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여쁜 꽃씨 하나 창비시선 80
서홍관 지음 / 창비 / 198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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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6



제비춤 만나는 새봄

― 어여쁜 꽃씨 하나

 서홍관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89.9.15.



  요즈음 도시에서 태어나는 아이들은 제비를 볼 길이 없습니다. 이제 한국에서 도시로 찾아오는 제비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비는 지난해에 묵은 제 둥지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도시는 끝없이 재개발과 재건축을 할 뿐 아니라, 제비 같은 새가 잡아먹을 애벌레나 날벌레가 사라져요. 자동차와 공장이 지나치게 많고, 풀숲이나 나무숲이 자취를 감추지요. 이런 도시는 제비뿐 아니라 사람이 살기에도 메마르거나 팍팍하기 일쑤입니다.



.. 이제 네가 바라볼 것은 / 늦겨울 파릇하게 자라나는 보리싹과 / 봄날 강언덕에 지천으로 피어나는 / 들쑥무더기 같은 것들이니 ..  (민들레 2)



  제비가 찾아갈 수 없는 도시이지만, 도시는 더 커지기만 합니다. 크기가 줄어드는 도시는 없습니다. 크기를 줄이려 하는 도시도 없습니다. 도시로 몰리는 사람은 끝없이 늘기만 합니다. 도시에 깃든 사람은 도시에서 빠져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한 번 도시에 발을 들였으면, 죽어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도시에만 머물려 합니다.


  사람 아닌 목숨은 바퀴벌레와 모기와 파리를 빼고는 도무지 도시에서 못 살겠다고 하는데, 왜 사람은 도시로 몰리려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사람 아닌 목숨은 바퀴벌레와 모기와 파리를 빼고는 도시에서는 숨이 막혀서 거의 다 죽어 버리거나 미쳐 버리는데, 왜 사람은 도시를 붙잡고 안 놓으려 하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쩌면, 사람도 도시에서 죽어 버리거나 미쳐 버린 탓에 도시를 못 벗어나지는 않을까요.



.. 이 나라에서는 / 세계인의 축제 올림픽을 연다고 / 총경비 2조 4천 4백억원이나 들여서 / 외국인선수들 숙소에는 냉난방과 오락시설까지 갖춰놓고 / 우리 산업근로자들의 작업장에는 / 배기시설 안전설비도 안해놓고 / 수은을 먹건 카드뮴을 먹건 내버려둔다면서요 ..  (송면이가 떠나가요)



  시골에서 살기에 제비를 만나지는 않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예전에는 손으로 짓는 시골일이었으나, 이제는 기계로 만드는 시골 ‘농업’이나 ‘산업’이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시골은 온통 기계투성이에 비닐투성이입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사람 손길을 타는 땅은 좀처럼 만날 수 없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온갖 곳에 농약을 뿌려대니, 사람이 손을 뻗어 흙을 만질 일이 없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마늘이나 파를 뽑을 적에는 손을 쓰겠지요. 그러나 농약투성이 밭뙈기와 논자락을 맨 살갗을 대면서 만지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도 논밭에서 살 수 없고, 개구리와 새도 논밭에서 살 수 없습니다.



.. 들길을 걷노라면 / 찰랑거리는 논물에는 / 물달개비 향기가 좋은데 / 잎잎이 붙은 물잠자리들이 / 달빛에 잠이 깰까 걱정되네요 ..  (넋 건지기)



  서홍관 님이 빚은 시집 《어여쁜 꽃씨 하나》(창작과비평사,1989)를 읽습니다. 시집 이름 그대로 ‘어여쁜 꽃씨’를 그리는 이야기를 묶은 책입니다.


  꽃씨는 참으로 어여쁩니다. 새로운 꽃을 품은 씨앗이니 어여쁠 수밖에 없습니다. 꽃씨처럼 사람씨도 참으로 어여쁩니다. 비록 오늘날 이 지구별에는 전쟁무기가 끔찍하게 넘치고, 바보짓을 하는 정치와 경제와 사회와 교육과 문화와 예술과 과학과 종교가 득실거리지만, 이러한 바보짓을 걷어내어 마음바탕을 읽을 수 있다면, 우리 가슴에는 아름다운 사랑씨가 있는 줄 알아채리라 생각합니다. 아직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바탕을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지구별에 끔찍한 전쟁이 안 멈추리라 느껴요.



..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 총이 없어 도망쳐 다니는 / 우리집 아이가 안돼 보이기도 하고 / 장난감 총을 가졌다고 위협하고 다니는 / 옆집 꼬마가 괘씸하기도 하다 ..  (장난감 총)



  어른들은 스스로 전쟁무기를 만들어서 스스로 손에 쥡니다. 어른들은 전쟁 장난감을 만들어 아이들한테 팝니다. 어른은 참말 서로 죽일 수 있는 전쟁무기를 손에 쥐고, 아이는 놀이로 서로 죽이는 버릇을 일찌감치 몸에 익힙니다.


