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겨울 평화 발자국 6
강제숙 글, 이담 그림 / 보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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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꽃 할머니를 짓밟는 겨울나라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4] 강제숙·이담, 《끝나지 않은 겨울》



 야누슈 코르착 님 삶을 다룬 그림책 《천사들의 행진》(양철북,2008)은 나라안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온누리 아이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한삶을 보낸 어른 한 사람 이야기를 차분하고 곱게 보여줍니다. 위인전이든 훌륭하다는 사람 이야기이든 군인과 임금과 부자와 과학자와 운동선수만을 비추는 틀에 얽매인 이 나라임을 헤아린다면, 《천사들의 행진》 같은 그림책이 하나 나온 일이란 몹시 반가우며 대단합니다.

 우리 나라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한 나라밖 빛나는 어른인 야누슈 코르착 님 삶을 《천사들의 행진》에 담았다면, 사람들한테 제대로 읽히지 못한 나라안 빛나는 어른인 문힉환 님 삶을 그림책으로 담은 《갈 테야 목사님》(웅진주니어,2010)이 있습니다. 이제는 윤이상 님이나 임응식 님이나 최민식 님이나 추송웅 님 같은 분들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 나오기도 하며, 독재자 아닌 그림할머니 박정희 님 같은 분 삶을 그리는 동화책이 나오기도 합니다. 아직 이 나라는 민주주의 나라라 할 수 없으나, 제법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듯한 모습을 책마을에서 엿볼 만합니다.

 그러나 이 나라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나라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다니는 배움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나라 제도권 학교는 모두 ‘입시 싸움터’이지 참다운 배움터가 아닙니다. 사람다운 삶을 배우고 사랑스러운 넋을 배우며 참다운 말글을 배우는 터전이 아닌 한국땅 학교입니다. 오로지 대학교바라기에 쏠린 시험문제 풀이터인 한국땅 학교입니다. 대학교라는 곳은 더욱 큰 회사에 들어가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장사꾼을 키우는 자리로 탈바꿈했습니다. 참배움이 없는 나라가 민주주의 나라일 수 없습니다. 참배움이 없는 대한민국이라면 봉건주의 나라이거나 제국주의 나라이거나 엉터리 나라입니다.

 지난 1998년에 쉰 몇 해 만에 정권이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참말 정권이 처음으로 바뀌며 나라가 크게 꿈틀거렸습니다. 다만, 정권이 바뀌었어도 막개발 정책은 고스란히 이어졌고,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삶을 즐겁고 아름다이 붙잡으며 오순도순 어깨동무할 수 있는 삶터를 지켜 주지 않았습니다. 예전 정권이든 바뀐 정권이든 또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정권이든 또다시 바꾸자고 하는 정권이든, 정치를 하거나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언제나 돈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어야 한다고 말할 뿐 아니라, 당신 스스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움켜쥐고 있습니다. 당신한테 있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이웃하고 나눌 생각이 없이, 당신은 당신대로 훨씬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한편 돈있는 이들이 돈을 더 크게 불릴 수 있는 길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삶을 아름다이 가꾼다든지 넋을 따스히 돌본다든지 말을 알차게 빛낸다든지 하는 데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요.

 이 나라 껍데기는 살짝 민주주의 맛을 보았다 할 만합니다. 이리하여 《천사들의 행진》이나 《갈 테야 목사님》 같은 놀라운 그림책이 태어납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는 민주주의 겉만 살짝 핥을 뿐이기에 《천사들의 행진》 같은 그림책은 알찬 이야기를 담기는 했어도 지나치게 어둡습니다. 이 나라는 민주주의 속살을 사랑하려 하지 못하기에 《갈 테야 목사님》 같은 그림책은 참민주와 참통일을 꿈꾸는 삶이란 따분하지 않고 재미나면서 올바른 일임을 보여주기는 해도 꽤나 어수선합니다. 야누슈 코르착 님이 얼마나 밝고 시원하며 푸른 사람인가를 《천사들의 행진》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문익환 님이 얼마나 정갈하며 단단하고 눈물 많은 사람인가를 《갈 테야 목사님》은 드러내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그림책을 내놓기는 내놓습니다만, 큰어른이라 하는 분들이 걸었던 참길에서 ‘참’과 ‘길’을 살뜰히 읽어내어 곰삭인 뒤 그려 보이는 매무새는 아직 마주하기 힘듭니다.


.. 우리는 발을 동동 구르며 내려 달라고 했지만 그 사람들은 들은 척도 안 했어요. 트럭은 해 질 무렵에야 멈췄어요. 우리는 허름한 여관방에 짐짝처럼 떠밀려 들어갔어요 ..


 2010년 8월 15일에 맞추어 그림책 《끝나지 않은 겨울》(보리,2010)이 나옵니다. ‘정신대’, ‘위안부’, ‘성노예’ 같은 이름이 붙은 이 나라 여느 할머니 삶자락 하나를 들여다보는 그림책 하나 나옵니다.

 경상도 시골이든 강원도 시골이든 함경도 시골이든 전라도 시골이든, 여느 시골마을에서 땅을 부치고 땅처럼 엎드려 살아가던 사람들은 땅을 섬기지 않을 뿐더러 땅을 짓밟는 권력자한테 등허리와 팔다리 모두 짓이겨진 채 식민지살이를 했습니다. 식민지살이라면 으레 일본 제국주의만 떠올리는데, 제국주의는 일본에만 있지 않습니다. 중국에도 있고 미국에도 있으며 한국에도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든 제국주의 권력자가 또아리를 틀고 있습니다. 모두들 제 나라 여느 자리 수수한 농사꾼을 군화발로 짓누른 채 돈과 이름과 힘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림책 《끝나지 않은 겨울》은 당신 뜻하고는 동떨어진 채 일본군한테 붙잡혀 ‘종군 위안부 삶’을 보내야 했던 할머니가 얼마나 아팠고 얼마나 괴로웠으며 얼마나 힘들었는가를 그려냅니다.


.. 나는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지만 나와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다시는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요 ..


 흔히 ‘정신대 할머니’라는 이름을 듣는 할머님이 조곤조곤 말문을 엽니다. 참으로 당신은 배우지 못하고 알지도 못한다는데, 당신은 제도권 학교를 배우지 못했을 뿐이지, 이 나라 산과 들과 바다와 냇물과 갯벌과 나무와 풀과 벌레와 짐승을 당신 어버이한테서 골고루 잘 배웠습니다. 당신은 큰 도시는커녕 작은 도시로 나와서 살아가지 않았을 뿐이요, 게다가 권력이든 재산이든 이름값이든 누려 보지 않았을 뿐더러 누릴 마음조차 없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이 나라에서 당신과 매한가지로 수수하고 나즈막하게 살아가는 모든 땅붙이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음과 눈물을 주고받는 삶을 보냈습니다. 시골에서는 논밭하고 사귀는 한삶이었고, 도시에서는 골목길하고 어깨를 겯는 한삶이었습니다.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여름이면 김을 매며 가을이면 열매를 거두어 겨울이면 길쌈을 하지요. 살림을 하고 되살림을 하며 살림살이를 해 왔지요. 큰 돈벌이이든 높은 이름벌이이든 대단한 힘벌이(권력놀음)이든 해 보지 않았고, 할 생각이 없는데다가, 할 까닭이 없습니다. 봉숭아를 잘게 빻아 손가락에 물들이는 멋으로도 곱고 어여쁜걸요.


.. 나에게 남은 것은 옷 보따리 하나였어요. 나는 기차를 타고, 걷고 또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고향집 담 밑에는 여전히 봉숭아가 곱게 피어 있었어요. 나는 차마 들어서지 못하고 집 밖에서 서성거렸어요. 엄마가 나를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 나왔어요 ..


 그림책 《끝나지 않은 겨울》은 책이름 그대로 이 나라에 ‘겨울은 끝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나라 숱한 할머님들이 겪은 아픔과 슬픔을 그림과 글로 낱낱이 차분하게 보여주면서 ‘어떤 겨울이 버젓이 남아 있는가’를 알려줍니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를 들이대면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이야기를 제대로 알아보라고 말문을 엽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는 이야기인데다가, 학원이며 영어이며 게임이며 어지럽고 바빠맞은 나날에 고단해 아예 멀리 동떨어져 있는 이야기를 제발 숨 좀 돌리며 들어 보라며 손길을 내밉니다.

 ‘스펙’을 알거나 ‘아이템’을 아는 일이란 앎다운 앎이 아님을 들려주는 그림책 《끝나지 않은 겨울》입니다. 돈에 사로잡히거나 가방끈에 얽매인 삶은 삶다운 삶이 못 됨을 보여주는 그림책 《끝나지 않은 겨울》입니다. 이 나라는 일본 제국주의한테서 풀려났지만, 우리 스스로 ‘한국 제국주의’로 지내고 있다면, 예나 이제나 똑같이 서슬퍼런 겨울나라에서 꽁꽁 얼어붙을밖에 없음을 일깨우는 그림책 《끝나지 않은 겨울》입니다.

 제국주의란 군대힘으로 이웃나라뿐 아니라 제 나라까지 못살게 들볶습니다. 사람들이 옳게 못 느껴서 그렇지, 우리 나라는 이웃나라로 마구 쳐들어간 적이 없다 하지만, 온누리에 손꼽힐 만큼 군대가 크며 무기가 많은데다가 큰돈을 군사힘을 불리는 데에 바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또한 제국주의임을 알아채야 합니다. 우리 나라 또한 교육이 교육답지 못하고 문화가 문화답지 않은 가운데 사회가 사회다움을 잃고 있음을 느껴야 합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외치는 참교육이 아니더라도, 참말로 이 나라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배우는 터전이 아닌 대학입시만을 바라보는 싸움터이잖습니까. 우리 나라에 무슨 문화가 있습니까. 우리 나라에는 장사만 판을 치고 유행과 사대주의만 감돌잖습니까. 우리 사회가 무슨 민주주의입니까. 평화와 평등하고는 동떨어진 채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히기가 넘실대잖습니까. 학교에서는 왕따요, 일터에서는 비정규직과 이주노동자 차별인데, 집에서는 아주 단단한 남녀차별이 꿈쩍도 안 하며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예나 이제나 차디찬 겨울입니다. 우리 나라는 사랑스럽고 따스한 나라가 아니라 차디차고 매몰찬 겨울나라입니다.


