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거기에 그들처럼 - 아프리카.중동.아시아.중남미 2000-2010
박노해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72

 


게바라는 사진기를 안 들었다
― 나 거기에 그들처럼
 박노해 사진
 느린걸음 펴냄, 2010.10.1.

 


  체 게바라 님은 처음에는 총을 들고 혁명을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 총을 들어 이룬 혁명을, 이 다음에는 어떻게 일구었을까요. 총을 내려놓고는 호미와 연필을 들었어요. 어쩌면, 호미와 연필이 아닌 망치와 연필을 들었달 수 있고, 스패너 또는 드라이버하고 연필을 들었달 수 있습니다.


.. 아름다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었다 ..  (289쪽)


  총칼에 탱크와 미사일까지 거느린 독재권력자를 몰아내려면 총을 나란히 들어야 할 수 있습니다. 무시무시하게 총질을 해대는 독재권력자는 총맛을 보아야 비로소 눈을 번쩍 뜰는지 몰라요. 평화로운 손길이나 따스한 사랑을 모르니, 평화로운 손길을 내밀거나 따스한 사랑을 베풀어도 하나도 못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폭력을 폭력으로 맞설 적에는 폭력을 휘두르는 쪽에서 더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앙갚음하곤 합니다. 폭력을 다스리는 길은 폭력밖에 없다고 여겨, 스스로 폭력굴레에 갇히기까지 해요. 고문기술자라는 이름을 내걸며 독재정권 지키는 데에 한몫 단단히 한 바보스러운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이 사람들을 고문한 대로 이들을 고문하면, 이 고문기술자들은 잘못을 뉘우칠까요. 이녁이 이제까지 어떤 짓을 했는지 제대로 깨달아 크게 뉘우치면서 고개를 숙일까요.


  어떤 전쟁도 전쟁으로 몰아내지 못합니다. 전쟁으로 전쟁을 몰아내면 다시 전쟁이 찾아듭니다. 전쟁무기 내세워 땅을 넓히려 하면, 맞선 쪽에서도 똑같이 전쟁무기 앞세워 땅을 되찾으려 할 뿐이에요. 전쟁무기는 평화가 아닌 전쟁에만 이바지합니다. 군대는 평화가 아닌 전쟁을 지킵니다. 평화를 바란다면 평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평화를 누리려 한다면, 삶과 넋과 말이 모두 평화롭게 거듭나야 합니다.


.. 과거를 팔아 오늘을 살고 싶지 않았다. / 아니, 사랑이 없다면, /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  (289쪽)

 

 


  지구별에 평화를 불러들이는 몸짓은 언제나 따사롭습니다. 지구별에 사랑이 감돌도록 이끄는 손짓은 늘 보드랍습니다. 지구별에 꿈이 푸르게 우거지도록 북돋우는 마음짓은 노상 너그럽습니다. 전쟁을 하면서 즐겁게 웃지 못해요. 내가 남을 죽이면, 남도 나를 죽이기 마련이에요. 피로 얻은 열매는 피로 갚을 뿐입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면, 남도 나를 사랑할밖에 없어요. 사랑으로 얻은 열매는 사랑으로 돌려주기 마련이에요.


  전쟁은 전쟁 씨앗을 뿌려 새 전쟁 피어나게 합니다. 사랑은 사랑 씨앗을 드리워 새 사랑 자라나게 합니다. 우리 손에는 무엇을 쥐어야 할까요. 우리 손으로 무엇을 가꿔야 할까요. 우리 손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까요.


  예부터 도시를 이루어 권력을 한손에 거머쥔 이들은 언제나 전쟁 미치광이 되었습니다. 어느 역사책을 보더라도 도시에서 권력을 누리는 이들은 노상 전쟁에 미쳐서 전쟁짓 하느라 날뛰었어요.


  예부터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만지고 풀을 먹던 이들은 언제나 사랑을 노래하고 평화롭게 살았어요. 어느 역사책을 보더라도 시골에서 조용히 흙과 풀을 누리며 사랑을 노래하고 평화롭게 살던 이들 모습은 하나도 안 담아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전쟁을 벌이며 역사책을 써요. 사람들은 평화롭고 사랑스레 살 적에는 굳이 역사책을 안 써요. 사람들은 전쟁 미치광이가 되면서 학문을 하고 지식을 넓히며 권력을 굳힙니다. 사람들은 평화롭고 사랑스레 흙과 풀을 누리는 동안 학문도 지식도 권력도 부질없는 줄 슬기롭게 깨달아요.


  씨앗을 심어 알뜰히 돌보며 거두면 될 뿐이에요. 몸으로 익히고 마음으로 알면 돼요. 따로 책으로 써야 하지 않아요. 풀과 꽃과 나무마다 사랑스레 이름을 붙여서 부르면 돼요. 굳이 학술이름이니 라틴말이름이니 욀 까닭이 없어요. 무슨 갈래로 나누고 어떤 갈래로 그러모아야 하지 않아요.

 


.. 세계의 진실은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다. / ‘사랑한 만큼 보이는 것’이다. / 사랑은 곧바로 쏘아진다! / 자신의 가슴을 관통 당하지 않으면 / ‘불꽃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  (290쪽)


  이웃으로 지내면 서로를 살가이 깨달으면서 깊이 알 수 있습니다. 이웃으로 지내지 않으면 서로를 제대로 모를 뿐더러 얕게 훑을 뿐입니다. 나무 한 그루를 이웃으로 여겨 살가이 지내면 나무살이를 아주 깊고 넓게 깨닫고 압니다. 나무 한 그루를 오직 학문으로 다루거나 파헤치려 한다면, 나무를 베어 나이테를 읽거나 나무 성분을 살핀다 하더라도 나무살이를 제대로 모를 뿐더러 나무를 죽이고 말아요.


  제비 한 마리를 잡아다가 배를 갈라야 제비를 잘 알까요? 제비 표본이나 박제를 만들어야 제비를 연구할 수 있을까요? 제비와 이웃이 되어 제비가 둥지를 지을 만한 처마가 있는 시골집에서 흙을 만지며 언제나 제비랑 인사를 하고 지내면, 대학교를 안 다니고 논문을 안 쓰더라도 어느 누구보다 제비를 잘 알고 제비하고 사랑스레 삶을 짓습니다.


  알자면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알려면 이웃이 되어야지요. 설문지 들고 캐묻는대서 알지 않아요. 보고서 쥐고 달달 외운대서 알 수 없어요. 인터뷰를 하면 알 수 있나요?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곁에서 이웃이나 동무로 지내야 알아요. 곁에서 한솥밥 먹으며 어깨동무를 해야 비로소 알아요.


  누군가를 사진으로 담으려 한다면, 누군가하고 이웃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 이웃이 되어 살가이 사귀고 아낄 때에 비로소 차근차근 알 수 있어요. 서로 이웃이 되지 않으면, 서로 마음으로 아끼지 않으면, 그럴듯한 모습은 사진으로 찍더라도, 이야기가 될 사랑과 빛과 넋과 삶은 사진에 조금도 못 담습니다.