  남북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지 않는 한국에서는 전쟁무기가 남북에 가득합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니 총부리를 겨눕니다. 서로 아끼려 하지 않으니 탱크와 전투기와 폭탄과 미사일을 엄청나게 만듭니다. 서로 보살피거나 헤아리려 하지 않으니 군대를 키우고, 젊은이는 군대에서 썩도록 내몹니다.



.. 청무우 다발 위에는 청무우눈꽃 / 쌓아놓은 볏단 위에는 볏단눈꽃 / 쓰레기더미 위에는 쓰레기눈꽃 /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탱자나무눈꽃 ..  (눈꽃)



  우리한테 핵무기가 있어야 우리가 느긋하지 않습니다. 우리한테 핵발전소가 있어야 우리가 전기를 잘 쓸 만하지 않습니다. 핵발전소는 핵무기를 만들려고 세우는 시설입니다. 핵발전소가 있어서 핵쓰레기가 나와야, 이 핵쓰레기로 핵무기를 만들어요. 그러니까, 정부에서 핵발전소를 붙잡는 까닭은 군대와 전쟁무기를 붙잡는 까닭과 똑같습니다. 정부에서 군대와 전쟁무기를 없애려 하지 않는다면 핵발전소를 없앨 수 없습니다. 다른 전쟁무기는 그대로 있는데 핵무기만 없앨 수 있지 않아요. 모든 전쟁무기를 한꺼번에 없애려고 해야 비로소 핵무기와 핵발전소를 없앨 수 있습니다.


  더 헤아려 보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우리 보금자리를 아름답게 가꾸려는 마음이 되어 기쁘게 노래할 수 있어야, 비로소 아름다운 손길로 어깨동무를 합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운 마음이 되어 아름답게 노래를 부를 줄 알 때에, 제비는 도시와 시골 곳곳에 기쁘게 돌아올 수 있습니다. 제비가 돌아와서 깃들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마을을 가꿀 노릇입니다.



.. 나라에서는 / 철이네 식구들더러 / 핵우산의 보호 아래 / 편안히 잠들라 했다. // 어느 날 / 큰 나라들이 전쟁을 시작했고 / 서로 단추 몇 개를 누르더니 / 철이네 식구들은 / 곤한 꿈꾸다 사라져버렸고 // 그 후 수십 년 동안 / 그 나라에는 / 먼지만 오래도록 쏟아져내리더니 / 아직껏 풀도 나지 않고 / 새도 울지 않는다고 한다 ..  (핵우산)



  우리 보금자리는 전쟁무기와 군대를 거느리기 좋은 곳이 아니라,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아름다운 곳이 되어야 합니다. 남북녘 어디에서나 제비춤을 맞이하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나 시인이 되고, 누구나 교사가 되며, 누구나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시를 쓰고, 누구나 노래를 부르며, 누구나 삶을 짓는 아름다운 숲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월에 사월꽃을 그리면서 밭자락에 어여쁜 꽃씨를 심을 수 있는 삶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4348.4.12.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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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 속에서 잠자다 창비시선 143
김진경 지음 / 창비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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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0



시와 꿈노래

― 별빛 속에서 잠자다

 김진경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6.2.28.



  잠이 들 적에 즐겁지 않은 날이 없는 채 삽니다. 고작 십 분이나 오 분만 눈을 붙여야 하더라도, 잠이 들 적에는 늘 즐겁다고 여깁니다. 이 일을 마치지 못했건, 저 일을 마무리짓지 못했건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잠이 들 적에는 이곳에 있는 모든 일을 내려놓습니다. 오직 잠 하나만 생각하면서 눈을 감습니다.



.. 밤새도록 소쩍새 울음이 창호지문에 젖는데 불도저 소리가 어둠의 한켠을 꺼내리고 있다 ..  (밤나무를 본다)



  내 삶이 기쁨이면 잠자리에 들면서 기쁜 이야기가 꿈으로 찾아옵니다. 내 삶이 기쁨이 아니라면 잠자리에 들 적에 기쁘지 않은 이야기가 꿈으로 찾아오거나 아무 꿈을 꾸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떠한지 모릅니다. 나는 이렇습니다.


  이러다 보니, 잠자리에 들 적에 아이들과 즐거이 노래합니다. 나로서는 가장 보드라우면서 따스한 목소리가 되어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잠자리에서 두 아이를 왼쪽과 오른쪽에 누여서 늘 자장노래를 부르는데, 내 목소리가 이토록 곱고 맑으며 싱그러운가 하고 놀랍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이 한 해 두 해 자라는 사이 내 목소리는 자장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를 부를 적에도 제법 들어 줄 만합니다. 다만, 들어 줄 만하다 하더라도 훌륭하거나 멋있다고는 여기지 않아요. 나도 이만큼 노래를 부르면서 아이들과 웃고 놀 수 있구나 하고 느낍니다.



