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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만들기
이기원 / 눈빛 / 199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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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 또는 누구’를 찍을까 걱정하지 말자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1] 이기원, 《세상 만들기》


 사회사진연구소를 꾸리던 이기원 님은 《그날 이후》(1990), 《노동자, 강철과 눈물의 빛》(1991), 《답하라, 전세계 노동자》(1993) 같은 사진책을 함께 내놓은 다음 새로운 사진책 《세상 만들기》(1995)를 우리 누리에 내놓습니다. 이기원 님이 아니고도 이 나라 공장 일꾼 삶과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기원 님 앞으로나 뒤로나 공장 일꾼 삶과 이야기를 사진으로 알뜰히 담은 사람은 퍽 드뭅니다. 아니, 거의 없다고 할 만합니다.

 사진을 찍는 적잖은 이들은 이 나라에서 무척 많은 사람이 몸담고 있는 공장을 사진감으로 삼지 않습니다. 공장을 비롯해 여느 회사 사무실을 사진감 무대로 다루지 않습니다. 사진찍기를 즐기는 교사가 제법 많습니다만, 당신 일터인 학교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사진감으로 맞아들이는 일이란 퍽 드뭅니다. 어쩌면 아예 없거나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적잖은 이들은 프랑스 파리를 돌아다닌다든지 에스파냐 산티아고를 걷는다든지 일본 도쿄를 거닌다든지 티벳이나 네팔 산기슭을 오르내린다든지 인도나 아프리카 땅을 떠돌고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이 나라 적잖은 이들 작품은 으레 이와 같은 곳 삶을 스치거나 부대낀 이야기에 맴돕니다. 스스로 태어나서 자라며 복닥인 우리 누리 우리 터전을 오래도록 스스럼없이 살피거나 받아들이는 일이란 좀처럼 찾아보지 못합니다.

 사진책 《세상 만들기》는 그리 잘 찍은 사진을 담지 못합니다. 사진책 《세상 만들기》는 이 나라 중공업 일꾼을 담습니다만, 몇몇 중공업 일꾼을 다룰 뿐, 조금 작은 공장 일꾼이나 더 작은 공장 일꾼을 다루지 못합니다. 중공업 일꾼은 다루지만 경공업 일꾼이라든지 옷 만드는 공장 일꾼이라든지 자전거 만드는 공장 일꾼은 다루지 못합니다. 아니, 다루려고 생각을 해도 다루지 못했거나, 다룬다고 해 보아도 책으로 엮어 줄 출판사를 만나기 힘들지 않으랴 싶습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Workers》라는 이름으로 온누리 일꾼들 삶을 사진 이야기로 적바림했습니다. 말 그대로 ‘일하는 사람’이니까 ‘일꾼’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기원 님은 《세상 만들기》라는 이름으로 우리 누리 일꾼들 삶을 사진 이야기로 갈무리했습니다. 말 그대로 이 땅 일하는 사람들은 ‘세상을 만들고 있’으니까 ‘세상 만들기’라는 이름이 걸맞습니다.

 그렇지만 아쉽습니다. 왜 ‘세상 만들기’는 “이기원이 찍은 한국이 중공업 노동자들”에서 첫머리이자 마지막이 되어야 했을까요. 다른 공장 일꾼 삶을 담아내어 ‘세상 만들기’를 잇달아 보여주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날마다 먹는 밥을 일구어 베풀어 주는 농사꾼들 삶을 사진으로 담아 ‘세상 만들기’라는 또다른 이야기를 엮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우리들이 어른이 되기까지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눈코 뜰 사이 없이 돌보고 어루만져 온 어버이들 삶을 사진으로 보듬어 ‘세상 만들기’란 여느 자리 여느 살림집 여느 아버지와 어머니한테서 언제나 엿볼 수 있음을 나누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진쟁이 이기원 님 한 분한테만 ‘우리 나라 숱한 세상 만들기’를 사진으로 담으라 말할 수 없습니다. 이기원 님은 이기원 님 당신이 할 수 있는 힘을 다 쏟아내어 “중공업 일꾼 삶”을 담았을 테니까요. 이기원 님 둘레에서 사진을 찍는 벗들이 다른 일꾼 삶을 들여다보며 담아내야 하며, 이기원 님 사진책을 즐겁게 마주한 뒷사람이 우리 둘레 숱한 일꾼 삶을 마주보며 실어내야 합니다.

 그나저나 사진책 《세상 만들기》는 “중공업 일꾼”한테조차 좀더 가깝고 살가우며 따스하게 다가서지는 못했다고 느낍니다. 꼭 살가도 님 사진책을 빗대어서 말한다기보다, 일하는 사람을 다루는 작품이라 한다면, ‘일하는 사람 손’과 ‘일하는 사람 몸’과 ‘일하는 사람 옷’과 ‘일하는 사람 터’를 좀더 오롯이 넓고 깊으며 차분히 보여줄 수 있어야 할 텐데요. 중공업 일꾼이 일하는 자리가 어떠하며 중공업 일꾼이 어떤 장비를 쓰며 어떻게 일하는가를 내보이는 사진으로는 퍽 괜찮다 여길 만하지만, 정작 ‘그래, 중공업 일꾼을 보여주어서 뭘 어쩔 텐데?’ 하는 물음을 풀지 못합니다. 본 대로 담는다고 사진이 아니요, 느낀 대로 찍는다고 사진이 아닙니다. 보았으니 본 이야기를 사진으로 되삭여야 하고, 느꼈으니 느낀 삶을 사진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일으켜야 합니다. 이기원 님은 이제까지 어느 사진쟁이도 제대로 하지 않거나 아예 하지 않던 뜻깊은 일을 굵은 땀방울 흘리며 일구어 냈습니다만, 가까스로 뗀 아장걸음에서 하나하나 튼튼하게 나아가는 매무새로 잇지 못했습니다.

 사진쟁이 이기원 님은 당신 사진책 《세상 만들기》 끝자락에 “끝으로 이 사진집이 눈빛 출판사에 손해나 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붙입니다. 다른 때도 아닌 1995년에 공장 일꾼 사진책을 내놓는다는 일이란 참 힘들고 팍팍합니다. 자칫 국가보안법이니 뭐니 하는 그물에 걸릴 수 있습니다. 2010년이 된 오늘날까지 국가보안법 쇠사슬과 쇠그물이란 아주 단단하거든요. 이 나라에 공장이 수두룩하게 있을 뿐 아니라 공장에서 물건을 끝없이 만들지 않는다면 서울이고 부산이고 큰도시뿐 아니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버틸 수 없으나, 정작 공장 일꾼 삶을 다루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연극이나 연속극이나 영화는 몇 가지나 있는가요. 아니, 있기나 있습니까. 더욱이 농사꾼 삶을 다루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연극이나 연속극이나 영화는 몇 가지나 나오며, 이런 문화와 예술이 팔리기나 합니까.

 공장 일꾼을 담는 사진은 ‘노동자 권리를 지켜 주려 한다는 정당’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공장 일꾼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진찍기입니다. 논밭에서 땀흘려 일하는 사람을 담는 사진은 ‘농업 운동’을 하는 사람만 하는 일이 아닙니다. 텃밭을 일구는 사람이든 논밭을 사랑하는 사람이든 누구나 할 수 있는 사진찍기입니다.

