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안녕 아기동물 사진 그림책 1
유키 모이라 글, 후쿠다 유키히로 사진, 이선아 옮김 / 웅진주니어 / 2001년 12월
평점 :
절판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19

 


아이들과 숲을 생각하기
― 엄마, 안녕
 후쿠다 유키히로 사진,유키 모이라 글,이선아 옮김
 웅진주니어 펴냄,2001.12.10./7500원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는 숲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곳에 숲이 없으면, 사람으로서 목숨은 건사할 수 있어도 사람답게 살림을 꾸리지 못합니다. 탄광마을이 시커멓고, 크고작은 도시마다 매캐한 바람 가득한 까닭은 숲이 없기 때문입니다. 숲이 없는 터에는 다툼과 싸움이 판칩니다. 숲이 없는 곳에는 돈과 권력이 떠돕니다. 숲이 없는 자리에는 아름다운 이야기 깃들지 못합니다.


  서양 여러 나라는 숲 없는 도시를 짓다가 스스로 숨막히는 줄 깨닫고는, 도시 한복판에 널따랗게 ‘숲 비슷한 공원’을 따로 마련합니다. 도시 한복판이라 하면 땅값 몹시 비싸다 할 텐데, 땅값 비싸다 할 데에 건물이나 가게 아닌 ‘나무와 풀이 푸르게 자라는 공원’을 마련하지요.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도시가 도시로서 굴러가지 못하는 줄 뼛속 깊이 느꼈기 때문입니다.


  한국 도시에는 공원이 거의 없습니다. 한국 도시에 있는 공원에서는 흙땅 밟기조차 어렵습니다. 흙땅을 밟지 못하면 공원이랄 수조차 없지만, 그나마 풀이나 나무 자라는 손바닥만 한 공원조차 제대로 없는 한국 도시입니다. 서울 어디에, 부산 어디에, 대구나 인천 어디에, 대전이나 광주 어디에 ‘숲내음 그윽한 쉼터’가 도시 한복판에 있을까요. 새로 커지는 울산이나 거제나 용인이나 일산이나 분당 같은 도시 어느 한켠에 ‘숲바람 따사로운 쉼터’가 있는가요.


  나무그늘 누릴 숲터가 있어야 삶터라 할 만합니다. 들꽃 만날 숲자리 있어야 보금자리가 될 만합니다. 들새 둥지를 트도록 숲을 돌보고 아끼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 살아가는 동네에서도 서로 어깨동무를 할 만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도시 한복판 공원’은커녕 ‘도시 변두리 공원’조차 바라기 어려워요. ‘도시를 벗어난 시골’에서도 정갈한 숲과 멧골과 들판을 바라기 힘들어요. 도시 바깥쪽에 ‘도시에 들이지 않는 위험·위해시설’을 잔뜩 둡니다. 도시 언저리 시골은 쓰레기밭으로 바뀝니다. 높고낮은 멧자락마다 우람한 송전탑 섭니다. 아름다운 들판을 가로질러 고속도로와 고속철도 지나갑니다. 깨끗해야 할 바닷가에 공장과 발전소를 자꾸 지으면서, 바다와 갯벌이 끝없이 망가집니다. 더구나, 뭍에서 흘러나오는 쓰레기를 걸러내는 갯벌을 자꾸 메워 개발을 한다 외치는 바람에, 이 나라 사람들은 스스로 맑은 물과 바람과 볕하고 나날이 멀어집니다.


  왜 이 나라 어른들은 스스로 숲을 생각하지 못할까요. 왜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하고 함께 숲을 헤아리지 않을까요. 왜 이 나라 어른들은 스스로 숲을 누리려 하지 못할까요. 왜 이 나라 어른들은 아이들이 숲을 누리게끔 숲을 돌보고 지키며 물려줄 생각을 안 품을까요.

 

 

 


  후쿠다 유키히로 님 사진하고 유키 모이라 님 글이 어우러진 사진책 《엄마, 안녕》(웅진주니어,2001)을 들여다봅니다. ‘하프물범’이라 하는 ‘북극 바다짐승’ 삶자락을 살그마니 보여줍니다. 하프물범이 새끼를 낳아 어떻게 돌보고, 새끼 하프물범은 어미 하프물범한테서 어떤 사랑을 어떻게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가를 알뜰히 보여줍니다. 아름다운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찍은 후쿠다 유키히로 님은 “얼음 위는 영하 20도로 매우 춥지만, 아기물범들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때나마 추위도 잊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혹독하게 추운 곳에도 하프물범이라는 정겨운 동물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날마다 놀라곤 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지구온난화의 영향 때문인지, 하프물범들이 새끼를 기르는 장소인 바다 위의 얼음장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얼음장이 없는 바다에서는 안전하게 새끼를 기를 수 없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몹시 추운 곳에서 씩씩하게 살아가는 하프물범을 바라보면서, 사진쟁이 한 사람도 씩씩하게 사진을 찍었다고 해요. 북극 바다짐승을 만나며 아름다움을 누렸기에, 이 아름다움을 사진 한 장으로 담아 지구별 어린 벗님들과 나누려고 한 뜻을 잘 알겠습니다.


  바다짐승은 바다가 깨끗해야 삶을 즐거이 누립니다. 들짐승은 들이 깨끗해야 삶을 아름다이 누립니다. 멧짐승은 멧자락이 깨끗해야 삶을 사랑스레 누립니다.


  사람은 삶터가 어떠할 때에 삶을 누릴까요. 우리 삶은 얼마나 즐거운가요. 우리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우리 삶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요. 이웃한 다른 나라는 살짝 잊고, 바로 이 나라 삶을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어른들은 스스로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하루를 빛내는지 궁금합니다. 한국에서 일자리 찾아 돈을 벌어 아이들 먹여살리는 어른들은 스스로 얼마나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삶을 헤아리며 누리는지 궁금합니다. 한국 어른들은 한국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삶터 누리면서 어떤 이야기꽃 길어올리는 즐거운 삶 누리도록 마음을 기울이는지 궁금합니다.


  먼 앞날, 곧 아이들 앞날을 헤아려 고속도로 잔뜩 깔고 새 고속도로 늘리면 즐거운 삶 될까요? 먼 뒷날, 곧 아이들 뒷날을 생각해 숲을 지키고 돌보면서, 도시 한복판이든 시골 어디이든, 푸르게 빛나는 맑은 숲터 가꾸면서 사랑과 꿈을 물려줄 마음이 있는지요? 아이들과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찾으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이야기하며, 무엇을 보살피고, 무엇을 사랑할 때에, 삶이 삶다울 수 있는지 하루 빨리 깨닫기를 빕니다. 4346.4.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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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뱅클럽
그레그 마리노비치, 주앙 실바 지음, 김성민 옮김 / 월간사진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사진책 <뱅뱅클럽> 느낌글 2부입니다. 이 글은 느낌글 2부이니 앞서 올린 1부를 먼저 읽고 이 글을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원고지로 100장 가까이 되는 글입니다. 차근차근 읽어 주시기를 바라며, 사진에 깃든 사랑을 잘 헤아려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54


― 뱅뱅클럽
 그레그 마리노비치·주앙 실바 글,김성민 옮김
 월간사진 펴냄,2013.3.11./17000원

 


  ㄷ. 케빈 카터, 바라보는 눈길


  젊은 사진가 케빈 카터 님은 1960년 9월 13일에 태어나 1994년 7월 28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케빈 카터 님은 1994년에 퓰리처상을 받으며 사진가로서는 아주 높은 자리에 올라섰다 할 만하지만, 퓰리처상 받은 사진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지 못한 나머지 스스로 목숨을 끊어요.


  지구별 아픈 사람들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은 다른 사진가 로버트 카파 님은 1913년에 태어나 1954년에 베트남에서 지뢰를 밟고 죽습니다. 전쟁터에서 사진을 찍던 또 다른 사진가 사와다 교이치 님은 1936년에 태어나 1970년에 베트남에서 총알에 맞아 죽습니다.


  전쟁터 사진을 찍는 이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슬프게 죽지는 않습니다. 죽은 사람보다 살아남은 사람이 더 많고,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다른 사진길을 꾸준하게 걸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이 몸을 사렸기에 살아남고, 몸을 안 사렸기에 살아남지 못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전쟁터에서는 군인이나 민간인을 가리지 않아요. 총알이 빗발치고 지뢰가 터지며 탱크와 전투기가 폭탄과 미사일 퍼붓는 곳에서는 목숨줄이 따로 없습니다. 한쪽은 삶이라면 한쪽은 죽음입니다. 한쪽은 빛이라면 한쪽은 어둠입니다. 늘 두 가지가 함께 움직입니다.


  케빈 카터 님이나 로버트 카파 님이나 사와다 교이치 님이 죽음길 아닌 삶길을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었으면, 앞으로 어떤 사진을 우리한테 베풀 수 있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이들은 목숨을 내려놓거나 빼앗겨야 했을까요. 아니, 이들 목숨이 아스라이 사라지기 앞서, 이 지구별에서 전쟁과 다툼과 학살과 굶주림이 먼저 사라져야 하지 않을까요. 이들 사진을 말하기 앞서, 이들이 사진으로 말하려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이들이 사진으로 말하려던 이야기에 나오듯, 지구별에 아름다움과 평화와 사랑이 감돌도록 우리들이 온힘 기울일 노릇 아닐까요.


