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닷 Photo닷 2014.3 - Vol.4
포토닷(월간지) 편집부 엮음 / 포토닷(월간지) / 2014년 2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62

 


사진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가
― 사진잡지 《포토닷》 4호
 포토닷 펴냄, 2014.3.1.

 


  사진잡지 《포토닷》 4호(2014.3.)가 나왔습니다. 필름사진은 거의 사라지고 디지털사진으로 달라지는 흐름과 맞물려, 종이책으로 나오는 사진잡지는 거의 숨을 거두고 디지털로 나오는 사진잡지가 하나둘 늘어납니다. 그렇지만 《포토닷》은 종이책 사진잡지입니다. 4호째 나오는 종이책을 찬찬히 넘기면서 생각합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사진가들이 디지털사진기로 사진을 찍더라도 전시장을 얻어 사진잔치를 열 적에는 ‘종이에 사진을 앉’힙니다. 디지털파일로 사진을 보도록 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디지털파일로 사진을 보도록 벽에 화면을 쏘더라도 종이에 앉힌 사진을 함께 걸기 마련입니다. 사진잔치를 알리는 엽서나 쪽글이나 도록도 종이책으로 만들기 마련이에요.


  사진기자 일을 하다가 지리산 언저리로 깃들며 살아가는 분이 사진을 놓고 “막연히 나이 들어서는 시골에 머물며 사진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하지만 점차 사진이 삶의 목적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았죠. 삶 자체가 더 중요하고 사진은 놓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25쪽/이창수).” 하고 이야기합니다. 삶이 더 크고 사진은 놓아도 된다고 생각했다지만, 어느 쪽이 더 크거나 작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들한테서는 사진을 빼면 삶이 없거든요. 사진과 함께 살아가니, 삶과 사진은 언제나 한몸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이한테서 흙을 빼면 삶이 없습니다. 시골내기한테 흙을 빼고는 아무것이 없습니다. 시골내기와 흙은 늘 한몸이요 한마음입니다. 흙을 만지며 풀을 보듬고, 흙을 가꾸며 나무를 아낍니다. 사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언제나 사진이 삶을 빛내고 밝히리라 느껴요. 다시 말하자면, 삶을 내려놓고 사진만 할 수 없습니다. 사진만 내려놓고 삶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사진길 걷는 사람한테는 삶과 사진이 늘 한덩어리입니다.

 

 
  한국땅 아름다운 빛을 담는다는 옥맹곤 님은 사진을 놓고 “풍경사진은 사진을 찍을 당시의 피사체, 주변환경, 사진가의 상태 3가지가 일체가 되어야 얻을 수 있는 귀중한 보석 같은 것이에요. 말이 아니라 발과 마음이 좋은 풍경사진을 얻는 비결이죠(27쪽/옥맹곤).” 하고 이야기합니다. 오래도록 사진을 찍었다는 옥맹곤 님인데, 이녁이 쓰는 사진장비를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사진장비를 써야 사진을 아름답게 찍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지 않아요. 디지털이냐 필름이냐 하는 이야기도 하지 않습니다. 이녁이 말하는 세 가지는 ‘찍히는 님’과 ‘찍는 나’와 ‘찍히는 님과 찍는 나 사이를 이루는 삶자리’입니다. 세 갈래 삶을 함께 읽을 때에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세 자리 삶을 하나로 엮으며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사진을 찍는다는 소리입니다.


  사진잡지 《포토닷》을 더 펼칩니다. “인물을 찍는 행위는 결국 나를 거울에 비춰 보는 행위다(58쪽/천경우).”와 같은 이야기를 읽다가 “나는 보그 이탈리아를 찍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평생 패션을 하는 것이 꿈이다 … 패션사진을 학문과 학술로 배워 본 적이 없다(107, 108쪽/홍장현).”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사진기를 든 사람은 언제나 ‘남’을 찍지만, 남을 찍는 사진은 언제나 ‘나’를 보여주는 셈입니다. 남에 비추어 나를 보여준다고 할 만해요. 사진에는 모델이 나온다 하더라도, 모델에 비추어 내 삶과 넋과 모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셈입니다.


  즐겁게 놀며 살아가는 사람이 즐거운 빛을 사진으로 담겠지요. 아름답게 웃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름다운 웃음을 사진으로 보여주겠지요.


  슬프고 어둡게 보이는 사람을 찍었다면, 사진에 나오는 저들이 슬프거나 어둡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슬프거나 어둡습니다. 밝고 환하게 보이는 사람을 찍었으면, 사진에 나오는 저들이 밝거나 환하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 밝거나 환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찍는 사람도 눈물을 흘립니다. 빙그레 웃는 사람을 찍는 사람도 빙그레 웃습니다. 삶을 담고 삶을 보여주는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사진을 놓고 깊고 너른 이야기를 나누기는 아직 어려운 듯합니다. “이번 페스티벌의 원칙 중 하나가 참여작가들에게 작품 제작비와 대여료를 반드시 지급한다는 것이었고, 충분하진 못해도 최대한을 지급하려고 했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관행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였는데, 미술관 쪽에선 이것마저 당황해 했다(63쪽/박주석).”와 같은 이야기를 읽어 보셔요. 미술관에서 사진잔치를 열면서 사진가한테 제대로 사진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모습은 2014년에도 똑같습니다. 지자체나 미술관에서 사진잔치를 기획한다면, 마땅히 사진가한테 일삯을 치러야겠지요. 사진을 걸었으면 사진을 만드는 데에 드는 돈뿐 아니라, 사진을 찍느라 들인 땀값을 치러야겠지요.


