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 피우는 사연
전민조 지음 / 대가 / 2010년 5월
평점 :
품절



 사진을 찍는 삶 이야기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0] 전민조, 《담배 피우는 사연》


- 책이름 : 담배 피우는 사연
- 글ㆍ사진 : 전민조
- 펴낸곳 : 대가 (2010.5.15.)
- 책값 : 2만 원



 (1) 사진기 드는 마음


 사진을 잘 찍는 사람만 사진기를 들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을 못 찍는 사람 또한 사진기를 들 수 있으며, 사진을 어설피 찍는 사람 누구나 사진기를 들 수 있습니다. 사진을 훌륭히 찍는 사람만 사진기를 든다면 우리 누리는 얼마나 슬프거나 메마르거나 치우쳐 있을까요.

 밥을 잘 하는 사람만 밥상을 차릴 수 있지 않습니다. 밥솜씨가 모자라더라도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어린이도 밥상을 차릴 수 있고, 푸름이와 젊은이와 늙은이 누구나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함께 수저를 들며 배고픔을 달랠 사람들 마음을 따사로이 보듬을 줄 안다면 모두모두 밥상을 차릴 수 있습니다.

 애보기를 잘 하는 사람만 아이를 보며 키울 수 있지 않습니다. 애보기에 어설픈 사람도 아이를 보며 키워야 합니다. 애보기를 해 보지 않았다 한들 애보기를 손사래쳐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여자들은 아기를 배에 열 달 보듬고 있다고 낳기에 남자들과 견주어 아기한테 쏟는 사랑이 남다를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내 배에서 보듬어 보지 못했다 하여 애보기를 안 한다든지 아이가 눈 똥오줌을 못 치운다든지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사랑과 믿음으로 애보기를 할 노릇입니다.

 사진기를 들 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사진기는 얼마나 싸구려 사진기인가 하고. 그렇지만 이 싸구려 사진기를 들고 있는 내가 ‘싸구려 기계를 쓰니까 싸구려 사진만 찍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기계는 싸구려일지라도 내가 내 손으로 이루는 사진에는 내 온 사랑과 믿음을 따뜻하고 넉넉하게 어루만지며 일구려는 손길을 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손에 들고 있을 이 사진기가 비싸구려 사진기일지라도 더 나은 사진이나 더 마음에 드는 사진이나 더 괜찮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퍽 비싸구려 사진기를 어쩌다 한 번 손에 쥐어 보면 속으로 눈물이 납니다. 비싸구려 사진기로 이 사진기를 갖고 있는 분 모습을 찍어 드리다 보니, 이 비싸구려 사진기에 찍히는 모습들은 그야말로 대단하더군요. 대충 찍는 사진이란 없겠습니다만, 대충 찍어도 작품처럼 보이니까요.

 비싸구려 사진기를 내려놓고 제 싸구려 사진기를 집어듭니다. 낡고 닳은 제 싸구려 사진기를 손에 듭니다. 내 살림살이가 푸지지 못해서 서운하느냐고 속으로 묻습니다. 내 사진기는 싸구려이기 때문에 내가 바라거나 생각하거나 마주하는 사람들 삶자락을 꾸밈없이 담아내지 못하느냐고 혼잣말로 되뇝니다.

 틀림없이 그 비싸구려 사진기를 갖고 있다면 오늘 제가 담아내어 나눌 사진은 한결 빛나거나 아름다이 보이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들고 있는 사진기는 싸구려인 탓에 더 마음을 쏟고 더 손을 쓰며 더 몸을 부려서 사진 하나를 일구어야 합니다. 아무리 비싸구려 사진기를 갖고 있다 할지라도 대충 찍는 일이란 없지만, 대충 찍을 수 없는 사진임을 더 뼈저리게 깨달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살짝 어긋나기만 하여도 엉터리가 되는 싸구려 사진기이니 훨씬 힘을 내고 땀을 흘리며 다리품을 팝니다. 무엇보다도 사진기 눈으로 들여다볼 때하고 사진으로 찍힐 때하고 넓이가 달라 애를 먹으나, 이렇게 애를 먹으면 애를 먹는 대로 ‘사진기를 들여다보는 만큼’이 아닌 요모조모 어긋나게 나오는 푼수를 헤아리며 찍으면 그만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다른 분들보다 더 사진에 힘을 들여야 하고 마음을 바쳐야 하니까, 나는 나로서 한결 반갑고 고마운 사진을 얻는 셈 아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두 끼니나 세 끼니 밥을 해서 아이와 함께 먹습니다. 아빠가 아이한테 가장 맛나거나 좋을 밥을 해 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차려 준 밥을 늘 고맙게 받아먹지는 않고 고개를 요리조리 홱홱 돌리며 밥은 안 먹겠다고 투정을 부리곤 합니다. 애 아빠는 아이가 밥을 안 먹으려 할 때마다 기운이 빠지고 섭섭하며 고개를 떨굽니다. 애 아빠가 더 밥을 잘 하지 못한 줄은 살피지 않고 그냥 기운이 빠집니다. 그래도 아이는 달리 아픈 데 거의 없이 용케 무럭무럭 큽니다. 참으로 씩씩하게 뛰어놉니다. 끝없이 수다를 떨고 끊임없이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가 아빠보다 기운이 좋아 펄펄 날듯 놀고, 아빠는 집살림이며 돈벌이이며 다른 일이며 치르느라 헉헉댑니다. 아이는 배고플 때에 차려 주니까 먹는 밥일는지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먹어 주는 밥일는지 모릅니다. 애 아빠 스스로 아이 눈높이가 되어 아빠 된 사람이 이런 밥을 차려 주면 먹을 만할까 하고 헤아린다면, 저로서는 부끄럽게 여기며 더 마음을 쏟아야 할 텐데, 언제나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로 한숨만 쉬고 맙니다. 더 애쓰고 더 용쓰며 더 힘쓸 노릇인데 자꾸 풀이 죽습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가 먹고 싶어 하는 밥거리를 좀더 살뜰히 마련해 주어야 할 노릇인데, 아이 입맛과 밥맛에 잘 못 맞추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애 아빠 입맛과 밥맛이 아닌 아이 입맛과 밥맛을 살피며 밥을 차리고 밥술을 떠 줄 노릇인데, 그저 배고픔 때울 끼니거리만 해 오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하루 내내 힘들여 찍은 사진을 셈틀로 옮기며 갈무리하며 생각합니다. 군더더기와 티끌 하나 없이 제대로 찍은 사진은 제가 찍은 제 사진이면서 스스로 웃고 스스로 웁니다. 군더더기가 한 군데라도 있으면 더없이 잘 찍은 괜찮은 사진이라 여기면서도 이 사진을 쓰고픈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다시 가서 새로 찍어야겠네’ 하는 생각이 들며 주눅이 듭니다. 필름사진기라든지 더 값나가는 좋은 장비였다면 다시 찍을 일은 거의 안 생겼을 테지요. 그래도 저 스스로 더 마음을 쏟지 못한 탓에 사진을 다시 찍을 일이 생기고 만다고 마음을 고쳐먹습니다. 아니, 마음을 고쳐먹어야지 어쩌겠습니까. 달삯 치를 돈조차 빠듯한데 무슨 사진 장비 타령을 합니까.

 그러니까 애 아빠가 차린 밥상을 아이가 그닥 달가와 하지 않는다면, 애 아빠는 ‘내가 오늘 밥을 제대로 못했나?’ 하고 뉘우치면서 밥을 아예 새로 차려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따가 뭘 해야 하고, 낮이나 저녁에 누굴 만나야 하고 하면서 ‘이 녀석아, 얼른 좀 먹어!’ 하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 먹을 만하지 않게 밥을 차려 놓고 억지로 쑤셔넣는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아이가 아직 많이 어려 어른이 알아들을 말을 못한다고 함부로 굴면 안 됩니다. 사진을 아직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기에 ‘이 사진 꽤 괜찮은데 왜 버리셔요?’ 하고 묻는다 할지라도 나 스스로 이 괜찮다는 사진에서 군더더기와 티끌을 한 군데에서라도 보거나 느낀다면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저한테 괜찮은 사진이라는 소리를 들으려면 빈틈도 군더더기도 티끌도 어설픔도 모자람도 없어야 하니까요. 그릇 빚는 이들이 옹근 그릇이 아니면 모두 깨부수듯, 사진찍는 이들 또한 옹근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필름은 불사르고 파일은 지울 노릇입니다. 다시, 새로, 거듭, 또다시, 새삼스레, 자꾸자꾸 찍고 또 찍어야 합니다.

 ‘바로 이 한 장’이라 할 만한 사진을 얻어야 합니다. ‘꽤 괜찮은’ 사진을 얻어서는 안 됩니다. 올 한 해 내 마음을 넉넉히 채우는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앞으로 열 해와 스무 해를 보내는 동안에도 즐거이 마주할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내가 숨을 거두어 딸아들한테 물려줄 때에도 기쁘게 웃으며 물려줄 ‘바로 이 한 장’을 얻어야 합니다.

 사진밭은 그림밭하고 견주어 훨씬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입니다. 사진을 찍어 남길 수 있는 작품 숫자하고 그림을 그려 남길 수 있는 작품 숫자는 엇비슷합니다. 제대로 사진을 찍고 올바로 사진을 찍으며 훌륭히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한삶을 걸쳐 이룰 아름다운 사진’ 숫자란 몇 안 됩니다. 그럭저럭 괜찮은 사진이 많다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참 아름다운 사진 한 장’ 숫자는 아주 적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면서 ‘사진은 참 쉽게 찍을 수 있어요’ 하고 말하거나 생각한다면 모두 엉터리입니다.


 (2) 바보스럽게 찍은 《담배 피우는 사연》 전민조 님


 사진쟁이 전민조 님이 2010년 새 사진 작품을 내놓았습니다. 해마다 새로운 사진 작품을 내놓고 있는 전민조 님은 앞으로 2011년에도 새 작품을 내놓을 터이며, 2012년에도 새 작품을 내놓으리라 봅니다. 그야말로 꾸준하고 이야말로 한결같으며 더할 나위 없이 새롭습니다. 사진찍기란 ‘꾸준함’과 ‘한결같음’과 ‘새로움’ 세 가지 매무새를 갖추어 찍어야 함을 당신 스스로 몸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조차 제대로 안 갖추거나 못 갖춘 채 어설프고 어줍잖으며 엉터리일밖에 없는 사진을 쏟아내는 ‘거짓 쟁이’가 넘치는 한국땅에서 전민조 님 사진밭은 참 고마운 선물입니다.


