 파일을 건사할 저장장치가 꽤 커야 할 뿐더러, 한 번 모셔 놓은 저장장치가 언제까지나 알뜰히 지켜질 일은 없으니, 더 큰 부피인 저장장치를 틈틈이 따로 마련하여 겹으로 건사해 놓아야 합니다. 어찌 되었든 돈이 많이 깨질밖에 없는 사진입니다.


.. 주입식 교육에 의해서 형성된, 사진에 대한 고정된 틀이 몸에 밴 경우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개성을 잃는 경우가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한국 교육과정의 경직성이 개개인의 개성을 묻혀 버리게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 우리가 외국어를 해독할 때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시각 언어의 해독도 역시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다른 학문의 영역과는 달리 예술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은 열린 마음이지요 ..  (14, 18쪽/구본창)


 우리 집식구는 열흘쯤 앞서 인천 골목동네 살림집을 떠나 충주 산골마을 살림집으로 들어왔습니다. 누구들처럼 돈이 있어 집 사고 땅 사고 하며 들어온 시골집은 아닙니다. 돈이며 집이며 땅이며 하나 없는 주제에 비어 있는 집자리 하나 얻어 살림살이를 옮겼습니다. 여러 날에 걸쳐 손바닥만 한 땅뙈기 돌을 고르고 비닐을 걷어내어 밭으로 일구었고, 이 밭에 처음으로 씨앗을 심어 기릅니다.

 이러는 동안 제 사진찍기는 거의 멈추어 있습니다. 이제까지 제가 담아 온 사진은 ‘헌책방’과 ‘인천골목길’인데, 이 두 가지하고 아주 동떨어진 곳에서 시골살림을 꾸리고 있으니까요.

 새 삶터에서는 새 사진감을 찾아 새 사진을 찍어야 할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전만큼은 아닐지라도 내 사진감을 놓거나 잊지 않은 채 틈틈이 찾아다니며 내 사진감을 함께 일굴 노릇이 아닐까 하고도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시골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담아내는 좋으며 반가운 사진감을 하나 느껴 붙잡고, 지난날부터 꾸준히 이어온 사진감은 틈나는 대로 차근차근 가다듬으면서 여태껏 나 스스로 걸어온 사진길이 얼마나 고왔거나 좋았거나 올바랐는지를 돌아보아야지 싶습니다.

 그동안 걸어온 사진길은 나 스스로 바라지 않았어도 ‘이 나라 이 땅에서는 자꾸 스러지거나 잊혀지거나 없어지는’ 모습을 담는 길이었습니다. 이런 까닭에 제 사진감을 저 스스로 즐기고 있으면서도 ‘오늘 찍은 사진을 앞으로 두 번 다시 나를 비롯해 어느 누구도 찍을 수 없겠지’ 하고 느꼈습니다. 따로 조바심을 내려 하지 않았으나, 찍고 나서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살펴보며 제대로 못 담은 사진이라고 느낄 때에는 ‘어쩔 수 없지’ 하는 마음과 ‘이렇게 찍으면 어떡하니’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는 사진감을 왜 자꾸 엉터리로 찍느냐고 스스로 다그치고 나무라면서 지냈습니다.

 시골집 한 구석에서 밭일을 하다가 아이를 보다가 밥을 하다가 파리를 잡다가 빨래를 하다가 등허리를 두들기며 한동안 드러누웠다가 곰곰이 헤아립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보내는 나날이 길면서도 짧아, 사진찍기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고. 그나마 시골집으로 온 뒤부터는 아이 사진조차 얼마 못 찍어 주고 있다고.


.. 그러나 몇 달 동안은 거의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요. 밤거리에서 방황하고 술집 종업원들과 사귀면서 이태원 분위기를 몸으로 익혔죠. 그러다가 한 업체와 연결되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비로소 촬영이 시작됐습니다. 한 3년 찍었어요 … 처음 이태원에 들어갔을 때는 부정적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어요. 예를 든다면 서양도 아니고 한국도 아닌 짬뽕 문화의 현장, 속 빈 여대생들이 영어라도 한 마디 배워 볼까 배회하는 곳 등. 그러나 몇 년을 이태원에 출입하고, 유흥가 종업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요. 그들도 평범한 인간들이었고, 도리어 기구한 삶들이 많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더 들었어요. 그래서 그들을 부정적 시각으로 보면서 고발성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들의 삶을 우리들의 삶과 동격으로 놓고 담담히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스트레이트냐 메이킹이냐 하는 문제보다도 사진가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담기 위해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가 중요하겠지요 ..  (28, 34쪽/김남진)


 한숨을 돌리고 가만히 돌아봅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은 하나같이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저부터 얼마 앞서까지 도시에서 도시사람으로서만 지냈습니다. 시골살림을 꾸리면서도 도시사람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더 돌아보면, 사진쟁이뿐 아니라 그림쟁이도 매한가지요, 만화쟁이나 여느 글쟁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인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교사나 교수들 모두 도시사람일 뿐입니다. 전문직이라는 의사나 변호사나 정치꾼 모두 도시사람입니다. 사는 곳은 시골일지라도 도시사람다운 살림살이를 꾸리고 있습니다.

 새소리를 듣고 벌레소리와 바람소리를 느끼는 시골에서 조용히 곱씹습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하자면 아무래도 도시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이라는 문화나 예술을 즐길 사람은 모조리 도시에만 있으니, 사진쟁이 스스로 도시사람이어야 하고 도시 터전에 발맞추며 지내야 하는지 모릅니다. 사진잔치를 해도 도시에서 하고, 사진책이 나와도 도시에서 나오며, 사진을 누군가 사들인다 하여도 도시사람이 사들입니다. 시골에서 이루어지는 사진잔치는 구경할 수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 팔려고 내놓는 사진책을 본 적은 아직 없습니다. 시골사람이 사진 작품을 장만해서 당신 집이나 논가나 밭가에 세우거나 걸어 놓는 모습 또한 아직 못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우리 삶이란, 아니 오늘 우리 사진쟁이 삶이란 도시에 뿌리내리고 도시에 머물며 도시만 헤아리는 삶이로구나 싶습니다. 도시에서만 주고받을 사진이요 도시에서 태어나는 사진인 가운데 도시에서 자리매기는 사진이로구나 싶습니다. 삶과 넋과 열매 모두 온통 도시에 쏠려 있는 사진문화이고 사진예술입니다.

