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즐거운 산지니시인선 11
표성배 지음 / 산지니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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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7



고요히 누리는 기쁜

― 은근히 즐거운

 표성배 글

 산지니 펴냄, 2015.4.20.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립니다. 비가 와도 자전거를 타고 가야 할 곳이 있으니 자전거를 달립니다.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갈 수 있지만, 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버스가 들어올 때까지 기다릴 수 없기에, 빗줄기를 가로지르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아이들은 버스를 타든 자전거를 달리든 나들이를 가면 기뻐하니,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달립니다.


  왜 굳이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려야 했을까요. 우체국에 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왜 비가 멎은 이튿날 가지 않고 비가 오는 날에 가야 할까요. 날짜에 맞추어서 보내야 하는 편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가방에 편지를 담고, 작은아이는 수레에 태우고, 큰아이는 비옷을 입고 장갑을 낀 손으로 샛자전거에 앉습니다. 우리는 셋이서 빗길을 자전거로 천천히 하느작하느작 달립니다.



.. 우체국 가자 / 좀 멀다 싶으면 자전거라도 타고 가자 / 우체국 가는 길 새로 생긴 우체통 있어도 / 그냥 우체국 가자 ..  (흑백사진)



  두 아이와 비를 맞으면서 자전거를 타는 일은 드뭅니다. 아마 한 해에 한두 차례쯤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어리니 빗길 자전거를 잘 안 타기도 하지만, 굳이 비오는 날까지 자전거를 달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비가 오는 날에 자전거를 달리면 비를 맞으면서 빗소리를 듣고 빗물내음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고 나도 혼자 살던 지난날에는 비가 오는 날에 퍽 자주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아니, 나는 혼자 살림을 꾸리며 살던 예전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몰아치나 벼락이 떨어지나 씩씩하게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비를 잔뜩 맞은 나머지 멈추개가 망가진 날에도, 비를 여러 시간 맞고 자전거를 달리느라 손가락이 얼어붙은 날에도, 나 스스로 나한테 ‘너 참 씩씩하구나’ 하고 말하면서 자전거를 달렸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니, 나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전거를 익혔기에, 자전거를 탈 적에 날씨를 안 가리는구나 싶습니다. 신문배달은 한 해 내내 합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신문을 돌려야 합니다. 날이 푹푹 찌든 모질게 춥든 신문을 돌려야 합니다. 언젠가 비가 억수처럼 쏟아져서 가슴께까지 빗물이 찬 적이 있는데, 신문이 젖지 않도록 비닐로 꽁꽁 싸매고 머리에 짊어지면서 물길을 자전거를 헤치면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그러니까, 신문배달을 하는데 뒤에서 갑자기 자동차가 나를 들이받고는 뺑소니를 치느라 손목과 팔꿈치가 부러진 뒤에도, 아픈 손과 팔에 붕대를 감고 자전거를 달려서 신문을 돌렸습니다.



.. 학생과 선생 사이처럼 빚쟁이와 빚꾸러기 사이처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처럼 의사와 환자 사이처럼 사이에 사랑 하나 머물지 못해 진지하다 그런데 시마저 진지하기만 하면 이 사이를 어떻게 좁히느냐며 시 좀 재미있게 쓰잔다 ..  (헐렁했으면 좋겠다)



  표성배 님 시집 《은근히 즐거운》(산지니,2015)을 읽으면서, 표성배 님이 오늘 이곳(표성배 님 삶자리)에서 누리는 즐거운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이러면서 내가 오늘 이곳에서 누리는 즐거운 노래를 헤아립니다.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 가운데 ‘자전거’가 나오는 싯말이 있기에, 아련하게 떠오르는 내 신문배달 삶을 되새기면서, 어쩜 그때 그렇게 일하면서 살았을까 하고 빙그레 웃습니다. 내 자전거 바구니에서 신문을 몰래 한 부씩 훔쳐가던 사람들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한겨울에 길바닥이 꽁꽁 얼어붙은 날 가파른 내리막길에서 안 미끄러지려고 용을 쓰던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눈이 너무 쌓인 겨울에 골목동네 오르막길을 자전거로 끌고 올라갈 수 없어서, 자전거는 아래쪽에 두고 신문을 옆구리에 낀 채 오르막길을 깊은 새벽에 엉금엉금 기어서 올라간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장마가 이어지는 어느 날, 지국장님 반지하집에 물이 차오른다면서, 신문배달을 마치기 무섭게 옷장이며 살림이며 빼내어 신문지국으로 나르던 일을 떠올리면서 웃습니다.


  우리 삶은 언제나 노래입니다. 슬픈 노래도 있고 기쁜 노래도 있습니다. 아픈 노래도 있고 웃음이 터지는 노래도 있습니다. 이 노래이기에 나쁘지 않고 저 노래이기에 좋지 않습니다. 이 노래만 부를 수 없고, 저 노래는 귀를 막을 수 없습니다.



.. 바람이 있으면 하면 바람이 있었고 // 햇볕이 있으면 하면 햇볕이 있었는데 // 어디 따로 눈 둘 곳 찾지 못해 오늘은 자꾸 멀뚱하다 ..  (장마 탓이다)



  바람이 붑니다. 내가 바람을 불렀으니 나한테 바람이 붑니다. 바람이 멎습니다. 내가 바람을 바라지 않으니 나한테 바람이 불지 않습니다.


  꽃이 핍니다. 내가 꽃을 바라기에 꽃이 핍니다. 꽃이 안 핍니다. 내가 꽃을 안 바라니까 꽃이 안 핍니다.


  그러면, 군사독재정권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내가 이런 것을 바랐기에 군사독재정권이 생겼을까요? 전쟁과 핵무기 따위는 무엇일까요? 이런 것도 내가 바란 탓에 생겼을까요?