― 박정희 정권 시절 외무부장관을 지낸 이동원(1926∼2006) 장관은 당시 한ㆍ일회담을 성사시킬 때의 반대여론을 회고하면서 줄담배를 피웠다. 담배연기가 이내 방 안에 안개처럼 꽉 차서 그의 얼굴이 희미해 보였다. 사진은 미래를 찍지 못하는 것이다. 사진기가 찍은 인물은 순식간에 과거의 인물이 되었다. (20쪽/1991.1.14.연희동 자택)

― 박 대통령 사망 후 정치인 김대중(1924∼2009)은 상도동 김영삼 자택을 찾아 환담했다. 그는 지금까지 사진기자들한테 보여준 도전적인 얼굴이 아닌 아주 편안한 얼굴로 비장의 파이프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의 표정은 앞으로 어떻게 어두운 정국을 헤쳐 나가야 대권을 잡을지 라이벌 김영삼 앞에서 무엇인가 골똘하게 구상하는 듯했다. (28쪽/1979.12.29.상도동 김영삼 자택)


 여원사와 한국일보사와 동아일보사에서 사진기자로 일한 다음 정년퇴직을 한 전민조 님은 지난 2005년부터 해마다 사진잔치를 열고 사진책을 펴내고 있습니다. 2005년은 ‘섬’, 2006년은 ‘서울’, 2007년은 ‘한국인의 초상’, 2008년은 ‘기자가 바라본 기자’, 2009년은 ‘농부’이고, 2010년은 ‘담배 피우는 사연’입니다.

 이 나라에 사진기자는 수두룩하게 많으나 ‘한 해에 한 번씩’은 어렵다 하여도 ‘여러 해나 열 해에 한 번’쯤이라도 사진잔치를 열며 사진책을 펴내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누구보다 사진을 많이 찍고 누구보다 더 많은 곳을 다니며 누구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사진기자라 한다면, 누구보다 사진으로 나눌 이야기가 많으리라 생각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사진기자로 일하며 사진잔치와 사진책을 신나게 선보이는 사람은 너무 적은 우리 나라입니다.

 일에 치여 바쁘기 때문일까요. 찍어 달라는 사진만 찍어도 속이 얹히거나 메스꺼워 도무지 ‘내 사진’을 일굴 수 없기 때문일까요. 나중에, 한참 나중에 선보이며 온누리를 크게 놀래키고 싶기 때문일까요.


― 삼성 이병철 회장의 장남으로 태어난 이맹희 씨는 기자들을 불러서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이야기를 갑자기 쏟아냈다. 허공에 담배 연기를 날리며 고뇌하는 얼굴을 보면서 가진 것이 너무나 많아서 겪는 재벌가의 암투와 갈등의 주인공보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이 카메라와 몸뚱이만 가지고 세상을 향해 사진만 찍고 있는 사진기자 직업이 정말 속편하다는 생각을 했다. (48쪽/1988.12.13.장충동 자택에서)

― 영업택시 운전기사가 달리면서 담뱃재를 도시를 향해 털고 있다. 꽁초와 담뱃재는 도시에 버리고 자신의 좁은 공간만 깨끗하게 하려는 이런 얄궂은 심리는 거리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런 풍경은 윗목에 쓰레기를 모아 놓고 아랫목에서 코를 막고 누워 있는 심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164쪽/2010.3.20.강남구 논현동)


 해마다 내놓는 전민조 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두 가지 생각이 듭니다. 먼저, 당신이 올해 새로 선보이는 사진 가운데 2/3나 3/4은 당신이 사진기자로 뛰었기 때문에 찍을 수 있었구나 싶습니다. 다음으로 1/3이나 1/4은 당신이 사진기자를 그만둔 뒤에 여느 사진쟁이와 다를 바 없이 스스로를 낮추면서 새롭게 사진길을 걷는 ‘새내기 사진꾼’으로 여기고 있기에 이런 사진을 얻는구나 싶습니다.

 신문사 사진기자일 때에는 ‘위에서 주어진 대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때때로 ‘내가 내 사진감을 만들어서’ 신문에 싣기도 하지만, 신문에 싣는 사진은 사진쟁이 한 사람 목소리로 선보일 사진일 수 없습니다.

 홀가분한 사진쟁이 한 사람으로 찍는 사진일 때에는 ‘나 스스로 좋아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내 사진을 바라보거나 들여다보거나 찾아보는 사람은 ‘이 사진쟁이는 뭘 그리 좋아해서 이런 사진을 다 찍나?’ 하는 궁금함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누구나 다 찍는 사진이 아닌 사진쟁이 한 사람 눈길로만 들여다보며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일구어야 합니다. 최종규면 최종규 사진을 찍고 전민조면 전민조 사진을 찍으며 강운구면 강운구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사진만 척 보아도 ‘어허라, 아무개 사진이네!’ 하는 소리가 절로 튀어나와야 합니다.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면서 ‘이게 누구 사진이더라?’ 하고 있다면 이런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이런 사진은 흉내내기 사진이거나 짜깁기 사진입니다. 이런 사진은 너절한 사진이요, 무엇보다도 ‘사진’이라는 이름을 내걸 수 없는 종이조각입니다.

 전민조 님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지난 1960년대 것부터 2010년대 것까지 두루 있습니다. 한 사람 작품을 이리 오랜 나날에 걸쳐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는 일이란 더없이 반갑고 고마운 노릇입니다. 사진삶을 쉰 해 아우르는 사진쟁이란 이 나라에 몇 없습니다. 더욱이 사진삶 쉰 해를 늘 새내기 마음으로 새내기 사진으로 일구려는 사람은 열 손가락으로 다 꼽기조차 힘듭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 해서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오랜 나날 사진기를 붙잡고 필름 수십만 통을 썼다 할지라도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넋으로 일구며 아름다운 손길이 서린 아름다운 사진을 바라지, 무슨무슨 이름값이나 권력이나 얼굴값으로 사진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느 대가 한 분 작품이 나왔소이다!’ 해서는 사진이 팔리지 않습니다. ‘이야, 이번에 이런 좋은 작품이 나왔습니다!’라든지 ‘우와, 이번에 이런 아름다운 작품이 나왔습니다!’라 해야 사진이 팔립니다.


.. 실제 신문, 잡지의 사진 찍는 일은 인터뷰가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담배 피우는 사진은 재미있게 찍어 와도 별로 좋아하지 않고 잘 게재하지 않았다. 유명인사로 알려진 인물들의 그럴듯한 외양 뒤에 숨겨진 참모습은 담배 피우는 표정이었다. 완벽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담배를 피우면서 사색하는 모습은 모두 고독해 보였다. 어제의 승리자에서 패배자로 전락한 기업가가 연신 뻐끔 담배로 울분을 토하는 표정, 담배가 꼭 남성들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표정으로 거침없이 연기를 날리는 드라마작가 … 모든 흡연자는 자신들이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고 담배가 몸에 나쁜 줄 알면서 습관적으로 피우는 사람이 많았다 ..  (6쪽)


 사진책이 사진책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사진을 사진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이 나라입니다. 글을 쓰거나 글을 좋아한다는 분들은 어김없이 글책은 많이 사서 읽는데, 그림책이나 사진책이나 만화책은 참으로 멀리하고 있는 알쏭달쏭한 이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글 하나 엮는 일과 아름다운 그림 하나 그리는 일과 아름다운 사진 하나 일구는 일과 아름다운 만화 하나 낳는 일은 얼마나 다를까요. 어느 일이 더 힘들거나 어느 일이 더 값있을까요.

 아름다운 책이면 한결같이 아름다운 책입니다. 글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림책이나 사진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만화책만 아름다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만화라고 하는 틀을 넘어 ‘사람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담아서 나누려는 책을 만나야 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피땀을 흘린 손자국을 글책에서 만나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피땀을 쏟은 손자취를 그림책에서 만나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피땀을 바친 사진책을 만나는 가운데, 만화를 빚는 사람이 피땀을 들인 만화책을 만날 노릇입니다.

 참말로 피땀이 깃든 책은 글책이든 그림책이든 사진책이든 만화책이든 우리 마음과 생각을 곱게 어루만집니다. 피땀이란 바로 사랑과 믿음이거든요. 사랑과 믿음이란 다름아닌 글쟁이ㆍ그림쟁이ㆍ사진쟁이ㆍ만화쟁이가 눈물과 웃음으로 부대낀 좋은 삶이거든요. 좋은 삶이란 어디 먼 나라에 있는 삶이 아니라, 바로 우리 둘레에서 늘 마주하고 살을 섞는 여느 수수한 사람들 삶이거든요.


.. 나는 그때 지옥에서 기어나와 천당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한 신선한 공기를 맡는 것 같았다. 국내 산에 올라 그렇게 숲속을 걸어다녀도 전혀 느끼지 못했던 향기를 그때 처음 느껴 본 것이다. 나는 그때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물질이 풍요로워도 숲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땅바닥에 발을 딛자 본능적으로 담배를 한 대 입에 가져가게 되었는데 담배연기를 마시자마자 기침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 깨끗한 공기를 마시고 왔던 가슴에서 담배 거부 반응이 일어난 것이다 … 강대국들의 담배회사는 지금까지 약소국의 젊은이들 건강은 염려하지 않고 온갖 방법으로 망쳐 놓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 담배를 끊고 소란스런 세상을 살아가면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담배 피우는 사람의 입에서는 향긋하지 못한 냄새가 풍겨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 피우는 사람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기가 힘들다는 사실이다 ..  (8∼9쪽)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은 전민조 님은 똑같은 이름을 붙인 사진잔치를 2010년 5월 19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관훈동 토포하우스(02-734-7555)에서 엽니다. 사진책과 전시회 알림쪽지에 적힌 글월을 읽다 보면, “그래서 ‘담배는 일종의 마약이며 국민들을 병자로 만드는 독약’이라는 생각에서 요즘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항상 불안하게 쳐다보면서 《담배 피우는 사연》이라는 사진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이 사진집은 금연운동에 바치는 사진집이다” 하는 이야기로 끝마무리를 짓습니다. 이 나라에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이런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함부로(?) 끄적이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렇지만, 담배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콧방귀를 뀌든 손가락질을 하든, 전민조 님 스스로 ‘담배 사랑이’였다가 ‘담배 끊은이’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말은 얼마든지 하실 수 있습니다. 게가다 전민조 님은 사진쟁이입니다. 사진으로 말을 걸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입니다. 당신 스스로 담배 태우는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보여준다고 할 때에는 무슨 뜻이 한 가지 있기 마련입니다.

