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소파 - 세상에 말을 건네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지음, 민병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6월
평점 :
절판



 사진으로 만나는 사람들한테서
 [찾아 읽는 사진책 53]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붉은 소파》(중앙books,2010)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님은 ‘붉은 소파’를 들고 다니면서 사람을 만나고, 이렇게 만난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과 영상으로 담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님 사진이 어떠하고, 당신이 사진과 영상으로 담은 이야기를 어떻게 들려주는지 알 길이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런 얘기 저런 소식을 듣는다 하더라도 막상 한국말로 옮겨진 사진책이 없다면 어떠한 작품으로 어떠한 사진이야기를 엮는지 알 수 없으니까요. 지난 2010년 6월에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님 사진책 《붉은 소파》(중앙books)가 한국말로 나와 무척 반갑게 장만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님뿐 아니라, 온누리 곳곳에는 남다르며 빛다른 결로 사진이야기 엮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한국땅에서만 살아간다면 이런저런 수많은 온누리 사진흐름을 알거나 읽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아주 좁게 바라보고 아주 작은 대목만 헤아릴 테지요. 적어도 이웃 일본으로는 찾아가서 사진책을 살피거나 사진잔치를 돌아볼 수 있어야 사진흐름을 읽을 만하달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찾아가서 사진학교를 다니거나 사진잔치를 돌아보아야 비로소 온누리 사진흐름을 읽었다 할 만하달 수 있어요.

 

 《붉은 소파》를 찬찬히 읽습니다. 먼저 사진을 읽고, 다음으로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님은 당신이 사진과 영상으로 담은 사람들한테 몇 가지를 똑같이 묻는데, 사람들이 이 물음에 모두 대꾸했는지, 몇 가지만 대꾸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사진 왼편에 적힌 이야기를 보면, 모든 물음에 찬찬히 대꾸한 사람이 있지만, 몇 가지만 대꾸한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한 가지 놀랍다면, 다시 태어난다 했을 때에 마하트마 간디라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 사람이 셋이나 돼요.

 

 폭신폭신한 걸상에 앉도록 하고서 이야기를 나누기에 사진으로 찍힌 사람들이 한결 느긋하면서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 수 있는가 하고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폭신폭신한 걸상이 아닌 딱딱한 걸상이라면, 이를테면 나무걸상이나 돌걸상이나 쇠걸상이라면 어떠했을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걸상이 다르대서 다른 이야기가 나오겠느냐 싶으면서, 걸상이 다르면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겠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을 사진관(스튜디오)으로 불러서 사진으로 찍을 때랑, 사람들은 내 집으로 불러서 사진으로 찍을 때랑,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로 찾아가서 사진을 찍을 때랑, 어느 자리나 똑같지는 않아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찍고 싶은 모습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듣고 싶은 이야기를 듣습니다. 사람들이 조금 더 느긋하며 홀가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주기를 바라는 사진쟁이라면 이와 같은 자리를 마련하겠지요. 사람들한테서 ‘무언가 다른’ 모습을 끄집어내어 ‘무언가 다른’ 빛을 사진으로 담고 싶다면, 이와 같이 사진을 찍을 만한 자리를 만들겠지요. 느긋하거나 홀가분한 자리를 마련한대서 더 대단하지 않습니다. 딱딱하거나 남다르거나 빛다르거나 무언가 새롭다 싶은 자리를 만든대서 더 놀랍지 않습니다. 어떠한 자리를 마련하든 이야기를 듣고 이야기를 적바림할 때에 사진이 됩니다.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님은 굳이 ‘붉은 소파’가 없더라도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애써 ‘붉은 소파’를 들고 다니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러 ‘붉은 소파’를 들고, 추운 땅과 더운 땅 어디이든 찾아갑니다. 시골이든 도시이든 멧골이든 ‘붉은 소파’와 함께합니다. 참 재미납니다. 그래요, 재미나게 살아갑니다. 사진으로 찍힐 사람들은 저 재미난 사진쟁이 앞에서 말문을 틉니다. 굳이, 애써, 부러 찾아온 사진쟁이를 마주하면서 참 재미나다고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이녁을 찾아온 사진쟁이가 참 뭔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느끼는구나 싶어요.

 

 《붉은 소파》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른바 더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만한 ‘이름나다’는 사람이 있고, 그닥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일이 없을 ‘이름 안 났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여느 사람이 있을 테고, 수수한 사람이 있을 테지요. 잘난 사람이 있을 테며, 알려진 사람이 있겠지요. 그러나, 나로서는 잘 알 수 없어요. 이 사람 가운데 누가 ‘여느’ 사람이고 누가 ‘대단한’ 사람이며 누가 ‘수수한’ 사람이고 누가 ‘놀라운’ 사람인지 알 수 없어요. 그저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나와 ‘똑같은’ 목숨을 누리는 사람이요, 나와 ‘똑같이’ 사랑스러운 나날을 누리는 사람이에요.

 

 사진으로 만나는 사람들이기에 더 적바림할 만한 값이 있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담기지 않은 사람들이기에 더 적바림할 만한 값이 없지 않습니다.

 

 내가 내 아이를 만나 이야기를 듣고서 사진으로 담아도 인류학이 됩니다. 내가 이제껏 나한테 낯선 길손 한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들은 다음 사진으로 담아도 인류학이 됩니다. 내가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을 사진으로 담든, 내가 영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을 사진으로 담든, 언제나 사람 이야기예요.

 

 내가 누군가를 안다면, 나는 이 누군가를 얼마나 잘 밝히는 앎으로 이이를 사진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내가 누군가를 모른다면, 나는 이 누군가를 얼마나 못 보여주거나 얼마나 못 담는 사진을 찍을까요.

 

 사람들이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람들이 사람들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습니다. 사람들이 사람들 이야기를 눈여겨봅니다. 사람들이 사람들을 만납니다.