.. 젊은 사진가인 케빈 카터는 80년대 중반에 신문사에서 처음 일할 때 알게 된 사이다. 이때, 케빈은 공개처형이라고 알려진 네클리스를 처음 목격하게 된다. 네클리스는 휘발유로 채워진 타이어를 목에 걸게 하고, 불을 붙여 살해하는 야만적인 처형 방법을 지칭하는 이 지역 속어다. 케빈은 마키 스코사나의 네클리스 처형을 목격하고, 사진을 촬영했는데, 처형 이유는 단지 그녀가 경찰관의 애인이었다는 것뿐이었다 … 케빈은 이 충격적인 사건에 대해 수년 후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하는 짓을 보고 놀랐고, 이런 현장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 한 번 더 놀랐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현장에서 촬영한 사진들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진들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그리고 그때 내가 했던 일들이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충격적인 현장에서 목격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은 꼭 형편없는 일이라고만 치부할 수는 없다.” ..  (67, 68쪽)

 

 

 

 


  아름다움을 사진으로 담으려 애쓰는 이들은 언제나 사진으로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늘 아름다움을 생각하고, 삶에서 아름다움을 누리면서, 이웃들과 아름다움을 사랑스레 나눕니다.


  슬픔과 죽음을 사진으로 담으려 힘쓰는 이들은 언제나 사진으로 슬픔과 죽음을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늘 슬픔과 죽음을 생각하고, 삶에서 슬픔과 죽음을 스스로 겪거나 부대끼는 한편, 이웃들한테 슬픔과 죽음을 퍼뜨립니다. 그래, 가까운 이웃이나 동무한테 슬픔과 죽음을 퍼뜨릴 수 있다고 스스로 느껴, 이웃이나 동무한테 아뭇소리 안 하면서 사진만 찍곤 하지요.


  스스로 외롭습니다. 스스로 혼자 됩니다. 사진은 누구나 혼자 서서 찍지만, 슬픔과 죽음이 벌어지는 곳으로 뛰어들어 사진을 찍는 이들은 더 외롭고 더 혼자 되어 사진기를 쥡니다.


  인종차별과 전쟁과 굶주림과 학대가 노상 벌어지는 터전에서 살아가며 사진을 찍어야 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을 생각하며 무엇을 마음에 담을까요. 사진가 아닌 여느 사람이라면 사진으로 찍을 일도 없겠지만, 끔찍한 싸움터에 뛰어들 일조차 없고, 끔찍하게 죽은 사람들 주검을 들여다볼 일 또한 없습니다.


  사람들이 사진가를 부릅니다. 이봐, 저기 저 끔찍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알려야 하지 않나, 하고. 사진가는 사람들한테, 이보게, 그게 그렇게 끔찍해서 사진으로 찍어 알려야 한다면 자네가 찍게, 하고 대꾸하지 못합니다. 사진가는 사람들한테, 그렇군요, 그렇게 끔찍한 모습이니 제가 들여다보고 사진으로 알뜰히 담아 널리 알려야겠군요, 하고 대꾸할 수밖에 없습니다.


  곧, 사람들 스스로 들여다보고 싶지 않은 모습을 사진가는 노상 들여다봅니다. 사람들 스스로 구역질 난다 싶은 끔찍한 죽음을 사진가는 늘 마주합니다. 사람들 스스로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가까이하지 않는 곳으로 사진가는 언제나 뛰어듭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찍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슬픔과 죽음이 벌어지는 곳’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그러니까 슬픔도 죽음도 두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슬픔과 죽음 냄새가 진저리쳐지도록 퍼지는 곳하고는 멀리 떨어진 채, 사진만 봅니다.


.. 백인들만 사는 지역에 들어오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던 흑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이 빈번하게 출동했고, 어린 케빈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자행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소위 자유주의적 가풍을 가진 우리 가정은 결코 인종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우리 모두는 모든 인간을 포함한 이웃을 사랑하라는 크리스천 방식으로 양육되었다. 하지만 난 이제 어떻게 나의 부모 세대들이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명백한 죄와 싸우는 것에 대해 그토록 방관적일 수 있었는지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 케빈은 언젠가 한 기사에서 전쟁을 취재하면서 우리가 공유했던 생각들을 피력했다. “나는 내가 보았던 것들로 인해 상심에 쌓이고, 악몽을 경험한다. 내 가족을 포함한 ‘일반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나 자신을 느낀다.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고 나는 황량한 먼지 속의 피와 죽음으로 얼룩진 어두운 이미지들을 가진 어두운 곳으로 침잠한다.” ..  (68∼69, 88∼89쪽)

 

 

 

 


  사진가 케빈 카터 님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굶주리는 사람들을 수두룩하게 사진으로 찍습니다. 케빈 카터 님은 사진벗 주앙 실바 님과 함께 수단에 갔습니다. 이 둘은 보름 남짓 기다린 끝에 수단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겨우 탈 수 있었고, 아주 짧은 동안 살짝 지나가며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두 사람을 수단으로 보내어 사진을 찍도록 일을 시킨 단체는 ‘이 두 사람이 굶주린 사람들을 사진으로 잘 담아서 유럽과 미국과 일본 같은 나라에서 수단으로 구호 물자와 구호 돈을 많이 보내도록 해 주기’를 바랐어요.


  사진가 두 사람은 ‘지구별 이웃들이 굶주린 수단 모습에 눈을 번쩍 뜨도록 이끌’ 만한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여러 날이나 여러 주 머물 수 없었습니다. 더 오래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아니었습니다. 바쁘게 마을을 훑어야 했고, 달리듯이 이 사람 저 사람 바라보며 ‘더 슬프고 훨씬 괴롭게 보이는 모습’을 찾아야 했습니다. 한손으로 도울 수도 없고, 주머니에서 돈 몇 닢 꺼내어 내밀 수도 없으며, 말 한 마디로도 따순 이야기 건넬 수도 없었습니다.


  주앙 실바 님은 그럭저럭 가난하고 슬픈 사람들 모습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케빈 카터 님은 그야말로 사람들 눈을 번쩍 뜨도록 이끌 만한 사진을 한 장 찍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탄 두 사람은 ‘사진가로서 제대로 일을 했느냐 못했느냐’를 헤아립니다.


.. 눈물은 케빈 자신의 고통뿐만 아니라, 그가 촬영했던 모든 사람들의 고통을 상징했다 … 주앙은 닭냄새가 진동하는 방에서 더러운 마루 위에 사지를 쫙 벌리고 누워 있는 깡마른 어린아이를 보았다. 케빈도 와서 함께 무릎을 꿇고 사진을 찍었다. 그러고는 고개를 들고 넋이 나간 표정으로 주앙을 바라보았다. 전날 밤의 온갖 행복한 기대감은 사라지고, 전쟁이 낳은 기아의 현장을 목도하고 있었다 … 주앙이 방금 촬영했던 아이 같았지만 근처에 콘도르는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방금 콘도르를 쫓아냈어!” 케빈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너무 빨리 말하느라 횡설수설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목에 걸고 있던 초록색 스카프로 눈을 계속 문지르고 있었다 ..  (169, 170, 173쪽)


  사진가 두 사람을 수단으로 보낸 구호단체 사람들은 사진가 두 사람이 찍은 사진을 바라보면서 좋아합니다. 왜냐하면, 구호단체가 더 널리 알려질 만한 사진을, 지구별 곳곳에서 당신들한테 구호품과 돈을 많이 보내 주도록 이끌 만한 사진을 얻었거든요. 구호단체 사람들은 케빈 카터 님 사진을 바라보면서 ‘사진에 나온 가시내가 그 뒤 어떻게 되었느냐’ 하고 묻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에 나온 가시내’는 바로 구호단체 사람들이 건사하며 보듬을 아이입니다. 사진가더러 ‘그 아이 도우라’는 뜻으로 구호단체에서 두 사람을 불러들이지 않았어요. 구호단체는 사진가 두 사람더러 ‘사진을 찍으라’고 수단까지 불렀어요. 사진가 두 사람은 스스로 경비를 마련해서 수단으로 사진을 찍으러 갔어요. 구호단체는 사진가 두 사람한테 경비를 대주지 못해요. 구호단체는 사진가 두 사람이 사진을 더 잘 찍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뿐입니다. 사진가 두 사람은 구호단체를 널리 알려야 합니다. 수단에서 아이와 어른 모두 얼마나 고단하고 굶주리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케빈 카터 님 사진을 받은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구호단체한테 ‘사진에 나온 가시내’ 뒷이야기를 묻지 않고, 사진 찍은 사람한테 뒷이야기를 묻습니다. 너무 마땅하지만, 사진 찍은 사람이 뒷이야기를 알 턱 없습니다.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헛다리를 짚으며 사진가를 나무랍니다.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수단에 있는 구호단체에 전화를 먼저 걸어 ‘사진에 나온 가시내’ 뒷이야기를 여쭈어야 했습니다. 전화를 걸어 알 수 없다면, ‘뉴욕타임즈 기자’ 한 사람을 수단으로 보내어, 그 아이 뒷이야기를 알아보도록 해야 했습니다. 또는, 케빈 카터 님한테 경비를 모두 대주면서 수단으로 보내 주어, ‘사진에 나온 가시내’가 그 뒤에 어떻게 지내는가 하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으라고 부탁해야 했습니다. 아무래도, ‘뉴욕타임즈에서 그 사진을 널리 팔아 잡지를 알리고 돈을 벌었다’면, 다른 기자보다 케빈 카터 님을 수단으로 보냈어야 올바릅니다. 이번에는 케빈 카터 님이 오래도록 수단에 머물 수 있게끔 해 주어야 했습니다.


  케빈 카터 님이 ‘콘도르가 지켜보는 가시내’ 사진을 찍을 적에는, 스스로 경비를 마련하느라 며칠 머물 수조차 없었습니다. 이무렵 케빈 카터 님은 생활비조차 없던 형편이었어요.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는 사진가 한 사람한테 여섯 달 동안 취재를 하도록 일을 맡깁니다. 뉴욕타임즈 잡지도 케빈 카터 님한테 여섯 달 즈음 수단에 머물면서 ‘굶주리는 사람들’ 이야기를 한결 깊이 파고들도록 일을 맡겼어야 올바릅니다.


