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강승숙 선생님의 그림책 수업 일기 살아있는 교육 21
강승숙 지음, 노익상 그림 / 보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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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한테 좋은 책 하나 읽히기 앞서
 [그림책이 좋다 80] 강승숙,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책이름 :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
- 글 : 강승숙
- 사진 : 노익상
- 펴낸곳 : 보리 (2010.4.12.)
- 책값 : 15000원



 (1) 제도권 학교 교사들


 요즈음 초등학교는 한 반에 스물∼스물다섯 즈음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리 놀라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 나라도 이런 숫자가 될 만큼 발돋움했으니까요. 그러나 담임교사 한 사람이 맡는 아이들 숫자는 줄었을지라도 교사 한 사람이 맡을 행정 일감은 그리 줄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맡아야 할 아이들 숫자가 줄었으면 그만큼 아이 하나하나한테 더 마음을 기울여 참되고 착하고 고운 배움을 나눌 수 있어야 할 텐데, 예나 이제나 대학바라기 배움터 모습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끔찍한 대학바라기로 바뀌는 한편, 집과 마을이 학교와 함께 맡아야 할 몫을 놓거나 잃거나 잊고 있다고 느낍니다.

 제가 국민학교에 들어간 1982년부터 고등학교를 마친 1993년까지, 학교에서 교과서 아닌 책을 읽어 준 분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세계사를 가르친 분 한 사람이 있었을 뿐, 열두 해에 걸쳐 시집이나 소설책이나 그림책이나 동화책 한 번 읽어 준 분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한 반에 예순 안팎이던 학교였고, 교과서 진도 나가기 바쁜 가운데, 날마다 쏟아내는 숙제를 살피어 몽둥이찜질로 열고 닫는 학교였던 만큼, 교과서 아닌 책을 들고 다니는 교사를 찾아보는 일부터 잘못일는지 모릅니다. 제도권 학교 열두 해를 다니면서 ‘교과서 아닌 책’은 ‘불온도서나 불온소지품’으로 여기던 학교였고, 국민학교 때이든 중고등학교 때이든 교과서와 참고서와 공책과 준비물 따위로 가방이 몹시 무거웠기에 ‘교과서 아닌 책’을 따로 챙겨 들고 다니는 동무란 거의 아무도 없었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적에 한둘 고작 있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 님과 서머셋 모옴 님 소설을 영어책으로 읽던 중학교 3학년 때에는 학교에서 미친놈 소리를 들었고, 신경림 님이나 신동엽 님이나 김현승 님이나 릴케 님 시집은 고등학교 때에 ‘불온도서 압수품’이 되곤 했습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교사들은 교사들대로 우리들을 닦달하고 숙제벼락 퍼부어 몽둥이찜질을 하며 ‘학교 밖 탈선을 막는다’는 큰일을 하시느라 몹시 바쁘고 힘에 겨워 가벼운 소설책 하나조차 손에 쥘 기운이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중고등학교 여섯 해에 걸쳐 우리들을 밤 열한 시까지 학교에 꽁꽁 가두어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을 시키자니, 교사들이 교무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낮잠이나 텔레비전 보기나 고스톱이지, 조용히 책읽기를 하며 당신들 마음닦이를 하실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따로 불러 돈봉투를 내라 하지 않은 국민학교 적 교사들입니다만, 교실에서 수업을 하다가, 또는 아침저녁 모임을 하면서, 때로는 골마루에서 큰소리로 외치듯 대놓고 돈봉투를 내라 하던 국민학교 적 교사들입니다. 스승날을 앞두고 반장과 부반장은 돈봉투에 넣을 돈을 얼마씩 모아야 한다며 닦달하듯 돈을 거두는 한편, 선물을 따로 챙겨서 교탁에 올려놓아야 했습니다. 선물을 챙기기 어려운 몹시 가난한 동무가 있을 때에는 마음 좋은 동무가 한 가지씩 나누어 주기도 했지만, 따돌림을 받는 동무라든지 자존심이 있는 동무는 선물을 내지 않고 ‘스승날을 기리며 스승한테 선물을 내지 않은 값’으로 종아리나 엉덩이를 두들겨맞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떠올리는 국민학교 여섯 해 나날 가운데 수업시간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어쩌다 몇 대목이 떠오르지만, 국민학교 적 이야기를 떠올리면 언제나 운동장이나 골마루나 교실 뒤쪽에서 뛰놀던 일이 떠오릅니다. 교실 안쪽 이야기 가운데에는 얻어맞거나 폐품 모으기하고 성금 내기하고 환경미화 하기에다가 날마다 한두 시간에 걸쳐 끔찍하게 해야 했던 청소가 떠오릅니다. 가뜩이나 날마다 ‘짧아야 한 시간’을 골마루며 창문이며 뒷간이며 책걸상이며 학교 구석구석을 쓸고 닦고 빛을 내느라 ‘밖에서 동무하고 놀 겨를’이 모자라 입이 뿌루퉁하게 나오며 쑹얼쑹얼거렸는데, 교육감이라는 사람이 찾아온다고 하면 한 주나 보름 동안 ‘한 시간 + 한 시간’ 청소를 했고, 교육감이 들이닥치는 때에는 아예 수업을 안 하고 청소만 시키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때에는 교육감이 찾아온다며 청소하던 일이 고마웠습니다. 왜냐하면 이날은 숙제가 너무 많아 다 못했기 때문에 그냥 수업을 했다면 숙제 안 한 만큼 흠씬 두들겨맞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중학생이 되었을 때 가장 기뻤던 대목은 국민학생 때하고 견주어 학교에서 청소하는 시간이 1/3이나 1/2로 줄었던 한 가지입니다.

 담임교사가 우리들 집을 찾아다니는 때에는 동네가 들썩들썩합니다. 다들 잘난 사람들이 아니라 못난 사람들인 터라 ‘가정방문 교사한테 돈봉투를 주고 밥과 술 대접’ 하는 일이 힘에 부치는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다들 이 집 저 집 다니며 돈을 꾸느니 먹을거리를 얻느니 반찬을 나누느니 하느라 부산했습니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담임교사가 집에 들렀다 가면 담임교사는 여러 집을 거치기 때문에 우리 집에 좀 늦게 오면 다른 집에서 배불리 먹을 테니 우리 집에서는 잔칫상 같은 밥상을 얼마 손을 못 대고 남겨서 이 남은 좋은 먹을거리를 우리가 신나게 먹는 날이로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인지 5학년 때인지, 어머니가 옆집에서 돈을 꾸어 비싼 딸기를 한 소쿠리 내놓았으나 담임교사는 다른 집에서 벌써 잔뜩 먹었다며 거의 손을 안 대고 돌아갔습니다. 형하고 저는 이날 딸기를 실컷 먹었습니다.


.. 학교 어디에도 여자아이들이 모여 있을 만한 구석진 자리는 없다. 아름드리나무도, 아담한 뒤뜰도 없다. 그러니 자연 여자아이들은 화장실을 아지트로 삼는다 … 아이들과 같이 이 그림책을 보면서 산도 들도 빼앗기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다시 생각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피시방에 간다고, 텔레비전에 매달려 산다고 아이들을 나무라기 전에 둘레에 아이들이 바라는 공간이 있는지 먼저 살펴봐야 할 것 같다 ..  (31, 37∼38쪽)


 국민학교 적 모든 교사가 나쁜 마음 몹쓸 마음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학교 2학년이었을 때에 담임을 하셨던 분은 여느 교사들과 달리 (몽둥이 아닌) 회초리조차 거의 든 일이 없었고, 무슨 일 때문에 일찍 다른 학교로 떠났는지 학교를 그만두었는지 하면서 예순이 넘는 우리들한테 선물을 하나씩 ‘저마다 좋아하는 것에 맞추어’ 주었습니다. 저는 이때 그분한테 받은 ‘삼미슈퍼스타즈 야구수첩’하고 편지를 오늘날까지 고이 간직하고 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에 교과서 아닌 《세계사 수첩》(민맥)이라는 책을 교과서처럼 삼으며 수업을 했던 분하고는 편지나 소식을 가끔가끔 주고받습니다.


 (2) 그림책 읽어 주는 교사들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강승숙 님이 낸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강승숙 님은 지난 2003년에 《행복한 교실》이라는 책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사 숫자는 수십만에 이르지만, 이 숱한 교사들 가운데 교사일기를 꾸준히 쓴다든지 학교 이야기를 틈틈이 적바림하는 분은 아주 드뭅니다. 교사일기와 학교 이야기를 틈틈이 쓴다 할지라도 가슴이 뭉클할 만한 삶자락을 보여주는 분은 다시금 손가락으로 꼽아야 합니다.

 좋은 교사가 없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좋은 교사로 일할 만한 터전이 아니라는 소리입니다. 교사라면 마땅히 교사일기를 써야지, 갖가지 자질구레한 행정서류를 쓸 노릇이 아닙니다. 교사라면 마땅히 학교 이야기를 생각하며 나누어야지, 부동산이니 자가용이니 여행이니 뭐니 하며 다른 이야기에 마음이 푹 빠질 노릇이 아닙니다. 학교 바깥에서 여느 사람으로 지낼 때에는 무얼 하든 마음껏 하면 됩니다. 다만 학교 안쪽에서 일할 때에는 학교를 생각하고 학생을 헤아리며 배움과 가르침이라는 이음고리를 살필 노릇입니다.

 “책 한 권으로 아이들 마음이나 행동이 크게 바뀔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어떤 문제를 깊이 생각할 기회는 생길 것 같다(171쪽).”고 이야기하는 강승숙 님입니다. 틀림없이 책 한 권으로 아이들 삶이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과서를 제아무리 잘 가르친다 할지라도 아이들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교사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동네에서 동네 어른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내보이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아이들은 집에서 집식구들이 하루 내내 아이들 앞에서 드러내는 모습을 보고 듣고 살피며 달라집니다.


..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가까이에 마음을 달래 줄 자연조차 없는 곳에서 자라고 있다. 그래서 어른들이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는 게 더 절실히 필요하다 … 2008년에 4학년 아이들하고는 이 그림책을 재미있게 보았다. 아이들은 그림책을 보는 내내 자기네가 사는 집과 식구들을 생각하는 듯했고, 불만도 솔직하게 표현했다. 보통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아이들은 멋진 아파트를 꿈꿀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렇지는 않았다. 아이들은 식구들이 함께 어울려 사는 따뜻한 집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개들이 마중 나오고, 할머니가 마당에서 채소를 다듬거나 할아버지가 옥상에서 텃밭을 가꾸는 ‘만희네 집’을 몹시 부러워했다 …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넉넉하지 못한 주영이네와 그림책 속에 나오는 부유한 집안 풍경이 대조가 되어 읽어 주기가 민망했다. 집에 대한 주영이의 아쉬움은 《돼지책》을 읽을 때도 강하게 드러났다. 이 책에 나오는 피곳 씨 부인은 아들 둘과 남편의 도구 같은 존재였다. 밥해 주는 여자, 집안 정리해 주는 여자, 그 피곤함을 전반부에 잘 그리고 있다. 힘든 여자의 처지를 잘 이해했을 텐데도 주영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좋겠다. 집이 좋잖아요.” ..  (63, 275, 296쪽)


 슬기롭고 아름다이 거듭날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어리석고 짓궂게 굴러떨어질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착하고 참되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아이들이지만, 거짓되고 구지레하고 나뒹굴 수 있는 아이들입니다. 아이들 삶이란 둘레 어른들 삶에 따라 다릅니다. 둘레 어른들 스스로 당신들 삶을 먼저 슬기롭고 아름다우며 착하고 참되이 가다듬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책 한 권 읽어 줄 겨를을 낸다면 더없이 고맙습니다만, 책 한 권 안 읽어 주거나 못 읽어 주어도 괜찮으니까, 부디 옳고 바르고 곱게 당신들 삶자락을 추슬러 주면 좋겠습니다. 어른들 옳은 삶이 아이들 옳은 삶으로 이어지니까요. 어른들 바른 넋이 아이들 바른 넋으로 옮아가니까요. 어른들 고운 말이 아니들 고운 말로 대물림하니까요.


