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하는 나무
호시노 미치오 지음, 김욱 옮김 / 갈라파고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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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68

 


여행하는 삶과 여행하는 사랑
― 여행하는 나무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김욱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06.5.15.

 


  아침 일곱 시 반에 자리에서 일어난 작은아이가 아버지를 부릅니다. “쉬 마려.” 쉬가 마려우면 혼자 가서 하면 되지, 뭘 부르니. 그렇지만 작은아이를 데리고 마루로 가서 쉬를 누입니다. 이제 네 살 어린이인 만큼 쉬를 누여 달라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일곱 살 큰아이는 씩씩하게 혼자 쉬를 누지만, 깊은 밤에는 함께 마루에 서 달라고 부릅니다.


  아이를 이끌고 마루에 서서 쉬를 누이거나 오줌누기를 지켜보노라면, 어느새 바깥빛을 살핍니다. 한밤에는 한밤 빛깔을 살피고, 새벽에는 새벽빛 살피며 아침에는 아침빛 살펴요. 일곱 시 반에 작은아이 쉬를 누이면서, 일월 이십육일 아침해가 이렇게 일찍 뜨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겨울 한복판인 일월이지만 해가 꽤 길어졌다고 느낍니다.


  한겨울 지나 늦겨울이자 끝겨울이 되어도 추위는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이월에는 일월보다 해가 길 테지요. 일월보다 이월은 해가 일찍 뜨고 늦게 질 테지요. 엊그제 아이들 데리고 자전거마실을 하는데, 저녁 여섯 시가 넘어도 해가 다 안 떨어집니다. 동짓날이 가까우면 낮 네 시를 지나도 곧 어둑어둑한데, 저녁 다섯 시에도 해가 안 떨어지고, 여섯 시에도 날이 밝은 빛을 바라보면서, 겨울과 봄이 이렇게 흐르는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 이 땅에 문명이라는 것이 찾아온 뒤로 모든 게 변하고 있습니다 … “미래의 후손들에게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아름다운 자연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더욱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 고향 사람들은 사진을 찍어 봤자 무엇이 달라지느냐고 말합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언젠가 먼 훗날, 아마존의 밀림이 모두 사라진다 해도 아마존의 모습과 그 속에서 살아갔던 사람들의 표정이 담긴 한 장의 사진으로 얼마든지 아마존을 되살릴 수 있다고 말입니다.”(친구 알두가 호시노한테 들려준 이야기) ..  (23쪽)


  겨울을 벌거숭이로 보내는 나무가 있습니다. 겨울에도 푸른 잎사귀 고스란히 매다는 나무가 있습니다. 벌거숭이로 겨울을 보내는 나무라면 앙상하다 할 테지만, 가지마다 새눈이 대롱대롱 있어요. 가을잎 떨구면서 곧바로 새잎 틔우려고 힘을 써요. 겨우내 새눈에 온힘을 그득 모아요.


  겨우내 푸른 잎사귀 매다는 나무를 들여다보면 새봄에 피울 꽃봉오리를 단단하게 맺습니다. 우리 집 마당 후박나무와 동백나무를 날마다 마주하면서 꽃봉오리를 으레 만집니다. 얼마나 야무지고 단단한지 살핍니다. 얼마나 멋스럽고 고운지 헤아립니다.


  두 눈으로 잎사귀와 봉오리를 만지고, 두 손으로 종이를 펼쳐 잎사귀와 봉오리를 그립니다. 두 귀를 기울여 나뭇잎을 스치는 바람소리를 듣고, 코와 살갗으로 풀내음을 가득 마신 다음, 살며시 귀를 나뭇줄기에 대고는 나무 숨결 뛰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을 수 있다면, 언제나 나무 곁에 있으면서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기 때문입니다. 나무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을 수 없다면, 언제나 나무 곁에 없을 뿐 아니라 나무가 노래를 들려준다는 생각조차 안 하기 때문입니다.


.. 밤이 깊어지자 하늘은 온통 별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로라는 나타나지 않았고, 대신 달이 우리를 반겼습니다 … 푸른 열매송이가 보이면 무작정 자리를 잡고 앉아 손이 닿는 대로 블루베리를 따먹고 나서 잠시 누워버립니다. 그때 눈에 들어오는 하늘은 블루베리 색과 똑같습니다 … 이 조용한 세계에서 들리는 것이라곤 오직 발밑을 스쳐 지나가는 눈들의 외침뿐입니다 … 인간의 손길을 거부하는 듯한 생명의 약동이야말로 자연의 위대한 힘입니다 ..  (32, 34, 50, 75쪽)


  바람은 늘 노래를 부릅니다. 바람에 실린 꽃내음과 풀내음을 먹기에 사람도 짐승도 벌레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바람은 늘 웃음을 짓습니다. 바람결에 묻어나는 웃음을 바라보는 논과 밭에서 새롭게 풀싹이 돋고 풀줄기 오릅니다. 우리들은 바람노래 듣는 풀잎을 먹으면서 오늘 하루도 즐겁게 살아갈 수 있어요.


  사진기라고 하는 물건이 태어난 지는 이제 백 해를 조금 넘으니, 사진을 찍은 발자취도 백 해 남짓입니다. 그렇지만, 사진기가 없었어도 사람들은 늘 마음속에 사진을 담았습니다. 따사롭게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담아요. 즐겁게 마주하면서 이야기를 누려요. 한 번 들은 노래를 잊지 않고 새삼스레 흥얼거립니다. 한 번 본 모습을 잊지 않고 다시금 조잘조잘 이웃한테 알려줍니다.


  마음에 담기에 노래로 다시 부르고, 마음에 담으니 이야기로 다시 들려줍니다. 마음에 담으니 사진기 있을 적에는 사진기를 빌어 살포시 앉혀요. 마음에 담지 못할 적에는 사진기 있더라도 어떠한 모습조차 앉히지 못합니다.


  처음 본 모습이기에 찍지 않아요. 마음속으로 그리던 모습이기에 찍어요.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는 마음이란, 처음부터 그리고 기다리면서 품습니다.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느끼고 누군가는 아름답다고 느끼지 못하는 까닭은, 한 사람은 늘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기다렸고 다른 한 사람은 마음속으로 그리거나 기다린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 어미는 영하 50도의 추위를 뚫고 갓 태어난 새로운 생명을 열심히 핥아 주다가 젖을 물릴 준비를 했습니다 … 카리부 사슴의 새끼가 매서운 바람이 휘몰아치는 설원에서 태어나는 것도, 한 마리의 검은방울새가 영하 60도의 추위 속에서 즐겁게 지저귀는 것도 단지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 우리는 깜짝 놀라서 목화밭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배낭을 벗어버리고 그 위에 누웠다. 여름철에만 맡을 수 있는 툰드라의 흙내가 싱그러웠다. 맑게 갠 백야의 푸른 하늘이 한없이 펼쳐졌다. 그대로 가만히 누워 있으면 카리부 사슴떼가 머리 위로 소리 없이 지나갈 것만 같았다 ..  (44, 46, 138쪽)


  호시노 미치오 님 사진책 《여행하는 나무》(갈라파고스,2006)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 ‘사진책’이라기보다는 ‘이야기책’이라고 해야 옳습니다. 호시노 미치오 님이 알라스카를 온몸으로 누비면서 겪은 이야기를 담은 책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동안 호시노 미치오 님이 ‘무엇을 사진으로 담으려 했느냐’ 하는 이야기를 읽어요. 이 책을 읽으면서 호시노 미치오 님이 ‘사진길을 걸어가려고 하는 뜻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이야기를 아로새깁니다.


  사진기를 빌어 찍은 모습만 담아야 사진책일까요? 사진 작품만 그러모아야 사진책일까요?