 산이나 들이나 바다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 산사람이나 들사람이나 바다사람 눈높이와 삶결로 사진을 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안승일 님이 이룬 《굴피집》(1997) 하나쯤 있다고 할까요. 시골에 보금자리를 마련하며 지내는 분들이 찍는 시골살림 사진조차 시골사람이나 시골마을을 ‘풍경’으로 바라보고 풍경으로 담습니다. 시골사람이나 시골마을을 ‘삶’으로 껴안으며 ‘사진’으로 빚어내는 모습은 아직 못 보고 있습니다. 산일이든 들일이든 바다일이든, 산과 들과 바다에서 하는 일을 담을 때에도 ‘풍경’에서 헤매거나, 뭔가 다르다면 그나마 ‘기록’이라는 테두리에 머물 뿐, ‘삶’이라는 자리를 찾아나서지 못합니다. 산사람은 무엇을 어디에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헤아리거나, 들사람과 바다사람은 무엇을 어느 곳에서 어떠한 눈썰미로 바라보고 있는지 살피지 못합니다.

 어쩔 수 없이 오늘날 한국땅 사진쟁이들 사진이란 ‘만듦사진’뿐입니다. 일하는 골방에서 만드는 사진이든, 셈틀을 주무르면서 만드는 사진이든, 인화액과 인화지를 만지작거리며 만드는 사진이든 만듦사진입니다. 더욱이, 사진기 단추를 찰칵찰칵 누르며 담는 사진 또한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만드는’ 사진에 머물고 맙니다.

 삶을 느끼지 못하고 풍경만 잡아채니까, 이 또한 ‘스냅’이나 ‘스트레이트’가 아닌 ‘도시에서 살고 있는 사진쟁이 눈높이로 얼개와 이야기를 억지로 만드는’ 사진이 되어 버립니다. 만듦 삶이고 만듦 넋이며 만듦 사진입니다. 




 (2) ‘한국 사진작가’는 누구인가


 사진찍기와 사진비평과 사진전시와 대학교수 일을 다 함께 한다는 최건수 님이 쓰고 엮은 책 《사진 그리고 삶》을 읽습니다. 이 책 《사진 그리고 삶》에는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 이야기가 실려 있다고 합니다. 최건수 님이 사진쟁이 스물다섯 사람을 차례차례 만나서 나눈 이야기를 통으로 실어 놓고 있습니다.


.. 요사이는 사진을 전공하지 않은 것을 정말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뭐랄까, 학연이나 인맥으로부터 자유가 결국 작업의 자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요즘은 많이 들어요 … 새로운 소재를 찾기보다는 이미 익숙한 소재들을 새롭게 접근하여 사진을 풀어 가는 것입니다. 같은 대상이라도 애정을 가지고 새롭게 바라볼 때 사물은 전혀 다르게 다가옵니다 ..  (57, 59쪽/민병헌)


 책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글쓴이 최건수 님은 틀림없이 ‘한국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들 스물다섯 사람이 어떻게 ‘한국 사진작가’가 될 수 있는가 궁금합니다. 한국에는 사진작가라 하는 사람이 이들 스물다섯밖에 없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을 드는 책을 내놓는다고 할 때에, 이들 스물다섯 사람이 맨 먼저 다루어져야 하는 까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최건수 님은 2004년에 《사진 속으로의 여행》이라는 이름으로 두 번째 ‘한국 사진작가 스물다섯 사람’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사진 그리고 삶》은 판이 끊어졌고, 《사진 속으로의 여행》은 품절되었다고 하는데, 첫 번째 스물다섯 사진쟁이 이야기에서는 “구본창, 김남진, 김장섭, 민병헌, 이상일, 이정진, 이주용, 임양환, 조남붕, 최광호, 최병관, 황경희, 김대수, 김재경, 김석종, 김석중, 박용세, 신경철, 신미혜, 신현숙, 신혜경, 안승환, 정동석, 정주하, 한세준” 님을 다룹니다. 두 번째 스물다섯 사진쟁이 이야기에서는, “강상훈, 강용석, 고명근, 권순평, 김기찬, 김우영, 김정수, 박홍천, 배병우, 성남훈, 양성철, 오상조, 오형근, 우종일, 육명심, 이갑철, 이완교, 임영균, 전흥수, 정창기, 주명덕, 차용부, 한정식, 홍순태, 황규태” 님을 다룹니다.

 사진쟁이 이름을 낱낱이 살펴보면 이들을 두고 ‘한국 사진쟁이’라 일컫는 일이 엉성하거나 잘못이라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진쟁이를 다룰 수 없고 모든 사진밭을 두루 살필 수 없으며 모든 사진삶을 펼쳐 보일 수는 없겠지요. 그렇지만 몇몇 분을 빼놓고는 사진을 만드는 분들입니다. 사진으로 이야기 하나 엮으려고 하는 분들은 몇 사람 다루지 않습니다. 사진 한 장에 사진쟁이 온삶을 실어내는 사람은 쉰 꼭지에 이르는 만나보기 이야기 가운데 몇 되지 않습니다.


.. 대학의 사진과에 입학함과 동시에 정신적으로 이미 예술가가 되어 버리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사진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증거지요 … 결국 내가 찍은 사진이 내가 가지고 있는 자양분으로부터 나오지 못할 때, 한 사람의 올곧은 사진가가 아닌 모방꾼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 또 하나의 원인이라면 다큐멘터리 사진에 대한 자각이 별로 없다는 거예요. 쉽게 예술가라는 탈을 뒤집어쓰기 위해서라도 메이킹으로 선회하죠 ..  (73쪽/이상일)


 한국에서 사진을 하고 있으면 누구나 ‘한국 사진작가’라 할 만합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말이나 ‘사진작가’라는 말은 더없이 부질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책에 실린 사진쟁이들 발자국을 더듬어 보면,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보다 ‘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분이 꽤 많기 때문입니다.

 사진기를 내려놓고 강단에 섰다 할지라도 사진쟁이는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을 찍은 손품에 따라 강사도 되고 교수도 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이룬 사진은 다른 이들보다 한결 돋보이거나 빼어나다 여길 수 있습니다. 주류라 하건 비주류라 하건 이들 ‘가르침이 + 찍새’인 분들이 숱한 ‘아마추어’ 사진쟁이들한테 피와 살이 될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으면 이 책은 값있고 뜻있고 멋있다 할 만합니다.


