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성 -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어린이미술관 13
신수경 지음 / 나무숲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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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재’아닌 ‘좋은’ 그림쟁이 이인성
 [그림책이 좋다 61] 신수경,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


- 책이름 :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
- 글 : 신수경
- 펴낸곳 : 나무숲 (2009.3.4.)
- 책값 : 10500원



 (1) 즐거운 삶이 될 때 비로소


 지난밤, 책 하나 만드는 일을 하면서 날밤을 홀딱 새웠습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야 누구나 날밤 새우는 일을 밥먹듯 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지 않은 터라 딱히 일감이 많지 않아 날밤 새울 일이 드뭅니다. 1인잡지를 엮을 때 며칠쯤 밤을 새우다시피 하지만, 아기 함께 돌보고 기저귀 빨고 해야 하기에 밤을 새우지 않기도 합니다. 다만, 어제 하루는 홀몸으로 인천집에 머물면서 책 만들기를 하다 보니 저절로 날밤 새우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새벽녘에 살풋 잠든 다음 다시 일어나서 여러 시간 책상 앞에 앉아 일손을 붙잡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일손을 붙잡으면서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즐겁습니다.

 따로 어떤 돈을 버는 일이 아니요,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나, 저한테는 그지없이 재미있고 즐겁습니다. 등짝이 쑤시고 팔 어깨 손목이 저리지만, 이렇게 아프고 쑤시고 저리고 결리는 몸뚱이를 다독이면서 눈을 밝힙니다.

 다른 책쟁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그예 돈만 벌려고 일하는 분도 어김없이 있는 한편, 그저 좋아서, 즐거워서, 재미있어서 적은 일삯을 받으면서도 책마을에 오래도록 몸담는 분이 많을 테지요.


.. 이인성은 ‘우리의 풍경’ 하면 누구나 떠올리는 자연의 색을 표현한 화가입니다. 색채의 마술사였던 이인성은 땅과 하늘, 산과 나무에서 우리 고유의 색을 찾아냈습니다 ..  (3쪽)


 사진을 찍으러 골목마실을 하고 헌책방마실을 하면 온몸과 손목이 저리고 결립니다. 골목에서는 사진만 찍지 않고 햇볕과 바람을 함께 받아들입니다. 헌책방에서는 사진만 담지 않고 반가운 책을 바지런히 살피고 보듬습니다.

 햇볕과 바람이 있고, 밤냄새와 이야기소리가 있어 즐거운 골목마실입니다. 마음을 살찌우는 밥이 있고, 마음을 건드리는 헌책방 일꾼과 책손 말씀이 있어 고마운 헌책방마실입니다. 이리하여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사진을 찍게 되고, 두 손이 꽁꽁 얼어서 손가락을 꼬부리지 못하게 되어도 사진을 찍습니다. 가방이 터질 듯 책을 채워서 집으로 돌아오고, 두 손이 책먼지로 시커매져도 까만 손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치면서 씨익 웃게 됩니다.


.. 이제 갓 스무 살의 이인성이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까지 하자, 지역 유지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려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울 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들은 경북여자고등학교 시라가 주키치 교장이 이인성의 유학을 돕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일본의 킹 크레용 회사 사장에게 재주가 뛰어난 학생이 있는데 화가로 키우면 좋겠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  (12쪽)


 둘레 사람들은 저보고 왜 세탁기를 안 쓰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세탁기를 쓰겠습니까. 제 옷이며 옆지기 옷이며 아기 옷이며, 손으로 빠는 느낌이 얼마나 풋풋하고 싱그러운데요. 기저귀 빨래를 하느라 하루 가운데 1/5쯤 잡아먹고(요사이는 아기가 오줌을 적게 누기에) 널고 개고 뭐하느라 다른 일을 할 시간을 빼앗긴다고 하지만, 시간을 빼앗긴다기보다 시간을 넉넉히 나누어 쓰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북북 비비고 헹구고 탁탁 물 빼어 너는 동안 마음이 얼마나 고요해지는데요.

 몸이 여위고 힘들다 하여도 손빨래를 놓을 수 없습니다. 몸이 아프고 지쳤다 하여도 손빨래를 미룰 수 없습니다. 하루 한두 끼니 먹는 밥과 같이, 하루에 몇 차례 손빨래를 하면서 몸과 마음을 고이 다스립니다. 날마다 누런쌀에 온갖 콩팥 섞은 밥으로 몸을 다스리는 한편, 훌륭하고 거룩한 책들로 마음을 다스리듯, 손빨래로 제 넋과 손발을 다스립니다.

 앞으로 아이가 무럭무럭 크면, 아이한테도 손빨래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가를, 이 기쁨을 혼자서만 즐기기란 얼마나 아까운가를 차근차근 물려줄 생각입니다. 저부터 즐겁고, 저부터 기쁘고, 저부터 고마운 일이며 놀이이기 때문입니다.


.. 이인성은 답답하고 막막한 마음을 캔버스에 풀어냈습니다. 특히 아이들을 모델로 하여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  (33쪽)


 열 해 남짓 사귀어 오는 술동무를 낮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이제 모두들 시집장가를 가고 아이를 낳게 되면서 얼마나 바쁜 몸이 되었는지, 예전에는 거의 날마다 만나 술잔을 비웠는데 이제는 한 해에 한 번 잠깐 얼굴 보기도 힘들어집니다. 다들 아이가 좀 자라면, 다들 일이 좀 느긋해지면, 이리하여 우리들 나이가 쉰이나 예순쯤 되면 한갓지게 다시 어울릴 수 있을까요. 그런데 한창 바쁠 때에도 연락을 못하거나 만나지 못하는 사이이면서 나중에도 어울릴 수 있으려나요.

 좋은 사람들이라 저 스스로도 벗님들한테 좋은 마음으로 다가가고 싶고, 좋은 동무들이라 저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거듭나면서 어깨동무를 하리라 다짐하게 됩니다.

 좋은 자연과 벗삼으면 자연이 선물하는 좋음을 받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좋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서 자연한테 선물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 됩니다. 좋은 이웃과 좋은 마을에서 살게 되면 이웃과 마을이 베푸는 선물을 받는 가운데, 나 스스로도 좋은 이웃이요 마을문화 일구는 사람으로 새로워지자고 마음먹으면서 내 다른 이웃과 마을에 좋은 땀방울을 바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살아가는 기쁨이라면 하루하루가 나누는 즐거움입니다. 하루하루가 비손하는 믿음이라면 하루하루가 서로 손 맞잡으면서 부둥켜안는 넉넉함입니다.

 삶이란 문화이며 문화란 삶이고, 사랑이란 믿음이며 믿음이란 사랑이고, 일이란 놀이이며 놀이란 일이라고 느낍니다. 모두 한동아리가 되어 흐를 수 있을 때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빚어진다고 느낍니다. 자연스레 생겨나는 무지개이고, 자연스레 비가 되고 눈이 되는 물방울이며, 자연스레 싹이 트고 움이 돋고 줄기와 잎과 꽃과 열매로 뻗어나가는 푸나무입니다. 우리 사람한테도 이와 같은 자연스러움이 온몸과 온마음에 깃들면서 나와 너를 바라볼 수 있을 때, 저마다 선 자리에서 즐거이 호미 한 자루 쥘 수 있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2) 그림쟁이 이인성 님 이야기를 담은 《이인성》


 그림이야기 《자연의 색채를 사랑한 화가 이인성》을 넘깁니다. 1912년에 태어나 1950년까지 짧게 살면서 그림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온 한 사람 발자취를 고이 담아낸 그림이야기책입니다.

 이인성 님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하며, 이런 모습을 보면서 둘레에서 일본으로 그림을 배우도록 보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인성 님이 살던 때는 일제강점기 때였고, 이인성 님을 일본으로 보내준 사람은 일본사람입니다.

 발자취와 그림밭을 찬찬히 살피다가 흠칫 놀랍니다. 아니, 우리 나라를 짓누르고 있던 일본인데, 그 일본에서도 조선사람을 눈여겨보면서 고이 보듬던 손길이 함께 있었다는 소리인가? 그러면, 오늘날 독립된 나라로 살아가는 이 땅에서는 어떠하지?