 

 사마귀가 알을 낳습니다. 연어가 알을 낳습니다. 거미가 알을 낳습니다. 사람이 아기를 낳습니다. 짐승이 새끼를 낳습니다. 모두들 제자리를 찾아 목숨을 잇습니다. 밤을 적시는 비가 내리고, 새벽을 밝히며 동이 틉니다.

 

 ‘붉은 소파’는 바람을 맞으며 달립니다. ‘붉은 소파’는 바닷물에 젖고 빗물에 젖으며 냇물에 젖습니다. 어린이 궁둥이를 품에 안던 ‘붉은 소파’는 할머니 궁둥이를 품에 안습니다. 독일에서 노르웨이를 거쳐 아이슬란드를 지나 프랑스를 밟고 영국을 스칩니다. 어쩌면, 일본이나 한국이나 중국이나 페루나 칠레나 볼리비아도 거칠는지 몰라요. 스리랑카나 티벳이나 몽골이나 부탄이나 네팔을 지날는지 몰라요. 일본에서는 정치꾼을 앉힐 수 있을까요. 한국에서는 비정규직 일꾼을 앉힐 수 있을까요. 중국에서는 공장 일꾼을 앉힐 수 있을까요. 페루에서는 누구를 앉히고 스리랑카나 베트남에서는 누구를 앉힐까요.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사랑할 만한 보금자리를 찾습니다.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사랑할 만한 짝꿍을 사귑니다.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사랑할 만한 삶을 누립니다. 사진이 사람을 담는다 한다면, 사진으로 담기는 사람들 이야기란 오직 하나, 사랑이 되겠지요. 사랑은 가까운 곳에도 있고 먼 곳에도 있습니다. 사랑은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어요. 사랑은 나한테도 있고 당신한테도 있습니다. (4345.1.19.나무.ㅎㄲㅅㄱ)


― 붉은 소파 (호르스트 바커바르트 사진,민병일 옮김,중앙books 펴냄,2010.6.28./1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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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作寫眞館 4卷 星野道夫「アラスカ」 (小學館ア-カイヴスベスト·ライブラリ-) (大型本)
호시노 미치오 / 小學館 / 2006년 2월
평점 :
품절


 

 

 

 

 

 

 

 

 


 아름다운 벗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46] 호시노 미치오(星野道夫), 《Grizzly》(平凡社,1985)

 


 앓아눕다가 자리를 박차고 겨우 일어난 지 이레쯤 되었나 싶습니다. 좋은 손님이 서울부터 전남 고흥 우리 사진책도서관까지 먼 마실을 하며 찾아오셨기에 처음으로 면내 가게에 술을 시켜 봅니다. 첫째 아이랑 나랑 둘이서 도서관에서 어울려 노는 동안, 옆지기는 집에서 둘째를 살살 달래며 재운 다음 현미가루케익을 굽고 꼴띠(꼴뚜기)지짐을 하며 매생이국을 마련합니다. 몸이 아직 시원찮은 나머지, 밥하기를 옆지기가 맡아 해 줍니다. 곱게 차린 밥상에 술 한 병 올려 좋은 손님이랑 나눕니다.

 

 한 달 조금 못 되게 마시지 않던 보리술을 모처럼 여러 병 마십니다. 아이들은 늦게까지 신나게 뛰놀다가 모두 새근새근 잠듭니다. 첫째도 둘째도 마음껏 뛰고 기며 놀다가는 한달음에 곯아떨어집니다. 그야말로 갑자기 아주 조용합니다.

 

 날은 따스해 깊은 밤이 되어도 쌀쌀하지 않습니다. 어느 하나 모자라지 않습니다. 마당에 내려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새카만 밤빛을 느낍니다. 씻는방에 그득하게 쌓인 빨랫감을 바라보며, ‘뭐 이듬날 아침에 하면 되지. 정 많으면 새벽에 보일러 돌아가며 뜨신 물 나올 때에 조금 나누어 하면 되지.’ 하고 생각합니다.

 

 방으로 돌아옵니다. 셈틀 앞에 앉습니다. 조용하며 느긋합니다. 자, 이 좋은 느낌을 담아 글 한 줄 써 볼까. 그런데 막상 마음을 가다듬어 글 한 줄 쓰자니 도무지 어디에서인가 꽝꽝 막힙니다. 무엇이 막히지? 왜 막히지? 아, 한동안 마시지 않던 술을 마셨기 때문에 이렇게 생각이 막히나? 고작 보리술 몇 병으로 이렇게 생각이 멈추나?

 

 한 시간 이십 분쯤 용을 쓰다가 그대로 드러눕습니다. 글쓰기는 용쓰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는 삶쓰기입니다. 삶을 스스럼없이 북돋우며 사랑하고 아끼는 넋이 샘솟지 않는다면 아무런 글 한 줄 쓸 수 없습니다. 글쓰기는 사랑쓰기입니다. 내 삶을 온마음 바치는 사랑으로 꿈꾸어 가꾸지 못한다면 어떠한 글 하나 낳지 못합니다.

 

 어느새 아이들 곁에서 새근새근 자다가 새벽 네 시에 깹니다. 둘째가 쉬를 누며 잠을 깨 으앙으앙 자지러지게 울거든요. 아이 어머니가 보드라이 달래고 어르며 둘째를 다시 재우고는 다시 모두들 조용히 잠자리를 누립니다. 나는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자리에 앉습니다. 지난 2010년 가을,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 〈대우서점〉에서 장만하고는 오래오래 책상맡에 두며 틈틈이 들추고 바라본 사진책 《Grizzly》(平凡社,1985)를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을 펼치면 딴짓 하던 다섯 살 첫째 아이가 아버지 곁으로 뽀르르 달려와 “나도! 나도!” 하면서 함께 책장을 넘기며 보겠다고 방방 뜁니다. 다른 사진책을 펼칠 때에는 같이 보자 해도 보지 않더니, 이 사진책 《Grizzly》에는 왜 그리도 달려드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아이보고 손을 펴라 합니다. 손가락을 만집니다. “자, 손 씻고 보자. 손을 씻지 않고 이 책장을 넘기면 네 손그림이 종이에 묻어.”