  사진 한 장에 치르는 품값과 땀값은 얼마로 매기면 될까 궁금합니다. 사진 한 장을 미술관에서 거저로 받거나 헐값으로 사들여서 걸어도 될까 궁금합니다. 그러고 보니, 나부터 예전에 ㅇ미술관에서 했던 사진잔치에 함께하면서 겪은 일이 떠오릅니다. 여섯 달 동안 사진 100장을 찍어 달라 했는데, 여섯 달 동안 사진 100장을 찍는 품값과 땀값으로 육십만 원 남짓 준다고 했어요. 이 말을 들은 다른 젊은 사진가들은 어이없어 하면서도 이녁 경력에 이름이 들어가니까 구시렁거리면서도 이 제안을 받아들이려 했습니다. 여러 사람이 말을 해서 찻삯조차 없이 그런 헐값으로는 사진을 못 찍는다 해서 교통비 몫으로 달마다 얼마쯤 받기로 하면서 사진 100장에 130만 원 일삯이 되었으나, 더할 나위 없이 터무니없는 노릇이지요. 사진 1장 찍어서 가져오면 1만 원을 준다는 꼴이니까요. 나중에 뒷이야기를 들으니, 나와 여러 사람이 ㅇ미술관에서 함께 일하기 앞서 일했던 다른 이들은 이보다 훨씬 적은 돈을 받고 더 많은 사진을 찍어 주었다고 합니다.

 


  사진책 《밝은 그늘》을 비평하는 글을 읽습니다. “사진은 기법이나 표현법으로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 아름다움을 바라보거나 느끼면서, 내 이웃한테 아름다움을 나누어 주고 싶어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사랑스러움을 깨닫거나 누리면서, 내 이웃한테 사랑스러움을 베풀고 싶어 사진을 찍는 사람은 늘 따사롭습니다 …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을 바라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을 사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사진 한 장 찍습니다(145, 146쪽/최종규).”와 같은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우리는 사진으로 무엇을 하고 싶을까 생각해 봅니다. 사진가를 헐값으로 부리려 하는 미술관 일꾼은 사진잔치를 왜 하려 하나 헤아려 봅니다. 그야말로 사진에 온삶을 바치는 이들은 어떤 눈빛으로 사진기를 만지는지 되새겨 봅니다. 사진 한 장을 얻고자 굵은 땀방울을 흘리는 이웃 사진가들은 어느 때에 보람을 얻으면서 싱긋 웃는지 곱씹어 봅니다.


  사진은 무엇일까요. 사진책은 무엇이고, 사진잔치는 무엇일까요. 사진길을 걷고 싶은 이들은 왜 대학교에 들어가려 하고, 외국에까지 나가서 무엇을 배울 생각일까요. 사진을 찍어서 참말 무엇을 하고 싶을까요.


  돈이란 무엇일까요. 일자리란 무엇일까요. 돈을 벌어서 무엇을 하고 싶은 우리들일까요. 돈을 벌어 어디에 돈을 쓰면 즐거웁다고 여기는 우리들일까요.


  사진을 찍는 이들이 봄볕을 쬐면서 봄노래를 부르기를 빕니다. 사진을 읽는 이들이 봄바람을 마시면서 봄빛을 즐기기를 빕니다. 사진을 다루는 이들이 봄들을 거닐면서 봄꽃을 물끄러미 들여다볼 수 있기를 빕니다. 4347.3.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에서 본 한국
얀 아르튀스-베르트랑 사진, 이어령.존 프랭클 에세이, 김외곤.조형준 사진 에세이 / 새물결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61

 


한국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가
― 하늘에서 본 한국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새물결 펴냄, 2008.11.15.

 


  프랑스사람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님은 비행기를 타고 지구별을 돕니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지구별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지구별 여러 나라에서는 이녁한테 사진을 찍어 주기를 바라면서 여러모로 도와주기도 합니다. 한국에서도 다섯 해에 걸쳐 찬찬히 사진을 찍어 2008년에 《하늘에서 본 한국》(새물결)을 퍽 두툼하고 큰 판으로 내놓기도 했습니다.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님은 한국을 찍은 사진책 머리말에서 “사람들은 제 사진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정작 아름다운 것은 지구입니다(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하고 이야기해요.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님이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지구별이 아름다우니, 이 아름다운 지구별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빛을 사진으로 아름답게 찍을밖에 없는’ 셈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을 지피는 아름다운 짝꿍을 사진으로 찍어 보셔요. 얼마나 아름다운 사진이 태어납니까. 내가 사진을 잘 찍으니 아름다운 짝꿍을 아름답게 찍지 않습니다. 내 사진기가 대단히 값지거나 비싼 기계이기에 내 짝꿍을 아름답게 찍지 않아요. 나와 마주한 아름다운 짝꿍한테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사랑빛이 사진으로 살포시 옮아갈 뿐입니다.


