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으로 - 아득하고 신비한 원시림의 세계, 월드원더북스 5
호시노 미치오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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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여쁜 자연과 살아가며 어여쁜 사진을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6 : 호시노 미치오, 《숲으로》(진선출판사,2005)



 아름답구나 하고 느낄 만한 사진을 찍다가 곰한테 목숨을 앗긴 일본 사진쟁이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이야기 《숲으로》(진선출판사,2005)를 천천히 읽습니다. 먼저 혼자 읽고 나서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함께 읽습니다. 아이는 제 아버지처럼 사진을 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이는 아이답게 사진을 읽습니다. 아이 눈에 익숙한 모습이 나오면 금세 알아채고, 아이 눈에 낯선 모습이 나오면 “이게 뭐야?” 하고 묻습니다. 모르니까 묻고, 궁금하니까 묻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이 곰한테 목숨을 앗겼다는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호시노 미치오답게 숨을 거두었다’고들 말하곤 합니다. 글쎄, 어찌 보면 호시노 미치오 님답다 할 테지만, 곰곰이 살피면 호시노 미치오 님답지 않을 수 있어요. 어떻든, 호시노 미치오 님은 곰이 살아가는 터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며시 깊은 숲에 발자국을 남기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어린이 사진책 《숲으로》는 “숲이 들려주는 수많은 이야기(30쪽).”를 담습니다. 사진으로 이야기를 담고, 글로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 지구별 거의 모든 사람은 밟을 수 없는 곳을 스스로 힘껏 밟으면서 사진을 찍은 호시노 미치오 님인 터라, 당신 아니면 찍을 수 없으며, 당신 아니면 보여주기 어려운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호시노 미치오 님 아니면 찍을 수 없다 싶은 모습이라서 사진책 《숲으로》가 빛나지 않습니다. 누구라도 호시노 미치오 님처럼 곰과 곰 보금자리를 사랑하는 넋이 되어 숲으로 깊이 들어서면, 이 사진책처럼 아름다이 빛나는 사진을 얻어서 나눌 수 있어요. 다만, 호시노 미치오 님처럼 곰을 사랑하면서 숲으로 발을 한 발 두 발 살며시 디딘 사람이 몹시 드물 뿐입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이 깊은 숲이 아닌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사진을 찍었더라도 《숲으로》와 마찬가지로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일구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곳을 찍었기에 아름다운 사진’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아름다운 눈길로 아름다이 바라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가슴이 한껏 벅차오를 때에 아름다운 마음결이 되어 찍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네 살 아이한테 “나무와 이끼, 그리고 바위와 쓰러진 나무들이 서로 의지해서 살아가는 숲은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입니다 … ‘만일 곰이 다가오면, 그땐 조용히 길을 비켜 주면 될 거야.’ 그런 생각마저 들었습니다(15쪽).” 같은 글을 읽힌대서 아이가 이 글을 잘 헤아려 주기란 어려울 수 있어요. 살짝 말을 바꾸어 읽습니다. ‘나무와 이끼와 바위와 쓰러진 나무가 서로 기대어 살아가는 숲은 커다란 목숨입니다. 곰이 나한테 다가오면 그때에는 조용히 길을 비켜 주면 되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는 아버지가 읽는 글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짝반짝 빛내는 눈망울로 사진을 말끄러미 바라봅니다. 아름다운 사진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아이 눈망울이 빛납니다.

 “쓰러진 나무 위에는 다람쥐가 먹다 버린 등자나무의 열매 껍질들이 흩어져 있습니다. 동물들도 자연의 길로 다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숲 속의 다람쥐가 된 기분으로 쓰러진 나무 위를 걸었습니다(18쪽).” 같은 글을 읽히면서, 아이 아버지부터 마음이 좋습니다. 다람쥐도 곰도 사람도 똑같이 자연이라는 숲길을 걷습니다. 우리가 걸어갈 길은 바로 이곳, 숲길이에요. 찻길이 아닌 숲길을 걸어야 하고, 시멘트길이 아닌 흙길을 걸어야 해요.

 두 아이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자가용을 몹시 싫어할 뿐 아니라, 자가용을 타고다니면 글을 쓸 수 없고 그림을 그릴 수 없으며 사진을 찍을 수 없다고 느껴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은 자가용을 타지 않고 몰지 않으며 장만하지 않는다고 느껴요. 두 다리로 이 땅을 사랑하고, 두 손으로 동무를 사랑하며, 온몸과 온마음으로 제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때에 바야흐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다고 느껴요.

 이리하여, 아이한테 “일생을 마친 수많은 연어들이 강물에 떠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연어가 숲을 만든다.’ 알래스카 숲에 사는 인디언들의 속담입니다. 알을 낳는 사명을 다하고 죽은 연어들이 떠내려오며 숲에 영양분을 준다는 뜻이지요. 나는 살며시 개울을 떠나 다시 숲 속으로 들어갔습니다(27쪽).” 같은 글을 읽고 사진 몇 장 더 넘긴 뒤 책을 덮으면서 따사로운 넋으로 다시 태어나는 느낌입니다.

 사진이란 이처럼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글이란 이와 같이 아름다운 삶자국이에요. 덧바르거나 꾸민대서 아름다운 얼굴이 되지 않아요. 옷을 입히거나 이름을 붙인대서 아름다운 사람이 되지 않아요.