.. 가을이 와서 / 노랗게 물들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입니다 ..  (은행나무)



  삶은 늘 꿈대로 이룬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꿈을 꾸는 대로 내 삶이 나아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나 스스로 꿈을 꾸지 않는다면, 내 삶은 다른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합니다. 나 스스로 꿈을 지으려 하지 않으면, 나로서는 내 일을 스스로 찾지 못해요.


  꿈을 꿀 수 있을 때에 내 길을 걷습니다. 꿈을 꿀 수 있기에 내 노래를 불러요. 꿈을 꿀 수 있는 하루이기에 내 사랑을 내 마음속에서 길어올립니다.


  다른 사람 탓을 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내 자랑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내가 나를 추켜세울 일도 없습니다. 나는 그저 내 꿈을 꾸면서 내 삶을 짓고 내 하루를 누립니다.



.. 억지로 술을 마신 날 / 담벼락 밑에 헛구역질을 하다가 / 담장 위로 보랏빛 눈을 뜬 수수꽃다리 ..  (낙타, 수수꽃다리 핀 골목에서)



  김진경 님 시집 《별빛 속에서 잠자다》(창작과비평사,1996)를 읽습니다. 김진경 님은 별을 우러르면서 어떤 꿈을 빌었을까 하고 헤아립니다. 김진경 님이 스스로 바란 꿈은 어느 만큼 김진경 님 삶으로 드러났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빚잔치로 허덕이던 아픔을 이제는 씻으셨을까요. 아이와 놀지 못한 채 아이를 시무룩한 얼굴로 유치원에 보내던 앙금을 이제는 씻으셨을까요. 가난도 사회운동도 이제는 이럭저럭 말끔하게 털거나 씻으셨을까요.



.. 어릴 적 빚 받으려는 아주머니들 학교로 찾아와, 수업 대신에 등나무 아래서,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는 어머니의 행방을 모른다거니, 맹랑한 놈이라거니, 사람의 소음에 지쳐 귀를 닫으면 멀리서 뻐꾹새소리 들렸다 ..  (칡꽃)



  아픔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픔은 좋지 않습니다. 앙금이나 얼룩이나 생채기는 나쁘지 않아요. 그렇다고 앙금이나 얼룩이나 생채기가 있어야 좋지 않습니다.


  아픔은 아픔일 뿐입니다. 앙금은 앙금일 뿐이에요. 내가 걸어가려는 길에서 겪거나 부딪히거나 만나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멀리할 까닭도 가까이할 까닭도 없습니다. 그저 가만히 바라보면서 내 꿈을 짓고 내 삶을 가꾸면서 내 넋을 사랑하면 됩니다.



.. 따뜻한 봄날 아침 철책 따라 길을 걷다가 병사에게 지명의 유래를 물으니 모른다 한다. 담배를 비벼 끄고 다시 찔러총을 하는 병사들의 군홧발에 밟히는 노란 민들레 ..  (안인포구)



  밥을 짓고 빨래를 합니다. 이불을 말리고 아이들 손발을 씻깁니다. 밥을 차려서 아이들과 곁님을 먹이고, 부엌과 마루를 치웁니다. 온갖 일을 건사하느라 하루가 바쁩니다. 모든 일을 돌보느라 눈알이 빙그르르 돕니다. 그러나, 이런 일과 저런 살림을 맡으면서 노래를 하고 웃으며 춤을 춥니다. 참말 나는 밥을 짓고 국을 끓이면서 춤을 추어요.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가 춤추고 노래하면서 밥짓는 모습을 늘 지켜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가 빨래하면서 노래하는 모습을 언제나 바라봅니다. 우리 아이들은 아버지가 잠자리뿐 아니라 자전거마실을 할 적에도 으레 노래하는 모습을 노상 봅니다.


  이리하여, 아이들은 늘 노래를 불러요. 놀면서도 부르고, 잠자리에서 아버지가 목이 아파서 노래를 그만 부르면 아이들이 뒤이어서 부릅니다. 나는 아이들을 재우려고 자장노래를 부르지만, 요새는 내가 아이들 노래를 들으면서 먼저 곯아떨어지기 일쑤입니다.



.. 봉천동 가파른 계단 / 유치원 종일반에 가기 싫어 칭얼대는 / 아이를 업고 내려간다 ..  (한울이 도깨비 이야기)



  삶은 재미있습니다. 스스로 재미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되기에 재미있습니다. 삶은 슬픕니다. 스스로 슬프다고 여기는 마음이 되기 때문에 슬픕니다.


  어떤 삶으로 나아가고 싶은지 스스로 생각해야 해요. 어떤 사랑으로 삶을 짓고 싶은지 스스로 돌아보아야 해요. 어떤 생각을 마음에 심으면서 삶을 사랑스레 노래하고 싶은지 스스로 헤아려야 합니다.


  꿈이 되고 노래가 되는 삶입니다. 꿈과 노래를 고스란히 삶으로 드러내는 하루입니다. 우리 함께 시를 써요. 내 이야기를 시로 쓰고, 내 이야기를 이웃과 나누어요. 내 이야기를 노랫가락에 담아서 아이들한테 물려주어요.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이 땅에 까만 씨앗으로 심어요. 4348.4.10.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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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창비시선 169
박영근 지음 / 창비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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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5



눈 감은 하루, 눈 뜨는 모레

―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박영근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7.11.20.



