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아라키의 애정 사진 아라키 노부요시, 사진을 말하다 2
아라키 노부요시 지음, 백창흠 옮김 / 포토넷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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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67

 


사진 찍는 마음은 오직 사랑
― 천재 아라키의 애정사진
 아라키 노부요시 글·사진
 이윤경 옮김
 포토넷 펴냄, 2013.10.25.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입니다. 나처럼 사진을 찍는 사람을 가리켜 ‘사진작가’라고도 하는데, 굳이 이런 이름이 붙지 않더라도 나는 ‘사진을 찍는’ 사람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을 가리켜 한자말 이름으로 ‘농부’나 ‘농사꾼’이라 합니다. 그런데 시골에서 땅을 일구는 사람들, 그러니까 흙을 만지는 사람은 늘 땅과 흙을 지키고 돌봐요. 흙을 아끼고 사랑합니다. 이들 시골 농부와 농사꾼이란, 바로 ‘흙지기’입니다.


  새책방이나 헌책방을 가꾸는 사람들은 책을 다루는 일을 합니다. 책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을 해요. 이들 책방 일꾼은 ‘책방지기’ 또는 ‘책지기’예요. 그러면, 사진을 찍거나 읽으며 즐기는 사람한테는 ‘사진지기’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집에서 아이들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도 사진지기입니다. 학교에서 사진을 배우는 사람도, 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도 사진지기입니다. 사진기를 써서 예술품을 만들려 하는 사람도 사진지기 되고, 사진책 빚으려 땀흘리는 책마을 일꾼도 사진지기 됩니다. 노래를 사랑하며 즐겨 부를 때에는 노래지기 되고, 사진을 사랑하며 즐겨 나눌 적에는 사진지기 됩니다.


.. 요즘 사진들을 보면 정말 소중한 무언가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난 척하는 것 같지만, 감정과 정감은 쏙 빼놓고 표면이랄까, 표상만 단조롭게 찍는다는 느낌이에요. 그러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요. 땀범벅, 눈물범벅이 되도록 열정을 다해 찍는 게 사진이지요. 얼마나 좋아요. 카메라는 그런 모습을 더 강조하려고 사용하는 도구 혹은 기계라고 보면 돼요 … 뭔가가 있다 싶은 사진이라면 슬픔이 느껴질걸요. 그게 정말 멋진 사진이라면 말이에요. 요즘 젊은 사람들 사진을 보면 그런 쓸쓸함이 느껴지지 않아요. 남 이야기라고 함부로 말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 달라요. 물론 사진이 달라졌다는 이야기예요. 시대는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엄청난 속도로 변해서 우주 공간을 둥둥 떠다니면서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시대가 온다 해도 상관없어요. 시대가 어떻든 사진에는 슬픔이 묻어나야 해요. 안타까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건 사진이 아니에요 ..  (6, 21쪽)

 

 

 

 


  사진을 찍는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아이를 낳아 돌보는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는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책을 읽는 마음과 글을 쓰는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시골에 보금자리 마련해서 흙을 일구는 사람들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바다에서 고기를 낚고, 숲에서 나무를 보살피는 사람들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자전거를 달리는 사람 마음이랑, 두 다리로 온누리 골골샅샅 걸어서 다니는 사람 마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누구라도 마음에는 오직 사랑 한 가지 있습니다. 누구나 마음속에 사랑씨앗 한 톨 심고 두 톨 심으면서 날마다 새로운 삶 짓습니다.


  사랑이 없이 사진을 찍으면 어찌 될까요. 사랑이 없이 아이를 낳거나 돌보면 어떻게 될까요. 사랑이 없이 밥을 짓는다면, 사랑이 없이 빨래를 한다면, 사랑이 없이 책을 읽으면, 사랑이 없이 글을 쓰면, 이러할 때에 우리 삶은 어떤 모습이 될까요.


  사랑 담아 찍는 사진과 사랑 없이 찍는 사진을 생각해 봐요. 사랑 담아 돌보는 아이와 사랑 없이 키우는 아이를 생각해 봐요. 사랑 담아 쓰는 글과 사랑 없이 쓰는 글은 누구나 곧바로 알아채리라 느껴요. 사랑 담아 건네는 말과 사랑 없이 뱉는 말은 누구라도 이내 알아차리겠지요.


.. 이런 풍경은 이미 내 머릿속에 잠들어 있었는지도 몰라요 … 사진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이런 특별한 날에는 역시 기념사진이 필수예요. 무조건 찍어 두는 편이 좋아요. 재미도 있고 추억거리도 되잖아요. 두고두고 찍길 잘했다고 생각할걸요 … 애정이 담기지 않은 사진은 진짜가 아니에요. 무슨 재미가 있겠어요 … 사진 속엔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구석구석 스토리가 가득 펼쳐져 있어요 … 사진 속에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는 건 그만큼 보는 사람이 사진의 의미를 상상하고 해석할 여지가 있다는 뜻이기도 해요 … 사진은 찍는 순간에 성패가 결정돼요. 이렇게 할까, 저렇게 할까 고민할 틈이 없어요. 반사적으로 셔터를 누르니까요 ..  (19, 23, 31, 35, 36, 93쪽)

 

 

 

 

 


  사랑하는 마음이기에 새롭게 하루를 맞이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날마다 아침을 열고 저녁을 닫습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펼치기에 활짝 웃고 기쁘게 노래합니다.


  사진기 다루는 솜씨가 좋다고 해서 아름다운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기계 다루는 솜씨가 빼어난 사람은 그럴듯해 보이는 사진을 찍을 뿐, 마음속으로 스며들며 환한 빛 곱게 피어나게 이끄는 사진을 못 찍습니다. 기계 다루는 솜씨가 서툴더라도 마음 가득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사진기를 쥐면, 언제나 환하고 밝은 웃음꽃 피어나도록 이야기샘 흐르는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요리 솜씨 빼어나기에 밥이 맛있지 않아요. 온갖 재료 잔뜩 갖추어 요리를 하니 밥이 맛나지 않아요. 사랑이 어린 손길로 짓는 밥이 맛있어요. 즐겁게 웃고 노래하며 짓는 사랑스러운 밥이 맛나요.


  목청만 좋대서 노래가 듣기 좋지 않습니다. 사랑을 담아 부르는 노래일 적에 가락이 좀 어긋나더라도 듣기에 좋아요. 손놀림이 뛰어나기에 그림이 보기 좋지 않아요. 손놀림은 아직 어리숙하더라도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그린 그림일 때에 눈가 촉촉히 젖으며 벅찬 아름다움을 누려요.


  사진을 따로 배운 적 없대서 사진찍기를 두려워 할 까닭이 없습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못 다녔대서, 나라밖으로 사진을 배우러 다닌 적 없대서, 사진찍기를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사진은 사랑으로 찍으니, 내 마음속에 어떤 사랑이 감도는가를 살피면 돼요. 사진은 사랑으로 찍어 사랑으로 읽는 만큼, 사진이론을 모르더라도 어떤 사진이나 다 잘 읽을 수 있어요. 이름난 작가 이름을 몰라도 사진은 잘 읽을 수 있어요.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이름’이 아닌 ‘속으로 우러나오는 사랑’을 찍고 읽으며 나누는 사람입니다.


.. 사진을 찍을 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대방과 동격이어야 한다는 점이에요. 대상이 누구건 상대방과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 이거예요. 사진을 찍는 사람의 마음이랄까 품성, 인생 따위가 고스란히 사진에 녹아들기 마련이니까요 … 찍히는 사람은 자신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잖아요. 찍는 사람도 대상이 어느 때보다 행복해 하는 모습, 아름다워 보이는 순간을 포착하고 싶어 해요. 그래서 그런 모습을 찾고 또 찾아요. 신기한 건 결국 그런 장면을 찾게 된다는 사실이에요 … 본인도 모르는 숨은 매력을 내가 끌어내는 것, 이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에요 … 흔히들 사진에는 인생이 담겨 있다고 하잖아요.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인생이라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어요. 소소한 일상을 담은 게 바로 사진이니까요 ..  (26, 27, 71, 73쪽)

 

 

 

 


  아라키 노부요시 님이 찍은 사진을 이녁 스스로 바라보면서 사진벗이랑 조곤조곤 나눈 이야기를 살풋살풋 들려주는 사진책 《천재 아라키의 애정사진》(포토넷,2013)을 읽습니다. 아라키 노부요시 님은 어느덧 일흔 살을 넘어선다고 합니다. 그렇구나, 이분 나이가 벌써 일흔이 넘는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이분 사진을 읽을 적에 나이를 느낀 적이 없다고 깨닫습니다.


  그래요, 사랑하는 마음은 스무 살이거나 마흔 살이거나 예순 살이거나 여든 살이거나 똑같습니다. 여든 해 살아온 사람은 이만큼 사랑을 나눈 빛이 있고, 스무 해 살아온 사람은 이동안 사랑을 꽃피운 빛이 있습니다. 높은 사랑 없고 낮은 사랑 없어요. 언제나 즐겁게 누리는 사랑이 있습니다. 늘 기쁘게 주고받는 사랑이 있습니다.


.. 평범한 일상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좋은 거예요. 이런 ‘순간’이 가장 좋아요. 그런 ‘순간’이 전부 여기에 담겨 있으니까요 … 행복한 ‘순간’, 좋은 시간을 찍는 게 최고예요. 사람은 무엇보다 행복해야 하니까요. 누구나 경험하는 시간이지만 사실 다들 그런 ‘순간’을 찍지는 않아요. 그래서 사진작가가 대신 촬영하는 거예요. 그게 사진작가가 할 일이니까. 사진작가는 다른 사람 대신 사진을 찍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정말 행복한 ‘순간’이 왔다 해도 보통은 찍을 카메라가 없거나 순간을 포차하는 기술이 부족하거든요 … 찰칵 하는 순간 내 마음까지 찍힌 거지요. 아주 짧은 순간이에요 ..  (64, 65, 82쪽)

 

 

 

 


  즐겁게 찍은 사진을 전시장에 붙여 사진잔치 할 수 있습니다. 기쁘게 찍은 사진을 한 장씩만 종이로 뽑아 사진첩 만들고는 집안에 둘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사진책을 만듭니다. 누군가는 셈틀에 고이 두고는 가끔 들여다봅니다. 누리집을 만들어 여러 사람 들여다보도록 할 수 있습니다. 문화재단에서 돈을 받아 이모저모 이름을 알리고 작가로 일할 수 있습니다.


  어느 길을 가든 모두 사진입니다. 사진역사에 이름을 남겨야 사진이 아닙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즐겁게 누릴 때에 사진입니다. 사진문화를 북돋운다는 일에 앞장서야 사진이 아니에요. 바로 오늘 이곳에서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을 마주하면서 사진 살가이 찍으면 사진입니다.


  혼인잔치나 돌잔치에 사진작가 불러 사진 찍어 달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사진을 찍을 수 없으니까요. 동무더러 사진 찍어 달라 할 수 있습니다. 주례를 서는 분이 사진기 들고 사진 찍을 수 있고, 신랑신부 어버이가 사진기 들어 사진 찍을 수 있어요.


  사진찍기는 남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남 눈치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 없으니, 사진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즐겁게 찍습니다. 신랑이나 신부가 혼례잔치에서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한손에 사진기 쥘 수 있어요.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스스로 사진을 좋아하는 삶 그대로 사진을 즐기는데요. 어떤 상을 받는 자리에 서더라도 어깨에 사진기 걸치고 올라갈 수 있어요. 자전거로 마실 다니며 사진기를 목걸이처럼 걸 수 있어요. 아이들과 밥을 먹으며 무릎에 사진기 놓고는 아이들 밥 먹는 모습 찰칵찰칵 담을 수 있어요.


  사랑하는 마음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며 찍는 사진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만난 사람들이 서로 아끼고 보살피면서 즐겁게 웃는 사이 살짝살짝 한 장 두 장 찍는 사진입니다.


