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자전거 날쌘돌이
다바타 세이이치 글 그림, 엄혜숙 옮김 / 우리교육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고장나서 버린’ 자전거일까, ‘버려서 망가진’ 자전거인가
 [그림책이 좋다 70] 다바타 세이이치, 《고물자전거 날쌘돌이》


- 책이름 : 고물자전거 날쌘돌이
- 글ㆍ그림 : 다바타 세이이치
- 옮긴이 : 엄혜숙
- 펴낸곳 : 우리교육 (2009.4.1.)
- 책값 : 1만 원


 (1) ‘자전거 삶’이 되기까지는


 제가 태어나고 자란 인천 골목마실을 하면서 ‘버려진 자전거’를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잘 안 타는 채로 오래 묶여 있는 자전거’는 드문드문 보는데, 이런 자전거들은 어느 만큼 비눈바람을 맞고 있다가도 누군가 데려가서 헌 쇠붙이로 다시 쓰거나 헌 자전거로 손질해서 다시 쓰곤 합니다. 사람들이 자전거를 ‘안 버린다’라기보다는 ‘버릴 자전거가 없다’고 해야 맞는 말이라고 할까요.

 그러나 제 고향 인천이라 하여도 아파트가 많이 몰린 데에는 어김없이 ‘버려진 자전거’가 곳곳에 묶여 있거나 나뒹굴고 있습니다. 전철역 앞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이제는 한국땅에서 상식처럼 되었는데, 전철역이든 기차역이든 버스역이든 학교나 관공서이든 ‘자전거 주차장’이라고 삼은 곳은 ‘자전거를 대어 두는 곳’이 아닌 ‘안 타거나 못 쓰게 된 자전거를 버리는 곳’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자전거 주차장’ 간수를 허술하게 할 뿐 아니라, 비눈바람을 맞지 않게끔 지붕을 씌워 놓지 않기 일쑤요, 지붕을 씌워 놓았어도 비눈바람이 으레 들이칩니다.

 곰곰이 살피면, ‘자전거 주차장’에만 지붕이 제대로 없는 우리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서서 기다리는 버스역에도 지붕이 없기 마련이요, 지붕이 있어도 비를 제대로 못 가리기 마련입니다. 멋스럽게 꾸며 놓는 버스역 지붕은 곳곳에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대로 비눈바람을 그으면서 버스를 기다리도록 마련한 버스역 지붕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생각이 모자란 탓인지, 생각을 안 하는 탓인지, 정책이 없는 탓인지, 정책이 엇나간 탓인지, 건설업자가 대충 짓는 탓인지, 건설업자가 함부로 짓는 탓인지는 알 노릇이 없습니다. 다만, 이런 엉터리 ‘자전거 주차장’과 ‘버스역 지붕’이 판을 쳐도 우리들 스스로 아무 말이 없습니다. 만들어 주니 고마운 노릇이 아니냐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 이건 자전거 날쌘돌이입니다. 삐걱삐걱 괴상한 소리를 내던 날샌돌이는 결국 이런 곳에 버려졌습니다. “너무해! 난 쓰레기가 아니란 말이야. 제대로 손보면, 아직 힘차게 달릴 수 있다고!” ..  (2∼3쪽)


 지난주에 서울로 마실을 오며 대방동을 지나갈 무렵입니다. 지하도 들머리에 서 있는 자전거 한 대를 보았습니다. 몸통을 까맣게 바른 자전거인데, 얼핏 보기로도 버려진 자전거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니, 뒷바퀴에는 바람이 빠져 있고 안장은 사라졌습니다. 신문을 받아보면 신문사 지국에서 거저로 주는 자전거가 아닐까 싶은데, 예전 임자가 자전거 몸통을 까만 스프레이로 뿌렸습니다. 그런데 이 자전거는 왜 여기에 멀뚱멀뚱 서 있을까요. 뒷바퀴에 자물쇠를 채워 놓은 모습으로 보건대, 틀림없이 자전거 임자가 있을 텐데.

 누군가 이 자전거를 몰래 훔치려고 했을까요. 아니면, 이곳에 오래도록 묶여 있던 탓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장난 삼아 바퀴에 구멍을 내고 안장을 빼갔을까요.

 자전거 임자가 자전거를 사랑해 주지 않아 오래도록 내버려지고 있었다 할지라도, 이 자전거한테는 어김없는 임자가 있으니, 안장이든 다른 부속이든 훔쳐가서는 안 됩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바로 이 나라 사람들은 이런 ‘임자 있는 자전거 부속’을 몰래 빼내고 훔칩니다.

 저도 예전에 길가에 자전거를 묶어 놓고 조금 오래 볼일을 보고 돌아와 보니 중요한 부속을 누군가 빼내는 바람에 자전거를 못 타게 된 적이 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부속 빠진 자전거를 자전거가게로 끌고 가서 고쳤습니다. 그 부속은 그 자전거한테만 쓰는 부속이라 그 자전거를 다루는 대리점에서만 고칠 수 있는데, 그 부속을 빼낸 사람은 무슨 생각이었을는지 몹시 궁금했습니다. 당신한테도 저와 똑같은 자전거가 있기에 그 부속을 빼냈는지, 재미 삼아서 슬쩍했는지, 아니면 자전거 타는 사람을 못마땅해 하기에 일부로 놀려 주려고 했는지 더없이 궁금했습니다.


..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 하나 도와주러 오지 않았습니다. “아아, 나는 이제 틀렸어. 이런 채로 부슬부슬 녹이 슬어 죽고 말 거야!” 날쌘돌이는 엉엉 울고 말았어요 ..  (8쪽)
 





 우리는 자전거를 참으로 쉽게 얻고 쉽게 버립니다. 자전거를 쉽게 거저로 나누어 주고, 쉽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다 버립니다. 자전거 한 대를 장만하느라 이삼십만 원을 썼다면, 또는 이삼백만 원을 들였다면, 섣불리 길가 아무 데에나 자전거를 버리는 일이 있겠습니까. 또는, 짐자전거를 장만하여 일터에서 짐을 나르는 분들이라면 당신들 자전거를 가볍게 내다 버리겠습니까.

 우리 스스로 자전거를 어디에 쓰려고 생각하면서 장만한다면, 어디부터 어디까지 타고다니겠다고 생각하면서 마련한다면, 자전거를 함부로 버리는 일은 없으리라 봅니다. 내 쓰임새에 알맞게 자전거를 장만하려 한다면, 굳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멋져 보이는(뽀대나는) 자전거를 큰돈 들여 장만할 까닭이 없습니다. 집과 일터를 오가는 자전거를 타든, 가끔 먼 나들이 나가는 자전거를 타든 하려 한다면, 괜히 더 값나가는 자전거를 목돈 들여 마련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타는 자전거를 나중에 내 아이한테 물려주려는 마음이라면, 또는 내 둘레 이웃한테 넘겨주거나 내 가까운 동무나 살붙이한테 이어주려는 마음이라면, 아무 자전거나 쉬 사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틈틈이 손질하고 쓰다듬고 어루만지는 가운데, 언제나 ‘자전거 삶’을 즐겁게 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 겐지 할아버지는 정말로 자전거를 잘 고쳤어요. 이제는 날쌘돌이도 다시 태어난 것처럼 쌩쌩해졌습니다. “자아, 날쌘돌이야. 너, 아프리카에 가지 않을래?” “아프리카요?” “그래, 아프리카는 우리 인간들의 고향이란다. 그 아프리카가 이제 새롭게 다시 태어나려고 불끈 힘내고 있어. 희망 가득한 일이지. 여러 가지로 도움이 필요해. 난 너에게 그런 도움을 부탁하고 싶구나.” “나라도 괜찮아요?” ..  (18∼19쪽)


 봄부터 여름까지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석 달에 걸쳐 ‘자전거 정비’ 수업을 함께하면서 여러모로 자전거를 다시 생각하기도 했고, 아이들이 자전거를 바라보는 눈길을 새삼스레 느끼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아이들 어느 누구도 자전거를 처음 장만하던 날부터 자전거 수업을 하는 그때까지 ‘자전거 닦아 주기를 한 번조차 한 적이 없다’는 대목에서 놀랐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아이 어버이 되는 분들이 아이들한테 ‘얘야, 네 자전거는 네가 스스로 틈틈이 닦아 주고 만져 주고 기름 쳐 주고 해야지’ 하고 가르쳐 주지 못한 탓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 어버이 되는 분들한테 어버이가 되는 분들 또한 ‘자전거 손질하기’를 물려주지 못한 탓입니다.

 더 깊이 들어가면 자전거 손질을 일러 주지 못한 탓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내 손으로 내 옷을 빨고, 내 손으로 내 옷을 기우며, 내 손으로 우리 집 걸레를 빨아 우리 집 방바닥을 닦고 하는 버릇을 일찍부터 들여 놓았으면 ‘자전거 닦고 손질하기’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기 마련입니다. 자동차도 틈나는 대로 닦아 주면서, 아니 자동차는 꽤나 자주 닦아 주면서 자전거를 안 닦아 준다면 어딘가 얄궂지 않겠습니까. 무언가 뒤바뀌지 않겠습니까.


.. “날쌘돌이야, 먼 곳까지 잘 왔구나! 아산티 사아나(정말 고마워)!” 마을의 아이들과 모샤 아주머니가 크게 기뻐하며 마중을 나왔어요. 모샤 아주머니는 마을 보건소의 산파예요. 이렇게 해서 날쌘돌이는 모샤 아주머니를 태우고 일하게 되었습니다 ..  (36쪽)


 자전거는 두 다리보다 빠릅니다. 자동차는 자전거보다 빠릅니다. 그런데 도심지에서는 자동차가 자전거보다 그리 안 빠를 뿐더러 더 느리기도 합니다. 자동차는 짐을 많이 실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큰짐을 자주 날라야 하지 않는다면 자전거로 나르는 짐으로도 넉넉합니다. 때로는 자동차와 자전거 없이 가방을 메거나 수레를 끌면서 짐을 날라도 됩니다.

 자전거를 알맞고 올바르게 탈 수 있는 삶이 되자면, 먼저 내 두 다리와 내 두 손과 내 몸뚱이를 알맞고 올바르게 가누거나 부릴 줄 아는 삶이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내 두 다리로 내 삶터를 느끼고 내 이웃 삶터를 헤아리는 가운데, 내 두 손을 펼쳐 내 온몸으로 내 이웃을 껴안고 내 동무와 식구를 껴안으며 내 삶터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뭇목숨붙이를 껴안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풀벌레이든 푸나무이든, 또는 풀꽃이든, 가만히 들여다보고 넌지시 손을 내밀며 따스히 손을 맞잡을 수 있는 가운데 비로소 ‘자전거 삶’이 열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씽씽이도 자전거요 날쌘돌이도 자전거입니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까닭은 씽씽 내달리거나 날쌔가 휘몰아치는 데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즐거웁자고 타는 자전거요, 바람맛과 다리맛과 땀맛과 길맛, 여기에 사람 사는 삶터를 두루 돌아보고 부둥켜안는 사랑맛을 함께 느끼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2) 번역그림책 《고물자전거 날쌘돌이》


 그림책 《고물자전거 날쌘돌이》를 찬찬히 넘겨 보았습니다. 처음부터 고물자전거가 아닌 ‘날쌘돌이’였지만, 이 자전거를 타던 아이가 아무 데나 내다 버리면서 고물자전거가 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옆지기하고도 보고,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돌려읽으면서 생각을 나누어 보기도 했습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 자전거는 처음에는 어느 한 군데가 망가졌을 텐데, 자전거 임자인 아이는 틀림없이 ‘고장난 데를 안 고치고 그냥’ 탔을 테며, 이렇게 타는 동안 다른 곳도 하나둘 고장이 나면서 더는 탈 수 없게 되었을 때 아무 아쉬움 없이 내다 버렸으리라 봅니다.