 착하게 살아가면 누구나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참다이 어깨동무하면 저마다 아름다운 삶이에요.

 아이들한테 좋은 그림책을 읽혀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그림책을 읽히기 앞서 어른 스스로 좋은 그림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이야기책을 읽혀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이야기책을 읽히기 앞서 어른부터 기쁘게 좋은 이야기책을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사진책을 읽혀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좋은 사진책을 읽히겠다면 어른들이 꾸준히 좋은 사진책을 예쁘게 장만해서 예쁘게 건사해야 합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은 곰한테 목숨을 앗긴 사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숲에서 자연스레 숲사람으로 지내다가 자연스러이 숲으로 돌아갔습니다. (4344.6.9.나무.ㅎㄲㅅㄱ)


― 숲으로 (호시노 미치오 사진·글,김창원 옮김,진선출판사 펴냄,2005.8.16./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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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 House - 붉은 틀
노순택 사진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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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 잊은 사람들 삶을 다큐사진으로
 [찾아 읽는 사진책 36] 노순택, 《RED HOUSE》(청어람미디어,2007)



 다큐사진을 찍는 노순택 님은 《RED HOUSE》(청어람미디어,2007)라는 사진책 머리말에서 “북한을 바라보는 어떤 시선도, (그것이 내부에서 비롯된 것이건, 외부에서 비롯된 것이건) 밀도 있는 작업이 되기 어렵다는 것을, 나는 타인의 작업들을 바라보면서, 또 내 작업을 검토하면서 알게 되었다(10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북녘 이야기와 삶을 사진으로 담든, 남녘 사람들과 사랑을 사진으로 싣든, 깊이 있게 사진말을 나누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어느 사진감을 고르든 똑같습니다. 어느 일을 하든 매한가지입니다. 쉬운 일이란 없고, 쉬운 사진이란 없으며, 쉬운 파헤치기나 사귀기란 없습니다.

 사진책 《RED HOUSE》 머리말에는 “사진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겉’뿐이다(9쪽)”라는 이야기도 한 줄 적힙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은 겉을 찍고 겉만 나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모로 본다면, 사진은 속을 찍고 속만 나눌 수 있어요. 겉과 속을 함께 찍을 수 있으며, 겉과 속을 하나도 못 찍을 수 있어요. 스스로 겉을 찍으려 하면 겉을 찍습니다. 스스로 속을 찍으려 할 때에는 속을 찍어요. 사람을 사귈 때에도 겉치레로 사귄다면 겉훍기로 그칩니다. 사람을 마주하며 속사랑을 나누려 한다면 속사랑을 이루어요.

 사진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모습만 찍지 않습니다. 글이기 때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모습까지 담지 않습니다. 그림은, 춤은, 노래는, 영화는, 연극은 어떠하다고 할까 돌아볼 노릇입니다. 어떠한 길을 걷든,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무엇을 담아내고 무엇을 보여주며 무엇을 나누는가는 사뭇 달라집니다.

  사진책 《RED HOUSE》를 들여다봅니다. 세 갈래로 나누어 사진을 싣고 보여줍니다. ‘펼쳐들다’와 ‘스며들다’와 ‘말려들다’로 나눈 《RED HOUSE》입니다. 펼쳐들다에서는 “질서의 이면”을 말한다 하고, 스며들다에서는 “배타와 흡인”을 말한다 하며, 말려들다에서는 “전복된 자기모순”을 말한다 합니다.

 사진을 넘기면서 세 갈래 이야기 펼쳐들다와 스며들다와 말려들다가 이러할 수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리고, 세 갈래 이야기란 따로 떨어뜨린 셋이 아니라 한몸이고, 세 갈래 이야기는 북녘사람 삶이나 남녘사람 삶이 세 갈래라는 뜻이 될 수 있지만, 북녘과 남녘을 바라보는 사진쟁이 삶이 세 갈래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노순택 님은 ‘종이쪽 놀이(카드섹션)’를 하는 북녘사람들을 바라보며 ‘질서 뒤에 가려진 모습을 펼쳐든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종이쪽 놀이를 펼치는 10만 어린이와 어른들 움직임을 질서라 일컬을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런 종이쪽 놀이란 질서라 일컬을 수 없을 텐데요. 질서가 아닌 권위이고 권력이며 군국주의라고 느낍니다. 질서일 수 없는 슬픔과 바보짓과 아픔이라고 느낍니다. 질서하고는 동떨어진 눈물이며 생채기인데다가 용두질이구나 싶습니다. 깊이를 따지면, 종이쪽 놀이를 하는 사람은 북녘사람만이 아닙니다. 남녘에서도 똑같이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다른 모습으로 똑같이 벌이는 일입니다. 북녘이나 남녘이나 틀에 박힌 초·중·고등학교 교육입니다. 북녘 군대나 남녘 군대나 틀에 박힙니다. 서로서로 평화를 지키려는 군대가 아니라 평화를 밟고 서로를 더 잘 죽이려는 ‘사람 죽이는 재주’를 길들이는 군대예요. 이는 사진책 《RED HOUSE》 셋째 갈래인 말려들다를 넘기면 숱하게 나오는 ‘군인옷 입은 어르신’ 얼굴을 보면 쉬 어림할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그렸다는 김일성 얼굴보다 이 ‘김일성 그림을 들거나 불사르는 군인옷 입은 남녘 남자 어르신들 얼굴’이 훨씬 무시무시하구나 싶어요.

