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비룡소의 그림동화 7
존 버닝햄 지음,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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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지 않도록 보살펴 주셔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3] 존 버닝햄,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비룡소,1996)



 잠자리에서 아이하고 나란히 누워 그림책을 읽히는 재미란,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만 맛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로서 이와 같은 재미를 누릴 수 있고, 아이를 낳지 않은 어른이지만 이모이든 큰아빠이든 삼촌이든 하는 자리에서 이 같은 재미를 누릴 수 있어요. 낳은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사랑을 듬뿍 나눌 수 있으며, 함께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아이한테 사랑을 널리 나눌 수 있어요.

 졸린 아이가 어서 잠들 수 있도록 불빛을 살짝 어둡게 하고는 함께 눕습니다. 아이는 더 놀고 싶거나 말을 하고 싶은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종알종알 두런두런 합니다. 아무래도 그대로 고이 잠들지 못하겠구나 싶어, 엊그제는 《가을 아이》(이와사키 치히로 그림)를 읽었으니 오늘은 《겨울 아이》를 읽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겨울 아이》는 보드라운 수채그림이다 보니 흐릿한 불빛으로는 그림 나누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빠 혼자 실컷 보다가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이번에는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를 집어서 펼칩니다. 첫머리를 “플럼스터 씨와 플럼스터 부인이라는 기러기 부부가 있었습니다(3쪽).”로 엽니다. 음, 이 대목을 우째 읽나 걱정합니다. 도무지 우리 말이 아닌 말로 첫머리를 열기 때문입니다. “기러기 부부인 플럼스터 아저씨와 플럼스터 아줌마가 있습니다.”쯤으로는 적바림해야 할 텐데요. 우리들이 ‘이웃집 부부’를 일컬을 때 어떻게 말을 하나요. 함부로 ‘아무개 씨’ 하고 부르는 일은 없습니다. 어른들끼리는 이렇게 부르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달라요.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을 헤아린다면, 또 어른이라 할지라도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한다면, ‘이웃집 부부’를 가리키는 부름말을 달리 적바림해야 알맞습니다. 그나저나 기러기라 하면서 꽤나 뚱뚱해 보여 ‘기러기인데 너무 뚱뚱하다. 이렇게 뚱뚱해서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하는 말로 고쳐 읽고 다음 쪽으로 넘깁니다.

 다음 쪽에는 꽃이 나오고 알을 품는 어미 기러기 뒤편으로 노오란 해가 보입니다. 5쪽 그림에서는 기러기 부부가 제법 날씬해 보이는군요. 그래요. 기러기라 한다면 이쯤 되어야 날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그나저나 다음 쪽에서는 얄궂다 싶은 낱말이 두 군데 보입니다. 그림으로 보기에는 하나도 메마르거나 거칠지 않으나, “황량(荒凉)한 늪지(-地)에서 살았습니다(4쪽)”라고 나옵니다. 크고작은 꽃이 소담스레 핀 그림임을 살핀다면, “조용한 늪가에서 살았습니다”로 고쳐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5쪽에는 “가끔씩 쉿쉿거렸습니다”라는 글월이 나오는데 ‘가끔’으로 고쳐야 합니다. ‘가끔씩’은 틀린 글월입니다.

 아이는 5쪽에 나오는 해 그림을 보며 자꾸 ‘달’이라고 말합니다. 으음,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달일 수 없습니다. 아이 볼을 살살 꼬집으며, 녀석아 너 달이 아무리 좋아도 모두 달이라고만 하면 어떡하니, 이 노랗고 동그란 그림은 해야, 하고 말합니다.

 10쪽에 이르자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가 비로소 나옵니다. 모두 다섯 남매인 보르카네인데, 보르카는 홀로 깃털이 없습니다. 처음 태어날 때부터 깃털이 없다는군요. 저런, 기러기한테 깃털이 없으면 어찌 날지? 어찌 헤엄치지? 그나저나 10쪽에서도 “플럼스터 씨와 플럼스터 부인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같은 글월을 “플럼스터 아저씨와 플럼스터 아줌마는 걱정이 되었습니다”로 고쳐 주어야겠습니다. 서양 그림책이나 문학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으레 ‘아무개 부인(婦人)’처럼 옮기는 분들이 있는데, 혼인한 여자를 일컫는 부름말로는 ‘부인’이 아닌 ‘아줌마’나 ‘아주머니’를 적어 넣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정말(正-) 드문 경우(境遇)인데(10쪽).” 같은 글월은 “참으로 드문 일인데.”나 “참말 드문데.”로 손질합니다.

 다음 쪽을 펼칩니다. 기러기 아주머님이 뜨개질을 합니다. 아, 뜨개질을 하네요. 우리 집 애 엄마도 한창 뜨개질을 하는데. 둘째를 몸에 밴 뒤로는 뜨개질에 마음을 쏟습니다. 몸이 무거우며 힘들고, 마음 또한 무겁고 고단한 애 엄마는 뜨개질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문득문득 느끼는데, 나라밖 그림책을 보노라면 어머니나 아가씨나 아이가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어렵잖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아저씨나 총각이 뜨개질을 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요. 저도 뜨개질은 잘 못합니다. 그림책에만 나오는 모습이라 여길는지 모르지만, 나라밖 사람들도 ‘옷을 사 입히곤’ 하는 가운데, ‘집에서 손수 뜨개질을 해서 옷을 마련하여 입히곤’ 합니다. 어느 집에서나 흔한 삶이고, 누구한테서나 쉬 찾아보는 삶이에요. 그림책이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라서 깃털옷을 마련해 주려고 뜨개질을 한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뜨개질을 하고, 누구나 뜨개질을 즐기는 삶이기에, 이 그림책에도 살포시 ‘뜨개질 살림살이’가 묻어납니다. 뜨개질 살림살이가 묻어나지 않는 나날이라면, 아마 이 그림책 펼침새는 ‘플럼스터 아줌마’가 저잣거리 마실을 하면서 깃털옷을 돈 주고 사 입히는 흐름으로 되었겠지요. 그나저나 13쪽에서도 세 군데를 손질해야 합니다. 먼저, “깃털을 짜기 시작(始作)했습니다.”는 “깃털을 짭니다.”로 손질하고, ‘물론(勿論)’은 ‘다만’으로 손질하며, “회색(灰色) 털옷”은 “잿빛 털옷”으로 손질합니다.

 이제 기러기 보르카는 어머니한테서 깃털옷을 받습니다. 보르카도 헤엄치기를 익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르카네 언니 오빠는 보르카를 놀립니다. 깃털 없이 옷을 입었다면서 놀립니다. 가만히 누워 그림책을 함께 보는 아이한테 말합니다. ‘너한테 동생이 태어났을 때 이렇게 놀리지 않겠지? 동생이 뭘 잘못해도 함부로 놀리면 안 돼요. 엄마 아빠가 너를 사랑해 주듯이 너도 동생을 사랑해 주어야 해요. 엄마 아빠가 너한테 밥을 먹여 주듯이, 너도 동생한테 밥을 먹여 주어야 해요. 엄마 아빠가 너를 업어 주듯이, 너도 동생을 업어 주어야 해요.’