..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명작이 탄생하나 봐요.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요. ‘네 실력 한번 볼까. 날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겠군’ 하며 지켜보고 계신 것 같잖아요 … 사람이 죽으면 하나같이 얼굴이 온화해지더군요. 그러니 그 순간만큼은 꼭 찍어 둬야 해요.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그 사람이 평생을 가꿔 온 얼굴이거든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람을 듬뿍 받으며 만들어진 작품이 보기 흉할 리가 없지요 … 사진이란 절묘한 테크닉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지요. 빛과 그림자가 관능적으로 어우러지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은 디지털카메라가 이미 알려줬잖아요. 결국 사진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건 진실한 사랑밖에 없어요. 진심 어린 사랑으로 대하는 사람과 허울뿐인 사랑으로 꾸며내는 사람은 분명 달라요 ..  (79, 94∼95쪽)

 

 

 

 

 


  아라키 노부요시 님은 앞으로 여든 살을 맞이할 적에도 손에 사진기를 쥐겠지요. 어쩌면 수술대에 오를 적에도 한손에는 사진기를 쥘는지 모르고, 또는 사진벗한테 수술받는 아라키 님 모습을 찍어 달라 할는지 모릅니다. 목숨이 다해 흙으로 돌아가는 날 한손에 사진기 꼭 쥘는지 모릅니다. 목숨이 다해 흙으로 돌아가는 날 사진벗이 마지막 모습 곱다라니 찍어서 사진책에 담아 달라 할는지 모릅니다.


  모든 삶이 사진으로 태어납니다. 모든 삶이 사랑스럽게 사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모든 삶이 사진으로 사랑스럽고도 새롭게 태어나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진을 찍고 읽는 마음이 오직 사랑인 까닭은, 사진은 삶을 찍고 사진으로 삶을 읽기 때문입니다. 삶을 찍기에 사랑을 찍고, 삶을 읽기에 사랑을 읽습니다.


  사랑이 아니라면 굳이 사진으로 찍을 일이 없고,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릴 일이 없습니다. 사랑이기에 사진으로도 글로도 그림으로도 옮기는데, 사진이나 글이나 그림으로 옮기는 사랑이란, 우리들이 즐겁게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추며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가 있기에 살아가고, 이야기가 있어 사진이 태어납니다.


.. 내가 머무르는 곳, 생활하는 곳에서 찍는 게 진정한 사진이구나 싶어요. 이사를 가게 된다면 새로운 곳을 터전 삼아 찍으면 그만이고요 … 사진의 품격을 결정하는 건 그 여성이 지닌 품격과 기품이 아닌가 싶어요. 아름다움이란 곧 품격을 의미하니까요. 사진 촬영도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품격 없는 여성을 찍으면 아무리 애써도 좋은 결과물이 나오지 않아요 … 사진작가에게 필요한 자질 중 하나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장면을 순간적으로 프레이밍해서 셔터를 누르는 능력이에요. 그게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그렇게 하면 딱 적당한 상황에 대상이 화면에 쏙 들어와 주거든요 ..  (132, 149, 169쪽)

 

 

 

 


  나는 1998년에 처음 사진을 배웠습니다. 처음 사진을 배우던 때, 사진학과 교수는 우리더러 ‘너희 사진 주제를 스스로 하나씩 잡으라’고 했습니다. 나는 사진을 석 달 배우고서 혼자 사진기 어깨에 걸고 돌아다니며, 내 사진감(사진 주제)을 무엇으로 잡아야 할까 하고 석 달 생각했습니다. 이것도 찍고 저것도 찍어 보았어요. 사람들이 많이 찍는 사진감을 헤아리고 사람들이 안 찍는 사진감을 돌아보았어요.


  이동안 날마다 헌책방 두어 군데씩 들러 예닐곱 시간씩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석 달 배우고서 석 달 동안 헌책방마실을 예닐곱 시간씩 하며 ‘내 사진감은 무엇일까?’ 하고 골머리를 앓은 셈입니다.


  석 달이 지난 어느 날 문득 깨달았어요. 내 사진감이란 바로 내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내가 사진으로 찍을 이야기란 내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사진으로 즐겁게 찍을 모습이란 내가 환하게 웃고 노래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이 무엇을 사진감으로 삼거나 말거나 아랑곳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곳에는 나도 살고 내 이웃도 살아요. 그러니 내가 살아가는 골목동네를 나도 이웃도 사진으로 찍을 수 있어요. 1998년이 아닌 2013년 오늘을 떠올리면 나는 아이들과 시골에서 살아요. 내가 낳아 돌보는 아이를 내가 사진으로 찍으면 되듯이, 누구나 이녁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으면 됩니다. 시골을 사진으로 찍는 사람은 많을 수 있어요. 시골에 살아가는 사람들 숫자만큼 ‘시골’을 사진감으로 삼을 만합니다. 자전거를 사진감으로 삼을 수도 있어요. 스스로 자전거를 즐긴다면 얼마든지 자전거를 즐겁게 찍을 만해요.


  내 사진감은 내가 사랑하는 삶이면 됩니다. 내 사진감은 내가 사랑하는 삶에서 흐뭇하게 피어나는 이야기이면 됩니다.


.. 나한테 100미터만 걸으라고 해 봐요. 아마 사진집 한 권은 거뜬히 나올걸요. 동네가 어디건 상관없어요. 내가 걷기만 하면 명연기자들이 등장해 주니까요 … 자동차는 안에 누가 탔는지 보이지 않잖아요. 자전거와 오토바이는 사람이 보여서 좋아요. 거리가 살아숨쉬고 있구나, 움직이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든다니까요 … 결국 내가 찍은 건 분위기인 셈이지요 … 사람들이 사진을 보고 알아줬으면 해요. 느껴 달라는 말이지요. 얼마나 쓸쓸한지, 지로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 보는 사람이 결정하면 되는 거예요 ..  (192, 202, 229쪽)

 

 

 

 


  아라키 노부요시 님은 100미터만 걸어도 사진책 한 권 거뜬히 나온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한 마디 덧붙여 말할 수 있습니다. 100미터 아닌 1미터만 걸어도 사진책 한 권 거뜬히 나와요. 1미터 걷기 아닌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사진책 한 권 얼마든지 나와요. 눈을 감고 찍어도 사진책 한 권 예쁘게 나와요. 왜냐하면, 사랑스러운 눈길로 온누리를 바라보고 내 삶자리를 마주하면, 언제나 얼마든지 ‘사진으로 찍을 어여쁜 이야기’가 나한테 찾아옵니다.


  사랑스러운 눈길이 없다면 100미터 아닌 100만미터를 걷더라도 사진책 한 권 못 엮습니다. 사랑스러운 눈길과 마음길이 아니라면 백 해 아닌 천 해 동안 사진을 찍어도 사진책으로 엮을 만한 사진이 안 나옵니다.


  작품을 찍어 보았자 사진이 아닌 작품입니다. 사진을 찍어야 사진입니다. 사랑을 찍을 때에 사진이요, 사랑을 못 찍는다면 작품이라는 이름조차 부끄럽습니다. 사랑을 찍어 사진이 되면, 이 사진은 모두 작품이 될 수 있고 문화와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삶은 사랑에서 비롯합니다. 사진은 사랑에서 태어납니다. 삶은 사랑이 있어 아름답습니다. 사진은 사랑을 찍어 아름답습니다. 4346.11.8.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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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Eugene Smith (Hardcover)
W. Eugene Smith / Distributed Art Pub Inc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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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67

 


사진을 찍는 눈빛
― W. William Eugene Smith
 유진 스미스(William Eugene Smith) 사진
 la Fabrica, 2011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야기가 바로 가장 크며 아름다운 빛이리라 느껴요. 작품으로 찍으면 그저 작품이 되는 사진이고, 삶을 누리면서 찍으면 삶이 빛나는 이야기가 되어요.


  언제나 내 삶이 바로 나한테 가장 크며 아름다운 빛이로구나 싶어요. 내 삶을 내 눈으로 바라보고, 내 삶을 내 손으로 일굽니다. 내 삶을 내 마음으로 헤아리고, 내 삶을 내 사랑으로 가꿉니다.


  스스로 걸어가는 길이 스스로 찍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일구는 삶이 스스로 빚는 사진입니다. 사진은 흑백이 되어도 되고, 칼라가 되어도 됩니다. 까만 빛과 하얀 빛이 얼크러지는 무늬가 싱그럽도록 할 수 있고, 고운 무지개빛이 흐르며 눈부시도록 할 수 있습니다. 어느 모습이나 빛깔이나 무늬가 되어도 다 즐거워요. 왜냐하면, 삶이니까요. 눈물도 삶이고 웃음도 삶인걸요. 기쁨도 삶이요 슬픔도 삶인걸요.


  언제나 찍는 사진입니다. 어떤 일이 있건 늘 찍는 사진입니다. 어디에서나 찍는 사진입니다. 어떤 모습이라 하든, 어떤 일이나 놀이를 하든, 신나게 찍는 사진입니다.

 

 

 

 

 


  유진 스미스(William Eugene Smith) 님이 남긴 사진으로 그러모은 두툼한 사진책 《W. William Eugene Smith》(la Fabrica, 2011)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유진 스미스 님은 1918년에 태어나 1978년에 숨을 거둡니다. 길다면 길게 살았고 짧다면 짧게 살았어요. 그런데, 길든 짧든 유진 스미스 님은 이녁 눈빛으로 바라본 삶을 이녁 손빛으로 가다듬어 사진으로 일구었어요.


  다른 모습을 찍지 않습니다. 유진 스미스 님은 유진 스미스 님 삶에 맞추어 이녁 삶빛을 사진빛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다른 사람이 본 모습을 찍지 않아요. 늘 스스로 바라본 모습을 찍어요.


  스스로 선 자리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스스로 걷는 길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사람이 저곳에서 사진을 찍는대서 굳이 저곳으로 가야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저쪽에서 찍은 사진이 널리 알려지거나 사랑받는다 해서 애써 저쪽으로 가야 하지 않아요.

 

 

 

 

 


  눈빛이 싱그러이 살아날 만한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넉넉합니다. 마음빛이 고우면서 맑게 드리우는 곳에서 사진을 찍으면 즐겁습니다. 우리들이 찍는 사진은 현대사진이 아닙니다. 우리들 사진은 ‘우리 사진’이요 ‘내 사진’입니다. 오늘 이곳에서 찍는 사진이고,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기념사진도 좋고 스냅사진도 좋습니다. 어떤 이름을 앞에 붙이더라도, 스스로 삶을 즐기며 사랑하는 마음결로 찍으면 다 좋습니다. 스스로 삶을 즐기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못하는 채 기록하거나 돈을 벌거나 예술을 하려는 뜻이 되어 찍는 사진이라면, 재미없고 부질없습니다.


  내가 먹을 밥을 손수 차립니다. 식구들과 따스하게 나눌 밥을 즐겁게 차립니다. 내가 입을 옷을 손수 빨래합니다. 식구들과 오붓하게 지낼 살림을 즐거이 일굽니다.

 

 

 

 

 


  사진을 찍는 까닭은 눈빛을 밝히기 때문입니다. 글을 쓰는 까닭은 생각빛을 키우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마음빛을 북돋우기 때문입니다. 노래를 부르는 까닭은 사랑빛을 살찌우기 때문입니다. 춤을 추는 까닭은 몸빛을 일깨우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눈빛을 밝혀 삶을 사랑하는 길을 걷습니다. 스스로 눈빛을 밝혀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삶이 얼마나 즐거운가 하고 깨닫습니다. 스스로 눈빛을 밝혀 내 자그마한 사진기 하나를 손에 쥘 적에, 작은 사진 하나 일구면서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꽃 피어나는가 하고 느낍니다.


  유진 스미스 님은 사진기 하나로 밝히는 눈빛을 이야기합니다. 사진 한 장으로 빛내는 삶을 노래합니다. 사진책 하나 남아 꿈꾸는 사랑을 속삭입니다. 사진은 바로 우리 가슴속에 있어요. 사진은 늘 우리 가슴속에서 샘솟아요. 사진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우리 가슴속에서 곱게 빛나요. 4346.11.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미국에 가는 아는 이웃이나 동무 있으면

유진 스미스 님 사진책을 사 달라

부탁하고 싶습니다.