.. 《새앙 쥐와 태엽 쥐》, 나는 이렇게 마음이 따스해지는 그림책이 좋다 …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권정생 선생님이 쓴 글은 꾸밈없는 시골 아저씨 이야기처럼 담담하다. 기교를 부리지도, 형식을 실험해 보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작품에 공감한다.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진실의 힘, 또는 삶에서 우러나온 이야기의 힘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야기를 만들려고 애쓰는 데서 동화가 나오는 게 아니라 선생님을 둘러싼 삶의 아주 작은 구석부터 거대한 사회 흐름까지 놓치지 않고 살피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  (80, 153쪽)


 교사 강승숙 님은 살아숨쉬는 배움터를 생각하면서 당신이 할 수 있는 아주 자그마한 일인 ‘그림책 읽기’를 함께합니다. 먼저, 아이들한테 좋을 그림책을 찾는다기보다 당신 스스로 좋아하거나 당신한테 반갑고 좋을 그림책을 찾습니다. 꼭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는 일을 한다기보다, 학급문고로 그림책을 갖추어 놓으면서 아이들 스스로 먼저 찾아 읽도록 하는 한편, 아이들이 재미있어 하도록 그림책을 읽는 일을 거듭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그림책 읽기를 억지로 내세우거나 앞세운다면 이는 제도권 교과서 달달 털어내는 일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제아무리 맛나고 좋은 밥이라 할지라도 아이들이 스스로 밥술을 들어 떠먹어야 하거든요. 수저질을 잘 못해서 밥알을 떨어뜨리더라도 아이들이 차근차근 손아귀힘과 손가락힘을 길러 스스로 밥을 떠먹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무엇인가를 배우든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좋다는 책 하나를 읽든, 아이는 아이대로 스스로 가장 기쁘고 신날 책 하나를 알아보고 찾아내어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집에 가서 다시금 찬찬히 그림책을 보았다. 그리고 책 뒤표지에 붙어 있는 색종이를 접어서 고양이를 만들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차올랐다. 내가 감동하여 읽은 이 책을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 열 번도 넘게 보았지만 볼 때마다 가슴이 저릿해 오는 《까마귀 소년》. 좋아하는 그림책을 보여줄 때면 아무래도 읽어 줄 준비를 더 잘하게 되나 보다. 늦은 밤 이불에 엎드려 그림책을 다시 보았다. 동무들과 선생님을 무서워하던 주인공 땅꼬마 아이를 보니 어릴 적 동무들과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 생각났다. 지저분하고 공부 못한다고 놀림받던 명자는 늘 혼자였다. 명자는 늘 얼굴을 찡그리고 동무들이 노는 모습을 한쪽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고는 했다. 어른이 되어 아이들을 가르칠 때도 해마다 명자처럼 동무 없이 지내는 쓸쓸한 아이들이 한둘씩 꼭 있었다 ..  (106∼107, 123쪽)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을 읽으며 강승숙 님네 아이들이 참 부럽습니다. 강승숙 님이 읽어 주는 그림책이 아이들한테 괜찮은 책이든 안 괜찮은 책이든 떠나, 아이들한테는 ‘숙제나 짐처럼 떠안기는 추천도서나 명작동화’가 아니라, 살과 숨과 목소리와 땀을 함께 느끼며 빠져드는 고운 이야기를 나누는 배움이거든요. 아이들은 저희하고 놀아 주는 교사가 좋지, 아이들한테 매섭거나 무서우며 ‘위에서 내려다보는’ 교사가 좋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딱딱한 가르침이 아니라 부드럽고 따사로운 어깨동무가 좋은 아이들입니다. 무슨 지식조각이나 어떤 지식부스러기를 나누어 주지 못할지라도 함께 고무줄을 하고 같이 금긋기놀이를 하는 어른이 좋은 놀이동무요 일동무요 배움동무입니다.

 예부터 스승이란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르치며 배우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른한테서 배우는 사람이지만 배우기만 할 뿐 아니라 배우면서 가르칩니다. 어른과 아이는 서로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사이요, 어버이와 아이 또한 서로서로 가르치며 배우는 살붙이입니다.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라는 책은 교사 된 사람들이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이렁저렁 읽어 주어야 좋다는 생각을 펼치지 않습니다. 이런저런 그림책을 꼭 읽히라고 외치지 않습니다.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아이들 앞에서 읽어 줄 때에 교육 효과가 크다고 떠벌이지 않습니다.

 한 학급 숫자가 예순이나 여든일 때에도 얼마든지 그림책 읽기를 할 수 있었으나, 한 학급 숫자가 고작 스물이나 서른인 오늘날에는 누구나 그림책 읽기를 어렵잖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어렵잖이 그림책 읽기를 할 수 있으니 이러한 일을 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라, 아이들 삶에 더 깊숙하게 스며들면서 손을 맞잡고 어깨를 겯는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으로 우리 매무새를 다독여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강승숙 님은 이처럼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 되기’를 그림책 읽기로 하고 있을 뿐입니다. 다른 분들은 저마다 다른 길과 흐름에 맞추어 아이들 앞에서 사랑스럽고 믿음직한 어른이 될 삶을 찾아 주면 넉넉합니다.


.. 문장을 보니 2학년 아이들한테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지’를 얼른 ‘땅’으로 바꾸어 읽었다. 그래도 이 문장을 들은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다. ‘생명의 불꽃’이라니, 무슨 말인지 얼른 다가오지 않는 모양이다. 설명하려다 화면을 넘겼다 … 그림책 만드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과감한 기법과 새로운 감각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가는 그림책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아이들한테는 《엄마의 의자》같이 삶이 묻어난 그림책, 소년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처럼 서민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도 필요하다 ..  (130, 287쪽)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는 제대로 읽어야 하는 책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줄거리나 모습을 섣불리 따라하면 안 되고, 이 책에 나오는 그림책들이 ‘모두 괜찮은 책’이라고는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책에서 다루는 그림책은 고작 백 가지가 안 됩니다. 이 책에서 다루지 못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이 아주 많을 뿐 아니라, 이 책은 ‘좋은 책 추천하는 책’이 아닙니다.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읽어 주기 앞서 어른인 우리 스스로 먼저 그림책을 아끼고 사랑하면서 그림책 하나에 어떤 땀과 뜻이 서려 있는가를 헤아리자고 하는 목소리를 무엇보다 제대로 살펴야 할 《선생님, 우리 그림책 읽어요》입니다.

 아무래도 책 짜임이 이 대목을 더 헤아리지 못하지 않았느냐 싶은데, 딱딱한 책이 되지 않기를 바라며 강승숙 님 모습과 당신 반 아이들 모습 사진을 많이 실었습니다만, 외려 이 사진들은 책읽기에서 자꾸 걸립니다. 책에 담긴 줄거리하고는 어울리지 않고 ‘그림만 좋은’ 사진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 일곱 갈래로 나눈 책이니 일곱 갈래를 새로 여는 데에만 사진을 넣고, 사이사이에는 강승숙 님과 아이들이 아주 아끼고 사랑한 ‘그림책 어느 한 대목’을 제대로 보여주었어야 이 책을 읽으며 눈과 숨이 부드러웠겠다고 느낍니다. 사이사이 그림책 한두 대목이 들어가 있기는 한데, 정작 ‘이 그림책을 이야기하며 바로 이 그림이 좋았다’고 하는 흐름에서 ‘이 그림’이 없기 일쑤였습니다. ‘그림책 교육 지도서’ 느낌이 안 나도록 하려고 이처럼 책을 엮었다 할 수 있는데, 좋은 글을 읽으며 좋은 ‘그림책 한 대목’을 함께 느낄 수 있으면 강승숙 님이 왜 아이들 앞에서 허리를 숙이며 같은 눈높이에서 그림책을 즐기고 있는가를 좀더 마음 깊이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 봅니다.

 109쪽에 ‘도둑고양이’라고 적바림한 낱말은 ‘골목고양이’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도둑개나 닭둘기가 아닌 골목개요 골목비둘기입니다. 어설픈 사람 눈길로 뭇짐승을 깎아내리는 말마디가 어설피 튀어나오지 않도록 끝마무리를 단단히 여미어 주면 더욱 고맙겠습니다. (4343.5.1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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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라면을 먹을 때 모두가 친구 12
하세가와 요시후미 지음, 장지현 옮김 / 고래이야기 / 200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빨래할 때에 이웃집도 빨래를 한다
 [그림책이 좋다 79] 하세가와 요시후미, 《내가 라면을 먹을 때》



- 책이름 : 내가 라면을 먹을 때
- 글ㆍ그림 : 하세가와 요시후미
- 옮긴이 : 장지현
- 펴낸곳 : 고래이야기 (2009.3.20.)
- 책값 : 9800원



 (1) 내가 손빨래를 할 때


 어제 하루 새벽부터 저녁나절까지 낮잠 한 번 없이 신나게 놀며 아빠를 힘들게 하던 아이는 밤 한 시 무렵 깨어났습니다. 먹으라는 밥은 안 먹고 혼자 신나게 놀다가 사탕 하나 집어물고 스르르 잠든 때가 저녁 일곱 시 조금 넘어서입니다. 그러니 배가 고파서 깼겠지요. 그나마 밥이라도 먹고 잠들었으면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여섯 시나 여섯 시 반쯤 일어났을 테지만, 배고프다고 밤 한 시부터 한 시간 반 남짓 칭얼칭얼거립니다. 밤나절에는 먹이지 않으려고 하기에 달래고 어르고 안고 업고 하지만 도무지 잠들지 않아 하는 수 없이 밥을 조금 먹여야겠구나 싶습니다. 밤에 일어나 밥을 차려 놓습니다. 그렇지만 밥상을 차려 놓으니 잘 먹지 않습니다. 깊은 밤에 네 시 가까이까지 아빠와 엄마 모두 힘들게 한 끝에 잠들고, 다시 아침 일곱 시 반쯤 일어납니다.

 스스로 말은 잘 안 하려 하지만 말귀는 모두 알아듣는 아이한테 하소연하듯 이야기합니다. “아이야, 제발 조금 더 자고 일어나 주라, 응? 힘들어 못살겠구나.”

 이런 말을 한다고 아이가 다시 잠드는 일이란 없습니다. 이 누리에 아이가 태어난 뒤부터 오늘까지 그야말로 잠 없고 기운 넘치게 놀아대는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틀림없이 낮잠은 거뜬히 건너뛰고 저녁나절까지 낑낑 칭얼칭얼 하다가 까무룩 하고 잠이 들겠지요. 보나 마나 오늘도 밥은 잘 안 먹으려고 하겠지만 제발 밤에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밥을 조금이나마 먹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아이가 깨어 있는데 아빠는 드러누울 수 없습니다. 아이는 저 때문에 아빠와 엄마가 잠을 설칠 뿐 아니라 졸음이 가득한 줄을 헤아리지 않으니까요. 십 분 또는 이십 분쯤 엎드린 채 끙끙거리다가는 일어납니다. 더 누워 있다가 아이가 이부자리나 방바닥이나 책상맡에 오줌이라도 누면 큰일이니까요.