  그러나,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모든 일을 그르칩니다. 가장 나쁜 쪽으로 일을 꾀합니다. 사진 한 장 헐값에 사들여서 쓰면서, 사진가를 비판하는 차가운 한 마디를 달아 매체에 사진을 싣습니다.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케빈 카터 님 사진에 “사진가는 콘도르를 쫓아낸 후에 그녀가 기력을 회복해 다시 급식소로 갔다고 했다. 아이가 급식소에 안전하게 도착했는지는 알지 못한다(177쪽).” 하고 적바림합니다.


.. 사진이 출간되고 난 뒤 사람들이 끊임없이 전화를 걸어왔던 일을 낸시 리는 회상한다. 모두들 이 소녀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 했다. 그래서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인) 그녀는 케빈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 보았다. 그는 그 아이가 식량 배급소로 갔다고 말했다. “그녀(아이)를 도왔나요?”, “아뇨, 아이는 일어나서 급식소로 갔어요. 우린 무척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내가 볼 수 있었다구요.”, “그럼,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거네요. 아이를 돕지 않았군요?”, “아뇨. 하지만 아이가 간 것을 알고 있어요. 내가 보았다구요.” ..  (175∼176쪽)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사진부장’이자 ‘잡지 편집자’로서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아이가 급식소에 안전하게 갔는지’를 알아보는 몫은 사진가 아닌 잡지 편집자한테 있어요. 스스로 제대로 알아보지 않고 잡지를 내놓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제대로 알아보고서 잡지를 내놓았어도 되고, 뒷이야기는 더 취재해서 싣겠다고 붙였어야 옳습니다. 왜냐하면 케빈 카터 님 사진은 케빈 카터 님만 찍었어요. 다른 어느 누구도 찍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은 한 가지를 또렷하게 알아야 합니다.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콘도르가 지켜보는 가시내’ 뒷이야기보다 다른 대목을 더 궁금하게 여겼고, 다른 대목을 갈무리하는 데에 훨씬 힘을 기울였습니다. “낸시 리는 자신이 콘도르 사진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전율을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당시 〈뉴욕타임즈〉는 여전히 사진을 한 장씩 뽑아낼 수 있는 구식 전송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사진을 본 그녀는 부이르스키에게 〈뉴욕타임즈〉에서 이 사진을 출판하기 전까지 케빈이 다른 어떤 출판물에도 이 사진을 팔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175쪽).”


  뉴욕타임즈 사진부장은 이녁이 몸담은 사진잡지 잇속 때문에 젊은 사진가 한 사람을 벼랑으로 내몰았습니다. 그런데, 일을 여기에서 뚝 그쳤으면 케빈 카터 님이 ‘콘도르가 지켜보는 가시내’ 사진 하나 때문에 시달릴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케빈 카터 님은 젊고, 앞으로 수많은 사진을 찍을 사람이며, 참말 수없이 놀라운 다른 사진을 꾸준하게 찍는 사람이거든요.


  안타깝지만, 뉴욕타임즈는 두 번째 일을 저지릅니다. 바로, 이 사진을 퓰리처상 후보로 올려, 퓰리처상을 받게 합니다. “〈뉴욕타임즈〉의 사진 편집장은 케빈의 콘도르 사진을 퓰리처상에 제출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케빈은 그전에 한 번도 그들과 일해 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단 한 번 사진을 구입해 게재한 외부의 프리랜서보다는 내부 스태프 사진기자들의 사진을 제출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퓰리처는 저널리즘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이 아니던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신문인 〈뉴욕타임즈〉는 기사로는 수 차례 퓰리처상을 수상한 적이 있지만, 사진으로는 한 번도 이 상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추천 시간이 임박해지자, 이들은 결국 케빈의 사진을 선택했다. 자신들이 그해에 출간한 사진들 가운데 케빈의 사진이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이미지라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210쪽).”


  케빈 카터 님은 ‘퓰리처상’이 있는지 없는지 이름조차 몰랐습니다. 아마 ‘뉴욕타임즈’라는 신문이 있는지 없는지 이름조차 몰랐으리라 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과 내전과 학살을 사진으로 찍으며 남아프리카공화국 매체에 사진을 싣고, 더러 AP 같은 데에 사진을 팔 뿐이었으니까요. 그러니, 미국에서 케빈 카터 님 사진을 한 장 사서 어느 매체에 실었다 한들, 그 뒤에 어떤 일이 미국에서 벌어지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뉴욕타임즈가 매체에 사진 한 번 싣고 끝냈으면 그야말로 모든 일은 끝이었어요. 그러나 퓰리처상을 받게 하고, 퓰리처상이라는 권위를 앞세워 ‘사진 한 장에 매기는 윤리와 도덕 잣대로 손가락질하는 모든 비판’을 뉴욕타임즈 아닌 케빈 카터가 받도록 했어요.


.. 사진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원조단체들에서 기금 모금을 위해 이 사진을 포스터에 사용했다. 또한 전 세계의 수많은 신문들과 잡지들도 이 사진을 게재했고, 독자들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내왔다. 수단에 있는 많은 원조 기구들에 후원금이 답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 정작 케빈은 도덕적 딜레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사진을 촬영하고 난 뒤에 아이를 들어서 100미터 거리밖에 안 되는 급식소에 데려다 주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이 그를 괴롭혔다. 수단의 어려운 사정을 세상에 알리는 기자로서의 사명은 완수되었고, 그 이상의 일까지 해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라이프라인 수단이라는 단체가 케빈과 주앙을 수단에 데리고 간 이유가 아이들을 보살피라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두 사람의 역할은 최악의 기아와 전쟁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  (213, 214쪽)


  왜 뉴욕타임즈 사진부장과 편집자 들은 퓰리처상 받은 다음에라도 케빈 카터 님을 수단으로 보내어 뒷이야기를 사진으로 담도록 일을 안 맡겼을까요? 왜 비평가들은 이 대목을 못 짚거나 안 짚을까요? 왜 사람들은 사진가 한 사람한테 모든 화살을 퍼부을까요?

 


  케빈 카터 님이 아니었어도 ‘굶주리는 수단 어린이’를 사진으로 찍을 사람은 많았겠지요. 케빈 카터 님이 아니어도 ‘굶주리는 수단 어린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아 알린 사람은 많겠지요.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케빈 카터 님처럼 사람들 가슴을 찡하게 울리면서 움직이지 못했어요.


  도덕이니 윤리이니 하고 따지기 앞서, 아니 도덕이나 윤리를 따질 때조차도, 케빈 카터 님 사진처럼 사람들 가슴을 울리거나 아프게 하지 못했어요. 도덕이나 윤리를 따지려 한다면, 먼저 사진 한 장이 가슴을 울리거나 아프게 해야 합니다. 가슴을 울리거나 아프게 하는 사진이기에, 사람들은 이 사진 한 장을 놓고 도덕이나 윤리를 따질 수 있습니다.

 

 

 


.. 라디오에서 총격 소식을 듣고 케빈이 토고자로 돌아왔다. 응급실 입구 밖에서 개리가 케빈의 목을 껴안고 켄이 죽었다고 토해내듯이 말했다. 케빈은 곧장 앞을 바라보았다. 그의 가장 절친한 친구가 방금 죽은 것이다 … 켄의 죽음은 케빈과 주앙에게 커다란 상처를 가져왔고, 이들은 이날 취하기로 작정하고 술을 마셨다. 그러나 술은 고통을 잠재우는 대신에 주앙의 분노에 불을 붙였다 … 주앙은 죄책감에 빠졌고, 마음이 상했다. “어떻게 죽은 친구를 촬영할 수 있었지? 진정으로 내 영혼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그는 케빈의 팔에 안겨 울었다. 케빈은 그를 꼭 안고서 말했다. “적어도 너는 그곳에 있었잖아.” … 단 2주 사이에 그(케빈)는 음주운전으로 체포되고, 여자 친구에게 차이고, 직장을 잃었다가, 퓰리처상을 받아 다시 일을 되찾았고, 그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었다 … 그러나 케빈은 일거리 이상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총알에 맞았어야 하는 사람은 켄이 아니라 바로 나였어야 했어.’라고 말하고 다닌다는 것을 들었다 ..  (234, 244, 245∼246, 249쪽)


  케빈 카터 님은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사랑하던 짝꿍이랑 낳은 딸아이조차 거의 만나지 못하는 나날을 보낸 케빈 카터 님은 언제나 죽음과 슬픔 수렁에서 괴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사진을 찍느라, 이 죽음과 슬픔 수렁 이야기를 ‘가까운 살붙이’한테조차 들려주지 못합니다. 온몸 갈기갈기 찢겨 죽은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었다 하는 이야기를 저녁밥 먹는 자리에서 꺼내면, 아마 다들 밥맛이 사라지겠지요. 식구들이 케빈 카터 님더러 ‘오늘 무슨 사진 찍었어요?’ 하고 묻는 일이 없겠지요. 너무도 뻔한 대답과 너무도 끔찍하고 슬픈 대답을 할 일이 뻔하니, 아예 안 묻겠지요.


  케빈 카터 님은 스스로 마음에 담기 버거운 짐을 아무한테도 털어놓지 못한 채 열 몇 해째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동안 사랑하던 짝꿍한테서 버림받고, 딸아이를 만나지 못하는 법에 걸리고, 당신은 언제나처럼 죽음과 슬픔 수렁이라는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어수선하고 어지러운 나날이라 하더라도, 케빈 카터 님은 그동안 목숨을 안 끊고 버티었어요. 왜 그러느냐 하면, ‘뱅뱅클럽’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사진벗이 있었어요. 이 뱅뱅클럽 사진벗 가운데 케빈 카터 님은 켄 오스터브룩이라는 사진벗을 친형처럼 삼아 마음앓이를 나누며 새로 기운을 북돋았다고 해요.


