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단오제 - 김수남 사진집
김수남 지음, 황루시 글 / 눈빛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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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에 앞서 사람을 사랑하는 넋으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9] 김수남, 《강릉단오제》



- 책이름 : 강릉단오제
- 사진 : 김수남
- 글 : 황루시
- 펴낸곳 : 눈빛 (2007.9.20.)
- 책값 : 5만 원



 (1) 사람을 사랑하는 사진찍기


 저는 제 사진을 찍습니다. 저는 제가 좋아하는 삶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삶을 스스로 알뜰살뜰 꾸리자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보내는 가운데 사진을 찍습니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아이 사진을 찍고, 집 둘레 멧기슭과 논과 밭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날마다 새 마음으로 일어나 새롭게 놀고 복닥이며 어르고 달래는 아이 삶자락을 차근차근 사진 한 장 두 장으로 그려 봅니다.

 아빠가 늘 사진기를 붙잡으니까 아이는 사진기를 갖고 놉니다. 이제 망가져서 더는 못 쓰는 헌 사진기 하나를 아이가 용케 찾아내어 “어, 사진기네.” 하고 말하며 목걸이처럼 목에 겁니다. 이 망가진 사진기에는 망가지는 바람에 미처 꺼내지 못한 ‘찍다 만 필름’이 들어 있습니다. 필름을 꺼내야 하는데 섣불리 꺼내지 못합니다. 건전지로 가는 사진기인데, 건전지는 살았으나 기계가 멈추어 되감기를 할 수 없습니다. 기계를 통째로 수리집에 들고 가서 꺼내야 합니다. 벌써 한 해 가까이 사진기를 필름과 함께 그대로 두고 맙니다. 아이는 이 ‘아빠가 내버려 둔 사진기’를 끄집어 내어 갖고 놉니다. 아빠가 사진을 찍듯 저도 사진기를 쥐고 “사진 찍어.” 하는 말을 들려주면서 사진을 찍는다며 놉니다.

 엊그제까지는 아빠 사진기로 사진을 찍던 아이입니다. 아빠나 엄마 손전화를 손에 들고 수도 없이 갖가지 사진을 찍은 아이입니다. 손전화 기계하고 셈틀을 잇는 줄이 없어 손전화에 담긴 사진 수백 장을 못 꺼냅니다. 도시로 마실을 나가면 이 줄 하나 장만해야겠습니다. 아이가 그동안 무슨 사진을 어떤 눈길과 눈높이로 찍어 왔는지를 구경하고 싶어요.

 어제, 아빠는 아이를 집에 두고 볼일을 본다며 도시로 마실을 나옵니다. 아이는 아빠가 혼자 나간다며 서운해서 웁니다. “아빠! 자전거!” 하고 외칩니다. 자전거수레에 저를 태워 주고 같이 나가잡니다. “아빠! 자전거 아냐? 이야야? 이야?” 하고 외치며 아빠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아빠 혼자 다녀올게. 돌아올 때에 까까 사 올게. 나중에 이야 같이 가자. 미안해.” 하며 손을 흔듭니다. 다른 때에는 으레 손을 흔들며 “다녀오셔요.” 하는 말을 따라하더니, 어제만큼은 서운하고 풀죽은 얼굴로 바라보기만 합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로 뒤를 쳐다보며 논둑길을 걸어 시골버스역으로 갑니다. 아이가 울멍울멍하는 얼굴로 물끄러미 바라보며 선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며 ‘이렇게 아이한테 미안한 일이 있나’ 하고 생각합니다.

 오랜만에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갑니다. 시외버스를 타기 무섭게 속이 울렁거립니다. 메스껍습니다. 시골집에서만 지내다가 시외버스를 탔기 때문인가 봅니다. 몸이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윽윽 하며 게우고 싶지만 꾹 참습니다. 아이랑 함께 버스를 탔다면 아이는 훨씬 괴로웁겠다고 느낍니다. 아이하고 서울이나 인천 같은 도시로 마실을 나온다며 버스를 타야 할 때에는 무척 힘들겠구나 싶습니다. 기차는 괜찮으려나. 집으로 돌아갈 때에는 기차를 타야겠습니다. 한손으로 머리를 짚습니다. 아이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발걸음을 겨우겨우 한 걸음씩 떼다가 아이 사진을 담았는데, 이렇게 담은 아이 사진에는 아이가 아빠한테 서운해 하며 슬퍼 하는 빛깔을 고스란히 옮겼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아니, 나로서는 아이가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도록 살아가고 싶지 않은데, 아이를 서운해 하거나 슬퍼 하도록 하면서 사진을 남긴 일이 옳은지 궁금합니다. 언제나 아이가 웃는 모습만 사진으로 찍을 수는 없습니다. 아이가 떼를 쓰며 우는 모습도 찍곤 합니다. 아이가 새근새근 잠든 모습도 찍고, 아이가 신나게 춤추고 노래하는 모습도 찍습니다. 밥을 먹는 모습도 찍는데, 밥을 먹다가 안 먹는다며 실눈을 뜨고 살짝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아직 안 찍었습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며 투정을 부릴 때에는 몹시 힘들어 사진기를 쥘 기운이 나지 않아요. “제발, 밥도 한 술 먹어 주라.” 하고 빌기에 바쁩니다. 아이가 제풀에 지쳐 배가 고프기를 기다리면서, 아빠도 배가 고프니 밥술을 허둥지둥 뜹니다.

 아이 엄마가 뜨개질을 할 때에 옆에 앉습니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기에 방바닥에는 늘 이불을 깔아 놓습니다. 책 몇 권을 챙겨 이불에 다리를 넣습니다. 아이도 아빠를 따라 엄마 옆 이불에 발을 넣습니다. 아이 그림책을 챙겨 왔으니 아이 옆에 이 책들을 펼치고, 아빠는 아빠 책을 읽습니다. 아이는 아빠 곁에서 아빠를 따라 책을 넘기며 읽습니다. 그림을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그림책을 넘기다가 언니가 넘어진 모습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면서, “언니, 넘어졌어.” 하고 말하며 손가락으로 짚습니다. “언니, 아야 했어.” 하고 말할 때에 “응, 언니 아야 해. 이제는 일어났네. 괜찮네.” 하고 대꾸합니다. 예전에는 이 그림책을 펼치며 아이한테 구석구석에 나오는 모든 모습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는데, 이제 아이는 떠오르는 대로 하나씩 되새기며 말을 합니다. 차츰 말문이 트이는 듯합니다.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며 말문이 트는 딸아이라. 그렇구나. 이맘때에 우리 아이는 말문을 트는구나.

 책을 읽는 딸아이랑 뜨개질을 하는 엄마랑 함께 나오도록 사진을 한 장 조용히 찍습니다. 아이는 사진 찍히는 줄을 느끼지 못하며 책에 빠져듭니다. 뜨개질하는 아이 엄마 손을 조금 크게 찍습니다. 아이 엄마 손을 찍다가, 몸이 퍽 안 좋은 아이 엄마 다리며 팔이며 허리며 주물러 준 지 퍽 오래되지 않았는가 하고 깨닫습니다. 하기는, 아이 아빠인 저부터 갖은 집일을 다하며 살아가자니 늘 고단하고 지쳐서 내 몸 건사하기에도 빠듯하다 보니, 아이 엄마 몸 돌보기를 자꾸 못하고 맙니다. 이렇게 사진 한 장 더 찍기에 용쓰지 말고, 사진 한 장 찍을 겨를에 아이 엄마 다리를 주물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직 다리 주무르기를 잘 모릅니다. 가끔 따라하긴 하지만 아이로서는 익숙하지 않습니다. 틈틈이 아이한테 쭉쭉이를 시키며 온몸을 주물러 주는데, 아이한테 이렇게 해 주어도 엄마나 아빠를 주무르는 법은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빠가 힘에 부쳐 서너 시쯤 “이제 아빠도 쓰러진다!” 하고 벌렁 드러누우면, 아이도 아빠 곁으로 쪼르르 달려와 “이불!” 하면서 저도 이불을 덮고 눕겠다 하면서, 아빠 옆에서 아빠 얼굴을 살살 쓰다듬습니다. 눈을 감으며 아이 여린 손길이 내 얼굴에 닿는 느낌을 즐깁니다. “응응, 고마워.” 하고 말하며 아이가 낮잠 한 숨 자 주면 아빠도 숨을 살짝 돌리겠다고 얘기를 합니다.

 어느새 포로롱 잠듭니다. 잠에서 깨어나 보면 아이가 곁에서 잠들어 있습니다. 히유 하고 한숨을 쉬며 잘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낮잠에 빠져들면서 꿈으로 ‘내 사진감인 헌책방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헌책방으로 마실을 가서 신나게 책을 고르며 사진을 찍는 일’이라든지 ‘또다른 내 사진감인 인천 골목길을 사진으로 담는다며 인천으로 찾아가서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골집에서 세 식구 올망졸망 살아가는 동안 내 사진감을 옳게 찍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내가 찍을 사진이라면 내가 가장 잘 찍을 수 있는 자리에서 가장 즐겁게 가장 사랑하면서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요즈음 내 삶으로는 헌책방이든 인천 골목길이든 자주 찾아갈 수 없으니, 어쩌다 한 번 찾아갈 수 있다면 눈물 콧물 웃음 실컷 길어올리도록 사진을 찍어야 하고, 여느 때에는 내 여느 삶자리에서 우리 세 식구 삶을 홀가분하게 사랑하며 찍으면 넉넉하지 않겠느냐고.

 먼저 나 스스로를 사랑하고, 나와 살아가는 옆지기를 사랑하며, 엄마 아빠랑 오붓하게 살아가는 딸아이를 사랑하면서 찍을 사진입니다. 이렇게 사진 하나 찍는 매무새를 내 수수한 보금자리에서 즐길 수 있을 때에, 헌책방에 가든 골목길을 가든 다른 어디를 가든 나로서는 내 눈길과 손길로 내 마음길 사뿐히 담아내는 사진 이야기를 일군다고 느낍니다.


 (2) 굿을 사랑하는 사진찍기


 김수남 님 사진책 《강릉단오제》(눈빛,2007)를 읽습니다. 사진을 읽고 사진마다 붙은 글을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사진쟁이 김수남 님이 저승사람이 된 뒤에 나왔기에, 사진마다 붙은 글은 김수남 님이 손수 달지 않았습니다. 1980년대에 김수남 님 사진으로 태어났던 “한국의 굿”에 달려 있던 이야기 결이나 느낌하고 사뭇 다른 글이 붙은 《강릉단오제》입니다. 사진을 읽다가 글을 읽을 때에는 어쩐지 둘이 제대로 어우러지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사진은 빛깔 곱지만, 글은 빛깔 고운 결에 녹아들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한국의 굿”이라는 이름이 붙어 스무 권 나온 사진책에는 책날개마다 사진쟁이 김수남 님 짤막한 덧글이 남아 있습니다. 아직 스무 권을 빠짐없이 챙기지 못했는데, 집에 있는 “한국의 굿” 가운데 두 권을 뽑아 듭니다. 먼저 《수용포 수망굿》(1985)에 적힌 글을 읽습니다.


