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행복을 담는 엄마의 카메라 - Family Photography
장화영 글.사진 / 다빈치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사진기와 함께 사랑을 들어 주셔요
 [찾아 읽는 사진책 32] 장화영, 《엄마의 카메라》(다빈치,2007)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 무엇보다도 아이를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에 따라서 사진 느낌이 확 갈립니다. 아이가 태어나기 앞서 옆지기와 둘이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진기를 쥔 내가 옆지기를 어느 만큼 깊으면서 넓은 사랑으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사진 느낌이 크게 달라져요.

 모델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다큐멘터리를 빚으려고 사진을 찍는 사람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모델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모델을 얼마만큼 생각하면서 아끼는가에 따라서 사진 느낌이 새록새록 거듭납니다. 다큐멘터리를 빚으며 이야기를 갈무리하려는 사진쟁이는 이녁이 마주하는 사람하고 얼마나 따스하면서 너그러운 넋과 얼로 손을 맞잡느냐에 따라 사진 이야기가 이모저모 샘솟거나 수그러듭니다.

 사진찍기로 밥벌이를 하지만, 아이를 둘 낳아서 키우는 어머니인 장화영 님이 글을 쓰고 사진을 담은 책 《엄마의 카메라》(다빈치,2007)를 읽습니다. 첫째를 2008년에 낳고 둘째를 2011년에 낳을 살림집에서 집안일과 집밖일을 도맡는 아버지로서 《엄마의 카메라》라는 책은 ‘집안일과 집밖일에 함께 마음을 쓰는 사람’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까 생각하면서 몹시 두근두근 설렜습니다. 이제까지 한국에서 나오는 사진책을 돌아보면, 어떠한 책이건 ‘집안일은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집밖일로 사진기만 쥐는 사람’들 삶과 넋과 말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머리말에서 “카메라를 들고 아이와 마주했을 때 아이의 눈빛에서 ‘화’를 보기도 하고 ‘슬픔’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는 조용히 카메라를 내려놓고 아이와 대화를 하기 위해 엄마가 아닌 친구가 되려고 노력합니다(9쪽).”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 몹시 반갑고 기쁩니다.

 그렇지만 친구 아닌 엄마가 되어야지요. 엄마로서 아이하고 사랑스러운 살붙이로 지내야지요. 어머니는 어머니이지 동무가 아닙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이지 벗이 아니에요. 내 아이는 내 아이입니다. 내 아이를 아이 그대로 맞아들이면서 함께 살아갈 뿐입니다.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는 내 어머니와 내 아버지예요. 모두 이분들 자리를 옳게 돌아보면서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제 어머니한테 바라는 무언가 있다면 ‘어머니가 어머니로 나하고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일 테지, ‘어머니가 동무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리라 느낍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사진찍기를 일거리로 삼아서 살아가자면, 남자이든 여자이든 집안일에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집안일에 얽매여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집안일은 다른 누군가 도맡아 주어야 합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은 사진기만 헤아려야 합니다. 사진기만 헤아리더라도 겨룸에서 밀리거나 다툼에서 쓰러질 테니까, 사진기 아닌 다른 사람이나 자리나 삶을 생각한다면, 한국땅에서는 벌써 ‘두 손 든’ 셈이라 할 만해요.

 사진책 《엄마의 카메라》를 쓴 장화영 님은 “카메라 컬렉터가 아니라 사진이 목적이라면, 너무 기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진은 기계 외적 요인(심리적 상태, 의욕, 테마 등)의 역할이 크게 작용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33쪽).”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몇 대목 없습니다. 더군다나 기계에 얽매여서 안 되는 만큼 ‘사진쟁이 일을 하는 어버이 삶’에도 얽매여서는 안 되는 줄을 자꾸 잊습니다.

 270쪽에 이르는 책에서 “엄마 사진기”라는 책이름에 걸맞게 ‘엄마가 손에 쥔 사진기’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이 몹시 드뭅니다. ‘그냥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이야기입니다. ‘계급’은 엄마일는지 모르나, 막상 이야기를 펼칠 때에는 ‘엄마 아닌 남자 사진쟁이’라 할 만합니다. 엄마 자리에 서서 이 땅 수많은 엄마들한테 들려주는 사진 이야기라든지, 이 땅 숱한 아이들한테 속삭이는 사진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카메라는 사람의 눈과 유사하지만 결코 같지 않습니다. 아직까지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신이 선물한 우리의 눈은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골라 보는 탁월한 기능이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확대하거나 축소하여 해석하는 재미나고도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눈에 ‘콩깍지’라는 것이 붙기도 하고 ‘미운 털’이 박히기도 합니다(44∼45쪽).” 같은 이야기는 좋습니다. 참으로 좋은 이야기입니다.