 그나저나, 노순택 님은 왜 “붉은 틀”이라는 이름을 붙인 사진책 《RED HOUSE》를 내놓았는지 아리송합니다. 북녘 사회가 붉은 틀을 보여주기에 《RED HOUSE》를 찍었다 할 테지만, 정치권력자가 보여주는 붉은 틀이 북녘사람들 삶자락은 아니거든요. 붉은 틀에 가둔다 하더라도 사람들이 붉게 물들지는 않거든요. 아니, 붉은 틀에 오래오래 가둔 끝에 시나브로 붉게 물들었다지만, 어느 사람이든 붉은 피가 흐르지만 붉은 사람 아닌 흙빛 사람이에요.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는 흙빛 사람입니다. 입시지옥에 얽매인 채 시험점수만 외워야 하는 남녘 어린이와 푸름이는 참으로 슬프며 불쌍한데, 북녘 어린이와 푸름이는 또 북녘 어린이와 푸름이대로 참으로 슬프며 불쌍해요. 서로서로 ‘더 낫지’ 않고 ‘더 나쁘지’ 않아요. 둘 모두 아름다움하고는 사뭇 동떨어진 채 숨을 잇습니다.

 정치권력을 쥔 사람이든 정치권력을 쥔 사람한테 눌리는 사람이든 갓난쟁이로 태어나서 늙은이로 죽습니다. 제아무리 오래 살더라도 백 살을 튼튼히 살지 못합니다. 제아무리 돈과 힘과 이름을 거머쥐었더라도 갓난쟁이일 때에는 똥오줌을 못 가립니다. 붉은 틀이란 아직 철모르는 사람들 바보스러운 짓이에요. 철모르는 사람들 바보스러운 짓을 사진으로든 그림으로든 글로든 담아서 나눈다 할 때에는, 조금도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만 얻고야 맙니다. 다큐사진이란 아름답지 못한 이야기를 구태여 파헤치거나 들여다보는 일이어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다큐사진은 사랑사진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담는 사진이 곧 다큐사진입니다. 그래서 사진책 《RED HOUSE》를 넘기는 내내 노순택 님이 북녘사람과 남녘사람을 바라보며 어떠한 사랑을 무슨 빛깔로 어떤 손길로 담아서 나누려 하는가를 곰곰이 되씹습니다. “우리는 행복해요”를 까망하양 사진으로 보여주는데, “우리는 행복해요”를 무지개 빛깔로 보여주었다면 어떠한 느낌과 이야기가 되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침나절에, 새벽나절에, 낮나절에, 저녁나절에, 햇살이 살포시 내려앉으며 뭇 꽃과 풀이 어여삐 어우러진 학교 문가와 둘레를 살펴본다면, 또 창문턱을 가만히 ‘깊게’ 들여다본다면 어떤 이야기가 샘솟을까 가누어 봅니다.

 사진기를 든 북쪽 경비원 몸짓 말고, 사진기를 든 북쪽 경비원 손가락과 손등과 손바닥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구두코와 발가락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옷깃과 지갑을 사진으로 담아 본다면, ‘붉은 틀’에 꽁꽁 싸매 두었다지만, 이곳저곳에 조용히 스며들어 선보이는 ‘사람내음’과 ‘사랑내음’을 곱게 어루만지듯 감싼다면, 무시무시한 주먹을 휘두르면서 서울 광화문 큰거리에서 목소리 높이는 어르신들 흰머리를 더 깊이 들여다본다면, 사진책 《RED HOUSE》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새삼스레 깃들는지 궁금합니다.

 더 사랑해 주셔요.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더 따스한 손길로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더 오래오래 내 고운 이웃으로 여겨 더 따스한 손길로 더 깊이 사랑해 주셔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다큐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삶으로 내 하루하루를 흐뭇하게 웃고 떠들며 즐기지 않을 때에는 다큐사진하고 멀어집니다. 누군가를 붉은 틀이라고 이름붙일 때에는, 이 이름을 붙이는 사람부터 붉은 틀입니다. (4344.6.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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笑顔大好き地球の子 (大型本)
田沼 武能 / 新日本出版社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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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야기하는 사진책은 안 뜨지만, 다른 사진책에서도 이분 사진결을 느끼면 좋으리라 생각해서 다른 사진책에 느낌글을 걸칩니다) 



 지구별 어린이를 사랑하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7]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 《地球星の子どもたち》(朝日新聞社,1994)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자랍니다. 아이는 어느덧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된 아이는 저처럼 작고 어여쁜 아이를 낳습니다. 작고 어여쁜 아이는 새롭게 태어나고, 이 작고 어여쁜 아이는 어느새 어른이 되어, 다시금 저처럼 작으면서 어여쁜 아이를 낳습니다.

 온누리는 아이가 있기 때문에 이루어집니다.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아이가 새로 태어나서 자라기 때문에 나라살림을 이룹니다. 일본이든 미국이든 중국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때라야 비로소 한 나라 살림을 이룹니다. 아이들은 어른처럼 일을 하거나 돈을 벌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오직 놀 수 있을 뿐이요, 어버이한테서 사랑받을 수 있을 뿐인데, 이렇게 여리디여리며 작디작은 아이가 있어야 비로소 어느 나라이든 나라꼴을 갖춥니다.