..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미국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의 사진 속에 그들의 삶이 스며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사진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깊이 있는 사진을 하면서 아주 천천히 다가오는 삶의 즐거움입니다 ..  (106쪽/이주용)


 만듦사진이라고 해서 사진을 모른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을 한다고 해서 사진하고 동떨어진 길을 걷는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이든 삶사진이든 사진을 할 수 있으면 되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어서 나눌 수 있으면 됩니다.

 최건수 님이 만나본 최광호 님 말씀마따나 ‘사진으로 재미있게 살’ 수 있으면 되는 한편, ‘사진으로 이야기를 엮’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최건수 님 사진책에 실린 쉰 사람 가운데 몇 사람이나마 두 갈래 가운데 하나에 드는 분이라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분들이 돈이나 이름을 바라며 사진을 찍지는 않을 터이나, 거의 모두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만 만나면서 사진하고 삶이 이어지는 고리가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을는지 잘 모겠습니다.

 만듦사진 또한 똑같이 사진이요, 만듦사진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 누구한테나 삶이 있으니 《사진 그리고 삶》이란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 몇몇 ‘찍는 사진’을 하는 사람을 끼워넣는 일은 달가워 보이지 않습니다. 차라리 스물다섯 사람 + 스물다섯 사람을 몽땅 만듦사진을 하는 사람으로 채워서 ‘만듦사진에도 어김없이 삶이 있고 사람이 있으며 이야기가 있다’고 나아가면서 더욱 깊은 사진말을 들려줄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오거나 나라밖으로 사진을 배우러 다녀왔거나 대학교나 대학원에서 사진학을 하거나 사진을 가르치는 이들만 ‘사진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식구들 사진을 찍는 사람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윤미네 집》을 일군 전몽각 님 또한 ‘사진을 하는’ 사람입니다. 《골목 안 풍경》을 이룬 김기찬 님은 돌아가시는 날까지 사진밭에서는 ‘당신은 아마추어요’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하는데, 여느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어우러지는 삶을 찍는 사진을 즐기는 사진쟁이가 얼마 없기는 합니다만, 다른 누구도 아닌 사진작가이면서 사진비평가이고 사진전시자인 가운데 대학교수이기까지 한 최건수 님이라 한다면, 당신만 한 자리에서 써 내려갈 《사진 그리고 삶》이란 이러한 높낮이에서 그칠 책이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참말로 사진은 무엇이며 삶은 또 무엇인가를 파헤치면서 건드리는 책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들한테서 당신들한테 사진과 삶이 무엇이냐고 묻는 말뿐 아니라 최건수 님 스스로 생각하는 사진과 삶을 또렷이 밝히며 더욱 깊고 너른 이야기를 나누어 《사진 그리고 삶》에 담아야 할 노릇이 아니냐 싶습니다.


.. 미국에서는 사진으로 재미있게 사는 방법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사진이 다양한 것은 사진을 자신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 우리 사진은 무엇을 주장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사진을 가지고 즐기지도 못합니다. 어정쩡하게 서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고, 곁눈질하면서 사진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 사진의 특성은 이미지 전달이지요. 기계적 특성에 너무 매달리면 그 본질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 사진은 보편적 아름다움이나 결정적 순간을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느낀 것을 토해 내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일상 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장비는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진가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죠 ..  (157, 164쪽/최광호)


 아쉬우나마, 숱한 사진쟁이들은 사진하는 마음과 살아가는 마음을 이 도톰한 책에 알뜰히 펼쳐 보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아쉽게도 최건수 님은 이 대목에서 더 깊고 그윽한 대목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자기가 느낀 것을 토해 내는” 사진이라 한다면, “무엇을 느끼셔서 무엇을 담았습니까?” 하고 물을 줄 알아야 하고, “느낀 그 무엇을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던가요?” 하고 다시금 물을 줄 알아야 하며, “사진으로서 그 무엇을 느끼는 일이란 또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고 거듭 물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일상 속에 있는 자기가 느낀 것을 보려면 어떻게 살며 어떻게 사진을 찍어야 할까요?” 같은 물음을 잇는다든지, 이 물음을 사진쟁이들이 하기 앞서 최건수 님 스스로 “아, 그래요. 사진이란 이러구저러구이며 삶이란 이바구저바구로군요.” 하는 사진말을 길어내야지 싶습니다.


.. 조금 극단적인 예가 되겠습니다만, 일본의 어린 유치원생들은 해를 그릴 때도 모두 빨간색으로 그리도록 교육받지 않습니다. 파란 해를 그린 아이도 있고, 검정 해를 그린 아이들도 있죠. 선생님들은 그 부분을 인정하고 북돋아 주지요. 이렇게 열린 사고로 훈련받은 아이들은 세상과 사물을 새롭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고요 ..  (122쪽/임영환)


 어제 집에서 아이랑 애 엄마랑 영화 〈로빙화〉를 또 한 번 보았습니다. 어제는 “아명, 왜 해를 파랗게 칠하지?” “해가 너무 뜨거우면 아빠가 일하시기 힘드니까요.” 하고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목이 오래도록 남았습니다. 마침 요 며칠 동안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텃밭에서 돌 고르기를 한 탓인지 모릅니다. 해를 발갛게 그릴 수 있으나 노랗게 그릴 수 있고, 또 파랗게 그리거나 까맣게 그릴 수 있습니다. 하얗게 그린다거나 잇빛으로 그릴 수 있겠지요. 푸르게 그리거나 하늘빛에 녹아들도록 그릴 수 있습니다. 어느 때이든 해를 그리는 사람 마음이 깃들어 있다면 제 마음 가는 대로 그릴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오늘 우리 누리에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하는 사진이란 무엇인가 새삼스레 곱씹습니다. ‘찍는’ 사진이 되든 ‘만드는’ 사진이 되든, 오늘 이 땅 이 나라 사진쟁이라 하는 분들은 참으로 당신들 나름대로 당신 삶으로 받아들이는 무엇인가를 느끼면서 사진기를 쥐고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사진작품을 선보이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싸해 보이는 사진이나 잘 팔리는 사진이나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에 얽매인 채, 정작 ‘내 사진 즐기기’하고는 그예 멀어지거나 등을 돌리고 있지 않느냐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글을 쓰거나 책을 엮는 분들을 바라보면서도 이러한 걱정은 이어집니다. 참말 ‘좋은 사진을 좋게 즐기는 마음을 담는 사진읽기’를 펼치고 있으신지, 강단에 선 지식인으로서 ‘말 만들기’를 하고 있으신지 궁금합니다.