  나는 사랑과 평화만 바라보려고 하지만, 자꾸 전쟁과 핵무기 따위가 눈에 어른거립니다. 나는 꿈과 노래를 어루만지려고 하지만, 자꾸 따돌림과 괴롭힘 따위가 눈에 밟힙니다.



.. 평생을 기계와 같이 사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이고지고 사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위해 밥을 하고 물을 끓이는 사람 // 평생을 기계를 위해 아이를 낳고 기르는 사람 ..  (기술자)



  기뻐하는 이웃이 있고, 슬퍼하는 이웃이 있습니다. 노래하는 이웃이 있고, 노래를 잊거나 빼앗긴 이웃이 있습니다. 눈물짓는 이웃이 있고, 웃음을 그치지 않는 이웃이 있습니다. 잔치를 누리는 이웃이 있고, 배고파서 허덕이는 이웃이 있습니다.


  책을 많이 읽은 이웃이 있고, 책 한 권조차 모르는 이웃이 있습니다. 술독에 빠진 이웃이 있고, 술 한 방울 입에 안 대는 이웃이 있습니다. 늘 웃는 이웃이 있으나, 늘 아무 낯빛이 없는 이웃이 있습니다.


  부드럽고 맑은 말씨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말끝마다 온갖 거친 막말을 섞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밥을 차리는 어버이가 있고, 얼렁뚱땅 끼니를 때우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입시지옥에 휘둘리며 아픈 푸름이가 있고, 학교를 안 다니면서 제 꿈을 스스로 찾으려는 푸름이가 있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 다 다른 노래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이야기가 자랍니다. 다 다른 삶에서 다 다른 시가 한 줄씩 흐릅니다.



.. 솔숲에 가면 솔바람 불고요 / 강가에 가면 강바람 부는데 / 공단에는 무슨 바람 불까 / 가슴만 두근거리네요 ..  (바람)



  시집 《은근히 즐거운》을 차근차근 읽습니다. 빗길을 아이들과 자전거로 달리고 나서 몸을 씻고 빨래를 한 뒤에 읽습니다. 아이들한테 저녁을 차려 주고 나서 기지개를 켜다가 등허리를 펴려고 자리에 살짝 누운 뒤에 읽습니다. 몸이 뻑적지근해서 몇 줄 읽다가 어느새 곯아떨어집니다. 삼십 분쯤 눈을 붙였을까요. 아이들이 저희끼리 잘 노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깹니다. 살짝 누웠더니 허리를 펼 만합니다. 두 아이를 하나씩 옆구리에 끼고 방에서 빙글빙글 돕니다. 마당으로 나가서 두 손을 잡고 휘휘 돌립니다. 우리 집 마당에 선 후박나무 가지까지 번쩍번쩍 들어올리거나 하늘 높이 던지고서 받습니다.


  개구리가 노래하고, 사이사이 풀벌레가 노래합니다. 낮새는 고이 잠들었고, 밤새가 일어나서 노래합니다. 아이들이 짓는 웃음은 밤노래가 되어 저 먼 별까지 퍼집니다. 저 먼 별은 우리 집으로 고운 빛줄기를 베풉니다.



.. 고철 더미 속에서 붉은 녹물을 토하는 늙은 기계가 말하고 고철 장이 듣고 있는 가령, //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는 곳을 볼 수 있는 것은 먼저 인사를 건네는 것 // 안녕, 망치야 안녕, 비둘기야 안녕, 그라인더야 안녕, 나의 일터야 ..  (안녕, 망치에게)



  모든 시는 삶을 담습니다. 모든 시는 삶글입니다. 시를 쓰는 모든 사람은 일을 합니다. 애써 ‘노동’이라는 한자말을 빌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사람’이 시를 씁니다. 우리는 회사에서도 일하고, 공장에서도 일하며, 시골에서도 일합니다. 부엌에서도 일하고, 책상맡에서도 일하며, 텃밭에서도 일합니다. 자전거를 달리며 일하는 사람이 있고, 두 다리로 걸으며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토바이로 편지를 나르며 일하는 사람이 있고, 짐차를 몰며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루 내내 한곳에 꼼짝 않고 서서 일하는 사람이 있으며, 빗자루를 들고 일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글은 삶글이면서 살림글입니다. 살아가며 쓰는 글이기에 삶글이요, 저마다 다르게 하는 일을 가꾸면서 쓰는 글이니까 살림글입니다. 삶을 쓰는 글은 삶노래입니다. 글은 언제나 노래처럼 흐르기에 삶노래입니다. 살림을 쓰는 글이라면 살림노래가 될 텐데, 일을 읊는 노래라면 일노래이기도 하지요.


  들에서 일하면 들노래입니다. 집에서 일하면 집노래입니다. 숲에서 일하면 숲노래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지구별에 두 다리를 딛고 일한다고 여기면 별노래입니다.


  망치한테 인사하는 표성배 님 시집은 어떤 노래일까 하고 헤아립니다. 고요히 누리는 기쁜 삶을 노래하는 싯말은 어떤 노래가 되어 이 땅에서 고이 흐를까 하고 헤아립니다. 저녁이 깊어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곁에서 자장노래를 나긋나긋 부르면서 내 삶노래와 살림노래와 꿈노래와 별노래를 하나씩 함께 헤아립니다. 4348.4.29.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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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4-30 00:03   좋아요 0 | URL
저도 18쪽의 `흑백사진`을 읽으며 절로 함께살기님이 생각나 빙그레 웃었습니다~

모든 시는 삶을 담습니다. 모든 시는 삶글입니다.-
정말 그렇지요.^^

아주 편안하고 즐겁게 읽은 이 시집을, 함께살기님의 느낌글로 다시 읽으니 참으로
기쁘고 고맙습니다~*^^*

좋은 시집에 좋은 느낌글입니다!