 지난날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그림밭에 빼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진밭이나 글밭에서 놀라운 솜씨를 선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농사짓기를 훌륭히 하는 사람들이 있고, 집살림을 알뜰살뜰 잘 꾸리는 사람들이 있으며, 바른 넋과 착한 마음으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숱한 사람들도 ‘일제강점기 그림쟁이 이인성’ 님과 마찬가지로 고운 손길과 따순 사랑을 받고 있을까요?


.. 이인성은 평생 우리 자연과 평범한 사람들을 그렸습니다 ..  (21쪽)


 그림쟁이 이인성 님 그림밭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책에 실린 풀이말과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이인성 님 붓질은 더없이 밝으며 맑다고 느낍니다. 그림을 즐기는 동안 눈이나 머리나 마음이 짐스럽지 않습니다. 홀가분하게 넘기고 가붓하게 헤아리게 됩니다. 아무래도 ‘자기와 같은 이웃을 그리고, 자기가 발디딘 터전을 그렸기’ 때문인가 생각해 보는데, 자기와 같은 이웃을 그리더라도 엉망으로 그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가 발디딘 터전을 그린다 하여도 ‘우리가 어깨동무하는 삶터’가 아닌 ‘좁거나 치우친 눈길로 허투루 바라본 삶터’를 그리는 사람이 많아요.
 





.. 세상을 떠나던 해에 쓴 그의 글에는 화가의 자부심과 단호함이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이래도 저래도 나의 천직은 그림을 그린다는 신세인 만큼, 그림 속에서 살고 그림 속에서 괴롬과 함께 사라진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누구에게도 자기의 개성을 짓밟히기는 싫다.” ..  (43쪽)


 그렇다면, 그림쟁이 이인성 님한테는 여느 그림쟁이와는 사뭇 다른 마음결이 있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똑같은 밑바닥 사람을 보더라도 바라보는 눈이 다르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짓눌린 이 나라 이 땅을 바라보더라도 여느 사람들 눈결과는 다르지 않았겠느냐 싶어요. 그리고 이런 다름을 고이 돌보고 북돋우면서 당신 나름대로 그림에 말을 걸었을 테고, 이런 말걸기는 그림을 즐기려는 우리한테 보람과 눈물과 웃음과 기쁨을 남기게 될 테고요.

 어떻게 본다면 이인성 님은 ‘천재화가’일는지 모릅니다만, 제가 느끼기로 이인성 님은 ‘천재’라 하기보다는 ‘좋은’ 그림쟁이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살가운’ 그림쟁이로, ‘가슴 열린’ 그림쟁이로, ‘눈을 뜬’ 그림쟁이로, ‘제 길을 제 다리로 뚜벅뚜벅 걷는 동안’ 조금도 흐트러짐이나 망설임이 없이 힘차고 다부졌던 그림쟁이로 보아야 알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면서, 오늘날 그림을 즐기고 나누려는 많은 이들이 ‘천재’나 ‘뛰어나다’라는 이름에 매이기보다는 ‘좋다’나 ‘아름답다’나 ‘즐겁다’나 ‘반갑다’는 소리를 듣는 이웃 같은 그림쟁이로 자리매김할 수 있으면, 오랜 벗님 같은 그림쟁이로 뿌리내릴 수 있으면, 언제 보아도 허물없고 반가운 풀꽃과 같은 그림쟁이로 이어갈 수 있으면, 그림그리기와 그림즐기기는 모두 사랑이요 믿음일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4342.3.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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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난 책읽기가 좋아
아놀드 로벨 글.그림,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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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너한테, 너는 나한테 좋은 벗님
 [그림책이 좋다 60] 아놀드 로벨,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 책이름 :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 글ㆍ그림 : 아놀드 로벨
- 옮긴이 : 엄혜숙
- 펴낸곳 : 비룡소 (1996.8.15.)
- 책값 : 5000원



 (1) 동무 사귀기


 ‘독후감 쓰기’를 해야 하는 중학교 1학년 처남이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읽습니다.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겉에는 ‘초등학교 1ㆍ2학년을 위한 그림 동화’라는 글월이 제법 굵게 적혀 있습니다. 왜 이 그림책을 초등학교 1ㆍ2학년을 생각하는 책이라고 못박을까 궁금한데, 아이들 눈높이를 헤아려 이와 같이 적을 수 있었겠으나, 이 그림책에 담긴 너비와 깊이를 살핀 우리 어른들이었다면, ‘예닐곱 살 어린이부터 함께 즐기는 그림이야기’라고 적어 놓지 않았겠느냐 싶습니다.

 그림책이란 어린이만 읽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화책 또한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화책을 초등학생만 읽는 책이라고 누가 말하든가요. 누가 그런 금을 함부로 그을 수 있습니까. 《몽실 언니》를 어린이만 읽어야 할까요? 《꼬마 옥이》를 아이들만 가슴 저미게 읽어야 할까요?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은 세상 살아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아직 모르는 사람들한테, 그리고 세상 살아가는 아름다움을 느끼면서 알아가고픈 사람들한테 길잡이가 되어 주는 책입니다. 이리하여 어린 아이들한테 ‘동무를 사귀는 기쁨과 보람’을 차근차근 깨닫도록 해 주려는 싱그럽고 맑은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나는 그만 집으로 돌아왔단다. 집에 와서 또 다른 모퉁이를 보았지. 우리 집 모퉁이 말이야.”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너 거기서도 돌아다녔니?” 하고 두꺼비가 물었어요. “그럼, 그 모퉁이도 돌아다녔어.” 하고 개구리가 대답했지요. “무얼 좀 보았어?” “나는 해가 구름 속에서 나오는 걸 보았어.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노래하는 것도 보았어. 어머니하고 아버지하고 꽃밭에서 일하시는 것도 보았어. 꽃밭에는 꽃들이 활짝 피어 있었어!” “드디어 봄을 찾았구나!” 하고 두꺼비가 기뻐 소리를 질렀어요. “응, 나는 정말 기뻤단다. 봄이 온 모퉁이를 찾아냈으니까.” ..  (26∼28쪽)


 중학교 1학년이 된 처남은 학교 말고 학원도 나갑니다. 다른 동무들도 학원을 나갑니다. 초등학교 때에도 학원을 나갔습니다. 우리 나라나 일본에서는 아주 마땅한 일처럼 받아들여지는 학원 다니기인데, 두 나라를 빼놓고(어쩌면 중국도 비슷할는지 모릅니다만) ‘학교에서 치르는 시험공부를 더 하거나 미리 하려는’ 학원에 다니는 나라는 지구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 나라 많은 분들이 우러러 마지 않는 미국에조차도 입시학원이란 없습니다. 프랑스에 있을까요? 영국에 있는가요? 독일에 있는지요? 우리는 입을 벙긋할 때마다 ‘세계화’니 ‘글로벌’이니 ‘선진국’이나 ‘경제대국’이니 읊고 있는데, 아이들한테 입시지옥을 선물하는 나라가 무슨 앞서거나 잘사는 나라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아이다움을 키우면서 제 꿈과 뜻을 고이 펼치거나 나누도록 하지 않는 어른들이 권력을 움켜쥐고 있는 나라가 어떤 좋은 나라가 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학원에 다녀야 한다면, 노래를 배우고 그림을 배우고 글을 배우고 연극을 배우며 춤을 배우는 한편 농사일을 배우고 뜨개질과 손빨래 들을 배우는 ‘삶이 있는 다른 배움터’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입시음악이나 입시미술이나 논술학원이 아닌 ‘삶을 가꾸는 노래’와 ‘삶을 빛내는 그림’과 ‘삶을 밝히는 글’을 익히는 새로운 배움터를 다녀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 “이런, 달고 시원한 아이스크림이 죄다 씻겨 내려갔네.” 하고 두꺼비가 말했어요. “걱정 마, 두껍아. 내게 좋은 방법이 있으니까.”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개구리와 두꺼비는 재빨리 가게로 달려갔어요. 그런 다음 둘이는 커다란 나무그늘에 앉아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었답니다.” ..  (40∼41쪽)


 어린 처남은 초등학교 때에도 동무들과 겨루어야 했습니다. 그나마 처남이 다닌 초등학교는 아주 작은 학교였고 반도 세 반에다가 한 반 아이들 숫자가 참 적었습니다. 그렇지만 중학교에는 아홉 반에다가 한 반에 마흔이 넘는 아이들이 있고, 이 아이들은 서로서로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는 데로 내몰립니다. 아니, 교사 스스로 내몹니다. 교과서가, 교과 제도가, 교육 틀거리가 모두 입시지옥일 뿐입니다. 아이들한테 빛나는 마음과 넉넉한 얼과 따순 숨결을 북돋우는 터전이 아니라, 숱한 지식과 셈 잘하는 머리와 돈되는 일거리 생각하기에만 매이도록 하는 감옥과 같습니다.