 사진찍기도 즐기는 일이요, 사진읽기도 즐기는 일입니다. 즐길 수 없다면 사진찍기가 아니고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아니, 즐기지 못한다면 삶이 아닙니다. 즐기지 못하면서 사진삶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4343.7.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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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전쟁
조지 풀러 / 눈빛 / 1996년 6월
평점 :
품절



 한국전쟁을 빛깔사진으로 담은 미군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5] 조지 풀러, 《끝나지 않은 전쟁》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예순 해를 맞이하면서 여러 가지 책과 사진자료가 빛을 봅니다. 이 가운데 지난 5월 10일에 나온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존 리치 사진,서울셀렉션 펴냄,2010)은 무척 돋보이는 사진책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 맨 앞자리에 실린 추천글을 쓴 사람은 백선엽 씨입니다. 백선엽 씨 이름 밑에는 ‘대한민국 육군협회 회장’과 ‘6·25전쟁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고문’이라는 직책이 달려 있습니다. 백선엽 씨가 한국전쟁 때 거두었다는 ‘큰 성과(쥐잡기 작전)’를 헤아린다면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에 추천글을 쓸 만할 수 있으며, 한국전쟁을 기린다는 사업회 고문 자리를 맡을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선엽 씨 발자취를 돌아보면 일제강점기에 만주군관학교를 나왔고, 인천에서 당신과 동생 백인엽 씨 이름을 딴 ‘선인재단’을 만들었습니다. 만주군관학교라는 곳은 아무나 들어가는 여느 학교가 아닙니다. 인천에서 선인재단은 어마어마한 사학비리를 저지른 곳일 뿐 아니라 인천이라는 곳이 꼴통이 되도록 권력을 뒤흔들던 곳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일제강점기 발자취라든지 군사독재정권 무렵 사학비리를 저질렀다든지 하는 발자국이란 ‘한국전쟁 공로’에 견주면 아무것 아닐 수 있으며, 눈감을 만한 티끌로 삼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속이 갑갑하고 아찔합니다. 전쟁 때에 나라를 지키겠다고 외치며 두 주먹 불끈 쥐었던 사람이라면 전쟁을 마친 다음에도 나라를 지킬 수 있게끔 맑고 깨끗하며 정갈한 삶을 꾸려야 할 노릇이 아니냐 싶습니다. 전쟁 업적과 친일부역과 사학비리란 한 자리에 한 사람한테 나란히 놓일 만한 보람은 아니라고 느낍니다.

 씁쓸한 추천글이 달린 사진책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을 한 장 한 장 넘깁니다. 추천글은 씁쓸하더라도 책에 담긴 사진이 씁쓸하지 않다면 이 사진책은 훌륭합니다. 아니, 이런저런 추천글하고는 아랑곳하지 않을 책 하나 알맹이입니다. 그런데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들 또한 그리 달갑지 못합니다. ‘컬러로 보는’이라는 책이름답게 한국전쟁 모습을 빛깔사진으로 담은 드문 자료로 엮은 책이기는 하나, 한국땅에서 일어나 한겨레가 서로 치고박으며 숨을 거두고 괴로워 하던 나날을 읽을 수 없습니다. 또한, 총부리를 마주하며 다투는 가운데에도 여느 사람들은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살림을 여느 매무새로 꾸리고 있던 손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지난 1996년에 나온 작은 사진책 《끝나지 않은 전쟁》을 책꽂이에서 꺼내어 다시 한 번 읽어 봅니다.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든 《끝나지 않은 전쟁》이든 미군 사진기자가 찍은 빛깔사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두 가지 책은 한국땅과 한국전쟁과 한겨레붙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사뭇 다릅니다. 아니, 한국땅과 한국전쟁과 한겨레붙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다르다기보다 두 미군 사진기자 삶이 달랐겠지요. 사뭇 다른 삶에 따라 서로 다른 눈매가 되었을 테며, 서로 다른 눈매에 따라 서로 다른 눈썰미로 한국땅에서 한국전쟁을 부대끼고 한겨레붙이를 마주하면서 빛깔사진을 담았을 테지요.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사진책은 책이름 그대로 1950년 무렵이든 1996년 무렵이든, 또 2010년 무렵이든 끝나지 않았을 뿐더러 끝날 수 없어 보이는 싸움터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끝나지 않을 싸움터로 보이는 이 자그마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자그마한 사람들은 아기자기하며 앙증맞습니다. 군인들이 쏘아댄 총알과 폭탄 때문에 산과 들은 무너지고 나무는 꺾이고 풀과 꽃은 자취를 감춥니다. 그러나 군인 아닌 여느 사람들, 또 군인으로 끌려간 여느 사람들은 빈 들판에 곡식을 심어 일구고 빈 멧부리에 나무가 자라도록 마음을 쏟습니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헌 옷가지이든 모포이든 무엇이든 그러모아 바느질을 하여 아이들 옷과 어른들 옷을 마련합니다. 쑥대밭이 된 마을에서 흙과 나무로 집을 다시 세우고, 이런 마을 한켠에서 아이들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코를 흘리며 골목놀이를 합니다. 널뛰기를 하고 초콜릿을 얻으려고 미군한테 달려듭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이라는 작은 사진책을 덮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이 사진책 하나로 엮인 전쟁 사진을 찍은 미군 사진기자 조지 풀러 님은 ‘전쟁과 자본주의 미국 문화와 삶에 진저리를 치면서 넋이 맑고 차분하고 깨끔한 사람과 삶’을 찾아나서고 싶어 하지 않았느냐 하고. 왜냐하면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실린 한국땅 여느 한겨레붙이 모습을 보면, 오늘날 한국 사진쟁이가 인도이니 티벳이니 네팔이니 찾아가서 사진으로 담는 ‘거룩하고 수수하며 깨끗하고 착하다는 사람들’ 느낌이 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에 실린 한국땅 한겨레붙이 모습을 볼라치면 한 마디로 ‘전쟁 난민’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으레 떠올릴 만한 ‘코소보 아이들’이라든지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이라든지 ‘콩고 아이들’과 같은 느낌이 납니다.

