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관 - 인천 차이나타운
김보섭 지음 / 눈빛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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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사진, 잃어버린 삶
 [찾아 읽는 사진책 6] 김보섭, 《청관》(눈빛,2010)



 사진 백서른두 장이 갑작스레 날아갔습니다. 필름으로 치면 한 통에 서른여섯 장이니 서너 통쯤 사라진 셈입니다. 다섯 해쯤 앞서 사진기와 필름이 든 가방을 도둑맞았을 때에 사진기와 책과 돈뿐 아니라 이 가방에 들었던 필름 일곱 통을 함께 잃은 적 있습니다. 열 해쯤 앞서 신문배달을 하는 동안 누군가 신문사지국에 몰래 들어와 가방을 훔쳤을 때에도 필름 두 통을 함께 잃었습니다. 지난날 잃은 필름은 모두 헌책방을 찍은 사진이고, 어제 잃은 사진은 모두 골목길을 담은 사진입니다.

 디지털사진을 필름사진과 함께 찍던 처음, 그동안 겪은 일을 바탕으로 메모리카드를 제값 치르며 제대로 사자고 생각했습니다. 필름을 장만할 때에 한결 값싼 녀석을 쓸 수 있었으나, 값싼 필름을 쓰다 보면 으레 어딘가에서 말썽이 나곤 했습니다. 값은 곱절이요, 내 눈결하고 들어맞는 필름은 더 비싼값이지만, 내 사진을 내가 좋아하는 대로 이루자면 그만한 값을 들여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애써 찾아간 헌책방에서 찍은 사진들은 다시는 찍을 수 없는 모습이며 삶이기 때문에, 제 살림돈을 아무리 거덜내거나 차지한다 하더라도 필름에 말썽이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디지털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도 나중에 갑작스레 무슨 말썽이 생기면 안 된다고 여겼습니다. 사진을 고스란히 잘 살릴 수 있어야 하며, 힘써 찍은 사진은 내장하드이든 외장하드이든 알뜰히 건사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메모리카드 되살리기를 해 보지만 메모리카드에 틀림없이 담긴 이 사진파일은 되살아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지끈 뚝딱 하면서 가뭇없이 사라질 듯합니다. 모처럼 인천으로 마실을 가서 한창 신나게 사진을 찍었는데, 두 시간 남짓 다리품을 팔며 걸어다닌 골목동네에서 골목빛 담은 사진이 어느 한때 슬그머니 자취를 감춘 셈입니다. 사진기를 떨어뜨린다든지 메모리카드를 꺼내어 분지른다든지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한창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새 뿅 하고 날아갔습니다.

 그러고 보니, 잘 쓰던 사진기가 갑자기 멈춘 적이 이제까지 세 차례 있습니다. 떨어뜨리거나 부딪히거나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골목마실을 하거나 헌책방마실을 하며 땀 뻘뻘 흘리는 가운데 사진을 찍는데 사진기가 갑자기 멈췄어요. 나중에 수리점에 맡긴 다음 알았는데, 아무리 알뜰히 건사하며 사진기를 쓰더라도 ‘많이 찍’으면 사진기도 기계인 만큼 낡고 닳아 스스로 멈출 수 있더군요. 사진을 많이 오래 찍으려는 사람은 사진기를 한 대만 갖고 다닐 수 없습니다. 곁으로 하나를 마련해 놓아야 합니다. 가난한 사진쟁이로서는 사진기 한 대 렌즈 하나 마련하여 쓰기조차 벅찬데 곁사진기 하나를 둔다는 일은 몹시 어렵습니다. 저는 아직 곁사진기를 두지 못합니다. 곁렌즈 하나 없는걸요. 렌즈도 사진기와 매한가지로 언젠가 낡고 닳아 못 쓰고 맙니다. 그래, 사진기와 렌즈는 하나씩 더 챙겨 놓아야 해요.

 씁쓸하고 슬프지만, 아이 엄마는 아이 아빠한테 한 마디를 들려줍니다. “그 사진은 이제 없는 사진이라고 생각하셔요.” 하고.

 아쉬워 한다고 짠 하고 나타날 사진이 아닙니다. 애태운다고 살아날 사진이 아닙니다. 자전거를 타고 읍내마실을 다녀오는데 못난 자동차꾼이 저를 들이받아 제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다 하면 ‘부러진 팔다리’이지, ‘예전처럼 멀쩡히 살아날 팔다리’가 아닙니다. 제 사진기랑 가방을 훔쳐갔던 이들은 제 사진기랑 가방을 돌려주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열 차례 도둑맞았습니다. 없는 살림에 잃는 사진기랑 가방을 떠올리면 목매달아 죽고플 만큼 괴롭습니다. 그렇지만 잃은 사진기는 잃은 사진기이고, 잃은 가방은 잃은 가방입니다. 잃은 사진파일 또한 잃은 사진파일이라 해야 할 테지요.

 되새기기 싫으나, 사진파일 백서른두 장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몇 시 무렵 어느 골목을 어떻게 거닐며 어떤 골목빛을 어떠한 사진으로 옮겨 담았는가 헤아립니다. 사진파일이 살아 있다면 말이 아닌 사진으로 보여주었을 이야기를 생각합니다. 사진쟁이란 사진으로 이야기하는 사람이지 말로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잃은 사진을 앞에 두고는 말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내 말마디로 ‘사진으로 보여주듯이’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합니다.

 맨 먼저, 동인천역 뒤쪽 송현1동입니다. 송현1동에서는 ‘동인천 북광장 재개발’ 때문에 쫓겨나야 하는 사람들이 세운 천막을 담았고, 추운 날 천막에서 농성하는 분들이 헐린 건물 자리 돌과 쓰레기를 치운 다음 일군 텃밭을 찍었습니다. 이분들은 일흔 해 안팎 건물이 서 있던 자리에 씨앗을 심어 배추며 무며 상추며 갖은 푸성귀를 길러냈습니다. 다음으로 이 텃밭 옆에 바지랑대를 세우고 널어 놓은 빨래. 가을햇살은 텃밭에도 빨래에도 곱게 내려앉습니다.

 건널목을 건너기 앞서 ‘아직 안 헐린 건물’에 깃든 나무집에 붙은 ‘애관극장 영화광고 나무판’을 찍습니다. 건널목을 건너 다시금 찍습니다. 나무판으로 만든 ‘애관극장 영화광고판’은 인천에서도 이곳에 딱 하나 남았습니다. 이 나무판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직 못 만났습니다. 이 건물이 헐리면 이제 이 나무판도 끝장이지요. 애관극장은 대한민국에서 맨 처음 선 극장이요, 맨 처음 선 극장에서 만들어 붙인 ‘나무판으로 된 광고판’ 또한 한국땅에 더는 안 남은 줄 압니다. 시골에는 아직 남았으려나요.

 송현2동 안골에서 꽃잔치집 앞에 섭니다. 꽃잔치집은 가을날 대문 안쪽 작은 마당에서 자라는 감나무에 열매가 주렁주렁 달렸습니다. 일부러 한꺼번에 안 따고 한 알 두 알 따 드시는 듯합니다.

 다시 길을 건너 화평동으로 갈까 하다가 지하상가로 건너 전동으로 접어듭니다. 옛 인천여고 자리에서 자라는 우람한 은행나무는 가을빛이 한껏 빛납니다. 아, 이 자리에는 동인천동사무소가 아닌 학교가 있어야 하는데. 학교 운동장은 주차장이 되다니. 이 우람하며 멋들어진 나무를 아이들이 날마다 보듬으면서 너른 꿈을 키워야 하는데. 아이들한테는 최신시설이 아닌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애틋한데.

 전동 안골로 들어섭니다. 지난해까지는 수세미가 나무전봇대 전깃줄을 따라서 자랐는데, 올해에는 수세미가 없군요. 그러나 나무전봇대 뿌리 께에 마련한 작은 꽃밭에 심은 꽃이 지고 잎이 지며 예쁜 노을빛을 베풉니다.

 내동하고 맞닿은 전동 쪽으로 갑니다. 할배 한 분이 해바라기를 즐기곤 하는 골목집 ‘대문 위쪽 자리’에 희고 큰 개가 앉아서 저를 바라봅니다. 제가 골목마실 하는 모양이 재미나 보이는 모양인지, 예전에 인천에 살면서 거의 날마다 지나다니던 저를 알아보았는지 궁금합니다. 살짝 인사를 하고 사진 한 장 찍습니다. 내동으로 접어듭니다. 2층 꽃밭에서 저를 내려다보던 다른 희고 큰 개가 컹컹 짖습니다. 깜짝 놀랍니다. 맞은편에 골목고양이 한 마리 있네요. 골목고양이도 놀랍니다. 이때다 싶어 깜짝 놀라 하며 우뚝 선 골목고양이 사진을 석 장 잇달아 찍습니다.