 이웃 일본뿐 아니라 우리도 마찬가지인 이야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일본이나 우리 나라나, 가볍게 얻은 물건을 가볍게 다루다가 버리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동무들을 따돌리고 이웃을 따돌리는 모양새도 똑같습니다.


.. “모샤 아주머니 큰일났어요! 아기를 낳으려는데 위험해요! 지금 빨리 와서 도와주세요.” 깊은 산속 마을에서 아주 급한 연락이 왔습니다. 하지만 다리가 떠내려가서 자동차는 달릴 수가 없었습니다. “부탁할게! 날쌘돌이야, 힘내렴!” 모샤 아주머니는 날쌘돌이를 짊어지고 강을 건넜습니다 ..  (42쪽)


 그렇지만 《고물자전거 날쌘돌이》에서 날쌘돌이는 길고양이들을 만나 새 길을 찾게 됩니다. 길고양이들은 저희하고 생각을 나눌 줄 아는 동네 꼬마 유끼짱한테 마음으로 이야기를 건네며 ‘버려진 날쌘돌이’를 살려 달라고 하고, 유끼짱은 낡고 망가진 날쌘돌이를 스스럼없이 자전거가게까지 데려다 줍니다. 그리고, 자전거가게 할배는 기꺼이 날쌘돌이를 손질해 주며, 그런 다음 아프리카로 ‘원조품 자전거’가 되도록 다리를 놓아 줍니다.


.. 그날 밤, 날쌘돌이는 늦게까지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츠이마와 모샤 아주머니, 마을 모든 사람들의 웃는 얼굴이 머리속에 뱅글뱅글 맴돌았습니다. “대단하구나! 이렇게 기쁜 일이 있다니, 나는 생각지도 못했어!” ..  (52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자전거를 함부로 타는 아이들한테 그림책 《고물자전거 날쌘돌이》는 좋은 책동무가 되며 길동무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아이들에 앞서 어른들부터 이 그림책을 펼치면서 ‘여느 때 나는 내 자전거나 이웃 자전거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돌아보아 주고, 이렇게 돌아본 마음으로 당신 아이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나누어 주어야 하는가를 곱씹을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다고 느낍니다.

 그예 수수하게 펼쳐지는 그림책이요, 딱히 도드라지는 사건사고가 없는 그림책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밋밋하다 할 수 있고, 그림책 겉장에 나오는 ‘유끼짱’이라는 아이가 끝에 다시 나오는 대목을 잇는 얼거리는 퍽 허술하다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이 아이들한테 읽히려는 책임을 헤아린다면, 책끝이나 책머리에 ‘자전거가 버려지는 일’과 ‘자전거를 되살리는 일’과 ‘낡은 자전거를 손질해서 제3세계나 가난한 나라’로 보내는 이야기 들을 짤막하게나마 붙여 준다면, 이 그림책을 보는 아이들한테 한결 도움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우리 둘레에서 늘 일어나거나 부대끼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그림책이 아주 드문 모습을 돌아본다면, 그림책 《고물자전거 날쌘돌이》는 퍽 싱그럽고 괜찮은 이야기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다만, 이 그림책에 담긴 줄거리는 우리 둘레에 대단히 자주 일어나는 이야기이고, 웬만한 사람들은 으레 겪음직하거나 보았음직한 이야기입니다. 어디에나 널려 있는 이야기라고 할까요.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우리네 그림책 작가나 글책 작가는 거의 못 그려내고 못 써냅니다. 보아도 못 느끼고, 겪어도 못 깨닫습니다. 그러니, 이렇게나마 번역 그림책을 낼밖에 없을 텐데, 나라밖 ‘좋은 생활그림책’을 옮겨내는 마음씀과 눈썰미를 조금 더 가다듬거나 모두면서 우리 땅 우리 사람 이야기로 꾸미는 새로운 생활그림책을 빚어낼 수 있으면 한결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4342.8.2.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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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8-04 11:56   좋아요 0 | URL
글쎄요.자물쇠가 채워진것으로 봐서는 그냥 거기 나둔 자전거가 아닐까요?
 
비닐봉지풀 느림보 그림책 15
방미진 글, 오승민 그림 / 느림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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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닐봉지가 ‘풀포기’가 되는 우리 삶터
 [그림책이 좋다 69] 방미진+오승민, 《비닐봉지풀》



- 책이름 : 비닐봉지풀
- 글 : 방미진
- 그림 : 오승민
- 펴낸곳 : 느림보 (2009.6.26.)
- 책값 : 9800원


 (1) 비어 있는 그림, 또는 열려 있는 그림


 그림책 《나무》가 있습니다. ‘옐라 마리’라는 분이 나무 한해살이를 말 한 마디 없이 그림으로만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무 말이 없이 어떻게 나무 한해살이를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나누어 보여줄 수 있겠느냐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막상 그림책을 펼치고 보면, 참으로 말 한 마디 없기 때문에 이토록 아름답고 싱그럽게 보여주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빈자리가 있는 아름다움’이라고도 합니다만, 꼭 빈자리가 있기에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빈자리를 둘 수 있는 마음결이 되기에 아름다울 뿐입니다. 빈자리가 없도록 하는 마음밭이기에 아름다우며, 빈자리를 꾸밈없이 사랑할 수 있는 마음바탕이기에 아름답습니다.

 그림책 《비닐봉지풀》을 봅니다. 말마디가 아주 짤막합니다. 한 장 두 장 넘기면서 앞뒤 면지까지 해서 서른 쪽짜리 그림책을 살피는 동안, ‘말없는 그림책’이라고 해도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말뿐 아니라 그림까지도 붓질이 몇 번 가지 않은 그림이라 ‘그림 드문 그림책’이라고까지 할 만합니다.


― 비닐봉지는 혼자서 놀아. (3쪽)


 국민학교 그림그리기 시간을 떠올려 봅니다. 어느 겨울날이었고, 저는 그때 3학년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그러면 1984년쯤일 텐데, 교실에는 나무를 때는 난로가 한복판에 있고, 저는 난로하고 퍽 멀찌감치 떨어진 조금 뒤쯤 되는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추위로 곱는 손을 호호 불어 녹이며, 겨울 모습을 그림으로 그립니다. 50분 동안 그림을 뚝딱 그려야 하기 때문에 옆 짝꿍하고 수다를 떨며 놀 겨를이 없습니다. 시간에 맞추어 그려내지 못하면 선생님한테 긴 자로 머리를 짝 소리 나도록 얻어맞거든요.

 저는 여느 동무들처럼, 겨울날 눈싸움하는 동네 모습을 어기적어기적 그립니다. 눈이 오는 날 눈싸움 그림이니, 바탕은 온통 하얀 크레파스를 발라야겠는데, 그리 깨끔하게 그리지 못합니다. 그래도 추위에 땀 빼며 그려낸 내 그림이니 혼자서 잘 그렸다고 생각하며 히죽히죽 웃습니다. 다 그린 그림을 선생님한테 내는데, 어느 동무 하나가 도화지를 온통 하얗게만 발랐습니다.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하는 동무인데, 선생님이 왜 이렇게 했느냐고 물으니, 온통 눈밭인 모습을 그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얘기를 들으며 ‘뭐야? 그렇게 그려도 되냐?’ 하면서 흠칫 놀랐고,  동무녀석 말이 옳다고 느끼면서, 나도 저렇게 생각했으면 더 쉽게 그렸을 텐데 하고 아쉬워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동무녀석이 그렇게 하얗게만 바르며 눈밭을 나타내는 그림을 어디에서 배웠는지 누구한테서 들었는지는 알쏭달쏭입니다. 누구한테서 들었든 책에서 보았든, 그 녀석이 우리 반에서는 맨 처음으로 그렇게 그렸으니, 앞으로 다른 동무들은 그렇게 따라 그릴 수는 없습니다. 따라 그리면 흉내일 뿐이니까요. 그리고, 선생님은 “아무개는 훌륭한 상상력으로 이렇게 그렸지만, 다른 녀석들은 이렇게 따라 그리면 맞아죽을 줄 알아!” 하고 윽박질렀습니다.


― 비닐봉지가 풀 사이에 앉았어. 조심조심 풀인 척. (11쪽)


 눈밭을 하얗게만 그리는 이야기는 나중에 다른 데에서도 얼핏 들었습니다. 하얀 종이에 점 하나만 찍는 그림도 있다는 이야기 또한 뒷날 들었습니다. 하얀 종이에 점 하나 찍어 놓고서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 점 하나만 들여다볼’ 뿐이고, 점을 둘러싼 아주 넓은 하얀 자리는 못 본다는 이야기도 어느 때인가 들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학교 그림그리기 시간에는, 언제나 ‘종이를 꽉 채우는 그림’만 배웠습니다. 빈자리 하나 없이 무슨 빛깔로든 채우도록 배웠고, 못 채우고 남긴 곳이 있으면 자이든 몽둥이든 지휘봉이든 무엇으로든 신나게 얻어맞은 다음 채워넣기를 해야 했습니다.

 이제 와 그 지난날을 돌아본다면, 학교 그림그리기 시간은 우리한테 생각날개를 달아 주는 그림그리기라기보다 시간을 때우는 제도권 수업과정 가운데 하나였을 뿐입니다.


― 가만, 풀들이 손짓해. 같이 놀자고! (17쪽)


 고등학생쯤 되었을 때라고 떠오르는데, 이무렵 학교 국어시간에 ‘여백의 미’라는 말마디를 배웁니다. 쉽게 풀어내면, ‘빈자리가 있는 아름다움’이요, ‘빈 곳을 남기는 아름다움’이며, ‘굳이 다 채우지 않는 아름다움’입니다.

 채워서 맛이기도 하나, 안 채워서도 맛입니다. 역사책 《연려실기술》에는 빈자리를 마련해 놓았다고 하는데, 이 역사책을 처음 쓸 때에는 ‘아직 제대로 모르는 대목’이 틀림없이 있을 터이니 뒷사람들이 채워 놓을 수 있게끔 빈자리를 두었다고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리는 그림도 ‘그날그날 꼭 그리고픈 만큼’만 그린 다음, 나중에 더 생각이 나거나 다른 마음이 들 때 더 그려도 됩니다. 어떤 사람 눈으로는 ‘마무리 안 된’ 모습일지라도, ‘마무리 안 된 그대로 좋은’ 그림일 수 있습니다. 마무리가 다 되었다 할지라도, 기나긴 세월이 흐른 다음 돌아보면 ‘좀더 손질하거나 보태어야 할’ 그림이 될 수 있어요.

 그래, 그림책 《비닐봉지풀》은 빈자리가 넘실넘실거리는 그림책입니다. 빈자리가 가득가득인데 고작 서른 쪽짜리 그림책이면서 값은 9800원입니다. 책방에 선 채로 후루룩 라면 먹듯 훑으면 몇 분이 되지 않아 후딱 읽어치울 만합니다. 이 그림책 그림 하나하나를 한 시간씩 물끄러미 바라볼 사람이 있을 테지만, 이 그림책을 돈다발 세듯 주루룩 넘기며 “책 하나 다 봤어!” 하고 외칠 사람이 있습니다. 이 그림책을 찬찬히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고 나서 덮었으나, 다음날 다시 한 번 들출 사람이 있고, 그 다음날 또다시 들출 사람이 있습니다. 생각날 때마다 거듭 들출 사람 또한 있겠지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에 넉넉한 자리를 두고 있다면, 그림책 《비닐봉지풀》이란 넉넉한 마음자리로 받아안을 수 있다고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마음에 넉넉한 자리를 두지 못한다면, 그림책 《비닐봉지풀》이란 시시껄렁하다고 한 번 훑고 잊어버릴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2) 비닐봉지와 우리 삶


 그림책 《비닐봉지풀》은 세 해가 꼬박 들도록 애써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 책이라고 합니다. 말마디 몇 줄 없고 그림자리 몇 가닥 없는 데에도 세 해를 꼬박 바친 책이라고 합니다.