 이리하여,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는 아이 사진을 담고 애 아빠가 애 엄마 사진을 담으며 애 엄마가 애 아빠 사진을 담으며 ‘(집안에서) 일하는 어버이’ 삶을 알알이 엮을 수 있습니다. 여느 살림집 할매와 할배 삶을 곁에서 지켜보며 담는 가운데 ‘일하는 할매와 할배’ 삶을 알뜰히 엮을 수 있습니다. 즐겨찾는 동네 구멍가게 일꾼 삶을 사진으로 엮을 수 있겠지요. 단골 책방 일꾼 삶을 사진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사진감이란 먼 데에 있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먼 데에도 좋은 사진감이 있는데, 어김없이 가까운 데에도 훌륭한 사진감이 있습니다. 아니, 어김없이 가까운 데에 있을 뿐 아니라 바로 내 곁에, 그러니까 내 삶 한복판에 깃든 아름다운 사진감을 꾸밈없이 느끼며 받아들이어 사진으로 담을 줄 알지 못한다면, 머나먼 데에 있는 좋으며 애틋하고 거룩한 사진감을 이러한 좋음과 애틋함과 거룩함 그대로 담아낼 수 없는 노릇입니다. 우리 어머니 우리 아버지 우리 살붙이 우리 아이 우리 이웃 …… 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살며시 이어지면서 우리 동무와 우리 짝꿍을 사랑하는 마음이 됩니다. (4343.8.25.물.ㅎㄲㅅㄱ)


― 세상 만들기 (이기원,눈빛,1995.4.10./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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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사람들 - 양해남 사진집
양해남 지음 / 연장통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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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울 수 없는 사진을 배우는 길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10] 양해남, 《우리 동네 사람들》(연장통,2003)



 아이 사진을 찍을 때에는 내가 낳아서 기르는 아이이기 때문에 한결 사랑스러운 모습을 더욱 즐거이 찍지 않습니다. 내 아이가 아니더라도 아이마다 싱그럽고 맑은 기운을 듬뿍 나누어 주고 있으니, 이 기운을 고이 받으면서 사랑스러운 모습을 즐거이 찍을 수 있습니다. 나와 좀더 가까운 사람을 찍는다고 해서 좀더 부드럽거나 따스한 모습을 찍을 수는 없습니다. 나와 동떨어지거나 낯선 사람을 찍는다고 해서 그예 딱딱하거나 차가운 모습을 찍지는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히는 사람 숨결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사진인 가운데,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결이 소담스레 스며드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고자 하는 분들은 사진을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즐긴다 할 때에는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을 스스로 찾아나서면서 스스로 느끼는 그대로 찍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은 배울 수 없습니다.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는 스스로 사진을 좋아하는지 좋아하지 않는지를 살피지 못하는 가운데 내 눈길이 사진으로 기쁘게 가 닿는가 가 닿지 않는가조차 느끼지 못하면서 셀 수 없이 단추를 눌러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찍기 일을 하는 분들은 으레 어느 분한테서 사진을 배웠다느니 어느 나라로 찾아가사 어느 대학교에서 사진을 배웠다느니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사진은 배울 수 없습니다. 아주 빼어난 스승을 섬기고 있다 한들, 아주 놀라운 나라밖 대학교를 다녔다 한들, 사진을 배웠다고 할 수 없습니다. 렘브란트 님한테서 그림을 배운 사람이란 없고, 반 고흐 님한테서 그림을 배운 사람이란 없습니다. 벨라스케스 님한테서 그림을 배운 사람이 있을까요. 이중섭 님이나 박수근 님한테서 그림을 배운 사람이 있는가요.

 우리한테 생각하는 힘이 있다면 어떤 대단한 분 그림을 들여다보았다든지 어느 훌륭한 분 그림 그리는 모습을 살폈다든지 하고만 살짝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붓을 들고 종이 앞에 섰다 하는 모습만이 그림그리기가 아닙니다. 종이 하나에 다 그려진 그림 하나만이 그림으로 일군 작품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진찍기를 제대로 알고 느끼며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사진찍기란 무엇인가를 참다이 바라보고 살피며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얻은 사진 한 장에 어떤 삶이 담겨 있는가를 보듬고 껴안으며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사진에는 내가 바라보며 찍은 모습이 담기지 않습니다. 내 사진에는 내가 살아가며 부대낀 이야기를 담습니다. 내 사진에는 고운 얼굴이나 미운 얼굴이 담기지 않습니다. 나와 사귀고 있는 한 사람 삶을 얼굴에 빗대어 담습니다. 내 사진에는 풍경이 담기지 않습니다. 내 사진에는 사람들이 어우러지며 살아가는 터전을 담습니다.

 내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기에 누구한테서 배울 수 없는 사진이지만, 누구를 가르칠 수도 없는 사진입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담고 당신은 당신 이야기를 담는 사진입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글로 쓰고 당신은 당신 이야기를 글로 씁니다. 나는 내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리며 당신은 당신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립니다.

 다만 한 가지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다면 사진기라는 기계를 다루는 솜씨입니다. 필터를 어떻게 건사한다든지 손수 인화하고 현상하는 솜씨라든지 어떤 세발이를 쓰면 알맞을까 하는 대목은 배우거나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진기를 골라들고 어떤 렌즈를 끼워서 쓰느냐마저 따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스스로 다루어 보지 않은 기계를 누군가 알려준다고 해서 섣불리 쓸 수 없습니다. 나 스스로 지내 보아야 살 만한 보금자리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서 ‘괜찮은 아파트’라는 광고가 대문짝하게 나온다 해서 이러한 집이 나한테 살 만한 보금자리가 되지 않습니다. 잘생기거나 이름난 연예인이 광고하는 사진기가 내 사진삶에 걸맞을 기계가 되지 않습니다. 250킬로미터까지 달릴 수 있는 자가용을 뽑아야 내가 일터와 집을 오가는 데에 알뜰살뜰 굴릴 수 있을까요. 한 달에 천만 원쯤은 벌어야 뭔가 일다운 일을 하는 셈이라 할 만한지요.

 이리하여 사진찍기를 비롯해서 우리가 하루하루 꾸리는 삶 모든 자리 이야기는 어느 한 가지조차 누가 가르칠 수 없고, 누구한테서 배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기를 쥐기 앞서 ‘사진찍기는 혼자서 뒹굴며 즐기는 삶’임을 헤아려야 합니다. 나 스스로 좋아하는 삶이요 나 스스로 즐기는 사진찍기를 이어가고 있다면, 이때에 비로소 사진책 《우리 동네 사람들》(연장통,2003)에 담긴 멋과 맛을 조촐히 느낄 만합니다. 누구나 펼칠 수 있고 누구라도 살 수 있는 사진책 하나인 《우리 동네 사람들》이지만, 아무나 읽어내거나 아무라도 톺아볼 수 없는 사진책 하나인 《우리 동네 사람들》입니다.

 사진책 《우리 동네 사람들》을 일군 양해남 님은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 사진책에는 금산사람 삶을 금산사람 눈길로 금산사람답게 담아낸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책이름은 “금산 마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라고 붙입니다.

 우리한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운이 조금 남아 있다면, 거듭 생각을 기울일 대목입니다. 최민식 님은 “사람”을 찍었지 “부산사람”을 찍지 않았습니다. 김기찬 님은 “골목길”을 찍었지 “서울골목길”을 찍지 않았습니다. 양해남 님은 당신 삶터에서 금산사람을 찍었으나, “금산사람”이라기보다 “우리 동네 사람”을 찍었습니다.