 한국전쟁이란 참으로 쓰디쓴 우리 옛 생채기입니다. 죽인 쪽이나 죽은 쪽이나 아프디아픈 자국입니다. 앞으로 마흔 해가 더 지나 한국전쟁 백 해를 맞이한대서 아물 수 없는 슬픔입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은 왜 우리한테 생채기요 아픔이요 슬픔이 될까요. 한국전쟁을 떠올릴 때 곰곰이 살필 대목이란 북침이니 남침이니 전쟁 피해이니 하는 숫자셈이어야 할까요. 몇 백만이 죽거나 얼마나 많은 산과 들이 무너졌거나 얼마나 많은 들짐승이 나란히 숨을 거두었거나 하는 한국전쟁이 아닙니다. 이때 뒤로 남과 북이 서로서로 무기를 더 늘리려고 얼마나 큰돈을 쏟아부었으며 서로서로 독재 틀거리를 지키고자 반공과 반미를 왜 그토록 모질게 외쳤는가 하는 대목 또한 한국전쟁하고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한국전쟁이란 다름아닌 우리 아버지가 죽고 우리 어머니가 죽었으며 우리 누나가 죽는 가운데 우리 동생이 죽은 끔찍한 일입니다. 내 살붙이가 죽고 내 이웃이 죽었으며 내 동무가 죽은 끔찍한 일입니다. 고단하게 죽고 만 용산 철거민 또한 내 이웃이요, 미선이와 효순이 또한 내 동생이며, 한때 정치권력자와 언론들이 폭도로 내몰았던 광주사람 또한 내 살붙이입니다.

 어떤 전쟁이든 우리 삶을 망가뜨릴 뿐 아니라 괴롭히며 짓밟습니다. 어떤 전쟁에서든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여느 사람들은 아프고 힘들며 고단해야 합니다. 어떤 전쟁이든 거룩하다거나 뜻깊다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어떤 전쟁에서든 권력자와 지휘자는 죽지 않으며, 전쟁이 끝났든 전쟁이 없는 동안에든 평화롭고 아름다운 나라가 되자면 모든 무기와 군인이 사라져야 합니다. 나라를 지키는 참된 힘이란 무기와 군대가 아닙니다. 나라를 지키는 참다운 힘이란 여느 사람들 따스한 사랑과 땀흘려 일하는 투박한 손에서 샘솟습니다. (4343.6.25.쇠.ㅎㄲㅅㄱ)


- 끝나지 않은 전쟁 (조지 풀러 사진,신광수 엮음,눈빛 펴냄,1996.6.3./1만 원)
(재미있다고 해야 할까 모르겠으나, 사진책 《끝나지 않은 전쟁》을 엮은 신광수 님 또한 백선엽 씨한테서 도움을 받아 사진에 나온 곳이나 그무렵 이야기를 듣고 갈무리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조지 풀러 - 끝나지 않은 전쟁]에 실린 사진들 





















 

[존 리치 - 컬러로 보는 한국전쟁]에 실린 사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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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신미식 포토에세이
신미식 지음 / 푸른솔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구경꾼 사진인가 사랑꾼 사진인가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2] 신미식,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책이름 :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글ㆍ사진 : 신미식
- 펴낸곳 : 푸른솔 (2007.7.7.)
- 책값 : 27000원


 (1) 구경하는 사진과 살아가는 사진


 제가 마지막으로 마친 학교는 고등학교입니다. 제가 마친 고등학교는 여느 인문계 고등학교이기에 따로 어떤 특기나 재주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마친 학교가 이곳이든 저곳이든 저로서는 학교에서 배웠다고 내세울 만한 대목이 따로 없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치거나 중학교만 마친 사람이 대학교에서 강사나 교수가 되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대학교라는 자리에서 대학생을 가르치는 몫을 맡는 사람은 모두 자격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란 숱한 자격증 가운데 하나이며 거의 언제나 어디에서든 내밀어야만 하는 자격증입니다. 흔히 말하는 전문 일자리를 얻으려면 대학교 졸업장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출판사이든, 온누리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언론사이든, 아이들 가르치는 터전이라는 학교이든, 동네사람을 보듬는 일을 맡는다는 공공기관(동사무소)이든, 졸업장이 없고서는 입사지원서 하나 내놓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그림그리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노래부르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춤추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사진찍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다거나 어느어느 사람한테서 배웠다고 하는 경력이나 자격을 들이밀어야 합니다.

 나아가,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 따위를 처음으로 배운다든지 새롭게 배운다든지 하는 우리들 스스로 ‘어느어느 대학교’라든지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온 아무개’라든지 ‘이런저런 강좌나 특강’이라든지 ‘어찌어찌 이름난 누군가’를 찾아나섭니다. 하다못해(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삶에 따라) 밥하기를 배운다는 자리에서도, 우리를 낳아 기르며 먹여살린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밥하기를 배우려 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요리학원에 나가야 하고, 요리교실을 들어야 하며, 요리책을 들여다보거나 요리방송을 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다고 대학교라는 틀이 나쁜 틀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섬돌을 밟아 올라가듯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틀입니다. 샛길로 빠지거나 어긋나지 않도록 잘 붙잡아 주며 이끄는 틀입니다.

 그런데, 대학교라는 배움터는 열린 마당이 아닌 갇힌 틀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길을 찾으며 저마다 다른 삶을 꾸리도록 길벗이 되어 주는 열린 마당이 아니라, 어떠한 자격증을 따내도록 한 가지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갇힌 틀입니다.

 열린 마당에서는 무슨 솜씨나 재주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로 가르칠 일이 없습니다. 밥물 맞추기와 나물 무치기를 알려주는 할머니가 무슨 솜씨나 재주를 부려서 더 맛나게 하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밥을 할 때에는 물을 어찌 맞추고 나물을 무칠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된다고 가르칠 뿐입니다. 갇힌 틀에서는 언제나 솜씨와 재주를 가르칩니다. 따로 가르치지 않고서는 따로 배울 수 없습니다. 밥물을 맞출 때에 비율을 따지고 부피를 셈합니다. 쌀알을 몇 그램 떠서 몇 차례 씻어서 어느 높이가 되도록 맞추도록 지시를 내립니다. 나물은 몇 그램을 마련하고 어디를 어느 만한 길이로 다듬어서 몇 분에 걸쳐 어떠한 그릇이나 냄비나 불판을 쓰는데 어떤 양념을 얼마만한 부피를 어느 때에 넣어서 무치라고 가르칩니다.