.. 그때마다 나랑 순이는 눈물을 머금은 채 우리 꼭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자고 두 손을 맞잡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밤에 순이가 사라졌어요. 몰래 산에 올라가 바다에 몸을 던진 거예요 ..


 그림책 《끝나지 않은 겨울》을 다시금 넘깁니다. 이 그림책에는 슬프고 아린 이야기가 가득합니다. 그런데 슬프고 아린 이야기만 소록소록 담지지 않습니다. 겨울을 이야기하기 앞서 할머님은 봄을 이야기합니다. 할머님이 아리따운 색시였을 무렵 당신 어머님하고 봄나물을 뜯고 캐던 따스하고 사랑스러운 나날을 이야기합니다. 할머님은 당신 한삶을 이야기하며 끝자락으로 갈수록 눈물을 짓고 아파하셨을 테지만, 앞자락 이야기, 그러니까 봄날 당신 어머님하고 봄나물을 마주하며 땅에 몸을 붙이고 두 손에 흙물이 들던 이야기를 할 적에는 웃음을 짓고 좋아하시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할머님은 이 그림책 맨 마지막 대목에서 말하듯 “다시는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온 세상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해요.” 하고 이야기하며 살아가시겠지요. 그런데 할머님이 날마다 이 이야기만 꺼내고 살아가지는 않으리라 느낍니다. 할머님은 이날 이때까지 당신 한삶을 버티거나 이을 수 있던 뿌리는 무엇이겠어요. 할머님은 바로 흙과 같이 살아오며 당신 몸에 곱디고운 꽃송이 하나 피워올리는 분입니다. 당신 몸을 바쳐 꽃송이 하나 피도록 해 온 분입니다. 흙하고 어깨동무하면서 스스로 흙이 되고 스스로 흙으로 돌아가는 분입니다.

 그림책 《끝나지 않은 겨울》 첫머리를 보면 할머님 얼굴과 모습을 아주 어둡게 담습니다. 쭈글쭈글 굵고 큰 당신 손만 밝게 그렸습니다. 아무래도 “끝나지 않은 겨울”을 보여주려 하다 보니까, 할머님을 괴롭혔던 어두운 그늘을 알리려 하다 보니까, 이렇게밖에 못 그리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렇지만, 글쓴이와 그린이가 좀더 할머님하고 오래오래 살가이 사귀었다면, 또한 ‘정신대 할머니’가 어디 먼 나라 사람이 아닌 당신 친할머니요 외할머니처럼 수수한 할머니 한 분임을 깨닫는다면, 첫머리부터 끝머리 그림까지 사뭇 새롭게 거듭나지 않았겠느냐 생각합니다.

 ‘위안부’ 할머니가 아닌 그냥 할머니입니다. ‘정신대’ 할머니가 아닌 그예 할머니입니다. ‘성노예’ 할머니가 아닌 그저 그대로 할머니입니다.

 우리는 할머니한테서 당신 삶을 귀담아들을 뿐입니다. 우리는 할머니한테서 당신 삶을 배울 뿐입니다. 우리는 할머니한테서 당신 삶을 얻을 뿐입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은 예나 이제나 어슷비슷하게 차디찬 겨울나라입니다. 이와 달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할머니 가슴은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따스한 봄흙 봄나물 봄꽃입니다. 누군가 군화발로 당신을 짓이겼어도 옆으로 줄기를 누인 채 꽃을 피우는 할머니입니다. 누군가 총부리로 당신을 겨누었어도 스스럼없이 밥 한 그릇 소담스레 퍼서 “배고플 텐데 밥이나 좀 자쇼.” 하고 말을 건네는 할머니입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노상 봄이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늘 봄이었습니다. 우리 할머니들은 바로 봄입니다. 사내들만, 돈에 굶주린 사내들만, 돈에 미친 사내들만, 돈 때문에 제국주의에 몸과 마음 모두 팔아치운 사내들만 언제나 겨울입니다. (4343.8.24.불.ㅎㄲㅅㄱ)


― 끝나지 않은 겨울 (강제숙 글·이담 그림,보리,2010.8.15./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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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입니다 - 2005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대상 수상작 보림창작그림책공모전 수상작 11
이혜란 글 그림 / 보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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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림책 하나 그리거나 내놓을 때 좀더 따스하고 참다운 사랑을 담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우리 식구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 이혜란, 《우리 가족입니다》



 음성 읍내에 있는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가고, 서울 홍제동에 있는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가 보고 난 다음 옆지기 말을 곰곰이 되씹습니다. 옆지기는 중국집에 가면 밥맛이 없어 못 먹을 일이 거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웬만한 중국집이라면 퍽 괜찮다 할 만하며, 꼭 그렇지는 않다 하겠으나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찾아갈 때라면 즐겁게 한 끼를 맞아들일 수 있다고 느낍니다.

 인천에서 사는 동안 찾아간 중국집은 언제나 ‘중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이었습니다. 한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은 애써 찾아가지 않았으며, 한국사람이 하는 중국집에 억지로 끌려 가서 밥을 먹은 뒤에는 영 개운하지 않았습니다. 한국사람이라 해서 짜장면이나 가락국수나 돼지고기볶은튀김을 잘 못하지는 않겠지요. 그러나 한국사람이 빚는 중국 밥맛하고 중국사람이 빚는 중국 밥맛은 같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 살아가는 중국사람하고 같을 수 없을 뿐더러, 중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랑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한국사람이랑 서로서로 손맛이 비슷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다른 삶이고 저마다 다른 손길이며 저마다 다른 몸짓입니다. 언뜻선뜻 바라보기에는 한국땅에서 꾸리는 중국집이라면 다 같은 중국집이라 할 텐데, 곰곰이 살펴보면 한국땅에서 꾸리는 중국집이란 다 같은 중국집이 아닙니다. 중국사람이 꾸리는 중국집 느낌이나 기운을 베끼거나 따르는 한국사람 중국집이 더러 있으나 중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중국집을 마련하여 꾸리는 넋이나 몸짓을 헤아리거나 받아들이기까지는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사람 중국집에는 ‘신속배달’ 따위는 없거든요.

 ‘신속배달’을 우리 말로 옮기자면 “빨리 갖다 드립니다”입니다. 전화로 뭣뭣을 시키면 아주 빨리 갖다 주겠다는 소리인데, 중국밥이든 한국밥이든 갓 지은 다음 곧바로 먹으면 가장 맛이 있기는 하다지만, 갓 지은 밥이 꼭 갓 지은 다음에만 가장 맛있지 않습니다. 이는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 아주 잘 나와 있습니다. 만화책 《미스터 초밥왕》에는 ‘배달 초밥’ 이야기가 나옵니다. 초밥을 그 자리에서 빚어 먹지 않고 ‘전화로 시킨 뒤 갖다 주어 먹도록 한다’는, 어찌 보면 참 터무니없는 소리라 할 만한 대목입니다만, 초밥을 빚을 때에 ‘몇 분 뒤에 먹는가를 헤아려 몇 분 뒤에 초밥 맛이 살아나도록 해 놓는다’면 얼마든지 ‘배달 초밥’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속배달’이 더 맛나거나 좋은 중국밥이 아니라, ‘알맞춤한 때에 갖다 주어 알맞춤하게 먹을 수 있도록 해’야 비로소 좋은 중국밥입니다.

 한국사람들은 ‘신속배달’에 매여 있습니다. 어느 중국집은 전화로 시킨 지 십 분이 채 되지 않아 바람처럼 갖다 줍니다. 번개처럼 갖다 준다고 하는 중국집까지 있습니다. 참 대단한 빠르기이지요. 그러나 ‘빨리 갖다 주기’만큼 ‘시켜서 먹는 밥맛’을 살피고 있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가게에서 받아 먹을 때하고 시켜서 먹을 때하고 맛이 같다면 이런 밥집에서는 밥을 먹을 수 없다고 느끼지만, 이를 곱씹는 사람을 만나기는 힘듭니다.

 우리 식구는 한국사람 중국집에 굳이 찾아가지 않습니다. 밥 한 그릇 사먹는다 할 때에 어디이든 맛집을 찾아가도 나쁠 일은 없습니다만, ‘신속배달’이라든지 ‘친절봉사’를 살피는 한국사람 중국집보다는 ‘제맛’과 ‘참맛’을 살피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한결 낫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국사람 중국집’이 그러하지는 않으나, 따로 ‘신속배달’은커녕 ‘느린배달’조차 하지 않는 중국집을 좋아합니다. 장사가 잘되어 요리사를 더 두거나 가게를 늘릴 만하지만 요리사를 더 두거나 가게를 늘릴 꿈은 키우지 않고 ‘사람이 많이 찾아 북적대’면 외려 쉬는 날을 마련해 아예 가게 문을 안 여는 날을 두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반갑습니다. 참말 중국사람다운 중국집으로 꾸미고, 중국사람이 빚는 중국밥을 내놓으며, 중국밥에 어린 맛을 꾸밈없이 느끼도록 이끄는 중국사람 중국집이 즐겁습니다.

 우리 식구는 한정식집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딱히 반기지도 않습니다. 애써 찾아가지 않을 뿐입니다. 한국사람한테는 한국밥이라지만, 바깥밥으로 사먹을 ‘한국밥집’ 가운데 참다운 한국밥맛을 느끼도록 해 주는 곳이란 몹시 드물기 때문입니다.

