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홍? 분홍... 분홍! - 창작 이야기 곧은나무 그림책 1
나다니엘 호비 지음, 조슬린 호비 그림, 노은정 옮김 / 곧은나무(삼성출판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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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달래빛 함께 있어 아리따운 삶
 [즐기는 그림책 22] 나다니엘 호비(글)+조슬린 호비(그림), 《분홍? 분홍… 분홍!》(곧은나무,2005)


 미국에서는 《Priscilla and the Pink planet》이라는 이름으로 나왔던 그림책 《분홍? 분홍… 분홍!》을 읽습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이 그림책을 펼치면, 아이는 제가 아는 뭔가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한 마디씩 합니다. “와, 나비다.” “여기도 나비야.” 그러다가는 “꼬옷, 꽃, 꼬시야.” 합니다. 아이 아빠가 혀가 짧아 ‘꼬치야’라 말하지 못하는 바람에 아이는 이 소리를 그대로 따라합니다. 이럴 때 아이 엄마가 곁에 있으면 아이 아빠가 또 말을 잘못한다며 나무랍니다.

 아이는 마당이나 숲이나 산이나 논밭에서 한들거리는 나비를 보면서도 나비인 줄 알아보고, 《분홍? 분홍… 분홍!》에 나오는 나비를 보면서도 나비라고 알아봅니다. 들판에서 보는 나비라든지 그림책에서 보는 나비는 다 다릅니다. 생김새가 다르고 크기가 다릅니다. 그렇지만 아이는 모두 나비임을 알아차립니다. 꽃을 볼 때에도 그래요. 노란꽃이든 하얀꽃이든 빨간꽃이든 파란꽃이든 분홍꽃이든 모두 꽃임을 잘 알아보아요. 그러니까 이 땅 이 터전에는 한 가지 빛깔 나비나 꽃만 있지 않음을 압니다. 이 누리 이 나라에는 한 가지 얼굴 사람만 있지 않음 또한 잘 압니다.


.. 분홍 사과, 분홍 바나나에 분홍 오렌지! 자전거도 분홍, 구두 밑창의 고무도 분홍! 분홍 강물, 분홍 물고기, 분홍 유리, 그리고 분홍 하늘! 아무리 눈을 씻고 봐도 전부 분홍이에요. 빛깔 중에 분홍이 최고라는 사람도 있지요. 하지만 꼬마 아가씨 프리실라는 분홍이 지겨웠어요. 이제 분홍빛 죽은 단 한 숟가락도 먹고 싶지 않았어요. 온통 분홍뿐인 물건들도 더 이상 보기 싫어져서 창고에 넣어 버렸답니다 ..  (5∼6쪽)


 온통 분홍빛이기만 별나라에서 살아가는 프리실라는 어디에서나 무엇에서나 분홍이기만 한 모습이 싫습니다. 보기 싫고 견디기 싫으며 살아내기 힘듭니다. 이리하여 프리실라는 먼 길을 떠나기로 해요. “세상 어딘가에 꼭 하나는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빛깔을 찾아 힘차게 길을 떠(7쪽)”납니다. 어머니한테 말을 않고, 아버지한테 말을 않으며, 다른 살붙이나 동무나 선생님이나 어른한테까지 말을 하지 않고 홀로 꿋꿋하게 길을 나섭니다.

 어쩌면, 둘레 다른 사람들은 ‘분홍이기만 한 삶은 좋은데, 왜?’ 하면서 하나도 질려 하지 않을 뿐더러 싫어하지 않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모두들 ‘분홍이면 분홍이지, 뭘 어쩌라고?’ 하는 마음이라 프리실라로서는 마음을 활짝 열고 이야기를 나눌 동무가 없어서인지 몰라요. ‘분홍이든 까망이든 무슨 대수람? 바빠 죽겠는데 그런 데까지 어떻게 마음을 쓰나?’ 하니까 아예 아무하고도 말을 못 섞고 말아, 홀로 길을 나서기로 했는지 모르지요.

 혼자 길을 떠나는 프리실라는 외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허전해 보인다거나 힘들어 보이지조차 않아요. 프리실라로서는 새로운 삶을 찾고 싶거든요. 무엇이든 똑같은 틀에 맞추어 버리는 삶을 벗어던지고 싶거든요. 홀가분하고 싶으며, 꿈꾸고 싶은 프리실라입니다. 기쁘고 싶으며, 아름답고 싶은 프리실라예요. 틀에 박힌 삶에서는 스스로 즐거울 수 없으며 아름다울 수 없음을 느낀 프리실라입니다. ‘틀에 안 박힌 삶이 얼마나 아름다울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정작 ‘틀에 안 박힌 삶을 찾아내기는 했는데 조금도 아름답지 않아 슬플는’지 모르지만, 이러거나 저러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숨을 쉬지 못하도록 옥죄는 갑갑한 틀을 떨치고픈 프리실라입니다.


.. “절대로 안 돼!” 여왕은 부르르 화를 냈습니다. “아무리 예쁘게 봐 주려고 해도 그 나비는 너무 꼴사나워! 저렇게 알록달록하다니, 우아하지 못해! 뭐니뭐니 해도 분홍이 제일이야. 그래서 내가 이 별에 분홍 마법을 걸었지.” ..  (21쪽)


 지난밤, 내내 잠을 못 이루며, 또는 자꾸 잠에서 깨며 아빠 또한 잠을 못 자게 하던 아이가 오늘 아침 일찍 일어납니다. 아빠는 졸음이 가득한 몸으로 겨우겨우 아침 일을 붙잡으려 하는데, 아이는 벌써부터 아빠를 붙잡고 놀자 합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 그림책을 펼쳐 놓다가는 홍초를 따순 물에 타서 먹입니다. 달짝지근한 물을 마시니 아이가 몹시 조용합니다. 더 어릴 때에는 당근을 갈아서 주면 아주 조용하게 먹기만 했는데. 한 달 두 달 한 살 두 달 나이를 먹어 가며 이 아이는 이 아이 나름대로 좋아하는 길을 따라 무럭무럭 자라겠지요. 우리 집 아이는 우리 집에서 이렇게 살아내며 스스로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무언가를 가슴에 담는다면, 다른 집 아이는 다른 집에서 다르게 살아가며 저 깜냥껏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무언가를 마음에 두겠지요.

 둘레에서 아이를 키우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우리 집 아이만 한 아이들을 꽤 일찍부터 어린이집에 보냅니다. 아니, 첫돌조차 안 지난 갓난쟁이를 어린이집에 맡기는 분이 무척 많습니다. 우리 집에서는 엄마랑 아빠가 늘 집에서 아이랑 붙어 지내며 똥기저귀 빨고 오줌기저귀 갈며, 똥오줌 가리기를 시키려고 아침에 깨어나서 저녁에 잠들 때까지 기저귀를 채우지 않으며 지냈습니다. 첫돌이 지난 뒤부터 이렇게 하자니 그야말로 집안은 똥투성이에 지린내범벅이 되더군요. 그러나 이렇게 했기에 어버이는 손이 많이 가며 고단하지만, 아이는 즐겁고 튼튼히 기저귀를 (낮에는) 뗍니다. 스스로 오줌과 똥을 가려요.