  예부터 사진찍기는 ‘넋찍기’라 했습니다. 사진에 찍히면 넋이 빠져나간다고 여겼습니다. 이 말은 옳을 수 있고 그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은 대수롭지 않습니다. 찍히는 사람이 아름답게 삶을 가꾸면, 이녁을 찍는 사진은 언제나 아름답지요. 찍히는 사람이 아름답게 삶을 가꾸지 못하면, 이녁을 찍는 사진은 언제나 아름다움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진책 《하늘에서 본 한국》은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님이 찍었기에 아름답지 않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아름답다면 누가 한국을 찍더라도 아름다운 빛이 서리기 마련입니다. 책끝에 붙은 “이 책은 하늘에서 보면 민족주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심지어 DMZ를 찍은 사진들을 보더라도 한국이 남북으로 분단된 ‘미완’의 국가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존 프랭클).”와 같은 이야기를 헤아려 봅니다. 하늘에서 바라보면 남녘과 북녘이 따로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군인과 대통령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서울대 나온 젊은이와 고등학교만 마친 젊은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얼굴 이쁜 색시와 얼굴 못생긴 사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부자와 가난뱅이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또한, 하늘에서는 전라도와 경상도를 알아볼 수 없습니다. 하늘에서는 이것과 저것을 가르지 않습니다.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님이 하늘을 날며 사진을 찍는 까닭을 얼핏설핏 알 만합니다. 하늘에서는 국경이 없기에, 이녁은 언제나 지구별을 나들이할 뿐입니다. 이 나라와 저 나라를 가로지르지 않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지구별을 두루두루 나들이를 하면서 마음 가득 아름다운 빛을 담아요. 사진은 그저 거들 뿐이라 할까요. 손가락으로 단추를 누르기만 할 뿐, 언제나 아름다운 삶과 꿈과 사랑을 마주하니 즐거운 웃음으로 노래하듯이 사진을 빚는다고 할까요.


  그러면, 한국을 찍은 사진에는 어떤 빛이 서린다 할 만할까 돌아봅니다. 책끝에 붙은 “한국의 농촌에서는 사람의 그림자가 드문드문하고, 낙후된 실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환경이나 자연 풍광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울을 찍은 사진을 보면 저간의 사정이 짐작된다. 즉 한국 인구의 1/4에 가까운 인구가 수도인 서울에 집중되어 있으며, 날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다(존 프랭클).”와 같은 이야기를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시골에는 사람이 매우 드물고, 아이들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한국에서 도시에는 사람이 매우 많고, 지나치게 넘칩니다. 사람도 자동차도 건물도 한국 도시는 끔찍하다 할 만큼 복닥복닥 어수선합니다.


  사진책 《하늘에서 본 한국》을 들여다보면 골프장 사진이 틈틈이 나옵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기에 골프장은 그야말로 그악스럽기 때문일까요. 어쩐지 도드라져 보이기 때문일까요. 숲하고 동떨어진 골프장이요, 시골마을하고도 엇나가는 골프장입니다. 외딴섬에 마련한 별장과 관광단지 사진도 가끔 나타납니다. 작고 예쁘장한 섬에 엄청난 돈을 들이부어 마련한 별장과 관광단지는 무엇을 말할까요. 왜 ‘한국을 이야기하는 사진’에는 그악스럽다 할 만한 모습이 자주 나타날까요.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러들인 ‘시골집 지붕’ 빛깔을 바라봅니다. 새마을운동 바람과 함께 온 나라 시골에 불어닥친 ‘비닐 농사’ 무늬를 바라봅니다. 고랑을 따라 길게 줄을 맞춰 땅을 뒤덮는 비닐입니다. 시골은 온통 비닐이요, 도시는 온통 아스팔트와 시멘트입니다. 한국은 오늘날 이런 모습입니다. 아름답다면 아름다울 한국이요, 안 아름답다면 안 아름다울 한국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거의 마지막에 실린 사진에 붙인 말을 읽습니다. “갈대밭으로 유명한 순천만에는 약 2600만㎡에 달하는 넓은 갯벌이 있다. V자 형의 개막이 그물이 군데군데 처져 있는 갯벌 위로 저녁노을이 곱게 물들어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이 만들어졌다.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멋진 풍경을 선사하는 순천만 갯벌은 수산물이 풍부해 지역 주민들의 생계에도 보탬이 되고 있다(332쪽).”와 같은 말은 누가 붙였을까요. 한국사람이 붙였을까요, 프랑스 사진가 스스로 붙였을까요. 어쨌든, 순천만 갯벌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마을사람 살림살이를 북돋우는 아주 좋은 삶터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런 말이 나온 지는 얼마 안 되었어요. 이런 말이 나오기 앞서까지 온 나라 갯벌을 온통 메우느라 바빴습니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전남 고흥은 들과 바다와 섬과 갯벌이 한껏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고장이지만, 거의 모든 갯벌을 메워 논으로 바꾸었습니다. 다른 바닷가 시골에서도 갯벌을 메우기 바쁘기만 했습니다. 서울과 가까운 도시에서는 갯벌을 메워 아파트를 올렸어요. 인천공항은 섬과 갯벌을 메워서 지었습니다.

 


  갯벌은 순천 갯벌만 예쁘지 않습니다. 온 나라 모든 갯벌이 예쁩니다. 그러나 순천을 뺀 다른 고장에서는 갯벌을 없애기에 바빴고, 메운 갯벌에 다시 바닷물을 끌어들이려 하는 고장을 찾기 어려우며, 제주섬은 바닷가를 빙 둘러 찻길을 닦았습니다. 한국은 틀림없이 지구별에서 손꼽힐 만큼 들과 숲과 멧골과 바다와 냇물이 아름다운 나라였을 텐데, 오늘날에는 지구별에서 손꼽힐 만큼 몽땅 망가뜨려 어지럽고 아픈 누리로 바뀌었습니다.