 아쉽다면, 이렇게 좋은 이야기는 ‘엄마 사진쟁이’가 아닌 ‘여느 사진쟁이’ 누구나 느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펼치려고 《엄마의 카메라》를 썼다고 한다면 좀 슬픕니다. 《엄마의 카메라》가 어울릴 뿐 아니라 아름답자면, 어머니로서 아이와 살아가는 보금자리에서 얼마나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다이 사진길을 걷는가 하는 이야기가 불거져야 합니다. 더 빼어난 솜씨가 없어도 됩니다. 더 훌륭한 재주가 없어도 됩니다. 사진찍기는 솜씨나 재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솜씨는 있으나 사랑이 없다면, 재주는 빼어나다지만 마음이 가난하다면, 사진장비는 값지지만 삶은 값진 길을 걷지 못한다면, 이러한 흐름에서 ‘사진을 찍는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이 마음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사진기로 찍지 않습니다. 아니, 사진을 찍으려면 사진기를 써야겠지요. 그런데 사진기가 있대서 사진을 찍지는 않아요. 사진기는 있으나 사랑이 없으면 사진을 찍을 수 없어요. 사진기는 없어도 사랑이 있으면 사진을 찍습니다. 다만, 사진기 없이 사랑이 있는 사람은 종이에 뽑을 만한 사진을 얻지는 못해요. 언제나 가슴속으로 아로새기는 사진을 빚고 나누며 즐깁니다.

 사진을 찍겠다고 다짐하거나 생각하는 분이라면 생각해야 합니다. 내 아이라 하든 이웃집 아이라 하든 ‘사진기’라는 장비를 몰라요. 더 나은 사진장비가 되든 무척 값진 사진장비가 되면 아이는 몰라요. 내 자가용이 값싸고 작든 내 자가용이 크며 비싸든 아이는 모릅니다. 아니,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 자가용이 있거나 없거나 아랑곳하지 않아요. 아이는 제 어버이가 반지하에 사는지 아파트에 사는지 시골에 사는지 대수롭지 않아요.

 아이한테는 사랑이 없으면 젬병입니다. 아이한테 사랑을 나눌 수 없다면 부질없습니다.

 아이가 아닌 어른끼리도 이야기합니다. 사랑에는 국경도 겨레도 뭐도 없다고 합니다. 돈있는 사람끼리 사랑하거나 돈없는 사람끼리 사랑하는 일이란 없어요. 마음이 맞거나 마음을 기울여 서로를 아끼는 사람이 사랑을 합니다. 한국사람이 일본사람하고 짝을 짓든, 한국사람이 네팔사람이나 덴마크사람하고 짝을 맺든 하나도 대수롭지 않아요. 참으로 사랑하는 넋이면 돼요.

 아마, 어른 가운데 사랑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모르는 사람은 없겠지요. 어른이라면 사랑이 왜 사랑인가를 잘 안다고 할 만하겠지요. 그러면 아이하고도 똑같이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아이하고 사진을 찍을 때에는 기계가 아닌 가슴으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아이하고 사진으로 이야기를 일굴 때에는 기계 아닌 따순 손길로 이야기를 일구어야 합니다. 조리개며 빛이며 기계이며 색온도이며 하나도 마음쓸 일이 없습니다. 어머니이거나 아버지인 내가 마음쓸 대목이란 어머니로서 아이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버지로서 아이를 어떻게 믿느냐입니다.

 아무쪼록 사진기라는 기계와 함께 어머니 손길이 듬뿍 밴 사랑을 함께 들어 주셔요. 놀라운 사진이나 돋보이는 사진은 없어도 되니까, 아이하고 오붓한 사랑과 즐거운 믿음을 어깨동무해 주셔요.

 “여러 빛을 만나는 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110쪽).” 같은 말마따나, 날마다 언제나 새로운 아이하고 새 하루를 맞이하는 나날이란 날마다 새로운 사랑을 하는 기쁨이자 놀라움입니다. ‘엄마가 나누려는 사랑’보다 ‘사진쟁이인 엄마가 아닌 사진 지식’ 이야기에 너무 치우치고 말아 아쉽습니다만, 앞으로는 ‘엄마 사진쟁이’가 참말로 《엄마의 카메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이야기책 하나 빚어서 나눌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4.5.20.쇠.ㅎㄲㅅㄱ)


