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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세현의 얼굴 - 그의 카메라가 담는 사람, 표정 그리고 마음들
조세현 지음 / 앨리스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비매품으로 만든 사진책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에 조세현 님 다른 책에 이 글을 붙입니다. 아무쪼록, '최정상'이라느니 하는 부질없는 이름에 얽매이지 않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말을 함부로 덧달지 않기를 바라 마지 않습니다. 사진은 그냥 사진입니다. 

 


 더 아름다운 얼굴사진은 어디에도 없다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7] 조세현, 《Self-portrait of Postenchians》



- 책이름 : Self-portrait of Postenchians
- 사진 : 조세현
- 글 : 유대식, 황원미
- 영어 번역 : 유대식
- 펴낸곳 : POSTECH (2006.11.11.)
- 시중에 팔지 않는 책



 (1) 얼굴사진 찍기


 모든 사진은 얼굴을 찍습니다. 사람을 찍든 돌을 찍든 나무를 찍든 새를 찍든 구름을 찍든 바다를 찍든 얼굴을 찍는 사진입니다. 낯짝을 대놓고 찍을 때에만 얼굴을 찍는 사진이 아닙니다. 한 사람한테 고이 드러나는 빛깔을 찍는 사진이기에 얼굴사진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돌에 깃든 얼굴, 나무에 스민 얼굴, 새한테 감도는 얼굴, 구름에 비치는 얼굴, 바다에 어린 얼굴을 차근차근 담는 사진입니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사진쟁이 조세현 님을 일컬어 ‘얼굴 또는 사람 사진을 가장 잘 찍는 사진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피식 하고 웃었습니다. 도무지 터무니없기만 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가지를 가장 잘 찍는다 할 사진쟁이란 있을 수 없을 뿐더러, 사람이든 얼굴이든 가장 잘 찍을 사진쟁이 또한 나타날 수 없습니다.

 누구나 제 삶에 걸맞게 사진을 찍습니다. 누구나 저 스스로 좋아하는 모습을 제 깜냥껏 찍습니다. 잘 찍고 못 찍고란 따로 없습니다. 내 마음을 담아냈느냐 못 담아냈느냐만 있습니다.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잘 찍었다고 할 때에는, 이 사진쟁이 한 사람이 바라보는 사람을 이 사진쟁이 넋으로 잘 담아냈다는 뜻입니다. 더도 덜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잘 찍었다”는 말은 함부로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진쟁이 한 사람은 사람을 찍은 사진이 아니라 “사진쟁이로서 어떤 사람들을 바라보며 느끼어 절로 샘솟는 이야기를 찍은 사진”이기 때문입니다.

 딸아이 아빠보다 딸아이 사진을 잘 찍을 사람이란 없습니다. 다만, 딸아이 아빠가 바라보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는 모습을 남달리 잡아채어 찍을 수 있는 사진쟁이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딸아이 아빠가 아닌 딸아이 아빠 이웃집 아저씨도 매한가지입니다. 딸아이 아빠가 못 보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봅니다. 할머니도 보고 동무도 보며 동생도 봅니다. 언니도 보고 엄마도 보고 낯선 길손도 봅니다. 누구나 제 깜냥껏 제 눈길에 따라 제 삶결을 아로새기는 사진찍기일 뿐입니다.

 사랑스러운 짝꿍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는, 사랑스러운 짝꿍이 나한테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생각하면서 사진으로 담을 노릇입니다. 사랑스러운 짝꿍을 애써 찍었으나 무언가 어수룩하거나 예쁘장하지 않다고 느꼈다면, 사진기를 쥔 나 스스로 내 사랑스러운 짝꿍이 얼마나 사랑스러운가를 깨닫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진기가 싸구려였다라든지 필름이 나빴다라든지 날씨가 궂었다라든지 솜씨가 없었다라든지 하는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마음밭이 아직 모자란 탓입니다.

 사진관 일꾼은 누구나 사람사진을 잘 찍습니다. 왜냐하면 사진관 일꾼이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 ‘이 사진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가’를 아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큰회사에 낼 서류에 붙이는 사진이라든지, 대학입시 서류에 붙이는 사진이라든지, 여권에 붙이는 사진이라든지, 살림집 마루에 큼직하게 붙이는 사진이라든지, 지갑에 넣고 간직할 사진이라든지, 누군가한테 선물할 사진이라든지 …… 사진관 일꾼은 쓸모와 쓰임새에 맞추어 사진을 알차게 찍습니다. 사람사진을 가장 잘 찍는다는 말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만, 이런 말을 하자면 다른 사람이 아닌 사진관 일꾼한테 해야 올바릅니다.

 깊어 가는 밤나절, 아빠가 자꾸 부스럭거리면서 글깨나 끄적인다고 셈틀을 켜 놓고 있자니 아이가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깹니다. 아빠는 글 좀 깨작거리고픈 나머지 아이한테 골을 부립니다. 그렇지만 셈틀을 끕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보아도 아빠가 잘못했으니까요.

 셈틀을 끈 아빠는 아이를 무릎에 누입니다. 한동안 누이다가 자리에 눕힙니다. 자리에 눕힌 다음 머리칼을 쓰다듬습니다. 한참 이대로 있자니 아이가 “물!” 하고 외칩니다. 아빠는 물을 갖다 바쳐야 합니다. 물을 마신 아이는 다시 눕습니다. 무언가 흐뭇한 얼굴입니다. 아빠도 아이 곁에 모로 눕습니다. 아이는 “이불!” 하고 외칩니다. 네, 이불을 끌어올려 드립지요. 아이는 한참을 더 뒤치락 엎치락 꼼지락 꾸무적 꼼틀꿈틀 하더니 한 시간쯤 걸려 바야흐로 고이 꿈나라로 빠져듭니다.

 아이가 한창 꼼지락거리며 두 손으로 머리칼을 만지작거릴 때에 디지털사진기를 들어 감도를 1600으로 놓고 셔터빠르기는 3초나 4초쯤으로 한 다음 사진 하나 찍어 볼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는 아빠가 누워 있다가 일어난 줄을 깨닫고 저도 일어나겠다며 ‘두 손으로 머리칼 만지작거리기’를 그칩니다.

 아빠는 속으로 ‘젠떡!’ 하고 외칩니다. 이내 뉘우칩니다. 아빠는 사진쟁이라서 사진으로 아이 삶을 담아내 주고 싶지만, 이런 모습을 꼭 사진으로 담아야 하지는 않습니다. 눈으로 보았으면, 눈을 거쳐 머리를 지나 가슴으로 포근히 안으면 됩니다. 그림을 그리듯이 가슴에 새기면 될 아이 삶이고 모습이며 몸짓입니다. 내 아이를 내 무릎에 몇 분 동안 누여야 아이를 사랑하는 삶이 되지 않습니다. 내 아이를 눕히고 몇 분 동안 몇 가락 잠노래를 불러 주어야 아이를 아끼는 모습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 곁에서 아이가 씩씩하거나 튼튼히 크도록 지켜봐 주는 시간이 하루에 얼마쯤 되는가에 따라 아이를 보살피는 몸짓이 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고, 함께 얼싸안는 삶입니다. 사진은 천천히 얻습니다. 삶무늬를 아로새기는 얼굴사진이란 함께 살아가는 사람끼리 언제 어디에서나 넉넉하게 얻고 나눕니다. 삶이야기를 풀어놓는 얼굴사진이란 함께 얼싸안는 삶에서 그때그때 숱하게 깨알처럼 쏟아지면서 맛난 이야기 열매로 새삼스레 주렁주렁 달립니다.

 사진은 이론이 아니고, 사진은 손재주가 아니며, 사진은 장비놀음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랑어린 손길이고, 사진은 따사로운 눈길이며, 사진은 너그러운 마음길입니다.

 누구나 흔히 찍는 얼굴사진입니다. 누구나 참 잘 찍는 얼굴사진입니다. 아무개 사진쟁이를 놓고 얼굴사진이든 사람사진이든 가장 잘 찍는다고 일컫는다면, 이런 소리는 이런 소리를 듣는 사진쟁이한테부터 못마땅하거나 안 어울리거나 몹쓸 소리입니다. 이런 소리를 늘어놓는 분들 또한 참으로 슬픈 넋입니다. 우리는 사진을 보고 사람을 보며 삶을 보아야지, 허울이나 겉치레나 껍데기를 볼 까닭이 없습니다.


 (2) 포항공대 찍기


 포항공대 스무 돌을 맞이하여 나온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봅니다. 비매품으로 나온 사진책이기에 헌책방에서 뜻밖에 만납니다. 다른 자리에서는 이 사진책을 마주할 길이 없습니다. 포항공대 스무 돌을 기린다는 뜻은 거룩합니다. 다만, 이렇게 기리는 거룩한 사진책에 붙이는 이름이 왜 이 모양으로 알파벳투성이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포항공대 스무 돌을 기리는 사진책인 탓에 이런 이름이 붙겠구나 싶습니다. 지난날 포항제철 몇 돌인가를 기리는 사진책이 하나 나왔을 때에도(이때에도 비매품으로 나왔고, 저는 이 사진책을 아주 마땅히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에드워드 김’ 님이 사진으로 담은 이 사진책은 온통 알파벳투성이였습니다. 아마 《영일만의 기적》이라는 말마디를 영어로 “미라클 오브 영일만”이라 했던가 싶습니다. 알파벳으로 적는 책이름은 잘 떠오르지 않습니다.


.. 포스텍이 걸어온 20년은 한국 대학교육에 변화의 물길을 만들고 우리의 이공분야에 새로운 지평을 개척하면서 21세기의 과학기술을 이끌어 나갈 뛰어난 인재를 길러내는 길이었다. 짧은 역사에 비해 먼 길을 왔다고 자부한다. 이 포토에세이는 그 기록이다. 그러나 지금 여기서 앞을 바라보면 아직 가야 할 길은 멀다. 그래서 ‘스무 살 포스텍’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성찰하면서 제2의 도약을 준비하는 것이다. 기다리고 있는 길을 포스테키안은 선배들이 물려준 사명의식, 창의정신, 도전의식으로 목을 축이며 마라토너처럼 가기로 한다. 마침내 터져나올 환호성을 꿈꾸면서 ..  (책날개 소개글)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아로새기는 사진을 찍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지난날 포항체절 기림책은 에드워드 김 님이 사진을 찍었으니, 이 자리 이 기림책에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우뚝 서는 일이란 사진쟁이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큰 이름값이요 보람이며 금메달이라 할 만합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 첫손을 꼽을 만한 사진쟁이가 아니고서야 포항제철이든 포항공대이든 하는 곳 삶자락을 담아낼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뽑힐 수 없으니까요.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넘기면, 이 사진책을 내놓고자 한 포항공대 뜻마따나 씩씩하고 똑똑하며 아름다운 젊은 학생들이 웃음꽃을 피우는 모습이 가득합니다. 슬기로운 머리와 튼튼한 몸, 땀흘리는 배움과 온누리를 밝히는 넋이 사진마다 고이 묻어난다고 생각합니다. 참말로 포항공대는 나라안에서 손꼽는 훌륭한 대학교입니다. 나라밖으로 널리 알리며 북돋울 만한 멋진 배움터입니다.