 어린이집(또는 보육원)이라는 곳은 아이를 맡아 무언가를 가르치는 곳이라 합니다. 아마 영어도 가르치고 놀이도 가르치며 뭣도 뭣도 보여줄 테지요. 아빠랑 엄마 둘이 바깥일을 하며 ‘뜻과 꿈을 이루려’ 하는 집이라든지 ‘돈을 많이 벌어야’ 할 집에서는 마땅히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길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도 바쁘고 아빠도 바쁜 집에서는 당신들이 아이한테 사랑을 물려주지 못하거든요. 어린이한테는 무엇보다 사랑을 먹이고 사랑을 가르치며 사랑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똥오줌 가리기를 비롯해 말 배우기나 물건 다루기 모두 사랑으로 받아들이는 몸가짐입니다. 지식이 아닌 사랑으로.

 지난날 한 집안 식구가 꽤 많아, 집이 곧 어린이집이라 할 만하던 때에는 아주 마땅히 아이들을 어떤 시설에 넣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치원이든 초등학교이든 굳이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초등학교(국민학교/소학교)가 생긴 지는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거든요. 기껏 백 해쯤 된 일인데, 백 해쯤 되었다 해도 그무렵부터 학교에 아이를 넣은 집은 아주 드뭅니다. 왜냐하면 아이한테 무엇인가 가르치면서 튼튼하고 씩씩한 한 사람으로 서도록 하는 몫은 ‘다른 사람 손’이 아닌 ‘내 손’이나 ‘내 살붙이 손’이었으니까요. 저마다 다른 살림집에서 저마다 다른 살림살이에 따라 저마다 다른 삶으로 아이들한테 새 삶결을 불어넣었어요.


.. 프리실라는 초록 나무를 보고서 입이 딱 벌어졌어요. 정말 예뻤거든요. 보랏빛 꽃을 보고는 하도 기뻐서 다리까지 후들거렸답니다. 눈부시게 밝은 노란 해님! 파란 하늘! “어쩜! 세상이 정말 새롭게 보여!” 프리실라가 외쳤어요 ..  (26∼27쪽)


 프리실라는 분홍이 아닌 다른 빛깔을 찾으려고 길을 나서며 ‘도시 아닌 자연’에서 수많은 빛깔을 마주합니다. 프리실라는 제 손으로 제 빛을 찾았어요. 책을 읽다가 퍼뜩 궁금합니다. 프리실라가 자연이 아닌 도시에서 다른 빛깔을 찾으려 했다면? 프리실라가 도시에서 다른 빛깔을 찾았다면?

 오늘날 사람들 거의 모두 도시에서 살아가거나 도시에 몸을 기대어 살아갑니다. 시골이라 하더라도 참말 시골인 곳은 드뭅니다. 시골 읍내나 면내는 도시 모습을 닮아 가고, 작은 도시이든 큰 도시이든 ‘남다른 빛깔’을 찾아볼 수 없어요. 서울이 서울답거나 부산이 부산답거나 광주가 광주답지 않습니다. 모두 한 가지 빛깔로 물들어 갑니다. 어디이든 한 가지 빛깔에 갇히고 맙니다.

 자전거를 즐긴다는 사람들이 다 다른 모습과 다 다른 빠르기로 다 다른 삶결에 따라 자전거를 즐기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책을 즐긴다는 사람들이 다 다른 넋과 다 다른 슬기로 다 다른 사랑에 따라 다 다른 책을 즐기는 모습을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길을 찾아 다 다른 일거리를 빛내거나 다 다른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다 다른 삶결에 걸맞게 대학교나 고등학교나 중학교나 초등학교를 처음부터 안 다니면서 스스로 아름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만날 수 없이 됩니다.

 하늘에 높이 떠서 우리를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해님이 얼마나 아름다이 노란빛인가를 깨달을 요즈음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나뭇가지가 어떤 빛깔이요 나뭇잎은 어떤 빛깔인지 가만히 들여다보며 고운 내음을 맡는 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가을녘 골목동네나 시골 고샅에서 씩씩하게 자라난 맨드라미를 보며 어여쁘다 느끼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나한테 느끼려는 가슴이 있다면 “기뻐서 다리까지 후들거”릴 만큼 내 둘레 아름다운 삶을 얼싸안을 수 있습니다. 나한테 사랑스레 살아가고픈 빛줄기 하나 마음밭에 비추고 있다면, ‘진달래빛만 있는’ 누리가 아닌 ‘진달래빛이 함께 있는’ 누리가 그야말로 즐거우며 밝고 좋은 누리임을 알아채겠지요. 진달래빛이 함께 있어 참으로 아리따우며 신나는구나 하고 방실방실 웃으며 반기겠지요. (4343.11.3.물.ㅎㄲㅅㄱ)


― 분홍? 분홍… 분홍! (나다니엘 호비 글,조슬린 호비 그림,노은정 옮김,곧은나무 펴냄,2005.9.1./6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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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쟁이가 들려주는 물속 생물 이야기 - 여름철 둠벙에서 만난 곤충과 물풀 들의 한살이와 생태 철수와영희 그림책 2
노정임 글, 안경자 그림, 바람하늘지기, 김성수 감수 / 철수와영희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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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골에서 자연과 어우러지는 즐거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5] 바람하늘지기·노정임·안경자, 《소금쟁이가 들려주는 물속 생물 이야기》(철수와영희,2010)



 우리 집 살붙이는 이제 모두 넷입니다. 어른 둘에 아이 둘인데, 첫째 아이 동생은 어머니 몸속에서 무럭무럭 크고 있습니다. 여느 때에도 집살림은 ­‘살림 잘 못 꾸리는 아버지’가 도맡는데 둘째 아이가 새 누리에 새롭게 발을 디디면 하루하루 얼마나 빠듯하랴 싶습니다. 그러나 첫째 아이와 함께 살아가면서 늘 느끼지만 빠듯한 만큼 즐겁고, 고단한 만큼 보람이 있습니다. 지치는 만큼 신나며, 벅차는 만큼 재미있습니다.

 우리 집 깃든 멧자락에는 이오덕 선생님 뜻을 이어받아 살찌우고자 하는 자그마한 배움터가 있습니다. 이 배움터 이름은 이오덕자유학교입니다. 우리 살림집은 이오독자유학교랑 이웃입니다. 배움터 아이들은 밭에 씨앗을 심든 밭매기를 하든 거두기를 하든 우리 살림집 옆을 지나갑니다. 우리 살림집과 배움터 밭이랑 맞닿아 있어요. 이 때문에 부릉부릉 소리를 날마다 숱하게 듣고, 아이들 재잘거리는 소리를 함께 듣습니다. 아침나절에는 이오덕자유학교 아이들이 감 따러 간다고 나서며 살림집 옆에서 조잘거립니다. 첫째 아이는 어느새 이 조잘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신을 얼른 꿰어 신습니다. “언니야?” 하고 소리치며 마당으로 뛰어나갑니다. 어느덧 날씨가 퍽 쌀쌀해 오늘 아침에도 살얼음이 얼었는데 가벼운 옷차림으로 뛰어나가다니. 애 아빠는 부랴부랴 두툼한 겉옷을 챙겨 아이한테 입힙니다. 애 아빠는 빨래를 해서 널고 있었기에, 아이만 먼저 배움터 아이들한테 딸려 보내고 뒤따라 가기로 합니다. 아침에 새로 한 빨래는 널고, 엊저녁에 해 둔 빨래는 걷어서 잘 갭니다. 긴바지를 챙겨 입고 자전거에 아기수레를 붙인 다음 감나무 우거진 집으로 찾아갑니다. 아이는 언니 오빠 틈에서 감따기를 올려다봅니다. 아빠가 자전거를 타고 오는 모습을 보더니 “아빠다!” 하고 외치며 고 조그마한 발로 톡톡 구르듯 걸으면서 다가옵니다.