 

 

 

 

 

 

 

 

 

 

 

 그러께 부산에서 《Grizzly》를 장만하면서, 처음에는 이 사진책 찍은 사람 이름을 눈여겨보지 않았습니다. 그저 겉종이를 채운 사진만 바라보며 살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곰 찍은 좀 흔한 사진인가?’ 하고 생각하며 지나쳤습니다. 건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보수동 헌책방골목 책잔치 때에 여러 날 머물며 책을 다섯 상자 부피로 장만했는데, 그동안 이 사진책은 흘끗흘끗 지나치며 바라보았을 뿐, 막상 집어들어 책장을 넘기지 않았습니다. 보아 하니,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이 사진책을 눈여겨보지 않아요. 잘 보이는 자리에 펼쳐 놓았으나 좀처럼 팔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수동 책잔치가 끝날 무렵, 나와 옆지기가 책을 실컷 장만하고서 이제 더는 책을 고르지 말자고, 책값으로 살림돈이 아주 바닥나겠구나 걱정스러울 무렵, 헌책방 일꾼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헌책방골목 사진을 찍을 무렵, ‘그래, 오늘로 책방마실 마치고 시골집으로 돌아가면 언제 또 이 책들을 구경하겠니. 사지 않더라도 구경은 하자.’ 하는 마음으로 ‘그냥 곰 찍은 좀 흔한 사진책’으로 여기던 《Grizzly》를 집었습니다.

 

 책 안쪽에는 사인펜으로 ‘엉성하게 휘갈긴’ 듯한 손글씨가 큼직하게 있습니다. 사진쟁이 이름이 넉 자 적힙니다. 한자로 ‘星野道夫 1986.4.4.’를 읽으며 그저 시큰둥합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참 글씨도 영 못 쓰는군.’ 그런데 막상 첫 사진을 펼치니 입이 쩍 벌어집니다. ‘어, 뭐야, 겉종이에 넣은 사진이랑 책 짜임새는 영 어설프면서 속에 깃든 사진은 뭐지? 흔하게 만든 흔하게 찍은 동물 사진이 아니었어?’

 

 사진 몇 장 넘기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스칩니다. 책날개를 펼칩니다. 사진쟁이 이름을 다시 읽습니다. ‘星野道夫를 어떻게 읽더라. 옳지. 옆에 영어로도 적는구나. Michio Hoshino. 미치오 호시노? 미치오 호시노라. 응, 호시노 미치오?’

 

 1952년 일본 치바에서 태어난 호시노 미치오 님은 1985년 11월 11일에 드디어 당신 첫 사진책 《Grizzly》를 내놓으면서 당신 사진길을 널리 알립니다. 그러니까,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에서 만난 《Grizzly》는 바로 그 《Grizzly》입니다. 처음 내놓은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책이면서, 누군가한테 당신 이름을 또박또박 적어서 드린 사진책이 부산 보수동 헌책방 한 곳에 널리 잘 보이는 자리에 펼쳐진 채 오래오래 있었구나. 그렇구나.

 

 

 

 

 

 

 

 

 

 

 

 2010년 9월 11일 저녁, 부산 보수동 여관방에서 잠들기 앞서 사진책 겉에 묻은 ‘세월 때’를 문질러 닦습니다. 옆지기랑 아이하고 사진 한 장 한 장 살몃살몃 넘기며 읽습니다. 다른 책들은 상자에 차곡차곡 담아 시골집으로 부치지만, 이 사진책은 아이 옷가지와 천기저귀로 꽉 찬 무거운 가방에 함께 넣어 등으로 짊어지며 시골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고는 이태 동안 책상맡에 곱디곱게 모시며 틈날 때마다 들춥니다.

 

 슬슬 동틀 무렵입니다. 동틀 무렵 시골마을 바깥은 참으로 깜깜합니다. 나는 이 깜깜한 새벽빛이 좋습니다. 깜깜한 새벽하늘 가만히 바라보며 누우면, 이내 차츰차츰 부옇게 밝습니다. 파래지고 발개지고 노래지면서 하얗게 바뀌다가는 다시금 파란 빛깔이 온 하늘에 가득 찹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어여쁜 빛깔이 무지개처럼 춤을 추는 새벽이에요.

 

 호시노 미치오 님은 춥디추운 땅에서 북극곰처럼 눈밭과 풀밭을 뒹굴며 사진을 찍었겠지요. 수없이 사진을 찍으며 수없이 많은 밤과 낮과 새벽과 아침을 북극에서 맞이했겠지요.

 

 불빛이 아닌 햇빛을 보았겠지요. 동물원 우리가 아닌 드넓은 들판을 보았겠지요. 정수기 물이나 수도꼭지 물이 아닌 얼음장 곁을 흐르는 차디찬 물에서 헤엄치는 연어를 잡는 곰들이 뛰노는 물을 보았겠지요.

 

 아름다운 벗님 앞에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아름다운 꿈으로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나와 옆지기와 아이들한테 찾아온 사진책 《Grizzly》는 참으로 반갑습니다. 빠듯한 살림이라기보다 고단한 살림으로 사진책도서관을 용케 꾸리는데, 내 좋은 도서관 책꽂이에 《Grizzly》를 얌전히 꽂고는 언제라도 돌아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옆지기랑 아이들이랑 마음껏 펼칠 수 있어 더없이 기쁩니다. 앞으로 서울이나 인천에서, 부산이나 대구에서, 파주나 춘천에서, 양양이나 함양에서 이곳 고흥땅 어여쁜 우리 도서관으로 사진책 구경하러 마실오는 이라면, 누구나 이 사진책 하나 흐뭇하게 손으로 살몃살몃 어루만지며 눈물과 웃음을 쏟을 수 있겠지요. (4345.1.15.해.ㅎㄲㅅㄱ)

 

 