.. 바닷속에 잠든 넋을 건져 총각귀신 처녀귀신 면하라고 결혼시켜 주는 수망굿. 대반에 의지해서 들어오고 있는 예쁜 인형 신랑 신부의 결혼식이다. 넋을 건지는 동안 슬피 울던 가족들도 결혼식이 시작되면 웃기 시작한다. “새색시 웃지 마라 딸 난다.” “술을 제대로 먹여야지.” 짓궂은 농담과 우스갯소리가 계속된다. 결혼식이 끝나면 인형 신랑 신부끼리 신방을 차려 준다. 물론 창호지를 뚫고 신방을 훔쳐보기도 한다. 조그만 어촌에서 벌어지는 굿판은 구경꾼들로 가득 차서 슬픔과 즐거움이 엇갈린다. 수십 리 안팎에서 모여든 할머니 아주머니 장사꾼들로 해서, 여름 바닷가 모래사장은 장터로 변한다. 가족들은 슬퍼하고 기뻐하고 구경꾼들은 굿을 즐기고 무당들은 박수 받기를 기대하고 ……. 굿을 좋아하는 민족에게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  (1985년/4권 《수용포 수망굿》)


 굿을 좋아하는 겨레한테서 볼 수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곱다시 담아 온 김수남 님입니다. 딱히 사진을 안다 모른다 말할 수 없던 고등학생 때부터 “한국의 굿”을 기쁘게 장만하며 읽어 왔습니다. 스무 권을 통째로 장만하지 않고, 한 권 한 권 다 읽고 나서 다음 책을 장만하면서 읽었습니다. 굿을 구경하지 못했고, 굿을 구경하기조차 어려운 내 삶인데, 고등학교 수험생에서 인천부터 서울까지 오가는 대학생이 되다가, 대학교는 집어치우고 신문배달 일꾼으로 일하면서 “한국의 굿”을 틈틈이 한 권씩 사 모았습니다. 굿판에 갈 겨를이 없는 바쁘고 빠듯한 삶을 되삭이면서 김수남 님 사진책에 실린 사람들 놀음과 웃음과 어우러짐과 눈물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참말, 김수남 님은 다른 사진을 못 찍으시겠구나.’ 하고 느껴 왔습니다. 아니, 다른 사진도 제법 잘 찍으실는지 모르지만, 김수남 님으로서는 이 나라 이 겨레 삶자락을 ‘굿 사진 사랑’으로 풀어냈다고 느낍니다. 굿을 하는 사람들 주름살과 옷고름과 손짓에 이 겨레 삶이 묻어 있습니다. 굿을 치르려는 사람들 쪼그라든 살결 입술과 고랑진 이맛살 아래쪽에 옴폭 패인 눈자위에 이 땅 농사꾼과 고기잡이 삶이 배어 있습니다. 굿을 구경하는 사람들 애틋하거나 안타깝거나 즐겁거나 설레는 몸짓에 이 나라 수수한 사람들 웃음과 눈물이 한 올 두 올 어려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 책을 좋아하는 동무한테 김수남 님 사진책을 보여주며 이야기했습니다. 이 책 하나야말로 우리 겨레 문화를 고스란히 밝힌다고. 대학생이 된 다음 동무나 선배나 후배한테 김수남 님 사진책을 한 권씩 선물로 사 주면서 이야기했습니다. 대학생이라면, 이 나라 대학생이라면, 김수남 님 사진책을 한 권쯤이라도 읽고 헤아리며 알아야 한다고.


.. 신굿은 심방들 자신들의 성무의례로 초신질, 중신질, 상신질을 발룬다(바르게 한다) 하여 일생에 세 번 행하는 큰 굿이다. 초신질 발루는 것은 심방을 하겠다고 신에게 고하는 일종의 내림굿이며, 중신질과 상신질은 중신층, 상신층으로서의 자격과 길을 인정받기 위한 굿이다. 이 책에 실린 사진은 1981년 당시 스물한 살인 입무자 문순실의 초신질 발루는 굿을 찍은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신타파라는 이름으로 굿하는 것이 급격히 소멸하던 시절이었다. 심방들의 이야기로는 몇 십 년 만에 하는 굿이라고 했다. 또한 신굿 과정 중의 몇몇 부분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지금은 달라졌지만 당시에는 사진 찍히기를 거부하던 심방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신굿에는 평소 작은 굿을 할 때는 볼 수 없는 제주의 많은 제차들이 등장한다. 신굿은 보통 열흘 이상 보름 정도 계속되는 큰 굿이다. 워낙 긴 기간 진행되고 많은 굿이 포함되어 있기에 대표적인 제차들을 중심으로 내보낸다. 여든이어멍으로 불리는 문순실의 어머니 역시 동김녕마을 당매인 심방이다. 그녀의 딸에 대한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대를 이어가며 모녀가 지금도 굿판에서 살고 있다. 이 굿이 진행된 문순실의 집은 아름다운 제주의 바다와 접해 있다. 그래서 매일 새벽 다섯 시 경에 진행된 관세우를 보고, 아침식사할 때까지 한 시간 정도 파도치는 바위 위에 앉아 전국의 굿과 무당들에 대해 십 여 일 동안 황루시 씨와 토론했던 기억이 새롭다 ..  (1989년/12권 《제주도 신굿》)


 김수남 님이 아니었어도 굿 사진을 찍은 사람이 꽤 있습니다. 김수남 님이 굿 사진을 찍던 무렵에도 적잖은 이들이 굿 사진을 찍었습니다.

 다른 사람들 굿 사진하고 김수남 님 굿 사진을 나란히 놓고 살피면, 다른 사람들 굿 사진은 영 못마땅합니다. 뭐하러 애먼 필름을 쓰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로 돈이 되기에 찍는 굿 사진이 아니고, 굳이 ‘한국 문화를 적바림한다’는 거룩한 뜻에서 찍는 굿 사진이 아닙니다. 굿이건 뭐건, 굿이건 춤이건, 굿이건 헌책방이건, 굿이건 풍물패이건, 굿이건 대통령 행차이건, 굿이건 4대강 사업이건, 굿이건 재가발이건, 굿이건 연예인 알몸 모델이건, 다 사진은 사진입니다. 저마다 스스로 좋아할 때에 찍는 사진입니다. 누구나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삶터와 삶자락을 찍을 사진입니다. 김수남 님은 스스로 굿이 되었고, 스스로 굿하고 살짝 떨어진 자리로 나와서 굿판에 고요히 녹아드는 흐드러진 몸사위로 사진찍기를 하지 않았나 하고 느낍니다. 고요히 녹아드는 흐드러진 몸사위일 때에 이렇게 애틋하다 느낄 사진 한 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강릉단오제》를 읽으며 이 사진책에 붙인 글이 더없이 거추장스럽다고 느낍니다. 글을 붙일 자리에 사진을 더 넣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이제는 김수남 님 사진에 섣부르거나 어설프거나 서툰 글을 보탬말로 달지 않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강릉단오제》 뒤쪽에는 빛깔 넣은 사진이 꽤 실리는데, 사진마다 ‘언제 어디에서 무슨 장면을 담았다’는 말만 아주 짤막히 붙이기만 하면서, 굿 사진을 한 장이라도 더 보여줄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나풀나풀 옷자락이 춤추는 결에 생긋 웃는 굿쟁이 얼굴이 아름다이 담긴 빛깔 사진 한 장을 보면서, 아, 이 사진이야말로 《강릉단오제》 겉장으로 보여줄 사진이 아닌가 하고 깨닫습니다. 《강릉단오제》 겉에 실린 흑백 사진도 나쁘지 않으며, 이 모습 또한 썩 훌륭하다 할 만하지만, 김수남 님이 굿판에서 여러 날 함께 지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나비처럼 나풀나풀 춤추는 굿쟁이 웃는 얼굴’마냥 신나게 웃으면서 온 사랑을 바쳤을 테니까요.

 사랑하면서 찍은 굿 사진이거든요. 사랑을 쏟아 일군 굿 사진이거든요. 사랑을 소담스레 펼쳐 보이며 굿판에서 또다른 굿판을 선사하던 사진찍기이거든요. 굿판에서 굿을 벌인 굿쟁이이든, 굿을 치르려던 분들이든, 굿을 구경하던 사람들이든, 사진기 두 대로 새삼스럽고 남다른 살풀이굿을 선보이는 김수남 님을 서로서로 웃거나 울며 나란히 바라보았겠구나 싶거든요. (4343.10.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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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 : 에드워드 슈타이켄
최봉림 지음 / 디자인하우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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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과 사람과 삶을 제대로 읽어야 한다
 [찾아 읽는 사진책 1] 최봉림,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디자인하우스,2000)


 사진길을 걸었던 에드워드 슈타이켄(에드워드 스타이겐) 님 이야기를 ‘마치 에드워드 슈타이켄과 마주앉아 이야기를 주고받기라도 하는 듯 꾸며’서 엮은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를 읽습니다. 나라안 출판사에서 에드워드 슈타이켄 님 책을 펴낸 적은 딱 한 번입니다. 다만, 이 책은 해적판으로 《인간가족》을 몰래 펴낸 판으로, 그나마 1986년에 월간사진사에서 한 번 나오고 다시 나오지 못합니다. 해적판이면서도 제대로 낼 만하지만, 해적판이면서 제대로 내지 못한 책이기에, ‘인간가족’이라는 사진잔치를 마련하여 도록을 엮은 슈타이켄 님 삶이나 넋을 고이 싣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한글로 된 자료라든지 책으로는 슈타이켄 님이 어떤 사진길을 걸으며 어떠한 사진밭을 일구었는가 헤아리기 몹시 어려워요.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라는 책은 2000년에 나옵니다. 슈타이켄 님 작품이라든지 슈타이켄 님이 마련한 사진잔치 모습이라든지 슈타이켄 님이 사진길을 걸을 무렵 둘레에서 이룬 남다른 사진 작품 들이 이 조그마한 책(128쪽)에 찬찬히 실립니다. 도판은 퍽 깔끔합니다. 그러나 슈타이켄 님이 이루었거나 일구었다 할 만한 작품세계를 차분하게 살필 만하지는 않습니다. 그저 살짝 엿볼 만큼입니다.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고, 오직 생각날개로) 책을 쓴 최봉림 님은 “회화주의의 역사적 소임은 사진적 재현이 기계적 복제술이 아니라, 회화처럼 인간의 지성과 감수성이 만들어 내는 창작물이라는 것을 예술계와 사회에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45쪽).”라든지 “선생님의 전시회는 인류의 희망과 화해를 기원하고 손짓했지만, 실제로 ‘인간 가족’이라는 이상적 개념은 오히려 미국의 세계 패권주의를 호도하고 가리는 문화 정책의 일환으로 사용될 수도 있었습니다(97쪽).”라든지 하면서, 말이 좀 많습니다.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틀이라 한다면 이처럼 말이 좀 많을 수도 있다 할 만하지만, 이 작은 책은 최봉림 님 이야기를 들으려고 사서 읽을 책이 아닙니다. 최봉림 님이 이토록 온갖 말을 당신 입으로 더 드러내어 밝히고자 했다면 ‘마주이야기 틀’이 아닌 ‘비평 틀’로 책을 엮어야 옳다고 느낍니다.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를 읽는 내내 ‘슈타이켄 님 목소리’로 나오는 이야기가 참말 슈타이켄 님이 했던 말인지, 또는 당신이 손수 쓴 글에 적힌 이야기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따로 붙임말을 달아 어느 자료 몇째 줄에 실린 글에서 따서 적었다고 밝히지 않으니까요. 최봉림 님이 생각해 내어 적은 ‘슈타이켄이라면 이렇게 말했겠지?’ 하는 말인지, 최봉림 님이 ‘슈타이켄 증언 자료를 이리저리 깁고 새로 엮으면서 묻는 말을 새로 만들었’는지 또한 알 수 없습니다. 그저 곧이곧대로 믿으며 읽어야 할 뿐입니다.

