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 -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권산 글.사진 / 반비 / 2012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31

 


옛집, 옛사람, 옛나무, 옛들
― 아버지의 집, 고택 송석헌과 노인 권헌조 이야기
 권산 사진·글
 반비 펴냄,20122.11.25./25000원

 


  삼백 해를 머금은 옛집이라는 ‘송석헌’을 사진과 글로 담아 보여주는 《아버지의 집》(반비,2012)을 읽습니다. 전라도 구례에서 ‘지리산닷컴’을 꾸리는 권산 님이 사진과 글로 빚은 사진책으로, 옛집에서 삶을 잇고 꾸린 권헌조라고 하는 할아버지 이야기를 살그마니 곁들입니다.


  권산 님은 “그 PD 역시 그랬다. 나는 그 ‘흔하디흔한 감나무 잎’을 쫓는, 은퇴를 앞둔 소년 같은 PD가 흥미로웠고, 그는 내 사진과 글의 어떤 대목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10쪽).” 하는 말로, 이 사진책 엮은 까닭을 밝힙니다. 방송국에서 옛집을 찍어 보여주려 하면서 권산 님하고 끈이 닿고, 권산 님은 방송에 나갈 사진을 찍으며 경상도 봉화에 있는 옛집을 찾아갔다고 해요. 그러니까, 처음부터 스스로 좋아서 찾아간 옛집은 아니요, 스스로 천천히 찾아간 옛사람이 아니며, 스스로 느긋하게 찾아가며 마주하는 옛나무나 옛들은 아닌 셈입니다. 사진을 찍는 권산 님은 자꾸 혼잣말을 합니다. 이를테면, “바람을 찍는 것도 아닌데 연사모드로 설정했다. 이른 아침 고택에서 셔터 소리는 유난했다. 하지만 노인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48쪽).” 하는. 또는, “노인의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지팡이를 쥔 저 손을 찍어야 한다고 머리는 판단했지만 나의 호흡은 너무 거칠었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55쪽).”와 같은.


  사진을 찍는 이라면 누구나 느낄는지 모르고, 또 누구나 안 느낄는지 모르는데, 어떤 모습을 찍더라도 ‘바로 오늘 이곳’일 때에 찍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 아닌 모습은 못 찍습니다. 골짜기를 흐르는 냇물을 찍더라도 스스로 골짜기 냇물 곁에 서서 ‘바로 오늘 이곳’인 줄 느껴야 찍어요. 아이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도 아이들 곁에 서서 아이들 노는 양을 가만히 바라보며 ‘바로 오늘 이곳’이 아이들 곁인 줄 느껴야 찍습니다.

 

 


  봄꽃을 사진으로 찍으려면 봄이 오기까지 기다려요. 그리고, 봄이 지나면 봄꽃은 못 찍어요. 마땅한 노릇인데, 여름에는 여름꽃을 찍지, 봄꽃을 못 찍습니다. 곧, 봄에는 ‘바로 오늘 이곳’이 봄이기에 봄꽃을 찍고, 여름에는 ‘바로 오늘 이곳’이 여름이라서 여름꽃을 찍어요. 오직 봄꽃 한 가지만 사진으로 찍고 싶다면, 여름 가을 겨울 지나 봄이 오기를 기다릴 노릇이요, 봄이 지나가면 다시 봄이 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릴 노릇입니다.


  권산 님은 경상도 봉화 옛집에 세 차례 찾아가서 사진을 담습니다. 고작 세 번뿐이라 할 수 있지만, 자그마치 세 번이라 할 수 있어요. 송석헌 권헌조 할아버지가 옛어른 무덤으로 오르는 길에 200장 안팎 사진을 찍었다 하는 만큼, 스스로 사진을 찍고 싶으면 얼마든지 사진을 찍어요. 다시 말하자면, 권산 님 스스로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나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하면, 참말 권산 님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찍을 사진보다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 사진만 찍습니다.


  어떠한 사진을 찍더라도 나쁠 구석 없으며, 더 좋을 대목 없습니다.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모습’을 찍는 사진이라면 이러한 사진대로 재미있습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즐겁게 어울리며 사진을 찍겠다면, 이러한 사진은 이러한 사진대로 재미있습니다.

 

 


  권산 님은 권헌조 할아버지 새벽마실(옛어른 무덤 찾아뵙기)을 그날 아니면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일이라 여겼지만, 권헌조 할아버지는 누가 지켜보거나 말거나 스스로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리려는 일을 누립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날이 궂든 맑든, 스스럼없이 옛어른 무덤을 찾아뵈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다시 찾아오기 어려운 모습’이 아니라, ‘권산 님 스스로 경상도 봉화 옛집에 다시 찾아와서 이 모습을 보기 어렵다’고 해야 옳습니다. 권산 님 스스로 더 마음을 기울인다면, 경상도 봉화에서 여러 날 느긋하게 머물면서 여러 날 새벽에 권헌조 할아버지하고 함께 무덤마실을 즐기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어느 날은 사진기 안 들고 무덤마실을 즐기고, 어느 날은 사진만 신나게 찍으며 무덤마실을 즐깁니다. 어느 날은 두런두런 말씀을 여쭙고 들으며 무덤마실 즐길 수 있고, 어느 날은 하루 내내 무덤 곁에서 해바라기를 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어요.