.. 시인이자 노동자이자 혁명가로 / 온몸을 던져 살아온 나는, / 슬프게도, 길을 잃어버렸다 ..  (291쪽)

 

 


  노동자이자 혁명가로 살다가 노동도 혁명도 내려놓아야 한 채 시인이 되었던 박노해 님이 모든 굴레와 짐을 내려놓으며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이웃을 만나러 길을 떠나고, 이웃을 만나 웃고 울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떠난 길은 아니에요. 사진을 찍어 사진책 내놓으려는 길은 아니에요. 다큐사진을 이룬다거나, 고발이나 폭로를 하려는 길은 아닙니다. 그저 이웃을 만나러는 길에 사진기를 손에 쥐어요. 예쁜 이웃을 만나면서 사진기를 손에 듭니다. 살갑게 이웃사랑을 하면서 저절로 사진기를 품에 안습니다.


.. 사진가와 지역은 운명적인 관계가 있다. / 아프리카……중동……아시아……중남미…… / 내 두 발은 왜 그리로 이끌려 갔던 걸까. / 그들은 왜 나를 그 자리로 불러세운 걸까 ..  (291쪽)


  사진책 《나 거기에 그들처럼》(느린걸음,2010)을 읽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곳에 그들하고 똑같이 있어요. 우리는 언제나 이곳에 있고, 그들은 우리한테 이웃으로 찾아와요. 우리는 그들, 아니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이웃은 우리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 이웃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저마다 다른 곳에서 저마다 다른 사랑을 꽃피웁니다. 서로 다른 자리에서 서로 다른 사람을 돌보고 아끼며 보듬습니다. 멀리 떨어진 데에서 살아가는 듯하지만, 모두 똑같은 지구별에서 살아갑니다. 모두 똑같은 햇볕을 받고, 모두 똑같은 바람을 마셔요. 모두 똑같은 지구별 바다와 냇물이 베푸는 물을 마시고, 모두 똑같은 지구별 나무와 풀이 베푸는 푸른 숨결을 맞아들여요.


  체 게바라 님은 사진기를 안 들었습니다. 체 게바라 님은 낫과 연필을 들고 땀흘리느라 바빴습니다. 혁명이란 삶이고, 삶인 혁명을 이루려면 총으로는 안 될 뿐 아니라, 언제나 호미로 흙을 일구고 보듬을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즐거운 이야기를 차곡차곡 적어서 이웃들과 노래로 누려요. 호미로 삶을 짓고 연필로 삶을 노래합니다. 호미로 삶을 가꾸고 연필로 삶을 사랑하지요.


  박노해 님이 손에 쥔 사진기는 연필과 같은 구실을 할까요. 박노해 님이 손에 잡은 사진기는 연필과 같이 삶을 노래하거나 삶을 사랑하는 빛이 될까요. 4346.12.9.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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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닷 Photo닷 2013.12 - Vol.1, 창간호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지음 / 포토닷(월간지)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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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52

 


마음이 모이고 만날 때에 사진 하나
― 사진잡지 《포토닷》 1호
 포토닷 펴냄, 2013.12.1.

 


  2013년이 저무는 섣달에 사진잡지 《포토닷》 1호가 태어납니다. 지구별을 두루 살필 적에 한국은 ‘사진기 한 대쯤 갖춘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습니다. 지난 2006년에 벌써 ‘사진기 천만 대’를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집집마다 사진기 한 대쯤 있는 셈이고, 필름사진기나 디지털사진기가 아니더라도 손전화로도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모든 사람이 사진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기까지 합니다.


  사진기를 갖추거나 쓰는 사람은 무척 많습니다. 아니, 사진을 찍거나 사진기 있는 사람이 ‘무척 많다’기보다 ‘누구나 사진기 있’고 ‘누구나 사진을 찍’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거나, 사진을 어떻게 즐기는가 하고 살피거나, 사진을 찍는 매무새와 넋과 빛을 배우는 일은 드물어요. 이를테면, ‘사진 초상권’이나 ‘사진 저작권’을 나누거나 배우지 못한다고 할 만해요.


  사진을 찍지 말라는데도 사진기 들이미는 사람이 있어요. 몰래몰래 사진을 찍고는 몰래몰래 발표하거나 공개하는 사람이 있어요. 연예인이나 정치인이나 인기인뿐 아니라 수수한 여느 사람들까지 엄청난 사진물결에 휩쓸려요.


  가만히 돌아보면, 우리 사회는 아름답거나 올바르게 흐른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들 살아가는 이 나라는 한국이요, 한국말을 씁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쓰는 이가 무척 드물어요.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마을에서도 일터에서도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가르치거나 이야기하거나 배우지 않습니다. 공공기관 공문서조차 중국 한자말·일본 한자말·미국 영어를 거리끼지 않고 써요. 아니, 한자나 영어를 써야 멋있거나 똑똑하거나 대단하다는 듯 여기는 흐름이 있어요.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 올바로 배우거나 깨닫거나 생각하도록 돕는 잡지라든지 매체라든지 책이 매우 드뭅니다. 아니, 한국말 슬기롭게 배우거나 나누도록 돕는 잡지는 한 가지조차 없다고 할 수 있어요.

 

 


  더 돌아보면, 이제 한국에서 집집마다 자가용 한 대나 두 대쯤 거느리는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가용을 몰면서도, 뺑소니와 음주운전이 줄어들지 않아요. 거칠거나 무시무시하게 달리는 자동차 많을 뿐 아니라, 걷는 사람과 자전거와 아이들 살뜰히 살피는 어른이 퍽 적어요.


  물질과 문명과 기계와 자본은 있지만, 이들을 다루거나 보듬는 ‘마음’이 없는 한국이지 싶어요. 학교와 집과 정부에서 ‘교육’을 말하기는 해도, 모두들 대학입시에 얽힌 입시교육일 뿐, 아이들이 삶을 배우고 사랑을 나누는 참다운 꿈을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으로 나아가지는 않아요. 이런 마당에, 한국 사진문화가 올바르며 아름답고 즐거우면서 사랑스레 뿌리내리거나 퍼지기를 바라는 일은, 섣부르다거나 배부르다거나 바보스러운 잠꼬대일는지 모릅니다.


  사진잡지 《포토닷》 1년 정기구독을 합니다.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사진책도서관’을 꾸리는 사진지기이니 즐겁고 반갑게 정기구독을 합니다. 1호를 받아 봅니다. 사진잡지 내는 넋을 “마침점이 아닌 어디를 향해, 무엇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사진의 무수한 점과 점들이 모이고 섞이는 창을 지향합니다. 사진인들이 출자자와 운영자로 참여하는 포토닷 협동조합 준비위원회가 발행합니다.” 하고 밝힙니다. 점이란 자그마한 빛이겠지요. 커다랗거나 대단한 빛이 아닌 자그마한 빛이 점일 테지요. 수많은 점이 모여서 새로운 점이 되고, 이 새로운 점이 모이고 또 모여서 새로운 사진을 이룹니다.


  어떤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이름난 작가 몇몇이 있어야 사진문화가 발돋움하지 않아요. 대단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으며 이름나지도 않은, 여느 수수한 사람들이 사진을 좋아하고 아낄 때에 사진문화가 발돋움한다고 느껴요. 손전화로 동무들끼리 사진을 찍는 고등학교 아이들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빛으로 사진을 좋아하고 아낄 때에 사진문화가 발돋움해요. 작가로 뛰는 어른이든 작가 아닌 즐김이로 사진을 좋아하는 어른이든, 맑은 눈망울과 밝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진으로 차곡차곡 담을 적에 사진문화가 발돋움해요.

