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촌 - 나의 서울
한정식 지음 / 눈빛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찾아 읽는 사진책 168



내 보금자리를 사진으로 담으면

― 북촌

 한정식 사진·글

 눈빛 펴냄, 2010.4.5.



  내 보금자리를 사진으로 담으면 즐겁습니다. 생각해 보셔요. 내 보금자리란 무엇인가요. 즐겁게 살아가는 곳이 보금자리입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곳이 보금자리입니다. 꿈을 키우는 곳이 보금자리입니다. 이야기를 속삭이는 곳이 보금자리입니다.


  먹고 자고 일하고 쉬고 지내는 곳은 ‘집’입니다. 집에서 사랑과 꿈이 숨쉬도록 한다면 ‘보금자리’입니다. 이와 달리 ‘주거지’나 ‘주소지’는 잠을 자려고 하는 곳이나 머무르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같은 곳을 가리키지만 때로는 ‘부동산’이 될 수 있고 ‘아파트 동호 수’가 되기도 해요.


  집을 사진으로 찍을 때와 보금자리를 사진으로 찍을 때조차 느낌과 마음과 생각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주거지와 주소지를 사진으로 찍으면 어떤 느낌과 마음과 생각이 될까요. 부동산을 사진으로 찍으면? 아파트 동호 수를 사진으로 찍으면?


  1937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한정식 님이 선보인 사진책 《북촌》(눈빛,2010)이 있습니다. 1937년에 태어났으나 열 살 나이라면 1947년이요, 여덟 살 나이에 해방을 맞이했고, 열세 살에 한국전쟁을 만났습니다. 열여섯 살에 전쟁이 끝났고, 스무 살은 1957년입니다.




  한정식 님은 사진책 《북촌》에서 “모두들 공해와 닳은 인심을 들먹이며 시골과 자연을 예찬하지만 내게 있어서 서울은 내 시골이요, 내 자연이다 … 내 어린 날의 서울은 납작했다 … 내 어린 날의 서울 골목은 좁고 길었다. 놀아도 놀아도 해가 지지 않아, 엄마나 조르려고 담장을 손으로 훑으며 집으로 돌아오던 그 골목은 얼마나 길었던지. 밤엔 외등도 없어, 어두워서 집에 들어가려면 그 기나긴 골목 어느 모퉁이에 도깨비라도 앉아 기다릴 것만 같아(11∼1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맞습니다. 옳습니다. 1990년대 서울이 아닌, 또 1980년대 서울이 아닌, 게다가 2000년대나 2010년대 서울이 아닌 1930∼40년대 서울은 서울이라기보다 시골이랄 수 있어요. 게다가 1940∼50년대 서울은 우물물을 긷고 물장수가 다니며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던 서울입니다. 그무렵에도 행정수도 서울은 여느 시골보다 컸겠지요. 그러나, 그무렵 행정수도 서울은 들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나부끼며 들꽃이 피던 서울입니다.


  한정식 님은 “나는 기록성에 매달리기보다는 예술성에 기울었다. 내 기질 탓이었다. 귀국 후의 첫 개인전도 기록성과는 인연이 먼 〈나무〉였다. 그 전시에 이명동 선생과 함께 오셨던 임 선생이 역시 이명동 선생과 함께 낙담한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시던 눈길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5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생각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다 하는 한정식 님은 왜 ‘나무’를 사진으로 찍었을까요. 그리고, ‘나무’를 찍는 사진은 ‘기록’이 아니라 ‘예술’일까요.


  여느 보금자리를 찍는 사진은 무엇일까요. ‘기록’일까요, ‘예술’일까요. 여느 골목동네를 찍는 사진은 또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기록’일까요, ‘예술’일까요. 한정식 님이 선보인 《북촌》은 ‘기록을 한 책’일까요, ‘예술을 보여주는 책’일까요.




  한정식 님은 어린 날 “언젠가는 학교에 늦어 또 지각했다고 담임선생님께 꾸중 들을 게 뻔해서, 아예 학교를 집어치우고 감투바위에 올라앉아 놀다가 어머니가 정성껏 싸 준 도시락 까먹고 학교 끝날 때쯤 집으로 간 적도 있었다(29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요새는 학교에서 급식을 하니 도시락이 없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도시락을 몰래 까먹을 수 없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은 도시락을 들고 학교를 땡땡이친 뒤 나들이를 다닐 수 없습니다.


  한정식 님이 찍은 사진으로 그러모은 《북촌》에는 한정식 님이 누린 어린 나날 이야기가 고스란히 흐릅니다. 어릴 적에 본 바위 빛깔이 흐르고, 어릴 적에 바라본 하늘과 땅과 이웃집과 동무 얼굴이 고스란히 흐릅니다.


  사진책 《북촌》은 사진책입니다. 사진을 찍어서 엮은 책이니 사진책입니다. 이 사진책은 기록물이 아니고 예술품이 아닙니다. 사진책입니다. 왜냐하면, 가회동이든 사직동이든 ‘사라진 모습’을 찍은 사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010년대로 넘어선 오늘날 돌아보면 ‘사라진 모습’이겠으나, 한정식 님이 골목을 거닐던 그때에는 ‘그곳에 고스란히 있는 모습’이었어요. 사람이 살아가는 동네였고, 사람이 사랑을 속삭이는 골목이었습니다.


  어쩌면, 기록을 하려고 사진을 찍었을는지 모릅니다. 아무래도, 기록이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 사진을 찍었을는지 모릅니다. “며칠 전 내자동 근처를 지나며 잠시 사직공원 쪽으로 눈길을 돌리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내수동, 그 납작하고 아담하던 내수동 일대가 완전히 사라지고 거기 고층 빌딩이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닌가(100쪽).”와 같은 이야기를 읽으면, 《북촌》은 여러모로 기록물로 여길 만합니다. 그러면, 참말 《북촌》은 기록물로 바라보면 될 책일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기록물로만 바라보면 즐거울까 궁금합니다.