 잠수함이 없고 군함이 없어도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습니다. 군대가 없거나 경찰이 없어도 나라를 돌볼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돌볼 수 없습니다. 아파트가 없고 쇼핑센터가 없어도 나라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나라를 사랑할 수 없어요.

 ‘애국’과 ‘충성’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나라사랑이 아닙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 내 넋을 사랑하며 내 말을 사랑하는 나라사랑입니다. ‘경제개발 역군’이 되자는 나라사랑이 아닙니다. 내 작은 살림집을 사랑하고, 내 살가운 살붙이를 사랑하자는 나라사랑이에요.

 사랑하기 때문에 집에서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비질과 걸레질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하고 먹으려고 밥을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한테 입히려고 빨래를 합니다. 사랑하는 아이하고 오순도순 지내려고 비질과 걸레질을 해서 집안을 말끔히 치웁니다. 오직 사랑이기 때문에 집안에서 일을 하고, 오로지 사랑으로 집안에서 살림을 꾸립니다.

 사진책 《地球星の子どもたち》(朝日新聞社,1994)를 읽습니다. 사진책 《지구별 어린이》는 사진쟁이 타누마 타케요시(田沼武能) 님이 온누리 숱한 나라를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만난 아이들을 담습니다. 한두 나라 어린이가 아니라 백 나라를 훨씬 넘는 수많은 나라를 찾아다니면서 아이들을 만나고 사귑니다. 가난하다는 나라에도 찾아가 가난하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난하다는 나라에서도 제법 잘사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멸차다는 나라에도 찾아가 가멸차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가멸차다는 나라에서도 퍽 가난하다는 집안 어린이를 만납니다.

 많디많은 나라 많디많은 어린이를 사진책 하나로 마주하며 곱씹습니다. 다 다른 나라 다 다른 겨레 아이들 웃음꽃은 서로 닮습니다. 다 다른 나라 다 다른 겨레 눈물꽃 또한 서로 닮습니다. 아이들 눈망울은 비슷합니다. 아이들 몸짓은 비슷합니다. 저마다 즐기는 놀이가 다르고, 저마다 낳은 어버이와 키우는 어버이가 다를 테지만, 아이들 살림살이는 엇비슷합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살아간대서 더 불쌍해 보이거나 안쓰러워 보이지 않습니다. 싸움이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지낸대서 다 가엾게 보이거나 딱해 보이지 않습니다. 어쩌면,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뿐더러, 나라살림이 넉넉해서 돈 걱정이나 배곯이 걱정이 없는 곳에서 지낸다 하는 아이들이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갑갑할는지 모릅니다. 주어진 틀에 따라 학교를 다녀야 하고, 시키는 틀에 따라 시험을 치러 자격증이나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하는 아이들이 훨씬 외롭거나 심심하거나 갑갑한데다가 고단할는지 모릅니다.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그저 아이들을 마주합니다. 이 아이들 차림새를 살피면 한눈에 이 아이가 살아가는 집안살림이 어떠한지 헤아릴 만합니다. 그런데 ‘집안살림 = 돈 크기’가 아니에요.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즐겁거나 오붓하게 지내는 집안이 있습니다. 돈은 있으나 돈만 넘치게 쓸 뿐, 기쁨이나 애틋함하고는 동떨어진 집안이 있어요.

 집식구가 ‘집안일’과 ‘집밖일’만 한다면, 이러한 집에서 살아가야 할 아이들은 끼니를 굶을 근심이 없더라도 마음속에 사랑이 피어나지 못합니다. 집식구가 집안일과 집밖일을 알맞게 나누어 서로서로 살뜰히 맡으면서 집안살림과 집밖살림을 알뜰히 여민다면, 이러한 집에서 지내는 아이들은 가슴속 깊이 사랑씨를 뿌립니다. 아이들 웃음꽃이란 아이들을 낳아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가 뿌린 사랑씨에서 비롯합니다. 아이들 눈물꽃이란 아이들을 보살피며 함께 지내는 어버이가 뿌린 미움씨에서 비롯해요.

 새삼스레 《지구별 어린이》를 거듭 넘기고 다시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쟁이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지구별에서 가 보지 않은 나라가 없겠지요. 모든 나라 모든 아이를 마주하며 사귀었을 텐데, 아마 어느 나라 어느 아이를 만나더라도 아이들 낯빛과 사랑빛과 눈물빛은 매한가지로구나 하고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더 많은 나라로 찾아가서 더 많은 아이들을 만나지 않더라도 아이들 맑은 눈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더 가난하거나 더 ‘두메’라 하는 데까지 찾아가야 아이들 밝은 웃음빛을 만날 수 있지 않아요. 일본 사진쟁이로서는 일본에서 얼마든지 만나는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입니다. 한국 사진쟁이라면 한국에서 얼마든지 만날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일 테지요. 타누마 타케요시 님은 일본부터 한국이나 중국이나 대만을 거쳐 지구별을 샅샅이 밟습니다. 그런데 어느 나라 어느 겨레를 찾아가서 아이를 만나더라도 아이는 아이답습니다. 그러니까 “지구별 어린이”가 아닌 “일본 어린이”가 되어도, 또 “일본 훗카이도 어린이”가 되어도, 또 “우리 집 내 아이”가 되어도 맑은 눈빛과 밝은 웃음빛은 똑같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나한테 있습니다. 사진감과 사진말과 사진꽃과 사진빛과 사진뜻과 사진값과 사진꿈은 늘 내 가슴속에 있습니다. 나를 보고 내 삶을 볼 때에 내가 걸어갈 사진길을 깨닫습니다. (4344.6.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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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fghanistan (Paperback) - Broken Promise
Moises Saman / Charta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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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진 꿈 앞에서 흔들리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6] 모이제스 사만(Moises Saman), 《Afghanistan, broken promise》(CHARTA,2007)



 한국에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알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거꾸로,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에서 한국을 알기도 매우 힘들겠지요. 한국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를 배울 일이란 없습니다. 세계사를 다루는 교과서에서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를 얼마나 실을까 궁금한데, 몇 줄쯤으로 이 나라 이야기를 다룰는지요. 몇 줄이든 몇 쪽이든 다루어 준다면 얼마나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살피거나 헤아리는 눈썰미로 다룰는지요.