.. 우리가 진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인간의 역사는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더 많은 그림자를 인간에게 드리웁니다. 그리고 지금 그 그림자의 존재를 깨닫기 시작한 인류를 헤아릴 수 없는 어둠 속에서 멍하니 서 있습니다 … 린드버그가 알래스카를 방문한 적이 있다니, 몰랐던 사실이다. 게다가 이렇게 헌책방의 낡은 앨범 속에 귀중한 자료가 잠들어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 정보가 적다는 사실은 사람의 내부에서 어떤 힘을 만들게끔 유도한다. 그래서 그만큼 인간은 더 많은 무언가를 상상하게 된다 … 편대를 이뤄 창공을 날아가는 오리떼가 내겐 아름다운 자연의 광경에 지나지 않았지만, 에스키모 사냥꾼들에겐 하루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양식일 뿐이었다 ..  (84, 116, 153, 243쪽)


  사진 몇 장 안 실은 《여행하는 나무》이지만, 그동안 호시노 미치오 님이 사진으로 담은 ‘이웃들’ 살림살이와 빛깔과 무늬와 그림이 고스란히 깃듭니다. 사진 몇 장 안 실어도 좋은 《여행하는 나무》를 읽으면, 사진이 없어도 머릿속으로 그림을 또렷이 그릴 수 있습니다. 이녁이 만난 사람들 낯빛과 웃음을 그릴 수 있습니다. 이녁이 디딘 땅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이녁을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알라스카로 가서 살림을 꾸리는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사진이란 그예 사진입니다. 작품으로도 사진을 느끼며, 말로도 사진을 느낍니다. 이야기로도 사진을 누리며, 눈빛으로도 사진을 누립니다.


  알라스카하고 한몸이 되면서 사진하고 한마음이 되는 호시노 미치오 님은 알라스카에서 만난 이웃들하고 ‘사진’이라는 징검다리를 놓습니다. ‘사진’ 하나로 알라스카 사람이 되어요. 사진을 드리우면서 삶꽃을 피웁니다.


.. 나는 이곳에서 사람이 따스한 햇살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 매일 밤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별빛은 우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진 페이지인 셈이다 … 오로라가 나타나지 않아도 좋다. 빙하 위에서 밤을 지새면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세계를 경험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의 인생은 풍요로워질 것이다 … 지금 얼마나 멋진 풍경 속에 자신들이 서 있는지를 아이들은 알고 있는 걸까. 이렇게 대자연의 품에 안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다 … 사회의 척도에서 멀어질수록 인간은 더육 자유로워진다. 인생의 척도가 오직 자기 자신뿐이기 때문이다 ..  (139, 148, 149∼150, 151, 233쪽)


  우리 집 일곱 살 큰아이가 문득 “나 춤추고 싶어요.” 하고 말합니다. 그래, 춤추고 싶으면 춤을 추렴. “노래 틀어 주셔요.” 하고 덧붙입니다. 그래, 노래를 들으면서 춤을 추고 싶구나. 그러면 틀어야지.


  큰아이는 누가 보거나 말거나 춤을 춥니다. 혼자서 마음 가는 대로 춤을 춥니다. 어깨를 흔들고 발장구를 칩니다.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이리저리 뜁니다. 스스로 즐거운 춤입니다.


  스스로 즐거울 때에 삶이 되고, 스스로 즐거운 삶일 때에 이야기 되며, 스스로 즐거운 삶으로 빚는 이야기일 때에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는 솜씨는 없습니다. 삶을 가꾸는 솜씨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란 없습니다. 삶을 꾸미는 재주란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돌볼 적에 이런 솜씨나 저런 재주를 부리지 못합니다. 아이는 오로지 사랑으로만 돌봅니다. 어버이와 함께 살아가는 아이들도 사랑을 받아먹을 뿐, 과자나 밥이나 주전부리를 받아먹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사랑스레 내미는 넋을 받아서 즐겁게 먹고 즐겁게 놀아요.


  사진을 아름답게 찍는 넋은 여기에 있습니다.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고픈 꿈을 품으면서 하루하루 사랑스레 일구면, 사진은 저절로 태어나요.


.. 나는 혼자였고, 많은 위험도 겪었다. 그러나 위험한 순간들을 무사히 넘길 때마다, 또 내가 혼자라는 고독을 체감할 때마다 마음이 성장하는 것이 자연스레 느껴졌다. 그날그날 내가 선택하는 일상이 대본 없는 연극처럼 새롭기만 했다. 내 평생 처음 겪어 보는 신비로운 감정이었다 … 어제까지 알래스카의 여행자였다면 오늘부터 한 사람의 당당한 주민이 된 것이다. 나는 친구들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다 … 이곳에 뿌리를 내려야겠다고 다짐한 후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예를 들어 간혹 벌판에서 마주치는 늑대조차 왠지 낯설지가 않다. 그 전에는 늑대의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었다면 지금은 내가 지키고 보존해야 할 나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  (222, 226쪽)


  여행하는 나무란, 나무가 여행한다는 뜻일까요. 여행하는 나무란, 나무가 여행하는 꿈을 품는다는 소리일까요.


  나무는 언제나 여행합니다. 나무는 한 곳에 뿌리를 내리지만, 나무꽃은 온 숲과 마을 새와 벌레와 사람을 부릅니다. 머나먼 곳에서 나무꽃을 보려고 모여요. 그러고는 나무한테 저마다 어디에서 왔고 그동안 어떤 일을 겪었는지 조잘조잘 떠듭니다. 나무는 한 곳에 가만히 서서 온누리 이야기를 모조리 듣습니다. 그러고는 조용히 꽃을 떨구고 열매를 맺습니다. 열매에는 씨앗이 깃듭니다. 나무한테 찾아온 새가 열매를 먹고 멀리멀리 날아가서 똥을 뽀지직 누면서 어린 씨앗이 새로운 터에서 뿌리를 내려요.


  사람들이 나무를 베어 종이를 만듭니다. 종이가 된 나무는 책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책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는 이 나라 저 나라를 두루 누빕니다.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거치면서 온갖 고을과 고장을 돌아다닙니다.


  나무는 빙그레 웃습니다. 씨앗으로서 여행을 다니고, 책이 되어 나들이를 떠납니다. 때로는 책상이나 걸상이 되어 여행을 해요. 때때로 배가 되기도 하고 기둥이 되기도 합니다. 온갖 모습으로 몸을 바꾸면서 여행을 하는 나무입니다.


..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기에 이런 광경을 자아낼 수 있는 것일까. 이곳에서 살아남은 생명은 오직 빛과 그림자뿐이다 … 아내는 이곳의 자연에 흠뻑 반한 눈치였다. 겨울이 긴 북쪽은 상대적으로 여름이 짧다. 이런 곳에서 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은 단순한 기쁨이 아니다. 만일 이 땅에 겨울이 없었다면, 그리고 일 년 내내 꽃이 피었다면 사람들은 지금처럼 생명을 사랑하고, 꽃을 사랑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내 덕분에 알래스카의 또 다른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항상 거대한 자연만 관찰하던 내게 땅에 핀 꽃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 이곳에서 만난 꽃과 바람은 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그런 것들이 아니다 ..  (285, 295, 297쪽)


  오늘 이곳을 찍는 사진입니다. 어떤 사진도 어제나 모레를 찍지 않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곳에서 찍은 사진 하나는 모레가 되고 글피가 되면서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오랜 나날 지구별에서 푸르게 흐르며 살아온 이야기를 오늘 이곳에서 모조리 보여주어요.


  얼마나 많은 나날이 흘러서 지어낸 멋진 모습일까요. 오늘 이곳에 찾아왔기에 찍은 이 사진 하나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숨었을까요. 사진 하나 들여다보는 우리들은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까요.