 지난주부터 어찌저찌하여 어느 대안학교 선생님들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저처럼 대학교를 안 나왔을 뿐 아니라, 사진 전공조차 안 했으며, 가르쳐 준 사진 스승이 없는 사람한테 사진을 배우겠다고 하는 분들이 참 용하구나 싶은데, 저로서는 즐겁게 사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너덧 해쯤 앞서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모임 자원봉사 활동가 아줌마 아저씨한테 사진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나 이때나 제 마음은 매한가지입니다. 저한테 ‘사진 배우기’를 하겠다는 분들은 ‘가르쳐’ 주기를 바라시지만, 저는 사진을 가르치지 못하고 가르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가르치려 한다면, 모든 사진기마다 딸려 있는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손전화를 장만해도 이 손전화에 딸린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마련해도 이 자전거에 딸린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됩니다. 자동차를 사서 몰든 오토바이를 사서 몰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물건에 딸린 설명서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물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익힐 노릇입니다. 사진이라고 다르지 않고, 그림이나 글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볼펜을 쓰는 솜씨를 익히고자 글쓰기를 배운다 하지 않겠지요? 붓을 놀리는 재주를 알고자 그림그리기를 배운다 하지 않을 테고요.

 사진기 다루는 재주나 솜씨 때문이라면 저 같은 사람한테서 사진을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누구한테서든 배울 까닭이 없어요. 이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요, 사진강좌나 사진교실 같은 데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나 솜씨는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나 솜씨는 ‘사진기 사용설명서’를 읽으며 스스로 알아차릴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진기 단추를 눌러 사진을 만드는 일이란, 빨래기계 단추를 눌러 빨래를 하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사진을 배운다고 할 때에는 사진기 다루는 재주가 아닌 사진 한 장에 담을 내 넋과 삶을 배우려 한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을 어떠한 눈길과 매무새로 바라보는가를 돌아보고, 사진 한 장을 얻고자 어떻게 마음쓰고 애쓰고 힘써야 하는가를 살피며, 사진 한 장을 얻고 나서 이 사진으로 내 둘레 이웃과 동무하고 즐거운 눈물과 웃음을 주고받느냐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따라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따라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사람을 사귑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는 우리 삶을 배우겠다는 셈이요, 이제까지 보내 온 내 삶을 찬찬히 되새기고 되짚으면서 앞으로 꾸릴 내 삶이 어떠한 모습과 매무새가 되면 좋을까 하고 내다보는 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읽을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려는 걸음걸이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사진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맨 먼저 내 삶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사진찍기는 못합니다. 내 삶을 모르는데 무슨 글쓰기를 하며, 내 삶을 알려 하지 않는데 무슨 그림그리기를 하겠어요.

 오늘날 숱한 사람들이 사진기를 쉽게 장만하고 사진을 쉽게 찍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사진찍기란 몇몇 부자나 예술쟁이들이 겉멋 부리듯 하는 놀음놀이가 아니니까요. 비싸구려 사진기만 사진기가 아니요, 값싼 1회용 사진기 또한 사진기입니다.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어야 하며, 사진기는 누구나 장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빼어난 장비를 갖추었다고 빼어난 사진이 나오지 않으며, 허술한 장비밖에 없다고 허술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숟가락을 들고 주걱을 들며 칼을 든 살림꾼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밥이듯, 사진기를 쥔 우리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어디에서 언제 찍으려 하느냐는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만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기를 들고는 겉멋을 부리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겉멋을 부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겉멋에 들린 삶을 꾸리며 겉멋을 한껏 뽐내는 또다른 길로 사진기를 쥘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간다고 잘못이라거나 몹쓸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길로 접어들지 못할 뿐이니, 이렇게 겉스치는 길로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구경꾼 사진을 얻습니다. 나 스스로 속알을 채우며 보듬는 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시나브로 속알이 야무지거나 단단하여 그윽한 멋이 풍기는 사진을 얻습니다. 사랑스레 꾸리는 삶이기에 사랑꾼 사진을 얻어요.

 그런데 사진 가르치기를 두 번째로 해 보면서 적잖이 걱정스럽습니다. 저로서는 제 삶을 아름다이 가꾸고 싶어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고 싶은데, 사진을 배우려는 분들은 어떤 길을 걷고자 하시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따로 사진 재주만을 배우려 하지 않느냐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하루하루란 아이들한테 지식을 집어넣는 일이 아닐 텐데,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배우려 하는 사진이란 당신 스스로 ‘사진 다루는 지식’으로 흐르지 않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구경하는 삶이라 할 때에는 오로지 구경하는 사진만 얻으며 구경하는 사진이 아름다운 듯 여길 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진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살아내는 하루하루라 할 때에는, 그러니까 땀흘리고 마음쏟으며 꾸리는 참삶일 때에는 땀흘리는 사진이고 내 마음 깊이 바쳐진 사진이며 참다운 사진으로 나날이 거듭납니다. 어제는 어제대로 아름다우나, 오늘은 오늘대로 어제까지 보낸 삶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디는 새로우며 빛나는 삶을 사랑하고 싶다면, 티없는 사랑꾼 사진을 즐기고 싶다면, 우리는 사진 지식을 내려놓고 사진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사람 삶터를 담는 사진이란


 “사진가가 아름다운 풍광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34쪽).” 하고 말하는 신미식 님은 당신 사진을 그러모은 작품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 《사진은 감동이다》(2010)를 엮었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을 때》(2009)라든지 《천국의 땅, 에티오피아》(2009)라든지 《행복 정거장》(2008)이라든지 《마치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2008)이라든지 《미침, 여행과 사진에 미치다》(2007)라든지 《카메라를 던져라!》(2006)라든지 《마다가스카르 이야기》(2006)라든지, 지난 2002년부터 숱한 사진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2007)는 사진찍기 한길을 걸어가는 당신 삶과 넋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책을 여러 번 되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틀림없이 ‘사진쟁이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기쁜’ 일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쟁이 스스로 내가 남긴 사진에 아름다운 모습이 담겼을 때 눈물을 흘릴 뿐 아니라, 이 아름다이 찍은 사진 한 장을 이튿날이 되어 보잘것없다고 느낄 줄 안다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어제 쓴 글’과 견주어 ‘오늘 쓴 글’이 더 아름답거나 훌륭하기 마련이요, ‘어제 그린 그림’과 맞대어 ‘오늘 그린 그림’이 한결 빛나거나 놀랍기 마련입니다. 사진쟁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책을 내놓으려고 하는 이들은 으레 한 가지 사진감을 놓고 아무리 짧아도 열 해는 잇달아 꾸준히 찍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까닭은 오직 이 한 가지 때문입니다. 어제 찍은 사진이 제아무리 훌륭했어도 오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 보잘것없거든요.