 배움터 아이들은 선생님이 감 따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림을 그립니다. 감을 따려고 장대를 들고 젓는 모습을 그리고, 감나무를 그립니다. 아이들은 저 수많은 가지를 어찌 다 그리느냐고 투덜투덜댑니다. 다른 나무를 그릴 때에도 그렇지만, 감나무를 그리자면 몹시 골이 아프다 할 만해요. 감나무 가지는 참으로 많거든요. 이리 뻗고 저리 뻗은 가지를 그리자면, 감나무와 종이 사이를 쉴새없이 오락가락 쳐다보아야 합니다. 슬며시 아이들 그림을 들여다보는데, 뭐 투덜대기는 하면서 다들 썩 잘 그립니다.

 아침을 안 먹고 집을 나온 아이는 슬슬 배고플 때입니다. 힘들다며 아빠한테 안기려 들기에 “자전거 탈까?” 하고 묻습니다. 아이는 “응, 자전거.” 하고 말합니다. 언니와 오빠와 선생님 들한테 인사를 하고 자전거에 태웁니다. 오는 길은 오르막이요 가는 길은 내리막입니다. 시원하고 신나게 달립니다. 집에 닿아 뭣 좀 먹일까 하면서 밥을 안치고 찌개를 끓입니다. 이제 슬슬 밥이 되려고 하는데, 배움터 아이들이 감따기와 그림그리기를 마치고 우리 살림집 옆을 지나갑니다. 아이는 아이들 소리를 듣고는 또 “언니다!” 하면서 뛰어나갑니다. 아이고, 녀석아. 밥 먹어야 하는데 어딜 또 나가. 그렇지만 아이는 어느새 배움터 아이들하고 산으로 올라갑니다. 아빠는 하던 밥이 있으니 밥이 다 될 때까지 기다립니다. 이윽고 밥이 다 됩니다. 다시금 부랴부랴 산으로 뒤따라 올라갑니다. 아이들 소리는 배움터 밥집에서 납니다. 배움터에서는 낮밥 때가 되었군요.

 설마 하는 마음으로 밥집으로 들어갑니다. 아, 아이는 이곳에서 언니 오빠하고 함께 밥을 먹습니다. 집에서 제 아빠하고 엄마는 함께 밥을 먹으려고 다 해 놓고 기다리는데, 아이는 아무런 말 없이(아직 스물일곱 달이니까 말을 하고파도 못한다 하겠지요) 바깥밥을 먹다니.


.. 물은 생명이 탄생한 곳입니다. 물이 있는 곳은 생물들이 자라기에 좋은 환경이지요. 실제 물속에는 아주 많은 생명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어요. 이 책에서 볼 수 있는 물속 곤충과 물풀뿐만 아니라, 새·물고기·우렁이·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은 물벌레도 많지요. 벼논이 많은 우리 나라에는 큰 저수지뿐만 아니라 ‘둠벙’도 많지요 ..  (책머리에)


 시골집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어디에서나 마음껏 뜁니다. 언제나 마음껏 소리지르고 노래하며 춤을 춥니다. 웃고 까불며 울기도 하다가는 졸음에 가득한 무거운 눈으로 칭얼대다가 새근새근 잠이 듭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 3층짜리 벽돌집 2층에서 지냈습니다. 아래층은 집임자인 할배와 할매가 살고, 웃층에는 대학생에 고등학생이 있는 아주머니 아저씨가 살았어요. 도시에서도 시골에서 못지않게 뛰고 웃고 울고 복작대며 지내던 아이입니다. 아이가 뛰거나 소리지를 때마다 아빠 가슴은 철렁철렁합니다. 아래층 할배와 할매는 ‘아이 키우는 집은 다 그렇다’며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지만 부끄러운 마음을 감출 수 없어요. 도시에서 시골로 옮긴 뒤로 무엇보다 ‘아이가 마음껏 놀 수 있는’ 대목이 좋습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라고 마음껏 못 놀지 않았어요. 그저 엄마랑 아빠가 눈치를 보느라 힘들 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식구 시골집으로 오며 더없이 좋은 대목은 ‘도시에서는 마주하기 힘든 자연’을 언제나 부대끼거나 어우러지는 삶입니다.

 자연과 함께 살아간다고 자연을 안다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 살림집 옆 멧기슭을 따라 멧느타리가 곳곳에 자라는 줄을 안 지는 보름쯤 되었습니다. 그렇게까지 많이 나지는 않아 배불리 따 먹지는 못하지만, 가끔 산길을 타며 한 송이씩 따서 찌개를 끓일 때 넣습니다. 땅속을 흐르는 물을 마시고, 빛나는 달과 맑은 해 기운이 어린 바람을 마십니다. 도시에서라면 여기는 무슨 가게 저기는 무슨 가게 하며 말해야 하거나 이것저것 아이가 모르거나 궁금해 하는 건물과 물건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시골에서는 굳이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도시 살림살이를 안 가르쳐 주어도 됩니다. 엄마하고 아빠가 제대로 모르기에 찬찬이 일러 주지는 못하나, 들풀과 들꽃과 들새와 들짐승을 이야기합니다.

 시골에서 아이와 맞이한 올 첫 여름에는 이오덕자유학교에 있는 헤엄터(산에서 흐르는 물을 받아서 마련한 어린이 헤엄터)에서 여러 가지 물벌레를 보고 나무그늘을 느끼면서 놀았습니다. 이때 게아재비를 아이와 같이 처음으로 봅니다(아빠는 어릴 적에 일찌감치 보았고, 아이하고 같이 보기는 처음입니다). 도시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소금쟁이를 시골에서는 어디에서나 으레 봅니다. 도시 골목집에서 살던 때에도 개미나 거미는 흔히 보았는데, 시골에서는 집이고 마당이고 산이고 논이고 밭이고 개미와 거미를 비롯한 갖가지 풀벌레가 많습니다. 집 둘레로 온통 멧새이고요. 시골에서 아이와 마주하는 올 첫 가을에는 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올려다보다가는 낮은 가지에 매달린 감은 아이가 손수 따도록 합니다. 아이는 아침 일찍 일어나니까, 아침에 찡얼거리는 아이 손을 잡고 마당으로 나와서 들판에 넓게 깔린 서리를 보여줄 수 있어요. 도시에서 아빠하고 몇 시간이고 골목마실을 늘 한 까닭에 산타기를 할 때에 아이는 제법 잘 걷습니다.


.. 물속 친구들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풀이야. 물풀은 물도 깨끗하게 해 주고, 물속 곤충들의 먹이도 되어 준단다 ..  (18쪽)


 그림책 《소금쟁이가 들려주는 물속 생물 이야기》를 펼칩니다. 여느 시골마을 물웅덩이(둠벙)라면 어렵잖이 마주할 만한 물벌레와 물풀 이야기가 수수한 그림으로 실려 있습니다. 시골사람한테는 하나도 대단하지 않은 흔한 물벌레 이야기요 너른 물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여느 시골에서 자취를 감추는 흔하던 물벌레요 너르던 물풀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여느 시골이라면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를 많이 쓰거든요. 1920년대에 최순애 님이 쓴 〈오빠 생각〉이라는 시에는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하고 첫머리를 열지만, 논에서 뜸북새를 찾아보기 힘들고 숲에서 뻐꾹새를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최순애 님이 시를 지을 때에는 뜸북새는 참새와 마찬가지로 흔한 새였으나 이제는 천연기념물이에요. 뻐꾸기는 아직 천연기념물까지 되지 않았으나 머잖아 천연기념물이 되리라 생각해요. 맹꽁이는 어느새 멸종위기에 닥쳤다고 하는데, 맹꽁이나 두꺼비가 사라지리라 생각하던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풀무치라든지 물방개 또한 어느 날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질는지 모른답니다.