  한국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일까요. 한국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 빛을 만날 수 있을까요. 얀 아르튀스 베르트랑 님이 다른 나라에서 찍은 사진과 한국에서 찍은 사진을 굳이 견주어야 할 까닭은 없을 테지만, 저절로 견주고 맙니다. 자꾸 견주고 맙니다. 한국에서 만날 수 있는 빛은 아름다움보다는 그악스러움에 가깝고, 앞으로도 아름다움보다는 그악스러움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4347.3.2.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4세계와의 조우 - 북미 원주민의 삶과 문화를 탐험하다, Close Encounters of the Fourth World
손승현 글.사진 / 지오북 / 2012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잡지 <포토닷> 2014년 3월호가 나왔다. 어제 낮에 우리 집에 왔다. 정기구독자한테는 어제 왔으니, 이제 책방에도 배본이 되었을까. <포토닷> 이번 호에 실은 사진비평을 올린다. 사진책 <밝은 그늘>은 인터넷책방에도 여느 새책방에도 없기에 손승현 님 다른 책에 이 글을 붙인다. 이 사진책을 장만하고 싶은 분은 https://www.facebook.com/aprilsnowpress '사월의눈' 출판사 누리집으로 들어가서 여쭈면 된다.

 

..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44

 


어느 자리에서 찍는 사진입니까
― 밝은 그늘
 손승현 사진
 사월의눈 펴냄, 2013.10.31.

 


  여러 사람이 어느 곳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들이나 골짜기나 바다나 숲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여러 사람은 나들이를 간 곳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고는 입이 쩍 벌어집니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눈에만 담을 수 없겠다고 여겨, 서로서로 사진기를 가방에서 꺼냅니다. 저마다 찰칵찰칵 찍습니다. 이때에, 참으로 아름답다고 느낀 여러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은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요? 이들이 찍은 사진 가운데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모델을 앞에 두고 사진작가 여럿이 둘러싸고는 사진을 찍습니다. 이때에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대통령이나 운동선수가 기자회견을 하는 자리에 모인 신문기자가 대통령이나 운동선수를 둘러싸고는 사진을 찍습니다. 이때에 ‘똑같은 사진’이 나올 수 있을까요?


  뜻밖이라 해야 할는지 모르겠으나, 여러 사람이 한 자리에 모여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으면, 모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똑같은 아이 하나를 둘러싸고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진을 찍을 적에도 노상 다른 사진이 태어나고, 이웃이나 친척이나 동무가 찾아와서 사진을 찍을 적에도 늘 다른 사진이 태어납니다.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면서 찍는 사진은 늘 다른 사진으로 나타납니다. 사랑스럽네 하고 느끼면서 찍는 사진은 언제나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드러납니다.

 

 


.. 몽골의 경제성장률이 17%, 작년이 12%, 올해도 15%인데 90% 이상이 모두 광산개발과 관련된 지표다. 몽골에 갈 때마다 울란바타르 풍경이 급속도로 바뀐다. 그 안에서 유목민의 삶도 급속하게 변하고 있고, 파란 하늘이 보이는 곳마다 빌딩이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도시에 사람들이 몰린다. 몽골의 인구가 300만 정도다. 그런데 울란바타르 주민의 비율이 22% 정도였다가 지금은 40%가 넘어간다 … 유목마을에는 젊은이들이 별로 없다. 그런데 그들 중 중학생 되는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 보면 “돈 많이 벌고 싶어요.”라고 한다. “도시 가서 택시 운전기사 아니면 광산 갈 거예요.”라고. 답이 딱 두 개다 ..  (70∼71쪽)


  이와 달리, 아주 똑같구나 싶은 사진이 태어나는 일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으면서 찍은 사진이 아닌데, 참 똑같구나 싶은 사진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이때에는 ‘표절’이나 ‘도용’이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두 사람이나 여러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지 않았는데, 왜 참으로 똑같다 싶은 사진이 태어날까요? 이때에는 아름다움이나 사랑스러움을 마음속에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을 찍으려는 사진이나 사랑스러움을 나타내려는 사진이 아니라, 어떤 욕심이나 꿍꿍이를 품었기 때문에 ‘표절’이나 ‘도용’이라 할 만한 사진이 태어납니다.


  그림을 그린 고호 님은 밀레라는 분이 그린 그림을 수없이 따라서 그렸어요. 그런데, 고호 님이 그린 ‘밀레 그림’은 표절이나 도용이 아닙니다. 밀레라는 분이 그린 그림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움을 기쁘게 맞아들여 사랑스럽게 붓질을 했기에, 고호 님이 그린 ‘밀레 그림’은 새로운 그림이 됩니다.


  똑같은 자리에서 해돋이나 해넘이를 찍는다 하더라도, 어느 사진은 ‘누군가 찍은 사진을 흉내낸 듯하구나’ 하고 느낄 수 있어요. 어느 사진은 ‘이야, 아주 새로운 이야기가 흐르는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진은 기법이나 표현법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마음으로 드러납니다. 어느 자리에서 찍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제주섬 오름에서 사진을 찍은 김영갑 님을 떠올려 보셔요. 김영갑 님은 으레 똑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자리는 똑같지만 이야기는 언제나 달랐어요. 김영갑 님은 이녁이 찍은 사진을 선보이면서 ‘똑같은 모습을 본 적이 한 번도 없다’고 밝혔어요. 같은 자리에 서도 언제나 다른 사진이 태어날 수밖에 없다고 밝혔습니다.