 포항공대 사람들이 조세현 님을 ‘포항공대 역사 기록꾼’으로 받아들여 이 책을 엮을 만하다고 느낍니다. 다른 사진쟁이였다면 이 책에 담긴 사진 같은 모습을 선뜻 담아내지 못했겠지요.


.. 지난 늦겨울에 포스텍으로부터 개교 20주년 기념 화보집에 대한 제안을 받았을 때, 솔직히 저는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20년이라는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을 담아낼 수 있을까, 이런 걱정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우에 불과했습니다. 일 년 가까이 포스텍에서 보낸 저의 사진 여정은 큰 행운이었습니다. 세련된 대학환경, 창조적인 분위기, 예지적이면서도 정열적인 젊은 얼굴들이 색다른 영감을 일깨웠으며, 그 영감은 멋진 화보집을 탄생시킬 훌륭한 에너지로 바뀌었습니다 ..  (197쪽/조세현)


 사진쟁이는 사진으로 말합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으로 말할 때에는, 그동안 갈고닦은 사진 솜씨로 말하지는 않습니다. 사진쟁이는 사진기를 쥔 채 보내온 나날을 사진 한 장에 갈무리하며 말합니다.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찍은 조세현 님은 당신이 걸어온 나날 이야기를 이 사진책에 담긴 모습들에 살포시 담아서 내려놓습니다. 사진책 이름은 포항공대 사람들이지만, 사진책 이야기는 ‘포항공대 사람들을 바라본 사진쟁이 조세현 님이 걸어온 길’입니다. 주문(부탁)을 받아 찍은 사진이기에 주문(부탁)한 대로 사진을 찍기 마련이지만, 사진관 일꾼이 아니고서야 사진쟁이 마음결을 사진에 담을밖에 없습니다.

 뭇사람과 뭇평론가는 사진관 일꾼이 일구는 사진을 으레 깎아내리는데, 사진관 일꾼이 사진을 찍을 때에는 당신 이름을 사진에 살며시 내려놓거나 스며 놓지 않습니다. 어느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사진관 사진’인데, 이런 사진관 사진이면서 ‘사진관마다 다 달리 찍는 사진’입니다. 모르기는 모르지만, 제가 포항공대 관계자였으면 포항공대 앞에 자리한 사진관 일꾼한테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부탁)했습니다. ‘포항공대 사람들을 사진쟁이 깜냥껏 읽어내어 담아내는 사진’이 아닌 ‘포항공대 사람들 스무 해 삶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사진’을 바란다면 말이지요.


.. 기숙사를 나서는 등교시간, 기숙사로 돌아가는 하교시간, 그리고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나면 포스텍 캠퍼스는 거의 하루 종일 적막감에 싸여 있습니다. 그러나 강의실과 연구실에는 뜨거운 열정이 넘치고 있으며, 이것을 포스텍의 내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방학 동안에도 연구실과 실험실에는 포스테키안의 아름다운 눈동자들이 빛나고 있었습니다 … 최첨단 디지털 도서관인 청암학술정보관은 대학 건축물에 대한 저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만큼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고요한 공간에서 과학 한국의 밝은 미래를 미리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문득 고요를 깨야 했던 저의 카메라 셔터 소리는 지금 생각해도 민망하고 미안했습니다 ..  (197쪽/조세현)


 사진쟁이 조세현 님이 사진을 못 찍는다거나 엉성히 찍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사진쟁이 조세현 이야기’만을 사진으로 담을 줄 압니다. 사진쟁이 조세현 님은 ‘사진관 일꾼’이 아닙니다. 사진관 일꾼이 아닌 조세현 님은 이처럼 주문(부탁)을 받은 사진을 찍을 때에 어김없이 ‘조세현 이름표’를 달아 놓습니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사진을 찍지는 못하겠지요. 그러니까, 이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는 우리 둘레에서 마주하는 포항공대 사람들 삶이나 모습이나 몸짓이 아닌, ‘사진쟁이 조세현 님 눈에 비치며 사진쟁이 조세현 님 마음에서 우러나는 이야기로 다시 그려지는’ 대학생일 뿐입니다. 조세현 님으로서는 포항공대 아닌 서울대 사람들을 찍을 때이든, 연세대 사람들을 찍을 때이든, 이화여대 사람들을 찍을 때이든, 조선대 사람들이나 광운대 사람들을 찍을 때이든 언제나 똑같을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이 대학 사람을 찍든 저 대학 사람을 찍든 ‘조세현 이름표’가 붙기 마련이며, ‘어느 대학 사람’인지는 따로 꼬리말을 달지 않고서는 알아챌 수 없습니다. 《Self-portrait of Postenchians》라는 사진책은 포항공대 사람들이라는 꼬리말이 붙었으니 비로소 포항공대 사람들인 줄 알지, 이런 꼬리말이 없으면 포항공대 사람들 사진책인지 아닌지 알 노릇이 없을 뿐더러, 포항공대 스무 돌을 기리는 사진책인지 아닌지조차 알아낼 수 없습니다.

 거듭 밝히는데, 사진쟁이 조세현 님 사진이 알맞지 않거나 어울리지 않거나 올바르지 않거나 좋지 않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조세현 님은 조세현 님 사진만 찍는 사진쟁이라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조세현 님은 부디 조세현 님 사진밭을 이루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주문(부탁)을 받아서 사진일을 한다면, 이러한 사진일을 하면서 어느 만큼 벌이가 될 테지요. 돈도 벌고 이름값도 얻겠지요. 그러나 당신 사진밭을 이루지 못할 뿐더러, 당신한테 일을 맡긴 사람들 또한 처음 바라던 대로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맙니다. 사진관 일꾼이 맡아서 사진을 찍어야 할 자리는 사진관 일꾼이 맡아서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조세현 님은 ‘조세현 이야기’가 가장 잘 묻어나는 ‘조세현 사진’ 한길을 즐겁고 신나며 아리땁게 일구어야 합니다.


.. 이 책에서 저는 무엇보다도 스무 살의 젊음과 포부를 마음껏 표현해 보고 싶었습니다. 또한 이공계 연구중심 대학에서 발견한 휴머니즘과 포스테키안의 드높은 기상을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 아직 앵글을 맞추지 못한 캠퍼스의 여러 모습과 소중한 얼굴들이 많은데, 벌써 출간할 때가 되었다니 아쉬움이 큽니다. 아무리 서둘러도 시간의 속도를 따라잡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 ‘스무 살 포스텍’의 놀라운 저력이 미래의 한국 과학을 이끌어 나가리라고 믿으며, 모든 포스테키안들에게 미흡하나마 저의 시각의 혼을 담은 이 화보집을 바칩니다 ..  (197∼199쪽/조세현)


 ‘포항공대 사람들 스무 살 푸른 꿈’이 아닌 ‘사진쟁이 조세현 스무 살 푸른 꿈’을 잘 구경한 사진책 《Self-portrait of Postenchians》입니다. 조세현 님 다른 사진책을 볼 때에도 이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조세현 님은 ‘얼굴사진이나 사람사진 가장 잘 찍는다는 사진쟁이’가 아니라, ‘다른 사람 얼굴 모습을 빗대어 조세현 님 당신 이야기를 알뜰히 담아낼 줄 아는 사진쟁이’라고 일컬어야 옳겠구나 싶습니다.

 문득 일본 사진쟁이 다카하시 아유무 님 사진이 떠오릅니다. 조세현 님도 다카하시 아유무 님처럼 한결 홀가분하면서 한껏 호젓할 수 있다면, 굳이 포항공대 같은 데에서 일감을 얻지 않고도 얼마든지 밥벌이 잘 될 멋진 사진책을 꾸준히 선보일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밥벌이 잘 될 멋진 사진책이 아니라, 밥벌이가 안 되더라도 눈물나고 웃음나는 사랑스러운 사진책을 꾸준하게 우리한테 선보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4343.11.25.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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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고양이 -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녹스 사진, 사라 닐리 글, 한희선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평점 :
품절


드디어 리뷰쓰기가 되네... 이틀 만이다 ㅠ.ㅜ 

 


 찬찬히 다가서면 누구나 찍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 녹스·사라 닐리,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예담,2007)



 글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글을 씁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립니다. 춤을 추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잘 써야만 쓸 글이 아니고, 잘 그려야만 그리는 그림이 아닙니다. 잘 추어야만 출 춤이 아니며, 잘 불러야만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누구나 글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즐깁니다. 제 깜냥껏 즐기고 제 마음껏 누립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찍기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을 찍기도 할 테지만, 스스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돈을 치를 테니 찍어 달라 하는 사진을 자주 찍어야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모습에다가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내며 돈을 버는 삶이라지만, 뜻이 있으면 ‘나 스스로 바라지 않는 사진찍기’를 하면서 얼마든지 ‘한결 나은 사진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늘 새롭게 거듭나는 사진찍기를 선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벌이 사진을 하면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거나 빛나는 사진을 내놓는 사람은 무척 드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도 벌어야 먹고산다 할 만하지만, 사진은 돈이 아니요, 돈이 있다 해서 사진을 즐길 수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라 할 텐데, 돈벌이에 굳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 살림살이라 하더라도 사진을 한껏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벌이에서는 홀가분하지만, 사진찍기에서는 홀가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꿋꿋하거나 씩씩하게 걷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신나게 사진을 찍기는 하더라도 열매를 싱그러이 맺는 사진찍기로 이어가지 못해요.

 나 스스로 참다이 글쓰기를 즐기고 사진찍기를 즐기자면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내 글감은 나 스스로 내 좋은 삶에서 찾고, 내 사진감은 내가 손수 땀흘리는 내 삶에서 얻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를 글로 쓴다 할 때에,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편지를 쓴다 할 때에,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들이면서 써야 가장 아름답습니다. 누군가한테 써 달라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 더 멋들어지게 이야기를 붙이고 멋진 글씨로 적바림해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삐뚤빼뚤한 글씨로 앞뒤가 잘 안 맞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나 스스로 내 사랑이한테 편지를 적바림해서 보낼 때만큼 애틋하거나 아름답지는 못하다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그래요. ‘사람 사진 대단히 잘 찍는다’는 이한테 내 사랑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달라 맡길 수 있겠지요. 참 예뻐 보이도록 사진 한 장 얻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해서 얻는 사진 한 장이 나한테 가장 기쁘거나 고맙거나 반갑거나 살가운 사진으로 자리매길 수 있을는지요. 무언가 이래저래 잘 안 맞는 사진을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게 찍으면 내가 아낄 만한 사진이 안 될는지요.


..  우리 주변에는 존재감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방랑 고양이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일부러 그들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좀처럼 그들과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에요 ..  (머리말)


 사진책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를 읽습니다. 도시에서도 가장 번들거린다 할 만한 미국땅, 여기에서도 뉴욕에서 살아가는 골목고양이 삶을 좇아 사진으로 하나둘 담아내어 엮은 사진책입니다.