  한정식 님은 “그들이 서울에 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복잡한 교통에 오염된 공기 탓도 있겠지만, 실은 여기 서울에 그들의 살냄새가 배어 있지 않은 탓이리라. 서울 말씨나 말투도 그들의 입에 밴 사투리가 아니고, 들어서는 골목길이 발길에 익숙지 않으니 수십 년을 살아도 서울은 제 고향이 아니요(57쪽).” 하고 이야기해요.


  사진이란 무엇일까요. 사진은 사진입니다. 글은 글입니다. 사랑은 사랑입니다. 평화는 평화입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사진이라 하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써서 예술을 한다면 예술이지 사진이 아닙니다. 연필로 글을 쓸 수 있고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만화를 그릴 수 있어요. 연필을 쥐었기에 모두 글이 아니고 그림이 아니며 만화가 아닙니다. 전쟁무기는 평화가 아닙니다. 전쟁무기는 평화를 지키지 않습니다. 전쟁무기는 전쟁을 하려고 만들어요. 전쟁무기는 전쟁을 부릅니다. 평화는 평화가 부릅니다. 평화는 평화로 지킵니다. 서로를 사랑하려면 사랑을 해야지 돈을 건넬 일이 아닙니다. 돈으로는 사랑을 못합니다. 돈으로는 돈을 나눌 뿐입니다. 금반지를 끼워야 사랑이 아니고, 구리반지를 끼우니 사랑이 아니라 하지 않습니다. 아무 반지가 없으니 사랑이란 말을 못 쓸까요?


  기록은 언제나 기록일 뿐이고, 예술은 언제나 예술일 뿐입니다. 더 낫지도 않고 더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뿐입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입니다. 골목은 언제나 골목이요, 서울은 언제나 서울입니다. 사람들이 살가이 어깨동무하는 보금자리는 언제나 보금자리다운 빛과 숨결이 흘러요.


  “낙산사처럼 완전히 소실된 뒤에도 옛 모습을 찾아 주는 것만이 전통의 올바른 계승일까. 숭례문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아랫도리가 남았고 숭례문 현판이 용케 살았다고 해서 그것을 옛 모습 그대로 복원하는 것만이 전통 계승의 유일한 길, 최선의 길이었을까, 의문이 든다(115쪽).”와 같은 이야기를 찬찬히 읽으며 사진책 《북촌》을 덮습니다. 낙산사는 낙산사이고, 숭례문은 숭례문입니다. 그러나 이를 이대로 느끼거나 깨닫지 않기에 ‘문화재 되살리기’를 합니다. 낙산사와 숭례문은 ‘문화재’일까요?


  국립공원은 무엇일까요. 지리산이나 다도해는 국립공원일까요, 지리산이나 다도해일까요. 국립공원이기 앞서 지리산이나 다도해는 어떤 곳이었을까요. 국립공원이 된 뒤 지리산이나 다도해는 어떤 곳인가요. 지리산은 늘 지리산이고, 다도해는 늘 다도해예요.


  우리는 무너진 지리산을 되돌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망가진 다도해를 되찾지 못합니다. 새로운 지리산을 가꾸고, 새롭게 다도해를 보살핍니다.




  아마 ‘북촌’이라는 곳은 한정식 님이 처음 태어나 자라던 때 모습을 거의 다 잃었으리라 느낍니다. 게다가 북촌에서 1990년대에 태어난 아이가 있으면, 이 아이가 오늘날 돌아보아도 북촌은 예전 모습이 없다고 할 만합니다. 2010년대에 북촌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앞으로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는 무엇을 느낄 만할까요.


  아스라한 옛 이야기를 되찾으려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이 사진이 더 뜻있거나 값있지 않습니다. 그저 그러한 사진일 뿐입니다. 추억을 바라면 추억을 찍고, 오늘을 바라면 오늘을 찍어요. 이야기를 바라면 이야기를 찍고, 사랑을 바라면 사랑을 찍습니다.


  내 보금자리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는 내 보금자리를 누리는 즐거움과 사랑스러움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내 보금자리처럼 내 이웃 보금자리를 사진으로 찍을 적에는 우리가 함께 누리는 즐거움과 사랑스러움을 사진으로 보여줍니다.


  사진이 사진인 까닭은, 사진은 우리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야기가 솔솔 피어나는 숨결이기 때문입니다. 사진기로는 기록물을 만들 수 있어요. 사진기로는 예술품을 빚을 수 있어요. 그리고, 사진기로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4347.4.2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복 정거장 Happy Station - I Love Madagascar
신미식 지음 / 푸른솔 / 2008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찾아 읽는 사진책 166



즐겁게 찍는 사진은

― 행복정거장

 신미식 사진·글

 푸른솔 펴냄, 2008.11.22.



  사진‘은’ 어떻게 찍어야 할까요? 사진‘을’ 어떻게 찍으면 될까요? 사진을 배우려는 분들은 으레 이렇게 물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을 까닭은 없어요. 왜냐하면, ‘사진’이라는 낱말을 바꾸면 되거든요. 자, 다시 물을게요. 어떻게 살면 될까요? 사랑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떤 일을 하면 될까요? 일을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아이와 어떻게 살면 될까요?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면 될까요?


  마음이 있다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쉽게 알지 못합니다. 마음이 있다면 ‘사진을 어떻게 찍느냐’는 ‘삶을 어떻게 꾸리느냐’와 똑같은 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이 없다면 ‘사진을 찍는 까닭’과 ‘아이를 사랑하는 까닭’이 서로 같은 줄 느끼지 못합니다.


  사진책 《행복정거장》(푸른솔,2008)을 내놓은 신미식 님은 “마다가스카르를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행복이었다.” 하고 말합니다. 사진책 《행복정거장》은 사진책이면서 사진공책입니다. 신미식 님이 찍은 사진을 담은 책이면서, 사이사이 수첩이나 공책으로 쓸 수 있도록 빈자리가 많습니다.