 성공회 내동성당 아래쪽 골목집 아줌마가 골목고양이한테 밥과 물을 주는 그릇을 찍습니다. 그릇 하나는 깨졌고, 그릇 둘은 잘 있습니다. 예전에 살던 내동 3층짜리 벽돌집 앞에 섭니다. 예전 살림집 임자인 할아버지가 저를 알아보고 인사합니다. 할배는 언제나처럼 당신 살뜰한 살림집을 알들히 여미어 놓습니다. 골목집 맞은편 텃밭은 사라지고 높은 울타리가 섭니다. 돈 많은 내리교회에서 새 건물을 세우려나 보군요. 신포시장을 거쳐 답동성당 가톨릭생협 매장에 들른 다음 율목동으로 올라설까 하다가 용동 골목으로 들어섭니다. 다시 경동 골목으로 빠져나와 싸리재 가구집들 사이를 지나 정보산업고 뒤쪽 동네로 접어듭니다. 빨간 사루비아와 하얀 사루비아 키우는 골목집 앞에 섭니다. 이 골목집 할머니가 저를 보며 “사진 찍어 주어 고마워요.” 하고 인사합니다. “저야말로 이렇게 예쁘게 돌보는 집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 고맙습니다.” 하며 인사를 받습니다. 그런데, 이분 꽃밭 사루비아 밑을 보니, 아스팔트 사이를 뚫고 자라는 사루비아 한 포기가 있습니다. 어쩜!

 여기까지 두 시간 즈음 천천히 거닐며 사진을 찍어 백서른두 장이었습니다. 싱그러운 골목 삶터 모습을 이제 겨우 몇 가지 찍었다 싶었고, 배다리 헌책방거리로 들어서며 헌책방에서 스무 장쯤 더 찍는데, 헌책방에서 찍은 스무 장 남짓하고 골목길 사진하고 아스라이 사라지고 맙니다. 힘이 빠져 골목마실을 더 잇지 못합니다.


.. 그는 인천사람이다. 인천사람이 인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관심이 인천에 주로 머물고 있는 것은 리얼리스트로서의 그의 사진적 입장과 무관하지 않다 ..  (추천글/한정식)


 사진책 《청관》을 읽습니다. 올 2010년 3월에 새로 나온 사진책 《청관》은 지난 1995년에 한 번 나온 적 있고, 이번은 고침판이라 할 책입니다. 열다섯 해를 묵어 새로 나왔다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1995년판은 1995년까지 살아낸 ‘중국사람 동네’ 이야기가 묻어난 사진책이라 할 테고, 2010년판은 2010년까지 열다섯 해를 더 살아낸 중국사람 골목 이야기가 깃든 사진책이라 할 테지요.

 그런데, 2010년판 《청관》을 읽으며 1995년판 《청관》하고 무엇이 달라졌는지 잘 못 느끼겠습니다. 2010년판 《청관》에는 1995년판에는 담기지 못한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담겼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사진으로 나누는 ‘새 열다섯 해’란 어떤 뜻이나 값이 있는지 아리송합니다.

 김보섭 님은 《한의사 강영재》와 《바다 사진관》과 《수복호 사람들》과 《시간의 흔적들》 같은 사진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사진책은 하나같이 ‘인천에서 살아가며 인천사람으로서 마주한 삶’을 담습니다. 사진책에 한정식 교수님이 붙인 글마따나 ‘인천사람이 인천을 바라보며 느낀 이야기’를 담습니다.

 사진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한국사람이라 할 때에 모두 같은 한국사람이 아닙니다. 한국사람 가운데 서울사람이라 할 때에 모두 같은 서울사람이 아닙니다. 서울사람 가운데 강아랫마을사람을 생각해 보면, 강아랫마을사람이라 해서 모두 같은 강아랫마을사람은 아닙니다.

 다 다른 인천사람이고 다 다른 인천사람 삶입니다. 그러면서 다 다르나 다 같은 삶과 사람과 삶터입니다. 바로 이 대목, 다 다르면서 다 같은 삶이고 사람이며 삶터인데, 김보섭 님 사진은 이 알맹이를 아직 못 건드리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청관 사진’인지 ‘청관사람 사진’인지 ‘청관사람 이야기 사진’인지 ‘청관사람 주름살 사진’인지 ‘청관 마을 사진’인지 ‘청관 마을 사람들 사진’인지 어떤 사진인지를 먼저 또렷하게 가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중국사람 동네에서 담벼락 이룬 벽돌 한 장 찍으면서도 얼마든지 온갖 이야기를 길어올릴 뿐 아니라 기나긴 삶을 보여줄 수 있어요. 중국사람 동네 골목고양이이든 꽃그릇 하나이든 간판 하나이든 유리창 하나이든 문패 하나이든 우물자리 바가지 하나이든 전봇대 하나이든, 얼마든지 ‘청관’이라는 이름을 붙여 사진이야기 엮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진쟁이 김보섭 님한테는 무슨 이야기를 간직했던 청관이요,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는 청관일는지요.


.. 김보섭의 사진은 정직하고 정확하다. 진지하고 무게가 있다. 사람이 작품이요, 작품이 곧 그 사람이란 말이 있지만, 그의 인품을 보면 그의 사진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것이 이해된다 ..  (추천글/한정식)


 사진찍기는 나한테 찍힌 사람들을 보여주는 일이 아닙니다. 내가 바라본 사람들 삶을 옮겨 보여주는 일입니다. 내가 바라본 사람들 삶을 옮겨 보여줄 때에는 나 스스로 살아냈고 살아가며 살아가려는 결에 맞추어 이 가슴을 고즈넉히 보여줍니다.

 잘난 모습이 아닙니다. 못난 모습 또한 아닙니다. 꾸밈없는 모습입니다. 수수한 모습입니다. 여느 모습입니다. 흔한 모습입니다. 사진 한 장에 담는 삶이란 더없이 흔한 삶입니다. 사진 한 장으로 옮기는 사람 이야기란 참으로 너른 사람 이야기입니다. 사진 한 장에 적바림하는 삶터 자국이란 대수롭다 할 만한 작은 자국입니다.

 사진 한 장을 담을 때에는 내가 살아낸 만큼 담기 때문에 내 옆으로 스쳐 지나가며 바라보지 못한 모습을 ‘잃기’ 마련입니다. 나로서는 느끼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했으니 아예 ‘모른다’ 할 만한 모습인데, 사진쟁이한테는 이렇게 ‘모른다’ 할 만한 모습이란 ‘잃은’ 모습입니다. 처음부터 얻지 못한 모습이라고도 할 터이나, 사진쟁이 삶을 되새긴다면 사진쟁이로서 ‘얻지’ 못한 ‘잃은’ 모습이요, ‘찾지’ 못했고 ‘나누지’ 못한 셈입니다.

 추천글을 가만히 읽습니다. 한정식 교수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이 작품이요, 작품이 곧 그 사람”이란 말 그대로입니다. 김보섭 님은 김보섭 님대로 바라본 ‘중국사람 골목’이고, 이 모습을 사진책 하나로 말끔히 엮습니다. 이 사진을 바라보는 한정식 교수님은 한정식 교수님대로 ‘중국사람 골목’을 이러한 사진 몇 가지로 읽을밖에 없습니다. 몸으로 부대끼거나 몸소 찾아가서 바라보며 맞아들인 중국사람 골목이 아니었으니, 추천글을 적을 때에 이렇게만 적을 뿐입니다. 더 오래 더 많은 사람을 마주하며 더 긴 말마디를 들었다 해서 중국사람 골목 담은 사진이 더 깊거나 더 넓거나 더 애틋할 수 없어요. 이야기를 이루어 내자면, 얼굴 주름살이 아닌 얼굴 주름살에 밴 삶을 사진으로 담아야 합니다. 이야기를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엮어 나누려 한다면, 이 사람 저 사람 얼굴 주름살 모습이 아닌 이 사람은 이 사람 결대로 어떤 삶이며 저 사람은 저 사람 굳은살마냥 어떤 넋인지 차근차근 읽어내고 담아내어 보여야 합니다. 참다이 읽지 못하며 찍는 사진은 잃어버린 사진입니다. 착하게 삭이지 못하며 보여주는 사진은 잃어버린 삶입니다. (4343.11.11.나무.ㅎㄲㅅㄱ)


― 청관 (김보섭 사진,눈빛 펴냄,2010.3.12.(고침판)/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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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1-11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본적으로 보급형 DSLR의 경우 셧터수명이 보통 몇만컷이라고 하더군요(사실 필림의 경우라면 평생쓰고다 남을 숫자이지만..DSLR의 경우 필림압박이 없고 연사놀이로 금방 몇만컷이 나옵니다).따라서 좀 오래 쓰실려면 아무래도 각사에서 나오는 플래그쉽 카메라를 추천해 드립니다.최소 셧터박스 수명이 15만~30만컷이라고 하니 굉장히 튼튼하지요.게다가 좀 예전거은 이제 50만원대로 중고 구입이 가능하니 쓸만하실 겁니다.
예전에 숨책에서 된장님을 봤을적에 DSLR을 가지고 계신것을 봤는데 그리 많이 도난당하셨는줄 몰랐네요.그 당시에도 자전거를 타고 책과 무거운 DSLR을 가지고 다니시니 무척 힘들어 보이서더군요.이기회에 차라리 작고 가벼운 하이엔드 카메라가 좋으실듯 합니다.