 아프거나 힘들거나 힘이 여린 동무나 동생이라면 마땅히 감싸거나 돌보거나 더욱 사랑해야 할 텐데, 보르카네 언니 오빠는 참 못되었습니다. 게다가, 보르카네 엄마랑 아빠랑 너무 바쁜 탓에 보르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뿐더러, 보르카네 언니 오빠가 보르카를 따돌리는 줄 깨닫지 못하는군요. 외로운 아이를 달래지 못하고, 마음이 좁은 아이들을 다스리지 못할 만큼 무슨 일에 그리도 바빠야 할까요. 15쪽에서도 몇 군데 글월을 손질해야 합니다. “이제 어린 기러기들은 날기와 헤엄치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는 “이제 어린 기러기들은 날기와 헤엄치기를 배웁니다.”나 “이제 어린 기러기들은 날기와 헤엄치기를 배울 때가 되었습니다.”로 손질하고, “상당(相當)히 뒤처졌지요.”는 “몹시 뒤처졌지요.”로 손질합니다. 15쪽 한켠에는 ‘상당히’라 나오다가 곧바로 ‘몹시’라고도 나옵니다. 알맞게 잘 쓴 대목이 있으나, 제대로 못 쓴 대목이 나란히 있군요. 16쪽에서는 “날은 점점(漸漸) 추워지고”라 나오는데 “날은 차츰 추워지고”나 “날은 자꾸 추워지고”로 손질합니다. “먹이 구(求)하기가”는 “먹이 얻기가”로 손질해 줍니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이래저래 얄궂다 싶은 글월은 모조리 손질해서 읽습니다. 책에 적힌 그대로 읽힌다 해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아이가 어릴 적부터 얄궂은 글월을 익숙하게 듣도록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림책을 읽으며 볼펜으로 죽죽 줄을 긋고는 새 낱말이나 글월을 적어 넣습니다. 아직은 아이가 어려 아빠가 읽어 주지만, 나중에 아이가 스스로 읽을 나이가 되면, 옳고 바른 글월을 스스로 소리내어 읽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가잖아요. 세 살 적 듣는 말이 여든까지 갑니다. 바로 우리 아이가 옛말에 일컫는 세 살입니다. 세 살 아이가 좋은 그림책 하나를 아빠랑 함께 읽으면서 좋은 글월과 좋은 목소리와 좋은 잠자리에서 좋게좋게 맞아들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좋은 마음을 가꾼다고 느낍니다.

 다음 쪽을 넘깁니다. 그림책을 읽는 아빠는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이 언니랑 오빠들, 또 엄마랑 아빠는 보르카를 내버려 두고 저희끼리만 날아가겠다고.

 참말 모두들 보르카만 두고 날아갑니다. 보르카는 외롭고 슬퍼 홀로 웁니다. 그러다가 마음씨 좋은 개하고 뱃사람을 만납니다. 다시금 마음씨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마음씨 너그러운 동무를 처음으로 만납니다.

 보르카를 낳고 기른 어버이 또한 마음씨가 나쁜 기러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더욱 따뜻하고 너그러이 품에 안지 못했습니다. 제 아이한테 하나하나 이름을 지어 주었으면서, 어찌 제 아이를 잊고는 따뜻한 곳을 찾아 날아갈 수 있나요. 고작 깃털옷 한 벌 뜨개질해서 마련한 다음 싹 잊을 수 있나요.

 보르카는 외로운 가운데 홀로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며 드디어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랑스러운 벗을 만납니다. 물보다 짙은 피라지만, 물만큼 짙지 못한 피가 되었어요. 앞으로 보르카가 좋은 짝꿍을 만나 새 보금자리를 튼다면, 그때에 보르카는 어떠한 삶을 꾸리려나요. 보르카가 어린 날 맞이했듯이 살아가려나요. 보르카가 어린 날 모질게 겪은 만큼 한결 따사로우며 너그러운 매무새로 살아가려나요. 보르카를 잊어버린 어버이랑 언니 오빠는 앞으로 어떠한 삶을 일구려나요. 혼자서 춥고 외로워 벌벌 떨다가 죽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한식구를 쉬 잊어버리는 기러기들이 꾸릴 삶은 어떤 모습이려나요.

 이제 그림책을 덮습니다. 그림책을 보는 내내 아이는 ‘해’하고 ‘달’ 모습만 찾습니다. 아이는 다른 그림책을 볼 때에도 해랑 달을 몹시 사랑합니다. 동글동글한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반토막 달을 보거나 날씬한 달을 보면서도 ‘달’인 줄 압니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밤마다 달을 보니까 그림책에 나오는 달을 또렷이 깨닫는다 할 텐데, 아이 둘레에서 쉬 마주하는 사람과 삶과 자연과 물건을 그림책에서 마주할 때에 한결 살가우며 가까이 받아들인다 할 만한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책에서 제아무리 따사롭고 넉넉한 사랑을 다룬달지라도, 나 스스로 살아가는 보금자리에 사랑이 없다면 그림책은 덧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즐거운 나날이 아니라 한다면, 제아무리 즐거운 나날 가득한 그림책을 읽힌들 부질없습니다.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인문책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책으로만 즐거울 수 없고, 책으로만 아름다울 수 없으며, 책으로만 훌륭할 수 없어요. 내 삶부터 즐겁고 아름다우며 훌륭해야 합니다. 나부터 내 보금자리에서 따사롭고 너그러우며 맑게 빛나야 합니다. 그림책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는 여러 이야기와 알맹이를 조곤조곤 들려주는데, 이런 얘기 저런 삶을 낱낱이 헤아리거나 곱씹으며 고운 사랑과 너른 믿음을 익히도록 이끄는 일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사랑이든 저런 믿음이든 가르치거나 이야기하기 앞서, 부디 내 삶자리에서 내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하고 오순도순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몇 가지 낱말을 더 손질해 봅니다. 18쪽에서 “비가 내리게 되었습니다.”는 “비가 내립니다.”로 손질하고, “떠날 때가 온 거예요.”는 “떠날 때가 왔어요.”로 손질하며, “침침(沈沈)한 하늘”은 “어두운 하늘”이나 “어슴프레한 하늘”이나 “어두컴컴한 하늘”로 손질합니다. 20쪽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始作)했거든요.”는 “비가 내렸거든요.”로 손질하고, 22쪽에서 “기러기라는 걸 알고는, 개는 짖는 걸 멈추고”는 “기러기인 줄 알고는, 개는 더 짖지 않고”로 손질하며, 23쪽에서 “어찌나 피곤(疲困)한지”는 “어찌나 고단한지”나 “어찌나 지쳤는지”로 손질합니다. 24쪽에서 “매칼리스터 선장의 배였습니다.”는 “매칼리스터 선장이 모는 배였습니다.”로 손질하고, “항구를 떠나기로 결정(決定)했습니다.”는 “항구를 떠나기로 했습니다.”로 손질합니다. 26쪽에서 “파울러는 물론(勿論)이고”는 “파울러를 비롯해서”로 손질하고, “곧 친(親)해졌어요.”는 “곧 가까워졌어요.”로 손질하며, “대신(代身)에 맛난 음식을”은 “그리고 맛난 음식을”로 손질합니다. 28쪽에 ‘궁리(窮理)했습니다’는 ‘생각했습니다’로 손질하고, 29쪽에 “선장은 보르카를 울타리 위에 내려놓았습니다.”는 “선장은 보르카를 울타리 안쪽에 내려놓았습니다.”로 손질합니다. 29쪽 그림을 보아도 선장은 팔을 뻗어 보르카를 울타리 ‘안쪽에’ 내려놓는 모습인데, 번역 글월은 ‘위에’로 되었으니 잘못입니다. 31쪽에 “전(全)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는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로 손질하고, “특(特)히, 퍼디넌드라는 기러기가 친절(親切)했습니다.”는 “누구보다 퍼디넌드라는 기러기가 따뜻했습니다.”로 손질하며, 32쪽에 “기러기를 보게 될 겁니다.”는 “기러기를 볼 수 있습니다.”로 손질합니다. 31쪽을 보면, “큐 가든(garden)에는 온갖 이상(異常)야릇한 새들이 다 있었거든요.”라는 대목이 있으나, ‘이상야릇한’이라는 낱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온갖 새들이”나 “온갖 빛깔 새들이”나 “온갖 모양 새들이”라 적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큐 가든’이라는 이름 또한 ‘큐 공원’쯤으로 고쳐야겠지요.