 

 


  “아카이브 사진이라는 것이 어렵게 느껴질 수는 있겠지만, 사실 누군가의 기념사진들이다(26쪽/이경민).” 하는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우리가 찍는 사진이란 참말 모두 ‘기념사진’입니다. 예술가가 찍어야 사진이겠어요? 이때에도 사진이겠지요. 사진가가 찍어야 사진이겠어요? 사진이 좋다고 여겨 사진기를 장만했으면 누구나 사진을 찍겠지요.


  즐겁게 살려고 사진을 찍어요. 즐겁게 놀고 일하며 어깨동무하고 싶어 사진을 찍어요. 보도사진만 찍어야 하지 않아요. 상업사진을 찍어야 사진가로 돈벌이 할 수 있지 않아요. 다큐사진을 찍어야 사진빛을 밝히지 않아요. 어느 갈래 사진을 찍든, 스스로 삶을 밝히며 누리고 가꾸는 즐거운 마음이면 넉넉해요.


  “1988년, 이제 갓 20대에 접어든 영국 출신의 이 포토저널리스트 지망생은 캄보디아로 향했다. 크메르루즈 반군을 취재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취재 의뢰를 받은 매체도, 찍은 사진을 사줄 매체도 없었다. 당시 그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시간’이었다(29쪽).” 하는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그래요, 이름난 작가이든 아직 이름 안 난 작가이든, 우리는 ‘시간’을 들여 사진을 찍습니다.


  느긋하게 찍어요. 너그럽게 찍어요. 넉넉하게 찍어요.

 


  웃고 노래하면서 사진을 찍어요. 춤추고 얼싸안으면서 사진을 찍어요. 함께 밥 한 그릇 나누어 먹으면서, 서로 손을 맞잡아 땀을 흘려 논밭을 갈면서 사진을 찍어요.


  바쁘게 서둘러서 찍을 수 있는 사진은 없어요. 후딱후딱 찍어 버릴 사진은 없어요. 참말 사진 한 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즐겁게 찍자면, ‘내 시간’과 ‘네 시간’이 살가이 만나서 하나가 되어야지 싶어요.


  “20대 초반 사진학과를 다닐 때의 한 수업이 생각이 난다. 파인아트 수업이었는데, 내가 누구인지 자신을 표현하는 사진을 찍어 오라는 과제가 주어졌다. 학생들이 발표한 사진을 본 교수의 첫 마디는 ‘갓 스물이 넘은 파릇파릇한 애들이 왜 이렇게 어두운 얘기뿐이냐’는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랬다. ‘행복한 것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요. 좋은 건 그냥 좋은 거죠. 하지만 뭔지 모를 답답하고 우울한 느낌은 자꾸만 고민하게 돼요. 내가 왜 이런 걸까? 무엇 때문에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저도 모르는 그런 감정들을 사진으로 해소시키고 싶었어요.’(92쪽/김소윤)” 하는 이야기를 되짚습니다. 갓 스물이라는 나이라 해서 파릇파릇할 수 없어요. 갓 스물이란, 이제 겨우 입시지옥에서 벗어난 나이예요. 입시지옥에 짓눌려야 하는 아이들은, 이름은 ‘푸름이(청소년)’라 하지만, 막상 푸르게 꽃피우지 못해요. 새벽부터 밤까지 햇볕 한 줌 못 쬐어요. 시원한 바람 한 숨 못 쐬어요.


  시골 아이들조차 들판을 달리지 못하고, 숲길을 거닐지 못하며, 바다에 몸 담그지 못해요. 시골 고등학생과 중학생도 입시지옥에 휘둘려요. 시골 아이들도 서울 강남에서 내려온 영어강사와 수학강사한테서 특별강의를 받아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가도록 채찍질을 받아요.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가는 고작 스물밖에 안 된 가녀린 아이들은 그야말로 가녀립니다. 꿈도 빛도 삶도 없이, 오직 시험문제만 들여다보다가 대학생이 되었어요. 어떻게 살아가면 즐거울까 하고 생각할 수 없이 갇힌 채, 비로소 사진기를 손에 쥐어요. 이 아이들이 무엇을 찍을 수 있을까요. 이 아이들한테 무엇을 찍으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지만 내 머릿속의 상상력을 꺼내서 한 컷 한 컷 자세하게 그린다(111쪽/박경일).” 하는 이야기를 되뇝니다. 누구나 머릿속으로 그린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습니다. 머릿속에 환하게 그리는 이야기 있어야,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짓고 춤을 선보입니다. 머릿속에 환하게 그리는 이야기 없으면, 글도 못 쓰고 그림도 못 그릴 뿐 아니라, 사진도 못 찍습니다.


  “2003년 12월 어느 날이다. 한창 잘 나가는 모 카메라 회사가 사진상을 제정하여 첫 시상식을 초호화호텔인 역삼동 리츠칼튼호텔에서 개최한다고 하여 조금은 차림새에 신경을 쓰고 찾아간 적이 있다. 그런데 호텔 입구에서 입장을 불허당한 몇몇 사진인들이 웅성웅성 모여 있었다. 이유인즉 차림새가 단정치 않다며 호텔 측에서 출입을 제한했단다(122쪽/진동선).” 하는 이야기를 읽다가 웃음이 터집니다. 우하하 하고 큰웃음 터집니다.


  나는 저 역삼동 리츠칼튼호텔 일꾼들한테 한 마디 여쭙고 싶어요. 여보셔요, 사진상 받는 사진가가 1회용사진기를 써서 훌륭한 사진을 찍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소? 편의점에서 만 원짜리 1회용사진기를 사서 아름다운 사진을 찍은 사람이 사진상을 받는다면, 이녁은 이 사진가도 출입제한 하시겠소? 천만 원짜리 사진기를 써야 사진가요? 이천만 원짜리 사진기를 써야 신문사 사진기자요? 하다못해 백만 원쯤 되는 사진기를 다루어야 사진가나 사진기자요?


  양복을 입어야 사진을 잘 찍소? 고무신차림에 시골에서 흙밥 먹는 사람은 사진을 못 찍소? 까만 자가용을 운전수 끼고 몰아야 사진을 잘 찍소? 자전거를 달리거나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은 사진을 못 찍소?


  “요즘 젊은 사진가들 중에는 스스로 아티스트로 불리어지길 원하는 사람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진가들은 사진이라는 매체를 사용해 작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사진가라고 당당히 부르는 게 맞지 않을까요(138쪽/이경민).”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빙그레 웃음짓습니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가’지요. 한국말로 하자면 ‘-장이’와 ‘-쟁이’를 붙일 수 있어요. ‘쟁이’는 어떤 일이 아직 무르익지 않으나 꾸준하게 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장이’는 어떤 일이 아주 무르익어 훌륭한 솜씨와 빛을 선보이는 사람을 가리켜요. ‘사진장이’라 하면 사진길 훌륭히 열거나 빛낸 이요, ‘사진쟁이’는 차근차근 사진길 걸으며 제 빛을 찾으려는 이예요. 다른 한편, ‘사진지기’라는 이름을 쓸 만해요. 사진을 아끼고 사랑하는 넋으로 사진벗과 어깨동무하면서 사진비평을 쓰고 사진창작도 하며 사진전시관이나 사진책도서관을 꾸리는 이들, 또 사진책을 엮거나 사진잡지를 내는 이들은 모두 사진지기예요. 사진을 지키고, 사진을 가꾸며, 사진을 밝히기에 사진지기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스스로 ‘아티스트’라는 이름을 쓰려 한다면 좀 안쓰럽구나 싶어요. 적어도 ‘사진예술가’라 하면 돼요. 사진으로 예술을 하려 한다면, 말 그대로 ‘사진예술가’가 될 테니까요.