 그래도 처남 스스로 제 삶을 잘 다스리면 될 노릇이고, 동무들하고도 사이좋게 어울리면서 즐겁게 뛰어놀 수 있으면 될 노릇입니다. 학교옷이 땀과 먼지로 뒤엉키도록 신나게 놀 수 있는 가슴과 팔다리가 있으면 됩니다. 어른들이 내어주는 ‘독후감 숙제’ 때문에 억지로라도 책을 읽게 된다 하여도, 제 깜냥껏 삭이고 빨아먹을 수 있으면 됩니다. 느낌글이 어수룩할 수 있고 글씨가 삐뚤빼뚤일 수 있지만, 책마다 담긴 고운 이야기를 제 마음바탕에 담아 놓을 수 있으면 됩니다.


.. 개구리는 두꺼비 집에 와서 집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마침 다행이다, 두꺼비가 집에 없으니. 누가 갈퀴질했는지 모르겠지.” 두꺼비는 개구리 집에 와서 집 안을 들여다보았어요. “마침 다행이다, 개구리가 집에 없으니 누가 갈퀴질했는지 짐작조차 못하겠지.” 개구리는 열심히 일했어요. 갈퀴질을 해서 나뭇잎 더미를 만들었어요. 곧, 두꺼비네 마당이 말끔해졌어요. 개구리는 갈퀴를 집어들고 집으로 왔지요. 두꺼비는 여기저기 갈퀴질을 했어요. 갈퀴질을 해서 나뭇잎 더미를 만들었어요. 곧, 개구리네 마당에는 나뭇잎이 하나도 없게 되었어요. 두꺼비는 갈퀴를 집어들고 집으로 왔지요. 바람이 불어왔어요. 바람이 휙 지나갔어요. 개구리가 갈퀴질한 나뭇잎 더미가 사방으로 날렸어요. 두꺼비가 갈퀴질한 나뭇잎 더미가 사방으로 날렸어요 ..  (46∼50쪽)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사귀는 동무는 놀이동무입니다. 그 다음으로 소꿉동무이고, 그 다음으로 배움동무이고, 그러고 나서 일동무입니다. 그 뒤 한참 지나서 길동무를 만나고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를 만나게 됩니다. 처음부터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를 만날 수 있지만, 이러한 마음동무와 사랑동무는 놀이동무와 소꿉동무를 함께 거치곤 하지, 놀이와 소꿉과 배움과 일을 한꺼번에 뛰어넘으며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어린 처남이 이런 흐름과 삶과 동무를 제 나이와 자리에 맞게 바라보고 어울리고 웃고 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랴 생각합니다.

 저 또한 어릴 적부터 사귀고 만나고 어울려 온 수많은 동무들을 떠올리면서, 서로서로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즐겁게 제 길을 가면서 오래도록 한마음으로 기쁘게 술잔을 부딪힐 수 있기를 꿈꿉니다. 어느 한때 잠깐 스치던 사이가 아니기를 꿈꾸고, 저마다 제 밥그릇에 따라서 사귀다가도 헤어지다가도 등치다가도 하는 사이가 아니기를 꿈꿉니다.

 저는 동무한테 빛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힘이 되면서,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하는 가운데 늙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동무한테 눈물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웃음이 되면서, 거리낌없이 술벗으로 만나는 동안 주름이 늘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저는 동무한테 사랑이 되고, 동무는 저한테 믿음이 되면서, 꾸밈없이 속을 털어놓는 말벗으로 복닥이고 복닥인 끝에 흙으로 조용히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그린 ‘아놀드 로벨’ 님은 1933년에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이 그림책만 하여도 1976년에 그렸습니다. 당신 나이 마흔셋일 때 빚은 작품이군요. 이밖에 《개구리와 두꺼비가 함께》, 《개구리와 두꺼비의 하루하루》, 《개구리와 두꺼비는 친구》 같은 그림책이 우리 말로 옮겨져 있습니다.

 개구리며 두꺼비며 겨울잠 없이 썰매를 타고 논다거나, 예수님나신날을 즐긴다거나, 얼음과자를 맛본다든가, 집 앞에 쌓인 가랑잎을 쓴다든가 하는 일이란, 어떻게 보면 터무니없는 일입니다만, 아이부터 어른까지 ‘개구리와 두꺼비는 징그러운 물뭍짐승으로 여기는’ 잘못된 생각을 톡톡 건드리면서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을 가만히 돌아보게 해 주는 반가운 벗님들 삶자락입니다. 개구리는 개구리 나름대로, 두꺼비는 두꺼비 깜냥껏 저희들 삶이 있고 저희들 꿈이 있으며 저희들 놀이와 일이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 고운 목숨을 물려받으면서 아름다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사람들만 바삐 살지 않아요. 사람들만 땀흘리지 않아요. 사람들만 사랑을 하나요. 사람들만 밥을 먹나요. 사람들만 동무하고 어울리나요.

 개구리는 개구리대로삽니다. 두꺼비는 두꺼비대로 땀흘리고 사랑하고 밥을 먹고 동무와 어울립니다. 흰둥이는 흰둥이대로, 깜둥이는 깜둥이대로, 누렁둥이는 누렁둥이대로 제 땅에 발붙이면서 삶을 꾸리고 사랑하고 어울리고 사귑니다. 못생긴 이나 잘생긴 이나 마찬가지이며, 돈 많은 이나 가난한 이나 다르지 않습니다. 똑똑한 이나 어리석은 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저마다 고운 삶이 있습니다. 저마다 고운 삶을 즐깁니다. 얕은 사람 눈길에는 조금도 고와 보이지 않을 테지만. 비뚤어진 사람 눈썰미로는 하나도 곱다고 느껴지지 않을 테지만.


.. 그런데 개구리가 거기 있는 것이었어요. “안녕, 두껍아, 늦어서 정말 미안해. 선물 꾸리다가 그만 늦었어.” “너 구덩이에 안 빠졌어?” “응.” “너 숲에서 길 잃지 않았어?” “으응.” “너 커다란 동물한테 안 쫓겼어?” “그래, 전혀 그런 일 없었어.” “와, 개굴아, 너하고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낼 수 있어서 정말 기뻐.” 하고 두꺼비가 말했어요 ..  (62∼63쪽)


 아놀드 로웰 님은 개구리는 개구리대로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껴안으면서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빚어냅니다. 두꺼비는 두꺼비대로 믿음직스럽게 헤아리고 보듬으면서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을 내놓았습니다.

 돈으로는 사랑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참된 사랑은 처음부터 돈을 생각하고 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이름값으로는 믿음을 살 수 없을 뿐 아니라, 살가운 믿음은 처음부터 이름값을 살피지 않음을 일러 줍니다. 힘이 세다고 평화를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운 평화는 처음부터 힘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음을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이러저러그러한 모든 이야기를 수수하게 그려 보이는 그림책 《개구리와 두꺼비의 사계절》입니다. 책겉에 적힌 말처럼 ‘초등학교 1ㆍ2학년’ 어린이도 손쉽게 알아채거나 느낄 수 있도록 짜여 있습니다. 아주 가벼운 줄거리이고, 예닐곱 살 어린이가 아니라 너덧 살 어린이도 어버이가 조곤조곤 읽어 주면 좋아라 들으면서 받아들일 수 있게끔 엮여 있습니다.