 담배란 무엇인가 살피고, 담배가 태어난 밑뿌리는 어떠하며, 사람들이 담배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담배가 우리 삶에 어떻게 자리잡고 있으며, 담배를 우리 삶에서 어떻게 마주해야 좋을까 하는 숱한 생각을 사진으로 풀어낼 전민조 님입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들여다보고 사진책을 넘기면서 싱긋 웃음이 납니다. 사진쟁이 전민조 님은 ‘담배 끊자’고 말하고 싶은 마음에 《담배 피우는 사연》을 내놓으셨지만, “인간이 아무리 돈이 많고 물질이 풍요로워도 숲이 없는 황폐한 환경에서는 어떤 행복도 느낄 수 없”음을 깨달은 당신 말씀마따나, 숲이 없고 물질만 넘치는 오늘날 우리 도시 삶터에서는 이 사진책을 들여다보며 ‘어, 담배나 한 개비 물어야겠네’ 하는 분들이 훨씬 많겠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무래도 ‘그래, 담배가 몸에 얼마나 나쁘고 우리 터전을 얼마나 무너뜨리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절로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무는 사람이 많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4343.6.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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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Zone - 선우 家의 자연 이야기, 선우중호 가족 사진집
선우중호 사진 / 눈빛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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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 살 돈으로 사진책 사소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9] 선우중호 가족 사진집, 《FAMILY ZONE》



- 책이름 : FAMILY ZONE, 선우家의 자연 이야기
- 글, 사진 : 선우중호와 네 식구
- 펴낸곳 : 눈빛 (2009.12.2.)
- 책값 : 3만 원 

 




 (1) 사진기는 어떻게 사야 하는가


 지난 2007년 4월 15일부터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문을 열어 놓고 있던 사진책 도서관은 2010년 6월 15일에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세 해하고 두 달을 비싼 달삯 치르며 버티었으나,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사진벗을 마주하기 힘들고 벅차 시골마을로 살림터와 책터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꾸려야 할 책짐이 5톤 짐차로 석 대를 가득 채우고 남을 만큼 되기에 몇 달 앞서부터 틈틈이 책을 묶어 두고 있습니다. 집살림 꾸리고 아이 함께 돌보는 가운데 겨우 틈을 조금 내어 책을 묶기에 퍽 오래 걸립니다. 내 책들이 어느덧 열한 번째 묶이며 터덜터덜 먼 나들이를 떠나는가 하고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번에 옮기면 적어도 열 해 동안은 느긋하게 쉬도록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해 봅니다. 두 번 다시 안 옮겨도 되도록 살림돈이 넉넉하여 마땅한 집 하나를 마련한다면 가장 좋을 테지만, 우리 딸아이가 오늘 제 나이만큼 크더라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저 앞으로 또다시 책짐을 꾸려야 할 수 있으니, 나중에는 더 많은 책을 더 오랜 품을 들여 묶고 나를 만한 힘이 튼튼히 살아 있도록 몸을 추슬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한창 책짐을 꾸리고 있을 때에 도서관에 손님 두 분 찾아옵니다. 살짝살짝 책 구경을 마친 두 분이 도서관을 나설 무렵 저한테 사진 한 장 찍어 달라 말씀합니다.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분이 당신 짝꿍을 찍어 달라 말씀하는군요. 그냥 당신이 찍으면 될 텐데 왜 나한테?

 한 분만 찍을 까닭이 없기에 두 분이 함께 앉으면 찍겠다고 해서 두 분을 앉히고 사진기를 건네받습니다. 사진기에 붙인 렌즈는 제가 쓰는 렌즈하고 같은 값싸구려이지만, 사진기 몸통은 저로서는 꿈꾸기 어려운 ‘마크 머시기’라는 녀석입니다. 사진기를 왼손으로 감싸고 오른손으로 단추께를 만지작거리는데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퍼뜩 생각합니다. ‘이러니까, 돈있는 사람이라면 마크 머시기를 쓰는구나’

 웃는 얼굴로 걸상에 앉은 두 분을 사진기로 들여다봅니다. 오, 이런. 같은 값싸구려 렌즈이지만 마크 머시기에 붙은 이 렌즈로 들여다보이는 모습이란 넓고 시원합니다. 한 마디로 아주 좋습니다. 속으로 눈물 찔끔 납니다. 그런데 사진 한 장 두 장 시험판으로 찍어 보니 제가 생각하던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살짝 생각하다가 사진 설정과 화이트밸런스 설정 두 가지를 눌러 봅니다. 아하, 이분은 이 두 가지 설정을 처음 그대로 놓고 있군요. 사진기를 장만한 사람들은 사진 설정이나 화이트밸런스 설정이나 다른 여러 가지를 당신 사진감에 맞추어 손질해 놓아야 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감도만 800으로 돌려놓아 실내에서 어둡지 않게 나오는 데에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늘 찍는 대로 사진 설정은 ‘풍경’으로 고치고, 화이트밸런스 설정은 ‘그늘’로 고칩니다. 저는 디지털사진기를 장만하고 두 해쯤 뒤에 비로소 이 설정을 처음 깨달았는데, 어느 디지털사진기이든 필름사진기와 견주어 ‘좀더 밝게’ 찍히고 ‘좀더 날카롭게’ 찍힙니다. 디지털사진기에 맞추어져 있는 처음 설정을 그대로 두면 새내기나 풋내기들도 웬만큼 어긋나거나 틀리지 않는 사진이 나오도록 되어 있는 설정이라서, 사진을 제법 찍어 온 사람들 눈이나 느낌에는 꽤 동떨어진 사진이 되기 일쑤입니다. 괜히 디지털사진은 ‘날선’ 느낌이라 싫다고 잘못 생각하고 맙니다.

 저로서는 이태 만에 겨우 이러한 대목을 깨달았습니다만, 필름사진만 찍는 숱한 분들은 아직 이러한 대목을 못 깨닫습니다. 사진 설정을 고치면 ‘필름으로 찍을 때하고 똑같을’ 뿐 아니라 ‘사람 두 눈으로 바라보는 빛과 느낌’ 그대로 찍을 수 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같은 필름사진이라도 니콘과 캐논과 미놀타에 같은 필름을 앉히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찍어 보아도 사진은 똑같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라이카를 쓰든 콘탁스를 쓰든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에 따라 빛과 느낌과 날카로움이 아주 가늘고 자잘하게 다릅니다. 이 또한 디지털사진기에서도 매한가지라, 사진 전문가들은 ‘이제 막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진감을 즐겨서 찍으려’ 하는가를 귀기울여 들은 다음에 이이한테 가장 어울릴 기계와 필름(또는 디지털파일 형식)을 일러 주어야 합니다. 움직이는 사람을 찍을 때에 한결 잘 어울리는 기계와 필름이 있고, 멈춘 사람을 찍을 때에 한결 돋보이도록 돕는 기계와 필름이 있습니다. 건물을 찍거나 옷가지나 보석을 찍을 때에 더욱 걸맞는 기계와 필름이 있습니다.

 더 좋거나 더 나쁜 장비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기계마다 쓰임새가 다르고 구실이 다르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기계를 쓰든 다루는 사람이 잘 다루면 그만이지만, 기계를 처음 만든 공장과 일꾼이 어느 쪽에 더 마음을 기울였느냐에 따라서 기계가 살릴 수 있는 사진감이 다릅니다. 이를테면, 장도리로도 못을 박고 망치로도 못을 박습니다. 어느 연장을 쓰든 못을 박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연장이 똑같은 쓰임새이거나 구실이지는 않습니다. 오직 못 박는 한 가지에만 쓰도록 망치를 만드는 까닭이 따로 있습니다. 사진기에서도 기계마다 어느 자리에 더 알맞거나 걸맞거나 어울리는 구실이 있습니다. 사진관 일꾼이나 사진쟁이는 이렇게 다른 구실을 옳게 깨닫거나 알아채면서 사진기를 팔거나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더 비싼 장비가 더 좋은 장비가 아닙니다. 알맞춤한 자리에 알맞춤한 장비입니다. 내 사진감 쓰임새에 따라 나 스스로 여러 해에 걸쳐 목돈을 모아 반드시 장만해야 할 장비가 있으며, 내 사진감 쓰임새에 따라 적은 돈을 들여 값싸게 장만하여 아주 신나게 쓸 장비가 있습니다.

 광고에 휘둘려 무슨무슨 사진기가 가장 뛰어나다는 듯한 엉터리에 속으면서 애먼 데에 돈을 쓸 일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면 사진기를 장만하기 앞서 내가 무엇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는가를 오래도록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굳이 내가 사진기를 장만해서 애써 내가 뭔가를 사진으로 담으려는 까닭을 두고두고 살피고 느껴야 합니다. 이런 시간을 아무리 짧아도 한두 해쯤 ‘사진기 없이 보내’면서, 나한테 사진기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사진감으로 삼으려 하던 이 모습을 코앞에서 뻔히 보고 있으나 찍지 못하니 속에서 불이 나고 갑갑하고 미칠 노릇이라 안 되겠다고 느낄 때에 사진기를 장만해야 합니다.


.. 지난 1990년대 말, 갑작스럽게 집에서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만 했을 때에 사진은 내게 일거리라는 귀한 선물을 주었다 ..  (머리말)


 베스트셀러이니 뭐니 하고 떠들썩한 책이 나한테 가장 좋은 읽을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좋다고 야단법석인 책이 내가 읽을 만한 책이지 않습니다. 어쩌다 운 좋게 이러한 책 가운데 나한테 어울리는 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한테 좋은 책은 나 스스로 오랫동안 살피고 더듬고 찾아나서야 비로소 만납니다. 찾고 찾고 또 찾으면서 다리품을 팔며 장만할 책 한 권입니다.

 사진기를 장만할 때뿐 아니라, 사진기를 장만한 다음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도 ‘내가 사진으로 무엇을 담아 말을 걸려고 하지?’ 하는 물음을 채우려면 오래오래 다리품을 팔아야 하고 생각을 거듭해야 하며 삶을 알차게 꾸려야 합니다. 










 (2) 사진기 살 돈과 사진책 살 돈


 “나무가 그렇게 아름답고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 큰지는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 이제야 겨우 이런 자연의 신비함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 참으로 둔하게 살기도 하였구나’ 하고 탄식을 하게 된다(35쪽)”는 이야기를 적바림한 사진책 《FAMILY ZONE》을 봅니다. 사진책 《FAMILY ZONE》은 광주과학기술원장인 선우중호 님이 당신 사진과 당신 식구들 사진을 한데 그러모아 펴낸 책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아닌 선우중호 님이지만 풋내기 사진쟁이 또한 아닌 선우중호 님입니다. 취미가 사진이라지만 그예 취미로만 마주하지 않는 사진입니다.


.. (50여 년 전 대학에 다닐 때에) 내 전 재산을 털어서 산 비싼 카메라이고 재산목록 1호라서 다루기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서인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카메라는 손색이 없이 잘 작동되고 있다. 요즈음은 이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요란스러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 더 전문가답게 보여진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사람들이 좀 많이 모이는 곳이면 오히려 이런 골동품을 가지고 나가 전문가인 양 과시하기도 한다. 우리같이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말한다면 카메라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싼 카메라를 가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지 좋은 사진을 찍는 것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 현재 쓰고 있는 카메라가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혹시카메라를 새로운 모델이나 다른 종류로 바꾸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에서 새로운 모델로 바꾸다 보니, 내 카메라 장 안에는 카메라가 하나 가득 있다. 대부분이 아직도 멀쩡하기만 한 카메라들이라 볼 때마다 좀 미안한 느낌이 든다 ..  (21∼22쪽)


 짧지 않은 햇수에 걸쳐 즐겨 온 사진 가운데 사람들한테 좀더 널리 나누고 싶은 사진을 몇 가지 간추려서 묶은 《FAMILY ZONE》에는 선우중호 님이 사진과 사진기와 사진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밝힌 글이 사이사이 실려 있습니다. 흔히들 이런 사진책을 내면서 사진만 덜렁 싣는데, 선우중호 님은 ‘사진에 할 말 있다’는 듯 여러 가지 말씀을 들려줍니다.