― 엄마의 카메라 (장화영 사진·글,다빈치 펴냄,2007.12.20./12000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카페 일기 - 행복이란 분명 이런 것 다카페 일기 1
모리 유지 지음, 권남희 옮김 / 북스코프(아카넷) / 200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마음껏 찍으셔요, 사진이니까요
 [찾아 읽는 사진책 31] 모리 유지, 《다카페 일기》(북스코프,2008)



 날마다 집에서 아이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보내는 사람이라면, 날마다 집에서 아이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보내는 나날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침에는 집 바깥 일터로 가서 일을 하고 저녁나절에 느즈막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은, 이러한 삶흐름에 맞추어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여느 날에 아이하고 마주하는 겨를이 적다면, 주말이나 쉬는 때에 아이하고 조금 더 오래 마주하면서 조금 더 많이 사진을 찍자고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이른바 ‘출사 사진’처럼 아이 사진을 찍습니다.

 여느 날에 아이하고 늘 마주하면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출사 사진’이 덧없을 뿐 아니라, 출사 사진을 찍을 일도 까닭도 겨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를 바라보면서 ‘자, 활짝 웃어 보렴!’ 하고 말하면서 찍을 어버이란 없을 테니까요. 아이가 활짝 웃으며 신나게 놀 때에 곁에서 이 모습을 놓치지 않으면서 찍으면 되니까요.

 아이 앞에서든 모델 앞에서든 매한가지입니다. 사람을 마주보면서 ‘자, 활짝 웃어 보셔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찍는 사진은 이름으로는 사진이지만 사진이 아닙니다. ‘자, 이렇게 해 보셔요!’ 하고 말하는 사람이 담는 사진은 겉으로 보기에는 사진이지만 사진이 아니에요. 똑같이 ‘얼굴 힘살을 움직인’대서 웃음이 되지는 않아요. 놀면서 짓는 웃음이랑 사진기 앞에서 짓는 웃음은 다릅니다. 놀면서 웃을 때에 곁에서 즐거이 사진으로 담아야지, 다 놀고 나서 쉬는 때에 얼굴빛만 웃으라 하면서 웃음꽃 사진을 빚는대서 ‘사진 한 장에 이야기가 깃들’ 수는 없습니다.

 사진책 《다카페 일기》(북스코프,2008)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포토넷,2010)하고 비슷하다면 비슷하고 같다면 같으나 다르다면 다른 사진책 《다카페 일기》를 곰곰이 살피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 《다카페 일기》는 ‘집에서 아이하고 함께 지내는 겨를이 긴 사람’이 ‘집에서 언제나 아이하고 복닥이는 모습을 스스럼없이’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은 ‘바깥일로 바쁜 사람’이 ‘밤늦게 집으로 돌아온 때와 주말과 쉬는 날을 맞이해서 집안 식구 나날을 바지런히’ 사진으로 담습니다.

 나는 《윤미네 집》을 좋아합니다. 다만, 《윤미네 집》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사진책에 깃든 좋고 아쉬운 대목을 모두 좋아합니다. 사진책 《윤미네 집》은 ‘남자는 바깥일 여자는 집안일’로 나뉜 우리네 모습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윤미네 집》을 일군 전몽각 님은 집에 머물 겨를이 거의 없었을 테지만, 아이하고 조금 더 만나고픈 꿈을 사진으로 키웁니다. 아이하고 자주 마음껏 놀 수 없으나, 적어도 입학식이나 졸업식 같은 자리에는 함께하려고 힘씁니다. 지난날이건 오늘날이건 아이가 학교에서 맞이하는 크고작은 행사에 함께하는 아버지는 그리 안 많습니다. 전몽각 님은 몹시 애쓰고 힘쓰면서 《윤미네 집》을 가까스로 맺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책 《윤미네 집》에는 아이가 하루하루 남달리 자라거나 크면서 으레 바라볼 예쁘면서 밉고, 미우면서 예쁜, 즐거우면서 고단하고, 고단하면서 즐거운 ‘여느 삶 여느 모습 여느 이야기’가 얼마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하거나 저러하거나 사진책 《윤미네 집》에는 집식구를 알뜰히 사랑하는 따사로운 손길이 깊이 스며요.

 사진책 《다카페 일기》를 빚은 모리 유지 님도 바깥일을 합니다. 그렇지만 전몽각 님과 달리 ‘집에서도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전몽각 님하고 다르게 ‘집에서 아이하고 복닥이거나 부대끼는 겨를이 퍽 길다’ 여길 수 있습니다.