숲노래 2010-11-11 14:06   좋아요 0 | URL
작고 가벼운 사진기도 나쁘지는 않지만, '반사경'이 너무 작아서 제가 바라는 '각도'가 나오지 않는답니다 ^^;;; 그래서 헌책방 사진은 필름 사진으로 찍곤 하는데, 요사이는 슬라이드필름 값을 댈 수 없어, 칼라사진은 디지털로 찍어요. 디지털 작은 기종 가운데에도 1미터쯤 되는 크기로 뽑아도 깨지지 않으면서 '각도'가 비틀리지 않으면서 넓게 나오는 기종이 있다면 쓸 만하겠지요 ^^;;;

돈도 돈이지만, 사진기 만드는 회사에서 '전문가 기종'은 너무 좁게만 만들어서 몇 가지 기종 아니면 쓸 수 없도록 한답니다. '여느 즐김이 기종'은 거의 껍데기 모양만 바꾸어 수만 가지를 내놓는데, 다들 고만고만한 장단점이 있어 섣불리 쓰기 어려워요. 장점만 있는 사진기를 만든다고 돈이 더 들지는 않습니다만... 장사이기 때문에 어려워요...

카스피 2010-11-12 10:45   좋아요 0 | URL
음 각도라 하면 화각을 말씀하시는 건가요.좁은 헌책방 사진을 찍으시려면 필히 광각 렌즈가 필요하시겠지요.요즘 하이엔드로 24mm까지 지원하는데 그보다 더한 것은 DSLR도 왜곡 현상이 심하지 않을가요.

숲노래 2010-11-12 22:57   좋아요 0 | URL
광각을 쓸 때에 24미리 밑으로 내려가면 왜곡이 커서 거의 못 쓴답니다. 24미리도 어떻게 찍느냐에 따라 왜곡이 잘 생기고요. 더구나, '값이 싼' 렌즈는 왜곡도 왜곡이지만 화각이 너무 좁답니다. 디지털사진기로 화각과 왜곡을 줄이려면, 기본 천만 원에 이르는 장비를 써야 하니까, 저로서는 꿈조차 못 꾸고, 값싼 사진기하고 옛날 필름사진기로 아쉬운 대로 화각과 왜곡을 겨우 줄이며 사진을 찍어요 ^^;;;
 
내가 못 본 지리산 - 사진가 이창수의 산마을 십 년
이창수 지음 / 학고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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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사진을 찍을까
 [찾아 읽는 사진책 5] 이창수, 《내가 못 본 지리산》(학고재,2009)


 1985년부터 사진기자로 열여섯 해 일을 하다가 2000년부터 지리산과 섬진강이 어우러진 악양골 노전마을에서 살아가며 차 농사와 감 농사를 짓는 가운데 순천대학교 사진예술학과 겸임교수로도 일한다는 이창수 님이 내놓은 사진책 《내가 못 본 지리산》을 진작에 읽었습니다. 이창수 님은 “먼 길 달려온 햇빛이 논에 내려 빛잔치를 벌입니다(61쪽).” 하고 말할 줄 압니다. “마지막 모내기가 바쁜 논은 연둣빛 호수입니다(42쪽).”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산중에 사는 즐거움이란 바로 계절의 뒤바뀜을 실시간으로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겁니다(30쪽).” 하고 말하며 웃겠지요. 그러나 이 사진책에서 빛잔치와 연두빛 호수와 꾸준히 뒤바뀌는 철을 찬찬히 느끼기는 어렵구나 싶습니다. 사진과 글을 담은 이창수 님부터 “노전마을에서 우리 집 가는 길은 악양면의 ‘스카이웨이’입니다(34쪽).” 하고 말하거든요.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며 아름답고 살갑다 할 만한 시골 삶자락을 고이 선보인다 하는 책 《내가 못 본 지리산》인데, 아직까지 도시에서 하듯이 ‘스카이웨이’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진작에 이 책 읽었던 지난해 어느 날, 책을 덮으며 끝자락에 석 줄을 적바림했습니다.

 첫째 줄. 무엇을 말하고 싶어서 글을 썼을까.

 둘째 줄.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서 사진을 찍었을까.

 셋째 줄. 무엇을 나누고 싶어서 책을 냈을까.

 74쪽에 실어 놓은 나락빛 사진이 참 좋다고 느꼈습니다. 다만, 이 사진 하나가 좋다고 느꼈습니다. 다른 사진을 볼 때에는 ‘빛잔치’가 무엇일까 하며 고개를 갸우뚱갸우뚱했습니다. 연두빛 호수라 하던 사진은 이창수 님이 스스로 이렇게 말했으니 연두빛으로 물든 못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철이 바뀌는 산골마을이라 말은 하면서 정작 철이 바뀌는 사진을 찬찬히 실어 보여주지는 못합니다.

 ‘바로 이 한 장’이라 할 만한 사진이 없기 때문인지 모르지요. 그러나 ‘바로 이 한 장’이라 할 만한 사진은 없어도 됩니다. 마음으로 와닿는 사진이면 넉넉합니다. 지리산골 예술쟁이들 사진을 잔뜩 싣거나 이들 이야기를 찬찬히 늘어놓기보다, 그저 이창수 님이 살아가는 터전에서 이창수 님이 가슴으로 받아안은 고운 빛잔치를 찬찬히 보여주기만 하면 됩니다. 빛잔치라 했지 글잔치라고는 안 했지요? 빛잔치라 하셨지 사람잔치라고는 안 했잖아요.

 시골사람을 만나 삶을 귀담아들으면 되는데, 구태여 취재를 하듯 다가설 까닭이란 없어요. 시골사람 시골살이를 차근차근 누리거나 즐기면 넉넉하지, 따로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옮겨야 할 까닭은 없어요. 반드시 글로 옮기거나 그림으로 다시 그리거나 사진으로 거듭 찍어야 하는 삶이 아닙니다. 가붓이 즐기면 넉넉하고, 살뜰히 어루어지는 그대로 느긋합니다.

 글에 서린 빛을 보여주고 싶을 수 있고, 사람에 어린 빛일 담고 싶을 수 있겠지요. 어느 빛이든 더없이 좋았기 때문에 혼자서만 즐길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서두른다고 일이 되지 않아요. 서두른다고 글이 멋있어지지 않아요. 서두른다고 사진이 아름다울 수 없어요. 마을 이장님은 이창수 님한테 한 마디 툭 뱉습니다. 아니, 마을 이장님은 당신이 살아온 결 그대로 당신 삶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사랑스레 건넵니다. “아녀, 지금이 딱이야. 봄이 바빠야 가을이 넉넉하지. 이제 일할 때가 되니 겁나나(46쪽)?” 서둘러도 안 되고 늦추어도 안 됩니다. 딱 이때에 이만큼 해야 합니다. 글이든 사진이든, 또 이창수 님이 대학교에서 맡은 강의이든 언제나 딱 고만큼 고 자리에서 고롷코롬 해야 합니다. 빛잔치란 빛이 넘치기에 이루어지는 잔치가 아닙니다. 빛이 모자라다고 이루어지지 않는 잔치 또한 아니에요.

 “라면을 끓여 먹던 도회지 생활은 바빴습니다. 정신없이 흘러갔습니다. 나름 의미 있는 것과 의미 없는 것이 뒤섞이며 그렇게 지냈습니다. 도회지에서 원없이 일했고 원없이 놀았습니다(21쪽).” 하고 말하던 이창수 님은 아직까지 라면 수렁에서 허우적거리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라면을 먹든 말든 무슨 대수랍니까. 시골사람도 라면을 즐기는데요, 뭐. 도시사람 가운데 라면을 안 즐기는 사람이 있고, 시골사람 가운데 라면을 아주 즐기는 사람이 있어요. 도시사람이면서 바쁜 일에 얽매이지 않으며 내 삶을 따숩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시골사람이지만 너무 바쁜 일에 허우적거리며 허둥지둥 ‘소담스러운 하루와 한때’를 깡그리 놓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창수 님은 도시에서도 몹시 바빠 도시살이 아름다움을 놓쳤고, 시골에서도 지나치게 바빠 시골살이 아리따움을 놓치지는 않나 걱정스럽습니다.

 라면 한 그릇을 아주 느긋하게 끓여 매우 느긋하게 즐기는 사람이 많습니다. 밭에서 거둔 푸성귀랑 멧자락에서 캐거나 뜯은 나물이랑 밥상을 차렸지만 헐레벌떡 주워먹기 바쁜 사람 또한 많습니다. 누군가는 스스로 농사를 지은 쌀을 손수 빻아 몸소 쌀을 일고 씻어 불린 뒤 밥을 하는 가운데 다른 찬거리를 마련하여 밥상을 차립니다. 누군가는 손전화 꾹꾹 눌러 바깥밥을 시켜 카드로 긁어 후딱 먹고는 비닐봉지에 대충 묶어 아무 데나 내놓거나 땅에 파묻습니다.

 사진은 손이 아닌 마음이 찍습니다. 밥은 손이 아닌 마음으로 마련하여 마음으로 먹습니다. 찍는 사진이나 찍힌 사진이나 마음으로 바라보며 즐깁니다. 차려 놓은 밥상이든 차리는 밥상이든 마음을 담아 나눕니다. 찍혀 준 사람이나 찍어 주는 사람이나 마음과 마음으로 사귈 때에 바야흐로 사진이 태어나고 사진이 빛납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이나 살림을 하는 사람이나 마음과 마음으로 두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도록 땀을 흘리며 사랑을 바칠 때에 비로소 삶이 아름답고 삶이 빛납니다.