 양해남 님으로서는 굳이 “금산 마을 사람들” 같은 이름을 붙일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동네가 금산이기는 하지만, 말 그대로 우리 동네에서 살아가며 우리 동네 이야기를 엮었으니까요. 먼 데서 구경 오듯 드나들며 금산을 찍은 사진책이 아닙니다. 고향을 떠나 있다가 모처럼 찾아와서 휘리릭 둘러보며 금산을 담은 사진책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금산에서 부대끼면서 스스럼없이 마주한 사람들을 사진이라는 징검다리로 실어낸 사진책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배울 수 없음을 깨닫지 못하는 채 사진을 찍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아주 놀랍도록 아름다우며 몹시 훌륭하도록 살가운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내 사진에 깃들여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진을 누구한테서 배울 수 없음을 깨닫고 있다면 다른 이 흉내를 낸다든지 다른 이 솜씨를 베낀다든지 다른 이 사진길을 따라 걷는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걸작’이나 ‘명작’을 노릴 까닭이 없을 뿐더러, ‘걸작’이나 ‘명작’이라는 사진이 어떻게 태어나고 왜 이러한 이름이 붙는가를 옳게 헤아립니다. 우리 집 식구들 삶자락을 사진으로 담기만 하여도 얼마나 놀랍도록 아름다운데요. 내 동무와 이웃 삶결을 찬찬히 살피며 나날이 한두 장씩 꾸준히 담아내 본다면 이 사진이 얼마나 훌륭하도록 살가운데요. 아니, 우리는 내 모습을 나 스스로 찍으며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엮을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며 마주한 사람들이라든지 내가 돌아다니며 만난 모습이라든지 한결같이 알뜰살뜰 사진으로 담으면서 온누리에 꼭 하나만 있는 싱그럽고 씩씩하며 돋보이는 사진열매 하나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러러 마지 않는 ‘온누리에 손꼽히는 사진쟁이’란 바로 ‘다른 사람 사진길을 뒤따라 걷던 사람’이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느끼며 좋아하고 사랑할 당신 삶을 힘차고 신나게 걸어가며 당신 사진길이 잘났든 못났든 알차든 모자라든 스스럼없이 일군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진책 《우리 동네 사람들》이 잘 읽히려면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건 다른 나라에서건 이만 한 사진책 하나 살뜰히 읽으며 웃고 울며 기뻐하며 슬퍼할 만한 사람을 사귈 수 있자면 앞으로 한참 멀었습니다. 어쩌면 우리 나라에서 사진길을 걸어가는 동안에는 이 사진책 하나 푼푼하게 즐길 사람을 사귈 수 없을는지 모르겠습니다. (4343.8.14.흙.ㅎㄲㅅㄱ)


― 우리 동네 사람들(양해남 사진,연장통,2003.11.27./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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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테마다 - 곽윤섭 기자가 제안하는 나만의 사진 찍기
곽윤섭 지음 / 동녘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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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살리는 길과 사진을 죽이는 길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4] 곽윤섭, 《이제는 테마다》



- 책이름 : 이제는 테마다
- 글·사진 : 곽윤섭
- 펴낸곳 : 동녘 (2010.6.5.)
- 책값 : 13800원


 (1) 사진을 하는 마음


 집살림을 쉰 해나 예순 해나 일흔 해를 해 온 할머니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신이 꾸려 온 삶이 대단한 삶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여자라면 누구나 으레 꾸려야 하는 집살림이기에, 당신 또한 여느 여자와 마찬가지로 집살림 한길만을 걸어야 했다고 느낄 뿐입니다.

 집살림을 놓고 ‘가사노동’이라 일컫기는 하지만, 정작 집살림을 하는 살림꾼한테 돈값을 치르는 사람이란 없습니다. 집식구가 집살림을 할 때에는 ‘거저로 도맡아 해 줄 일’로 여기고, 밖에서 사람을 불러 일을 시킬 때에 비로소 돈값을 치릅니다. 집안에 있으면 벌이를 하나도 안 한다 여기고, 집밖에 있어야 비로소 벌이를 한다고 여깁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은 집안에서 살림을 하던 할머니와 살림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닮았다고 느낍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수수하고 조촐하게 즐기는 사람들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줍잖게 ‘전문 사진작가 흉내’를 내느라 제멋을 잃고 있는 사람이 보이는 한편, ‘다른 어느 누구 흉내를 내지 않고 스스로 제멋을 살리며’ 더없이 싱그럽고 재미나게 사진을 찍는 사람이 보입니다. 제멋을 잃고 있는 사람은 으레 으쓱으쓱거리면서 마치 당신이 언제라도 ‘전문 사진작가’ 가운데 하나로 이름을 올릴 수 있기라도 하는 듯 뻐기곤 합니다. 제멋을 사랑하며 살리는 사람은 으레 ‘아유, 이런 사진이 뭐가 좋다고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좋아서 찍은 사진인데요.’ 하면서 당신 스스로를 스스럼없이 낮추곤 합니다. 전문 사진작가라고 내세운다든지 전문 사진작가 시늉을 하는 사람들은 당신들이 읽거나 들은 ‘전문 지식’이라 일컫는 이론을 들려줍니다. 스스로 좋아서 사진을 즐기는 사람은 당신들이 겪거나 부대낀 ‘삶’을 웃음이나 눈물을 담아 들려줍니다.

 전문 사진작가라고 해서 사진이 훌륭하란 법이 없습니다. 전문 사진작가이기에 사진이 대단하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라고 해서 사진이 안 훌륭하란 법이 없습니다. 여느 사진 즐김이이기 때문에 사진이 어설프게 나오지는 않습니다. 언제나 가장 크게 돌아볼 대목은 ‘사진하는 마음’이 어떠하느냐입니다. 여기에 ‘사진하는 매무새’가 어떤 모습인가를 돌아봅니다. 다음으로 ‘사진하는 손길’에 어떤 무늬가 아로새겨져 있는가를 헤아립니다. 그리고 ‘사진하는 길’이 어느 구비를 거쳤는가를 살핍니다.

 한 사람을 돌아볼 때에 이이가 어떤 일을 해서 돈을 얼마나 벌거나 이름값을 얼마나 높였는가는 하나도 돌아볼 만한 대목이 아닙니다. 한 사람을 돌아보고자 한다면 이이가 당신 삶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어 즐거이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했느냐를 돌아볼 뿐입니다.

 집살림하는 분들은 집살림을 학교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집살림을 무슨무슨 요리학원이나 문화센터 같은 데에서 익히지 않습니다. 집살림하는 분들은 당신 스스로 집안에서 부대끼고 복닥이면서 차근차근 온몸과 온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집살림하는 분들한테 시어머니이든 친정어머니이든 있을 때에 가장 가까우면서 고마운 스승으로 삼으며 드문드문 하나씩 살가이 맞아들입니다. 그런데 당신 시어머니이든 친정어머니이든 ‘전문 살림꾼’은 아닙니다. 그저 ‘여느 살림꾼’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네 살림꾼들이 일구는 집살림은 살림집 숫자만큼 많습니다. 사람마다 살림하는 모양이 다르고, 사람마다 살림하는 틀이 다릅니다. 집집마다 장맛과 김치맛이 다르다고 하듯, 사람마다 살아가는 얼거리가 달라요. 그러니까, 이렇듯 모두 다른 삶결대로 모두 다른 살림을 꾸려 온 이들이 바로 우리네 살림꾼인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소리요, 오늘날까지 가장 막대접이나 푸대접을 받으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훌륭하고 알뜰히 당신 길을 걸어온 어른이 할머니와 어머니라는 얘기입니다.