 읽거나 듣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읽어 주거나 먼저 살피며 책값 치르어 사드는 어른은 어른대로, 이 그림책 하나를 펼치는 동안 우리 앞에 펼쳐지는 푸르고 밝은 새나라 이야기에 빠져들도록 합니다.


.. “우리, 썰매 타고 언덕 아래로 내려가자.” 하고 개구리가 말했어요. “나는 싫어.” 하고 두꺼비가 대꾸했지요. “무서워하지 마. 내가 같이 탈 테니까. 썰매는 신나게, 빠르게 달릴 거야. 두껍아, 네가 앞에 앉아. 내가 너 뒤에 앉을 테니까.” ..  (8쪽)


 그림책은 누가 읽는 책인지 잘 모르겠다면 아놀드 로웰 님 작품을 살며시 집어들어 보면 됩니다. 그림책이 왜 좋은가 궁금하다면 아놀드 로웰 님을 비롯한 훌륭한 앞선 사람들 작품을 가만가만 돌아보면 됩니다. 그림책이란 어떤 책인지 아직 모르겠다면 나라 안팎 손꼽히는 그림책 작가를 알아보면서, 이분들 작품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면서 뭉클하게 움직이는지를 아이 손을 붙잡고 함께 들여다보면서 느껴 보면 됩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허물이 없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울타리를 쌓지 않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얌전하고 다소곳하게 문을 활짝 열어 놓습니다. 그림책이기 때문에 너나없이 웃고 울며 손에 쥘 수 있습니다. 보다가 찢어져도 괜찮고, 찢어지면 풀로 붙이거나 종이를 대면 되며, 망가지고 더러워져도 우리 아이들한테 두고두고 물려주게 됩니다. (4342.3.2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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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봉지 공주 비룡소의 그림동화 49
로버트 먼치 지음, 김태희 옮김, 마이클 마첸코 그림 / 비룡소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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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털털이 빈몸이 되어도 기쁜 ‘종이 봉지 공주’
 [그림책이 좋다 59] 로버트 문치+마이클 마첸코, 《종이 봉지 공주》



- 책이름 : 종이 봉지 공주
- 글 : 로버트 문치
- 그림 : 마이클 마첸코
- 옮긴이 : 김태희
- 펴낸곳 : 비룡소 (1998.11.26.)
- 책값 : 6500원


 (1) 옷이란, 우리 삶이란


 옆지기네 식구들이 살고 있는 일산집으로 찾아가려면 언제나 ‘탄현동 로데오거리’를 걸어서 가로질러야 합니다. 그 길을 가로질러야 나오는 아파트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느 날에는 한갓지지만, 주말이나 명절만 되면 버스정류장에도 자가용이 겹으로 서고 사람으로 바글바글하여 마치 놀이공원에 사람들이 모여든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나 ‘새옷 사려는 사람이 많은가’ 싶어 놀라고, 그렇게 옷 사려는 사람이 많으니 옷집만으로도 길디긴 거리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서울에서도 이화여대 앞 골목은 옷집으로 가득합니다. 꼭 로데오거리라는 이름이 붙은 곳이나 이대 앞만이 아니라도, 서울이며 부산이며 어디를 가든 가장 많이 눈에 뜨이는 곳은 밥집과 함께 옷집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밥과 옷과 집’,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만큼 옷집과 밥집이 많을밖에 없을 텐데, 때 되면 배가 고파지니 밥집이 많다고 하여도 때 되면 옷을 사야 하기에 옷집이 많을까요? 우리는 참말 입을 옷이 너무도 많이 있어야 하기에 옷집도 이토록 많아야 할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저랑 우리 옆지기랑 아기랑 세 식구는 옷을 사입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아기 옷은 모두 이웃한테서 얻어 입힙니다). 한두 해도 아닌 열 해 남짓 입고 입고 또 입어 헐고 해지고 더 기워 입기 어렵다 싶을 무렵 비로소 한 벌을 새로 장만합니다. 이렇게 장만하지 않아도 틈틈이 이웃한테서 ‘못 입게 되거나 입을 겨를이 없어 내놓게 되는 옷’을 얻곤 합니다. 행사장에서 나누어 주는 옷이라든지 모임에서 주는 옷을 하나둘 챙기다 보면, 이런 옷가지들을 번갈아 입어도 죽는 날까지 다 못 입고 남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저한테는 아직 봉지도 못 뜯은 행사 기념 옷이 몇 벌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옷 갖춤새는 우리 식구 이야기일 뿐이지 싶습니다. 거리마다 넘치는 옷집들을 보면. 길거리 돌아다니는 젊고 늙은 사람들 반짝이고 빛나고 고운 옷차림을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새로운 집으로 옮길 때에는, 무엇보다도 옷가지 짐이 가장 많게 되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책은 몇 묶음이 없어도, 아니 책은 한 묶음조차 없어도 옷꾸러미는 몇 상자 나오지 않을까 궁금합니다.


..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운 공주였습니다. 엘리자베스 공주는 성에 살았지요. 그 성에는 비싸고 좋은 옷들이 많았습니다. 또 공주는 로널드 왕자와 결혼하기로 되어 있었죠 ..  (2쪽)


 헌옷 모으는 통에 안 입는 옷을 모으면 다시쓰기가 된다지만, 좀더 깊이 돌아본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쓰기를 하지 않아도 될 만큼 덜 사고 덜 쓰고 덜 누려도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같은 옷을 날마다 빨아 날마다 갈아입어도 여러 해 너끈히 입을 수 있습니다. 옷 두 벌을 이틀 걸러 빨아 입어도 꽤 긴 햇수에 걸쳐 입을 수 있습니다. 옷 세 벌쯤을 사흘 걸러 빨아 입어도 오래오래 입게 됩니다. 한 주에 일곱 벌을 날마다 갈아입으면 훨씬 오래 간수하며 입을 수 있을 테고요.

 그러나, 날마다 빨아야 하는 옷이 아니요, 날마다 갈아입어야 하는 옷이 아닙니다. 날마다 새로운 차림새로 다녀야 하는 우리들이어야 하나요. 날마다 새로운 차림새로 다닌다고 날마다 새로운 우리들이 되던가요. 겉차림이 새롭다고 마음차림도 새로울까요. 겉꾸밈이 새롭다고 속차림도 새로운가요. 하루쯤 덜 빨아 물을 아낄 마음을 키울 수 없는지요. 옷 한 벌 덜 사면서 지구자원을 적게 쓰려는 마음을 북돋울 수 없는가요.


.. 어느 날, 무서운 용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용은 공주의 성을 부수고, 뜨거운 불길을 내뿜어 공주의 옷을 몽땅 태워 버렸지요. 그리고 로널드 왕자를 잡아갔습니다. 공주는 용을 뒤쫓아가서 왕자를 구해 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옷이 몽땅 타 버려서 입을 것이 없었지요. 공주는 사방을 둘러보았습니다. 그때 종이 봉지 한 장이 눈에 띄었습니다. 공주는 종이 봉지를 주워 입고 용을 찾아나섰습니다 ..  (4∼6쪽)


 우리는 우리 스스로 껍데기만 키우고 알맹이는 내버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가 애써 벌어들인 돈으로 마음차리기는 못하는 가운데 겉차리는 데에 온힘을 쏟아붓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니, 우리는 날마다 새옷을 뽐내고 싶은 나머지, 새옷 장만하려고 죽어라 일하고 죽어라 돈벌고 죽어라 경제성장을 외치는 쳇바퀴에 갇혀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알맞게 일하고 알맞게 벌어 알맞게 우리 삶을 즐기는 길에서 멀리 벗어나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즐거운 삶보다 남 앞에서 자랑하거나 내보이는 치레에 매여 버리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2)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를 꺼내어 읽습니다. 몇 번씩 보고 또 보았으나, 볼 때마다 늘 새롭고, 덮을 때마다 늘 웃음이 터져나와 히죽히죽거리게 됩니다. 장난꾸러기인데가 욕심꾸러기인 용 한 마리는 ‘책에서 주인공인 공주’가 사는 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립니다. 배가 고파서 성을 통째로 구워먹는다고 하는데, 성만 구워먹지 않고 성에서 공주와 함께 혼인할 왕자까지 얌체처럼 붙잡아 갑니다. 그리고, 왕자만 붙잡아 가지 않고 공주가 입던 옷마저 홀랑 태웁니다.