 한국사람은 이웃한 일본에서 ‘아이들한테 역사를 엉뚱하게 가르치는 교과서’를 자꾸 만든다며 나무라곤 합니다. 일본에서 정치권력을 거머쥐거나 틀어쥐려는 이들은 ‘역사 비틀기’를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도 정치권력을 거머쥐거나 틀어쥐려는 이들은 일본 군국주의자하고 똑같습니다. 일본은 ‘일-한 역사 비틀기’를 하고, 한국은 ‘한국사람 여느 역사 비틀기’를 합니다.

 신문에 실리거나 방송에 나오는 아프가니스탄 이야기는 온통 전쟁과 테러와 약탈과 가난과 파병뿐 아닌가 싶습니다. 때때로 ‘여성 권리가 아주 끔찍하다’는 이야기가 떠돌곤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사람도 사랑을 할 텐데, 아프가니스탄사람도 밥을 먹을 텐데, 아프가니스탄사람도 일을 하고 놀이를 즐기며 살아갈 텐데, 옷을 깁고 집을 지으며 동무를 사귈 텐데, 흙을 일구고 꽃을 사랑하며 나무를 돌볼 텐데, 아이를 낳고 늙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조용히 숨을 거둘 텐데, 숱하디숱한 사람 사는 이야기를 듣기란 참 어렵습니다.

 사진책 《Afghanistan, broken promise》(CHARTA,2007)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페루 리마에서 태어나 에스파냐 바르셀로나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진기자나 사진작가로 일하는 모이제스 사만(Moises Saman) 님 사진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2004년에 《This is War》(CHARTA)를 내놓은 모이제스 사만 님은 싸움이 일어나는 곳에서 아픈 채 살아야 하는 사람과 터전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어떻게 아프고, 슬픈 사람들이 어떻게 슬픈지를 사진으로 조용히 보여줍니다. 아픈 채 살아가고 슬픈 채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고즈넉히 들려줍니다.

 사람도 땅도 집도 길도 꽃도 들판도 흔들립니다. 절뚝이면서 흔들리는지 모르고, 울다가 흔들리는지 모르며, 고개를 떨구기에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폭탄이 터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르고, 탱크가 지나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르며, 군인들이 지나가며 땅이 흔들리는지 모릅니다.

 얼핏, 재미나다면 재미나고 무섭다면 무서운 이야기 하나 듣습니다. 미국 정부가 아프가니스탄에 보낸 군인한테 들이는 돈이 ‘군인 한 사람 앞에 해마다 100만 달러’만큼 된다고 하더군요. 2011년 1월부터 5월까지 들인 돈은 1130억 달러라고 합니다. 1억 원이 아닌 1억 달러라 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큰 돈입니다. 1억 달러라 하면 1000억 원이 넘으니까요. 1130억 달러라 하면 얼마나 큼지막한 돈이 될까요.

 미국 한 나라가 고작 다섯 달 동안 ‘아프가니스탄이라는 나라 한 곳’으로 보낸 ‘싸움터 군인과 무기와 군사시설’에 들인 돈이 1130억 달러라 한다면, 이제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인 군사비는 얼마나 되고, 지구별 곳곳에서 들인 군사비는 또 어떻게 될까 끔찍합니다. 지난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들인 군사비는 또 얼마나 될까 생각하면 훨씬 끔찍합니다. 소련에 앞서 아프가니스탄하고 이웃한 나라에서 퍼부은 군사비에다가 서양 나라가 아프가니스탄을 식민지로 삼으려고 들인 군사비는 또 얼마나 될는지 헤아리면 참으로 끔찍합니다.

 미국이며 소련이며 유럽이며, 왜 아프가니스탄에서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들여 군대를 보내어 사람을 죽이고 집을 허물며 땅을 망가뜨릴까요. 이토록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 가운데 1/10000이라도 아프가니스탄 논밭과 살림집과 어린이와 교육에 보태었다면,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해 지구별 평화와 사랑은 얼마나 달라지거나 거듭났을까요.

 사진책 《아프가니스탄, 깨진 다짐》에 나오는 어린이와 어른이 흔들립니다. 아니, 아프가니스탄 어린이와 어른을 바라보는 사진쟁이 손과 눈과 마음이 흔들립니다. 아니, 미국에서 살아가며 미국 언론매체에 보도사진을 보내는 노릇을 하는 ‘페루에서 태어나 에스파냐에서 자란’ 사진쟁이 몸뚱이가 흔들립니다.