 여느 자리에서 여느 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 ‘사진하는 아름다움’을 건사하려 한다면, 다른 어느 누가 아닌 집살림하는 할머니가 걷던 길이나 어머니가 걷는 길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손꼽히는 요리강사나 국보급 인간문화재한테서 무언가를 배우거나 익혀야 살림을 잘하겠습니까. 손꼽히는 요리강사한테서도 무언가를 배우고, 국보급 인간문화재한테서도 어떤 이야기를 듣기는 할 테지요.

 그렇지만, 내 삶은 내 가슴으로 내 나름대로 느끼면서 내 결대로 내 길을 걸어가면서 일굴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모습을 흉내낸다든지 남을 엿보면서 시늉을 한다고 내 삶을 일굴 수 없습니다. 내 살림은 내 몸과 마음에 맞추어 내 깜냥껏 일구어야 합니다. 곧, 내 사진은 다른 어느 누구한테서 배워서 하는 사진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좋고 나쁨을 느끼며 찍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전문 사진강사한테서 좋은 구도를 배운다든지 괜찮은 빛느낌을 익힌다든지 쓸 만한 사진감(소재나 주제 모두)을 받아들인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내 깜냥껏 반갑고 아쉬움을 헤아리며 담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내 눈을 믿고 내 손을 믿으며 내 사랑과 믿음을 믿으며 즐기는 사진이어야 합니다.

 지난날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기에 앞으로 이어질 머나먼 나날까지, 집살림하는 분들이 꾸린 삶자락이란 바깥사람 눈길로 보기에 ‘아무 모양새(주제)’가 없었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집살림하는 당신들처럼 살림을 하는 사람이라든지 집안에서 당신 곁에 머물며 오래오래 함께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보기에 ‘참 고우며 좋은 모양새(주제)’였다 할 만합니다.

 인천 골목동네에 살 때에 알고 지내던 아주머니네 어머니가 돌아가신 엊그제, 마침 충주에서 인천으로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었기에, 장례식장에 들렀습니다. 장례식장에서도 마구 뛰고 휘저으며 노는 딸아이를 붙잡느라 정작 돌아가신 분한테 ‘고이 저승길을 걸어가소서’ 하고 비손할 겨를조차 없이 바빴습니다. 고단해 하며 시나브로 잠들 듯한 아이를 안고 잠자리로 가는 길에서야 겨우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에 어떠했는지를 여쭙지 못했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오늘 이때에도 어디에선가 할머니들은 한 분 두 분 숨을 거두고 있을 텐데, 숨을 거두는 할머니들 궂긴 소식은 신문에든 방송에든 나오지 않습니다. 여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데 어느 신문이나 방송에서 당신들 삶을 다루겠습니까.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루는 궂긴 소식은 이름난 사람들이나 연예인이나 정치꾼이나 회사 간부나 높은자리 공직자들뿐입니다. 그런데 이런저런 이름난 사람들한테서 얻거나 느낄 마음이란 무엇일는지요? 하나같이 양복을 쫙 빼입고 있는 그 이름난 분들 궂긴 소식 사진을 바라보면서 무슨 울렁거림이 있을는지요?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진을 찍는 바로 그때부터 ‘내 사진감(사진 주제)’이 태어났다고 느낍니다. 집에서 식구들 모습을 찍든, 꽃 사진을 찍든, 동네에서 동무나 이웃 사진을 찍든,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찍든 ‘내 사진감(사진 주제)’을 알뜰살뜰 즐기고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동안에 언제나 내 사진감이 하나둘 새록새록 쌓이고 있달까요.

 따로 사진감을 찾을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나 무엇이든 넓고 깊은 숱한 사진감으로 샘솟고 있기 때문입니다. ‘뭐 하나만 찍자’고 해야 사진감이 되지 않습니다. 골목고양이 하나만 찍자고 해서 ‘주제가 있는 사진’을 찍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산과 바다만을 찍자고 해서 ‘주제가 서린 사진’을 담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모든 사진은 ‘주제가 있는 사진’입니다. 다만, 한 가지 틀에서는 다릅니다. 모든 사진에는 저마다 사진감(주제)이 있습니다만, ‘이야기’까지 있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래저래 아무렇게나 찍은 사진에도 이야기를 우겨넣을 수 있기는 할 테지요. 이야기란 우겨넣든 꾸겨넣든 쑤셔넣든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생각해 보셔요. 우겨넣거나 꾸겨넣거나 쑤셔넣은 이야기를 달가이 반길 사람은 얼마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 생각을 하기 앞서, 나 스스로 생각해 보셔요. 우겨넣은 이야기가 즐거웁겠습니까. 꾸겨넣거나 쑤셔넣은 이야기를 나 스스로 오래도록 즐길 수 있겠습니까.

 할머니나 어머니를 만나서 이야기보따리를 풀다 보면, 방송 연속극에 나오는 ‘억지로 지어내거나 짜낸 웃음눈물’하고 견줄 수 없이 산뜻하고 너르며 풋풋한 웃음과 눈물이 가득하곤 합니다. 여느 사람들 누구나 이런 느낌이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 누구한테서나 살가우며 재미난 한편으로 고달프고 힘겨운 나날인 까닭에, 여느 사람들 삶이야기야말로 눈물나거나 웃음납니다. 그래도 여느 사람들은 당신들 삶을 이야기하기보다 방송 연속극을 들여다보기 좋아하시는데, 그저 당신들 할머니나 어머니 삶을 찬찬히 들으며 당신들 삶을 책으로 쓰거나 연속극으로 담은 일이 없을 뿐입니다. 당신들이 온몸과 온마음으로 붙잡고 부둥켜안으면서 보내 온 삶에는 늘 ‘주제’와 ‘이야기’가 깃들어 있으나, 당신들부터 이러한 삶에 깃든 주제와 이야기를 내세운 적이 없는 가운데 우리 또한 돌아보거나 살피거나 보듬지 않아 왔습니다.

 그래서, 사진을 하고 싶은 분들은 굳이 사진을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그예 ‘사진하는 마음’을 잘 다스리시면 됩니다. 여기에 ‘사진하는 매무새’를 알차게 돌보면 됩니다. 다음으로 ‘사진하는 손길’을 보살피면서 ‘사진하는 길’을 힘차게 걸어가면 돼요. 이 모든 줄기와 구비는 나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합니다. 다른 이 손을 빌 일이란 없습니다. 홀로 걷다가 벅차면 누군가 도와줄 수 있겠지요. 그러나 남한테 맡겨서는 이룰 수 없는 우리 집 살림이요 내 사진밭입니다. 홀로 걷다가 벅차다 할지라도 바로 이렇게 ‘벅찬 배움’ 때문에 나 스스로 내 사진을 더 튼튼하고 힘차게 갈고닦을 수 있습니다. 벽에 부딪혔을 때에 누군가 등받이를 해 주어 밟고 올라설 수 있습니다만, 이 벽을 내 자그마한 두 주먹으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이 벽을 멀리 에돌아 갈 수 있는 한편, 내 손으로 사다리 하나 만들어서 벽을 살며시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어찌 되든, 벽 앞에 선 나는 내 깜냥껏 이 벽하고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내 길을 씩씩하게 걸어가야 합니다.

 글쓰기를 할 때에도 똑같고, 그림그리기를 할 때에도 똑같습니다. 노래를 부르거나 지을 때, 춤을 추거나 어떤 공연을 할 때에도 똑같습니다. 남을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남한테서 배워 글쓰기를 할 수 없고 좋은 스승한테서 배운다고 그림그리기를 할 수 없습니다.