 

..

 

 

 

 

 

..

 

이 사진들을

'선집'이 아닌

다 다른 '낱권 사진책'으로 볼 수 있으면

훨씬 더 가슴 깊이 울리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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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1-05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이 많이 느껴지는 글이네요. 함께살기 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일기' 한 대목을 다시 읽는 느낌도 듭니다.

* * *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이나 타인(관찰자이든 이웃이든 아니면 시인이든 친구이든)에게 가장 가치가 있을 때는 그가 가장 만족스럽고 편한 곳에 있을 때이다. 거기에서 그의 인생은 가장 강렬해지고 순간들을 놓치는 경우도 가장 적어진다. 친숙한 주위의 대상들이 인생 최고의 상징이자 그의 인생을 나타내는 최고의 예증이다.

숲노래 2013-11-05 19:06   좋아요 0 | URL
유진 스미스 님이라든지 로버트 카파 님이라든지,
이런 분들 좋은 사진책을
돈이 있는 출판사에서 씩씩하게 번역해서 선보인다면
우리 사진빛(사진문화)은 무척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저는 이 책을 옆지기가 미국에 갔을 적에
책값 비싸더라도 꼭 사서 한국으로 돌아오라 해서
어렵게 장만했어요. 아무튼... 책값이 만만하지 않은데...
이 사진들을 다른 분들이 거의 보실 수 없으리라 여겨
서른한 장을 붙였어요.

아무튼, 잘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oren 님~ ^^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고양이 카이
이와고 히데코 지음, 구혜영 옮김, 이와고 미츠아키 사진 / 동쪽나라(=한민사)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66

 


이 아름다운 숨결을 사진과 함께
―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고양이 카이
 이와고 미츠아키 사진, 이와고 히데코 글
 동쪽나라 펴냄, 2003.9.10.

 


  아이들과 살아가며 글이 태어납니다. 아이들과 살아가지 않던 지난날에도 글은 마음속에서 태어났는데, 아이들과 살아가며 이 아이들이 나누어 주는 고운 빛을 받는 글이 태어납니다.


  글은 어디에서나 태어납니다. 시골에 살거나 도시에 살거나 글은 늘 어디에서나 태어납니다. 복닥거리는 전철에서도 글은 태어납니다. 이른바 ‘지옥철’이라는 이름이 붙은, 인천서 서울로 달리는 전철에서도 글은 태어납니다. 지옥철을 타며 온몸이 마른오징어처럼 납작해지는 하루를 견디는 동안에도 글은 얼마든지 태어납니다. 매캐한 배기가스 맡으며 회사를 오가야 하는 길에서도,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도록 내모는 시험지옥 고등학교에서도, 글은 언제나 태어납니다.


  무시무시한 곳이라 해서 글이 못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둡고 퀴퀴하며 슬픈 곳이라 해서 맑거나 사랑스러운 글이 못 태어나지 않습니다. 살림이 넉넉하거나 근심걱정 없다 싶은 곳이라 해서 맑거나 고운 글만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떠한 글이든 어디에서나 태어나고, 어느 삶자리에서든 어떠한 글이라도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빚고, 아이들과 부대끼는 나날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글을 잘 쓰기에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쓰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잘 다루기에 아이와 부대끼는 나날을 사진으로 옮기지 않습니다. 연필과 종이가 있기에 글을 써요. 필름(또는 메모리카드)과 사진기 있기에 사진을 찍어요.


  멋스럽게 찍지 않아도 멋스러운 삶입니다. 멋스럽게 꾸미지 않아도 멋스러운 사랑입니다. 삶을 누리는 그대로 쓰면 글이 되고, 삶을 즐기는 그대로 찍으면 사진이 됩니다. 이 아름다운 숨결을 글과 함께 빚고, 이 아리따운 숨결을 사진과 함께 일굽니다.


.. 이날 카이의 모습은 평소와 달리, 침착해 보였습니다.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 걸까요?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걸까요? 우리로서는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냥 따사로운 봄햇살이 내려쪼이는 창가에서 행복한 듯 평화로이 앉아 있는 모습이군요 ..  (39쪽)

 

 


  날마다 꾸준히 밥을 새로 차려서 먹듯이, 날마다 꾸준히 글을 새로 일굽니다. 날마다 꾸준히 옷을 갈아입히듯이, 날마다 꾸준히 사진을 새삼스레 찍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아이를 찍더라도 늘 다른 사진이 나옵니다. 같은 집에서 같은 아이와 얼크러지더라도 늘 다른 글이 태어납니다.


  생각해 보면, 같은 집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똑같은 일이라 하지만, 어제와 오늘은 다르고, 오늘과 모레가 달라요. 다 다른 날에 다 같은 일을 한다 하지만, 다 같은 일이란 참말 없습니다. 조금씩 다른 일이요, 새롭게 다른 일이며, 새삼스레 다른 일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와 살아가는 이야기를 글로 쓰더라도 날마다 다른 글을 쓰고, 아이와 복닥이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더라도 노상 다른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아침해와 저녁해를 사진으로 찍어 보셔요. 날마다 다를밖에 없습니다. 아침햇살과 저녁햇살을 가만히 바라보며 날마다 글로 써 보셔요. 참말 날마다 다른 글을 쓸밖에 없습니다.


  학교 가는 길이건 회사 가는 길이건 날마다 달라요. 같은 때에 집을 나서 같은 때에 버스나 전철을 타더라도, 날마다 다른 하루요, 날마다 다른 이야기 샘솟습니다. 그러니까, 날마다 얼마나 다른 줄 느낄 때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요. 날마다 어느 만큼 새로운 빛이 흘러드는가를 느낄 때에 글과 사진을 빚어요.


  움직이는 삶이기에 움직이는 글이 됩니다. 흐르는 삶이기에 흐르는 사진이 됩니다. 애써 꾸미거나 지을 까닭이 없어요. 움직이는 삶을 따라 글을 쓰기만 해도 미처 못 쓰는 글이 있어요. 흐르는 삶과 나란히 거닐며 사진을 찍어도 모든 모습을 찍지 못해요.


.. 아침부터 눈이 내리더니 하염없이 수북수북 쌓여만 갑니다. 멋진 경치를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지요. 우리는 집 근처에 있는 노가와 공원으로 나갔습니다. 카이 입장에서 보면 뭐가 멋진 경치냐고 하겠지만 말예요 … 카이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경이로운 계절의 변화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눈이 올 때마다 노가와 공원에 데리고 갔습니다 ..  (43, 72쪽)

 


  가장 아름답구나 싶은 때에 글을 씁니다. 가장 사랑스럽구나 싶은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연필을 들어 종이에 또박또박 씁니다. 사진기를 들어 한 장 두 장 신나게 찍습니다. 네 숨결을 내 가슴으로 맞아들입니다. 내 숨결을 네 가슴에 건넵니다. 네 삶빛이 내 마음속으로 스며듭니다. 내 삶빛이 네 마음밭으로 젖어듭니다.


  서로 눈빛이 오갑니다. 서로 사랑이 오갑니다. 서로 손길이 오갑니다. 아름답게 꿈을 꾸며 아름답게 쓰는 글이요, 아리땁게 꿈을 지으며 아리땁게 찍는 사진입니다. 삶을 아름다이 일구면서 글 또한 저절로 아름다이 흘러요. 삶을 아리따이 돌보면서 사진 또한 시나브로 아리따이 자라요.


  사진을 찍으러 미국에 가도 되고 일본에 가도 됩니다. 사진을 배우러 프랑스에 가도 되고 영국에 가도 됩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으러 마을 한 바퀴 돌아도 되고 이웃이나 동무를 만나러 가도 됩니다. 사진을 배우러 아이와 복닥이며 살림을 꾸려도 되고 논밭을 일구어도 됩니다.


  미국여행과 일본여행도 사진이 됩니다. 마을걷기와 이웃사랑도 사진이 됩니다. 프랑스나 영국에 있는 이름난 학교에서도 사진을 배웁니다. 아이들한테서도 사진을 배우고, 집살림 꾸리면서도 사진을 배웁니다.


  사진은 이론도 실기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은 창작을 하지 않고 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랑스러운 아이가 곁에 있는데 사랑스러운 아이를 사진으로 찍지 못한다면, 무엇을 사진으로 찍을까요. 아름다운 삶이 언제나 내 곁에서 흐르는데 이 아름다운 삶을 사진으로 찍지 않는다면, 무엇을 사진으로 찍는가요.


  꽃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모델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장치를 해서 무언가 넌지시 보여주려는 소품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설치예술을 한대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가난한 동네를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힘든 이웃이나 정치꾼을 찍어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찍어야 할 이야기라면,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 스스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진으로 담아야 할 모습이라면, 사진기를 어깨에 멘 사람 스스로 가장 아름답게 누리는 삶입니다.


  즐겁게 웃는 옆지기와 아이를 사진으로 찍습니다. 요모조모 앙증맞게 차린 밥상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아이들과 신나게 뛰노는 들판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토닥토닥 재운 아이 곁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책방마실을 하며 사진을 찍고, 자전거를 타며 사진을 찍습니다. 빨래터에서 놀며, 텃밭에서 풀을 뜯으며, 하늘바라기를 하며, 멧골에서 냇물에 발을 담그며 사진을 찍습니다.


.. 남편은 언제나 카이의 눈높이에서 셔터를 눌렀습니다. 즉 고양이 사진을 찍을 때, 가능하면 배를 깔고 낮은 자세에서 사진 파인더를 바라보면 카이의 기분이 가장 잘 보인다고 합니다 … 이일라(Yilla)는 고양이에게 말을 걸면서 촬영했다고 하는데, 그래서일까요, 남편은 얼른 “미안해요. 모두 내 잘못이야. 하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난 너희들 사진을 찍고 싶단다. 이건 아저씨 일이니까 말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  (69, 124쪽)

 

 


  내가 선 이곳이 나한테 가장 아름다운 삶터입니다. 나와 마주한 사람이 나한테 가장 사랑스러운 님입니다. 사진은 늘 바로 이곳에 있어요. 사진은 언제나 바로 오늘 이루어요.


  무엇을 찍느냐? 내 사랑을 찍어요. 누구를 찍느냐? 내 사람을 찍어요. 어디에서 찍느냐? 내 보금자리에서 찍어요. 왜 찍느냐? 즐겁게 살아가니 찍어요. 어떻게 찍느냐? 아름다운 눈길과 손길과 마음길로 찍어요. 언제 찍느냐? 활짝 웃을 적에 찍어요.


  밥을 지으며 무엇을 생각하는지 가만히 돌아보셔요. 밥을 짓듯이 사진을 찍으면 즐겁습니다. 빨래를 하며 무엇을 떠올리는지 살며시 헤아려요. 빨래를 하듯이 사진을 찍으면 재미있습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놀이를 하면서, 잠을 자면서, 우리들 꿈과 사랑이 어떻게 흐르는가 하고 곰곰이 되새겨요. 홀가분하면서 씩씩하고 다부지게 사진을 찍으면 아름답습니다. 나는 나답게 찍는 사진입니다. 이녁은 이녁답게 찍을 사진입니다. 나는 나답게 읽는 사진입니다. 이녁은 이녁답게 읽을 사진입니다.


.. 강가에서 흠뻑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카이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폴폴 납니다. 좁은 아파트 방 안에서는 솟구치는 고양이의 에너지를 주체하지 못합니다 ..  (70쪽)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사진을 찍고 이와고 히데코 님이 글을 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고양이 카이》(동쪽나라,2003)라는 사진책을 읽습니다. 사진이랑 글하고 함께 살아가는 두 사람이 엮고 일군 아름다운 사랑이 스민 이야기를 조그마한 책에서 읽습니다.


  참말, 사진찍기란 사랑찍기입니다. 사랑을 찍는 사진이니 삶을 찍어요. 삶찍기입니다. 사진읽기란 사랑읽기입니다. 사랑을 읽는 사진이니 삶을 읽어요. 사진을 찍은 사람은 이녁 사랑과 삶을 담고, 사진을 읽는 사람은 이녁 사랑과 삶을 읽습니다.