.. 비교적 근래에 산 카메라들은 주머니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최상의 기종들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작품의 질은 카메라 가격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 자신부터 솔직히 인정한다 ..  (23쪽)


 아마, 이런 글을 읽는 분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리라 봅니다. 틀림없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글입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글입니다. 왜냐하면 제 살림살이와 제 삶과 제 사진길로 돌아볼 때에는 이런 말마디는 한낱 배부른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선우중호 님 스스로 “우리같이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말한다면 카메라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주머니에 여유가 있어”서 “최상의 기종”들을 사 모으고 있습니다.

 참으로 딱합니다. 왜 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때에 ‘그때그때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서 모아 놓고 먼지만 먹히십니까. 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때에 ‘그때그때 새로 나온 좋은 사진책’을 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그때 새로 나온 좋은 사진책을 장만하셨다면 이 사진책은 먼지를 먹을 일이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수없이 다시 꺼내고 들추고 펼치고 하면서 손때가 잔뜩 먹습니다. 당신과 함께 사진을 좋아하는 식구들 또한 이 사진책을 넘기거나 펼치면서 사진책이 낡고 닳아 똑같은 사진책을 두 번 세 번 다시 장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할 테고요. 당신한테 찾아온 손님한테 당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진책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참 좋다고 느낀 사진책이라면 열 권쯤 장만한 다음 한 권씩 선물해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매일 접하게 되면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그래서인지 흔히들 유럽과 같은 외국에 다녀오고서는 그들의 예술 작품에 대해 너무나 감명을 받은 나머지 우리 전통예술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크게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접하지 못하던 것을 처음 접하면 그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  (52쪽)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제대로 살피며 삶으로 삭일 노릇입니다.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올바로 삭이지 못하면 엉터리 사진만 찍고 어설픈 그림만 그리며 어줍잖은 글만 씁니다.

 최고경영자 자리에 선 이들 누구나 똑같을 텐데, 최고경영자란 회사나 학교 살림을 가장 훌륭히 꾸리는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맡고 있는 자리를 제대로 살필 노릇이요 당신 삶을 바쳐 올바로 삭일 노릇입니다. 어설피 하거나 어줍잖게 맡아도 될 최고경영자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제대로 살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제대로 못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볼 줄을 안다면 날마다 마주하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즐겁고 반가우고 고마운가를 새삼 헤아리며 날마다 기쁩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움을 올바로 삭이는 삶을 꾸리고 있다면, 참된 아름다움 앞에서 저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움을 알뜰히 돌보고 있으면, 거짓 꾸민 아름다움 앞에서 혀를 끌끌 차며 슬픔에 북받쳐 눈물이 흐릅니다.


.. 왜 흑백을 고집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흑백사진과 컬러 사진의 차이를 책을 읽는 것과 TV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컬러 사진이 눈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면 흑백사진은 뇌에 즐거움을 준다고 말을 한다. 흑백사진 애호가로서 좀 과장된 비유라고 들리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흑백사진은 컬러 사진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준다. 우리 눈은 자연의 각종 색들에 익숙하기 때문에 컬러 사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으로 그칠 뿐이다. 그 작품성을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마음에 찡하고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보통의 컬러 사진이다 ..  (79∼80쪽)


 곱고 밝게 찍어야 감동이 샘솟습니다. 흑백사진으로 찍었기에 감동이 샘솟지 않습니다. 선우중호 님은 “흑백사진은 좀 다르다. 자연의 모든 색을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의 색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작품에 있는 피사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피사체가 아니다(80쪽)”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래서 이 말마따나 적잖은 흑백사진들은 ‘몇 가지로 줄인 빛깔로 엮은 사진’인 터라 수수하거나 한결 깊은 느낌을 자아내곤 합니다. 누구나 아무렇게나 찍어도 이런 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빛깔사진을 찍자면 누구나 아무렇게나 찍어서는 수수하거나 한결 깊은 느낌을 자아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늘 바라보는 모습이 빛깔이 어우러진 삶이기 때문에, 빛깔사진은 빛깔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 크게 갈립니다.

 흑백사진은 다루어야 하는 빛깔이 아주 적기 때문에 살짝만 건드려 주어도 느낌이 달라지거나 살아납니다만, 빛깔사진은 다루어야 하는 빛깔이 아주 많은데다가 흑백사진과 마찬가지로 ‘그늘 자리’하고 ‘같은 빛깔이라 할지라도 짙기와 옅기에 따라 느낌이 다른’ 만큼 이러한 짙기와 옅기를 함께 건드려야 합니다. 몹시 어려운 사진이 빛깔사진입니다. 사진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마치 흑백사진을 해야만 작품이 되는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만, 작품이 되려면 사진을 잘 찍도록 애써야지 흑백사진을 찍을 노릇이 아닙니다. 저마다 붙잡고자 하는 사진감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흑백사진으로 할는지 빛깔사진으로 할는지를 골라야 합니다. 이러면서 두 가지로 사진을 함께하는 가운데 흑백사진으로 살릴 수 있는 이야기는 흑백사진으로 살리고, 빛깔사진으로 살릴 만한 이야기는 빛깔사진으로 살려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어느 한 가지 생각에 지나치게 매여 있으면, 사진을 찍는 동안 ‘내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하고 있는데?’ 하는 자랑만 사진에 담깁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오늘 내가 아주 훌륭하다 싶은 사진을 하나 얻었다’고 느낄지라도 이 사진은 고작 오늘 하루로 그치는 사진입니다. 오늘을 마감하고 글피를 맞이할 때에는 글피에 걸맞게 ‘오늘 훌륭히 찍은 사진은 스스로 내려놓은’ 다음, 이보다 거듭나면서 이보다 한 걸음 더 내디딘 더 훌륭한 사진을 품에 안도록 땀을 흘릴 노릇입니다. ‘어제까지 내가 찍은 사진은 모조리 바보스러울 뿐입니다’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오늘까지 내가 얻은 사진은 아직 어수룩할 뿐입니다’ 하는 생각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흑백사진이라 할지라도 흑백필름을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고, 흑백필름을 안칠 사진기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나아가, 35미리 사진기를 쓸는지 중형사진기를 쓸는지 대형사진기를 쓸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또한, 여느 필름사진기를 쓰느냐하고 파노라마사진기를 쓰느냐하고 갈립니다. 같은 중형사진기라 하더라도 핫셀과 마미야와 브로니카가 다르며, 파노라마일 때에도 린호프인지 호스만인지 후지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선우중호 님은 《FAMILY ZONE》에서 “솔직히 말해서 작품의 질은 카메라 가격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작품 질이란 흑백이나 빛깔이냐에 따라 갈리지 않는다”고 말해야 앞뒤가 맞으면서 올바릅니다. 바로 이 사진책 《FAMILY ZONE》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선우중호 님은 흑백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으나, 당신 옆지기와 아이들을 모두 빛깔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선우중호 님으로서는 당신 식구들이 빛깔사진 아닌 흑백사진으로 담았을 때에 한결 멋스러우며 작품값을 한다고 여기실는지 모릅니다만, 제 눈으로 들여다볼 때에는 흑백으로 하든 빛깔로 하든 스스로 붙잡은 사진감으로 얼마나 깊이 스며들며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가에 따라 작품이라 할 만한지 아닌지가 갈리는구나 싶습니다. 흑백사진을 한다 할지라도 내가 담으려는 사진감하고 제대로 어깨동무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장걸음을 하는 사진입니다. 한자말로는 습작이요 우리 말로는 풋내기 작품입니다. 내가 담으려고 하는 사진감하고 살가이 하나가 되어 있으면 바야흐로 눈물과 웃음이 절로 샘솟는 작품입니다. 우리가 흔히 우러러 마지 않는 나라밖 몇몇 사진쟁이들은 당신들 스스로 언제나 예전 사진하고 견주어 한 걸음씩 나아가며 거듭나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느낄 만합니다. 이들이 다큐를 하든 예술을 하든 상업을 하든 ‘흑백사진을 찍어’서 아름답다거나 훌륭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에 바치는 땀방울이 아름답기에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사진에 깃들이는 사랑이 훌륭하기에 사진이 훌륭합니다.

 사진책 《FAMILY ZONE》을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최고경영자’들께서 사진잔치도 열고 사진책도 내면서 ‘사진밭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다 할 만한데, 사진을 취미로 여기든 사진을 삶으로 여기든 사진을 직업으로 여기든 좋습니다만, 사진을 어떻게 맞아들여 즐기고 있든지 ‘사진은 사진으로 곰삭여’ 주십사 하고 바랍니다. 사진은 사진답게 해야지, 사진을 사진답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회사를 꾸리는 자리에서 회사를 회사답게 꾸려야지 회사답지 않게 꾸릴 수 없고, 학교살림 맡은 분으로서는 학교를 학교답게 일구어야지 학교를 직업훈련소나 영어학원처럼 일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할 때에는 온통 사진으로 생각하고 사진으로 살며 사진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니콘이니 핫셀이니 마미야니 라이카니 올림푸스니 하는 이름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 몇 가지 길입니다. 표준렌즈를 쓰느니 광각렌즈를 쓰느니 망원렌즈를 쓰느니 또한 여러 갈래 길입니다. 필름을 쓰느냐 디지털파일을 쓰느냐 또한 여러 갈래 길이며, 디지털파일에서도 raw가 있고 jpg가 있습니다. 필름에서도 흑백뿐 아니라 빛깔필름에서는 여느 필름과 슬라이드가 있습니다. 이 모두 사진쟁이들이 사진을 하는 숱한 길 가운데 하나이지, 이러한 길 가운데 어느 길로 가야 작품이 된다거나 멋이 담긴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틀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길만이 사진이 아니며, 이 모두가 사진으로 가는 길인 한편, 이 가운데 사진을 사진으로서 제대로 삭이며 살아내는 자리에서 오래도록 고이 이어가는 아름다움을 꽃피웁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사진이 되면 비로소 ‘사진은 예술’이라 말할 수 있고, 사진이 사진다우며 사진으로 나누는 삶이 무엇인가 하고 두루 선보일 수 있습니다.


.. 결국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전문가의 사진을 따라 찍는 것이 사진수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작가의 사진이지 자기 자신의 사진은 아니다. 같은 피사체를 같은 장소에서 찍는다 하더라도 찍는 사람에 따라 다른 사진이 되는 것은 각기 피사체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은 피사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피사체에 옮기고 이를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132쪽)


 1940년에 태어난 선우중호 님은 어느덧 일흔 나이입니다. 일흔 나이에 사진을 새로 배우거나 다시 배우라 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취미로 여기든 돈벌이로 삼든 어떻게 바라보든지, 사진이 참 좋아 사진길을 걷고자 하신다면 일흔 나이에라도 새롭게 사진을 배울 노릇이요 여든이나 아흔에도 새롭게 다시 배우며 사진을 찍을 노릇입니다. 나이를 많이 먹었기에 더는 새로 배울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힘들어서 못 배우겠다고 하신다면 사진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문화와 예술과 교육과 정치와 사회와 경제가 매한가지인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없고 오늘과 똑같은 글피가 없습니다. 늘 새로 태어나는 하루요 노상 새로 일구는 삶입니다. 최고경영자라는 이름이란 언제나 새롭게 일하며 한결같이 새로움을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우중호 님은 《FAMILY ZONE》을 내놓는 자리에서 “결국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진이란 “사진기를 든 내 삶을 보여주는” 노릇입니다. “자기 생각을 피사체에 옮기”는 일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이 내 사진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흑백사진으로든 빛깔사진으로든 이 사진 하나를 바라보며 나 스스로 가슴이 뭉클하다면, 이이는 사진을 잘 찍어서가 아니라 삶을 알차게 꾸렸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쉰 해나 예순 해를 해 왔다고 해서 이이 사진이 아름다울까요? 사진을 고작 한두 달만 했다고 이이 사진은 형편없을까요?