 궁중에서 임금님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농사꾼이 들판에서 먹는 밥이 한국밥일까요. 양반이 먹던 밥이, 고관대작이라는 분이 먹던 밥이, 서울 궁궐 안쪽에 살던 사람이 먹던 밥이, 사또나 이방 같은 분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달동네를 이루며 살아가던 사람이 먹던 밥이 한국밥일까요. 이 땅에서는 어떤 밥을 두고 한국밥이라 할 만하며, 어떻게 가게를 꾸미거나 일구어야 한국밥집이라 할 만할까요.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를 펼칩니다. ‘한국사람이 꾸리는 중국집’ 식구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그림책입니다. 갑작스레 찾아와 군식구로 지내는 할머니를 사이에 놓고 온갖 이야기가 벌어집니다. 그린이 이혜란 님은 책 끝에 붙인 그린이 한 마디에 “아버지는 자신을 버린 할머니를 묵묵히 받아들이셨습니다. 억울해 하지도 불평하지도 않으셨어요. 그저 한 마디. ‘부몬데 우짤 끼고.’ 그뿐이었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아버지의 상처를 이해하셨습니다. 그런 두 분과 할머니를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하고 적바림합니다.

 이 말마따나 그린이 어머니는 아버지를 헤아렸겠구나 하고 느낍니다. 그러면 그린이 아버지 또한 할머니를 헤아렸을까 궁금합니다. “묵묵히 받아들”였다고 적바림했지만, 죽을 날을 앞두고 아들 집에 찾아온 할머니한테 잠자리와 먹을거리를 주고 똥을 치워 주는 일이 ‘받아들이기’라고는 여길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부몬데 우짤 끼고.”처럼 뒤치다꺼리만 해 주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뒤치다꺼리를 해 준다고 받아들이는 삶은 아닙니다. 받아들이는 삶이란 사랑하는 삶이고, 사랑하는 삶이란 ‘부모가 아니라도 우짤 끼고.’까지 넘어서면서 ‘넌 우짤 낀데?’이며, 한 걸음 나아가 ‘니 할머니 아닌가? 니 아버지한테 어머니 아닌가?’입니다.

 그린이 이혜란 님은 “저희 아버지는 엄마의 사랑이라는 걸 모르고 자라셨어요.” 하는 덧말을 붙입니다. 저 또한 퍽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해 왔고, 아직 이런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처럼 어리석을 뿐 아니라 엉터리요 어줍잖은 생각이란 없습니다. 사랑이 없이 태어나는 아이는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태어날 아이는 하나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온누리 모든 아이는 바로 사랑으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숨을 거둔 어머니라 할지라도 아이한테 사랑을 베풉니다. 아이를 낳기 무섭게 입양을 보내야 한 어머니여도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줍니다. 아이를 낳고 아주 어릴 때에 다른 이한테 넘긴 어머니일지라도 아이한테 사랑을 나누어 놓습니다. 아주 손쉬워서 그러한지 모르나 사람들이 아주 손쉽게 잊는데, 모든 사람 몸뚱이는 바로 어머니 피와 살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어머니가 피를 바치고 살을 바쳐 아이가 열 달 동안 어머니 몸에서 무럭무럭 컸고, 어머니 살을 찢으며 이 누리에 나왔으며, 어머니 젖을 물고(또는 다른 엄마 젖을 물고) 목숨을 잇는 가운데 아이를 거쳐 어른으로 자랍니다. 나한테 장애가 많아 갓난아기 적부터 늘 누워 지내든 잔병치레가 잦아 골골거리든 나는 나한테 고맙고 고운 목숨을 선물해 준 어머니 사랑을 어느 한때라도 잊거나 잃을 수 없어요. “엄마 사랑을 모르고 자랄” 사람이란 이 땅에 하나도 없습니다.

 엄마 사랑을 모른다면, 못 느끼거나 모르는 사람이 잘못입니다. 대학교 등록금까지 바쳐 주어야 엄마 사랑이 되겠습니까. 자가용 사 주고 아파르를 마련해 주며 시집장가를 보내야 엄마 사랑이 될까요. 초·중·고등학교를 걱정없이 다니도록 하거나 학원을 알뜰히 챙겨 주어야 엄마 사랑이 되나요. 엄마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엄마는 아이한테 무슨 사랑을 주어야 하나요.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는 ‘할머니를 돌보는 부모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아이들이 커 나가는 흐름’을 보여주는 가운데 ‘할머니란 존재가 싫어하고 미워할 대상이 아니라, 자신이 이해하고 껴안아야 할 가엾고도 소중한 존재임을 깨닫’도록 이끈다(출판사에서 쓴 소개글)고 합니다. 이러한 줄거리로 여길 만하겠구나 싶은 한편,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가 참말 할머니를 우리 식구로 받아들이며 사랑하거나 아끼는가를 곱씹는다면 ‘글쎄, 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우리 식구입니다!” 하고 외친다 해서 우리 식구이지는 않습니다. “우리 식구”라 말하기 앞서 “우리 사랑스러운 할머니예요.” 하고 말해야 하며, “우리 고마운 어머니예요.” 하고 말해야 할 테고, “우리 예쁜 아버지예요.” 하고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도록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그림책 《우리 가족입니다》를 넘기면, 주인공 아버지는 할머니를 ‘돌보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 그림책에서 주인공 아버지는 할머니를 돌보지 않아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뒤치다꺼리’만 합니다. (하루쯤 가게 문을 닫고는) 할머니를 모시어 바닷가로 마실을 다닌다든지 할머니랑 함께 짜장면을 볶는다든지, 할머니하고 뒹굴면서 ‘할머니가 눈 똥오줌 이불’ 빨래를 함께 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일이 벌어지고 나서’ 뒤에서 치우기만 할 뿐이요, 뒤에서 치우면서도 웃음 한 번 없는데다가, 주인공인 어린이가 ‘할머니 싫어!’ 하고 외칠 때에 아버지가 비로소 힘겨운 몸짓으로 갈무리를 맡고 있습니다.

 바쁘디바쁜 중국집을 꾸리느라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었으리라 느낍니다. 이제 막 두 돌을 지낸 딸아이를 키우면서 몸아픈 옆지기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돌아보노라면 저 스스로 《우리 가족입니다》에 나오는 주인공 아버지처럼 ‘뒤치다꺼리’에 매여 휩쓸리지, 처음부터 기쁘게 웃음짓고 나서며 ‘손잡기와 어깨동무’를 하기가 만만하지 않아요. 아이 엄마는 저보고 ‘벼리야, 아빠가 또 낯 찌푸린다!’ 하고 말하는데, 스스로 먼저 기쁘게 나서지 못하고 뒤에서 치다꺼리만 하고 있으니 웃음에 앞서 이맛살입니다.

 이 책 《우리 가족입니다》 뒤쪽에는 띠종이가 붙으며 세 사람 추천글이 적혀 있습니다. 변산에서 농부로 일한다는 윤구병 님은 “삶의 진실을 아이들에게 제대로 알려 주려는 작가의 진지한 열정이 돋보인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한다면 이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린이 이혜란 님이 우리한테 보여주고자 하는 “삶의 진실”이란 무엇인가 궁금합니다. 고단하고 지친 나머지 뒤치다꺼리에 매여 할머니한테 참다운 사랑을 베풀지 못하는 가운데 그냥 “우리 식구입니다!” 하고 외치는 한 마디가 “삶의 진실”이려나요. 다른 두 분은 “탄탄하게 짜인 다층 구조의 시각 연출이 뛰어난 작품”(박혜준)이라고 말하고, “현실에 발 딛은 이야기, 그는 그림으로 진실을 말하는 법을 안다”(이성표)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 아이들한테 좋을 그림책이란, 또한 아이들한테 보여줄 그림책을 장만하여 함께 읽으며 기뻐할 우리 어른들한테 괜찮을 그림책이란 ‘삶의 진실 + 다층 구조 + 시각 연출 + 현실에 발 딛은 + 진실을 말하는’으로 짜 놓으면 될 노릇인가 궁금합니다. 어떤 삶이며 어떤 사람이고 어떤 넋인가를 다스리지 못한 가운데 섣불리 외치는 목소리로 어떻게 사람들 가슴에 참되고 착하며 고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모든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고, 모든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삶은 사랑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사랑을 느끼지 못하기 일쑤이고, 모든 사람은 사랑으로 태어났으나 사랑을 헤아리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우리 스스로 나를 참다이 사랑하지 못하고 있으니 더 너르거나 깊은 사랑으로 뻗지 못하는 셈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는 누구보다 나를 깊고 널리 사랑해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나를 사랑해야 나를 낳거나 기른 어버이 넋에 얼마나 깊고 너른 사랑이 스며 있는가를 깨닫습니다. 나 스스로 나부터 사랑해야 내가 섬길 하느님이나 부처님이나 알라님 같은 거룩한 넋이 베푸는 뜻을 읽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착하게 사랑해야 내 이웃과 동무 삶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곱게 사랑하고 있으면 내 살붙이와 어우러지는 한삶이 얼마나 기쁘며 멋진가를 깨달아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참다우며 착하고 고운 사랑을 담아야 비로소 그림책이고, 바야흐로 문학이며, 시나브로 예술입니다. (4343.8.18.물.ㅎㄲㅅㄱ)


― 우리 가족입니다 (이혜란,보림,2005.10.15./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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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럼쟁이 해마 과학 그림동화 29
크리스 버터워스 지음, 존 로렌스 그림, 이강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한결 아름다운 번역으로 만나고 싶어서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 크리스 버터워스·존 로렌스, 《부끄럼쟁이 해마》



 좋은 어린이책을 쓰거나 엮는 이들은 좋은 넋으로 좋은 삶을 일구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라안에서 살아가든 나라밖에서 살아가든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좋은 얼을 빛내며 좋은 사람을 사귀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좋다고 하는 삶이나 넋이란 모두 똑같을 수 없습니다. 비슷할 수도 없습니다. 이 그림책을 일군 사람은 이러한 테두리에서 좋고, 저 이야기책을 이룬 사람은 저러한 틀에서 좋습니다.