 틀림없이 《비닐봉지풀》은 퍽 썰렁하구나 싶도록 느끼게 되는 그림책입니다. 다만, 몹시 바쁜 우리 삶에 잠깐 느긋한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쉬는 마음이 될 수 있다면, ‘이야, 참 환한 그림책이구나!’ 하고 느끼면서, 어린아이 하나가 바람에 흩날리는 비닐봉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흐름을 좇을 수 있다면, 그림책 《비닐봉지풀》을 보면서 어렴풋이 그림책 《나무》를 떠올려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람에 흩날리다가 길가 풀포기에 걸린 비닐봉지를 좇아가다 보면, 어느새 ‘가브리엘 벵상’ 그림책 《꼬마 인형》을 마음속에 그릴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지켜보거나 바라보거나 들여다보아 주는 이 없는 ‘버려진’ 비닐봉지가 어찌 되는가에 눈길을 둘 수 있는 마음새라 한다면, 책을 덮고 나서 ‘마리 홀 에츠’ 그림책 《나무 숲속》이 생각나 이 그림책을 새롭게 읽고 싶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랴 싶습니다.


― 비닐봉지풀은 바람이 되었어. (28쪽)


 시를 쓰면 문학잡지에서 으레 한 꼭지에 5만 원이나 10만 원을 준다고 합니다. 긴시를 쓰건 짧은시를 쓰건 매한가지입니다. 소설이나 산문을 쓰면 원고지로 셈해 한 장에 1만 원을 주곤 합니다. 원고지 1장에 2만 원 넘게 주는 곳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열 몇 해 앞서도 시값은 5만∼10만 원이었고, 소설이나 산문 쓰는 값도 원고지 한 장에 5천∼1만 원을 쳐 주었습니다.

 나라안에 시를 실어 주는 문학잡지는 그리 많지 않으며, 나라안 시인 숫자를 헤아린다면, 한 달에 두 군데 문학잡지에 시 두 꼭지씩 싣는다 하면, 시를 써서 20만∼40만 원을 버는 셈입니다. 그런데, 다달이 시를 실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는 문학잡지는 얼마나 될까요. 얼마나 많은 시인이 당신 시를 문학잡지에 실을 수 있을까요.

 그림책 《비닐봉지풀》을 덮으면서 문학쟁이들 글삯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ㅅ 일꾼하고 주고받은 적이 있는데, 그분은 “아직도 원고지 한 장에 만 원밖에 안 줘요? 5만 원은 줘야 먹고살 수 있지 않아요?” 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 3년 전 7월 어느 날, 은행나무를 멍하니 보고 있다가 눈물이 났습니다. 은행알들이 다글다글 붙어 있었거든요. 외로워서 저렇게 꼭 붙어 있구나. 꽃들도, 풀들도, 모두 외로워서 닿으려고 닿으려고 손을 뻗으며 안간힘을 쓰는구나, 싶어서요. 그런데 길가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어디에도 낄 곳이 없는 초라한 모습으로요. 사람들이 삼삼오오 오가는 거리에서 그 풍경에 녹아들지 못하는 내가,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뒹굴고 있는 그 비닐봉지처럼 느껴져서 한참을 바라보았지요 ..  (글쓴이 방미진 님 말)


 이 땅에서 ‘사람 돌보기’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랜드 노동자들은 빼앗긴 권리를 되찾았을까요? 대학교 등록금이 한 해 천만 원이라지만, 오늘날 유치원 한 해 교육삯 또한 천만 원이 조금 못 미칠 만큼 들어가고 있습니다. 중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를 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학원을 보내고 학교옷을 맞춰 주고 급식비 내고 뭐 하고 저거 하느라 바쳐야 하는 돈이, 해마다 얼추 천만 원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 해에 삼천만 원을 번다 한들, 아파트 장만하려고 진 빚을 갚느라, 자가용 굴리며 기름 넣고 보험삯 내랴, 또 때때로 식구들하고 나들이도 다니고 영화도 보고 책도 사 읽히느라, 또 가끔가끔 맛난 바깥밥을 사먹이고 동무들하고 술잔을 부딪히느라, …… 제법 많은 돈을 일삯으로 받고 있다고 하여도 모두들 한목소리로 ‘먹고살기 힘들다’는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가난한 이는 가난한 대로 힘들고, 돈있는 이는 돈있는 대로 힘듭니다. 모두들 너무 힘들고 고달프다 보니, 더 ‘내 한 몸 사리기’로 움츠러들고, 이러면서 바깥으로 내쳐진 사람이나 따돌려진 사람이나 시달리는 사람들은 더 춥고 배고프고 쓸쓸합니다. 가게에서 ‘한 번 쓰고 버리는 비닐봉지’를 못 쓰도록 법률을 마련했다 하여도 어느 가게에나 비닐봉지는 많이 쓰입니다. 게다가, 비닐봉지를 안 쓴다 하여도 큰 마트마다 물건들을 죄다 비닐이나 랩으로 뒤집어씌워 놓고 있습니다.

 맨흙이 드러나는 땅바닥이 거의 모두 사라져 버린 도심지에는 망초처럼 목숨이 질긴 들풀이 뿌리를 내릴 만한 구석이 거의 없습니다. 보기 좋으라고 심은 벚나무는 스무 해라도 버티면서 도심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제 도시에서는, 또 시골에서도, 푸른빛을 뽐내는 풀과 나무를 만나기는 만만하지 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스스로 길에서 푸르디푸른 푸나무를 만나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두들 아파트에서 자가용으로 갈아타고, 자가용에서 내리면 곧바로 시멘트와 쇠붙이로 지은 건물에 들어가서 하루를 보낸 다음, 다시 자가용을 타고 몇 군데 가게를 들러 아파트로 돌아옵니다. 하늘 올려다볼 틈이건 땅 내려다볼 겨를이건 없는 가운데, 집구석에서 키우는 꽃그릇 하나라도 제대로 살펴보는 말미란 없다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비닐봉지풀’만 저 혼자 외따로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리다가는, 온 동네방네 심어 놓은 은행나무와 벚나무 가지에 걸려 새까만 나뭇잎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4342.7.20.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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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7-20 18:29   좋아요 0 | URL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 ㅅ 일꾼이시라면 숨어있는 책 사장님을 말씀하시나요.이분이 헌책방하시기전에 무슨 출판사에 편집장으로 계셨다고 하시는것 같던데요

숲노래 2009-07-22 12:33   좋아요 0 | URL
<숨어있는 책> 사장님은, 열화당과 눈빛 출판사에서 일하시다가 그만두었습니다.
 
살림살이 (양장) 겨레 전통 도감 1
윤혜신 글, 김근희.이담 그림, 토박이 기획 / 보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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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전통문화 이야기는 ‘조선 후기’에만 머물까?
 [잠깐 읽기 45] 토박이+윤혜신+김근희ㆍ이담, 《살림살이》



- 책이름 : 살림살이
- 기획 : 토박이
- 글 : 윤혜신
- 그림 : 김근희(세밀화), 이담(펼친그림)
- 펴낸곳 : 보리 (2008.12.30.)
- 책값 : 35000원



 (1) 집안살림과 집밖살림


 우리 어머니는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분입니다. 우리 아버지는 집밖일을 도맡아 하는 분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삶을 들여다보면서, 저 또한 이러한 길을 걸었음직하지만, 저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걸었던 길은 조금도 안 걷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와 옆지기가 낳아 키우는 아이도 제 엄마 아빠가 걷는 길을 안 걸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저는 ‘남자 = 집밖일’, ‘여자 = 집안일’처럼 가르는 길이 마땅하지 않다고 느끼며 올바르지 못하다고 생각하여, 이 길을 거스릅니다. 옆지기가 몸과 마음이 아프고 힘들어 집안일을 제가 거의 도맡고 있기도 하지만, 몸과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할지라도, 저는 언제나처럼 집안일과 집밖일을 많이 맡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또는, 집안일을 제가 거의 다 하고 집밖일은 옆지기한테 맡긴다든지요.


.. 살림살이 가운데에는 지금 아줌마가 즐겨쓰는 것도 있고 처음 보는 것도 있어. 이런 살림살이는 사람들이 더 쉽고 편하게 살림을 하려고 만들어 낸 거야. 저마다 쓰임새에 맞게 만들어 조금씩 고쳐 가면서 점점 더 쓸모있게 만들었어. 정말 놀라운 일이지? 살림을 하는 데 이 많은 살림살이가 다 쓰이고, 또 쓰임에 딱 맞는 것이 있다는 게 말이야. 아줌마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 바로 이 ‘살림’이라는 말이야. 말 그대로 살림은 우리가 먹고 자고 입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일이지. 우리는 살리는 일, 살림. 사람들은 살림을 하면서 몸과 마음이 자라는 것 같아 ..  (머리말)


 어머니는 ‘가정 주부’였습니다. 이 나라 숱한 어머니는 모조리 ‘가정 주부’라고 봅니다. 엊그제 옆지기네 고모님 댁에 다녀왔는데, 옆지기네 고모님은 하나같이 ‘가정 주부’입니다. 빈 그릇 치우기라도 거들고 싶지만, 제가 자리에서 일어나 빈 그릇을 치울라치면, “최 서방이 일어나니까 우리가 앉아 있을 수 없네.” 하고 말씀하시니 오히려 제가 몸둘 바를 모릅니다. 사위를 고이 여겨 주시는 마음은 고맙지만, 그예 밥상머리에 눌러앉아 밥술만 떠야 하니 속이 메슥거리고 방귀만 뿡뿡 나올 듯해서 힘듭니다. 잠깐이라도 일어나 빈 그릇도 나르고 설거지라도 하며 몸을 놀려야 할 텐데, ‘가정 주부’로 집안일을 도맡아 오신 당신님들한테는 사위가 이런 모습을 보이는 일이 외려 바라보기 힘든 노릇인가 싶기도 합니다.

 하는 수 없이 목구멍까지 먹을거리가 차넘칠 때까지 겨우 견디며 밥상과 과일상 들을 받는데, 아기를 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스스로 너무 오래도록 남자 다르고 여자 다르다는 울타리를 쌓는 바람에 모두 이렇게 생각이 굳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듭니다.


.. 조상들은 우리네 옛 살림이 사람힘으로만 되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았어. 세상 모든 일들이 하늘과 땅과 사람의 조화라고 생각해서, 늘 자연을 벗삼고 공경하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지. 봄이 오면 그 따스함에 고마워하고 반기는 마음으로 잔치를 벌였고, 부드러운 봄바람, 따뜻한 햇볕, 단비를 내리는 하늘에 진심으로 고마워했어. 산과 들에 가득한 풀을 뜯고 나무에서 물을 받을 때는 땅에 절을 했지. 아무리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이웃과 나누어 먹으면서 사람들은 봄의 충만한 생명력을 즐겼던 거야 ..  (14∼15쪽)


 집으로 돌아온 우리들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늦도록 아기하고 씨름하느라 고달픕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 말씀을 들으면, 우리 옆지기는 우리 아기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가 살림을 꾸리며 아이 돌보는 일이란 그리 어렵지 않은 셈입니다. 우리 아이는 많이 얌전하다(?) 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면, 아이를 키우며 보내는 하루하루란 아이 없이 지내던 하루하루하고 견줄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 없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데, 아이 없이 지내는 삶이 얼마나 단출하고 홀가분하고 호젓하고 손쉽던 나날이라고 떠오르는지. 아이하고 씨름하고 부대끼는 하루하루가 얼마나 길 뿐 아니라 힘들고 벅차다고 느껴지는지.