 사진에 담는 깊이란 사진을 찍어 온 밥그릇(찍은 필름) 숫자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온누리를 뜨겁게 부둥켜안으며 따스히 손잡고 살아왔는가 하는 데에 달린 사진 찍는 깊이입니다.

 사진에 담는 멋이란 어떤 사진 장비를 쓰거나 어떤 필름을 쓰거나 어떤 장치를 하느냐 하고 동떨어져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나 스스로를 아름다이 가꾸고자 땀을 흘렸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에 담는 멋입니다. (4343.5.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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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동기의 현장
이경모 / 눈빛 / 199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기자는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가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 이경모, 《격동기의 현장》(눈빛,1989)



 1926년에 태어나 1946년부터 호남신문사 사진부장으로 일했던 이경모 님은 《격동기의 현장》이라는 사진책에서 1945∼1951년 무렵 이 나라 삶자락을 하나하나 보여줍니다. 이경모 님이 일하던 신문사는 사라졌고, 한국전쟁 때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에서 뛰며 찍은 사진은 현상처리가 나빠 이 책에 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따로 갖고 있던 사진기에 담았던 필름이 남아 있어 이 사진책 하나를 꾸릴 수 있었답니다.

 우리한테 사진 문화가 조금이나마 있었다면 해방 이야기를 호남신문사에서 1945년에 내놓을 수 있었을 테며, 한국전쟁 이야기를 국방부에서 1953년에 펴낼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무렵에 사진책으로 엮지 않았기에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 삶자락을 담은 사진은 하나둘 자취를 감춥니다. 아니, 처음부터 빛을 보지 못합니다. 박도 님이 엮은 《그들이 본 한국전쟁》이라는 사진책이 있습니다만, 미국에 있는 도서관에 있든 누군가 개인으로 갖고 있든 오래도록 빛을 보지 못한 채 묻혀 있는 사진들은 이보다 훨씬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고 보면 지난 1996년에 《끝나지 않은 전쟁》(조지 풀러 사진,눈빛 펴냄)이라는 사진책이 나온 적 있습니다. 한국전쟁 모습을 미국 군인이 빛깔 사진으로 담아 엮은 책입니다. 우리 지난 삶자락을 돌아보는 더없이 애틋한 사진책이지만, 이 사진책은 거의 눈길을 못 받고 사랑 또한 못 받은 채 묻혀 있습니다. 사진책으로 나오지 못한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우리 나라인데, 애써 사진책으로 나왔다 할지라도 제대로 읽히거나 보이지 못하는 우리 나라입니다. 제아무리 잘 팔린 사진책이라 할지라도 1만 권 넘게 팔리는 일이란 몹시 드물고, 10만 권이나 100만 권 팔렸다는 사진책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이름있는 사진기들이 몇 만 대씩 팔리는 모습을 보노라면, 사진을 찍는 아름답거나 해맑은 길을 보여주는 사진책들이 조용히 묻혀 있는 모습이란 그다지 어울리지 않을 뿐더러,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이경모 님은 지난 2001년 5월 17일에 눈을 감았습니다. 사진과 얽혀 여러 가지 큰일을 했다지만 우리 문화와 역사에는 거의 아무런 자국을 남기지 못했고, 눈을 감은 소식을 찾아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진을 찍었건 저런 사진을 남겼건 이 땅에서는 제대로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 이런 눈물이 있건 저런 사람들 저런 웃음이 있건 이 나라에서는 찬찬히 헤아려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격동기의 현장》이 나온 1989년을 돌아보면 이경모 님이 1945∼1951년치 사진을 찍은 지 거의 쉰 해 만입니다. 어쩌면 군부독재 정권이 무너졌기에 이런 사진책 하나 비로소 나올 만하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해방 무렵 사진이란 해방을 맞이하고 쉰 해가 지나서야 빛을 볼 만한 사진은 아닐 텐데, 이 나라 책마을이나 사진마을은 이와 같은 사진을 두루 살펴서 널리 나누고자 힘쓰지 못했습니다. 이런 흐름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요즈음 우리 삶터를 요즈음 차근차근 돌아보며 요즈음에 알뜰살뜰 묶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느 사람들이 복닥이고 있는 눈물과 웃음이 어린 삶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그때그때 옮기며 웃고 울며 나눌 수 있으면 얼마나 반가울까요. 수수한 사람들 투박한 땀방울과 착한 손길을 그날그날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함께할 수 있으면 얼마나 기쁠까요.

 글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자리에서 어느 이웃하고 어깨동무하면서 글을 쓰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곳에서 어느 동무하고 손을 맞잡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은 어느 터전에서 어느 겨레붙이하고 부대끼면서 사진을 찍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해방도 격동기이지만 입시지옥도 격동기입니다. 한국전쟁도 격동기이지만 국가보안법도 격동기입니다. 여수ㆍ순천 사건도 격동기이지만 비정규직도 격동기입니다. 우리는 지난날과 오늘날과 앞날 격동기를 어느 만큼 헤아리면서 어느 만큼 올바른 눈썰미로 어느 만큼 알차게 보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글쟁이와 그림쟁이와 사진쟁이들만 탓할 수 없습니다. 정치꾼만을 탓한다고 정치가 달라지거나 나아지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를 돌아보며 우리 스스로 꾸리는 삶을 나무라며 가다듬는 가운데 정치를 바로세우도록 힘을 모아야 합니다. 바로 우리 스스로를 굽어살피며 우리 스스로 일구는 삶을 꾸짖고 뜯어고치는 가운데 문화와 예술이 살가이 꽃피우도록 뜻을 그러모아야 합니다.

 사진기자가 비틀어 보이는 거짓 사진에 홀리고 있는 우리들이라 한다면 몇몇 엉터리 사진기자들은 참을 비트는 사진을 자꾸자꾸 찍어서 내보냅니다. 사진기자가 엉터리 사진을 내놓을 때에 ‘이런 쓸개빠진 엉터리!’ 하면서 손가락질할 줄 안다면, 사진기자들이 우리들 앞에서 부끄러워 할 뿐 아니라 우리들을 두려워 하며 옳고 바른 사진으로 나아가고자 힘을 쓸밖에 없습니다. 엉터리 정치꾼이 나오는 까닭은 엉터리 유권자 때문이며, 엉터리 사진이 쏟아지는 까닭은 엉터리 독자 때문입니다. 참다운 정치꾼이 나오려면 참다운 유권자로 거듭나야 하며, 참다운 사진책이 나오려면 참다운 사진 독자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마땅한 노릇인데, 이제 어느 누구도 1945∼1951년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을 수 없습니다. 2009년 이야기 또한 어느 누구도 사진으로 찍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2010년 올해 이야기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으며, 5월 17일 어제나 5월 16일 그제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을 수조차 없습니다. 오로지 5월 18일 오늘 이야기만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으며, 하루하루 새로 맞이하는 그날그날 삶과 사람을 사진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사진쟁이란 언제나 바로 그때 그곳에 있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글쟁이와 그림쟁이는 바로 그때 그곳에 없었어도 글과 그림을 낳지만, 사진쟁이만큼은 총알이 빗발치든 군화발이 으르릉거리든 바로 그때 그곳에 머물며 삶과 죽음이 가로지르는 터에서 참거짓을 마주해야 합니다. 사진책 《격동기의 현장》은 이경모 님이 사진기자였기 때문에 낳을 수 있던 책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가로놓인 자리에 두 다리 튼튼하게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낳은 보배덩어리입니다. (4343.5.18.불.ㅎㄲㅅㄱ)

― 격동기의 현장 (이경모 사진,눈빛 펴냄,1989.11.10./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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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의 공명
지율 스님 지음 / 삼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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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율 스님 사진책은 시중 책방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지율 스님 다른 책에 이 글을 걸쳐 놓는다. 이 사진책은 녹색평론사에 전화해서 주문해야 한다. 이 사진책을 보고 싶은 분은 한 권에 3000원이니 10권을 3만 원에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해 주신다면 더없이 고맙겠다.)
 

 






 낙동강 삶터와 거짓말하는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8] 지율 스님, 《낙동강 before and after》



- 책이름 : 낙동강 before and after
- 글ㆍ사진 : 지율 스님, ‘낙동강 숨결 느끼기’ 순례 동행들
- 펴낸곳 : 녹색평론사 (2010.3.31.)
- 책값 : 3000원
(http://www.chorok.org)


 (1)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


 사진을 참말을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사진은 참말만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거짓말을 하기도 합니다.

 참을 밝히는 글이 있으나 거짓으로 가득한 글이 있습니다. 참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는 한편, 거짓으로 넘실거리는 그림이 있습니다. 참을 숨긴 목소리가 있고 참이 고스란히 담긴 목소리가 있습니다.

 바라보는 자리에 따라 사진을 다르게 느낀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쪽에 서 있느냐 저쪽에 서 있느냐에 따라 사진은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니까요. 우리 동네 한복판에 51층으로 올라설 아파트는 누군가한테는 아주 멋진 집자리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51층짜리 아파트 둘레에서 햇볕을 쬐지 못하고 찬바람만 씽씽 불어대는 곳에서 살아야 할 사람한테는 끔찍한 집자리입니다. 돈 몇 푼으로 햇볕권을 갚아 줄 수 없는 노릇이요, 살림을 꾸리는 넋을 보듬을 수 없습니다.

 헌책방을 속깊이 헤아리면서 책시렁을 가만가만 살피는 이들한테는 헌책방에서 숨죽이는 책들이 어떻게 아름답고 좋은가를 온몸으로 깨달으며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무슨 책 있어요?” 하고 묻기만 하거나 어쩌다 한 번 지나치는 걸음으로 찾아오는 사람한테는 헌책방처럼 구지레하거나 어수선한 데는 따로 없습니다. 누군가한테는 보배로운 책을 찾고 얻는 헌책방이지만, 누군가한테는 아무런 책이 없는 헌책방입니다.

 골목길을 오로지 추억이나 퇴락한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분이 있습니다. 골목길을 추억이나 퇴락한 곳이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치고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골목동네 사람으로서 살림을 꾸리는 이들은 내 터전인 골목길에 휴지 한 장 버리지 않습니다. 곱고 맑고 살갑게 일구고 돌봅니다. 골목동네 사람한테 골목길이란 추억 아닌 삶(현실)이며, 퇴락한 곳이 아닌 아름다운 곳입니다.