  그런데 바로 켄 오스터브룩 님이 ‘평화유지군이 쏜 총알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다른 사진벗 하나도 ‘평화유지군이 쏜 총알에 맞아 죽을 뻔했지만 살아남았’는데 아주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집니다.


.. 뉴욕 여행에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케빈에게 사진을 촬영했을 때의 감정과 행동에 대해 신랄한 질문들을 던지기 시작했다. 일본의 한 텔레비전 방송 스태프는 내내 케빈을 쫓아다녔고, 기자들로 인해 케빈은 화가 나기 시작했다 … 케빈의 윤리와 그의 인간애에 관한 질문들이 빈번하게 제기되면서 케빈의 압박도 쌓여 갔다 … 케빈은 카메라를 들 때마다 콘도르 사진 수준의 작품을 찍어야만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고, 사진가의 상투성이 그를 괴롭혔다. 그는 콘도르 사진을 가리켜 많은 사진가들이 요행수로 얻어낸 ‘앵무새’ 사진이라고 헐뜯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그 사진에는 운이 따랐다. 그러나 케빈은 그 사진을 촬영하기 위해 자비를 들여 수단에 갔고, 촬영할 수 있는 적절한 장소와 시간에 그 자리에 있었다 … 그가 과거에 했던 모든 일들이 이 사진 한 장으로 싹 지워져버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퓰리처상과 함께 그에게 쏟아진 많은 기대들이 케빈으로 하여금 사진을 촬영하는 것에 대해 두려움을 갖도록 만든 것이다. 그는 마비 상태였다 ..  (261, 265, 267쪽)

 


  사진은 삶입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은 이녁 삶에 따라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녁 삶에 따라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은 사랑입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은 이녁 사랑을 밑거름 삼아 사진을 읽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녁 사랑을 발판 삼아 사진을 찍습니다.

 

 


  케빈 카터 님 사진을 읽는 사람들은 어떤 삶자리에서 어떤 사랑으로 사진을 읽을까요. 케빈 카터 님은 어떤 삶자리에서 어떤 사랑으로 사진을 찍었을까요.


  케빈 카터 님이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았다면, 당신 삶자리가 스산하게 무너지고 당신 사랑이 가뭇없이 지워졌다는 뜻 아닐는지요. 당신한테 사진을 찍는 힘이 되는 삶자리가 와르르 무너진데다가, 당신으로서 사진을 붙잡는 밑바탕이 될 사랑이 아스라이 멀어지고 말았다는 뜻 아닐는지요.

 

 

 


.. 그 이후 누구도 살아 있는 케빈을 다시 보지 못했다 … 주앙은 자신이 아직 꿈을 꾸는지 전화기를 흔들어댔다 … 고향에 돌아와서 우리는 그가 왜 자살을 했는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우리에게 모두 얘기하던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왜 그런 일을 벌인 것일까? 그의 유서조차도 아무런 단서를 제공하지 못했다. 두서없이 적힌 유서는 후회와 분노, 좌절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 33살의 나이에 마침내 자신의 실패에 대한 자각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난 언제나 모든 것들을 가질 수 있었지만, 나란 놈은 그 모든 것을 날려 버리고 말았다.” … 케빈이 자살하던 날 아침에는 케빈의 수단 사진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적어서 보낸 일본 학생들의 편지다발이 그의 부모 집에 도착했다. 편지는 도쿄의 아라카와구에 있는 다이로꾸 니폰 초등학교 학생들이 보낸 것이었다. 장례식장에서 편지의 일부가 낭독되었다. “제가 만약 이런 험악한 상황에 처한다면, 난 당신의 사진을 기억하고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거예요.” “저는 이제까지 참 이기적인 사람이었어요.” “이 사진을 본 이후로 저는 어떤 것이든지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난 사진을 찍지 않고, 이 소녀에게 물을 가져다주었을 거예요.” “난 떨리는 손으로 한 장의 사진을 찍었을 거예요.” ..  (277, 278, 279, 280, 281쪽)


  케빈 카터 님 사진을 읽은 아이들 가운데 사진가 길 걷는 아이가 있습니다. 케빈 카터 님 사진을 읽은 아이들 가운데 스스로 기운을 차려 씩씩하게 삶 일구는 아이가 있습니다. 케빈 카터 님 사진을 읽은 아이들 가운데 이웃사랑에 눈을 뜬 아이가 있습니다.


  케빈 카터 님은 왜 ‘콘도르가 지켜보는 가시내’ 사진을 찍었을까요.


  이야기책 《뱅뱅클럽》을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우리 집 두 아이 새근새근 재운 깊은 밤에 조용히 생각을 기울입니다. 어느덧 새벽동이 천천히 틉니다. 창호종이 바른 문살로 새벽빛살 살며시 스밉니다. 처마 밑 제비집에서 잠을 깨고 일어날 제비들이 곧 째째째째 노래하며 먹이 찾으러 들마실 갈 때입니다. 나는 밤새 아이들 잠자리 이불을 열 차례나 스무 차례 여밉니다. 아이들은 자는 동안 자꾸자꾸 이불을 걷어찹니다. 아이들과 살아오는 내내 어느 하루도 깊이 잠든 적 없습니다. 아이들 갓난쟁이였을 적에는 오줌기저귀 갈랴 밤잠 못 이루고, 아이들 제법 큰 뒤로는 밤새 이불깃 여미느라 밤잠 못 이룹니다. 그래도 오늘 하루 씩씩하게 새로 맞이하며 살아가는 힘이라면, 바로 아이들입니다. 달콤하게 자면서 꿈나라 누비는 아이들 맑은 얼굴 바라보며 기운을 차립니다.


  케빈 카터 님은 수단에서, 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당신 곁에 있는 수많은 아이들 맑은 얼굴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굶주리는 아이들이건, 어른들 싸움터에서 애꿎게 총알에 맞거나 폭탄에 맞은 아이들이건, 한결같이 티없는 얼굴 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언제나 마음속에 아이들 얼굴 떠올리면서, 이 아이들 모두 평화롭고 사랑스레 누릴 지구별을 꿈꾸며 사진 한 장 찍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쟁을 멈추고, 돈놀이를 멈추며, 서로 어깨동무하는 품앗이와 두레를 바라는 이야기 한 자락 사진에 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진에 나란히 찍힌 콘도르’는 가녀린 가시내를 노려보려고 그 자리에 찾아들지 않았으리라 느껴요. 바로 우리들을 지켜보려고 그 자리로 찾아들었으리라 느껴요. 가녀린 가시내가 쓰러지기를 기다리는 콘도르 아닌, 우리들 스스로 지구별에 평화와 사랑 북돋우도록 힘쓸 때까지 기다리는 콘도르라고 느껴요. 가슴에 손을 얹고 함께 생각해요. 자, 우리는 사진 한 장에서 무엇을 읽어야 할까요. 자, 우리는 사진 한 장을 읽고 우리 삶을 어떻게 일구며 보살펴야 할까요. 자, 우리는 우리 이웃을 어떤 눈길로 바라보고 어떤 손길로 마주하며 어떤 마음길로 사랑해야 할까요. 4346.4.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느낌글 2부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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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4-03 1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아침. 소중한 책과 소중한 느낌글 1, 2부 차분한 마음으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모든 것이 무릇 다 그렇겠지만 사진은 삶의 이야기겠지요.
우리가 어떤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살아야 하는지, 다시금 생각하고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저도 함께살기님의 글과 사진 읽으며, 나날이 참삶의 기쁨에 젖어들어 즐거운 삶 기꺼이 누릴 수 있어 정말 감사드립니다.^^

숲노래 2013-04-03 10:56   좋아요 0 | URL
두 번째 느낌글 맨 위에 올린 사진이 바로 '총격전 벌어지는 곳에서 사진 찍는 케빈 카터' 님 모습이에요. 옆에 숨은 흑인 얼굴빛에 감도는 두려움, 또 그 옆에서 앞에 자기를 지켜 줄 엄폐물 없이 사진기 들고 사진 찍는 케빈 카터 얼굴에서 드러나는 '죽고 죽이는 모습 찍는 어지러움과 슬픔 뒤섞인 넋 나간 빛'... 이것이 바로 분쟁지역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 모습입니다. 저 얼굴빛이 고작 서른 안팎 나이에 찍힌 모습이에요...