 가만히 보면, 일본에서는 퍽 일찍부터 ‘일본 자연 삶터를 넓게 살피며 두루 담는 어린이책’이 그림책으로나 사진책으로나 글책으로나 무척 많이 나왔습니다. 일본은 우리와 견주어 꽤 예전부터 공장이 늘었고 산업주의가 온 나라를 덮었습니다. 맑고 밝던 시골 삶자락이 진작부터 많이 무너졌어요. 자연스러운 시골 삶터를 버리고 도시로 나온 사람이 참 많았습니다. 이리하여 어떠한 어린이책보다 자연을 느끼어 가슴으로 껴안도록 돕는 자연 이야기책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으리라 보는데, 우리는 이제서야 드문드문 자연 이야기책이 나옵니다. 그런데 일본은 산업주의가 진작에 뻗었어도 유기농업을 하는 시골이 참 많아요. 흔하기에 수수한 시골 논밭이 잘 자리잡습니다. 일본이라고 농사짓기를 물려받고 싶어하는 젊은이가 많다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한국처럼 뜸북새가 자취를 감춘다든지 맹꽁이가 삶터를 빼앗긴다든지 여우가 씨를 퍼뜨리지 못한다든지 하지 않아요.

 그림책 《소금쟁이가 들려주는 물속 생물 이야기》를 다시 펼칩니다. 소금쟁이는 시골 뭉웅덩이에서만 즐거이 노닐 목숨이 아닙니다. 소금쟁이는 골목동네 물웅덩이에서도 어렵잖이 마주하던 벗이었습니다. 어릴 적 땅거미가 내려앉던 해거름이면 골목 한켠에서 으레 땅강아지를 잡으며 놀았습니다. 우리는 뭇사람과 뭇짐승과 뭇벌레가 서로서로 어우러져 살아갈 터전을 헤아려야지 싶어요. 뭇목숨이 골고루 어깨동무하며 지낼 보금자리를 살펴야지 싶어요. 메뚜기도 살고 사마귀도 살며 개구리도 살도록 마음을 기울여야지 싶어요. 검정말도 살고 물질경이도 살며 물옥잠도 살 수 있게 마음을 써야지 싶어요. 뱃살 나오고 허리 굵어지는 도시사람이 살빼는 운동을 하는 공원이 아니라, 작은 들짐승이 나란히 숨쉬며 지낼 만한 참다운 숲을 도시 한복판에도 마련할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숲에는 새도 살고 쥐도 살지만, 숲이 있을 때에 사람 또한 사람다이 살아갑니다. 얕은 물웅덩이이든 작은 늪이든 앙증맞은 논이든 조촐한 못이든, 시골뿐 아니라 도시 한켠에도 흙이 있고 샘물이 있을 때에 사람으로서 사람다움을 건사합니다.

 그림책 《소금쟁이가 들려주는 물속 생물 이야기》를 또 한 번 들춥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라면 아이하고 그림책 하나를 놓고 백 번은 우습게 되넘기고 즈믄 번은 가벼이 되읽습니다. 아이랑 이 그림책 하나를 즈믄 번쯤 즐길 수 있을까 헤아려 봅니다. 즈믄 번이 어렵다면 백 번쯤은 신나게 맛볼 수 있으려나 곱씹어 봅니다.

 수수한 목숨붙이를 수수하게 담은 그림결은 무척 좋습니다. 자연보다 지식을 보여주려 하는 그림책 모습이 아니어 괜찮습니다. 천연기념물이라든지 꽤 예쁘장한 그림에 매이지 않아 반갑습니다. 그나저나 ‘천연기념물’이란 이름이란 도무지 뭔 소리인지 알쏭달쏭합니다. ‘천연을 기념하는 생물’?

 그나저나, ‘부들은 키가 몹시 크며 곧고 길게 자란다’는 풀이를 달면서(33쪽) 크며 곧고 긴 모습 그림을 담지 못하니 아쉽습니다. 그렇다고 더 낱낱이 들여다보도록 그림을 그리지도 않습니다. 한결 도드라지게 들여다보는 그림을 담으면서 뿌리께부터 맨 꼭대기 줄기까지 두루 바라보는 그림을 넣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또한, 물가 둘레를 한눈에 살피도록 엮은 그림이 제대로 없습니다. 맨 안쪽에 이 그림을 넣는다고 넣었으나 물가 둘레에 돋는 풀은 한두 가지가 아닌데 그림이 너무 밋밋해요. 갖가지 들풀을 고루 그리면서 물벌레뿐 아니라 물 바깥 여느 벌레가 곳곳에 숨어 있는 모습으로 담았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습니다. 뜸북새를 그려 넣을 수는 없지만(뜸북새를 넣을 수 있으면 훨씬 좋겠지요) 논이나 물가를 오가는 들새나 멧새는 제법 많아요. 물 안팎 모습을 한눈에 보도록 낱낱이 담은 그림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도 ‘더 많은 목숨들이 더 살갑고 싱그럽게 살아숨쉬는’ 그림으로 담았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습니다. 덩그러니 한 마리만 그려 넣는 ‘표본실 그림’이 아닌, ‘적어도 암수 두 마리가 짝을 짓는 그림’쯤으로 엮는다면 한결 낫고, ‘너덧이나 대여섯이나 예닐곱 마리쯤 얼크러지는 그림’으로 선보일 수 있습니다. 책 끝에 ‘물속 생물 사전’을 따로 담았으니 모둠그림에는 따로 이름표를 붙이지 않아도 됩니다. 외려 이름표 없이 그림으로 재미나며 아기자기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더욱 짜임새가 단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소금쟁이이든 물벌레이든 물풀이든 하나같이 ‘시골에서 아름다이 어우러지는 목숨’입니다. 시골 논이고 둠벙이기 때문에 언제나 즐거이 어우러지는 목숨이에요. 그러면, 이와 같은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담으려 할 때에는 참말 말 그대로 ‘시골살이 삶자락’이 어떻게 아름답고 얼마나 아름다운가를 살갗 깊이 파고들도록 마음을 쏟고 땀을 들여야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들한테는 생태도감이나 자연도감이 따로 있어야 하지 않아요. 도시 아이라 해서 따로 생태도감이나 자연도감을 마련해 줄 까닭은 없어요.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도감’보다 ‘사랑’을 말할 수 있으면 좋고, 모두들 ‘지식’보다 ‘삶’을 어루만질 수 있도록 이끌어야 빛깔 그윽히 곱습니다. (4343.10.29.쇠.ㅎㄲㅅㄱ)


― 소금쟁이가 들려주는 물속 생물 이야기 (바람하늘지기 기획,노정임 글,안경자 그림,철수와영희 펴냄,2010.5.15./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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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ングリ山のやまんばあさん (單行本)
도미야스 요코 / 理論社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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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집으로만 나온 <눈사람의 비밀>이라서 '마이리뷰'로 못 올린다. 그러나 아직 번역이 안 된 '오오시마 다에코' 님 그림책이 제법 있어, 이분 그림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에 다른 그림책에 걸쳐 놓는다. 한결 깊고 살가이 우리 삶으로 스며들 수 있다면, 그림책 맛과 멋이 좀더 그윽하지 않으랴 싶다.