 서울과 부산을 네 시간으로도 모자라 두 시간 반이나 두 시간 만에 오가야겠다고 생각하는 이들로서는 수천 억이 아닌 수십 조를 쓰더라도 빠른기차를 놓아야 합니다. 수천 억이나 수십 조를 교육과 복지에 바쳐서, 대학 교육까지 개인이 돈을 내지 않고 나라에서 돈을 내도록 하면서 튼튼하고 곧은 배움마당이 되도록 마음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울과 부산을 오갈 빠른기차 때문에 얼마나 많은 논밭과 산들과 냇물이 파헤쳐지거나 무너지거나 앓고 있는지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주 빨리 휙휙 지나치는 ‘풍경’이지, 숱한 목숨과 사람이 기나긴 나날을 보내온 삶터에 기찻길을 놓았음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빠른기차를 달리며 바깥을 바라보는 사진하고 기찻길한테 자리를 내준 논밭이나 산들이나 냇물에 서서 빠른기차를 바라보는 사진은 다릅니다. 빠른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기차가 내는 어마어마한 소리를 느끼지 못합니다. 논밭이나 산들이나 냇물에 서 있는 사람은 삶자리를 빼앗겼을 뿐 아니라 무시무시한 소리까지 등에 업으며 귀를 막아야 합니다.

 자가용을 타고 골목을 쌩 하니 달리며 내다보는 모습이랑 오토바이를 타고 휙휙 달리며 골목을 둘러보는 모습이랑 자전거를 타고 바람처럼 달릴 때 골목을 쳐다보는 모습이랑 아이 손을 잡고 거닐며 골목을 둘러보는 모습은 저마다 다릅니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빨리빨리 달리기만 해서는 골목을 느낄 수 없습니다. 두 다리로 걷더라도 머리속에 자질구레한 생각조각이 많으면 골목을 한갓지게 거닐고 있어도 아무런 느낌을 못 받습니다.

 사진 하나를 찍는다고 할 때에는 내 사진감인 사람이나 짐승이나 자연이나 물건하고 함께 살고 있어야 합니다. 구경하는 삶으로는 구경하는 사진일 뿐입니다. 여행하는 사진은 거의 모두 구경꾼 사진입니다. 이러다 보니 여행 사진은 으레 그럴싸하거나 멋들어진 모습으로 꾸미려 할 뿐, 그 좋다고 하는 곳을 두루 다니면서 맛보고 받아들인 좋은 모습을 꾸밈없이 담는 가운데 스스로 조촐하고 아름답게 거듭나지 못합니다. 내 삶터를 찍고 내 사랑이를 찍으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언가를 찍어야 비로소 사진입니다.

 돈을 좋아하고 아파트를 아끼며 빠른기차와 자가용을 아끼는 사람한테는 ‘쇠삽날 재개발 정책’에서 장미빛 꿈을 들여다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을 파헤치는 모습을 보면서 큰물을 막는다느니 물을 잘 살려쓸 수 있다느니 일자리를 늘린다느니 아름다운 나라로 탈바꿈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엮어냅니다. 잔뜩 파헤쳐진 강바닥을 보면서 ‘이제 더 멋지게 다시 태어날 텐데?’ 하고 생각합니다. 강바닥에 박아 놓은 쇠말뚝을 바라보면서 ‘꿈처럼 아름다운 관광길’이 태어나겠거니 생각합니다. 서울 청계천하고 매한가지입니다.

 돈을 좋아하지 않고 자연 삶터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은 ‘4대강 살리기’란 무서운 말장난이면서 우리를 바보로 만드는 데에 엄청난 돈을 쏟아붓느라 정작 우리 삶을 망가뜨리고 있음을 들여다봅니다. 한강 낙동강 금강 섬진강뿐 아니라, 일찌감치 우리 둘레 우리들 조그마한 터전부터 어처구니없는 막공사와 막개발이 판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좋은 삶 좋은 삶터 좋은 자연이란 사람이 돈을 써서 억지로 꾸밀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 자연을 살리거나 사랑한다면 자연을 그대로 놓아 두기만 하면 되는 줄 헤아립니다. 씨앗 하나 스스로 뿌리를 내려 자라도록 지켜보기만 하면 넉넉한 줄을 읽습니다. 자연이 자연 그대로 있으며 자연스러울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터전이요, 이 아름다운 터전에서 우리들을 아름답게 어루만지는 멋과 웃음이 있음을 느낍니다.

 온누리 모든 사진은 사진기를 든 사람 눈높이와 삶자리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그래서 모든 사진은 다른 사람들한테 거짓말을 하는 사진이 됩니다. 구경꾼 사진은 동네 주민한테 거짓말 사진입니다. 동네 주민 사진은 구경꾼한테는 거짓말 사진입니다. 짓밟히고 억눌린 삶을 뜯어고치고자 집회를 하는 사람들한테는 몽둥이 휘두르며 집회를 때려부수는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 거짓말입니다. 몽둥이 휘두르며 집회를 때려부수는 경찰하고 한 자리에 선 사람들한테는 짓밟히고 억눌려서 집회를 하겠다는 사람들 이야기와 삶이 거짓말입니다. 흔히들 ‘왜곡 사진’이니 ‘비틀린 기사’이니 하지만, 왜곡이나 비틀림이란 없습니다. 모두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생각하고 살아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한테는 수수하고 꾸밈없는 매무새가 당신들 삶이지만, 누군가한테는 꾸미거나 겉발림하는 모양새가 당신들 삶입니다. 큰 돈과 큰 집과 빠른 차를 바라는 이들하고 가난과 작은 삯집과 두 다리로 살아가는 이들하고는 참거짓을 가르는 잣대와 금과 틀이 다릅니다.

 그렇다면, 사진은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옳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이 거짓말을 한다기보다 삶이 거짓말을 한다고 해야 옳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 찍을 뿐이지만, 사진기를 든 사람이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꾸리지 않을 뿐더러, 사진기를 든 사람이 당신 삶을 돈바라기로 내몰고 있기 때문에 돈바라기 사진이라는 허울을 감추고 있다고 해야 옳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2) 지율 스님 사진 《낙동강》


 ㅈ일보는 지율 스님이 찍은 사진을 놓고 “이들의 허위 선동은 국민 가슴에 근거 없는 증오를 심고, 막대한 국가 예산을 낭비하게 만든다(2010.5.11.)”고 이야기합니다. 또다른 ㅈ일보는 “현지 민심부터 읽어야 한다. 더 이상 식상한 이벤트로 감동을 줄 수 없다. 우리 사회를 움직이려면 논리적인 설득만이 유일한 길이다(2010.5.13.)”라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지율 스님은 《낙동강 before and after》(녹색평론사)라고 하는 아주 조그마한 사진책을 내놓으며 사진잔치를 열고 있습니다. ㅈ일보에서 논설위원으로 있거나 기자로 뛰는 분들이 지율 스님 사진책을 읽었는지 궁금하며, 지율 스님 사진잔치에서 사진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또는 지율 스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 강을 파괴하고 그 위에 세워진 시멘트 기둥을 자연과 신의 선물로 부르는 사람들에 의해 4대강 사업은 계획되고 진행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은 더 많은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우리의 강은 원형을 잃고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녹색의 그믈망에 덮여 있는 저 베어진 나무들은 얼마전 까지 우리와 함께 호흡하며 바로 이 강가에 서있던 생명들이었다. 한 나무들의 봄은 우리의 봄이었고 그 나무들의 여름은 우리들의 여름이었다. 그 나무들의 죽음은 바로 계절의 죽음이며 강의 죽음이며 우리들의 죽음이다 ..  (초록의 공명/2010.2.11.)


 지난 2007년에 사진쟁이 홍순태 님이 《낙동강》(눈빛)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습니다. 홍순태 님은 1970년대 낙동강 물줄기와 낙동강 둘레 터전을 다니면서 찍은 사진을 책 하나로 묶었습니다.

 올 2010년에 스님 지율은 《낙동강 before and after》라는 작은 사진책을 내놓으며 2009년과 2010년에 낙동강 물줄기와 낙동강 둘레 터전이 어떻게 바뀌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2007년에 빛을 본 사진책 《낙동강》에서는 2000년대에는 찾아볼 길이 없는 1970년대 낙동강 삶자락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사진책 《낙동강》은 1970년대에 홍순태 님이 찍은 사진일 뿐, 1960년대나 1950년대나 1940년대나 이 사진에 깃든 모습하고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들 옷차림을 바꾼다면 1870년대라든지 1770년대라든지 1670년대하고도 다를 바 없겠지요. 아마 1070년대라든지 570년대하고도 어슷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2010년에 빛을 보는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에서는 2000년대에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쇠삽날 개발 정책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2009년과 2010년에 이르러 갑작스레 사라져 버리는 수많은 모습이 어떻게 사라지고 마는가를 찬찬히 알려줍니다.

 사진쟁이 홍순태 님은 “낙동강은 단순히 자연경관을 이루는 자연의 일부만이 아니라 물의 원천이요, 물은 인간의 희망이기도 하다. 오염되지 않은 맑은 물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삶을 살찌운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수자원의 원천이며 우리 고유문화의 젖줄이기도 한 낙동강의 옛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남기고 싶었다”고 덧붙입니다.

 스님 지율은 “무엇보다 어둠에 잠기기 직전 강가에 물드는 보라빛 낙조를 보여주고 싶다”고 이야기합니다. 당신은 “천성산을 통해 나는 자신이 서 있는 땅의 역사와 문화를 자신이 신고 다니는 신발만큼도 여기지 않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국토가 맡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단 한 번도 천성산을 밟아 보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아무런 애정도 관심도 없는 자들의 기술적인 잣대에 의하여 천성산은 무너지고 파헤쳐졌다. 천성산은 내게 우리의 국토가 처해 있는 아픔과,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기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었다”고 덧붙입니다.


.. 눈이 아픈 현장들을 담은 사진전을 여는 이유는 -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심 없이 무참하게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4대강 개발의 실상을 알리고, 금수강산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산하를 돌이킬 수 없이 파괴한 시대를 살다간 한사람으로써 도덕적 책임을 느끼고 우리 뒤에 올 이들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  (초록의 공명/2010.3.30.)


 스님 지율은, 또는 지율 스님은 왜 밥굶기 싸움에 이어 사진찍기로 접어들었을까요.

 스님 지율은, 또는 지율 스님은 왜 그토록 기나긴 밥굶기 싸움을 하면서도 목숨을 잃지 않았으며, 그토록 가녀린 몸뚱이로 작은 사진기를 어깨에 달랑달랑 걸치고는 기나긴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걷고 또 걷고 다시 걷고 있을까요.

 《낙동강》을 펴낸 사진쟁이 홍순태 님은 강물이 얼어붙을 때이든 큰물이 져 풀집이 물에 잠기든 낙동강으로 달려갔습니다. 《낙동강 before and after》를 펴낸 스님 지율은 낙동강 물줄기에 쇠삽날이 한 번 찍히고 두 번 찍힐 때마다 거듭거듭 사진기 단추를 누르고 있습니다.