 그렇지만, 이렇게 고단하고 지치는 하루하루가 싫지 않습니다. 고단하고 지치며 보내는 하루하루이기 때문에 한결 크고 깊은 보람과 즐거움이 있습니다. 아기보다 먼저 곯아떨어지는 나날이라 하여도 이 삶을 끝끝내 붙잡도록 하는 새힘이 돋고, 이 일 저 일 밀리고 치이면서도 이렇게 밀리고 치이기 때문에 내 이웃 아이를 새삼스레 돌아보고 내 이웃 어른을 다시금 헤아릴 수 있습니다.


.. 예전에는 냉장고가 없어서 음식을 오래 보관하기 어려웠어. 그래서 아줌마네 어머니는 여름철이면 끼니때마다 식구들이 먹을 만큼만 음식을 만드셨지. 특히 열무김치는 사나흘에 한 번 조금씩 담그셨어. 김치를 담글 때마다 어머니는 빨간 고추와 마늘, 생강을 돌확에 넣고 확확 갈아서 양념을 만드시는 거야 ..  (120쪽)


 살림살이란 내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란 오늘 하루 내 모습이면서, 오늘뿐 아니라 앞으로도 꾸리거나 이끌어 나갈 내 모습이면서 꿈과 생각입니다. 내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대로, 내가 앞으로 다른 곳에서 살아갈 모습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란 내가 생각하는 모습이기에, 입으로만 읊는 말마디나 믿음이 아닌 온몸으로 보여주는 말과 믿음이 됩니다.

 내가 갖추는 살림살이는 바로 오늘 내 생각과 매무새를 보여주고, 내가 갖춘 살림살이를 다루는 모습은 바로 오늘 내가 세상과 사람을 보는 눈길과 눈높이를 이야기합니다.


 (2) 살림살이는 ‘죽은 유물’이 될 수 없는데


 집살림 잘 꾸리는 사람을 일컬어, 또 돈을 허투루 안 쓰고 잘 갈무리하는 사람을 가리켜 ‘살림꾼’이라고 합니다. 요즈음은, 어느 모임이나 일터를 잘 꾸린다든지 이끈다든지 하는 사람을 두고도 ‘살림꾼’이라 합니다. 집안 울타리에 머물던 살림꾼이 집밖 울타리 너머까지 뻗는 셈입니다.

 ‘겨레 전통 도감’이라는 이름을 걸고, 《살림살이》라고 하는 그림백과사전이 하나 선보였습니다. 그림백과사전 《살림살이》는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에 따라, 우리네 여느 살림집에서 어떤 연장을 썼는가를 그림 하나와 글 하나로 나누어 엮어 보여줍니다.

 먼저 봄에는, “장독, 소쿠리, 체, 가마솥, 표주박, 빗자루, 이남박, 조리, 수저, 주걱, 밥통, 주전자, 칼과 도마, 양푼, 푼주, 냄비, 단지, 초병과 초 단지, 기름병, 기름틀, 자라병, 다래끼, 광주리, 동고리, 도시락, 찬합, 보자기”까지 스물아홉 가지를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여름에는, “두레박, 바가지, 물동이, 방구리, 물두멍, 물지게, 살강, 찬탁, 그릇, 신선로, 수세미, 밀판과 밀방망이, 국수틀, 국자, 곰박, 확과 확돌, 화덕, 불씨 항아리, 손풀무, 석쇠, 돗자리, 죽부인”까지 스물네 가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가을에는, “멱둥구미, 바구니, 흡·되·말, 저울, 맷돌, 다식판, 약과 판, 상술 빗기, 술병, 뒤주, 채반, 망태기, 뒤웅박”까지 열다섯 가지를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겨울에는, “젓갈 항아리, 옹배기, 자배기, 앵병, 절구, 메주 틀, 두부 틀, 시루, 떡판과 떡메, 함지박, 쟁반, 가위, 화로, 곰방대와 장죽, 등잔, 요강, 약달이기”까지 열아홉 가지를 보여줍니다. 이리하여 모두 여든일곱 가지 살림살이를 보여주는데, 오늘날 살림꾼 가운데 이 여든일곱 가지를 옹글게 떠올리거나 헤아리는 분은 얼마쯤 되려나 궁금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이 여든일곱 가지를 또렷하게 알거나 쓰거나 다룰 줄 아는 분은 많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가운데 오늘날까지 두루 쓰는 살림살이는 많지 않거든요.

 《살림살이》에 나오는 ‘도시락’이나 ‘찬합’은 예전에 쓰던 살림살이이지, 요즈음 쓰는 살림살이가 아닙니다. 설거지를 하며 수세미를 쓴다고 하여도, 《살림살이》에 나오는 ‘수세미’를 집에서 길러 마련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손풀무를 쓰는 사람도 없으며, 물지게를 일 사람 또한 없고, 살강 놓인 부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골 부엌도 죄다 ‘서양 입식 가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요. 《살림살이》에 나오는 ‘바구니’는 농사짓는 사람이 자연에서 거둔 들풀로 엮거나 짠 바구니이지, 플라스틱으로 공장에서 뽑아낸 바구니가 아닙니다. ‘가위’ 또한 대장간에서 불을 달궈 쇠망치로 두들겨 만든 가위입니다. 절구는 돌을 깎았을 테며, 떡판이나 시루, 다식판은 나무를 깎았겠지요.

 그러나 이 모든 살림살이를 장만하지 못하란 법은 없습니다. 부모가 이와 같은 살림살이를 간직하고 있다면 물려받을 수 있습니다. 부모한테 없다면 돈을 치러 살 수 있습니다.


.. 발효하는 것이 많은 우리 나라 음식에는 장독이 가장 잘 어울려. 그러고 보면 우리 조상들이 꾸려 온 살림살이는 참 지혜로웠지 ..  (18쪽)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책 사이사이 틈틈이 나오는 “우리 조상들이 꾸려 온 살림살이는 참 지혜로웠지”라는 말마디처럼 우리 옛사람이 ‘슬기롭게 살아온 모습’을 오늘날 아이들한테 보여주며 가르치려는 매무새로 엮었습니다. 이 모든 살림살이는 꼭 알맞춤하게 만들었고, 어느 살림살이나 자연에서 나왔으며, 망가져도 버려지는 일이 없이 되쓰이거나 썩어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왜 우리 옛사람 ‘슬기로운 살림살이’를 오늘날 아이들한테 보여주어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네 슬기로운 살림살이’는 어짜하여 오늘날 거의 안 쓰이고 있을까요?


.. 옛날에는 빗자루가 흔해서 그랬는지,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어른들이 빗자루채를 거꾸로 들고 혼을 냈어. 커다란 빗자루에 몇 대 맞아도 별로 아프지도 않고 다치는 일도 없었거든. 지금 생각해 보면 빗자루는 사랑의 매였던 거지 ..  (30쪽)


 그림백과를 덮으며 또다른 대목에서 궁금합니다. 우리네 슬기로운 살림살이라 하고 우리 옛사람 살림살이라고 하지만, 그림백과에서 보여주는 거의 모든 살림살이는 ‘조선 후기에 쓰던 살림살이’입니다. 그나마 ‘조선 전기에 쓰던’ 살림살이는 몇 가지 안 되며, ‘고려’나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때 쓰던 살림살이까지 헤아리자면 얼마 없으며, 더 오래도록 이 나라 사람들이 써 온 살림살이가 무엇일까 하고 가누어 보면 거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참말 ‘살림살이란 무엇일까?’ 하고 새삼 생각해 봅니다. 무엇을 두고 살림살이라 할 만한지 잘 모르겠습니다. 또한, 그림백과 《살림살이》에 나오는 살림살이는, ‘이 나라 여느 살림집에서도 두루 쓰던 살림살이’일는지, 가난한 집에서는 쓰지 않던 살림살이가 있는지, 돈 많거나 사대부집안에서만 쓰는 살림살이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더욱이 ‘옛사람 슬기’라 하지만, 그림백과 《살림살이》에 보여지는 모습은 하나같이 ‘여자 손이 가는 물건’일 뿐입니다. 남자 손이 가는 물건이란 없으며, 그림백과 사이사이 곁들인 ‘펼친그림’에 비춰지는 사람들 모습 또한 ‘남자 = 위, 여자 = 아래’인 듯한 가부장 모습 그대로일 뿐입니다. 비록, 지난날 조선 때에 사람들 삶이 ‘여자는 죽도록 집안일을 하며 허리가 휘고, 남자는 양반다리 하고 앉아 높은 자리에서 밥상을 받았다’ 할지라도, 이런 모습을 굳이 그대로 보여주는 일을 ‘전통’이나 ‘문화’라는 이름으로, 또 ‘전통문화’라는 이름으로 아이들 앞에 내놓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전통문화가 우리 아이들한테 물려줄 만한 아름답거나 훌륭한 우리네 전통문화라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 아줌마가 시어머니께 살림을 하나씩 배워 가는 초보 주부였을 때 일이야. 한번은 시어머니께 크게 야단을 맞은 적이 있었어. 무슨 큰 잘못을 했기에 그렇게 혼이 났냐고? 쌀을 씻다가 그만 쌀알을 조금 흘려 버렸지 뭐야. 한 스무 톨쯤? 시어머니는 귀한 쌀을 많이 버렸다고 혼쭐을 내셨지. 그때는 시어머니 말씀이 너무 서운했어. 먹다 남은 밥도 버리는데 그깟 쌀 몇 톨에 왜 그러실까 하고 말이야. 하지만 아줌마가 직접 농사를 지어 보니까 그 마음을 알 것 같아. 그 쌀 한 톨이 나오기까지 수고한 농부의 손길과 땀, 벼가 뜨거운 햇빛과 차가운 밤이슬을 견디고 자란 그 시간을 생각해 봐 ..  (32쪽)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조선 후기 퍽 넉넉한 살림집 모습’을 바탕으로 ‘우리네 슬기로운 옛사람 전통문화’를 보여주는 틀로 짜여 있는데, 다른 출판사에서 펴내는 다른 전통문화 그림책과 이야기책에서도 이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네 전통문화 연구가 ‘조선 후기 문화와 삶’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편, 조선 전기나 고려나 더 앞선 때 문화와 삶을 헤아릴 자료가 없는 탓이라 할 테지만, 연구와 상상력을 모두어 더 뿌리깊고 넉넉한 ‘참다운 전통문화 찾기’를 해 본다면 더 뜻이 있고 보람이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리고, 옛날 문화재 더듬어 보기에만 그치지 말고, 오늘날 우리가 기쁘게 즐기면서 앞으로 우리 뒷사람한테 신나게 물려줄 ‘오늘 우리가 누리는 전통문화란 무엇일까’에도 눈길을 둔다면 더욱 싱그럽고 아름답지 않겠느냐 생각합니다.


.. 여자아이들은 예닐곱 살만 되면 작은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어 나르는 연습을 했어. 사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물인 만큼 그것을 길어 나르는 것도 큰일이었지. 그래서 부엌에 놓인 물두멍에 물이 얼마나 차 있는지를 보고 그 집 안주인이 얼마나 부지런한지 가늠하기도 했대. 어머니들이 지칠 줄 모르고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올리던 힘은 아마도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 박 오가리는 졸여 먹기도 해. 껍질까지 잘 말려서 그릇으로도 쓰니, 아무것도 버리지 않고 다 쓰는 것이, 자식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치는 어머니나 할머니와 마음을 꼭 닮은 것 같아. 박은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셈이야 ..  (86, 88쪽)


 아쉬운 대목은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림백과 《살림살이》는 ‘세밀화’와 ‘펼친그림’ 두 가지 그림을 나누어 싣습니다. 먼저 펼친그림으로 이야기 흐름을 두루 보여주고, 다음으로 세밀화로 낱낱 살림살이를 도드라져 보이도록 합니다. 한쪽에 그림 하나를 큼지막하게 넣습니다.