 눈겨울 기다리는 마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0] 가도노 에이코(글)+오오시마 다에코(그림), 《눈사람의 비밀》


 지난 10월 26일 아침, 우리 산골마을에도 얼음이 얼었습니다. 꽝꽝얼음은 아니고 살얼음입니다. 오늘도 살얼음이 얼었고, 들판과 멧자락에는 서리가 곱고 넓게 내렸습니다.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때에는 골목마실을 하면서 골목집 꽃그릇이나 텃밭에 앙증맞게 내려앉은 서리를 보았습니다. 서리가 아스팔트 길바닥에 내린다든지, 거님길 돌바닥에 내려앉는 모습은 거의 못 봅니다. 그러나 도시 어디에나 잔뜩 서 있는 자동차 지붕에 하얗게 깔린 서리는 자주 봅니다.

 자동차 지붕에 내려앉는 하얀 얼음조각을 서리라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시골이든 도시이든 똑같은 자연 움직임이니 서리가 아니라 할 수는 없을 텐데, 자연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할 뿐더러, 아예 자연을 잊거나 잃으며 살아가는 도시라는 터전이거든요. 자동차 지붕에 앉는 얼음조각을 볼 때면 이 얼음조각은 서리가 아닌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으랴 싶곤 합니다.

 이제 울긋불긋한 가을잎으로 저무는 철이 지나고 나무마다 빈 가지가 될 무렵에는 차츰 눈바람이 불 테지요. 때때로 눈보라가 치기도 할까요. 눈은 없이 매서운 추위인 강추위가 몰아닥치려나요. 해가 갈수록 날씨는 자꾸 미쳐 가니까요. 미쳐 가는 사람한테 걸맞게 사람들이 느껴야 할 날씨는 나날이 뒤죽박죽이 되어 가니까요.

 그림책 《눈사람의 비밀》을 봅니다. 이 그림책은 낱권으로는 나오지 않고 전집으로만 나온 터라 여느 새책방에서는 따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게다가 더는 찾아보기 힘들기까지 합니다. 헌책방에서 겨우 찾아보는데, 헌책방에서도 낱권으로는 장만하기 힘듭니다. 전집으로 묶어 서른 권인가 마흔 권을 한꺼번에 장만해야, 이 가운데 1번으로 나온 《눈사람의 비밀》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용케 낱권으로 하나 흩어진 이 책을 만났습니다.

 《눈사람의 비밀》이라는 이름이지만, 눈사람한테 비밀이 있다기보다, “비밀 눈사람”이라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눈사람들이 깊은 밤이 되면 조용히 일어나 저희끼리 공차기를 비롯해 온갖 놀이를 즐기거든요. 어쩌면 “눈사람한테 있는 비밀”이라든지 “눈사람한테 비밀이 있어요”라 해 볼 수 있겠지요. “비밀스러운 눈사람”이라든지요.

 차츰 눈 구경이 힘든 만큼 이 그림책에 눈이 갑니다. 눈 구경이란 아득한 옛날 일처럼 가물가물해지기에, 아빠(또는 엄마)랑 눈사람을 함께 굴리며 손이 얼얼해지는 이야기를 담은 이 그림책에 손이 갑니다. 함박눈이 펑펑 내리던 때, 눈을 뭉치자면 장갑을 끼고는 잘 안 되었습니다. 으레 장갑을 벗은 맨손으로 눈을 뭉치거나 굴렸고, 한동안은 맨손으로 눈을 뭉칠 때에 참 잘 뭉쳐진다고 느낍니다. 그러다가 어느 때부터 손가락 끝부터 쨍 하고 뜨끔합니다. 이러면서 손가락 온 마디와 손바닥까지 후끈후끈 달고, 사타구니까지 조입니다. 다시 장갑을 끼어도 아픔은 가시지 않습니다. 한쪽 눈을 질끈 감으며 눈물을 흘립니다. 아이고 아야 윽윽 하며 두 팔을 오므려 가슴에 대고 두 손을 살살 어루만지고 비빕니다. 장갑을 낀다고 따스하지 않으니 다시 장갑을 벗습니다. 얼어붙은 맨손을 서로 덜덜 떨면서 쓰다듬습니다. 손가락에 따시 따순 피가 돌 때까지 옴쭉달싹 못합니다. 조금 손이 풀렸다 싶으면 허벅지 사이에 두 손을 넣고 콩콩 뛰거나 새우처럼 등을 구부립니다. 이렇게 몇 분을 앓으면 드디어 손이 풀려 히유 하고 한숨을 쉽니다. 그런 다음 또 눈을 뭉치는데, 장갑 낀 손으로는 도무지 눈 뭉치기가 안 되어 또다시 장갑을 벗으며, 얼마 뒤에 똑같은 뜨끔함과 아픔을 거듭 겪습니다.

 어릴 때에는 잘 몰랐습니다. 왜 장갑 낀 손으로는 눈을 뭉치기 어려웠는지, 왜 맨손으로는 눈을 잘 뭉칠 수 있는지. 장갑 낀 손으로는 눈을 모으기까지는 좋으나, 맨손일 때에는 따스한 손이 눈을 살짝 녹이면서 눈이 한결 단단히 뭉쳐집니다.


.. “자, 눈을 모아서 조그만 눈덩이를 만들자.” 아빠가 말했어. 나는 두 손으로 눈을 뭉쳤어. 아, 손 시려. 손가락이 얼얼했어 ..  (6쪽)


 여름은 덥습니다. 겨울은 춥습니다. 봄은 따뜻합니다. 가을은 시원합니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은 서로 다른 철이요, 서로 다른 네 철이 골고루 흐르며 찾아오는 동안 우리 몸과 마음은 찬찬히 튼튼해지고 씩씩해지며 무르익습니다.

 따뜻하기만 한 나라에서 살아가도 좋을 테고, 시원하기만 한 나라에서 살아가도 좋다 할 만하겠지요. 그러나 따뜻하기만 한 나라는 파리와 모기가 많습니다. 시원하기만 한 나라는 곡식이 잘 여물지 못합니다. 더우면 싫고 싫으면 괴롭다지만, 덥기도 하고 춥기도 하면서 땅과 해와 바람과 물이 어우러질 때에 뭇목숨과 뭇사람이 즐거우며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뜻한 봄에는 따뜻한 날씨에 걸맞게 따뜻한 이야기가 있고, 더운 여름에는 더운 날씨에 알맞게 더운 이야기가 있으며, 시원한 가을에는 시원한 날씨에 알맞춤하게 시원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추운 겨울에는 추운 나날에 들어맞는 추운 이야기가 있어요. 추운 겨울에만 느낄 수 있고, 추운 나날에만 겪을 수 있으며, 추운 나날에만 즐길 수 있는 일과 놀이가 있습니다. 추운 나날에는 멧자락 작은 집에 꽁꽁 틀어박혀서 살붙이하고 더 오래 이야기를 나누고 더 가까이 보듬으면서 사랑을 꽃피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저러나, 겨울이 닥쳐 오면 빨래하기가 한결 힘듭니다. 빨래를 하자면 손이 시리고 얼어붙으니까요. 기름을 때어 보일러를 돌리면 따순 물을 얻어 쓰니 손이 얼어붙지는 않는데, 한낮 살짝 따뜻할 때를 잘 맞추어 빨래를 신나게 하지 않으면 제대로 말리기 어렵습니다. 겨울날 겨울빨래를 하며 봄을 기다립니다. 겨울에는 이불 빨래를 하기 힘드니까, 봄이 되어 신나게 이불 빨래를 꾹꾹 밟으면서 마당에 척척 널어 놓을 일을 꿈꿉니다. 올겨울이 가고 새봄이 오면 우리 아이도 한 살을 더 먹을 테니, 이제는 이불 빨래를 할 때에 발로 눌러 주는 힘이 더욱 세겠지요. 또 새 겨울을 맞이하고 나서 다시금 새 봄을 맞이한다면, 그때에는 우리 아이가 이불 빨래에서 제법 한몫 할 수 있으려나요.