 용으로 보자면, 공주를 안 잡아먹고 살려 두었으니 고맙다고 할 노릇일 텐데, 공주한테는 자기 집이며 왕자며, 거기다가 옷까지 빼앗겨 버렸으니 용처럼 괘씸한 녀석이 없습니다. 이리하여 공주는 용한테 앙갚음을 해 주고 왕자도 찾아오리라 다짐하게 되고, 씩씩하게 용을 찾으러 길을 나섭니다. 그러고는 아주 슬기롭게 용을 골탕먹이고 왕자를 살려냅니다(그렇지만, 용이 숲을 홀랑 태워 버리게 하는 대목은 퍽 슬픕니다. 애꿎은 숲……).

 아마 여기까지는 어디에서나 흔히 들을 수 있는 모험 이야기요, 왕자와 공주 이야기라 할 텐데요, 다만 한 가지, 왕자가 공주를 찾으러 안 가고 공주가 왕자를 찾으러 간다는 대목에서 사뭇 다릅니다. 더구나, 공주는 용한테 옷까지 모두 빼앗겼으니(왕자로 치면 무기가 하나도 없는 맨몸), 도무지 맨주먹으로 무슨 앙갚음을 하겠느냐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남자이든 여자이든, 똑똑이이든 어리보기이든 빼어난 무기로만 용을 마주할 수 있지 않아요. 어리석은 머리라 해도 조금씩 생각을 하고 마음을 쓰면 얼마든지 어려움에서 빠져나올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무엇보다도 ‘용이든 무엇이든 다 나오라고 해!’ 하는 씩씩하고 튼튼한 넋이 있어야 할 테지요. 슬기로움에다가 씩씩한 넋, 이 두 가지는 바로 《종이 봉지 공주》에서 ‘종이 봉지를 입은 공주’가 우리한테 보여주는 가장 크고 굳센 힘입니다.


.. 공주는 훌쩍 용을 뛰어넘어 동굴 문을 열었습니다. 동굴 안에는 로널드 왕자가 있었지요. 왕자는 공주를 보더니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엘리자베스, 너 꼴이 엉망이구나! 아이고 탄 내야. 머리는 온통 헝클어지고, 더럽고 찢어진 종이 봉지나 걸치고 있고.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와!” ..  (22쪽)


 한 가지 더.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에서 ‘무시무시한 용한테서 풀려난 왕자’는 아주 얼뜨고 건방진 말을 공주한테 건넵니다. 기껏 목숨을 살려 주었더니 하는 말이, 용이 뿜은 불이 공주 머리가 타서 냄새가 난다느니, 옷은 걸레짝 같다느니 하는.

 모르는 노릇이지만, 나라에서 힘있다고 뽐내는 분들이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이와 같이 우쭐대거나 콧대 높은 말과 몸짓을 보여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고마움을 고마움으로 느끼지 못하는 마음에 갇히고, 마땅히 받아야 할 선물을 받았다고 여기는 마음에 갇히며, 사랑과 믿음을 두루 나누기보다는 홀로 차지하려는 마음에 갇힌 셈입니다. 용한테서 풀려났지만, 몸뚱이는 풀려났어도 마음은 풀려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자기를 풀려나게 한 사람들이 얼마나 애를 쓰고 힘을 썼는가를 느끼지 않고 돌아보지 않습니다.

 용보다 괘씸하다기보다 딱합니다. 불쌍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좁살뱅이 마음인지 구슬프기까지 합니다. 공주로서는 이런 못난 왕자와 혼인을 꿈꾸고 있었다니 자기 눈이 삐어도 한참 삐었다고 느낄 만할 테고요.

 그런데, 어려움에서 빠져나온 철없는 사람들만 이렇게 고마움을 모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려움에 빠져 보지 않은 철없는 사람들은 죽는 날까지 자기들이 입거나 받는 고마움이 무엇인지를 하나도 헤아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자기 둘레에 어떤 이웃이 있고 어떤 벗들이 있는지를 살피지 못할 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둘레 사람들하고 어깨동무를 하며 살아가는 기쁨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할 수 있습니다. 콩 한 톨을 나누어 먹는 마음을 모르고, 밥 한 숟갈 나누어 먹는 마음을 모르며, 이불 한귀퉁이 나누어 덮는 마음을 모르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되어, 그림책 《종이 봉지 공주》는 마지막에 이릅니다. 마지막은, 건방지고 얼뜬 왕자한테 공주가 하는 말과 몸짓입니다. 공주는 왕자한테 무엇을 어떻게 할까요? 뺨을 한 대 갈길까요? 용이 왕자를 가둔 곳에 왕자를 도로 데려다 놓을까요? 왕자가 입던 옷을 모조리 벗겨 공주가 갈아입은 다음 종이 봉지를 왕자한테 씌울까요? 그래도 왕자가 시키는 말이니 어디에서든 새옷을 얻어입고 왕자한테 올까요?

 끝마무리는 어찌 보면 싱거울 수 있고, 아쉬울 수 있고, 밋밋할 수 있고, 그냥 그렇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리라 봅니다. 다만, 공주는 제 집을 잃었고 사랑을 잃었으며 옷이며 돈이며 모두 다 잃었는데에도 기쁘고 신나서 춤을 춥니다. 왜 신나서 춤을 추는지, 왜 빈털털이 빈몸이 되었음에도 기뻐하는지는 …… 그림책을 덮는 분들 스스로 가만히 헤아려 볼 노릇입니다. (4342.3.1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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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라 메뚜기 - 3~8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23
다시마 세이조 글.그림, 정근 옮김 / 보림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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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바꾸고 싶으면, 내 삶을 아름다이 가꾸자
 [그림책이 좋다 58] 다시마 세이조, 《뛰어라 메뚜기》



- 책이름 : 뛰어라 메뚜기
- 글ㆍ그림 : 다시마 세이조
- 옮긴이 : 정근
- 펴낸곳 : 보림 (1996.9.20.)
- 책값 : 8000원



 (1) 아름답게 가꾸고 싶은 삶


 옆지기가 먹을 푸성귀를 장만하러 생협 나들이를 갑니다. 그러나 오늘은 생협 매장 문을 열지 않아 헛걸음을 하고 터덜터덜 돌아옵니다. 어제 다녀왔어야 했다고 생각해 보아야 벌써 지나간 일입니다. 하는 수 없이 생협보다 비싸고 멀리 있는 ㅇ마트까지 가서 장만해야 합니다.

 가는 길 오는 길 다른 골목을 걷습니다. 가는 길은 늘 걷는 안쪽 샛골목입니다. 사람들은 으레 자동차 많이 오가는 싸리재 찻길로 다니지만, 우리는 이 찻길 바로 옆으로 난 골목집 사이를 잇는 ‘자전거도 못 지나가고 사람만 지나갈 수 있는’ 샛골목을 걷습니다.

 벌써 몇 해째 거니는 길인데, 이 길을 걷는 하루하루 새롭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에 따라 새롭기도 하지만, 어제 다르고 오늘 다릅니다. 어제 못 본 모습을 오늘 보고, 오늘 못 본 모습은 내일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이 골목집 가운데 어느 한 집에 눌러살게 되더라도 날마다 다른 집살림을 느끼게 되지 않으랴 싶습니다.