 투박한 듯하면서 투박하지 않고, 어두운 듯하면서 어둡지 않으며, 슬픈 듯하면서 슬프지 않은 그림책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라고 느낍니다. 사랑스레 즐길 만한 그림책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레 즐길 수 있도록 1996년에 처음 나온 그림책 번역을 앞으로 언제가 되든 아무쪼록 차근차근 따사롭게 어루만져 다시 내놓을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도, 이웃도, 자연도, 마을도, 살림살이도, 책도 외롭지 않도록 보살펴 주셔요. (4343.11.21.해.ㅎㄲㅅㄱ)


―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존 버닝햄 글·그림,엄혜숙 옮김,비룡소 펴냄,1996.2.1./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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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아이 - 이와사키 치히로의 자연의 아이들, 초등학생 그림책 10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다치하라 에리카 글, 백승인 옮김 / 달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하루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2] 이와사키 치히로·다치하라 에리카, 《가을 아이》(달리,2005)



 저녁이 깊어져 달빛이 환하게 비칠 무렵이면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를 부르기 앞서 으레 밖으로 나와 멧기슭 쪽으로 달려가서 쉬를 눕니다. 멧기슭 도랑에서 쉬를 눌 때면 아이는 아빠를 따라 바깥문을 열고 내다보면서 “아빠, 쉬?” 하고 묻다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빠, 달!” 하고 외칩니다. “그래, 달이지? 달이 환하지? 이제 들어가자.” 하고 말하며 아이하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방으로 들어갈 때에 그림책 두 권쯤 챙깁니다. 아빠가 먼저 이불을 뒤집어쓰며 눕습니다.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는 그냥 혼자 뒹굴고 싶어 안 들어오기도 하지만, 아빠 팔을 베개 삼아 눕고 싶기도 합니다. 팔베개를 하며 그림책을 함께 봅니다. 이러다가 일어나고, 또 눕고 다시 일어나기를 끝없이 되풀이합니다.

 저녁에 그림책을 읽힐 때마다 느끼지만, 아이가 씽씽쌩쌩 놀 때에는 그림책을 읽히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어느 만큼 신나게 논 다음 눈이 가물가물할 때에 읽혀야지 싶습니다. 그러나 눈이 가물가물거리다가도 어느 때에 번쩍 깨어나 다시금 놀곤 합니다. 불을 다 끄고 어른들이 모두 누웠다 해서 잠드는 아이는 아닙니다. 지난밤에는 세 시에 깨어나 두 시간 남짓 잠들지 않으면서 노래를 하고 아빠를 부르고 응가를 한다 하고(그러나 응가는 안 했습니다) 끝없이 놀아대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만큼 하루가 다르게 뛰놀고파 하는구나 싶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 싶어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픈 애 엄마에다가 씩씩한 아이 하나를 애 아빠 홀로 건사하기란 틀림없이 벅찹니다. 그런데 튼튼한 어른 두 사람일지라도 아이 하나 돌보기란 만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함께 살아가면 한결 수월하고, 다른 살붙이가 한둘쯤 있다면 제법 짐을 덥니다. 그리고, 집안 살붙이가 여럿일 때에는 일거리를 여럿이 나누어 맡는다기보다 ‘집안 살림을 하는 가운데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놀라운 모습’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즐겁거나 기쁘겠다고 느낍니다.


.. 실뜨기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할마니였습니다. 리본 매기를 가르쳐 준 사람도 할머니였고, 세 가닥 땋기를 가르쳐 준 사람도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의 손은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 가을에 피는 꽃 이름과 나무 열매의 이름을 가르쳐 준 할머니. 도토리 팽이랑 억새 초롱을 만들어 준 할머니. 할머니는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 할머니는 이제 여자 아이처럼 뛰어오르거나 달릴 수 없습니다. 멀리 걸을 수도 없습니다. 너무 늙어서 다리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  (15∼17쪽)


 어제는, 아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느 날처럼 신나게 놀아대다가 까무룩 잠들었습니다. 아빠가 껍질을 벗겨 준 귤 한 알을 들고 한쪽씩 뜯으며 쪽쪽 빨거나 아빠한테 먹여 주며 마지막 놀이를 하더니 그예 이 모양 그대로 곯아떨어졌습니다. 귀엽게 잠든 아이를 잠자리에 눕히며 아빠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요 며칠 아빠가 몸이 퍽 고단해 기운을 차리느라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 장마당 마실을 다니지 못했는데, 이듬날 읍내 장마당에는 꼭 자전거수레에 태워 마실을 해야겠다고. 장마당을 휘 한 바퀴 돌며 아이한테 찐빵도 사 주고 까까이든 사탕도 사 주어야겠다고. 아이가 잘 먹는 도토리묵 한 모를 사고, 귤이랑 능금이랑 한 봉지씩 장만해야겠다고.

 그림책을 볼 때이든 길을 걸을 때이든 자전거만 보면 ‘자전거!’ 하고 외치는 이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싶어 몸이 달 텐데, 아빠가 튼튼하지 못하면 날마다 서운한 빛으로 하루를 마감하겠지요. 아빠이든 엄마이든 몸이 조금 더 튼튼해서 날마다 멧등성이도 타고 자전거도 타야 훨씬 즐겁게 하루를 보낼 테지요.