 《내가 못 본 지리산》 74쪽에 실은 나락빛 사진이 좋았다고 말했는데, 이 나락빛 사진을 보면서 정인숙 님 사진책 《풍경》에 실린 나락무리가 떠올랐습니다. 《내가 못 본 지리산》 18쪽에 실린 층층논 누렇게 익은 나락 사진을 보면서 안승일 님 사진책 《굴피집》이 떠올랐습니다. 이창수 님은 이창수 님 사진을 찍고, 정인숙 님이나 안승일 님은 정인숙 님 사진이나 안승일 님 사진을 찍을 테지요. 그러면 이창수 님 사진에는 어떠한 ‘이창수 사진 빛’이 있다 말할 수 있으려나요. 이창수 님이 지리산 악양골 노전마을에 깃들어 지내며 담은 사진에는 어떤 ‘지리산 사진빛’이나 어떤 ‘지리산 악양골 사진빛’이나 어떤 ‘지리산 악양골 노전마을 사진빛’이나 어떤 ‘지리산 악양골 노전마을 이창수’ 사진빛이 감돈다 할 만한지요. 잡지사와 신문사 사진기자 노릇을 하던 때 버릇을 고스란히 움켜쥔 채 시골자락 삶결을 마구 헤집거나 후벼파지는 않나 근심스럽습니다.


.. “늙은 할망구 얼굴 찍지 말어.” “고우세요.” “곱기는 왜 아침부터 사진기 들고 다녀.” “어여 가.” ..  (37쪽)


 마을사람들은 이창수 님한테 말 한 마디 톡톡 뱉습니다. 바삐 일하느라 고단한데 말을 거니까 톡톡 뱉습니다. “아녀! 사월 이십칠일에 못자리 내려면 이제 해야 돼(40쪽).”  “없이 살다 보니 예까지 왔지, 있이 살면 이 험한 골로 누가 오나(52쪽).” “책상에서 숫자 가지고 노는 놈들이 농사를 알겠어(62쪽)?” “마누라 해 주는 게 맛있제, 내가 헌 게 맛있는가(66쪽)!” “사진쟁이는 복조리 많이 사 가서 많이 노나 줘(85쪽).” “누가 벌어 주나요, 내 안 벌면. 허리가 아파도 먹고살려면 해야지(98쪽).”

 차분한 빛 한 줄기여도 즐겁습니다. 따스한 사진 한 장이어도 기쁩니다. 살가운 글 한 줄이어도 곱습니다.

 더 많이 받아들여야 할 빛은 아닙니다. 더 많이 찍어야 할 사진은 아닙니다. 더 많이 써야 할 글은 아닙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한결 오순도순 살아가면 좋을 터전입니다. 내 살붙이하고 있든 감나무하고 있든 참으로 알콩달콩 속삭이면 좋을 보금자리입니다. 그예 올망졸망 손을 잡으면 좋은 이웃마을입니다. 내 살림집 자리잡은 마을도 좋고 내 살림집과 이웃한 마을도 좋아요. 천천히 거닐면 됩니다. 논둑길이든 멧등성이길이든 천천히 두 다리로 오가면 됩니다. 뭐가 그리 바빠서 짐차를 타고 대학교까지 강의를 하러 다닙니까. 무슨 가르칠 꺼리가 그리 많아서 짐차를 몰아 대학교까지 들락 날락 하며 사진 이야기를 쏟아내야 하겠습니까.

 스스로 빛나는 고운 사진잔치가 되어 《내가 못 본 지리산》이 아닌 “내가 본 지리산”이나 “내가 사는 지리산”으로 거듭날 수 있으면, 이 사진책 하나를 가슴에 품으며 사진을 찍으려 하는 어린 뒷사람한테 좋은 길잡이책으로 스며듭니다. 강의도 학문도 예술도 장사도 살림도 농사도 고스란히 책 한 권에 녹아들도록 마음을 바치는 굳은살이 그립습니다. (4343.11.9.불.ㅎㄲㅅㄱ)


― 내가 못 본 지리산 (이창수 사진·글,학고재 펴냄,2009.10.7./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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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i 2010-11-10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 내리는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힘이 들어가 있지 않은 글이란게 이런거구나 싶네요. 호기심 탓에 그간 내놓으신 글을 찾아봐야겠다 기억해 놓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장터목 산장 곁 경사에 앉아 석양에 넋을 놓던 기억이 십여 년 전이니, 그간 뭐하느라 한 번 찾질 못했나 싶은 자책이 쓸쓸해지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숲노래 2010-11-11 05:05   좋아요 0 | URL
이 나라 교수나 작가나 수많은 사람들이 조금 더 예쁘며 착하게 살아가며 예쁘고 착한 책을 내놓을 날을 꿈꿉니다...
 
임영균 인물사진
임영균 / 안그라픽스 / 1993년 9월
평점 :
절판



 사진은 ‘기록하는 문화유산’이 아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4] 임영균,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안그라픽스,1993)



 제아무리 연출을 잘하거나 ‘한때’를 잘 담았다 할지라도 ‘느낌이 살게’끔 ‘오늘까지 살아온 사람이 내 앞에 즐겁고 기껍게 서 주었’기에 사람사진을 얻습니다. 한 사람이 나한테 다가와 주기까지 기다릴 뿐 아니라 내 눈과 손과 머리와 가슴과 몸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이름난 사람을 찍는다고 해서 좋은 ‘인물사진 작품’이 되지 않고, 내 동무나 식구나 이웃을 찍었다고 해서 ‘보잘것없는 흔한 공산품’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임영균 님 사진책을 돌아보며 생각합니다. 임영균 님은 조금 더 기다리며 당신 삶을 가다듬었다면, 찍힌 사람들 삶자리와 눈물과 웃음을 한결 깊이 나누어 받으며 보여줄 수 있지 않았겠느냐 싶군요.

 찍힌 사람이 그때 그곳에서 그 모습으로 마주해 주었기에 얻는 사진인 한편, 찍는 사람 또한 그때 그곳에서 그 손길로 사진기 단추를 눌러 주었기에 빚는 사진입니다. 옳은 소리이지요. 그러면, 임영균 님이 그때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임영균 님한테서만 느낄 수 있는 삶이야기는 어느 만큼 담았다 할 만한가요. 그때 그곳에 임영균 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이는 어떠한 사진을 어떻게 담았을는지요. 임영균 님이 바로 그곳 바로 그때 그 손길로 사진을 찍으며 ‘다른 어느 누구도 아닌 임영균 님 삶과 넋과 말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으로 영근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일는지, 다른 어느 사진쟁이라 하더라도 이와 마찬가지로 담을 만한 사진일는지 궁금합니다. 또는, 다른 사진쟁이가 그때 그곳에 있었다면 새삼스레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렸을는지 더욱 궁금합니다.

 이 사진책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을 들여다보는 내내 ‘이 사진책에 담은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생각하기 힘들었니다. ‘임영균이라는 사람이 찍은 사진이라는구나. 그러면 임영균이라는 사람은 사진을 어떻게 찍는가?’ 하고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저절로 묻어나는 삶이야기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사진에 찍혀 준 ‘미국에서 살며 일하는 예술쟁이’들 매무새와 몸짓과 이야기만 살며시 보이는데, 이 또한 이 사진에 담긴 사람들을 일컬어 예술쟁이라 하니까 예술쟁이로구나 하고 여기지, 이런 말을 붙이지 않는다면 이들이 예술쟁이인지 아닌지조차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학습, 교훈, 느낌, 추상, 이미지, 표현, 기교, 구도, ……도 틀림없이 잘 헤아리며 가누어 사진을 일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목소리도 내고, 내 꿈도 밝히며, 내 세상읽기를 드러내는 사진예술을 즐길 노릇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사진을 찍어 문화를 빚는다 할 때에는, 사진 한 장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인 내 삶이 고이 녹아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사진찍기로 새로운 삶을 살피거나 헤아린다 할 적에는, 사진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넋을 조곤조곤 곰삭이는 살림꾼 땀방울이 깃들어야 한다고 여깁니다.

 내 삶을 고이 녹이지 않으며 단추만 누를 때에는 사진이 아니요 작품 또한 아니며 삶이나 이야기조차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사진이란 삶이야기를 담아 보여주는 수많은 갈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진 한 장 얻는 일이란 내 아이이든 이웃집 아이이든 살가이 손 마주잡으며 신나게 놀며 얻는 웃음 한 조각과 같습니다. 사진 한 장 만드는(만들 수 없다고 느낍니다만) 일이란 내 살붙이하고 날마다 먹는 밥을 차리려고 날마다 새벽같이 일어나 쌀을 씻어 불린 뒤 안치는 한편 갖은 밥거리를 마련하려고 바삐 손을 놀리며 늘어나는 주름살이나 날마다 살붙이들이 입는 옷을 빨고 널고 개고 하면서 새삼스레 돋는 굳은살과 같습니다. 사진 한 장 거저로 얻지 않습니다. 사진 하나 그냥 얻을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가 되든 그림그리기가 되든 글쓰기하고 한동아리입니다. 글쓰기를 할 때에 ‘글을 쓴 사람이 잘나’서 좋다는 글 하나 태어나는 일이란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글이든 ‘글로 쓴 사람 또한 틀림없이 대단하다’ 할 만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 글로 쓸 만한 이야기거리와 삶자락을 나 스스로 살아내며 얻든 다른 사람을 만나거나 마주하며 받아들이든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이 대목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에도 이 대목을 안 헤아리는 사람이 꽤 많고요. 혼자 잘나서 얻는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은 없고, 홀로 대단히 많이 배우고 무척 오래 배워서 놀라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태어나게 하는 일도 없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듯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사진을 찍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듯 글을 여미고 그림을 다듬으며 사진을 어루만집니다. 어머니가 내리사랑 아이를 다 키워 놓고 씩씩하게 제금나도록 떠나보내듯,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이들 문화나 예술을 키운 사람은 내 손에서 홀가분하게 떠나보냅니다.