  아무쪼록 서로 즐겁게 사진을 누리기를 빌어요. 사진을 찍는 작가이든 여느 사람이든, 사진을 가르치는 교수나 사진을 배우는 학생이든, 누구나 스스럼없이 손을 맞잡으며 사진을 노래하고 즐길 수 있기를 빌어요. 사진잡지 《포토닷》이 1000호, 2000호, 3000호를 내놓아 우리 사진문화를 환하게 빛낼 수 있기를 기다려요. 4346.1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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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보다 오래 남는 사진 찍기
강영의 글.사진 / 북하우스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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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읽는 사진책 150

 


좋아하는 대로 찍는다
― 여행보다 오래 남는 사진 찍기
 강영의 글·사진
 북하우스 펴냄, 2005.3.7.

 


  《여행보다 오래 남는 사진 찍기》(북하우스,2005)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이 책은 여행책 아닌 사진책입니다. 여행하는 즐거움보다는 사진을 찍는 즐거움을 이야기합니다. 책 첫머리를 보면 “더 좋은 차를 타기 위해 돈을 모으는 것이 행복한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나의 경우 내 소유의 집이나 차가 없더라도 혹은 그런 것들을 가지기 위해서 몇 년간 유예기간을 갖게 되더라도 긴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면 행복한 삶을 사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1쪽).” 하는 이야기가 흘러요. 자가용과 아파트보다는 여행이 한결 즐겁다고 말해요. 사람마다 삶이 다르니, 누군가는 자가용으로 가고, 누군가는 아파트로 갈 테지요. 누군가는 자전거로 갈 테며, 누군가는 도시 아닌 시골 논밭으로 갑니다. 그리고, 강영의 님은 여행으로 가면서, 사진책 하나 내놓습니다.


  처음 여행길에 나선 강영의 님은 “어딜 가든 폼 나는 카메라 가방을 들고 다니는 내 모습은 스스로도 좀 멋져 보인다. 그리고 나에게 ‘나는 언제나 카메라와 함께’라는 자기 위안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원하는 순간에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다(25쪽).” 하고 말합니다. 딱히 사진을 배운 적이 없으니, 사진기를 가방에 집어넣을 뿐, 어깨에 걸치거나 손에 쥐는 매무새를 못 익혔을 수 있어요. 사진기를 파는 가게에서 손님더러 ‘손님, 사진을 찍으려면 사진기는 가방에 넣지 말고 들고 다니셔요. 사진가방은 없어도 돼요.’ 하고 말하는 일 없어요. 사진기 파는 가게에서는 사진가방 나란히 팔려고 할 테지요. 사진기 처음 장만하는 분들은 으레 이런 말 저런 말에 휩쓸려 사진가방이며 세발이며 여러 가지를 나란히 장만할 테고요.


  사진을 찍든 책을 읽든 똑같습니다. 한꺼번에 백 권 천 권 장만해서 책을 읽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한 권씩 차근차근 장만해서 읽으며 스스로 책눈을 넓힐 적에 더 즐겁고 오래 읽기 마련이에요. 사진장비 또한 맨 처음에는 가볍게 사진기 하나와 렌즈 하나부터 해서, 차근차근 이것저것 쓸모와 쓰임새에 맞게 갖출 때에 한결 즐겁습니다. 돈이 넉넉해 책을 십만 권 한꺼번에 장만한다 하더라도 이 책들 언제 다 읽겠어요. 돈이 많아 값진 사진장비 한꺼번에 마련한다 하더라도 이 장비를 알뜰히 쓰기는 어려워요.


  사진을 찍는다고 할 적에는 수백 장이나 수만 장을 찍을 생각이 아닙니다. 저마다 마음에 남는 사진을 찍고 싶으니 사진기를 장만합니다. 남이 찍은 사진을 구경할 적에도 즐겁지만, 스스로 사진을 찍어 스스로 아름다운 빛을 누리고 싶어요. 이리하여, “때로 한 장의 사진이 내 상상력을 자극한다(75쪽).”와 같은 이야기처럼, 다문 사진 한 장 찍으려고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높은 멧봉우리를 오르내리기도 하고, 먼 바다로 나가기도 하며, 밤을 꼴딱 지새우기도 합니다. 다문 사진 한 장 찍으려고 한 해를 기다려 가을빛 무르익은 들판에 서기도 해요. 다문 사진 한 장 찍고 싶어 한국에서 무척 멀리 떨어진 나라로 신나게 찾아가기도 하지요.

 

 


  즐겁게 찍으려는 사진이니, “셔터를 누르고 후회한 적은 거의 없지만, 누르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한 적은 많다(81쪽).”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내놓을 작품으로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삶을 즐기려고 찍는 사진이에요. 남한테 자랑하려고 찍는 사진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을 곱게 밝히려고 찍는 사진입니다.


  그러면, 사진은 어떻게 찍어야 할까요.


  사진길은 하나입니다. 저마다 좋아하는 대로 찍으면 돼요. 저마다 사랑하는 대로 찍으면 돼요. 저마다 즐거운 대로 찍으면 돼요. 강영의 님은 “나는 브라질이 참 좋다. 왜냐하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113쪽).” 하고 말합니다. 이 말마따나 강영의 님이 브라질에서 찍은 사진은 보기에 좋습니다. 강영의 님 스스로 브라질을 ‘좋다’고 여기니, 브라질에서 찍은 사진은 보기에 ‘좋’아요. 마음에 드는 사람들과 만나 사진을 찍으니 ‘마음에 들’ 만한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길은 삶길입니다. 삶을 즐길 때에 사진을 즐깁니다. 삶을 즐기지 못하면 사진을 즐기지 못해요. 웃음이 묻어나는 삶에서는 웃음이 묻어나는 사진을 빚어요. 웃음이 없는 삶에서는 웃음이 없는 사진만 낳아요.


  좋아하는 길대로 삶을 일굴 때에 좋아요. 좋아하는 길대로 삶을 가꿀 때에 사진 또한 좋아하는 빛이 곱게 스며들어 좋은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어요. 4346.1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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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의 여행법 - 사진편 - <하루키의 여행법> 에세이편의 별책 사진집, 개정판 하루키의 여행법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마스무라 에이조 사진 / 문학사상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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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70

 


우리 이웃을 느끼는 사진마실
― 하루키의 여행법 : 사진편
 마스무라 에이조 사진
 무라카미 하루키 글
 문학사상사 펴냄, 1999.2.20.

 


  마스무라 에이조 님이 찍은 사진에 무라카미 하루키 님이 글일 붙인 《하루키의 여행법 : 사진편》(문학사상사,1999)은 사진책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이 이녁이 여행을 하며 누린 삶을 글책으로 하나 내면서 사진책으로 하나 내는데, 손수 사진을 찍지 않고, 살가운 여행벗인 마스무라 에이조 님 손을 빌어 사진책을 선보입니다.


  왜 스스로 사진을 찍지 않고 다른 사람 손을 빌어 사진책을 내놓을까요? 스스로 얼마든지 사진을 찍을 만한데 왜 다른 사람 손으로 사진을 찍고 책을 내놓을까요?