 《다카페 일기》를 일군 모리 유지 님을 놓고, 옆지기 ‘다짱’ 님은 “남편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외부에서 사진 찍는 걸 아주 곤혹스러워 합니다. 망원렌즈를 구입한 뒤에도 바다(딸아이)의 운동회를 비롯해 여러 행사에 참여했지만, 카메라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낸 적이 없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사진과 디자인으로 집식구를 먹여살린다는 모리 유지 님인데,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는 사진을 못 찍는다고 하니까, 사람을 찍는 사진쟁이는 아니고 물건이나 건축을 사진으로 찍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카페 일기》 끝자락에는 “나는 앞으로도 계속될 평범한 날들을 아내와 사이좋게 지내기도 하고, 가끔 토닥거리기도 하면서, 나 나름대로 열심히 보내고, 바다와 하늘이를 잘 키우고, 그날들을 찍고, 일기에 쓰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리 유지 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옆지기와 아이 삶을 늘 부대끼면서 언제나 사진으로 담고 싶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잘난 사진이나 뛰어난 사진이나 멋진 사진이나 놀라운 사진을 찍을 마음은 없다는 소리입니다. 날마다 마주하는 사랑스러운 삶자락을 사랑스러운 사진으로 품고 싶다는 이야기예요.

 사진이니까 신나게 찍습니다. 사진이기에 마음껏 찍습니다. 누구 눈치를 볼 까닭이 없습니다. 무슨무슨 ‘사진 경향’이나 ‘사진 조류’에 휩쓸릴 까닭이 없습니다. 어떤저떤 사진 장비를 갖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사진강의를 듣거나 사진수업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무지개빛 사진으로 찍든 까망하양 사진으로 찍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 한삶을 다큐멘터리처럼 엮는다든지 패션사진처럼 뽐낸다든지 할 까닭이 없어요. 아이를 찍는 사진은 아이를 아이답게 담으면 즐겁습니다. 옆지기를 담는 사진은 옆지기를 옆지기 그대로 담으면 아름답습니다.

 모델 아무개처럼 보이도록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얼짱각도로 찍어야 할 사진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꾸밈없이 찍으면 될 사진입니다. 따사로운 손길을 따사로운 눈길로 누리면 될 사진입니다. 마음껏 찍으셔요, 사진이니까요.

 그나저나, 《다카페 일기》에 나오는 어른 두 사람은 ‘일본말 이름’으로 적으면서, 아이 둘은 ‘한국말 이름’으로 적은 대목은 잘못입니다. 아이 이름을 ‘바다’와 ‘하늘’이라 했으나, 일본말대로 적어야지요. 일본사람이 ‘海’와 ‘空’으로 붙인 일본 이름이니까, 이 일본 이름 그대로 읽어야 마땅합니다. 맑은 사진을 바라보며 즐기다가, 엉뚱한 번역 때문에 살짝 낯을 찌푸립니다. (4344.5.18.물.ㅎㄲㅅㄱ)


― 다카페 일기 (모리 유지 사진·글,권남희 옮김,북스코프 펴냄,2008.12.22./15000원)
 

 

(최종규 . 20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The Children (Paperback) - Refugees and Migrants
Sebastiao Salgado / Aperture / 2003년 8월
평점 :
품절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5] 사람들과 사진으로 사랑을 나누기
 -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the children》(aperture,2000)



 돈없는 사람이 돈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이란 없습니다. 드물다 할 만한 일이 아니라,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돈없는 사람은 사진을 찍을 일조차 드뭅니다. 그러나, 사진길을 걷고픈 꿈을 꾸는 돈없는 사람이 저와 비슷한 돈없는 이웃을 사진으로 찍는 일이 있습니다.

 돈없는 사람이 저와 비슷한 돈없는 이웃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둘로 갈립니다. 첫째, 사진을 찍기 앞서와 사진을 찍는 동안과 사진을 찍고 나서 한결같이 살가이 이웃으로 지내려는 매무새입니다. 둘째, 사진을 찍고 나서 돈있는 사람 자리에 서려는 매무새입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없는 사람도 사진으로 찍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을 들여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돈없는 사람은 아주 드물게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으나, 말 그대로 너무 드문 일입니다. 돈없는 사람이 ‘돈없는 삶으로 담은 사진’을 기꺼이 책으로 엮는다든지 두루 알린다든지 하는 일이란 참으로 드뭅니다.

 다큐멘터리라 하는 갈래를 이루는 사진을 생각합니다. ‘돈있는 사람’을 찍은 사진을 놓고 다큐사진이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직 이러한 사진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돈없는 사람’을 찍은 사진을 가리켜 인물사진이라 하거나 패션사진이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이제껏 이러한 사진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큐사진이라 하면 으레 ‘가난하거나 힘들거나 어렵거나 고단한 사람’을 찍어야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듯 여기곤 합니다.