 

 


  아름다움을 바라보거나 느끼면서, 내 이웃한테 아름다움을 나누어 주고 싶어 사진을 찍는 사람은 언제나 새롭습니다. 사랑스러움을 깨닫거나 누리면서, 내 이웃한테 사랑스러움을 베풀고 싶어 사진을 찍는 사람은 늘 따사롭습니다.


  꼭 어느 곳에 가야 멋진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반드시 어느 나라로 찾아가야 훌륭한 사진을 찍지 않습니다. 꼭 인도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네팔이나 부탄에 가야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나라를 애써 찾아가야 하지 않아요. 외딴 두멧시골까지 가야 다큐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몸매 잘 빠진 모델을 찾아야 패션사진이 빛나지 않아요. 사진을 찍으려면, 스스로 마음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어서 나누려면, 스스로 마음을 살찌워야 합니다. 사진을 찍어서 이웃과 어깨동무하면서 활짝 웃고 싶으면, 스스로 마음을 사랑과 꿈과 빛으로 채워야 합니다.


.. 몽골의 밤하늘을 본 적이 있는가?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끝없이 펼쳐진 은하수를 보면 경이롭다 못해 한동안 멍해지곤 했다. 여기서 평화로움의 정적을 깨는 단 하나는 하늘을 나는 비행기다 … 내가 마을에 가서 “사진을 찍어 드립니다.”라고 했더니 나이드신 분들은 목욕을 하고 나왔다. 이를 닦고 와야 한다면서 가시는 분도 계시고. 응시 방식의 문제는 이렇게 사진 찍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점에 있는 것 같다. 사진을 평생 몇 번밖에 안 찍어 본 분들이다. 사진을 뽑아 드리니 가장 중요한 물건들을 놓아 두는 가족사진 옆에 놓더라. 액자에 넣어서 ..  (74, 76쪽)


  손승현 님이 몽골에서 만난 ‘지구별 이웃’과 얼크러진 삶을 들려주는 사진책 《밝은 그늘》(사월의눈,2013)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손승현 님은 몽골 시골자락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가슴이 부풉니다. 그렇지만 몽골 시골자락을 벗어나 울란바타르라는 도시로 가면 가슴이 오그라듭니다. 드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미리내를 올려다보면서 손승현 님 스스로 미리내 마음이 되어, 미리내처럼 빛나는 이야기를 미리내와 같이 밝은 사진으로 갈무리합니다. 돈과 경제개발이 춤추는 도시 한복판에서는 이러한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으로 갈무리합니다.

 

 

 

 


  몽골 시내 한켠에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작은 ‘지구별 이웃’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서울 시내 한켠에도 아름다운 사랑으로 아름다운 삶을 가꾸는 작은 ‘지구별 이웃’이 있어요. 부산 시내에도, 대구 시내에도, 인천 시내에도, 어디에나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이 있습니다.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을 바라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을 사귀면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다가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작고 예쁜 지구별 이웃이 주눅들도록 하는 사회 얼거리 때문에 마음이 아픈 사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이 마음앓이를 가슴으로 삭히면서 사진 한 장 찍습니다.


  사진책 《밝은 그늘》에 나오는 아파트와 선글라스는 무엇일까요. 오늘날 몽골 사회는 몽골 바깥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까요. 몽골 정치인과 기자와 작가는 몽골을 어떤 빛으로 그리고 싶을까요. 한편, 오늘날 한국 사회는 한국 바깥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싶을까요. 한국 정치인과 기자와 작가는 한국을 어떤 빛으로 그리고 싶을까요. 한국에서 사진가로 일하는 사람들은 어떤 빛과 그늘로 한국을 살며시 밝힐 만할까요.


.. 뉴욕에 있을 때 전세계에서 온 사진들을 보며 작가가 사는 지리적 환경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음을 느꼈다. 예술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관계를 맺고 작업하는 것이 중요하다 … 몽골에 가서 본 것은 그들이 냉소적이고 비극적인 일들을 너무 많이 당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주 작은 희망을 이 사람들을 통해서 봤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그런 것을 보는 따뜻한 마음의 스파이가 되려고 했다 ..  (84, 86쪽)

 


  겨울이 지나면서 봄이 찾아옵니다. 봄이 흐르면 여름이 찾아옵니다. 여름이 무르익다가 가을이 찾아옵니다. 가을이 저물면서 겨울이 찾아옵니다. 봄이 되어 들판에 푸른 빛이 살아나면 비로소 딸기풀에 하얗게 꽃망울 맺습니다. 딸기꽃이 지는 늦봄부터 딸기알이 빨갛게 익습니다. 예전에는 누구나 여름 문턱에 딸기맛을 보았는데, 이제는 누구나 철없이 딸기알을 사다가 먹습니다. 맨땅에서 햇볕과 바람과 빗물을 머금으면서 풀벌레와 멧새와 개구리 노랫소리를 듣고 자란 들딸기나 멧딸기를 먹으려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비닐집에 갇힌 채 기계소리를 듣고 난로 열기와 석유내음을 마신 철없는 딸기를 대형마트뿐 아니라 동네 구멍가게에서조차 손쉽게 사다가 먹는 오늘날 한국 사회입니다.