 교사나 강사나 스승이나 교수나 전문가라는 분들한테서 몇 가지 자잘한 솜씨는 받아들이거나 물려받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글 한 줄에 담는 넋은 내 넋을 담을 노릇입니다. 그림 한 장에 싣는 얼은 내 얼을 실을 노릇입니다. 내 스승 넋을 내 사진에 담아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내 스승 넋은 내 스승이 당신 스스로 찍는 사진에 당신 나름대로 담을 뿐입니다.


 (2) 사진은 억지로 가르칠 수 없는데


 한겨레신문사에서 사진기자 일을 하는 곽윤섭 님이 《이제는 테마다》라는 이름을 붙인 책 하나 내놓습니다.

 사진강좌를 열기도 하고,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길잡이말을 찬찬히 일러 주기도 하는 곽윤섭 님입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곽윤섭님한테서 도움을 받은 사진쟁이가 꽤 많지 싶고, 곽윤섭 님이 도와준 사람들 숫자 또한 무척 많지 싶습니다.

 그렇지만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은 누가 누구한테 가르쳐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누가 누구한테서 배울 수 없으니까요. 곽윤섭 님 사진은 곽윤섭 님 스스로 깨달으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당신한테 사진을 가르쳐 준 교수님이나 작가님이 있다 할지라도, 곽윤섭 님 당신 사진은 당신 나름대로 깨닫고 깨우쳐야 비로소 이루는 사진입니다. 곽윤섭 님한테서 사진강의를 듣는 분들도 매한가지예요. 사진강의를 듣는 분들은 사진강사한테서 훌륭하거나 알뜰하다 싶은 이야기를 엿듣거나 받아들여야 당신 사진을 훌륭하게 끌어올리거나 일굴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강의를 듣든 안 듣든 당신 스스로 당신 사진길을 당신이 몸소 부대끼면서 깨닫고 깨우쳐야 비로소 당신 사진길을 걸으면서 당신 사진을 훌륭히 끌어올리거나 일굽니다.


.. 사진에 선이 들어 있으면 주목도가 높아집니다. 바닷가나 사막의 모래밭을 떠올려 봅시다 … 이 모래밭 사진을 찍었을 때 담을 수 있는 것은 모래의 질감과 색일 것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찍은 사막 사진과 비교하면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 도시에서 사진을 찍으면 삭막하게 보이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숱하게 등장하는 사각형들 때문입니다. 어디서 카메라를 들여다봐도 사각형을 피하기가 힘듭니다. 굳이 사진을 찍지 않고 눈으로만 본다고 해도 답답하기 짝이 없습니다 ..  (13, 25쪽)


 곽윤섭 님은 《이제는 테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책이름부터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진은 “주제가 있는 사진”입니다. 주제(테마)가 없는 사진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저 “사진에는 늘 주제가 있으나 이야기가 꼭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들 사진하는 사람이 ‘이제 막 사진길을 걸으려고 하는 사람’이나 ‘사진길을 걷다가 망설이거나 헤매는 사람’한테 길잡이 노릇을 하자면, “이제는 테마다!” 하고 외칠 노릇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모든 사진에는 주제가 있어요.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 사진 어디에나 주제가 있음을 못 느끼거나 못 알아채고 있답니다.” 하고 따스한 목소리로 알려주는 가운데 “그런데 말이에요. 우리들이 찍는 모든 사진에는 주제가 있기는 한데, 이야기를 싣지 못할 때에는 영 맛이 없거나 멋이 없답니다.” 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어깨를 토닥이며 딱 한 가지 모자람만 짚으면 됩니다.


.. 모르는 사람을 모델 삼아 찍기가 어렵다면 주변 인물, 즉 가족, 친구, 동료들을 미리 점찍어 둔 공간에 데리고 가서 찍어 봅시다 … 사진은 그림과 달라 비슷한 두 개의 꽃병을 다르게 찍기가 어렵습니다. 사진은 발견이며 선택의 문제입니다. 부지런한 발로 끊임없이 돌아다니면서 어떤 것을 찍을지 보고 다니다가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비슷한 두 개의 꽃병이 아니라 서로 다르게 생긴 두 개의 꽃병을 찾아다니는 것이 사진입니다 ..  (39, 41쪽)


 이야기가 없으니 맛도 멋도 있을 턱이 없습니다. 이야기가 있으면 흔들린 사진이든 초점이 어긋난 사진이든 좀 어둡거나 밝게 나온 사진이든 재미가 있습니다. 신이 나고 기쁨이 묻어 나기 마련입니다. 놀랍도록 훌륭하다 하는 사진쟁이들이 마련한 사진잔치에 가 보면 으레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 몇 점씩 끼어 있곤 한데, 당신들은 틀림없이 ‘안 흔들리거나 초점 잘 맞춘’ 사진을 다시금 찍고 새로 더 찍었을 텐데, 사진잔치 자리에서는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을 어김없이 내걸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안 흔들리거나 초점 잘 맞춘 사진이든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든 “주제는 다 같이 있”습니다만, “이야기는 다 같이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안 흔들리거나 초점은 잘 맞았어도 “이야기 하나 제대로 실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진은 쓰지 못합니다. 흔들리거나 초점 덜 맞은 사진이라 할지라도 “이야기 하나 살뜰히 실어냈기” 때문에 이 사진을 씁니다.

 한 달에 오백만 원을 벌어야 좋은 돈벌이가 아닙니다. 한 달에 사백구십오만 원을 벌어도 좋은 돈벌이요, 사백오십만 원을 벌든 삼백오십만 원을 벌든 이백오십만 원을 벌든 오십만 원을 벌든 좋은 돈벌이입니다. 오로지 돈벌이만 하느라 내 삶을 놓치고 있다면 끔찍한 돈벌이입니다. 벌어들이는 돈 숫자가 낮을지라도 내 삶을 가꿀 겨를이 있는 가운데, 보람찬 돈을 벌어들일 수 있어야 비로소 나한테 좋은 돈벌이입니다.

 우리는 “이제는 주제다”가 아닌 “이제는 이야기다” 하고 외쳐 주어야 합니다. 이제 막 사진길을 걷는 새내기한테든, 오래도록 사진길을 걸은 즐김이한테든, 꼭 한 가지 말마디, “여러분 당신이 사랑하고 좋아하는 이야기를 그저 있는 그대로 살포시 사진 한 장에 담아 주셔요. 이뿐이랍니다.” 하고 들려주어야 합니다.

 무슨무슨 소재를 시험 삼아 찍어 보라고 일러 주어 보았자 부질없습니다. 이럴 때에는 이런 구도로 찍어 보고 저럴 때에는 저런 느낌을 담아 보라고 해 보았자 덧없습니다. 만듦사진이 부질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야기 하나 없는데 만듦사진이든 스냅사진이든 스트레이트이든 무어이든 해 보았자 “사진이 될” 수 없어요.

 마구 휘갈겨 쓴 글이나 아무렇게나 휘갈기듯 그린 그림이라 할지라도, 글쓴이나 그린이 나름대로 이야기 한 자락 담고 있으면 놀랍도록 눈물나거나 웃음나는 글이나 그림으로 남습니다. 세발이를 받치고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찰칵 한 장 찍었다고 훌륭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모든 구도와 빛과 그림자를 맞추어 황금분할을 이루었다 할지라도 멋있는 사진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사진조차 될 수 없”습니다.