 

이런 말 하기 뭣 하지만... 호시노 미치오 님 첫 사진책(데뷔작) 구경 즐거이 하신 분들은

추천 꾹 눌러 주셔요~ 이 세상에 거저가 어디 있습니까~ ㅋㅋㅋㅋ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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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1-16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귀한 사진책이었군요. 귀한 소재에 따뜻한 글 잘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2-01-16 17:23   좋아요 0 | URL
이 글 다음으로
http://blog.aladin.co.kr/hbooks/5356700
요 글을 읽으면,
이 사진책 소개하며 안 올린 다른 사진을
볼 수 있는데,
다들 이 글까지는 안 읽으시는가 봐요... 이궁... ㅠ.ㅜ

마녀고양이 2012-01-16 15: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사인이 든 귀한 책을 얻으셨네요.
읽으면서 제 맘이 찡해졌답니다. 가운데 사진, 물색이 손에 잡힐 듯 합니다.

숲노래 2012-01-16 17:24   좋아요 0 | URL
이태 앞서 사 놓고 이제서야 느낌글+소개글을 썼답니다.
ㅋㅋ
에궁...
사진으로 찍어서 보더라도
사진이 참 좋은
호시노 미치오 님 이야기들이에요..
 
서울 진오기굿 한국의 굿 20
조흥윤 지음 / 열화당 / 1993년 3월
평점 :
절판


김수남 님 <한국의 굿> 사진책 스무 권 가운데 오직 하나만 검색됩니다. 그나마 이 한 권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20번 사진책으로 소개하는 글을 쓸까 하다가, 아무래도 상징성이 있어, 저는 1권으로 소개글을 씁니다.

 

 

 


 내 이웃과 사진으로 이야기를 나눈다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4] 김수남, 《한국의 굿 1 황해도 내림굿》(열화당,1983)

 


 1983년 7월 20일 첫선을 보인 ‘열화당 한국의 굿’ 스무 권 1번을 빛내는 《황해도 내림굿》(열화당,1983)은 첫 사진 첫 글을 “81년 6월 23일 서울 석관동에 있는 황해도 큰만신 김금화의 집에서 내림굿이 있었다(17쪽).’로 엽니다. 첫 장으로 깃든 사진은 책 뒤쪽에도 자그맣게 실립니다. 이 사진 한 장은 자그마치(?) 스무 권으로 꾀한 《한국의 굿》을 여는 실타래가 되면서, 이제껏 한겨레 굿놀이와 굿판과 굿잔치를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 바라보거나 가르치거나 생각하도록 이끌던 흐름을 따사로이 보듬으려는 손길이 됩니다. 엉뚱한 눈길을 바로잡는다든지, 터무니없는 손길을 나무라지 않습니다. 그저 곱게 바라보는 사랑과 꿈을 이야기합니다.

 

 사진책 《한국의 굿》 스무 권을 펴낸 열화당 출판사 편집부는 책머리에, “무속사진을 찍는 사람이 학자일 경우에는 사진이라고 하는 전달매체의 특징을 백분 살리는 데에 미흡하여 무속의 아름다움과 품위를 놓치기 쉽다. 그와 반면에 사진전문가일 경우에는 무속 내용에 대한 이해에 한계가 있어 그 본령을 드러내 보여주는 데 부족함이 있다. 때문에 때로는 본래의 의미와 품위를 왜곡 변질시키는 무속사진이 시각예술이라는 이름 아래 공개되는 경우조차 없지 않았다. 이제 우리는 무속이 어찌해서 우리 문화의 고향일 수밖에 없는가를 깨닫고 느끼게 하기보다는 사라져 가고 있는 관광자료에 불과한 민속이나 미신이라고 설명하려는 무속사진들이 더이상 쏟아져 나오기 전에, 전국의 무속을 정리하고 무속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내릴 시점에 이르렀다(이 책을 간행하면서,12쪽).” 하고 적습니다. 나는 이 첫머리 글을 읽던 고등학생 때(1991년)나 오늘(2012년)이나 늘 같은 마음입니다. 책 하나 내놓으며 이렇게 머리글을 붙이던 일이란 1976년에 태어난 잡지 《뿌리깊은 나무》와, 이곳에서 1981년에 내놓은 《민중 자서전》이랑, 1983년에 내놓은 《한국의 발견》 뒤로는 처음이자, 이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좀처럼 이러한 말마디를 새로 듣기 어렵지 않나 싶어요.

 

 곰곰이 헤아리면, 이와 비슷한 말마디를 내놓은 책으로 ‘대원사 빛깔있는 책들’이 있다고 느껴요.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에서 문화를 읽고 전통을 느끼며 역사를 살피는 이야기책이 거의 태어나지 못하는 채, 으레 연구실과 자료실에서 쌓이는 연표와 통계는 온통 ‘수수한 여느 사람들을 다스리는 권력자’ 쪽에서 바라보는 책만 쏟아지는데, 《한국의 굿》 스무 권은 이러한 사진밭 흐름에 좋은 사랑씨앗이 되려고 했구나 싶어요.

 

 더 되짚으면, 이들 책에 앞서 예용해 님이 1963년에 빚은 《인간문화재》(어문각)라는 책이 있기에, 한겨레 삶자락을 살가이 돌아보는 기틀을 닦을 수 있다고 말할 만합니다. 따로 책이라는 틀로 무언가 보여주지 않더라도 ‘수수한 여느 사람들’은 언제나 사랑스레 살았어요. 애써 역사나 문화나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더라도 ‘수수한 여느 사람들’은 하루하루 즐거우며 고맙게 맞이했어요. 누군가 조선 막사발을 첫손 꼽지 않더라도 수수한 여느 사람들은 막사발을 썼고 수저를 썼어요. 한겨레 문화와 역사와 예술과 전통이라 한다면, 밭을 일구는 호미 한 가락입니다. 쌀겨나 티를 까부르는 키 하나입니다. 옷을 기우는 바늘 하나이고, 갓난쟁이한테 대는 기저귀 하나예요. 궁중에서 입는 옷이 되어야 전통이나 문화가 되지 않아요. 여느 사람들이 여느 살림집에서 늘 입는 옷이 바로 전통이나 문화예요. 그런데 여느 사람들 여느 살림집에서는 이러한 옷을 전통이나 문화라고 바라보지 않아요. 그저 삶입니다.