숲노래 2015-04-30 00:23   좋아요 0 | URL
우리 스스로 즐거운 이야기를 짓고
다 함께 아름다운 삶이 된다고 느껴요.
appletreeje 님도 오늘 하루를
기쁘게 누리셔요~
 
몸에 피는 꽃 창비시선 144
이재무 지음 / 창비 / 199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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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3



시와 꽃숨

― 몸에 피는 꽃

 이재무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6.2.20.



  다섯 살은 다섯 살대로 아름답습니다. 다섯 살에는 다섯 살에만 누리는 빛나는 삶이 있습니다. 열다섯 살은 열다섯 살대로 아름답습니다. 열다섯 살에는 열다섯 살에만 즐기는 기쁜 삶이 있습니다.


  다섯 살 아이는 열다섯 살이 아니기 때문에 서운하지 않습니다. 열다섯 살 아이는 스물다섯 살이 아니기 때문에 섭섭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제 나이에 맞게 빛나면서 기쁩니다.



.. 포대자루에 담긴 감자알, / 낡고 헐한 버스에 실려 청양엘 간다 ..  (청양행 버스)



  사람이 누리는 모든 나이는 이녁한테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한 살도, 두 살도, 열한 살도, 열두 살도, 스물한 살도, 스물두 살도, 모두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마흔 살이나 마흔한 살도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예순 살이나 예순한 살도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사람한테는 나이만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닙니다. 오늘 하루도 언제나 처음이요 마지막입니다. 새로 찾아온 봄이기에 똑같은 봄이 아닙니다. 내가 누리는 나이에 처음으로 맞이하는 봄입니다. 봄에 보는 꽃도 지난해에 보던 꽃을 다시 보는 셈이 아니라, 내 나이에 새롭게 맞이하면서 기쁘게 누리는 꽃입니다.



.. 바람의 맛 달디단 것 / 새삼 밤밭골에 와 알았습니다 / 배 주린 후에야 밥 / 귀한 줄 알듯 / 서울 떠나고야 알았습니다 ..  (수목송)



  이재무 님이 빚은 시집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사,1996)을 읽습니다. 시집 이름처럼 ‘몸에 피는 꽃’을 이야기하는 싯말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몸에 피는 꽃이라면 ‘몸꽃’이 됩니다. 몸꽃이 피는 삶이라면 삶꽃이라 할 만합니다. 꽃이 피어나는 삶이요, 꽃이 피어나는 몸이니, 생각도 꽃과 같아 생각꽃이 될 테고, 사랑도 꽃과 같아 사랑꽃이라 할 만합니다. 모두 꽃이요, 꽃내음이며, 꽃밭입니다.



.. 도회지에 사는 동안 나무는 / 수직상승의 욕망만이 허용된다 / 길을 닮은 나무 / 나무는 단 한번 줄기의 높이만큼 / 가지의 넓이 갖고 싶다 ..  (가로수)



  한껏 봄이 무르익는 사월 끝자락입니다. 우리 집 마당과 뒤꼍을 갓꽃과 유채꽃이 가득 둘러쌉니다. 갓꽃과 유채꽃은 이 미터가 넘게 자랍니다. 경관사업을 하느라 군청에서 나누어 준 유채씨를 뿌린 논에서는 유채꽃이 일 미터가 채 안 되지만, 우리 집 유채꽃은 키가 참으로 큽니다.


  높다랗게 자라는 유채꽃과 갓꽃 밑에는 봄까지꽃이랑 코딱지나물꽃이랑 별꽃이 가득하고, 살갈퀴꽃이 막 올라오는 한편, 민들레꽃이 골고루 어우러집니다. 마당과 뒤꼍에서 풀을 뜯으면 내 몸에는 풀내음뿐 아니라 꽃내음이 번집니다.


  신나게 뜯은 풀을 부엌에서 헹구어 밥상을 차리는데, 어깨 쪽에서 뭔가 떨어집니다. 뭐가 떨어지나 하고 살피니 꽃송이입니다. 높다랗게 자란 유채꽃과 갓꽃을 스치면서 다니니, 어깨와 목덜미에 꽃송이가 붙었는가 봅니다.



.. 텃밭 장다리꽃 피어 / 나비 눈부시네 / 이 집 살림은 어떤가? / 저 집 곳간이 났나? / 이 꽃 저 꽃 치마폭 / 한나절 내내 들춰보더니 ..  (장다리꽃과 나비)



  꽃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꽃눈’이 됩니다. 꽃을 바라보면서 내 둘레를 꽃빛으로 받아들입니다. 숲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숲눈’이 됩니다. 숲을 바라보면서 내 둘레를 숲빛으로 헤아립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 다른 눈’이 되어 둘레를 바라봅니다. 다 다른 눈으로 다 다른 삶을 살피고, 다 다른 사랑을 가꾸면서 다 다른 꿈으로 나아갑니다.


  장미꽃도 곱고 동백꽃도 곱습니다. 튤립꽃도 곱고 찔레꽃도 곱습니다. 앵두꽃도 곱고 팬지꽃도 곱습니다. 곱지 않은 꽃은 없습니다. 곱지 않은 삶은 없습니다. 곱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시를 쓴 님은 싯말에 새로운 숨결을 넣으면서 곱고, 시를 읽는 님은 싯말에 새로운 가락을 입혀서 즐기기에 곱습니다.



.. 쑥국이 올라온 저녁밥상 / 국물 한 방울도 아껴 먹는다 / 밥 두 숟갈에 국물 한 숟갈 ..  (조그만 행복)



  시집 《몸에 피는 꽃》을 읽으면서 내 꽃삶을 떠올립니다. 새봄 내내 쑥부침개와 쑥국을 즐기는 내 꽃밥을 떠올립니다. 나는 늘 꽃밥을 차린다고 생각합니다. 꽃접시에 담기에 꽃밥이 아닙니다. 꽃을 먹는다고 여기기에 꽃밥입니다. 곁님과 아이들하고 늘 꽃밥을 누리면서 꽃내음을 먹고, 꽃사람이 된다고 느낍니다. 꽃으로 피어나는 숨결을 아침저녁으로 먹으면서 꽃사람이 되고 꽃마음이 되어 꽃사랑을 피웁니다.