 임영균 님은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을 내놓으며 말합니다. “흔히들 사진은 기계 예술이라고 말하지만, 사진이란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 모든 예술이 마찬가지겠지만, 그 사람의 생각과 시선이 우선 있어야 그 다음에 그것을 매개로 완성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후기).”고.

 이 말씀은 아주 틀리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갱이를 ‘바라보’지 못할 뿐더러, 알맹이를 ‘느끼지’ 못하는데다가, 빛과 그림자를 ‘깨달’아 ‘삭여’ 내지 못합니다.

 누구나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보지 않는 목숨은 없습니다. 장님이라 해서 무엇인가를 안 바라본다고 생각하면 큰 잘못입니다. 어떠한 목숨이든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늘 무엇이든 바라보지만, 이렇게 늘 바라보는 무엇 가운데 ‘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이나 춤이나 노래나 연극으로 담아낼 만한’ 어느 한 가지를 어떻게 추리거나 고르거나 가리려나요. 바라보는 무엇 가운데 내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다시 보여주거나 새롭게 곰삭이고자 한다면, ‘바라보는 무언가를 느껴야’ 하고, 바라보는 무언가를 느끼려면, 내가 바라보는 무언가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으며 어떻게 이어져 왔고 어찌어찌 살아내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는데, 이를 안다는 일은 지식이 아닌 ‘삶’입니다.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살든, 서로 이웃으로 지내든,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면서 살가운 나날을 보내든 하면서 ‘삶 한 올 두 올 풀어내는 이야기’를 차근차근 아로새길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바라보는 삶을 사진으로 담는 손길’을 마무리합니다.

 임영균 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내가 그들을 사진관 스튜디오가 아닌 그들이 주거하고 있는 집이나 작업장 혹은 그들이 즐겨 거닐던 거리에서 촬영하기를 고집하는 것은, 오늘의 시대적·사회적 배경을 사진에 함께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몇 세기 후에는 오늘날의 기록사진 혹은 풍속도가 문화유산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록사진 중에서도 특히 인물사진에 내가 매료된 것은 나 자신이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 소박한 심정의 발로였다(후기).”

 사진을 찍는 분이라면 누구나 잘 알아야 합니다. 사진관에서 찍는다고 기록사진이 되지 말란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을 돌아보면서 지난날 어느 때에는 사진관이 이렇게 생겼고, 이런 모습을 뒤로 놓고 사진을 찍었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예술쟁이 일터에서 찍든 예술쟁이가 거닐던 길거리에서 찍든 똑같이 그때에는 그러했네 하고 헤아릴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기록이 되리라 생각하며 기록하는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는 처음부터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한자를 조금 다르게 적어 ‘기억사진’은 됩니다. ‘지난날 내가 사귀던 사람을 떠올리는 사진’은 될 테지요. 그렇지만 ‘지난날 사람들 발자취가 이러했구나 하고 적바림하는 사진’은 되지 못합니다.

 사진을 찍는 분이라면 으레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 찍은 사진 한 장은 뒷날 문화유산이 되지 않으며, 될 수 없고,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찍은 사진 한 장은 오늘 하루 사진을 함께 찍어 즐거운 삶입니다. (4343.11.8.달.ㅎㄲㅅㄱ)


― 임영균 인물사진 1980∼1993 (임영균 사진·글,안그라픽스 펴냄,1993.9.1./판 끊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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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ve & Free 러브 앤 프리 : 자, 떠나버릴까? - 다카하시 아유무, 전설의 세계 방랑 노트
다카하시 아유무 지음, 양윤옥 옮김 / 에이지21 / 201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을 알면 사진찍기는 늘 즐겁다
 [찾아 읽는 사진책 3] 다카하시 아유무, 《LOVE&FREE》


 잘 팔리는 사진책은 몹시 드뭅니다. 제법 팔리는 사진책을 살피면 이른바 ‘정통 사진책’이라 하는 책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정통이든 아니든 똑같은 사진책이고, 한결같이 사진을 이야기합니다.

 가만히 보면, 아직 이 나라에는 ‘참 좋다 싶은 정통 사진책’이 그리 많이는 안 나왔습니다. 나라밖에서 수없이 쏟아지는 ‘무척 좋다 싶은 정통 사진책’ 가운데 한국말로 옮겨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름만 대도 알 만한 살가도라든지 쿠델카라든지 브레송이라든지 드와노라든지 앗제라든지 스티글리츠라든지 아담스라든지 할스만이라든지 …… 한글판으로 알차게 엮은 책이 한 가지라도 있는가 궁금합니다. 예전에 해적판으로 나온 책이 더러 있고, 아주 조그맣게 나온 번역책이 있기는 하지만, ‘사진을 배우는 길에서 아름다운 스승이 된다’는 사람들 작품책은 거의 나오지 못합니다. 팔리기 힘들고, 판권을 사 오자면 돈이 많이 든다는 아우성만 들립니다.

 이 나라에도 문화부가 있고 지역마다 문화재단이 있습니다(없는 곳도 많습니다만). 문화재단이 없더라도 시나 군마다 문화 정책을 다루는 부서가 있습니다. 개인 출판사에서는 돈이 모자라 힘들다면, 시나 군이나 문화부에서 따로 출판사를 차려서 ‘나라 안팎 빼어난 정통 사진책’을 펴내면 됩니다. 사진책 하나 내는 데에 돈이 꽤 많이 든다지요? 그렇지만 해마다 거님길 돌 갈아치우는 데에 쓰는 돈 가운데 1/100만 들여도 해마다 100권이 넘는 놀라운 ‘정통 사진책’을 펴내고 남습니다. 이렇게 펴낸 사진책을 도서관과 학교마다 한 권씩 거저로 줄 만큼 이 나라 건설과 토목과 행정은 엉뚱한 데에 돈을 흘립니다.

 일본사람 다카하시 아유무 님 글과 사진으로 엮은 《LOVE&FREE》를 읽습니다. 2010년 9월에 새로운 판으로 다시 나왔군요. 2002년 판은 책값이 8400원인데 2010년 판은 외려 400원 내린 8000원입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예전 책을 펼칩니다. 아유무 님은 처음부터 “돈은 조금 부족하지만 시간만은 무한대로 있는 여행(15쪽)”을 즐기겠다고 밝힙니다. 그래요. 여행이든 동네마실이든 삶이든 ‘돈이 넉넉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마음껏 즐기면 됩니다. 다달이 오백만 원쯤 벌어야 살 만하겠습니까. 달마다 이백만 원을 벌거나 백오십만 원을 벌면 어떠하지요? 한 달에 오육십 만 원 벌이로는 너무 빠듯한가요? 그러나, ‘돈이 없어’도 ‘사랑이 있’고 ‘사람이 있’으면 모자란 대로 오순도순 지낼 만합니다. 내 아이한테 십만 원짜리 옷을 사 주어야 사랑이겠습니까. 내 옆지기한테 이십만 원짜리 치마를 사 주어야 믿음이 되나요. 텃밭에서 가꾼 무를 뽑아 무채를 만들고 무국을 끓여도 사랑입니다. 돈은 한푼 없으나 아이를 품에 안으며 실컷 놀아도 믿음이에요.

 책 첫머리에서 아유무 님은 당신 넋을 거듭 밝힙니다. 이러한 다짐과 넋이 아름답기에, 《LOVE&FREE》라고 하는 ‘정통 아닌 사진책’이 널리 사랑받을 만하며, 참으로 두루 사랑받는구나 싶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어루만지기보다 한 사람의 가슴을 도려내듯 절절한 표현을 하고 싶다(25쪽).”는 마음가짐으로 “사야카의 웃는 얼굴이 좋다. 무엇인가 끄적거리기 전에 우선 이 여자를 즐겁게 해야지(27쪽).” 하고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믿는 두 사람은 길을 떠날 즈음 “사는 것이 예술이다(26쪽).” 하고 느낀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첫머리에 이렇게 말을 할 줄 안다면 굳이 끝까지 읽지 않아도 이 책 《LOVE&FREE》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는지 알 만합니다. 삶이 곧 예술이라면 사진이 바로 예술이며, 글이 곧바로 예술입니다.


.. 미처 몰랐기에 신선하다 ..  (53쪽)


 아직까지 한국사람은 “아는 만큼 본다”는 말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아직도 한국사람은 “아는 만큼 보려”고 발버둥입니다. 입문책을 보고 기술책을 보며 참고서를 뒤집니다. 여행 길잡이책이라든지 사진 새내기책은 하나같이 자잘한 손재주와 지식덩어리를 다룹니다. 여행을 하는 마음이나 사진을 찍는 가슴을 다루지 못해요. 나들이를 즐기는 넋이랑 사진을 사랑하는 얼을 보여주지 못해요.

 아유무 님과 짝꿍이 일군 《LOVE&FREE》는 ‘알면 아는 대로 좋고, 모르면 모르는 대로 새삼스러우며 싱그러운’ 삶을 즐깁니다. 따지고 보면, 안다고 해 보아야 무엇을 어느 만큼 어떻게 안다 할 수 있나요. 신라를 알고 신라 불상을 안다 하면 신라랑 신라 불상을 얼마나 잘 안다 할 만한가요. 경주를, 안동을, 제주를, 춘천을, 평양을, 백두산을, 하늘못을, 한라산을, 속리산을, 태안을, 부석사를, 해남을, 광주를 …… 사람들은 어느 만큼 어떻게 무엇으로 안다고 말하는지 궁금합니다.