 

 사진책 《한국의 굿》 스무 권에 나오는 굿판 굿마당 굿잔치 굿놀이 사람들 몸가짐과 차림새 또한 남다르다고 여길 모습이 아닙니다. 그저 예부터 이녁 삶으로 받아들이면서 사랑한 모습이에요. 애써 돋보이도록 꾸미는 모습이 아니에요. 여느 삶 모습이에요. 일부러 도드라지게 덧대는 모습이 아니에요. 꾸밈없이 살아가는 모습이에요.

 

 더 높지 않으나, 더 낮지 않습니다. 더 높여야 하지 않고, 더 낮춰야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한겨레에서 문화를 찾거나 예술을 바라거나 전통을 지키려 하는 어떤 흐름이 있다면, 김수남 님이 사진기를 들고 ‘한국의 굿’을 찍었다 할 때에, 어느 자리에선가는 ‘한겨레 옷’을 찍을 법했어요. ‘한겨레 집’을 찍고 ‘한겨레 밥’을 찍으며 ‘한겨레 길’과 ‘한겨레 논밭’과 ‘한겨레 바다’와 ‘한겨레 마을’을 찍을 만했어요. 이리하여, ‘한겨레 마을’까지는 아니나 《제주의 마을》이라는 이름을 단 자그마한 이야기책이 반석이라는 출판사에서 꽤 많이 나온 적 있어요. 엮음새가 너무 투박하기는 했으나, 제주섬에서 제주 마을만 돌아본 ‘제주의 마을 시리즈’는 참으로 소담스러운 선물이라 여길 ‘여느 사람 삶을 톺아보려는 사랑몸짓’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문화유산을 두루 돌아다니는 일이 나쁘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어느 한쪽에서는 문화유산을 두루 밟으며 한겨레 옛삶을 살필 만해요. 이러한 데에 애틋하게 눈길을 보내는 삶이라 한다면, 언젠가는 ‘한겨레 오늘 삶’을 깨달아, 전통이든 역사이든 문화이든 예술이든 어디 멀찌감치 떨어진 자리에는 하나도 없는 줄 알아챌 수 있을 테니까요.

 

 오늘 우리는 ‘엉뚱하게 적바림되며 참뜻하고 동떨어질까 걱정스러운’ 한국굿 이야기를 소담스레 담은 《한국의 굿》 스무 권을 만날 수 있어요. 아쉽다면, 도서관이나 헌책방에서 가까스로 만난다 할 텐데, 아직 우리 스스로 우리 오늘 삶을 착하며 곱게 돌아보거나 보듬는 손길이랑 눈길을 북돋우지 못한 탓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아직 ‘한겨레 골목길’조차, ‘한겨레 숟가락’조차, ‘한겨레 비녀’조차, ‘한겨레 바지랑대’조차, ‘한겨레 구멍가게’조차 꾸밈없이 바라보며 얼싸안지 못해요.

 

 2010년대를 살아가는 사람한테 1980년대는 서른 해나 지난 아스라한 옛삶입니다. 2040년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한테는 2010년대 오늘은 참 아스라한 옛삶이에요. 2070년대를 살아갈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한테 2010년대는 무척 아스라한 옛삶이에요.

 

 전통이나 문화나 역사나 예술은 어디 멀리 있지 않아요. 바로 오늘 우리가 두 발 디딘 이 자리 삶자락이 전통이요 문화요 역사이며 예술이에요. 내가 살아내는 하루가 전통이에요. 내가 누리는 보금자리가 문화예요. 내가 먹는 밥이 역사예요. 내가 살붙이랑 나누는 이야기가 예술이에요.

 

 《한국의 굿 1 황해도 내림굿》 책날개 뒤쪽에 김수남 님이 적은 맺음말을 읽습니다. “아마 삶과 죽음, 고통과 환희, 좌절과 희망, 이런 것들을 가장 극렬하고 감동적으로 보여주는 곳이 굿판일 게다. 어차피 사회와 시대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는, 그래서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까지 되어 버린 굿을 찍으면서 지난 10여 년간의 작업이 최소한 하나의 증언, 하나의 기록이 될 수 있기를 꿈꾼다. 한 계층이 처한 시대적 상황, 그리고 그 속한 사회에서 변모해 가는 삶의 현장을 남기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나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김수남 님은 ‘굿판을 사진으로 찍었다’기보다 ‘사람들 살아가는 터전’을 사진으로 찍은 셈입니다. 김수남 님 좋은 이웃을 예쁘게 사귀면서, 이 이웃들하고 사진으로 이야기꽃을 피운 셈입니다. (4345.1.14.흙.ㅎㄲㅅㄱ)

 


― 황해도 내림굿 (김수남 사진,김인회·최종민 글,열화당 펴냄,1983.7.20./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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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2-01-1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의 굿』이라는 책을 지난달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살펴본 적이 있었답니다. 정말 인상적이고도 다양한 사진들을 접할 수 있었는데, 어찌보면 우리들 삶의 깊숙한 뿌리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도 많이 받았었습니다.

마침 동네 도서관에도 딱 한권의 책만 있던데, 알라딘 서재에서 이 책에 관한 멋진 글을 만나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네요. 아름답고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숲노래 2012-01-14 23:09   좋아요 0 | URL
예나 이제나
이만 한
사진을 찍으려고 애쓰는 사람이 너무 적어요.

어쩔 수 없이
학교에서는 늘 틀에 박힌 대로만 배우고 길들여지니
학교를 다니며 사진을 배우면 찍지 못한다 할 텐데,
그래도 누군가 한 사람 이렇게 남겼으니
고마운 노릇이라고 여겨야 할까 싶기도 해서
많이 슬프답니다...
 