  우리는 저마다 늘 먹는 밥대로 몸빛이 바뀝니다. 누구나 늘 마시는 바람대로 몸결이 달라집니다. 사람은 늘 쬐는 햇볕대로 몸매가 새롭습니다. 싱그러운 밥과 푸른 바람과 맑은 햇볕을 맞아들이는 사람은 아름답게 자랍니다. 꽃숨을 쉬면서 꽃살림을 가꿀 수 있다면, 우리는 누구나 사랑스럽게 거듭납니다. 참말 우리는 꽃넋이 되어 꽃노래를 부르는 꽃동무가 될 수 있습니다. 4348.4.26.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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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노래가 되었다
조태일 지음, 신경림 엮음 / 창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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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97



시를 읽는 사람은 노래를 사랑해

― 나는 노래가 되었다

 조태일 글

 신경림 엮음

 창비 펴냄, 2004.9.25.



  봄에 꽃이 필 무렵 어김없이 벌이 찾아듭니다. 아직 이르다 싶은 삼월에도 벌이 찾아듭니다. 사월이면 벌이 무척 많이 늘어납니다. 사월에 피어나는 꽃은 삼월보다 훨씬 많아요. 마당에 선 동백나무에 동백꽃이 한창이던 때에는 벌도 수백 마리가 윙윙거렸습니다. 동백꽃이 거의 다 진 이즈음에는 동백나무 둘레에 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유채꽃과 갓꽃이 곳곳에 흐드러지다 보니 갓꽃밭과 유채꽃밭은 벌떼로 아주 시끄럽다 싶을 만합니다.


  벌떼는 매화가 매화꽃을 터뜨릴 적에도 몰리고, 모과나무가 모과꽃을 터뜨릴 적에도 몰립니다. 군데군데 피어나는 민들레꽃에도 벌이 내려앉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냉이꽃과 별꽃에도 벌이 내려앉습니다. 벌과 나비는 꽃을 가리지 않습니다. 모든 꽃에 살며시 내려앉아서 꿀이나 꽃가루를 받아먹습니다. 이러면서 꽃가루받이를 해 주어요.



.. 내 어릴 적 / 산속에서 길을 잃고 / 엄마야! 엄마야! 엄마야! / 울부짖던 그 소리 ..  (메아리)



  어젯밤에 아이들과 마을 논둑에 서서 별바라기를 하며 풀벌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개구리는 보름쯤 앞서 깨어나서 노래를 들려줍니다. 풀밭 여기저기에도 풀벌레가 깨어나서 드문드문 노래를 들려줍니다. 아직 왁자지껄한 노래는 아닙니다. 개구리 노랫소리도 드문드문 들릴 뿐입니다.


  모두 노래를 부릅니다. 낮에는 낮노래를 부르고, 밤에는 밤노래를 부릅니다. 노는 아이들은 놀이노래를 부르고, 일을 하는 어른들은 일노래를 부릅니다. 마실을 다닐 적에는 마실노래를 부르지요. 나는 밥을 지으면서 밥노래를 부르는데, 아이들은 밥을 먹으면서 밥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과 내가 부르는 밥노래는 사뭇 다릅니다.



.. 풀씨가 날아다니다 멈추는 곳 / 그곳이 나의 고향, / 그곳에 묻히리 ..  (풀씨)



  조태일 님은 1999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시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창비,2004)는 조태일 님이 저승길로 떠나고 난 뒤에 신경림 님이 새로 엮어서 내놓은 책입니다. 조태일 님이 그동안 내놓은 시집 여러 권에서 추리고 가리고 골라서 엮은 시집입니다.


  시집을 읽을 때마다 한 가지를 떠올립니다. 우리는 ‘시’라고 하는 글을 책으로 읽는데, 시가 깃든 책인 시집은 ‘노래책’과 같구나 싶어요. 시는 삶을 노래한 글이고, 삶을 노래한 글을 묶은 책이니, 시집은 언제나 노래책이 되리라 느낍니다.



.. 꽃들, 줄기에 꼼짝 못하게 매달렸어도 / 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 // 아빠꽃 엄마꽃 형꽃 누나꽃 따라 / 아기꽃 동생꽃 쌍둥이꽃 / 바람들을 잘도 가지고 논다 ..  (꽃들, 바람을 가지고 논다)



  노래는 소리에 담은 가락입니다. 그저 흐르는 소리는 그저 소리이지만, 소리에 가락이 담기면 노래로 거듭납니다. 그저 흐르는 자동차 소리라든지 버스 소리라든지 기차 소리는 그냥 소리입니다. 이 소리를 고즈넉하게 들을 수도 있으나, 시끄럽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가 끊이지 않는 고속도로 옆에 서면 온갖 자동차가 내는 소리가 시끄러워 귀청이 찢어질 듯하다고 느낄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소리도 내 마음에 따라서 노래로 들을 수 있습니다. 자동차마다 다 다르게 달리면서 내는 소릿결을 느껴서 가락을 헤아리면 노랫가락이 됩니다.


  개구리와 풀벌레와 꾀꼬리가 들려주는 소릿가락을 들으면서 시끄럽다고 느낄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개구리와 풀벌레와 꾀꼬리가 들려주는 소릿가락을 노래로 들을 사람이 있어요. 어느 때에는 반가운 소리이기에 노래요, 어느 때에는 달갑잖은 소리이기에 시끄럽습니다.