 게슴츠레 일어나서 씻는방으로 들어갑니다. 오늘은 낮 한 시부에 도서관 책손을 맞이해야 하기에 머리를 감고 씻고 빨래를 하기로 합니다. 지난밤 아이가 오줌을 눈 기저귀와 옷가지에다가 새로 잔뜩 쌓인 옆지기 옷가지를 씻는방 바닥에 펼쳐 놓고 머리를 감습니다. 아이 옷가지와 기저귀부터 빱니다.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작은 대야에 비빔질 마친 빨래를 하나씩 넣고는 다섯 벌로 나뉘어 차근차근 헹굼질을 합니다. 다섯 벌로 나눈 빨래이니 첫 벌로 헹군 빨래를 두 벌로 빤 빨래를 헹구고, 이렇게 다섯 가지 빨래를 착착 헹굽니다. 마지막 헹군 구정물로는 씻는방 바닥과 벽에 부어 물때를 벗깁니다. “아이구 허리야, 날마다 해도 해도 빨래는 날마다 잔뜩 쌓이는구나.” 하는 노래를 하며 빨래를 하는 동안 아이는 아빠가 빨래하는 양을 말끄러미 바라보며 물놀이를 할까 말까 망설입니다. 아이가 양말을 챙겨 신은 채 씻는방에 들어왔기에, “벼리야, 양말 젖는다. 방으로 들어가.” 하는 말을 세 차례 해서 내보냅니다. 맨발로 들어왔으면 가만히 지켜봤을 테고, 맨발로 있던 아이를 아빠가 말없이 지켜보기만 하면 아이는 살그머니 저 두 손을 헹굼물에 담그며 놀았을 테며, 이러는 가운데 아이는 옷이 젖었을 테고, 아이가 옷이 젖으면 ‘이 녀석, 또 옷을 버리네.’ 하고 한숨을 쉬며 아이 씻을 물을 따로 받아 아이를 씻기면서 빨래를 했겠지요. 어차피 거의 날마다 아이를 씻기지만 오늘 아침은 몹시 힘들기 때문에 마음속으로 빕니다. ‘아이야, 오늘은 저녁에 씻자, 응? 오늘 아침은 너무 힘들다.’

 비비고 헹구고 털며 빨래를 하는 내내 허리를 톡톡 두들깁니다. 오늘 아침도 여느 아침과 마찬가지로 빨래로 여는데, 오늘날 여느 한국땅 살림집처럼 빨래기계를 키우고 있다면 이런 고단함이란 없을는지 모릅니다. 요사이는 집일이 부쩍 늘어 빨래를 다 마치고 널면서 어제 해 놓은 빨래가 다 말랐어도 곧바로 개지 못합니다. 자리에 드러누워 허리를 편 다음 개든지 한숨 크게 돌리고 나서 저녁에 개든지 이틀치를 쌓아 놓고 개든지 합니다.

 헌 빨래기계를 거저로 준다는 사람이 있고, 이제는 빨래기계 한 대쯤이야 돈으로 얼마 치지 않아 집안에 들이기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빨래기계를 들이고 싶지 않습니다. 냉장고며 텔레비전과 마찬가지로 빨래기계가 들어오는 일이란 하나도 반갑지 않고 달갑지 않으며 고맙지 않습니다. 얼마든지 두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기계한테 맡기기 싫고, 괜히 빨래기계 냉장고 텔레비전을 키우며 애먼 전기를 더 쓰고 싶지 않아요. 글을 쓰는 셈틀하고 손전화에 밥 먹이는 데하고 밤에 등불 켤 때를 빼고는 전기를 쓰고 싶지 않습니다. 곰곰이 돌이켜보면 우리가 오늘날처럼 전기를 많이 쓰던 날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거든요. 지난날 여느 살림집은 어디나 전기를 얼마 안 쓰거나 없이 살았으며 등불 하나 켜면서 조마조마해 했습니다. 여느 살림집에는 셈틀이란 없던 우리들이요, 빨래기계를 집집마다 들인 지 수십 해가 된 우리 나라가 아닐 뿐더러, 냉장고가 여느 살림집에 들어온 햇수가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우리는 어느 집이나 손으로 일을 하고 손으로 부대끼며 손으로 얼싸안으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기계를 쓴다든지 돈을 쓴다든지 하면서 내 살림살이를 남한테 맡기지 않은 우리들 발자취입니다. 아이를 키우든 아이를 가르치든 먹을거리를 마련하든 누구나 제 손으로 꾸리던 우리들 살림살이입니다.

 아침 일찍부터 손빨래를 하며 생각합니다. 이제는 내 이웃집 가운데 어느 집도 빨래기계 안 쓰는 집은 없을 테지만, 이 아침나절에 어느 이웃집이나 빨래를 하고 있지 않겠느냐고. 빨래를 마칠 무렵이면 아이한테 밥을 먹일 테고, 새벽바람으로 일 나가는 집식구가 있으면 새벽밥을 지어서 먹을 터이며, 집식구 모두 아침부터 바깥일을 나가야 한다면 지난밤에 아침을 미리 마련해 놓고 있었으리라고.

 이리하여 아침 예닐곱 시부터 낮 열두 시 무렵까지는 골목동네마다 빨래를 하는 때입니다. 이무렵에 집일을 모두 마치고 골목마실을 나서면 동네마다 막 마친 빨래를 햇볕 잘 드는 자리에 널어 놓으려고 부산한 모습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열두 시를 넘은 때에 골목마실을 하면 새로 빨래를 너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으며, 햇볕과 바람으로 거의 다 마른 빨래가 팔랑팔랑 나부끼는 모습을 찾아봅니다. 때로는 바람에 날린 빨래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데, 이때에는 슬며시 빨래를 집어들고 탁탁 흙먼지를 털어 빨래줄이나 빨래대에 곱게 얹습니다. 빈 빨래집게가 있으면 집어 놓습니다. 빨래집게로 안 집어서 빨래가 날리는데,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들 가운데에는 빨래집게가 어엿하게 있는데 깜빡 잊는다든지 집에서 전화가 울리면 그냥 널어 놓고 들어간 채 잊곤 하거든요.

 어제 낮에 배다리 헌책방거리에 있는 책쉼터 〈낮잠〉이라는 곳에서 만난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젊은이가 제 골목 사진을 보고 사진을 이렇게 잘 찍으려면 어떡해야 하느냐고 묻기에 “제 사진은 잘 찍은 사진은 아니고 누구나 찍을 수 있는 사진이에요. 다만 날마다 여러 시간을 여러 해 돌아다니면 누구나 찍을 수 있을 뿐이랍니다.” 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느끼고, 스스로 좋아하는 대로 내 삶과 이웃 삶을 살피면 글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다른 사람 눈치가 아닌 내 눈썰미에 따라 좋은 이야기를 엮을 수 있습니다. 굳이 작품이 되기를 바라는 글이 아니라 한다면 언제나 즐겁게 글을 쓸 수 있어요. 애써 작품이 되기를 꿈꾸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니라 한다면 노상 신나게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을 수 있고요. 무엇보다도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매무새인데, 우리들은 좋아하는 마음과 즐기는 매무새를 하루하루 잃고 있다고 느낍니다. 손빨래를 좋아하는 마음을 잃고, 손걸레질을 즐기는 매무새를 나날이 잃고 있구나 싶습니다. 두 다리로 마실하는 재미를 잃고, 아이를 안거나 걸리며 키우는 보람을 잊구나 싶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어른인 나부터 신나게 돌아보고 우리 딸아들한테 알뜰살뜰 보여주며 함께 나눌 책 하나 우리 눈길로 살피어 장만한 다음 같이 읽기란 어려운 노릇이겠지요.


 (2)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 담은 삶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를 넘깁니다. 책이름 그대로 일본땅 여느 살림집에서 살아가는 어린이가 집에서 라면을 끓여먹을 때부터 이야기를 엽니다. ‘뭐야, 라면인가?’ 하는 생각이 들며, 라면을 먹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인지 라면이 맛나다든지 뭐 그런 그림책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요즈음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까지 모두)은 라면을 좋아하고 즐겨먹고 있어 이런 그림책마저 그리는가 싶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펼쳐 끝까지 보지 않고서야 무슨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겉그림이나 첫그림만 보고 섣불리 짚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옆에서 방울이는 하품을 한다.
옆에서 방울이가 하품을 할 때
이웃집 미미는 텔레비전 채널을 돌린다.
이웃집 미미가 텔레비전 채널을 돌릴 때
이웃집의 이웃집 디디는 비데 단추를 누른다.



 그림책 첫머리는 라면 먹는 아이 모습이 나옵니다. 라면 먹는 아이는 일본땅에서는 ‘아주 잘사는 집’도 아니고 ‘아주 못사는 집’도 아닙니다. 그저 수수한 살림집 여느 아이입니다. 아이 곁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심심한 듯 하품을 합니다. 오늘날 우리 둘레에는 고양이나 개를 기르는 집이 퍽 많습니다. 일본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입니다.

 이웃집 아이는 텔레비전을 보고, 이 이웃집 옆에 사는 아이는 뒷간에서 비데 단추를 누릅니다. 오늘날 웬만한 살림집이란 모조리 아파트이거나 빌라입니다. 빌라는 차츰 줄며 아파트로 바뀌고 있으며, 잘사는 아파트이건 조금 못사는 아파트이건 시설이나 집 얼거리는 ‘현대화’나 ‘최신식’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비데 단추쯤이야 아무것 아닐 테지요.


그 이웃마을 여자아이가 달걀을 깰 때
이웃나라 남자아이는 자전거를 탄다.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탈 때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여자아이는 아기를 본다.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에는 일본땅에서 문화와 물질을 듬뿍 누리는 아이들을 하나둘 보여줍니다. 말끔한 야구옷을 차려입고 야구놀이를 하는 아이를 보여주고, 바이올린을 개인 선생한테서 배우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부엌에서 손수 밥하기를 하며 노는 아이를 보여줍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림이 달라집니다. 이제 ‘아이들 이웃집’이 ‘아이들 이웃나라’로 옮깁니다. 먼저, 일본하고 맞붙은 이웃나라인 한국으로 와서 한국땅 ‘자전거 타는 어린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한국땅에서 이웃이라 할 나라인 아시아로 접어들어, 아시아에서 ‘아기 보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처음에 라면 먹는 어린이라든지 비데 단추 누르는 어린이라든지 값나가는 바이올린을 여러 대 벽에 걸어 놓고 이쁘장하게 배우는 어린이라든지 나올 때에는 그예 흔하디흔한 싸구려 그림책이 아닌가 하고 여겼습니다. 아기(어린 동생)를 보는 어린이를 보여주는 그림을 보고서야 비로소 무릎을 치며 깨닫습니다. 아하, 이렇게 차근차근 내 눈길을 우리 옆으로 옆으로 돌리면서 우리 이웃과 동무와 둘레 삶자락을 느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어설피 가르침을 베풀려는 그림책이 되어서는 안 되고, 아주 부드럽고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로 내 삶터와 이웃 삶터를 골고루 느끼도록 도와주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제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가슴이 시린 대목을 톡톡 건드립니다. 소를 부리며 농사일을 하는 어린이를 보여주고, 엄마 아빠 몫을 떠안아 길에서 장사를 하며 살림을 꾸리는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엄마 아빠 모두 싸움터에서 목숨을 잃은 다음 어린이까지 싸움터에서 누군가 쏜 총에 맞아 길바닥에 널브러진 어린이를 보여줍니다.


그 이웃나라의 이웃나라 남자아이가 소를 몰 때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는 빵을 판다.
그 맞은편 나라 여자아이가 빵을 팔 때
그 맞은편 나라의 산 너머 나라 남자아이는 쓰러져 있다.