 사진쟁이가 되었든 그림쟁이나 글쟁이가 되었든 모두 한 가지 매무새입니다. 첫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내 사진에 아름다움이 담겼으면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오늘 찍은 사진은 오늘로 잊고 이듬날에는 이듬날 새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이 일이 나에게 물질적으로 풍요를 채워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사진은 직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호흡법이기 때문이다 … 이곳에 실린 사진의 인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에겐 잊혀지지 않을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와 동떨어진 피사체가 아니라 나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친구로 다가가 찍은 사진들이 결국 내 마음을 만진다 …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작품성의 의미를 떠나 신미식이 만난 귀한 친구들이라는 사실이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다. 사진을 찍기 전에 사람을 먼저 사랑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모아져 결국은 지금의 내가 되었다. 카메라를 장만한 지 이제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스스로 감사하며 감동이 있는 사진을 계속 찍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길 원한다. 만들어진 틀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아닌 스스로 찾아낸 삶의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된 것은 나에겐 행운이다 ..  (책을 내면서)


 사진 한 장 아름다이 찍은 사람은 누구보다 사진쟁이 스스로한테 영향을 끼칩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다움 그대로 담아낸 사진쟁이는 이웃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며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이끌기 앞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손이 덜덜 떨리면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사진쟁이라는 사람은 당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죽이거나 밀어내어 손가락이 덜덜 떨리지 않도록 다그치면서 차분하게 아름다움을 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손가락이 덜덜 떨리면서 찍은 사진이 아니고서는 이웃사람한테 벅차오르는 가슴이 무엇인지를 나누지 못합니다. 벅차오르는 가슴일 때에 벅차오르는 그대로를 담아야지, 벅차오르는 가슴을 다독이며 담은 사진에는 ‘벌써 차분해지고 만 재미없거나 따분한’ 사진이 박히고 맙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서는 ‘이 사진을 찍을 때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데?’ 하고 말할는지 모르나, 사진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사진쟁이가 덧붙이는 말’ 때문에 ‘그렇군요!’ 하고 생각하지, 사진을 보는 사람 스스로 가슴이 울렁거리지 못합니다.

 신미식 님은 2007년에 열여섯 해째 사진찍기를 했다 했으니, 2010년이면 열아홉 해째요, 2011년에는 스무 해째가 될 테지요. 그렇다면 궁금합니다. 이제는 신미식 님이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한테) 감동이 있는 사진을 계속 찍을” 생각인지,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삶을 꾸리며 사진을 즐길’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신미식 님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길” 바라기 앞서, 신미식 님 스스로 찍은 사진으로 남들보다 당신 스스로한테 영향을 끼치며 당신 삶을 스스로 티없이 맑고 밝으며 곱게 다스릴 수 있기를 바라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소금호텔을 나와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길 하나 없는 하얀 사막을 달리는 운전사는 이정표도 없는 길을 잘도 찾아간다. 아마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길이 있는 듯하다 … 난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플라밍고의 동작 하나하나를 담기 위해 숨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분홍빛의 플라밍고는 처음으로 내 카메라의 포로가 되었다. 한참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운전사가 오더니 나를 보고 웃는다. 왜 그러냐고 어깨를 들썩이니, 이곳은 플라밍고가 많은 곳이 아니고 다음에 가는 호수가 진짜 제대로 된 플라밍고 서식지라는 것이다. 난 이곳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는데, 이보다 더 큰 서식지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수밖에 ..  (30, 33쪽)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라는 사진책에서 신미식 님은 ‘사진쟁이로서 당신 나름대로 아름다이 걸었던 길’은 그다지 밝히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로 걷는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움을 본 길’만 자꾸 되풀이합니다. 당신이 두 눈과 두 다리와 온몸으로 부대낀 여행지에서 마주한 아름다움을 그저 ‘풍광’으로 받아들일 뿐, 당신 ‘삶’으로는 삭이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딛었을지도 모르는 낯선 자연과 그들의 소중한 삶 속에서 난 미치도록 행복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82쪽)” 같은 말을 해야 하고 들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런 말마디에 뭉클해 해야 할는지요. 우리는 우리 둘레 여느 삶터 여느 이웃하고 복닥이는 삶에서 ‘미치도록 즐거운 삶자락’을 느끼고 잡아채며 담아내는 사진쟁이 길을 걸어야 참다이 아름답지 않으랴 싶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내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에 내 이웃 보금자리에서도 내 이웃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를 깨닫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쟁이 신미식 님 말은 슬픕니다. 아직 한국사람이 안 내디뎠다는 그곳 모습을 처음으로 찍어야만 미치도록 즐거울는지요. 수많은 사람이 다녀간 곳에서 ‘수없이 스친 사람들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하거나 마주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한’ 모습을 신미식 님 당신만은 날카롭고 포근하며 따스하게 잡아채거나 느껴 사진 한 장으로 옮길 노릇이 아닌지요.

 아무도 못 본 모습을 처음으로 사진으로 담을 때에 즐겁다면, 그예 1등주의와 다름없는 최초주의로 머무는 삶이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찍기란 1등주의가 아니고 최초주의가 아닌데, 사진찍기란 글쓰기와 그림그리기와 다름없는 아름다움 찾기일 텐데, 사진찍기란 사진기를 든 사람부터 아름답게 거듭나면서 둘레 이웃과 동무한테 아름다움을 나누는 일일 텐데, 왜 ‘(구경꾼한테)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일컫는 곳에만 찾아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벌어진 틈이 있는 곳에서는 아름다운 연기가 올라온다. 함께 온 여행자들의 입에서는 탄성소리가 터져나온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 이곳에 서면 사람은 모두가 작아진다. 그리고 한없이 작아진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그랬듯이, 이곳을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가 그랬듯이. 감격에 겨워 흘린 눈물은 새로운 여행자들을 이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 직접 오를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여행자의 특권 앞에 난 심장이 뛰었다 ..  (50, 62, 77쪽)


 여행하는 사람은 당신한테 낯선 곳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여행하는 사람 당신으로서는 낯선 곳이지만, 여행하는 사람이 찾아간 곳에서 태어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하나도 낯설지 않은 곳입니다.