.. 자유가 시인더러 / 시인이 자유더러 / 멱살을 잡고 무슨 말인가를 하지만 / 전혀 알아들을 수 없네. / 우리 같은 촌놈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네 ..  (자유가 시인더러)



  네가 나한테 들려주는 말이 내 마음에 스며들어 사르르 녹는다면, 네 말은 나한테 노래와 같습니다. 내가 너한테 들려주는 말이 네 마음에 스며들지 못하고 사르르 녹지도 못한다면, 그저 담벼락에 부딪혀서 떨어지는 돌멩이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지 않고서는 이야기가 되지 않아요. 따스한 사랑을 품고 스며드는 말은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로 듣는 말은 노래가 됩니다. 이와 달리, 아무런 사랑을 담지 않은 말은 이야기도 노래도 되지 못합니다. 다투는 말이 되면서 시끄럽구나 하고 느끼는 소리로 머뭅니다.


  자유가 시인더러 무슨 말을 했을까요. 시인은 자유더러 무슨 소리를 했을까요. 둘은 서로 노래를 불렀을까요. 둘은 서로 노래하는 마음이었을까요.



.. 파란 하늘 아래 / 잠자리 날고 // 잠자리 날개 아래 / 파란 연못 잠들었다 ..  (대낮)



  시를 읽는 사람은 노래를 사랑합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시를 사랑합니다. 시를 읽으면서 노래가 저절로 흐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시가 저절로 솟아납니다.


  아이들은 모두 시인이라고 합니다. 아이들이 읊는 말에는 언제나 가락이 실려서 노랫말처럼 되기 때문입니다. 아니, 노랫말처럼 된다기보다 그예 노래가 됩니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어른한테서 배우는 노래가 아니라, 놀면서 스스로 기쁘고 신나서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노래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어른들 누구나 시인입니다. 왜냐하면, ‘어른’이라는 사람은 ‘아이’로 태어나서 신나게 놀고 기쁘게 노래하면서 하루하루 살다가 어느새 ‘어른’이 되었으니까요.


  작가라는 이름이 있기에 시인이 아닙니다. 삶을 노래하기에 시인입니다. 시집을 내거나 잡지에 작품을 싣기에 시인이 아닙니다. 삶을 사랑하면서 빙그레 웃고 노래하는 가슴으로 하루를 열기에 시인입니다.



.. 타고난 시골솜씨 한철 만나셨다 / 산1일번지에 오셔서 / 이불 빨고 양말 빨고 콧수건 빨고 / 김치, 동치미, 고추장, 청국장 담그신다. / 양념보다 맛있는 사투리로 담그신다 ..  (어머님 곁에서)



  조태일 님이 그동안 부른 노래를 가만히 헤아립니다. 시선집 《나는 노래가 되었다》로 새롭게 태어난 조태일 님 노래를 가만히 생각합니다. 이제 조태일 님은 이승이 아닌 저승에 있습니다. 조태일 님은 더는 삶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태일 님이 부른 삶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삶노래를 부릅니다.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삶노래를 부르고, 우리 아이들이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삶노래를 부릅니다. 앞으로는 우리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새롭게 아이를 낳아 저희 아이들한테 새롭게 삶노래를 물려주겠지요.


  노래가 흐르고 흐릅니다. 생각과 꿈이 흐르고 흐릅니다. 사랑과 삶이 흐르고 거듭 흐릅니다. 언제나 새로우면서 아름답게 춤추는 노래가 흐릅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시를 쓰고, 삶을 꿈꾸기에 시를 읽습니다. 삶을 아름다이 가꾸면서 시를 쓰고, 삶을 사랑스레 보듬으면서 시를 읽습니다. 4348.4.17.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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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04-18 10:13   좋아요 0 | URL
조태일 님의 <國土>를 아주 오래전에 읽은 시간이 떠오르네요.

이번에 한대수 님께서 새로 내신, <사랑은 사랑, 인생은 인생>의 들어가는 말에서

- 내 노래를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느낀 것이 ˝바로 이 책이 나의 자서전이구나˝였다. 나는 피아노 앞에 앉거나 기타를 안고 작곡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냥 일상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순간들이 멜로디가 된다. 67년을 살았으니 얼마나 많았겠는가?

범죄와 끔직한 테러로 인간이 이성을 잃어가는 이때에, 우리는 평화의 노래를 ˝천천히. 꾸준히. 끝까지˝ 불러야 한다. - 에 공감이 되었어요.

오늘도 함께살기님의 좋은 글 감사히 읽고 갑니다~

숲노래 2015-04-18 11:14   좋아요 0 | URL
한대수 님이 새로 책을 내셨군요.
그 책에도 사랑스러운 노래 같은 이야기가 흐르겠지요.

조태일 님 `시선집`을 읽다 보니
따로따로 `시집 한 권`씩 읽는 흐름이
한결 낫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꼈는데,
그래도 아무튼 이렇게
시선집으로 새롭게 읽으면서도
아련하면서 오래되고, 또 곧게 흐르는 노래 같은 숨결을
다시금 느껴 보았어요.

고맙습니다~
 
오장원의 가을 문학과지성 시인선 70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8년 10월
평점 :
품절


시를 말하는 시 92



시와 싸움터

― 五丈原의 가을

 복거일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1988.4.15.



  봄이 무르익으면서 동이 일찍 틉니다. 이제 새벽 다섯 시 반 무렵이면 어슴푸레한 빛이 드러나고, 곧 따스한 기운이 퍼지면서 붉은 해님이 떠오릅니다. 다시 아침입니다. 어제에도 찾아온 아침이고 오늘도 찾아오는 아침입니다. 이 아침은 모레에도 새롭게 찾아오겠지요.