.. 이런 경우는 어떨까요?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는 아이를 찍을 때 옆에 있는 다른 놀이기구의 테두리를 이용해 찍는 것. 이것도 프레임 속 프레임입니다 … 회화에서는 화가 특유의 터치로 시각에 따라 대상을 표현하는 선이나 면을 일그러지게, 때로는 더 과장되게 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반 고흐가 그린 해바라기는 다른 사람의 해바라기와 아주 다르게 보입니다. 그러나 셔터를 눌러서 찍는 사진에서는 사진가 임의대로 터치를 바꾸는 것이 극단적으로 제한되어 있습니다 ..  (59, 69쪽)


 우러나오는 사진이 되도록 ‘사진하는 사람’들 누구나 스스로 당신 삶을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서 넉넉히 사랑하고 아끼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이는 사진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글이나 그림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든, 아니면 여느 교사로서 초중고등학교나 대안학교나 대학교나 뭐 이런저런 배움터에 있든 똑같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물려줄 수 없어요. 지식이란 책에 적바림해 놓고 ‘한번 읽으셔요’ 하고 내밀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삶을 물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삶만 물려줍니다. 삶에 서린 눈물을 물려주고, 삶에 깃든 웃음을 남깁니다.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를 잇는 가운데, 삶을 돌아보는 눈길과 손길을 나눕니다.


.. 사진을 찍어서 예쁘게 나올 만한 길들을 찾아봅시다. 우선 한강을 따라가 봅시다. 한강 주변에는 멋진 산책로가 많이 있습니다. 서울의 선유도공원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만나는 무지개다리는 낮이나 밤이 모두 아름다운 곳입니다 ..  (163쪽)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사진 지식’을 펼쳐 보이는 《이제는 테마다》라는 책 하나라고 느낍니다. ‘사진 지식’이 아닌 ‘사진 삶’을 펼쳐 보였어야 할 곽윤섭 님이 아닌가 싶은데, 이제까지 퍽 오랫동안 전문 사진기자 길을 걸어오셨으나 정작 사람들한테 ‘사진 삶’은 펼쳐 보이지 못하고 책머리부터 책끝까지 온통 ‘사진 지식’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사진하는 지식을 다루는 책이라면 구태여 《이제는 테마다》 같은 책을 들출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사진하는 지식을 다루는 책은 《이제는 테마다》를 비롯해 그 어떤 책조차 들출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가 들출 사진책이라면 사진하는 삶을 다루는 책이어야 합니다. 사진하는 삶을 ‘사진책을 쓴 사진쟁이’ 스스로 먼저 온몸과 온마음으로 보여주는 가운데, 당신 뒷사람들한테 사진하는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우며 멋진가를 깨닫도록 한손을 내미는 책을 들추어야 합니다.

 집살림을 하는 분들은 당신 집안에서 톡톡히 살림꾼입니다. 사진을 하는 분들은 당신 두 다리로 서 있는 어느 곳에서나 톡톡히 ‘사진 살림꾼’일 노릇입니다.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다시 서고,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새로 서며, 사진을 하는 살림꾼으로 튼튼히 설 노릇입니다.


.. 자전거를 테마로 삼으면 유리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주변 어디에서든지 쉽게 찾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거리, 공원, 광장 등에서 수시로 자전거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자전거에 동그란 바퀴가 있다는 것도 사진을 찍는 데 흥미로운 점입니다. 사진 속에 무엇인가를 담을 때는 특이한 소재가 있으면 무조건 도움이 되는데, 자전거의 바퀴는 모양 덕에 풍부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습니다. 동그라미는 명랑하고 원만하며 희망적인 느낌을 줍니다 ..  (191쪽)


 사진을 살리는 길과 사진을 죽이는 길은 종이 한 장과 같습니다. 종이를 앞으로 뒤집으면 사진을 살리고, 종이를 뒤로 뒤집으면 사진을 죽입니다.

 내 눈을 믿고 내 가슴을 사랑하며 내 삶을 좋아하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눈이 아닌 남 눈에 기대거나 내 가슴이 아닌 다른 이 가슴을 눈치 보듯 살피거나 내 삶이 아닌 딴 사람들 삶에 홀리고 있다면 사진을 죽입니다. 내 사진기가 값싼 녀석이든 비싼 녀석이든, 이 하나를 내 몸통으로 여기며 언제나 고이 아낄 수 있으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사진기 하나를 아끼기보다 더 값있고 괜찮다는 기계에 자꾸 눈이 멀다 보면 사진을 죽입니다. 척 보기에 눈물나거나 웃음나도록 아름다운 사진을 좋아하는 가운데 나 스스로 내 사진에 아름다움을 담으려고 해야 사진을 살립니다. 남 앞에서 내보이거나 무슨 기록을 만든다거나 어떤 일거리에 따라 찍으려고 하는 사진이라면 저절로 사진을 죽입니다.

 내 두 손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살아가면 사진을 살립니다. 내 두 다리가 단단해지도록 살아가면 사진을 살찌웁니다. 손수 꾸리고 몸소 일구는 삶이라면 사진이 살아납니다. 사진이란 ‘손수’ 하는 일이고, 내가 ‘몸소’ 즐기는 놀이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부터 ‘사진을 막 배우려는’ 분들이나 ‘사진을 오랫동안 했으나 갈팡질팡하는’ 분들이라면 제발 사진강의는 듣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부디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려고 용을 쓰지 말아 주시면 좋겠습니다. 사진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뿌리는 바로 내 삶에 있으니까요. 사진을 곱게 여미는 잎사귀는 먼나라가 아닌 내 고향마을 어디에나 곱다시 있으니까요. (4343.7.16.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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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저널리즘 -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지음, 구자호.이기명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사진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는가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7] 케네스 코브레, 《포토저널리즘 (5판)》



 사진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 또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읽기마저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가르칠 수 있는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나 지식인이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우치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익히는 사진찍기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사진읽기입니다.

 그러나 사진이든 사진찍기이든 사진읽기이든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듣는다든지 하면서 배우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도 사진이나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강좌나 이론 또한 사진이며 사진찍기이며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곰곰이 살피면, 사진뿐 아니라 사랑 또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아무개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없을 뿐더러 어떻게 해야 사랑이 된다고 알려줄 수 없습니다. 사랑편지를 쓰라느니, 만나면 어디를 가라느니 하고 도움말을 할 수는 있으나, 마음이 맞는 두 짝꿍이 이루는 사랑은 두 사람 스스로 두 사람 깜냥껏 이룰 뿐입니다.

 사랑만 스스로 깜냥껏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어머니 손맛’을 이야기하는데, 어머니들 스스로 어머니 손맛을 이루어지기까지 누구한테서 살림살이 비법을 배운 적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처음부터 어머니이지 않았고, 누구도 처음부터 어머니 손맛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내면서 차츰차츰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 손맛을 익힐 뿐입니다.

 학자가 되는 길이든 교사가 되는 길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논문을 쓰거나 책을 내놓아야 학자가 아닙니다. 대학원을 다녀야 학자로 설 수 있지 않아요. 내 배움길을 스스로 갈고닦으며 살피고 가다듬으며 비로소 학자가 됩니다. 교대를 나와 교사자격증을 땄다고 교사이지 않습니다. 배움터에서 아이들하고 부대끼는 가운데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교사다움을 익히고 받아들이면서 아주 천천히 교사가 됩니다.