 여기에 할머니랑 이모랑 삼촌이랑, 또는 큰아빠까지 함께 살아간다면 여러 사람 손에 따라 여러 가지 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으니 더 신날 테고요. 시골집이라 또래 동무 만나기 더더욱 힘들지만, 이웃한 이오덕자유학교 언니 오빠들이랑 얼크러지는 날이면 밥먹기조차 잊으며 참 잘 뛰어다니며 놉니다. 놀려고 태어났으며, 놀고 싶어 하는 아이이니, 집안에서 논다며 이 책 저 책 이 물건 저 물건 마음껏 늘어놓을 때에는 함부로 꾸중하지 말아야지 싶습니다. 마음껏 놀도록 한 다음 다른 놀이를 하려 할 때에 ‘네가 어지른 이 물건들 치우고 놀아야지.’ 하고 한 마디를 하면서 함께 치워야지 싶습니다.


.. 다음날부터, 시오리는 (고양이) 미미에게 꼭 맞는 예쁜 조끼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짜도, 미미는 금세 누더기로 만들어 버릴 거야. 고양이는 조끼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엄마가 웃습니다. “입혀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에요.” 시오리는 그렇게 말하며, 부지런히 뜨개바늘을 움직입니다. “조끼가 다 되면 장화도 만들어야지. 미미의 발은 네 개니까 장화가 두 켤레 필요하겠다. 예쁘게 만들어 줄게. 기다려, 미미야.” 시오리는 뜨개를 뜨면서 말했습니다. 아직 아무도 미미의 비밀을 모릅니다 ..  (30쪽)


 그림책 《가을 아이》를 아이랑 함께 읽습니다. 아이는 아빠 팔베개를 한 채 함께 드러누워 읽습니다. 《가을 아이》는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에 다치하라 에리카 님이 글을 붙여 《봄 아이》 《여름 아이》 《겨울 아이》가 나란히 함께 나온 그림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산골자락에서 가을을 보내는 아이하고 가을 이야기를 나누려고 네 가지 가운데 《가을 아이》를 먼저 뽑아 읽습니다. 이 그림책들은 이와사키 치히로 님이 숨을 거둔 다음 어린이문학을 하는 분이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을 살피며 글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와사키 치히로 님은 1974년에 숨을 거두었고, 이 그림책은 일본에서 1985년에 나왔거든요.

 《가을 아이》 마지막 쪽을 보면, 뜨개질을 하는 계집아이 그림이 나옵니다. 이제 고작 초등학교 낮은학년쯤 되어 보이는데 큼직한 뜨개바늘을 꽤 잘 놀립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무렵에도 학교에서 남녀 가리지 않고 실과 공부를 하며 뜨개질을 익혔습니다. 2학년은 아니었지 싶고, 3학년부터 뜨개질을 했다고 느낍니다. 바느질은 2학년부터 했나, 바느질도 3학년부터 했나 싶어요. 저는 국민학교 다닐 때에 바느질을 하며 쓰던 반짇고리를 아직 잘 건사해 놓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마음이었다고 딱히 말할 수 없지만, 나중에 커서 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가 되면, 내 아이 어버이로서 내가 어린 나날 바느질을 익히며 쓰던 이 반짇고리를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즈막에 애 엄마는 한창 뜨개질을 하는데, 뜨개질을 하며 쓸 바늘을 ‘그럭저럭 좋은 녀석’으로 삼십만 원 웃도는 값을 치르며 장만했습니다. 그럭저럭 좋은 녀석이니 아직 바늘을 다 장만하지 않았어도 이만한 값이라 합니다. 꽤 좋은 녀석이라면 바늘을 다 장만하기까지 백만 원이 넘겠지요. 바늘 값을 치르느라 허리가 휘청휘청하는데, 애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이 바늘은 우리 아이한테 물려줄 만한 바늘이에요.’

 하기는. 500원짜리 값싼 바늘은 장마철만 되어도 곰팡이가 핍니다. 그럭저럭 좋은 녀석쯤 되면 장마철이고 뭐고 곰팡이 걱정이 없으며 바느질하는 손이 덜 아프답니다. 애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이 되새깁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값싼 바늘을 너무 값싸게 다루기만 하지만, 나라밖에서는 뜨개바늘쯤 되면 ‘아주 좋은 녀석으로 알뜰히 장만해서 아이들한테 두고두고 물려주어 쓰도록 한다’더군요. 그래요.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우리들은 아이와 아름다이 즐길 좋은 책을 장만해 놓아야 하고, 아이가 나중에 기쁘게 물려받아 쓸 만한 뜨개바늘이며 냄비이며 수저이며 살림살이를 갖추어야겠지요. 한 번 쓰고 버릴 물건이 아니라, 쉰 해 백 해 즈믄 해를 보낼 만큼 튼튼하고 좋은 살림살이와 연장을 차곡차곡 건사해야겠지요. 더 많은 돈이 아닌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살림살이를, 더 큰 집이나 더 빠른 자동차가 아닌 한결 믿음직하며 참다운 연장을, 우리 조그마한 멧기슭 집에 하나둘 마련해야겠지요. 즐거이 살아갈 만한 터전을 곱게 일구어야지, 돈이 될 만한 땅을 잔뜩 사들이는 어버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책 《가을 아이》를 빚은 이와사키 치히로 님은 인권운동가로 일하며 벌이를 못하는 남편에다가 병든 어머니에다가 나이든 시어머니랑 시아버지까지 모시는 가운데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독신이라면 보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비록 몸이 고단할지라도 나는 번잡한 나의 가정 속에서 인간으로서 균형 잡힌 감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야말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나는 소중한 인간관계를 뿌리치고서 어린이를 그릴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림책에 딸린 안내종이에 적힌 말).”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고작 살붙이 둘을 돌보면서 글을 끄적거린다고 용을 씁니다. 이듬해에 둘째가 태어나면 살붙이 셋을 돌보며 글을 끄적거려야 하겠지요. 아픈 옆지기하고 신나게 놀고픈 어린이를 돌보는 나날이란 참 힘겹습니다. 퍽 벅찹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겹고 벅차기에 날마다 새로 기지개를 켜며 새벽 일찍 일어나 글 몇 자락 쓰자고 다짐을 하고, 아침부터 밥하고 찌개 끓이며, 설거지에 뒤치닥거리에, 아이하고 놀아 주기에, 집안 치우기에, 빨래에, 무엇무엇에 힘을 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3.11.20.흙.ㅎㄲㅅㄱ)


― 가을 아이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다치하라 에리카 글,백승인 옮김,달리 펴냄,2005.8.5./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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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철학 그림책 1
홍성혜 옮김, 소피 그림, 라스칼 글 / 마루벌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손 잡고 나란히 길을 걷는 마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1] 라스칼·소피, 《문이》(마루벌,1995)