 “피사체가 무엇이든 혹은 누구이든 사진은 ‘찍는 것’이 아니라 ‘찍혀 주셔서 고마운’ 것이 아닐까(75쪽).” 하고 비로소 느끼는 아유무 님입니다. 이 대목에 밑줄을 그으며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틈틈이 나오는 수많은 ‘정통 사진책’을 비롯하여 ‘만듦사진(메이킹포토)’을 보여주는 숱한 몸짓은 아직까지 ‘찍히는 사람과 사물과 자연한테 고맙다고 느끼는 마음밭’이 지나치게 얕지 않나 싶어요. 찍혀서 대단한 사진이란 없거든요. 찍혀 주어 대단한 사진이랍니다. 찍어서 놀라운 사진이란 없습니다. 찍혀 주었기에 놀라운 사진입니다.

 이리하여, 이런저런 사진쟁이와 여행쟁이가 인도라는 나라를 다녀오며 찍은 사진이 왜 한결같이 볼품없거나 볼썽사나운가를 일깨우는 한 마디가 톡 튀어나옵니다. 한국땅 사진쟁이와 여행쟁이가 이 대목을 잘 깨우치며 삭일 수 있을 때에, 한국땅 사진쟁이 작품과 여행쟁이 이야기를 나라 안팎에서 살뜰히 즐기며 누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유무 님은 “나는 지금까지 편파와 왜곡으로 일그러진 필터를 통해 인도를 보아 왔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길에서 자는 것도 하나의 라이프스타일이었다 … 길에서 호젓한 낮잠을 즐기는 것이라는 것을 겨우 알아냈다 … 인도에는 슬픔과 아픔 대신 수천 년의 역사가 만들어 낸 ‘현실’과 ‘미래’가 있을 뿐이다(70∼71쪽).” 하고 말합니다.

 한국에서도 똑같이 말하고 느껴야 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아름답고, 돈있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대로 멋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대로 모자라고, 돈있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대로 꾀죄죄해요. 무엇이 있고 없고는 아랑곳하지 않아도 됩니다. 삶을 바라보면 돼요. 사람을 사람다이 마주하면서 내 사랑을 고이 나누면 넉넉해요. “많이 읽을 필요는 없어. 한 권의 책이라도 책장이 뚫어질 때까지 읽어 보렴. 그 편이 진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니까(145쪽).” 하는 이야기를 찬찬히 헤아리면 됩니다.

 사람을 많이 사귀면 더 좋을까요? 사람을 더 많이 사귀면, 더 많은 사람을 사귀면, 아는 사람이 많아 내 손전화 기계에 천 사람 넘는 전화번호가 담겼으면 ‘좋은 벗이 많다’ 말할 수 있나요. 인간문화재를 백 사람 취재해서 사진책 하나 내놓으면 그럴싸할는지요? 인간문화재라는 분 가운데 다문 한 사람만 마주하면서 이이 한 사람 삶을 가까이 사귀어 살붙이가 되면서 내놓는 사진은 어떠한가요. 인간문화재가 아니면서 수수하게 살아가는 동네 이웃 한 사람을 서른 해나 마흔 해 사귄 이야기를 사진하고 글로 엮어서 내놓으면 어떠할까요. 제주 올레길은 멋들어지고, 우리 동네 골목길은 하찮은지요. 서울 북촌은 멋스럽고 우리 동네 골목집은 지저분하나요. 영화배우 아무개는 잘생겼고, 우리 할아버지는 못생겼을까요. 여행쟁이 한비야 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듯, 내 어머니와 내 언니와 내 동생과 내 동무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본 적이 얼마나 되는가요. 밥상머리에 둘러앉아 다 함께 연속극을 본 적 말고, 텔레비전이 없는 조용한 방에서 커피 한 잔이든 찬물 한 잔이든 앞에 놓고 한두 시간 신나게 수다를 떨어 본 적이 얼마나 있는가요.


.. 소중한 것을 깨닫는 장소는 언제나 컴퓨터 앞이 아니라 새파란 하늘 아래였다 ..  (202쪽)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멋스럽지 않습니다. 깊은 생각을 담은 듯 사진을 찍는들, 싯말처럼 보이는 글을 펼친들 뭔가 남다르다 할 수 없어요. 그예 살아가는 내 모습을 꾸밈없이 드러내면서 따사롭고 부드러이 꼭 감싸안을 수 있으면 됩니다. 멋스럽지 않아도 좋은 사진이요, 남다르지 않아도 기쁜 글입니다. 훌륭해 보여야 하는 사진이 아니고, 재미있어야만 하는 글이 아닙니다. 파란하늘을 어깨동무하며 즐길 줄 아는 몸가짐이면 됩니다. 푸른 들판에서 호미와 낫을 들고 땀흘려 일할 줄 아는 발바닥이면 됩니다. 아침저녁으로 쌀을 씻어 밥을 안친 다음 국 한 그릇 구수히 끓여 살붙이랑 배불리 먹을 줄 아는 살림꾼 꾸덕살이면 됩니다. 날마다 아기 기저귀를 빨아 빨랫대에 널어 놓고 나서, 이 빨래들이 햇볕에 보송보송 마르는 느낌을 사진으로 한 장씩 담거나 글로 한 줄씩 적바림해 놓아도 좋아요. 이렇게 즐기는 사진 한 장과 글 한 줄이 차곡차곡 모이면 빛깔 고우며 냄새 그윽한 삶이야기로 마무리됩니다. (4343.11.7.해.ㅎㄲㅅㄱ)


― LOVE&FREE (다카하시 아유무 글·그림,차수연 옮김,동아시아 펴냄,2002.8.1./8000원·2010년 9월에 ‘에이지21’에서 고침판으로 나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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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像) The Portrait
김아타 지음 / 학고재 / 2008년 3월
평점 :
품절



 바라보는 대로 아름다운 삶과 사람과 사진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0] 김아타, 《상, The Portrait》



- 책이름 : 상, The Portrait
- 사진·글 : 김아타
- 펴낸곳 : 학고재 (2008.3.20.)
- 책값 : 40000원


 (1) 잡지 《뿌리깊은 나무》


 1975년에 인천에서 태어나 1995년에 인천을 떠나 서울로 갔고, 이해 11월에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 군대로 끌려가 1997년 12월에 인천로 돌아왔으나 1998년 1월에 다시 서울로 떠납니다. 2003년 9월에 서울을 떠나 충청북도 충주 산골마을로 들어왔고, 2007년 4월에 다시금 인천으로 왔으나, 2010년 6월 끝무렵에 거듭 충청북도 충주 산골마을로 들어옵니다. 굵직하게 보면 이래저래 옮긴 셈인데, 가깝지 않은 곳을 오가며 살림을 옮기는 동안 1995년부터 거의 해마다 살림집을 새로 옮겼지 싶습니다. 이제 더는 살림집을 옮기고 싶지 않으나 앞날은 모르는 노릇입니다. 푸진 돈으로 마음껏 살림집을 뿌리내리는 형편이 아니니까요. 다만, 이렁저렁 1995년부터 거의 해마다 살림집을 옮기는 동안, 내 살림집에 늘 가까이 모셔 놓는 책이 한 가지 있습니다. 바로, 잡지 《뿌리깊은 나무》입니다.

 잡지 《뿌리깊은 나무》는 1980년 가을로 접어들 무렵, 군사독재를 일으킨 전두환 씨 힘에 짓밟혀 그만 이슬처럼 사라집니다. 1976년 봄에 태어난 잡지는 고작 다섯 해를 버티었습니다. 아니, 잡지 《뿌리깊은 나무》한테는 ‘버티었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섯 해 동안 이 나라 얕은 문화밭을 튼튼하게 일구었습니다. 한때에는 정기구독자가 7만이 넘었다고 했는데, 군사독재 정권 총칼에 무너지지 않았다면 오늘날까지 살아숨쉬며 수십만 독자를 거느리며 이 나라 문화밭을 한결 알차게 북돋았을는지 모릅니다.

 꿈이야 좋으니 꿈을 꾸지만, 꿈이기만 하다면 굳이 꿈을 꾸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저, 지난날 우리 삶터를 곱게 어루만지던 잡지를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한 권씩 두 권씩 장만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짝은 다 맞추지 못하고 두 권이 비었으나 이럭저럭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 결과 흐름을 찬찬히 읽으며 즐길 수 있습니다. 한두 권씩만 장만해서 찬찬히 읽으며 모으다 보니, 딱 한 번, 《뿌리깊은 나무》 첫 책부터 마지막 책까지 한꺼번에 헌책방에 나왔을 때에, 헌책방 사장님이 무척 싼값에 팔 테니 가져가라 했을 때에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무렵은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던 터라 한 달 벌이가 십육만 원이었는데, 《뿌리깊은 나무》 예순 권쯤 한 질을 고작 5만 원에 주겠다 하셨습니다. 눈이 동그래질 만한 값이지요. 제가 그 헌책방 단골이요 책을 아끼는 ‘고학생’이라 다른 장사꾼이나 교수한테는 안 팔고 자네한테 팔겠네 하던 헌책방 사장님입니다. 참말 그때 외상이라도 그으며 사고 싶었지요. 그렇지만 십육만 원으로 한 달을 가까스로 버티는데 오만 원을 그날 하루에 다 바칠 수 없었습니다.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어요.