  사진책을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머리말에만 짤막하게 적은 글을 읽어 봅니다. 신미식 님은 “내가 이 나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난 이 나라가 나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소리를 들었다.” 하고 말합니다. 그렇군요. 신미식 님은 마다가스카르가 신미식 님한테 ‘나 너 사랑해’ 하고 읊은 노래를 들었습니다. 마음으로 들은 노래를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서 마음으로 책을 엮습니다.




  신미식 님으로서는 “이제는 어느덧 고향과도 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이 땅과 사람들. 그리움을 두고 떠나온 것은 사람만은 아니었다.” 하고 덧붙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선보이는 사진들은 그동안 숨겨져 있던 나만의 보물이다. 자칫 세상에 등장하지 못할 뻔한 아이들과 아름다운 풍광들을 마음껏 넣을 수 있어서 기분이 좋다.” 하고 마무리짓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서울 북촌이 좋습니다. 누군가한테는 부산 광복동이 좋습니다. 누군가한테는 라다크가 좋습니다. 누군가한테는 핀란드가 좋습니다. 누군가한테는 마다가스카르가 좋습니다.


  사진책을 덮고 문득 생각에 잠깁니다. 한국을 좋다고 말할 사진가는 있을까요. 한국땅 구석구석을 두 다리로 천천히 밟으면서 한국을 사랑한다고 말할 사진가는 있을까요. 풍광이나 풍경이 아닌 삶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한국을 아름답게 노래할 사진가는 있을까요. 그림쟁이 고흐 님이 감자 먹는 시골사람을 그림으로 담았듯이, 시골에서 흙을 가꾸며 아끼는 사람을 사진으로 담을 분이 있을까요.


  아무렴, 틀림없이 있습니다.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는 오로지 시골 할매와 할배를 사진과 글로 보여줍니다. 시골에서 뿌리를 내리며 즐겁게 웃고 노래하는 할매와 할배가 늘 주인공이 되어 잡지를 가득 채웁니다. 한국에서 이런 잡지는 아직 없습니다. 농협에서 내는 잡지나 신문에서도 농사꾼이 주인공이 되지 않아요. 농림수산부에서 내는 기관지나 사외보에서는 농사꾼이 주인공이 될까요? 된 적이 있을까요?





  즐겁게 찍는 사진은 이웃한테 즐거운 웃음을 베풉니다. 즐겁게 찍는 사진은 사진쟁이 스스로 아름답게 웃는 씨앗을 베풉니다. 더도 덜도 아닙니다. 즐겁게 살 때에 아름답습니다. 즐겁게 찍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즐겁게 찍으면 됩니다. 사진 역사에 이름이 남아야 하지 않습니다. 비평가나 평론가가 눈여겨보아 주어야 하지 않아요. 사진잡지에 실려야 하지 않아요. 사진은 그저 즐겁게 찍을 뿐입니다. 삶은 그저 즐겁게 가꿀 뿐입니다. 우리 삶이 신문에 나거나 방송에 나거나 책으로 나와야 하지 않아요. 우리 삶은 늘 그 모습 그대로 아름답습니다. 사진으로 찍든 안 찍든 언제나 즐거운 하루입니다. 사진으로 돌아보지 않더라도, 글로 되새기지 않더라도, 그림으로 다시 보지 않더라도, 우리 삶은 날마다 새롭게 아름다운 빛을 뽐냅니다. 사진책 《행복정거장》은 신미식 님이 들려주고 싶은 노래를 담습니다. 작고 수수한 이야기가 가만히 흐릅니다. 4347.4.28.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곡마단 사람들
오진령 지음 / 호미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꼭 열 해 앞서 이 사진책 느낌글을 썼는데

열 해가 지난 오늘 다시 읽어 보니

너무 부끄러워서

새롭게 느낌글을 쓴다.


사진가 오진령 님 앞날이

환하게 빛나면서

고운 사진이야기 흐르기를 빈다.


..


찾아 읽는 사진책 166



날마다 새롭게 숨쉬는 사진

― 곡마단 사람들

 오진령 글·사진

 호미 펴냄, 2004.1.15.



  사진은 날마다 새롭게 숨쉽니다. 처음 태어난 날에는 첫빛을 안고 숨쉽니다. 한 해가 지나면 첫돌을 지나는 빛으로 숨쉽니다. 세 해가 흐르고 여섯 해가 흐르면, 세 살 빛깔과 여섯 살 빛물결을 품으면서 숨쉽니다.


  사람은 날마다 새롭게 살아갑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바깥으로 나온 첫날에는 첫날대로 살고, 백 날을 지내면 백 날대로 살며, 돌을 지내면 돌대로 삽니다. 다섯 살이 되면 다섯 살 어린이대로 살며, 열 살이 되면 열 살 어린이대로 살아요.


  숲은 날마다 새롭게 빛납니다. 봄에는 봄빛이 가득한 숲이요, 여름에는 여름빛이 그윽한 숲이며, 가을에는 가을빛이 고운 숲이다가, 겨울에는 겨울빛으로 하얀 숲입니다.


  한 자리에 머무는 사진이나 사람이나 숲은 없습니다. 늘 새로운 사진이고 사람이며 숲입니다. 찬찬히 흐르면서 거듭나고, 꾸준히 빛나면서 즐거운 사진이요 사람이면서 숲이에요.






  오진령 님은 2004년에 《곡마단 사람들》(호미 펴냄)이라는 사진책을 선보입니다. 2014년에 《짓》(이안북스 펴냄)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열 해만에 둘째 권입니다. 앞으로 또 열 해가 지나면 셋째 권을 베풀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2004년에 선보인 《곡마단 사람들》을 새로 꺼내어 읽습니다. 오진령 님은 “곡예사들의 소박하고 자유롭고 진정 어린 삶에서 감동을 받았고, 순정하고 여린 탓에 상처 많은 그들에게서 아픔도 느꼈다(머리말).” 하고 말합니다. 열 해 앞서나 오늘이나 이 마음은 그대로라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웃고 울던 삶을 사진으로 차곡차곡 갈무리했으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즐겁지 않으면 즐거운 기운을 사진으로 못 담고, 자유롭지 않으면 자유로운 기운을 사진으로 못 담아요. 노래하는 사람이 노래와 같은 사진을 찍고, 춤을 추는 사람이 춤이 샘솟는 사진을 찍습니다.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삶결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보이는 대로 찍는 사진은 없습니다.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찍습니다.