 “문이가 태어났을 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2쪽)”다고 합니다. “마침내 먹을 것이 다 떨어졌(6쪽)”고, 문이를 낳아 기르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바다 저 멀리로 문이를 떠나 보내려(6쪽)”고 “사랑하는 아기 문이를 상자 안에 소중히 담(6쪽)”습니다. 상자는 큰 물결을 맞으면서도 멀디먼 바다를 건너는 동안 가라앉지 않습니다. 아이가 담긴 상자는 이웃나라에 얌전히 닿습니다. 또한, 이웃나라 바닷가에 닿은 상자를 알아본 사람이 있고, 이들은 이 상자에 담긴 아이를 고이 껴안으며 기르기로 합니다. 이웃나라에서 어린 문이를 받아들여 키운 어버이는 문이가 꽤 컸다고 느낀 어느 날, “어느 봄날 이른 아침(24쪽)”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들려줍니다. 이때 새 어머니와 새 아버지는 문이한테 “문이를 데리고 온 이야기와 사랑하며 살아온 지난 이야기 모두(24쪽)”를 들려줍니다. 이때부터 문이는 “더 자주 바닷가에 나가게 되(28쪽)”었고, “바다 저쪽 끝에 있는 아빠와 엄마도 문이를 사랑했었다(28쪽)”고 여깁니다.

 저를 낳아 기르던 어버이가 저를 버린 줄 알았을 때 어떤 마음일까요. 저를 낳아 기르던 어버이가 당신들은 굶주리다 못해 숨을 거둔다든지, 또는 싸움판에서 끔찍하게 숨을 거둔다든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제 어버이가 당신들은 숨을 거두면서 저 혼자 살아남도록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알았을 때에는 어떤 마음이려나요.

 길디긴 싸움판이 그치지 않을 때, 누구도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울 테고, 시골에서는 애써 거둔 곡식을 자꾸 빼앗길 테지요. 돈도 밥도 집도 옷도 얻기 어려우며, 삶마저 괴롭겠지요.

 마지막 곡식이 떨어질 무렵이면 싸움이 끝나 주리라 믿다가 사랑스러운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는지 모릅니다. 마지막 곡식이 떨어지기 앞서 싸움판 나라를 아이와 함께 떠나 평화롭고 따사로운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는지 모릅니다. 굶어죽더라도 함께 굶어죽고, 싸움판에서 총이나 대포에 맞아 죽더라도 함께 죽어야 했을는지 모릅니다. 아이만 바다 너머로 보낼 노릇이 아니라 어버이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널 노릇이었는지 모릅니다. 아이는 용케 좋은 어버이를 새로 만나 즐거우며 따사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지만, 아이는 아무런 새 어버이를 만나지 못하면서 더 괴롭게 굶어죽을 수 있습니다. 아이는 새 어버이를 만났다지만 못된 어버이를 만나 아파 하고 슬퍼 하며 삶을 마감할 수 있어요. 아이를 떠나보내고 얼마 있지 않아 싸움이 끝났다든지, 뜻밖에 먹을거리를 넉넉히 얻을 수 있었다면, 이 어버이들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서 아이를 누군가한테 떠나보낸다 한다면, 더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 셈입니다. 도무지 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누리는 아이 어버이들이 당신 아이를 더는 끌어안지 못하도록 내몰곤 합니다. 어버이와 아이를 갈라 놓고, 어버이와 아이한테 생채기가 남도록 짓누르곤 합니다.


.. 문이는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전쟁이 미웠고, 문이를 낳아 바다에 띄워 보낸 바다 저쪽 끝에 있는 아빠와 엄마도 미웠습니다 ..  (26쪽)


 전쟁은 사람이 일으킵니다. 전쟁은 어른이 일으킵니다. 전쟁을 하는 어른들은 남자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까닭은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짓밟은 다음, 돈은 돈대로 거두어들이고 이웃나라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흥청망청 노닥거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손수 제 밥거리를 얻으려는 사람은 이웃을 해코지하지 않습니다. 알맞게 일하여 알맞게 거두어 알맞게 먹고사는 사람은 다툼질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너무 큰 돈·이름·힘을 물려받는다든지, 얼마 일하지 않고도 지나치게 큰 돈을 얻어들이는 사람들이 다툼질을 하고 맙니다. 아무렇게나 쓰고도 어마어마하게 남는 사람들이 자꾸자꾸 이웃을 짓밟으며 더 가지려 하고 더 누리려 합니다.

 우리 삶터는 한결 발돋움하는 삶터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터는 서로서로 즐거우며 아름다운 삶터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고속도로가 더 생기거나 고속철도가 더 늘어난다고 우리 삶터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큰물이 날 때에 물이 넘치니 ‘큰 물줄기 네 곳’을 손질해야 한다지만, 큰물이 나는 밑뿌리는 그대로 둔 채 토목건설만을 해댈 때에는 또다른 큰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좋아하는 삶을 찾아야 합니다. 즐기는 삶을 느껴야 합니다. 고운 삶을 껴안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믿음직한 삶을 누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느긋하면서 튼튼하고 씩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착한 삶을 아끼고, 참다운 삶을 돌보아야 합니다. 기쁜 삶을 맞아들이도록 나와 내 살붙이와 내 아이와 내 이웃과 내 동무와 함께 기쁜 일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 어느 가을날 저녁, 문이는 어릴 때 좋아했던 모든 것을 작은 대나무 상자 속에 담았습니다 ..  (30쪽)


 그림책 《문이》를 읽습니다. 그림책 《문이》에 나오는 ‘문이’는 전쟁 때문에 모든 삶이 바뀝니다. 전쟁이 아니라면 제 어버이를 잃지 않았으며, 새 어버이를 만나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제 어버이를 잃는 아이는 많습니다. 교통사고 때문이든, 길에서 그만 어버이를 잃든 하면서 제 어버이를 잃는 아이가 많습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터지지는 않는 이 나라에서도 아이를 먹여살릴 길이 없어 아이를 누군가한테 맡겨야 하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다른 한켠에서는 넉넉히 먹고살 뿐 아니라 돈이 가득하거나 밥쓰레기가 흘러넘칩니다. 집에서 밥을 먹든 바깥에서 밥을 사먹든, 알맞게 밥을 먹어 밥쓰레기가 안 나오도록 마음쓰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내 몸을 생각하며 밥을 먹는 사람들이지만, 내 이웃 몸과 삶을 헤아리며 밥을 나누는 일은 좀처럼 드뭅니다.