 한 권씩 두 권씩 사서 모아 온 잡지 《뿌리깊은 나무》는 숱하게 살림집을 옮기면서도 늘 끈 자국이 나지 않게끔 살살 다루었고, 짐을 끌를 때에도 거의 맨 먼저 끌르며 다른 데도 아닌 늘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자리에 얹어 놓습니다. 틈틈이 들추고 꾸준히 읽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렇지만 외려 이렇게 가까이 두는 데에도 잘 안 들추곤 합니다. 어쩌면 너무 가까이에 있기에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다 할 수 있습니다. 몹시 사랑하고자 가까이에 두지만, 정작 가까이에 있기에 참멋과 참모습을 사랑하지 못한다고 할까요. 늘 가까이에 있다 보니, 바람처럼 햇살처럼 물처럼 흙처럼 얼마나 소담스러우며 아름다운가를 잊는다고 할까요.

 엊저녁, 1979년 1월치 《뿌리깊은 나무》를 꺼내어 봅니다. 나중에 잡지가 문을 닫은 뒤 ‘해뜸’ 출판사를 차린 사진쟁이 윤주심 님이 사진을 찍은 기사 〈명창 강도근〉을 읽습니다.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는 이무렵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있던 예용해 님이 〈민중의 유산〉이라는 꼭지에 이 나라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 이야기를 꾸준히 적바림하곤 했습니다. 예용해 님은 1960년대 첫머리에 ‘인간문화재’라는 낱말을 처음으로 써서 신문에 기사를 띄웠고, 어문각 출판사에서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을 붙인 두툼하며 멋들어진 책을 내놓기도 했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이 익히 아는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은 예용해 님이 만들었고, 정부에서 인간문화재를 법으로 삼아 도움돈을 내어 주도록 하기까지에도 예용해 님 힘이 대단히 컸습니다. ‘이 나라 수수한 자리에서 수수한 손길로 수수한 살림살이 만들던 사람들 손품과 다리품’이 바로 ‘사람 문화재’임을 온누리에 밝힌 예용해 님입니다. 이때부터 비로소 수많은 사람들한테 들씌워져 있던 손가락질과 푸대접을 차츰 벗을 수 있었어요. 제주섬에서는 진성기 님이 이러한 일을 알뜰히 하셨지요.

 윤주심 님 사진에 호원숙 님 글이 붙은 〈명창 강도근〉을 차근차근 읽습니다. 예전에 이 글을 읽을 때에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헤아려 보지만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는 수업 시간에 조금도 늦지 않을 뿐더러 한 시간도 빼먹는 법이 없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모습에선 광대라든지 쟁이라든지 예술을 한답시고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이 흔히 가지기 쉬운 거만함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고 …… 오후 다섯 시쯤에 수업을 모두 끝내고 나면 곧장 시장으로 간다. 저녁 찬거리를 사러 가는 것이다. 이리 가서 생선도 몇 마리 사고 저리 가서 과일도 몇 알 사서 보자기에 싸 자전거 뒤에 올려놓는 그의 모습은 궁상스러워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정겨워 보인다. 그리고 나서 그가 부지런히 페달을 저어 가는 곳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의 집이다.” 서울 바닥에서는 놀 마음이 없이 전주 바닥에서만 논다는 명창 강도근 님 삶을 살뜰히 살피면서 담아낸 글이 좋고 사진이 좋습니다. 어김없이 인간문화재라 할 만한 강도근 님인데(강도근 님은 인간문화제 5호이며 1996년 5월 15일에 일흔여덟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글과 사진으로 마주하는 당신 삶은 참 ‘가난’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낱낱이 보이는 당신 가난한 삶이 참 부드럽습니다. 따숩고 좋습니다. 더 많은 돈이나 이름이나 힘보다는 올망졸망 사랑스러운 식구들하고 시골집에서 조용히 어우러지면서 고향 후배한테 소리를 가르치는 품새가 더없이 애틋하구나 싶습니다. 명창이자 인간문화재이면서도 손수 밭갈이를 하고 자전거를 타며 저잣거리에서 찬거리를 장만하여 집으로 돌아온 다음, 자그마한 집에서 온식구 둘러앉아 밥을 먹습니다. 꽤 늦은 나이에 얻은 아이들을 몸소 업어 주고 안아 주며 함께 복닥입니다.

 흔히들, 아니 으레 잘 모르거나 잘 알고자 하지 않으니 그러하겠지만,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을 얻은 이들이라 해서 떵떵거리거나 배불리 잘 사는 사람이란 드물거나 거의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좀 달라지거나 나아졌는지 모르지요. 내 삶을 사랑하며 내 넋을 고이 건사하는 사람이 인간문화재 이름을 얻습니다. 전통문화를 지킨다는 사람이 인간문화재가 아닙니다. 인간문화재 이름을 얻는 이들이 건사하는 ‘전통문화’란 여느 사람들 여느 삶입니다. 가난한 사람들 수수한 삶입니다.

 때로는 임금님 자시는 밥거리를 장만하는 분들이 인간문화재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임금님 밥상은 누가 차리나요. 양반이 차리나요, 사대부가 차리나요. 임금님 옷은 누가 지어 주나요. 양반이 바느질을 하나요, 사대부가 뜨개질을 하나요, 지식인이 길쌈을 하나요.

 인간문화재 이름을 얻는 이들은 하나같이 농사꾼입니다. 농사꾼 아들이거나 딸입니다. 뿌리가 농사꾼이고 벗과 이웃과 살붙이가 농사꾼인 인간문화재입니다. 스스로 땅에 뿌리를 두고 스스로 땅인 몸뚱이로 살아가며 ‘삶을 곧 문화로 일구는’ 사람인 인간문화재예요.

 예용해 님 글을 즐겁게 만나는 잡지 《뿌리깊은 나무》인데, 예용해 님 글이 아니더라도 우리네 수수하고 가난하며 투박한 여느 삶 사람들 이야기를 알뜰살뜰 여미어 내는 잡지 《뿌리깊은 나무》이기도 합니다. 인간문화재 이름을 얻은 이들이 왜 인간문화재요, 인간문화재 이름을 얻은 이들 삶이 어떠한가를 꾸밈없이 보여주는 잡지 《뿌리깊은 나무》예요. 그래, 이 잡지를 만드는 사람이나 이 잡지를 읽는 사람이나 이 잡지에 실리는 사람이나 한결같이 ‘수수한 사람’입니다. 하나같이 못생기거나 투박하거나 수수하거나 하잘것없는 사람이에요.

 다른 호수를 하나하나 들추어 봅니다. 어느 호수를 들추든 잘난 구석 없는 사람들, 그러면서 못난 구석 또한 없는 사람들 이야기가 알뜰히 담겨 있습니다. 그예 바라보는 그대로 아름다운 사람들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마주하고 앉은 자리에서 참 좋다고 느낄 만한 사람들 이야기로 쏠쏠합니다. 내 삶부터 수수하고, 인간문화재라 하는 사람들 삶도 수수하며, 정치꾼이건 운동선수건 청소부이건 하나같이 수수합니다. 겉으로는 떵떵거릴지라도, 어디에선가 우쭐거릴지라도, 모두모두 수수한 사람이요 이웃입니다. 이름표를 떼고 보셔요. 주민증을 집어넣고 보셔요. 다 같은 사람이요, 다 착한 사람이며, 다 고운 사람입니다. 신비스럽다든지 신령스럽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그저 살가운 사람이고, 좋은 이웃입니다. 좋은 아재요 푸진 아짐씨입니다.


 (2) 새로운 사진과 이야기는 내 삶에 있습니다


 온누리에 내로라 할 만큼 손꼽힌다는 사진쟁이 김아타 님 사진책 《상, The Portrait》를 읽습니다. 한국땅에서 인간문화재라 하는 분들을 한 분씩 찾아뵙고 한 장이나 두 장쯤 얼굴사진이나 몸통사진을 담아서 엮은 사진책입니다. 책 왼쪽에는 인간문화재 소개글을 짤막하게 붙이고, 오른쪽에는 사진을 넣습니다. 사진은 모두 흑백입니다.


- 서한규, 그는 대나무 살을 발라 채상을 만든다. 그의 손줄이 가파르면 대나무는 벌거벗고 춤을 춘다. 담양은 대나무가 많기로 유명한 고장이다. 담양에 대나무가 많은 것은 땅이 고와서 그럴 것이다. 땅을 닮아서 그의 심성도 곱다. 조모가 만들었다는 백 년이 넘은 채상, 낡은 시간을 세웠다.


 사진을 보면서 생각합니다. 이분들이 인간문화재라 하니까 인간문화재로구나 하고 생각하지,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을 따로 밝히지 않으면, 이냥저냥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할 할머니나 할아버지겠구나 싶다고. 날카로운 눈매와 고즈넉한 매무새를 보이는 할매와 할배 모습이 있습니다만, 해병대 나왔다는 할배라든지 온갖 시집살이 고된살이 다 치렀다는 할매한테서도 날카로운 눈매나 고즈넉한 매무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동상 앞에서 어깨띠와 머리띠를 두르고 으싸으싸 하면서 목청을 돋우는 할배한테서도 얼마든지 깊은 이야기와 너른 삶을 귀기울여 들을 수 있습니다.