 저는 미국은 밟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밟을 일이 없다고 느끼는데, 이 가운데 뉴욕 같은 데는 더더욱 밟을 일이 없다고 느낍니다만, 이곳에도 골목고양이가 살아가는구나 하고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를 읽으며 깨닫습니다. 하기는, 미국에도 거지가 있고 뉴욕에도 거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에도 나무가 자라고, 뉴욕에도 나무가 자랄 테지요. 버려지는 밥쓰레기가 넘칠 테고, 이 밥쓰레기를 뒤지며 배를 채울 골목고양이는 어김없이 있겠지요.

 골목고양이는 뉴욕뿐 아니라 서울에도 있습니다. 큰도시에도 있고 작은도시에도 있으며 시골에도 있습니다. 고양이는 어디에서든 살아갑니다. 개도 어디에서든 살아갑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비둘기도 매한가지예요. 사람들이 아무 데나 멋모르고 풀어 놓는 바람에 씨가 자꾸 퍼지기도 한다지만, 살 터전인 자연이 차츰 사라지거나 밀리기 때문에, 이제는 뭇 짐승들조차 도시로 몰려들어 보금자리와 먹이를 찾을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으레 도시에서 이런 짐승들이 어찌 살아가나 생각하지만, 짐승들은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찾아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시로 몰려듭니다. 사람들은 일자리와 잠자리와 짝꿍을 찾으러 도시로 몰려들면서 이웃이나 동무를 거의 아랑곳하지 않는데, 사람들 스스로 사람을 살피지 않듯이 사람들은 으레 이웃 짐승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골목고양이가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골목비둘기가 있든 말든 마음쓰지 않습니다. 골목개가 떠돌든 말든 쳐다보지 않아요. 아니, 쳐다보거나 알아볼 수 없습니다. 거의 언제나 자가용으로 움직이니까요. 자가용이 아니더라도 길거리를 거닐 일이 드뭅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서 골목고양이를 마주할 틈이 없습니다. 불빛 밝은 길을 거닐면서 달을 올려다보지 못할 뿐더러 별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판에, 길바닥 골목고양이 한 마리를 바라보지 못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몇 분 동안 느긋이 마주보지 않아요.


.. 아무리 뒷골목에 숨어 지낸다 해도 동물들(말 나온 김에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누구도)은 사람이 모는 자동차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않다 ..  (맺음말)


 사진책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는 사진쟁이 녹스 님이 골목고양이를 무척 가까이에서 마주하며 사진을 한 장 두 장 담아내었기에 일구었습니다. 멀거니 떨어진 채로는 일굴 수 없는 사진책입니다. 골목고양이하고 이웃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저절로 찍고 저절로 엮는 사진책입니다.

 사진쟁이 녹스 님이 골목고양이가 아닌 연예인을 이웃이나 동무로 삼는다면, 가까운 연예인 삶을 살뜰히 사진책 하나로 내놓겠지요. 당신 어머님이나 아버님하고 가까이 지낸다면 당신 어머님이나 아버님 삶을 사진책 하나로 곱게 영글어 놓을 테고요. 꽃을 사랑한다면 꽃 이야기를 사진책으로 엮습니다. 빌딩을 사랑한다면 뉴욕땅 우람한 빌딩숲을 멋들어지게 담을 테지요.

 그러니까, 사진이란, 누구나 찬찬히 다가서면 얼마든지 찍어서 이루는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찬찬히 다가서지 못할 때에는 아무도 이루지 못하는 문화이거나 예술입니다. 찬찬히 다가서는 넋이기에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이야기 하나 알알이 예쁘게 엮어서 선보입니다. 찬찬히 다가서면서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맞잡는데,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사랑스러울밖에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꾸만 잊어버리는데, 무슨 일을 하든 무엇보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 함께 어우러지려고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동산 일을 하든 편의점 알바를 하든 함께 어우러지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할 때에는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교사 노릇을 할 생각이든 공무원 구실을 할 생각이든, 내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하고 곧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문화재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만 다소곳한 매무새여야 하겠습니까. 인간문화재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만 얌전한 몸가짐이어야 할까요. 골목개 앞에서든 골목고양이 앞에서든 똑같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 사진감 앞에서 언제나 다소곳하거나 얌전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좋아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믿어야 합니다.

 노래쟁이는 노래를 믿고 춤쟁이는 춤을 믿습니다. 글쟁이는 글을 믿고 그림쟁이는 그림을 믿습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을 믿습니다. 서로서로 믿으면서 한동아리가 됩니다. 문화를 하든 예술을 하든 바뀔 수 없는 밑바탕이고, 살림을 꾸리는 자리에서도 흔들릴 수 없는 밑틀입니다. 내 사랑을 바쳐 내 고운 님하고 한몸 한마음으로 어우러지는 자리에서 빛나는 열매 하나 달콤하게 맛보며 나눕니다. 한국땅에도 골목고양이나 집고양이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무척 많은데, 아직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처럼 살갑거나 사랑스레 사진이야기 꽃피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4343.11.21.해.ㅎㄲㅅㄱ)


―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 (녹스 사진,사라 닐리 글,한희선 옮김,예담 펴냄,2007.7.27./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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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Human) 14 최민식 사진집 휴먼(Human) 14
최민식 지음 / 눈빛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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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흑백사진도 아름답다
 [찾아 읽는 사진책 8] 최민식, 《HUMAN·14》(눈빛,2010)



 쉰두 해째 사진 한길을 걷는 최민식 님 새 사진책 《HUMAN·14》을 장만해서 읽습니다. 쉰두 해에 걸쳐 사진 한길을 걷기란 만만하지 않을 뿐더러 수월하지 않습니다. 쉰두 해 내내 사진 한길을 걸어온 발자국이란 얼마나 길디길으며 굵디굵을까요.

 잠자리에서 사진책을 펼칩니다. 이불을 무릎에 덮고 옆에 나란히 앉은 아이가 흘끔 사진책을 돌아봅니다. 사진책에 ‘어린이’ 모습 담은 사진이 나오니 가까이 다가오며 손가락으로 가리킵니다. 아이는 이내 책을 뺏아 듭니다. 조그마한 손으로 제법 큰 책을 휘릭휘릭 넘깁니다. 아이한테 언니나 동무나 동생 되는 모습이 나오면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어떤 모습으로 있는가를 아이가 아는 대로 말합니다.

 아이가 여러 번 보고 나서 사진책을 받아듭니다. 처음부터 다시 차근차근 넘깁니다. 첫머리 즈음 2010년 부산 골목동네를 담은 사진이 새삼스럽습니다. 2010년이라는 숫자를 옆에 달아 놓았으니 2010년 모습인지 알 만할 뿐, 숫자를 달아 놓지 않는다면 1957년으로 볼 수 있고, 1977년이나 1967년이나 1987년으로 볼 수 있습니다.

 빛살을 잘 살렸고 빛느낌이 고이 내려앉은 사진이라고 느낍니다. 이 사진들을 흑백으로 곱게 여민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한편, 이 사진들에 빛깔을 넣으면 어떠한 아름다움일까 궁금합니다. 1957년이나 1967년이나 1977년에는 빛깔 담은 사진을 찍기 어려웠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1987년이나 1997년이나 2007년이라면, 또 2010년이라면 빛깔 넣은 사진을 일구어 볼 만하겠지요. 또한, 2010년 오늘 빛깔 넣은 사진으로 담고, 다가올 2020년과 2030년에도 빛깔 있는 사진으로 담는다면 어떠한 멋과 맛일는지 궁금합니다. 흑백으로 담은 2010년 부산 골목동네 모습은 ‘흑백이라는 빛느낌’하고 맞물리며 마치 2010년이 아니라는 느낌이요, 지난 쉰두 해에 걸쳐 언제나 똑같은 삶터라는 느낌입니다.


.. 다큐멘터리 사진은 인간의 삶을 포착하는 작업이며, 대중에게 진정한 삶의 경험을 전달합니다. 저는 사진에서 인간적인 접근과 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오랜 사진작업을 통해 배웠습니다. 사진은 제게 ‘삶이 무엇이냐’는 의문에 대한 답을 제시함과 동시에 인생 전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  (머리말)


 사진쟁이 최민식 님은 지난 쉰두 해에 걸쳐 다 다른 사람들을 다 다른 삶자리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담아 왔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은 다 다른 사진마다 돋보입니다. 그러나 사진에 담긴 사람들은 다 다르지만, 다 다른 사람을 찍은 최민식 님은 늘 같은 마음과 매무새입니다. ‘삶이 무엇이냐’와 ‘사람은 무엇이냐’를 생각하는 최민식 님 마음과 매무새를 고스란히 담은 《HUMAN·14》입니다. 《HUMAN·14》뿐 아니라 《HUMAN·1》도 최민식 님 마음과 매무새를 고스란히 담습니다. 《HUMAN·1》 이야기는 《HUMAN·14》 이야기하고 맞물립니다. 《HUMAN·14》 모양새는 《HUMAN·14》에서도 곱게 이어집니다. 《HUMAN·1》을 이루는 넋은 《HUMAN·14》를 이루는 넋하고 같습니다.

 한결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한결같은 눈매로 바라보아 사진으로 옮깁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한결같이 살고, 가난하면서도 사랑스러우며 즐겁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가난하면서도 사랑스러우며 즐거운 모습대로 한결같이 사진으로 옮깁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최민식 님 말마따나 “사람 삶을 잡아채어 담아 놓는 사진”입니다. “살가이 다가서며 따사롭게 껴안는 사진”일 때에 비로소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사진 하나로 사람들한테 따스함과 아름다움과 슬픔과 고마움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들려줍니다.

 그런데, 가난하면서 가난을 기꺼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한테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부질없습니다. 가멸찬 살림이면서 가멸찬 살림을 넉넉히 나누지 못하는 사람한테도 다큐멘터리 사진이란 덧없습니다. 스스로 사람다이 살아가는 사람한테 바야흐로 따사로우며 너그러이 스며드는 다큐멘터리 사진입니다. 내 삶을 단단히 붙잡거나 여미는 사진쟁이들이 붙잡는 다큐멘터리 사진이면서, 내 삶을 튼튼히 가다듬거나 다스리는 살림꾼들이 즐기는 다큐멘터리 사진입니다. 여느 대중은 다큐멘터리 사진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 제 삶은 이 사진 컬렉션을 통해 재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저의 열정, 사상, 우리 삶의 비판적인 관찰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사진은 농사를 짓는 것과 유사합니다. 새싹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돋아나지 않듯이 사진도 갑작스레 창조되는 것이 아닙니다. 농부가 땀과 고된 노동 끝에 낟알을 수확하듯이 사진도 사진가의 땀과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  (머리말)


 최민식 님은 ‘사람들 얼굴을 담은 사진’으로, 이 얼굴마다 깃든 다 다른 삶결을 보여줍니다. ‘사람들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이 모습에 밴 다 다른 삶무늬를 알려줍니다. 어디 먼 나라 사람들 얼굴이 아닙니다. 어느 딴 나라 사람들 모습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는 최민식 님하고 이웃하는 사람들 삶이 드러나는 얼굴입니다. 사진기를 쥔 최민식 님 둘레에서 올망졸망 부대끼는 사람들 몸짓이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최민식 님은 스스로 다큐멘터리 사진을 찍는다고 말씀하지만, 깊이 따지고 보면 최민식 님 사진은 딱히 다큐멘터리 사진이라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사진’이라 하면 되고, 사진 하나로 ‘삶읽기’를 한다고 말하면 됩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내 이웃 삶 모습에서 느끼고, 내가 살아낸 자국이 배인 얼굴 모습을 내 이웃 얼굴 모습에서 깨닫는 셈이니까요.