  스스로 즐기는 삶만큼 스스로 찍는 사진입니다.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에 따라 스스로 바라봅니다. 스스로 즐기는 삶이 아닐 때에는 느끼지 못하기에 바라보지 못해요. 이를테면, 시골길 천천히 걷기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은 시골길 언저리에 돋는 조그마한 풀과 꽃을 못 느끼며 자가용을 내몰아요. 시골길 천천히 걷기를 즐길 때에는 시골길 언저리 조그마한 풀과 꽃을 느끼는 한편, 시골 멧자락을 감도는 구름을 느끼고, 시골숲에서 노니는 멧새가 지저귀는 노랫가락을 느낍니다. 이렇게 느낄 때에는 이렇게 느끼는 여러 가지를 마음으로 받아들여 사진 하나로 새롭게 빚습니다. 이렇게 느끼지 못할 때에는 이런 여러 가지가 내 사진에 스며들지 못합니다.


  권산 님은 옛집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깁니다. 전라도 구례에서 겪은 ‘중앙정부 옛집 되살리기’를 떠올립니다. “국가는 집을 보호한다고 한다. 몇 억, 몇 십억 원의 예산을 고택 수리에 투여한다. 그들에게는 건축물인 집만 보일 뿐 그 집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12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중앙정부는 옛집이라 하는 ‘문화재’를 바라볼 뿐, 옛집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삶’을 바라보지 못해요. 아니, 못 느끼니 못 바라봅니다. 못 느끼기에 모르고, 모르기에 바라보지 못하며, 못 느끼고 못 바라보기에 모르면서 ‘옛집에 깃드는 사람들 삶’을 사랑하거나 아끼는 길을 찾지 못해요.

 

 


  고속도로를 왜 내야 하고, 공장과 골프장을 왜 지어야 하며, 발전소나 관광단지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공무원과 개발업자는 왜 시골자락 갈아엎어 무언가 뚝딱뚝딱 시멘트와 쇠붙이와 아스팔트와 플라스틱을 들이부으려 할까 하고 돌아볼 노릇입니다. 참말, 이들 공무원과 개발업자는 삶을 느끼지 않기에 삶을 바라보지 못할 테지요. 시골자락 시골살이를 느끼지 않으니 시골마을 시골사람을 바라보거나 사랑하거나 아끼지 못할 테지요.


  그런데, 권산 님도 경상도 봉화 옛집을 조금 더 살가이 바라보지 못합니다. 권산 님 스스로 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만 “나는 짧은 시간에 미션을 완료하는 이 일에 나의 진정성이 얼마나 투여되는 것인지 스스로 가늠하지 못한다(204쪽).” 하고 털어놓습니다.


  짧은 겨를에 바삐 찍는 사진이니 참말 권산 님 말마따나 ‘참다움(진정성)’을 제대로 못 담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사흘 동안 찍는 사진 아닌 엿새 동안 찍는 사진이라면, 또는 서른 날이나 삼백 날 찍는 사진이라면, 또는 세 해나 서른 해 찍는 사진이라면, 조금 더 참다움을 담을 만할까 궁금해요. 사흘 나들이로 찍는 사진이라면, 사흘 나들이대로 홀가분하게 즐기면서 사진을 찍으면 넉넉하리라 생각합니다. 사흘이든 이틀이든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꼭 하루 동안 찍는 사진이어도 되고, 한 시간 사이에 찍는 사진이어도 됩니다.

 


  즐겁게 찍으면 즐거움을 나눕니다. 사랑스레 찍으면 사랑스러움을 나눕니다. 사진책 《아버지의 집》에서 권산 님은 즐거움으로도 사랑스러움으로도 송석헌 옛집을 마주하지 못하는구나 싶어요. 권산 님 삶과 일이 너무 바쁘면 어때요. 바쁘다 하지만 사흘이나 짬을 내고 다른 일을 미루면서 봉화마실을 했어요. 다른 일을 젖히고 봉화마실을 하면서 권헌조 할아버지를 뵙고 권헌조 할아버지 ‘늙은 아들’도 뵈었어요. 방송에 나가야 하는 무언가 그럴듯한 그림을 못 찍으면 어때요. 그저 즐겁게 찍으면 돼요. 새벽녘에도 바라보고, 환한 낮에도 바라보며, 어두운 밤에도 바라보면 돼요. 안채에 이런저런 어수선한 것들이 있으면 어수선한 대로 바라보면 되고, 어수선한 모습 사이에 살가이 깃든 ‘예쁜 삶’과 ‘고운 삶’과 ‘따순 삶’을 느끼면 돼요.


  옛집을 보고, 옛사람을 봅니다. 옛나무를 보고, 옛들을 봅니다. 집 한 채 삼백 해 먹었다는데, 멧자락 하나 삼만 해나 삼억 해를 묵습니다. 옛나무 한 그루 삼백 해나 삼천 해 즈음 먹을 수 있고, 옛나무에서 옛나무로 이어오는 숲은 삼십만 해나 삼십억 해를 묵을 수 있어요. 오래된 들판에 한해살이풀이나 두해살이풀이 돋는다지만, 이 풀은 먼먼 옛날부터 씨앗과 씨앗으로 이어졌어요. 만해살이풀이나 억해살이풀일 수 있어요.