  이밖에 무엇을 더 찍거나 읽을 수 있을까요? 이론이나 실기를 읽거나 찍는가요? 사조나 유행이나 흐름을 읽거나 찍는가요? 주의주장을 읽거나 찍는가요?


  삶은 이론도 실기도 아닙니다. 사랑은 사조도 유행도 흐름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이지, 현대사진도 과거사진도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일 뿐, 다큐사진도 패션사진도 아무 사진도 아닙니다.


.. 사실 남편은 밝히고 싶지 않겠지만, 카메라가 보이면 카이는 싫은 내색을 합니다. 나는 이런 카이의 기분을 알 것도 같습니다. 그래서 남편 귓속에다 살며시, 카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최대한 속삭이면서 말했습니다. “카이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모든 걸 말예요.” ..  (149쪽)

 


  아침해가 뜨고 아이들이 깨어납니다. 작은아이는 일어나자마자 쉬를 눈 뒤 곧바로 똥을 눕니다. 속이 개운하겠네. 똥이 마려워서 잠을 깼니. 다 컸구나. “누나는 자.” 하고 말하는 세 살 아이가 혼자 씩씩하게 마당으로 내려가서 놉니다. 아침볕을 듬뿍 받습니다. 혼자서도 까르르 웃으며 노래를 하고, 가을볕 드리우며 까맣게 익은 부추씨를 보다가, 새까만 까마중알 쳐다보다가, 구름을 노랗게 물들이며 천천히 오르는 해를 바라봅니다.


  멧새는 아침부터 부산하게 날아다니며 노래하고 먹이를 찾습니다. 개미도 바지런히 먹이를 물어 나르겠지요. 아직 겨울잠 안 자는 풀벌레도 곧 모두 겨울잠에 들어요. 서늘한 바람이 불며 가랑잎 지고 풀잎 시듭니다. 머잖아 차가운 바람이 불다가 눈송이 흩날릴 테지요.


  가을이 깊어 가을빛을 사진으로 누립니다. 겨울이 찾아와 겨울빛을 사진으로 즐깁니다. 가을과 겨울 지나면 새봄에 봄빛을 사진으로 밝히겠지요. 여름에는 여름빛 싱그러운 사진이 됩니다.


  사진은 늘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이곳에서 찍습니다. 가만히 생각하면, 사진뿐 아니라 글도, 노래도, 그림도, 춤도, 흙일도, 물일도, 집일도, 아이키우기도, 책읽기도, 온누리 어떠한 것이라도 늘 오늘 이곳에서 이룹니다.


  삶이란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누려요. 사랑이란 바로 오늘 이곳에서 나눠요. 생각이 자라며 사진이 자라고, 마음이 크면서 사진이 빛납니다. 삶을 보듬으며 사진이 새롭고, 사랑을 아끼면서 사진이 새삼스럽습니다. 4346.11.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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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1-05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저희 가족도 이 <세상에서 가장 예쁜 고양이 카이>
즐겁게 읽은 오래전의 그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오늘 함께살기님의 느낌글 읽으며 카이 사진 보니, 기분이
왠지 더 맑아지고 몽실몽실 해요~
마을 고양이들이 언제나 마당에서 논다니, 참 정겹고 부러워요~*^^*

숲노래 2013-11-05 09:51   좋아요 0 | URL
이와고 미츠아키 님이
길고양이를 사진으로 가장 잘 찍는 분인데
막상 처음 번역된 이 고양이 사진책은 절판되고
다른 아름다운 고양이 사진책은 번역이 안 되고...
그렇더라구요...

그래서 저는 가끔 이분 일본 사진책을 한 권씩 사서 모아요~
 
짚문화 빛깔있는책들 - 민속 1
인병선 / 대원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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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65

 


삶이 그대로 문화이면서 사진
― 짚문화
 인병선 글·사진
 대원사 펴냄, 1989.5.15.

 


  가을날 누렇게 익는 벼가 차츰 샛노랗게 빛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바라본 사람이라면 사진으로 안 찍고는 못 배기리라 생각합니다. 예전이라면 이 아름다운 들판을 그림으로 그리려 했을 테고, 더 먼 옛날이라면 가슴 깊이 고운 빛을 아로새겼으리라 느낍니다.


  봄에는 짙은 흙빛입니다. 짙은 흙빛에 물이 찰랑찰랑 차고, 이윽고 어린 모가 한 움큼 자리를 잡습니다. 조그마한 볏모는 흙땅에 조그맣게 박힌 푸른 점처럼 보입니다. 이윽고 모가 자리를 잡으며 반짝반짝 빛납니다. 이런 빛을 ‘사름’이라 합니다. 사름을 지난 모는 쑥쑥 줄기를 올립니다. 조그마한 방울과 같던 볏모는 어느새 우쑥 자라 푸른 줄을 흙땅에 죽죽 그은 듯한 모습이 됩니다. 한 달 남짓 지나면 볏포기는 아이들 키높이만큼 자랍니다. 아이들이 여름들에 서면 머리카락 한 올 안 보이도록 볏포기 키가 높습니다. 여름이 저물려 하면서 이삭이 패지요. 이삭이 팰 즈음부터 들판에 누릇누릇 살짝 감돕니다. 이삭이 패고 천천히 알맹이 들어차며 고개를 숙일 즈음 노릇노릇 들빛이 달라집니다. 누런 빛과 푸른 빛이 어우러진 새로운 물결입니다. 이 물결은 가을로 접어들면서 푸른 빛이 차츰 가시고 누런 빛이 한결 밝으면서 날마다 새롭습니다. 속알이 꽉 차 아주 영글 무렵이면 누런 빛이 노오랗게 거듭납니다. 잘 익었으니 어서 베어 가을볕에 말리라면서 바람 따라 촤르르촤르르 가을노래 베풉니다.


  사진작가 아니라 하더라도 시골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 지내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빛 달라지는 모습을 삼백예순다섯 장 사진으로 아름다이 엮으리라 생각합니다. 올해와 지난해 다르고, 그러께와 이듬해 다른 들빛을 해마다 새삼스레 한 장 두 장 사진으로 옮기리라 생각합니다.


  사진기 든 사람은 딱히 할 일이 없습니다. 한 자리에 가만히 서서 들판을 바라보면 됩니다. 들일을 하기 앞서 들빛을 사진으로 한 장 담으면 됩니다. 다음날에도 또 다음날에도 차근차근 들빛을 날마다 사진 한 장으로 담으면 되지요. 이렇게 한 해가 흘러 삼백예순다섯 장 이야기를 돌아보면, 시골 들빛이 어떻게 사람들 마음과 몸을 살찌우는가 깨달으리라 생각해요.


  끼니만 채우는 밥이 아닙니다. 봄부터 가을까지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실컷 들이켠 아름다운 숨결을 누리는 밥입니다. 밥 한 그릇에는 햇볕내음이 감돕니다. 밥 한 그릇에는 바람내음이 서립니다. 밥 한 그릇에는 빗물내음이 섞입니다. 밥 한 술을 뜨면서 봄볕과 여름볕과 가을볕 어우러진 빛을 헤아립니다. 밥 한 술 입에 넣으며 봄바람과 여름바람과 가을바람 얼크러진 무늬를 돌아봅니다. 밥 한 술 야금야금 씹으며 봄비와 여름비와 가을비 하나된 결을 짚습니다.


.. 짚으로 만든 여러 종류의 망태기들이 황토벽에 걸려 있다. 풋풋한 인상을 풍기는 황토벽과 총호지 문, 짚 제품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 농촌 생활의 소박함을 운치 있게 보여주고 있다 … 쌀가마니는 섬이나 멱서리 대신에 일제시대에 기계로 대량 생산하던 것이다. 역사가 짧은 이 쌀가마도 요즘은 비닐 부대에 밀려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 해어진 멍석은 사진에서처럼 이렇게 기워서 썼다. 해진 물건을 기워서 다시 쓰는 알뜰함은 현대인이 잃어버린 부분이다 … 색깔 있는 헝겊이나 비사리로 상(上) 자 혹은 복(福) 자를 넣은 것, 의미 없이 줄을 두어 가닥 넣은 것 등이 있다. 이것들은 다 장식적인 의미보다는 단순히 이웃집과 바뀌지 않게 하기 위한 표시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  (25, 29, 38, 71쪽)

 

 


  시골사람은 여름에도 겨울에도 새벽 네 시 무렵에 하루를 엽니다. 겨울에 딱히 일거리 없다 하더라도 네 시 무렵이면 저절로 눈을 뜹니다. 여름에 일손이 바쁘더라도 굳이 두어 시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며칠 너무 몸을 쓰면 다른 날 일을 제대로 못해요. 날마다 알맞게 차근차근 일을 합니다. 오늘 할 일을 오늘 합니다. 이튿날 할 일을 애써 오늘 마무리하려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나물을 말려서 쓸 생각이라면 잔뜩 뜯어도 되지만, 밥때에 맞추어 뜯는 나물이라면 끼니마다 조금씩 뜯어서 먹을 때에 가장 맛있습니다. 뜯은 자리에서 먹는 풀이 가장 맛있지, 어제 뜯은 풀을 오늘 먹으면 그리 맛있지 않아요. 밥도 새로 지은 밥이 가장 맛있어요. 굳이 식히거나 묵혀서 먹어야 하지 않아요. 끼니마다 알맞게 밥을 지어서 먹으면 됩니다. 보온밥솥에 넣는 밥이 맛있을 수 없어요. 따스한 기운을 건사할 뿐입니다. 따스한 기운조차 새로 지은 밥에서 솔솔 솟는 모락모락 따스한 기운을 따를 수 없습니다.


  알맞게 일하면서 알맞게 생각합니다. 알뜰히 일하면서 알뜰히 사랑합니다. 더 가지려 한들 더 가지지 못합니다. 굳이 덜 가지거나 누릴 까닭은 없습니다. 즐거울 만큼 일하고 즐거울 만큼 나눕니다.


  사진을 배우는 길은 여럿이고, 사진을 찍는 길도 여럿입니다.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올 수 있고, 여러 사진강좌를 찾아 들을 수 있으며, 온갖 사진책을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시골일 배우는 길은 여럿이고, 시골에서 살아가는 길도 여럿입니다. 대학교 농학과를 나올 수 있고, 어버이한테서 시골일 물려받을 수 있으며, 온갖 자료와 책으로 배우거나 귀농학교를 다닐 수 있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는 시골일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겪고 치르며 부딪혀야 제대로 맞아들이면서 익힙니다. 대학교에서 이름난 스승한테서 배우더라도 스스로 겪고 치르며 부딪혀야 제대로 받아들이면서 배웁니다.


  ‘호미질 선생’은 없습니다. ‘씨뿌리기 선생’도 없습니다. ‘풀뜯기 선생’ 또한 없습니다. 그저 스스로 호미질을 하고 씨뿌리기를 하고 풀뜯기를 하면서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몸으로 받아들여 배웁니다.

  ‘사진찍기 선생’은 없습니다. ‘사진읽기 선생’도 없습니다. ‘사진놀이 선생’ 또한 없어요. 그예 스스로 사진기를 손에 쥐고 찍으면서 배웁니다. 스스로 사진을 들여다보고 생각하면서 깨닫습니다. 남이 일러 주는 대로 따라갈 수 없는 시골일이고, 집살림이며, 사진길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대로 걸어갈 시골일이며, 집살림이고, 사진길이에요.