  아침볕을 쬐고 아침바람을 마시려고 마당에 서면, 우리 집에서 함께 지내는 새들이 푸르륵 날갯짓 소리를 내면서 날아오릅니다. 처마에서 우듬지로 옮기고, 마당에 선 나무에 있다가 지붕으로 옮기며, 지붕에 있다가 지붕 너머 전깃줄로 옮깁니다.



.. 떨어지는 것은 으레 / 맨 아래 단추다. / 원래 공평하지 못한 게 삶이다. / 마음에 걸리면서도 며칠을 미적거리다, 눈 감고 찬물에 뛰어드는 심정으로 / 바늘을 찾는다 ..  (하숙 2)



  감나무를 바라봅니다. 새봄을 맞이한 감나무는 매화꽃이 모두 지고 매화잎이 푸르게 돋아서 짙게 퍼질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움이 틉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늑장을 부리는 나무라 할 테지만, 감나무보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더 늦게 돋습니다. 감나무는 새봄 사월에 이르러 비로소 조그맣게 잎사귀를 내밀면서 보들보들한 옅노랑빛을 보여주는데, 무화과나무는 아직 겨울눈이 터지지 않습니다. 대추나무를 보면 대추나무는 훨씬 늦어요.


  가만히 나무를 바라봅니다. 지난해에도 보고 지지난해에도 보던 나무를 바라봅니다. 해마다 맞이하는 봄이니 해마다 똑같은 모습을 본다고 할 텐데, 해마다 새로 피어나는 꽃은 그야말로 새롭게, 해마다 새로 돋는 잎도 그야말로 새롭습니다. 봄이 새롭고, 하루가 새로우며, 꽃과 잎과 나무가 모두 새롭습니다.



.. 겨울엔 / 겨울 마음으로 설 일이다 ..  (눈사람)



  나뭇줄기를 어루만집니다. 어느 나무이든 지난해와 대면 줄기가 굵고 가지가 넓게 퍼졌습니다. 나무는 해마다 차츰차츰 자랍니다. 봄이 저물고 여름이 되면, 나뭇가지가 드리우는 그늘도 한결 넓어지겠지요.


  나무를 어루만지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나무처럼 아이들도 해마다 무럭무럭 자랍니다. 지난해에 입던 옷이 올해에 안 맞기 일쑤이고, 봄에 입던 옷이 가을에 안 맞기 마련이에요.


  그러면, 어른은 얼마나 자랄까요. 어른도 몸이 자랄까요. 아니면, 어른은 뱃살이 늘까요. 아니면, 어른은 늘 똑같은 몸으로 나이만 먹을까요. 아마, 어른도 아이처럼 해마다 새로운 철이 찾아온다고 느끼면서 기쁘게 웃으면 한결 튼튼하면서 씩씩한 몸으로 거듭나리라 생각합니다.



.. 퇴직금 봉투를 품에 넣어도, / 서른여덟 나이를 덮기엔 / 옷이 얇아라 ..  (사표 2)



  복거일 님이 쓴 시집 《五丈原의 가을》(문학과지성사,1988)을 읽습니다. 복거일 님이 처음 내놓은 시집이라고 합니다. 한글이 아닌 한자로 ‘五丈原’이라 적는 복거일 님은 서울대 상대를 마치고 은행과 기업체와 연구소에서 일하다가 1983년에 사표를 내고 ‘오직 글만 쓰겠노라’ 하고 외쳤다고 합니다. 회사원을 그만두고 글쟁이가 되는 삶을 놓고 복거일 님은 ‘자유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고 보면, 복거일 님이 쓰는 글에 ‘자유’나 ‘자유인’이나 ‘자유주의’ 같은 낱말이 자주 나옵니다.


  ‘자유(自由)’는 한자말입니다. 이 낱말은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한다고 합니다. 얽매이지 않는 모습이요,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습을 ‘자유’라고 한답니다. 그러니까, 글만 쓰며 살든 회사원으로 살든, 또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살든 학교에서 교사 노릇을 하든, 우리 스스로 ‘다른 것에 얽매이지 않고 내 뜻을 살리면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자유’입니다. 글만 쓰고 살더라도 ‘얽매이는 것’이 있다면 자유가 아닙니다.



.. 빈 책상들을 치우고 / 새 자리를 잡으면, / 삼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리던 入社同期도 / 추억이다 ..  (감원)



  시집 《오장원의 가을》은 자유를 노래한 글일까 궁금합니다. 사표를 내고 회사를 뛰쳐나온 이야기가 흐르는 시, 회사에서 겪은 여러 이야기가 흐르는 시, 추상과 비유가 흐르는 시, 오직 글만 쓰겠노라 외치는 이야기가 흐르는 시, 이러한 시는 ‘어떤 자유’일까 궁금합니다.


  한자말로는 ‘자유’인데, 한국말로는 ‘홀가분’입니다. 한겨레도 예부터 ‘얽매이지 않으면서 제 마음대로 일구는 삶’을 가리키는 낱말이 있고, 이러한 삶을 ‘홀가분’으로 나타냅니다.


  ‘홀가분’은 “홀로 가벼움”입니다. 홀로 날갯짓을 하며 날듯이, 홀로 삶을 일굴 수 있는 모습이고, 홀로 삶을 일구기에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아, 스스로 옥죄는 짐덩이 같은 무게가 없는 모습이기에 ‘홀가분’입니다.


  홀가분한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참다이 홀가분한 사람은 사랑을 합니다. 내가 홀가분하니 너를 홀가분하게 맞이합니다. 내가 홀가분하기에, 이 아름다운 홀가분함으로 너와 어깨동무를 합니다. 내가 홀가분하니까, 다 함께 홀가분하게 꿈을 꾸고 노래를 할 수 있는 사랑으로 나아갑니다.