 그런데 번역책을 마주할 때에는 느낌이나 생각을 다르게 품습니다. 틀림없이 좋은 어린이책이요 좋은 그림책이며 좋은 이야기책인데, 이 좋은 책에 담긴 말글은 하나도 좋지 않을 때에는 다르게 생각할밖에 없습니다. 왜 이토록 좋은 책에 좋은 넋을 실은 좋은 말로 이야기를 이루어 내지 못하지?

 번역책이라 해서 말글이 더 나쁘거나 창작책이라 해서 말글이 더 낫지는 않습니다. 번역이든 창작이든, 책을 다루는 사람 매무새와 숨결에 따라 말글이 크게 바뀝니다. 글월이 몇 줄 깃들지 않은 그림책이라 하더라도 틀림없이 글월이 깃들기 마련인데, 글월이 얼마 없다 해서 글을 허투루 쓰거나 다룰 수 없습니다. 글월로 문학을 이루어 가는 이야기책이라고 해서 글을 한결 살뜰히 쓰거나 다루지는 않습니다.

 나라밖 그림책 《부끄럼쟁이 해마》를 보다가 그만 책에 이런저런 자국을 남깁니다. 그림책이나 만화책을 펼쳐 볼 때에는 책에 아무런 손자국을 남기지 않아 버릇하는데, 이 그림책 《부끄럼쟁이 해마》만큼은 어찌할 수 없어서 곳곳에 볼펜으로 죽죽 긋고 새로운 말을 집어넣습니다.

[7쪽] 따뜻한 바다 속 물결치는 해초 속을 보세요.
→ 따뜻한 바다 속 물결치는 바다풀 사이를 보세요.
[7쪽] 과연 누구일까요?
→ 아, 누구일까요? / 응, 누구일까요?
[8쪽] 해마의 머리는 말을 닮았어요.
→ 해마는 머리가 말을 닮았어요.
[8쪽] 수컷의 배에는 캥거루처럼
→ 수컷은 배에 캥거루처럼
[8쪽] 해마 역시 물고기랍니다.
→ 해마 또한 물고기랍니다.
[8쪽] 해마의 학명은 히포캄푸스입니다.
→ 해마는 학명이 히포캄푸스입니다.


 우리 나라는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뒤죽박죽입니다. 초등학교 교과서와 중·고등학교 교과서와 여느 어른 책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다릅니다. 출판사마다 어린이책 맞춤법을 달리 씁니다. 어른 책을 내는 출판사 또한 저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다르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아이들한테 책을 사서 읽히는 어버이는 출판사마다 살짝살짝 다른 맞춤법과 띄어쓰기로 된 책을 읽고 읽힙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서면서 초등학생 때하고는 다른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만납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생이 될 때에는 또다른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마주합니다. 더욱이, 오늘날은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부터 영어를 신나게 가르칩니다. 중고등학생 때에는 영어를 우리 말글보다 훨씬 잘하도록 윽박지르듯이 가르칩니다. 대학생 때에는 아예 영어로만 가르치는 곳이 있습니다.

 번역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 꽤 많은 우리 나라입니다. 번역을 가르치는 학교나 강좌가 제법 많은 이 나라입니다. 그런데, 번역을 가르치는 학교나 강좌에서 우리 말글을 옳고 바르게 가르치는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습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담는 우리 말넋과 우리 글얼을 깊이 헤아리며 살피는 분들을 찾아보기란 대단히 힘듭니다.

[10쪽] 하지만 아주 영리해서 배고픈 도미가 간식거리를 찾아 다가와도
→ 그렇지만 아주 똑똑해서 배고픈 도미가 먹을거리를 찾아 다가와도
[10쪽] 우선 해마는
→ 먼저 해마는
[10쪽] 지금은 해마가 보이죠?
→ 이제는 해마가 보이죠?
[10쪽] 그런 다음 몸 색깔을 감쪽같이 바꾼답니다.
→ 그런 다음 몸빛을 감쪽같이 바꾼답니다.
[10쪽] 해마가 주변 환경에 따라
→ 해마가 둘레 모습에 따라
[11쪽] 피부색을 바꾸어 숨는 것을 의태라고 부릅니다.
→ 살빛을 바꾸어 숨을 때에 의태라고 합니다.
[11쪽] 해마의 몸은 딱딱한 가죽으로 덮여 있어요.
→ 해마는 몸이 딱딱한 가죽으로 덮여 있어요.


 모든 사람이 우리 말글을 옳고 바르게 잘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에서는 우리 말글을 옳고 바르게 잘하도록 가르치지 못합니다. 아니, 이 나라 국어국문학과라든지 문예창작학과조차 우리 말글이 무엇인가를 밝고 알차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국어학자이든 국어교사이든 우리 말글을 어떤 모습으로 일구거나 보듬어야 아름다운가를 돌아보지 못합니다. 어버이이든 동네 어른이든 지식인이든 우리 스스로 알맞게 쓰면서 우리 아이한테 알뜰살뜰 물려줄 말글을 찬찬히 어루만지지 않습니다.

 ‘우리 말글 바로쓰기’라고 하지만, 정작 ‘바로쓰기’가 무엇이고 어떠한 말을 어느 만큼 바르게 써야 하는가를 깨닫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우리 말에 한자말이 어느 만큼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 말에 자리하고 있는 한자말이란 어떤 빛깔이요 어느 푼수이고 왜 이렇게 있는가를 제대로 곱씹는 사람 또한 아주 드뭅니다. 꼭 같은 일을 놓고 토박이말로도 이르고 한자말로도 이르는 모습을 얄궂게 느끼며, 우리가 걸어갈 말길을 참다이 느끼는 사람이란 대단히 드뭅니다.

 한자말이고 영어이고를 떠나, ‘하지만’이나 ‘해서’처럼 쓰는 말투가 옳지 않음을 헤아리며 바로잡으려는 이란 참 드뭅니다. ‘그러하지만(그렇지만)’이나 ‘이리해서(그리해서/저리해서)’라 적어야 올바르고 알맞음을 깨우치는 사람이란 퍽 드뭅니다. 무엇보다, 처음부터 ‘몸빛’이라 말하지 못하고 ‘몸 색깔’이라 말하는 아쉬운 대목을 읽지 못합니다. “의태라고 부릅니다”처럼 적바림하는 말투가 잘못임은 여러 곳에서 짚어 주고 있으나, 여러 곳에서 짚고 있음을 제대로 살피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토씨 ‘-의’를 넣으려면 어느 자리에 넣어야 하는지를 느낀다든지, 이런 토씨 ‘-의’는 한 마디조차 안 쓸 때에 한결 살가우며 매끄러운 우리 말글로 뿌리내림을 헤아리는 사람이란 더없이 드뭅니다.

[12쪽] 천천히 헤엄쳐 나와 짝을 찾기 시작해요.
→ 천천히 헤엄쳐 나와 짝을 찾아요.
[12쪽] 색이 같아질 때까지 몸 색깔을 바꿔요.
→ 빛깔이 같아질 때까지 몸빛을 바꿔요.
[12쪽]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는 경우가 많아요.
→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내곤 해요.
[13쪽] 짝짓기를 하기 전 일주일 정도 함께 어울려 다니며 친해집니다.
→ 짝짓기를 하기 앞서 이레쯤 함께 어울려 다니며 가까워집니다.
[13쪽] 수컷 해마가 갖고 있는 씨앗인 정자와 암컷 해마의 난자가
→ 수컷 해마한테 있는 씨앗인 정자와 암컷 해마한테 있는 난자가
[13쪽] 수컷의 아기주머니 속에서 만나
→ 수컷한테 있는 아기주머니 속에서 만나


 좋은 어린이책뿐 아니라 좋은 어른책을 읽을 때에도 좋은 선물을 받는다고 느낍니다. 좋은 줄거리로 내 삶을 좋은 길로 가다듬으며 좋은 말씀을 얻으니 내 하루하루가 그지없이 알찰 수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좋은 어린이책이든 어른책이든 좋은 말이나 좋은 글로 갈무리된 책은 몇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구석 빈틈 하나 없이 알차며 싱그럽기는 어려울 테지만, 지나치게 많은 대목이 뒤틀리거나 비틀려 있습니다. 글을 쓴 사람이든 글을 옮긴 사람이든 책을 엮은 사람이든 이와 같이 뒤틀리거나 비틀린 말글을 깨닫지 못합니다. 좋은 책 하나 다루며 느낌글을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에 싣는 분들 또한 좋은 책이 베푸는 좋은 말로 느낌글을 일구지 못합니다.

 어린 나날부터 좋은 말을 익히 듣지 못한 탓일는지 궁금하고, 나이든 뒤에도 좋은 말을 기쁘게 들을 수 없는 터전에서 살아가기 때문일는지 궁금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말을 하고 글을 쓰지만, 좋은 말과 좋은 글이 되도록 가다듬는 길을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일까 궁금합니다.

[14쪽] 수컷 해마의 주머니 속은 산소와 영양분이 충분해요.
→ 수컷 해마한테 있는 주머니에는 산소와 영양분이 넉넉해요.
[14쪽] 수컷이 임신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물고기랍니다.
→ 수컷이 새끼를 밸 수 있는 하나뿐인 물고기랍니다.
[15쪽] 주머니 안에서 알들을 안전하게 키웁니다.
→ 주머니에서 알들을 알뜰살뜰 키웁니다.
[15쪽] 꼬리는 원숭이를 닮았을 거예요.
→ 꼬리는 원숭이를 닮았겠지요.