세상의 어린이들 - 이기웅 사진집
이기웅 / 열화당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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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아이와 이웃 아이 바라보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40] 이기웅, 《세상의 어린이들》(열화당,2001)

 


 지난 2001년 1월 1일 첫선을 보인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열화당,2001)을 2001년에 들여다볼 때를 곰곰이 떠올리면서 2012년 올해에 두 아이와 살아가는 내 모습을 비추어 이 사진책을 다시 펼칩니다. 우리 시골마을 사진책도서관 책꽂이에서 이 책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그래, 나는 이 책을 아직 혼인하지 않고 나한테 아이가 없을 때에 처음 만났지.’ 하고 되새깁니다. 예전 내 삶으로 들여다보는 《세상의 어린이들》이랑 오늘 내 삶으로 헤아릴 《세상의 어린이들》은 얼마나 같거나 얼마나 다를까.

 

 아이들과 살아간다는 나날을 헤아리거나 겪지 못하던 때에 바라보는 어린이 사진하고, 아이들과 스물네 시간 함께 살아가며 늘 들여다보고 노상 치닥거리하는 나날 바라보는 어린이 사진은 참 다르겠지요. 그렇지만, 내가 오늘 두 아이랑 복닥인다 하더라도 ‘아이가 없거나 아이하고 복닥이지 않는 사람’하고 견주어 어린이 사진을 더 잘 읽는다거나 어린이 모습을 사진으로 더 잘 찍을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아요. 함께 살아가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마음과 사랑으로 마주하느냐에 따라 사진·글·그림·이야기 모두 달라지니까요.

 

 열한 해 앞서 읽은 책을 열한 해 만에 다시 손에 쥔다면, 똑같은 느낌은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열한 해 동안 똑같은 느낌이 고스란히 이어질는지 모르지만, 사진을 읽든 그림을 읽든 시를 읽든 만화를 읽든, 열한 해라는 나날에 걸쳐 새롭게 일군 내 땀방울과 꾸덕살 이야기를 발판으로 더 깊게 읽거나 한결 넓게 읽을 수 있어요.

 

 열화당 대표 이기웅 님이 일군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을 새삼스레 다시 만지작거리며 홀로 생각합니다. ‘열한 해 앞서 이 사진책을 장만했으니 이렇게 오랜 나날에 걸쳐 책과 사진을 두고두고 곱씹을 수 있구나. 그저 책방에 선 채로 읽었다면, 아니면 도서관에 이 책을 넣어 달라 말하며 빌려서 읽었다면, 누군가 장만해서 이녁 집 책꽂이에 꽂은 책을 빌려서 읽었다면, 아마 그 한 번 읽은 느낌으로만 이 책을 헤아리지 않겠니. 애써 장만해서 오래도록 건사하는 책 하나가 내 집에 있으면, 나는 이 책을 오래도록 곱씹고 되씹으면서 내 넋과 사랑과 꿈과 빛을 한결 따사로이 북돋울 수 있어.’ 사진책 하나 장만하는 일은 기쁨으로 그치지 않아요. 내 눈길을 날마다 새롭게 일구도록 도와요. 언제나 곁에 있는 책을 틈틈이 들추면서 열 번 백 번 천 번 되읽으며 새롭게 생각하거나 돌아보는 빛씨앗을 베풀어요.

 

 이기웅 님은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 끝자락에, “새천년의 첫 해가 다 저물어 가는 십이월 어느 날, 강운구 형의 지프를 타고 몇 날 동안의 새벽녘에, 햇볕 찬란한 한낮에, 그리고 저녁 어스름에 바흐의 피아노곡을 들으면서 이 나라 남도의 들과 마을들을 달려 지나고 있었다. 그때도 여느 때처럼 나는, 우리 국토는 이렇듯 참담하게 망가져 가고 있으며, 이 나라 사람들은 왜 이처럼 일그러져 가고 있는가를 화내고 있었다. 나라 도처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로공사로 무자비하게 파헤쳐지고 있는 산천들, 무책임한 건축공사로 속속 들어서고 있는 변태적인 인공구조물들, 치졸의 극에 달한 글자꼴의 간판과 디자인(423쪽).” 하는 이야기를 붙입니다. 아, 그래요. 2001년만 하더라도 한국땅 남녘자락이 얼마나 망가지던지요. 2012년이라면 훨씬 더 망가졌겠지요. 앞으로 더 망가질 테며, 2022년쯤 되면 사랑스럽거나 아름답다 싶은 시골마을이 깡그리 무너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기웅 님은 “무자비한 도로공사”를 “지프를 타고 달리며” 느낍니다. 두 다리로 남녘자락을 천천히 거닐며 느끼지는 않아요.

 

 곰곰이 생각합니다. 전남 고흥에서 살아가는 우리 식구들은 이 고흥자락이 참 어여쁘며 좋습니다. 고속도로 없지, 기차길 안 들어오지,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지, 관광지로 개발하려는 재벌회사도 따로 없지, 고흥군에는 대학교 없지, 커다란 회사도 없지, 공장도 보이지 않지, 골프장 없지, 군수가 앞장서서 친환경농업을 하겠다고 외치지 ……. 고흥에서 다른 마을로 마실을 가자면 퍽 고달픕니다. 왜냐하면, 다른 데에서 고흥으로 들어서는 길이 외통수요 멀디멀리 돌아야 하는 만큼, 고흥에서 밖으로 나갈 때에도 외통수이며 멀디멀리 돌아야 하거든요. 그렇지만, 이렇게 멀고 돌아야 하는 길이 즐겁습니다. 지난해 가을녘, 시외버스를 타고 순천을 거쳐 남원 지나 전주로 가는데, 시외버스 일꾼이 부러 고속도로나 고속국도 아닌 시골국도를 달리더군요. 이 때문에 시외버스는 다른 때보다 좀 더디 달릴밖에 없었는데, 나는 이렇게 달려서 참 좋았어요. 오가는 자가용 아주 드문 시골국도는 우람하게 자란 나무숲 사이로 달리는 길이면서, 가을자락 깊이 물든 남녘땅 어여쁜 빛깔을 듬뿍 베풀었어요. 시외버스로 세 시간을 달리면서 모처럼 차멀미를 안 할 수 있었어요.