.. “우리 고향에 있는 얘긴데, 능금을 먹으려면, 삼대가 걸린답니다. 능금나물 심는 사람, 가꾸는 사람, 능금을 따 먹는 사람.” 내 얼굴을 흘긋 살피고서, 박형은 말을 이었다. “지금 능금나물 심어서 따 먹잔 얘긴데…….” 말끝을 흐리면서, 그는 밖을 내다보았다. 나도 따라 내다보았다 ..  (능금나무)



  나는 우리 시골집에 나무를 심습니다. 내가 이듬해나 몇 해 뒤에 따먹을 열매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심는 나무가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이 물려받을 나무를 심습니다.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돌보면서 저희 아이를 새롭게 낳아서 새롭게 물려줄 나무를 심습니다. 나무는 언제나 똑같이 ‘한 그루’이지만, 나부터 새롭게 마주하고, 우리 아이들이 새롭게 마주하며, 우리 아이들이 낳을 아이들도 새롭게 마주할 나무입니다. 같은 나무 한 그루를 마주하는 사람마다 다 다르면서 모두 새로운 숨결이 됩니다.


  나부터 홀가분하고 너도 함께 홀가분한 노래라 한다면, 바로 나무를 심는 노래이리라 느낍니다. ‘나는 자유야!’ 하고 외치는 노래가 아니라, ‘나는 사랑이야!’ 하고 노래하면서,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사랑이야!’ 하고 외치는 노래일 때에 비로소 참다이 홀가분하면서 아름답게 퍼질 수 있는 씨앗 한 톨이라고 느낍니다.


  복거일 님은 요즈음도 시를 쓸까요? 부디 조용히 시를 쓸 수 있는 넋이 되기를 빕니다. 싸움터에서 조용히 벗어나서, 아름다이 꿈을 꾸는 삶노래꾼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4.16.나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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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4-16 10:22   좋아요 0 | URL
아..지난 시간 88년 이면 호돌이 굴렁쇠.
늦은 4학년.먼지나는 신작로.무궁화꺽꽂이.
또..내 기억폴더에..뭐가있더라....

숲노래 2015-04-16 11:22   좋아요 1 | URL
88년에 전두환이 권좌에서 내려왔지만
다른 독재자가 들어서면서
나라는 그대로 얼어붙고
어디에서나 최루탄 냄새가 자욱했지요...

[그장소] 2015-04-16 11:50   좋아요 0 | URL
그들은 그저 바톤 터치만 할 뿐 이란걸..새삼스럽게...

황지우의 새들도 세상을 뜨는 구나 .
를 읽다..웃다 울다..그랬어요.
복거일시인의 시선 번호가88년이면 몇번이 붙는지 몰라도 황시인은 32번 째 문지 시선 입니다.
개정도 있고 재판인쇄도 있으나..그건 그렇다 치고 83년9월
자서를 시작으로 열죠.만
웃어요.그저..시간의 흐름을 막론하고 어쩌면 지금 현대를 그대로 읊나..
싶어서. 이런 시간차 공격을 뭐라 표현하는가 싶어서..서늘해지죠.

숲노래 2015-04-16 17:23   좋아요 1 | URL
먼 옛날도 없이
오늘도 없이
늘 흐르는 하루라고 느낍니다.

이 시집을 새삼스레 읽는 동안
`1980년대 첫무렵에 회사에 사표를 쓰고 당차게 나온` 그분이
오늘은 어떤 일을 하는가를
곰곰이 돌아보았습니다.

[그장소] 2015-04-16 17:45   좋아요 0 | URL
아..모든 글을 업으로 사는 이들은..시대를 타고 난다 아니 산다..던가?요.. 그것이 저항이든 순응이든...
 
날랜 사랑 창비시선 134
고재종 지음 / 창비 / 199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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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91



시와 나락섬

― 날랜 사랑

 고재종 글

 창작과비평사 펴냄, 1995.5.10.



  요즈음 시골에서는 헬리콥터를 흔하게 봅니다. 어느 때가 되면 마을마다 헬리콥터가 여러 대 떠서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골골샅샅 날아다닙니다. 마을에 헬리콥터가 뜨면 집집마다 대문과 창문을 꼭꼭 닫습니다. 지지난해까지는 헬리콥터가 뜰 무렵 면소재지에서 면내방송을 해서 장독 뚜껑도 닫으라고 알렸으나, 지난해부터는 헬리콥터가 뜨든 말든 면내방송을 아예 안 합니다.



.. 모진 돈들막 귀영치의 / 씨톨 하나도 깨우는 속삭임이여 / 논두렁 밑 양지녘엔 / 벌써 저리 냉이꽃 반짝이네 ..  (우수)



  요즈음 시골에서 뜨는 헬리콥터는 ‘농약 뿌리는 헬리콥터’입니다. 이제 시골마다 할매와 할배 나이가 대단히 많습니다. 그야말로 요즈음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는 손수 농약을 뿌리기 어려운 몸이 됩니다. 마을 할매와 할배 말씀으로는 ‘마음 같아서 날마다 농약을 뿌리’고 싶다는데, 몸이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리하여, 마을마다 돈을 모아서 농협 헬리콥터를 빌립니다. 조금 덜 늙은 할매와 할배는 경운기를 끌고 손수 농약을 뿌리지만, 많이 늙은 할매와 할배는 돈을 들여 헬리콥터를 부르고는 신나게 농약을 뿌리도록 시킵니다.



.. 사람의 한평생은 아름다워라 / 윗논에서 논을 갈던 칠순 박영감 / 옆논에서 보리 베는 김영감 불러 / 한됫박 탁배기를 나눠 마시듯 ..  (새참)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면 빨래를 걷어야 하고, 아이들을 모조리 집으로 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헬리콥터는 새벽부터 저물녘까지 골골샅샅 돌아다니니, 농협 일꾼이 낮밥이나 샛밥 먹느라 살짝 쉬는 때에도 빨래를 내다 널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마당에조차 나가 놀지 못하고 맙니다. 농약 뿌리는 때가 되면 아예 마을을 떠나서 도시로 나들이를 갑니다. 헬리콥터 소리가 귀청을 찢기도 하고, 농약 때문에 숨을 쉬기 어려우며, 빨래이든 집안일이든 도무지 할 수 없는데다가, 아이들은 시골에 살면서도 바깥에서 뛰놀지 못합니다.