사진뿐 아니라 글도 모두 저마다 꾸리는 삶빛이 고스란히 드러나는구나 싶어요. 저도 appletreeje 님이 띄워 주는 싯노래 읽으며 마음을 새롭게 다스립니다~
 
뱅뱅클럽
그레그 마리노비치, 주앙 실바 지음, 김성민 옮김 / 월간사진출판사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사진책 <뱅뱅클럽> 느낌글 1부입니다. 이 느낌글은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립니다. 원고지로 100장 가까이 되는 글입니다. 차근차근 읽어 주시기를 바라며, 1부와 2부 차례대로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54

 


사진이란, 눈물 한 방울
― 뱅뱅클럽
 그레그 마리노비치·주앙 실바 글,김성민 옮김
 월간사진 펴냄,2013.3.11./17000원

 


  ㄱ. 사진을 찍는다, 눈물 한 방울로


  인종차별을 꾀하던 백인 권력자들이 일으킨 피비린내 철철 넘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를 몰아내려고 애쓴 사람들 삶과 죽음을 사진으로 담아내며 목숨을 바친 젊은 네 사람 있습니다. 이 가운데 둘은 죽었고, 둘은 살았습니다. 한 사람은 평화유지군이 쏜 총알에 맞아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살가운 벗이 죽은 일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다가 사진 하나를 놓고 온갖 곳에서 들쑤시는 화살 같은 말에 스스로 채찍질하다가 목숨을 끊습니다. 죽을 고비에서 숱하게 살아남고, 먼저 죽은 사진벗이 간 죽음길을 따라가려고 하다가도 삶을 놓지 않은 두 사람이 사진기 아닌 연필 들어 글을 씁니다. 살아남은 두 사람조차 죽음길로 가고 나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들 네 사람이 젊은과 목숨을 바치면서 지키려고 하던 뜻이 무엇인가를 아무도 모를 테니까요. 비평가나 평론가나 지식인이나 기자나 권력자가 정치꾼이 아무렇게나 들이대는 뭇칼질 같은 글이 아닌, 사랑으로 쓰다듬고 어루만질 사진이야기 하나 헤아리며 《뱅뱅클럽》(월간사진,2013)이라는 책을 써요.


  이 책은 2000년에 비로소 나왔고, 한국에는 2013년 3월에 나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사진을 찍다가 죽은 두 사람은 케빈 카터(스스로 죽음) 님과 켄 오스터브룩(총알 맞아 죽음) 님입니다. 씩씩하게 살아남아 글을 남긴 두 사람은 그레그 마리노비치 님과 주앙 실바 님입니다. 책을 쓴 두 사람은 죽은 두 사람 입과 마음을 빌어서, 곧 네 사람 목소리를 하나로 모두어 밝힙니다. “이곳에 내가 만들어야 할 사진이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는 일이다(226쪽).” 하고.


.. 언제 셔터를 누르고, 언제 사진가로서 활동을 잠시 멈춰야 하는가 … 남자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비린내와 살인자들의 땀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에서도, 나는 사진가로서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 충격을 받은 만큼 내가 촬영한 사진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어떤 말도 내가 촬영한 충격적이고 잔인한 사진들만큼 오늘 오후에 벌어진 엄청난 사건을 잘 드러낼 수는 없을 것이다 … 나는 너무도 충격적인 사건을 목격했고, 그 이유로 남아프리카를 떠날 수밖에 없는 엄청난 고통 앞에 있었지만, 그 누구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 지금까지 총에 맞지 않았다는 안전에 대한 환상은, 내가 총에 맞는 순간, 내가 한없이 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며 모두 날아가 버렸다 ..  (11, 37, 39, 60, 227쪽)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은 눈물 한 방울입니다. 슬픈 나라에서 태어나 슬픈 사람을 이웃으로 사귀면서 슬픈 이야기를 슬픈 사진으로 담습니다. 글을 써서는 아무도 믿지 않을 뿐더러, 글을 써도 제대로 싣는 매체가 없습니다. 이들은 사진을 찍습니다. 끔찍한 죽음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더러운 인종차별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진으로 찍어 남아프리카공화국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과 지구별 여러 나라로 사진을 보내어 보여주어야 비로소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어떤 일 벌어지는가’를 알릴 수 있습니다. 권력자와 정치꾼은 ‘남아프리카공화국 속모습이나 참모습’을 한 차례도 안 밝히고 안 보여줍니다.


  더욱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조차 바로 옆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살피지 못합니다. 흑인 스스로도 백인 스스로도 참모습을 알아보려 하지 않습니다. 제도권 사회나 독재정권 사회가 억누르는 흐름에 몸을 맡길 뿐입니다.


  피를 흘리며 죽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불에 타서 죽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가슴이 벌렁벌렁 뜁니다. 눈에서는 눈물이 흐릅니다. 사진을 찍는 나를 누군가 도끼로 찍거나 몽둥이로 두들겨팰 수 있습니다. 사진 찍는 네 사람은 칼에 찔릴 뻔한 아슬아슬한 고비를 수두룩하게 넘기고, 총알이 빗발치는 한복판에서 이리 달리고 저리 구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이들 사진기자, 그러니까 사진쟁이 네 사람이 있거든요. 왜나하면, 바로 그곳에 슬픈 남아프리카공화국 속모습이 있거든요.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인종차별 끝내고 싶은 꿈을 품은 젊은 네 사람이 있거든요. 왜냐하면, 바로 그곳에 백인 권력자한테 휘둘리며 흑인끼리 서로 다투고 괴롭히는 뼈아픈 생채기가 있거든요.

 


.. 유복했던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었던 사람들의 삶을 탐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는 사진을 배웠다 …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손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그저 사진만 찍고 있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아직도 떨쳐낼 수 없었다 … 내 가슴은 뛰기 시작했고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이 사건의 참여자 입장과 사건을 냉철하게 관찰해야 하는 저널리스트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자문했다 … 나중에 BBC카메라맨인 사이먼이 내게 말했다. “하느님 맙소사, 그 친구가 당신 찌르려고 했던 것 봤어?” 바로 그 결정적인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나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 감각들은 깨어 있지 않았다. 기계적으로 촬영한 사진들은 나중에 나의 기억들이 회상하지 못했던 사건들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  (29, 48, 49, 51쪽)


  사진을 찍고 또 찍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사진을 찍다가, 어느새 눈물이 마릅니다. 눈물 흘릴 틈이 없습니다. 또, 눈물 적시며 찍은 사진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사진에 깃든 깊은 이야기’까지 헤아리지 못합니다. 또, 사진을 찍은 사람이 들려주는 엄청난 이야기를 차분한 마음으로 끝까지 들어 줄 만한 ‘여느 사람’이 없습니다.


  죽음과 분쟁과 전쟁과 차별을 사진으로 찍는 젊은 네 사람은 맨마음으로 사진을 못 찍습니다. 술을 마시고 마약을 합니다. 맨마음으로는 죽음구렁텅이에서 살아나오거나 헤쳐나오지 못합니다. 맨마음으로는 총알 쏟아지는 전쟁터에서 아무렇지 않게 사진 못 찍습니다.


  ‘여느 사람’은 총소리를 모릅니다. 총알 한 방 쏘는 소리가 어떠한가를 아는 여느 사람은 없어요. 군대를 가야 비로소 총소리를 듣는달 수 있는데, 자동소총이나 기관소총 방아쇠를 풀고 드드드드 갈기는 소리를 들은 적 있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방아쇠 풀어 드드드드 수십 수백 발 갈기면, 둘레에 있는 사람은 귀청이 찢어집니다. 총싸움이 그치고 몇 시간이 지나도 귀울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귀가 멍할 뿐 아니라 머리 또한 멍하지요. 이런 전쟁터에서 스무 살부터 서른 살까지 푸른 젊은 날 사진을 찍은 ‘뱅뱅클럽’ 네 사람 마음자리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인종차별 일삼는 백인 경찰과 군인은 아예 장갑차를 끌고 다니면서 흑인거주지역에서 아무렇게나 총질을 합니다. 누가 죽거나 말거나 ‘흑인 한 마리 죽은’ 셈 치며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백인 권력자한테서 돈과 작은 권력 물려받은 흑인 권력자들이 서로 내전을 벌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배신자라 헐뜯으면서 몽뚱이와 칼과 도끼로 머리를 내려찍고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다가는 몸에 기름을 들이붓고는, 불에 태워서 아주 끝장을 봅니다. ‘뱅뱅클럽’ 네 사람은 이런 죽음터 죽음판 죽음잔치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말이 나오지 않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속살을 훤히 드러내어, 제발 이 죽음판 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난 망원렌즈가 달린 카메라를 잡았다. 인간 횃불이 된 남자는 점차 속도를 줄이고, 마침내 바닥에 웅크린 자세로 고꾸라졌다. 초점을 맞춘 후 나는 타오르는 남자의 바로 뒤에 이른아침 해가 떠 있음을 알아차렸다. 카메라의 노출계가 작동하지 않아 나는 조리개를 완전 개방한 f5.6에 맞추었다 … 그러나 몬티와 파스는 린자예 차발랄라의 살해 사진이 반드시 사람들에게 알려져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사진이 너무 강하거나 점잖지 못하거나 혹은 외설스럽다고 해서 겸열하는 것은 독자들의 알 권리를 무시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 나는 저널리스트이지 경찰 고발자가 아니다 … 주앙은 두려웠고, 혼란스리웠다. 이것은 그가 상상해 오던 종류의 전쟁 사진이 결코 아니었다. 정말 이상한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지만, 그는 뒤로 물러서면서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사진을 찍어 나갔다 ..  (53, 58, 59, 76쪽)


  사진을 찍는 마음은 무엇일까요.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진 한 장 읽는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하나요. ‘이 사진은 거짓이야? 꾸몄어?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어디에서 벌어져?’ 하고 생각하나요.


  한국에서 멀디먼 남아프리카공화국 아닌, 바로 한국을 생각해 봐요. 한국에서 독재정권 사라진 지 얼마 안 되었어요. 1960년 3월 어느 날 일을 되새겨요. 마산 앞바다에 어린 학생 주검이 떠올랐지요. 눈에 최루탄 박힌 끔찍한 모습으로 주검 하나 떠올랐지요. 이 모습을 누군가 사진으로 찍을밖에 없어요. 에그, 안타깝구나, 하면서도 얼른 최루탄부터 빼내지 못해요. 사진부터 찍을밖에 없어요. 어떤 독재정권이, 어떤 경찰과 군인이, 어떤 못난 놈들이, 어떤 나쁜 짓을 일삼는가를 또렷이 보여줄 사진부터 찍을밖에 없어요.