  삶을 바라볼 수 있기를 빌어요. ‘옛집을 지킨다는 중앙정부가 여러 억 들여 뚝딱뚝딱거리는 모습’이 달갑지 않다면, 중앙정부 일꾼 스스로 삶을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중앙정부 일꾼 누구나 삶을 즐겁게 바라볼 수 있도록, 우리부터 스스로 삶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사진을 즐겁게 찍을 수 있기를 빌어요. 멋들어진 모습으로 찍는 사진이 아닌, 즐겁게 찍는 사진으로, 즐겁게 삶을 잇고 지은 옛집 옛삶을 마주할 수 있기를 빌어요. 사진책 하나에 즐거운 웃음 물씬 드러나는 이야기 한자락 살포시 실을 수 있기를 빌어요. 4346.2.1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김일주 / 민음사 / 1996년 7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30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
―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김일주 사진
 민음사 펴냄,1996.6.25./35000원

 


  내 살가운 사진벗 가운데 한 분은 로모사진기로만 사진을 찍습니다. 한 팔을 곧게 뻗어 거리를 잰 다음 찰칵 하고 눌러 사진을 빚습니다. 한 통을 다 찍으면 사진을 값싸게 만들어 주는 데에서 필름을 찾습니다. 누리사랑방에 ‘필름 한 통 찍은 사진’을 통째로 고스란히 올립니다. 이 사진들을 바라보며 참 좋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진을 좋아하며 누리는 삶이랄까요, 사진과 벗삼으며 하루하루 즐기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여러 해째 ‘로모 사진’을 그분 누리사랑방에서 지켜보면서 오늘 문득, ‘사진은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있어 재미있다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김일주 님이 한국 문학가를 찾아다니며 찍은 ‘얼굴사진’을 그러모아 엮은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민음사,1996)을 곰곰이 들여다봅니다. 책머리에 “모쪼록 이 사진집의 발간으로 우리 문학과 문화를 사랑하는 많은 분들이 보다 더 문학과 가까워지고 우리 문학이 풍성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발간사).” 하는 말이 실립니다. 참말, 이 책머리 이야기처럼 이 사진책 하나가 조그맣게 밑거름 구실을 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은 그닥 재미있지 않습니다. 이런 시인 저런 소설가 골고루 얼굴사진 실으려 하면서, 너무 밋밋한 책이 되고 말아요. 이런 작가한테는 이런 삶이 있을 테고, 저런 작가한테는 저런 생각이 있을 텐데, 사진책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을 들여다보면, 이런 작가한테 어떤 삶이 있고 저런 작가한테 어떤 생각이 있는가 읽기 몹시 힘들어요. 여러 작가들 얼굴은 들여다볼 수 있지만, 작가마다 다른 삶과 생각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온갖 작가를 만나기 쉽지 않은 만큼, 비슷비슷한 행사 자리에서 마주치며 바지런히 찍은 사진을 실을밖에 없기도 하리라 봅니다. 그런데, 비슷비슷한 행사 자리에서 마주친다 하더라도, 작가마다 어떤 삶을 일구며 어떤 생각을 글에 녹였는가를 찬찬히 헤아린다면, 다 다른 얼굴빛 다 다른 삶빛 다 다른 넋빛을 사진으로 실을 만하지 않았을까요. 2008∼2009년에 사진잔치를 열 적에 김일주 님은 ‘8만 장’에 이르는 얼굴사진을 마흔 해에 걸쳐 찍었다고 밝혔습니다. 틈틈이 사진잔치를 여는 만큼, 8만 장 가운데 새롭게 선보이는 사진이 있을 테고, 거듭 선보이는 사진이 있겠지요. 그러면, 1996년에 처음 나온 《한국 현대 문학의 얼굴》 고침판을 한 번쯤 낼 만하지 않으랴 싶어요. 밋밋하거나 싱거운 ‘백과사전 같은 사진책’을 넘어, ‘작가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책’을 기쁘게 베풀 만하리라 생각해요. 작가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태우는 모습도, 작가마다 다른 삶과 넋으로 술과 담배를 벗삼는 모습으로 보여줄 수 있어요. 작가들이 마이크 앞에서 이야기하는 모습도, 작가마다 다른 빛과 얼로 이야기꽃 피우는 모습으로 밝힐 수 있어요. 작가 한 사람 모습을 예전과 오늘을 견주며 드러낼 수 있겠지요.


  더 많은 글작가를 만나서 더 많은 사진을 남겨야 하지 않습니다. 흔한 말로 ‘아카이브 쌓기’를 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러 사람을 즐겁게 마주하면서 즐거운 사랑을 느끼며 즐거운 사진으로 일굴 수 있으면 돼요.


  천천히 찾아서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사진에 있는 줄 되새길 수 있기를 빕니다. 그 자리에서 곧바로 찾아 즐기는 ‘바로사진(즉석사진)’도 있는데, 사진이 바로 나온다 하더라도, 종이에 그림이 뜨기까지 ‘천천히 기다리’지요. 디지털사진이라면 찍자마자 창에 짠 하고 뜨기에 ‘기다리는 맛’은 없다 할 텐데, 디지털파일로 들여다볼 때에는 어떠한 사진이든 ‘오래도록 즐기는 맛’이 없어요. 필름으로 찍거나 디지털로 찍거나, 내 집이나 일터에 붙이려 한다면 종이에 앉히잖아요. 종이에 앉히기까지 ‘잘 앉기를 바라’며 기다리고, 벽에 ‘종이로 앉힌 사진’을 붙이고 나면 한 달 한 해 열 해 스무 해 두고두고 바라보는 ‘오래도록 즐기는 사진’으로 거듭납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사진’이나 ‘얼굴사진’이란 사람 겉모습을 찍거나 얼굴 생김새를 찍는대서 이루지 못합니다. 이런 시인 저런 소설가를 더 많이 찍어야 “한국 현대 문학 얼굴”을 말하는 사진책을 엮을 수 있지 않습니다. 시인한테 어떤 삶이 있고 소설가한테 어떤 사랑이 있으며 수필가한테 어떤 꿈이 있는 한편 극작가한테 어떤 생각이 있는가를 환하게 드러내는 웃음꽃이 ‘사람들 얼굴 모습에서 피어날’ 때에 비로소 사람사진이나 얼굴사진이 됩니다. 한 사람을 찍더라도 ‘기나긴 해를 글 한 줄 쓰며 살아온 글벗 넋’을 내 넋으로 받아들여 어깨동무하는 손길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시를 쓰는 동안에는 가난도 뭐도 모두 잊어요. 오직 글 하나에 삶을 바칩니다. 글꽃이란 삶꽃입니다. 빙그레 웃거나 슬프게 울면서 시를 씁니다. 웃음꽃이 시꽃이 되고, 눈물바람이 시바람이 됩니다. 노랫가락이 싯가락이 되며, 춤사위가 싯사위가 되어요.