 그렇지만, 아프가니스탄사람은 아프가니스탄사람대로 살아갑니다. 슬프면 슬픈 대로 살고 아프면 아픈 대로 삽니다. 슬프거나 아프지만 어김없이 사랑이 꽃피고, 메마르거나 무섭거나 차디찬 땅에서도 새롭게 아이가 태어납니다. 더 나은 시설과 문화와 교육을 누리지 못한다지만, 이곳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는 한국 어린이나 미국 어린이하고 똑같이 착한 사랑과 고운 믿음을 온몸으로 예쁘게 맞아들이면서 자랍니다. 다만,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자라는 길에는 한결 맑은 하늘이나 한껏 푸른 들판보다 번쩍거리는 총칼을 휘두르는 군인에다가 쾅쾅 귀를 울리는 폭탄소리가 익숙할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면, 탱크나 전투기나 폭탄이 보이지 않는 서울 시내 어린이는 괜찮은지요. 뉴욕 시내 어린이와 도쿄 시내 어린이는 걱정없는지요. 서울과 뉴욕과 도쿄 시내에서 살아가는 어린이는 어떠한 모습을 보고 어떠한 소리를 들으며 어떠한 나날을 보내는지요.

 어른이 일으킨 싸움이 아니라,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이거나 거머쥐려는 힘센 나라 어른이 벌이거나 부추기는 싸움이 끊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믿음을 북돋우는 데에 돈을 안 쓰고, 전쟁무기 만들거나 살인훈련 받는 군인을 키우는 데에 돈을 끝없이 쓰는 ‘선진강대국’ 어른들이 저지르는 싸움이 그치지 않습니다.

 사진쟁이 한 사람은 참으로 여리디여립니다. 사진 한 장으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사진은 온누리를 바꾸지도 못하고, 아픔이나 생채기를 보여주지도 못하며, 눈물이나 웃음 또한 담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그저 흔들릴 뿐입니다. 이제나 저제나 얼룩질 뿐입니다. 깨진 꿈이라기보다 깨뜨린 꿈을 찾거나 보듬거나 다스리기에는 너무도 벅찬 아프가니스탄 어린이가 총알 구멍 숱하게 생긴 벽을 바라보며 앉았습니다. 그나마 이 벽은 폭탄을 맞아 송두리째 사라진다든지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4344.6.3.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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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사진관
최창수 사진.글 / 북하우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착한 사람을 사진으로 담는 나들이
 [찾아 읽는 사진책 33] 최창수, 《지구별 사진관》(북하우스,2007)


 퍽 젊다고 하는 나이에 지구별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최창수 님이 당신이 찍은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글로 담은 책 《지구별 사진관》(북하우스,2007)을 읽습니다. 사진책에 실린 사진을 살피면서 꼭 아무개 사진 느낌이 난다 하고 생각했더니, “아무튼 나는 스티브 매커리 사진을 열심히 흉내내기 시작했다. 거장의 작품을 함부로 따라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난 그 과정을 통해 내 사진이 조금씩 나아지는 걸 느꼈다(25쪽).”는 말마따나,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을 따라하는 사진이었습니다.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이 얼마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아름답기에 굳이 이분 사진을 따라하느냐 싶습니다. 아니, 최창수는 최창수이지, 굳이 스티브 매커리 사진 느낌이 나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면, 다큐사진을 찍는다는 어느 분은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이나 요제프 쿠델카 님 사진을 따라하려고 애쓰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며 참 딱하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살가도 님 사진이 좋으면 마음으로 담으면 됩니다. 쿠델카 님 사진이 좋을 때에도 마음으로 옮기면 돼요.

 어쩌면 습작을 하듯이 따라할 수 있습니다. 그림쟁이 고흐 님이 밀레 님 그림을 따라 그리듯이, 얼마든지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이든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이든 따라하며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고흐 님이 밀레 님 그림을 따라하며 그릴 때에는 ‘밀레 붓질이 살아나는 그림’이 아니라 ‘고흐 붓질이 춤추는 그림’입니다. 좋아하는 사람 그림결을 배우면서 고개를 숙이되, 내 마음과 넋을 알뜰히 살리면서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사진책 《지구별 사진관》을 넘기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에 실린 사진은 ‘최창수 사진인가, 아닌가?’ 하고.

 “더 나은 사진을 찍을 수 있으리란 기대감으로 도시보다는 시골을 찾았고, 큰길보다는 골목을 헤맸고, 축제를 쫓아다녔다. 사진 찍는 게 별일이 아닌 잘사는 나라보다는 사진기를 둘러멘 내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을 쏟아 주는 오지를 여행했다(18쪽).”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개를 갸웃합니다. 시골에 찾아간대서 더 낫다 싶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골목을 헤맨들 잔치마당을 찾아나선들 더 낫다 싶은 사진거리를 얻을 수 있지 않아요.

 최창수 님은 ‘오지 여행’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오지’라 하는 ‘두메’란 이 지구별 어디에도 없어요. 두메가 아닌 ‘삶터’입니다. 두메로 찾아가는 사람한테는 참 깊디깊어 멀디멀구나 하고 느낄는지 모르나, ‘두메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내 보금자리에서 내 깜냥껏 즐거이 삶을 일구니까, 이러한 두메 삶자락은 ‘외딴 곳’이 되지 않아요. 살가우며 아름다운 보금자리입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은 으레 ‘오지 여행’이라 말하지만, ‘여행길을 나서는 사람한테만 멀다’뿐, ‘여행하는 사람이 찾아간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한테는 살가우며 넉넉한 고향입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겠다는 사람이라면 ‘여행하는 내가 외딴 곳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더 따숩게 반기는 곳에서 더 따숩게 느낄 만한 사진을 찍을 노릇이 아니라, ‘여행하는 내가 살아가는 터전 둘레’에서 ‘가장 흔하며 너른 이웃’한테도 더없이 따숩게 느낄 만한 사진을 찍을 때에 비로소 사진다운 사진이 됩니다. 스티브 매커리라는 이가 찍은 사진이라면 이러한 사진이겠지요.