 다큐멘터리 사진이기에 더 대단하거나 훌륭하거나 놀랍거나 좋거나 거룩한 사진이 아닙니다. ‘사진’이기 때문에 더 빼어나거나 아름답거나 멋지거나 괜찮은 문화나 예술이 아닙니다. 사진은 사진 그대로 좋고, 삶은 삶 그대로 즐겁습니다. 가난하다고 더 나은 삶이 아니요, 가멸차다고 더 못난 삶이 아닙니다. 사진 하나 즐기는 마음하고 농사짓기 즐기는 마음은 곱게 맞닿습니다. 사진 하나 나누는 마음하고 곡식 한 알 나누는 마음은 살뜰히 이어집니다.

 새싹은 어디에서나 스스로 돋습니다. 사진 또한 누구나 스스로 얻습니다. 풀싹은 어느 곳에서나 스스로 뿌리를 내립니다. 사진쟁이 또한 누구나 스스로 깨우쳐서 사진밭을 이룩합니다.

 농사꾼이 논밭에서 씨앗을 심거나 뿌려 곡식을 일구기도 하지만, 갖은 풀과 나무는 처음부터 스스로 씨앗을 내어 흙으로 녹아듭니다. 이 씨앗은 스스로 온힘을 내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워 줄기를 올리려고 애씁니다. 사진쟁이들 누구나 사진을 누구한테서 배운다 할 수 있지만, 누가 가르쳐 준대서 깨닫거나 깨우치는 사진이 아닙니다. 스스로 온힘을 짜내어 뿌리를 내리려 할 때에 오랜 나날에 걸쳐 차츰차츰 이룩하는 사진이에요.

 최민식 님은 최민식 님이 살아온 대로 사람들과 사귀며 사진을 찍습니다. 최민식 님은 최민식 님이 살아가는 대로 사진밭을 일구면서 사진 이야기를 내놓습니다. 삶 이야기가 사진 이야기로 마무리되고, 삶 무늬가 사진 무늬로 아로새겨집니다. 최민식 님이 사진으로 담은 사람들 얼굴이나 모습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으면, 최민식 님이 하루하루 꾸리는 삶이 아름답다고 느낄 만하다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HUMAN·14》을 읽으며 어느 모로 보면 아쉽다 할 만한 사진이 있을 때에는 최민식 님 삶 한자락이 어느 모로 보면 아쉽다 할 만하다는 소리라고 봅니다.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는 분들이 흑백사진을 즐기는 까닭은 여럿일 텐데, 흑백사진으로 삶을 담을 때에는 눈길이 흩어지지 않습니다. 이 구석 저 구석 찬찬히 차분히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빛깔사진을 찍을 때에는 더욱 마음을 쏟지 않으면 눈길이 이리저리 흩어집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사진을 보는 사람이나 속알을 살피지 못하고 맙니다. 그러나, 흑백사진이든 빛깔사진이든 때와 곳과 날씨와 철과 삶에 알맞게 다룰 수 있다면, 어느 사진으로 다큐멘터리를 엮든 사람 살아가는 내음을 아리땁게 엮어 냅니다. 빛깔사진이기 때문에 1957년과 1977년과 1997년이 서로 다른 삶자락을 읽도록 이끌지는 않습니다. 흑백사진으로도 얼마든지 다 다른 나날을 읽도록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이 사진은 언제 적 누구 이야기를 풀어낸 사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갈 때에는 사진 한 장으로 삶과 나날과 누리와 넋을 읽도록 이끕니다.

 흑백사진도 아름답고, 빛깔사진도 아름답습니다. 다만, 다큐멘터리 사진을 하는 분 가운데에는 빛깔사진 또한 아름다운 다큐멘터리 사진임을 보여주는 분은 좀처럼 태어나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빛깔 다큐멘터리 사진으로는 도무지 다가서지 못합니다. 삶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을 하는 분 가운데 흑백사진으로도 아름답겠지만 빛깔사진으로도 아름다운 삶을 나누어 주는 분은 무척 드뭅니다. 빛깔 있는 삶을 빛깔 있는 이야기에 따라 빛깔 있는 사진으로 일구기란 너무 힘든 노릇인지 모릅니다.

 이이한테는 이 빛깔이 있고, 저이한테는 저 빛깔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삶을 사진으로 영글어 놓고자 할 때에는 빛깔사진을 함께 찍을밖에 없습니다. 삶 사진을 일구려 하면서 흑백사진으로만 이야기를 엮는다면 사진 한 장에는 내 이야기 한 자락만 깊이 배어듭니다. 최민식 님 목소리를 듣는 《HUMAN·14》도 즐겁지만, 《HUMAN·14》에 담긴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목소리도 조곤조곤 즐겁게 듣고 싶습니다. (4343.11.18.나무.ㅎㄲㅅㄱ)


― HUMAN·14 (최민식 사진,눈빛 펴냄,2010.10.27./4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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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김영갑 / 하날오름 / 1996년 9월
평점 :
절판


 

이번에 제주마실을 하며 '시중 책방에는 없는' 김영갑 님 사진책 하나를 장만했다. 예전에 눈빛 출판사에서 나온 책을 다시 내놓은 듯하다. 이 책 이야기를 올리려다가, 먼저 지난해에 적었던 글을 좀 크게 손질해서 걸쳐 놓는다. 몇 해 앞서 김영갑 님 사진책 이야기를 다룬 글 또한 여러모로 손질해서 함께 걸치면, 내 나름대로 김영갑 님 사진비평을 갈무리한 셈이 되리라 본다. 


 이 책 하나 102 - 삶이 되지 못한 사진이라면 돈벌이나 겉멋일 뿐
 : 김영갑,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 책이름 :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 글 : 김영갑
- 펴낸곳 : 하날오름 (1996.9.10.)
- 1996년에 처음 나올 때에는 김영갑 님 글만 모아서 묶었습니다. 2004년에 ‘휴먼&북스’에서 사진을 넣어 새판으로 다시 펴냈고, 2007년에는 ‘김영갑 2주기 기림’판으로 새로 펴냅니다. 저는 이 가운데 1996년에 처음 나온 판으로 만나서 읽었습니다.


 (1) 만화에서 느끼는 사진


 준코 카루베라는 일본 만화쟁이가 그린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 열 권이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이듬해 2001년에 뒷이야기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 열두 권이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가 나올 무렵에는 얼른 알아채고 열 권을 모두 장만해서 기쁘게 읽었는데, 뒷이야기까지 옮겨졌다는 소식을 듣지 못해 그만 놓치고 말았으며,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는 금세 판이 끊어졌습니다.

 이리하여, 헌책방에 이 만화가 들어오기를 손꼽아 기다린 끝에 지난달 가까스로 열두 권을 장만했습니다. 마침 골목마실을 하며 지나는 길에 본 ‘문닫은 대여점’에서 값싸게 내놓은 책꾸러미 가운데 이 녀석이 있었어요. 이 만화책을 갖추어 놓은 대여점이 있었구나 싶어 놀라면서 즐겁게 장만했는데, 열두 권에 이르는 만화책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를 읽는 동안, ‘이 만화는 대여점에서 거의 안 읽힌 듯하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어느 책이든 사람들이 찾아서 읽으면 읽은 자국이 남습니다만, 이 만화책 열두 권은 아주 깨끗했습니다. 2001년에 나온 만화임에도 먼지가 그리 내려앉지 않았고요.

 참으로 오래도록 기다린 끝에 만난 만큼 한 번 보고 그칠 수 없어 거듭 펼치고 다시 넘기고 합니다. 7권을 보면, ‘소리를 듣지 못하는 엄마’가 초등학생 딸아이를 앞에 놓고 “찌주루(딸아이 이름), 그 착한 마음은 어디에서 가져온 거니? 엄마는 뽐내고 있었단다. 찌주루의 모든 걸 엄마가 낳았다고 생각했거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 찌주루가 가지고 와 준 거야(25∼26쪽).” 하고 생각합니다. 꾀병을 부리던 딸아이가 참말로 몸이 아프지만 어머니를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말 않으며 꾹 참는데, 아이 어머니는 “숨겨도 소용없어. 엄마는 다 알고 있는걸. 찌주루의 일은 전부. 왜냐면 찌주루를 너무너무 사랑하니까(8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 “며칠 동안 머물며 찍은 사진하고, 몇 년 기다려 찍은 사진하고는 다르겠죠. 취미로 사진하는 게 아니거든요.” … 한 장이라도 감동적인 사진을 찍어야만 한다는 집념으로 집을 떠나 떠돌아다니는 동안, 정작 부모님의 사진은 한 장도 찍지 못했다 … 많은 이들을 사진으로 감동시킬 수 있으면 글로도 감동시킬 수 있다 ..  (13, 127, 204쪽)


 더없이 착하디착한 만화인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와 《신ㆍ엄마손이 속삭일 때》에는 마음씨 나쁜 사람은 나오지 않습니다.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 모습은 엇비슷합니다. 어쩌면 모두 똑같다 하여도 틀리지 않습니다. 때때로 심통을 부린다 할지라도 어느새 풀어지거나 누그러뜨립니다. 아프거나 괴롭게 하는 이야기란 나오지 않습니다. 슬프거나 힘겹게 하는 이야기 또한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화책을 넘기는 내내 눈물을 흘립니다. 가슴속 깊은 자리까지 스며들면서 콕콕 찌르는 뭉클함이 있기에 눈물 없이 만화를 볼 수 없습니다.

 다 읽고 덮으면서도 뭉클뭉클함이 고이 남아 책등을 살며시 쓰다듬습니다. 이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하면서 사진기를 들고 골목마실을 나가면, 눈이 한결 맑아지고 손길은 더욱 부드러워진다고 느낍니다. 착한 만화를 보면서 제 마음이 착해지는 가운데 제가 담아내려는 사진 또한 착해진다고 할까요.

 저 스스로 좋아하는 이야기는 착한 이야기이고, 착한 사람들 나오는 만화에 더욱 눈길이 쏠리는 한편, 저 스스로 즐기면서 이웃하고 나누고픈 사진이란 바로 착한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골목동네와 헌책방동네라고 할까요. 제가 좋아하는 착한 이야기와 착한 그림과 착한 사진처럼, 저 스스로 착한 사람이 되고 싶으며, 제 삶터를 착한 마을로 일구는 일에 손을 거들고 싶다고 할까요.