 슈타이켄 님 목소리로 “점, 선, 면과 흑과 백의 계조도가 만들어 내는 항공사진의 추상적 형태미는 오직 사진이라는 매체만이 실현할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습니다(55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라든지 “아름다움이 미술관과 살롱의 전유물로 갇혀 있기보다는 일상의 삶 속에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예술 운동의 한 결실인 셈이었죠(79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와 아울러 자잘하게 묻고 대꾸하는 안부인사가 꽤 깁니다. 아마, 이런 안부인사란 ‘마주이야기 틀’로 엮은 책임을 또렷이 드러내면서 감칠맛나는 짜임새를 보여주는 구실을 한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책은 200쪽이나 300쪽짜리 책이 아닙니다. 사진 자료까지 곁들여 128쪽으로 자그맣게 엮은 책입니다. 더 깊이 파고들면서 한결 속내를 캐내는 이야기를 뽑아 올려야 하는데, 그만 허울을 좋게 꾸미려 하면서 알맹이를 다루는 자리가 아주 줄어들고 맙니다. 이러면서 슈타이켄 목소리보다 최봉림 목소리가 더 높습니다.

 이를테면, 슈타이켄이 바라보는 사진과 사진길과 사진쟁이와 사진누리 들을 날카롭게 잡아채었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슈타이켄은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이렇게 말했다’ 하는 마주이야기가 드러나지 않아 몹시 아쉽습니다. ‘슈타이켄은 사진쟁이란 어떤 사람이라고 이와 같이 말했다’ 하는 마주이야기 또한 나타나지 않아 매우 안타깝습니다. 더구나, “스티글리츠의 ‘사진 분리파’가 성취하려 했던 것은 ‘사진 작가’에 의한 ‘예술 사진’, ‘예술 사진’을 위한 ‘사진 작가’, 사진작가로서의 예술, 예술로서의 사진이었습니다(31쪽).” 하는 이야기처럼, 슈타이켄 이야기보다 스티글리츠 이야기가 지나치게 많이 차지합니다. 이런 마주이야기라면 아흔네 살까지 잘 살았다는 안부인사가 아니라, 슈타이켄 어린 나날 이야기를 여쭙고, 어린 나날 어떠한 터전에서 무엇을 누리거나 어깨동무하면서 마음을 살찌웠는가 귀기울여 들으며, 사진과 삶과 문화와 사람을 슈타이켄 님 나름대로 어떻게 배우며 받아들였는가를 아로새겨 주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마주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최봉림 님은 굳이 슈타이켄 님 입을 빌어 “만족했지요. 돈, 명예, 그리고 권력은 언제나 내 편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은 사진가’는 아니었어요.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사진가라고 말하는 것이 옳았을 겁니다(103쪽).” 하는 말을 끄집어 냅니다. 그런데 이런 말을 끄집어 내면서도 책을 통틀어 ‘왜 슈타이켄이 온누리에서 널리 우러르는 사진쟁이’인가 하는 이야기를 한 번도 끄집어 내지 못했습니다. 128쪽짜리 책에서 103쪽까지 이루어진 마주이야기 내내 ‘슈타이켄이 이룬 열매’와 ‘슈타이켄 발자취와 이 발자취 비평’을 이야기하는 데에 쏠립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마주이야기를 이토록 따분하게 엮으면서 온갖 지식과 정보만을 담으려 한다면, 차라리 마주이야기가 아닌 ‘슈타이켄 사진론 비평’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식으로 사진비평책을 낼 노릇이라고. 평전을 쓰든 비평책을 내든 ‘주관이 아닌 객관’이라는 자리에 튼튼히 서면서 더욱 낱낱이 따지거나 파헤치는 비평책을 써야 한다고. 슈타이켄 님이 일군 사진을 1부에 넣고 슈타이켄 님이 빚은 사진잔치를 2부에 넣으며 슈타이켄 님이 가르친 사진쟁이 이야기를 3부에 넣은 다음 슈타이켄 님과 스티글리츠 님이 맺은 사진삶을 4부에 넣으면서 5부에 이르러 ‘슈타이켄 종합 비평’을 하는 정식 이론책을 내놓아야 비로소 읽을 만한 사진책 하나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라는 책은 이도 저도 아닙니다. 국도 밥도 죽도 아닙니다. 게다가 책이름에 적바림한 “성공신화의 셔터”라는 이야기조차 풀어내지 못합니다. 왜, 얼마나, 무엇을, 어떻게 ‘성공하여 신화를 이루었는지’ 밝히지 못합니다. (4343.10.26.불.ㅎㄲㅅㄱ)


- 에드워드 슈타이켄, 성공신화의 셔터를 누르다 (최봉림 글,디자인하우스,2000.6.15./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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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이 Fighting Bull, Hanmyung
윤현수 사진 / 눈빛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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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찍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8] 윤현수, 《한명이》



- 책이름 : 한명이
- 사진 : 윤현수
- 펴낸곳 : 눈빛 (2008.9.23.)
- 책값 : 35000원



 (1) 내 삶자리를 사랑하면서 사진 한 장


 사진쟁이는 사진을 찍고 그림쟁이는 그림을 그리며 글쟁이는 글을 씁니다. 연극쟁이는 연극을 하고 춤쟁이는 춤을 추며 노래쟁이는 노래를 합니다. 노래에는 여러 갈래가 있고 춤에도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글에도 여러 갈래가 있는 한편 그림에도 숱한 갈래가 있어요. 사진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찍기에도 갖가지 갈래가 있어요.

 가지가지 다른 길을 걸으면서 하는 사진이며 그림이며 글이며 연극이며 춤이며 노래입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길을 걸으면서 할 수는 없는 사진이며 그림이며 글이며 연극이며 춤이며 노래입니다. 노래를 하는 이 가운데에는 레코드판이나 시디를 긁어서 소리를 새로 만드는 사람이 있을 테고, 전자장비를 만져 ‘지구에는 없는 소리’를 남달리 빚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 가운데에도 사진기와 필름과 메모리카드로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필름만으로 사진을 하는 사람이 있고 갖가지 장치를 하거나 전자장비를 써서 사진을 만드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문화를 즐기거나 무슨 예술을 뽐내건 언제나 사진이고 그림이며 글입니다. 연극이며 춤이고 노래입니다. 이들 문화는 늘 내 삶자리에 바탕을 둡니다. 이러한 예술은 한결같이 내 삶자락에 뿌리를 둡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일구는 문화인 사진입니다. 내가 살아가고픈 대로 가꾸는 예술인 글입니다. 내 삶이 아닌 네 삶이 훨씬 좋아 보여 네 삶을 좇으며 따라하는 문화나 예술은 될 수 없습니다. 스승을 좇는다든지 동무를 따른다든지 할 수 없어요. 노상 내 모습을 고스란히 담습니다.

 느긋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하는 모든 일에 느긋함이 뱁니다. 능금을 팔든 배추를 팔든 물고기를 팔든 이이가 장사하는 가게에는 느긋함이 어려 있어요. 더 많은 돈을 뽑아내고파 하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하는 모든 일에 돈내음이 뱁니다. 회사를 꾸리든 회사원으로 있든 이이 옷자락과 발걸음에는 돈내음이 물씬 납니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하는 모든 말에 착한 기운이 서립니다. 기나길게 말을 하든 짤막히 말을 하든, 편지를 쓰든 보고서를 쓰든 착한 기운이 가득 서립니다. 자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이이가 펼치는 모든 문학에 자랑하는 어깨춤이 깃듭니다. 사진을 찍든 노래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똑같습니다.

 아이 하나를 함께 낳아 함께 기르면서 하루 내내 아이를 들여다봅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보여주는 모습은 어버이가 살아가는 모습 그대로입니다. 아이가 내뱉는 말은 어버이가 아이 앞에서 내뱉는 말 그대로입니다. 아이가 먹는 밥은 어버이가 먹는 밥 그대로예요. 어느 하나 아이 스스로 새로 만들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지 않은 모습이 없습니다. 아이한테서 사랑스러움을 느낀다면 어버이로서 사랑스럽게 살아가기 때문이고, 아이한테서 밉살스러움을 느낀다면 어버이부터 밉살스레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아이랑 스물일곱 달째 살아가며 사진을 찍을 때마다 생각합니다. 이 아이 오늘 모습에 사랑스러움이 드러나는지 고단함이 드러나는지 착하며 고운 빛이 드러나는지 지루하며 골 부리는 몸가짐이 드러나는지 가만히 살핍니다. 겉보기로는 아빠가 아이를 찍은 사진이지만, 속보기를 한다면 아빠 된 어버이가 아이랑 복닥이는 하루 삶이 고스란히 묻어난 이야기입니다.

 수많은 사진쟁이 작품을 언제 어디에서나 구경하거나 돌아볼 수 있는 오늘날입니다. 바야흐로 사진이 넘치는 이 나라 사진삶을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예나 이제나 사진책은 잘 안 팔린다 하고, 예나 이제나 사진책 펴내는 출판사는 작품책 하나 선뜻 내놓지 못한다 하며, 예나 이제나 사진길을 고지식하게 파고드는 사람은 배를 곯는다 합니다. 그런데 잘 안 팔린다는 사진책이 나날이 더 많이 나오고, 펴내기 힘들다는 사진책 또한 꾸준히 많이 나오며, 사진 한길을 걷는 사람은 더 늘어납니다.

 고작 열 해쯤 앞서인 2000년을 생각하면, 또 1990년을 돌아보면, 사진책 하나 번듯이 내놓은 한국 사진쟁이는 얼마 안 됩니다. 나라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진잔치 숫자는 썩 많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5년을 곱씹고, 2010년을 살피며, 다가올 2015년을 내다본다면, 사진책 하나 멋들어지게 내놓는 사람 숫자는 부쩍 는다 할 만하고, 사진잔치 숫자는 어마어마하다 할 만합니다. 갖가지 갈래 온갖 사진을 아주 많은 사진쟁이들이 다 다른 눈썰미와 손짓으로 이루어 냅니다.

 지난날에는 오로지 필름사진이었고, 이제는 필름사진과 디지털사진 두 가지입니다. 여기에 디지털사진이 아닌 만듦사진이 한 자리를 차지하기도 합니다. 틀은 ‘사진’을 빌지만 ‘예술’을 하는 이들이 퍽 늘었어요. 이름부터 ‘사진찍기’가 아닌 ‘사진빚기’를 하는 분들이 꽤 늘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한 예술을 뽐낸다고 하는 이들만 사진빚기를 하지 않습니다. 멈추어 있는 물건을 그리는 그림이 있고, 모델을 세워 놓고 그리는 그림이 있듯, 정물만을 찍거나 모델만을 찍는 사진빚기가 있습니다. 이러한 사진은 이름은 사진찍기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진빚기입니다. 정물과 모델을 빌어 당신 생각과 목소리를 담는 예술로 거듭나는 사진빚기입니다.