  가만히 돌아보면, 내가 저이를 읽은 만큼 저이 모습이 내 사진 하나로 다시 태어납니다. 내가 내 삶벗을 헤아린 만큼 내 삶벗 이야기를 내 사진 하나로 살포시 앉힙니다. 어느 작가가 내놓은 작품을 열 권쯤 읽은 뒤하고, 어느 작가가 내놓은 작품을 아직 한 권도 안 읽은 뒤하고, 내가 찍을 사진은 같지 않습니다. 어느 작가하고 도란도란 오랜 나날 이야기꽃을 피운 뒤하고, 어느 작가하고 처음 마주한 자리하고, 내가 느끼며 찍을 사진은 조금도 비슷하지 않아요.

  천천히 찍으면 됩니다. 천천히 오래도록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읽을 사람들이 천천히 오래도록 즐기기를 바란다면, 사진을 찍는 사람부터 천천히 오래도록 찍으면 됩니다. 사진을 읽을 사람들이 ‘더 많은 작가’ 얼굴을 바라보기를 바란다면, 사진을 찍는 사람도 그저 ‘더 많은 작가’를 만나려고 잰걸음 놀리면서 더 많은 작가를 찍으면 됩니다. 4346.2.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청계의 나날들 - 흐르는 삶, 퇴적된 기억
이상엽 지음 / 이른아침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29

 


사진은 어디에 있는가요
― 청계의 나날들
 이상엽 사진·글
 이른아침 펴냄,2008.6.12./9000원

 


  사진책 《청계의 나날들》(이른아침,2008)을 내놓은 이상엽 님은 “내가 처음 청계천을 가 본 것은 온 나라가 대통령의 죽음으로 어수선한 79년이었다. 당시 국민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중학교용 참고서를 싼값에 산다는 핑계로 청계천 헌책방을 어슬렁거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홀로 도심을 탐색하고 다닌 셈이다. 하지만 어디서도 개천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왜 청계천이라 하는지 몰랐다(5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서울 청계천이라는 데를 언제쯤 처음 가 보았나 돌아봅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인 1993년에 처음 가 보았지 싶습니다. 인천이라는 시골에서 태어나 살다가, 큰물이라 하는 서울은 모든 것이 크고 많고 넓고 깊다 해서, 여름방학인가 일요일에 전철을 타고 찾아가 보았지 싶어요. 퍽 조그마한 가게가 줄지어 서고, 사이사이 옷집이 많으며, 책 살피는 사람보다 옷 장만하려는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은 청계천 헌책방거리를 여러 시간 걸어다녔습니다. 청계천 헌책방거리 일꾼들 눈치를 안 보거나 안 느낀다면 몇 시간쯤 서서 책을 읽을 수 있을 테지만, 십 분이나 이십 분쯤 책읽기를 하자니 자꾸 눈치와 핀잔을 받아야 했습니다. 사지 않을 책을 자꾸 만지작거리면서 넘기는 몸짓을 달갑지 않게 여기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그저 두리번두리번하면서 이쪽 거리 끝에서 저쪽 거리 끝까지 걷기만 했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나머지, 책방이 많고 책이 많지만, 한갓지거나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눌 만하지 못하겠다고 느꼈어요.


  서울 청계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일구었을까요. 저마다 어떠한 이야기를 빚으면서 어떠한 하루를 맞이했을까요. 바깥에서 겉을 스치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느끼는 청계천이 아니라, 청계천에 터를 잡고 살아온 사람들이 느끼는 청계천은 어떤 모습일까요. 청계천 언저리에 조그마한 집이 있고, 조그마한 집에서 아이가 태어나며, 아이들이 개구지게 뛰노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청계천 사람들이 생각하는 청계천은 어떤 마을일까요.


  서울 청계천에서 살아가지 않는 사람들이 청계천이라 하는 냇물 위에 시멘트로 뚜껑을 덮습니다. 서울 청계천에서 살지 않는 사람들이 청계천이라 하는 뚜껑 덮인 냇물 위에 시멘트 고가도로를 놓습니다. 서울 청계천에서 살아갈 뜻이 없는 사람들이 청계천에 있던 시멘트 고가도로를 헐고 시멘트 뚜껑을 엽니다.


  하나하나 돌이켜보면, 어떤 도시계획이든, 계획에 따라 허물어 새로 지을 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도시계획을 세우는 일이란 없습니다. 골목동네 사람들 스스로 골목동네 새 모습을 설계하고 기획하고 꾸미고 하면서 다시 짓는 일이 없어요. 골목동네에서 살아가지 않고 골목동네에서 살아갈 뜻이 없는 사람들이 골목동네를 와장창 쓸어내어 뭔가 그럴듯하게 보인다는 모습으로 새로 지으려고 합니다. 도시 변두리나 시골에 발전소를 짓거나 골장을 짓거나 골프장을 지으려 하는 사람들, 이른바 공무원과 정치꾼과 기업꾼들은, 도시 변두리나 시골에서 살아가지 않아요. 전남 고흥에 우주기지를 세웠다지만, 이 우주기지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공무원과 정치꾼과 기업꾼은, 또 과학자나 학자나 전문가나 기자는 몇이나 될는지요.