.. 모든 전통 문화 유산이 시간이 갈수록 귀한 대접을 받고 있는 반면, 짚은 날이 갈수록 버림받고 잊혀져 가고 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없는 망각의 높으로 하나씩 둘씩 영원히 사라져 가고 있다 … 짚은 우리 조상들에게 흡사 공기나 물과 같았다고나 할까 … 지붕뿐만이 아니라 볏뭇, 수수뭇, 차곡차곡 쌓아 놓은 낟가리, 토종 벌통에 씌운 주저리, 김장 둥주리, 하다못해 누에를 키우는 잠박, 잠석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그리도 솜씨 있게 꼬고 틀어 올리고 매듭을 지었는지 한참 동안 넋을 잃고 도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매우 뛰어난 솜씨였고 나무랄 데 없는 예술품이었다. 마을에서 마침 낫꽂이를 만들고 있는 할아버지와 만날 수 있었다. 칠순이 넘어 보였으나 구릿빛으로 건장한 그 할아버지는 낯선 서울 여자가 유심히 들여다보자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으나 곧 묻는 말에 심상히 대꾸해 주었다. “할아버지, 그게 뭐지요?” “이거 낫꽂이여, 낫꽂이. 이제 벼도 다 거두어들이고 했으니께 낫 간수를 해야지.” “그거 뭐 서부렁해서 몇 번 꽂으면 금방 망가질 것 같네요.” 필자가 좀 불공스러운 말투로 물었는데도 할아버지는 내색없이 부드럽게 대꾸해 주었다. “망가지면 버리고 또 만들지 어째여.” ..  (58, 59, 60∼61쪽)

 


  예나 이제나 시골에서 살아가며 시골빛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지나치는 길에 시골을 찍는다든지, 신문기자로서 취재를 하러 살짝 들르는 길에 시골을 찍는 사람은 있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시골로 가끔 취재여행이나 촬영여행 오는 사람은 있어요. 그렇지만, 참말로,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며 살아가는 하루를 누리며 시골빛을 사진으로 옮긴다든지 시골삶을 글로 적는다든지 시골꿈을 그림으로 선보이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모조리 도시로 몰리고, 도시에서 일거리를 찾으며, 도시에서 갈 길을 열려 하기 때문이리라 느낍니다. 책이 나오면 도시에서 읽힙니다. 시골에서 읽히지 않습니다. 신문이 나와도 도시사람 이야기를 다루며 도시사람이 읽지, 시골 이야기를 다루는 일 없고 시골사람한테 읽힐 신문도 없습니다.


  어쩔 수 없을까 모를 노릇입니다만, 신문기자가 되거나 작가가 되려고 공부하는 이들은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며 도시 문화와 도시 사회를 몸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으로 헤아립니다. 날마다 밥을 먹어도 이 밥이 어느 시골 흙지기 손에서 태어나 도시로 오는가를 생각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날마다 물을 마셔도 이 물이 어느 숲에서 흐르다가 도시에까지 오는가를 헤아리는 사람이 없습니다. 날마다 옷을 입고 집에서 잠을 자도, 옷 한 벌과 집 한 채가 지구별에서 어떤 빛인가를 깨닫는 사람이 없습니다.


  도시에서 작가들이 무언가 자꾸 ‘만듭’니다. 이것저것 만들면서 ‘설치예술’을 한다 말하고, ‘메이킹포토’를 한다 말합니다. 도시라는 곳이 ‘억지로 만든’ 마을이기 때문인데, 도시라는 곳은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이려고 똑같은 집과 길과 학교를 끝없이 만들어야 하는 터라, 도시 사회 교육이란 틀에 박힙니다. 이른바 제도권입니다. 똑같은 교과서를 써서 똑같은 시험을 치르도록 합니다. 시험점수 잘 받는 아이들을 높이 받듭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북적북적 모이기 때문에 사람한테 등급이나 계급을 매깁니다. 이런 흐름이니, 도시에서 문화나 예술을 하려는 이들도 스스로 등급이나 계급을 매기듯이 ‘무언가 설치하고 만드는 문화와 예술’로 나아가고 맙니다. 도시에서 도시를 꾸밈없이 바라보거나 껴안지 못해요. 도시에서 도시를 스스럼없이 얼싸안거나 어깨동무하지 못해요. 도시가 사람들을 구경꾼이나 톱니바퀴 되도록 내몰듯, 도시에서 문화와 예술을 하는 작가들도 스스로 구경꾼이나 톱니바퀴처럼 구르면서 ‘작품을 만드는 길’에 빠져듭니다.


  그러면, 이 ‘만듦사진’이나 ‘만듦작품’은 얼마나 뜻이 있을까요. 이 ‘만듦사진’이나 ‘만듦작품’은 얼마나 목숨을 이을 만할까요. 만듦사진은 백 해나 이백 해쯤 목숨을 건사할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만듦사진이 나오면 지난날 만듦사진은 아무것 아닌 채 뒤로 밀리지 않나요? 아주 새롭다 하는 만듦작품이 나오면 예전 만듦작품은 볼품없이 뒤로 젖혀 놓지 않나요?


  푸른 바람이 불지 않는 도시에서 만드는 모든 것은 새로운 다른 것에 밀리고 치이고 밟힙니다. 푸른 숨결이 감돌지 않는 도시에서 만드는 모든 문화와 예술은 새로 만드는 문화와 예술에 눌리고 떠돌다가 잊힙니다.


.. 산간에 사는 아낙네들은 길을 가다가도 볏짚을 보면 그것이 비록 한 움큼밖에 안 되는 작은 분량일지라도 소중히 챙겨 들고 간다 했다 …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옛날에 농군치고 멍석이나 미거리, 멧방석 같은 것을 만들 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건 마치 농사의 한 부분과 같아서 농군들에겐 필수적인 작업이었던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짚 제품에는 장이가 따로 없었다 … 누런 벼, 콩, 팥, 빨간 고추가 널린 풍경은 참으로 탐스럽고 대견하다. 요즘은 멍석이 무겁고 짐스럽다고 해서 젊은 사람들이 더러 나일론 천막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인들 말을 들어 보면 나일론은 절대로 멍석만큼 잘 마르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  (63, 64, 71쪽)

 

 


  시골 낟가리나 볏가리를 사진으로 담던 작가나 기자가 예전에 몇 사람쯤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사진은 얼마 가지 못했습니다. 이내 다른 사진감으로 갈아탔습니다. 살롱사진이나 공모사진은 시골 낟가리나 볏가리를 ‘예술스럽게’ 사진으로 찍으려 애쓰기도 했는데, 예술스럽게 사진으로 찍으려 했을 뿐, ‘시골스럽게’ 사진으로 찍지 않았습니다.


  우리 겨레 낟가리나 볏가리를 사진으로 찍지 못한 작가들은 중국이나 베트남이나 인도에 가서도 이들 겨레 시골마을에서 낟가리나 볏가리를 들여다볼 줄 모르고 느낄 줄 모릅니다. 이곳에서 깨닫지 못하면 저곳에서도 깨닫지 못합니다.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한테 치이거나 밀리거나 시달린 사람들은 한국땅을 떠나 제3세계나 가난한 나라나 두멧시골 있는 나라로 가서 ‘사람한테 치인 적 없이 맑은 눈빛’인 사람들을 만나며 가슴이 북받쳐 오릅니다. ‘사람한테 밀린 적 없이 깨끗한 눈망울’인 사람들을 마주하며 이 고운 낯빛을 사진으로 담으려고 애씁니다. ‘사람한테 시달린 적 없이 고운 눈매’인 사람들 모습을 바지런히 사진으로 담는 취재여행을 다닙니다.


  사진이란 삶이기에 스스로 누리는 삶대로 사진이 태어납니다. 하루하루 아름답게 살아가려는 사람은 사진을 아름답게 일굽니다. 날마다 고단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사진에 고단한 빛이 묻어납니다. 스스로 꿈을 짓는 사람들은 사진에 고운 꿈나래 펄럭입니다.


  사진이란 삶인 만큼 스스로 빚는 삶대로 사진을 빚습니다. 언제나 노래하는 삶이라면 언제나 노래하는 사진으로 나아가요. 늘 사랑을 속삭이는 삶이라면 늘 사랑을 속삭이는 사진으로 나아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다 도시에서 살아가고, 도시에서 학교를 다니며, 도시에서 일자리와 집자리를 찾아요. 이리하여, 오늘날 사진은 거의 다 도시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사진은 거의 다 도시에서 ‘똑같은 틀에서 벗어나려 아웅다웅하지만 정작 톱니바퀴 부품이 되거나 쳇바퀴 돌듯 판에 박은 만듦사진’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새로운 빛이 없는 곳에서 무언가 만든다고 하면 무엇이 태어날까요. 모두 똑같은 틀에 맞추어 스스로 살아가는데 새로 무언가 만들려 한다 한들 새로울 수 없습니다.


..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가죽신이 차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짚신과 가죽신의 계급적 차별이 생겨, 급기야 서민들에게는 짚신 이외의 다른 신을 신을 수 없게 하는 제도까지 마련되었고 … 짚신밖에 신을 수 없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운 신을 신을 수 있을까 하는 갈망에서 궁리되고 다듬어진 짚신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어느 공예품도 쉽게 따라올 수 없는 미의 극치를 이루었던 것이다 … 사랑스러운 며느리나 딸에게는 앙징맞고 예쁜 신을 삼아 주고 싶었으리라. 이런 신은 ‘고운 신’이라 했고 남자들이 신는 투박하고 거친 신은 ‘막치기’라고 했다 ..  (66∼67쪽)

 


  가을날 가을볕은 가을에만 만날 수 있습니다. 가을날 가을볕 가운데 구월볕과 시월볕과 십일월볕이 저마다 다릅니다. 시월볕 가운데 시월 첫째 주 볕이랑 둘째 주 볕하고 셋째 주와 넷째 주 볕이 모두 달라요. 시월 둘째 주 볕 가운데 첫째 날과 둘째 날과 셋째 날과 넷째 날과 다섯째 날과 여섯째 날과 일곱째 날 볕이 모조리 다릅니다. 시월 둘째 주 볕에서 둘째 날 아침이랑 새벽이랑 낮이랑 저녁에 드리우는 볕이 또 다르지요.


  다른 빛이란 무엇인가를 몸과 마음으로 깨달아 받아들일 때에, 비로소 다른 사진을 찍습니다. 다른 삶이란 어떠한가를 몸과 마음으로 알아차려 스스로 지을 적에, 바야흐로 다른 이야기 담는 다른 사진을 이룹니다. 다른 사랑이란 어떻게 태어나는가를 다른 빛과 삶을 일구며 느끼고 나누면, 시나브로 내 눈길과 손길로 내 사진빛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 서민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 온 짚 제품이 미술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어느 것보다도 그 아름다움이 뒤떨어지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다만 그 평가의 기준이 문제가 될 뿐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귀족적이고 매끈하며 깔끔하고 희귀한 것에만 지나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여 왔다. “이거 궁중에서 쓰던 거래”라고 하면 사람들의 눈이 금방 휘둥그래지는 것은 물론, 그 속에 당대의 뛰어난 솜씨가 남김없이 드러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한편 특수층의 것이면 무조건 좋게 보아 온 나쁜 버릇 탓도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 … 짚 문화의 중요성은 그래서 오랜 시간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전혀 외래 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데에도 있다. 전통 문화의 어느 분야도 외래 문화의 영향을 아주 떼 놓고 생각하긴 매우 곤란하다. 그러나 짚 문화만큼은 아래로만 아래로만 깔려 순수성을 지켜 왔고, 어쩌면 농경 생활이 시작됐을 무렵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것조차 적지 않다 ..  (77, 78쪽)


  삶이 그대로 문화입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이 그대로 문화입니다. 빨래 비빔질과 빨래터가 그대로 문화입니다. 밥짓기와 설거지가 그대로 문화입니다. 잠자리와 이부자리와 자장노래가 그대로 문화입니다.


  문화가 아니라 할 만한 삶이란 없습니다. 문화가 안 될 삶자락이란 없습니다. 부지깽이 하나가 문화요, 비녀 하나가 문화입니다. 연필 한 자루가 문화이고, 깍두기공책 한 권이 문화입니다. 대청마루가 문화이며 장작 한 짐이 문화입니다. 아궁이가, 숯불이, 쑥내음이, 도리깨질이, 빨랫줄이 모두 문화입니다.


  삶이 그대로 문화이기에 삶을 그대로 사진으로 찍을 수 있으면 환하게 빛납니다. 만들어야 할 사진이 있기도 하지만, 애써 만들지 않아도 우리들이 서로 다르게 살아가는 숱한 이야기 흘러넘치기에, 사진으로 담을 빛은 아주 넓고 깊으며 많습니다.