 새벽과 아침과 낮에 해를 느낄 수 있다면, 밤에 달과 별을 올려다볼 수 있다면,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결을 맞아들일 수 있다면, 들풀과 들꽃과 들새 이름을 하나하나 욀 수 있다면, 이웃사람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살아갈 수 있다면, 미움이나 다툼이나 겨룸이나 싸움이 아닌 사랑이나 따스함이나 믿음이나 너그러움으로 어깨동무할 텐데요. 서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좋은 보금자리로 안아들이는 삶이 될 텐데요.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가 아닙니다. 많이 가졌어도 모자랄 사람이 있고, 적게 가졌어도 넘친다 여길 사람이 있습니다. 알맞게 가지고, 알맞게 나누며, 알맞게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와 어깨동무를 하면서 서로 기쁘게 살자고 하는 곳이 사랑이면서 평화입니다. 나와 네가 어깨동무를 안 하고, 나와 네가 서로 기쁘게 안 살려 하는 모든 자리는 싸움판입니다. (4343.11.18.나무.ㅎㄲㅅㄱ)


― 문이 (라스칼 글,소피 그림,홍성혜 옮김,마루벌 펴냄,1995.5.15./7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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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쪽빛문고 2
가코 사토시 지음, 이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제주 올레길·인천 골목길·우리 살림집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9] 가코 사토시,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청어람미디어,2006)



2006년 5월 1일부터 이레에 걸쳐 제주섬 마실을 했습니다. 2010년 11월 13일부터 제주섬 마실을 합니다. 네 해 만에 제주섬 마실을 하면서 들뜨는 마음이고 벅차는 가슴입니다. 옆지기랑 제주마실을 처음 하니 즐겁고, 아이하고도 제주마실은 처음이기에 기쁩니다. 아이는 제가 제주를 밟는지 울릉을 밟는지 알까 궁금합니다. 오늘 밟는 이곳 이 느낌 이 이야기를 앞으로 언제까지 고스란히 이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함께 제주마실을 하는 동안 아빠가 찍어 놓은 사진을 돌이키면서 ‘아, 내가 어렸을 때 제주섬은 이런 모습 이런 삶 이런 이야기 깃든 곳이었네.’ 하고 되새겨 줄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문화나 역사나 예술이라 할 때에 으레 ‘예전 사람들이 해 놓은 무언가’를 들춥니다. 서른 해가 되었다든지 쉰 해가 되었다든지 백 해가 되었다든지 이백 해나 오백 해가 되었다든지 이야기합니다. 어제 서귀포로 넘어와 이중섭거리 한켠에 자리한 삼만 원짜리 잠집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이곳은 예전부터 이중섭거리는 아니었고, 이중섭 님을 기리는 집이나 등불이나 바닥돌 또한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새롭게 마련한 기림집이요 기림돌이요 기림길입니다.


이중섭 님이 살던 동안이라든지, 이중섭 님이 바지런히 그림을 그리던 동안이라든지,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중섭 님을 기리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박물관이든 전시관이든 도서관이든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곱다시 건사하는 일 또한 거의 없습니다. 이제는 제주섬 현무암 돌담길이 멋스러운 문화유산인 듯 여기지만, 제주섬 여느 살림집마다 현무암을 쌓아 돌담을 이룬 모습은 그예 ‘삶’이었습니다. 남달리 보이려 한 모습이 아니요, 무슨무슨 문화를 이루고자 이룩한 모습이 아니에요. 한때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현무암 돌담길은 시멘트블록 돌담길로 바뀝니다. 띠를 이은 살림집은 슬레트나 개량기와 지붕으로 바뀝니다. 흙벽에는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를 바르다가, 이제는 물감으로 갖가지 그림을 그려 놓습니다.


제주 시내 뒤켠 골목을 걷습니다. ‘올레길’ 아닌 ‘여느 살림집 이어진 골목길’을 걷습니다. 웬만한 살림집마다 문패가 붙은 모습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나무로 새긴 문패, 돌로 빚은 문패, 플라스틱 문패 들이 골고루 어우러져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대문을 보고 쇠로 만든 대문을 봅니다. 나무 대문이며 문고리이며 오래도록 닳고 낡은 대문이요 문고리입니다. 모두들 얌전히 붙어 있습니다. 저 문고리를 들어 대문을 탁탁 치면 ‘울림 종’ 노릇을 했지, 하고 떠올립니다. 예전에는 여느 살림집에 누름단추 따위란 따로 없었고, 누름단추가 처음 생길 때에는 ‘삐이이!’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참말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시끄러운 소리를 ‘더 발돋움한 모습’이라거나 ‘현대 물질문명을 누리는 모습’처럼 여겨, 나무대문에 쇠문고리 있는 집조차 누름단추를 비싼값 치르며 달곤 했습니다. 우리 애 엄마도 알까 궁금한데, 지난날에는 우체부 일꾼이 편지를 갖다 주면서 쇠문고리를 탁탁 나무대문에 치면서 “편지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나무대문을 다 열지 않고, 나무대문 한쪽에 작게 낸 쪽대문을 열어 편지를 받았어요. 안에서 “네!” 하며 나오지 않으면, 대문 밑으로 살짝 낸 틈에 편지를 밀어넣지요.



.. 우리는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면서 우리는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 (2쪽)



제 고향마을인 인천에서도 올해 가을부터 ‘제주 올레길을 닮은 걷는 마실’ 길을 마련했습니다. 인천은 예부터 ‘서울로 올려보낼 물건’을 바닷가에서 받아 수레에 실어 나르는 곳이었습니다. 개항기라고 하던 지난날에는 서울로 들여보낼 ‘새로운 서양 문물’을 언제나 맨 처음으로 풀어 놓고 ‘시험을 해 보며 잘잘못을 살피는’ 곳이었습니다. 한국땅에서 ‘맨 처음이라 손꼽는 새 문물’은 거의 모두 인천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철도라든지 극장이라든지 운동경기라든지 종교라든지 ……. 가장 오래된 야구장 또한 인천에 있었으나 하루아침에 사라졌어요. 뭐, 다 재개발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뜻있는 분들이 마련해 보았다는 ‘두 다리로 걸으며 문화와 역사를 헤아리는 길’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걷는 길인가를 가늠해 보면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습니다. 문화와 역사란 죽은 유물이나 굳은 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머나먼 옛날이나 까마득한 지난날이 문화와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오늘과 살아낼 글피가 문화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들 눈썰미로 오늘 삶터를 바라봅니다. 아이들한테 오늘 삶터가 어떠한 오늘 삶터요 어떠한 글피 삶터가 될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어른들로서는 ‘예전과 견주어 오늘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데, 아이들한테 오늘은 오늘입니다. 아이들한테 오늘이 어제일 수 없고 글피이지 않아요. 언제나 오늘은 오늘이에요.


아이들은 오늘을 즐기려고 놀이를 합니다. 오늘을 즐기는 놀이를 하지, 어제를 돌아보는 놀이라든지 글피를 맞아들이는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즐거울 놀이를 함께 나누는 아이들입니다.


옆지기하고 아이가 손 잡고 제주 골목을 걷거나 이곳저곳 다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생각합니다. 아빠 눈썰미로 보자면, 이 모습이건 저 모습이건 그닥 새롭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이한테는 모든 모습이 처음이요 모든 이야기가 오늘 이 자리 이야기입니다. 아이한테는 앞으로 다섯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또 고작 한 해 뒤이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함께 일군 이야기가 더없이 새로우면서 빛나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이는 새 삶을 일구며 새 이야기를 긷고, 새 나날을 맞이하며 새 꿈을 키웁니다.