 말 그대로 사진찍기를 하는 사진쟁이는 무척 줄었습니다. 앞으로도 말 그대로 사진찍기로 사진을 즐기는 사진쟁이는 더 줄어들리라 봅니다. 사진기 하나를 믿거나 기대어 나하고 마주하는 사람과 만나면서 삶을 일구는 사진쟁이는 그예 줄어들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나랑 마주보는 목숨과 물건과 터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찍기로 거듭나는 사진쟁이는 자꾸 사라지리라 봅니다. 내 삶자리를 사랑하여 사진을 좋아하는 사진쟁이를 만나기 힘들어지며, 내 삶자리는 아랑곳하지 않는 가운데 사진빚기를 하는 사진쟁이만 수두룩하게 늘어난다 싶어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진은 사진이라 하겠지요. 이렇게 일해서 벌거나 저렇게 일해서 벌거나 돈은 돈이라 하니까요. 이마트 값싼 물건을 장만하여 아이를 먹이든, 동네 구멍가게나 저잣거리에서 물건을 사들여 아이를 먹이든, 생협에서 올바른 먹을거리를 마련하여 아이를 먹이든, 손수 땅을 일구어 아이를 먹이든, 어찌 되든 똑같이 밥이니까요.

 내 어머니를 사진으로 찍어도 내 어머니하고 깊디깊이 오래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한 장 두 장 고맙게 ‘얻는’ 사진을 어머니랑 웃음과 울음으로 ‘사랑하는’ 가운데 그러모아 선보이는 사진 작품은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내 어여쁘거나 잘생긴 짝꿍을 사진으로 담아도 내 짝꿍이랑 서로서로 어떤 길을 걸어오며 어떤 꿈과 보람으로 어떤 삶을 일구었는가를 톺아보는 가운데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사랑을 길어올리는 사진 작품은 도무지 찾아보지 못합니다. 골목길을 찍든, 여자 고등학생을 담든, 대나무숲을 옮기든, 몸매 좋은 연예인을 그리든, 나라밖 인도나 티벳이나 몽골에서 티없는 웃음을 빼앗든, 너무 섣불리 지나치게 빨리 참으로 우악스럽게 ‘만드는’ 사진이 아주 많이 넘실거리는 한국 사진밭이라고 느낍니다.

 왜 우리는 이 나라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과 삶터와 이야기를 올망졸망 아기자기 알뜰살뜰 오순도순 ‘찍지’ 못하는가요. 우리는 내 곁에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님을 사진 한 장으로 ‘담을’ 수 없는지요. 구경하는 사진이나 뽐내는 사진이나 만드는 사진이 아니라,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진을 얻을 수 없을까요. 함께 살아가는 숨결을 보듬는 사진을 이룰 수 없나요.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넘어지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하며 땀투성이가 된 채 싱긋빙긋 웃고 떠드는 사진을 즐길 수 없나 궁금합니다.

 사진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문학(글)도 삶이요, 노래도 삶이고, 춤도 삶입니다. 그림과 만화도 삶입니다. 연극과 영화도 삶입니다. 모두모두 내 삶을 살포시 어루만지어 나타내는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사진은 사랑하는 내 삶입니다. 사진은 사랑하는 내 삶과 함께 있는 고운 벗님과 살붙이랑 어울리는 신나는 삶입니다.

 내가 내 아이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내 아이 얼굴이든 몸이든 모습이든 사진 하나로 찍지 못합니다. 내가 내 터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골목길이든 도심지이든 고샅길이든 바닷가이든 사진 하나로 담지 못합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내 삶을 옮기는 일이지만, 그냥저냥 흐르는 내 삶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둘도 셋도 넷도 없이 아끼며 사랑하는 내 삶을 눈물콧물땀방울 뒤섞어 힘차게 옮기는 일입니다. 좋아하는 일이에요. 사랑하는 일이랍니다.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지요. 아무렇게나 할 수 없는 일이고요. 내 삶이고 내 사랑이며 내 사람이거든요.


 (2) 소 아닌 싸움을 찍은 ‘한명이’ 이야기


 사진책 《한명이》를 읽습니다. 《한명이》는 사진책인 만큼 사진은 ‘본다’고 해야 맞으나, 사진책 《한명이》를 읽습니다. 소 이야기나 소 삶을 다룬 사진이 아닌 소를 빌어 사람살이 싸움과 싸움판을 넌지시 보여주는 사진책 《한명이》를 읽습니다.

 사진책 《한명이》는 싸움소 가운데 ‘한명이’라는 이름이 붙은 소가 싸움판에서 어떻게 싸우는가, 싸움판 바깥에서는 어떻게 지내는가를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사진쟁이 윤현수 님은 싸움소 한명이를 빌어 당신이 하루하루 살아낸 발자국을 보여줍니다. 윤현수 님 사진감은 싸움소요, 싸움소 가운데 한명이입니다만, 정작 이 사진책 《한명이》에서는 싸움소 한삶이나 한명이 하루를 담지 않습니다. 오직 윤현수 님이 어떤 마음과 눈길과 몸짓으로 살아가는가를 당신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 무릇 산 것들 중 싸우지 않는 것이 있을까. 소가 우리 나라에 전래된 것은 약 2천 년 전 정도로 추정된다. 아마 그때부터 소싸움은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싸움의 이유도 다양하였을 것이지만, 사람의 싸움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지금의 소싸움은 일종의 놀이다. 야생의 자연스런 소들의 싸움이 아니라 사람들이 정한 규칙과 약속에 의한 싸움놀이이다. 현재와 같은 민속놀이 소싸움은 아마 명절인 추석 때 풍년과 화평을 기리는 뜻으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진주 소싸움의 기원은 백제와 싸워 이긴 신라가 시작했다는 전승기념 잔치 설을 비롯하여 고려 말부터 자생했다는 고유의 민속놀이 설 등 다양하다 ..  (172쪽)


 사진쟁이 윤현수 님이자 씨이오라 할 만한 윤현수 님한테 사진은 ‘싸움’입니다. 아니 윤현수 님이 사진기를 들기 앞서 윤현수 님 삶은 ‘싸움’입니다. 윤현수 님이 아끼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싸움’으로 날을 지새웁니다.

 싸움을 사진으로 담는 일이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어떠한 이야기이든 사진으로 알뜰히 담으면 넉넉합니다. 이런 이야기이든 저런 이야기이든 사진으로 담는 손길과 그릇이 아름답거나 사랑스러우면 즐겁습니다. 예쁜 꽃을 찍어야 예쁜 사진이 되지 않으니까요. 아픈 사람들을 찍는다고 아픈 사진이 되지 않으니까요.

 그나저나 윤현수 님 사진에 담기는 소들, 싸움소들은 어떤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윤현수 님은 ‘우리 나라에 소가 처음 들어온 2천 년 앞서부터 소싸움이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이 나라에 소싸움이 벌어지기로는 ‘신라 때나 고려 때 즈음’이라고 (윤현수 님 스스로) 말합니다. 고려 때라면 육칠백 해쯤 앞서일 테고, 신라 때라면 즈믄 해쯤 앞서가 될까요. 그런데 참말 소싸움이 그무렵부터 있었는지 없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으려나요. 소싸움이 있었다 하더라도 ‘돈과 힘이 있는 사람’이 즐길 뿐, 여느 농사꾼은 즐기지 않았다면 이를 어떠한 ‘문화’나 ‘삶’으로 보아야 할는지요. 지난날 농사짓던 사람 가운데 소를 부릴 만한 살림을 꾸린 이는 얼마나 되었을는지요.


.. 그래 끝장을 보아야 한다. 두 마리의 싸움소가 내뿜는 모래먼지 속에서 승패를 향한 그치지 않는 뿔 치는 소리는 〈비창〉 3악장의 팀파니 소리에 섞여 나의 이를 시리게 한다 ..  (177쪽)


 윤현수 님은 더 잘 찍은 사진이 아니고, 더 못 찍은 사진이 아닌, 꼭 윤현수 님이 좋아하는 삶결 그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윤현수 님 소싸움 사진에서 피가 튄다면 윤현수 님 삶에서 피가 튀기 때문입니다. 윤현수 님 소싸움 사진에서 짜릿함을 느낀다면 윤현수 님 삶에서 짜릿함이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윤현수 님 소싸움 사진에서 아픔과 괴로움과 고단함이 엿보인다면 윤현수 님 삶에 아픔과 괴로움과 고단함이 늘 어려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한명이》를 읽고 거듭 읽고 다시 읽으면서 제 마음이 썩 따스하지 못합니다. 윤현수 님으로서는 한명이라는 싸움소 하나를 주인공으로 삼아 사진을 찍어 책으로 여밀 때에 사람들하고 따스함을 나눌 마음이 아니었구나 싶거든요. 윤현수 님은 당신 삶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데에 알뜰합니다. 들여다보자면 소요 싸움소요 한명이입니다. 이름표는 틀림없이 ‘한·명·이’입니다. 그렇지만 알맹이는 ‘윤·현·수’예요. 윤현수 님은 사진이라는 매체 빛깔을 잘 헤아리면서 당신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합니다. 당신이 곧바로 쏟아낼 이야기보다는 사진이라는 옷을 입힌 문화나 예술로 당신 발자국과 걸음걸이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있는 그대로 사람들 앞에 서기보다 한 꺼풀 옷을 입은 채 모습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수많은 싸움소들, 그들은 각자 나름의 이름을 가지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장을 누빈다. 그러다 싸움소로의 수명이 다하는 그날, 싸움소는 일반 비육우보다 훨씬 싼값에 넘겨진다. 억대에 달하는 이름값은 첫새벽 이슬처럼 사라지고, 다만 육질이 질긴 소로서 생을 마감한다 … 나도 그저 한 마리 소가 된다. 한명이가 된다. 덕성농장의 한 마리 싸움소가 된다. 내 피멍든 삶의 상처 속에 강씨 부자의 오줌찜질이 놓인다. 그들의 눈길과 손길이 청·홍·황빛의 묵은 광목이 지친 내 이름을 감싼다. 그곳에서 나는 아버지를 본다. 당뇨, 빨치기, 폐병. 세상의 병고 속을 우리 안의 한 마리 곰처엄 의연히 싸우다 가신 아버지가 보인다 ..  (180∼181쪽)


 “무릇 산 것들 중 싸우지 않는 것이 있을까?” 하고 묻는 윤현수 님입니다. 그래요, 아마 아직은 잘 안 보이실 테지요. 그러나 앞으로는 부디 보거나 느끼거나 알아채 주시면 좋겠어요. 산 목숨 가운데 안 싸우며 사랑하는 예쁜 님이 무척 많답니다. 싸움이라는 낱말을 아예 모르는 사람 또한 몹시 많아요.

 팔리 모왓 님이 쓴 《잊혀진 미래》라는 책을 한번 읽어 보셔요. 이시무레 미치코 님이 쓴 《슬픈 미나마타》라는 책을 가만히 읽어 보소서. 그지없이 착하며 고운 사람들 삶자락이 알뜰히 서려 있답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님이 쓴 ‘말괄량이 삐삐’ 이야기이든 ‘떠돌이 라스무스’ 이야기이든 곰곰이 새겨 보셔요. 얼마나 따스하며 넉넉한 가슴으로 내 이웃을 보듬는 사람이 많은가를 놀랍게 깨달을 수 있답니다.