  딸기를 사진으로 찍는 사람이 있으면, 어떤 딸기를 찍을까 궁금합니다. 딸기와 얽힌 어떤 이야기를 보여줄까 궁금합니다. 딸기가 마신 바람이나, 딸기가 받은 햇살이나, 딸기가 머금은 빗물이나, 딸기가 들은 맹꽁이 노래나, 딸기가 지켜본 제비춤을 ‘딸기를 찍은 사진’에 살포시 담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능금밭에 섰대서 능금을 사진으로 잘 찍지 않습니다. 바닷가 모래밭에 섰기에 바닷가와 모래밭을 사진으로 잘 찍지 않습니다. 몽골에 간대서 누구나 《밝은 그늘》과 같은 사진책을 빚을 수 없습니다. 마음을 열어 서로 사귀는 이웃으로 지내면, 몽골에서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콜롬비아에서도 동티모르에서도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언제나 밝은 빛을 사진으로 찍어서 선보입니다. 마음을 열어 서로 사랑하는 동무로 지내면, 늘 웃음꽃과 이야기꽃이 흐드러진 무지개 그늘을 사진으로 찍어서 선물합니다. 마음이 움직여 삶이 되고, 마음을 사랑해 사진이 됩니다. 마음이 자라며 꿈이 되고, 마음을 보살펴 사진이 되어요. 4347.2.13.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Beyond
정금희 지음 / 류가헌 / 201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60

 


이곳에 있는 티벳을 읽는다
― BEYOND
 정금희 사진
 류가헌 펴냄, 2011.8.25.

 


  1968년에 부산에서 태어나 부경대학교를 다녔고, 대학에서 디자인과 색채 이론을 강의하다가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으며 사진을 익혔다고 하는 정금희 님이 내놓은 사진책 《BEYOND》(류가헌)는 2011년 여름에 태어났습니다. 지난 2011년 여름에 이 사진책을 만났으나 2014년 2월까지 책상맡에 두었습니다. 아무래도 이 사진책을 읽어내기까지는 정금희 님이 한국을 떠나 티벳을 마실하며 누린 나날처럼 시골집 책상맡에서 조용히 삭혀야 했다고 느낍니다.


  어느 사진은 처음 사진책을 장만하던 날 즐겁게 읽어내면서 활짝 웃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어느 사진은 《BEYOND》라는 사진책처럼 여러 해 책상맡에 두고는 오래오래 다시 들추고 되읽으면서 가만히 노래하는 이야기를 풀어놓을 수 있습니다. 사진읽기는 하루아침에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사진읽기를 하자면 여러 해가 걸려야만 하지는 않습니다. 사진마다 다르고 사진책마다 다릅니다.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결과 무늬가 다르며, 사람마다 바라보는 빛깔과 노래가 다릅니다.


  누군가는 서울과 부산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도 참새와 박새와 딱새와 콩새가 날갯짓하는 조그마한 몸놀림과 노래를 들여다봅니다. 누군가는 시끄러운 자동차 물결 사이에서도 도시비둘기가 퍼덕퍼덕 날아오르다가 톡톡톡 거닐면서 먹이를 쪼는 소리를 눈여겨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사람 발길 없는 깊고 조용한 네팔 멧등성이에서 외로움이나 쓸쓸함을 느끼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드넓은 하늘과 벌판이 드러나는 티벳 길자락에서 넋을 잃기도 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서울과 부산 같은 도시 한복판에 서면서도 티넷사람 넋이 되곤 합니다. 누군가는 네팔이나 티벳 같은 나라에서 시골이나 숲이나 멧자락을 거닐면서도 맥주 한 잔과 세겹살 한 점과 텔레비전 연속극을 떠올리곤 합니다.


  이곳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이곳을 잘 알지 않습니다.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아파트라는 삶터를 얼마나 잘 읽거나 알거나 헤아릴까요.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흙과 들과 숲을 얼마나 잘 살피거나 느끼거나 받아들일까요.

 


  교사가 되어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들은 다 다른 아이들을 얼마나 잘 살피거나 헤아리면서 교과서 진도를 나갈까요. 초·중·고등학교 교실을 그득 채운 모든 아이가 대학생이 될 수 없으며, 모든 아이가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될 수 없는데, 교과서 진도는 누구한테 맞추는 지식이 될는지요. 교사 자리에 서는 이들은 아이들한테 무엇을 심거나 가르치는 셈일까요.


  사진책 《BEYOND》를 선보인 정금희 님은 “그저 말없이 바람이 전하는 소식을 담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길을 따라 다양하게 모여듭니다.” 하고 말합니다. “나그네의 발자국으로 길 위에 또 다른 길을 잇고 다른 길을 이어 낮선 곳에서 바람의 말을 풀어놓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빛을 읽어 빛을 사진으로 담습니다. 길을 읽어 길을 사진으로 옮깁니다. 눈망울을 읽어 눈망울을 사진으로 엮습니다. 꿈을 읽어 꿈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어떤 사람은 골목동네에서 ‘폐허’를 읽기에 골목동네를 ‘폐허’로 주제를 잡아 사진을 찍습니다. 어떤 사람은 골목동네에서 ‘사랑’을 읽기에 골목동네를 ‘사랑’으로 주제를 잡아 사진을 찍습니다. 똑같은 골목동네이지만,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사진은 사뭇 다릅니다. 나그네인 사진가가 돌아다니지 않아도 골목사람이 오순도순 모여서 살아가는 터전인 골목동네이기에, 굳이 누군가 사진으로 찍어 주지 않아도 언제나 이야기가 흐릅니다. 다시 말하자면, 정금희 님이 티벳으로 사진마실을 가지 않았어도 티벳 이야기는 티벳에서나 지구별 어디에서나 살그마니 흐릅니다. 누군가 티벳으로 사진기를 들고 찾아가야 티벳 이야기를 지구별 곳곳에서 누릴 수 있지 않습니다. 티벳 이야기가 흐르자면, 스스로 티벳사람이 되면 됩니다. 티벳 이야기를 나누자면, 살그마니 티벳땅 흙 한 줌이 되면 됩니다.