  윤리와 도덕을 살피거나 재기 앞서 사진을 찍어요. 명분과 이름을 따지거나 내세우기 앞서 사진을 찍어요.


  아, 삶이거든요. 아, 눈물이거든요. 아, 아픔이거든요. 아, 사랑이거든요.


.. 살인 행위가 벌어지는 내내 주앙은 계속 사진 촬영을 했고, 완전히 몰입해서 자신이 촬영하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 만약 주앙이 폭력 사태가 벌어지고 있던 마을에서 겪었던 일들을 비비안에게 시시콜콜 얘기한다면 그것 또한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 상처는 깨끗한 모양이었다. ‘저렇게 작은 구멍이 어떻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었을까’라고 주앙은 생각했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주앙은 카메라를 들어서 사진을 촬영했다. 화가 나고 놀란 간호사가 그를 제지하자, 주앙은 폭발했다. “내가 이 나라에서 죽은 사람들 전부를 촬영할 수 있는 것처럼, 내 친구(죽은 사진작가 켄) 사진도 찍을 수 있는 거요!” 주앙은 등을 돌리고 나가 버렸다 ..  (127, 153, 187쪽)


  1987년 어느 날 서울 어느 대학교 앞을 그립니다. 전투경찰이 대학생 얼굴을 겨누어 쏜 최루탄을 맞은 누군가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며 숨통 끊어지려 합니다. 이 모습 본 사진기자가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기자 눈에서도 피와 눈물이 흐르지만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기 냅다 집어던지고 피를 닦으려고, 병원차를 부르려고, 업거나 어깨를 함께 짊어지며 병원으로 데려가려고, 이렇게 생각하거나 살필 겨를 없어요. 곤봉 휘두르는 전투경찰 막을 틈 없어요. 전투경찰 휘두르는 곤봉에 얻어맞는 앳된 대학생들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밖에 없어요.


  1980년 5월 광주에서, 특수부대 요원들이 길거리 여느 사람들을 두들겨패거나 총질을 해대며 죽이는 모습을 건물 한쪽에 숨어 사진을 찍습니다. 참말 숨어서 사진을 찍습니다. 머리카락 끄트머리라도 들켰다가는 사진기자조차 쥐도 새도 모르게 죽겠지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서 어느 한갓진 시골 두멧자락 멧자락에 처박힐 수 있습니다. 두려움에 이를 갈고 슬픔에 떨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머리통 아주 짓이겨진 주검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옆에는 유족들이 울부짖습니다. 주검을 사진으로 찍고, 울부짖는 유족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진기자는 사진을 찍을밖에 달리 다른 길이 없습니다. 사진기자는 사진을 찍어 다른 사람들한테 슬픔과 아픔과 독재정권과 전쟁과 눈물을 보여주는 길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 우리가 언제 개입하고, 언제 사진을 계속 촬영해도 되는지에 대한 고정된 규칙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주앙과 내가 1992년에 충격적인 기아를 취재하기 위해 소말리아로 갔을 때,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보았지만, 한 명도 구조한 적은 없었다. 보디가드들에게 굶주린 사람들을 데려다가 우리의 픽업트럭 뒤에 태우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우리가 직접 도움의 손길을 내민 적은 없었다. 우리는 눈앞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았고, 그들의 사진을 촬영했다. 자신의 아이가 무릎 위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기아에 허덕이는 아버지가 지켜보는 사진을 촬영하면서 무기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저 아버지가 딸의 눈을 감겨 주는 것을 렌즈를 통해 목격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  (215쪽)


  사진을 왜 찍느냐고 묻지 말아요. 사진을 어디에 쓰느냐고 묻지 말아요. 묻고 싶으면, 왜 사느냐, 하고 스스로 물어요. 물을 이야기는 오직 하나예요. 삶은 무엇이고 사람은 무엇이며 사랑은 무엇인가, 이 하나만 물을 만해요.

 


  ㄴ. 남아프리카공화국, 스스로 일구는 삶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 이야기는 학교에서도 세계사 수업을 하며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중·고등학교 다니던 1988∼1993년 사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인종차별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얼마나 끔찍하며 어느 만큼 아프며 슬픈가 하는 대목을 짚은 교사는 없습니다. 시험 문제에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낱말 적어 넣는 ‘정답’만 가르칠 뿐,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서 사람들이 겪는 숱한 이야기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요즈음 학교에서도 인종차별을 가르칠까요. 요즈음 학교에서는 인종차별을 어떻게 가르칠까요. 한국에는 인종차별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삼십만 훌쩍 넘는다는 이주노동자는 한겨레하고 살빛이 다르고 말이 다르며 문화가 다른데, 이들 이주노동자를 한겨레는 어떤 눈길로 바라보는가요. 이주노동자와 한겨레 노동자는 똑같은 권리를 누릴까요. 이주노동자와 한겨레 노동자는 ‘일하는 시간과 받는 일삯’이 같을까요.


  이주노동자한테 푸대접을 한다면, 한겨레 노동자 사이에서도 ‘학력에 따라’ 대접이 달라집니다. 고졸 노동자와 대졸 노동자 일삯이 달라요. 중졸 노동자와 국졸 노동자, 또 무학력 노동자는 일삯이 사뭇 벌어집니다. 한국에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처럼 총질과 싸움질이 마구 벌어지지 않는다지만, 언제 어디에서나 인종차별이 버젓이 있어요.


  돌이켜보면, 예나 이제나 학교에서 ‘한국 사회 차별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가르친 적 없다고 느낍니다. 학교에서는 ‘대학 입시 문제 가르치기’에 온힘을 기울이지, 누가 차별을 받거나 누가 따돌림을 받거나 누가 고단한 삶 짊어지는가를 밝히거나 푸는 길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요. 곧잘 지식으로 이러한 대목을 다룬다 하더라도, 함께 어깨동무하면서 문제풀이에 나서지 않아요.


.. 국제사회로부터 남아공이 고립되고 백인으로 구성된 소수 정부에게 아파르트헤이트를 철회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남아프리카 백인들은 자신들이 창출해낸 낙원에거 안락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방어태세를 갖추고 엄청난 돈을 자급자곡 시스템에 쏟아부었고, 유순한 유권자들에게 엄청난 물질적 보상을 해 주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 진정한 의미의 화폐 유통은 소웨토 내에서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소웨토 주민들은 백인 정부에게 세금과 수입의 형태로 수많은 돈을 지불함으로써 자신들을 억누르는 세력을 후원하고 있는 셈이 돼 버린 것이다 ..  (22, 106쪽)


  인종차별은 인종차별로 그치지 않습니다. 계급차별과 신분차별과 학력차별과 지역차별과 남녀차별로 차근차근 이어집니다. 왜냐하면, 차별이니까요. 거꾸로, 사랑도 차근차근 이어져요. 다른 인종을 사랑하든, 다른 계급과 신분과 학력과 지역과 남녀를 사랑하든, 사랑 또한 차근차근 이어집니다.


  서로를 아끼는 마음도 이어지고, 서로를 해코지하는 몸짓도 이어집니다. 서로를 따사롭게 보듬는 손길이나 살가이 바라보는 눈길도 이어지고, 서로를 등지거나 따돌리는 몸짓 또한 이어져요.


  어떠한 삶을 바라는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떠한 길 걸어가면서 삶을 누릴 때에 아름다운가 하고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연필을 들기 앞서, 붓을 들기 앞서, 사진기를 들기 앞서, 나 스스로 어느 곳에서 어떠한 넋 되어 어떠한 삶을 꽃피우려 하는가를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참 마땅한 일이지만, 작품을 만들려고 쓰는 글이 아닙니다. 삶을 밝히려고 쓰는 글입니다. 예술을 하려고 그리는 그림이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면서 그리는 그림입니다. 다큐멘터리 작업 때문에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서로 어깨동무하는 꿈을 노래하는 하루를 즐기는 사진입니다.


.. 우리는 이러한 잔혹한 살인행위를 멈추게 하기 위해서는 죽은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고, 매일 죽어나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야 한다고 확신했다 … 우리가 없었다면 대학살에 관한 유일한 정보원은 경찰과 정당들의 대변인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 진상조사위원회가 발족되었지만, 이들이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경찰이 자신들의 개입 증거를 모두 없애버렸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러나 보이파통의 사람들은 진실을 알고 있었다 … 결국 피하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경찰들이 조준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  (95, 120, 125쪽)

 


  서울에 깃을 두며 서울에서 일어나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 이야기를 다루는 신문이 무척 많습니다. 이들은 서울에서 일어나는 정치·경제·사회 이야기 다루는 데에도 벅차, 서울 바깥으로는 눈길을 거의 못 돌립니다. 서울 곁 인천 이야기조차 못 다루고, 대전이나 대구나 부산이나 광주 이야기도 거의 못 다룹니다. 무언가 서울보다 커다란 사건이나 사고가 터질 때라야 비로소 취재기자를 보냅니다. 이리하여, 서울에 깃을 둔 숱한 매체는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골골샅샅 이야기를 두루 보듬지 못하고, 한국을 벗어난 이웃나라 이야기를 차분히 들여다보지 못해요.


  우리 식구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살아갑니다. 고흥에서 나오는 종이신문을 가끔 들여다보지만, 고흥에서 나오는 종이신문에서 고흥 이야기를 다룬다고는 못 느낍니다. 전라남도에서 나오는 신문을 면사무소나 읍내 우체국에 가면 들출 수 있는데, 이들 전라남도 신문에서 전라남도 이야기 두루두루 짚거나 보듬는다고는 못 느낍니다. 그렇지만 신문은 날마다 나와요. 신문에는 날마다 온갖 글과 그림과 사진이 실려요.