 경동 샛골목을 지나다가, 27번지 문패를 보고는 우뚝 걸음을 멈춥니다. 볕이 잘 안 드는 자리에 있기는 해도, 비와 바람에 닳고 낡은 문패는 이 집이 이곳에서 얼마나 오래도록 뿌리내리면서 삶을 이어왔는지 보여줍니다. 이제는 빈집이 된 이곳, 앞으로 어찌 될는지 알 수 없는 이곳, 이제 이 집이 재생사업이니 도시정화사업이니 하는 이름으로 헐리게 되면, 문간에 아주 단단히 붙여놓아 떨어지지도 않을 터라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릴 저 문패며 집이며 대문이며 …….


.. 조그마한 수풀 속에 메뚜기 한 마리가 숨어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아주 무서운 녀석들이 메뚜기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었지요. 그래서 메뚜기는 날마다 깜짝깜짝 놀라며 살았습니다 ..  (2∼4쪽)


 아침에 아기를 씻기고 빨래를 하니 금세 낮으로 바뀝니다. 넘어져 다친 손가락과 팔꿈치 아픔을 찌릿찌릿 느끼면서 비빔질을 하고 물짜기를 합니다. 부시시한 눈도 비비면서 빨래를 모두 끝마치고 옥상마당에 차곡차곡 내다 널고 걸고 나니 조금은 개운합니다. 삼월을 맞이하며 한결 따뜻해졌다고 느껴지는 이 햇볕을 쬐는 빨래는 한결 보송보송 마르며 아기 몸한테도 고운 햇살을 이어주리라 믿습니다.

 한동안 옥상마당을 서성이며 둘레 골목집을 둘러봅니다. 바지런한 골목집에서도 아침 빨래를 마치고 저마다 저희 옥상마당에 빨래를 내다 넙니다. 옥상마당이 따로 없는 골목집은 창문가나 골목가에 빨래줄을 이어 넙니다. 모르는 사람은 골목집과 골목집 사이에 줄이 왜 이어져 있는지 모르기 일쑤이고, 또 지저분하게 이런 줄을 왜 이었느냐 궁시렁거리기도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기 마련입니다.


.. 메뚜기는 이런 곳에서 겁먹고 사는 것이 몹시 싫어졌어요 ..  (7쪽)


 제가 처음 태어난 동네를 서른 몇 해 만에 찾아가 ‘떠오르지도 않는 그 옛날’ 모습은 어떠했을까 생각해 보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 또 숱하게 옮겨다니며 살았다는 동네를 하나하나 되찾으며 ‘그때 어느 집에 살았을까’ 곱씹으며 사진을 찍는 동안, 그리고 고향땅이 싫어 서울로 충주로 또 다른 이 마을 저 마을 구석구석으로 떠돌며 지내던 때에도 이곳에 고이 남아서 살아온 사람들 삶자락을 온몸으로 느끼며 사진을 찍는 동안, 마음이 아립니다. 저로서는 ‘적바림하는’ 사진(기록사진, 다큐사진)이 아님에도 제가 찍는 사진을 적바림 사진으로만 여기는 사람둘 눈길이 슬프고, 제가 만나고 부대끼는 사람들 삶터가 ‘없어져야 할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 마음이 슬프며, 고향 없이 돈만 바라며 집자리를 옮겨다니게 되는 사람들 모습이 슬프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는 나무처럼 뿌리내리면서 싱그럽고 시원한 그늘을 백 해 이백 해 즈믄 해 선사하는 사람으로는 살아가지 못할까요. 왜 우리는 산처럼 우람하고 튼튼하게 선 채로 맑고 밝은 숨결을 널리널리 고이고이 베푸는 사람으로는 살아내지 못할까요.

 돈이 되어야만 하는 일이 아니라 즐거웁기에 하는 일이 될 수는 없는지 아쉽습니다. 재미가 있어야만 즐기는 놀이가 아니라 마음이 따뜻해지고 넉넉해지기에 함께하는 놀이가 될 수는 없는지 아쉽습니다. 이름값을 높여야만 맡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을 주고받을 수 있기에 맡는 자리가 될 수는 없는지 아쉽습니다.


.. 메뚜기는 커다란 바위 꼭대기로 나와 대담하게 햇볕을 쬐기 시작했어요. 이렇게 하면 금방 남의 눈에 뜨여 잡아먹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에요 ..  (10쪽)


 빨래를 마치고 쌀을 씻다가 생각합니다. 우리 식구는 누런쌀에 온갖 다른 곡식과 콩팥을 잔뜩 섞어 먹는 밥이 맛있다고 여기고, 여느 흰쌀밥은 도무지 씹을 수 없어 맛없다고 느끼는데, 어쩌면 우리 삶이 하루하루 흰쌀로만 밥을 먹듯 우리 생각과 삶도 흰쌀처럼 되어 가고 있지 않느냐고.

 사람몸에 도움되는 알맹이를 다 깎아내어 허여멀겋게 남은 흰쌀로 지은 밥이 마치 좋은 밥이라도 되고 맛난 밥이라도 되는 양 잘못 알듯 우리 생각과 삶도 흘러가지 않느냐고.

 버려지는 알맹이마냥 우리 몸과 마음에 깃든 아름다움을 우리 스스로 내동댕이치거나 내버리고 있지 않느냐고.

 우리들 모두한테는 마음자리 깊숙한 데에 하느님이 살아 있는데, 우리 마음자리에 깃든 하느님은 못 본 채 절집과 예배당과 성경과 불경만 파고드는 우리들이 아니냐고.


.. 이제는 살 길이 없다고 생각한 순간, 메뚜기는 온힘을 다해 날갯짓을 했습니다.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면서, 위로 떠올랐습니다. “아니 저게 뭐야. 뭐가 저렇게 날아?” 잠자리가 사뿐 날아들며 메뚜기를 비웃었습니다. “하하하. 저런 엉터리 날갯짓!” 나비들이 나풀나풀 가볍게 날면서 떠들어댔습니다 ..  (26∼28쪽)


 보채고 꿍얼대다가 엄마젖을 물고 가까스로 잠든 아기를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오늘은 아직 아침똥을 누지 않는데, 몸이 안 좋고 힘이 드는가 봅니다. 아기야, 네가 튼튼하게 놀고 먹고 자고 옹알이를 해야 엄마도 한결 즐겁고 고된 몸이 놓이면서 너한테 더 맛나고 좋은 젖을 줄 수 있단다, 부디 새근새근 잘 자고, 이따가 일어나면 다시금 신나게 놀자꾸나.


 (2) 《뛰어라 메뚜기》는 어떤 그림책인가


 1996년에 《뛰어라 메뚜기》(보림)가 옮겨진 다시마 세이조 님 그림책은, 2002년에 《늑대의 돼지 꿈》(현암사)이 두 번째로 옮겨지고, 2002년에 《1111마리의 벼룩과 고양이》(효리원)가 세 번째로 옮겨지며, 2006년에 《채소밭 잔치》(우리교육)가 네 번째로 옮겨진 다음, 2007년에 《엄청나고 신기하게 생긴 풀숲》(우리교육)이 다섯 번째로 옮겨지고, 지난 2008년에 《쿨쿨쿨》(보림)이 여섯 번째로 옮겨집니다.

 투박하면서 수수한 다시마 세이조 님 그림결은, 어떻게 보면 아이들이 마음껏 즐기는 그림결처럼 느껴집니다. 어른이면서 어린이 같은 그림을 흉내내는 분들이 제법 많고, 이런 그림이 퍽 사랑받고 있음을 헤아린다면, 다시마 세이조 님 그림은 ‘어떤 유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느 ‘아이들 그림 같은 그림’하고 다른 대목이 있어, 이분 그림책이 사랑받고 또 사랑스럽다고 느낍니다.

 첫째로, 아이들은 다시마 세이조 님처럼 그림을 그리지 못합니다. 거침없으면서 투박한 그림이지만, 이 거침없음과 투박함은 기나긴 세월에 걸쳐 스스로 녹여낸 붓질이지, 이제 막 붓을 잡은 아이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거침없음과 투박함이 아닙니다. 그러면서, 어설픈 잔재주나 섣부른 아이 흉내에 빠지지 않는 가운데 스스로 녹여낸 거침없으며 투박한 이 붓끝으로 ‘아이와 함께 나눌 삶과 생각’을 차분하게 담아냅니다.