 


  나그네는 언제나 나그네요, 동네사람은 언제나 동네사람입니다. 마음이 숲과 같은 사람은 언제나 숲입니다. 마음이 바다와 같은 사람은 언제나 바다입니다. 곧, 마음이 티벳땅 흙 한 줌과 같다면 언제 어디에서나 티벳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티벳땅을 밟고 서니까 티벳을 찍지 않아요. 마음이 티벳일 적에 티벳을 찍습니다.


  부산땅에 서야 부산을 찍지 않습니다. 서울로 찾아가야 서울을 찍지 않습니다. 강원도에서도 부산을 찍을 수 있고, 제주섬에서도 서울을 찍을 수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이 아닙니다. 어떠한 사랑을 가슴에 담으며 살아가느냐에 따라 거듭나는 사진입니다. 어떠한 꿈을 마음에 실으며 사랑하느냐에 따라 태어날 수 있는 사진입니다.


  사람들은 국경을 나누고 국적을 가르지만, 새는 국경도 국적도 없이 훨훨 날아다닙니다. 사람들은 여권을 내밀고 주민등록번호를 받지만, 바람은 여권도 주민등록번호도 없이 지구별을 골골샅샅 누빕니다. 서로 예쁜 사람이기에 나그네도 동네사람도 아닌 살가운 이웃입니다. 4347.2.2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진의 털 - 노순택 사진 에세이
노순택 글.사진 / 씨네21북스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59

 


사진가한테 머리띠를 주지 마셔요
― 사진의 털
 노순택 글·사진
 씨네21북스, 2013.5.14.

 


  잡지 〈씨네21〉에 주마다 싣는다는 사진이야기 가운데 여든 꼭지를 그러모아서 선보인 노순택 님 《사진의 털》(씨네21북스,2013)을 읽습니다. 어느 날 어느 시인과 어느 공장을 찾아갔더니 “전기가 끊긴 창문 없는 공장 안에서, 시인은 내게 사진을 찍으라고 명하였다(25쪽).”고 합니다. 그래서 노순택 님은 전기가 끊긴 깜깜한 공장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창문도 없어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장에서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을 찍으라고 하잖아요. 시인이 사진을 찍으라고 하잖아요.


  시인은 나중에 시를 썼을까요. 썼을 수 있고 안 썼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쓸 생각일 수 있고, 어쩌면 안 쓸 생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진가는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사진가는 언제나 바로 이곳에서만 사진을 찍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진가는 다른 곳이나 다른 때라면 사진을 찍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황을 다시 꾸며서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무대를 만들거나 모델을 세워서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상황이든 무대이든 모델이든 늘 바로 이곳에 있을 때에 찍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 없으면 다시 꾸민 상황이나 무대를 찍지 못하고, 다시 꾸민 상황이나 무대가 있더라도 바로 이곳에 있어야 사진을 찍습니다.


  노순택 님은 어느 사진잔치 자리에서 겪은 일을 “형사님들은 이른바 ‘채증’을 위해 갤러리를 샅샅이 촬영했다. 그분들도 관람객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우리 누구도 그들을 제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웠다. 누가 우리 작품을 이렇게 세심한 각도로, 이렇게 정성을 담아 카메라에 담아 주었던가(37쪽).”와 같은 이야기로 들려줍니다. 전시관을 샅샅이 찍었다는 형사님이란 얼마나 놀라운 관람객일까 궁금합니다. 참말 어느 관람객도 이렇게 사진을 찍지는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요모조모 샅샅이 찍으며 ‘채증’을 하는 관람객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잔치 자리를 찾아가는 관람객은 이녁 사진기가 아닌 이녁 마음에 사진 작품을 담기 때문입니다. 이녁 마음을 아름답게 살찌우고 싶으니 사진잔치 자리에 가요. 이녁 마음을 새롭게 북돋우면서 가슴속에 고운 사랑을 심고 싶기에 사진잔치 자리에서 즐겁게 눈빛을 밝힙니다.


  사진을 읽거나 글을 읽거나 늘 똑같으리라 생각합니다. 겉글을 읽으면 속글을 알 수 없어요. 겉사진을 읽으면 속사진을 알 수 없습니다. ㅈㅈㄷ신문을 읽을 적이든 ㄱ이나 ㅎ신문을 읽을 적이든 똑같아요. ㅈㅈㄷ신문만 속살을 파헤치듯이 읽을 일이 아닙니다. ㄱ이나 ㅎ신문도 속살을 제대로 파헤치면서 읽을 노릇입니다. “찍혀 있는 사진을 읽는 여러 방법 중 하나는, 사진이 보여주는 걸 보되 그 사진이 감추고 있는 게 무엇인지 추리하는 것이다(64쪽).”와 같은 말이 아니더라도, 신문이나 잡지 같은 매체에 나오는 사진은 무엇인가를 감춥니다. 아니, 감춘다기보다 추리소설을 쓴다고 해야 할 테지요. 추리소설을 쓰는 글과 사진이 넘치니, 신문 독자나 잡지 독자로서는 스스로 탐정이나 형사가 되어 꿍꿍이를 찾아내야 합니다.