  긴긴 겨울이 있어 봄꽃을 기다린다면, 긴긴 삶이 있기에 오늘 사진 한 장 찍겠지요. 긴긴 겨울을 보내며 봄꽃을 흠뻑 누린다면, 긴긴 삶을 숱한 사람들이 누리며 오늘 이곳까지 왔으니, 이 모습을 즐겁고 고마웁게 찰칵 한 장 찍겠지요.


  여행하는 나무이고, 여행하는 사진입니다. 나무는 여행을 하고, 사진은 여행을 합니다. 여행하는 삶이고, 여행하는 사랑입니다. 삶은 여행을 누리고, 사랑은 여행을 꽃피웁니다. 4347.1.2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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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6 17: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숲노래 2014-01-26 19:15   좋아요 0 | URL
이분 책은 하나하나 참 멋져요.
한국말로 옮긴 책은 아직 몇 가지 안 되고,
이분 사진책은 아직 한국에 소개도 못 되었는데,
저는 일본판으로 이분 사진책을
하나하나 장만하면서 즐겁게 누린답니다~
 
빨강 풍선 분도그림우화 15
알베르 라모리스 지음, 이미림 옮김 / 분도출판사 / 198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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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25

 


아이한테 들려줄 사랑이란
― 빨강 풍선
 알베르 라모리스
 이미림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 1982.3.1.

 


  1956년에 34분 길이로 나온 〈Le ballon rouge〉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를 찍은 ‘알베르 라모리스(Albert Lamorisse)’ 님은 ‘빨강 풍선’ 하나와 어린이가 서로 어떻게 만나서 마음을 나누는가를 차분히 보여줍니다. 오늘날 도시 문명사회에서 ‘여느 어른’이라 하는 분들 눈길로 본다면, 학교로 가다가 가로등에 묶인 풍선 하나를 지나치지 못하는 아이를 알쏭달쏭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뭔 풍선을 갖고 버스를 타려 하느냐고 윽박지를 수 있습니다. 학교에 왜 풍선을 갖고 오느냐고 나무랄 수 있습니다. 그깟 풍선은 내다 버리라고, 풍선을 갖고 다녀 보았자 공부와 시험과 성적에는 도움이 안 된다 말할 만합니다.


  풍선이 아닌 들고양이나 딱정벌레를 건사할 적에도 이와 똑같이 여기리라 느낍니다. 돌멩이를 줍는다든지, 나뭇잎을 주울 적에도 이와 똑같이 여길는지 몰라요. 나비 한 마리를 바라보거나 개구리 한 마리를 만나 하염없이 들여다볼 적에도 똑같이 여길 수 있겠지요.


  영화 〈Le ballon rouge〉는 조그마한 사진책 《빨강 풍선》으로도 태어납니다. 영화에 나오는 몇 대목을 간추리고, 이야기를 붙여요. 영화에서는 딱히 ‘말로 이런저런 모습’을 알려주지 않지만, 조그마한 사진책에서는 틈틈이 말을 넣어서 이런 모습과 저런 모습이 어떤 이야기인가를 밝힙니다. 이를테면, “파스칼은 풍선을 가지고는 버스를 탈 수 없는 그 바보 같은 규칙 때문에 집에까지 걸어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풍선이 젖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8쪽).”와 같이 밝혀 주어요.

 

 

 

 

 

 

 


  그래요. ‘여느 어른’들은 풍선을 갖고 다니는 아이를 바보처럼 여깁니다. 온갖 규칙을 내세워 아이를 나무라기만 합니다. 아이를 규칙에 따라 길들이려고 합니다. 규칙에 맞추지 않는 아이를 다그치기만 합니다.


  “교회는 풍선이 갈 곳이 아닙니다. 모두들 풍선을 쳐다보았고, 아무도 예배에 마음을 쏟지 않았습니다. 파스칼은 교회 수위 아저씨에게 쫓겨 서둘러 밖으로 나와야 했습니다. 풍선은 어떤 일이 맞갖은 것인지 모르는 게 틀림없습니다(25쪽).”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빨강 풍선은 학교에서도 받아들이지 않고, 교회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버스에서도 받아들이지 않으며, 《빨강 풍선》에 나오는 ‘파스칼’이라는 아이 어머니도 받아들이지 않아요. 영화에서나 사진책에서나 ‘빨강 풍선’을 받아들이는 ‘여느 어른’은 아무도 없습니다. 게다가, 이 영화와 사진책에 나오는 어른들은 모두 칙칙한 옷을 입습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도 칙칙한 옷을 입힙니다. 시커멓거나 잿빛인 옷만 입고 입혀요. 어른들이 이룬 도시도 우중충한 빛입니다. 밝거나 환하거나 고운 빛깔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빨강 풍선’처럼 새빨갛거나 눈부신 빛깔로 옷을 차려입는다든지 집을 짓는다든지 하지 않아요.


  어쩌면, 이 영화와 사진책에 나오는 ‘빨강 풍선’은 ‘빨강’이라는 빛깔과 ‘풍선’이라는 대목에서 무언가를 넌지시 빗댄다고 할 만합니다. 빛깔이 없거나 잃은 ‘여느 어른’들 사회와 삶자리와 문화와 교육과 정치를 이야기한달 수 있어요. 빛깔을 억누르거나 짓누르는 ‘여느 어른’들 생각과 마음과 매무새를 보여준달 수 있어요.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누리는 하루를 보낼까요. 우리 어른들은 어떤 사랑을 속삭이거나 어떤 꿈을 꾸면서 삶을 즐길까요.


  어머니가 입힌 ‘잿빛 옷’을 입은 어린이 파스칼은 ‘빨강’ 풍선을 언제나 들고 다닙니다. 그러다가 ‘파랑’ 풍선을 들고 다니는 가시내를 만납니다. 살가운 동무를 만난 셈입니다. 그렇지만, 살가운 동무보다는 짓궂은 동네 아이들한테 시달려요. 동네 아이들은 파스칼을 따사로이 보듬지 않습니다. 괴롭히고 놀리고 못살게 굽니다. 이리하여, “‘날아가, 풍선아 날아가!’ 파스칼은 외쳤습니다. 그러나 풍선은 친구를 떠나려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돌 하나가 풍선을 맞혔고 풍선은 터졌습니다(37쪽).” 하는 대목처럼, 빨강 풍선은 그만 뻥 하고 터지고 말아요. 어린 파스칼은 슬픔에 젖습니다.


  동네 아이들은 왜 파스칼이랑 빨강 풍선을 괴롭힐까요. 빨강 풍선을 괴롭히려는 마음을 어디에서 배웠을까요. 아이들 마음속에서 이런 모습이 자랐을까요. 둘레 어른한테서 배운 모습일까요. 어른들은 왜 아이들한테 사랑과 꿈과 평화를 가르치지 않고, 지식과 규율과 규칙을 먼저 가르치거나 길들이려 하나요. 아이들은 어떤 삶을 누릴 때에 아름답고, 어른들은 어떤 삶을 일굴 때에 사랑스러울까요.

 

 

 

 

 

 

 


  사진책 《빨강 풍선》은 “파리의 모든 풍선들이 파스칼에게 내려와 빙글빙글 춤을 추며 튼튼한 줄을 꼬아서는 파스칼을 하늘로 떠오르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파스칼은 온 세계를 구경하는 멋진 여행을 하게 된 것입니다(43쪽).” 하고 이야기하면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조그마한 아이가 빨강 풍선을 아끼던 마음을 다른 모든 풍선들이 읽어 주었어요. 작고 여린 아이가 사랑을 담아 돌보면서 보듬은 넋을 다른 풍선들이 모두 알아보았습니다.