 그래서 저는 “무릇 살아가면서 사랑하지 않는 목숨이 있을까?” 하는 말마디를 들려주고 싶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며 살아가요. 우리는 사랑하며 어깨동무해요. 우리는 사랑하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쓰며 그림을 그려요. 언제 어디에서나 사랑이 가득합니다. 사랑으로 아침밥을 차리고, 사랑으로 살붙이 빨래를 하며, 사랑으로 집식구 잠자리를 깔아 함께 잠을 잡니다. 사랑하는 동무들이랑 일을 하여 살림돈을 마련하고, 사랑하는 이웃들이랑 마을이나 동네를 이루며, 사랑스러운 뭇목숨 어우러진 숲과 들과 바다를 소담스레 돌보면서 이 땅 이 나라에 두 다리로 우뚝 섭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진 또한 있고, 사랑이 없을 때에 사진 또한 없습니다. (4343.10.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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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이다 - 김홍희의 사진 노트
김홍희 글.사진 / 다빈치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별을 둘이나 셋쯤 줄 수도 있으나, 김홍희 님이 당신 사진길과 사진삶을 좀더 고개숙이며 가다듬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별은 딱 하나만 달아 놓는다. 스스로를 옳게 들여다보아야 사진이든 만화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아름답게 펼친다.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면, 사진은 사랑이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6] 김홍희, 《나는 사진이다》


- 책이름 : 나는 사진이다
- 글·사진 : 김홍희
- 펴낸곳 : 다빈치 (2005.1.20.)
- 책값 : 15000원



 (1) ‘만듦사진’은 사진이 아니다


 책방에 들러 사진책이나 그림책을 둘러보면, 으레 나라밖 사진책이나 그림책을 손에 쥡니다. 다 둘러보고 값을 치러 장만하고 싶은 책을 추릴 때, 노상 나라밖 사진책이나 그림책을 잔뜩 쌓아 놓고 있습니다. 나라밖 책을 살피고 장만할 때에는, 사진책으로서 얼마나 아름답고 그림책으로서 얼마나 고운가를 헤아립니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은 나라밖 사진책은 장만하지 않습니다. 썩 곱지 않은 나라밖 그림책은 사들이지 않습니다.

 나라안 사진책이나 그림책에는 선뜻 손이 가지 않습니다. 눈길부터 잘 안 갑니다. 두 눈을 사로잡거나 내 가슴을 울렁이도록 이끄는 나라안 사진책이나 그림책이 퍽 드뭅니다.

 나라안 글책을 살필 때에는 속이 답답합니다. 틀림없이 한국사람이 한국 이웃한테 읽히려고 한국글로 써서 한글로 적힌 한국 글책이지만, 이 글책을 놓고 참말 한국 글책이라 해야 할는지 알쏭달쏭합니다. 낱말이고 말투이고 우리 낱말이거나 우리 말투인 책이 아주 드뭅니다. 띄어쓰기하고 맞춤법을 제대로 맞추었는가는 일찌감치 접어둡니다. 바른 말 고운 말이라는 테두리로 살펴볼 수조차 없습니다. 흔한 말로 ‘알아들을 수는 있는 글(의사소통은 되는 글)’이지만, 한국사람이 한국사람다이 한국넋으로 한국글로 풀어내 보이는 문학이라고는 느끼기 어려운 책이 넘칩니다.

 오늘 이 나라 학교에서는 우리 말글을 옳고 바르며 알맞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오늘 이 나라 학생은 우리 말글을 옳고 바르며 알맞게 배우고자 마음먹지 않습니다. 제도권 학교는 입시만을 바라보고, 제도권 교사는 입시만을 집어넣습니다. 제도권 학생은 입시만을 생각합니다. 교과서만 탓할 수 없고, 제도권만 탓할 수 없으며, 월급쟁이 쇠밥그릇 교사만 나무랄 수 없을 뿐더러, 제도권 울타리에서 허덕이는 학생을 꾸짖을 수 없습니다. 참말 아무도 탓할 수 없고, 누구도 꾸짖을 수 없는 한국 삶터입니다.

 창작책이 아닌 번역책을 본다고 해서 썩 나을 구석이 없습니다. 그나마 번역하는 사람은 창작하는 사람처럼 ‘시적 허용’이라는 터무니없는 말재주를 덜 피웁니다. 우리 나라 책마을에서는 번역쟁이가 우리 말로 옮긴 글을 출판사 편집 일꾼이 거듭거듭 손질하고 매만집니다.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글을 고르고 짜맞춥니다. 더구나, 어린이책 번역은 훨씬 엉터리입니다. 번역쟁이로 이름이 높든 낮든, 어린이문학은 어른문학하고 견주어 급수가 낮다고 여겨 버릇하거든요. 어린이문학을 하찮게 여기면서 어린이문학 번역을 참으로 하찮게 해치우고 맙니다. 어린이 눈높이라든지 어린이 삶이라든지 어린이 넋을 제대로 어루만지는 어린이문학 번역이란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 만큼 드뭅니다.

 나라안 글책과 그림책과 사진책을 들여다볼 때마다 절로 한숨이 나옵니다. 노벨상을 바랄 까닭은 없고, 구태여 한국문학 가운데 세계명작이 나와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우리 문학과 문화와 예술이란 어떠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주기 앞서 우리 어른들이 신나게 즐기고 기쁘게 어깨동무할 문학과 문화와 예술이란 어떻게 일구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왜 우리는 우리 문학과 문화와 예술을 사랑스러우며 따스하게 일구지 못하는가요. 어이하여 우리는 우리 문학과 문화와 예술을 믿음직하며 넉넉하게 돌보지 않는가요.

 ‘판타지’는 문학을 이루는 수많은 갈래 가운데 아주 작은 한 가지입니다. ‘판타지 = 문학’일 수 없습니다. 판타지여야 잘 빚은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그림이어야 새로운 예술이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없던 남다른 모습을 만들어 내어 사진이라는 틀로 담아야 문화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또렷이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조각은 그림이 아닙니다. 조각은 조각입니다. 판화는 그림이 아닙니다. 판화는 판화입니다. 건축은 그림이 아닙니다. 건축은 건축입니다. 그림과 조각과 판화와 건축은 한자말로 하자면 ‘미술’이라는 테두리로 함께 묶을 수 있을 뿐입니다.

 ‘만듦사진’은 사진이 아닙니다. ‘만듦사진’은 다른 낱말을 새롭게 지어서 다른 문화매체이거나 예술매체임을 당차게 외쳐야 합니다. 사진이 아닌 만듦사진을 섣불러 얼토당토않게 내세우면서 ‘만듦사진 또한 사진이다’ 하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어쩌면 ‘만듦사진’은 ‘미술’이라는 테두리에 넣어야 알맞을 수 있습니다. 사진기라는 장비를 썼든 사진매체를 빌었든, 나타내고자 하는 뜻과 길이 사진이 아닌데 함부로 ‘만듦사진도 사진이다’ 하고 말해서는 올바르지 않아요. 똑같이 붓이나 연필을 써서 종이에 그린다고 해서 모두 그림이 되지 않습니다. 건축설계를 놓고 ‘그림’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닮’거나 ‘그림보다 더 그림다운’ 건축설계가 태어날 수 있습니다만, 이 모두는 건축이지 그림이 아닙니다. ‘만듦사진’ 가운데에는 ‘사진을 닮’거나 ‘사진보다 더 사진다운’ 만듦사진이 태어날 수 있을 텐데, 이 모두는 새 이름을 붙일 만듦사진이지 사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만듦사진을 깎아내리려고 만듦사진은 사진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만듦사진은 새로운 문화예술 갈래인데 억지로 사진이라는 갈래에 쑤셔넣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새로운 문화예술 갈래이면 새로운 이름을 붙이며 새롭게 문화예술을 즐겨야 할 노릇입니다. 괜스레 ‘사진’ 갈래에 짜맞추려 하면서 사진밭을 헝클어뜨리거나 쑤석거려서는 안 됩니다. 괜한 쑤석거림질이란 만듦사진을 하는 분들 스스로 당신 문화예술밭을 제대로 갈고닦지 못하는 뻘 짓이 되고야 맙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들 또한 사진 아닌 만듦사진에 ‘사진 아닌 매체인데 사진으로 잘못 알고 다가서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든지 그림을 즐길 수 있듯, 사진을 좋아하면서 ‘만듦사진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림을 그리고 판화를 하며 조각을 하는 가운데 건축을 한다고 해서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진을 찍고 만듦사진을 한다고 해서 나무랄 사람이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길을 똑똑히 깨달으며 올바로 걸어가야 할 뿐입니다. 벼를 심어야 논농사이지 보리를 심는다고 논농사가 되지 않아요. 보리는 밭농사입니다. 벼일 때에 논농사입니다. 감자와 고구마 또한 논농사가 아닌 밭농사입니다. 수수이든 밀이든 옥수수이든 밭농사입니다. ‘수수밭’과 ‘밀밭’과 ‘옥수수밭’이라 말하지, ‘수수논’이나 ‘밀논’이나 ‘옥수수논’이라 말하지 않아요. 오로지 ‘벼논’이라 말합니다. 사진과 만듦사진이란 벼논과 보리밭 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모두 곡식을 짓는 농사이지만 갈래가 다릅니다. 사진과 만듦사진 모두 사진기나 필름이나 인화지를 써서 펼치는 문화요 예술이라 하지만, 서로 갈래가 다릅니다. 아주 다른 갈래인 두 문화예술을 엉뚱하게 한동아리로 뭉뚱그리며 다루어서는 갈팡질팡 헤매기만 하지, 아름다우며 훌륭하고 좋은 길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2) 김홍희 님은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는 김홍희 님은 《나는 사진이다》라는 이름을 내걸고 사진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당차고 다부진 이름인 《나는 사진이다》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당찬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대목이 다부진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나는 사진이다》 하고 외친다고 해서 김홍희 님이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김홍희 님은 사진이 아니라 김홍희입니다.


.. 그럼 자신의 생각과 주장은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 첫째, 우선은 셔터를 눌러야 한다. 생각하고 셔터를 누르기보다 셔터를 누르고 나서 생각하는 것이 좋다. 나는 이것을 ‘손가락으로 생각하기’라고 부른다. 그게 익숙해지면 사물을 대하는 순간 핵심을 꿰뚫어보는 직관이 생기고, 자연스레 셔터를 누른 것이 ‘물건’이 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셔터는 누르지 않고 생각만 한다고 사진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  (35쪽)


 김홍희 님은 《나는 사진이다》에서 “언제까지고 남의 사진론으로 자신의 사진을 찍을 수는 없다. 남의 이론을 업고 사진을 찍는 것을 아류라고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가들이 남의 사진론을 업고 자신을 반증하려 한다(32쪽).”고 밝힙니다. 그러면서 김홍희 님은 당신 ‘김홍희 사진론’을 사람들한테 집어넣으려 합니다. 왜 ‘생각하기 앞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라’고 말하지요? 이런 사진찍기란 ‘한낱 김홍희 당신이 즐기는 사진찍기’가 아닐는지요.