  가만히 생각하면, 여행을 다니며 보고 듣고 겪고 마주하는 모든 이야기는 ‘내 삶’이면서 ‘네 삶’입니다. 나들이를 다니면서 지나가는 골목이나 마을은 ‘이웃이 살아가는 집’입니다. 우리는 나들이길이나 마실길에 언제나 ‘이웃집 구경’을 하는 셈입니다. 누군가 내 이웃이나 동무가 우리 집 앞을 지나간다면 이녁도 ‘이웃집 구경’을 하는 셈입니다.


  나들이를 다니며 아름답구나 싶은 마을을 지나간다면, 이 마을이 왜 아름다울까요? 바로 이 마을에서 보금자리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일구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이 아름다운 집을 지어 아름다운 살림을 누리니, 이런 집들 모인 마을은 아름다울밖에 없어요.


  먼길 나들이를 다니든 가까운 마실을 다니든, 여행길에 선 사람들은 ‘이웃 사귀기’를 하는 셈입니다. 내 이웃이 어떻게 살아가는가 하고 돌아보는 셈입니다. 여행길에 어느 밥집에 들러 밥 한 그릇 먹는다 할 적에, ‘나는 손님’일 테지만, 또 ‘나는 길손’일 테지만, 이 밥집이 있는 마을에서 살아가며 이 밥집을 으레 들르는 사람은 ‘마을사람’이에요. 내가 밥 한 그릇 맛있게 먹건 맛없다고 느끼며 먹건,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늘 이 밥을 먹을 테지요.

 

 


.. 그때까지 그는 어느 사진 주간지의 일을 하고 있었다. 상당히 능력 있는 파파라치(프리랜서 사진가)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을 계속하느라 스트레스가 쌓이고 녹초가 되어 버린 그는 과감히 그 일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작은 라이카 카메라를 손에 들고 혼자 만주까지 가서 자신이 찍고 싶은 사진을 찍어 온 것이다. 솔직히 말한다면, 에이조 군은 결코 재능 있는 사진작가는 아니다. 칼날에 비유하자면 에이조 군의 작품은 날이 잘 선 예리한 나이프나 면도날 같은 느낌보다는 시골 뒷마당에서 장작을 쪼개는 데 쓰이는 손도끼 같은 투박한 느낌을 준다 ..  (5쪽)


  사진여행일까요, 여행사진일까요. 어느 쪽이 되어도 됩니다. 사진을 찍는 여행이 되어도 되고, 여행을 하며 찍는 사진이 되어도 됩니다. 스스로 즐거운 길을 걸어갈 때에 즐겁습니다. 참말 사진을 찍는 여행을 다닐 수 있고, 여행을 누리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어요.


  누군가는 ‘여행을 하면 사진만 남는다’고 여길 만합니다. 누군가는 ‘여행을 하면 마음속에 이야기가 남으니 사진은 없어도 된다’고 여길 만합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님은 ‘사진을 남기지 않고 마음속에 이야기를 남기고 싶’었고, 사진길 걷는 벗님을 불러 함께 나들이 누리면서 사진벗한테는 ‘여행을 하며 남기는 사진’을 찍도록 했다고 할 만합니다. 둘이 서로 다른 눈길로 함께 다니고, 둘이 서로 다른 눈빛으로 삶과 이웃과 사람을 마주한다고 하겠습니다.


  한 집안에서 살아가는 아이와 어른도 이와 마찬가지예요. 아이 눈높이와 어른 눈높이는 달라요. 아이 눈썰미와 어른 눈썰미도 다르지요. 그렇지만 아이와 어른은 서로 즐겁게 가르치고 배우면서 살아갑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요.


  마음으로 담는 여행과 사진으로 담는 여행은 어떤 빛이 될까요. 마음빛과 사진빛이 만나면 서로 어떠한 이야기가 태어날까요.

 


.. 여기에 담긴 사진들은, 우리 두 사람이 함께 한 여행의 기록인 셈인데, 단지 고베 지역만 따로 행동했다. 나는 내 고향인 니시노미야로부터 고베까지의 길을 혼자서 걸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이조 군은 그로부터 반 년쯤 훕, 내가 걸었던 길을 혼자서 걸어가며 여기에 담긴 사진들을 찍어 주었다. 이 사진들을 보고 있으면, 똑같은 풍경을 똑같은 각도에서 봤는데도 우리는 정말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구나 하고 새삼스레 감탄하게 된다 ..  (8쪽)


  혼자서 두 가지 길을 걸을 수 있어요. 혼자서 신나게 마음빛 살찌우는 한편, 다른 한편으로 또 바지런히 사진빛 북돋울 수 있어요. 하려고 하면 하지요. 하려고 안 하기에 못 합니다.


  아이가 자라나는 흐름을 사진으로 담는 사람은 아무리 일이 바쁘고 벅차거나 힘겨워도 ‘아이가 자라나는 흐름’을 붙잡아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이가 자라나는 흐름을 사진으로 담을 뜻이 굳지 않은 사람은 아무리 일이 적거나 느긋하거나 수월한 삶이어도 ‘아이가 자라나는 흐름’을 으레 놓치거나 사진으로 못 담습니다.


  마음을 먹는 결에 따라 사진이 달라요. 마음을 즐겁게 다스리지 못하면 사진장비가 대단하더라도 사진을 못 찍어요. 마음을 즐겁게 다스리면 사진장비가 몹시 허술하더라도 사진을 잘 찍어요.


  비싼 만년필이 있어야 글을 잘 쓰지 않습니다. 값진 붓이 있어야 글을 잘 쓰지 않습니다. 비싼 공책이나 수첩이 있어야 글을 잘 쓸까요. 성능 빼어난 컴퓨터를 들여야 글을 잘 쓰나요.


  몽당연필로도 글을 얼마든지 씁니다. 낡은 컴퓨터로도 글을 신나게 씁니다. 헌 공책에도 글을 쓰지요. 한쪽은 빈 광고종이에도 아름다운 시와 노래를 적을 수 있습니다.

 

 


.. 오아하카 교외에서. 비가 그친 저녁이 되면 멕시코는 넓어 보이는 나라이다. 어디까지나 이런 도로와 도시, 하늘이 계속된다. 이따금 도대체 인간은 무엇 때문에 여행 따위를 하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함의 형태를 다른 모양으로 바꿔 놓고 있을 뿐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 치아파스는 역사에 짓밟혀지고 무력에 상처입은 고장이다. 그곳은 가난하고, 온통 모순과 슬픔이 배어나는 고장이다. 한 발만 들여놓아도 여행자는 그 분위기를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심각한 문제를 초월하여, 이 고장에는 어쩐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 같다. 거기에는 슬픔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치열함 속에 조용함이 있으며, 가난함 속에 어떤 종류의 생각이 있었다 ..  (40, 48쪽)


  아침볕이 따스합니다. 봄날 아침볕과 여름날 아침볕과 가을날 아침볕이 사뭇 다르지만, 언제나 아침볕이 따스합니다. 겨울날에도 아침볕은 따스해요. 꽁꽁 얼어붙은 들과 숲과 마을에 보드라운 기운이 퍼집니다. 푹푹 찌는 한여름이라 하더라도 아침볕은 보드라운 기운으로 찾아옵니다.


  아침마다 사진을 찍는 누군가 있으면, 이 보드라운 기운을 온몸으로 느끼며 한 장 두 장 담으리라 생각합니다. 새벽빛과 낮빛과 저녁빛과 밤빛이 사뭇 다른 기운 또한 하나하나 느끼며 사진으로 알뜰살뜰 엮으리라 생각합니다. 빛이란 삶을 밝히는 빛이요, 빛이란 삶을 살리는 빛이고, 빛이란 삶을 사랑하는 빛이며, 빛이란 삶을 노래하는 빛입니다.