 

 


  막개발이 이루어지는 까닭은 꼭 하나라고 느낍니다. 돈 때문에 막개발이 이루어진다고도 할 수 있지만, 돈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 그곳에서 살아가지 않고 살아갈 뜻이 없으니 막개발이 이루어지는구나 싶어요. 서울에서 난지도 곁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난지도라는 데에 쓰레기무덤을 세우는 정책을 세울까요. 이제 난지도는 쓰레기섬에서 벗어난다고 하는데, 그러면 난지도에 버리던 쓰레기는 어디로 가지고 가서 버릴까요. 새로운 쓰레기섬이 되는 곳 언저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 ‘이제 쓰레기 여기다 버릴 테니, 너희는 너희 고향을 떠나. 돈 넉넉히 줄게.’ 하고 다그쳐도 될까요.

 

  《청계의 나날들》을 내놓은 이상엽 님은 “나는 고가도로의 그늘에 가려 음침하게 성장해 온 이곳이 좋았다. 이곳은 밝고 고상한 대신 복잡하고, 남루하며, 음흉한 곳이었다(57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살아가는 사람들은 살아가니까 살아갑니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삶터이니 살아갑니다. 삶터이기에 살아가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사랑을 속삭이는 터이니 사랑터로 거듭납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사랑터에서는 천천히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사랑터는 이야기터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야기터에서는 알콩달콩 웃음꽃이 피어나고, 얼룩덜룩 눈물꽃이 피어나기도 하며, 새록새록 삶꽃이 흐드러집니다.


  바깥에서 스윽 지나치는 사람들은 이렇게도 바라보거나 저렇게도 말하겠지요. 안쪽에서 궁둥이 눌러붙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런 삶도 누리고 저런 삶도 치르겠지요. 밥을 짓고 빨래를 합니다. 아이들을 돌보고 아이들이랑 마실을 다닙니다. 옆지기하고 도란도란 생각을 나누기도 하다가는, 툭탁툭탁 다툼질도 벌이겠지요.

 

 


  사진은 무엇을 찍을까요. 사진은 언제 찍을까요. 사진은 누구를 찍을까요. 사진은 왜 찍을까요. 서울 청계천을 어슬렁거리는 사람은, 아마 어슬렁거리는 느낌을 사진으로 찍겠지요. 서울 청계천에 동무가 있어 와하하 깔깔깔 호호호 웃고 떠들며 노는 사람은, 청계천 동무하고 놀며 누린 느낌을 사진으로 찍겠지요. 서울 청계천에서 나고 자라는 동안 힘들거나 고단한 일을 오래 겪은 이는, 어린 나날부터 겪은 힘들거나 고단한 느낌을 살려 사진으로 찍겠지요. 서울 청계천에서 식구들이랑 웃음노래 부르면서 맑은 이야기 건사한 사람은, 이녁 스스로 즐겁게 지낸 삶자락 되새기면서 사진으로 찍겠지요.


  삶이 다르기에 사랑이 다르고, 사랑이 다르기에 생각이 다르며, 생각이 다른 만큼 이야기가 달라, 이야기 다른 결에 맞추어 사진이 다르게 자라납니다.


  사진은 자랍니다. 사진은 무럭무럭 자라 이야기나무가 됩니다. 이야기나무가 되는 사진은 꿈을 따스하게 품어 안습니다. 꿈을 따스하게 품어 안은 사진은 기쁘게 맞아들이는 사진이 되고, 즐겁게 바라보면서 마음을 넉넉하게 쉬도록 이끄는 사진이 됩니다.


  이상엽 님은 서울 청계천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또 다른 세련된 콘크리트로 대체된 것은 아닌지 회의하고 의심할 뿐이다(5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서울 청계천에 있던 시멘트 뚜껑이 사라졌고, 시멘트 고가도로가 사라졌어요. 그런데, 두 가지 시멘트덩이가 사라진 자리에는 새로운 시멘트덩이가 깃들었어요.


  냇물이 냇물답게 흐르는 곳이 아닌 청계천이에요. 모래와 흙과 돌이 자연답게 흐르지 못하는 청계천이에요. 서울사람이 쓰고 버리는 물은 어디로 흘러들까요. 샴푸로 머리를 감은 물, 세제로 그릇을 씻은 물, 자동차 껍데기를 씻은 물, 옷가지 빨래한 물, 밥을 지으며 쓰는 물, 몸을 씻고 난 물, 공장에서 물건 만들며 내놓는 물, 발전소에서 내놓는 열폐수, 자동차 배기가스, 살림집과 건물을 덥히며 나오는 가스, …… 이 모든 더러운 것들은 어디로 가고, 서울 청계천은 어떠한 물이 흐르는 냇물이라 할 만한가요.


  서울 청계천을 떠올리는 사진은 무엇을 담는 사진이 될까 궁금합니다. 서울 청계천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려고 사진을 찍을까 궁금합니다. 무엇보다, 서울 청계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스스로 서울 청계천 이야기를 사진과 글과 그림과 노래와 만화와 춤과 연극과 영화로 선보일 날은 언제쯤 될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어디에 있는가요. 4346.2.1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물은 답을 알고 있다 - 물이 전하는 신비한 메시지 물은 답을 알고 있다 (더난출판사) 1
에모토 마사루 지음, 홍성민 옮김 / 더난출판사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26

 


사진빛은 늘 마음속에 있다
― 물의 메시지
 에모토 마사루 사진·글,양억관 옮김
 나무심는사람 펴냄,2003.9.30.