  아이한테 들려줄 사랑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들은 어떤 삶을 가꾸면서 어떤 사랑을 속삭일 때에 기쁘게 웃을 만한지 헤아려 봅니다. 무지개빛이 곱다고 여긴다면, 무지개가 하늘을 가로지를 수 있도록 맑으며 푸른 삶터가 되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우리들이 입는 옷이나 우리들이 살아가는 집과 마을이 무지개빛이 되도록 할 노릇이지 싶습니다. 우리들이 읽는 책에 무지개빛이 감돌고, 우리 이웃하고 무지개빛으로 어깨동무를 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사진이라면, 무지개빛을 찍을 때에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흑백사진이든 칼라사진이든, ‘무지개빛’을 담아야지요. 무지개처럼 곱게 어우러지는 빛과 넋과 삶을 찬찬히 엮어야지요. 무지개처럼 환하면서 맑게 드리우는 빛살과 마음과 사랑을 따사로이 보여주어야지요.


  간장종이 하나에 식은밥 한 덩이 있어도 사랑을 담아 건네면 맛있게 먹는 한 끼니입니다. 온갖 반찬 푸짐하게 차렸어도 사랑을 담지 않으면 맛있게 누리지 못하는 한 끼니입니다. 알록달록하게 꾸미기에 무지개빛이 아닙니다. 무지개빛은 알록달록이 아닙니다. 무지개빛은 사랑입니다. 아이한테 물려줄 무지개빛이란 사랑빛이요, 아이와 나눌 즐거운 삶이란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4347.1.25.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

 

영화는 유투브에서 찾아보면 나옵니다.

 

http://www.youtube.com/results?search_query=albert+lamorisse&page=1

감독 이름을 넣으면 이 영화를 즐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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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 -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안세홍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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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75

 


살아가는 즐거움과 사진
―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안세홍 글·사진
 서해문집 펴냄, 2013.8.15.

 


  안세홍 님이 글과 사진으로 엮은 사진책 《겹겹, 중국에 남겨진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서해문집,2013)를 읽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군대가 아시아 수많은 나라를 식민지로 삼던 지난날, 일본군이 식민지 나라 사람들을 죽이고 괴롭힐 뿐 아니라 돈을 빼앗고 여성을 노리개로 삼다가 성병에 몹시 많이 걸렸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여러모로 말썽이 되기에 일본 제국주의 군대는 식민지 나라 가시내들을 일본군 씨받이처럼 삼으려고 ‘위안부’를 둡니다. 식민지 나라 사내들은 전쟁터로 내몰아 총알받이가 되거나 군수공장이나 탄광으로 내몰려 부속품이 되었습니다.


  가만히 헤아리면, 남녘땅에도 ‘위안부’와 비슷한 곳이 여기저기에 많습니다. 남녘에 있는 미군 부대 둘레에 ‘미국 군인 씨받이’ 구실을 하는 골목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제국주의 군대 ‘위안부’라면, 식민지도 강점기도 아닌 오늘날에는 이 나라 정부가 버젓이 눈을 감고 만들어 주는 ‘미국 군인 씨받이 골목’이 있어요.


  군대에 사내만 끌려가지 않고 가시내도 함께 끌려가면 무언가 달라질까 궁금합니다. 그러나, 군대에 가시내까지 함께 끌려간대서 달라지리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전쟁무기와 폭력으로 이루어진 군부대가 있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성폭력’이 함께 도사립니다. 총과 칼과 폭탄과 주먹으로 사람 죽이는 짓을 온몸으로 익히는 군대라는 곳은 지구별 모든 것을 부수거나 망가뜨리는 일을 합니다. 죽음을 부르고 죽음을 바라며 죽음을 노래하는 군대인 터라, 전쟁무기와 군부대를 모조리 없애지 않고서는 평화를 바랄 수 없습니다. 전쟁무기와 군부대를 몽땅 쓸어내지 않고서는 ‘위안부’와 ‘미국 군인 씨받이 골목’ 생채기나 아픔이나 멍에를 풀지 못합니다.

 


.. 30여 분 경로원 주변을 배회하는 동안 할머니가 나물을 한 움큼 쥐고 들어왔다. 할머니의 모습은 그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 앞니 네 대가 빠지고, 얼굴이 약간 말랐을 뿐이다. 같은 위안소에서 지낸 동갑내기 김순옥 할머니보다 훨씬 정정해 보였다 … “이젠 가족이 보내준 이 사진 한 장밖에 없어. 유일한 가족사진이지.” 가족과 함께 있어야 할 나이에 할머니는 고향을 떠났다. 겨우 가족들과 연락이 닿았지만 만날 수 없어 고향 가족들이 모여 사진을 찍어 보내 왔다. 할머니는 무엇보다도 이 사진 한 장에 의지해 지금까지 살아왔다 ..  (19, 34쪽)


  ‘위안부’가 되어야 한 사람들은 어디 별나라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어머니이자, 우리 언니이자, 우리 이웃입니다. 우리 아지매이자, 우리 누나이자, 우리 이모와 고모입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수한 사람들이 ‘위안부’가 되었습니다. 징용과 징병이 되어 수없이 죽고 만 사람들 또한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는 수수한 넋입니다.


  그러면,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무기를 만든 권력자는 누구일까요. 이들도 우리 이웃일까요. 이들도 우리 아버지일까요. 이들도 우리 아재이거나 삼촌일까요. 시골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던 사람들을 전쟁터로 내몰고 군수공장과 탄광으로 끌고 간 그네들은 어디 별나라 사람은 아닐까요.


  생채기와 아픔을 달고 살아온 할머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생채기를 만들고 아픈 짓을 일삼은 ‘누군가’를 찾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듣거나 사진을 찍는 분은 아직 못 봅니다. 두들겨맞은 사람들 이야기는 있습니다. 두들겨팬 사람들 이야기는 없습니다.


  언제나 궁금하다고 생각하는데, ‘위안소’로 찾아갔던 ‘일본 제국주의 군대 병사와 간부’들이 아직 다 안 죽었어요. 이들은 일본에서 할아버지가 되었겠지요. 징병으로 끌려갔다가 어쩔 수 없이 위안소에 가야 했던 조선인 할아버지도 있어요. 이분들도 아직 다 안 죽었습니다. 이들을 하나하나 만나고 이야기를 들으며 사진을 찍는 작가들 있을까 궁금합니다. 위안소를 만들라 명령과 지시를 내린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 발자취를 살피며 이야기와 사진을 아로새기는 작가들은 몇 사람쯤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제는 ‘위안부 (드나든) 할아버지’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전쟁과 평화를 더 또렷하게 밝히고 드러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시먼쯔 위안소는 촌이어도 군부대가 많았어요.” “군인을 적게 받으면 주인이 때렸어요. 일본 군인도 술 마시고 발로 막 때리는 거예요. 눈앞이 노랬지요.” “매 맞고 있으면 여자들이 다 운다 말이야. 마음 달래는 게 창가하고 신세타령이 전부지.” … “내래 죽기 전에 한복 입고 사진 박히는 게 소원인데, 한 장 박아 주소.” 할머니는 그동안 사진관에 가서 사진 한 장 남길 여유가 없었다. 너무나 말라 보이던 몸에 한복을 두르니 그나마 왜소한 몸이 넉넉해 보인다 ..  (45, 51쪽)


  우리 집 큰아이는 2014년을 맞이해 일곱 살입니다. 어느새 일곱 살이로구나 하고 느끼다가는 예전 사진을 돌아보면서 새삼스럽습니다. 오늘은 일곱 살 모습을 마주하지만, 여섯 해 앞서는 갓난쟁이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해 뒤에는 일네 살 푸름이 모습을 만나겠지요.


  큰아이를 처음 낳아서 돌보던 때를 떠올립니다. 갓 태어나서 세이레를 맞이하기까지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젖을 물리는 곁님은 젖몸살에다가 아기가 어머니 곁에서 안 떨어지려 해서 몹시 고단합니다. 아버지가 안아서 재우려 할 때에 잠들면 좋으련만, 큰아이는 아버지 등판이나 가슴에 안겨서는 잠들지 않았어요. 이러면서 삼십 분마다 쉬를 누니 삼십 분마다 기저귀를 갈고, 오줌기저귀 밀리지 않도록 한 시간마다 기저귀를 빨았어요. 마침 큰아이가 태어난 뒤 한 달 남짓 장마철이었습니다.