 “난간에 매달리고, 철로나 도로에 뛰어들고, 바닷물이나 빗속을 헤매는 등 갖은 위험한 상황에 온몸과 카메라를 내던졌다. 그러고는 내가 봐도 프로 같은 내 모습에 도취하곤 했다. 사진도 그렇게 찍으니 보답이라도 하듯 잘 나오는 것 같았다(34∼35쪽).”는 이야기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프로 같은’ 모습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이 잘 나오는’ 듯한 느낌이란 무엇인가요? 사진에는 프로와 아마란 부질없습니다. 아니, 사진뿐 아니라 글이든 연극이든 삶이든 마찬가지예요. 프로 살림꾼이 밥을 잘 할는지요. 여느 살림꾼이 한 밥은 맛이 없을는지요.

 남들이 알아주어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공모전에서 상을 받아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평론가가 손가락을 추켜세워야 좋은 사진이 아닙니다. 달력에 깃드는 사진이 되어야 좋은 사진이 아니에요.

 “나는 사진을 통해 그런 걸 이야기하고 싶었다. 인간의 행복과, 희망, 사랑, 우정. 잘사는 나라가 아닌 가난한 나라에서 피어난 것이라면 더욱 소중하고 순수할 것이었다(39쪽).” 같은 이야기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맙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피어난 사랑이기에 더욱 아름답거나 깨끗할 수 없습니다. 사랑이라면 어디에서 어떤 사랑이 되더라도 아름답거나 깨끗합니다.

 5만 원을 가진 사람이 6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할까요. 50만 원을 가진 사람이 60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한가요. 500만 원을 가진 사람이 600만 원을 가진 사람보다 더 아름답거나 깨끗하다 할 만한가요.

 가난한 나라에 가서야 비로소 사랑과 희망과 우정을 이야기하는 사진을 얻는다면, 가난하지 않다는 나라에는 사랑과 희망과 우정이 없다는 뜻이 될는지 아리송합니다. 그러면, 사랑도 희망도 우정도 없다는 가난하지 않다는 나라에서는 사람들이 무얼 하며 어떻게 살아가려나요. 사진을 찍은 최창수 님이 살아가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가난하지 않은 나라’인데, 이 가난하지 않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서는 사랑이나 희망이나 우정을 찾아볼 수 없이 슬프거나 외롭거나 쓸쓸하기만 할는지요.

 이리하여, 최창수 님은 “나는 프로 사진작가에 비해 실력, 장비, 경비, 일정, 교통수단 등 모자라는 구석이 너무도 많았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되는 건 단 한 가지, 여행과 사진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었다(59∼60쪽).” 하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래요, 어쩌면 ‘순수한 열정’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사진길을 걷는 아주 많은 사람들은 이웃 일본이나 중국으로조차 마실을 못 가곤 합니다. ‘오지 여행’이든 ‘세계 여행’이든 꿈조차 못 꾸는 프로 사진쟁이가 꽤 많습니다. 참말로 최창수 님한테 더 나은 대목은 ‘순수한 열정’이라 할 만할까요. 최창수 님한테는 ‘순수한 열정’이 있어서 사진여행을 다닐 수 있었을까요.

 “이란 이후에는 대개의 유라시아 횡단 여행자가 그러듯 터키로 향할 계획이었고, 예멘이란 동네는 지구본을 돌려 보지 않는 이상 어디에 붙어 있는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다(195쪽).” 같은 대목에서도 느끼지만, 지구별 어디에 붙었는지조차 모르는 나라로 간대서 한결 나은 사진을 얻지 않습니다. 더욱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나라라 한다면, 이 나라 사람이 무엇을 꿈꾸고 무엇을 사랑하며 무엇을 아끼는지를 알 턱이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동무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늘 스쳐 지나가면서 찍는 사진이 되는데, 스쳐 지나가면서 사람들한테 ‘웃는 모습을 보여 달라’고 바라거나 웃기는 모습을 보여주며 웃음꽃을 피울 때에 찍는 사진이란 얼마나 아름답거나 보람차거나 사랑스럽다 할 만한 사진이 될까 알쏭달쏭합니다. 무엇보다, 예멘사람은 예멘사람입니다. 최창수 님은 예멘을 몰라도 예멘사람은 예멘을 압니다. 예멘사람은 예나 이제나 예멘사람으로 살아갑니다. 예멘은 ‘두메’도 ‘먼 나라’도 ‘숨은 나라’도 아닙니다.

 “그(일본 여행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멘 남자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지 뒤통수에 대고 비웃었던 기억이 난다(201쪽).” 같은 대목에서도 새삼스레 느낍니다. 예멘사람들처럼 옷을 차려입은 사람이 웃기게 보여서 비웃는다면, 예멘사람들 차림새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안 웃겨 보일는지 궁금합니다. 예멘사람이 입는 옷을 장만해서 몸소 입는 사람하고, 예멘사람 차림새를 스쳐 지나가는 눈길로 사진으로 담는 사람하고, 어느 쪽에 예멘 삶을 조금 더 가까이 느껴 보려고 한달 수 있을까요.