 좋은 그림책이라고 느끼는 《부끄럼쟁이 해마》를 보면서 자꾸자꾸 옮김 말투 때문에 걸리적거립니다. 웬만해서는 옮김 말투이든 창작 말투이든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줄거리를 받아들이지만, 이 그림책 《부끄럼쟁이 해마》는 모든 글월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져 있기 때문에 도무지 그림책 줄거리로 빠져들지 못합니다.

 참말 이렇게까지 옮긴이는 우리 말글을 살피기 힘들었을까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이다지도 옮긴이는 아이들한테 좋은 책뿐 아니라 좋은 넋과 좋은 말을 골고루 베풀어 주려는 마음으로 거듭나기 어려웠는가 모르겠습니다.

 우리 아이가 읽을 책임을 생각하고, 우리 아이 동무가 함께 읽을 책임을 생각하며, 우리 아이가 커서 사랑을 하여 아이를 낳을 때에 먼 뒷날 또다른 아이들이 즐거이 읽을 책임을 생각한다면 그림책 하나에 담는 말글을 훨씬 다르게 보듬을 수 있을 텐데요.

[16쪽] 몇 주 후
→ 몇 주 뒤
[16쪽] 밤낮으로 열심히
→ 밤낮으로 바지런히 / 밤낮으로 힘껏
[16쪽] 수백 마리의 새끼를 낳는답니다.
→ 수백 마리 새끼를 낳는답니다. / 새끼를 수백 마리 낳는답니다.
[17쪽] 짝짓기를 한 후 2주에서 6주 정도 후에 새끼를 낳아요.
→ 짝짓기를 한 다음 두 주에서 여섯 주쯤 뒤에 새끼를 낳아요.


 참삶, 참사람, 참사랑, 참책, 참말, 참글, 참넋, 참얼로 고이 어우러지도록 우리 마음을 한 번 더 알뜰히 쏟아 줄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더 많은 좋은 어린이책을 내놓아도 나쁘지 않으나, 한 권 내놓는 그림책이든 이야기책이든 가없이 고우며 믿음직하고 사랑스러운 어린이책으로 자리매기도록 마음을 바칠 수 있으면 반갑겠습니다. 천 가지 만 가지 그림책으로 우리 아이들한테 골고루 기쁨을 베풀어 줄 수 있을 텐데, 천 가지가 아닌 열 가지라도 괜찮고 만 가지가 아닌 백 가지여도 즐겁습니다. 다문 한 권이 있을지라도 이 한 권으로 우리 아이들은 신나고 즐거우며 멋진 삶을 제 나름대로 가꿀 수 있어요.

[18쪽] 아빠 해마의 주위를 헤엄치고 있어요.
→ 아빠 해마 둘레를 헤엄치고 있어요.
[18쪽] 그 모습이 꼭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아요.
→ 이 모습이 꼭 연기가 피어오르는 듯해요.
[18쪽] 하지만 일단 아빠의 몸에서 떨어지면
→ 그러나 한번 아빠 몸에서 떨어지면
[23쪽] 폭풍우가 불거나 배가 지나가면서 파도를 일으켜도
→ 비바람이 몰아치거나 배가 지나가면서 큰 물결을 일으켜도
[24쪽] 여기가 해마의 집인가 봐요.
→ 여기가 해마네 집인가 봐요.
[24쪽] 언제나 자기의 보금자리를 찾아
→ 언제나 제 보금자리를 찾아


 옮김 말투 이야기로만 지새웠습니다만, 그림책 《부끄럼쟁이 해마》는 몹시 귀엽고 어여쁩니다. 여느 사람인 우리들로서는 이 땅에서 바다 깊이 들어가 해마하고 사귀거나 놀기는 힘든데, 이 그림책 하나를 펼치면서 우리로서는 쉽사리 마주하기 어려운 바닷마을 동무인 해마하고 살가이 지낼 수 있습니다.

 바닷마을 동무인 해마하고 살가이 사귀는 가운데, 우리들은 우리 둘레에서 해마와 매한가지로 외로운 듯 보이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으면서 제 삶을 곱다시 가꾸는 좋은 벗님을 하나둘 알아채거나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반짝이는 눈이 돋보인다는 해마마냥, 우리 둘레에는 반짝이는 눈빛으로 맑고 밝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동무가 있잖아요. 다들 반짝이는 눈빛보다는 잘생긴 얼굴이나 잘 빠진 몸매에 눈길이 홀려서 그렇지요. 또 반짝이는 눈빛이 아닌 번쩍이는 금이나 돈에 눈이 멀어서 그렇지요.

[25쪽] 보금자리 주위에서만 돌아다녀요.
→ 보금자리 언저리에서만 돌아다녀요.
[26쪽] 평생 바위에 붙어서
→ 언제까지나 바위에 붙어서
[26쪽] 6개월이 지나면
→ 여섯 달이 지나면
[27쪽] 산호초 속에 숨은 건 누구일까요?
→ 산호초 사이에는 누가 숨어 있을까요?
[29쪽] 멍한 듯 반짝이는 무척 눈이 인상적이에요.
→ 멍한 듯 반짝이는 눈이 무척 돋보여요.


 《부끄럼쟁이 해마》를 아주 어린 아이한테 읽히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어린 아이를 두고 있는 어버이라면 이 그림책을 일찌감치 장만한 다음 어버이 스스로 자주 꺼내들어 펼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버이 스스로 어버이 둘레 좋은 벗님을 헤아리고, 어버이 스스로 다른 동무한테 살가우며 고운 동무로 지낼 수 있는 고운 삶을 일구겠다는 다짐을 끌어낼 수 있으면 참 고마운 그림책이 아니랴 싶습니다.

 좋은 그림책은 아이한테는 아이 나름대로 새로 일구는 삶에 빛이 됩니다. 좋은 그림책은 이 그림책을 장만하여 아이한테 읽히는 어버이한테 앞으로 주어진 나날을 한결 아름다우며 튼튼하고 씩씩하게 일구는 기운을 선사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그림책 《부끄럼쟁이 해마》를 보면서 꽤나 서운하고 슬픕니다. 왜 이렇게 한결 구지레한 옮김 말투로 책을 어지럽혀야 했을까요. 옮긴이와 출판사 엮은이 모두 우리 삶과 책과 말과 넋을 다시금 돌아보며 새삼스레 다독일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좋은 넋을 좋은 말에 담아 좋은 책으로 일구는 좋은 삶을 사랑하는 좋은 책마을을 꿈꿉니다. (4343.8.12.나무.ㅎㄲㅅㄱ)


― 부끄럼쟁이 해마 (크리스 버터워스 글·존 로렌스 그림,비룡소,2007.5.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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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너 웅진 세계그림책 132
앤서니 브라운 글.그림, 서애경 옮김 / 웅진주니어 / 2010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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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외로우면 우리 집에 놀러 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 앤서니 브라운, 《나와 너》



 어떤 이들은 앤서니 브라운 님과 같은 그림쟁이를 두고 “그림책 독자라면 누구나 최고의 작가라고 손꼽는” 같은 꾸밈말을 달아 놓으면서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웁니다. ‘최고’란 “가장 높음”이나 “가장 훌륭함”을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그림쟁이보다 앤서니 브라운 님이 가장 돋보인다거나 높다거나 훌륭하다거나 거룩하다는 소리인 셈입니다.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느끼기에 따라 다를 텐데, 누군가는 닥터 수스 님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테고, 아무개는 윌리엄 스타이그를 첫 손가락으로 삼을 테며, 어떤 이는 버지니아 리 버튼 님 같은 그림쟁이는 없다고 침을 튀기리라 봅니다. 마리 홀 엣츠 님을 으뜸으로 치는 분도 있을 테고요.

 저마다 살아가는 자리가 다르기에 그림책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다릅니다. 모두들 하는 일과 즐기는 놀이가 다른 까닭에 그림책을 받아들이는 가슴이 다릅니다. 누구나 서 있는 곳과 삶터와 마음밭과 살림돈과 가방끈이 다르니까 그림책을 읽는 눈높이와 눈결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 어른들한테는 그림책을 일군 그림쟁이 이름을 하나하나 들며 누구 그림은 어떠하고 아무개 그림은 저떠하다 말할는지 모르나(이를테면 논문이나 비평하는 글을 쓰면서), 아이들은 그림책 하나하나를 꾸밈없이 살피고 받아들이면서 생각합니다. 굳이 앤서니 브라운 님 그림책이라서 더 좋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딱히 닥터 수스 님 그림책이기에 더 재미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반드시 윌리엄 스타이그 님 그림책인 까닭에 한결 아름답다고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꼭 마리 홀 엣츠 님 그림책이니까 훨씬 놀랍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림책 하나마다 다른 결을 살피고, 같은 그림쟁이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책마다 다른 손길과 마음길을 담았음을 읽습니다.

 서른 살 나이에 그리는 그림책에는 서른 살까지 살아오며 마주하고 부대끼며 보듬은 삶을 담습니다. 마흔 살 나이에 내놓는 그림책에는 마흔 살까지 사는 동안 만나고 복닥이며 어루만진 삶을 싣습니다. 쉰 살 나이에 선보이는 그림책에는 쉰 살까지 지내며 맞아들이고 받아들이며 어깨동무한 삶자락을 아로새깁니다. 이리하여 서른 살 나이에 그린 그림책에는 서른 살 그림쟁이 숨결을 읽으며 즐겁습니다. 마흔 살 나이에 내놓은 그림책에는 마흔 살 그림쟁이 숨소리를 들으며 반갑습니다. 쉰 살 나이에 선보인 그림책에는 쉰 살 그림쟁이 숨넋을 곱씹으며 고맙습니다.