제주시 골목을 거닐며 사진을 찍다가 자꾸자꾸 느낍니다. 제주라 해서 더 남다르거나 나을 수 없는 셈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깨닫거나 헤아릴 수 있는지는 모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곳곳에 ‘제주를 드러내는 상징물이나 조형물’을 애써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이렇게 세워 놓은 상징물이나 조형물하고 나란히 있는 ‘여느 살림집 살림살이’야말로 애써 목돈 들여 마련한 상징물이나 조형물보다 훨씬 멋스러우며 곱다고 느낍니다.



.. 우리는 지표면 위에 있는 잎이나 꽃, 줄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흙 속에 묻혀 있는 뿌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풀이나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숨어 있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5쪽)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일본에서 1975년에 나왔습니다. 저는 이 그림책을 1975년에 일본에서 나온 판으로 즐겁게 보았습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가코 사토시 님 다른 그림책도 일본판으로 알뜰히 갖추어 놓았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1975년 책이니 자그마치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그림책이군요. 책으로 치면 서른다섯 살이고, 사람으로 치면 서른여섯 살입니다. 제 나이 서른여섯하고 똑같은 그림책이에요.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는 2006년에 한글판이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진작에 1975년부터 이 그림책을 즐겼으나, 한국에서는 고작 2006년에 이르러 비로소 이 그림책을 즐기는 셈입니다. 일본 어린이와 어버이는 1975년부터 이처럼 놀랍고 알찬 그림책을 맞아들이며 마음밭을 한껏 살찌웠습니다만, 한국 어린이와 어버이는 2006년이 되어 가까스로 이 그림책을 맛보기라도 하는 셈입니다.


2010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자면, 1975년에 빚은 그림책을 오늘날 즐기는 모습이란 참 ‘낡은’ 이야기에 매인 모습이라 여길 만합니다. 2010년이라면 2010년 이야기를 나눌 노릇이라 여길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2010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1975년을 살아가던 이웃나라 일본사람보다 무엇이 더 발돋움했거나 무엇을 더 아름다이 여민다고 말하려나요. 2010년 한국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이나 어른책은 얼마나 2010년다운 이야기와 맛과 멋과 깊이와 꿈과 뜻과 보람과 사랑을 담았다 말할 만한가요.


가코 사토시 님은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첫머리에서 말합니다. 우리들은 이 지구에서 살아가며, 사람들은 지구 겉껍데기는 잘 알지만 속알맹이는 잘 모른다고.


곰곰이 곱씹어 봅니다. 우리들은 이 지구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지구에서 살아간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사람들은 지구 속알맹이는커녕 겉껍데기조차 거의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문화니 역사니 예술이니 하지만, 문화나 역사나 예술을 얼마나 잘 아는 우리들이라 할 만하겠습니까. 어제 발자취를 말하는 우리들이라지만, 어제 발자취는커녕 오늘 발자취조차 제대로 모르는 우리들이 아닌가 모를 일입니다.


이 땅 사람들은 문화와 역사와 예술을 말하기 앞서 ‘삶’을 모르거나 잊거나 등돌립니다. 오늘 삶, 여느 삶, 어제 삶, 고른 삶 들을 두루 모르거나 잊거나 등돌립니다.


성냥공장 터를 찾거나 백 살이 넘은 초등학교 건물을 돌아보거나 외국 선교사 잠집을 찾아다니며 역사가 이러하고 문화가 어떠하며 예술이 어찌저찌 하다고 읊는 이야기 또한 얼마든지 ‘인천 골목 올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았으려나요. 백 살이 넘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은 어느 동네 어느 살림집에서 어떤 골목터를 이루며 살았을까요. 외국 선교사가 외국 종교를 이 나라에 퍼뜨리려고 마주하던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떠한 삶 어떠한 살림 어떠한 모습이었을까요. 동일방직에서 똥물을 마셔야 했던 언니들은 어느 동네 어느 집에서 어떤 살림을 누구랑 꾸렸을까요.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는 ‘1975년 오늘을 살아가는 일본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지구 삶터 이야기를 몹시 알뜰히 일구어 냈습니다. 참으로 몹시 알뜰히 일구어 낸 예쁜 그림책이기 때문에 2006년에 한글판으로 나와 2010년에 우리 집 책시렁에 곱게 꽂아 놓아도 빛이 납니다. 2075년을 맞이하든 2175년을 맞이하든 이 그림책은 사람들한테 아리따운 이야기를 쉼없이 길어올리리라 생각합니다. (4343.11.15.달.ㅎㄲㅅㄱ)

-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가코 사토시 글·그림,이태원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6.4.1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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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사벅슨
바바라 쿠니 그림, 앨리스 맥레란 글, 아기장수의 날개 옮김 / 고슴도치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내 삶터가 가장 좋은 놀이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8] 앨리스 맥레란·바바라 쿠니, 《록사벅슨》(고슴도치,2005)



 그림책 《록사벅슨》을 보았습니다. 부드러운 그림결에 따스함 감도는 이야기가 좋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집 아이도 이 그림책을 좋아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에는 온통 언니랑 오빠랑 그득그득 쉴새없이 나오거든요.