.. 눈사람들이 다시 걸어가고 있어. 하늘을 보고 노래를 부르면서 말야 ..  (28쪽)


 올해 겨울에는 얼마나 눈바람이 불고 눈누리가 이루어질까 기다립니다. 우리 산골마을에는 얼마나 눈이 찾아들어 버스며 짐차며 다니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안 생길까 궁금합니다. 온통 눈밭이 되면 어린 딸아이는 마음껏 소리지르고 노래부르며 신나게 뛰어놀 수 있다고, 어쩌면 우리 집 마당이나 문간이나 한길에 눈사람 둘 세워 놓을 만큼 눈이 펄펄 찾아들는지 모릅니다. 겨울다운 겨울이 찾아와 달라고 비손합니다.

 그림책 《눈사람의 비밀》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내아이가 제 아빠랑 공차기를 하며 노는 꿈을 꾸는데, 사내아이랑 아빠가 아닌 계집아이랑 엄마가 솔솔 내리는 눈을 가만히 그러모아 눈사람을 만들며 꿈을 하나 빌었다면 이야기가 얼마나 달랐을까 헤아려 봅니다. 계집아이랑 아빠, 사내아이랑 엄마일 때에는 또 얼마나 다른 꿈을 빌었을까 곱씹어 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사내아이이든 계집아이이든 꿈이란 매한가지가 되려나요. 아니면, 눈사람 굴리기는 사내아이만 즐길 놀이가 되려나요.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쓴 《초원의 집》을 보면, 어린 계집아이인 ‘로라’는 제 언니 ‘메리’하고 신나게 눈사람을 굴리며 놀았습니다. (4343.10.28.나무.ㅎㄲㅅㄱ)


― 눈사람의 비밀 (가도노 에이코 글, 오오시마 다에코 그림, 고향옥 옮김,웅진닷컴,2000.12.20./판끊어짐,전집으로만 나왔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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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고양이 연구 파랑새 그림책 69
이자와 마사코 지음, 히라이데 마모루 그림, 이예린 옮김 / 파랑새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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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양이 삶을 들여다보면 즐겁다
 [즐기는 그림책 24] 이자와 마사코·히라이데 마모루, 《도둑고양이 연구》(파랑새,2008)



 아이가 어릴 적부터 “돼지야.” 하고 불렀습니다. 이제 아이는 아빠가 “벼리는 돼지지.” 하면 “대지지.” 하고 따라합니다. ‘돼지’가 무엇이고, 돼지라 일컬을 때에는 무슨 뜻인지는 읽지 못하지만, 소리를 고스란히 따라합니다(아직 ‘돼·지’라고 또박또박 말하지 못하지만). 나중에 아이가 커서 저를 가리켜 돼지라 말한 줄 안다면, 아이는 좋아할까요 싫어할까요. 아마, 다른 사람이 나를 보면서 “당신은 돼지야.” 하고 말할 때에 나는 어떤 느낌일까 하고 헤아린다면 아이 마음을 살필 수 있는지 모릅니다.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 나를 두고 “넌 돼지네.” 하고 말한다면 어떠한 느낌일는지. 돼지, 돼지, 돼지. 음, 돼지를 키우거나 곁에서 지켜본 분이라면 알 텐데, 돼지는 참 귀엽습니다. 착하고 어여쁩니다. 심술돼지 아닌 사랑돼지라고 할까요. 어쩐지 돼지라는 이름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돼지라는 짐승이름은 놀림말로 흔히 썼어요. 밥을 많이 먹어도 돼지, 뭘 잘 못해도 돼지, 굼뜬다 할 때에도 돼지 ……, 그야말로 돼지는 못난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씨처럼 자리잡은 우리 나라입니다. 이런 흐름이니까 제가 아이를 보며 “요 돼지야!” 할 때에 둘레 사람들이 “아니, 그렇게 예쁜 아이한테 돼지가 뭐예요?” 하고 물을밖에 없습니다.

 그림책 《도둑고양이 연구》를 보며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은 꽤 사랑받은 작품이지만 출판사에서 더는 안 찍습니다. 왜 안 찍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이 책을 다시 내준다면 책이름은 고쳐 주면 좋겠습니다. 일본사람 이자와 마사코 님과 히라이데 마모루 님이 이 책을 1991년에 내놓으며 붙인 이름은 “Let's Follow And Observe A Town Cat!”입니다. 일본사람은 이 그림책에 ‘A Town Cat’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도둑고양이’가 아닌 ‘도시고양이’ 또는 ‘동네고양이’ 또는 ‘마을고양이’ 또는 ‘시골고양이’인 셈입니다.

 그림책 무대를 살피면 자그마한 도시인데 논이 함께 있습니다. 아마 큰도시는 아닐 테며 작은도시조차 아닐 수 있어요. 우리로 치면 읍내이거나 면내에서 고양이를 살핀다 할 만해요. 그러니까 영어로 하자면 ‘A Town Cat’일지라도 한국말로 옮길 때에는 ‘시골고양이’라 해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요즈음 흔히 쓰는 말로 고친다면 ‘골목고양이’나 ‘길고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골목고양이’나 ‘길고양이’가 가장 어울릴 테고, 이 가운데에서는 ‘골목고양이’가 한결 어울립니다. 그저 길을 다니는 고양이가 아니라,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고양이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책을 내놓은 분은 “여러분은 아프리카 초원이나 아마존 정글에 가야만 동물을 연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동물들만 잘 관찰해도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고양이를 연구할 수도 있어요(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참말, 이 그림책은 고양이를 찬찬히 살피는 분이 하루 동안 고양이 삶이 어떠한가를 돌아본 이야기를 담습니다. 골목개를 꼼꼼히 살펴도 이와 같은 그림책을 엮을 수 있으며, 하루살이를 하루 내내 살펴도 이처럼 그림책을 엮을 수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하루 동안 어찌 지내는가를 살펴도 이러한 그림책을 엮을 수 있습니다.

 문득, 열여섯 해 앞서 일이 떠오릅니다. 인천을 처음 떠나 서울에 있는 대학교를 다니던 때에 동무 하나가 자취방에서 지내는데, 이 녀석 집에 ‘도둑고양이’가 드나들며 밥을 얻어먹었습니다. 동무녀석도, 또다른 동무들도, 저도 으레 ‘도둑고양이’라고 말했습니다. 비쩍 마른 가난한 자취생 집에서 ‘얼마 안 되는 밥’을 얻어먹으니까 이렇게들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 고양이를 보며 ‘동네고양이’라거나 ‘길고양이’라거나 ‘골목고양이’라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언제나 고양이 눈높이가 아닌 사람 눈높이에서 바라보았으니까요. 늘 고양이 눈썰미가 아닌 사람 눈썰미에서 살폈으니까요. 노상 고양이 삶이 아닌 사람 삶에서 곱씹었으니까요.