 


  사진으로 찍어서 나눌 모습은 늘 곁에 있습니다. 어떤 시골마을 아이를 찾아나서면서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골목동네 아이를 찾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됩니다. 어떤 두멧나라 두멧시골 아이를 찾아내면서 사진을 찍지 않아도 됩니다. 이야기는 늘 내 마음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 집 아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줄 안다면, 우리 집 아이를 담은 사진으로도 넉넉히 사진빛을 이룹니다. 이웃 아이를 담은 사진으로도, 우리 마을 아이를 담은 사진으로도, 내 마음속에서 피어날 이야기를 가뿐히 나눌 수 있어요.


  내 마음속 사진빛을 느끼지 못하면, 이웃 아이를 바라보건 시골마을 아이를 마주하건 골목동네 아이를 만나건 두멧나라 두멧시골 아이를 들여다보건, 어떠한 사진도 얻지 못합니다. 이때에는 그럴듯한 작품만 빚습니다.


  그럴듯하게 빚은 모습을 놓고 사진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럴듯하게 꾸민 모습을 놓고 그림이라 말하지 않고, 글이라 말하지 않아요.


  루벤스나 피카소를 똑같이 베낄 때에도 그림이라 말하지 않아요. 이때에는 ‘복제품’이라 말합니다. 멋들어지게 그리거나 그럴듯하게 그렸으나, 그림 하나에는 이야기가 있어야 그림이지만, 이야기 없이 눈가림에 그치거든요. 눈가림은 눈가림이요, 복제품은 복제품입니다. 겉치레는 겉치레요 손재주는 손재주입니다.


  어떤 기교를 부리면 기교입니다. 기교를 부리는 시는 시가 아닌 기교입니다. 기교를 부리는 사진은 사진이 아닌 기교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가 있을 때에 비로소 시라 하고, 사진이라 하며, 문학이 되고, 노래가 돼요.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건사하지 못하면 시도 사진도 문학도 노래도 못 됩니다.


  에모토 마사루 님이 물방울 결정을 사진으로 담아 들려주는 이야기책 《물의 메시지》(나무심는사람,2003)를 읽습니다. 에모토 마사루 님은 “만일 일본민족과 한민족이 싸워야 할 사태가 벌어졌을 때 우리 자식들은 과연 어느 편을 들어야 할까요. 그때 나는 맹세했습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리라고(9쪽).”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에모토 마사루 님 사진은 에모토 마사루 님 생각을 드러냅니다. 스스로 이루고픈 일을 사진 하나로 담고, 스스로 살아내고픈 모습을 사진 하나로 빚습니다.


  “순수한 샘물 결정의 촬영은 참으로 즐거운 작업이었습니다. 아무리 사진을 찍어도 처참한 모습만 드러내는 수돗물의 경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 두근거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강물은 식물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기르며 평야로 흘러들어 상류에서 가져온 영양분을 내려놓습니다. 매일 우리 식탁에 오르는 음식의 대부분은 강물의 혜택을 받아 성장한 것입니다(15쪽).” 하는 이야기를 헤아립니다. 물마다 결정이 다르듯, 물마다 맛이 다릅니다. 물마다 결정이 다른 모양이요 생김새이며 무늬이듯, 물마다 내음이 다르고 느낌이 다르며 숨결이 달라요.


  물 한 잔 받아서 마음속 사랑을 고이 들려주면 물방울 결정은 곱게 거듭납니다. 물 한 잔 아무렇게나 다루거나 함부로 굴리면 물방울 결정은 아무렇게나 망가집니다.


  깊은 두멧시골에서 길어올린 물이어야 아름다운 결정을 이루지는 않습니다. 깊은 두멧시골에서 길어올렸다 하지만, 내 마음이 엉망이거나 어수선하다면, 물방울 결정도 그만 엉망이 되거나 어수선하게 뒤틀려요. 내 마음이 따스할 때에 우리 아이들한테 따스한 말을 건네고, 내 마음이 차가울 때에 우리 아이들한테 차가운 말을 건넵니다. 나한테서 태어난 따스한 말은 아이들을 거치고 여러 사람을 거치며 차츰 더 따스한 기운을 뽐냅니다. 나한테서 자라난 차가운 말은 아이들을 거치고 여러 사람을 거치며 자꾸 더 차가운 기운이 짙습니다. 곧, 내 마음자리에 따라 물무늬와 물빛이 바뀌어요. 물은 스스로 맑거나 곱게 빛나기도 하지만, 내 마음결에 따라 한결 맑거나 슬프게 맑을 수 있고, 한껏 곱거나 안쓰러이 고울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에모토 마사루 님은 “이 결정이 보다 크고 힘찬 모습의 결정으로 변할 수는 없을까요? 그 열쇠는 아마도 당신의 마음일 것입니다(2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물방울 결정이 오롯이 아름답지 못한 까닭은 바로 내 마음 때문이거든요. 물방울 결정이 오롯이 아름답다면 바로 내 마음 때문이에요. 내 사진이 오롯이 아름답지 못하면, 사진 솜씨가 모자라거나 사진 장비가 뒤떨어지기 때문이 아니에요. 내 마음이 모자라거나 내 사랑이 뒤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내 마음을 따스히 살찌울 수 있은 다음 사진기를 쥘 노릇입니다. 나는 바로 내 사랑부터 곱게 여미면서 사진기를 붙잡을 노릇입니다.


  마음이 따스하지 않으면서 겉보기에 그럴듯하게 꾸민다면, 작품으로서는 남다르다 싶을 수 있겠지만, 아름다움이나 즐거움이나 해맑음을 나누지 못해요. 마음이 따스하면서 사진길을 걸어가면, 처음에는 사진 솜씨가 모자라거나 어설플 수 있지만, 솜씨란 차츰 익숙해지면서 거듭납니다. 처음에는 투박하거나 거친 사진이라 하지만, 따스하거나 보드라운 마음이 깃들 때에는, 사진읽기를 즐기는 사람들 모두 활짝 웃을 수 있어요.