 이렇게 넣은 펼친그림은 구수하고 따스하다 싶은 느낌이 배어들게 하고, 찬찬히 그린 세밀화는 ‘이제는 눈으로 구경하기도 어렵게 된 살림살이’ 모습을 잘 살펴보도록 돕습니다. 그림 짜임새를 돌아본다면, 으레 말하는 ‘여백의 미’, 그러니까 ‘빈자리를 두는 아름다움’을 살리려 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백과 《살림살이》에서 베푸는 ‘빈자리 두는 아름다움에 따른 큼지막한 그림 하나’는, ‘사진으로 찍어도 되는데 왜 그림으로 굳이 그렸을까’ 하는 느낌이 듭니다. ‘사진으로 찍는 모습하고 다를 다 없다’는 느낌도 듭니다.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보여줄 수 있는 기쁨과 재미가 없다’는 느낌에다가, ‘덩그러니 하나만 보여주는 그림으로 할 바에는 차라리 판짜임을 줄이고 작은 그림으로 넣더라도’ 괜찮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굳이 35000원짜리 큰 판짜임으로 할 까닭이 없고, 주머니도감으로 엮어 한결 값싸고 가벼운 책으로 묶었다면 더 보람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왜냐하면, 살림살이는 ‘박제’가 아니요 ‘박물관 유물’ 또한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늘 가까이에서 부대끼는 연장이요, 우리가 늘 만지는 연장이거든요. 이제는 흙으로 빚는 살림살이가 아닌 스테인리스로 찍어내는 살림살이라 할지라도, 살림살이란 다루는 살림꾼이 어떤 마음밭이요 매무새이느냐에 따라 빛이 나기 마련입니다. 옻이 아닌 니스를 바른 밥상이라 할지라도, 살림꾼 마음이 애틋하다면 살갑고 사랑스러운 손길이 배어들기 마련입니다.

 보리출판사에서는 앞으로도 ‘겨레 전통 도감’이라는 이름으로 그림백과를 더 펴낸다고 밝히고 있는데, ‘겨레 전통 도감’ 2번을 펴낼 때에는 1번인 《살림살이》에서 보여준 좋고 나쁨을 널리 굽어살피고 보듬어 준다면 좋겠습니다. 살아 있는 이야기로 겨레 전통문화를 나누는 길을 찾으면 좋겠고, 죽어 버린 박물관 유물유먹 같은 값비싸고 껍데기 우람한 길은 이제 그만 접어두면 고맙겠습니다. (4342.7.13.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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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 때에 네버랜드 Picture Books 세계의 걸작 그림책 39
레이먼드 브릭스 글, 그림 | 김경미 옮김 / 시공주니어 / 199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차피 모두 타죽이게 할 전쟁이니까
 [그림책이 좋다 67] 레이먼드 브릭스, 《바람이 불 때에》



- 책이름 : 바람이 불 때에
- 글ㆍ그림 : 레이먼드 브릭스
- 옮긴이 : 김경미
- 펴낸곳 : 시공사 (1995.11.7.)
- 책값 : 7000원


 (1) 남녘나라에서 군대라는 곳


 군대에 갔다 온, 또는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어른들은 젊은이한테 이야기합니다. “군대에 갔다 오면 사람 된다.”

 어릴 적부터 익히 들은 이 말마디는 어린 제 생각과 삶을 온통 뒤흔들었고, 군대에 끌려갈 날을 앞둔 젊은이가 된 제 생각과 삶 또한 온통 뒤흔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무렵, 저 같은 아이들 또는 젊은이들한테 이런 말마디를 읊은 어른들이 ‘모두 군대에 갔다 왔는지’는 여쭙지 못했고, 여쭐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 어른들이 군대에 갔다 오신 다음에 “사람이 되셨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았습니다. 그예,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며, 내가 국가대표 운동선수가 되어 금메달을 목에 걸거나 돈이 아주 많거나 나라밖으로 떠나거나 하지 않으면 군대에 끌려가야 한다고만 생각했습니다.


.. “다녀왔소.” “다녀오셨어요? 오늘 아침은 좋았어요?” “응, 좋았어. 별 일은 없었지. 사는 게 너무 지루하고 재미없어.” “퇴직했으니까 그렇죠, 제임스. 당신 좀 우울해 보이는데?” “응, 아침 내내 공립도서관에서 신문만 봐서 그렇지.” “흥, 그까짓 쓰레기 같은 것들! 난 절대로 신문은 안 봐요. 〈스타〉지만 빼고요.” “여보, 당신도 국제 정세를 좀 알아야 해. 결국엔 우리도 강대국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을걸.” “신문엔 정치니 스포츠니 하는 것들만 잔뜩 실려 있잖아요.” ..  (1쪽)


 군대에 갔다 오고 나서도 어른들은 말합니다. “남자는 군대에 갔다 오지 않으면 사람이 안 된다.”

 군대에 갔다 온 저는 어른들한테 여쭙니다. “네, 저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그래? 어디 있었는데?”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 있었습니다.” “…….” 때때로 해병대 나온 분들이 있어 좀더 꼬치꼬치 물으실 때에는, “강원도 양구 도솔산에 있었습니다. 도솔산부대 들머리에 ‘해병대 전적비’ 있는 줄 아시지요? 해병대 나오셨으면 ‘도솔산의 노래’라는 노래 아시지요?” “…….”

 우리 아버지는 당신 아들한테 “너는 군대에 가서 사회를 알아야 해.” 하고 틈틈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들은 군대에 갔다 왔습니다. 아버지도 강원도 양구에 있었다고 합니다. 딱 한 번, 아버지와 어머니는 인천에서 양구까지 면회를 왔습니다. 일고여덟 시간도 넘게 걸려 겨우 부대 밑자락 검문소에 닿으신 아버지와 어머니는 부대 들머리까지 들어오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무렵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어떠한 차도 우리 부대 앞까지 올라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해안마을(펀치볼)로 넘어가는 산꼭대기에 자리잡은 도솔부대는 한 해에 꼭 닷새쯤 해를 볼 수 있는 기막힌(?) 곳이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군인들이 행군을 해서 한 시간 반 남짓 걸어내려와야 하는 산 밑자락에서 아들을 기다리셨습니다. 그때 눈밭을 헤치고 겨우겨우 걸어내려가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뵈니 아버지는, “에이,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어? 어떻게 이런 데에서 사람이 살아?” 아버지 말씀마따나 그곳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 마을 분들은 군부대 옆에 깃들며 살림을 꾸리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중대가 모시는 대대에는 해마다 10월 끝무렵이면 장갑차 한 대가 떨어져서, 눈이 오는 날이면 장갑차가 슥슥 밀어 주고, 다음으로는 제철차가 슥슥 민 다음, 우리들 땅개가 줄줄이 늘어서서 싸리비와 눈삽으로 눈을 치워내곤 했습니다. 눈이 오면 으레 m 단위로 왔으니까요. 아무튼,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면회를 오신 다음부터 아버지 입에서 “너는 군대에 갔다 와야 해.” 하는 말은 가뭇없이 사라졌습니다.


.. “여보, 아무래도 전쟁이 일어날 것 같소. 그래, 곧 전쟁이 터질 거라네.” “글쎄요, 그래도 당신은 징집되지 않을 거예요, 제임스. 당신은 너무 늙었잖아요.” “고맙구려. 그래도 난 당신보다 두 살이나 적어.” “어쨌거나, 최악의 경우에는 승리의 그날까지 다시 소매를 걷어붙이고 허리띠를 동여매고 철모를 써야겠죠.” “이번엔 그럴 것 같지 않고. 이번 전쟁은 빅뱅이론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아. 그건 모드 똑똑한 과학자들이 생각해 낸 거요.” ..  (1∼2쪽)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올 무렵, 행보관은 전역하는 우리를 앞에 두고 “너희들 주제에 사회에 나간다고 뾰족한 벌이도 없을 테니 공사판에 나갈 텐데, 공사판에 나갈 때면 우리 부대 야상을 꼭 입고 가라. 그러면 오천 원은 더 준다.”고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거짓말이 아닌 소리였는데(1998년도), 우리들이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에 있는 동안 배운 일이라면 삽질과 곡괭이질과 마대질과 산타기 따위였습니다. 이른바 막일은 실컷 배운 셈이었습니다. 아니, 한 달 일삯 8000∼1만 얼마에 실컷 막일을 해 온 셈이었습니다. 그무렵 사회에서는 막일을 하면 하루에 3만 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군인이기 때문에 군대 막일을 하루 일삯 300원으로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해 온 셈이더군요.

 이리하여,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배운다는 군부대에서, 우리 부대원들은 하나같이 ‘배운 것 없는 사람이 먹고사는 재주’만 신나게 배운 셈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어릴 적 동네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그 부대를 나오면서 제 앞가림은 막일터에 나가면서 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 “이번엔 방공호도 없다니 왠지 이상해요. 그땐 우리 집 정원에 앤더슨 방공호가 있었어요. 지금도 기억나요. 우린 방공호 주위에 한련을 잔뜩 심고 입구를 초록색으로 칠했어요. 정말 예뻤는데, 옆집에서는 방공호 위에다가 양배추를 심었죠.” “맞아. 우리 집에선 모리슨 방공호를 설치했어. 난 그 안에서 잤어. 그 안에다 여자들 사진을 잔뜩 붙였지. 베티 그래블, 앤 셸턴, 패트리샤 록. 잠자리에서 촛불을 켜고 책을 읽다가 천장을 까맣게 그을렸지.” “그래요. 2차대전 때에는 정말 좋았어요. 방공호, 등화 관제, 경보 해제 사이렌, 홍차, 공습 경보대, 피난민들. 런던의 아이들은 그때에 처음으로 소를 보았고, 라디오에선 처칠의 목소리. 아홉 시 뉴스, 베라 린의 노래, 노동자 큰잔치 프로그램을 방송했고. 옥수수밭 너머 푸른 하늘에선 스피트파이어와 허리케인이 몰려왔고, 도버 해협의 하얀 절벽으론 독일군이 밤바다 쳐들어왔죠. 그땐 좋았어요.” ..  (7쪽) 






 스무 살 젊은 나이에 군대에 들어가 스물셋을 앞두고 사회로 돌아왔습니다. 한창 펄펄 끓는 나이에 군대에 있는 동안, 제 얼굴과 몸과 말결과 마음밭은 크게 달라졌습니다. 군대에 가기 앞서 책을 즐겨읽기는 했어도 아주 좋아하지는 않았는데, 스물여섯 달 있으면서 책을 한 권도 읽지 못했습니다. 신문 한 장 읽은 적이 없습니다. 사회에 나오고 보니, 2005년 가을부터 2007년 겨울까지 세상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저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아, 부대에 딱 두 가지 신문이 들어왔는데, 하나는 ‘스포츠○○’이었고, 하나는 ‘ㅈ일보’였습니다. 이 신문은 소대장과 중대장이 보았는데, 어쩌다가 슬쩍슬쩍 넘겨본다든지 철지난 신문을 차곡차곡 모아 태워 위장크림으로 만든다고 할 때에 살펴보기는 했으나, 이런 신문으로는 세상을 하나도 읽을 수 없었습니다.