  밤잠도 낮잠도 이루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면서 다리미로 기저귀를 말렸습니다. 날마다 미역을 손으로 끊어서 미역국을 끓입니다. 아기가 젖을 물지 않을 적에는 안아서 노래를 부르고 어릅니다. 세이레 지난 뒤 비로소 바깥바람을 쏘이는데, 곁님이 집에서 쉴 수 있도록 한두 시간씩 골목마실을 했습니다. 한손에는 아기를 안고 다른 한손으로는 사진기를 쥔 채 골목이웃 사진을 찍었어요.


  아기는 자라고 자라 두 다리로 섭니다. 두 다리로 서면서 걷습니다. 걸음을 제대로 옮기지 못하는 아이를 업고 안으면서, 이때부터 서너 시간씩 골목마실을 합니다. 밥을 먹이고서 다시 밥을 먹이기까지 골목꽃 보러 돌아다니면서 지냈어요.


  갓난쟁이였을 적에 늘 어머니 품에서 잠들던 큰아이인데, 작은아이가 태어난 뒤로는 늘 아버지 곁에서 잠듭니다. 아버지가 작은아이 재우느라 부르는 자장노래를 옆에서 함께 들으면서 잡니다. 작은아이도 큰아이도 곁님도 시골집에서 아버지가 차리는 밥을 먹으면서 하루를 누립니다. 네 식구 모두 아버지가 손빨래를 하는 옷을 입으며 겨울을 보냅니다. 두 아이는 아버지가 모는 자전거를 함께 타고 마실을 다닙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어느 하루도 아이하고 떨어져 지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버이 둘레에서 맴돕니다. 다른 데에 마음을 쓸 수 없고, 하루 내내 아이들 앞바라지 옆바라지 뒷바라지를 한는 셈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누리는 삶은 힘이 드는가? 글쎄, 이제껏 힘들다는 생각은 아직 해 본 적 없습니다.

 


.. 부산에서 만난 조카 귀남이 할머니는 같은 해에 한국 정부에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등록 절차를 밟지 않았다. 할머니가 방문할 당시 오래전에 한국에서 사망 신고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한국에서 살 곳도 없고, 늙어서 돈을 받아 어디에 쓰갔어. 귀찮아.” … 할머니는 베이징에서 살면서도 한국말을 잊지 않기 위해 혼자 있을 때면 조선 노래를 부른다 ..  (72, 75쪽)


  아이들이 밥을 먹습니다. 무엇을 차리든 맛나게 먹습니다. 풀밥을 먹고 된장국을 먹습니다. 무채를 먹고 오이채를 먹습니다. 나물버무림을 먹고 곤약을 먹습니다. 아이들은 늘 수수한 밥을 먹습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어버이도 언제나 수수한 밥을 먹습니다. 수수하게 살아가니 아이들을 사진으로 찍으면 수수한 빛이 감돕니다. 수수하게 지내는 시골마을이기에, 우리 보금자리를 사진으로 담으면 수수한 내음이 깃듭니다.


  안세홍 님이 선보이는 사진책 《겹겹》에 나오는 할머님들 삶자리를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모두들 더없이 수수한 집에서 그지없이 수수한 살림을 꾸립니다. 수수한 얼굴이요 수수한 목소리이지 싶습니다. 이분들이 살아가는 곳은 중국일 뿐, 내가 우리 식구들과 지내는 보금자리하고 똑같은 살림살이입니다. 똑같은 마음이고, 똑같은 사랑입니다.


  집 언저리를 돌며 풀을 뜯어 먹습니다. 손님이 찾아오면 밥을 대접하고 싶습니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기쁠 적에는 활짝 웃고, 슬플 때에는 아프게 웁니다. 할머님들은 모두 역사 한 자락을 살아내셨는데, 이 할머님들이 ‘위안부’ 아닌 ‘그냥 식민지 여성’으로 살아내셨어도 모두 역사 한 자락을 살아내셨으리라 느낍니다. 안세홍 님이 할머님한테서 들은 이야기는 ‘역사책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하루하루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역사책에 나와야 역사가 아닙니다. 살아온 나날이 모두 역사입니다. 대통령 이름이나 무슨무슨 대단한 사람들 발자취가 역사이지 않습니다. 아니, 대통령 이름도 역사가 되겠지요. 그리고, 대통령도 시장도 군수도 아닌 사람들, 여느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 이야기도 역사입니다. 《겹겹》에 나오는 모든 할머님들 이야기도 역사입니다. 《겹겹》에 나오는 할머님들 이웃 이야기도 역사예요.

 


.. “꽃이 피어오르는 걸 끊어낸 거지.” … “늙은이 사진을 이렇게 많이 찍어 어디에 써.” 사진을 많이 찍어 그 중에서 좋은 사진을 골라 드린다고 했다. “인제 그만 찍어. 혼이 나가. 혼이 나가면 몸이 아파. 조금만 찍어.” … 점심때가 되어 할머니한테 같이 식사하러 나가자고 권하니, 일없다며 사양한다. 오히려 할머니는 점심 먹고 가라며, 부엌에서 달걀 대여섯 개를 들고 나온다 ..  (89, 97. 136쪽)


  일본에서 사진잔치를 열려고 했다는 안세홍 님입니다. 그런데 ‘니콘’이라는 회사가 갑자기 말을 바꾸고 사진잔치를 가로막았다고 합니다. 그렇겠네 하고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럴 만하지 않나요?


  더 많은 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주어도 할머님들 이야기를 널리 알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더 많은 사람한테 사진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한테라도 제대로 보여줄 수 있으면 됩니다. 굳이 어떤 사진관이나 전시관에 사진을 걸어야 하지 않아요. 길거리에 사진을 걸고서, 지나가는 사람 아무한테나 사진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겹겹》에 나오는 할머님들이 ‘어디 먼 별나라에서 똑 떨어진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여느 수수한 이웃’인 만큼, 사진관이나 전시관까지 찾아오는 사람들한테뿐 아니라, 이냥저냥 ‘수수한 마을 한켠’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사진을 붙여서 조용히 보여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보고서가 아닙니다. 사진은 기록물이 아닙니다. 사진은 보도자료가 아닙니다. 사진은 다큐멘터리가 아닙니다. 사진은 고발이 아닙니다. 사진은 역사자료가 아닙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입니다.


  사진책 《겹겹》은 사진과 함께 이야기로 엮습니다. 그예 사진인 사진이 하나 있고, 그저 이야기인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겹겹》에 깃든 이야기는, 다 다른 할머님이 다 다르게 걸어온 삶길입니다. ‘어느 한 점’에 머문 이야기 아닌, 조선반도 남녘이나 북녘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가 어느 한때를 식민지 백성으로 생채기를 받은 뒤, 기나긴 나날을 중국에서 뿌리를 내려 살아온 이야기입니다.