 《도둑고양이 연구》를 내놓은 분은 “두 시간이 지나고 세 시간이 지나도 나오스케는 계속 자고 있습니다. 해는 점점 서쪽으로 기울어 가는데……. 드디어 나오스케가 일어났어요. 커다란 바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있던 나도 나오스케를 따라나섭니다(21쪽).” 하고 이야기를 잇습니다. 글쓴이(와 그린이)는 고양이가 얌전히 잠들어 있을 때에는 가까운 바위에 멍하니 걸터앉아 기다립니다. 고양이가 부시시 일어나 천천히 거닐면 고양이를 좇아 부시시 일어나 한들한들 거닙니다.

 고양이가 밥을 먹으면 지켜보는 사람도 밥을 먹고 싶으나 밥을 먹을 수 없습니다. 고양이를 지켜봐야 하니까요. 고양이가 다시 잠들어 준다면 비로소 밥을 먹겠지요. 그러나 고양이는 좀처럼 잠들어 주지 않습니다. 한참 돌아다니다가 겨우 잠들어 줍니다. 그러고는 다시 일어납니다. 깊은 밤 깨어나 다시금 동네마실을 합니다.

 “나오스케는 논 쪽으로 걸어갑니다. 가다가 뭔가를 보았는지 때때로 냄새를 맡거나 장난을 치기도 하지만,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고양이처럼 밤에도 잘 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불빛이 거의 없는 밤, 좁다란 논둑길을 걸을 때는 조심해야 됩니다 미끄러질 수도 있거든요. 하지만 조용한 밤길이 기분 좋네요(33쪽).” 하고 말하는 글쓴이(와 그린이)입니다. 아무래도 글쓴이(와 그린이)가 살펴본 고양이는 도시 한복판 길고양이가 아닌 작은 시골마을 길고양이었기 때문이라 할 텐데, 깊은 밤에 논둑길을 거니는 고양이를 따라 논둑길을 거닐면 참 싱그럽고 시원합니다. 깊은 밤 달빛에 기대어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아무 불빛이 없고 어떤 소리도 없는 밤나절 달빛 옆에 반짝반짝 빛나는 별빛을 느끼며 논둑길을 걸어 보셔요.

 도시에서는 너무 힘들겠지요. 도시에서는 꿈조차 못 꾸겠지요. 그래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골목고양이 또한 달빛이랑 별빛을 못 느낍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달빛이랑 별빛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 한결 애틋하며 포근하고 너그러운 나날이라 한다면, 이러한 도시에서 밥을 나누어 먹는 골목고양이들 삶 또한 더욱 애틋하며 포근하고 너그러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마주하는 비둘기를 놓고 으레 ‘닭둘기’라 하지요? 그런데, 이들 닭둘기는 스스로 좋아 닭둘기가 되었겠습니까. 메마르고 팍팍한 도시에서 살아남자면 어찌할 수 없어요. 평화이니 사랑이니 떠벌이며 수십 수백 마리를 잔뜩 풀어 주어 공원 하늘을 가득 채우도록 하면서 손뼉칠 때는 언제고, 도시에 무슨 애벌레가 있고 풀씨가 있으며 열매가 있다고, 이 비둘기들이 살아가겠습니까. 비둘기도 사랑을 나누고 새끼를 낳고 싶습니다. 비둘기도 어디에서든 오순도순 조용히 살아가고 싶어요. 도시라는 곳은, 그리고 큰도시라는 곳은, 비둘기이든 고양이이든 느긋하며 포근히 지내기 어렵습니다. 이와 함께 사람들 누구나 어깨동무하면서 즐겁고 힘차게 머물기 힘듭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도시에서 마주하는 고양이를 보면서, 또 시골에서도 흔히 ‘들고양이’이든 ‘길고양이’이든 ‘고샅고양이’이든 ‘골목고양이’이든 이야기하지 못하면서 ‘도둑고양이’라 말해 버리는구나 싶어요. 사람들 스스로 내 이웃 등살을 울궈먹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운 도시이잖아요. 사람들부터 내 동무 등짝을 후려치며 밟고 올라서지 않고는 살아내기 힘든 한국땅이잖아요.

 고양이는 흙을 좋아합니다. 흙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똥을 눌 때에 땅을 파고 눈 다음 흙으로 덮어야 합니다. 고양이는 풀을 좋아합니다. 풀이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잠을 잘 때에 부드러우며 따사로운 풀숲에 음전히 누워 새근새근 잠듭니다.

 사람은 흙이나 풀을 안 좋아하기 일쑤이고, 생각조차 안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들 누구나 흙이랑 풀이랑 없으면 살지 못합니다. 좋아하든 싫어하든 흙이랑 풀이랑 없을 때에 살아남을 사람이란 없습니다. 고양이를 집에서 키우며 ‘가짜 흙’을 마련하여 똥오줌을 누이고 ‘퓰처럼 느낄 폭신한 잠자리’를 마련하여 쓰다듬습니다. 가만히 돌이켜보면 우리들 사람 삶이란 ‘참말 있어야’ 할 무언가를 마련하지 못하거나 누리지 못하면서 ‘거짓으로 만든’ 무언가에 휩싸인 채 목숨만 잇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자와 마사코 님하고 히라이데 마모루 님은 고양이 한 마리를 하루 내내 들여다보면서 즐거움을 듬뿍 느낍니다. 이분들이 고양이 삶이 아닌 사람 삶을 하루 동안 들여다보았다면 무엇을 느낄는지 궁금합니다. 연봉 1억을 받는다는 사람 삶을 하루 동안 들여다본다면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국회의원님이나 선생님이나 군수님 하루 삶을 들여다볼 때에 무슨 재미가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4343.10.25.달.ㅎㄲㅅㄱ)


― 도둑고양이 연구 (이자와 마사코 글,히라이데 마모루 그림,파랑새 펴냄,2008.2.21./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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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 웅진 지식그림책 20
윤여림 지음, 정유정 그림, 이은주 감수, 조은화 꾸밈 / 웅진주니어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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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 키우는 책과 삶을 살리는 책
 [책읽기 삶읽기 19] 윤여림+정유정,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



 아이하고 날마다 갖가지 그림책을 읽는다. 아이한테 읽히려고 하다가 애 아빠 혼자서 한참 들여다보는 그림책이 있어 아이가 아빠 팔을 잡아당기는 때가 있고, 애 아빠는 좋다고 아이한테 읽히는데 아이는 다른 놀이를 한다며 딴전을 피울 때가 있다. 틀림없이 아이도 좋아하는 그림책이지만 이날 따라 딴짓을 하고파 본 척 만 척한다면 괜찮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데 아이는 지루해 하고 애 아빠도 따분해 하면 큰일이다. 이때에는 이 그림책에 담긴 그림이 아무리 예쁘장하다 해도 달갑지 않다. 이렇다면 이 그림책에 깃든 줄거리가 아무리 알차다 해도 반갑지 않다.

 그림책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를 읽다. 이 그림책에는 ‘지식 그림책’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런 이름은 보지 않고 골랐다. 우리 나라에서도 창작 그림책이 제법 나오기는 하지만, 우리 둘레 삶터를 찬찬히 헤아리며 알뜰히 담아내는 그림책은 아직 얼마 못 본다. 이런 가운데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라는 작품은 책이름이나 짜임새에서 무언가 수수하고 맛깔스러운 이야기를 담지 않았겠느냐 생각했다.