 위에서는 고참이, 옆에서는 동기가, 아래에서는 후임이 읊조리는 온갖 상소리와 욕지꺼리를 듣고 따라하고 익숙해지면서 사회에서 제 말투는 ‘못난 건달깡패나 외는 말투’로 받아들여졌고, 여러 해 동안 반 벙어리처럼 되어 사람들 앞에서 말문을 열기 어려웠습니다. 툭하면 욕이 튀어나와 “너 왜 그렇게 바뀌었니?”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느덧 예비군이 끝나고 민방위가 되었으나 군대 적 말투와 몸짓을 모두 털어내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 짧은 스물여섯 달, 아니 짧지 않은 스물여섯 달에 걸쳐 젊은 넋한테 아로새겨진 숱한 삶자락은 제가 눈을 감는 날까지 길디길게 이어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느 누구라도 한창 푸르고 젊고 싱싱하던 때에 겪고 부대낀 이야기들이 오래도록 또아리를 틀 테니까요.


.. “지금 페인트칠을 하려는 건 아니죠, 제임스?” “유리창을 하얗게 칠해야 해.” “왜요?” “방사능 때문인 것 같아. 햇빛을 막으려고 온실을 하얗게 칠하는 것처럼 말이지. 지침서에 나와 있어.” “정말 그렇게 더울까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히로시마에서는 해가 천 개나 떠 있는 것처럼 더웠대. 그러니 꽤 더울 거야. 게다가 지금 강대국들은 훨씬 더 성능이 좋은 걸 만들고 있어. 과학이 엄청나게 발전했으니까.” “페인트가 커튼에 묻지 않게 조심해요! 먼저 커튼부터 떼냈어야죠. 정말 생각이 없군요.” ..  (8∼9쪽)


 대한민국에서 군대에 가지 않으면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 셈이라는 이야기를 곧잘 듣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야기를 하는 분들치고 ‘땅개로 밑바닥에서 굴렀던 분’은 거의 없다고 느낍니다. 하사관이든 장교이든 간부로 있던 분들, 또는 여느 보병이었으나 후방에 있던 분들, 또는 전방에 있었어도 행정병으로 있던 분들이 으레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여느 땅개로 군대에서 젊은 나날을 보내야 했던 분들은 우리 사회에서 ‘말할 힘’이 거의 없는 밑바닥 일터에서 조용히 일만 하고 있는 개미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공장에서 기계를 다루거나 길바닥에서 장사를 하거나 할 뿐, 신문이든 잡지이든 방송이든 책이든 인터넷이든, 이런저런 데에 당신 목소리를 한 번이라도 낼 만한 자리에 있어 본 적이 없는 이들이라고 느낍니다.

 수십 킬로그램에 이르는 완전군장을 메고 소총을 메고 탄약상자를 들고, 또는 박격포를 셋으로 나누어 지고, 또는 무반동총을 홀로 낑낑거리며 군장 위에 얹고, 또는 부대 깃발과 무전기를 목아지에 얹고 하루 동안 쉼없이 걸어야 했던, 이러는 가운데 소대장이나 중대장이나 하사관 물통까지 덤으로 군장에 끼워들고 걸어야 했던 땅개 가운데에서는 “대한민국 남자는 군대에 가서 나라사랑을 배워야 한다”는 말을 섣불리 안 한다고 느낍니다. 고엽제 상자를 둘이 나누어 들고 군사분계선으로 날라 ‘시계청소’를 한다며 헬멧으로 퍼서 뿌리던 땅개들은, 진지구축을 한다며 시멘트와 돌과 모래와 물을 한 짐씩 이고는 네 시간 남짓 산길을 타고 올라 내려놓고 낮밥을 먹은 뒤 다시 네 시간 남짓을 걸어내려오며 하루 일을 마치던 땅개들은, 겨울철 보급로 눈길을 치울 싸리비를 만들어야 한다며 밤을 새워 몇날 며칠 수천 개에 이르는 싸리비를 만드느라 잠 못 자고 눈이 퉁퉁 붓던 땅개들은, 장마철에 보급로 무너지면 안 된다며 밤새워 삽자루 들고 온몸이 비에 흥건히 젖은 채 물골작업을 하던 땅개들은, 어설피 “남자인데 군대에 안 가?” 하는 말을 꺼내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저는 아직까지도 제가 상병일 때 병장이던 고참이 “종규야, 우리 천 삽 뜨고 허리 한 번 펴기 하자!” 하면서 웃던 얼굴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삼백 삽쯤 뜨고 허리를 펴려고 하니, “어, 아직 천 삽 되려면 멀었는데?” 하면서 삽자루로 후려패려고 높이 쳐들고 웃음 띠던 얼굴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장난으로 하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2) 대포동미사일이 걱정된다면


 북녘에서는 대포동미사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수천 킬로미터를 날아가는 미사일을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국은 수천 킬로미터뿐 아니라 수만 킬로미터를 날아갈 만한 미사일을 갖추고 있습니다. 러시아에도 있고 중국에도 있으며, 프랑스와 영국과 독일도 갖추고 있지 않으랴 싶습니다. 일본에는 이런 미사일이 없겠지만, 미사일보다 무시무시한 이지스함이 있고,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꿈꿀 수 없는 엄청난 군무기를 갖추고 있습니다.

 남녘땅에 있던 핵미사일을 미국이 도로 가져갔는지 모릅니다만, 미국이 남녘땅 핵미사일을 미국땅으로 가져갔거나 일본 류우큐우(오키나와)로 가져갔든, 이 핵미사일은 언제든지 북녘땅쯤 송두리째 날릴 수 있습니다. 단추 하나만 누르면.


.. “화장실은요?” “요강 같은 걸 들여놔야지.” “제임스 블록스 씨, 미리 말해 두지만, 난 품위 있게 위층으로 갈 거예요.” “하지만 여보, 돌아다녀선 안 돼. 국가적 비상 사태 열나흘 동안은 안 된다고.” “그럼, 좋아요! 요강은 어떻게 비울 거죠?” “저, 그냥 화장실에 버려야 할 것 같은데.” “방금 화장실에 가서는 안 된다고 했잖아요!” ..  (9쪽)


 일본은 한국과 대만과 중국과 태평양 섬나라를 식민지로 삼았고, 유럽은 지구에 그려진 모든 나라를 식민지로 삼았으며, 미국은 일본이 식민지로 삼았던 나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가운데 쿠바와 중남미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베트남을 프랑스에 이어 식민지로 삼으려다가 쓴맛을 보았고, 쿠바라는 물좋은 식민지는 카스트로와 체게바라 일당(?)한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쿠바를 빼앗긴 좋은(?) 쓴맛을 발판 삼아 칠레 아옌데 정부가 들어설 때 숱한 미사일과 헬리콥터와 탱크로 대통령궁을 박살내고 민주인사 목아지를 베어 죽이면서 식민지 넓히기를 힘차게 이어나갔습니다.


.. “세상에! 그럼 이젠 누가 지휘를 하지?” “꼼푸터겠죠.” “‘국민연금증서와 의료보험카드와 출생증명서를 상자에 보관할 것.’” “여기 쓸 만한 게 있어요, 여보. 속을 비울게요.” “고맙소. 상자는 안전한 곳에 둬야겠소. 그런데, 안전한 곳이 어디지?” ..  (13쪽)


 우리 나라는 우리보다 힘여린 나라를 식민지로 거느리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보다 돈없는 나라에 공장을 세우고 있으며, 우리보다 돈적은 나라에서 싼 물건을 사들여 나라안 일꾼과 가게가 무너지도록 하고 있습니다. 싼 물건을 사서 쓰는 우리들은, 제값 받고 팔아야 할 물건을 만드는 우리 이웃이 굶어죽도록 내몹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르기 앞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이 만든 ‘옳은 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자 하지 않으면서, 이웃나라에서 ‘싸게 내다 파는 달콤한 맛’에 홀려 머저리가 되었습니다. 앞에서 총칼 들고 밀어닥친 군부대 식민지는 아니지만, 뒤에서 돈다발 들고 킥킥거리는 부자들 놀음놀이 식민지라고 느낍니다.


.. (잠시 방송을 중단하겠습니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겠습니다. 적의 미사일이 우리 나라를 향해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3분 뒤에 폭발합니다.) “맙소사! 여보! 3분밖에 안 남았어!” “어머, 얼른 세탁물 좀 들여놓을게요.” “이리 돌아와, 이 바보야, 대피소로 들어가!” (대피하십시오!) “어떻게 나한테 그 따위 말을 할 수 있어요!” “입닥치고 들어가란 말이야!” “전시라고 해서 품위까지 팽개쳐야 하나요?” (집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입닥쳐! 방송을 듣고 있잖아!” (집 안에 계십시오!) “이날 이때껏 그런 소린 못 들어 봤어요.” (절대로 집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제발 입 좀 닥쳐!” (엎드리세요!) “아, 여보! 오븐을 켜 놨어요.” (들어가! 들어가! 들어가라니까!” ..  (17쪽)


 그나저나 북녘은 대포동미사일을 뭐하러 만들까요. 핵무기를 뭐하러 만들려고 할까요. 남이든 북이든 먼저 치고 들어가면 먼저 맞은편을 쑥대밭이 되도록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는데, 왜 서로서로 먼저 쳐들어가고 있지 않을까요.

 서로가 서로를 쳐들어간다면 누가 땅개가 되어 피를 흘리며 숨을 거두고, 누가 지도자나 사령관이 되어 가슴팍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게 될까요.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끝난 자리에는 무엇이 새로 들어서게 되고,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서로서로 무엇을 더 얻어려고 벌이는 주먹다짐 칼부림 총질이 될까요.
 





 (3)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가 말하는 이야기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는 힘센 나라들이 서로 악다구니처럼 싸움을 벌인 끝에 서로서로 핵무기를 쏘아대면서 모든 사람들이 가루가 되어 죽어 버린 일을 그림이야기로 담아냅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늙은 가시버시는 옛날 생각(제2차세계대전 때)을 하면서 ‘이번에도 어찌어찌 견디면 전쟁이란 바람은 지나가겠지’ 하고 생각하는데, 이번 바람은 그냥 지나가는 바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 목숨을 죽음으로 실어나르는 바람이었습니다.

 이리하여, 늙은 가시버시는 핵무기가 퍼뜨리는 병에 걸려서, 또 병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물과 밥이 다 떨어져 굶어죽었을 테지만, 조그마한 집 조그마한 대피소에 나란히 누워 아주 조용히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970년에 영국 그림쟁이가 담아낸 《바람이 불 때에》인데, 1970년 그무렵에도 ‘핵전쟁’을 걱정해야 할 만큼 사람들은, 아니 숱한 나라 정부들은, 아니 유럽과 미국에다가 러시아 정부들은 서로 누구 힘이 더 센가를 겨루면서 제 밥그릇을 좀더 크게 차지하려는 데에 온힘을 쏟았습니다.

 자, 그러면, 1970년부터 마흔 해 가까이 지난 2009년 오늘날 우리 세상은 어떠할까요. 유럽 나라는, 미국은, 러시아는, 일본은, 또 중국은 어떠하지요? 힘있는 뭇나라들은 힘여린 뭇나라 앞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요. 티벳은 왜 중국한테 짓밟히면서 죽어나야 하는가요. 태평양 섬나라는 어이하여 다국적기업 관광지로 개발되어야 하는가요.


.. “너무 조용하지, 안 그래?” “그래요, 이상하네요. 기차도 안 지나가네. 자동차도 없어요.” “폭발 때문에 모두들 파업했나 봐요.” “탄내가 아주 지독해요.” “맞아. 하긴, 당연한 일이지.” “고기 굽는 냄새 같아요.” “그래, 고기파티를 하나 봐. 사람들이 이번 주엔 일요일이 되기도 전에 만찬을 하나 보군.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럴 거야.” “길이 아주 이상해졌어요. 좀 녹은 것” 같아요.” “그래서 우유배달부가 늦나 보군. 길바닥 어디에 붙어 버렸나 봐. 전쟁이 제대로 진행되고 있는 걸까? 누가 이기고 있을까?” “걱정 말아요, 여보. 신문에 다 나올 거예요.” “생각해 보니까, 신문도 늦는 것 같아.” “어제도 우리 집은 빠뜨리고 갔어요.” ..  (30∼31쪽) 






 그림책은 아이들이 보라고 그린다고 하지만, 《바람이 불 때에》는 아이들이 보기에 썩 알맞지 않은 그림책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야기가 끔찍해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끔찍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어려워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아이들 삶하고 동떨어져서? 아닙니다. 이야기는 아이들 삶하고 가까이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면? 그러면 왜?