..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는 의리나 배신, 명예나 권력, 돈, 이 모두는 나와 무관하다. 나의 삶은 사람들의 관심 대상에서 제외됐다. 설명될 수도 없는 사생활,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삶, 움막에 틀어박혀 허구한 날 알을 품은 채 하품하는 일상들. 일 년 내내 혼자 지내며 흘린 눈물도, 웃음도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오랜 세월 열과 성으로 품었던 알에서 탄생된 생명인데도 나의 사진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한다. 사람들은 극적인 드라마를 원한다. 눈물겹고 재미있는 감동의 드라마만을 원한다. 사랑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는 행복한 드라마를 원한다. 성공했다 실패하고, 다시 오뚜기처럼 일어나 성공하는 영광의 드라마를 원한다. 나의 삶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내가 껴안은 드라마는 처음부터 감동과는 거리가 멀었다 ..  (45쪽)


 거의 모든 사진기자와 사진작가가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찍는 사진을 보면 어둡기 짝이 없습니다. 어수선하기 그지없습니다. 때로는 책을 몹시 거룩하게 드높이는 사진이 보입니다. 그러다가 아주 천덕꾸러기처럼 다루고, 옛추억에 잠기게끔 하려는 모양새로 다룹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서 담아내지 못합니다. 오늘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오늘과 글피와 어제가 어떻게 달랐으며, 책이 살아온 오늘과 어제에다가 글피는 또 어떻게 다를는지를 헤아리고자 하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사진기자와 사진작가가 골목마실을 하면서 찍는 사진은 헌책방을 찍는 사진하고 어슷비슷합니다. 꼭 닮습니다. 골목동네 삶터를 꾸밈없이 바라보지 않습니다. 골목동네 사람들 살아가는 매무새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지 않습니다. 늘 구경꾼 사진이요, 노상 스침 사진입니다. 살 속으로 파고들지 못할 뿐더러, 골목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자 살붙이로서 사진을 찍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진마다 으레 ‘다큐멘터리’라는 이름을 붙이고들 있어요.

 생각해 보면, 모두들 제 깜냥껏 바라보는 셈입니다. 당신들 살아온 당신들 깜냥껏 마주하는 셈입니다. 제 깜냥껏 좋은 책을 알아보면서 고를 뿐입니다. 당신들 눈이 더 밝다면 당신들 손길로 더 많은 책이 좋음을 알아차리고 당신들 스스로 더 많이 읽고 장만하는 헌책방마실이 될 테지요. 내 눈과 생각이 한결 밝다면 골목마실을 하면서 골목사람 삶자락을 더욱 깊숙이 껴안으면서 녹아드는 가운데 사진을 하나하나 차곡차곡 담아낼 테지요.

 무엇보다도, 헌책방이나 골목길에서 따로 사진 한 장 찍지 않더라도, 두 곳에서 우리한테 나누어 주려는 느낌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면서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리라 봅니다. 사진이란 사진기 단추를 눌러 찍어도 좋지만, 사진기조차 없어도 즐거우며, 사진 한 장 안 찍어도 아름답습니다. 사진기를 들고 부지런히 단추질을 해도 즐겁지만, 사진기를 들고 있으면서도 어깨에만 얌전히 걸치고 있어도 재미있습니다. 사진에 우리 삶을 담는다 하면, 필름에 앉혀 종이로 찍어내는 사진이 되지 않고, 눈을 거쳐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언제나 ‘그림을 그리듯 떠올리는 우리 발자취’로 간직한다고 느낍니다.


.. 자연을 의지해 살아가는 이들은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면서도 적절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 일기예보는 참고나 할 뿐 그들 방식대로 하늘을 보고, 바람 부는 방향과 강약 그리고 느낌을, 바다의 물결이나 색감을 보고 내일을 준비한다 … 자연을 대상으로 작업을 하는 사진가들은 자연의 변화를 읽지 않고는 좋은 사진을 기대할 수가 없다. 대가가 사용했던 명품의 카메라를 가졌다고 해도, 사진가가 원하는 상황을 맞이하지 못하면 좋은 사진을 기대할 수 없다 … 내게 많은 영향을 미친 사진가들과는 시대도, 환경도, 가치관도 다른데 그들을 흉내내고 있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부끄럽고 고통스러웠다 … 누구도 나에게 사진에 대해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스스로 터득해야 한다 ..  (169∼170, 190∼191쪽)


 저는 김수정 님 만화책을 해마다 한 번씩 통째로 되읽습니다. 해마다 되읽으면서 딱히 어떤 뜻이나 꿈이나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가만히 돌아본다면 이와 비슷한 마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을 올망졸망 담아낸 결이 그지없이 곱다고 느끼니, 스스럼없이 되읽는구나 싶어요.

 어릴 때부터 김수정 님 만화는 잡지에 이어실리는 대로 다 보았습니다. 학교(초중고등학교)를 마친 다음에는 낱권책을 장만해 놓고 거듭 봅니다. 김수정 님 만화를 보면, 김수정 님이 이 만화를 그렸던 때인 1980년대 사람들 삶자락이 고스란히 담깁니다. 단출한 줄이 이어지며 이루어진 만화이면서, 구석구석 꼼꼼하게 우리 동네 골목이 살아숨쉬고 이웃 동네 골목이 펄떡펄떡 뜁니다.

 무어라 대단하다 싶은 이야기가 없는데 아름답습니다. 어떤 이름난 사람이 나오지 않으며, 힘센 영웅 하나 나오지 않지만 어여쁩니다. 훌륭한 사람들이라든지 똑똑한 사람 하나 없는 김수정 님 만화인데, 아기자기하며 신납니다.


.. 어둠에 묻힌 정원은 어두운 대로 좋고, 달빛에 드러나는 정원은 그대로 좋다. 비가 내리면 내리는 대로, 눈이나 안개에 묻히면 묻히는 대로, 나를 매혹시킨다 … 사진가들 중에 사진의 우연성에 필요 이상 과대포장을 하려 한다. 사진의 미학 중에서 우연성이 사진의 전부인 양 착각한다 … 마라도는 일 년에 십만 명 정도 관광객이 다녀간다. 그 중에 사진가들도 많다. 이 사람 저 사람 카메라 들이대다 보니 주민들은 카메라만 보면 고개를 돌린다 … 현실을 상대하여 작업하지만 사진가의 마음에 여과된 것이다. 사진가가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사진은 사뭇 다르다. 사진 속의 현실은 사진가의 마음에서 여과된 현실이지, 있는 그대로 복사된 현실이 아니기에 사진이 예술일 수가 있다 … 감동을 주는 사진은 우연히 만나 촬영할 수도 있지만 철저한 준비 없이는 불가능하다 … 잔재주를 피워 쉽게 작업을 마무리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사진을 기대할 수는 없다 ..  (57, 180, 182, 198쪽)


 오늘날 만화를 보면 ‘배경 잘 그려 주는 도움 만화쟁이’를 꽤 많이 부립니다. 거의 사진을 옮겨놓았다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빈틈이 없는 그림을 꽉꽉 눌러 담습니다. 그러나 그닥 싱그럽지 않아요. 잘 그리기는 솜씨있게 잘 그렸지만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배경 하나하나 들여다보는 맛이 없고, 배경을 가만히 가슴에 아로새길 만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만화를 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잘 그리기만 한 배경 그림’이요 ‘이쁘장해 보이도록 그린 만화 작품’만 넘친다고 느낍니다. 다시 보고 또 보며 지난번에는 못 본 모습이 곳곳에 나타나는 기쁨을 찾아보기 어려운 오늘날 만화 작품들이에요. 주인공과 줄거리와 배경까지 골고루 들여다보고픈 마음이 들도록 하는 작품이란 나라안에서 좀처럼 태어나지 않습니다. ‘그냥 사진 찾아보면 되지?’라든지 ‘내가 몸소 거기에 가면 되지?’ 같은 마음만 듭니다. 어쩔 수 없이 채우려 하는 배경이 되었다고 할까요. 많이 팔릴 생각에 매인 만화 작품이라고 할까요. 만화를 즐기는 사람이 ‘만화를 왜 즐기는가’를 헤아리지 않으면서 기술자가 되어 버렸다고 할까요.

 오늘날 한국땅 사진쟁이가 퍽 많이 늘었으나, 사진쟁이 사진 작품을 볼 때면 한국땅 만화쟁이 만화 작품을 볼 때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지루합니다. 따분합니다. 왜 이렇게 스스로 대단해 보이려는 작품에 얽매이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두들 사진‘작가’라는 제길을 걷지 못합니다. 사진‘기술자’다운 길에 옭매입니다. ‘찍는 솜씨’는 빼어난데, ‘찍는 마음’은 하나도 안 느껴집니다. 사진을 찍기 앞서 삶을 일굴 노릇이고, 사진을 빚기 앞서 사랑을 할 노릇이며, 사진을 내놓기 앞서 믿음을 나눌 노릇입니다.

 사랑 없이 작품만 그럴싸하게 보인대서 ‘사진’이라 할 만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랑 없이 작품만 그럴듯하게 보인대서 ‘만화’라 한다거나 ‘문학’이라 한다거나 ‘노래’라 한다거나 ‘춤’이라 한다거나 ‘예술’이라 한다면 덧없는 몸짓이라고 여깁니다. 사랑 없이 내미는 손길이란 얼마나 차가운가요. 사랑 없이 돈 몇 푼 내놓는 손길이란 얼마나 메마른가요. 사랑 없이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사람은 모두 슬픕니다. 사랑 없이 붓질을 하는 사람은 다들 딱합니다. 사랑이 있으면 사진기 단추는 안 눌러도 되고, 사랑이 넘치는 붓이나 연필은 안 들어도 됩니다.


 (2) 책에서 느끼는 사진


 아침에 골목마실을 다녀옵니다. 요즈음은 일산과 인천을 오가느라 몸이 고단하여 골목마실을 제대로 못 다니는데, 도서관 문을 열어 놓는 금·토·일 사흘에 걸쳐 아침저녁으로 틈을 쪼개어 사진마실을 나갑니다.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용현동이나 학익동으로 나가 보려고 했다가, 그만 도원동과 선화동에서 붙잡힙니다. 도원동과 선화동 골목길 곳곳에 피어나는 꽃과 나무가 몹시 싱그럽고 좋아, 더는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맙니다. 바로 이곳에서 이 고운 모습을 가슴으로 받아들이면서 사진 하나로 옮겨내고 싶습니다.