 사진은 찍고픈 사람 마음대로 찍어야 합니다. 생각을 하고 난 다음 찍어도 좋고, 생각을 하며 찍어도 좋으며, 생각하는 가운데 찍어도 좋습니다. 생각이 아직 없이 찍은 다음 생각해도 좋고, 생각을 안 한 채 찍고 나서도 생각이 아예 없어도 좋습니다. 어느 쪽이 가장 나은 사진길이라 말할 수 없고 따질 수 없으며 못박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김홍희 님은 어느 한 가지만을 제대로 된 사진찍기인 양 못박으면서 그 길로만 가라고 외칩니다. 바로 ‘김홍희 사진론’을 만들면서.

 곰곰이 따지고 살핀다면, 김홍희 님은 스스로 억지를 부리며 사진론을 펼칩니다만, 김홍희 님 사진론은 밑바탕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생각이 서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사진기를 ‘처음 장만해서 가지고 있을’ 수조차 없습니다. 마음이 안 되었는데, 생각이 아예 없는데, 사진기부터 장만해서야 사진을 찍을 수 있나요. 김홍희 님 스스로 ‘장비병에 걸려 FM2라는 사진기를 창피하게 여겼다’고 말하는데, 장비병에 걸린 김홍희 님은 제아무리 사진기 단추를 바지런히 눌렀어도 사진을 한 장도 못 찍은 셈입니다. 그저 단추만 눌렀을 뿐이에요. 김홍희 님이 사귄 유대인 여자친구가 김홍희 님이 얼마나 엉터리 짓을 하고 있는가를 아주 넌지시 일깨워 주고서야 김홍희 님은 비로소 ‘사진찍기 길 가운데 가장 작은 한 가지’에 눈을 뜹니다.

 그래, 이 책 《나는 사진이다》는 아직 사진을 모를 뿐더러, 사진을 알아 간다기보다 사진을 알아 가지 않으며, 둘레에서 몇 가지 고맙게 일깨워 준 가르침에 힘입어 사진찍기로 돈벌이를 하고 있는 김홍희 님이 ‘2005년 어느 날 테두리에서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진 이야기’를 쏟아부은 책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 책 《나는 사진이다》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김홍희 님은 “나는 김홍희다”라는 이름쯤 붙일 수 있을 터이나, 김홍희 님이 섣부르게 “나는 사진이다” 하고 당돌히 말해서는 안 돼요. 김홍희 님은 사진을 모를 뿐더러 사진을 배울 마음이 없잖아요.


.. 얼마 전에 아주 잘 나가는 프로 사진가 모씨가 TV 방송에 나온 적이 있다. 그 프로그램이 끝날 무렵 기자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렇게 잘 나가시는데, 혹시 하고 싶은 사진 없으세요?” 기자의 질문에 그가 대답했다. “언젠가는 다큐멘터리를 하고 싶습니다.” 나는 그때 내심 코웃음을 쳤다. ‘당신은 죽었다 깨어나도 다큐멘터리는 안 돼. 잘 나가는 연예인들의 젖가슴이나 찍으며 희희낙락 하루하루 밥벌이에 연연하는 그 배짱으로, 삶의 진실을 캐기 위해 배를 곯며 카메라 한 대로 지구촌을 돌아다닐 수 있겠어?’ 다큐멘터리를 찍는 사람은 행동하는 철학이다. 철학하는 행동이고, 이미 독자나 관객의 입맛을 의식한 사진 작업을 오랫동안 해 오고 거기에 젖은 사람은 자신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한 삶의 질문을 던지는 게 쉽지 않다 ..  (14∼15쪽)


 예부터 익은 벼는 고개를 숙인다 했고, 익지 않은 벼는 뻣뻣하게 서 있다가 쭉정이가 됩니다. 김홍희 님은 쭉정이 아닌 익은 벼가 되어야 할 분입니다. 섣불리 괜스러운 주의와 주장을 책 하나에 빼곡하게 실으려고 채근대지 말아야 합니다. 즐거이 살아가는 마음으로 당신 하루하루를 일구는 가운데 사진기를 쥐어들어야 비로서 즐겁게 사진을 맞아들입니다. 즐겁지 않은 삶이면서 사진기만 쥔다고 갑자기 즐거워지겠습니까. 삶은 하나도 즐겁지 않은데, 사진기만 쥐면 난데없이 즐거움투성이가 될 수 있는가요.

 김홍희 님은 연예인 젖가슴 사진을 찍는 이들을 나무라지만, 눈빛 파란 스님 까까머리 사진을 찍는 일하고 연예인 젖가슴 사진을 찍는 일하고 다르지 않습니다. 연예인 젖가슴을 찍는다 하여도 ‘훌륭한 넋으로 훌륭히 찍으’면 아름답습니다. 눈빛 파란 스님 까까머리 사진을 찍으면서 ‘다른 갈래 다른 사진 찍는 이를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린다’면 김홍희 님으로서 눈빛 파란 스님 까까머리 사진을 찍으며 무엇을 얻거나 배운 셈인지요.


.. 옥상마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왠지 너절하고 삶에 지친 오래 전 우리의 삶을 상상했었다. 그러나 실제 옥상마을을 방문하는 순간, 입이 딱 벌어졌다. 시장 옥상에 지어진 집들이 얼마나 깨끗하고 단정한지. 좁은 골목길이지만 담배꽁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나의 너절한 상상을 단번에 깬 것이다. 이런 경우, 사진을 찍는 나의 행위는 존재 증명도 아니고 관념 증명도 아닌 무위로 끝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카메라를 들고 배회하고 있는 것이다 ..  (40쪽)


 김홍희 님은 가난하게 살아 본 적이 없는 분입니다. 이 글을 읽으면 아주 잘 알 수 있습니다. 김홍희 님 스스로 ‘너절하고 삶에 지친’ 동네에서 살아 본 적이 있다면 부산 옥상마을이라는 이름만 들으면서 그곳이 어떠하다고 지레 짚을 수 없습니다. 너절한 삶이란 무엇인가요? 당신이 생각한 너절한 삶이란 어떤 모습이지요? 골목동네, 그러니까 가장 가난한 사람이 모여서 게딱지 집을 이루어 지내는 곳에서 태어나 살아 본 사람은, 이 골목동네에 ‘담배꽁초 하나 떨어져 있지’ 않음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가난한 골목사람들은 당신 삶터에 담배꽁초를 버릴 일이 없을 뿐더러, 철없는 사람들이 버린 담배꽁초를 주워 당신 집 쓰레기통에 버려 버릇 하니까요. 골목동네에서 태어나지도 않고 살아 보지도 않으며 찾아가 보지조차 않은 이들이나 이러한 골목동네 터전을 하나도 모를 뿐입니다. 골목동네에 담배꽁초나 빈 병을 버리는 사람은 골목사람이 아닙니다. 골목동네를 스쳐 지나가는 건달이나 아파트내기입니다.

 사진이란 ‘편견을 품은’ 사람이 찍을 수 없는 예술입니다. 편견을 품은 사람은 오직 편견 담긴 사진만 쏟아냅니다. 편견을 품은 사람은 오로지 편견 깃든 글만 써 냅니다. 편견을 품은 사람이기에 그예 편견 가득한 그림만 그려댑니다.


.. 아, 생각난 김에 한 마디만 더 하자. “프로는 사진을 자랑하고, 아마추어는 카메라를 자랑한다.”는 말이 있다. 당신은 무엇을 자랑할 것인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는 지금 당신의 수중에 있는 카메라다. 당신과 함께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며 거침없이 일을 해 주고 즐거움을 주는 카메라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카메라라는 것을 지금 이 순간 깨달아야 한다. 그래야만 ‘사진의 본질’에 집중할 수 있다 ..  (83쪽)


 비아냥거리려고 이런 말씀을 올리지 않습니다. 슬프고 갑갑해서 이런 말씀을 올립니다. 제발, 김홍희 님부터 ‘사진에 마음을 쏟아’ 주시기 바랍니다. 어떤 바보 멍청이가 ‘프로는 사진을 자랑하고, 아마추어는 카메라를 자랑한다’ 따위 흰소리를 주워섬기는지 궁금합니다.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사진이나 카메라를 자랑할 때에 이이는 쓸개빠진 떨거지이지, 사진쟁이가 아닙니다. 프로 사진쟁이라면 당신 사진을 자랑할 까닭이 없고, 아마추어 사진쟁이라면 기계를 자랑할 턱이 없습니다. 프로 사진쟁이라면 당신이 사진을 찍으며 흘리는 땀방울을 기쁘게 즐깁니다. 아마추어 사진쟁이라면 당신이 사진으로 담는 사람과 어우러지는 삶을 반갑게 즐깁니다. 미쳤습니까. 프로 사진쟁이가 사진을 자랑하게. 돌았습니까. 아마추어 사진쟁이가 기계를 자랑하게.


.. 처음 사진 공부를 하러 온 사람에게 나는 이렇게 주문한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아무거나 우선 찍어 오십시오.” 그러면 학생들은 대개 당황한다. 아마 정해진 숙제를 하는 데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  (98쪽)


 뭘 찍어야 좋을지를 하나도 모르는 사람한테 아무것이나 찍으라 한다고 아무것이나 찍지 못합니다. 뭘 찍어야 좋을지를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진을 찍고픈 사람 가장 가까운 곳에 아주 흔하게 보이는 무언가(사람이든 건물이든 자연이든 짐승이든)를 눈여겨보며 차근차근 찍으라고 이끌어야 합니다. 세 살박이 어린이한테 “네 마음대로 놀아 봐.” 해서야 되겠습니까. 일곱 살박이 어린이한테 돈 만 원 쥐어 주고 “네 마음대로 아무 데나 가서 알아서 밥 사 먹어.” 해서야 되겠습니까.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아무것이나 막 하라고 하면 ‘사진을 가르치는’ 일이 아닙니다. 김홍희 님 스스로 김홍희 님한테 사진을 배우겠다고 하는 사람 삶을 들여다보고 이야기 나누며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당신 스스로 제자한테 다가서며 말을 건네고 손을 내밀며 사진밭에 신나게 뛰어들어 즐기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당신이 할 몫을 당신 스스로 안 하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 앞에서 낄낄대’는 매무새는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 이런 준비가 없다면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없다. 좋은 사진에는 일반인들이 쉽게 눈치채지 못하는 치밀한 구성이 있다. 그저 지나가는 아름다운 몸놀림에 눈을 빼앗겨 셔터를 누른 사진과 축제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셔터를 누른 사진과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 … 노출을 잘 맞춘다거나 수동으로 노출을 맞추어 사진 찍는 것을 자랑으로 늘어놓는 아마와 프로를 보면 나는 속으로 웃는다. 그 시간에 책이나 한 줄 더 읽고 다른 선수들의 사진이나 한 장 더 감상하는 것이 자신의 사진을 위해 훨씬 나으리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카메라를 믿어라 ..  (103, 166∼169쪽)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에 꼭 한 가지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입니다. 내 마음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한 가지만 ‘미리 갖출(준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미리 갖춘 내 마음이라 할지라도 정작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살아가노라면 언제나 조금씩 달라집니다. 늘 같은 내 마음은 아니에요. 골목에 피어난 꽃을 보며 마음이 흔들리고, 짓궂게 빵빵거리는 자동차 때문에 마음이 들쑤석거리며, 좋은 벗님한테서 오랜만에 전화가 걸려 와 한참 기쁜 얘기를 주고받으며 마음이 들뜹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을 어느 자리에 놓느냐에 따라 우리 사진을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도록 이끌어 냅니다. 내 마음을 사랑으로 채우고 있다면, 내가 미놀타 엑스300을 쓰든 니콘 에프3을 쓰든 사랑을 담은 사진을 얻습니다. 내 마음을 미움으로 채우고 있다면, 캐논에프1을 쓰든 핫셀블라드를 쓰든 내 사진에는 미움이 기어듭니다.