 사진기를 쥐고 다큐멘터리를 이루려 하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찾아나섭니다. 가난한 사람하고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를 함께 지내곤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동무로 삼는다면서 자주 찾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다큐사진을 하는 이들 가운데 ‘한 가지 이야기만 온삶을 붙잡으며 사진찍기를 하겠다’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다른 이야기를 찾아나섭니다. 사진책 한 권 또는 사진잔치 한 번 할 만한 부피만큼 사진을 찍고는 ‘또다른 가난한 사람’을 찾아나섭니다.

 이효리 님을 찍은 패션사진을 헤아립니다. 이효리 님을 더 예뻐 보이도록 하는 사진이 가득합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 가난하다는 아이들을 찍은 사진을 떠올립니다. 하나같이 가엾어 보이거나 굶주려 보이거나 슬퍼 보이는 사진입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님 사진책 《the children》(aperture,2000)을 들춥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아이들》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으나,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책 이름은 ‘가난한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입니다.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이 내놓은 사진책에 붙은 이름을 곱씹습니다. 한국 다큐사진쟁이 가운데 ‘아이들’이라는 이름을 수수하게 붙이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스스로 다큐사진이라 여기지 않고 ‘놀이를 즐기는 아이’를 찍은 편해문 님은 《소꿉》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은 적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은 김기찬 님은 ‘골목’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골목 안 풍경’이라고 덧말을 달았습니다.

 《the children》을 한 장 한 장 넘깁니다. 사진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제 모습을 제 사진기로 저희 스스로 찍을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바깥에서 누군가 찾아와서 저희 모습을 찍은 다음 돌아갑니다.

 사진책에 드러나는 아이들은 한결같이 가난합니다. 한결같이 외롭습니다. 한결같이 고단합니다.

 그런데, 이 가난하고 외로우며 고단한 아이들은 모조리 ‘아이들’입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workers》라는 사진책에서도 ‘일꾼’ 모습만 보여주었습니다. 가난하며 외롭고 고단한 일꾼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그저 ‘일꾼’이라는 이름만을 붙이며 일꾼만을 보여주었습니다.

 돈있는 집 아이도 아이입니다. 돈없는 집 아이도 아이입니다. 이름있는 집 아이도 사랑스럽습니다. 이름없는 집 아이도 사랑스럽습니다. 힘있는 집 아이도 예쁩니다. 힘없는 집 아이도 예쁩니다. 아이는 누구나 아이이면서 사랑스러운데다가 예쁩니다.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이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책을 차분히 들여다보면서 살가이 배우면 좋겠습니다. 겉모습을 키우거나 겉치레를 부리려고 ‘사진솜씨’를 북돋우는 길은 그만 배우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아이로 바라보고, 일꾼은 일꾼으로 바라보는 눈길과 손길과 몸길과 마음길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 스스로 사진으로 담는 일이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 스스로 글로 써서 이야기하거나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는 일 또한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가멸찬 사람이든, 제법 돈이 있는 사람이 글·그림·사진으로 이야기를 꾸립니다. 가난한 사람 스스로 가난한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을 찍지 못하는 줄 또렷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려는 삶 가운데 하나로 사진찍기를 합니다.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려는 삶 가운데 하나로 글쓰기를 할 수 있고, 밥짓기를 해서 나눌 수 있으며, 옷짓기를 해서 나눌 수 있어요. 언제나 ‘사람들과 사랑 나누기’를 하는 흐름에서 어깨동무를 하는 사진찍기입니다.

 가난하니까 더 꾀죄죄해 보인다거나 더 슬퍼 보이도록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가난하니까 이 가난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긴다거나 도와주도록 생각하게끔 이끄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아이들’입니다. 가난한 아이가 아닌 ‘아이’입니다. 사랑스러운 목숨을 선물받은 아이요, 아름다운 목숨을 곱게 이을 아이입니다.

 사진은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진책 《the children》은 사진은 조금도 대단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사진이야기를 묶으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사람을 잇는 고리를 보여줍니다.

 아이를 사랑해 주셔요, 이뿐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며 살아요, 이뿐입니다.

 누군가는 당신 살림집 네 살 아이를 한 번 더 꼬옥 껴안으면서 사랑하겠지요. 누군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집식구 먹여살리는 짓은 그만두고 자전거공장이나 두부공장으로 일터를 옮긴다든지, 아예 시골마을에서 흙을 일구는 터로 보금자리를 몽땅 옮기면서 사랑하겠지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아이들을 아이들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길을 걷는 사랑을 나눕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30] 스콧 슈만, 《사토리얼리스트》(윌북,2010)



 한국말은 ‘발돋움’입니다. 중국말이나 일본말은 ‘發展’입니다. 한글로 ‘발전’이라 적으면 한글이지, 한국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발전’이라는 낱말은 들온말(외래어)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바깥에서 들어온 낱말인 ‘발전’이지, 한국사람 스스로 일구거나 빚은 낱말인 ‘發展’이 아니에요.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 ‘발돋움’을 잊거나 내팽개치거나 잃을 뿐입니다.