  “사람들은 서커스를 어린 시절의, 과거 한때의 추억으로 돌려 버리고는 외면하고 잊으려 한다. 그러나 동춘서커스는 팔십 년 가까운 역사를 등에 지고서, 곡예사로서의 자부심을 잃지 않으며, 오늘도 사람들을 재미와 감동으로 울고 웃게 하면서 한 해 내내 전국을 유랑하고 있다. 과거가 아닌 오늘의 것으로서 서커스를 바라보면 좋겠다는 마음이다(머리말).”와 같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똑같은 곳을 바라본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동춘서커스를 ‘지나간 추억’으로 여깁니다. 누군가는 동춘서커스를 ‘여든 해 가까운 나날 이어온 오늘 삶’으로 여깁니다.






  바라보는 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생각하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보이는 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사랑하는 대로 찍는 사진입니다. 내 앞에 보이는 저곳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을 담아 사진을 찍어요. 내 앞에 있는 이곳을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랑스럽지 않은’ 사진을 빚습니다.


  “그들이라고 왜 두렵지 않겠는가? 곡예를 하다가 떨어져 몇 번씩 병원 신세를 진 그들인데 말이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날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새처럼 아름다운 비행을 하고 있다(54쪽).” 하고 이야기하는 오진령 님은 어떤 마음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곡예사가 ‘새처럼 아름답게 난다’고 이야기하는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그냥 날지 않고 새처럼 날되 아름답게 난다고 해요. 아니, 곡예를 하지 않고 새처럼 난다고 해요. 그러면, 오진령 님이 찍은 사진은 바로 ‘곡예를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새처럼 아름답게 나는’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찍은 사진이겠지요.





  사진이 날마다 새롭게 숨쉬는 까닭은 사진은 ‘기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참말, 사진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이야기를 합니다. 사진은 오늘 우리가 누린 삶을 이야기합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어제 우리가 누린 삶을 도란도란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기록물을 쳐다보면서 ‘아하 옛날에는 이랬지’ 하는 추억에 잠기지 않습니다. 아니, 이렇게 추억에 잠기는 사람도 있어요. 오진령 님은 추억에 잠기려고 사진을 찍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사진을 찍었고, 2004년뿐 아니라 2014년과 2024년에도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오순도순 꽃피우고 싶어 사진을 찍었구나 싶습니다.


  “공연장 밖에서 손님을 맞는 원숭이들에게 사람들은 인사 치레인 양 손가락질을 하거나 무언가를 집어던지곤 한다. 그러나 정작 원숭이들은 사람들의 그런 무례한 행동도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아량을 보인다. 서커스와 동고 동락해 온 오랜 연륜을 그들에게서 느끼게 된다(148쪽).”와 같은 이야기를 생각해 봅니다. 어떤 사람은 원숭이를 괴롭혀요. 어떤 사람은 원숭이뿐 아니라 사람도 괴롭혀요. 어떤 사람은 들과 숲에 농약을 함부로 뿌리면서 풀과 나무를 괴롭힙니다. 어떤 사람은 전쟁무기를 만들면서 지구별을 괴롭혀요. 핵무기를 만드는 핵발전소인데, 핵발전소를 멈추지 않으면서 지구별뿐 아니라 이 나라와 사회와 마을 모두 괴롭힙니다.





  마을 한복판을 고속도로가 꿰뚫고 지나가는 한국입니다. 숲 한복판을 밀고 고속철도가 달리는 한국입니다. 더 빨리 달리니까 좋은가요?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더 빨리 가는 사람은 좋겠지요? 그러면, 마을 한복판을 고속도로와 고속철도한테 빼앗긴 조그마한 시골마을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요? 땅값이 싼 시골에 공장을 지어 도시에서 문명과 문화를 누리는 오늘날인데, 시골마을에 공장이 들어서면서 맑은 물을 못 마신다면, 시골사람은 어떤 문명과 문화를 누린다고 해야 할까요?


  사진을 찍는 오진령 님은 동춘서커스단 곡예사를 마주하면서 “줄 타는 곡예사가 고작 바이킹 따위에서 그렇게 무서워하는 것이 처음에는 의아스러웠다. 그 공포심은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했다. 그래, 곡예사라고 해서, 줄을 탄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들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을 느낀다. 다만 날마다 그 큰 두려움을 견디는 것일 뿐이다(156쪽).” 하고 생각합니다. 곡예사도 사람이고 구경꾼도 사람입니다. 사진 찍는 이도 사람이고 사진 읽는 이도 사람입니다. 대통령도 사람일 테고 국무총리도 사람일 테지요. 진도 앞바다에서 배가 가라앉아 슬피 우는 사람들이 있고, 슬피 우는 사람들 옆에서 컵라면을 후루룩 먹는 사람도 있어요. 모두 사람이에요. 더 나은 사람이나 덜 떨어진 사람이 아니에요.






  사진책 《곡마단 사람들》을 덮습니다. “우리 사회가 서커스 하는 사람을 이방인 대하듯 하는 한, 그들에게는 무대 밖의 우리가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159쪽).”라고 읊는 이야기를 곰곰이 읽으면서 책을 덮습니다. 한자말 ‘이방인(異邦人)’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을 뜻합니다. 무대에 선 곡예사를 바라보는 구경꾼은 곡예사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무대에 선 곡예사는 구경꾼을 바라보면서 이녁이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도시에서는 시골내기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길 만해요. 시골에서는 도시내기가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라고 여길 만할 테지요. 시골에서도 농약 안 쓰는 사람은 농약 쓰는 사람 둘레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 됩니다. 시골에서 농약을 마구 쓰는 사람은 농약 안 쓰는 사람 둘레에서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이 되어요.