  참새를 사진으로 찍어 보시겠어요? 나락을 사진으로 찍어 보시겠어요? 일하는 흙지기 손가락을 사진으로 찍어 보시겠어요? 부추싹이 돋고 부추줄기 오르며 부추꽃 피어 부추씨 맺기까지 사진으로 찍어 보시겠어요? 개구리 한 마리와 제비 한 마리를 한 해 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셔요. 어여쁜 사진빛이 샘솟습니다. 잠자리와 나비를 들여다보셔요. 잠자리가 어디에 알을 낳고 잠자리알이 언제 깨며 어떻게 자라서 비로소 잠자리로 훨훨 날아다니는가를 사진으로 적바림해 보셔요. 나비가 어디에 알을 낳으며 이 알이 어떤 잎사귀 먹고 크면서 허물을 벗고 번데기를 거쳐 나비로 거듭나는가를 사진으로 옮겨 보셔요.


  날마다 새로운 삶을 보면 됩니다. 날마다 새삼스러운 하루를 누리면 됩니다. 날마다 다른 이야기 태어나는 빛을 느끼면 됩니다.


  사진은 언제나 늘 여기에 있어요. 사진은 예나 이제나 노상 이곳에 있어요. 삶은 바로 늘 여기에 있거든요. 이야기는 한결같이 이 자리에서 흐르거든요.

 


.. 시골에 있는 노인들을 만나 짚 이야기를 꺼내면 열이면 열 별로 달가워하지 않는 게 상례다. 우선 그들 자신이 짚 제품은 전혀 하잘것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머리에 꽉 박혀 있기 때문이다 … 시골에 현지 답사를 나갈 때마다 번번이 느끼는 것은 수십 년째 골동상들의 횡포가 어느 곳을 막론하고 너무 극심했었다는 사실이다. 시골엔 옛것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요강, 다듬잇돌, 다리미, 함지박 같은 것까지도 … 가을바람이 옆에 가려 놓은 마른 옥수수잎을 외스락와스락 흔들며 지나가고 따스한 햇볕이 내려 비치는 무덤 옆 마른 잔디 위에 앉아 할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듣는 건 참으로 푸근하고 즐거운 일이었다 ..  (82∼83, 86쪽)


  짚풀생활사박물관을 꾸린 인병선 님이 쓴 《짚문화》(대원사,1989)를 읽습니다. 인병선 님은 학자도 사진가도 아니었지만, 우리 겨레 짚삶을 찾으려고 1970년대 끝무렵부터 온 나라 시골마을 두루 다니면서 짚삶을 사진으로 담고 짚삶 이야기를 글로 썼습니다. 멋스러이 찍은 사진이라든지 맛깔나게 쓴 글은 없다고 할는지 모르지만, 인병선 님이 찍은 사진과 쓴 글은 짚내음이 납니다. 짚으로 삼은 짚신이 멋스럽거나 맛깔스럽지는 않으나 수수하고 투박하면서 쓸모가 있듯이, 짚내음이 나도록 찍은 사진과 짚빛이 흐르도록 쓴 글은 수수하고 투박하면서 아기자기합니다.


  그렇지요. 짚을 이야기하는 사진인데 짚내음이 나야지요. 짚을 노래하는 글인데 짚빛이 흘러야지요. 짚을 이야기하면서 양반이나 사대부나 임금과 같은 사람들 목소리일 수 없습니다. 짚을 노래하려 하면서 궁중음악을 들려줄 수 없습니다.


  짚내음 사진에는 흙빛이 흐를 때에 살갑습니다. 짚빛 글에는 햇살이 드리울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짚이란 볏짚입니다. 볏짚이란 볏포기입니다. 볏포기란 벼알이 알뜰히 맺히도록 버티는 꽃대요 줄기입니다. 볏줄기란 볏모에서 비롯하고, 볏모란 볍씨가 자라며 이루어집니다. 한쪽은 밥이 되고 다른 한쪽은 살림이 됩니다. 벼알은 밥이 되어 밥그릇에 담기고, 볏짚은 살림살이로 되어 집안 구석구석 깃듭니다.


.. 이분들에게 농사란 이제 전처럼 그렇게 절실하지 않아 보였다. 뿐만 아니라 수리 시설이 발달하고, 예와 달리 많은 농약에 극도로 의존하는 농법이, 뭔가 막연하기만 하고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런 예축의례에서 대단한 의미를 찾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 같았다 … 볏짚 자체가 옛날의 짚과는 아주 달라져 버렸다 …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수천 년 이 땅의 환경에 맞추어 키워 온 이 재래종 벼는 비록 수확 수치 면에서는 다소 떨어져도 쌀에 윤기가 흐르고 질이 매우 좋았다. 따라서 볏짚도 키가 크고 건강하고 노르스름한 게 때깔이 고왔다 … 이제 저 시골사람들에게 전통 문화의 중요성을 강조해 편리하고도 손쉬운 플라스틱 제품을 버리고 투박하고 무겁고 먼지 나고 불편한 짚 제품을 만들어 쓰라고 강요한들 그것이 어떻게 실용될 수 있겠는가 … 그 민속재는 그것을 창조한 그 고장, 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제 빛을 낼 수가 있다. 그 고장, 그 사람들에게서 뚝 떼어 낯선 곳에 갖다 놓고 오로지 민속재로서만 다루어질 때 그것은 이미 뿌리 잃은 죽은 나무가 되고 마는 것이다 ..  (90, 100, 102쪽)

 


  오늘날 사람들 집안에는 플라스틱 물건이 아주 많습니다. 석유를 뽑아서 만든 물건이 온 나라 사람들 집마다 그득합니다. 플라스틱과 비닐이 온 도시와 시골을 뒤덮습니다. 마늘을 심건 감자를 심건 고추를 심건 당근을 심건 오이를 심건 토마토를 심건 수박을 심건 호박을 심건 …… 아아, 시골에서 비닐을 흙에 덮지 않는 사람을 찾아보기 몹시 어렵습니다. 비닐이 없으면 시골일 못한다고 여깁니다. 그나마 논에까지 비닐을 치지는 않습니다만, 논바닥에 비닐을 안 친다 하더라도 논도랑을 죄다 시멘트로 덮어요. 논 둘레는 온통 시멘트입니다. 시멘트로 둑을 쳐서 벼알만 굵고 많이 달리도록 농약과 비료를 들이붓습니다. 시골 할매와 할배가 늙어서 농약을 못 친다고 하니까, 군청과 도청과 농협과 농림부에서 헬리콥터를 사들여 항공방제로 농약을 뿌려 줍니다.


  헬리콥터 항공방제를 마주쳐야 할 때면 참 골이 아픕니다. 헬리콥터를 장만하고 관계 기관에 전담 공무원을 두고 뭐를 하는 살림돈을 헤아리자면, 이 돈으로 젊은 일꾼이 손수 농약을 뿌려도 되고, 손수 거름을 내고 손수 피사리를 해도 됩니다. 제대로 된 친환경농사를 하겠다면, 농약산업에 엄청난 돈과 품을 들이지 말고, 젊은 사람들 시골로 보내 손수 거름 내고 흙 가꾸어 들에 아름다운 빛이 흐르도록 땀을 흘리면 됩니다.


  그러나 이 나라는 오직 돈으로 흐릅니다. 중앙정부도 지역정부도 돈을 따집니다. 새마을운동을 등에 업은 농협은 시골사람한테 기계를 쓰도록 떠밉니다. 기계를 쓰자니 농약과 비료가 있어야 합니다. 농약과 비료를 쓰니까 기계 없이는 넓은 땅을 손수 갈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소를 키우지도 못합니다. 소한테 먹일 풀이 자라는 빈터나 숲이 시골에서 사라졌습니다. 풀을 먹고 살아가는 소가 눈 똥을 거두어 거름으로 삭힐 젊은 일손이 없습니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됩니다. 이래저래 오늘날 우리 시골마을은 농약빛과 비료빛과 기계빛과 비닐빛입니다. 젊은 사람들 모조리 도시로 보내도록 하는 제도권 학교교육이고, 시골 중·고등학교에서조차 시골일 안 가르칠 뿐 아니라, 시골에 남아 농사꾼 되라고 이끌지 않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시골빛을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을 만한 사람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시골빛을 가슴 가득 받아안으며 활짝 웃을 만한 젊은이 나올 길이 꽉 막혔습니다. 애써 시골에 남는다 하더라도 거름내기를 배우지 못합니다. 겨우 시골에 남아도 기계질부터 배웁니다. 호미질이나 낫질이나 가래질이나 괭이질 아닌 기계질로 살아가는 시골 젊은이입니다. 아무런 빛이 없으니 시골로 가고, 아무런 빛을 스스로 일구지 못하니 시골살이 이야기 물씬 흐르는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이 태어나지 못합니다.


.. 무엇이 현실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그토록 자신의 것을 우습게 여기게 만들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제의 민족 문화 말살 정책도 한몫 거들었을 것이고, 해방 이후 밀어닥친 근대화와 산업화의 물결도 그 큰 몫을 담당했을 것이다. 더구나 70년대 초부터 단행된 새마을운동은 농촌 사람들이 수천 년 아끼고 젖어 살아온 모든 전통적 가치와 의미를 송두리째 뒤엎어 버렸다. 마을길을 닦기 위해 당산나무를 베어내고 성황당을 부수고 초가집을 양철이나 기와로 바꾸고 낡고 구태의연한 것은 무엇이나 때려부숴 번쩍거리고 울긋불긋하고 편리한 것으로 바꿔 버렸다 ..  (103쪽)

 


  삶이 그대로 사진입니다. 오늘날 우리들 삶이 고스란히 사진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만들고, 우리 아이들이 뒤따르는 오늘날 삶이 남김없이 사진입니다. 우리 어른들이 아름답게 가꾸지 못한 삶터라, 우리 아이들도 이 나라에서 아름답게 빛날 사진을 가꾸지 못합니다. 우리 어른들은 시골을 마냥 무너뜨리기만 했고, 도시조차 아름다운 ‘마을 공동체’ 되도록 북돋우지 못했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늘 보는 모습이란 텔레비전과 인터넷과 손전화입니다. 우리 어른들부터 숲과 들과 바다와 골짜기와 냇물을 바라보지 않으니, 우리 아이들도 숲과 들과 바다와 골짜기와 냇물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농약 치는 어른 곁에서 농약내음 맡으며 농약질 배우는 아이들입니다. 풀을 뜯고 흙을 살찌우는 어른 곁에서 풀내음과 흙내음 맡으며 시골살이 익히는 아이들입니다. 자가용 몰고 텔레비전 앞에서 스포츠중계에 소리치며 좋아하는 어른 곁에서는 이러한 모습 똑같이 따라하는 아이들입니다. 도시에서도 텃밭을 일구고 이웃사랑과 두레와 품앗이를 이루어 보려 땀흘리는 어른 곁에서는 이러한 삶 찬찬히 지켜보며 배우는 아이들입니다.


  오늘날 한겨레 젊은이들이 이루는 사진이란, 바로 지난날 한겨레 어른들이 이루거나 닦은 사진밭에서 자라는 씨앗입니다. 오늘날 젊은 사진가들이 컴퓨터 프로그램 만지면서 사진을 ‘만든다’고 하지만, 지난날 어른 사진가들은 이 나라 삶자락과 마을과 사람들을 꾸밈없이 수수하면서 살가이 어깨동무하듯 만나면서 사진을 찍지 않았어요. 지난날 어른 사진가들도 살롱사진이니 공모사진이니 예술사진이니 작품사진이니 하면서 ‘사진 만들기’에 지나치게 기울어진 채 살았어요. 그렇다고, 앞으로도 삶사진 아닌 만듦사진만 나온다면, 더 앞으로 새로 태어나 자랄 아이들이 걸어갈 사진길도 이대로 굳어지겠지요. 지난날 어른 사진가들이 ‘사진 만들기’에 푹 빠진 채 살았더라도, 오늘날 젊은 사진가들이 ‘만듦사진’에만 파묻히면 앞으로도 모두 재미없고 사랑없으며 힘없는 사진만 되고 말아요. 마치, 오늘날 볏짚이 농약과 비료와 기계질에 시달리며 힘알이 하나 없이 거무튀튀하며 흙내음 하나 없듯이, 앞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질 사진삶이 쓸쓸한 빛이 된다면 얼마나 슬플까요.