 

 고흥으로 우리 보금자리를 마련해서 옮기려고 혼자서, 때로는 아이랑 둘이서, 때로는 네 식구 다 함께 찾아와서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며 움직이기도 했지만, 두 다리로 여러 시간 걸어 돌아다니기도 했어요. 천천히 걸어 돌아다니면서 ‘고흥이라는 데로 들어올 바깥 자동차’가 몹시 드물 뿐더러, 마을사람 스스로 자동차 타고 움직일 일도 많지 않다고 느꼈어요. 읍내조차 그닥 어수선하지 않아요. 참 조용해요. 그렇다고 개발 손길이 아예 없지 않으나, 개발을 한대서 돈을 뽑아낼 무언가 있다고 여기지 않으니, 차분하면서 예뻐요.

 

 구례라든지 곡성이라든지 함양이라든지 양양이라든지 아마 다들 비슷하리라 느껴요. 읍내를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든 한갓져요.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하고 가깝지 않다면 호젓하면서 예뻐요. 자동차 아닌 자전거로 움직이면, 시골버스를 타거나 두 다리로 거닐면, 이 예쁜 온누리를 온통 내 마음으로 받아들일 만해요.

 

 어쩌면, 열화당 대표 이기웅 님이 새천년 첫 자락에 지프 아닌 두 다리로 천천히 남녘자락 시골길을 거닐어 보셨으면 또다른 이야기와 사랑과 느낌을 맞아들이지 않았을까 하고. 그러나, 이기웅 님은 지프를 타고 움직이였어요. 그런데, 이렇게 지프를 타고 움직이며 더 깊으며 그윽한 멋을 맞아들이지 않았기에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이 태어날 수 있습니다.

 

 이기웅 님은 “이 망가진 세상 속에서 어린이들은 차라리 들꽃이었다. 내 카메라의 렌즈는 그 아름다운 꽃송이를 향해 달려간다. 무념무상으로(423쪽).” 하고 덧붙입니다. 그러니까, 끔찍한 막개발과 막삽날을 당신 스스로 느끼지 않았으면 온누리 아이들 들꽃송이 웃음빛을 사진으로 담을 생각을 못 했을 수 있어요. 이러한 생각을 했어도 아주 느즈막하게 했을 수 있고, 굳이 사진책을 내놓자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어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도 느껴요. 이기웅 님이 천천히 두 다리로 거닐면서 남녘자락 시골마을 사람들 삶을 받아들였으면, 이러한 결대로 또다른 시골마을 사람들 이야기와 웃음과 눈물을 사진으로 담는 길을 열 수 있었으리라고.

 

 사진책 《세상의 어린이들》이 나온 지 열한 해가 되었어요. 이제 두 번째 《세상의 어린이들》이 나올 만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나라밖에서 만날 아이들도 예쁘고, 나라안에서 만날 아이들 또한 예뻐요. 멀리 있는 이름 모르는 아이들도 예쁠 테지만, 우리 집 내 아이들도 예쁘고 이웃집 아이들도 예뻐요.

 

 애써 비행기 타고 러시아나 인도로 나들이 가지 않더라도 한국땅 곳곳에서 눈빛 맑은 아이들을 만날 수 있어요. 먼저 나부터, 곧 우리 어른들부터 눈빛 맑은 어른으로 살아가면 눈빛 맑은 아이들을 느끼면서 서로 신나게 놀고 예쁘게 어우러질 수 있어요. 이렇게 서로 곱디곱게 춤을 추며 노래하면서 가끔 한두 장 사진을 찍으면, 흐드러지는 춤꽃 노래꽃 이야기꽃 사진들이 피어나리라 믿어요.

 

 좋다고 느끼는 사진은 좋다고 여길 내 삶을 즐거이 일굴 때에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찍더라도 태어나요.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진은 아름답다고 여길 내 삶을 아름다이 지을 때에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담더라도 태어나요.

 

 내 아이를 바라보며 온누리 아이들을 읽을 수 있어요. 온누리 아이들을 바라보며 내 아이를 느낄 수 있어요. 내 아이들을 찍어도 온누리 아이들 찍는 일하고 같아요. 온누리 아이들 찍는 일은 내 아이들 찍는 일하고 같아요. (4345.1.9.달.ㅎㄲㅅㄱ)


― 세상의 어린이들 (이기웅 사진,열화당 펴냄,2001.1.1./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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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역사적 기억
진동선 지음 / 눈빛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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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역사가 아닙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35] 진동선 엮음, 《사진과 역사적 기억》(눈빛,2003)

 


 진동선 님이 엮은 《사진과 역사적 기억》(눈빛,2003)이라는 사진책 앞글에 적힌 “역사학자들은 사진이 현대사 자체라고 말을 한다. 현대사가 곧 사진의 역사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카메라의 냉정한 기록성 때문인지, 아니면 목격자로서, 해석자로서, 전달자로서 시대 앞에 섰던 사진가의 시선인지, 아니면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사진’이라는 시간의 코드 때문인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23쪽).” 같은 말은 마땅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진동선 님은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하고 끝에 붙였으니 “현대사가 곧 사진의 역사라는 것이다. 옳은 말이다.” 라 했던 말을 뒤엎는다고 여길 수 있지만, 처음부터 이러한 말마디로 사진을 다루는 일조차 못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역사가 아니니까요. 사진은 역사가 될 수 없으니까요. 역사는 사진이 될 수 없고, 사진으로 역사를 읽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사진에 기대어 역사를 살필 수 없어요.