 


.. 할머니와 헤어질 무렵 아들이 택시운전 일을 마치고 돌아옸다. 아들은 할머니의 과거가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렇게 조사하고 사진을 찍어 가는데도 할머니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또 다시 할머니에게 상처가 된다고 생각한다 … 할머니는 열아홉 살에 집안의 가난을 덜기 위해 시집갔다. 남편 얼굴도 모른 채 부산에서 가까운 시골로 간 것이다. 도시에서 자란 할머니에게는 목화, 길쌈 등 농사일이 버거웠다. 시어머니한테 구박받다가 1년 만에 쫓겨났다. 친정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식당에서 일했다. “그저 공장일이나 허드렛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지.” “먹고살 일이 걱정이라 돈을 벌 요량으로 스무 살에 만주로 왔지.” ..  (143, 169쪽)


  안세홍 님은 사진책 《겹겹》을 흑백사진으로 묶습니다. 흑백사진이 드리우는 빛깔과 느낌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문득, 이 사진책 곳곳에 흑백 아닌 무지개빛 사진이 나란히 있으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할머님들 누구나 ‘끊어진 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와 군대는 할머님들이 젊은 나날 보내야 했던 지난 한때에 ‘꽃을 끊으려’ 했습니다만, 할머님들은 젊은 나날을 보내고 오늘까지 살아오면서 ‘고운 꽃’으로 씩씩하게 맑은 내음과 밝은 빛을 드리웠어요. ‘꽃’을 사진으로 담을 적에 흑백사진도 얼마든지 쓸 수 있습니다만, ‘꽃’을 사진으로 담는 만큼, 얼마나 아름다운 삶빛이 흐드러지고 쏟아지며 눈부시는가 하는 이야기를, 때때로 무지개 무늬로 살포시 담으면 어떠했을까 싶어요.


  시골마을에서 네 식구 살아가면서 노상 느껴요. 우리 아이들 모습을 흑백사진으로 찍어도 되게 멋있어요. 새삼스러운 빛을 느낍니다. 흑백사진을 찍으면, 우리 아이들 얼굴과 모습이 한결 도드라집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아이들을 으레 무지개빛으로 담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예쁠 뿐 아니라, 아이들이 지내는 이 시골마을 보금자리 빛깔이 더할 나위 없이 고우면서 환하거든요. 아이들이 지내는 삶터 무늬와 바람과 볕살을 함께 사진으로 담고 싶기에 늘 무지개빛 사진을 찍습니다.


  그러니까, 중국에서 살아가는 ‘위안부’ 할머님들이 조그마한 집에서 손님맞이를 하려고 달걀을 부치는 모습도, 집 언저리에서 풀을 뜯어서 나물로 삼는 모습도, 조용히 드러누워서 쉬는 모습도, 오랜 나날 손길과 손때 밴 밥그릇이나 부엌 살림살이 모습도, 햇살 드리우는 무지개빛 사진으로 넌지시 보여준다면, ‘이야기’가 새삼스러울 수 있겠구나 생각합니다.


  지는 꽃도 아름답습니다. 진 꽃도 아름답습니다. 동백꽃이 송이째 툭툭 떨어져도 아름답습니다. 꽃은 져야 합니다. 꽃이 져야 씨앗을 맺습니다. 꽃이 지고 씨앗을 맺어야 새롭게 피어날 꽃을 낳습니다. 일본 제국주의 총칼은 할머님들이 푸릇푸릇한 꽃이었을 적에 군화발로 짓밟으려 했지만, 이 꽃들은 꺾이지도 끊어지지도 않았습니다. 아기를 밸 수 없는 몸이 되었어도 씩씩하게 새 삶이라는 꽃을 피웠어요. 꽃송이가 툭툭 떨어졌어도 어느새 씨앗을 맺고 어느새 이 씨앗이 새로운 터에 뿌리를 내렸습니다. 새롭게 뿌리를 내린 꽃씨는 천천히 자라 꽃나무 됩니다. 꽃나무 둘레로 벌과 나비가 찾아들고, 꽃내음이 마을 한자락을 따사롭게 보듬습니다.


  살아가는 즐거움이 없다면 꽃을 피우지 못합니다. 꽃을 피우려는 마음을 곱다시 보듬어 즐겁게 살아가려고 다짐합니다. 수수하게 살고 투박하게 살림을 꾸립니다. 작은 꽃도 아름답고 수수한 꽃도 아름답습니다. 들꽃도 아름답고 시골꽃도 중국꽃도 모두 아름답습니다. 할머님들은 언제나 꽃입니다. 4347.1.2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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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4-01-23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 나왔을 때 읽고는 싶었는데, 어쩐지 마음이 너무 무거울까봐 쭈밋거리다
못 보았어요. 그런데 함께살기님께서 삶으로 삭히고 쓰신 느낌글을 읽으니 이젠 <겹겹>을 보아야겠다는 마음이 듭니다. 보슬비님께서도 도서관에서 대출하셨다는 페이퍼를 보았는데, 저도 얼른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어야겠습니다~
'겹겹'이란 제목에 들어있는 마음도, '할머님들은 언제나 꽃입니다.'하신 마지막 말씀도 다 좋네요.
오늘도 훌륭하고 좋은 글, 감사히 잘 읽다 갑니다~*^^*

숲노래 2014-01-23 12:22   좋아요 0 | URL
저는 1990년대 첫무렵부터 나온 정대협 책들을 다 읽고 하나하나 모아서 그러한지는 몰라도, 이 책은 그다지 '무겁다'는 생각이 안 들었어요. 이 느낌글에서도 밝히기는 했는데, 할머님들을 '무겁게' 바라보아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실마리를 못 맺으리라 느껴요. 이분들도 모두 우리와 살가운 '이웃'이니까요. 1990년대에 처음 자료집을 내고 세상에 크게 알리려 할 적에는 '무거운' 대목을 많이 짚어야 했다면, 이제는 '할머님들 살아온 나날'을 되새기면서, 우리들이 서로를 어떤 이웃으로 느끼면서 어깨동무를 해야 할까를 헤아려야지 싶어요.
 
주명덕 Joo Myung-Duck 열화당 사진문고 1
열화당 편집부 엮음 / 열화당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주명덕 님 사진책 <장미>는 새책방에서 팔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렇게 다른 주명덕 님 책에 이 사진책 느낌글을 붙입니다. 도서관에 이 책이 깃들어, 사람들이 널리 살펴볼 수 있는 길이 열리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


 

찾아 읽는 사진책 156

 


하나도 사진, 둘도 사진
― ROSE
 주명덕 사진
 한미사진미술관, 2009.6.13.

 


  하나를 보아도 사진입니다. 둘을 보아도 사진입니다. 꽃집에서 보아도 사진입니다. 씨앗을 받아 찬찬히 돌보며 나무로 키워 늘 지켜보아도 사진입니다. 어느 쪽에서도 사진은 태어납니다. 어느 곳에서도 사진을 읽습니다.


  장미를 보아도 사진입니다. 괭이밥꽃을 보아도 사진입니다. 동백을 보아도 사진입니다. 후박꽃을 보아도 사진입니다. 동백씨앗이 천천히 여물다가 굵어지고 무르익으며 벌어지는 모습을 보아도 사진입니다. 후박꽃 망울이 차츰 굵고 단단해지다가 천천히 벌어지면서 한껏 흐드러지도록 터지는 모습을 보아도 사진입니다. 어느 꽃을 보아도 사진은 태어납니다. 어느 꽃잎과 풀잎을 읽어도 사진을 깨닫습니다.


  나그네도 사진입니다. 마을사람과 토박이도 사진입니다. 나그네로 슬쩍 지나가다가 담아도 사진입니다. 마을사람이 한결같이 지내는 삶자락 담아도 사진입니다. 토박이가 토박이다운 눈썰미와 마음으로 그려도 사진입니다. 여행자가 되어야만 사진이 되지 않고, 마을사람 눈길로 바라보아야만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서로 다른 삶을 서로 다른 사랑으로 담아 서로 다른 이야기와 빛이 흐르는 사진이 됩니다.