  모두들 무슨 이야기를 신문에 담을까요. 모두들 신문을 펼쳐 어떤 이야기를 살피나요. 모두들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으로 어떤 이야기를 들여다보거나 마음에 담을까요.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서 차분히 살피는가요. 이웃들 웃고 우는 이야기를 매체나 책에서 깊고 넓게 만나는가요.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학살 이야기를 다룰 사람은 경찰도 군인도 정당도 공무원도 아니었습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학살 현장에 찾아가거나 이 현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사진을 찍는 사람도, 바로 그곳에 찾아가거나 그곳에서 살아갈 때에 비로소 참모습을 마주하면서 참글을 쓰고 참사진을 찍습니다.


.. 사진과 텔레비전의 명백한 취재 자료에도 불구하고 경찰과 민족주의 정치인들은 이 이미지들이 조작된 것이고, 사람들이 죽음과 부상까지 조작했다고 주장했다 … 취재를 가로막는 온갖 제약과 시스템에 맞서 싸우며 폭력사태를 취재하는 것은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했다. 흑인 사진가들은 흑인 언어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던 백인들과 달리 흑인들의 언어와 문화에 익숙했기 때문에, 보다 깊이 있는 취재를 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흑인 저널리스트들은 경찰들에게 자주 저지당하거나 구속되었다. 어떤 백인 저널리스트도 피터처럼 아무 이유 없이 18개월 동안이나 구금되지 않았다. 자신의 아들을 잃은 것을 비롯해, 많은 대가를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피터는 자신보다 쉽게 성공을 거둔 사진가나 백인들을 결코 원망하지 않았다 … 흑인들은 수십 년 동안의 고통 끝에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그것은 바로 백인을 해치면 반드시 엄청난 보복을 불러온다는 것이었다 ..  (126, 156, 160쪽)


  사진 한 장이 모든 참모습을 밝힐 수 있을까요. 글 한 줄이 모든 속내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사진 한 장 감추면 참모습을 숨길 수 있을까요. 글 한 줄 지우면 속내가 안 드러나도록 꽁꽁 틀어막을 수 있을까요.


  사진 한 장 찍으려고 전쟁터에 뛰어드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전쟁터에서 목숨 건사하며 찍은 사진 한 장을 매체에 싣는 사람은 어떤 생각일까요. 전쟁터에 뛰어들어 목숨 건사하며 찍은 사진이 실린 매체를 받아서 읽는 사람은 어떤 뜻을 헤아릴까요.


  사진에 담긴 사람이 눈물을 흘립니다. 사진에 나오는 사람이 웃음을 짓습니다. 사진에 찍힌 사람이 땅바닥에 고꾸라진 채 붉은 핏물 줄줄 흘리며 꼼짝을 않습니다. 사진에 있는 사람이 총칼을 옆구리에 낀 채 누군가를 노려봅니다. 이 사진은 무엇을 말하는가요. 이 사진은 우리한테 어떤 삶을 말하는가요. 이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들은 우리 삶자락에서 무엇을 생각하도록 이끄는가요.


.. 난 충격을 받았다. 평화유지군이었던 이 친구가 우리를 향해 총질을 해댄 것을 지금 인정한 것인가? … 나는 평화유지군들이 우리들에게 총질을 해댄 순간을 떠올렸고, 총을 발사했던 그들과 나와의 관계를 알고 싶었다. 그것은 분명 사고였다고 확신하지만 무언가 더 있지는 않을까? 설사 사고라고 할지라도 저널리스트들의 죽음이나 부상을 악의적으로 즐거워하는 녀석들이 있지는 않을까? 혹은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궁금했다 … 그는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평화유지군들에게 호스텔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때, 자신들이 느꼈던 공포에 대해 묘사했다. 자신들은 공황 상태에 빠졌었고, 아무 생각 없이 발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가 마침내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디선가, 어쨌든 …… 우리들 중 누군가로부터 너희 형제를 죽인 탄환이 나왔다. 그 탄환은 바로 우리가 발사한 것이다.” ..  (307, 308, 310쪽)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녁 나라 속살을 밝히려 한 누군가 있기에, 우리들은 한국에서 사진 몇 장과 글 몇 줄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속살을 살짝 읽을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이 나라 속살을 밝히려 하는 누군가 있으면,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웃들은 이녁 나라에서도 사진 몇 장과 글 몇 줄로 한국 속살을 살며시 읽을 수 있겠지요.


  사진은 나라와 나라를 넘나듭니다. 사진은 울타리를 허물고 냇물을 가로지릅니다. 사진은 겨레와 겨레를 아우릅니다. 사진은 두꺼운 가림천을 치우고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평화를 바라는 마음이 사진 한 장으로 나타나 널리 퍼집니다. 사랑을 꿈꾸는 마음이 사진 한 장으로 스며들어 두루 퍼집니다.

(1부 마무리. 2부로 이어집니다.)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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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라가 사랑한 동물 이야기 - 온가족이 함께보는 헝가리 여성사진가 아일라의 동물사진 앨범
정진국 글, 이일라 사진 / 눈빛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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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책은 참 아름다운데, 글 때문에 슬프게 망가집니다. 아예 글 없이 사진만 있으면 즐겁게 별 다섯 꾹꾹 채울 텐데, 글 때문에 슬프게 별 하나를 깎습니다... 부디 재판 찍어 글을 모두 덜고 사진을 더 집어넣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136

 


사랑이 있어 사진이 있습니다
― 이일라가 사랑한 동물 이야기
 이일라(Ylla) 사진,정진국 글
 눈빛 펴냄,2012.5.7./18000원

 


  사랑이 있어 사진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 사진이 없습니다. 사랑이 있어 노래가 달콤합니다. 사랑이 없어 노래가 메마릅니다. 사랑이 있어 글이 아름답습니다. 사랑이 없어 글이 무섭습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줍니다. 아니,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주기 앞서 하루하루 사랑 넘치는 웃음꽃 피어납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합니다. 아니, 어버이한테 사랑을 선물하기 앞서 늘 사랑 가득한 노래잔치 이룹니다.


  태어날 적에 어버이한테서 카밀라 코플러(Camilla Koffler)라는 이름을 얻은 이일라(Ylla)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아 엮은 책 《이일라가 사랑한 동물 이야기》(눈빛,2012)를 읽으면서 곰곰이 생각합니다. 이일라 님은 당신 어릴 적과 젊은 나날 당신 어버이한테서 얼마나 깊고 너른 사랑을 받았을까요. 얼마나 따사롭고 포근한 사랑을 누렸을까요.


  곰을 찍고 코끼리를 찍으며, 개를 찍고 고향이를 찍는 한편, 아프리카와 인도를 밟으면서 찍은 사진을 하나하나 들여다봅니다. 살가운 사랑을 받으며 하루하루 빛나는 이야기 누렸기에 이렇게 어여쁜 사진을 찍는구나 싶습니다. 고운 사랑을 받으며 언제나 해맑은 웃음 피웠기에 이처럼 아리땁게 사진을 찍는구나 싶어요.

 

 

 

 


  사진책 《이일라가 사랑한 동물 이야기》에 풀이말 붙인 정진국 님은 “이일라는 개에게서 억지로 포즈를 끌어내려 하지 않았다. 개들이 저들 나름대로 자세를 취하는 대로, 우쭐한 척하면 하는 대로, 또 침울하면 침울한 대로 사진에 담았다(101쪽).” 하고 말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이일라 님은 사진 한 장 억지스레 찍지 않습니다. 이일라 님은 사진을 사랑으로 찍습니다.


  그래요. 사랑이 있으니 사진을 찍지요. 사랑이 있기에 사랑을 사진에 담지요. 사랑을 생각하기에 사진 한 장 찍으며 사랑을 나누는 즐거움을 헤아리지요.


  사진은 손재주로 찍지 못합니다. 손재주 아무리 좋다 하더라도, 사람들 가슴으로 스며드는 이야기는 이루지 못해요. 사진은 손놀림으로 찍지 못합니다. 손놀림 제아무리 잽싸다 하더라도, 사람들 가슴으로 젖어드는 이야기는 일구지 못해요. 사진은 기계만으로 찍지 못합니다. 사진장비 아무리 값지다 하지만, 내 이웃을 아끼며 사랑하는 넋이 아니라 할 때에는, 서로 어깨동무할 사진으로 거듭나지 못해요.


  백 마디 말이 무슨 쓸모가 있을까요. 한 마디 사랑이면 넉넉합니다. 한 가지 사랑으로 찍는 사진이면 됩니다. 어버이가 주머니에 늘 품는 아이들 사진은 ‘빼어난 손재주로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옆지기가 지갑에 언제나 넣고 다니는 아이들 사진은 ‘놀라운 손놀림으로 찍은 사진’이 아닙니다. 사랑을 담아 찍은 사진을 주머니에 넣고는, 늘 꺼내고 또 꺼내어 들여다봅니다. 사랑을 실어 빚은 사진을 지갑에 넣고는, 새삼스레 꺼내고 또 꺼내어 바라봅니다.


  꽃 한 송이를 찍거나, 나무 한 그루를 찍을 적에도 마음속으로 피어나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 한 마리를 찍거나, 고양이 한 마리를 찍을 때에도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꿈이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 마음이 좋은 사진으로 갑니다. 좋은 사랑이 좋은 사진으로 태어납니다. 기쁜 마음이 기쁜 사진으로 갑니다. 기쁜 사랑이 기쁜 사진으로 태어나요.