 둘째로, 아이는 아이이고 어른은 어른입니다. 아이는 아이 삶이 있고 어른은 어른 삶이 있습니다. 어른은 아이 때를 거쳐 어른이 되는 동안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세상 보는 눈을 좀더 기르게 됩니다. 어른인 그림쟁이가 펼쳐 보이는 그림책은 아이한테 주는 선물이면서 아이 때를 거친 자기 발자국이고, 선물을 받아든 아이들 반짝이는 눈빛을 보면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는 고마운 눈물입니다. 그래서 잘 빚은 그림책은 억지로 떠먹이지 않는 몸에 좋으며 맛난 밥과 같고, 잘못 빚은 그림책은 아이 몸과 마음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아이가 거스르게 되는 달갑잖은 먹을거리와 같습니다.

 셋째로, 오래도록 서로서로 함께 나눌 이야기를 곰삭입니다. 어른으로서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고, 어린이로서 어른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저마다 다르게 찾습니다. 이런 길찾기는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어른은 또 어른대로 서로서로 눈을 마주하고 몸을 맞대면서 저절로 느낍니다. 겉으로 사랑한다 하는지, 입으로만 사랑한다 읊는지, 속으로 사랑하는구나 느껴지는지, 온몸으로 사랑을 보여주는지를, 서로서로 찬찬히 헤아립니다. 다시마 세이조 님 그림책은 스스로 즐거우면서 아이와 함께 즐거울 길을 차근차근 뚫고 가꾸고 돌보며 몸소 걸어가는 마음자락을 담아내는 놀이이면서 일입니다.


.. 하지만 메뚜기는 누가 뭐라고 해도 모르는 척했습니다. 자기 힘으로 날 수 있으니, 정말 기쁘고 즐거웠거든요. 메뚜기는 높이높이 날았습니다. 자기 날개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바람을 타고 날아갔습니다 ..  (30쪽)


 《뛰어라 메뚜기》라는 그림책은, 그린이 스스로 ‘뛰고 싶은 삶’을 보여줍니다. 스스로 펄쩍 뛰어오르려는 몸가짐을 보여줍니다. 부딪혀서 온몸이 조각조각 부수어질 수 있으나, 그렇다고 가만히 앉거나 뒤에 숨어 있는 채로 밟혀 죽거나 잡혀 찢어져 죽고 싶지 않은 메뚜기 마음을 보여줍니다. 아주 작은 한 가지부터 고쳐 나갈 길을 찾고, 이러한 길을 남들보고만 가라 하지 않고 스스로 먼저 갑니다. 말보다 몸이 먼저이고, 몸이 가면서 살며시 말을 건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바란다면 우리 스스로 아름다워져야겠지요.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겠지요. 비록 아름다워지려고 애쓰고 힘써도 아름다움에 가까이 닿지 못할 수 있으나, 그렇게 되든 안 되든 꾸준하게 애쓰고 한결같이 힘쓰는 삶이 바로 아름다움일 수 있어요. 이런 넋과 생각과 삶이 그림책 《뛰어라 메뚜기》에 고이 담깁니다. “전쟁이 싫어요!” 하고 외치는 목소리 하나로 전쟁을 거스를 수 없다고 하나, 바로 이 조그마한 목소리 외침이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발걸음 하나입니다. 그런 다음, 자기한테 싫은 전쟁을 맞이하지 않을 길을 하나씩 찾고,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내 마음을 가꿀 일거리를 찾으며, 전쟁을 멀리하고 평화를 불러올 사람 사귐을 헤아리는 가운데, 전쟁을 내어쫓고 아름다운 사랑이 가득할 삶이란 어떻게 가꾸는가를 톺아보면서 스스로 일구게 됩니다.


.. 메뚜기는 황무지를 지나, 멀리멀리 날아갔습니다 ..  (32∼34쪽)


 두꺼비, 뱀, 사마귀, 거미, 새, …… 여기에 사람까지. 메뚜기를 괴롭히거나 들볶는 녀석들은 아주 많습니다. 그래서 이 짜증스럽고 무서운 녀석들한테서 몸을 숨기면서 아주 외롭고 쓸쓸하게 어두운 구석에 갇혀 지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온몸이 부서지거나 목숨마저 잃을지라도 다부지고 당차게 몹쓸 녀석들하고 한판 붙을 수 있습니다. 굳이 한판을 붙지 않더라도 우리 나름대로 밝고 맑게 살아갈 길을 찾아나설 수 있습니다. 좀 굶주리더라도, 좀 헐벗더라도, 좀 가난하더라도. 좀 고달프더라도, 좀 힘들더라도, 좀 괴롭더라도. 좀 벅차더라도 나와 같은 길을 가는 벗을 만나며 서로가 서로한테 힘이 됩니다. 좀 고단하더라도 우리와 같이 걷는 이웃을 사귀며 오순도순 어깨동무를 하며 사랑힘을 키웁니다. 좀 더디고 오래 걸리더라도 차근차근 밑바탕부터 다지면서 우리 스스로와 우리 뒷사람 모두한테 흐뭇할 터전을 갈무리합니다. 그러면서 바야흐로 거칠고 메마른 땅을 훨훨 날아서 가로지르고, 우리가 꿈꾸던 싱그럽고 고운 세상에 가 닿게 됩니다. (4342.3.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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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자라는 물고기 - 목어 이야기 우리 문화 그림책 14
김혜리 글.그림 / 사계절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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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문화’를 담는 그림책이라 한다면
 [그림책이 좋다 57] 김혜리,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



- 책이름 :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
- 글ㆍ그림 : 김혜리
- 펴낸곳 : 사계절 (2009.1.22.)
- 책값 : 9800원

 





 (1) 그림책을 펼치면서 즐거움


 절에는 나무로 만든 물고기인 ‘목어’가 있습니다. 이 ‘나무물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는 《교원청규》라는 책에 실려 있다고 합니다. 아침저녁으로 두들기면서 마음닦이 하는 이들이 잠을 쫓고 마음을 맑게 다스리도록 도우려고 쓰는 나무물고기라고 합니다. 그림책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는 절에서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늘날 어린이들한테 절에서 흔히 보는 나무물고기가 어떻게 해서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재미나고 싱그럽게 보여줍니다.

 어쩌면 오늘날 절은 산속 깊이깊이 들어가 있어서 이와 같은 나무물고기 하나를 눈여겨보기 어려울 수 있고, 절에 깃든 우리 옛 문화재를 이야기할 때에도 돌탑이나 대웅전이나 벽그림처럼 크게 앞세워지지는 않아 알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를 그려낸 분은 절집을 이루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에 담긴 애틋함을 잘 담아내었고, 이 애틋함을 돌아볼 만한 마음그릇이 되어야 비로소 절집에서 마음닦이를 하는 뜻을 스님들 스스로 돌아볼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책을 펴낸 ‘사계절’ 출판사에서도 “우리 문화 그림책”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우리가 찬찬히 헤아리지 못하거나 스쳐 지나가는 우리 삶자락을 아이들이 하나하나 돌아볼 수 있게끔 해 주는 일을 하면서 어느덧 열네 번째 그림책을 선보입니다.