  주명덕 님이 일흔 나이 언저리에 선보이는 사진책 《ROSE》(한미사진미술관,2009)를 읽습니다. 이 사진책은 시중에 돌지 않고, 새책방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서관에는 있을까요? 네, 국립중앙도서관에는 있습니다. 그러면 다른 도서관에는 있을까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국립중앙도서관에 가면 이 사진책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는, 이 사진책을 펴낸 한미사진미술관에 찾아가면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주명덕 님은 사진책 첫머리에서, “장미는 예쁘고 아름답다. 흰장미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품격이 백작부인 같다. 남대문 꽃시장 나의 단골 아줌마는 항상 좋은 백장미를 골라 준다. 나는 백장미를 좋아한다. 그리고 사랑한다. 그 사랑을 나는 내 사진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하고 밝힙니다. 그런데, 한자말 ‘우아(優雅)하다’는 ‘아름답다’를 뜻합니다. 한국말 ‘아름답다’를 한자말로 옮기면 ‘우아하다’가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한국말로는 ‘흰장미’이고, 한자로 적으려면 ‘백(白)장미’가 되지요. “우아하고 아름다운 품격”이란 “아름답고 아름다운 품격”이에요.




  한국사람이 ‘아름다운 흰장미’를 바라보든,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이 ‘優雅한 白장미’를 바라보든 똑같은 꽃입니다. 미국사람이 ‘beautiful white rose’를 바라보아도 똑같은 꽃이에요.


  사진책 《ROSE》는 흰장미를 다발로 처음 만날 적에 곱게 빛나는 모습부터 찬찬히 시들어 마른 모습까지 흑백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차근차근 흐르는 사진을 보여주는 주명덕 님은 “어느덧 내 나이가 칠순이 되었다. 장미 사진들을 보니 내 삶을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제부터, 이제부터 더욱 좋은 사진 작업을 해야만 한다. 희망과 용기를 갖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는 말을 붙입니다. 그래요, 하얗게 빛나는 장미는 주명덕 님이 풋풋한 눈빛으로 사진기를 처음 쥐던 때 모습일 테고, 차츰 흰빛이 바래는 흐름은 주명덕 님이 신나게 사진기를 쥐면서 뛰어다닐 적 모습일 테지요. 이러다가 뻣뻣하게 시들면서 마르는 장미빛이란 주명덕 님이 일흔 고개를 지나가는 모습이 되겠지요.


  장미꽃은 언제 가장 아름다울까요. 사람은 언제 가장 빛날까요. 장미꽃은 언제 가장 맑을까요. 사람은 언제 가장 환하게 웃을까요. 장미꽃은 언제 가장 돋보일까요. 사람은 언제 가장 싱그럽게 웃으면서 일할까요.


  어린이가 가장 아름다우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일흔 할매나 여든 할배쯤 되어야 가장 멋스러우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도 멋도 빛도 따로 금으로 죽 그어서 가르지 못합니다. 오늘이 더 아름답거나 어제가 더 아름답지 않습니다. 모레가 한결 아름다울 수 있거나 이듬해에 훨씬 아름다울 수 있지 않습니다.


  갓 돋은 장미꽃은 갓 돋은 대로 곱습니다. 한창 무르익다가 천천히 시들며 씨앗을 맺으려는 꽃송이는 이러한 결대로 곱습니다. 꽃잎이 모두 진 나뭇가지는 나뭇가지대로 곱습니다. 겨울을 나면서 새눈이 돋는 모습은 새눈대로 곱습니다.


  작은 씨앗은 씨앗으로서 곱습니다. 우람한 나무는 우람한 나무로서 곱습니다. 찔레나무는 찔레나무대로 곱고, 탱자나무는 탱자나무대로 곱습니다. 버들잎은 버들잎대로 고우며, 억새잎은 억새잎대로 곱지요.


  고운 눈빛으로 바라보면 어느 나무라도 곱습니다. 사랑스러운 손길로 쓰다듬으면 어느 풀이라도 사랑스럽습니다. 고운 빛을 사진으로 담지 못한다면, 고운 눈길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스러운 무늬를 사진으로 싣지 못한다면, 사랑스러운 손길로 어루만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전문가 되어야 사진을 잘 찍지 않습니다. 사진을 쉰 해쯤 찍고 나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지 않습니다. 즐겁게 살아가려는 사람이 즐겁게 사진을 찍습니다. 사랑을 속삭이는 하루를 밝히는 사람이 사랑스러운 사진을 내놓습니다.


  하나도 사진입니다. 둘도 사진입니다. 하나를 읽어도 사진입니다. 둘을 읽어도 사진입니다. 셋이나 넷까지 담거나 보여주어야 사진이지 않습니다. 하나에서 그치거나 둘에서 머물더라도 안 볼 만한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나누는 사진이요, 저마다 기쁘게 어깨동무하는 사진입니다. 일흔 나이란 대수롭지 않고, 오랜 사진길은 놀랍지 않습니다. 꿈을 키우는 삶빛일 때에 곱습니다. 사랑을 나누는 눈빛일 때에 아름다운 사진입니다. 4347.1.2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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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역 오감도 -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 바람에 실린 간이역 테마 여행
신명식 지음 / 이지북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55

 


이웃과 함께 즐기는 사진
― 간이역 오감도
 신명식 글·사진
 이지북 펴냄, 2010.4.8.

 


  모든 사진은 이웃과 함께 즐기고 싶어서 찍습니다. 혼자 찍어서 혼자 즐기는 사진도 틀림없이 있으나, 사진을 찍을 적에는 잘 찍었건 못 찍었건 이웃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뭉게뭉게 피어납니다. 내가 누린 곳에서 담은 아름다운 빛을 이웃한테 사진으로 보여주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철도와 철도역을 사진으로 담는 신명식 님이 빚은 사진책 《간이역 오감도》(이지북,2010)는 신명식 님이 그동안 찍은 사진 가운데 ‘간이역’ 한 가지만 보여줍니다. 철도를 즐기고, 철도역을 다니면서 늘 사진과 함께 지냈다고 해요. 철도를 타는 기쁨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철도역을 오가면서 누린 웃음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이러면서, 수많은 철도역 가운데 ‘간이역’을 도드라지게 헤아려 봅니다.


  “기차역에 내리는 것만으로 온전한 여행이 될 수는 없을까(17쪽)?” 하는 마음에서 조그마한 사진책 하나 태어납니다. 다만, 이 조그마한 사진책에서 이 나라 모든 간이역을 보여주지는 못해요. 이 작은 사진책을 바탕으로 앞으로 ‘모든 간이역 삶자락’을 담은 두툼하면서 알찬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겠지요.


  간이역으로 기차를 타고 갈 수 있기도 하지만, 기차가 서지 않는 간이역이 훨씬 더 많아, 버스나 자가용을 타야 비로소 찾아갈 수 있다고 해요. 신명식 님한테 말미와 기운이 더 있다면, 버스나 자가용 아닌 자전거를 타고 간이역을 다닐 수도 있어요. 천천히 걸어서 다닐 수도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누비다 보면, 으레 기차역 옆을 지나가곤 해요. 따로 기차역을 생각하며 지나가지 않지만, 자전거는 고속도로나 고속화국도로 다니기 힘들어요. 자전거는 으레 지방국도로 달립니다. 두 다리로 걸을 적에도 지방국도를 걷기 마련이요, 지방국도조차 아닌 시골길을 걷기도 해요. 길이 없는 멧자락을 넘을 수 있습니다.

 

 

  이제 기차가 서지 않는다는 간이역을 보면, 하나같이 시골에 있습니다. 하나같이 시골에 있으면서, 조그마한 면소재지나 읍내 한켠에 있어요. 그러니 이런 간이역은 지방도로나 시골길하고 잘 어울려요. 천천히 다가서는 간이역이요, 천천히 머무는 간이역이며, 천천히 헤어지는 간이역입니다.