 싸움은 누가 일으켰을까요. 어린이들끼리 싸움이 붙었을까요. 어린이들은 까닭 모르며 집을 잃고 어버이를 잃으며 목숨마저 잃어야 하는가요. 무슨 잇속을 챙기려고 무시무시한 무기를 앞세운 사람은 누구일까요. 우리 어른들은 왜 무기를 끝없이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서 만들고 있나요. 평화를 지키려는 무기인가요, 싸움을 끊임없이 되풀이하며 남보다 더 큰 잇속을 챙기려 하는 무기인가요. 나라를 지킨다는 이름을 앞세우는 어른들인데, 정작 제 나라 사람들뿐 아니라 이웃나라 사람들 목숨은 아주 하찮게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무기를 만들고 싸움을 일으키며 서로 죽이고 죽는 어른들은 이웃집을 들여다보거나 헤아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싸움터로 끌려나가야 하거나 스스로 싸움터로 뛰쳐나간 어른들 또한 당신 둘레 동무와 아이들을 살피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총을 든 어른들은 누군가를 죽이려는 사람이지 누군가를 살리려는 사람이지 않습니다. 적군을 죽이는 총이요 우리를 지키는 총이라지만, 우리한테 적군일 맞은편도 우리하고 똑같이 생각합니다. 우리들만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가 아닙니다. 적군인 나라도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입니다. 여느 살림집 여느 어린이 여느 어버이인 우리들 서로서로가 총을 맞대며 우락부락 다툴 까닭이란 없습니다. 우리 나라에 더 있는 돈과 자원이라면 우리보다 힘겨운 이웃나라한테 보태 주며 사랑을 나누면 됩니다. 우리한테 모자란 돈과 자원이라면 우리보다 넉넉한 이웃나라한테서 얻으며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억지로 힘을 써서 빼앗아야 할 까닭이 없고, 빼앗아서는 안 됩니다. 어거지로 옆사람을 밀어내거나 넘어뜨리며 나 홀로 1등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고, 1등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2등이 될 까닭 또한 없으며 3등과 4등 또한 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등수나 숫자나 돈셈이 아닌, 사랑과 웃음과 눈물과 즐거움과 보람과 땀방울로 어우러진 아름다움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해야 할 일은 사랑이요 믿음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일은 괴롭힘과 죽임과 빼앗음입니다. 갖추어야 할 매무새는 착함과 올바름과 넉넉함과 따뜻함과 너그러움과 참됨입니다. 갖추지 않아야 할 매무새는 시샘과 따돌림과 미움과 못됨과 차가움과 메마름과 거짓입니다.


바람이 불었다.


 그림책 《내가 라면을 먹을 때》는 “바람이 불었다” 한 마디를 넣은 그림을 여러 쪽 잇달아 보여주면서 마무리를 짓습니다. 라면을 먹던 어린이는 이웃집 동무들이 어떻게 지내는가를 가만히 헤아려 보다가 바람을 느꼈을 수 있고, 그냥 라면만 배불리 먹고 빈 그릇은 개수대에 던져 놓고 설거지는 엄마한테 떠넘긴 채 야구방망이와 장갑을 챙겨들고 밖으로 나가 다른 동무들하고 신나게 공놀이를 즐겼을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고 나서 컴퓨터 게임을 할 수 있고, 라면을 먹었으니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즐길 수 있습니다. 라면을 먹은 든든한 몸으로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읽을 수 있는 한편, 라면을 먹으면서 밀린 숙제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놀 때에 일하는 동무가 있고, 내가 잠잘 때에 싸우는 어버이 때문에 눈물로 지새우는 동무가 있으며, 내가 자가용을 타고 학교와 학원을 오갈 때에 썰렁한 집에서 라이타로 불장난을 하는 동무가 있습니다. 옆에 있다고 모두 동무가 아니며, 가까이에서 지켜보지 못한다고 동무 아닌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동무들과 이웃들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는 한편, 우리는 우리 둘레 사람이나 삶터를 하나도 모르거나 아예 등돌린 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라면을 먹을 때에 바람이 붑니다. 아이 옷가지를 손빨래하고 있을 때에 이웃집에서도 빨래를 하고 있습니다. (4343.5.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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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생쥐 - 2010년 칼데콧 상 수상작 별천지 제리 핑크니
제리 핑크니 글.그림, 윤한구 옮김 / 별천지(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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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을 읽는 어른과 어린이
 [그림책이 좋다 78] 제리 핑크니, 《사자와 생쥐》



- 책이름 : 사자와 생쥐
- 그린이 : 제리 핑크니
- 옮긴이 : 윤한구
- 펴낸곳 : 별천지 (2010.3.10.)
- 책값 : 9000원



 (1) 아이와 함께 읽을 책이란


 엊그제부터 《이누야사(犬夜叉)》라는 만화책을 읽고 있습니다. 일본 만화쟁이 타카하시 류미코 님이 1996년부터 그린 쉰다섯 권에 이르는 긴 만화인데, 1986년부터 그린 《란마 1/2》보다 훨씬 길고, 이보다 앞서 그린 《1파운드의 복음》이나 《도레미 하우스》보다 훨씬 긴 작품입니다. 《시끌별 녀석들》하고 견주어도 참 깁니다. 쉰 권이 넘는 만화로 예전에 《4번 타자 왕종훈》을 본 적이 있고, 처음 옮길 때 42권까지 나왔다가 뒷이야기로 새로 이어지는 《드래곤볼》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 만화 가운데에는 열 권이 넘어가는 만화가 퍽 드문데, 일본 만화에서는 스무 권은 아주 가벼운 셈이고, 마흔 권이나 쉰 권은 으레 찾아볼 수 있으며 백 권이 넘는 만화 또한 꽤 많습니다.

 일본은 만화나라라 하니 이렇게 긴 만화를 그릴 수 있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우리 나라는 일본 못지않은 만화나라요, 만화를 즐기거나 그리는 사람 또한 제법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짜임새있고 탄탄하며 재미있고 아름답기까지 한 만화는 손가락으로 꼽기 힘듭니다. 더욱이 우리 둘레 여느 삶에서 수수한 이야기를 찬찬히 돌아보면서 알뜰살뜰 만화감으로 잡아채거나 삭여내는 손끝을 만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용구슬 이야기이든 농구 이야기이든 야구 이야기이든, 또 요괴 이야기이든 격투나 무술 이야기이든, 길디길게 이으면서 빈틈이 엿보이지 않도록 그리는 만화결이란 손재주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손재주 아닌 훌륭한 솜씨를 바탕으로 그린이부터 스스로 눈물과 웃음으로 젖어들도록 빚어낼 수 있는 생각밭이 있어야 합니다.

 환상이나 판타지 갈래라 해서 오래도록 이어 그릴 수 없습니다. 우리한테 “초원의 집”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큰 숲 작은 집》 같은 문학이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난데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빨간머리 앤》 같은 문학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두 우리들 여느 삶에서 흔히 마주하거나 바라보는 이야기입니다. 때로는 우리 스스로 살아가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나 스스로 처음 어버이한테서 선물받은 고운 목숨을 고맙게 받아들여 즐거이 살아가면서 뒤돌아본 발자국을 발판 삼아 신나고 멋지고 아름다우며 눈물겨운 이야기를 엮습니다. 하루하루 고단하고 복닥이는 삶을 웃음나는 이야기로 거듭나도록 이끕니다. 나날이 부둥켜안는 사랑스러운 식구와 동무와 이웃 삶자락을 싱그러운 이야기로 다시 태어나도록 북돋웁니다.

 이제 21권째 읽고 있는 《이누야사》 18권 145쪽부터 152쪽으로 이어지는 대목을 다시금 펼쳐 봅니다. “나는 키쿄에게 생명을 걸고 보답해야 해.” “응. 키쿄는 나와 비교할 수 없어. 그건, 난 살아 있으니까. 키쿄의 일도 많이 생각했어. 키쿄와 난 전혀 달라. 내가 키쿄의 환생이라고 하는 이야기도, 그렇다고 해도 난 키쿄가 아니야. 마음은 내 마음이야. 하지만 한 가지만은 키쿄의 마음을 알았어. 나와 같이, 한 번 더 이누야사를 만나고 싶다는. 키쿄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어. 만나고 싶다는 마음은 같았을 거라고. 그래서 용기를 내서 이누야사를 만나러 왔어.” ‘카고메, 나도 너를 만나고 싶었어. 하지만.’ “나, 이누야사와 같이 있고 싶어. 잊을 수 없어.” ‘카고메, 나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지?’ “이누야사, 한 가지만 물어 볼게.” “응.” “함께 있어도 좋아?”

 만화책 《이누야사》를 이루는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카고메는 중학교 3학년 아이입니다. 카고메는 1990년대 일본 도쿄에서 고입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면서 집안에 있는 오래된 우물을 거쳐 일본 옛 전국시대를 드나드는 동안 새로운 사람과 삶을 만나며 새로운 넋과 몸으로 거듭납니다. 이러는 사이 차근차근 무르익는 마음밭은 ‘나는 이누야사와 살아가고 싶어. 즐거운 일이 있어도 좋아. 맘껏 웃고 싶어. 나에게 무엇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계속 옆에 있을 거야.’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이누야사 손을 꼬옥 잡습니다. 언뜻 생각하기로는 중학생 주제에 무슨 사랑을 하느냐고 바라볼 만합니다. 열여섯 나이에 무슨 사랑을 아느냐고 비웃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풋사랑이든 깊이 익은 사랑이든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어린 사랑이든 늙은 사랑이든 똑같은 사랑입니다. 열여섯 나이에도 사랑이고 여든여섯 나이에도 사랑입니다. 스물여섯이나 서른여섯이 되어야 사랑을 알까요. 아니, 스물여섯이나 서른여섯이면서 사랑을 모르는 우리들은 아닌지요.

 노래패 한스밴드는 중학생 나이에 사람들을 깜짝 놀래키며 노래판에 뛰어들었습니다. 노래하는 한스밴드 세 사람으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을 터이나, 이들 노래를 듣는 사람은 중학생이 부르는 노래에 놀라워 했습니다. 한스밴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노래를 좋아하면 열너덧 살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쉰너덧이나 예순너덧에도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열너덧에도 사랑노래를 부를 수 있고 예순너덧에도 사랑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열너덧에도 사회를 나무라는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예순너덧에서 사회를 꾸짖는 노래를 부를 만합니다. 우리가 바라볼 대목은 얼마나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운가입니다. 우리가 만화책 하나를 넘기며 헤아릴 대목은 얼마나 참된 이야기가 착한 얼거리로 아름답게 엮이어 있는가입니다. 우리가 노래 하나를 귀기울여 들으며 살필 대목은 얼마나 참된 이야기가 착한 목소리를 타고 아름다운 가락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입니다. 고갱이는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입니다. 사람마다 참됨과 착함과 아름다움을 맞아들이는 테두리와 깊이는 다를 텐데, 우리는 우리가 선 자리에 따라 얼마나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가를 느끼면서 어루만져야 합니다.

 스물한 달째 아이를 돌보며 살아가는 어버이 노릇을 하는 동안 날마다 같은 그림책을 아이한테 수없이 되풀이하며 읽히고 보이고 쥐어 줍니다. 아이는 저 스스로 같은 그림책을 날마다 수없이 되읽고 또 넘기고 새로 쥐어들곤 합니다. 인형도 그렇고 사진도 그렇고 놀잇감도 그렇습니다. 날마다 새로 만지고 새로 늘어놓으며 새로 쌓아 놓습니다. 날마다 아침에 눈을 뜨며 만나는 엄마 아빠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맞이하듯, 날마다 같은 책 하나를 놓고도 새로운 느낌과 마음으로 마주합니다. 어버이 된 저나 옆지기 또한 아이를 날마다 새로운 눈길과 손길로 마주합니다. 아이한테 책을 읽힐 때에도 날마다 다른 목소리와 매무새로 읽힙니다. 날마다 해서 먹이는 밥이든 날마다 빨래해서 입히는 옷이든 겉보기로는 똑같은 흐름이요 물건이며 살림새입니다. 그러나 날마다 똑같은 살림새라 할지라도 이 살림새를 다루는 어버이 마음은 늘 똑같지는 않습니다. 늘 새로운 하루에 발맞추어 새로운 마음이요,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는 결 하나만큼은 늘 똑같을 뿐입니다.

 아이와 읽을 책이든 어른 혼자 스스로 읽을 책이든, 날마다 새롭게 쥐어들어 새 넋과 얼을 키울 만한 그릇이 될 수 있도록 알차야 비로소 좋은 책 하나라고 느낍니다. 아니 좋고 나쁘고를 떠나 책이라는 이름을 얻으려면 우리 스스로 날마다 쥐어들 만해야 하며, 날마다 다시금 쥐어들면서 새삼스럽고 새로운 느낌을 선물받을 만한 얼거리야 한다고 느낍니다.
 