  사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언제나 다른 빛을 다 다르게 맞아들여 그때그때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재미난 예술입니까. 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삶입니까. 참말, 본 대로 그때그때 이야기로 빚어 보여주는 사진입니다. 참으로, 느낀 대로 그곳에서 곧바로 이야기 하나 빚는 사진입니다.


  1/100초, 또는 1/1000초, 때로는 1/10초, 어느 때에는 1/5초 사이에 찰칵 하고 움직이면서 빛과 삶과 이야기가 흐릅니다.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는 사이에 내 머릿속에 이야기 한 자락 아로새기듯, 사진기도 찰칵 하고 셔터막을 내렸다 올리면서 필름이나 디지털파일에 이야기 한 타래 돋을새김합니다.

 

 


.. 노몬한 앞쪽에서 촬영한 하루하 강. 직접 눈으로 보면 정말 멍해질 만큼 광활한 풍경이다.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희미하게 흐려져 있는 아침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라는 인간을 만들어 온 이 땅에 대해 생각하고, 이 땅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는 한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스스로 선택할 길이 없는 일들에 대하여..  (80, 146쪽)


  사진으로 빛을 찍을 적에는 삶을 찍습니다. 빛이란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빛을 찍으면서 이야기를 남깁니다. 빛이란 이야기이기 때문이에요. 햇빛을 받아 온누리에 무지개빛이 흐릅니다. 햇볕을 쬐며 온누리 목숨이 살아납니다. 햇살을 드리우면 온누리에 푸른 숨결 넘실거립니다.


  사람은 글과 그림과 사진, 이렇게 세 갈래로 이야기를 남깁니다. 사람은 춤과 노래와 몸짓, 이렇게 세 가지로 이야기를 엮습니다. 사람은 밥과 옷과 집, 이렇게 세 살림으로 이야기를 꾸립니다. 사람은 꿈과 사랑과 마음, 이렇게 세 빛으로 이야기를 빚습니다.


  이웃을 느끼면서 내 모습을 더 살가이 느낍니다. 이웃을 만나면서 내 속모습을 새롭게 만납니다. 이웃과 도란도란 말을 섞으면서 내 넋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이웃과 밥을 나누고 꿈을 나누며 사랑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내 길이 어디인지 알아차립니다.


  나는 너한테 찾아갑니다. 너는 나한테 찾아옵니다. 나는 내 사랑을 담아 너한테 띄웁니다. 너는 네 사랑을 실어 나한테 보냅니다. 이야기가 흐르고 생각이 흐릅니다. 삶이 흐르고 사랑이 흐릅니다.


  즐겁게 노래하니 즐겁고, 즐겁게 사진을 찍으니 즐겁습니다. 삶을 이루는 바탕이란 즐거움입니다. 사랑을 이루는 바탕이란 즐거움이에요. 그리고, 사진을 이루는 바탕이란 즐거움이지요. 즐겁지 않다면 노래하지 못하고, 즐겁지 않으면 사랑하지 못해요. 즐겁지 않은데 살아갈 수 없어요. 즐겁지 않은데 사진기를 손에 쥐지 못해요.

 


.. 캐나다에서 국경을 다시 넘어 디트로이트로 향했다. 그리고 오하이오, 인디애나를 거쳐 시카고로 갔다. 여기까지는 그다지 재미있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지루하기 그지없는 여행이었다. 그냥 차를 몰고 가면서 차창에 비치는 그저 그렇고 그런 풍경을 볼 따름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지루하다고 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꽤 자주 경찰이 차를 정차시켰기 때문이다 ..  (106쪽)


  여행을 나서는 사람은 즐거움을 찾고 싶습니다. 즐겁고 싶어 나들이를 갑니다. 즐겁지 않으려고 여행을 나서는 사람이 있을까요. 즐겁기 싫어 나들이를 가는 사람이 있나요.


  차근차근 삶을 돌아보셔요. 즐겁기 싫어 밥을 먹을까요? 즐겁기 싫어 잠을 잘까요? 즐거기 싫어 일을 할까요? 즐겁기 싫어 놀까요? 즐겁기 싫어 사랑을 하거나 꿈을 꿀까요?


  즐겁고 싶으니 꽃을 바라보며 꽃내음 맡아요. 즐겁고 싶기에 아름드리나무를 포근히 껴안으면서 나무숨을 쉽니다. 즐겁고 싶어 숲에 깃들어 풀밭에 드러누워 나무그늘 누립니다. 즐겁고 싶어 노래를 지어 불러요. 즐겁고 싶으니 피아노를 치고 피리를 불며 악기를 탑니다. 즐겁고 싶어 밥을 짓지요. 즐겁고 싶으니 밥을 차려 동무나 이웃을 불러 함께 먹어요. 즐겁고 싶기에 빨래를 하고, 옷을 개며, 바느질을 합니다.


  그렇다면, 전쟁을 일으키는 정치꾼이나 부자는? 밥그릇 채우기에 바쁜 사람들은?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며 동무를 짓밟고 올라서야 하는 아이들은? 아이들을 입시지옥에 내몰매 채찍질을 하는 교사와 어버이는? 이들도 즐거움을 찾는가요? 이들도 즐거움을 아는가요? 이들도 즐거운 길에 서나요?


  즐거운 사람은 웃으며 노래합니다. 즐거운 사람은 어깨동무를 합니다. 즐거운 사람은 바쁘지 않습니다. 즐거운 사람은 서두르지 않습니다. 즐거운 사람은 농약을 뿌리거나 화학비료를 쓰지 않습니다. 즐거운 사람은 총칼을 내밀지 않습니다. 즐거운 사람은 쳇바퀴질을 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사람은 홀가분하게 여행길에 나서요. 즐거운 사람은 보금자리를 곱게 가꿉니다.

 


.. 그것은 오래된 옛날 이야기이다. 이곳에 바다가 있고, 산이 있었던 무렵의 이야기이다. 아니, 바다나 산은 지금도 분명히 있다. 물론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과는 다른 바다와 산의 이야기인 것이다 ..  (150쪽)


  아침입니다. 아이들이 잠에서 깹니다. 조잘조잘 떠들면서 아침을 엽니다. 이 아이들은 아침마다 딱새처럼 딱딱거리며 노래합니다. 이 아이들은 아침마다 제비처럼 재재재재 노래합니다.


  얼마나 즐거울까요. 새롭게 맞이하는 아침이란 얼마나 즐거울까요. 참으로 즐겁겠지요. 새 하루 다시 열려 새롭게 놀 수 있어요. 아주 즐거울 테지요.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으니 기운이 넘쳐요.


  사진을 찍는 사람은 즐거운 삶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은 즐거운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즐거운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사진을 읽는 사람은 즐거운 꿈을 천천히 짓는 사람입니다.


  사진여행 함께 해요. 여행사진 함께 찍어요. 사진삶 함께 즐겨요. 삶사진 함께 찍어요. 사랑하는 삶을 사진으로 찍고, 삶을 사랑하는 눈빛으로 사진을 읽어요. 4346.11.24.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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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백화 - 백두산 산약초 100, 풍광 100
안승일 사진 / 호영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69

 


하얀 숲에 환한 꽃들
― 白山百花
 안승일 사진
 호형 펴냄, 2013.6.3.