 다른 때에도 으레 이와 같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한 시간쯤 달려 우리 골목동네에서 퍽 먼 골목동네를 만나고 싶은데, 언제나 얼마 못 달립니다. 아예 눈을 감듯 자전거를 씽씽 달려야 비로소 다른 동네를 만납니다. 그런데, 씽씽 달리는 자전거는 저부터 좋아하지 않아요. 느긋하게 달리는 자전거이고 싶습니다. 나긋나긋 한들한들 걷고 싶은 제 두 다리입니다. 제 삶자리인 골목동네이든 이웃 삶자리인 이웃 골목동네이든 살짝살짝 스치듯 지나가며 빨리빨리 더 많은 사진을 더 대단하게 담는 일을 하고프지 않습니다. 그저 그대로 그곳 결을 보듬으면서 사진을 즐기고 싶어요. 사진을 즐기기 앞서 동네를 즐기며, 골목꽃을 즐깁니다. 사진으로 옮기기 앞서 골목동네 빨래 싱그러운 빛깔을 듬뿍 느낍니다. 어제도 찍고 그제도 찍었어도 그예 지나치지 못하고 다시금 찍습니다. 어제는 어제 하루 새삼스러운 빛깔과 날씨와 기운과 빛줄기였다면, 그제는 그제대로 다른 빛깔과 날씨와 기운과 빛줄기이며, 오늘은 오늘대로 다른 빛깔과 날씨와 기운과 빛줄기입니다. 날마다 다릅니다. 같은 하루이더라도 아침과 낮과 저녁이 다릅니다. 같은 낮이어도 한 시와 두 시와 세 시가 다릅니다. 어제는 어제대로 좋고 그제는 그제대로 좋으며 오늘은 오늘대로 좋습니다.


.. 십 년을 줄곧 섬에서 생활했는데도 지금도 나는 뭍의 것들 속에 포함된다. 섬 것들 속에 포함되려면 삼대가 지난 뒤에야 자연스레 섬의 것들 속에 포함될 수 있단다. 나도 이제는 섬사람이라고 고개를 세우고 되물으면 섬의 토박이들은 고개를 흔들며 웃는다 … 사람 살 곳이 못 된다며 변방이라 부르던 시절 토박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피눈물을 흘렸다. 인내와 희생만을 요구하던 시절을 살다 간 토박이들의 땀과 눈물을 채우고 있다 … 내가 작업하고 싶은 사진만을 작업하며 생활하는 그 자체로 만족한다. 사진작가로, 예술가로 인정받아야 할 이유도, 까닭도 없어졌다 ..  (166∼167쪽)


 요 몇 달에 걸쳐 《빅토르 하라》를 읽는데 아직 끝마치지 못합니다. 《말괄량이 삐삐》나 《국가는 폭력이다》나 《식민주의와 언어》나 《지로 이야기》 같은 책은 진작에 다 읽었으나 느낌글로 갈무리하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다 읽은 책이 책상맡에 한아름 쌓이고 두 아름 쌓입니다. 이렇게 한 해가 흐르고 두 해가 흐르기도 하는데, 이렇게 하루하루 흐르는 동안 ‘얼른 이 책을 마치고(졸업) 다른 책으로 뻗어 가야지’ 하는 생각을 잇고 잇다가 ‘두 번 읽고 세 번 읽고야’ 마는 이 책들을 만지작거리면서 늘 새삼스럽다고 느낍니다. 그러면서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꼭 이 책을 마쳐야(졸업) 하지는 않아. 아니, 처음부터 책읽기란 없었지. 첫 줄부터 끝 줄까지 빠짐없이 읽어냈다고 책읽기는 아니니까.’

 지난번에 읽으며 놓친 대목이 이번에 읽을 때 눈에 뜨입니다. 지난번에 읽으며 잡아챈 대목이지만 이번에 읽을 때에는 다르게 스며듭니다. 이러는 동안 ‘어, 이 책 느낌글을 일찍 썼다면 너무 아쉬웠겠는걸’하고 생각합니다. ‘이 책 느낌글을 마무리짓지 못한 까닭은 따로 있었구나’ 하고 느낍니다. ‘더디 읽어야 할 책은 더디 읽어야’ 하고 ‘더디 새겨야 할 책은 더디 새겨야 함’을 깨닫습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적어도 열 해쯤은 해야’ 무언가를 한다는 시늉이라도 낸다고 이야기를 시나브로 헤아리다가는, ‘한길 한뜻을 이룩하는 일’도 나쁘지 않으나 ‘한길 한뜻을 이룩하지 않더라도 내 삶을 이 책 하나와 아름다이 보낸다’면 즐겁습니다.


.. 보통 사람과는 다른 삶을 살기에 가끔은 방송사나 잡지사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는다. 어떤 기자는 그저 흥미 위주로 묻기도 하고 어떤 기자는 꽤 심각한 질문만을 골라 던진다 … 대부분 기자들이 나 같은 풋내기에게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져 얻는 것은 없겠지만 성의없는 태도를 보이면 나도 하품이 난다. 아무리 풋내기 사진가라지만, 상대가 무성의하게 질문하면 나 또한 무성의한 대답을 할 뿐이다. 그러나 예의를 갖추고 질문하면 나도 진지하게 임한다. 나에게도 나만의 가슴속에 묻어 둔 눈물, 한숨, 기쁨이 있다. 이야기를 들으려는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이에게는 어떤 말을 해도 공염불이다 … 내가 배고프면 남도 배고프고, 내가 슬프면 남도 슬픈 줄 안다. 모든 것을 내 자신의 눈높이로 이해하고 해석하려 한다. 늘 떠돌아다녀야 하는 일을 하다 보니 가끔은 곤혹스럽고, 긴장하게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얼굴 마주하고 나의 깊은 곳을 털어놓지 않을 수 없게끔 인간적으로 나를 대한다. 진실에는 진실이 제격이다 … 여유있는 사람들의 서재에서 먼지가 쌓여 가는 값비싼 작품집이기보다는 손과 손에서 옮겨다니며 구겨지고 찢어지는 엽서와 카드이길 원했습니다 … 구한말 이 땅의 중요한 사건이나 사회의 구석구석을 사진으로 기록했던 것은 외국의 선교사들이었습니다. 이미 사진이 이 땅에 들어왔지만,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기록하지 못했습니다. 사진집으로 묶여 나온 것들이 대부분 외국인이 찍은 사진들이었습니다. 우리의 정서와 역사를 모르는 이들이 작업했기에 호기심에 의한 기념사진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정서와 역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우리가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일을 하려면 직장을 가지게 되면 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 언론이 보여주는 세상만을 보고 세상을 한탄할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보여주는 세상에 의지해서 세상을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찾아가 보고 난 후에 세상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밝은 세상, 착하고 진실한 사람들을 만나 내 자신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깨닫고 나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그들을 닮아 보고, 흉내라도 내 보고 싶었습니다 ..  (81∼90쪽)


 오늘날 쏟아지는 책들을 살피면 글에 곁들이는 사진이 퍽 많습니다. 사진 없이 글로 이루어진 책은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보면서 ‘굳이 넣어야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고, ‘사진을 넣는다고 책을 더 잘 읽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지우지 못합니다. 글은 글이고 그림은 그림이며 사진은 사진이거든요. 사진에 글을 붙인 책을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사진책인데 사진으로 말하지 못하나 궁금합니다. 글책이 글로 말을 걸지 못하고, 사진책이 사진으로 이야기를 이루지 못하는 오늘날 한국땅 책마을입니다.

 글에 보태려고 그림이나 사진을 넣을 수 없습니다. 그림이나 사진을 더 잘 알도록 한다며 글을 붙일 수 없습니다. 글은 글대로 홀로서야 하고, 그림과 사진은 그림과 사진대로 홀로서야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뭘 잘 알거나 깨달아서 이런 이야기를 끄적이지는 않아요. 그저 제가 살아가는 대로 내뱉는 말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아니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느끼는 대로 지껄이는 말입니다. 집안일 도맡고 집밖일 함께 하는 바빠맞은 삶을 되도록 천천히 꾸리려 하면서 툭툭 튀어나오는 말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아는 대로 보는 모습이 아니라 살아가는 대로 보는 모습이요, 아는 대로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살아가는 대로 찍는 사진”이라고,

 삶이 되면 알 수 있다고 할까요. 삶이 되니 글을 쓸 수 있고, 삶이 되니 그림을 그릴 수 있으며, 삶이 되니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할까요. 제 사진삶을 돌이키면, 사진하고 함께 산 지는 아직 스무 해가 못 되었으나 책하고 함께 산 지는 스무 해쯤 됩니다. 이러구러 ‘책이란 이렇구나’ 하고 혼자 싱긋 웃는 가운데 ‘사진이란 또 이렇구나’ 하고 홀로 빙긋 웃습니다. 살아온 만큼 웃고, 살아낸 만큼 웃으며, 살아가는 만큼 웃습니다. 오늘은 이렇게 웃으면 글피에는 저렇게 웃을 테고 모레에는 그렇게 웃겠지요. 모두 한 흐름이요 한 줄기요 한 뿌리인 삶이고 책이고 사진이고 문화이고 예술인 한편 살림살이입니다.


.. “곱쌍헌게 여편네 같쑤다.” 인물이 훤한 양반이 머리는 왜 묶느냐고 걱정을 한다. 머리 묶은 덕에 노인들과 어렵지 않게 말문이 열린다. 아이들도 노인들도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남자는 머리가 짧아야 남자답고 사내라고들 생각한다. 남자의 기준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고 우려한다. 만나는 이들마다 한 마디씩 한다 … 낚시꾼들이 포인트를 찾아 무인도에서 무인도로 옮겨 다니듯 사진가들도 분주하게 촬영지를 찾아나선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도 존재한다. 그런데도 아름다운 곳을 찾아 해외로 떠나려 한다 ..  (158, 182쪽)


 글쓰기를 가르치자면 글로 가르쳐야 하고, 그림을 가르치자면 그림으로 가르쳐야 하며, 사진을 가르치자면 사진으로 가르쳐야 한다고들 생각하곤 합니다. 그러나 저는 다르게 생각해요. 글로도 글을 가르치지만 그림으로도 글을 가르친다고. 사진으로도 글을 가르치고, 글로도 사진을 가르친다고. 왜냐하면, 글이 삶이 되면 무엇으로든 글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으니까요. 그림이 삶이 되면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림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니까요. 사진이 삶이 되면 누구하고 있더라도 모두 사진으로 바라보고 사진으로 삭이니까요.

 어릴 적에는, 그러니까 제가 철부지일 적에는 하나도 몰랐습니다. 요즈음도 아직은 철부지가 아닌가 싶은데, 예전만큼은 철부지가 아닌지 모릅니다만, 아무튼 예전이나 이제나 똑같은 철부지라 하여도 요사이는 새로 느끼는 이야기가 많아요. 철부지인 주제에 깨닫는 셈입니다만, ‘온힘 쏟아 책 하나 내놓은 사람이, 애써 내놓은 책은 싹 잊고는 다른 책 하나 내놓으려고 온누리를 두루 돌아다닌다’고 깨닫습니다. 온힘 쏟아 내놓은 책 하나를 붙잡으며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거머쥘 생각은 않고, 이 책은 ‘이 책을 읽을 사람들 몫’이라고 여기며 훌훌 털어냅니다. 당신은 당신 길을 새롭게 갑니다. 산꼭대기에 오르자마자 산을 타고 내려오는 셈입니다. 논갈이 논삶이 모내기 풀뽑기 가을걷이 모두 끝내 하루 농사를 마감했으면, 이듬해 새로운 농사를 똑같이 다시 열고자 마음을 기울이는 셈입니다.