 (2) 이야기하는 그림책 《사자와 생쥐》


 그림책 《사자와 생쥐》를 읽습니다. 말 한 마디 나오지 않고 그림으로 이루어진 그림책 《사자와 생쥐》를 읽습니다. 서울 혜화동 〈책방 이음〉 나들이를 하던 이달 첫머리에 옆지기가 이 그림책을 장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해서 장만하여 읽습니다. 이 책은 비닐에 싸여 있었기 때문에 속그림을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속그림을 들여다보지 못한 채 장만했다가 ‘이런, 겉과 속이 다르잖아?’ 하면서 짜증스러웠던 책이 꽤 있던 만큼 못내 걱정스러웠으나, 책 겉장을 이룬 사자 그림과 생쥐 그림으로도 ‘이만한 책이라면 속그림이 우리를 짜증스레 하지는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먼저 책방에서 책값을 셈한 다음 곧장 비닐을 뜯어 책을 펼칩니다. 겉장을 이룬 그림만큼 속을 채운 그림이 어여쁩니다. 동물원에서 살아가는 사자가 사람이 친 그물에 걸려 버둥거릴 때에 생쥐가 이빨로 그물을 갉아서 살려내는 줄거리란 그림으로만 보여줄 때에 한결 걸맞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에 말로 이야기를 넣었다면 재미나 즐거움이 크게 줄었겠다고 느낍니다. 사람들이 훤히 알 만한 옛이야기이기에 굳이 글을 안 넣었다기보다, 이 옛이야기란 따로 글 없이 그림으로 넉넉히 보여줄 만합니다. 입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글을 써서 이야기를 읽힌다 할 때에는 그림이나 사진 하나 없이 이 옛이야기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도록 할 노릇이요, 그림으로 이야기를 보여준다 할 때에는 오로지 그림으로만 이야기를 느끼도록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그린이로서는 생각힘을 한껏 북돋우면서 펼치는 그림책이고, 읽는이로서는 생각힘을 찬찬히 가다듬으면서 즐기는 그림책입니다.


.. 고전을 읽기 책으로 다시 만드는 작업이 드물어진 이후, 고전을 글이 없는 그림책으로 만드는 작업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아직까지도 이처럼 매력적인 고전의 등장인물들이 가족과 설정의 의미를 새롭게 깨닫게 해 주고 나로 하여금 이야기를 보다 풍요롭게 만들도록 하니까 ..  (그린이 말)


 《사자와 생쥐》를 그린 제리 핑크니 님은 동물원 둘레에서 살아간다고 합니다. 제리 핑크니 님이 살아가는 동물원이란 쇠창살 우리에 짐승을 가두어 놓는 동물원이 아니라 ‘자연 동물원’입니다. 쇠가시울타리나 쇠창살이 있지 않은 자연 동물원 둘레에서 살아가며 자연스레 살아가는 짐승을 늘 바라보고 부대끼는 느낌 그대로 그림을 즐긴다고 합니다.

 책끝에 붙은 그린이 소개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오늘날 우리 터전을 돌아보면, 자연과 함께 살아가며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자연으로 스며들면서 자연 이야기를 쓰는 분은 드물고, 도시에 뿌리를 내리거나 한 다리를 걸치거나 온몸을 내맡기면서 자연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 나라에서는 자연다운 자연을 자연스럽게 건사하기 어렵습니다. 국립공원에 하늘차(케이블차)를 버젓이 놓는가 하면, 국립공원을 꿰뚫는 고속도로나 고속화도로를 아무렇지 않게 뚫습니다. 국립공원에서 고기잡이 밥장사 술장사 번듯하게 이루어지며, 국립공원 아닌 데에서는 아주 막 나갑니다. 시골 논밭을 갈아엎으며 아파트를 세우거나 공장을 짓습니다. 시골 산을 깎아 아파트를 짓거나 공장을 들입니다. 갯벌을 메워 아파트를 올리거나 공장을 키웁니다. 자연이 자연다울 수 없고, 자연이 자연스러울 수 없습니다. 자연이 조금도 자연다움을 보듬지 못하도록 나동그라지는 곳에서 자연을 싱그럽고 아름다이 펼치는 이야기를 엮기란 몹시 힘듭니다. 자연을 하나도 자연스럽게 바라보지 않는 우리들 터전에서 자연을 사랑스럽고 알차게 받아들이는 이야기를 담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생태환경 그림책을 그리기 힘듭니다. 우리 스스로 생태환경을 받아들이는 마음그릇 채우며 나라밖 그림책을 옮기기 어렵습니다.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이 있어도 지식으로 삼을 뿐입니다. 훌륭한 자연 그림책 하나 옮겼어도 초등학교 낮은학년 때까지만 읽히지, 초등학교 높은학년이나 중고등학교 때에는 읽히지 않습니다. 길이길이 이어갈 자연을 굽어살피지 않고, 오래오래 사랑할 자연을 껴안지 않습니다. 그림책을 즐긴다는 초등학교 낮은학년이라지만, 이때에도 영어와 한자와 갖가지 지식과 학원 교육에 휘둘립니다.

 애틋한 그림책 《사자와 생쥐》라지만, 이 그림책 하나에 얼마나 애틋함이 묻어 있는지를 느낄 가슴이 자라날 겨를이 없는 오늘날 우리 아이들입니다. 살가운 그림책 《사자와 생쥐》라고 느낍니다만, 이 그림책 하나를 기쁘게 장만하여 넉넉히 나눌 품이 없는 오늘날 우리 어른들입니다.

 한 번 보고 덮는 그림책이 아니라 날마다 여러 차례 되읽으면서 한 해에 걸쳐 천 번 넘게 살피는 그림책임을 헤아리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어른들입니다. 가끔 한 번 넘기면 될 그림책이 아니라, 책꽂이에 꽂힐 겨를이 없이 손길을 타면서 닳고 때가 타야 할 그림책임을 돌아보지 못하는 아이들이고 어른들입니다. 우리 나라 아이들 손에는 참고서와 문제집만 닳고 낡으며, 우리 나라 아이들 손에는 좋은 그림책이나 고운 그림책이나 멋들어진 그림책이 닳고 낡지 못합니다. 그림책은 처음 이 책을 쥐는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아 기를 때까지 이어가는 책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저희 아이가 다시 어른이 되어 저희 아이를 낳을 때에도 물려주는 책임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 나는 자연보호구역 바로 옆에 살면서 주변의 숲에서 들려오는 온갖 소리와 졸졸졸 시냇물 흐르는 소리와 다람쥐들의 합창 소리에 매료되었다. 특히 다람쥐들의 합창 소리는 이야기를 부드럽게 만들려면 동물들의 소리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상상력과 함께 서사를 끌어가는 그림들을 그릴 수 있게 해 주었다 ..  (그린이 말)


 스물한 달을 살아낸 우리 아이한테는 《사자와 생쥐》가 아직 재미난 이야기책이 되기는 힘듭니다. 아이 스스로 가만히 들여다볼 때가 있고, 엄마나 아빠가 아이 한손을 쥐어 손가락으로 여기저기 가리키면서 “생쥐!” “사자!” “밧줄!” “꽃!” “나무!” “새끼 쥐!” 하면 하나하나 알아듣습니다만, 이 그림책을 자주 펼쳐 주지는 않습니다. 아이 또한 스스로 이 그림책을 펼치는 일은 드뭅니다. 다만, 사자나 생쥐 꼬리를 가리키며 “꼬리!”라 할 때에는 잘 알아듣고, 요 며칠 사이 아이한테는 ‘꼬리’라는 낱말이 재미있는지 이 낱말을 곧잘 읊습니다.

 아이가 제 삶터에서 사자나 생쥐를 만나기란 힘들고, 나중에 시골에서 살아간다 할지라도 쥐 한 마리 만나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그 흔하던 쥐마저 요즈음은 퍽 드문 목숨으로 바뀌었습니다. 귀엽다며 따로 키우는 몇 가지 개나 고양이를 빼놓고 여느 짐승을 도시나 시골 삶터에서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좋은 생태환경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를 넉넉히 나눌 만하지 않고, 우리 자연 벗님을 살가이 담은 그림책이라 할지라도 자연 벗님 살림살이와 한살이를 꾸밈없이 헤아릴 만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러한 도시 물질만능 문명 사회인 탓에 지식을 다루는 이야기책과 그림책만 넘치는지 모릅니다. 사람 또한 자연임을 느끼지 않는 사회인 까닭에 자연을 옳고 바르게 풀어내는 이야기책과 그림책이 제대로 사랑받기 힘드는지 모릅니다. 어른책뿐 아니라 어린이책에서까지 처세를 다루고 경영을 밝히고 돈벌이를 말해야 팔립니다. 아름다운 삶과 착한 사람과 참된 넋을 다루거나 밝히거나 말하는 책인 시시하거나 지루하다고 여깁니다.

 애 엄마와 애 아빠가 이야기를 그때그때 새로 짜내어 읽어 줄 그림책 《사자와 생쥐》란 오늘 우리 나라에서 어떻게 읽힐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이가 어릴 때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서 그때그때 늘 새롭게 읽어야 할 그림책 《사자와 생쥐》란 오늘 우리 나라에서 얼마나 읽힐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 2020년이 되고 2030년이 되어도 제리 핑크니 님 《사자와 생쥐》는 고이 목숨을 이을 수 있을는지, 우리 나라에서 이 그림책 넋을 깊이 되새기며 우리 땅과 사람한테 발맞춘 새로운 그림책 하나 그릴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4343.4.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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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야 놀자 비룡소의 그림동화 204
이수지 지음 / 비룡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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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쁜 그림책과 예쁜 마음결
 [그림책이 좋다 77] 이수지, 《파도야 놀자》



- 책이름 : 파도야 놀자
- 그림 : 이수지
- 펴낸곳 : 비룡소 (2009.5.22.)
- 책값 : 9500원


 (1) 예쁜 그림책 또는 예쁜 책이란


 예쁜 그림책을 펼쳐 읽는다고 내 마음이 예뻐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내 삶을 어여삐 보듬고 싶기 때문에 저절로 예쁜 그림책에 손이 가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떤 그림결을 놓고 예쁘다 할 만하고, 어떤 줄거리를 펼치는 그림책을 두고 예쁜 그림책이라 할 만할까요.

 예쁜 사람을 만나거나 마주한다고 내 삶이 예뻐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내 눈과 마음을 어여삐 어루만지고 싶기 때문에 시나브로 예쁜 사람하고 가까워지고자 바라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을 놓고 예쁘다 할 만하고, 어떤 마음밭 일구는 사람을 두고 예쁜 사람이라 할 만할까요.