 그림책 《록사벅슨》에 나오는 언니랑 오빠는 그림책에서는 언제까지나 어린이입니다. 그림책에서는 어린이인 이분들은 ‘살아 있다’면 아흔을 훌쩍 넘기거나 백 살 즈음 되겠구나 싶습니다. 퍽 까마득한 옛날 옛적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라 할 텐데, 그림책을 찬찬히 넘기는 동안, 이 그림책 이야기는 그리 머나먼 지난날을 다루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어린이요, 어린이로서 다 함께 오순도순 놀이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이 즐기던 놀이는 제가 1970∼80년대에 즐기던 놀이하고 그리 다르지 않는데다가, 애 엄마가 1980∼90년대에 즐기던 놀이하고도 썩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제 어린 날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든지 애 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든지, 이런 좀 지나간 사진을 아이가 들여다볼 때, 우리 아이는 그냥 ‘어린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사진으로 보는 아이들은 그저 사진에 담긴 그 나이 그대로 언니이거나 오빠이거나 동생이거나 동무입니다. 구태여 예전 모습이라 토를 달 까닭이 없고, 예전 모습이라 하지만 굳이 금을 그어 갈라 놓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책을 찬찬히 넘기고, 다시 넘기며, 거듭 넘기는 가운데 조용히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분은 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 같은 삶을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을 장만하여 스스로 읽거나 아이한테 읽힐 어버이 또한 ‘되찾거나 마주하기 어려운 지난날 발자취와 이야기’라고 여길 만하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다들 이렇게 놀았지.’ 하는 말마디를 겨우 들려줄 만하구나 싶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날 도시 자본주의 삶터에서는 ‘골목놀이’이든 ‘숲속놀이’이든 누리거나 즐길 수 없어요. 오늘날 도시 자본주의 삶터에는 자동차하고 건물하고 아스팔트만 있습니다. 마음껏 뛰놀 논밭이 아이들 보금자리 둘레에 없습니다. 신나게 물장구를 칠 도랑이나 개울이나 냇물이 아이들 삶자리 가까이에 없습니다. 살가이 찾아가서 함께 놀 이웃집이 아이들 사는 집하고 맞닿아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모조리 쪼개어졌습니다. 언니랑 오빠가 동생한테 골목놀이나 숲속놀이를 물려주지 못합니다. 진작에 골목놀이와 숲속놀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아이들 웃음소리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하는 말을 하는 어른들은 으레 잊습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안 놀고 숲속에서 못 놀기 앞서, 어른들부터 골목에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어른부터 골목에서든 숲속에서든 동무를 사귀거나 어울리지 않아요. 어른들이 먼저 골목에서나 숲속에서나 사귀지 않습니다. 물레방앗간이라든지 갈대밭이라든지 수수밭이라든지 밀밭이라든지 대나무숲이라든지 …… 애틋한 서로가 몰래 만나 사랑꽃을 피우는 일이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어디에나 흔해빠지도록 널린 모델에 방 하나 얻으면 그만인 사랑놀이입니다. 가까운 벗끼리 느릅나무 밑에서든 느티나무 밑에서든 미루나무 밑에서건 막걸리 사발 주고받는 조촐한 술잔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품앗이이든 울력이든 하지 않습니다. 도르리나 도리기란 잊힌 지 오래입니다. 아이들이 골목이나 숲속에서 놀지 않는다거나, 아이들 문화가 슬프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이 모양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얄딱구리한 정치꾼이 아닌 바로 나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학원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입시지옥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고속도로를 만드나요? 아이들이 자동차를 만드나요? 아이들이 높은 건물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4대강사업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대통령을 뽑나요? 아이들이 교대나 사범대를 나와 교사가 되나요? 아이들이 체벌을 하나요? 아이들이 돈빨래를 하나요?

 모조리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 때문에 아이들이 시름시름 앓습니다. 몽땅 어른들 말썽거리 때문에 아이들이 아파 합니다. 된통 어른들이 엉터리 바보 멍텅구리인 탓에 아이들이 놀이뿐 아니라 일하고 삶과 마음하고 믿음이랑 눈물에다가 웃음을 잃습니다.


.. 매리안은 그곳을 록사버슨이라고 불렀어. (매리안은 언제든지 모르는 이름이 없었으니까.) 길 건너편에 있는 그곳은 그냥 흔한 바위언덕처럼 생긴 곳이었어. 모래와 바위가 있고, 낡은 나무 상자들이 조금 있고, 선인장과 덤불, 그리고 가시 많은 오코틸로가 자라고 있을 뿐이었지 ..  (6쪽)


 이제 ‘록사벅슨’에서 노는 어린이는 없다고 합니다. 록사벅슨에서 놀던 아이들은 거의 다 도시로 나왔다고 합니다. 도시 삶터에서 시골 록사벅슨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답니다.

 한국땅에서도 도시 삶터를 떠나 시골 삶터로 옮기는 사람은 손에 꼽도록 드뭅니다. 드문드문 시골 삶터로 옮기는 사람이 있으나,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도시는 사람이 꾸역꾸역 늘고, 시골은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게다가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 숫자는 크게 줄어듭니다.

 시골에서 사람들 숫자가 줄어드니까, 서로서로 가까이 사귀기 힘듭니다. 서로서로 가까이 사귀지 못하니까 ‘록사벅슨’처럼 ‘무너미마을’이나 ‘학다리마을’이나 ‘숯고개’나 ‘못고개’ 같은 놀이터가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든다지만,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면서 ‘서로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낼 마음’이 아닙니다. 저마다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일 뜻으로 도시로 몰려듭니다. 사람들이 참 많으며 북적거리는 도시입니다만, 이 많은 사람이 서로서로 따사로이 어깨동무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돈다툼과 자리다툼을 할밖에 없습니다. 다들 말다툼과 성적다툼을 해야만 합니다. 도시에서조차 골목동네는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골목동네 값싼 땅과 집은 개발업자한테 통째로 팔려 비싼 땅 아파트로 다시 올려세우도록 떠밀립니다. 오순도순 고즈넉히 사귈 수 없는 도시 터전 사람들입니다. 알뜰살뜰 너나들이가 되어 가지 못하는 도시 터전 우리들이에요.

 아이들이 골목과 숲속에서 자취를 감추기 앞서 어른들부터 골목과 숲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 놀이가 사라지기 앞서 어른들 놀이가 사라졌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 사랑과 믿음이 말라비틀어지기 앞서 어른들 사랑과 믿음이 벌써 말라비틀어지고 말았음을 깊디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 말을 타면 바람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었어. 말 타기에는 속도 제한이 없고, 꼭 길로 다닐 필요도 없었거든. 그저 긴 막대기 하나와 고삐로 쓸 끈 같은 것만 있으면 다가닥 다가닥 어디든 신나게 말을 달릴 수 있었지 ..  (22∼23쪽)


 딸아이 하나와 함께 살아가는 한편, 이듬해 2011년 봄에 둘째를 낳아 함께 살아갈 우리 식구 살림살이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아이 아빠인 저랑 아이 엄마인 옆지기는 어린 날 동네에서 신나게 놀던 일을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손발에 곱게 아로새겨 놓았습니다. 언제라도 어렵잖이 떠올릴 만한 어릴 적 놀이요 삶이며 생각입니다. 이 어릴 적 발자국 또한 앞으로 쉰 해쯤 지나 “한국판 록사벅슨” 그림책으로 내놓아야 할까 모를 노릇인데,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무렵이든 충주 산골마을로 옮겨 살아가는 요즈음이든, 아이가 놀이동무를 마주하기는 퍽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골목마다 자동차로 꽉 찼으며, 시골에서는 너른 들판과 산자락마다 공장이 자꾸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동무를 사귀면서 놀 만한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며 ‘우리 아이들 나름대로 멋지게 이름붙이며 놀 록사벅슨’은 어디에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놀이터 록사벅슨은 박제가 되어야 할 유물이 아닌, 낡고 닳으며 새롭게 빛나는 구슬인데, 그저 ‘옛날엔 이랬단다(너희는 요로코롬 못 놀았지? 메롱!)’ 하고 노래하며 아이들 놀이터를 활짝 열어젖히지 않고 그림책만 쥐어 주는 이 나라 어른들 굴레가 이어지기만 할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이야기는 바로 삶입니다.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곧 내 삶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하루하루 일구는 우리 삶입니다. (4343.11.14.해.ㅎㄲㅅㄱ)


― 록사벅슨 (앨리스 맥레란 글,바바라 쿠니 그림,아기장수의 날개 옮김,고슴도치 펴냄,2005.6.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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