.. 섬 구석구석 아스팔트 길이 트이고 시멘트 건물이 늘어나면서 토박이들은 신명을 잃었다. 할망당이 없어진 자리에 대신 교회가 들어섰다. 하늘길이 열린 후 사람들이 몰려오자 인정도 사라졌다 … 마라도를 이해하는 데 태풍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마라도 사람들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바람을 경험해 보지 않고는 마라도의 삶을 이해할 수 없다 … 아주 작은 섬이지만 자연의 교향악이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아주 감동적이지만 누구나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마라도에서는 한 철을 혼자 살아도 그리운 사람이 기다려지지 않는다. 온종일 바다로 하늘로 공허한 마음을 채운다 ..  (21, 185∼186, 200쪽)


 예나 이제나 아직 철부지이며, 이런 철부지이니 철부지로서 책을 펼치고 그림을 즐기고 사진을 맛봅니다. 철부지이니 아쉽거나 모자라지만,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받아들이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맞아들입니다. 섣불리 더 뻗댈 마음이 없으며, 괜시리 숨기거나 가두고 싶지 않습니다. 늘 제 마음그릇 그대로 드러내면서 온몸으로 껴안고 싶습니다.


 (3) 김영갑 님 사진삶을 담은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


 “사진으로 감동시킬 수 있으면 글로도 감동시킬 수 있다”고 밝히는 김영갑 님 사진삶이 담긴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를 읽습니다. 204쪽짜리 자그마한 책 마지막을 채우는 말마디입니다. 이 말마디 앞에는 “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었는데 글로 표현한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밝힙니다.

 한 줄로 밝힐 수 없다면 백 줄로도 살을 붙일 수 없고, 백 줄을 채우지 못한다면 한 줄로 간추릴 수 없다는 이야기와 똑같을 테지요.


.. 아버지에 대한 미움, 증오가 내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나는 긴장한다. 내 자신을 반성한다. 그리고 후회한다. 내가 아버지를 미워했던 것만큼 내가 내 자신을 미워하고 증오했다 … 사진도 보는 사람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 내 자신을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 아니다. 보는 사람을 위한 사진이다 ..  (140, 173쪽)


 김영갑 님은 오로지 제주섬 중간산을 찍었습니다. 루게릭병이 찾아들어 더는 사진기를 손으로 못 찍고 마음으로만 찍게 된 뒤부터는 두모악갤러리를 지켰고, 이곳 두모악갤러리는 당신 뜻을 잇는 분이 야무지게 꾸립니다. 제주섬마실을 하는 분들은 우도나 마라도에 들르듯 으레 이곳에 들르고, 김영갑 님 온삶을 바친 사진을 고개를 끄덕이며, 또는 눈물을 흘리며 바라봅니다. 또는, ‘저게 뭐야? 나도 찍겠는걸?’ 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때로는, ‘사진에 갇혀 사진 이야기를 보기보다 내가 저곳에 기쁘게 찾아가서 자연 이야기를 내 삶 이야기로 삭이면 되지’ 하는 눈썰미로 바라봅니다.

 하기는. 김영갑 님 어여쁜 사진은 중간산 자연을 어여삐 담은 사진이 아닙니다. 김영갑 님 어여쁜 사진은 김영갑 님 이야기를 담은 ‘중간산 자락 삶’입니다.


.. (사람들은)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건물 짓고 기념비를 세운다. 마라도가 오염돼 환경이 파괴되면 왔던 손님도 되돌아간다. 볼 것이 없고 느낄 것이 없으면 마라도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진다. 사람이 마라도를 잊어버리는 날 민박집, 교회, 절이 폐가가 되어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을 것이다. 시절이 변하면 사람도 변한다. 사람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건물도 도시도 오래되면 늙는다. 늙으면 죽는다. 늙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것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매혹시키는 것이 마라도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것을 부각시키는 개발이 아니면 그 개발은 실패작이다. 사람을 환장하게 만드는 그 무엇을 보존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외면한다 ..  (200쪽)


 쉰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마흔을 조금 넘기고부터 병이 찾아들었습니다. 당신이 이 땅을 떠나기 앞서 여러 매체와 만나서 남긴 이야기를 살피니, ‘쉰조차 못 되어 이슬이 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쉰 살 가까이 살아남은 나는 얼마나 고마운’ 노릇이냐고 밝혔더군요.

 그래, 쉰은커녕 마흔이나 서른에, 또는 스물이나 열에 떠난 넋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 스스로 못 느낄 뿐이지만, 우리는 이 젊거나 어린 넋들이 있었기에 오늘처럼 우리 목숨을 고이 여밀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앞에 길을 마련한 숱한 땀방울이 있었기에 우리들 누구나 잔걱정 덜하면서 세상살이를 해 나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 밑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나를 보고 사람들은 정신나갔다고 혀를 찬다. 그래도 나는 웃는다. 불혹의 나이가 되도록 밥벌이도 못한다고 핀잔을 주어도 웃는다. 그 나이에 장가도 못 가고 뭐했냐고 다그쳐도 나는 웃는다. 십 년 세월 동안 밥벌이도 안 되는 일에 몰두했지만 드러내 보일 것이 없다. 뚜렷한 결과는 없지만 부끄럽지 않으려 나만의 일에 최선을 다했다 ..  (160쪽)


 김영갑 님이 《섬에 홀려 필름에 미쳐》를 펴내던 해는 1996년이고, 이때 당신 나이 마흔이었으며, 제주섬에 흘러든 지 열두 해째입니다. 이 책에 스스로 적은 해적이를 보면, 이무렵까지 20만 장 넘게 제주섬 중간산을 찍었다고 했는데, 김영갑 님은 여느 필름이 아닌 파노라마사진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하게 찍어댔습니다. 숨돌릴 틈 없이 찍었고, 오늘 어제 글피 가리지 않고 찍었습니다.

 한 장을 얻으려고 찍은 사진이었다 할는지 모르나, 제가 느끼기로는 하나하나 헤아리면서 20만 장을 얻으려고 찍은 20만 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 뒤로 더 찍어 50만 장을 이루었다면 50만 가지 모습을 나누고 싶어 50만 장을 찍었으리라 봅니다. 김영갑 님한테 제주섬 중간산에 사진을 찍는 일이란 당신 삶을 하루하루 일구는 일이었으니까요. 하루도 거를 수 없는 삶이고, 하루도 놓칠 수 없는 삶이었으니까요. 아니, 하루조차 아닌 한 시간도, 한 분도 한 초도 잊을 수 없는 삶이었으니까요.

 한때 두때 석때 차근차근 사진으로 담아 한삶을 이룹니다. 그런데 김영갑 님은 애써 담은 당신 한삶을 당신 스스로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얄궂게 찾아든 병 때문입니다. 당신 사진을 당신 스스로 갈무리하지 못하고 맙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당신한테 병이 찾아들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나 사진기만 붙잡았을 테며, 당신은 훨씬 더 많이 사진을 남겼으리라 봅니다. 그리고, 훨씬 더 많이 모인 사진은 당신 스스로나 다른 사람 누구나 짐을 질 수 없을 만큼 되었으리라 봅니다. 아니, 당신이 제주 중간산을 사진으로 담은 삶이 어떤 이야기인지 사람들이 함께 느끼도록 갈무리해서 보여주지 못했겠지요. 사진만 덩그러니 남았을 때에 당신 사진에 깃든 삶을 찬찬히 읽어낼 사람이란 아무도 없었겠지요.

 당신을 부른 뜻이 하늘나라 뜻인지 모르겠지만, ‘제주섬 중간산을 제주섬 중간산 그대로 담아내는 일은 이제 그쯤이면 넉넉하구나. 이제부터는 있는 그대로 느끼며 담아낸 제주섬 중간산 모습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있게끔 갈무리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조그마한 뜻으로 김영갑 님한테 병을 내려주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김영갑 님 스스로 아쉽거나 모자란 대목을 느낀다면, 이 아쉬움과 모자람은 사람들이 당신 사진을 보면서 하나씩 깨달으면 됩니다.


.. 사람들은 사진 공해 속에서 살면서도 사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텔레비전, 신문, 잡지 …… 고개를 들면 사방에 사진이다. 문밖을 나서면 골목에도, 지하도에도, 전철에도, 버스에도 사진이다. 그런데도 무관심이다 ..  (69쪽)


 2006년에 나온 《김영갑 1957∼2005》(다빈치)라는 사진책이 떠오릅니다. 이 사진책이 나온 지 벌써 세 해가 되었고, 김영갑 님이 세상을 떠난 지 네 해가 되었습니다. 참 빠르구나 싶으면서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싶습니다. 《김영갑 1957∼2005》를 들춰봅니다. “중간산 광활한 초원에는 눈을 흐리게 하는 빛깔이 없다. 귀를 멀게 하는 난잡한 소리도 없다. 코를 막히게 하는 역겨운 냄새도 없다. 입맛을 상하게 하는 잡다한 맛도 없다.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중간산 초원과 오름을 사랑한다 … 내가 한라산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궁금해 한다. 질문을 받을 때마다 대답 대신 웃는다.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벌써 다른 곳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뭔가 설명할 수 없기에 한라산 자락에서 이렇게 세월을 허비한다 … 겉으로 드러나는 아름다움은 한라산이 설악산이나 지리산보다 빼어날 수 없다.” 같은 글줄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렇게 제주섬 중간산은 김영갑 님과 한몸으로 있던 삶이었군요. 비록 ‘세 대에 걸쳐’ 살지 않아 ‘제주 토박이’가 되지는 못했으나, 당신 그 삶으로 한몸이 되는 길을 찾았군요. 그러니, 돈벌이 사진이 아닌 두모악갤러리를 마지막으로 남겼고, 죽기 얼마 앞서 찾아온 기자 앞에서도 ‘기자 양반, 다음에 다시 찾아와서 그때는 사진 찍기를 배우라’고 스스럼없이 말했군요. (4342.5.3.해.처음 씀/4343.11.17.물.고쳐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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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여우 헬렌 쪽빛문고 9
다케타쓰 미노루 지음, 고향옥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백 가지 삶과 백 가지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7] 다케타쓰 미노루, 《아기 여우 헬렌》(청어람미디어,2008)



 스물일곱 달째를 지나 스물여덟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가 큰방에서 혼자 놉니다. 아이 엄마는 작은방에서 이불을 무릎에 덮고 뜨개질을 합니다. 아이 아빠는 이불을 쓰고 자리에 누워 허리를 폅니다. 그제 서울과 인천으로 볼일 보러 갔다가 어제 돌아와서는 끙끙거립니다. 하룻밤 사이에 먼길을 오가고 나면 꼭 하루 남짓 끙끙 앓습니다. 아이 엄마가 아이 아빠한테 넌지시 묻습니다. “아이 예쁘지요?” 아이 아빠는 능청스레 대꾸합니다. “뭐가? 어디가?”