.. 제가 초록의 공명이라는 이름의 창을 쉽게 닫지 못했던 것은 문명과 자본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과도하게 자연을 파괴하는, 혹은 소유하는 행위가 계속 된다면 이 오리섬에 깃들었던 많은 생명들의 몰락처럼 멀지 않은 시간에 우리도 지구라는 별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하긴 인간이 지구에서 사라질 동원은 무수히 많아 보이고 살아남을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것이 더 사실적이기는 합니다 ..  (초록의 공명/2010.2.3.)


 무엇을 참이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무엇을 거짓이라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자연에는 태어남만 있지 않고 죽음이 함께 있는데, 우리는 우리 사람 삶을 어떻게 돌아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람은 살면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무엇을 담아서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어떤 모습에 어떤 이야기가 깃들었다고 읽어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은 거짓부렁 사진일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을 거짓부렁이라고 온나라 수백만 사람들한테 외치고 있는 사람이 거짓부렁 목소리일는지 궁금합니다.

 지율 스님 목소리는 고작 수십 또는 수백 사람 귀에만 들어가는데, 수백만 사람 앞에서 외치는 목소리는 이 낮고 작은 목소리가 무엇이 그리도 무섭거나 두려워서 그렇게 비아냥거리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비아냥거리기 앞서 지율이라고 하는 스님 하나가 선 낙동강 물줄기에 나란히 서 있어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깎아내리거나 손가락질하기 앞서 산을 보고 물을 보며 흙을 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물과 바람과 밥이 아닌 돈과 이름과 힘을 먹어야 살 수 있는 목숨인지 궁금합니다.


.. “여러분도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직접 걸으면서 느꼈을 것입니다. 먼젓번 순례에 참가한 외국인 한 분은 전 세계 어디서도 낙동강처럼 아름다운 강을 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  (낙동강 before and after/36쪽)


 서울과 부산을 잇는 빠른기차를 놓고 싶다면 놓을 수 있습니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빠른전철을 놓고 싶다면 놓을 수 있습니다.

 빠른기차는 서울과 부산 사이에서 거의 안 멈추고 달립니다. 빠른전철은 서울과 인천 사이에서 드문드문 설 뿐 신나게 달립니다.

 빠른기차가 있어야 하는 만큼, 아니 빠른기차가 있어야 하는 까닭보다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골골샅샅 이웃동네를 오갈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빠른전철이 있어야 하는 만큼, 아니 빠른전철이 있어야 하는 까닭보다 느린전철이 있어야 합니다. 옆동네를 드나들 느린기차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느린기차와 느린전철을 넘어, 자전거와 두 다리와 아기수레로 오갈 조용하고 걱정없으며 오붓한 길이 있어야 합니다.


.. 지난 주말, 설악산의 단풍객이 5만이 넘었고, 해운대 광안리 불꽃놀이 인파가 70만을 넘었으며, 올 시즌 야구 관람객은 600만을 돌파했다고 한다. 오색 단풍의 풍광, 바닷가의 현란한 불꽃놀이, 운동장의 함성과 열기에 이의를 달 수는 없다. 하지만 억만 년 이어져 내려온 자연의 물길이 위험에 처해 있고, 그 재앙에 대한 경고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야기되고 있어도, 태어나 자라게 해 준 국토가 겪는 아픔의 현장으로 향하는 발길은 너무나 드물다 ..  (낙동강 before and after/10쪽)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즐기는 사진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보는 사진은 거의 모두 빠른기차와 빠른전철하고 맞닿은 사진입니다. 느린기차와 느린전철을 닮은 사진이 아주 드뭅니다. 자전거로 천천히 달리는 사진은 더욱 드뭅니다. 아기수레를 끄는 사진은 손에 꼽을 만큼 적고, 두 다리로 거니는 사진은 아예 보이지조차 않습니다.

 저는 손빨래를 사랑합니다. 우리 옆지기도 손빨래를 사랑합니다. 엄마랑 아빠가 손빨래를 사랑하는 만큼 우리 딸아이 또한 손빨래를 사랑하여 머잖아 제 손으로 제 옷가지를 빨래하는 날을 맞이하리라 봅니다.

 저는 우리 식구 옷가지를 손빨래로 깨끗하게 건사하는 삶을 사랑하듯이 제가 마주하는 삶을 손빨래하는 마음으로 사진 한 장에 담고 두 장에 싣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마찬가지입니다. 손빨래를 하고, 두 다리로 걸으며, 동네에서 생협하고 어깨동무하는 내내 알맞게 벌고 알맞게 일하며 알맞게 노는 삶을 좋아합니다.

 홍순태 님 사진책 《낙동강》하고 지율 스님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를 포개어 놓으며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지율 스님 사진책은 고작 50쪽짜리인데다가 앞등조차 없어 책꽂이에 꽂으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지율 스님 사진책은 여느 책방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출판사에 전화를 걸어 여쭈어야 따로 받아 볼 수 있을 뿐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낮은 자리에서 만들며 낮은 자리에서 나누는 사진입니다. 이런 낮은뱅이 사진이 뭇사람을 쑤석거린다든지 엉터리 이야기를 퍼뜨린다든지 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낙동강에 선 사람들은 낙동강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니까요. 낙동강에 박힌 쇠말뚝을 본 사람들은 낙동강이 얼마나 아파하는가를 받아들이니까요.

 사진책 《낙동강》에서는 우리가 기나긴 나날 아름다이 건사해 오며 울고 웃고 보듬던 물줄기 삶터를 보여줍니다. 사진책 《낙동강 before and after》에서는 우리 스스로 짓밟아 버리며 등돌리는 바람에 앞으로는 더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할 슬픈 물줄기 생채기를 보여줍니다.

 사진은 아름다움을 말없이 말하기도 하지만, 사진은 슬픔을 눈물과 함께 보여주기도 합니다. 사진은 사랑이지만, 사진은 미움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눈물을 담은 땀방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겉치레 돈벌레 몸짓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따스한 손길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우악스런 주먹다짐이기도 합니다. 사진은 너그러운 어버이 품이기도 하지만, 사진은 차가우며 매몰찬 총칼이기도 합니다. (4343.5.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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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과 반동
이갑철 사진, 강운구.김용택 글 / 포토넷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내 사진은 ‘엉터리’입니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7] 이갑철, 《충돌과 반동》



- 책이름 : 충돌과 반동
- 사진 : 이갑철
- 펴낸곳 : 포토넷 (2010.4.1.)
- 책값 : 7만 원



 (1) ‘대가’와 ‘엉터리’


 언제부터인가 우리 나라 사진밭에서 ‘대가(大家)’라는 이름이 붙는 사람이 생겼습니다. 나라밖에서 그리 알아주지 않으나, 나라안에서는 서로서로 추켜세우거나 부추기면서 ‘대가’가 되는 분이 있습니다. 꼭 나라밖에서 알아주어야 훌륭한 사람이지 않습니다. 나라안에서 몇몇이 알아준다 하여도 얼마든지 훌륭한 사람입니다.

 크게 뜻을 이루었다는 분들이란 어떤 분들인지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오랜 나날에 걸쳐 작품 하나 빚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작품 하나 빚기까지 오랜 나날을 보냈기에 크게 뜻을 이룬 셈일는지요.

 다른 어느 문화밭이나 예술밭보다 사진밭에서 ‘대가’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고 팔리고 나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대가라는 이름이 붙거나 이 이름을 붙이는 분들 사진책은 좀처럼 팔리지 않습니다. 대가라는 분들 사진책이 덜 팔린다고 이분들이 대가가 아니라 할 수 없습니다. 많이 팔리는 사진책을 내놓았다고 대가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사진을 처음 배울 무렵부터 사진을 꾸준히 찍고 사진책을 차근차근 즐기는 오늘날까지 “대가 = 엉터리”이고 “엉터리 = 대가”가 아닌가 하고 느끼고 있습니다. 머리로 품는 생각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대가라고 일컫거나 둘레에서 대가라고 일컫는 이름에 흐뭇해 하거나 고개를 끄덕이거나 손사래치지 않는다면 그예 엉터리에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느낍니다. 남들이 엉터리라 하든 스스로 엉터리라고 이야기하든 엉터리 소리를 흔히 듣거나 자주 듣거나 으레 듣는다면 이이야말로 대가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느냐고 느낍니다.

 작품 하나로 그치는 대가란 없습니다. 작품 하나로 마무른 대가라 한다면 새로운 작품 하나로 나아갈 노릇이요, 지난날 당신이 이룬 대가다운 작품은 더는 건드리지 말아야 할 노릇이라고 봅니다. 작품 하나를 일군 대가라 한다면 하루하루 새 나날을 보내는 동안 당신이 지난날 이룬 대가다운 작품을 깎고 보태고 다듬고 손질하면서 마지막 숨결을 잇는 그때까지 땀흘리기를 멈출 수 없는 노릇이라고 봅니다.

 한자말로는 ‘대가’라지만, 우리 말로는 ‘큰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하든 글쓰기를 하든 그림그리기를 하든, 우리가 굳이 큰그릇만 되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작은그릇이면 어떠하고 작은그릇조차 못 되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우리는 크거나 작은 그릇이 되고자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내 삶을 사랑하는 만큼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내가 아끼는 만큼, 내가 알아 가는 만큼, 내가 고개숙이는 만큼, 내가 부대끼는 만큼, 내가 껴안는 만큼, 내가 느끼는 만큼, 내가 깨닫는 만큼, 내가 믿고 보듬는 만큼 일을 하고 놀이를 한다고 봅니다.

 큰사람이 되라고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습니다. 저 또한 딸아이 하나를 옆지기와 낳아 함께 복닥이고 씨름하는 나날을 보내며 생각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아빠나 엄마보다 크고 거룩하고 훌륭한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착하고 참되고 고운 사람으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살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큰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이란 처음부터 큰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작은그릇이 되라고 빚는 작품 또한 마찬가지인데, 아마 작은그릇이 되라고 작품을 빚는 사람은 없을 테지요. 다들 당신들 삶을 고루 담아내는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열매 하나를 생각하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억지로 짜맞추거나 끼워맞추거나 들어맞추도록 하려는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당신들 삶을 찬찬히 실어내며 따사로운 보람 하나를 헤아리는 사진이라기보다, 무언가 더 크고 높게 내세우거나 내놓으려고 하는 작품으로만 헤아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작가’라는 이름을 걸치고 ‘대가’라는 옷에 휘감긴 채 ‘작품’이라는 굴레를 뒤집어쓰고 있습니다.