 스물한 달째 접어들고 있는 딸아이는 ‘이쁜’ 짓을 자주 합니다. 잘 쥐기는 해도 잘 집지는 못하는 젓가락질로 온 방바닥을 어지럽히면서 밥을 먹는 모습부터 이쁩니다. 마시지도 않는 물이면서 물잔을 들고 걷다가 뚝뚝 흘리더니 와락 쏟아 놓고는 모르는 척하다가 엄마나 아빠가 이를 눈치채면 손가락으로 물 흘린 자리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 또한 이쁩니다. 걸레를 가지고 오면 저 스스로 닦겠다며 엉덩이를 하늘로 들고 자그마한 손으로 영차영차 비비는 꼴이 이쁩니다. 아이 코를 흥흥 해 주고 손과 얼굴을 닦아 주는 손수건인데 아이한테는 꼭 걸맞는 걸레 크기라, 아이는 제 손수건으로 벽을 닦는 시늉을 합니다. 방마다 벽에는 아이가 색연필과 볼펜으로 끄적여 놓은 줄그림이 가득합니다. 빨래하는 아빠 곁에서 말끄러미 지켜보다가는 저도 빨래를 해 보겠다고 쑤석거리며 헤집어 놓는 모양이란 더없이 이쁩니다. 바쁘고 고단하고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라 할 때에는 집일에 걸리적거리는 아이라 여길 수 있으나, 바쁘고 고단하고 괴롭고 슬픈 하루하루임에도 생각을 살며시 달리 품는다면 얼마든지 귀엽고 아름다운 아이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먹고살겠다며 밥숟가락 들고 다니는 품이라든지, 이제 좀 배가 불렀다며 더 안 먹겠다고 고개를 팩팩 돌리는 품이라든지, 아이는 아이다운 모습으로 하루하루를 살아냅니다. 어른들마냥 돈 걱정에 뭔 근심에 갖은 끌탕으로 골머리를 앓지 않습니다. 밥과 놀이와 사랑과 잠과 동무와 따순 품이면 넉넉한 삶입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밥과 놀이와 사랑과 잠과 동무와 따순 품이면 넉넉한 삶이지 않을까요. 더 많은 돈이나 더 보람찬 일이나 더 거룩한 이름이나 더 멋진 자동차나 더 넓은 아파트가 굳이 있지 않아도 넉넉하고 고운 삶이지 않을까요. 우리들은 어른이 되어 가면서 스스로 예쁜 삶을 저버리고 있지 않나요. 어쩌면 오늘날은 어린이일 때부터 스스로 예쁜 삶을 마주할 겨를이 없고, 예쁜 삶을 마주하지 못한 채 시험공부와 지식쌓기에 얽매이면서 푸름이를 거쳐 대학생을 지나 사회인이 되고 나면 멋없고 맛없고 재미없고 신바람 없는 맹숭맹숭 철까지 없는 어른으로 나뒹굴고 말지는 않는지요.

 곰곰이 돌아봅니다. 2008년보다 2009년에 좋은 어린이책이 훨씬 많이 나왔고 더 많이 팔려서 읽혔으며 훨씬 많은 사람이 좋은 어린이책 만들겠다며 책마을로 들어옵니다. 2009년보다 2010년에 좋은 어린이책이 더더욱 많이 나왔고 더 많이 팔려서 읽히며 더더욱 많은 사람이 좋은 어린이책 만들겠다며 책마을로 뛰어듭니다. 2007년을 헤아리고 2006년을 돌아보며 2005년을 곱씹으면, 해마다 좋은 어린이책은 끝없이 늘어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이 숱한 좋은 어린이책을 품에 안으면서 좋은 넋을 키우는 어린이는 뜻밖에 자꾸자꾸 줄어드는구나 싶습니다. 좋은 얼을 북돋우는 푸름이는 나날이 줄어들고, 좋은 마음을 건사하는 젊은이는 하루하루 스러지며, 좋은 꿈을 꽃피우려는 어른은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는구나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좋은 어린이책이란 어린이한테만 좋은 책이 아닙니다. 어린이와 어른 모두한테 좋을 때에 좋은 어린이책이라고 합니다. 훌륭한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두루 훌륭하게 곱새기면서 반가이 곰삭일 수 있는 책입니다. 권정생 할아버지 《하느님의 눈물》이라는 어린이책은 사람이 무엇을 먹으며 살아야 하는가를 놓고 가장 깊고 넓은 생각밭을 일깨웁니다. 고기도 풀도 불쌍하고 가슴아파 못 먹겠다고 하는 토끼는 바람과 이슬만 마시면서 살아가고 싶다며 눈물을 흘리고, 토끼가 흘리는 눈물 실린 울음을 듣던 하느님은 아무 말을 못하고 토끼와 함께 눈물을 흘리는 짧은 이야기 담긴 《하느님의 눈물》입니다.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육식이든 채식이든) 모두 다른 목숨을 먹는 일이요, 우리들 사람은 누구나 제 목숨을 잇자면 다른 이 목숨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나 스스로 ‘풀 먹는 사람입니다(채식주의자입니다)’ 하고 밝히더라도 좋은 이웃집에서 고기 반찬 차려 애써 대접해 주면 고맙게 받아먹을밖에 없습니다. 아무 티를 내지 않고. 왜냐하면 밥 한 그릇에 담긴 땀과 품과 사랑과 믿음이 있거든요. 푸성귀를 길러 먹는다고 목숨을 먹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돼지를 잡고 닭을 잡고 소를 잡을 때에만 불쌍하고, 개를 잡고 염소를 잡고 오리를 잡을 때에만 가여우며, 냉이를 캐고 쑥을 뜯고 두릅을 자를 때에는 불쌍하지 않는데다가, 벼를 베고 콩을 털고 밀을 빻을 때에는 가엾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밥을 먹고 옷을 깁고 집을 짓는 모든 일은 자연한테서 선물을 받는 삶입니다. 옛사람들은 예부터 자연한테서 얻은 선물이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돌보면서 당신들이 숨을 거둘 때에 조용히 자연으로 돌아갔습니다. ‘개화기’라는 이름으로 갖은 공장이 들어차며 우리 스스로 이 땅과 마을과 삶터와 사람 모두를 더럽히기 앞서, 사람 삶이란 언제나 되돌림이고 되살림이고 되풀이였습니다. 이렇다 하여 머나먼 옛날로 돌아가자는 소리가 아니라,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바탕과 밑마음을 고이 깨닫고 가누면서, 저마다 아름답고 알차게 삶을 일구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나 스스로 맑은 넋을 붙잡고, 나 스스로 고운 뜻을 이으며, 나 스스로 예쁜 삶을 가꾸어야 좋다는 소리입니다.

 예쁜 그림책 하나란 나 스스로 내 삶을 어여삐 붙잡고 잇고 가꿀 때에 비로소 태어납니다. 무슨무슨 일류 대학을 나온다든지 어디어디 나라밖에서 그림 공부를 했다든지 해야 예쁜 그림책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어떤어떤 상을 받았다거나 얼마얼마 많이 팔리는 그림책이라 해서 더 예쁜 그림책이 되지 않아요. 열다섯 살 나이에 그렸다고 모자란 그림책이 아니요, 예순다섯 살 나이에 그렸다고 훌륭한 그림책이 아닙니다. 내 삶에 담는 마음그릇에 따라 예쁘냐 예쁘지 않느냐가 갈리는 책 하나입니다. 내 삶에 바치는 땀과 눈물과 손길과 다리품에 따라 예쁜지 안 예쁜지가 나뉘는 책 하나입니다.









 


 (2) 예쁜 마음결로 노래하는 그림책


 그림책 《파도야 놀자》를 넘깁니다. 애 아빠는 설렁설렁 지나쳤으나 애 엄마는 그림이 예쁘고 시원하다면서 찬찬히 펼칩니다. 애 엄마 말에 애 아빠는 그림을 눈여겨봅니다. 애 아빠가 《파도야 놀자》를 사자고 말합니다. 애 엄마는 어느새 다른 그림책들을 구경하더니 똑같은 책값이라면 이 그림책 말고 다른 그림책을 사겠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합니다. 애 아빠는 이 그림책도 사고 다른 그림책도 사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집으로 돌아와 《파도야 놀자》를 여러 차례 되넘기고, 아이 앞에서 넘기며, 그린이 누리집에 들어가 이모저모 들여다봅니다.

 조용히 일렁이던 파란 물결이 차츰차츰 길어지거나 커지면서 아이하고 술래잡기를 하는 듯 오락가락합니다. 괭이갈매기 다섯 마리는 어린 계집아이 뒤와 둘레에서 걷다가 날다가 하면서 아이와 나란히 파란 물결하고 놉니다. 괭이갈매기는 갑자기 불어난 파란 물결을 깨닫고는 높이높이 날고, 어린 계집아이는 이를 눈치채지 못하다가는 와락 물벼락을 맞습니다. 그런데 물벼락을 맞고 보니 어지러이 핑핑 돌기는 하면서도 아이 둘레에 쏟아진 불가사리며 조개이며 갖가지 바닷것이 널립니다. 물결에 휩쓸려 아이한테 다가온 바닷내음입니다.

 《파도야 놀자》를 그린 이수지 님은 당신 아이한테 이 그림책을 바친다고 밝힙니다. 그런데 “나의 아기, 산에게”라 적어 놓습니다. “우리 아기, 산한테”나 “아기, 산한테”라 적지 못하는군요.

 군말이 없이 예쁘장하게 그리고 꾸민 책은 하양과 파랑과 검정이 알맞게 어우러지면서 시원한 맛과 넉넉한 멋을 풍깁니다. 온갖 군더더기가 많은 창작 그림책이 판치고, 지나친 지식과 정보에 허덕이는 자연생태 그림책이 넘치는 오늘 우리네 어린이책 터전을 돌아보노라면 《파도야 놀자》는 더없이 깔끔하고 홀가분한 그림책입니다. 옐라 마리 님이 빚은 《나무》처럼, 가브리엘 벵상 님이 이룬 《꼬마 인형》이나 《어느 개 이야기(떠돌이개)》처럼, 《파도야 놀자》는 그림책 하나로 사람들 가슴에 얼마나 짙고 넉넉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가를 알뜰히 보여줍니다.

 좋은 그림책이란 한 번 보며 좋다고 느낄 책이 아닙니다. 좋은 그림책이란 수백 번 볼 만한 그림책 또한 아닙니다. 좋은 그림책이라고 할 만한 책이라면 수백 수천 번을 볼 때마다 새삼스럽게 좋고 새롭도록 반가운 책입니다. 《파도야 놀자》는 여러 차례 되넘기며 들여다볼 만한 그림책입니다. 군더더기없는 그림책임에도 여러 차례 되넘길 때마다 곳곳에 조용히 깃든 또다른 모습에 눈길이 머무는 그림책입니다. 다만, 이 그림책을 백 번쯤 넘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면, 천 번쯤 되넘길 수 있을까 하고 헤아린다면, 글쎄 하는 말이 나옵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이수지 님은 당신 아이한테 이 그림책을 바친다고 책머리에 밝힙니다. 나라 안팎 좋은 그림책을 일군 숱한 분들은 하나같이 ‘당신 아이’ 또는 ‘마을 아이’ 또는 ‘이웃 아이’한테 바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그리곤 합니다. 글책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아이한테 바친다고 밝힌다든지, 참으로 아이한테 바치는 책이라 할지라도 늘 곱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지는 않습니다. 그림책 하나가 좋으면서 곱고 아름다운 가운데 훌륭하려면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를 샘솟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날마다 먹는 밥과 같은 이야기로 엮을 수 있어야 합니다. 날마다 먹지만 물리거나 질리는 느낌이 들지 않는 밥처럼, 날마다 새로 지은 밥이 날마다 새로운 맛이요 날마다 군침도는 맛이요 날마다 싱그러운 맛이듯, 좋은 그림책 하나로 자리잡자면 날마다 되넘기면서 날마다 기쁠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지난 삶을 돌아보았을 때, 아이를 키우지 않던 나날이었다면, 또는 혼인을 해서 옆지기하고 어우러지는 나날이 아니었다면, 이때에는 《파도야 놀자》를 넘기면서 이처럼 어여쁘고 멋지고 시원시원한 그림책이 또 있을까 하고 생각했으리라 봅니다. 아무래도 삶을 바라보는 눈길이 얕고 좁을 때에는 책을 바라보는 눈길 또한 더 깊거나 넓기란 어렵습니다. 누구나 제 삶에 따라 온누리를 살피고 사람을 마주하며 책을 쥐어듭니다. 스스로 훌륭한 사람이지 않고서는 훌륭한 책에 깃든 훌륭한 얼을 읽어내지 못할 뿐 아니라, 훌륭한 얼을 받아들여 스스로 훌륭한 삶으로 거듭나고자 힘쓰지 못합니다. 어줍잖은 쥐대기인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늘 어줍잖음을 느끼면서 책 하나 얼마나 제대로 읽어내는가를 돌아봅니다. 책 하나 얼마나 제대로 읽어내는가를 돌아보면서 내 삶을 나 스스로 얼마나 제대로 꾸리는가를 돌아봅니다.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하루를 보내는 동안 아이한테 같은 책을 수없이 되풀이하여 ‘다 다른 목소리와 모습’으로 읽어 주기 마련입니다. 아이가 좋아하는 책일 때에는 수백 번이 아닌 수천 번을 소리내어 읽어 주고 어버이가 아이와 함께 책에 젖어들기 마련입니다. 같은 책 하나를 수십 번이 아닌 수백 수천 번을 함께 읽다 보면, 이 책 하나를 어떤 마음결과 품과 뜻으로 이루어 냈는가를 저절로 깨닫습니다. 그림이 예쁘장하다 하여도 ‘앞으로 더 보여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느낀다든지, 줄거리가 재미있거나 괜찮다 하여도 ‘이 책에 담긴 삶이 영 올바르지 않네’ 하고 느낍니다. 1986년을 마지막으로 다시 나오지 못하는 《리타와 자전거》라는 그림책이 있습니다. 애 아빠가 몹시 좋아하는 책이면서 아이 또한 퍽 좋아하는 책이라 거의 날마다 이 그림책을 다시 펼치고 또 펼치곤 하는데, 벌써 몇 백 번을 넘기지만 질리는 날이 없고 지루한 날이 없습니다. 아이들이 저희 또래 동무나 손위 손아래 동무하고 어울리는 나날을 살가이 보듬는 한편,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 삶자락이 곱게 엮이어 있기 때문입니다.