  모처럼 아침에 해가 납니다. 아침에 뜨는 해를 바라보면서 두 팔을 활짝 벌립니다. 햇볕과 햇빛과 햇살을 골고루 이 몸에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온갖 멧새가 부산스레 날아다니면서 먹이를 찾는 아침에 우리 집 뒤꼍에 서서 해바라기를 합니다.



.. 안개는 제가 견딜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붙잡고 / 죽음의 기억까지 녹슬게 하고, / 우리는 찌그러진 반합통 같은 얼굴로 / 지난밤의 총탄이 박혀 있는 나무둥치와 / 몇 마리 오소리들을 보고 돌아서곤 했다 / 살아 붙잡을 것은 물소리밖에 없었던 / 내 마음의 대암산 / 이십년이 흘러도 나는 떠나지 못하고, / 귀울음으로 남아 시시때때로 울려오는 선무방송 ..  (대암산)



  아침에 해바라기를 하면서 뒤꼍을 걷다가 생각합니다. 오늘은 그동안 밀린 빨래를 신나게 해야겠구나. 아이들 옷을 모두 새로 갈아입힌 뒤 기운차게 빨래를 해야겠구나.


  볕이 나는 하루이니, 낮에는 이불을 내다 널 수 있을 테지요. 볕이 고운 하루라면, 아이들과 들마실을 다녀올 수 있겠지요. 엊저녁에 아이들과 자전거를 타고 들마실을 하는데, 바야흐로 논마다 유채꽃이 무르익으려 하면서 꽃내음이 짙습니다. 날마다 유채꽃이 곱게 올라올 테고, 들을 가득 채운 유채꽃물결이 우리 몸을 감싸면 새로운 봄빛으로 물들 만하리라 느낍니다.



.. 철조망 녹슬어가는 높은 담장 안에 / 비무장한 나무들이 / 새 둥우리 하나 지키고 있다 ..  (용산에서 1)



  해가 있기에 삶이 있습니다. 해가 없으면 삶이 없습니다. 바람이 불기에 삶이 있습니다. 바람이 없으면 숨이 막혀서 죽으니, 이때에도 삶이 없습니다. 비가 내리기에 삶이 있습니다. 비만 내리면 그예 축축하게 젖고 말지만, 꾸준하게 비가 내려 주어야 냇물이 흐르고 샘물이 솟습니다. 해와 바람과 비가 함께 있으니 흙이 기름지고, 풀과 나무가 자랍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별에 사람이 태어나서 삶을 가꿀 수 있습니다.



.. 오래 떠돌던 마음이 빗소리 속에서 집을 짓는다 // 새 한마리 / 배롱나무 가지 끝에서 / 비 그친 하늘 / 젖은 허공 한뼘을 물고 있다 ..  (빗소리)



  박영근 님 시집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창작과비평사,1997)를 읽습니다. 이 시집이 나올 무렵, 나는 강원도 양구에 있는 군대에서 볼볼 기어다녔습니다. 박영근 님은 대암산이라고 하는 곳을 시에 쓰는데, 나도 대암산이라는 곳에서 총을 들고 밤을 새야 한다든지, 삽을 들고 땡볕을 쬐면서 길을 다져야 했습니다. 비가 오면 물골을 내야 했고, 눈이 오면 눈을 퍼서 차곡차곡 쌓아야 했습니다.



.. 꽃 이운 자리에서 / 새까맣게 익은 꽃씨가 / 바람 속으로 / 떨어지고 있다 ..  (입추)



  사회나 정치에서는 군대가 ‘나라를 지킨다’고 말합니다. 군대에 들어가는 사내도 이 말에 젖어들기에, 휴가를 나오거나 전역을 하면 ‘군인이 나라를 지킨다’고 말한다든지 ‘내가 나라를 지킨다’고 읊기 일쑤입니다. 그러나, 군인은 나라를 지키지 않습니다. 군인은 제가 깃든 군부대 자리를 지킬 뿐입니다. 제자리에 맞게 착착 끼워맞추는 톱니바퀴 구실을 하면서 그곳에서 아무 생각을 하지 않는 허수아비 구실을 합니다. 군인이 되는 젊은 사내는 ‘머릿속에 모든 생각을 지운’ 뒤, 나라(중앙정부)에서 시키는 짓을 고스란히 따라하는 허수아비나 꼭둑각시가 되어 사회로 돌아갑니다.


  이리하여, 사회에서는 ‘군대 마친 사내’를 반깁니다. 왜 반길까요? 군대 마친 사내는 군대에서 계급과 신분과 위계질서에 길들었기 때문에, ‘웃사람이 시키는 짓’을 척척 잘 따르는 허수아비나 꼭둑각시 구실을 잘 합니다. 사회 조직에서는 ‘군대 마친 사내’한테 ‘군 가산점’을 주고 싶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 조직이 맡은 몫이란 ‘사람을 톱니바퀴처럼 짜맞추어서 위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도록 얽매이는 일’이니까요.