  에모토 마사루 님은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음식이나 식물 속에 포함된 물이 음악이나 말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사람이 음악을 듣고 즐거워하고 힘을 되찾는다면, 사람 몸속의 물이 변화하기 때문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던 것입니다(60쪽).” 하고도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내가 찍은 사진이 새롭게 보인다거나 예쁘게 보인다면, 왜 새롭게 보이거나 예쁘게 보일까요. 내가 찍은 사진이 틀에 박혀 보이거나 따분해 보인다면, 왜 틀에 박혀 보이거나 따분해 보일까요.

  우리는 어떤 짝꿍하고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가요. 우리는 어떤 짝꿍하고 어떤 사랑을 속삭이고 싶은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나라 어떤 누리를 물려주고 싶은가요.


  짐승을 귀엽게 여기며 보살피는 사람은 온갖 사랑을 듬뿍 나누어 줍니다. 짐승한테 막말을 일삼거나 막짓을 퍼붓지 않아요. 사진을 어여삐 여기며 보듬는 사람은 온갖 사랑을 듬뿍 담아 사진을 찍거나 읽습니다. 서툰 사진쟁이나 풋내기 사진쟁이 작품이라서 깎아내린다든지 얕잡지 않습니다. 삶을 삶대로 바라보고, 사랑을 사랑대로 마주하며, 사진을 사진대로 즐깁니다.


  에모토 마사루 님은 물방울 결정을 사진으로 찍으며, 참으로 깊은 한 가지를 스스로 묻습니다. “우리 눈으로 봐도 참 아름다운 사진인데요, 과연 물도 우리와 같은 느낌이었을까요(105쪽)?”


  자, 다 함께 생각해 보아요. 내가 바라보며 아름답다 느끼는 사진을 내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도 아름답다 느끼며 바라볼까요. 내가 아름답다 느끼는 풀잎을 내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도 아름답게 맞아들일까요. 내가 아름답다 느끼는 햇살이나 무지개나 구름이나 별빛을 내 이웃이나 동무나 살붙이도 아름답게 마주할까요.


  사진빛은 늘 마음속에 있습니다. 사랑빛은 언제나 마음밭에 있습니다. 삶빛은 한결같이 마음자리에 있습니다. 마음을 느낄 수 있으면 사진을 느낍니다. 마음을 아낄 수 있으면 사진을 아낍니다. 마음을 북돋울 수 있으면 사진을 북돋웁니다. 마음을 포근히 얼싸안으면 사진을 포근히 얼싸안습니다. 마음이 삶이요 삶이 마음입니다. 삶은 사진이고 사진은 삶입니다. 곧, 마음이 사진이요 사진이 마음입니다. 4346.2.1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에 수놓은 구름이야기 - 지리산 + 사진
임소혁 글.사진 / 대원사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28

 


시를 쓰며 사진을 찍는다
― 하늘에 수놓은 구름 이야기
 임소혁 사진·글
 대원사 펴냄,2006.4.15./18000원

 


  시를 쓰는 사람은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사진을 찍는 사람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느낍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시를 쓸 수 있다고 느낍니다.


  거꾸로, 시를 못 쓰는 사람은 사진을 못 찍고, 사진을 못 찍는 사람은 시를 못 쓰는구나 싶어요. 시를 못 쓰는 사람은 그림을 못 그리며, 그림을 못 그리는 사람은 시를 못 쓰는구나 싶습니다.


  누군가는 ‘난 말이야, 사진 찍는 솜씨 뛰어나다구. 그렇지만 난 시를 안 쓰는걸?’ 하고 물을는지 모릅니다. 또 누군가는 ‘나는 말예요, 시 쓰는 솜씨 빼어나요. 그러나 난 사진을 안 찍는걸?’ 하고 따질는지 모릅니다. 또 누군가는 ‘나는 말입니다, 그림 그리는 솜씨 훌륭해요. 그런데 난 사진을 안 하는걸?’ 하고 샐쭉거릴는지 몰라요.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시를 안 쓰고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요. 사진을 안 찍으면서 시를 쓸 수 있을까요. 시를 안 쓰는데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요. 그림을 안 그리는데 시를 쓸 수 있을까요.


  이오덕 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고 느낍니다. 예수님 말씀이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모두 하늘(하느님)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얘기를 하는 나도 갓난쟁이로 태어나서 아기 적을 지나 어린이로 살아온 나날이 있었기에, 오늘처럼 어른으로 살아갑니다. 곧, 나는 나부터 시인이었고, 나는 나부터 하늘(하느님)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굳이 꾸미면서 말할 까닭이 없습니다. 느끼는 가슴 그대로 말을 합니다. 즐겁다 느끼면 즐겁다 말하는 아이들이요, 슬프다 느끼면 슬프다 말하는 아이들입니다. 시란, 사진이란, 그림이란 무엇일까요. 즐거움을 즐거움대로 빚을 때에 시요 사진이며 그림입니다. 즐거움을 억누르며 슬픔으로 그리는 사람도 있을 테고, 슬픔을 감추며 즐거운 듯 그리는 사람도 있을 수 있어요. 그러나, 즐거움을 억누르면 무슨 재미일까요. 슬픔을 감추면 서로 이웃이나 동무로 지낼 까닭은 무엇일까요.


  옛사람은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빛을 느꼈습니다. 옛사람은 흙을 만지며 흙기운을 헤아렸습니다. 옛사람을 풀(나물과 곡식)을 뜯어서 먹으며 풀맛을 느꼈습니다. 옛사람은 일을 하거나 놀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느끼는 그대로 가슴을 스스로 적셨어요. 바라보는 그대로 눈빛을 스스로 밝혔어요.