  재미란 억지로 만들지 못해요. 사랑이란 돈으로 사들이지 못해요. 힘이란 권력이나 명예나 전쟁무기가 아니에요. 삶에서 재미가 샘솟고, 삶으로 사랑을 꽃피우며, 삶을 어깨동무하면서 새힘 솟아요. 튼튼하고 아름다우며 향긋한 짚이 다시 이 나라 시골에서 자랄 수 있도록, 재미나고 사랑스러우며 힘찬 사진이 새롭게 이 땅에서 태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웃음으로 어깨동무하는 곳에서 삶이 자라고 사진이 자랍니다. 노래로 활짝 웃는 곳에서 삶이 빛나며 사진이 빛납니다. 풀내음 향긋하게 흐르는 곳에서 삶이 아름답고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4346.10.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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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웃음, 잉카의 눈물 - A Photo journey to Peru
이기식 지음 / 작가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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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64

 


웃음과 눈물을 읽는 사진
― 잉카의 웃음, 잉카의 눈물
 이기식 글·사진
 작가 펴냄, 2005.3.22. 1만 원

 


  사람들 누구나 웃고 웁니다. 사람들 누구나 웃음이 있고 눈물이 있습니다. 웃는 만큼 울고, 우는 만큼 웃습니다.


  사람 곁에서 함께 자라고 시들며 흙으로 돌아갔다가, 이듬해에 다시 씩씩하게 푸른 잎사귀 틔우는 풀도 웃고 웁니다. 풀이 짓는 웃음을 느끼는 사람이 있고, 풀이 흘리는 눈물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풀이 짓는 웃음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으며, 풀이 흘리는 눈물을 못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새가 웃고, 벌레가 웁니다. 개구리가 웃고, 제비가 웁니다. 새는 벌레를 잡아먹으면서 웃고, 벌레는 풀밭에서 노닐면서 웁니다. 개구리는 모기를 잡아먹으면서 웃고, 제비는 나비를 잡아서 새끼한테 먹이면서 웁니다.


  모두들 웃고 울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저마다 다른 삶자리에서 다른 웃음과 눈물로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삶을 짓습니다. 나는 내 웃음을 짓고, 너는 네 웃음을 짓습니다. 나는 내 눈물을 흘리고, 너는 네 눈물을 흘립니다.


.. 잔뜩 겁에 질린 나를 더 무섭게 만든 것은 짐승이 아니라 가이드다. 1미터나 되는 칼을 내 앞에서 이리저리 휘두르며 나뭇가지를 자르며 앞으로 나간다. 혹시 저 녀석이 저 칼로 내게 해코지라도 한다면, 나는 당하는 수밖에 없다. 나는 그 무기를 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서 그 녀석이 내 물건을 차지한다면 적어도 몇 년은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것이다. 내 몸에는 카메라 석 대와 돈이 몇 백 달러나 있기 때문이다 … 그렇지 않아도 어둡던 정글이 더 어두워지더니 이제는 비까지 내리는 것이다. 사진 찍기는 더없이 힘들어졌다. 급한 김에 모자로 사진기를 감싼다. 가이드 녀석이 휙하고 칼을 휘둘러 바나나잎 하나를 잘라서 내게 준다. 이파리 하나가 우선이 된다. 이파리 하나가 내 몸을 거의 다 가린다. 한참을 걸었다. 비가 그친다. 바나나 이파리를 버린다. 참 편리하다는 생각이 든다 ..  (21, 29쪽)


  노래를 합니다. 큰아이는 내 왼쪽에 누이고 작은아이는 내 오른쪽에 누인 뒤 노래를 합니다. 잘 자라고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자장노래를 부르는 동안 목청을 가다듬습니다. 자장노래를 부를 적에 목소리를 곧고 맑게 추스릅니다. 아이들이 즐거우면서 밝은 노래를 들으며 새근새근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느새 나 스스로 즐거우면서 밝은 말을 입으로 읊는 마음이 됩니다. 아이들한테 들려주는 노래는 나한테 들려주는 노래가 되고, 아이들이 듣는 노래는 나 스스로 듣는 노래가 됩니다.


  밥을 차립니다. 아이들이 맛나게 먹을 밥을 차립니다. 아이들이 튼튼하게 자라고 씩씩하게 놀 기운을 얻도록 밥을 차립니다. 밥을 차리는 동안 구슬땀 흘리면서 사랑을 쏟습니다. 온마음 기울여 맛나게 먹을 밥을 차립니다. 아이들은 아침저녁으로 맛나면서 반가운 밥상 받겠지요. 이러는 동안 나 또한 새삼스레 맛나면서 반가운 밥상을 받습니다. 아이들이 먹는 밥 그대로 나도 즐겁고 사랑스럽게 먹습니다. 곰곰이 살피면, 아이들한테 먹이는 밥이란 나 스스로 내 넋과 몸과 숨을 살찌우는 즐겁고 사랑스러운 빛입니다.


  어린 두 아이한테 읽힐 그림책을 헤아립니다. 어린 두 아이가 스스로 챙겨 읽을 그림책을 돌아봅니다. 아무 그림책이나 읽히지 못하고, 아무 그림책이나 아이들이 쥐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듣고 읽을 그림책은 언제나 어버이인 내가 먼저 읽고 살핍니다. 아이들이 먹는 마음밥은 언제나 어버이인 내가 먼저 마음밥으로 삼습니다. 어버이로서 마음밥 즐겁게 얻을 만한 그림책이라고 느낄 적에 아이들한테도 기쁘게 건넵니다.


  아이들이 사랑스럽게 자라려면 어떻게 할 때에 즐거울까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어버이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아가면 됩니다. 어버이 스스로 사랑스럽게 살아가면 아이들은 사랑스럽게 자랍니다. 어버이 스스로 즐겁게 살아가면 아이들은 즐겁게 뛰놉니다. 어버이 스스로 신나게 일하며 예쁘게 노래하면, 아이들은 시나브로 신나게 뒹굴면서 예쁘게 노래합니다.

 

 

 


.. 어찌 저리도 무표정할까. 사진 찍어 달라고 달려온 사내아이 몇 녀석만 생글거릴 따름이다. 처음엔 서너 녀석이 몰려오더니, 이제는 온 동네 아이들이 다 몰려온다. 이곳 사람들은 사진 찍는 것을 싫어한다고 여행안내서에서 읽었다. 그런데 몇 사람을 빼고는 거절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능글능글한 가이드가 유능해서인가 … 우리 같으면 그 선생님은 벌써 목이 두 번도 잘렸을 것이다. 사진기를 꺼내 그것을 찍고 있으니, 뒤에서 뭐라고 소리친다. 사진 찍는 것을 허락받았느냐고 한 중년의 사내가 소리친다. 이럴 때는 편리하다. 아무 말도 못 알아들은 척하면 된다. 일을 끝낸 다음 미소로 답하면 대개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것으로 불충분하면 목례를 잠깐 하고 ‘그라시아스’ 하면 된다. 그것도 안 되면 삼십육계가 상책이다 ..  (35, 46쪽)


  사진을 찍습니다. 날마다 사진을 찍습니다. 내 곁에서 아이들 자라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면서 사진을 찍고, 내 보금자리에서 마주하는 반가우며 즐거운 모습을 찬찬히 살피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내가 찍은 사진은 어떤 누군가한테 보여주려고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찍은 사진은 스스로 즐겁기에 찍는 사진입니다. 작품인 사진이 아닙니다. 삶이 드러나는 사진입니다. 나와 살아가는 아이들은 서로 반가이 맞이하는 한솥밥지기이기에 함께 살아갑니다. 다른 무엇이란 없습니다. 서로 아낄 줄 알고 함께 사랑을 나누고픈 한식구입니다.


  사진을 찍는 길은 한 가지입니다. 즐거움입니다. 하루를 즐겁게 빛내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매무새는 한 가지입니다. 사랑입니다. 날마다 사랑으로 노래하고 싶기에 사진을 찍습니다.


  살아가는 길은 하나입니다. 즐거움입니다. 언제나 즐겁게 살아가고 싶으니,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사랑을 노래하고 싶기에 살아갑니다. 꿈을 이루고 싶기에 살아갑니다. 이야기를 누리면서 조곤조곤 도란도란 속닥속닥 나누고 싶어서 살아가요.


  아마, 사진을 놓고 ‘현대사진’이라 말하기도 하고, ‘예술사진’이라 말하기도 하며, ‘다큐사진’이나 ‘패션사진’이나 ‘보도사진’이라 말하기도 할 테지요. ‘작품사진’이라 말하기도 해요. 그러나, 사진은 사진일 뿐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흙지기한테 여쭈어 보셔요. 이녁은 왜 흙을 갈아 씨앗을 심거나 뿌려 거둡니까, 하고 여쭈어 보셔요. 아기를 낳고 젖을 물리는 어머니한테 여쭈어 보셔요. 이녁은 왜 아기를 낳아 젖을 물립니까, 하고 여쭈어 보셔요.


  시골 흙지기는 ‘농사꾼’이기 때문에 씨를 뿌릴까요? 아기 어머니는 ‘어머니’이기 때문에 젖을 물릴까요?
  무엇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란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해야 한다면 즐겁지 않고, 사랑스럽지 못하며, 반갑지 못합니다.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즐겁게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시켜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고, 사랑스럽게 하는 일이어야 합니다. 무언가 만들어서 보여주어야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되고, 반갑게 맞이하며 꿈을 이루는 일이어야 합니다.

 

 


.. 아마존 정글에 사는 원주민의 사정을 조금 엄밀하게 따져 보자. 그러면 그들이 축제에서도 웃지 않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웃음을 잃어버리게 만든 것은 장사꾼들이다. 장사꾼들은 정글에서 나는 장작, 동물 가죽, 과일 등을 아주 싼값에 사들인다. 그리고는 정글에서 반드시 필요하지도 않는 것을 사도록 했다 … 보통의 식당에서 나는 전식도 다 먹지 못한다. 양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리마에서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극과 극이다.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에 한 끼 아니면 두 끼 정도를 먹는다. 그것도 기껏해야 감자 몇 개 정도 먹는 것이 전부다. 그러니 빈민촌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몸이 호리호리한 것은 당연하다. 반면에 그 이외의 사람들은 엄청 많이 먹는다. 페루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요리와 헬스이다. 그렇게들 많이 먹으니 열심히 살 빼지 않으면 터질 것이다. 물론 토요일 밤의 파티도 빼놓을 수가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토요일 밤이면 디스코텍에서 밤새 춤추고 논다. 빈부의 극심한 격차는 먹고 노는 데서도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  (54, 80쪽)


  보잘것없는 사진은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잘것있는’ 사진 또한 없습니다. 사진을 놓고 이것은 보잘것없다 나눌 수 없고, 저것은 ‘보잘것있다’ 나눌 수 없습니다. 모든 사진은 그저 사진입니다.


  공모전을 노린다든지 작품이나 예술이 되도록 했다든지 하더라도, 더 보잘것없거나 덜 보잘것없지 않을 뿐더러, 더 보잘것있거나 아무런 보잘것있을 수 없습니다. 공모전을 노렸으면 ‘공모전을 노린 무엇’이 됩니다. 작품이나 예술이 되도록 했다면 ‘작품이나 예술인 무엇’이 됩니다. 사진이 아닙니다. 공모전을 노린 그림은 그림이 아닌 ‘공모전을 노린 무엇’이지요. 공모전을 노린 글은 글이 아닌 ‘공모전을 노린 무엇’입니다.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 먹이며 ‘너는 학자가 되어라!’라든지 ‘너는 축구선수가 되어라!’라든지 ‘너는 국회의원이 되어라!’와 같이 말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말할 분이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예 사랑으로 차리는 밥입니다. 그예 사랑으로 차린 밥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은 아이다움을 건사하면서 사랑스럽게 자랍니다. 사랑 아닌 영양성분이나 끼니로 차리는 밥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은 아이다움을 놓치거나 잃습니다. 사랑스러움이 아닌 ‘목적’으로 달려야 합니다.