 아이랑 스물일곱 달을 꾹꾹 채워 살아오는 동안 날마다 서른 장 남짓 아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면서 내 아이 모습을 어떤 이야기를 붙여 사진으로 담으면 좋을까 하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갖은 집일을 떠맡아 살림을 꾸리면서 이 사진은 이렇고 저 사진은 저렇고 하며 살필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이 모습은 이 삶결대로 담고, 저 모습은 저 삶자락대로 담을 뿐입니다.

 요 한두 달 사이 이 사진들을 곰곰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아빠한테 둘도 없이 어여쁜 모델이 되어 주는 이 아이 삶을 어떤 이야기 담은 모습으로 나눌 때에 아빠한테도 엄마한테도 아이한테도 즐거울까 하고. 참말로 바쁘다고 말은 하지만, 이런 말은 핑계일 뿐, 나로서는 아직 아빠다운 아빠 길을 못 걸으니까 아이 사진을 찍으면서 이 사진이 아이 삶하고 어떻게 어울리도록 하면 좋겠는가 하는 갈피를 못 잡는 셈 아닌가 하고.

 아이 사진을 함부로 누리집(블로그라든지 인터넷방이라든지)에 올려서는 안 된다고 느낀 어느 날부터 아이 사진을 섣불리 다른 사람 앞에 내보이지 않았습니다. 한 달 남짓 이러다가 마음을 곰곰이 추슬러 하루에 한 장씩 아이 사진을 글 한 줄씩 붙여 갈무리해 보자 생각합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 스스로 살갑게 쓸 수 있다면, 이 이야기를 이루는 사진을 둘레 사람하고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야기 없이 사진을 아무렇게나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 비로소 생각합니다.

 이제 날마다 한 가지 모습을 되새기며 이름붙이기를 해 봅니다. 이를테면 ‘고구마 어린이’라든지 ‘자전거 어린이’라든지 ‘책 어린이’라든지 ‘포대기 어린이’라든지 ‘북치는 어린이’라든지 ‘춤노래 어린이’라든지 ‘가을길 어린이’라든지 하면서. 어차피 이름을 붙인다면, 되도록 글자수를 맞추고 싶습니다. 첫 이름을 ‘고구마 어린이’로 했으니 모두 세 글자로 맞추고 싶은데, ‘책 어린이’에서 그만 걸렸습니다. 이 이름을 붙일 때 미처 생각을 못했으나, ‘책읽는 어린이’로 했다면 꼭 세 글자가 되었을 텐데, 왜 그때에는 이처럼 이름을 못 붙였나 싶습니다.

 예전에는 굳이 이름붙이기를 하지 않고 날짜만 살폈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며 하루 동안 찍는 사진 서른 장이나 쉰 장이나 일흔 장으로 얼마든지 책 하나 날마다 만들 수 있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루에 쉰 장을 찍더라도 쉰 가지 얼굴빛과 몸빛과 삶빛을 담을 수 있는 ‘내 아이 삶 사진’입니다. 이는 우리 집 아이한테서만 보는 모습이 아닙니다. 온누리 어느 집 아이한테서도 엿볼 수 있어요. 아이하고 어버이가 늘 집에만 붙어 있다 하더라도 매한가지입니다. 아이하고 어버이가 날마다 먼길 마실을 다닌다 하더라도 ‘날마다 쉰 가지나 일흔 가지 다 다른 얼굴빛’을 못 볼 수 있어요. 이 나라 저 나라 쏘다닌다 하는 사람이 더 나은 사진을 얻지 않고, 한 나라 조그마한 마을 작은 집에서 산다는 사람이 덜 떨어진 사진을 얻지 않습니다.

 시골마을에서 조그맣게 동물병원을 꾸리는 의사이면서, 당신이 돌보아야 하는 들짐승들 삶을 사진과 글로 묶어 이야기책을 내놓는 다케타쓰 미노루 님이 낸 책 가운데 《아기 여우 헬렌》을 읽으면, “솔개와 함께 생활했던 때를 뒤돌아보면, 그 형제와 형제의 학교 친구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살았던 그 솔개의 일생이 불행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하루하루가 무척이나 즐거웠을 것입니다(34∼35쪽).”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들새로 살아야 할 솔개이지만, (몹쓸 어른들 때문에) 몸이 크게 다쳐 아파 하던 솔개를 마을 아이들이 살려 달라며 껴안고 찾아왔다지요. 이 솔개를 어루만지고 함께 돌보면서 다시금 살아나 훨훨 날도록 도왔다지요. 이렇게 솔개랑 하루이틀 살아가면서 다케타쓰 미노루 님부터 ‘즐겁다’고 느끼는 한편, 들짐승 어루만지는 의사로서 솔개 몸이 ‘즐거워’ 함을 느꼈겠지요. 그야말로 날마다 새롭게 즐거웠으리라 생각합니다. 아기 여우 헬렌을 만나 함께 살아가면서도 “아내에게 안겨 있는 헬렌은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90쪽).” 하고 느끼거든요.

 아이 사진을 날마다 꾸준하게 찍으면서 곰곰이 떠올립니다. 아이가 아빠한테 안기거나 엄마한테 안길 때, 아이는 더없이 포근해 합니다. 할머니한테 안기든 할아버지한테 안기든 이모한테 안기든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는 저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마음을 제 마음으로 느끼어 받아들입니다. 아이 사진을 찍는 아빠 앞에서 아빠가 제 모습을 사랑스레 담아내는 줄 느끼니 스스럼없이 찍혀 줍니다. 나중에는 아이가 아빠 사진기를 쥐어 아빠 모습을 찍어 줍니다. 우리 집 딸아이는 고작 여섯 달이 되었을 무렵부터 아빠 사진기를 갖고 놀았고, 일곱 달이 채 안 되어 첫 사진을 찍었으며, 돌이 안 되었을 때 엄마나 아빠를 찍어 준다며 사진놀이를 즐겼습니다.

 천재라서 돌쟁이조차 아닌데 사진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그예 함께 살아가니까 사진을 제 몸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아빠랑 엄마가 텃밭을 일구거나 너른 논을 돌보며 살면, 아이는 낫이나 호미를 즐겨 들겠지요. 이때에 아이는 돌쟁이조차 아닌데 ‘호미 어린이’가 되어 풀 베거나 벼 베는 어린이 몫을 톡톡히 했겠지요. 그러니까, 때때로 텔레비전 같은 데에 ‘아주 어린 꼬맹이가 자동차 이름을 다 판가름하는 모습’ 따위를 보여줄 때에 이 아이를 일컬어 ‘천재’라느니 무어라느니 떠드는 일은 부질없습니다. 게다가, 어린이한테 영어를 일찌감치 가르치거나 한자를 일찍부터 알려주는 일 또한 덧없어요. 아니, 이런 짓은 아이를 망가뜨립니다. 어느 아이든 아이일 때 무엇이든 쏙쏙 빨아들입니다. 좋은 모습이든 궂은 모습이든 빨아들여요. 빨아들여야 살아낼 수 있으니까요. 빨아들여 제 것으로 삼아야 무럭무럭 자라니까요.

 아이가 어릴 때에는 영어이니 책이니 한자이니 한글이니 따위를 머리에 집어넣으면 안 됩니다.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삶을 어버이 스스로 힘껏 살아내는 하루하루를 곱다시 껴안도록 손을 잡고 이끌어야 해요. 맑은 바람과 싱그러운 하늘과 하얀 구름과 밝은 별을 아이가 가슴에 꼬옥 안도록 거들어야 합니다. 물맛과 밥맛을 깨닫도록 힘쓰고, 손맛과 발맛을 새삼스레 느끼도록 도와야 합니다. 착하지 않으면서 영어를 잘하거나 일본말을 잘한들 무슨 보람이 있나요. 참답지 않으면서 수백 수천 권에 이르는 책을 달달 왼들 어떤 빛이 서리나요. 고운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 아이가 서울대학교이든 하버드대학교이든 첫손 꼽으며 들어간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요.

 아이하고 살아가는 동안 아이는 어버이한테 날마다 다른 빛깔을 베풀어 주고, 어버이는 아이한테 늘 다른 빛무늬를 나누어 줍니다. 주니까 받는 사랑이 아니고,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랑 또한 아닙니다. 살랑살랑 흐르는 사랑입니다.

 노상 느끼는 사랑이니까 노상 느끼는 그대로 사진 한 장 얻고, 노상 느끼는 그대로 사진 한 장 꾸준히 얻다 보니, 나날이 새삼스러운 이야기를 실어 사진을 차곡차곡 그러모읍니다.

 이야기책 《아기 여우 헬렌》을 들춥니다. “헬렌은 한 번도 모래사장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내가 하는 행동은 이상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100쪽).” 여느 여우와 달리, 앞을 보지 못하는 헬렌은 어미를 잃었습니다. 어미 잃은 새끼 여우한테 무엇인가를 사람이 가르치기란 매우 힘듭니다. 그런데 앞을 못 보는 헬렌이라지만, 헬렌은 여느 여우하고 똑같은 여우입니다. 여우는 여우이니까요. 한편, 새끼 여우 헬렌은 구경거리 여우 헬렌이 아닌 서로서로 따사롭고 넉넉히 안아 줄 좋은 살붙이인 여우 헬렌입니다.

 “헬렌은 본래의 귀여운 아기 여우 얼굴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눈망울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습니다(161쪽).” 삶을 함께 누리기에 죽음을 함께 맞이합니다. 슬픔을 같이 나누고 기쁨을 서로 맞아들입니다. 솔개를 돌보든 다람쥐를 돌보든 여우를 돌보든 딱따구리를 돌보든 저마다 다른 짐승들을 저마다 다른 결과 손길로 돌보지만, 모두들 고운 목숨이요 삶임을 헤아리는 손길로 함께 돌봅니다. 이들 짐승들을 다루는 이야기를 글과 사진으로 차곡차곡 엮어야 비로소 동물병원 살림돈을 마련한다는 다케타쓰 미노루 님인데, ‘살림’하는 돈을 얻고자 용쓰던 사진찍기이고 글쓰기였지, 벌어들일 ‘돈’만 생각하며 꾀부리던 사진찍기나 글쓰기는 아니라고 느낍니다. 어제와 오늘이 새롭고, 이 아이와 저 아이가 새로우며, 내 삶과 네 삶이 새롭습니다.

 백 가지 삶을 느끼기에 백 가지 사진을 찍습니다. 백 가지 짐승을 만나기에 백 가지 손길을 뻗어 돌보고자 애씁니다. 백 가지 사진을 찍으며 한 가지로 이어지는 고리를 깨닫고, 백 가지 손길을 뻗는 동안 모두 한결같은 손길일밖에 없다고 알아챕니다. 동물병원이든 사람병원이든, 병원이면서 보금자리이고 삶터입니다. 삶터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사랑과 믿음이 고이 묻어납니다. 이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옮기어 나누는 옛이야기로 남을 수 있고, 글로 적바림해 문학이 될 수 있으며, 사진으로 옮겨 예술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4343.11.11.나무.ㅎㄲㅅㄱ)


― 아기 여우 헬렌 (다케타쓰 미노루 사진·글,고향옥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8.7.10./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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