 


  사랑은 마음속에서 자랍니다. 네 마음이나 다른 사람 마음 아닌 바로 내 마음에서 내 사랑이 자랍니다. 내 이웃은 이녁 마음에서 이녁 사랑이 자라고, 내 동무는 이녁 마음에서 이녁 사랑이 자라지요. 저마다 다 다른 사랑이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 마음에서 자랍니다.


  사진은 사랑을 찍을 때에 태어납니다. 나는 내 사랑을 찍으며 내 사진을 빚고, 내 이웃은 이녁 사랑을 찍으며 이녁 사진을 빚습니다.


  사랑을 찍어 사진이 되니, 먼저 내 마음속에서 사랑이 자라도록 삶을 가꿀 노릇입니다. 삶을 가꾸지 못한다면 사랑이 자라지 않고, 사랑이 자라지 않으면 사진을 찍지 못합니다.


  사진은 그럴듯한 모습을 찍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멋들어지는 모습을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마음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을 찍는 일입니다. 사진은 스스로 아름답게 가꾸는 삶을 꾸밈없이 사진으로 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아름답게 가꾸는 삶이라면 아름다운 사진이 태어납니다. 곱게 가꾸는 삶이라면 고운 사진이 태어나고, 착하게 가꾸는 삶이라면 착한 사진이 태어나요.


.. 이런 구름 바다를 기다리며 나는 산에 산다 … 천문봉, 용문봉. 그리고 7월의 유빙은 하나하나가 보석이다 … 원래는 짐승들의 산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어디로 떠나갔나 ..  (23, 27, 35쪽)

 

 


  삶을 가꾸는 매무새대로 말이 태어납니다.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사람이라면 말 또한 아름답게 흐릅니다. 삶을 아름답게 가꾸니 눈짓과 몸짓 또한 아름답고, 눈빛과 마음빛 또한 아름답지요.


  눈짓과 눈빛이 아름다울 때에는 내 둘레 무엇을 보거나 누구를 마주하든 아름다운 눈썰미로 헤아릴 수 있어요. 아름다운 눈썰미로 내 둘레를 바라본다면, 내가 바라보는 그대로 사진으로 찍을 적마다 아름다운 빛그림 이루어집니다.


  꾸미고 자시고 할 일이 없고, 꾸미거나 자시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느끼는 대로 담으면 넉넉하고, 내가 사랑하는 대로 찍으면 즐겁습니다.


  어떤 모습이 나올 때까지 굳이 안 기다려도 됩니다. 기다리면서 찍는 사진이 아니에요. 언제나 다 다르게 즐거움을 누리며 찍는 사진입니다. 오늘은 이 모습을 찍습니다. 어제는 저 모습 찍었습니다. 모레에는 그 모습을 찍으면 됩니다.


  날마다 새롭게 찾아오는 하루예요. 날마다 새롭게 만나는 하루예요. 날마다 새롭게 깨닫는 빛이요 볕이며 무지개입니다. 그러니, 날마다 새롭게 이루는 이야기 되고, 날마다 새롭게 찍는 사진입니다.

  날마다 내 모습을 사진으로 한 장씩 찍어 보셔요.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동이 트는 곳을 바라보면서 내 모습을 사진으로 한 장씩 찍어 보셔요. 늘 똑같이 맞춘 때에 찍어 보셔요. 삼백예순닷새 다 다른 빛과 결이 흐르면서 다 다른 모습이 찍힐 테고, 다 다른 모습마다 다 다른 이야기 배어나오리라 느껴요.


.. 이제 곧 화산이 폭발한다구? 개소리들 하지 마라 … 백두산은 수림한계선을 넘으면 아무데나 꽃밭이다 … 손톱만 한 좀참꽃들이 모여 통곡하듯 붉은 벌을 이룬다 ..  (43, 45, 59쪽)

 

 


  사진을 찍으러 먼 데에 갈 일이 없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내 삶자리에서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러 구태여 어느 한 곳 콕 집어서 취재를 나서야 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노상 내 보금자리에서 태어납니다.


  내가 가장 살아가고 싶은 곳이 바로 내가 가장 사진으로 찍고 싶은 곳입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싶은 님이 바로 내가 가장 사진으로 찍고 싶은 사람입니다. 내가 가장 즐거운 나날이 내가 가장 사진으로 찍고 싶은 때입니다.


  그림이 될 만하다거나 멋있어 보이는 모습을 찾으러 떠돌지 말아요. 스스로 삶을 찾으려고 마음을 기울여요. 저마다 다른 아름다운 삶을 스스로 깨닫는다면, 사진뿐 아니라, 글도, 그림도, 노래도, 춤도, 무엇보다 삶과 사랑과 꿈도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여기저기 떠도는 사람은 ‘떠도는 사진’을 찍습니다. 떠도는 사진에 뜻이 없지 않습니다. 떠도는 사진에는 ‘떠도는 삶’을 담는 빛이 흐릅니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녁 삶을 떠돌이로 보내는 데에 보람과 즐거움과 사랑이 있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러한 물결을 고이 헤아리면서 아끼면 됩니다. 왜냐하면, 남이 보기에는 떠돌이라 할 테지만, 나 스스로 보기에는 ‘떠돌이 = 머물기 = 삶’이 되니까요.


  스스로 사랑하지 못한다면 사진기를 쥘 수 없습니다. 스스로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진기를 든다면, 아마 ‘문화’나 ‘예술’이나 ‘작품’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화나 예술이나 작품은 삶이 아니고 사랑이 아니며 꿈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이란 사진일 뿐이기에, 사진에 다른 이름을 꾸밈말처럼 붙인다고 해서 사진이 되지 않아요.


.. 사진 한 장 찍자고 여기서 먹고 자며 기다리는 곰 같은 놈 … 차 타고 지나다 우연히 찍은 사진 아니다 … 그렇다. 바람이다. 빛이다. 그래서 자연은 풍광이다 ..  (113, 147, 171쪽)

 

 


  사람은 누구나 사진을 찍으려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돈을 벌려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꽂이를 하거나 대학교를 다니려고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왜 살아갈까요.

  사진을 찍으려 한다면, 맨 먼저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하는 이야기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 실마리를 풀지 않으면, 삶도 사진도 다른 어느 것도 실마리를 풀지 못하리라 느껴요.


  사람은 왜 살아가는가? 그래요, 사람은 살아가려고 살아가지요. 왜 살아가려고 살아가느냐? 살고 싶으니까요. 살고 싶은 마음이 없으면 죽으려고 죽겠지요.


  살고 싶기에 사진을 찍고 싶습니다. 죽고 싶기에 사진을 안 찍습니다. 살고 싶기에 사랑을 나눕니다. 죽고 싶기에 사랑을 안 나눕니다. 살고 싶기에 평화와 민주와 평등으로 나아갑니다. 죽고 싶기에 전쟁과 차별과 독재로 나아갑니다.


  모든 사진은 다큐사진이면서 패션사진이고 삶사진입니다. 모든 사진은 다큐멘터리가 되고 패션이 되면서 삶이 됩니다. 굳이 금을 그을 수 없습니다. 다만, ‘상업사진’은 없습니다. 상업사진이라는 이름부터 올바르지 않습니다. 상업사진 아닌 ‘상업’이나 ‘직업’이라고 해야 올바릅니다. 대통령과 국회의원과 의사와 판사가 직업이나 상업이듯이, 사진관을 꾸려 돈을 버는 일도 직업이나 상업이에요.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르다는 틀로 말할 수 없는 직업이나 상업입니다.