  대학교에 가려고 중·고등학교에서 입시지옥에 갇혀야 하면 얼마나 불쌍한가요. 대학교에는 가도 되고 안 가도 됩니다. 대학교에서 할 일이 있거나 대학교에서 남다르게 할 공부가 있어야 대학교를 가야지요. 중학교에서는 중학교답게 가르칠 것이 있어야 합니다. 고등학교에서는 고등학교답게 가르칠 이야기가 있어야 합니다. 입시교육이어서는 안 됩니다. 입시교육은 아이들 넋을 망가뜨립니다. 입시교육은 아이를 학교에 보낸 어버이 넋까지 짓밟습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사진가’나 ‘작가’나 ‘예술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은 ‘-家’나 ‘-쟁이’ 아닌 ‘즐김이’나 ‘사랑이’로 살아갈 노릇입니다. ‘사진 즐김이’와 ‘사진 사랑이’로 살아갈 노릇이에요.


  틀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틀을 만들면 사진이 아닌, 틀에 박힌 복제품이나 공산품이 됩니다. 울타리를 쌓지 말아야 합니다. 울타리를 쌓으면 사진하고 동떨어진, 권력과 상업주의와 박제가 되고 맙니다.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자유로운 사진이 될 때에 즐겁습니다. 웃고 우는 삶을 이야기하는 착한 사진이 될 때에 사랑스럽습니다. 사진으로 가는 길이란 삶으로 가는 길하고 같아요.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답게 걷는 길이 삶길이요 사진길입니다.

 

 


.. 페루의 수도 리마는 1년 내내 기후가 온화하다. 365일 내내 15도에서 25도 사이를 오르락내리락 한다. 일교차도 7도 정도에 불과하다. 이처럼 리마의 기온은 거의 환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다 거의 매일 온화한 햇살이 비친다. 거의 1년 내내 아침에 눈을 뜨면 맑은 하늘을 보여준다. 그뿐이 아니다. 높은 건물은 거의 없고 나지막한 건물들이 예쁘게 열 지어 있다 … 어느 부자 나라의 수도가 이처럼 깨끗하고 아름다울까 … 내가 보기에 서울의 하늘보다는 몇 배나 맑다. 해가 질 때면 황홀한 일몰을 즐길 수도 있다. 정직하게 말하면 세계의 다른 대도시들보다 하늘은 더 맑다 … 실제로 낮은 지역으로 내려오는 것이 고산병을 치유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다. 이제는 주위의 산야도 즐길 수 있고, 흐르는 물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맑고, 햇살은 한없이 따사롭다. 이제 정신이 드는 것 같다. 며칠간 시달리던 고산병도 이제는 완치가 된 듯하다. 산길 옆의 풀밭에서 할머니와 어린아이 둘이 함께 앉아 있따. 아이 둘은 할머니 주위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양털로 실을 잣는다. 그 옆에는 아이의 어머니인 듯한 젊은 아주머니가 낫으로 풀을 벤다. 또 한참을 내려오니 아이를 등에 업은 아주머니가 라마를 몰고 어디론가 간다. 조랑말과 같이 노는 아이도 만났다. 정겨운 풍경이다 ..  (68, 115쪽)


  고려대학교 독문과 교수라고 하는 이기식 님이 내놓은 사진책 《잉카의 웃음, 잉카의 눈물》(작가,2005)을 읽습니다. 이기식 님은 칠레라는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온몸으로 삶을 느낍니다. 한국에서 칠레로 날아간 뒤, 칠레 이곳저곳을 두루 두 다리로 밟으면서 이야기를 듣습니다. 칠레사람 모습을 바라보고 칠레사람 삶자리를 지켜봅니다. 때때로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진을 찍지만, 사진기에 앞서 눈으로 보고 귀로 들으며 코로 맡습니다. 살갗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헤아리며 머리로 생각합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칠레에 갔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사진책을 내거나 사진전시를 열려고 칠레에 갔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한국에서 원주나 장흥이나 밀양으로 다녀오면서 원주사람과 장흥사람과 밀양사람 삶을 느낄 수 있어요. 마을마다 사람이 다르고 삶이 다르며 이야기가 달라요. 오늘날 한국은 모두 ‘서울바라기’이고, 서울은 ‘미국바라기’나 ‘유럽바라기’로 흐르지만, 아무리 ‘서울바라기’라 하더라도, 원주는 원주답고 장흥은 장흥다우며 밀양은 밀양답습니다.


  칠레는 칠레답습니다. 칠레다운 빛이 흐르고 칠레다운 노래가 있습니다. 칠레다운 무늬가 있으며 칠레다운 꿈이 있어요.


.. 사진을 몇 장 더 찍고 집앞에서 동네를 내려다본다. 소녀가 다가오더니 자기를 한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깜짝 놀라 무슨 말이냐고 되묻는다. 자기도 한국에 가서 일하고 싶단다. 무슨 일을 할 수 있느냐니까 뭐든지 할 수 있단다. 돈을 많이 벌려면 일본이나 미국에 가는 게 낫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나라들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따. 마치 무작정 상경하려는 시골 처녀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빌마가 적극적으로 나서는 바람에 여러 집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수고비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약간의 돈을 주었더니 행복한 얼굴이다. 그러고는 곧바로 아들과 함께 가게로 달려간다. 아들과 함께 과자 한 봉지와 아이스크림 한 개를 손에 들고 다시 온다. 아주 행복한 얼굴이다 ..  (85, 87쪽)

 


  웃음과 눈물을 읽는 사진입니다. 웃음을 찍고 눈물을 찍는 사진입니다. 웃음과 눈물을 주고받는 삶입니다.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울면서 이야기하는 삶입니다. 아이들과 복닥이면서 웃음과 눈물이 샘솟습니다. 동무와 사귀면서 웃고 웁니다. 이웃과 어깨를 겯고 두레와 품앗이를 하면서 웃음과 눈물이 흐릅니다.


  낮이 흐르고 밤이 지나갑니다. 해가 뜨고 달이 뜹니다. 별이 내리고 비가 내립니다. 나락이 익고 푸성귀가 짙푸릅니다. 호박알 굵고 시래기가 마릅니다.


  텃새는 겨우내 먹이를 찾아 이 집 저 집 이곳저곳 날아다닙니다. 철새는 알맞춤한 보금자리를 찾아 바지런히 날아다닙니다. 풀과 나무는 꽃을 피워 씨앗을 떨굽니다. 흙은 모든 숨결 고이 받아들여 따사로운 삶자리 내어줍니다.


  아침해가 뜹니다. 저녁해가 집니다. 동이 트며 새들이 노래하고 풀벌레는 살짝 잠듭니다. 겨울 앞두고 잠자리들 알을 낳고는 하나둘 기운 잃으며 숨을 거둡니다. 잠자리 주검이 풀밭에 스러지고 냇물에 둥둥 뜹니다.


  우리들 살아가는 이곳에 어떤 이야기 있는가요. 우리들 새롭게 눈을 뜨며 맞이하는 하루에 어떤 이야기 찾아드는가요. 우리들 서로 어떤 눈빛으로 마주보면서, 오늘 하루 어떤 이야기 길어올리고 싶은가요.


.. 시내 가까이에 사는 빈민들은 가파른 언덕에 닥지닥지 집을 짓고 산다. 산사태라도 나면 큰 재앙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비가 거의 오지 않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곳 만차이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다. 그러나 교통이 여간 나쁘지 않다. 대중교통이 없으니 걸어서 그 언덕을 넘어 일하러 다닌다. 그래서 누런 색깔의 언덕에 하얀 길이 나 있다. 마치 눈 온 다음에 난 발자국처럼 ..  (97쪽)


  이기식 님은 《잉카의 웃음, 잉카의 눈물》이라는 사진책에서 ‘잉카’를 읽습니다. 잉카를 만났고, 잉카와 사귀었으며, 잉카와 지냈기 때문입니다. 이기식 님이 만난 잉카는 이기식 님한테 ‘이곳(잉카 땅)에 있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기식 님은 그곳(잉카 땅)에서 그곳 이야기를 듣습니다.


  잉카사람은 잉카사람 스스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쓸까요? 잉카사람은 스스로 사진을 찍거나 글을 쓰지 않으면 이녁 모습과 삶을 아로새기지 못할까요? 어쩌면, 잉카사람은 굳이 스스로 글을 안 쓰고 사진을 안 찍어도 이녁 삶을 고스란히 글로도 사진으로도 남기는 셈 아닐까요? 잉카사람은 글이나 사진 없이 오로지 이녁 삶으로, 이녁 웃음과 눈물로 먼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또 먼먼 앞날이 찾아오도록, 즐겁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가슴속에 아로새기지 않을까요?


.. 이들은 자신의 모자를 스스로 뜨개질한다. 어린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모두가 자신의 모자를 만드는 것이다. 이들은 길을 가면서도 아주 능숙한 손놀림으로 뜨개질을 한다. 이들은 자기 모자를 스스로 뜨개질한다는 데 대해서 무척 자랑스러워 한다. 여자들도 화려한 허리띠를 두르고 다닌다 … 중년의 남자가 호수 부근에 움막 같은 집을 짓고 있다. 곧 결혼할 아들을 위해 짓고 있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잠깐 기다리라고 한다. 그러고는 황급히 빨간색의 꼬깔 모자와 전통의상을 입는다. 이제는 찍어도 좋다고 말한다. 전통의상도 걸치지 않고 사진을 찍는 것은 모욕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127, 128쪽)


  사진으로 찍으면 사진이 남습니다. 글을 쓰면 글이 남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 이야기가 남습니다. 마음으로 아로새기면 마음에 남습니다. 사랑을 주고받으면 사랑이 태어나 사랑이 남습니다.


  ‘사진은 기록’이라고 하는데, 사진만 기록이 아닙니다. ‘글로 써야 남는다’고 하는데, 글만 남지 않습니다. 마음에 아로새긴 모습을 남한테 보여주지 못한다고 하지만, 마음에 아로새긴 모습을 조곤조곤 이야기로 들려주면 이웃사람 마음속에도 하나둘 그림으로 어떤 모습이 피어납니다. 글로 남기지 않았어도 가슴으로 아로새긴 이야기를 언제라도 다시 꺼내어 이웃과 동무한테 즐거이 들려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사람은 웃음과 눈물로 살아갑니다. 이야기는 웃음과 눈물로 이루어집니다. 사진도 글도 언제나 웃음과 눈물을 마주합니다.


  이야기가 있을 적에 사진이요 글입니다. 이야기란 삶인 만큼, 삶이 드러날 적에 사진이요 글입니다. 삶이란 웃음과 눈물이니, 사진이나 글이 되자면 마땅히 웃음과 눈물이 잔잔히 드러날 수 있어야 합니다.


.. 이 책에 실린 사진은 대단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사진들이다. 필자의 경험과 생각을 사진으로써 표현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  (135쪽)


  이기식 님은 이기식 님이 마음으로 만난 사람들 삶을 사진과 글을 빌어 나타냅니다. 사진책 《잉카의 웃음, 잉카의 눈물》은 이기식 님 손을 거쳐 태어납니다. 이기식 님은 대단한 사진가 아니요 훌륭한 작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웃을 만나려 한 사람이요, 동무와 사귀려 한 사람입니다.


  앞으로 다른 어느 분은 부탄에서 이웃을 만나 사진과 글 곱게 어우러진 이야기 선보일 수 있습니다. 또 어느 분은 일본에서, 필리핀에서, 네팔에서, 마다가스카르에서, 이집트에서, 볼리비아에서, 덴마크에서, 저마다 다른 목소리와 숨결과 사랑이 속삭이는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언제나 바로 이곳에 있는 사진입니다. 언제나 바로 이곳에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4346.10.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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