 좋아서 하는 사진이어야 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사랑해서 하는 사진이어야 옳지 않으랴 싶습니다. 즐기며 함께하는 사진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열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복닥이는 삶이란 아무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쉰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얽매일 사슬이란 참으로 부질없습니다. 앞으로 백 해 뒤를 내다보면 오늘 하루 악다구니를 쓰듯 붙잡으려는 힘-돈-이름이란 가없이 덧없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사랑하며 즐기는 사람 하나로서 생각합니다. 부디 이 나라에서 사진으로 일거리를 찾고 이름값을 높이며 돈벌이를 하는 한편 큰배움터나 문화마당 같은 자리에서 가르치는 분들 누구나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곰곰이 곱씹으면 고맙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을 왜 하고, 사진을 왜 찍고, 사진을 왜 가르치며, 사진을 왜 보여주고, 사진을 왜 돈 받고 파는지를 찬찬히 되새기면 반갑겠습니다. 사진을 책 하나로 엮는 까닭을 생각하고, 당신이 찍어서 엮은 사진책을 사람들 앞에 선보이는 까닭을 생각하면 기쁘겠습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말해야 한다는데, 마땅히 글은 글로 말하고 그림은 그림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더없이 마땅한 이야기를 괜히 멋부리듯 읊지 말고, 그저 그대로 온몸과 온마음 고스란히 내맡겨 스스로 사진삶을 일구는 모습이 사진에 담기도록 힘을 쏟아야지 싶습니다. 삶이 그대로 글이고 그림이듯,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글쟁이와 그림쟁이뿐 아니라 사진쟁이 또한 삶이 어떠한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자꾸자꾸 대가라는 이름에 매여 있는 당신 삶을 풀어 놓지 못한다면, 어설픈 이름 하나 얻을는지 몰라도 이러한 이름이 사진일 수 없습니다. 사진이란 이름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권력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돈값이 아니니까요. 사진은 사진이니까요. 사진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내 사진은 아직 엉터리’라고 여기며 늘 새롭게 거듭나거나 다시 태어나려고 몸부림을 치기 마련이니까요.
 











 (2) 다시 나온 사진책 《충돌과 반동》


 2002년에 처음 나왔던 사진책 《충돌과 반동》이 새옷을 입고 다시 나왔습니다. 예전 판은 보지 못했는데, 새옷을 입고 나온 책은 예전 판에 실린 사진하고 똑같다고 합니다. 예전 책에는 육명심 님 글이 붙어 있었으나 이 글을 덜고 강운구 님 글을 새로 붙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쟁이 이갑철 님으로서는 2002년이나 2010년이나 《충돌과 반동》이라는 작품 하나만을 내놓은 셈입니다(2009년에 《RED》라는 작품을 내놓으셨데 ‘충돌과 반동’이라는 사진감으로는 여덟 해 동안 다른 발돋움이 없었다는 소리입니다).

 충돌이 있고 반동이 있대서 책이름이 《충돌과 반동》이요, 이갑철 님이 일구어 온 사진밭은 다름아닌 충돌과 반동이라는 낱말로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영어로는 ‘conflict’와 ‘reaction’으로 적는데, 우리 말로는 ‘부딪힘’과 ‘거스름’ 또는 ‘부대낌’과 ‘튕김’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거나 부딪히고,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거스르거나 튕깁니다. 부대끼는 사람들은 서로 얼싸안거나 어깨동무를 하고, 때로는 밀어내거나 등을 돌립니다. 따지고 보면 아무리 사랑스러운 사이라 할지라도 만나고 헤어지기를 되풀이합니다. 충돌과 반동이란 그치지 않는 흐름이요, 만남과 헤어짐이며, 잠과 깸입니다. 해와 함께 달이 있듯,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습니다. 밥하고 똥은 다르지 않으며, 어른과 아이는 똑같이 고운 목숨입니다.

 이갑철 님이 2002년에 보여주었던 《충돌과 반동》은 여덟 해가 흐른 2010년에 이르러서도 그리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 삶터는 고작 여덟 해로서는 달라지지 않는 탓입니다. 아니, 앞으로 열여덟 해나 여든 해가 흐르더라도 그리 달라질 듯하지 않는 탓입니다. 돌이켜보면 지나온 여든 해조차 사람들이 서로 악다구니가 되어 돈이며 이름이며 힘이며 더 움켜쥐려고 할 뿐, 더 나누거나 더 베풀거나 더 내려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더 바빠지는 삶이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어슷비슷합니다. 더 바쁘고 덜 바쁘고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우리 흐름을 붙잡지 못합니다. 우리 삶이 어떠할 때에 우리 스스로 즐겁고 아름다운가를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 길이 어디로 이어질 때에 우리 스스로 신나고 맑은가를 깨닫지 못합니다. 우리 터전을 어떻게 가꿀 때에 우리 스스로 반갑고 넉넉한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같은 일이 되풀이되는 한국땅입니다. 같은 잘못이 이어지고 같은 슬픔이 잇달으며 같은 생채기가 자꾸 파이는 한국땅입니다. 이름과 때와 곳이 다를 뿐, 지난날과 오늘날 이 땅에서 벌어지는 크고작은 이야기들이란 거의 한결같습니다.

 이러한 한국땅에서 《충돌과 반동》에 깃든 이야기는 예나 이제나 어슷비슷하게 받아들여지리라 봅니다. 제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는 셈이요,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예나 이제나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셈입니다.

 이리하여, 이갑철 님으로서는 딱히 새로운 작품을 일구어 새로 나오는 책에 보탤 까닭이 없습니다. 《충돌과 반동》은 2002년에든 2010년에든 2022년에든 2102년에든 똑같은 사진책이 되고, 똑같은 느낌이 되며, 똑같은 삶으로 자리잡습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한테나 사진을 찍는 사람한테나 어떠한 움직임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스스로 ‘달라질 삶’을 찾지 않습니다. 사진에 담는 사람 또한 ‘달라질 삶’을 붙잡지 않습니다.

 좋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이어가는 삶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넉넉하다고 여겨 예나 이제나 그대로 내놓는 사진일는지 아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우리 나라 이 삶터는 새로운 흐름이란 없고 달라질 삶이란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사람들 마음에는 한껏 넓고 깊으며 따뜻하고 애틋한 사랑이 스며들 틈바구니가 없습니다. 이런 틈바구니가 가부장제도이든 남녀 신분과 계급이든 마을과 고을이든 보수와 진보이든 시골과 도시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가 좋다면 무엇이 있는 그대로일까요. 이어온 대로 좋다면 무엇이 예부터 이어온 줄기일까요.

 2010년에 새옷을 입고 거듭 태어난 《충돌과 반동》이란 미식가한테 맛난 밥이 되듯 소장가치가 있어 집안에 모셔 둘 만한 사진책인지, 또는 2002년에는 사람들이 읽어내지 못한 깊은 얘기가 있어 2010년이 된 오늘날부터는 새롭게 받아들일 얘기를 건네려고 내놓은 사진책인지, 또는 사진쟁이 이갑철 님을 대가로 섬기고자 마련한 사진책인지, 또는 웅숭깊은 사진말이 없는 한국땅 사진밭에 새 기운을 불어넣고자 선보이는 사진책인지 궁금합니다. 어느 쪽이 되든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에 담으려는 젊은 사진쟁이한테는 고맙고 드물며 반가울 사진말로 다가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사진으로 담는 젊은 사진쟁이가 몇 사람쯤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꼭 젊은 사진쟁이가 아니더라도 대가를 이루었다는 사진쟁이들한테 이 사진책 하나가 얼마나 말걸기로 파고들 만한지 모르겠습니다. 마음을 열 수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열 만한 마음밭이 있느냐 없느냐부터 걱정할 판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는 어슬렁거리며 작은 방의 프린트들을 뜯어보며 고생많았겠다고 생각했다. 프린트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주로 어두운 상황에서 뭔가를 본 순간에 쏠려고, 그러나 될 수 있는 한 심도를 깊게 하면서도 셔터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필름의 감도를 두 배나 네 배로 올려서 찍는다”고 이갑철은 나에게 말했다.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흔들리고 초점이 나간다. 그래도 이갑철은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흔들림과 초점이 나간 흐릿함에 귀신들이 깃들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갑철 사진의 흔들림, 불안정한 구도, 자동 카메라를 잘못 쓴 것 같은 엇나간 초점 같은 것들은 처음부터 고의적인 의도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윌리엄 클라인의 경우에서처럼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을 과감하게 수용하다가 점차 귀신 잡는 기법으로 발전시켜 나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 기법은 머리의 얄미운 계산이 아니라 뛰는 가슴의 어쩔 수 없는 필연과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  (130쪽/강운구 풀이말)


 2002년에 첫선을 보인 사진책 《충돌과 반동》에는 1990년대 사람들 삶자락이 이갑철 님 눈길로 담겨 있습니다. 이갑철 님은 이갑철 님 눈썰미로 사람들을 마주하고 들여다보았기에 《충돌과 반동》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데, 이갑철 님한테 당신한테만 남다른 눈길이 있기 앞서, 먼저 이갑철 님한테 보여지며 마주한 사람들이 오랜 나날을 당신들 터전에서 고이 살아내 왔기 때문에 이갑철 님 남다른 눈매가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뿐 아니라 지난날 숱한 사진쟁이들이 흔히 놓치는 대목이란 바로 사진에 담기는 사람들 삶자락이 거쳐 온 발자국 하나하나입니다. 옛날 사람이란 없고 오늘날 사람 또한 없습니다. 옛날 모습이란 따로 없고 오늘날 모습 또한 따로 없습니다. 옛날 결하고 오늘날 결은 있으나, 이 또한 사람들이 서로 복닥이거나 부대끼면서 이루어 내는 삶을 돌아본다면 언제 적 모습이니 어쩌니 하는 갈래 나눔이란 덧없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그대로 농사짓고, 낫질하는 사람은 똑같이 낫질하고, 절집 다니는 사람은 그예 절집을 다니고, 성모상에 절하는 사람은 언제나처럼 성모상에 절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이러한 기나길며 고스란히 이어지는 결 가운데 어느 하나를 사진쟁이 남다른 눈으로 잘라내거나 옮겨내거나 이어받아 한 가지 모습으로 선보이는 손짓입니다.

 함부로 잘라낼 수 없는 사람들 삶입니다. 섣불리 따지거나 잴 수 없는 사람들 마음입니다. 흔들리는 모습으로 찍혔다 한들 사람들 삶입니다. 조금 어둡게 찍히든 더욱 밝게 찍히든 사람들 삶입니다. 사람들 삶을 어떻게 마주하느냐를 느껴야 할 사진찍기이고, 사람들 삶을 나 스스로 어떻게 맺고 사귀고 다가서며 스며들며 어우러지는가를 느껴야 할 사진읽기입니다.

 어떤 사진기를 쓰든, 어떤 필름을 쓰든, 어떤 디지털 장비를 쓰든, 어느 사진감을 붙잡든, 어느 갈래 사진길을 걷든 더 낫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바라보는 눈길보다 바라보는 눈길에 서린 삶을 느낄 노릇입니다. 사진에 담길 사람들 삶을 헤아리는 마음결만큼 내 사진기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이나 자연 터전이나 물건들이 바로 나와 내 사진기를 어떻게 느끼며 마주하고 있느냐를 나란히 곰삭일 노릇입니다.

 그나저나, 2010년판 《충돌과 반동》은 곱게 여민 옷자락에 정갈하고 말끔하여 멋스럽지만, 책값 7만 원이란 지나치게 짐스럽습니다. 책꽂이에 박아 놓을 사진책이 아니라 한다면 좀더 단출하고 자그마한 그릇으로 여미어 한결 수수하며 너른 이야기자리가 되도록 매만질 때에 바야흐로 푸진 사진결이 빛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7만 원이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7만 원으로 이 사진책을 두어 권 장만할 수 있도록 여밀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을 지울 길 없습니다. (4343.5.1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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