 우리는 그림책 하나를 장만하여 읽는 자리에서 ‘우와, 아무개 그림책이 새로 나왔네!’ 하고 놀랄 수 있을 터이나, 이렇게 놀라기 앞서 ‘이야, 이 그림책 참 좋구나!’ 하고 놀라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렇게 놀라움이 절로 터져나오는 그림책이 아니고서는 구태여 사들일 까닭이 없고, 펼쳐 볼 일이란 없으며, 둘레에 나누거나 보여줄 구석이 없다고 느낍니다.

 앤서니 브라운 님 새 그림책 《나와 너》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영국에서 내려오는 옛이야기를 새로운 틀로 꾸며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으로서 이런 줄거리를 알 턱이 없습니다. 또 이런 줄거리를 반드시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영국 옛이야기이든 노르웨이 옛이야기이든 포르투갈 옛이야기이든 크게 돌아볼 만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피며 돌아볼 대목이란 ‘그림책 《나와 너》가 내 가슴을 얼마나 두근두근 쿵쾅쿵쾅 울리는가’라든지 ‘그림책 《나와 너》가 내 마음자리에 어떻게 스며들면서 웃음이나 울음을 길어올리는가’입니다.

 제 어린 날을 생각해 봅니다. 국민학생 때였는데 우산을 깜빡 잊은 채 학교에 갔고 공부를 마칠 즈음 비가 퍼붓습니다. 꽤 걱정이 됩니다. 수업하는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꾸자꾸 창밖을 내다 봅니다. 비가 언제 그치려나, 이 비가 그치지 않으면 누가 집에서 마중을 나오려나. 집에서 날 마중나올 사람이란 없을 텐데, 이 빗길을 어떻게 헤치고 가나. 빗길을 헤치려면 가방이 안 젖도록 어떻게 해야 하나. 비닐봉지라도 하나 있으면 좋으련만, 나한테는 봉지조차 하나 없는데.

 어린 날, 어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로 찾아와 주신 적이 있는지 없는지 거의 떠오르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다른 일로 바쁘셔서 나와 주실 수 없었겠지요. 동무들 가운데 몇몇 아이는 어머니나 할머니가 우산을 들고 학교 앞으로 나와 줍니다. 저를 비롯한 몇몇 아이는 아무도 마중을 나오지 않아 비를 쫄딱 얻어맞으며 집으로 쭐래쭐래 걸어갑니다. 그런데 이렇게 비를 흠뻑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끔가끔 어떤 어른이 “이런! 비를 맞고 가는구나!” 하면서 당신이 쓰던 우산을 저 같은 아이한테 씌워 주며 “어디까지 가니? 네가 가는 길까지는 우산을 같이 쓰자.”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예나 이제나 외롭게 떨어진 채 비를 흠뻑 맞으며 걷는 아이는 있습니다. 요즈음이야 우산 하나 아주 흔하고 값싸다고 하지만, 이토록 값싸고 흔한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하는 아이는 언제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에도 이 우산 하나 챙기지 못한 채 외로이 빗길을 걷는 아이한테 따숩게 말을 건네는 어른이란 얼마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오늘날 서울이나 부산이나 대구나 인천이나 광주나 …… 이런 큰도시뿐 아니라 시골마을에서 이와 같이 따숩게 말을 건네며 손수건이든 수건이든 건네며 비를 닦으라 한다든지, 아예 우산을 안기면서 “어른인 나는 우산을 하나 새로 사도 되거든.” 하고 말할 만한 사람은 몇이나 될까 궁금합니다.

 그림책 《나와 너》에 나오는 노랑머리 아이는 홀로 말없이 후미진 길을 걷다가 문이 빼꼼 열린 집으로 살며시 들어갑니다. 문이 빼꼼 열린 집에 차려진 밥상을 보며 왠지 모를 너그러움과 포근함을 맛보고는, 이내 ‘낯선 집에 사는 아이 몫’으로 주어진 밥그릇을 싹싹 비웁니다. 노랑머리 아이는 노랑머리 아이가 사는 집에서는 느끼지 못하지 않았느냐 싶은 즐거움을 실컷 느끼면서 ‘낯선 집에 사는 아이 잠자리’에까지 기어들어 달콤하게 잠이 듭니다. 그러나, 낯선 집 임자는 곧 집으로 돌아오고, 낯선 집 아버지와 어머니는 몹시 성이 났습니다. 노랑머리 아이는 깜짝 놀라 후다닥 내뺍니다. 노랑머리 아이한테 밥과 걸상과 잠자리마저 빼앗긴 낯선 집 아이는 제 엄마 아빠랑 달리 노랑머리 아이한테 성을 내지 않았습니다. 그저 크게 놀랐을 뿐입니다. 꽁지가 빠지게 내빼는 노랑머리 아이를 창문으로 내다 보던 낯선 집 아이는 홀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그 아이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노랑머리가 바라보기에, 낯선 집에 살던 아이는 어머니랑 아버지랑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공원으로 마실도 다녀오는 걱정없고 즐거운 아이입니다. 언뜻 보기에 참 따사롭고 넉넉한 집에서 근심이든 슬픔이든 하나 없이 살아간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이 낯선 집 아이네 어머니나 아버지는 당신 아이한테 ‘당신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즐기는지’ 한 마디도 묻지 않습니다. 함께 있기는 있으나 다른 누리를 생각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공원으로 세 식구가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아이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빠는 아빠 회사 이야기를 하고, 엄마는 엄마 회사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그냥 딴청을 피웠지요.” 하는 모습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쓰고 누리고 즐기는 모든 물질문명과 학원과 학교와 장난감 따위를 골고루 잘 갖춘 아이는 외롭지 않으며 언제나 기쁨이 넘친다 할 수 있을까요. 어버이 두 분이 다 있고, 집에 자가용이 있으며 널찍한 아파트가 있는데다가, 학교에서 꽤 높은 성적을 받고 있으면, 이 아이는 즐거운 나날이라 할 만한가요.

 아이들을 생각하기 앞서, 우리 어른들부터 되새길 노릇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모든 물질문명을 다 누리는데다가 돈이 철철 흘러넘치면 즐거운 삶인가요. 남들이 알아주는 이름값을 얻고 있다면, 어마어마한 공직자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자리에 올라 있으면, 어른들 당신은 기쁘며 아름다운 나날이나요. 아우디를 몰거나 뚜껑 없는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있으면 짜릿하며 신나는 삶인지요.

 그림책 《나와 너》가 우리한테 얼마나 살가우며 따사로운 그림책인가를 헤아리자면, ‘앤서니 브라운’이 일군 그림책이라는 껍데기를 훌훌 털어내어 이 그림책만 그림책 그대로 들여다보며 아이랑 오붓하게 읽고 눈물 한 방울과 웃음 한 조각 나누면 됩니다. (4343.8.7.흙.ㅎㄲㅅㄱ)


- 나와 너 (앤서니 브라운,웅진주니어,2010/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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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초등학교 아이들 그림 338점 지음, 이오덕 엮음 / 보리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어설프고 잘못된 편집 때문에 안타까이 절판된 책을 기리며 별을 다섯을 붙이지 못하고  

고작 셋밖에 못 붙인다.) 

 


 어린이는 왜 그림을 그리는가
 [그림책이 좋다 81] 이오덕,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 책이름 :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 그림 : 이오덕 선생님한테서 배운 시골 아이들
- 엮은이 : 이오덕
- 펴낸곳 : 보리 (2008.8.25.)
- 책값 : 5만 원 (판 끊어짐)



 (1)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읽으며


 아이슬랜드에서 나고 자란 비요크 님이 노래하고 춤추는 고운 삶을 보여주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세 식구가 함께 앉아 보았습니다. 아이 엄마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되풀이하여 보았고, 아이는 엄마 곁에서 이 영화를 잘 지켜보곤 합니다. 영화를 보고 있자니 예전에 본 적이 있지 않느냐 싶은 한편, 아이 엄마가 집에서 이 영화를 되풀이해서 다시 보고 또 보고 할 때에 군데군데 보기도 했구나 싶습니다.

 당신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눈병 때문에 당신이나 당신 아이나 눈이 몹시 나쁜 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 〈어둠 속의 댄서〉입니다. 영화에 붙은 이름 그대로, 셀마(비요크)는 차츰 눈이 나빠지며 어둠에 갇히고 맙니다. 또한, 셀마가 꾸리는 삶을 꾸밈없이 받아들여 주지 못하는 안쓰러운 이웃 때문에 셀마는 어둠 쪽으로 자꾸 밀려나다가는 그예 구렁텅이에 떨어지고 맙니다. 스스로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웃집 동무는 가녀린 셀마를 깊이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며 슬픈 넋입니다. 모두가 돈 때문이라 할는지 모르나, 돈에 앞서 참다운 사랑과 믿음을 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이와 달리, 셀마는 둘레에서 바라보기에 더없이 불쌍하고 딱하며 애틋합니다. 그러나 셀마는 당신 스스로를 불쌍하거나 딱하거나 애틋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셀마한테는 셀마한테 닥친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눈병’조차 달콤한 아름다움입니다. 이 눈병 때문에 아무런 일을 할 수 없을 뿐더러 뮤지컬을 즐길 수조차 없으나, 셀마는 어둠이 더 깊디깊이 닥칠수록 더 불타는 마음이 되어 스스로 숱한 뮤지컬을 만들어 냅니다. 비록 꿈에서 만들 뿐이지만요. 눈이 좀 밝다 싶은 때에는 한결 밝은 뮤지컬을 만들지만, 눈이 자꾸 어두워지고 있을 무렵에도 무척 신나는 뮤지컬을 만듭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만드는 뮤지컬은 당신 꿈속에만 가두지 않고 사람들 모두한테 보여줍니다. 이태껏 셀마 스스로 만든 뮤지컬은 셀마 혼자만 즐겼다면, 마지막 뮤지컬은 이 뮤지컬을 보고 가슴이 벅차오를 수 있을 사람한테는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하고, 이 뮤지컬을 보고도 어벙벙해 하는 사람한테는 가슴이 하나도 벅차오르지 않는, 사랑하는 가슴이라면 사랑을 느끼고 사랑이 없는 가슴이라면 그예 메마른 채로 있고 마는 뮤지컬을 선보입니다.