.. 오밤중 두시 무렵 / 짓다 만 신축공사장 빈터 / 취한 내가 / 허리도 팔다리도 꺾고 / 쭈그리고 앉아 / 홀로 사위어가는 모닥불을 쬔다 ..  (모닥불)



  노동자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노동자를 가리켜 ‘일꾼’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참말 그렇지요. 일을 하는 사람이 일꾼이지, 노동을 하는 사람이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한국말과 한자말로 서로 갈리는 대목이 있기도 할 테지만, 사회 얼거리를 보면, 참말 노동자는 일꾼이 못 되기 일쑤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노동자 자리에 서는 사람은 ‘공장 톱니바퀴’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자 자리에서는 ‘사용자가 시키는 일만 똑같이 되풀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무원이나 교사도 ‘노동자’나 ‘근로자’는 될 테지만, 공무원이나 교사를 가리켜 ‘일꾼’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공무원과 교사도 정부에서 시키는 대로 할 뿐, 스스로 ‘새로운 삶을 짓는 일’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셔요. 노동자는 공장에서 톱니바퀴입니다. 노동자는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을 만들거나 지을 수 없습니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이 팔아치워서 더 많은 돈을 긁어모을 수 있는 공산품’을 똑같이 꿰어맞추는 몸짓으로 지내야 할 뿐입니다. 사용자가 노동자한테 바라는 것은 ‘몸뚱이’일 뿐, ‘머리’가 아닙니다. 사용자는 노동자가 ‘머리 쓰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 바람에 / 구름 속 되살아나 / 비껴오는 / 한오라기 햇살 // 마저 그리움도 벗고 / 홀로 가거라 / 죽어 / 한점 비유도 없이 / 허공에 ..  (尹金伊)



  노동자가 노동자로만 남으려 한다면 노동자한테는 아무 삶이 있을 수 없습니다. 노동자는 ‘사용자가 우리한테 붙이려 하는 이름인 노동자’라는 허울을 벗고 ‘스스로 삶을 짓는 일꾼’이라는 이름을 손수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사람이거든요. 우리는 사랑스레 삶을 찾고, 아름답게 일을 찾아야 합니다. 돈을 버는 회사 조직이 아니라, 삶을 짓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름(직책이나 지위)을 얻는 톱니바퀴가 아니라, 사랑을 가꾸는 하루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떠야 합니다. 이제부터 다 함께 눈을 떠서 이 지구별을 환하게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4348.4.8.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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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는 나비 문학과지성 시인선 82
김정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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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3



비바람에 새를 부르는 나무

― 다시 시작하는 나비

 김정한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9.11.20.



  어제 낮부터 비바람이 드세게 몰아칩니다. 큰나무도 줄기가 휘청휘청 흔들릴 만큼 바람이 불면서 빗줄기가 굵습니다. 이런 비바람을 느끼며 마당에 서서 가만히 구름과 하늘을 살펴보는데, 온 마을 참새가 우리 집으로 모여듭니다. 이 참새들이 왜 우리 집으로 모여드는가 하고 궁금해서 지켜봅니다. 참새들은 우리 집 마당에 선 커다란 후박나무로 모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그렇습니다.


  참새처럼 조그마한 새는 이 비바람에 날려갈 수 있습니다. 비바람을 그을 수 있을 만한 자리를 찾아보았겠지요. 그런데, 마을에 큰나무가 없어요. 우리 마을 다른 집을 보면, 마당에 나무를 건사하는 집이 없습니다. 마을 밭이나 논에도 나무 한 그루조차 없어요. 가끔 감나무가 한둘 있더라도 가지를 죄 칩니다. 열매만 더 얻으려고 온갖 나무가 다 줄기가 싹둑 잘리고 가지는 앙상하게 끊어집니다.



.. 네 곁에서 / 내 모가지가 길게 자란다. / “그늘에서 꽃이 피는 거야.” / 내가 장난말을 한다. / 네가 쓸쓸하게 웃고 / 손가락을 조금 움직인다 ..  (쓸쓸한 몇 편의 사랑 노래)



  우리 집 후박나무에 모여든 참새는 모두 몇 마리인지 모릅니다. 아무튼 대단히 많습니다. 이 참새들은 후박나무에 모여서 찰싹 달라붙는지 촘촘히 앉아서 버티는지 모릅니다. 다만, 참새가 들려주는 엄청난 노래를 내내 듣습니다. 바람소리와 빗소리 사이에 어우러지는 재미난 봄노래를 듣습니다. 이 아이들은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멎으면 다시 이 후박나무를 떠나 이곳저곳 나들이를 다니겠지요.