  사진은 누가 찍는가요. 사진은 누가 누구를 찍는가요. 사진은 누가 누구를 찍어서 누구한테 읽히는가요. 이쪽 자리에서 찍는 사진과 저쪽 자리에서 찍는 사진은 저마다 어떻게 다를까요. 더 옳은 사진이 있을까요. 참을 숨긴 사진이 있을까요. 한 가지만 외곬로 바라보느라 큰 틀을 못 본 사진이 있을까요. 큰 틀로 바라본다고 하면서 막상 작은 곳을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사진이 있을까요.




  글과 그림과 사진은 모두 기록이 아닙니다. 이야기입니다. 노래와 춤은 문화나 예술이 아닙니다. 이야기입니다. 기록으로 남기려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려고 글을 씁니다. 문화나 예술을 꽃피우려고 노래나 춤을 즐기지 않습니다. 그예 삶을 즐기려고 노래나 춤을 즐깁니다. 오진령 님은 동춘서커스 곡예사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웃과 동무로 살가이 마주했기에 사진을 찍을 수 있었고, 이 사진들은 곱게 빛나면서 사진책으로 태어났습니다. 4347.4.2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 - 두 발과 가슴으로 써내려간 섬진강 에세이
조문환 글.사진 / 북성재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내 삶으로 삭힌 사진책 79



삶을 이루는 빛을 사진으로

―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

 조문환 글·사진

 북성재 펴냄, 2013.12.15.



  시골집은 어디에나 마당이 있습니다. 아무리 좁거나 작은 시골집이라 하더라도 마당이 있습니다. 마당이 없으면 밭이 있어요. 밭은 들 한쪽 귀퉁이에 있을 수 있고, 숲에 있을 수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볕을 듬뿍 쬘 만하며, 볕을 듬뿍 쬘 만한 데에 이불을 널거나 옷가지를 펼쳐 말리기에 좋은 시골입니다.


  시골에서는 층집을 안 짓기 마련입니다. 시골에서는 볕을 듬뿍 누릴 만한 집을 짓습니다. 시골살이란, 볕을 논밭에 골고루 드리우는 삶입니다. 시골살림이란, 볕이 풀과 나무와 꽃에 따사롭게 드리우는 사랑입니다. 시골에서는 무엇보다 볕을 크게 살핍니다. 볕과 함께 빛을 살피고, 빛과 함께 살을 살핍니다. 도시에서는 ‘해’만 생각할는지 모르나, 시골에서는 ‘햇볕·햇빛·햇살’ 세 가지를 골고루 헤아립니다.


  사진을 찍으려면 빛이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빛이 없으면 전기를 빌어 불빛을 펑 하고 터뜨립니다. 불빛을 터뜨리지 않으려면 세발이를 세워 오랫동안 ‘작은 빛(어두운 곳에서도 드리우는 작은 빛)’을 받아들이도록 합니다.


  아무래도 빛이 없으면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합니다.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은 으레 빛을 눈여겨보거나 살피기 마련입니다. 빛이 얼마나 되고, 아침과 낮과 저녁과 새벽과 밤에 빛느낌이 어떠한가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 섬진강에서 눈보라를 맞아 보았습니다. 얼어붙은 강 위에 찍힌 고라니 발자국 곁에 나도 같이 누워 보았습니다. 여름철 뙤약볕을 섬진강과 같이 걸었으며, 폭풍우도 같이 맞아 보았습니다 …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을 지닌 강이 아니라 그 누구도 쉽게 찾아와 친구가 될 수 있는 섬진강처럼 그의 시원도 시원이라 할 수 없을 만큼 평범했다 … 어쩌면 나는 감정이 메말라 섬진강을 통해 그것을 회복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  (9, 21, 29쪽)



  빛을 살피기에 빛을 잘 맞추는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빛과 그늘을 살피면 빛과 그늘이 곱게 어우러진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생각해 봅시다. 빛만 살피기에 빛만 잘 맞추는 사진을 찍지 않는가요? 빛이 없으면 못 찍는 사진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빛에만 눈길을 두지 않는가요?


  해는 우리한테 빛만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햇빛만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햇빛은 빛깔을 가누도록 하는 기운입니다. 햇빛이 있어 무지개빛을 느낍니다.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사진은 무지개빛이나 까망하양 두 가지 빛줄기로 담아서 보여줍니다.


  그러면, 사진을 찍을 적에 빛뿐 아니라 볕을 살핀다면? 사진에 햇빛뿐 아니라 햇볕을 담으려 한다면? 이와 함께 사진에 햇빛과 햇볕에다가 햇살을 담으려 한다면? 해가 지구별에 드리우는 세 가지 기운인 ‘빛·볕·살’을 고스란히 사진으로 담으려 한다면?





.. 섬진강 사람들은 그들이 강인지, 강이 그들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섬진강과 너무 닮아 있었다 … 나는 숨길 수 없는 분노를 하나 갖고 있다. 이것만 생각하면 가슴이 떨린다. 농촌에 대한 차별과 멸시, 모든 것이 서울로만 통하는 비이성적 사고, 이 땅의 최고·최대·최초는 모조리 서울에만 있는 특이한 서울공화국, 서울에 살아야 사람 취급 받고 대한민국 모든 드라마의 무대는 서울이고, 9시 뉴스의 99%는 서울발이며 ..  (68, 81쪽)



  어떤 사진은 무척 포근합니다. 어느 사진은 대단히 따스합니다. 어느 사진은 매우 살갑습니다. 사진을 읽으면서 포근함이나 따스함이나 살가움은 왜 어떻게 느낄 수 있을까요?