 가장 나은 길이라 한다면, 돈을 주고 예멘 옷을 사 입기보다, 예멘땅 어디에서라도 일자리를 얻어 예멘사람하고 함께 일하면서 시나브로 여느 예멘사람 옷차림으로 스며들 때입니다. 지나가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멈추어 서서 옷을 입은 사람’을 비웃는다면 그야말로 걸맞지 않습니다. 예멘사람이 아닌 일본사람이니까 예멘 옷차림이 어울릴 수 없을 텐데, 어울릴 수 없는 옷차림을 당차게 하면서 거리낌없이 걸어다닐 만큼 고개를 들지 않으면서 얼마나 예멘을 사귀면서 사랑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진책을 덮습니다. 《지구별 여행자》라는 책에서 느낌을 따왔다는 《지구별 사진관》이라는 사진책을 덮습니다.

 지구별은 여행하는 곳으로 바라볼 수도 있을 테지만, 지구별은 여행하는 곳이 아닙니다. 지구별은 살아가는 곳입니다.

 지구별에서 사진관을 차릴 수도 있을 테지만, 지구별은 사진찍는 곳이 아닙니다. 지구별은 사랑하는 곳입니다.

 여러 곳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어쩌다 찾아와서 한 번 스치고 지나갈 뜨내기’한테 ‘고맙게 사진으로 찍혀’ 주는 ‘착한 사람을 만나는’ 사람입니다.

 《지구별 사진관》은 사진 장비라든지 사진결이라든지, 얼추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결을 닮으려고 애쓴 티가 물씬 납니다. 그러나, 질감이나 빛이나 사진감은 스티브 매커리 님을 따라하지만, 막상 스티브 매커리 님이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 사진을 찍던 넋을 살피면서 배우지는 못합니다.

 참말, 스티브 매커리 님은 ‘착한 사람을 착한 삶 그대로 껴안으면서 수수하게 보여주는’ 일을 사진찍기로 이루었습니다. 돋보일 까닭이 없는 사진이고, 꼭 이러한 사진결이어야 하기 때문에 스티브 매커리 님은 당신 나름대로 이러한 사진을 이루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최창수 님은 겉으로 보이는 스티브 매커리 님 사진 질감과 빛깔만 따라하고야 맙니다.

 더 예쁘게 나올 까닭이 없는 사진이고, 더 멋지게 보일 까닭이 없는 사진입니다. 더 대단하게 보여야 하는 사진이 아니요, 더 널리 팔리거나 내보일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착하게 담는 그릇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부대끼는 나날을 참다이 일구는 호미입니다. 사진은, 사람이 어깨동무하는 누리를 곱게 보듬는 손길입니다.

 더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더 많은 사진을 찍어도 좋습니다. 다만, 더 적은 곳을 돌아다니거나 더 조금 사진을 찍어도 좋아요.

 사진은 남한테 보여주려고 찍을 수 없어요. 찍은 사진을 누군가 본다고 할 테지만, 사진은 남한테 보여줄 마음으로 찍지 않아요. 누구한테 읽히려고 쓰는 글이 아니고, 누구한테 자랑하려고 그리는 그림이 아니에요.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아름다움을 붓이나 연필이나 사진기를 쥐어 살포시 옮길 뿐입니다.

 착한 사람들이 웃어 줍니다. 웃을 만하니까 웃습니다. 착한 사람들이 시무룩합니다. 시무룩할 만하니까 시무룩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이 왜 아프가니스탄일까요. 예멘은 왜 예멘이고, 이란은 왜 이란인가요. 중동과 아프리카에 넘치는 무기는 누가 만들어서 누가 팔고 누가 사서 누가 쓸까요. 왜 전쟁은 끊이지 않고, 왜 강대국과 선진국은 전쟁무기뿐 아니라 사진예술로까지 장사를 할까요. ‘프로 사진쟁이’와 ‘상업 사진쟁이’는 어떻게 다르고, ‘사진쟁이’와 ‘사진 장사꾼’은 어떻게 다를는지요.

 최창수 님이 두 번째 《지구별 사진관》을 내놓을 생각이 있다면, 두 번째 사진책을 내놓을 적에는 두 번째 책에 담긴 사진으로 찍힌 이들한테 돈을 듬뿍듬뿍 주기를 바랍니다. 모델값을 주어야지요. 초상권이 있잖아요. 가난한 나라이기 때문에 얼굴사진을 찍힌 다음에 돈을 바라지 않습니다. 적어도 이만큼은 초상권 값을 치러야 하기 때문에 내주어야 하는 돈입니다. 티벳사람만 ‘사진으로 찍힐 때에 내 넋이 빠져나간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한국사람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잘 찍은 사진이든 잘 못 찍은 사진이든, 찍히는 사람들 넋이 사진에 스며듭니다.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내준 고운 넋을 사진책으로 엮을 때에는 ‘웃는 얼굴’ 사진만으로는 아무런 이야기를 들려줄 수 없습니다. (4344.6.1.물.ㅎㄲㅅㄱ)


― 지구별 사진관 (최창수 사진·글,북하우스 펴냄,2007.10.29./12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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