 문득, 인천 전동 골목길을 마실하며 이제 지친 다리를 쉴까 하며 여관집을 찾으려 할 무렵(인천에서 살다가 시골로 살림을 옮겼기에 인천 골목마실을 하고 난 다음에는 동네 여관집에서 묵어야 합니다) 가물가물 기울어지는 저녁햇살을 받으며 대문 앞 걸상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월남전 참전 군인’이던 할배하고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던 일이 떠오릅니다. 동네 할배는 제 모습이 당신 막내아들을 닮았다면서 월남싸움에서 겪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때 베트공한테 목숨을 앗긴 숱한 동료들이 아직까지 잊히지 않는다며,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하면 눈물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자리에서도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전동 골목집 할배로서는 동료 전우가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슬퍼하는 마음은 있으나, 당신하고 아무런 등진 일이 없는 애먼 베트남사람들을 죽여야 하고, 또 이들을 죽이려 하며 죽어야 하던 숱한 사람들 구슬픈 아픔까지는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깨닫습니다. 어찌 되든 ‘전쟁은 나쁘다’는 한 가지. 골목집 할배한테서 이야기를 들으며 당신이 ‘불쌍한 베트남사람 삶’을 헤아려 주기를 바랄 수는 없으나, ‘불쌍한 한국사람 삶’을 헤아릴 수 있는 대목으로도 반갑고, 이와 같은 마음을 곱다시 건사하면서 할배가 살아가는 골목동네 이웃을 사랑하고 아낄 수 있으면 그지없이 아름다운 삶이 아니겠느냐고 느낍니다. 저는 골목동네 할배가 내미는 손을 꼬옥 붙들면서, 당신 눈을 마주 보면서, 사람도 삶도 사랑도 하나로구나 하고 새삼 느꼈습니다.


- 장인은 스스로 안다. 옻칠이 손을 덮고. 하얀 눈 내린 태산 같은 눈썹, 달콤하고 나른하게 말을 건넨다. 풀 소리 가득한 봉원사. 무심한 가부좌는 겁의 시간을 낚고 있다. 8×10인치의 필름 위에 선 하나를 십만 번 넘게 그었다는 그를 가둔다. 숨이 멈춘, 사진을 찍었다.


 김아타 님은 《상, The Portrait》라는 사진책에서 한국땅 인간문화재인 분들을 퍽 신비스럽고 신령스럽게 담아내어 보여줍니다. 어쩌면, 김아타 님 삶부터 신비스럽고 신령스럽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인간문화재인 분들이 신비스럽고 신령스럽기 때문에 김아타 님이 이분들 삶자락을 이와 같이 담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대로 바라보면서 찍는 사진이거든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면서 찍는 사진이니까요. ‘있는 그대로’ 찍을 수 있는 사진이 되자면, 사진으로 찍고자 하는 사람이나 사물이나 짐승이나 자연하고 내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같이 숨쉬고 같이 밥먹으며 같이 똥오줌 누고 같이 잠자며 같이 살림을 꾸려야 합니다. 한동아리 한몸 한마음이 될 때에는 누구나 ‘있는 그대로’ 찍는 사진을 얻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로 모두어 움직이는 삶이 아니라 하면, ‘바라보는 대로’ 찍는데,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란 바로 ‘내가 살아가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아직 생각이 얕다면 ‘아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김아타 님은 생각이 얕은 분이 아닌 터라 ‘아는 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그래요, 김아타 님은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을 얻은 분들하고 마주하고 만나며 어울리면서 사진을 찍을 때에 ‘김아타라는 사진쟁이가 바라보는 결’을 고스란히 살립니다.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을 얻은 아무개라는 삶결’을 고스란히 살리지 않습니다.


- 무당 김금화. 그를 처음 만나던 날, 내가 올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신의 밥을 먹고 사는 사람. 신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다. 열일곱 어린 나이에 내림굿을 받아 40년 동안 작두를 타고 있다. 마음이 편치 않으면 작두가 까칠하다. 정한 마음으로 작두 위에 올라야 한다. 연두색 치마에 하얀 저고리. 새털처럼 가볍게 자리에 앉았다.


 내 어머니를 만나거나 옆지기 어머니를 만나거나 노상 생각합니다. 두 분 어머니한테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을 붙일 사람은 없을 텐데, 굳이 인간문화재를 나한테 두 사람 뽑으라 한다면 내가 아는 어머니 두 분을 뽑겠다고. 10분은커녕 5분이 채 걸리지 않는 사이 밥상을 후다닥 차려내는 솜씨란 고스란히 인간문화재라 할 만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푸짐하게 차려 놓고 언제나 “차린 것 없는데 많이 먹어.” 하고 말씀합니다. “차린 게 없어서 어쩌나.” 하는 말씀을 되풀이합니다.

 바느질을 못하나 빨래를 못하나 아이를 못 보나 청소를 못하나 설거지를 못하나 …… 그렇다고 집안이 기울어질 때에 소매 걷어붙이며 돈벌이를 못하나. 저하고 옆지기로서는 두 분 어머니를 빼놓고 다른 누구를 놓고 인간문화재라고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두 분 어머니를 기르신 어머니들(할머니들)이 살아 있다면 이분들한테 이 이름을 붙여 보겠지요.

 그런데 우리 살붙이를 낳고 기른 두 분 어머니만 인간문화재라 할 수 없습니다. 내 벗을 낳고 기른 어머님이든, 내 옆지기 벗님들을 낳고 기른 어머님이든, 우리 둘레 모든 어머님들을 놓고도 인간문화재라 말 안 할 수 없어요. 아버님들은 또 어떻고요.


.. 많은 시간이 흐른 기억 저편에서 그들을 다시 만난다. 나의 ‘젊은 날의 초상’을 다시 만난다. 그날들, 그들은 아까운 시간을 내게 주었다. 남도의 끝에서 서울 깊숙한 마을 안길까지 그들은 터를 잡고 있었다. 때로는 리어카에 장비를 싣고 신작로를 달리기도 하고, 며칠 밤낮을 그들과 함께하기도 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완고함으로 이태에 걸쳐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려야 했던 사람도 있다. “자네가 일가를 이루면 그때 찾아오라”는 사람도 만났다 ..  (책머리에)


 김아타 님은 틀림없이 온누리에 손꼽는 사진쟁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뉴욕에서, 또 이탈리아에서, 숱한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거나 손꼽힐 만한 분이라고 여깁니다.

 다만, 한 가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로서는 첫손을 꼽을 인간문화재인 우리 어머니한테도 김아타 님 사진이 첫손을 꼽을 만큼 아름다울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옆지기 어머님한테도 김아타 님 사진이 온누리에 손꼽을 만한 작품이 되도록 멋들어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미국에서 누가 8만 달러에 김아타 님 사진을 사들인들, 빌 게이츠라는 사람이 김아타 님 사진을 장만한들, 이런저런 값과 이름과 힘이 사진을 돋보이도록 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볼 줄 알아야 하고, 삶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을 보자면 나부터 제대로 볼 줄 알아야 하는데, 나와 내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 때에 비로소 사진찍기가 이루어집니다. 내 나름대로 바라보면서 내 풀이(해석)에 따라 내 작품(신비스러움)을 만든다고 해서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되나 잘 모르겠습니다. 정부에서 받아들여 몇몇 어르신들한테 인간문화재라는 이름을 붙이니, 온누리 평론가와 큐레이터나 업자들 또한 김아타 님한테 사진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이름이야 얼마든지 붙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름이란 얼마나 아름다웁거나 뜻있거나 값있을까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한테는 대단한 돈도 부질없지만 대단한 이름 또한 부질없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가 찾을 한 가지란, 즐거우며 착하고 참된 내 삶 한 자락이 아닌가 싶습니다.

 착한 인간문화재를 마주하여 착한 사진 하나 얻자면 내 삶이 착하면 됩니다. 참다운 인간문화재를 맞이하여 참된 사진 하나 이루자면 내 삶이 참다우면 됩니다. 고운 인간문화재를 만나서 고운 사진 하나 찍자면 내 삶이 고우면 돼요.

 주제를 먼저 세워 놓고 다큐멘타리 사진을 찍겠다고 나서는 분들 가운데 제대로 된 다큐멘타리 사진을 내놓는 분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주제는 따로 잡아 놓지 않았다지만, 소재를 먼저 잡아 놓고 어떠한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사진을 보여주겠다고 말하는 분들치고 제대로 된 이야기를 알뜰살뜰 나누는 분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그림 또한 그저 그림입니다. 예술은? 글쎄요, 예술은 내가 하루하루 즐겁고 신나게 꾸리는 삶을 일컫는 다른 이름이 아닐는지요.

 예술은 만들 수 없고 가르칠 수 없으며 배울 수 없습니다. 문화 또한 만들거나 가르치거나 배울 수 없습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삶이란 만들거나 가르치거나 배우지 못해요. 삶은 내 모습 내 길 내 넋 내 손 내 꿈이면서 내 꾸덕살이고 내 손빨래이며 내 설거지인 가운데 내 똥기저귀입니다. (4343.11.2.불.ㅎㄲㅅㄱ)
 

  

사진을 찍기 앞서 삶을 배우거나, 삶을 다부지게 껴안아야 한다.

 

뿌리깊은 나무에 실린 윤주심 님 사진 - 명창 김도근 (인간문화재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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