 아무래도 《바람이 불 때에》는 철이 없는 어른이 먼저 보도록 그려내지 않았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겪어 보았다고 하거나 전쟁을 안다고 하거나 나라사랑을 하자고 하거나 남북녘이 서로 맞서고 있다고 하거나 세계평화를 걱정한다고 하는 어른들이 바로 이 그림책을 찬찬히 받아들이거나 새기지 않는다면, 이 그림책이 아이들한테 제대로 읽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먼 앞날 세상을 바꿀 테지만, 어른들은 바로 아이들이 자라나는 오늘날 이 세상을 흔들고 있거든요. 오늘날 이 세상을 흔드는 어른들이 우리 삶터를 어떻게 다스리거나 이끄느냐에 따라 아이들 삶과 삶터가 뒤바뀔밖에 없거든요.


.. ‘그럴 필요도 없지. 어차피 케이크는 모두 탈 테니까.’ ..  (17쪽)


 모두를 타죽이게 하는 싸움입니다. 핵무기를 앞세운 싸움이든, 재래식 무기를 앞세운 싸움이든, 모두를 타죽이게 하는 싸움입니다. 어린이도 타죽이고 어른도 타죽입니다. 푸름이도 타죽이고 늙은이도 타죽입니다. 고양이도 타죽이고 강아지도 타죽이며, 염소와 송아지와 돼지와 닭을 가리지 않습니다. 진달래와 개나리와 장미와 튤립을 따지지 않으며, 소나무와 잣나무와 방울나무와 감나루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싸움이라고 하는 바람’이 한 번 불 때에는 이제 모두들 끝이라고 해야 합니다. 큰 싸움이든 작은 싸움이든, 모든 사람을 타죽이게 하는 불바람입니다. 이리하여, 그림책 《바람이 불 때에》는 아이들한테 읽히기 앞서 어른들이 먼저 찬찬히 읽고 새기고 받아들이며 어른들 삶을 스스로 고쳐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이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쥐어 주어야 아이들 또한 속속들이 살뜰히 받아먹습니다.

 그저 지식이나 정보로만 이 책을 쥐어 준다면, 그예 ‘세계 명작 그림책이니 아이들 인성발달에 좋겠지’ 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쥐어 준다면, 우리 어른들은 또다른 뜻에서 ‘싸움에 한발 담그는 셈’입니다. 아이들한테 ‘싸움 솜씨’만을 물려주는 셈입니다. 우리 집 아이와 이웃집 아이한테 싸움을 붙이는 꼴입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를 밟고 올라서도록 내모는 짓이 되고 맙니다. (4342.7.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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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계절
마틴 프로벤슨.앨리스 프로벤슨 글.그림, 김서정 옮김 / 북뱅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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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을 잃거나 버린’ 서울 열두 달 삶이란?
 [그림책이 좋다 66] 프로벤슨 부부,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1년》



- 책이름 :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1년
- 글ㆍ그림 : 마틴 프로벤슨, 앨리스 프로벤슨
- 옮긴이 : 양평
- 펴낸곳 : 백제 (1981.1.10.) / 문선사 (1984.6.15.)
(2008년 11월 10일에 ‘북뱅크’에서 새로운 판으로 펴냈습니다. 새로운 판으로 나온 책이름은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계절》입니다. 새로운 판은 김서정 님이 우리 말로 옮겼고, 새로운 판은 9500원입니다.)



 (1) 열두 달 이야기 그림책


 우리 나라에는 1981년에 처음 나오고, 1984년에 출판사를 옮겨 다시 나온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1년》이라는 그림책은 오래도록 판이 끊어진 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8년 3월, 이 그림책을 그려낸 프로벤슨 부부가 그린 또다른 그림책인 《우리 농장에 놀러 오실래요?》(북뱅크)가 우리 말로 나왔고, 2008년 11월에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계절》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옷을 입고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헌책방에서 이 그림책을 찾아보았을 때에는, ‘1980년대 첫무렵에 이만한 그림책이 우리한테 얼마나 반갑고 좋은가를 알아볼 사람이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어쩌면 서른 해 가까이 된 지난날에는 이 그림책 값을 깊이 느낄 가슴이 많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그무렵만 하여도 우리 나라 곳곳 자연 삶터는 그럭저럭 살아남아 있었고, 제법 큰 도시라 하여도 자전거를 타고 조금만 나가 보아도 싱그러운 자연을 어느 만큼 맛볼 수 있었거든요.

 적어도, 뭉게구름이 있고 소나기가 있으며 무지개가 있었습니다. 먹구름이 있고 회오리바람이 있었으며 파란하늘이 있었습니다. 박쥐가 있었고 땅거미가 있었으며 초롱초롱 빛나는 별이 있었습니다.


― 1월은 추운 겨울의 달. 온 세상은 눈에 덮여 하얗게 됩니다. 땅이 꽁꽁 얼어붙으면 암소는 뒷뜰을 떠나지 않습니다. 닭도 함께 있지만, 1월에는 달걀을 별로 낳지 않아요 …….


 2009년이 한참 흐르고 2010년을 코앞에 둔 요즈음 한국땅에서 열두 달을 헤아려 봅니다. 그림책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계절》에서는 열두 달 이야기가 다 다르게 펼쳐집니다. 1월은 1월다움이 있고 2월은 2월다움이 있습니다. 3월은 3월다움이 있으며 4월은 4월다움이 있어요.

 그러면 2009년 6월에는 무엇으로 유월다움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더위? 여름? 여름 과일? 여름꽃? 여름 하늘? 여름 바다?

 그러면 유월 더위는 얼마나 더운 느낌인가요. 유월 여름은 어떠한 대목에서 칠월 여름과 다른가요. 머리로 헤아리는 여름이 아닌, 우리가 바로 이곳에서 느끼는 여름이 어떠한가요. 봄부터 겨울까지 언제나 딸기며 수박이며 능금이며 값싸게 사들여 먹을 수 있는 판에, 여름 과일이란 무엇일까요. 꽃집에 가면 언제나 장미가 있고 튤립이 있고 나리가 있는 마당에, 여름꽃이란 무엇인가요.

 우리는 여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여름에 바라보는 바다는 봄과 가을에 바라보는 바다하고 무언가 다르다고 느끼고 있습니까. 아니, 동서남이 바다라 하면서도 바다 냄새와 맛을 거의 모르는 채 살아가는 우리들은 아닌가요.


― 1월 다음은 2월이죠. 숲속의 연못은 꽁꽁 얼어붙습니다. 아이들은 모여서 스케이트를 탑니다. 발이나 손이 시려워지면 모닥불 옆에 모여앉아 따뜻하게 불을 쬐기도 하지요. 그런데, 거위는 추위도 잊은 채 겨울을 내내 차디찬 물속에서 놀고 있어요 …….


 너무도 그리운 나날이 되어 버린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계절》 이야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져 버린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내켜 하지 않아 내동댕이쳐 버린 이야기가 아니랴 싶습니다. 그깟 열두 달이야 우리한테는 그다지 안 아름다우니 내다 버려도 됀찮다고 여기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늘날 초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치고 5월을 5월답게, 7월을 7월답게 보내는 아이들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3월이라 다르고 2월이라 다르게 보내도록 놓여난 아이들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제도권 입시교육에서 벗어나 대학생이 된다 한들, 스스로 제금나와 지내며 회사 다니는 몸이 된다 한들, 철을 철답게 느끼고 달을 달답게 느낄 만한 겨를이 터럭만큼이라도 있겠습니까.


― 3월은 바람이 붑니다. 밖은 아직도 춥지만 봄이 다가오는 듯해요. 헛간에도 봄이 스며들어 오고 있어요. 포니가 예쁜 새끼를 낳았읍니다. 사랑스런 눈길로 잘 돌봐 주고 있어요. 언제나 헛간에 있던 잿빛 고양이도 건초 속에서 새끼를 낳았어요. 그리고 또 양은 두 마리 아기 양을 …….


 귀염둥이 집짐승을 키우는 사람이 늘지만, 집짐승이 철과 달에 따라 달리 살아가는 버릇을 지키는 일이란 없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언제나 아무 걱정이 없는 집에서 키워지는 집짐승한테서 짐승다움을 찾아보기란 어렵습니다. 살아숨쉬는 장난감을 넘어, 스스로 제 삶을 꾸리는 집짐승이란 하나도 없다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흙땅을 파고 더위를 식힐 개들이 살 터전이란 없는걸요. 껑충껑충 뛰며 지붕을 타고 오를 고양이들이 깃들 터전이란 없는걸요. 참새조차도, 비둘기조차도, 까치조차도 둥우리를 틀 만한 조그마한 틈바구니란 없는걸요. 사람들이 ‘닭둘기’라고 놀려대어도 먹고살자면 스스로 닭둘기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을 수 없는 비둘기 삶을 읽어내며 미안해 하는 사람이란 없는걸요.


― 4월은 봄의 달입니다. 여러 동물들이 새로 태어나고 알을 낳는 걸 보면 이제는 정말 봄이 왔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갈색 암탉은 벌써 21일 동안이나 달걀을 품고 있읍니다. 껍질을 깨고 나오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겠지만, 지금 막 병아리가 나오려는 참이에요. 병아리는 알에서 나오자마자 아주 몽실몽실한 예쁜 모습을 하고 있어요 …….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아침똥을 눈 아기를 씻기는데 밖에서 후두둑 소리가 크게 나더니 소나기가 찾아옵니다. 화들짝 놀라 앞마당에 널어 놓은 빨래를 부리나케 걷습니다. 2∼3분쯤 뒤 소나기가 멎습니다. 살짝 해가 비칩니다. 여우비라고는 할 수 없고, 사람 놀리니? 음, 놀릴 만도 하지. 사람이 얼마나 이 땅을 더럽히고 있는데.


 (2) 우리한테 열두 달 이야기란


― 5월은 따뜻하여 동물들은 무거운 외투를 벗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제가끔 털을 갈기도 하고, 양의 털은 사람이 깎아 주지요. 양을 지키는 검은 강아지도 털을 잘라 달라고 졸랐어요. 그래서 길게 말아올려진 부분만 조금 잘라 주었더니 아주 많이 달라 보였어요. 하지만 겨울이 다시 올 때까지 털은 다시 예전처럼 자랄 거예요 …….


 우리 식구가 깃든 골목동네에서는 어렴풋이나마 철과 달을 느낍니다. 달따라 철따라 골목빛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집이건 크고작게 또는 많고적게 꽃그릇을 키웁니다. 덩굴풀을 키웁니다. 부러 길바닥부터 옥상까지 줄을 길게 늘어뜨려 덩굴풀이 줄기를 올리도록 해 놓습니다. 먹는 푸성귀를 심기도 하지만, 하얀꽃 노란꽃 빨간꽃이 차례차례 피어나도록 어여쁜 꽃씨를 심기도 합니다.

 조팝나무와 진달래 철쭉 개나리부터, 수수꽃다리 민들레 씀바귀 깨 앵두꽃을 거쳐, 수국 장미 달맞이꽃 메꽃 고추꽃을 지나, 배추꽃 가지꽃 오이꽃 호박꽃을 즐기는 가운데, 감꽃 대추꽃 호두꽃 밤꽃까지, 하루가 다르게 바뀌어 가는 골목동네 모습입니다. 나날이 다르게 선보이는 골목집 꽃그릇입니다.