  임소혁 님이 빚은 사진책 《하늘에 수놓은 구름 이야기》(대원사,2006)를 읽으며 다시금 생각합니다. 임소혁 님은 “새벽녘, 계절이 지나가는 지리산 왕시루봉 언덕에서 수천 겹 전설바다가 흘러가는 동녘을 바라본다. 매일같이 새롭게 자연을 담아내는 하늘에서 구름은 새벽바람을 따라 골짜기를 건너가며 아침을 알리는 대지의 언어로 피어난다. 때로는 조각달에 새기는 샛별의 언어로, 때로는 드높은 하늘을 황홀하게 물들이는 감미로운 노랫말로 말하려 한다(6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임소혁 님이 사진과 함께 적바림한 글은 ‘시’이고 ‘노래’입니다. 이를테면 ‘시노래’입니다.


  구름을 찍은 임소혁 님은 구름을 바라보면서 ‘시’를 느끼기에, 사진을 시처럼 찍습니다. 임소혁 님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시’를 쓰듯 ‘그림’을 그리겠지요. 임소혁 님이 사진도 그림도 안 하는 여느 흙일꾼이라면, ‘시’를 쓰듯 흙을 일구거나 만지거나 돌보는 하루를 누릴 테고요.


  사진쟁이 아닌 여느 어버이로서 이녁 아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하루를 돌아봅니다. 어느 어버이라 하더라도 이녁 아이를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하느님 눈빛’이 되고 ‘하느님 마음’이 되어요. 어느 사진쟁이라 하더라도 까르르 웃고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을 때에는 ‘사진쟁이 이름값’을 훌훌 벗어던지며 아이들하고 하나되어 놉니다.

 

 


  임소혁 님은 “태고의 어둠 같은 동녘에서 날이 밝아온다. 자연 그대로의 무성한 숲에서 내뿜는 생기가 하늘에 닿아 양떼구름도 찬란하게 피어났다. 태고의 산에서 해가 뜨고 질 때는 아마도 온 세상을 오색영롱한 빛으로 물들였으리라(56쪽).” 하고도 이야기합니다. 지리산 깊은 골짝에 깃들어 사진을 찍는 동안 숲내음에 젖어듭니다. 하늘내음을 맡고 하늘빛으로 물듭니다. 하늘소리를 듣고 하늘결로 숨을 쉽니다.


  햇살은 구름으로도 드리우고 멧등성이 나무한테도 드리웁니다. 햇살은 들꽃과 들풀한테도 드리우며, 벼와 배추와 무한테도 드리웁니다. 햇살은 고속도로 자동차물결에도 드리우고, 도시 아파트숲에도 드리웁니다. 그리고, 햇살은 사진기 손에 쥔 아저씨 머리카락에도 드리우며, 햇살은 내 마음속으로도 드리웁니다.


  사진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진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사진은 어떤 이야기를 담을까요. 사진은 누구하고 나누는 속삭임일까요. 사진은 왜 즐길 만한가요. 사람은 왜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그림을 그리다가는 사진을 찍고 춤을 추면서 흐드러지는 잔치마당을 열까요. 사람은 왜 말을 섞고 눈빛을 마주치다가는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게 이 길을 걸어갈까요.


  사진을 찍는 사람들 가슴에는 어떤 싹이 틀 때에 아름다울까요. 사진을 읽는 사람들 마음에는 어떤 빛이 떠오를 때에 어여쁠까요.

 


  임소혁 님은 “이 땅의 사람들은 일부러 욀 것도 없이, 생긴 모양대로 부르기 쉬운 마을 이름이나 땅 이름을 짓고 살아왔다. 천수답은 별똥지기, 조그마한 논은 궁둥이배미, 징검돌이 놓인 곳은 노딧거리, 산나물 나는 곳은 취밭등, 들꽃이 많은 곳은 꽃밭등이라 했고, 가는 비 묻어오는 골짜기를 우골, 안개골이라고 불렀다(9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요. 노루귀라는 풀이름은 누가 어떻게 왜 지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즐겁게 노루귀라는 낱말을 혀끝에 올리며 빙그레 웃습니다. 솜다리라는 풀이름을 누가 언제 뭣 하러 지었는지 알 턱이 없지만, 오늘을 숨쉬는 우리들은 기쁘게 솜다리라는 낱말을 혓바닥에 올리며 상긋상긋 웃어요.


  벼라는 이름, 밀이라는 이름, 박이라는 이름, 삼태기라는 이름, 짚이라는 이름, 밥이라는 이름, 주걱이라는 이름, 솥이라는 이름, 나무라는 이름, 물이라는 이름, 이 모든 이름에 어떤 숨결이 깃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 어버이를 낳은 어버이를 낳고 또 또 어버이를 낳은 옛사람은 어떤 숨결로 이 같은 이름을 짓고 부르며 한삶을 누렸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진을 즐기는 오늘 우리들은 어떤 이름을 사진마다 붙일까 헤아려 봅니다. 사진을 빚는 오늘 우리들은 어떤 시를 지어 사진 하나와 함께 누리는가 곱씹어 봅니다.


  내 목숨을 되돌아보며 시를 써요. 내 목숨을 되새기며 이야기를 나눠요. 내 목숨을 깨달으며 사진을 찍어요. 나이 서른이든 쉰이든 일흔이든 아흔이든, 우리는 모두 시인으로 태어났고, 하늘빛으로 이 땅에 온 줄 느낄 수 있기를 빕니다. 4346.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