  어떤 사진은 빛이 참 좋다고 느낄 만합니다. 어느 사진은 빛이 멋스럽습니다. 어느 사진은 빛이 고즈넉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빛을 생각하기에 빛이 살아나는 사진을 찍고, 빛을 따지기에 빛이 아름다운 사진을 얻습니다.


  빛 하나를 잘 다스려서 ‘빛나는’ 사진을 빚는 일도 즐겁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어딘가 아쉽습니다. 사진에 빛만 잘 들어오면 될까 궁금합니다. 사진은 빛으로만 찍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풀도 나무도 꽃도 빛으로는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람도 들짐승도 새도 물고기도 빛으로만 살아가지 않습니다. 빛과 볕과 살을 골고루 누릴 적에 목숨이 싱그럽습니다. 빛과 볕과 살을 함께 먹고 마실 적에 숨결이 푸릅니다. 사진도 빛뿐 아니라 볕을 찬찬히 담아서 포근하거나 따스하거나 살가운 숨결을 건사할 때에 한결 아름답지 않을까요. 사진도 빛과 볕에다가 살을 알뜰살뜰 실어서 즐겁게 노래하고 기쁘게 사랑하는 넋을 나눌 때에 더욱 눈부시지 않을까요.





.. 내가 보기에는 분명 붉은 꽃잎 하나에 우주가 담겨져 있었다 … 학원이 나를 키우지 않았다. 방과후학교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 피아노와 영어학원이 저녁 될 때까지 나를 잡아두지 않았다. 시냇물이 음악을 가르쳐 줬고 숨바꼭질과 총놀이·칼싸움놀이가 나를 키웠으며, 나를 저녁 때까지 잡아둔 장본인은 검은 그림자 드리운 들판과 산자락이었다 ..  (122, 149쪽)



  하동 공무원 조문환 님은 《하동 편지》(북성재,2012)에 이어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북성재,2013)라는 책을 선보입니다. 하동은 구례·산청·함양·남원·광양·사천·진주와 맞닿은 시골입니다. 지리산과 섬진강을 서로 나누어 껴안는 예쁜 시골입니다. 조문환 님은 공무원으로서 이럭저럭 살림을 꾸리거나 일을 할 수 있지만, 공무원이라는 자리를 노상 조용히 내려놓고는 ‘하동사람’과 ‘시골사람’이 됩니다. 때로는 ‘지리산사람’이 되고, 어느 날은 ‘섬진강사람’이 됩니다.


  사진과 글로 이야기를 엮은 두 가지 책은 조문환 님 스스로 들이켠 숲내음과 풀빛과 나무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섬진강이 하는 말, 내 내면의 귀로만 들을수 있는 섬진강의 음성을 듣고자 함이다 … 그는 학교와 책에서 가르쳐 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 중의 스승이다. 이것을 배우라, 저것을 암기하라 강요하지 않는다. 단지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 스승이요, 그가 있는 곳이 교실이다 … 지금까지 천 번 만 번을 지났었지만 피상적으로 지나다닐 때에는 깨달을 수 없었던 구례의 정신을 섬진강을 걷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으니 섬진강이 내게 스승인 것은 틀림이 없어 보인다 ..  (152, 221, 290쪽)




  삶을 이루는 빛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삶을 이루는 빛이란 무엇일까요. 아파트일까요, 자가용일까요, 월급봉투나 은행계좌일까요, 예쁜 곁님일까요, 인터넷이나 신문·방송·인터넷일까요, 졸업장일까요, 무엇일까요.


  삶을 이루는 빛은 누가 빚을까요. 삶을 이루는 빛은 어디에서 태어날까요. 삶을 이루는 빛은 어떻게 알아볼까요. 삶을 이루는 빛은 누구한테 아름답게 스며들까요.


  아이들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아이들 눈빛과 몸짓을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아이들 목소리를 듣고 아이들 놀이를 지켜보면서 생각합니다. 아이들과 손을 잡고 놀다가, 아이들 손을 잡고 들길과 숲길을 걷다가, 아이들과 마을 어귀 샘터를 치우다가,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 이웃마을로 나들이를 가다가 생각합니다. 사진은 삶을 얼마나 잘 담을 수 있는가요. 사진은 사랑을 어떻게 담을 수 있는가요. 사진은 꿈을 어떻게 담을 수 있는가요. 사진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어느 만큼 알차게 담아서 이웃한테 보여줄 수 있는가요.




.. 옛날 이곳에 화력발전소와 제철소가 생기기 전에는 강아지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아련한 전설이 있는 곳이다. 그만큼 풍요의 고장이었다. 하동김은 최고의 명품이었다. 그러나 이제 김은 물론 인근 바다는 어업을 포기한 지 오래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인류 문명의 향기를 맡고 산업단지로 밀려들어 왔다 ..  (318∼319쪽)



  하동 공무원 조문환 님이 찍은 사진이 대단하지는 않습니다. 대단할 까닭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골사람이 찍는 사진은 시골스럽기 마련입니다. 시골은 대단한 삶터가 아닙니다. 시골은 푸른 숨결이 감도는 풀과 나무와 꽃이 어우러진 곳입니다. 냇물이 흐르고 골짜기가 싱그러우며 새와 벌레와 짐승이 함께 모여서 살아가는 터입니다. 시골은 수수합니다. 시골사람이 찍는 시골마을은 수수한 사진이 됩니다. 시골은 투박합니다. 시골사람이 부르는 시골노래는 투박합니다. 《하동 편지》를 읽을 적에는 아직 덜 시골스럽구나 싶었고, 《네 모습 속에서 나를 본다》를 읽으면서 제법 시골스럽구나 싶습니다. 앞으로 하동에서 길어올릴 시골빛은 꾸준히 시골스러움을 더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멧자락과 하나 되는 삶이고 냇물과 어깨동무하는 삶일 테니 시골스러워야겠지요. 나락과 남새와 열매를 가꾸는 시골사람이 도시사람하고 넉넉히 밥을 나누듯, 시골 공무원 사진과 글도 너른 이웃들과 곱다라니 빛·볕·살을 나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7.4.23.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 사흘 / 2013년 1월
평점 :
절판




찾아 읽는 사진책 165



사진은 모두 다르게 읽는다

― 지속의 순간들

 제프 다이어 글

 한유주 옮김

 사흘 펴냄, 2013.1.28.