.. 엄마…… / 응? / 그곳은 어떤 곳이유? …… 사뭇 다르우? …… / 글쎄, 무어랄지……형식의 저 너머……안개 무리랄지…… / 우리가 생각나서 온 거유, 엄마? …… / …… 낮은 소리의 웃음, 작게, 아주 작은 메아리 같은 …… / 우리가 보고 싶었수? / 그래, 하지만 그곳에선 그 때문에 시달리지는 않는단다 ..  (죽은 엄마에 의한 엄마의 교정)



  새한테는 나무가 꼭 있어야 하는 줄 안 지 얼마 안 됩니다. 몇 해 앞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그동안 내가 살던 집 둘레에는 나무가 거의 없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집 앞이나 옆이나 둘레에 다른 집이 촘촘하게 있을 뿐, 나무가 깃들 틈이 없습니다.


  사회에서는 해마다 사월 오일이 나무 심는 날이라고 외치지만, 막상 ‘집 둘레’에 나무 심을 땅이 없습니다. 나무 심을 빈터조차 없는데, 사회나 정치에서 아무리 ‘나무 심자!’고 떠든들 나무를 심을 수 없습니다.


  나무를 어디에 심어야 할까요? 내 보금자리 둘레에 나무를 못 심는다면 나무를 어디에 심어야 할까요? 내가 돌보지도 못할 머나먼 곳에 덩그러니 심고 내버려 두면 나무가 알아서 잘 자랄까요?



.. 돌이거나 풀이거나 흔들리는 물바가지이거나 떡갈나무에 매인 노란 리본이거나 한 나의 詩는 당신을 꿈꿉니다. 당신에게 가는 것이 나의 궁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겨울입니다. 그러나 얼어붙은 겨울의 연못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  (나의 詩-그대에게 가기 위하여)



  나무는 사람 손길을 안 받아도 스스로 씨앗을 떨구어 새로운 나무를 키웁니다. 나무는 사람이 굳이 안 심어 주어도 스스로 어린나무를 돌보면서 숲을 이룹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애써 나무를 따로 심을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은 그저 지켜보면 됩니다. 오늘날 공무원이나 전문가라는 이들이 ‘숲을 가꾸겠다’면서 나무를 심는다거나 가지치기를 하는 짓은 모두 나무를 망가뜨리거나 숲을 어지럽히는 짓입니다.


  왜 그러할까요? 나무는 즈믄 해를 삽니다. 나무는 두 즈믄 해나 세 즈믄 해를 삽니다. 사람은 기껏 백 해조차 못 삽니다. 백 해조차 못 사는 사람으로서 어찌 즈믄 해를 사는 나무를 돌보겠다면서 어설피 손길을 뻗을까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 스스로 즈믄 해쯤 살아내면서 ‘과학과 이론을 갈무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면, 나무를 심든 돌보든 숲을 가꾸든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제대로 쌓은 과학이나 이론조차 없이 어설피 나무를 건드리는 사람들입니다. 도시 바깥에 나무를 심는다고 하더라도 몇 해 뒤에 솎아내기를 한다느니 고속도로를 낸다느니 송전탑을 박는다느니 하면서 다시 나무를 밀어 버립니다. 도시에서는 재개발을 한다면서 나무를 아무렇지 않게 베어서 죽입니다.



.. 내 육체가 나를 속였다 /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은 / 육체의 시간에게 잡아먹혔다 / 존재하는 일이 나를 / 탕진시켰다 젊음이 ..  (詩와 힘)



  김정란 님 시집 《다시 시작하는 나비》(문학과지성사,1989)를 읽으면서 문득문득 나무가 떠오릅니다. 나무와 삶이 떠오르고, 나무와 사람이 떠오릅니다.


  나비를 이야기하는 시를 읽으면서 왜 나무가 떠오를까요. 아무래도, 나비는 나무가 우거진 숲이나, 나무가 함께 있는 들에서 싱그럽게 깨어나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나무가 없는 곳에 나비가 없습니다. 나무가 짙푸르게 그늘을 드리워 주는 곳이 아니라면 나비가 없습니다.


  나비와 나무는 한삶입니다. 나비와 나무는 한넋입니다. 이러면서, 사람과 나비도, 사람과 나무도, 언제나 한마음이요 한꿈이면서 한사랑입니다.



.. 눈이 내리고, / 우리는 우리의 영혼이 맨발로 / 달려가는 소리를 듣는다. // 태초에, 우리가 꿈이었을 때, / 우리가 애벌레의 날개이며, 봄의 움이며, / 神의 숨결이었을 때, / 그때,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살거렸듯이 ..  (눈)



  비바람에 새를 부르는 나무처럼, 나와 너는 어렵고 힘든 일이 있으면 서로서로 부릅니다. 맑은 날에도 새를 부르는 나무처럼, 나와 너는 기쁘거나 즐거운 잔치가 있으면 서로서로 부릅니다.


  어깨를 다독이려고 부릅니다. 어깨를 겯고 노래할 마음으로 부릅니다. 따스히 얼싸안으려고 부릅니다. 포근히 감싸면서 신나게 춤을 추려고 부릅니다.