  별이 돋는 깜깜한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아직도 농약 냄새가 자욱합니다. 재채기가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농약 헬리콥터가 돌아다닐 때부터 온 마을이 고요합니다. 헬리콥터 소리를 빼고는 아무런 소리가 없습니다. 개구리도 더 노래하지 않고, 제비도 몽땅 사라지며, 흔한 참새와 까치마저 어디로 갔는지 찾을 길이 없습니다. 헬리콥터가 뿌리는 농약은 온갖 풀벌레를 싸그리 죽이고, 풀벌레를 잡아먹는 새까지 몽땅 죽음길로 내몹니다.


  농약 뿌리는 헬리콥터가 온 마을과 들과 숲을 휩쓴 뒤에는 시골에 아무런 소리도 노래도 없는 나날이 이어집니다. 그저 경운기 소리와 마을방송 소리만 덩그러니 울릴 뿐입니다. 나비와 벌도 사라집니다. 이리하여, 오늘날 시골에서는 아이들 웃음소리도 목소리도 듣기 어렵습니다.



.. 나락섬에 불을 지르고 돌아온 이제풍씨 / 속 끓는 아내가 차려주는 쌀밥을 먹는다 / 울대를 치는 오열도 함께 꼭꼭 씹어서 // 군청에 농기계를 반납해버린 오근선씨 / 군청 앞 식당에서 김칫국에 쌀밥을 먹는다 / 가슴 뿌리부터 치밀어오르는 걸 애써 누르며 ..  (오늘도 쌀밥을 먹는다)



  고재종 님이 빚은 시집 《날랜 사랑》(창작과비평사,1995)을 읽습니다. 시골에서 흙을 일구는 아재가 빚은 시집입니다. 늘 흙을 만지고 밟고 보듬고 돌보면서 삶을 일구는 고재종 님이니, 아무래도 고재종 님 싯말은 흙말이 됩니다. 흙에서 길어올린 노래요 시이며 이야기입니다. 흙을 먹으면서 사는 사람들 이야기가 흐르는 시입니다.


  문득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요즈음에는 시골에서 흙 만지면서 시를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매우 어렵습니다. 흙 만지면서 시를 쓰는 사람도 찾아보기 어렵지만, 흙 만지면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만화를 그리거나 사진을 찍는 사람도 대단히 드뭅니다. 흙 만지면서 춤·노래를 펼치거나 연극·영화를 이루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흙 만지면서 교사나 교수로 일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흙 만지면서 시장이나 군수 일을 하는 사람은 있을까요? 흙 만지는 국회의원은 있을까요? 흙 만지는 법관이나 의사나 공무원은 있을까요?



.. 내 마음의 불타버린 작은 숲에는 / 세월의 바람을 정갈하게 빗질하던 / 고고한 솔 한그루 자라지 / 않는다, 거기 동박새며 뱁새떼 / 우수수 오르고 우수수 내리던 / 잡덤불 속 생의 따뜻한 숨결은 어디 / 갔는가, 꿈의 산정을 치닫던 노루 한마리 ..  (불타버린 숲에서)



  흙을 만지는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는 아예 없다고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시골지기 삶을 헤아리는 정책이나 문화나 행정이나 교육은 아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골 초·중·고등학교에서 교사가 학생한테 시골일을 가르치거나 보여주는 일은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학교는 모든 아이가 오직 서울이나 큰도시로 나가서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고록 하는 시험공부만 시킵니다.


  시집 《날랜 사랑》을 조용히 읽습니다. 앞으로 흙내음이 감도는 시는 얼마나 더 만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앞으로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시를 쓰겠노라 당차게 외칠 만한 사람은 나올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다니면서 시를 배우려는 젊은이 말고, 시골에서 손수 흙을 가꾸면서 시를 익히려는 젊은이는 나올 만할까 궁금합니다.



.. 노타리 쳐서 물 방방히 실어놓은 / 내일쯤엔 모낼 논에 / 어디선가 날아내린 흰 고니 두 마리 / 그 긴 부리로 무언가를 콕콕 찍어댄다 ..  (문득)



  모든 사람이 꼭 흙을 만져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나 ‘흙에서 자란 밥’을 먹습니다.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흙에서 자랍니다. 시멘트나 아스팔트에서 자라는 나락은 없습니다. 딸기도 수박도 참외도 토마토도 능금도 포도도 모두 흙밭에서 자랍니다. 요새는 소와 닭과 돼지한테 사료와 항생제만 먹이지만, 예부터 모든 고기짐승은 짚이나 풀을 먹었습니다. 풀과 곡식을 먹을 적에도 ‘흙’을 먹는 셈이요, 고기를 먹을 적에도 ‘흙’을 먹는 셈이에요. 시골에 살든 도시에 살든 우리는 늘 흙을 먹는 삶이니, 흙을 만지지 않는다면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보기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흙을 만지지 않아도 삶을 이루지만, 흙을 만지지 않으면 삶을 삶결 그대로 바라보기 어려울’ 뿐입니다.


  시골지기가 나락섬에 불을 붙여서 태우는 아픔이나 생채기를 함께 느낄 만한 ‘도시 이웃’을 그려 봅니다. 시골지기가 농약을 쓰도록 부추기는 현대문명을 헤아려 봅니다. 시골지기와 어깨동무를 하려는 ‘도시 이웃’이 어디에 얼마나 있는지 가만히 손을 꼽아 봅니다. 4348.4.14.불.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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