 한국사람이든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사진을 찍습니다. ‘撮影’을 하거나 ‘出寫’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camera’를 손에 쥐지 않습니다. 저마다 사진을 합니다. ‘photo’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면 ‘사진’이 아닌 ‘photo’를 하겠지요.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라면 ‘寫眞’을 할 테고요.

 이 글을 쓰는 나, 이 사람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사람이기에 더 잘 났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며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말이 더 뛰어난 말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담는 한국글인 한글이 가장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말을 즐겁게 쓰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윌북,2010)를 읽습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스콧 슈만 님은 머리말에서 “독자들이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서 좀 다른 각도에서 패션과 스타일을 보게 되길 바란다(7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는 ‘패션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이 아닌 ‘패션사진책’이고, 사진이 아닌 ‘패션사진’을 보여줍니다.

 스콧 슈만 님은 사진이 아닌 패션사진을 하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다운 넋’을 놓치지는 않습니다. “헤어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저쪽에 가 있으라고 하는데,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달려와서 매만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완벽하면 할수록 때로는 완전히 지루한 사진이 되기 때문이다(163쪽).” 같은 말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더없이 마땅합니다. 아주 마땅하기에 굳이 토를 달 까닭이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지없이 마땅한 만큼, 굳이 이렇게 이야기할 까닭마저 없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매무새쯤은 밑바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면, 사진을 찍는 사람만 이러한 매무새를 다스려야 할까 궁금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빈틈이 없는 글을 쓰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빈틈이 없는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빈틈없다는 사진은 말 그대로 빈틈없다는 사진입니다. 빈틈없다는 글은 말 그대로 빈틈없다는 글입니다.

 그저 이러할 뿐입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또 만화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여기에 영화나 연극이나 공연이든 매한가지예요. 빈틈이 없는 작품을 노리면, 틀림없이 빈틈이 없는 작품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빈틈은 없되 아름다움 또한 없기 마련입니다. 빈틈은 없지만 사람내음 또한 없기 일쑤예요.

 ‘사진 아닌 패션사진’을 하는 이들을 바라볼 때에는 늘 이러한 대목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냥 사진을 하면서 저절로 ‘패션사진’이 이루어지도록 나아가면 좋을 텐데, 처음부터 ‘패션사진’이라고 못을 박으니 슬픕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사진을 하면서 시나브로 ‘다큐사진’이 되도록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구태여 ‘다큐사진’이라고 대못을 꽝꽝 박아야 거룩한 다큐멘터리 작품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라 안팎 이름난 상패를 거머쥐어야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작품이 되지 않아요. 《다카페 일기》 같은 사진책이나 《윤미네 집》 같은 사진책은 참 사랑스러운 다큐사진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다카페 일기》이든 《윤미네 집》이든 이 사진책을 일군 사진쟁이는 ‘다큐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마저 아닙니다. 틀림없이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지만, 모리 유지 님이 《다카페 일기》를 일구거나 전몽각 님이 《윤미네 집》을 가꿀 때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껴안고픈 마음’이었구나 싶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껴안고픈 마음을 담은 손길로 함께 지내며 ‘사진도 몇 장 같이’ 찍었을 뿐입니다.

 다시 《사토리얼리스트》를 생각합니다. 스콧 슈만 님은 “이 젊은 여성은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무척 부끄러워하면서 어색해 했다. 긴장을 풀어 주려고 갖은 재주를 피웠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198쪽).”고 말합니다. 사진찍기는 재주놀음이 아니니까요. 사람을 사귀려 하지 않고 ‘멋진 사진’만, 아니 ‘멋진 패션’만 뽑아내려고 하면, ‘사진찍기’이든 ‘패션사진찍기’이든 이루어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스콧 슈만 님은 사진기를 내려놓거나 당신이 사진으로 담고 싶은 사람하고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스콧 슈만 님이 쓴 글을 더 읽으면, 스콧 슈만 님은 ‘더 많이 찍거나 다시 찍어’ 보는 틀에서 벗어나, ‘사진쟁이가 아니라 이웃이나 동무처럼 다가갔을’ 때에 비로소 ‘길거리에서 모델 노릇이 된 여느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나 떨림이나 뻣뻣함을 풀면서 스스럼없이 웃거나 멋진 모습을 잡아 주었다고 밝힙니다.