 널어 놓는 빨래를 보면서 다름을 느낍니다. 시들고 마른 줄기와 잎사귀를 보며 철을 느낍니다. 대문에 붙인 봄맞이 글씨를 보며 새해를 느낍니다. 해가 뜨는 길이와 해거름을 돌아보면서 하루하루를 느낍니다. 비록, 시골살이처럼 또렷하게 느끼는 하루와 달과 철과 해는 아니지만, 아쉬운 대로 하루하루를 언제나 새롭게 느낍니다.


― 6월에는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읍니다. 들에는 메뚜기와 파랑깡충이와 불개미도 뛰어다니고 있군요 … 여름의 들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많이 피어 있읍니다. 꿀벌들은 물론 꽃을 좋아하지만, 양이나 염소도 무척 좋아한답니다. 누구나 꽃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겠죠 …….


 골목길 사진을 한 해 내내 날마다 찍다 보면, 사진에 담긴 빛이 늘 다르다고 깨닫습니다. 봄을 맞이해 가을이 무르익을 때까지는 빛깔이 아주 곱고 환합니다. 부드러운 빛깔이 짙은 빛깔이 되고 무르익는 빛깔이 되어 마무리합니다. 이내 겨울 문턱이면 어둡고 무겁고 차갑습니다. 제아무리 한낮 맑은 날 찍어도 겨울 사진은 겨울 사진입니다. 길거리에 눈송이 하나 흩날리지 않아도 겨울은 겨울이에요. 빗줄기 모습을 따로 담지 않아도 봄날은 봄날이고 여름날은 여름날입니다.

 그러나 저는 골목동네에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가니까 이런 느낌을 몸으로 받습니다. 또한 골목동네에서 살아간다 하여도 바쁜 시간에 매이지 않으니까, 틀에 박힌 회사에 나가지 않으니까, 더 많은 돈벌이에 이끌리지 않으니까, 하루하루 날씨를 느끼고 하늘을 느끼고 땅을 느낍니다.

 찬물에 기저귀를 빨고 헹구고 빨래줄에 널 때에도 날씨와 하늘과 땅을 느끼고 바람을 느낍니다. 옆지기와 번갈아 아기를 안고 업으며 마실을 다닐 때에도 날씨와 하늘과 땅을 느끼고 바람을 맞아들입니다. 몸과 몸으로, 마음과 마음으로, 우리들은 우리들 느낌을 우리 아기한테 물려줍니다. 자연이란 꼭 시골에만 있지 않음을 물려주고, 자연이란 먼저 내 몸과 마음에서 샘솟도록 해야 함을 이어줍니다.


― 6월이 지나면 7월이에요. 별이 없이 둥그런 달밤에는 좀체로 잠이 오지 않습니다. 웬일일까요? 귀를 기울이면 여러 가지 소리가 들립니다. 개구리는 개골개골, 귀뚜라미는 귀뚤귀뚤, 부엉이는 친구들에게 부엉부엉 하고 외칩니다. 포오치에 앉아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낮은 소리로 옛날이야기를 합니다. 때로는 음매 하고 우는 정겨운 소의 울음소리도 들려옵니다 …….


 다시 빗줄기를 뿌리는가 싶어 걱정스러웠는데, 빛살이 맑고 환하게 비춰들어 옵니다. 우리 집 둘레 조촐한 나무숲에서 살고 있는 새들이 지저귑니다. 나뭇가지에 앉아 지저귀는 새소리가 있고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새소리가 있습니다. 저 멀리 바닷가 부두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오고, 큰길가를 오가는 큰 짐차가 내는 뛰뛰빵빵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 소리조차 살갗으로 못 느끼지 않을까 싶은데, 1월 다르고 12월 다른 소리를 가늠할 만한 귀가 사라졌으리라 봅니다. 2월 다르고 11월 다른 냄새를 가눌 만한 코가 없어졌으리라 봅니다. 3월 다르고 10월 다른 모습을 살펴볼 만한 눈이 잊혀졌으리라 봅니다. 4월 다르고 9월 다른 느낌을 알아챌 가슴팍이 꺼져 버렸으리라 봅니다.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에도, 자가용을 얻어탈 때에도, 기차나 배를 탈 때에도 늘 매한가지입니다. 이 쇳덩어리에 몸을 싣는 내가 무엇을 느낄 수 있는지요? 그나마 자전거라도 타고 달리면 달과 날과 해에 따라 다른 바람과 햇살을 느낍니다.


― 8월은 여름이 끝나는 달, 하늘은 푸르고 햇빛은 쨍쨍합니다. 햇빛은 눈부시게 빛나고 있읍니다. 암소는 그늘에서 낮잠만 잡니다. 양은 날마다 조금씩 자라고 있읍니다. 양을 키우는 어린이의 마음은 흐뭇합니다. 꽃도 무럭무럭 자랍니다. 8월은 더우니까 시들기 쉬운 꽃을 잘 돌봐 주어야 합니다 …….


 내 손으로 땅을 어루만져야 느끼는 하루일 테고 깨닫는 한 달일 테고 받아들이는 철일 테며 알아차리는 한 해가 될 테지만, 내 손으로 책만 쥐고 볼펜만 쥐며 자판만 또닥거리고 운전대만 붙잡는다면 내 온몸은 온통 숫자 셈에만 얽매입니다.

 나는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아끼면서 즐기는가를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내가 한 달에 얼마를 벌고, 글 하나 써서 얼마를 받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내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돌보면서 함께 살아가는가를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 아이 나이가 몇 살(몇 달)이고, 천기저귀를 쓰느니 엄마젖을 먹이느니 헌옷을 얻어 입히느니 생협에서 장만한 먹을거리로 젖떼기밥을 먹이느니 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어 이렇게 좋았고 저 책을 읽어 저렇게 기뻤음을 글로 담고 싶습니다. 책 줄거리를 읊어대는 글이나 책을 몇 권이나 읽어치웠다는 숫자놀이를 글에 담고 싶지 않습니다. 느끼는 가슴이 소담스럽고, 느끼는 가슴을 다루는 데에도 제 삶은 참으로 짧습니다. 짧은 만큼 하루하루 알뜰히 즐기고픈 매무새이며, 짧기에 더 사랑스럽고 애틋하게 껴안고 싶은 하루하루입니다. 날마다 다르게 느끼고 달마다 다르게 깨닫고 철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3) 좋은 그림책이 좋은 그림책으로


― 그러다가 우리의 이마에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은 끝나버리는 것입니다. 해는 짧아지고 벌써 9월인걸요.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사람들은 누구나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습니다. 9월의 저녁은 정말 기분이 좋고, 말들은 신이 나서 마구 뛰고 싶어합니다 …….


 그림책 《단풍나무 언덕 농장의 사계절》은 더없이 푸근하고 따뜻합니다. 우리하고는 퍽 동떨어져 있을 법한 서양나라 열두 달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건만, ‘한 달 두 달 석 달 … 열한 달 열두 달’로 이어지는 철흐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안으면서 하루하루를 기쁨으로 맞아들이는 가슴녘이라면, 동양이건 서양이건 한국이건 미국이건 모두 한목소리요 한이웃임을 느끼도록 합니다.

 세계명작이란 이름은 세계 어느 나라 겨레 사람들이라 하여도 웃음과 눈물을 함께 느끼면서 받아들일 만한 작품을 가리키는구나 하고 깨닫도록 합니다. 이 그림책이 처음 나왔을 때부터, 이 그림책이 한국에 처음 옮겨지고 새삼 옮겨지는 때까지도 아름다울 수 있는 작품이며,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나 쉰 해나 백 해가 흐른 다음에도 아름답다고 느끼는 작품이라고 봅니다.


― 10월은 아주 좋은 달입니다. 무르익은 추수가 한창이구요. 첫 서리가 내리면 벌레들도 차츰 없어집니다. 밭에는 이제 동물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것이 별로 없어요. 건초더미는 헛간에 쟁여지고, 잘 여문 옥수수는 곳간으로 들어가지요. 그래서 동물들은 헛간 가까운 뜰을 떠나려 하지 않습니다. 닭들도 전보다 빨리 닭장으로 들어가고 달걀도 많이는 낳지 않게 됩니다 …….


 이제 우리 나라 사람 스스로 곧잘 ‘자연 그림책’이나 ‘생태 그림책’을 펴냅니다. 우리네 열두 달이나 네 철 이야기를 다루는 어린이책을 선보이기도 합니다. 보리 출판사에서 펴낸 ‘도토리 계절 그림책’ 네 권, 《우리 순이 어디 가니》, 《심심해서 그랬어》, 《바쁘다 바빠》, 《우리끼리 가자》는 더할 나위 없이 손꼽히는 좋은 작품입니다. 우리 시골 삶터를 꾸밈없이 보여주면서 우리네 철흐름을 고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봄에 따라 여름에 따라 가을에 따라 겨울에 따라, 우리 살림살이를 어찌어찌 다르게 꾸려 왔는가를 차근차근 일러 줍니다.

 그런데 이런 일러주기와 보여주기가 거의 모두 ‘일러주기와 보여주기로 끝!’을 맺곤 합니다. 《사계절 생태놀이》(천둥거인) 같은 작품도 몹시 빼어난 작품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 하는 물음을 그칠 길이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아이들한테 일러줄 수 있어도 우리 아이들이 스스로 즐길 수 없는 이야기들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아이들한테 들려줄 수 있어도 우리 어른이 우리 아이와 함께 즐기지 않는 이야기들일 뿐입니다.


― 11월! 거의 매일 밤 서리가 내리고, 차가운 공기는 겨울 냄새를 풍깁니다. 농장 연못에도 살얼음이 얼었지요. 농장 근처의 숲속에서 사냥꾼의 피리 부는 소리가 메아리쳐 옵니다 … 11월에는 추운 겨울이 오기 전에 농장을 나가는 동물들이 있읍니다. 팔려가는 것도 있지만, 가장 훌륭한 수컷들은 씨를 붙여 주기 위해 가까운 농장으로 나들이를 갑니다 …….


 우리네 책마을이 많이 발돋움했기 때문에, 지난날처럼 무턱대고 나라밖 책을 옮겨대는 일만 하지 않습니다. 훌륭하고 아름다운 책을 쏠쏠히 엮어냅니다. 아쉽다면, 엮어내는 매무새는 있으나 ‘정작 누가 이렇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다가 ‘우리가 다 함께 이렇게 살려면 어떡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을 깊이 파고들지는 못합니다.

 구경거리가 되는 생태 이야기는 넘칩니다. 지식과 정보가 되는 환경 이야기는 쏟아집니다. 시험공부에 도움되는 자연 이야기는 쎄고 쎘습니다. 그렇지만, 삶이 되는 생태며 환경이며 자연만큼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내 삶으로 받아들여 내 생각으로 곰삭이고 내 이야기로 풀어내며 어깨동무할 만한 생태며 환경이며 자연만큼은 도무지 찾아내기 힘듭니다.


― 12월은 겨울이 시작되는 달이지요. 대지는 겨울의 눈으로 덮여집니다. 마침내 헛간 속에서 생활하는 계절이 왔어요. 따뜻한 짚의 잠자리 속에서 그들은 맛있는 건초와 옥수수를 먹으며, 놀거나 숨거나 꿈을 꾸기도 합니다 …….


 문득, ‘도시에서 열두 달 보내기’ 같은 이야기책을 적바림해 보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궁금합니다. 이 나라 서울에서 보내는 열두 달은 어떻게 다를는지, 이 나라 서울살이 열두 달은 어떤 이야기가 샘솟을는지. 이 나라 서울에 뿌리내리고 있는 어른과 어린이는 저마다 어떤 삶을 보내고 있을는지. (4342.6.1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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