 저 또한 이 그림책을 보면서 절집에 매달린 나무물고기가 이러한 이야기에서 비롯했구나 하고 깨닫고, 나중에 절집에 가면 나무물고기를 좀더 애틋하게 쓰다듬어 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됩니다. 아기 엄마가 아기한테 이 그림책을 펼쳐서 보여주니, 아기도 크고작은 그림과 빛있고 빛없는 그림에 눈길을 보내면서 까르르 하고 재미있어 합니다. 초등학교 아이들 또는 어린이집 아이들이 혼자서 보기에 재미있는 한편, 아이 키우는 어머니 아버지들이 함께 펼쳐서 보기에 즐거울 만한 그림책이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줄거리를 살펴봅니다. 그림책 주인공 이름은 ‘멋대로’입니다. 이 멋대로는 동자승이면서 큰스님 가르침을 잘 따르지 않고 허구헌날 장난만 치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장난과 못된 짓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병을 얻어 그만 일찍 죽었고, 죽은 뒤 물고기로 다시 태어났는데 물고기가 되어서도 못된 짓을 그치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하늘은 다시 벌을 내려 이 아이 ‘멋대로’ 등에 나무가 자라게 하고, 이렇게 자란 나무 때문에 멋대로 물고기는 물속에서 움쭉달싹을 못하고 괴로워하다가 예전에 자기를 거두어 준 큰스님을 우연하게 만나서 잘못과 죄를 씻어내게 되고 ‘절에 매다는 나무물고기’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책 뒤에는 절집 문화와 역사, 그리고 나무물고기와 얽힌 이야기를 두 쪽에 걸쳐 실어 놓아서, 그림책을 보고 난 다음, 어버이와 아이가 ‘나무물고기’란 무엇이고 절집 문화와 역사는 어떻게 되는가를 찬찬히 살펴보도록 해 놓았습니다.
 







 (2) 그림책을 덮으면서 아쉬움


 다만, 책을 덮으면서 몇 가지 아쉽다고 느껴지는 대목이 엿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줄거리와 짜임새와 그림결’이기는 하나, 제멋대로 군다고 하는 ‘멋대로’라고 하는 아이는 왜 다른 아이와 달리 절집에서도 제멋대로 구는가 하는지가 《나무가 자라는 물고기》에는 제대로 담겨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꼭 담아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또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듯한 주인공’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이야기까지 담자면 그림책이 너무 길어진다고 할 테지만, 그림책을 덮는 마지막까지 이 궁금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다룬다고 하여 그림책이 그리 길어지지 않을 수 있으며, ‘처음부터 못된 아이는 하늘이 내린 벌을 받아야 한다는 느낌’을 넘어서, ‘이 아이가 제멋대로 굴게 되고 절집에 동자승으로 들어왔지만 큰스님이 큰스님답게 좀더 너그러이 아이를 보듬고 키우면서 애쓰는’ 이야기를 살며시 집어넣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렇게 애를 썼어도 멋대로라는 아이는 자기 삶을 찬찬히 되짚지 않고 더 제멋대로 까불면서 이웃을 괴롭히게 되었고, 이런 괴롭힘은 뒷날 고스란히 자기한테 돌아오게 되고, 이렇게 되돌아온 괴롭힘을 뼛속 깊이 느끼면서 ‘스님이 되어 마음닦이를 하는 뜻’뿐 아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서로서로 이웃과 동무가 되어서 살아가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를 짚는 데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지 않았나 싶어 아쉽습니다.

 그러나 그림책 하나에 이 모두를 담아내기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구태여 이런저런 대목까지 짚어내야만 하지는 않아요.

 그저 그림책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그림책에 나오는 동자승으로 있는 아이들이 어떤 까닭에 아빠 엄마와 어릴 때부터 헤어져 절집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언제부터 그처럼 제멋대로 굴던 아이였는지 나타나지 않아서 살짝 아쉬웠을 뿐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한두 줄로도 얼마든지 살을 입힐 수 있으니까요. 군말이지만, ‘멋대로’라고 하는 아이가 이렇게 제멋대로로 굴 때, 동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이 아이한테 마음을 안 쏟게 되는 흐름, 또 큰스님도 이런 대목을 짚지 못하는 대목이 섭섭하지만, 이런 섭섭함을 담아내자면 ‘나무물고기’라는 그림책은 나올 수 없었겠지요. 덧붙여, 이렇게 제멋대로 구는 아이가 잘못에 따른 벌을 받고 뉘우치면서 나무물고기로 다시 태어난다는 옛이야기를 고스란히 살려야 이 그림책이 마무리될 테고요.

 그렇지만 이 그림책이 옛이야기에 새옷을 입힌 창작물임을 헤아리기 때문에, 여러모로 아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이 아이가 마냥 멋대로 굴다가 하늘이 내린 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 되고, 이리하여 하늘이 내린 벌을 받았는데 다시금 잘못을 저지르고, 그런 다음 더 큰 벌을 받고서야 비로소 잘못을 뉘우치고 거듭 사랑을 받아 새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하는 줄거리만을 보여주어도 될까 하는 생각 또한 문득문득 듭니다. 이만한 이야기로는 굳이 새 옷을 입혀 빚어내는 그림책으로는 좀 모자라지 않을까 하는, 그래도 뜻있는 출판사에서 “우리 문화 그림책”이라고 내걸기까지 했는데, 좀 아쉽지 않느냐 하는 생각이 가시지 않습니다.

 옛이야기에 바탕을 두어야 비로소 나무물고기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기도 할 터이나, 옛이야기에 살을 붙이면서 남다른 재미를 보탤 수 있는 한편, 우리 둘레에서 얄궂은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 마음자리를 한 번 더 돌아볼 수 있는 자리가 되기도 합니다. 개구쟁이나 말괄량이가 아닌 ‘멋대로’가 되어 버린 아쉬움을 그저 따끔하게 꾸짖기만 하거나 아예 등돌리고 따돌리는 줄거리가 펼쳐지는데, 사랑으로 보듬어 주는 어른이나 동무 하나 없는 외로운 ‘멋대로’라고만 자꾸자꾸 느껴집니다. ‘외로운 아이가 외로움을 어찌하지 못하면서 그 외로움을 씩씩거리며 둘레에 화풀이를 해대는데, 이 화풀이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 주거나 껴안아 주는 이웃이나 어른이나 동무가 하나 없어 더 외롭고 더 까불고 더 나대는 모습’이 아니랴 싶은 생각이 자꾸자꾸 듭니다. 마음닦이에 들어서는 스님들한테 가르침을 베풀고자 지어낸 나무물고기 이야기를 함부로 손대거나 어줍잖게 뜯어고쳐서는 안 됩니다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려는 생각이 앞서면서 정작 우리 삶과 사람을 더욱 따뜻하고 애틋하게 보살피거나 쓰다듬어 주는 손길을 놓쳐 버릴 걱정이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이야기 끝에 가서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대목에서도 ‘등에 갑자기 나무가 자라서 옴쭉달싹 못하는 괴로움을 겪게’ 되었기 때문인데, 이러한 괴로움을 겪기까지 한 번쯤 살을 더 입혔더라면, 옛이야기 틀을 다치지 않게 하면서 한결 부드럽고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새이야기’로 태어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아쉬움을 더 들어 본다면, 그림책에 나오는 동자승 옷차림이 꼭 ‘우리 아이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때는 틀림없이 조선시대이고, 아이들은 절접 동자승입니다. 그리고 동네사람도 한복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저승사자 옷차림만 ‘펑퍼짐한’ 옷이고, 발목을 동인 매무새이고, 동자승이나 동네사람이나 ‘발목이 훤히 드러나는 짧고 통 좁은 바지’입니다. 웃도리도 몸에 쫙 달라붙는 옷을 입은 동자승이요 동네사람입니다. 그런데 절집사람뿐 아니라 여느 사람들 웃도리와 아랫도리가 이렇던가요? 우리 옷차림이 이렇게 ‘쫄티나 쫄바지’ 느낌이 나는 옷이었던가요?

 우리 한복은 ‘몸에 찰싹 달라붙도록 입지 않음’을 헤아린다면, 그리고 동자승한테도 ‘몸에 꼭 끼는 옷을 입히지 않음’을 돌아본다면, 비록 ‘그림책에 담는 새 창작 그림’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대목을 살리고 그 나름대로 북돋웠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그림책은 ‘그냥’ 그림책이 아닌 ‘우리 문화’ 그림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문화 그림책이라면 ‘우리 옷’이 우리 옷답게, ‘우리 집’이 우리네 집답게, ‘우리 사람’이 우리 사람답게 그려질 수 있는 바탕에서 새로운 창작이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342.2.2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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