 사진기 초점이나 빛(조리개)이나 셔터빠르기를 그때그때 맞추며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런저런 초점·빛·빠르기를 바꾸는 데에 1초가 걸리지 않습니다. 0.1초조차 안 걸리곤 합니다. 사진기를 손에 들고 사진기를 쳐다보지 않는 가운데 아주 부드러이 손가락 두엇 날렵하게 움직이며 다 맞추어 놓습니다. 사진기가 눈에 닿을 무렵 아주 스스럼없이 찰칵 하고 한 장을 찍습니다. 자동노출과 자동초점으로 사진을 찍는다고 수동노출과 수동초점으로 사진을 찍는 사람보다 더 잽싸거나 매끄럽지 않습니다. 어느 쪽이 더 잘 나오는 사진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어느 쪽이 ‘좋은 사진’이라거나 ‘나쁜 사진’이라 말해서도 안 돼요. 우리는 우리 사랑을 사진에 싣고자 할 뿐, 사진찍기 솜씨자랑을 하는 바보나 얼간이는 아니잖아요.


.. 사진의 진정한 목표는 생명의 공생에 있다. 생명의 공생은 공생 대 생며의 교감이다. 거기에 감동이 있는 것이다. 남을 감동시키기 위해 누군가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을 알게 됐다면, 우리가 느낀 감동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은 거짓 위에 서 있는 진실의 허상일 뿐이다. 그 사진을 보고 감동한 우리가 패악을 함께 저지른 것이다 ..  (261쪽)


 내 마음을 먼저 사랑으로 가득 채우며 글을 쓰는 한국 글쟁이가 하나둘 새로 태어나면 좋겠습니다. 내 마음부터 기쁘게 사랑으로 빛내면서 그림을 그리는 한국 그림쟁이가 둘씩 셋씩 새로 우뚝 서면 반갑겠습니다. 내 마음바탕에 사랑이 언제나 감돌도록 하루하루 삶을 알뜰히 일구는 사진쟁이 네 사람 다섯 사람 우리 누리 곳곳에서 조용히 땀흘리면 고맙겠습니다. 김홍희 님, 부산이라는 터전은 아주 넓습니다. 이 넓은 부산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면 아무쪼록 부산땅 모든 골목길을 철 따라 백 번씩은 누벼 보고 나서 힘차게 말하시기를 빕니다. 아무쪼록, 김홍희 님 사진에 참다우며 착하고 고운 사랑이 깃들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4343.9.1.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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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희의 힐링 포토 - 마음을 치유하는 사진
조선희 지음 / 민음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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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이 좋아 삶을 빛내고픈 사진찍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5] 조선희, 《조선희의 힐링 포토》



- 책이름 : 조선희의 힐링 포토, 마음을 치유하는 사진
- 글·사진 : 조선희
- 펴낸곳 : 황금가지 (2005.10.14.)
- 책값 : 17000원 → 23000원



 (1) 빛이 좋아 찍는 사진


 빛이 좋지 않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이야기가 좋지 않으면 그림이나 만화를 그릴 수 없습니다.

 느낌과 생각이 좋지 않으면 글을 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도 저도 좋지 않은 얄궂음투성이일지라도 삶이 좋으면 사진을 찍고 그림이나 만화를 그리며 글을 씁니다.

 팔월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골목마실을 합니다. 두 시간쯤 걷자니 살짝 비가 뿌릴 듯하다가 갭니다. 세 시간쯤 걸을 무렵 매지구름이 몰려들며 비가 퍼붓습니다. 지난날에는 소낙비라 했으나 오늘날에는 소낙비가 아닙니다. 지식인과 전문가들은 으레 ‘국지성 폭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골목을 걷다가 마주치던 퍼붓는 비이든 시골집이나 골목집에 살면서 마주하던 퍼붓는 비이든 어느 때이고 이 비를 놓고 ‘국지성 폭우’로 느낀 적은 없습니다. 오늘날 갑작스레 퍼붓는 비는 말 그대로 ‘갑작비’ 또는 ‘깜짝비’입니다. 그런데 이런 이름으로도 그닥 어울린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막비’쯤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할까요. 참말 마구 퍼붓다가, 참으로 마구마구 쏟아지다 그치다를 되풀이하고 있으니 ‘막비’라는 이름 말고는 달리 무어라 가리키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오늘 하루 막비를 숱하게 겪거나 느끼는 가운데 뜨거운 햇살을 함께 겪거나 느낍니다. 비가 올 때에는 비 느낌을 곱다시 실으며 사진을 찍으면 퍽 즐겁습니다. 눈이 올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비가 오는 날이든 눈이 오는 날이든, 요즈음은 예전처럼 즐겁게 사진찍기를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반가운 비나 눈이 아닌 궂은 비나 눈이기 일쑤이며, 오래 가물다가 내리는 비마저 여느 비가 아닌 막비이기 일쑤인 탓입니다. 날씨가 미친 채 돌아간다면, 이 미친 채 돌아가는 날씨를 받아들이며 살아가는 사람이 고스란히 담아낼 사진에는 미친 기운이 스밀밖에 없습니다.

 골목동네에서 사진을 찍든 시골마을에서 사진을 찍든 집안에서 사진을 찍든 늘 같은 마음입니다. 언제나 빛을 받아들이거나 느끼는 가운데 사진을 찍습니다. 빛과 그림자를 아울러 담는 사진입니다.

 두어 해쯤 앞서 인천 골목동네 한복판에서 살아가던 나날, 깊은 밤에 곧잘 밤마실을 나오며 골목 사진을 흑백으로 담곤 했습니다. 깊은 밤 조용한 때에 벽에 기대거나 골목길 바닥에 퍼질러 앉아 1초나 2초나 3초쯤 셔터를 열고 사진을 찍을 때면 퍽 느낌이 좋았습니다. 아니, 참 느낌이 괜찮았습니다. 누가 알아주느냐 마느냐를 살피지 않으며 더없이 기쁘게 즐기는 사진찍기였습니다. 이 느낌을 즐기려고 따로 세발이를 안 쓰고 내 몸뚱이를 세발이로 삼아 밤골목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제 밤마실 사진은 따로 안 찍습니다. 밤마실 사진에는 밤마실대로 느낌과 멋이 있어, 이러한 느낌과 멋을 살리는 아름다운 사진 이야기를 엮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느낌과 멋을 나눌 만한 우리 나라가 아니로구나 싶으며, 앞으로도 이와 같은 느낌과 멋을 나눌 만한 이 나라 삶과 문화와 사람이 되기는 힘들겠구나 싶어 더는 밤마실 사진을 안 찍습니다.

 그렇다고 낮마실 사진을 이 나라에서 제대로 나눌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낮마실 사진부터 제대로 삭일 수 있은 다음에 밤마실 사진을 삭인다고 생각합니다. 낮마실 사진조차 차분히 들여다보면서 낱낱이 새기는 맛과 멋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곱거나 착하거나 참된 밤마실 사진을 보여준다 한들 바위한테 책을 읽어 주는 꼴입니다.

 헤아려 보면, 바위한테 책을 읽어 준다고 쓸데없는 짓이 아닙니다. 바위한테 책을 읽어 주면 바위는 우리가 바위한테 바치거나 들이는 고운 넋을 찬찬히 받아들인다고 느낍니다. 참 그렇습니다. 텃밭에 일구는 무나 배추한테 곱다시 말을 걸어 보셔요. 봉숭아하고 채송화한테 예쁘게 이야기를 들려주어 보셔요.

 사진관에서는 빛을 만들고, 길에서는 빛을 봅니다. 사진관에서는 빛을 고르고, 길에서는 모든 빛을 껴안습니다. 사진관에서는 빛을 다루고, 길에서는 빛을 어루만집니다. 사진관에서는 빛을 알맞춤하게 움직이고, 길에서는 빛이 알맞춤할 때까지 움직이거나 기다립니다.

 사진관 사진이든 길 사진이든 빛을 담는 사진입니다. 빛을 만든다고 더 나쁜 사진일 수 없고, 빛을 본다고 더 나은 사진일 수 없습니다. 맨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삶이 좋다면 빛을 만들거나 빛을 보거나 좋은 사진을 일굽니다. 삶이 나쁘다면 빛을 만들든 빛을 보든 나쁜 사진만 쏟아냅니다. 삶이 곱다면 고운 사진을 일구며, 삶이 메마르다면 메마른 사진을 일굽니다.

 날씨가 궂을 때에는 되도록 사진을 안 찍으려고 합니다. 날씨가 미쳤을 때에도 웬만해서는 사진기를 감추려고 합니다. 미친 날씨가 걷히며 자연스러운 날씨로 우리 삶터가 예쁘며 맑고 맑은 모습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무렵에 비로소 사진기를 쥐어들어 신나게 사진찍기를 즐기려 합니다. 저로서는 미친 날씨 미친 터전 미친 나라 미친 사람 미친 돈벼락 미친 이름값 미친 힘자랑 따위에 놀아나는 삶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사랑스럽고 믿음직스러우며 따스한 가운데 넉넉하고 보드라운 사진을 즐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어서 둘레에 나눈다는 생각조차 안 합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며 즐기는 사진이라면 내 둘레에서 내가 즐기는 사진을 곱게 받아들여 줍니다. 내가 나누기 앞서 둘레에서 받아들여 주는 사진입니다. 나로서는 내가 먼저 건네기 앞서 내 둘레에서 내 몸(사진)에서 우러나오는 빛깔이나 냄새나 느낌을 선선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살아내며 사진을 즐기는 하루하루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찍기란 빛을 담는 즐거운 삶입니다.


 (2) 사진쟁이 조선희? 사진교수 조선희?


 사진을 찍으며 밥벌이를 하는 조선희 님 책 《조선희의 힐링 포토, 마음을 치유하는 사진》을 장만하여 읽고 볼 무렵, 조선희 님이 ‘사진쟁이’라는 이름에서 ‘사진교수’라는 이름으로 갈아탔다(그러나 사진찍기 일을 그만두지 않게 함께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나라에는 사진학과를 둔 대학교가 제법 있으니 사진을 가르치는 분이 꼭 있어야 합니다. 조선희 님 같은 분이라면 사진교수가 될 만한 그릇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이 책을 본 누군가가 내가 찍은 한 장의 사진이나 한 줄의 글 때문에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거나, 혹은 눈을 감고 깊은 마음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난 행복할 것이다. 누군가가 사진 한 장으로 인해 마음이 따뜻해졌다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걸 들을 수 있다면 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진가가 될 것이다 ..  (9쪽)


 그렇지만 어딘가 아쉽고 슬픕니다. 왜 조선희 님은 사진쟁이 길을 젖혀 놓고 사진교수 길을 가야 할는지요. 조선희 님 삶은 사진‘쟁이’가 아닌 사진‘교수’가 꿈이었을는지요.