  사진 한 장을 놓고 똑같이 읽는 법은 없습니다. 같은 사람이 같은 사진 한 장을 놓고도 오늘과 모레에 읽으면 다른 느낌이 샘솟습니다. 올해와 다음해에 읽으면 또 다른 느낌이 납니다. 열 해가 지나거나 서른 해가 지난 뒤에 읽으면 새로운 느낌이 다르게 피어납니다.


  사진비평은 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진 한 장을 놓고 백이면 백 사람이 모두 다르게 읽을 만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읽을 사진인 터라, 비평가 한 사람이 굳이 사진을 이야기할 까닭이 없을 만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비평은 어느 자리에서든 부질없습니다. 문학을 비평할 까닭이 없고 영화를 비평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인 느낌을 이야기로 살려내어 나누면 됩니다. 문학비평이나 사진비평이나 예술비평이 아닌, ‘문학 이야기꽃’과 ‘사진 이야기잔치’와 ‘예술 이야기놀이’를 함께할 때에 즐겁습니다.


  제프 다이어 님이 쓴 《지속의 순간들》(사흘,2013)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제프 다이어 님은 참말 제프 다이어 님 나름대로 사진을 읽습니다. 어쩜 이렇게 읽느냐 싶기도 하고, 아하 이렇게 읽어도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나는 제프 다이어 님이 읽은 대로 이런 작가와 저런 작가 사진을 읽은 적이 없습니다. 제프 다이어 님은 480쪽에 이르는 도톰한 책에서 유럽과 미국에서 사진길 걸어온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나는 사진가들 뒷이야기에 그리 눈길이 안 갑니다. 굳이 뒷이야기를 할 까닭은 없어요. ‘앞이야기’를 하면 돼요.


  “어떤 사진은 그 사진을 처음 찍은 사진가의 눈길을 끈 바로 그 방식대로 나의 눈길을 사로잡기도 했다(19쪽).”는 말마따나,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 느끼는 대로 느끼면 됩니다. 스스로 느끼는 대로 읽고, 스스로 느껴서 읽은 대로 말하면 됩니다.


  사진비평에는 마땅히 ‘정답’이 없습니다. 이렇게 읽어야 대단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저렇게 읽으니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지 않습니다. 이 사진은 이렇게만 읽어야 할까요? 이 사진을 저렇게 읽으면 안 될까요? 이 사진은 꼭 마루에 걸어야 할까요? 이 사진을 길가에 걸거나 대문에 붙이면 안 될까요?


  “사진가들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몇몇 사진가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작업에 고의로 연출한 요소들을 담기 시작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찾는 대신, 그들은 사진이 구성되는 방식을 강조하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39쪽).”와 같은 말을 읽으며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렇지만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합니다. 일부러 꾸며서 찍든, 꾸밈없이 수수하게 찍든, 모든 사진에는 사진가 넋이 깃듭니다. 어떻게 찍는 사진이든 사진가 삶이 드러납니다.


  연출사진이면 어떻고 안 연출사진이면 어떻겠어요. 졸업식이나 생일잔치에서 찍는 사진은 어떤 사진일까 궁금합니다. 연출사진일까요? 스냅사진일까요? 기자회견을 하는 정치꾼을 찍는 사진은 어떤 사진일는지 궁금합니다. 딱딱하고 메마른 낯빛으로 말하는 정치꾼 모습은 연출사진이 될까요, 아니면 스냅사진이 될까요, 아니면 보도사진이 될까요?


  “그림에 비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손을 묘사할 수 있는 사진의 능력은 사진이 지닌 대단한 매력들 중 하나다(103쪽).”와 같이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손은 글로도 그림으로도 노래로도 얼마든지 쉽게 그릴 수 있습니다. 사진이기에 손을 더 수월하게 그리지 않습니다. 사진이기에 더 잘 ‘기록’하지 않습니다.


  ‘기록’하려는 마음일 때에 기록합니다. 글도 그림도 사진도 안 쓰더라도, 머릿속에 아로새긴다면, 그 어느 것보다 훨씬 또렷하고 수월하게 ‘기록’합니다.


  온누리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 느낄 만한데, “어떤 도시나 마을은 때때로 수천 마일 떨어진 다른 나라의 도시나 마을과 ‘쌍둥이처럼’ 꼭 닮아서(118쪽).”, 사진 작품을 볼 적에도 어쩜 이리 똑같은 작품이 태어날 수 있을까 하고 놀라기도 합니다. 표절일까, 도용일까,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작품을 빚은 두 사람은 서로 동떨어진 곳에서 서로 모르는 채 살아왔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꼭 닮은 작품을 찍을 수 있어요.


  “늙고, 매우 지친 남자를, 우리가 사진가에 대해서나 피사체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면, 우리는 이 사진들을 손녀딸이 찍은 할아버지의 사진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161쪽).”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손녀딸이 찍은 할아버지 사진이면 어떤가요? 나이가 쉰 살쯤 벌어진 짝꿍 사이가 찍은 사진이면 어떤가요?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그러나, 제프 다이어 님은 이 사진에서는 사진을 읽기보다는 뒷이야기를 읽습니다. 아하 그렇지요. 뒷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은 뒷이야기를 읽으면 됩니다. 앞이야기를 읽고 싶은 사람은 앞이야기를 읽으면 됩니다. 사진을 읽고 싶은 사람은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삶을 읽고 싶은 사람은 삶을 읽으면 됩니다. 사랑을 읽고 싶은 사람은 사랑을 읽으면 됩니다.