 《포토저널리즘 (5판)》이라고 하는 ‘사진 길잡이책’은 사진과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를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살짝이나마 사진밭을 맛보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이 사진책은 ‘전문 사진기자가 되려는 사람한테 도움말을 건네는 책’이라 할 만하지만, 전문 사진기자이든 아마추어이든, 또는 집에서 꽃이나 강아지나 식구들을 찍으며 사진을 즐기든, 사진을 좀더 깊이 헤아리면서 좋아하고자 하는 이들한테 사진말을 나누어 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싶으면 읽는 책이요, 사진을 배우고 싶을 때에 ‘사진을 배우는 길’이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를 익히는 책입니다.

 “사진기자들은 제한된 시간 동안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 계속 촬영을 한다. 아마추어들은 몇 장의 스냅사진을 찍고 최상의 작품을 기대한다 … 많은 사진기자들이 필름을 다 쓰기 전에 촬영을 멈춘다. 필름을 남겨 두는 이유는 누군가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28, 3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기자와 아마추어를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나라밖에서 훌륭하며 알뜰히 사진기자로 뛰는 사람하고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잣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땅 사진기자들 가운데 ‘가장 나은 사진을 얻고자 쉬지 않고 찍는’ 사람은 퍽 드물거든요. 한국땅 사진기자는 너무 바쁜 나머지 취재현장에 오래 있지 않을 뿐더러(아예 취재현장에 안 오기 일쑤입니다), 미리 와서 살펴보지 않고, 행사나 사건이 끝난 다음까지 더 남아서 뒷모습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빨리 찍고 떠나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그림 될 만한 모습을 찍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예식장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진기자는 예식장 사진기사하고 닮았습니다. 주문받은 사진첩 하나에 넣을 사진만 착착 찍을 뿐, 혼인을 치르는 다 다른 짝꿍들한테서 느낄 다 다를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예식장에 미리 찾아와 온갖 모습을 두루 찍는다든지, 예식을 치르는 동안 벌어지는 갖가지 모습을 골고루 담는다든지, 예식을 마치고 나서 어우러지는 숱한 모습을 적바림한다든지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포토저널리즘 (5판)》에 나오는 “최고의 렌즈 테크닉과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도, 사진기자는 여전히 세금 인상을 위해 소집된 시의회와 지역구의 학교 수를 줄이기 위해 열린 회의의 차이를 독자를 위해 구별해 줘야 하는 어려움을 가진다(72쪽).” 같은 대목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문 사진기자들일수록 더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합니다. 전문 사진기자라 하는 분들이 사진강좌를 곧잘 열곤 하지만, 이런 분들한테서 사진을 배운다고 한다면, 아마추어이든 그저 ‘사진 즐김이’이든, 저마다 사랑하고 아끼며 가슴으로 받아들일 사진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대단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사랑할 자리를 찾고 깨닫고 느끼면서 이러한 모습을 꾸밈없이 담으며 좋아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그럴싸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요, 우리 삶에서 사랑스런 살붙이와 이웃을 살피고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이들 삶자락을 알뜰살뜰 담으며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

 기자들한테만 “만약 촬영 대상이 카메라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포토저널리즘적으로 뛰어난 기술도 내면을 드러내는 포트레이트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124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집에서 내 식구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된 우리들이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 아이가 ‘아이 참, 싫다는데 왜 자꾸 찍어요?’ 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면 어떤 사진이 나오겠습니까. 꽃이나 나무 사진을 찍는다 할지라도, 꽃이나 나무가 어떠한 터전을 좋아하고 반기는가를 살피지 않고 찍는다면 고운 꽃 사진 하나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문기자 사진이든 여느 생활사진이든 사진 한 장에는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너른 믿음과 가장 따순 손길을 담을 노릇입니다.

 마땅한 일이 마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우리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가 초중고등학교다운 적이란 없고, 언제나 입시지옥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대학교가 대학교다운 날이란 없으며, 늘 대기업 취직을 바라는 싸움터로만 구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배움터 모습이 언론에 옳고 바르게 나타나는 일이란 몹시 드뭅니다. 진보를 외치든 보수를 말하든, 참다운 우리 터전을 사랑하면서 우리 터전을 보여주는 목소리는 꽤 드뭅니다. “매체로서의 사진은 당연히 우리의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편집자들은 고의적이거나 은근한 무시를 통해 전체 인구 구성에서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중남미인, 아시아인, 모든 종족의 여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242쪽).”는 대목을 읽으며, 이 땅 진보나 보수가 얼마나 이 땅 너른 사람들 삶을 담아내는가를 살펴봅니다. 좌파가 진보이거나 우파가 보수이지 않습니다. 좌파는 좌파이고 우파는 우파이며, 진보는 진보이고 보수는 보수입니다. 저마다 우리 삶터를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참된 쪽으로 이끌어 갈 물줄기입니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른 물줄기가 아니에요. 사진이란, 또 사진찍기란, 그리고 사진읽기란 어떻게 해야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떻게 하면 그르다고 가를 수 없습니다. 참되고 착하며 고운 길을 걷는 가운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사랑과 믿음을 길어올리는 몸짓이 사진으로 됩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누구나 나 스스로 좋아하며 사랑하는 삶을 찍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을 담습니다. 나 스스로 아끼거나 돌보고픈 터전을 적바림합니다. “사진기자는 사진 콘테스트나 편집자 혹은 동료 사진기자들을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행복한 순간뿐만 아니라 슬픈 순간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한다(385쪽).”는 말마따나, 사진이란 내 모든 삶을 곱다시 담으며 즐기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이며, 삶을 즐기는 예술인 사진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를 어디 다른 데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삶을 즐기는 예술을 학교를 오래 다닌다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온다고 깨닫겠습니까.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찾으며 스스로 즐길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좀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책을 찾아 읽을 뿐이요, 나 스스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면, 내 사진은 아주 저절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진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알차게 일구고 있으면, 내 사진 또한 시나브로 알차게 일구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을 배우려면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진찍기를 제대로 하고 싶으면 스스로 내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사진읽기를 똑바로 받아들이려면 스스로 내 삶을 껴안아야 합니다. 사진 배움길이란 오직 이 하나입니다. (4343.7.14.물.ㅎㄲㅅㄱ)


― 포토저널리즘,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씀, 구자호·이기명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5.2.20./3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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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지음 / 들녘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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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찍는 가장 즐거운 멋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6] 김윤기, 《내 멋대로 사진찍기》


 우리 집에 디지털사진기가 두 대가 되었습니다. 형한테서 얻은 돈을 보태어 가까스로 한 대를 장만하여 쓰고 있었는데, 이 디지털사진기는 고작 한 해 반을 썼을 뿐이지만 부속품이 낡고 닳아 사진기값 1/5에 이르는 돈을 치르며 고치고 한 대를 새로 장만합니다. 사진기 수리점에서는 ‘사막에 다녀오셨어요?’ 하고 묻더군요. 오로지 인천골목길하고 헌책방하고 아이 세 가지만을 사진으로 담았으니 참 어이없는 물음이었습니다.

 우리 아이는 퍽 어릴 무렵부터 아빠 사진기를 갖고 놀았습니다. 백일이 지난 뒤부터가 아닌가 싶은데, 아빠가 늘 사진찍기를 하고 있으니, 사진기가 바닥에 놓여 있으면 엉금엉금 기어와서 사진기를 만지작거렸고, 단추를 하나하나 눌러 보면서 ‘설명서 한 번 안 보고’ 사진기 다루는 솜씨를 웬만큼 익혔습니다. 이제 고작 스물석 달짜리 아이인데, 혼자서 제법 씩씩하게 사진기를 들고는 사진을 찍습니다. 찍힌 사진을 들여다본다든지, 사진을 주루룩 넘긴다든지, 옆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일을 꽤 잘합니다.