 ‘뮤지컬’이라는 예술이자 문화는 모든 사람이 처음부터 제대로 알아보거나 받아들이며 즐길 수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뮤지컬’임을 모르는 가운데 누구나 이 문화이자 예술을 마음껏 즐길 수 있습니다. 딱히 뮤지컬이기 때문에 너무 어렵다든지, 그저 뮤지컬이라서 한결 아름답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뮤지컬은 뮤지컬일 뿐입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보는 동안, 이 영화를 찍은 분이나 셀마라는 삶을 보여주는 분이나 더없이 눈이 맑고 밝다고 느꼈습니다. 빛그림 이야기에 담는 틀부터 몹시 부드러우며 따사롭습니다. 못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예쁜 사람이든 미운 사람이든 똑같이 아름다운 자연과 사람들과 뭇목숨한테 둘러싸여 고운 삶 하나를 꾸리고 있음을 차분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어둠 속의 댄서”로 옮겨 적었으나, “어둠을 춤추는 사람”이라거나 “어둠을 노래하는 춤꾼”이라거나 “어둠과 벗삼는 춤꾼”이라거나, 제 나름대로 다시 읽으면서 영화를 헤아려 봅니다. 셀마라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나날 그대로 당신 꿈속에서 뮤지컬을 만들거든요. 웃고 싶을 때에는 웃고, 울고 싶을 때에는 울며, 괴로울 때에는 괴로워하고, 기쁠 때에는 기뻐하며 뮤지컬을 만듭니다. 목매달려 더는 노래를 할 수 없을 무렵 셀마가 펼친 노래는 이제껏 살아오며 가장 기뻐하면서 해맑게 부른 노래였습니다. 셀마와 살가이 지내던 동무는 셀마가 ‘사형장 이슬’로 사라지지 않는 일이 당신 아이한테 ‘엄마로 살아가는 뜻’이라고 생각했지만, 셀마는 ‘내 아이한테 눈을 주는’ 일이야말로 당신 스스로 당신 아이한테 ‘엄마가 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셀마처럼 내 아이 땀따귀를 갈기며 왜 학교에 안 가고 못된 녀석들하고 어울리느냐고 다그치는 어머니가 되면서, 내 목숨을 바쳐 내 아이한테 눈을 주고, 내 목숨이 사그라지는 앞에서 두려움에 떨다가, 내 아이가 비로소 새 삶을 얻었음을 느낀 다음에는 더없이 느긋하며 즐거울 수 있는 삶길이겠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러니까, 뮤지컬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뮤지컬을 즐기면 됩니다. 영화를 즐기고 싶은 사람은 영화를 즐기면 됩니다. 책을 즐기고 싶다면 책을 즐기고, 그림이나 만화를 즐기고 싶다면 그림이나 만화를 즐기며, 사진을 즐기고 싶을 때에는 사진을 즐기면 됩니다.

 문학과 영화로 함께 나온 〈로빙화〉에 나오는 고아명과 고차매 남매는 시골마을에서 둘 나름대로 그림을 즐겼습니다. 다른 사람 눈길에 따라 바라보는 그림이 아닌, 두 사람 눈썰미에 따라 서로서로 그림을 좋아하며 즐겼습니다. 〈어둠 속의 댄서〉에 나오는 셀마는 무척 외로웠지만 하나도 외롭지 않은 가운데 당신 둘레 사람들을 동무나 이웃으로 여기면서 당신 일과 삶과 춤노래를 꾸밈없이 즐겼습니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는지 어쩔 수 없다고 해야 할는지 알쏭달쏭하지만, 아직 우리 누리에서는 어린이 그림을 제대로 읽거나 깨닫거나 받아들이는 사람이 더없이 모자라거나 드문데, 바로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어린이 그림을 담은 그림책’에 실린 그림을 그렸던 1960∼70년대 산골마을 어린이들하고 이 아이들한테 그림을 가르쳤던 이오덕 선생님은, 누가 뭐라 하건 그림 재주와 이론이 어떠하건, 당신들은 당신들 배움터인 산골마을 작은 학교에서 당신들 나름대로 아름다우며 신나고 멋진 그림누리를 즐겼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은 이론으로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산골마을 작은 학교 이오덕 선생님은 이론으로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아이와 교사는 종이 하나와 크레파스 하나로 그림을 즐겼습니다. 종이를 펼치고 크레파스를 쥔 손은 억지로 무엇인가를 짜내려고 하는 몸뚱이나 넋이 아닙니다. 산골마을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삶을 고스란히 담을 뿐입니다. 아니, 고스란히 삶을 담는다는 말은 알맞지 않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 삶을 고스란히 즐기는 가운데 그림 하나 그렸다고 해야 옳습니다. 산골마을 아이들로 꾸리는 삶이 좋든 싫든 궂든 재미있든, 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즐기는 가운데 그림 하나로‘도’ 저희 삶을 나누었습니다.

 자랑이 아닌 이야기입니다. 뽐냄이 아닌 말걸기입니다. 효행일기나 반공일기 따위는 조금도 아니지만, 생활일기 또한 아닙니다. 셀마가 꿈속에서 웃음지으며 춤노래를 즐기다가는, 꿈 밖으로 나와서 바야흐로 웃으며 노래를 불렀듯, 아이들은 노상 꿈 바깥자리에서 까만 얼굴 까만 손 까만 몸뚱이인 산골아이로 지내는 저희 하루하루를 홀가분하면서 스스럼없이 종이 한 장에 크레파스로 담을 수 있었습니다.
 



 (2) 아이들 그림을 함께 즐겨야 할 텐데


 지난 2008년 8월에 나왔던 어린이 그림책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은 무척 슬프게도 진작에 판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들여다보면, 이오덕 선생님 아드님인 이정우 님이 출판사에 ‘더는 책을 내지 마십시오’ 하고 잘라 말하면서 스스로 판을 끊은 까닭을 알 만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 그림을 읽을 때에는 아이들 눈높이뿐 아니라 아이들 삶결 그대로 바라보며 즐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저 읽기만 해서는 안 되며, 즐길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 멋대로 그림을 요모조모 자른다든지(트리밍), 어느 한 군데만 오려낸다든지 하면서 엉뚱한 겉멋 부리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이 그림 한 장을 그리며 구석구석 빈틈없이 크레파스를 다 발라 놓는 흐름을 우리 어른들은 잘 읽어야 합니다. 배경이 군더더기라고 잘못 읽는다든지, 끝자리가 좀 구지레 보인다고 하면서 가운데 쪽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며 긴네모 그림을 바른네모 그림으로 만들어 버린다든지 하면 안 됩니다. 처음부터 아이들 눈결과 삶이 되어 어린이 그림을 볼 노릇입니다. 처음부터 ‘오로지 어른 눈썰미로 좀더 예쁘장한 책을 만들겠다’는 섣부른 생각이 되면 안 될 노릇입니다.


.. 그림은 이렇게 그려라, 저런 색을 칠해라 하고 가르쳐서는 안 됩니다. 마음대로 그릴 수 있게 놓아두어야 합니다. 다만 남의 그림을 흉내내지 않도록 할 것이고, 종이·연필·붓·물간……과 같은 용구도 무엇이든지 자유롭게 가려서 그릴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는 태도는 천천히, 온 정신을 기울여서 그리도록 하고, 자기 그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를 가지게 해야 합니다 … 사람은 누구나 다 자기 그림을 자유롭게 그리면서 즐길 수 있는데, 우리가 그렇게 못하는 것은 모두 어렸을 때 비참한 흉내내기 그림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  (이오덕-아이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들한테 그림을 그리도록 했을 때에는 ‘그림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림을 그리도록’ 했습니다.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을 즐기도록’ 했습니다. 또한, 아이들이 저희 삶을 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글짓기 아닌 글쓰기로 아이들마다 제 삶을 ‘글로 쓰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널리 쓰고 있는 낱말 ‘글쓰기’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들었습니다. 글이란 억지로 만드는 ‘글짓기’가 아닌, 꾸밈없이 살아가는 내 모습 그대로 즐기는 일이기에 ‘글쓰기’라는 낱말을 스스럼없이 느끼며 쓰셨습니다. 글이란 글쓰기라면, 그림이란 바로 ‘그림그리기’이겠지요. 사진이란 ‘사진찍기’이며, 춤이란 ‘춤추기’이고, 노래란 ‘노래부르기’입니다. 일이란 ‘일하기’이며, 놀이란 ‘놀이하기’입니다.

 이런 모든 우리 삶은 그예 삶입니다. 뒤에 ‘-교육’이라든지 ‘-강좌’라든지 ‘-학습’이라든지 ‘-체험’이라든지 ‘-학원’이라든지 ‘-학교’라든지 무엇이든 붙일 수 없어요. 그러나, 우리 둘레를 보면 이런 안쓰러운 이름들이 더없이 많습니다. 놀이마저 놀이교육 놀이강좌 놀이학습 놀이체험 놀이학원 …… 아주 많습니다. 영어는 어떻지요? 영어는 아예 영어마을 잉글리쉬존 따위마저 판을 칩니다. 영어를 즐기려면 마음껏 즐기도록 해야 하는데, 영어를 억지로 가르치고 배우고 맙니다. 영어뿐 아니라 모든 학문 또한 즐기는 삶이어야 할 뿐인데, 이 나라 이 땅 이곳 학교에서는 늘 ‘교육’이라는 이름이 달라붙습니다. 모두 제도권이 되고야 맙니다.