 

 사진은 “바라보는 눈길”입니다. 사진은 “사람들마다 다 달리 살아가며 바라보는 눈길”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1965년 부산에서 왼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살짝 찡그린 아저씨를 사진으로 담았대서 이 얼굴 사진이 1965년을 말하는 사진이나 역사가 되지 않습니다. 왼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살짝 찡그린 아저씨는 왜 이러한 모습 이러한 얼굴이었을까요. 배앓이라도 할까요, 졸음이 쏟아졌을까요, 무엇 때문일까요. 술 한 잔 걸치다가 이런 얼굴이 되었을까요.

 

 사진은 사람들마다 바라보는 눈길이기에, 이 눈길이 모든 사람 눈길을 보여준다 할 수 없을 뿐더러 ‘시대를 말한다’거나 ‘사회를 말한다’거나 ‘나라를 말한다’거나 ‘정치를 말한다’거나 ‘문화를 말한다’거나 ‘역사를 말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경모 님이 담은 사진에는 대나무창 들고 나란히 선 아가씨들이 나오지만, 어느 마을 어느 곳에서는 아가씨들한테 대나무창 들게 해서 군대 훈련 시켰다지만, 바로 이 마을 곁 어디에서는 아가씨들이 빨래를 하고 길쌈을 하며 밥을 지었겠지요. 사랑하는 님하고 만나 애틋하게 웃음을 나누며, 예쁜 아기한테 젖을 물렸을 테고,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었겠지요.

 

 그러나 물 긷고 물동이 이는 사진은 《사진과 역사적 기억》에 나오지 않습니다. 조셉 브라이텐바흐 님이 담은 사진에 나오는 1950∼70년대 한국땅 여자들 사진책 《Women of Asia》(the John day com,1968)에서는 빨래바구니를 이는 아주머니라든지 잠든 아이를 품에 안으며 풀빵 굽는 아주머니라든지 저잣거리에서 활짝 웃으며 푸성귀를 파는 아주머니라든지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진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사진책에는 밭에서 김매는 아줌마라든지 논에서 모내는 아저씨라든지 멧골짝에서 나무하는 아이라든지 갯벌에서 조개 캐는 할머니라든지 나타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사진은 무엇을 말할까요. 사진이 보여주는 모습은 무엇이 역사라 할 만한가요. “사진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이름은 누가 왜 어떻게 언제 어디에서 붙이는 이름이 될까요.

 

 1970년대 서울 망원동에서 흙길을 누비는 아이들이 《사진과 역사적 기억》에 나타납니다. 오늘날 서울 망원동에는 논이 없습니다.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와 높다란 건물과 끝없는 빌라뿐입니다. 서울 망원동 옛날 판자집 사진은 역사가 될까요, 기억이 될까요, 삶이 될까요, 발자국이 될까요.

 

 조그마한 방 한 칸짜리 집에서 식구들 둘러앉아 책을 읽는 사진 하나 보이는 《사진과 역사적 기억》입니다. 오직 한 장, 이렇게 수수한 삶자리 살며시 보여주는 사진이 실렸기에, “역사적 기억”이라 하는 어마어마하게 무겁디무거운 이름이 서로 어울리지 않구나 하고 보여주지만, 한국전쟁통에도 사람들은 밥을 지어서 먹었으며, 아이를 낳아 기저귀를 빨았으며, 똥을 누고 별을 올려다보며 논물을 맞추었습니다. 그래, 서울 망원동 사진 가운데에는 바지랑대 받쳐 기저귀를 빨아 넌 사진이 하나 깃들어요. 그지없이 사랑스러우면서 아늑한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사진입니다. 그러면, 이 사진은, 하얀 기저귀 빨래가 바지랑대 빨래줄에서 나부끼는 이 사진은, 어떤 역사와 사회와 문화를 보여준다고 이름표를 붙여야 할까요.

 

 이름표를 붙일 때에는 사진은 사진이라는 구실을 잃습니다. 딱지를 붙이면 사진은 사진이라는 빛을 놓칩니다. 번들거리는 삶을 우쭐대는 사람들을 보여주거나 되살리는 일은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찾아다니며 적바림하는 일은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적바림(기록)하는 몫이 사진에 있다지만, 적바림을 한대서 사진이 되지 않아요. 적바림을 한다면 그저 적바림, 곧 기록입니다. 기록을 사진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와 똑같은 말이 되는데, 예술은 예술이지 사진이 아닙니다. 예술을 한다면서 사진기를 손에 든대서 사진찍기이지 않아요. 예술하기일 뿐입니다. 사진기를 들어 기록을 한다면 기록하기이지 사진찍기가 아니에요. 사진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면, 교육이지 사진이 아니에요.

 

 기록을 하는 사람은 기록을 하려고 사진기를 빌립니다. 예술을 하는 사람은 예술을 하려고 사진기를 빌려요.

 

 기록을 하는 사진이기에 다큐사진이지 않습니다. 예술을 하는 사진이라서 패션사진이 아니에요. 모두들 잘못 짚습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사진을 놓고 기록이라느니 예술이라느니, 또 문화라느니 역사라느니 하면서 엉뚱하게 옷을 입히면 사진빛과 사진그림자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집니다.

 

 《사진과 역사적 기억》이라는 사진책은 참 아름답습니다. 참 아름다운 이야기를 담은 사진책입니다. 이 작은 사진책 하나로 우리들 살아온 지난날 어느 한 자락을 예쁘게 돌아볼 수 있어 참말 아름답습니다.

 

 그러니까, 애먼 군말은 붙이지 말아야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이름표는 떼어야 합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누리고, 사진은 사진으로 즐겨야 합니다. 사진은 사진으로 바라보면서 사진은 사진결 그대로 찍을 때에 빛납니다. (4345.1.4.물.ㅎㄲㅅㄱ)


― 사진과 역사적 기억 (진동선 엮음,눈빛 펴냄,2003.7.9./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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