  아무래도 오늘 이 나라는 살기에 재미가 없기 때문에 추리소설 같은 글과 사진이 넘칠는지 모릅니다. 참을 참 그대로 이야기하면 밋밋하거나 따분하니, 한 꺼풀을 씌우거나 두 꺼풀을 입히려 하는지 모릅니다. 저마다 계급과 신분과 학력과 돈과 이름값 따위를 앞세워서 잇속과 기득권을 거머쥐려 하니, 추리소설을 쓰지 않고서는 꿍꿍이를 감출 수 없는지 모릅니다. 어깨동무하려는 삶으로 나아가지 않고, 이웃을 밟고 올라서서 1등이 되려 하니, 기자도 작가도 추리소설 작가가 되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참말은 아주 쉽습니다. “전쟁은 산 것을 죽일 뿐, 그것이 누구의 삶인지, 어떠한 삶인지 가리지 않는다(147쪽).”와 같은 말처럼, 참말은 아주 쉽습니다. 전쟁은 산 것을 죽입니다. 게다가 전쟁은 죽은 것도 다시 죽입니다. 전쟁은 모두 다 죽입니다. 전쟁은 사람도 죽이고 풀과 나무도 죽입니다. 전쟁은 숲을 죽이고 지구별을 죽입니다. 전쟁은 사랑을 죽이고 꿈을 죽입니다.


  전쟁무기로는 평화를 찾지 못합니다. 전쟁무기는 전쟁을 하려는 무기이지, 평화를 누리려는 빛이 아닙니다. 전쟁무기는 이웃을 해코지하거나 괴롭히면서 밥그릇을 챙기려는 무기이지, 어깨동무하는 모둠살이로 나아가려는 웃음이 아닙니다. 이리하여, “‘안보의 이름으로 짓밟혀도 좋은 평화’란 성립 가능한 언어일까. 안보의 이름으로 찢겨도 좋은 ‘타인의 공동체’는 어디에 있는 걸까(194쪽).”와 같이 물을밖에 없습니다. 짓밟혀도 될 만한 평화란 없습니다. 밟혀도 되는 권리란 없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야 하니, 연습이나 훈련을 할 적에 두들겨패도 되지 않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오직 금메달을 따도록 엘리트 체육선수 몇 사람만 엄청난 세금을 쏟아부어 키워야 하지 않습니다.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 맛을 보고자, 앳된 운동선수한테 갖은 욕설을 일삼거나 얼차려를 주어도 되지 않습니다.


  사진가 노순택 님은 “뉴델리의 거리에서 요청됐던 사진가의 윤리는 무엇이었을까. 자신의 죽음과 그 이유를 증언해 달라는 잠펠 예시의 호소를 전파하는 것이었을까, 눈앞의 불을 끄는 것이었을까(241쪽).” 하고 묻습니다. 사진길 걷는 사람은 무엇을 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나는 이 물음을 받아 되묻고 싶습니다. 시골 흙일꾼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시골마을 논밭에 농약과 비료를 뿌려야 시골 흙일꾼이 될까요.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교과서에 적힌 대로 아이들을 대입시험지옥으로 내몰면 될까요.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때맞춰 예방주사를 놓고 때맞춰 유치원에 넣으며 때맞춰 영어를 가르치고 때맞춰 학원과 대학교에 집어넣도록 돈을 착착 벌면 될까요.


  사진가는 사진을 찍는 사람입니다. 사진가는 머리띠를 두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진가는 이쪽에 서지 않고 저쪽에 서지 않습니다. 사진가한테는 이쪽 저쪽이 없습니다. 사진가한테는 사진만 있습니다. 너무 마땅한 노릇입니다. 어버이한테는 무엇이 있을까요. 큰아이가 예쁠까요, 작은아이가 예쁠까요. 어버이는 두 아이를 놓고 누가 더 예쁘다 말할 수 있을까요? 아이는 두 어버이를 놓고 어머니가 좋은지 아버지가 좋은지 가를 수 있을까요? 어버이한테도 아이한테도 오직 한 가지만 있어요. 바로 사랑입니다.


  사진가한테 사진만 있는 까닭도 하나입니다. 사진가한테 있는 사진이란, 삶을 담는 사진이고, 사랑을 찍는 사진이며, 빛을 나누는 사진입니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삶과 사랑과 빛을 꿈꿉니다. 사진가는 사진으로 삶과 사랑과 빛을 노래합니다. 시골 흙일꾼은 흙 한 줌으로 삶과 사랑과 빛을 노래합니다. 교사는 교과서 아닌 ‘참사람’다운 모습으로 이끄는 넋을 들려주면서 삶과 사랑과 빛을 이야기해요.


  그나저나, 노순택 님은 머리띠를 두른 사진가이거나 활동가일까요. 아직 머리띠를 안 두른 사진가이거나 활동가일까요. 앞으로 머리띠를 두르고야 말 사진가이거나 활동가일까요. 아직 어느 길머리에 섰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사진가와 어버이와 참사람과 어른이라는 자리에 서서, 여기에 ‘한국사람’과 ‘서울사람’이라는 자리에 서서 이 나라를 바라봅니다. 노순택 님이 앞으로 걸어갈 길을 곰곰이 지켜봅니다. 4347.2.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