 책을 펼치면 아이 얼굴을 가득 덮을 만큼 커다란 나뭇잎에 구멍 둘 송송 내어 탈처럼 쓰는 모습이 하나 있다. 나뭇잎처럼 생긴 종이를 벗기면 아이 얼굴이 드러나고, 다시 나뭇잎처럼 생긴 종이를 책에 붙이면 ‘나뭇잎 탈’이 된다. 아이는 이 책을 보는 내내 이 대목 하나에서만 만지작거리며 “언니 얼굴이네.” 하는 말을 할 뿐, 다른 대목에서는 싱숭생숭. 아이가 하도 재미없어 하기에 ‘공원길을 거닐며 나뭇잎을 줍는 아이들’이 나오는 그림에서 겨우 거미 몇 마리를 찾아내어 “여기 거미 있네.” 하고 가리킨다. 우리 식구 살아가는 시골집에서 거미이며 개미이며 벌레이며 흔히 보니까, 아이는 거미나 개미나 벌레가 나오는 그림을 금세 알아채며 좋아하곤 한다. 그런데 몇 번씩 “여기 거미 있어. 여기 거미 있잖아.” 하고 말해 주어도 못 알아본다. 아예 알아볼 마음이 없는가.

 아이는 아빠랑 그림책 읽기를 그만둔다. 함께 보자는 그림책이 지루하다고 느낀 탓이다. 아빠는 그림책을 마저 펼쳐 살핀다. 왜 이렇게 아이가 지루하다고 느껴 하는가를 생각한다. 그러고는 다른 그림책을 하나 꺼내어 읽어 본다. 아, 금세 느낌이 온다.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는 이 그림책에 붙은 작은 이름 ‘지식 그림책’ 알맹이에 알뜰할 뿐, 정작 그림책이 할 몫을 못한다. 더 생각해 보면 참다운 지식 그림책이라 말하기도 어려우나, 어찌 되었든 지식을 다루는 그림책 자리에 머물 뿐, 이야기를 나누는 그림책이라든지 삶을 밝히는 그림책으로 거듭나지 못한다.

 그림책을 그리는 사람하고 그림책에 글을 쓰는 사랑이랑 그림책을 엮는 사람 모두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어떤 그림책이든 하나같이 ‘지식 그림책’이다. 지식을 다루지 않는 그림책이란 없다. 스무 해쯤 앞서부터 ‘철학 동화’라는 어린이책이 널리 팔리곤 하는데, 어떠한 동화이든 철학이 안 담긴 동화란 없다. 모든 동화에는 철학, 우리 말로 풀면 ‘생각’을 담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떠한 동화이든 가르침을 베푼다. 한자말로 하자면 ‘교훈’이 없는 동화란 없으며, 어른문학도 매한가지이다. 과학 동화나 과학 그림책은 좀 다를는지 모르나, 참다이 빚은 글책과 그림책일 때에는 굳이 ‘과학’이란 이름을 내어 붙이지 않으면서 몹시 아름다운 과학 동화요 과학 그림책이요 된다. 이를테면, 책이름은 참 잘못 붙였는데, 일본사람이 빚은 《도둑고양이 연구》(파랑새,2008)라는 그림책이 있다. 이 그림책은 ‘그냥 그림책’이다. ‘과학’이란 머리말을 달지 않는다. 이 그림책은 ‘도둑고양이’ 아닌 ‘골목고양이’나 ‘길고양이’라는 이름이 붙었어야 옳으나, 아무튼 이 그림책에서 살피어 담아낸 골목고양이 삶자락은 온통 과학이라 할 만하다. 그린이는 과학하는 사람답게 골목고양이 삶을 들여다보면서 이야기를 펼친다.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는 딱히 잘못 그렸다고 하는 대목은 없다. 그러나 살뜰히 그렸다고 하는 대목 또한 없다. 틀리게 그렸다고 하는 대목이란 없다. 그렇지만 살가이 그렸다고 할 만한 대목 또한 없다.

 숲에 들어가 보자. 수목원이나 동네 공원에 ‘사람이 억지로 심어 가꾸는’ 나무숲이 아닌, 나무와 풀과 짐승이 자연스러이 어우러져 있는 ‘사람이 오가는 길이 없는’ 그냥 숲에 들어가 보자. 억지로 키우는 숲이 아닌 곳에 들어가 보면 어떠한 나뭇잎을 만나는지 느껴 보자. 억지로 키우는 숲일지라도 얼마나 많은 나뭇잎이 있는지 헤아려 보자. 사람들이 으레 ‘참나무’라 하는 나무는 가짓수가 얼마나 많은지 곰곰이 살피고, 같은 소나무라 하더라도 나뭇잎이 얼마나 다른지를 바라보며, 감나무 한 그루에서 떨어져 흙바닥에 깔려 있는 가랑잎 모양이 얼마나 다른가를 느끼자. 나뭇잎 이야기는 지식이 아니라 삶이니까, 사람하고 같이 살아 주고 있는 고마우며 사랑스러운 나무이니까, 나무 한 그루 튼튼하게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싱그러운 나뭇잎 하나이니까, 이러한 목숨붙이와 자연을 꾸밈없이 가슴으로 받아들이자.

 그러고 보면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 같은 그림책은 ‘지식 그림책’이라는 이름이 아닌 ‘자연 그림책’ 같은 이름이 붙어야 한다. 처음부터 이와 같은 이름을 붙이려 하면서 책을 엮었어야 조금이나마 살가우며 아리따운 작품으로 거듭나지 않았겠느냐 생각한다.

 온갖 나무가 골고루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지 못하는 도시에 아주 많은 사람들이 살 뿐 아니라, 오늘날 거의 모든 아이들은 도시에서 바글바글거리는 틈바구니에 찡기어 있다. 오늘날 아이들은 아이답게 살아가지 못한다. 오늘날 아이들은 제 또래 동무나 손위 언니 오빠 형 손아래 동생하고 신나게 부대끼며 뛰어놀지 못한다. 나뭇가지를 함부로 꺾으면 안 되지만, 불을 땔 삭정이를 줍고 장작을 패거나 나무 열매를 따는 일을 할 겨를이 없다. 오늘날 아이들은 저잣거리조차 잘 가지 않고 마트에만 갈 뿐이다. 감이 감나무에서 열리는지, 배가 배나무에서 열리는지, 포도가 포도나무에서 열리는지를 모른다. 오늘날 과일밭은 얼마나 과일나무를 모질게 다루는지를 모르고, 옹글게 자라는 능금나무 한 그루를 보지 못한다. 복숭아나무를 모르고 살구나무를 모르면서 복숭아며 살구며 오얏이며 먹는다. 이러한 열매들을 오로지 ‘값 얼마짜리’로만 여긴다.

 어른이고 아이이고 ‘배추 한 포기 얼마, 배 한 알 얼마’ 하는 지식으로만, 숫자로만, 틀에 박힌 도시내기 쳇바퀴로만 바라본다. 어른부터 아이까지 나무 한 그루 사랑스레 얼싸안거나 쓰다듬지 못한다. 이리하여 그림책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는 그린이나 글쓴이나 엮은이나 ‘지식 그림책’ 울타리에서 스스로 헤어나올 수 없겠구나 싶다. 이 책을 장만하여 읽힐 어버이와 어린이 또한 이 그림책이 한결 참답고 착하며 곱게 다시 태어나야 하는 줄을 못 깨달을밖에 없다.

 가장 좋은 지식 그림책은 멧자락과 들판에 있다. 멧기슭이 바로 좋은 그림책이고, 너른 들판이 빛나는 그림책이다. 파란 바다와 하늘이 훌륭한 그림책이며, 멧새와 멧짐승이 고마운 그림책이다. (4343.10.23.흙.ㅎㄲㅅㄱ)


― 내가 만난 나뭇잎 하나 (윤여림 글,정유정 그림,웅진주니어 펴냄,2008.10.20./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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