 사진은 기계놀음도 재주놀음도 아닙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좋아하거나 반기는 숱한 사람들하고 어우러지는 삶이 곧 사진입니다. 아니,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도 나타내거나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 길어올리기도 한다고 이야기해야 옳습니다.

 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사진입니다.

 사람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사람입니다.

 기계가 바뀌거나 나아진다고 하지만, 발돋움하는 일이 아닙니다.

 문화와 문명이 태어나거나 깊어진다고 하지만, 발돋움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사진기를 쥐었건 사진기 앞에 서건, 서로서로 삶을 즐기는 나날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건, 서로서로 부둥켜안거나 어우러지면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꽃입니다.

 “사진에 담고자 하는 것이 그녀라는 내 의도를 이해했을 때 그녀는 ‘노, 미 브루타’라고 말했다. 사진에 찍힐 만큼 예쁘지 않다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445쪽).”를 읽으며 거듭 생각합니다. 스콧 슈만 님은 할머니한테 당신은 참 아름답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했답니다. 그래요, 할머니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할 만합니다.

 할머니는 왜 아름다울까 생각할 노릇입니다. 할머니가 어떻게 아름답기에 애써 사진으로 찍어야 할까를 돌아볼 노릇입니다.

 삶이 아름다울 때에 사랑이 아름답고, 사랑이 아름다우니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람을 사진으로 담고픈 사람이라면, 어느 한 사람한테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을 살포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얼굴’을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사람한테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을 찍는 사진일 테니까요.

 이리하여, 사진이든 사람이든 발돋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발돋움이 아니거든요. 삶 또한 발돋움이 아니에요. 더 나아지는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이 따사로운 사랑입니다. 더 나아지는 삶이 아니라, 늘 넉넉한 삶입니다.

 사진책 아닌 패션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를 손에 쥔 이들이 이 패션사진책을 넘기면서 ‘사람들마다 어떠한 사랑과 삶을 받아들여 즐기거나 누리는가’를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결로 받아들인다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4344.5.11.물.ㅎㄲㅅㄱ)


―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사진·글,박상미 옮김,윌북 펴냄,2010.6.20./17800원)
 

 

(최종규 . 20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차이 Chang Ts‘ai 열화당 사진문고 30
장차이 사진, 젠융빈 글, 한정선 옮김 / 열화당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역사를 기록하는 사진’이란 없어요
 [찾아 읽는 사진책 21] 젠융빈·한정선 엮음, 《장차이》(열화당,2008)



 지난날 ‘열화당 사진문고’는 ‘프랑스 photo poche’를 그대로 옮겨서 내놓았습니다. 오늘날 ‘열화당 사진문고’는 ‘영국 phaidon’을 고스란히 옮겨서 내놓습니다.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이 거의 자리잡지 못하는 한국 사진밭을 헤아린다면, 포토 포쉐이든 페이돈이든 옮겨서 내놓는 일이란 무척 고맙습니다. 한 발 나아가 ‘taschen’이라든지 ‘朝日カメラ’를 옮겨서 내놓을 수 있어요. 사진책을 팔아 돈을 벌기 힘든 한국땅에서, 돈있는 출판사가 선뜻 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이나 일본에서 만든 손꼽히는 사진책을 펴낼 수 있다면 참으로 반갑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름난 사진쟁이라 하든 이름 안 난 사진쟁이라 하든, 사진책을 낼 때에는 으레 제살깎기를 하듯 내놓기 마련입니다. 아주 이름난 사진쟁이가 아니고서는 제살깎기 아닌 ‘사진책 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지난날이든 오늘날이든, 이러구러 나라밖 사진문고를 한국말로 옮겨서 낸다 할 때에는, 이러한 사진책을 내면서 저작권삯을 치렀든 안 치렀든 조금 더 바지런히 옮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몇몇 아주 이름난 사진쟁이 사진책뿐 아니라, 한국에 거의 안 알려졌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사진’이나 ‘사랑스러운 사진’이나 ‘믿음직한 사진’을 펼쳐 보인 사람들 따사로우면서 넉넉한 손길을 느끼도록 했다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2008년을 끝으로 더는 안 나오는 ‘새 열화당 사진문고’ 가운데 하나인 《장차이》(열화당,2008)를 읽습니다. 장차이 님 사진은 “서양 문물이 유입되던 시기의 상하이 풍경, 정치사회적 격변기의 타이완 사람들과 원주민들의 생활상 등을 관찰과 탐구의 열정으로 기록한 타이완의 선구적인 사진가”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사진은 ‘역사를 기록한다’는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처럼 지난 한삶을 고이 보여주는 사진을 요즈음 들어 높이 사곤 합니다. 틀림없이 사진은 ‘본 대로 찍어서 남깁’니다. 내가 보는 모습이든 네가 보는 모습이든, 저마다 보는 모습을 고스란히 찍어서 남깁니다.