  삶이 노래로 피어나고, 삶이 꽃처럼 활짝 터집니다. 삶이 춤사위로 드러나며, 삶이 나비 날갯짓처럼 눈부시게 날아오릅니다.



.. 나는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아니 우리는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 그리고 비로소 나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나는 / 처음으로 알아차렸다, 그들이, 우리가, 똑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을. / 넌 누구니……누군가가 대답했다…난 나야…다른 누군가가 / 또 말했다…난 나야…우리는 똑같이 말했다, 난 나야. / 우리는 태아처럼 물 위에서 퐁당거리고 놀았다. / 하지만 우리 중의 누군가가 갑자기 말했다. / 우리들의 엄마도 다 엄마야? 그래? 엄마는 어때? 부정할 수 있어? ..  (엄마 버리기, 또는 뒤집기)



  나비는 늘 새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늘 새로 태어납니다. 나무는 늘 새로 태어납니다. 새와 벌레는 늘 새로 태어납니다.


  새로 태어나는 줄 느끼는 숨결은 그야말로 새로운 빛과 노래로 아름답습니다. 새로 태어나면서도 새로 태어났다고 느끼지 못하는 숨결은 그야말로 슬픔과 아픔만 가득한 채 스스로 아름다움을 피워내지 못합니다.


  번데기를 벗으면서 새로 태어나는 나비처럼, 나는 내 슬픔과 아픔을 훌훌 벗으면서 나비와 같이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데기에 갇힌 채 그 모습 그대로 잠들 수 있고, 내 슬픔과 아픔을 꽁꽁 가둔 채 그대로 죽음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 나는 줄거리를 참을 수 없다. 나는 일상을, 역사를 참을 수 없다. / 즉 나는 발단과 결말을, 원인과 결과를, 요컨대 얽힘을 참을 수 없다 ..  (소설을 읽지 않는 이유, 또는 막가는 나의 詩法)



  어느 길로 가든 내 삶은 내가 짓습니다. 아름다운 삶도 내가 짓고, 안 아름다운 삶도 내가 짓습니다. 사랑도 내가 짓고, 사랑 아닌 몸짓도 내가 짓습니다. 무엇을 짓든 늘 짓습니다. 어느 때에는 좋거나 나쁜 틀을 지을 테고, 어느 때에는 옳거나 그른 틀을 지을 테지요. 틀짓기도 ‘짓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삶짓기도 ‘짓기’ 가운데 하나예요.


  날갯짓을 하려면 삶을 지어야 합니다. 날갯짓을 하면서 새롭게 바람을 가르면서 파란 하늘과 하나가 되려면 사랑을 지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 꿈을 심으면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을 푸른 숨결로 갈마들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눈을 뜹니다. 4348.4.5.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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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문학과지성 시인선 81
이창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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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82



시를 읽는 날

―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

 이창기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9.5.30.



  아이들과 읍내로 저자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제비를 봅니다. 나는 올해 첫 제비를 사월 삼일에 봅니다. 아직 우리 집으로는 찾아들지 않았으나, 다른 마을에는 찾아들었구나 싶고, 바다와 가까운 우리 마을보다 읍내에 더 일찍 찾아왔네 싶어서 놀랍니다. 그러나, 가만히 헤아리니 신안 같은 섬마을에는 이른 삼월에도 제비가 찾아듭니다. 완도나 진도도 퍽 일찍 제비가 찾아들리라 생각합니다.


  나는 울음소리만 들어도 ‘아, 제비네.’ 하고 알아챕니다. 울음소리가 나는 쪽으로 홱 고개를 돌리면 아주 잽싼 날갯짓으로 바람을 휙 가르면서 제비가 벌써 저만치 날아갑니다.


  아이들은 “제비? 어디? 어디?” 하며 두리번거리지만, 제비는 벌써 저쪽으로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래도 찌익짹 찌익짹 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니, 아이들도 제비가 돌아왔구나 하고 알아챕니다.



.. 앨범 속에서뿐이다 / 내가 벌거벗고 사진을 찍는 것도 / 검은 교복을 입고 버짐처럼 웃는 것도 / 십여 년 전에 죽은 털이 짧은 벙어리 개를 / 끌어 안고 하모니카를 부는 저녁도 모두 ..  (앨범 속에서)



  보려고 하는 사람은 늘 봅니다. 보려고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늘 마음으로 먼저 알아채거나 느낍니다.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늘 못 봅니다. 보려고 하는 마음이 아니기에 늘 코앞에서 마주하더라도 하나도 안 알아채거나 못 느낍니다.


  내가 제비 날갯짓을 알아채는 까닭은 늘 제비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집에 깃드는 제비를 언제나 눈여겨보기 때문이고, 마음 가득 제비를 그리기 때문입니다. 꾀꼬리를 늘 생각하면 꾀꼬리 노랫소리나 날갯짓을 보며 바로 알아챕니다. 뻐꾸기를 늘 생각하면 뻐꾸기 노랫소리나 날갯짓을 보며 바로 느낍니다.