  이일라 님 사진책 《이일라가 사랑한 동물 이야기》를 여러 차례 넘깁니다. 정진국 님이 애써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붙여 주었는데, 정진국 님 글은 머리글 서너 쪽으로만 짧게 간추린 다음, 이일라 님 사진을 더 많이 담아서, 이 사진책 읽을 사람들한테 더 깊고 너른 사랑 누리도록 꾀했으면 얼마나 아름다웠으랴 싶습니다. 이일라 님 사진책에 이일라 님 사진 아닌 나그네 글이 너무 많습니다. 이일라 님 사진책에 이일라 님 사랑 어린 사진 아닌 나그네 군말이 너무 깁니다. 4346.3.23.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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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문자리
신미식 지음 / 처음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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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35

 


사진을 찍는 자리
― 머문 자리
 신미식 사진·글
 처음 펴냄,2002.10.15./5800원

 


  여행을 하며 사진을 찍는 신미식 님은 당신이 좋아하는 곳 이름을 붙여 ‘갤러리카페’를 엽니다. 먼저 ‘마다가스카르’를 서울 효창동에 열고, 다음으로 ‘에티오피아’를 서울 홍대앞에 엽니다. 사진을 찍으러 여행길에 나서면 여러모로 돈이 많이 들 텐데, 살림돈 푼푼이 아끼고 그러모아 당신 꿈 가운데 하나를 이루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도 내 삶길을 스스로 씩씩하게 걷고 싶어 2007년부터 ‘사진책 도서관’을 열어서 꾸립니다.


  나는 신미식 님 갤러리 카페에 가 보지 못합니다. 전남 고흥에서 서울까지는 한참 머니까요. 먼발치에서 다른 사람들 누리사랑방 기웃거리며 어떻게 생기고 어디에 있는가 하는 대목만 구경합니다. 우리 집 어린 두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 아이들 스스로 저희 짐을 저희 가방에 짊어지며 함께 돌아다닐 수 있다면, 갤러리 카페뿐 아니라 온누리 어디라도 서로 어깨동무하며 찾아갈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아직까지는 시골마을에서 시골바람 마시며 튼튼하게 자라야 할 아이들인 만큼, 아이도 아이 어버이인 나도, 시골집에서 시골흙 보듬는 삶을 누릴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미식 님이 2002년에 당신으로서는 처음 내놓은 사진책 《머문 자리》(처음,2002)를 읽습니다. 신미식 님은 “처음으로 사진을 접하게 됐던 시절, 화려함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올려다보면 늘 있는 하늘, 그 드넓은 하늘 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때문에 가던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습니다(6쪽).” 하고 말합니다. 풋풋한 마음 잘 드러내는 말이로구나 싶으면서, 살짝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참다운 평화를 ‘수수한 사람들 삶’에서 느꼈다고 하지만, ‘눈부신 사람들 삶’이라 해서 참다운 평화가 없을 까닭은 없어요. 눈부신 사람이란, 돈이 많거나 이름이 높거나 힘이 센 사람이 아니거든요. 눈부신 사람이란, 삶을 즐기고 사랑하며 아름답게 돌볼 줄 아는 사람이거든요. 드넓은 하늘 같은 사람이 수수한 사람이면서 눈부신 사람입니다. 파랗게 빛나는 하늘 같고, 따스히 내리쬐는 햇살 같으며, 시원하고 맑은 물 같은 사람이 바로 수수한 사람이면서 눈부신 사람이에요.

 


  수수한 사람이란, 돈이 적거나 이름이 안 났거나 힘이 여린 사람이 아닙니다. 수수한 사람은 그야말로 삶을 즐기는 사람이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삶을 아름답게 일굴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미식 님은 ‘수수한 사람’을 만나거나 ‘눈부신 사람’을 마주하면서도 더러 알쏭달쏭한 말을 하고 맙니다. “페루의 인디오 소년이 카메라 앞에서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어쩌면 미소를 지어 보이려 애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 어린 소년의 미소는 어떤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일까요? 자주 웃지 못한 환경 탓인지 어색한 표정의 미소는 못내 아쉬움을 남깁니다(19쪽).” 하고 말하는데, 왜 페루 사내아이 얼굴빛이 ‘만들어진 웃음’이라 여길까요. 페루 사내아이 삶을 얼마나 들여다보거나 함께하거나 마주했기에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웃음인지 아닌지 알 수 없기도 하고, 찡그린 웃음이건 고단한 웃음이건, 웃음이란 모두 웃음입니다. 이를 환히 드러내고 까르르 터뜨려야만 웃음이 아닙니다. 실웃음이 있고 함박웃음이 있어요. 눈웃음이 있고, 이웃음(이를 드러내는 웃음)이 있습니다.


  사랑스러운 낯빛은 웃는 얼굴에만 있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일구며 땀흘리는 얼굴에도 사랑스러운 낯빛이 있습니다. 나물을 뜯고 쟁기질을 하는 얼굴에도 아름다운 낯빛이 있습니다. 아기를 안고 밥을 짓는 얼굴에도 고운 낯빛이 있어요.


  신미식 님은 사진을 찍을 적에 더 생각하고 살펴야지 싶습니다.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라든지 길손으로서 찍는 사진인지, 아니면 서로 이웃으로서 사귀거나 만나려고 어깨동무하면서 찍는 사진인지, 스스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서로서로 스스럼없이 헤아리면서 어깨동무할 때에 사진이 태어납니다. 다 함께 웃고 울면서 밥을 나눌 적에 사진꽃 피어납니다.

 

 


  어쩌면, 스치고 지나가는 눈썰미로도 ‘저 아이가 외로운 아이’인지 ‘저 어른이 힘든 삶을 견디는지’ 읽을 수 있는지 몰라요. 그러나, 참말 읽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에요. 겉으로 스치는 얼굴이 그 사람 온 삶은 아니니까요. 무거운 짐을 나르고 살짝 쉬며 한숨을 고를 적에 찍는 사진이라면, 늦잠 자고 일어나 부시시한 얼굴을 찍는 사진이라면, 비탈길에서 넘어진 아이가 무릎이 아파 낯을 찡그렸을 적에 찍는 사진이라면, 그런데 이런 흐름 저런 뒷모습을 나그네나 길손으로서 하나도 모르는 채 사진만 얼른 찍고 지나간다면, 무엇을 얼마나 옳거나 바르게 안달 수 있을까요.


  사진을 찍는 자리를 생각합니다. 삶을 일구는 자리를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이녁 보금자리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고,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삶을 일구는 곳에서는 어떤 사진을 찍는가요.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도시나 시골이나 자연이나 푸나무를 만날 적에는, 얼마나 깊이 사귀거나 넓게 바라보면서 어떤 사진을 찍는가요.


  처음 만나는 사람하고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사진을 찍는가요. 오래도록 사귄 사람하고 어떤 이야기를 섞으며 사진을 찍는가요. 내 보금자리에서 내 살붙이하고 어떤 이야기를 속삭이며 사진을 찍는가요. 내 마을에서 내 이웃하고 어떤 이야기를 펼치며 사진을 찍는가요.


  신미식 님은 “어디든 가야 한다면 그곳은 내 집이 됩니다(83쪽).” 하고 말합니다. 참으로 어디든 내 집이 됩니다. 그러나, 내 집이 된대서 얕게 생각하고 지나칠 수 없습니다. 내 집이 되기에 더 오래 머뭅니다. 내 집이 되기에 섣불리 사진기를 들지 않습니다. 내 집 내 이웃 내 살붙이 내 동무, 그리고 바로 나 스스로가 되기에 함부로 말을 하지 않아요.

 


  서울 어디메에서 “그곳은 내 집”이라고 여기는 마음과 페루 어디쯤에서 “어설픈 웃음”이라고 느끼는 마음은 한동아리입니다. 맞고 틀리고 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옳고 그르고 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신미식 님은 신미식 님 삶을 신미식 님 사진으로 담고, 신미식 님 사랑과 꿈을 신미식 님 글로 옮깁니다. 페루에서 “어설픈 웃음” 짓는 사내아이 만났다면, 바로 신미식 님이 이와 같이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설픈 웃음을 짓는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노릇이 아니라, 말을 섞고 이야기를 들어야지요. 서울 어디메에서 “그곳은 내 집”이라 느끼기에 이 마음 그대로 글을 쓰고 사진을 찍듯, 페루 어디쯤에서도 “그 아이는 내 아이”요 “그 아이 모습은 내 모습”이라 느끼면서, 서로를 살가이 껴안도록 사귀고 나서 사진을 찍어야지요.


  머문 자리를 헤아리듯 사진 찍는 자리를 헤아립니다. 머물 자리를 돌아보듯 사진 찍을 자리를 돌아봅니다. 머무는 자리를 사랑하듯 사진 찍으려는 자리를 사랑합니다.


  마음 깊이 사랑을 담으면 무엇을 언제 찍어도 사랑을 나눕니다. 마음 깊이 꿈을 심으면 어디에서 어떻게 누구를 찍더라도 꿈을 길어올립니다. 신미식 님이 사랑해 마지않는 이웃들을 한결 너르고 살가운 품으로 껴안으면서 사진이야기 빚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미식 님이 꿈꾸는 길을 늘 즐겁고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고운 벗님들한테 꿈씨앗 나눌 수 있기를 빕니다.


  꼭 웃는 얼굴만 사진으로 찍지 않아도 됩니다. 꼭 웃기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 하루가 아니어도 됩니다. 비틀거리다가 넘어져도 돼요. 아이들은 걸음이 아직 익숙하지 않아 곧잘 넘어져요. 달리다가 돌에 걸려 자빠져도 돼요. 툭툭 털고 일어서면 돼요. 언제나 착한 넋 아끼면 넉넉하다고 느껴요. 늘 고운 얼 보살피면 따스하다고 느껴요. 사진을 찍는 자리는 착하게 살아가는 자리입니다. 사진을 읽는 자리는 곱게 손을 내밀며 어깨동무하는 자리입니다. 4346.3.1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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