 남들이 즐거웁기(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해서 남들이 즐거울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즐거웁게 살아가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한다면 내 즐거움이 저절로 내 이웃한테 스며듭니다. 남들이 내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즐거웁기를 바라거나 꾀하거나 꿈꿀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내가 일군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즐거웁다면, 굳이 내가 바라거나 꾀하거나 꿈꾸지 않아도 내 이웃은 내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와 함께 즐겁습니다. 나 스스로 사진을 즐겁게 찍지 못한다거나 나 스스로 내가 사진을 찍는 가운데 내 마음을 따뜻하게 추스르지 않는다면, 내 사진이 제아무리 그럴싸하고 내가 내 사진에 붙인 말이 여러모로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겉껍데기가 따뜻해 보인다 해서 속알맹이가 따뜻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을 찍고자 하는 사람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은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은 사진을 가르칠 뿐입니다.

 사진찍기에 온몸을 바치는 길은 하루아침에 닦거나 세우지 못합니다. 사진가르침에 온마음 쏟는 길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거나 만들지 못합니다. 오래오래 차근차근 걸어가는 가운데 나 스스로 느끼지 못하며 문득 내 길을 갈 뿐입니다. 조선희 님이 사진교수라는 이름을 얻고자 했다면, 스스로 오래도록 사진교수가 되는 배움을 얻거나 다스리거나 키우거나 북돋우고 있어야 했습니다. 어쩌면, 저 같은 쥐대기는 잘 모르는 배움길을 무척 다부지게 걸어가고 있으셨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배움길을 걷는 사람은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배움길을 걷느라 바빠 죽겠는데, 아니 배움길을 걸으며 살피고 곱씹으며 익힐 이야기가 한 가득인데 사진찍기에 틈을 내어줄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 또한 같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느라 하루 스물네 시간이 모자라거나 빠듯해 고단한데, 아니 사진찍기 한길을 걸어가며 돌아보고 되씹으며 곰삭일 이야기가 흘러넘치는데 사진가르침에 겨를을 낼 수 없습니다.


.. 길들여진다는 건 무서운 일이다. 남편을 따라 나들이를 온 일군의 여인들은 내가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남편의 눈치를 보며 황급히 얼굴을 가린다. 그리고 남편들은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며 마치 자신의 소유물을 자랑하듯 거만한 표정을 짓는다. 수백 년 수천 년 이어진 그들의 문화이지만 그 순간 난 부아가 치민다. 그러나 그녀들은 나를 더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며 마냥 어린아이들처럼 웃어댄다 ..  (26쪽)


 부질없는 소리일는지 모르나, 사진찍기는 대학교를 다니며 배우지 못합니다. 사진찍기는 사진기를 장만해서 스스로 찍어야 배웁니다. 사진찍기를 가르치는 가장 뛰어나며 가장 놀라운 스승이란 사진기입니다. 사진찍기를 가르쳐 줄 사람이란 바로 ‘내가 사진으로 담고자 하는 사진감이 되어 줄 사람(모델)’입니다.

 덧없는 말일는지 모르나, 사진찍기를 하기 앞서 마음닦기를 해야 합니다. 마음닦기를 하지 않고 사진기만 쥐어든다면 ‘사진다운 사진’ 한 장 얻지 못합니다. 사진이란 내 눈에 들어오는 ‘퍽 그럴싸한 모습’을 찍어서 남기는 종이 한 장이 아닙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내 삶이요 내 이웃 삶입니다. 내 삶을 나부터 잘 모르고 내 이웃 삶을 나 스스로 더 깊숙하게 껴안거나 어루만지며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다면, 예쁘장해 보이거나 멋있어 보인다는 ‘잘 찍은 사진’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이런 사진으로 사람들 마음을 따뜻하게 덥힐 수 있을는지요.


.. 하늘에도 다양한 인종이 살고 있다. 같은 날, 같은 시간, 같은 하늘에 수많은 다른 모양, 다른 색깔의 구름 떼가 함께 존재한다 … 갑자기 사진을 찍는 것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난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나의 뇌리를 파고든다. 한살박이는 됐을까? 어린 동생을 머리에 이고 있는 네 살쯤 된 아이를 찍었다. 그리고 쑥스러워하며 간절하게 나를 바라보는 눈을 저버리지 못하고 돈을 건넨다. 그들에게 사진을 찍히는 행위는 생존의 수단이다 ..  (83, 90쪽)


 조선희 님이 어떠한 사진길을 걸었는지는 잘 모릅니다. 아니, 굳이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조선희 님은 그예 ‘사진을 찍는 사람’이니까,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느끼며 껴안을 노릇입니다. 당신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몇인지 어디에서 태어나 자랐는지 무슨 사진기를 쓰는지 필름인지 디지털인지 마음에 아픔이 있는지 없는지 외팔이인지 외다리인지 애꾸눈인지 알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바지를 입는지 치마를 입는지 머리가 긴지 짧은지 얼굴이 갸름한지 네모진지 알아 보았자 쓸모가 없습니다. 당신이 무슨 대학교를 다녔는지, 또는 대학교를 안 나왔는지 나왔는지, 그냥 고등학교나 중학교만 마쳤는지, 아예 아무 학교도 안 다녔는지, 학교를 다녔다면 어떤 사람한테서 배웠는지, 어떤 사람한테서 어떤 삶을 배웠는지조차 소담스럽지 않습니다. 오로지 한 가지, ‘조선희 님은 사진을 찍는다’ 한 가지만 알아야 합니다. 이 한 가지만 아는 가운데 조선희 님 사진을 들여다볼 노릇입니다. 중학교 1학년 푸름이가 찍은 사진이 초등학교 3학년 어린이가 찍은 사진보다 훌륭해야 할 까닭이 없고, 고등학교 2학년 푸름이가 찍은 사진이 대학교 4학년 젊은이가 찍은 사진보다 덜 떨어질 까닭이 없습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자꾸 되풀이해야 하는 말인데, 조선희 님은 ‘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진을 찍다가 한두 번, 또는 여러 번, 때로는 한동안 사진가르침이라는 길을 거닐며 사진찍기라는 길을 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인지라 지치거나 고될 때가 있거든요. 어느 때에는 뒷걸음도 쳐 보고 제자리걸음도 할 수 있어요. 반드시 앞으로만 나아가야 할 우리 삶이 아닙니다. 그런데 참말 조선희 님은 왜 강단에 서서 사진가르침을 베풀어야 할는지요. 조선희 님이 강단에 서서 젊은이한테 베풀 만한 사진찍기란 무엇일는지요. 조선희 님이 베풀 사진가르침이란 당신이 하고 있는 사진찍기에 다 담겨 있지 않은가요. 당신이 내놓은 사진과 사진책이 바로 당신이 하려고 하는 모든 말과 앎과 삶에 깃든 열매가 아닌지요. 사진찍기를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라면 조선희 님 사진과 사진책을 보면서 얼마든지 배우고 가다듬으며 갈고닦을 노릇 아닌가요. 구태여 이 말 저 말 덧붙이면서 젊은이 앞에서 지식을 떠벌이고 경험을 늘어놓아야 하는지요. 그렇게 한갓진 삶인 조선희 님이온지요. 사진찍기에 품과 땀과 삶을 온통 바치지 않고 사진가르침이라는 곁길에 접어들면서 당신 삶을 흘려보내고 있어도 괜찮은지요.

 그런데,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사진가르침이 어줍잖거나 모자란 길일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는 사람한테는 사진가르침이란 어줍잖거나 모자라다는 소리입니다. 사진가르침을 하는 이들한테도 사진찍기라는 샛길로 빠진다면 어줍잖거나 모자랄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한길을 걸어갈 사람이지 두길 세길 네길 닷길을 걸을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 집식구 밥벌이 때문에, 우리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이 몹시 쪼들리고 괴로운 나머지 돈을 더 벌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두길 세길 네길을 걷습니다. 어린이문학을 하던 이원수 님은 창작을 비롯해 번역 편집 강사 노릇까지 참 숱한 일을 하셨습니다. 어린이문학 창작으로는 당신 식구를 먹여살릴 수 없었거든요. 이 나라에서 손꼽히는 이원수 님조차.


.. 뭘 먹든 뭘 마시든 꼭 남길 만큼 주문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였다. 이곳(인도)에 와서도 처음엔 그랬다. 밥이며 짜빠띠며 카레며 마구 시키곤 남겼다. 그 남긴 음식만큼 어느 순간 부끄럼이 생겨났다. 어린 시절 그릇에 붙어 있던 밥 한 알 때문에 할아버지께 듣던 설교가 생각난다. 잊고 있었다. 자연이니 환경이니 웰빙이니 떠들어대는 사이 우린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사소한(?) 것들을 너무 사소하게 생각해 왔다. 물을 아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어린 시절 한겨울 양동이에 데워 놓은 뜨거운 물을 아껴 써 본 기억밖에 없다 ..  (132쪽)


 궁금합니다. 조선희 님은 배가 고픈가요? 어떤 배가 고픈가요? 배가 얼마나 고픈가요? 돈이 없어 배가 고픈가요? 돈은 있는데 마음배가 고픈가요? 돈은 있고 마음배도 고프지 않으나 어딘가 허전한가요?

 거듭 얘기하지만, 사진은 삶이고,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이제까지 걸어온 조선희 님 삶이란 ‘물을 아껴 써 본 기억’이 없는 삶이며, 이러한 삶이 고스란히 조선희 님 사진으로 되었습니다. 그러면, 《조선희의 힐링 포토》라는 책을 내놓은 2005년부터는 조선희 님이 다른 사람 마음을 다스려 준다는 거룩한 뜻을 펼치기 앞서, 누구보다 조선희 님 마음을 다스리는 가운데 당신 삶을 새롭게 태어나도록 이끌어 당신 사진이 지난날과는 사뭇 다른 ‘이제부터는 물을 헤프게 쓰지 않으며 조금이나마 아낄 줄 아는 삶’이 되었는지요. ‘없어서는 안 될 사소한(?)’ 아름다움과 빛과 넋과 말과 몸짓과 이야기를 당신 사진에 오롯이 갈무리하는 사진쟁이 길을 튼튼하게 다지고 있으온지요.


.. 이 사진을 밖에 내걸고 어디에서 찍은 사진인 것 같으냐고 물으면 몇이나 답할 수 있을까? 여긴 뉴욕이다. 그것도 뉴욕 5번가다. 그 유명한 뉴욕 5번가에서 어떤 거지가 고양이 두 마리를 볼모로 동냥을 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은 돈을 준다. 고양이가 귀엽고 측은하므로 ..  (141쪽)


 사진찍기는 빛을 즐기는 삶입니다. 사진가르침은 빛을 나누는 삶입니다. 아무쪼록 어느 길을 걸어가시든 사진이란 빛을 바탕으로 일구는 이야기이며, 이 이야기에는 우리 삶을 짙고 고루 담아야 비로소 맑고 밝으며 고울 수 있음을 아로새겨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삶을 빛내는 사진찍기요, 삶을 비추는 사진가르침입니다.

 뉴욕이든 뉴욕 5번가이든 사람이 살아가는 곳입니다. 서울이든 서울 종로이든 사람이 사는 마을입니다. 샌프란시스코이든 마이애미이든 사람과 자연이 부대끼고 있습니다. 춘천이든 전주이든 사람만 있지 않고 자연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비록 오늘날 큰도시이든 작은도시이든 자연은 찌그러지거나 짓눌려 있겠지만. (4343.8.2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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