 다만, 사진은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하되, ‘내가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합니다. 사진은 내가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하되, ‘내가 생각하면서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합니다. 사진은 내가 생각하면서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하되, ‘내가 살아가며 내가 생각하는 동안 내가 보는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합니다.

 사진으로 담기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모습이란, 어느 한 나라나 한 겨레 역사라 할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담기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모습이란, 어느 한 사람이 한 곳에서 부대끼는 만큼 바라보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담는 모습입니다.

 사진은 더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진은 덜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진기를 쥔 사람 삶 깜냥과 무게와 깊이와 너비와 속살만큼 담아냅니다.

 사진기를 쥔 한 사람이 타이완 어느 도시에서 어느 한 동네 사람들하고 깊이 사귀거나 어울렸다면 바로 이 어느 한 동네 사람들 삶자락만을 아주 깊으면서 살갑게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이 타이완 토박이하고 멧자락 깊이 들어가 조용히 살아갔다면 바로 이 멧자락 깊은 터전 토박이들 여느 삶(토속 생활)을 사랑스레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기를 쥔 한 사람이 집에서 아이를 도맡아 키웠다면, 어느 한때(1920년대이든 1950년대이든 1970년대이든) 여느 살림집 아이 하나 자라는 동안 입거나 걸친 옷자락을 비롯해 생김새와 놀잇감이나 집살림을 요모조모 들여다볼 만한 사진을 남깁니다.

 ‘사진은 역사를 기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내가 살아온 발자취를 담는다’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1980년대 민주운동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할 때에도 ‘역사를 기록한 사진’이라 할 수 없습니다. ‘1980년대 민주운동하고 살아온 내 발자취’를 담는 사진일 뿐입니다.

 1980년대 민주운동 언저리에서 구경꾼으로 지냈는지, 그저 보도사진기자로만 머물렀는지, 민주운동을 ‘거친 폭력 시위대 몹쓸 짓’으로 여기며 지냈는지, 민주운동 한복판에서 온몸을 던지며 ‘독재정권 몰아내기’에 힘을 기울였는지 하는 내 삶자락이 담기는 사진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사진으로 담던 사람들도 매한가지입니다. 축구경기를 마음껏 즐긴 사람인지 축구경기가 벌어지는 언저리에서 구경꾼으로 머물렀는지, 또는 이무렵 일어난 ‘미군 장갑차 살인사건’을 살피는 한 사람으로 지냈는지 하는 ‘내 삶 한 자락 발자취’를 담는 사진이 됩니다.

 장차이 님 사진을 담은 《장차이》는 ‘1940∼50년대 현대 타이완 사회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장차이가 살았던 1940∼50년대 타이완 어느 한켠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기록이란 없습니다. 사진기록이란 없습니다. 글기록이든 그림기록이든 따로 없습니다. 모두 내 삶이면서 내 이야기가 되고, 내 모습이면서 내 얼굴이 됩니다. 더 뜻있는 사진이란 없고, 더 뜻없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더 좋은 사진이나 더 나쁜 사진은 없습니다. 2050년이나 2100년쯤 될 때에는, 이들 2050년이나 2100년 뒷사람은 2000년대나 2010년대 오늘 이야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려나요. 앞으로 2050년대 뒷사람이나 2100년대 뒷사람 또한 ‘2000년대 한국 사회 모습’이나 ‘2010년대 한국 서민 생활 모습’ 같은 이름을 붙이는 ‘사진기록’을 이야기하려나요. (4344.5.9.달.ㅎㄲㅅㄱ)


― 장차이 (젠융빈·한정선 엮음,열화당 펴냄,2008.11.15./12000원)
 

 

(최종규 . 2011)


댓글(0) 먼댓글(1)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글이 너무 맛!있습니다~~
    from 즐겁게~재밌게~美色不同面 半夜佳人 2011-05-09 17:49 
    된장님의 글이 너무 좋습니다~~ 제 맘대로 순서는 초큼 바꿔보았습니다~잘 발효된 된장에 맛나게 조물조물,나물반찬처럼 자꾸자꾸 생각이 납니다*^^*‘사진은 역사를 기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어느 한 사람이 한 곳에서 부대끼는 만큼 바라보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담는 모습입니다.사진은 더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진은 덜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진기를 쥔 사람 삶 깜냥과 무게와 깊이와 너비와 속살만큼 담아냅니다.다만, 사진은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