 애 아빠는 《리타와 자전거》를 자꾸자꾸 되읽으면서 아름다운 책 하나를 돌아봅니다. 애 엄마는 두툼한 《모비딕》을 여러 번 되읽으면서 좋은 책 하나를 생각합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이란 어디에 어떻게 나 있는가를 살펴보고,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는 길이란 누구와 어떻게 어깨동무하거나 손잡고 걷는가를 살핍니다.

 《파도야 놀자》는 틀림없이 예쁘장한 그림책입니다. 시원시원하고 아기자기한 그림책입니다. 앙증맞기도 한 그림책이요, 재미난 그림책입니다. 상큼하고 밝은 그림책입니다. 보기에 괜찮고 귀여운 그림책입니다. 다만 ‘좋은’이라는 꾸밈말을 붙여 ‘좋은 그림책’이라고는 말하기 쉽지 않습니다. 흐뭇한 그림책이거나 아름다운 그림책이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신나는 그림책이요 즐거운 그림책입니다만, 고운 그림책이라는 말은 삼가렵니다.

 그러나, 그림책 이루어 낸 분은 이제 서른일곱 나이인 만큼, 앞으로 마흔일곱이 되고 쉰일곱이 되면 그동안 못 보고 못 느끼고 못 생각하고 못 살고 못 어루만지고 못 부대끼고 못 받아들이고 못 찾았던 이야기와 삶을 새록새록 찾아내면서 알뜰살뜰 푸근하게 여밀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이 그림책 하나가 그린이 한 사람 모든 땀방울을 못박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모든 책은 똑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데, 이 책 하나로 이 책을 쓰거나 낸 사람 눈높이를 말하지 않습니다. 이 책 하나를 마무르는 동안 이만큼 이이 삶이 다시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려줍니다. 이 책 하나를 이쯤에서 마무르고 이제부터 또다른 삶을 일구면서 하루하루 새롭게 배워 나간 다음, 앞으로는 또다시 새로 태어나는 삶을 새로운 책에 담는다는 실마리를 보여줍니다.

 책을 덮고 책꽂이로 옮겨 놓습니다. 제가 장만한 책은 2009년 12월에 3쇄를 찍은 판입니다. 2009년 5월에 1쇄를 찍었으니 제법 사랑받는 그림책입니다. 그런데 이 그림책은 제본이 영 잘못되었습니다. 애써 시원시원 그린 그림을 잘못된 제본이 잡아먹어 버립니다. 1쇄가 이렇다면 미처 못 보고 지나쳐서 그렇다 칠 수 있습니다만, 2쇄도 아닌 3쇄 책이 이렇게 제본이 잘못되었다니요. 이수지 님 그림책 《파도야 놀자》는 가운데가 잡아먹히지 않게끔 실묶음을 제대로 하여 좍 펼쳐지도록 하든지, 아니면 그림을 통으로 더 길게 한쪽으로 오롯이 드러나도록 만들든지 해야 제맛과 제멋을 살립니다. 예쁜 그림책 하나를 어설픈 제본 때문에 망가뜨리는 끔찍한 잘못을 비룡소 같은 이름있고 큰 출판사에서 저지르지 않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4쇄와 5쇄에서는 반드시 제본을 바로잡아야 할 터이며, 이 책을 장만한 사람들한테 고개숙여 뉘우치면서 앞으로는 그림책 제본에 더욱 깊이 마음을 쏟아야 할 줄 압니다. (4343.4.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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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소년한길 유년동화 6
도이 카야 글 그림, 김정화 옮김 / 한길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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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그림책에는 참사랑을 담습니다
 [그림책이 좋다 76] 도이 카야,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책이름 :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
- 글ㆍ그림 : 도이 카야
- 옮긴이 : 김정화
- 펴낸곳 : 소년한길 (2002.6.10.)
- 책값 : 6500원



 (1)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른


 온누리에 나오는 모든 책이 모두 아름답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돈을 바라면서 만든 책이 있다고 느끼고, 나날이 돈을 바라보는 책이 차츰 늘어난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돈바라기 책이라 하더라도 책은 책입니다. 다만 책다운 책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엠에스지를 넣었느냐 안 넣었느냐를 놓고 아웅다웅이지만, 이에 앞서 유전자를 건드린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항생제와 비료와 풀약을 얼마나 먹고 자란 곡식으로 만들었느냐에다가, 화학첨가물이 얼마나 깃들었느냐를 돌아본다면, 오늘날 우리가 손쉽게 사다 먹는 밥거리 가운데 밥거리다운 밥거리란 없다고 할 만하다는 흐름하고 맞닿습니다.

 아주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가 있습니다. 며칠 앞서 우리 세 식구가 서울에서 인천까지 자동차를 얻어타고 돌아온 적 있습니다. 생태와 진보를 바라는 분들 자그마한 모임자리에서 우리 옆지기가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해서 찾아갔다가 전철이 끊길 무렵이 된 탓에, 인천(부개동)에서 자동차를 몰고 온 분이 우리 식구를 집 언저리까지 자동차로 태워 주었습니다. 더없이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세 식구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돌아오는 찻길에서 배탈이 났습니다. 전철을 탈 때에는 사람들한테 찡기고 낑기며 힘들기는 하여도 속이 메슥거리지 않는데, 자동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릴 때에는 숨조차 쉬기 어려워 어지러웠습니다. 아이는 집에 닿고 보니 차에서 똥을 싸서 기저귀를 적셨고, 옆지기는 이튿날까지 축 늘어진 채 쓰러져 지냈습니다. 저라고 몸이 나을 구석이 없으나, 집살림을 하느니 바깥일을 하느니 하면서 아픈 몸을 겨우 붙들어 세웠습니다. 가끔 자동차를 얻어탈 때마다 고맙다는 마음이지만, 고마운 한편 제발 10분 넘게 달리지 않는 얻어타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쩐지 자동차를 타고 움직이면 몸이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아마 오늘날 사람들치고 자동차를 타며 멀미를 하거나 배탈이 나거나 머리가 어지러울 사람은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저는 어릴 때부터 고속버스를 타지 못했고, 이제는 고속버스를 타지만 한 번 타고 나면 며칠 몸앓이를 할 뿐더러, 택시이든 고급자가용이든 작은자가용이든 자동차라는 탈거리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듭니다. 꽤 많은 짐을 한꺼번에 멀리까지 제법 빨리 옮겨 주는 자동차라 하지만, 제 몸과 삶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제 몸에 잘 안 맞기 때문에 되도록 바깥에서는 밥을 사먹고 싶지 않습니다. 제 몸에 거의 안 맞기 때문에 자동차를 얻어타기조차 싫고 자가용을 장만하기는 죽기보다 싫고 끔찍하다고 여깁니다. 빨래기계를 쓰면 손일을 덜고 다른 일을 할 겨를을 넉넉히 낸다고 합니다만, 저로서는 손빨래를 하는 기쁨과 보람을 놓치고 싶지 않을 뿐더러 손빨래를 하는 동안 옷을 한결 아끼면서 나중에 ‘빨래기계가 낡아서 버려야 할 때에 쓰레기를 만드는 짓’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게다가 빨래기계를 쓰면 전기와 물을 얼마나 많이 잡아먹는데요. 전기를 아예 안 쓰고 물은 훨씬 적게 쓰면서 우리 식구 옷가지를 좀더 사랑하고 아끼는 손빨래는 제가 두 눈을 감고 죽는 날까지 이어갈 생각입니다.

 이리하여 이런 삶이 고스란히 제 책읽기로 이어집니다. 손을 쓰고 몸을 놀리며 땅하고 가까이 맞닿고픈 삶이 제가 좋아하는 책을 찾는 눈길로 옮아갑니다. 몸이 제아무리 도시에 깃들어 있다 할지라도 땅을 사랑하는 넋이 스민 책이 좋습니다. 산골마을에서 일을 할 때에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을 사랑하는 얼이 깃든 책이 좋았고, 골목동네 자그마한 가난뱅이 집에 살면서도 산과 들과 땅과 바다와 하늘에다가 꽃과 나무와 풀을 사랑하고 아끼는 책이 반갑습니다.

 아이를 옆지기와 함께 키우면서 옆지기나 저나 ‘서로서로 좋아하는 책’을 따로 읽을 틈이 거의 없습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이든 보육원에든 보내지 않고 집에서 돌보기 때문에 하루 내내 아이하고 붙어 지내야 하니까요. 우리는 돈을 내고 아이를 또래 동무하고 억지로 사귀도록 내몰지 못합니다. 돈이 없는 탓도 있다지만, 돈이 있었다고 해도 아이를 굳이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에 안 넣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아이키우기란 얼마나 즐겁고 신나고 아름답고 멋진데요. 다만, 참말 힘들고 고되고 괴롭고 벅찹니다. 즐거우면서 힘들고, 신나면서 고되며, 아름다우며 괴롭고, 멋지며 벅찹니다.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옆지기는 퍽 자주 “아주 좋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따로 말로 나타낼 줄을 모르지만 “아이가 고맙다”고 생각합니다. 아이를 돌보면서 ‘아빠가 좋아한다는 책이라 하지만, 정작 더 깊이 파고들어 보면 우리 아이 바로 너를 돌보면 다 알 수 있는 지식과 생각이 담긴 책이니, 굳이 이런저런 책을 읽기보다 바로 너하고 어울리면 아빠가 몸으로 깨우치고 받아들이고 곰삭일 수 있음’을 배우곤 합니다. 아이를 안고 어르며 팔이 빠지거나 허리가 쑤시는 가운데, 날마다 치워도 끝이 없을 뿐더러 나날이 아이 옷가지 빨래가 넘쳐나는 이 모든 고단함이 곧바로 아이키우기에서 얻는 보람이 됩니다.

 예전에 혼자 살 때에도 아이들 그림책을 참으로 신나게 사들이며 혼자서 즐겁게 보았고, 오늘날 세 식구 살아가며 아이들 그림책을 그지없이 반가이 장만하며 세 식구 나란히 봅니다. 지난날에 아이들 그림책을 신나게 사들이던 때에는 아이들 그림책이란 아이들만 보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부터 보고 어른들이 ‘꼭’ 함께 보면서 ‘아이보다 더 깊고 넓게’ 배우고 익히고 사랑할 책이라고 느꼈고, 오늘날 세 식구 복닥이며 아이들 그림책을 펼칠 때에는 ‘아이가 재미있어 하는 책과 아이가 쳐다보지 않는 책이 갈리는구나. 왜 갈릴까?’ 하고 돌아보면서, 아이가 콧방귀조차 잘 안 뀌는 책에는 아이가 이렇게 고개를 돌릴 만한 까닭이 있음을 차츰차츰 깨닫습니다. 그림만 이쁘장하다고 아이가 좋아하지 않으며, 그림이 엉성해 보인다 할지라도 그림 하나하나에 너른 사랑이 담겼을 때에는 아이는 어김없이 알아챕니다. 그림이 알록달록하더라도 아이가 달가이 받아들이지만 않으며, 그림이 수수하다 할지라도 그림마다 깊은 마음이 스몄을 때에는 아이는 아주 좋아하고 자주 펼쳐 봅니다. 처음에는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나중에는 앙증맞은 손으로 그림책을 끄집어 내서 아빠나 엄마 앞에 집어던졌고, 조금 더 큰 뒤에는 아빠나 엄마 무릎에 그림책을 들고 털썩 주저앉아 얼른 펼쳐 달라고 옹알거리고, 이제는 혼자 책을 펼쳐서 한참 들여다보곤 하며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되풀이 넘기곤 합니다.