 디지털사진기 한 대만 있고, 필름사진기조차 망가져서 못 쓰고 있는 동안에는 아이가 사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따로 사진으로 담지 못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아이가 사진기를 갖고 노는 모습을 얼마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은 우리 아이가 사진을 찍을 줄 안다고 하면 못미더워 합니다. 저러다 비싼 사진기 떨어뜨려 깨뜨리지 않느냐며 걱정합니다. 아이는 백일 무렵부터 이제까지 아빠 사진기를 한 번도 바닥에 떨어뜨린 적이 없으며, 늘 살몃살몃 다루어 줍니다. 어린 나날부터 어버이 곁에서 사진기를 갖고 놀았으니 스물석 달을 살았으면서 채 돌이 되기 앞서부터 사진을 찍을밖에 없습니다. 어버이가 농사꾼이면 어린 나날부터 호미질 가래질 쟁기질을 옆에서 지켜보며 농사일을 익힐밖에 없고, 어버이가 살림꾼이면 어린 나날부터 밥하기 빨래하기 씻고 닦기 같은 일을 늘 바라보며 익힐밖에 없습니다. 저마다 삶으로 헤아리고 삶으로 배우며 삶으로 스며듭니다.

 태국에서 짐차를 모는 일을 하는 김윤기라는 분은 사진찍기를 무척 즐긴다고 합니다. 어디를 다니든 사진기를 챙긴다고 하는군요. 당신은 스스로 ‘프로’ 아닌 ‘아마추어’라 얘기하고, 프로이든 아마추어이든 사진을 즐기는 사람이면 사진쟁이라고 밝힙니다. 당신은 《내 멋대로 사진찍기》라는 책까지 하나 써 냈습니다. 사진을 말하는 책을 내놓는 사람들은 으레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인데, 사진으로 밥벌이를 하지 않으면서 사진책을 낸 김윤기 님은 머리말에서 “사진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프로가 아마추어를 가르치는 그런 식이었다 … 사람이 다르면 사진도 다르고, 그 방법도 다를 수밖엔 없다. 길을 가르쳐 준다기보다는 어디든지 가고 싶은 대로 자유로이 떠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7∼8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김윤기 님 말마따나 사람이 다르면 삶이 다르고, 삶이 다르기에 사진이 다릅니다. 사진이 다르다는 이야기는, 더 낫거나 모자란 사진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마다 제 삶을 사랑하는 만큼 제 사진을 사랑하기 마련이요, 저마다 제 삶을 좋아하는 만큼 제 사진을 좋아하기 마련입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나 놀이를 이야기한다면 누구나 손쉽고 따스하며 넉넉한 말씨로 들려줍니다. 사랑하거나 좋아하는 일이나 놀이를 다룰 때에는 언제나 살가우며 가슴이 뭉클하고 신나는 보람 하나를 베풀어 줍니다.

 좋은 사진이란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나누며 좋은 삶을 꾸릴 때에 태어납니다. 누가 좋다고 말하기 앞서 나 스스로 나부터 좋다고 느끼는 사진입니다. 누가 엉성하다고 따지기 앞서 내가 먼저 온몸으로 엉성하다고 느끼며 뉘우치는 사진입니다.

 사진을 찍는 멋이란 내 나름대로 내가 사랑하는 삶을 일구는 멋입니다. 사진을 바라보는 맛이란 내 깜냥껏 내가 좋아하는 사람하고 사귀며 어깨동무하는 맛입니다. 사진찍기는 온통 땀내 나는 삶이요, 사진읽기는 속속들이 살가우며 따스한 삶입니다.

 “완성에 이르지 못한 예술 사진처럼 쓸데없는 사진이 또 있을까? 무엇을 전하려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고, 막연한 느낌이나 감정을 전달하는, 그러나 주로 실패하는, 그런 사진을 찍는 데 필름을 마구 쓰는 것이 과연 가치 있는 일일까(34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김윤기 님은 필름사진을 찍으면서 필름을 알뜰히 아낀다고 밝힙니다. 식구들하고 먹고사는 가운데 사진찍기에 더 많은 돈을 쓸 수 없기도 하지만, 스스로 더 좋아할 만하거나 더욱 사랑할 만한 사진이 나오기까지 더 생각하고 살피며 부대낀 다음 사진기 단추를 누르고 싶답니다. 사진기 단추를 더 많이 눌러 본다고 해서 당신 마음에 더 들거나 당신이나 둘레 사람이 흐뭇하게 여길 만한 사진이 나오지는 않는다고 밝힙니다. “필름을 아껴 쓰는 것, 아마추어 사진가들에게는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아마추어의 사진이란 절제 속에서 그 깊이를 더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58쪽).” 하고 덧붙이는데, 곰곰이 따지면, 프로 사진쟁이이든 아마추어 사진쟁이이든 ‘나 스스로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어떤 매무새로 어떻게 담으려는가’에 마음을 쏟을 노릇입니다. 사진찍기를 즐길 수 있느냐 없느냐를 크게 헤아려야지, 어떻게 찍든 잘 나오는 사진 하나 얻으면 그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는 잘 찍은 사진 한 장이란 부질없거든요. 우리한테는 예쁘게 찍은 사진 한 장이란 덧없거든요. 우리한테는 그럴싸하게 찍은 사진 한 장이란 쓸모없거든요.

 잘 찍은 사진 한 장으로 무엇을 하겠습니까. 예쁘게 찍은 사진 한 장을 저잣거리에 내놓고 팔 생각입니까. 그럴싸하게 찍은 사진을 대문에 걸어 놓고 뽐내려 합니까.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이 더 아름답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의 사진을 찍으려 애쓴다(83쪽).”는 이야기처럼, 우리는 우리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느끼며 받아들이고자 살아갑니다. 이렇게 우리 두 발을 내디딘 이 땅에서 우리 아름다운 삶을 즐기고자 사진을 찍고 일거리를 찾고 놀이감을 즐기며 사랑하는 사람하고 보금자리를 가꿉니다.

 아름다운 삶에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에는 아름다움을 나누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윤기 님 책 《내 멋대로 사진찍기》는 김윤기 님이 살아가는 멋이랑 다른 이름난 사진쟁이가 살아가는 멋이랑 똑같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비슷하거나 닮은 구석 하나조차 없는데, 누가 누구한테서 사진을 배우거나 누가 누구 사진 틀거리를 배우거나 할 수 없음을 넌지시 들려줍니다. 사진강좌이든 사진학교이든 모조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이론이든 사진실기이든 하나같이 보탬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들었으면 내 삶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면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면 됩니다. 붓을 들었으면 내 삶을 고즈넉히 살피면서 그림 하나 그리면 됩니다. 연필을 들었으면 내 삶을 맑고 밝게 껴안으면서 글 하나 적바림하면 됩니다. 춤과 노래와 몸짓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우리 삶에 어떤 멋이 있고, 내가 좋아하는 멋이 어디에서 비롯하는가를 느끼며 비로소 문화이든 예술이든 삶 하나로 모두어지며 태어납니다. 사진은 누구나 ‘내 멋대로’ 찍고 ‘내 삶대로’ 좋아하며 즐기는 가운데 아름다움이라는 옷을 입습니다. (4343.7.11.해.ㅎㄲㅅㄱ)


― 내 멋대로 사진찍기 (김윤기 글·사진,들녘 펴냄,2004.2.23./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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