  사진기를 써서 돈을 벌 수 있어요. 붓을 써서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상업이나 직업이니까요. 그런데, 의술을 쓰면서 돈을 안 버는 사람도 있어요. 그저 의술로 삶을 일구거나 빛내는 사람이 있어요. 자원봉사나 의료봉사 같은 이름이 아닌, 의술을 삶으로 녹여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예요. 사진기로 상업이나 직업을 얻을 수 있는 한편, 삶을 사진 하나로 일구거나 빛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 사진을 만드는 건 구름과 안개다. 사진기나 필름이 아니다 … 이제는 주차장이 되어 버린 거기. 양귀비가 무리로 피던 곳 … 이발소 사진이 돼 버려도 나는 좋다. 이 사진 ..  (173, 187, 201쪽)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들은 흙으로 삶을 일구거나 빛냅니다. 한자말 이름으로는 ‘농사(농사꾼)’나 ‘농부’라 하고, 한국말 이름으로는 ‘흙일꾼’이나 ‘흙지기’가 되는 이들은, 흙으로 삶을 짓습니다. 다만, 흙을 만지면서도 상업이나 직업이 될 수 있어요. 좋거나 나쁘거나 옳거나 그른 금긋기가 아닙니다. 누군가는 흙을 만져 돈을 벌고 싶어요. 누군가는 흙을 만져 삶을 빛내고 싶어요. 누군가는 흙을 만지면서 돈을 잔뜩 만지고 싶어요. 누군가는 흙을 만지면서 삶을 보드랍게 보살피고 싶어요.


  삶을 마주하는 매무새가 그대로 사진을 마주하는 매무새 됩니다. 사진으로 즐겁게 삶을 일굴 줄 안다면, 흙으로 즐겁게 삶을 일굴 줄 압니다. 사진으로 아름답게 삶을 보살필 수 있으면, 흙으로 아름답게 삶을 보살필 수 있어요.


  대학교에서 농업을 배울 수 있겠지요. 대학교에서 사진학을 배울 수 있겠지요. 대학교에서는 학문과 직업을 가르쳐요. 대학교에서는 삶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대학교를 다니는 사람은 학문과 이론과 실기로 농업과 사진을 배울 만합니다. 그런데, 대학교에서는 삶을 가르치지 않는 터라 ‘흙’도 ‘사진’도 배우지 못해요. 대학교에서는 ‘학문(이론)’과 ‘상업(직업)’을 배울 뿐입니다. 스스로 삶을 누릴 때에는 그야말로 삶(참다운 흙과 참다운 사진)을 스스로 배우고 가르칩니다.


.. 백두산에 들면, 그저 몸과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오직 바람만이 살아 움직이는 천지의 눈밭에서 속절없이 아침을 기다리던 그 매운 날들까지 포함하여 나는 백두산의 행복한 기억들을 여기에 남깁니다. 나는 이 책 속에 그곳의 냄새, 분위기, 사람들과 나눈 감정까지 녹아들기를 바랍니다 ..  (머리말)

 

 


  안승일 님 사진책 《白山百花》(호형,2013)를 읽습니다. 하얀 멧골에 온갖 꽃이 피어난다는 이야기를 도톰한 사진책 하나로 들려줍니다. 백두산에서 만난 꽃을 사진책 《白山百花》 왼쪽에 싣고, 백두산에서 마주한 백두산 숨결을 사진책 《白山百花》 오른쪽에 넣습니다.


  꼭 백 가지 꽃이랑 숨결을 보여줍니다. 꼭 백 가지 꽃이랑 숨결에 하얗게 맑은 빛이 흐릅니다.


  하얀 빛. 그렇습니다. 하얀 빛입니다. 하얀 빛이란 무엇일까요. 하얀 빛을 알 만할까요. 하얀 빛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하얀 빛은 어떻게 태어날까요.


  해오라기는 하얀 새를 가리킵니다. 까마귀는 까만 새를 가리킵니다. 해오라기 옛이름은 하야로비입니다. 옛이름 들으면 ‘하얗다’가 떠오를까요. 오늘날 이름인 해오라기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얀 빛이 어디에서 나온 줄 깨달을까요.


  바로 해가 하얀 빛입니다. 하얀 빛을 낳는 님은 바로 해입니다. 햇빛은 흰빛입니다. 햇빛이 비추어 달이 하얗게 보이지요. 밤에도 낮에도 달은 해 둘레에서 하얀 빛깔로 우리 앞에 나타나요.


  하얀 해가 비추어 하얀 눈이 내립니다. 하얀 눈이 쌓여 하얀 멧골 이룹니다. 하얀 멧골에서는 사람들 머리카락도 하얗게 얼어붙습니다. 머리카락 하얗게 얼어붙은 사람들 마음 또한 하얗게 정갈합니다. 언제나 하얀 빛과 숨결을 마시면서 살아가니, 하얀 꿈과 사랑을 밝히겠지요.


.. 내가 백두산을 사랑했던 20년 세월, 나를 스쳐 지나간 모든 이들도 찾아보고, 백두산에 부치는 나의 연서를 내가 좋아하는 사람, 신세 진 사람, 우리 동네 이도백하 이웃들에게 주고 싶습니다 ..  (머리말)

 

 


  안승일 님은 백두산 곁에서 하얀 숨결을 마시면서 하얀 사진을 내놓습니다. 그러면, 우리들은 어디에서 살아가는가요? 우리들은, 사진기를 손에 쥔 우리들은, 저마다 어느 곳에서 어떠한 빛깔이 되어 어떠한 마음을 어떠한 사랑으로 담아서 보여주는가요? 사진기를 손에 쥔 오늘날 우리들은 저마다 어떤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서 사진길을 걷고, 사진책을 내거나 읽으며, 사진 하나로 생각을 주고받는가요?


.. 이 책의 사진은 디지털카메라의 온갖 편리함을 마다하고 중형필름카메라로만 찍은 것들입니다. 오로지 하늘이 내려주는 빗물만으로 농사를 짓는 농부처럼, 하늘이 내게 선물한 빛만으로 찍은 사진들입니다 ..  (머리말)


  하늘이 내리는 빗물만 갖고 흙을 일구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늘이 내리는 빗물에다가 하늘이 내리는 햇볕과 하늘이 내리는 바람, 이렇게 세 가지를 골고루 품으면서 흙을 일굽니다.


  사진도 그래요. 하늘이 내리는 빛, 하늘이 내리는 사랑, 하늘이 내리는 꿈, 이 세 가지를 가만히 어루만지면서 이야기 한 타래 풀어놓습니다.


  사랑 담은 밥을 먹습니다. 사랑 담아 밥을 차립니다. 사랑 담은 사진을 읽습니다. 사랑 담아 사진을 찍습니다. 안승일 님은 스스로 사랑하는 하얀 빛물결을 곱게 누리면서, 어제도 오늘도 모레도 활짝 웃는 즐거운 노래 부르는 하루를 열고 닫으리라 생각합니다. 4346.11.1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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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13-11-18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척 탐이나는 책이네요.^^
그래서 보관함에 담아 두었어요~ ㅎㅎ

숲노래 2013-11-19 03:21   좋아요 0 | URL
그동안 안승일 님 사진책을 꾸준히 보았는데,
이번 사진책을 보면서
이분은 참 '귀엽게' 삶을 누리시는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