 제가 아이를 낳아 기르지 않았더라도 ‘아이들이 좋아할 만하며 아이한테 참으로 좋은 그림책’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었다고 느낍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그동안 제가 장만한 그림책들은 거의 다 우리 아이 또한 퍽 좋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몸소 아이를 낳아 기르며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다른 아이를 바라볼 때’보다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눈길이 있습니다. 아니, 제가 몸소 아이를 낳아 길렀기 때문이라기보다 하루 내내 벌써 스무 달째 함께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아니, 스무 달째 아이와 하루 내내 붙어 지냈다기보다 스무 달째 아이하고 얽힌 모든 일을 엄마랑 아빠랑 모두 손으로 보듬고 몸으로 부대끼면서 마음으로 사귀어 온 나날이었기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어린이책을 어린이만 보도록 하는 책이 아니라 엄마 아빠 된 사람을 비롯하여 초중고등학교 교사와 대학 교수뿐 아니라 모든 어른이 함께 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지난날 이원수 님과 이오덕 님부터 줄곧 외친 까닭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어린이책이란 책 하나로 어린이와 어른을 잇는 좋은 다리이거든요. 아름다운 고리이거든요. 멋진 놀잇감이거든요. 훌륭한 배움터이거든요. 넉넉한 보금자리이거든요. 재미난 이야기보따리이거든요. 사랑스러운 손길이거든요.

 어른책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린이책을 돈바라기 눈길과 몸짓으로 만드는 어른들을 마주할 때에는 몹시 싫습니다. 몹시 딱합니다. 몹시 슬픕니다. 어린이책이란 돈이 아닌 사랑으로 빚을 책이고, 어린이책부터 사랑으로 빚는 매무새를 갈고닦아야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크면서 어른이 되어 어른책을 빚을 때에도 돈바라기 어른책이 아닌 사랑바라기 어른책을 일굴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그림과 뜻만 좋은 어린이책을 넘어


 그림책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는 어린 오누이가 목도리를 놓고 다툼질을 하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오누이한테 뜨개 목도리를 선물해 준 할머니가 슬기로운 생각을 짜내어 서로를 더욱 애틋하게 묶어 준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습니다. 부드럽고 고운 그림결에 따라 재미나고 살가운 이야기를 펼치는 좋은 어린이책입니다. 노란빛 목도리는 노란빛대로 어여쁘고 빨간빛 목도리는 빨간빛대로 어여쁘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코앞에 마주하는 좀더 나아 보이는 빛깔에 끌리면서 시샘을 하기도 하고, 이런 시샘을 다스리며 한결 사랑스러운 길로 나아가자면 어떻게 해야 좋을까를 차근차근 풀어 보입니다.


.. 치프와 초코는 강아지 오누이입니다. 오늘 할머니께서 선물을 보내 주셨어요. 오빠 치프에게는 노란 목도리를, 여동생 초코에게는 빨간 목도리를 보내셨습니다. 치프는 노란 목도리를 보고 좋아하며 말했어요. “이 목도리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달걀말이 색깔이야. 치프는 목도리를 목에 둘렀습니다. 초코는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가 더 멋져 보였어요. “나도 달걀말이 색깔 목도리가 좋아. 바꿔 줘, 바꿔 줘.” 엄마가 말했어요. “어머, 초코의 목도리는 빨갛고 귀여운 딸기 색인걸.” ..  (2∼4쪽)


 그림책이 되든 어린이책이 되든 어른문학책이 되든 마찬가지인데, 기나긴 말을 줄줄줄 늘어뜨리면서 이런 까닭 저런 까닭을 들 수 없습니다. 짤막한 한두 줄로 느낌과 생각과 삶과 모습을 보여줍니다. 《치프와 초코는 사이좋게 지내요》에서도 할머니가 뜨개 목도리를 선물한 이야기를 짤막히 보여주고, 동생이 빨간 목도리보다 노란 목도리를 더 좋아하지만, 엄마가 잘 달래 주는 모습을 단출하게 보여줍니다.

 그런데 첫 대목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이들한테나 엄마한테나(또 이 그림책에는 나오지 않는 아빠한테나) 큰 이야기 하나를 건너뛰었습니다. 할머니가 오누이한테 선물한 목도리는 할머니가 한 땀 두 땀 애써 뜨개질을 해서 일군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합니다. 돈 몇 푼으로 치른 목도리가 아니라, 할머니가 손자 손녀를 사랑하는 넋으로 애틋하게 뜬 목도리임을 느끼지 못해요. 엄마도 아이도 “할머니 고맙습니다.”라든지 “우와, 이 목도리를 손으로 떴다구요?” 하면서 좋아하는 모습이 비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첫 대목에서 이런 대목이 비치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두 오누이가 노란빛과 빨간빛을 보고 다툼질을 하겠다고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서로 시샘하며 다툼질을 하더라도 ‘할머니 사랑 손길’을 돌아보는 매무새를 한 줄쯤 살며시 밝힐 수 있었다면, 이 그림책은 더없이 따스하면서 아름다운 그림책이 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 초코는 다시 노란색 목도리가 갖고 싶어졌어요. “바꿔 줘, 바꿔 줘.” “싫어. 나도 노란색이 좋단 말이야.” 초코가 울기 시작했어요. 치프는 하는 수 없이 목도리를 바꿔 주었어요. 둘은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  (10∼11쪽)


 아이들은 둘이 저마다 받은 목도리에 얼마나 깊고 짙고 너른 사랑이 담겼는지를 먼저 찬찬히 살피면서 돌아볼 겨를이 없이 ‘할머니 댁에 찾아가 고맙다고 인사를 드리려’ 했기 때문에, 할머니 댁으로 찾아가면서도 끝없이 다툼질을 합니다. 더 좋아 보이는, 또는 더 좋은 물건을 오빠한테 주거나 동생한테 주면서 사이좋게 지내는 오누이가 아니라,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으니까 ‘내가 가져야겠어!’ 하는 마음만 부글거립니다.

 그림책에 나오는 이야기라지만, 왜 오누이이든 형제이든 자매이든 서로 사이좋게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되기 어려울까요. 아이들이 이런 마음을 타고났기 때문인가요. 우리 어른이 잘못 가르친 탓인가요.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른들 스스로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더 좋아 보이거나 더 좋은 것’을 스스럼없이 기꺼이 나누고 베푸는 마음이 없는 탓인가요.


.. 할머니네 집이 바로 눈앞이에요. 꽃밭에는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 있었습니다. 정말 예뻤습니다. 하지만 노란 꽃밭을 보니 치프는 걱정스러웠어요 ..  (16∼17쪽)


 오누이는 할머니 댁에 와서도 “할머니, 선물 고마웠어요!” 하는 인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오누이가 좋아한다는 땅콩빵을 먹으면서도 “할머니, 잘 먹겠습니다!” 하는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저 먹기에 바쁩니다. 선물을 받을 때에도 무슨 선물일까 궁금해 하며 열어 보기 바빴을 뿐이듯, 밥상머리에서도 “할머니도 와서 함께 먹어요!” 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두 오누이 목도리 실을 끌러 새로 뜰 때까지도 할머니를 부르지 않고 저희끼리만 놀았습니다.

 그림책 줄거리와 흐름과 끝맺음을 돌아보건대, 이렇게 철없는 오누이들 다툼질을 할머니가 잘 마무리지어서 다시금 사이좋은 오누이가 되었다고 ‘가르침’을 베푸는 얼거리라 할 수 있습니다만, 곰곰이 들여다보면 오누이부터 오누이를 기르는 아빠엄마 모두 옳게 살아간다고 하기 힘듭니다. 겉으로는 활짝 웃고 밝게 뛰노는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참된 사랑이나 믿음이나 나눔이란 귀퉁이 한 자락에도 깃들어 있지 않아요.

 내 밥그릇에만 눈길이 머뭅니다. 내 손아귀에만 눈썰미를 둡니다. 내 몸치레에만 눈높이를 맞춥니다. 슬픈 우리 삶이 어여쁜 그림책에 알게 모르게 배어 있습니다.


.. 치프와 초코는 할머니가 만든 땅콩 빵을 아주 좋아해요. 목도리 일은 까맣게 잊고 산처럼 쌓인 땅콩 빵을 먹기 시작했어요. 할머니는 아까 둘이 왜 울었는지 듣고는 좋은 생각을 해 냈습니다. 할머니는 둘의 목도리를 풀기 시작했습니다 ..  (20∼21쪽)


 문학책에서야 어찌어찌 다루어도 된다고 하지만, 뜨개질을 아무리 잘하는 분이라 하여도 목도리 둘을 후딱 뜰 수는 없는 노릇인데, 어찌 되었든 그림책에서는 아이들이 땅콩빵을 먹는 짧은 동안에 할머니가 목도리 둘을 ‘짠!’ 하고 만들어 냅니다. 아이들은 노랑과 빨강이 알록달록 어우러진 목도리를 새로 받아들고는 기뻐합니다. 이때에도 어김없이 할머니한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습니다. 그냥 주어지는 목도리요, 그냥 후딱 뜰 수 있는 목도리인 듯 여깁니다.

 예쁘장하고 부드러운 그림결이며 오누이가 이래저래 시샘하고 다툼질을 하다가도 잘 끝난다는 줄거리라 하지만, 가만히 되짚어 보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림책이라고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두 오누이를 불러 “얘들아, 이 목도리란 말이지, 할머니가 너희 오누이를 사랑하면서 한 땀 한 땀 떴단다. 노란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뜻과 사랑을 담고, 빨간 목도리에는 이런저런 넋과 믿음을 담았지.” 하면서 노란 목도리는 얼마나 노랗게 아름답고 빨간 목도리는 얼마나 빨갛게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할 수 없었나 싶어 아쉽기도 합니다. 또한, “할머니가 너희한테 노란 목도리와 빨간 목도리에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지 말도 안 하고 주어서 다투었구나. 할머니가 생각이 짧아서 미안하구나.” 하면서 할머니가 참다운 슬기를 뽐내는 얼거리로 뻗어나가지 못해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이만큼으로 마무리짓는 그림책이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이만큼으로 이루어 낸 그림책이어도 반갑습니다. 이만큼이나마 했어도 고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는 이만큼이나 돌아보거나 살필 겨를이 없이, 몹시 바빠맞도록 돈벌이에 매여 있는 탓입니다.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는 할머니를 기쁘게 맞이할 딸아들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손수 목도리를 떠서 선물하려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있겠습니까.

 아쉬운 우리 삶에 걸맞게 아쉬움이 가득 담긴 그림책이라 할 터이나, 아쉬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는 아쉬움을 느끼지 못하면서 예쁘고 곱고 재미나고 뜻있기까지 한 그림책으로 받아들이면서 즐기겠다고 봅니다.

 이 그림책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이 그림책에서 더 많은 이야기를 담으며 더 너른 따스함을 꽃피울 수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아무쪼록, 좋은 이야기감을 더 좋은 그림틀에 실어내면서 더 따사롭고 넉넉한 품으로 아이들과 어른들 모두를 껴안고 어루만지는 훌륭한 그림책을 새삼 기다리고 손꼽아 봅니다. (4343.3.29.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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