  ‘모나리자’ 그림은 어떤 그림일까요? 모나리자 그림은 누가 그렸고, 왜 그렸을까요? 무엇을 그렸을까요? 아마, 모나리자 그림을 놓고도 사람마다 다 다르게 읽겠지요? 비평가마다 다 다른 소리를 줄줄이 읊겠지요?


  “예전에 존재한 시간이, 한 세기를 지나, 바로 지금이 되었다고 생각해 보라(282쪽).”는 말처럼, 예전에 흐르던 하루가 오늘도 흐릅니다. 오늘 흐르던 하루가 먼 앞날에도 흐릅니다. 왜냐하면 삶이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아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 아이들은 내 사랑을 물려받아 오늘을 살아갑니다. 우리 아이들도 앞으로 저희 아이들한테 사랑을 물려줄 테지요. 그러니, 한 세기 아닌 천 해나 만 해가 흐른 뒤에도 똑같은 삶이 이어지곤 합니다.


  제프 다이어 님은 “차 안에서 찍은 사진들은 너무나 명백하게 건성으로 찍은 것처럼 보여서, 사진의 가치를 발견하기 힘들 때가 있다(309쪽).” 하고도 말합니다. 그래요, 이렇게 읽어도 됩니다. 이렇게 읽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참말 너무도 뚜렷하게 건성으로 찍었을까요? 너무도 뚜렷하게 눈물을 흘리며 찍지는 않았을까요? 너무도 뚜렷하게 마음이 아파서 찍지는 않았을까요?


  건성으로 찍은 사진이 한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엄청나게 땀흘린 사진이 한결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둘 모두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둘 모두 서로서로 이녁 나름대로 사진을 읽습니다.


  이리하여, “문맹의 세계에도 시가 존재한다면, 천박한 것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351쪽).” 같은 말은 살짝 뜬금없습니다. 어느 사진을 놓고는 건성이라 말하면서, 어쭙잖은 것에도 아름다움이 깃든다고 말한다면, 한 사람한테서 느끼는 두 얼굴일는지요? 뭔가 좀 뒤죽박죽입니다. 건성으로 찍은 사진에도 아름다움이 있다는 뜻이 될는지요? 아니면, 건성으로 찍은 사진이라 참 볼꼴사납다는 소리일는지요? 건성으로 찍어서 제프 다이어 님은 “사진의 가치를 발견하기 힘들”다고 말하는데, 로버트 프랭크 님이 사진을 건성으로 찍었는지 건성으로 안 찍었는지 어떻게 알까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어떻게 꾹꾹 눌러서 ‘바로 이렇다구!’ 하고 외칠 수 있을까요?


  그러나, 뒤죽박죽으로 읽어도 사진입니다. 뒤죽박죽으로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뒤죽박죽으로 읽든 말든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제프 다이어는 제프 다이어대로 사진을 읽으면 됩니다. 스티글리츠는 스티글리츠대로 사진을 찍고 읽으면 되고, 스미스는 스미스대로 삶을 읽어서 사진을 찍으면 됩니다. 아버스는 아버스대로 사랑을 노래하면서 사진을 찍으면 돼요.


  우리는 ‘정론’을 세우거나 ‘역사를 기록’하려고 사진을 읽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즐기고 싶기 때문에 사진을 읽습니다. 즐겁게 노래하듯이 사진을 읽습니다. 기쁘게 춤추듯이 사진을 읽습니다.


  누군가는 토라진 얼굴로 사진을 읽고, 누군가는 싸우듯이 또는 술을 마시듯이 또는 잠꼬대를 하듯이 사진을 읽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기에 저마다 다른 눈길로 저마다 다른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찍고 읽으며 나눕니다.


  “위노그랜드는 ‘누구라도 내가 찍은 사진을 인화할 수 있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에게 암실에서 보내는 시간이란 곧 사진을 찍을 수 없는 시간을 의미했다(448쪽).”와 같은 말마따나, 누군가는 인화와 현상에 품을 많이 들입니다. 누군가는 인화와 현상보다는 사진찍기에 품을 많이 들입니다. 누군가는 스스로 사진찍기를 즐기려고 애쓰고, 누군가는 스스로 사진읽기에만 마음을 쏟습니다.


  디지털사진이 나오는 오늘날, 굳이 인화를 해야 하지 않습니다. 굳이 포토샵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오늘날은 즐겁게 찍고 보여주고 나누고 얘기하고 웃고 떠들고 노래하면 됩니다. 오늘날에도 인화에 엄청나게 품을 들일 수 있습니다. 저마다 하고픈 대로 하면 됩니다. 이렇게 해야 ‘사진답지’ 않습니다. 저렇게 하기에 ‘사진답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제프 다이어 님은 “아버스가 헤밍웨이와 먼로에 대해 한 말들을 다시 생각해 보자. 우리는 게드니의 사진에 나타난 아버스를 보고 그녀의 자살을 예감할 수 있는가(9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그럼요. 미리 느낄 수 있어요. 그러나, 미리 못 느낄 수 있어요. 읽는 사람은 읽고, 못 읽는 사람은 못 읽습니다. 읽는 사람은 말을 안 하더라도 눈빛과 낌새만으로도 알아요. 눈빛과 낌새만으로도 삶과 사랑과 꿈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눈빛도 낌새도 못 읽는 사람이 있어요. 말로 찬찬히 알려주어도 못 알아채거나 못 느끼는 사람이 있어요.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즐겁게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즐겁게 사진을 읽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고스란히 이어지고, 모레와 글피도 차근차근 이어집니다. 너는 나이고 나는 너입니다. 우리는 하나이면서 다 다릅니다. 지구별은 온누리 가운데 작은 빛이면서 고스란히 온누리입니다. 사진은 자그마한 모래알이면서 커다란 하늘입니다. 노래하는 사람한테서는 노래하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꿈꾸는 사람한테서는 꿈꾸는 사진이 자랍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서는 어떤 사진이 피어날까요? 사진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스스로 곱게 가꿉니다. 4347.4.20.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사진책 읽는 즐거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