 ‘여행지’라는 곳이 ‘고향’인 사람하고 여행지가 말 그대로 ‘여행지’요 ‘낯선 곳’이요 ‘처음 내딛는 곳’인 사람하고는 느낌이 다릅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여행지 모습을 당신으로서는 ‘처음 사진으로 담는다’ 할지라도 여행지를 여행지 아닌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은 ‘늘 으레 보던 모습’이요 ‘늘 으레 사진으로 담은 모습’입니다.

 플라밍고 호수를 사진으로 찍는 신미식 님을 보며 웃던 운전기사는 ‘플라밍고가 조금 모여 있는 곳은 이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한편 ‘플라밍고가 구름처럼 모여 있으며 대단히 아름답다’고 하는 곳을 함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는 소리가 아니라, 두 곳이 저마다 달리 아름다운 줄을 알고 있습니다. 고향땅 운전기사는 어느 곳에 가든 그곳에 알맞춤하게 아름다움을 맛보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모든 곳을 ‘고향땅 사람’처럼 머물고 살고 일하고 놀며 지낼 수 없으니 겉훑기처럼 몇 가지만 살짝 보고 그치겠지요.

 여행이란 ‘눈을 넓히는 일’이 아닌 ‘좁은 눈을 자랑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며 내 삶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본다지만, 내가 보았다는 사뭇 다른 모습이란 ‘속내를 알고 보면 내가 찾아간 낯선 땅 참모습이 아닌 몇 가지 겉스친 모습’이기 일쑤입니다. 내가 찾아간 낯선 땅을 속속들이 느긋하고 너그러이 돌아볼 수 있으면 여행이란 더없이 ‘눈을 넓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여행을 한다는 분들은 얼마나 ‘눈을 넓히고자 넉넉하고 느긋하고 따스하게 여행하는 발걸음을 떼고’ 있으려나요. 우리들 여행자는 나라밖에서는 나라밖에서대로 좁은 눈으로 몇 가지만 겉스쳐 보고 있는 한편, 나라안에서는 나라안에서대로 내 삶터와 동네와 이웃을 넉넉하고 속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그저 밖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지 않는지요. 우리들한테 고향을 우리 고향으로 여기지 못하면서, 다른 ‘여행지가 고향인 사람들 터전’ 또한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곳인지를 살피지 못하는 쳇바퀴 돌기가 아닐는지요.


.. 사진으로 남기는 것과 가슴으로 남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남긴 수많은 사진들이 전부 가슴에 담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바쁘게 살아갈 필요가 없는 이곳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두고두고 나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 줬다 … 아마존의 숲을 걸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 숲속 길을 걸으면서 내가 정말 아마존의 밀림에 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져야 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내 여행의 여정들을 생각해 봤다. 여행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후로 가장 가슴에 남는 여행이라고 생각되어진 이곳에서 난 너무나 행복했다. 여행이란 꼭 대단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던 그곳에서 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114, 141쪽)


 신미식 님은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라는 사진책에서 끊임없이 스스로한테 말합니다. “여행이란 꼭 대단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이런 말 뒤에는 어김없이 “하늘의 신이 이들에게 선물한 최고의 자연” 같은 말마디가 이어집니다. 입으로는 대단한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진으로는 대단한 모습만을 사진으로 담아야 하는 듯 책을 엮었습니다.


.. 인도의 골목에는 내가 이해하기 힘들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진을 찍을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진가의 선택이다 … 여행자들은 사파의 순수한 사람들을 보고 싶어 찾아오지만 정작 이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겠지 … 모른다바 바닷가의 눈부시도록 신비한 오렌지색 하늘과 그 아래 휴식을 취하러 나온 사람들의 찬란한 오후는 하늘의 신이 이들에게 선물한 최고의 자연이다. 난 이들이 매일 접하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하늘을 잠시 훔쳐본 이방인일 뿐이다 … 니켈의 주요 생산지이자 뉴칼레도니아의 수도인 누메아는 흔히 작은 프랑스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적인 프랑스의 모습을 닮았다. 태평양에서 프랑스의 문화를 느껴 보는 즐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프랑스의 니스를 옮겨 놓은 듯한 건물들과 부둣가에 정박돼 있는 화려한 요트들을 구경하는 것도 이곳에서의 즐거움 중 하나다 ..  (214, 251, 323, 355쪽)


 인도 골목길이든 한국 골목길이든 숱한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골목동네 사람들이 잘 읽거나 깨달을 수 있으나, 토박이 아닌 구경꾼 또한 어느 만큼 읽거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머무는 사람이라고 더 잘 읽거나 깨닫지 않으며, 구경꾼이라고 하나도 못 알아채거나 못 읽지 않습니다. 저마다 살아낸 만큼 읽습니다. 저마다 살아가려는 몸짓만큼 읽습니다.

 사진책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를 덮을 무렵, “태평양에서 프랑스의 문화를 느껴 보는 즐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는 대목을 읽고는 무릎을 칩니다. 그렇군요. 신미식 님은 태평양에서 태평양 문화를 느끼는 즐거움 못지않게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고 즐기고 있었군요. 태평양 한복판에 뜬금없이 프랑스 문화가 있는 까닭을, 프랑스사람이 왜 뜬금없이 태평양 한복판까지 저희 문화를 심어 놓았는지를 읽지는 못하는군요.

 스스로 더 읽으려 하지 않거나 스스로 더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더 아름다이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더 바라볼 수 없으며 스스로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한국땅 곳곳에 숱하게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가 심어 놓은 집과 건물과 문물’ 또한 즐겁게 맛볼 수 있는 노릇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못박혀 있는 일제강점기 문화를 얼마든지 즐겁게 맛볼 수 있습니다. 신미식 님이 태평양 한복판 ‘프랑스 식민지 자국’을 즐겁게 맛본다고 하는데 토를 달거나 말꼬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하는 분들 마음이 이토록 가난하다면 어떤 사진이 태어날까요. (4343.6.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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