 이리하여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어린이 그림책은 아직까지 우리 나라에 한 차례조차 나오지 못한 아주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림누리를 펼쳐 보이면서 나눌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망가뜨렸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그림을 즐긴 나날이 소록소록 배어든 알뜰한 그림책이 이 나라에 처음으로 나왔는데, 출판사 일꾼들이 아이들 그림을 잘못 매만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영화 〈로빙화〉에 나오는 ‘그림을 이론으로만 아는 교사’들이 ‘사물을 똑같이 베껴 그려야 잘 그린 그림’이라고 말하듯, 아이들 그림을 아이들 그림 그대로 읽고 즐기며 받아들이지 못한 편집자들이 여기 자르고 저기 자르면서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습니다.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모르니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히고, 아이들 마음을 읽을 줄 모르기에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를 입혔어도 언제 생채기를 입혔는지 모를 뿐 아니라 무엇이 생채기가 되는지조차 모릅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소 귀나 다리가 잘리도록’ 소 그림을 그리지 않습니다. 통으로 소 몸뚱이를 그림에 다 그려 넣습니다. 그림 한 장에 소만 우격다짐으로 꽉 들어차게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 깜냥껏 넉넉한 품을 남기고 소를 채워 넣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보리밟기를 하는 모습을 위 아래 옆이 빡빡하도록 그리지 않습니다. 하늘을 그리고 넓은 보리밭이 잘 드러나도록 그립니다.

 아이들은 그림을 그릴 때에 해가 잘리도록 그리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그림에 나오는 해가 잘 나와서 온누리를 골고루 비추게끔 그립니다.

 아이들은 보리베기를 할 때에 보리 알곡이 잘리게 그리지 않습니다. 보리 알곡을 줄기와 잎사귀와 알곡 모두 잘 나오도록 그립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그릴 때에 다리를 자른다든지 머리를 자른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람을 통으로 잘 나오도록 알뜰살뜰 그립니다.

 아이들은 집을 그리며 집 어느 한쪽을 자르지 않습니다. 집을 통째로 다 그립니다.

 그런데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어린이 그림책에서는 모두모두 자르고 말았습니다. 아이들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합니다. 통으로 내보이면서 이 통 그림 하나에 아이들 넋과 삶과 꿈과 손길이 어떻게 묻어 있는가를 나누지 못하고 맙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편집하는 멋’에 따라, 어느 대목은 자르고 어느 자리는 붙일 수 있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편집하는 멋이란 있습니다. 그런데, 편집하는 멋이란 멋을 부릴 자리에 부려야지 섣불리 아무 데나 부릴 수 없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하는 책이라면 이러한 책에 걸맞게 편집을 해야 합니다. 산골마을에서 일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끼며 그린 그림이라 할 때에는 바로 이 ‘일하며 살아가는’ 모습과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을 느끼도록 하는 데에 편집하는 멋을 살릴 노릇입니다. 이와 동떨어진 데에서 어설피 멋을 부릴 노릇이 아닙니다.

 영화 〈어둠 속의 댄서〉를 빌어 말씀드린다면, 셀마는 당신 아들한테 새 눈을 선물해 주려고 체코에서 미국까지 건너와서 공장 일꾼이 되어 돈을 벌지, 당신 아들한테 자전거‘나’ 사 주려고 미국가지 건너오지 않았습니다. 셀마 또한 아이 어머니로서 얼마나 자전거‘를’ 사 주고 싶었을까요. 그렇지만 셀마는 자전거 ‘따위’는 아이한테 사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전거 ‘따위’는 나중에 아이가 새 눈을 얻은 다음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살 수 있으니까요. 자전거는 언제라도 돈을 다시 벌어 사면 되지만, 하루하루 나빠지는 눈을 고치려면 셀마 스스로도 눈이 더 나빠지기 앞서 더 많이 일을 해서 더 빨리 ‘아이 눈을 고칠 수술을 할 돈’을 버는 데에 힘을 쏟아야 합니다. 아이 또한 셀마와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눈이 몹시 나빠지고 있으니, 자전거를 장만하는 데라든지 아이한테 새 옷을 사 입힌다든지 아이한테 더 맛난 밥을 해 준다든지에 돈을 쓸 겨를이 없습니다. 아니, 이런 데에는 굳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135쪽 그림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김경수’라는 아이가 그림 한쪽에 적은 이름 석 자마저 ‘책을 편집하는 분들께서’ 싹둑 잘라 놓았습니다. 이런 책 편집을 이 아이가 들여다본다면 이 아이 마음은 어떠할까 궁금합니다. 내가 그린 그림을 통으로 내보이지 않고 어느 곳은 잘라서 없애 버리고 말면,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무슨 느낌을 받을까 궁금합니다.

 글 한 꼭지를 썼는데,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싹둑싹둑 자르면 어찌 되지요? 사진 한 장을 찍었는데, 내가 담은 모습을 동강동강 자르면 어찌 되나요? 영화를 하나 찍었는데 ‘건전하지 않다’며 몇 분치를 마구마구 자르면 어떡합니까? 노래 하나를 지었는데 ‘노랫말을 바꾸라’느니 무어니 하며 몇 초를 요리조리 자르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손가락 몇 가락을 잘라도 괜찮을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머리통 반쪽이 잘려도 살아숨쉴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합니다. 염통을 조금 잘라도 살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발톱 몇 군데쯤 없어도 잘 걸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 331쪽부터 335쪽까지 실린 그림 일곱 점은 ‘아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보고 그린 얼굴 그림’입니다. 그런데 출판사에서는 이 그림들에 ‘아버지 얼굴’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림을 제대로 읽지 못한 탓이요, 아이들이 무엇을 그림으로 담았는가를 아이 눈높이에서 헤아리지 못한 탓입니다. 더구나, 이정우 님이 출판사에 그림 원본을 보내 줄 때에 이 그림들은 ‘아이들이 이오덕 선생님을 보고 그린 그림’이라고 쪽지에 적어 붙여서 보냈는데 이런 편집이 나오고 말았습니다.


.. 아이들의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책에 나온 그림을 보고 그대로 그리게 해도 괜찮은가요? 언제나 똑같은 그림만 그리는데 어떻게 지도하면 될까요? ..  (이오덕-아이들 그림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을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 생각을 기울이며 우리 삶을 우리 나름대로 곱고 착하며 참되게 일구어야 합니다. 다른 이 생각을 귀담아들을 줄 알아야 하는 한편, 다른 이 생각이 내 생각으로 녹아들도록 잘 새기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어떠한 좋은 생각이든 좋은 생각에만 머물지 않고 내 생각이 되도록 애쓸 노릇이요, 이리하여 내 삶을 내 손으로 내 터전에 걸맞게 내 땀을 흘리며 가꿀 노릇입니다.

 우리가 아이 하나를 낳아서 키운다고 할 때에 어떻게 키우겠습니까. ‘아동발달 전문가’한테서 말씀을 하나하나 듣고서 키우겠습니까. ‘보육지침서’에 따라 키우겠습니까. 어린이집과 보육원과 학교에만 맡기며 키우겠습니까.

 우리가 책 하나를 장만하여 읽는다고 할 때에 어떻게 읽겠습니까. 전문가 비평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신문잡지 서평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출판사 보도자료대로만 받아들이며 읽겠습니까.

 아이들 그림은 아이들 삶결을 살피고 삶무늬를 들여다보며 삶자락을 껴안으면서 읽어야 합니다. 아이들이 그림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가를 톺아보고, 아이들이 저희 삶을 얼마나 아이들 스스로 즐겁도록 일구는 가운데 이어가고 있는가를 헤아리며, 아이들이 어떤 눈빛이고 말빛이고 얼빛인가를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만 쓴다고 해서 글쓰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꾸밈없이 그린다고 해서 그림그리기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살가이 찍는다고 사진찍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느낌대로 부른다고 해서 노래부르기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춘다고 해서 춤추기가 이루어지지 않아요.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삶으로 이룹니다. 두렵고 걱정스러우며 따스하며 넉넉하다가는 차갑고 슬픈 삶으로 이룹니다. 〈어둠 속의 댄서〉에서 셀마는 웃으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울면서도 노래를 부릅니다. 〈로빙화〉에서 고아명은 웃으면서도 그림을 그리고 울면서도 그림을 그립니다. 아이들은 웃으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울면서도 그림을 그렸습니다.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책에는 아이들이 웃으면서 그린 그림과 울면서 그린 그림이 고루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엮은 분들은 아이들 웃음과 울음을 느끼기 앞서 ‘이오덕 선생님이 일군 빼어난 열매’라는 대목에만 지나치게 매여 있고 맙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일군 빼어난 열매라 한다면, 1960∼70년대뿐 아니라 2010∼20년대 아이들 또한 즐거우며 기쁘며 보람차게 물려받거나 받아먹으면서 알뜰살뜰 오순도순 알콩달콩 누릴 수 있는 고운 그림나라 넋을 스며 놓은 책으로 엮어야 했겠지요.

 유물로 만드는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닙니다. 지난날 이오덕 선생님이라고 하는 놀라운 어르신 한 사람이 이룩한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그림인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오늘날 아이들 누구나 아이들 스스로 제 삶을 사랑하고 아끼며 부둥켜안으면 언제 어디서라도 그릴 수 있는 《일하는 아이들이 그린 봄 여름 가을 겨울》입니다. 좋은 그림을 읽고 즐기며 좋아할 수 있으려면, 나부터 좋은 넋으로 좋은 말을 하며 좋은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좋은 아이들 좋은 그림을 읽기 앞서 좋은 일놀이를 즐기는 좋은 어른으로서 좋은 나라를 가꾸고 있는 좋은 삶을 사랑하고 있어야 합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저희 삶을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춥니다. (4343.7.24.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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