  우리 집 작은아이는 늘 자동차를 생각하기 때문에, 마루에서 놀다가도 군내버스가 마을 어귀로 지나가는 소리가 나면 “와, 버스다! 버스 지나간다!” 하고 알아챕니다. 택배 짐차가 대문 앞으로 지나가거나 우리 집 앞에 서면 “택배 차다!” 하고 찻소리만으로도 알아채요.



.. 해가 지는 속도로 길을 걷는다 / 내 사랑하는 발바닥아 ..  (비상구를 향해 날아가다)



  이창기 님 시집 《꿈에도 별은 찬밥처럼》(문학과지성사,1989)을 읽습니다. 꿈에서도 별을 읽고, 삶에서도 별을 읽습니다. 별을 보려고 하기에 내 마음속에 온갖 별이 가득 뜹니다. 별을 느끼려고 하기에 내 가슴속에 갖은 별이 피어납니다.


  그리고, 꿈을 꾸려 하기에 잠을 자면서도 꿈을 꾸고, 눈을 뜨며 지내는 아침저녁으로도 언제나 꿈을 꿉니다.


  마음에 따라 살고, 마음에 지은 생각대로 하루를 열어요. 마음이 있기에 일을 하거나 놀이를 하고, 마음에 따라서 하루가 흐릅니다.



.. (선데이서울은 가명으로 간통이나 이별을 하고 / 투데이서울은 야구를 하고 책임자는 처벌된다) ..  (이상한 나라의 노래)



  사람들은 별을 으레 밤에만 봅니다. 낮별을 보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그러나 별은 밤낮으로 우리한테 찾아옵니다. 별은 하루 내내 우리를 지켜봅니다. 그저 우리 몸뚱이는 밤에만 별을 환하게 알아챌 뿐이에요. 먼먼 온별누리에서 우리를 지켜보는 별이지만, 우리는 고작 밤에만, 게다가 밤에도 전깃불을 더 밝게 비추어 아예 별을 잊어버리는 하루로 지나갑니다.


  별을 잊기에 삶을 잊지만, 별을 잊는 줄 모르기에 삶을 잊는 줄 모릅니다. 별을 못 보기에 삶을 못 보지만, 별을 못 보는 줄 모르니까 삶을 못 보는 줄 몰라요.



.. 나는 우리 집 개를 해피라고 부른다 / 새끼를 다섯 마리나 난 해피 / 검둥 개와 누런 개 슬픈 개와 추운 개 배고픈 개 새끼 / 다섯 마리의 어미를 해피라고 / 부른다 밥을 먹고 피똥을 싸는 ..  (해피 엔드)



  나는 우리 집에 얼마나 많은 새가 깃들어 지내는지 잘 모릅니다. 아무튼 온갖 새가 많이 삽니다. 아침저녁으로 온갖 새소리를 듣습니다. 하루 내내 집안과 집밖에서 숱한 새노래를 듣습니다.


  아이들도 이 소리와 노래를 함께 듣겠지요. 귀로도 듣고 마음으로도 듣겠지요. 눈으로도 보고 마음으로도 보겠지요. 가슴으로도 느껴, 마음 가득 기쁨을 채우겠지요.


  따로 시집을 펴야 시가 흐르지 않습니다. 눈을 떠서 새를 볼 수 있고, 별을 볼 수 있으며, 하늘을 볼 수 있으면 모두 시입니다. 굳이 시집을 장만해서 읽어야 시가 흐르지 않습니다. 귀를 열어 노래를 들을 수 있고, 귀를 활짝 열어 소리를 들을 수 있으며, 귀를 모두 열어 숨결을 들을 수 있으면, 우리 삶은 언제나 노래입니다.



.. 외상술을 마시고 화장실에서 미란다를 먹고 온 골목의 아가씨는 / 입가에 하얀 분말을 묻힌 채 트림을 하며 미련없이 멸치대가리를 / 떼어내어 한쪽 모서리에 가지런히 쌓아갔다 간간이 ..  (여행 보고서―K市에서)



  밤이 깊습니다. 큰아이가 스스로 일어나서 쉬를 가립니다. 다시 제자리에 눕습니다. 이불깃을 여밉니다. 이 아이가 밤오줌을 가리기까지 얼마나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지난날이 딱히 떠오르지 않습니다. 오늘 내가 떠올리는 삶은 오늘 이 아이가 보여주는 몸짓입니다. 오늘 함께 누리는 삶을 바라보고, 오늘 함께 짓는 삶을 헤아리며, 오늘 함께 사랑하는 삶을 느낍니다.


  까르르 웃는 몸짓이 노래이면서 시이고 삶입니다. 밥을 끓이는 소리가 노래이면서 시이고 삶입니다. 등허리를 펴려고 토닥토닥 두드리다가 자리에 눕는 하루가 노래이면서 시이고 삶입니다. 들풀을 뜯어 밥상머리에 나란히 둘러앉아 냠냠 짭짭 먹는 손길이 노래이면서 시이고 삶입니다. 우리 삶은 늘 모두 노래이면서 시입니다. 4348.4.4.흙.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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