  “남해고속도로를 비롯해 2번 국도가 4차선으로 확장되었고, 대전-통영 고속도로까지 개통되어 사람들은 거의 철도를 찾지 않게 되었다. 그 때문에 경전선에는 옛 풍경을 간직한 시골 마을, 때 묻지 않은 자연 풍광을 간직한 간이역이 많이 남아 있다(35쪽).” 하는 말이 아니더라도, 간이역을 찾아 자전거마실이나 걷기마실을 한다면, 간이역을 둘러싼 시골과 마을과 숲과 들과 멧골과 냇물을 모두 누릴 수 있어요. 간이역 하나 서기까지 이 둘레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일구면서 어떤 사랑을 꽃피웠는가 하는 대목을 읽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무엇을 찍을까요? 멋진 모습을 찍는가요? 사진으로 찍어서 무엇을 하나요? 예술품이나 창작품이라고 내걸면서 비싸게 팔아야 하는가요?

 


  사진을 찍는 까닭은 내가 찍는 사진 하나에 내 삶과 이야기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내가 마주한 이웃들 삶과 이야기가 감돌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부터 철길과 함께해 온 간이역의 세월을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오랫동안 마을과 자연과 기찻길이 함께 어우러져 숙성되었으니 어디 하나 소홀히 버릴 것이 없다(83쪽).” 하는 말처럼, 간이역을 ‘재개발 건축물’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낡은 건물을 하루아침에 허물고는 새 건물로 번듯하게 올려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과 삶과 이야기가 없다면, 오래된 건물이건 새 건물이건 우리한테 아무 뜻이 없어요.


  그러니까, “평은역은 최후를 눈앞에 두고 있다. 다름아닌 4대강사업 때문이다. 바로 옆을 흐르는 내성천 하류 쪽에 영주댐이 생기면서 역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수몰될 예정이다(109쪽).”와 같은 말처럼, 중앙정부나 지역정부가 함부로 밀어붙이는 토목개발은 참다운 ‘개발’이 못 됩니다. 오직 돈을 앞세워 마을을 없애고 숲을 없애며 간이역을 없애는 일은 개발이 아니고, 문명이나 문화도 아니며, 경제나 발전도 아닙니다. 그저 막공사일 뿐입니다.


  이야기는 돈으로 사고팔지 못해요. 사람이 태어나 자라고 사랑한 삶은 돈으로 사고팔지 못해요. 서로 아끼고 어깨동무하면서 살아온 오랜 이야기 서린 마을살이는 돈으로 사고팔지 못해요.


  값나가는 사진장비를 써야 간이역을 잘 찍지 않습니다. 편의점에서 파는 1회용사진기를 쓰기에 간이역을 못 찍지 않습니다.

 

 

 


  간이역이 선 마을에서 살아온 사람과 살아갈 사람들 눈빛과 마음빛과 삶빛과 사랑빛을 고루 헤아리면서 보듬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간이역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간이역이 서며 오늘까지 흘러온 발자국과 나날을 고이 돌아볼 수 있을 적에 바야흐로 간이역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현실주의자들의 말처럼 여유와 낭만이 밥을 먹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현재의 경춘선이 여유와 낭만을 포기한다면 너무 많은 것을 잃게 되는 것이 아닐까(137쪽).” 하는 말을 생각합니다. 즐겁게 타는 기차가 아니라면, 기차란 무엇일까요. 그저 빨리만 달려야 하는 고속철도라면 고속철도란 무엇일까요. 그저 빨리만 달려야 하는 자가용이라면, 이런 자가용에 아이들을 태우고 어디를 돌아다닐 만한가요.


  아이들하고 여행을 떠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랑하는 곁님이나 짝꿍하고 만나서 어디론가 나들이를 다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값진 밥을 차린 레스토랑에서 후다닥 배를 채우고는 비싼값을 치르는 호텔에서 후다닥 잠을 자야 만남이나 연애나 사랑이 될까요?


  몇몇 대학교 졸업장이 젊음을 말할 만할까요? 대입시험 점수가 푸른 나날을 말할 만할까요? 은행계좌가 온삶 바친 정년퇴직자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대학교는 왜 가야 하고, 회사는 왜 다녀야 하나요. 아이들은 왜 학교에 보내야 하고, 아이들한테 입시공부를 시키는 까닭은 무엇인가요. 여덟 살 아이는 여덟 살 나이를 어떻게 누릴 때에 즐거울까요. 열여덟 살 푸름이는 열여덟 살 나이에 무엇을 할 적에 아름다울까요. 서른여덟 살 아저씨나 아줌마는 이때에 무엇을 해야 사랑스러울까요.


  《간이역 오감도》 끝자락에 “오래된 역은 사람의 흔적을 담아내는데, 지나친 보수 작업으로 인해 세월의 흔적이 모두 사라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말쑥한 역사는 주위와 어울리지 못하지만, 주변의 풍경은 여전히 아름답다(277쪽).”와 같은 이야기가 흐릅니다. 사라지고 만 간이역을 애틋하게 여깁니다. 옛 간이역 건물이 사라졌어도 간이역이 선 마을 둘레 모습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그래요. 간이역이 사라졌어도 간이역이 선 마을에서 살아가는 할매와 할배는 오늘도 아름답습니다. 할매와 할배가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이 시골은 언제나 아름답습니다. 시골마을에 늙은 어르신 모두 흙으로 돌아가서 빈집만 휑뎅그렁하다 하더라도, 들과 숲은 아름답습니다. 꽃과 풀과 나무는 아름답습니다. 풀벌레와 멧새와 나비와 잠자리와 개구리는 모두 아름답습니다. 일구는 사람 없어 텅 빈 논밭이 되어도, 이 논밭에는 바람 따라 흩날리는 풀씨와 나무씨와 꽃씨가 내려앉아 새로운 숲으로 거듭납니다.


  오가는 사람이나 찾는 사람 없는 조용한 간이역이라 하지만, 풀씨가 산들산들 바람을 타고 내려앉습니다. 꽃씨도 하늘하늘 눈송이처럼 드리웁니다. 사람 발길은 없으나 푸른 꽃내음이 흐릅니다. 사람 소리는 없으나 멧새와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사진기를 쥔 누군가 간이역으로 찾아와 고즈넉한 빛을 담습니다. 사진기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누군가 간이역을 흘낏 스치듯 지나갑니다. 누군가 간이역을 사진으로 찍어 주어, 이곳을 잊거나 잃은 사람들이 따순 마음 되어 웃습니다. 누군가 간이역을 사진으로 찍지 않더라도, 이곳을 오래오래 한결같이 가슴으로 품은 사람들이 고운 마음 되어 이야기씨앗 심습니다. 사진 하나는 어여쁜 이야기씨앗 되어 이 땅에 뿌리를 내립니다. 4347.1.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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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4-01-11 1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간이역을 담은 사진과 글들을 보니 절로 따뜻한 가슴이 열리는 듯합니다.

중앙선 평은역은 제가 아주 어릴 때 처음으로 '안동역'까지 나와서 문수역 근처 마을에 사는 '작은 할배네 집'으로 놀러 갈 때 지나쳤던 역이에요.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진학하면서 '중앙선'을 자주 탔는데, 가끔씩 기차삯을 아끼느라 완행열차를 탈 때면 '평은역'에서도 기차가 섰다가 지나가곤 했었지요.

지금도 가끔씩 서울에서 시골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봉화의 춘양역을 비롯해서 그 인근의 이름모를 간이역들을 흘끔흘끔 쳐다보면서 지나치는데, 언젠가는 한번 카메라를 둘러메고 '기차와 도보로' 꼭 여행하고 싶은 마음이 그때마다 새록새록 돋아난답니다.

숲노래 2014-01-11 02:24   좋아요 0 | URL
oren 님이 작은 역들을 찬찬히 거닐며 사진으로 담으면
아주 새로우면서 사랑스러운 빛이
새록새록 스미겠어요.

철마다 다 다른 빛을 누리면서
즐겁게 마실하실 수 있기를 빌어요.

마음속에 있는 이야기들을 한 올 두 올
사진으로 곱게 풀어내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