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개
박기범 글, 김종숙 그림 / 낮은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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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네 눈빛을 들여다보지 않을 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8] 박기범·김종숙, 《미친개》(낮은산,2008)


 쥐를 끈끈이로 잡습니다. 집에 고양이를 키울 수 있으면 쥐잡이는 한결 손쉬울 수 있지만, 시골에서 살아가는 고양이는 금세 멧고양이나 들고양이로 바뀌기 마련입니다. 마을 닭과 병아리를 모조리 잡아 죽이거나 잡아서 먹는 으뜸가는 싸움꾼으로 탈바꿈합니다. 나중에는 먹이를 찾아 산으로 깊이 들어가며 산에 얼마쯤 살아남았던 다람쥐며 작은 새며 온통 잡고야 맙니다. 도시이고 시골이고 사람 아닌 목숨은 살아남지 못하는 마당에, 고양이 같은 짐승하고 맞서 싸울 만한 짐승이란 씨가 말랐습니다. 더욱이, 여느 들짐승이나 멧짐승은 새끼를 많이 까지 못합니다. 너구리나 오소리가 무리를 지어 들고양이들한테 덤비지 못합니다.

 고양이를 기르고 싶어도 마을사람들 닭을 생각하거나 조그마한 멧자락 짐승들을 헤아린다면 도무지 기르지 못합니다. 아니, 한 목숨이 다른 목숨을 기른다는 일이 걸맞지 않겠지요.

 올여름에 멧자락에 깃든 시골집으로 옮기고 나서 어제 아침까지 쥐를 열세 마리 잡습니다. 이 쥐들은 집구석 어딘가에 자꾸 구멍을 내며 기어듭니다. 그냥 벽에서만 살거나 천장에서만 살면 좋으련만, 어김없이 구멍을 내어 방을 돌아다니려 합니다. 하는 수 없이 읍내 약국에서 끈끈이를 사서는 구멍 앞에 가만히 내려놓습니다.

 이 끈끈이에 어른 주먹만큼 큰 쥐가 두 마리 함께 붙들린 적이 있고, 한 마리가 잡힌 뒤에 여러 날 조용하다 싶은 적이 있습니다만, 쥐들은 끈끈이에 발 한쪽이든 꼬리 한쪽이든 붙는 날에는 그예 골로 가고야 맙니다. 쥐 아닌 사람으로서 저는 두 번 끈끈이를 밟았는데, 끈끈이를 밟고 나면 참 안 떨어집니다. 끈끈이 풀을 벗기자면 며칠 걸립니다. 사람조차 끈끈이 떼어내기 힘든데 조그마한 쥐들은 어떠할까요.

 어른 주먹만 한 쥐를 열 마리 잡은 다음에는 어른 엄지손가락만 한 쥐를 세 마리 잇달아 잡습니다. 참으로 조그마한 쥐들은 끈끈이 가장자리에 하나 붙었고, 다른 하나는 끈끈이가 몇 조각 방바닥에 떨어진 자리에 붙었으며, 다른 한 마리는 볼볼 기어다니는 녀석을 손으로 덥석 쥐어서 잡습니다.

 큰 쥐이든 작은 쥐이든 잡힌 녀석은 슬프게 웁니다. 그러나 어찌할 길이 없습니다. 밤에 바깥에 내놓았다가 어스름이 물러나는 새벽녘에 멧자락 구석에 땅을 파서 묻거나, 쓰레기봉투에 담아 읍내 쓰레기통에 넣습니다. 처음에는 땅을 파서 묻자고 생각했는데, 잡히는 숫자가 늘고 또 느니까 땅을 파서 묻기에도 만만하지 않다고 느낍니다. 쥐도 딱하고 사람도 딱합니다. 쥐가 되든 사람이 되든 흙으로 돌아가기 어려운 나날입니다.


.. 개는 사람들이 버리는 쓰레기 봉지를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어. 코를 가까이 들이대고 무언가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살폈지 ..  (8쪽)


 엄지손가락만 한 쥐들은 끈끈이에서 떼거나 한손으로 살짝 쥔 채 사람집하고 멀찌감치 떨어진 멧등성이 한켠에 던져 주었습니다. 추운 겨울날 이들 작은 쥐가 멧자락에서 살아남을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시골쥐라면 시골쥐답게 멧자락에서 멧쥐로 살아가 주기를 비손합니다. 보드라운 흙을 잽싸게 파헤쳐서 사람집 벽 안쪽이 아니라 구수한 흙내음 물씬한 땅속에서 겨울을 나는 한편, 멧자락에서 먹이를 얻을 수 있기를 비손합니다.

 이들 잡힌 쥐를 묻거나 멧자락에 던져 놓으려고 들고 갈 때면 어김없이 쥐하고 눈이 마주칩니다. 눈이 안 마주칠 수 없습니다. 미안하구나 말하면서도 집에서 함께 살아가지는 못하겠다고 핑계를 댑니다. 핑계랄지 뭐랄지 모르겠습니다. 땅에 묻은 뒤이든 멧등성이에 던져 준 뒤이든 성호를 그으며 큰숨을 내쉬는데, 애처로운 쥐들 눈망울을 보자면 끈끈이를 놓고 싶지 않으나, 그렇다고 집안이 쥐판이 되도록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 식구 깃든 시골집은 맨 처음에는, 아니 우리 집이 들어서기 앞서는 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지내던 곳은 아니었을까요. 이 쥐들이 굴을 파며 오순도순 지내던 자리에 사람들이 ‘여기는 내(사람) 땅이요!’ 하면서 땅을 고르고 시멘트를 붓고 기둥을 세워 집을 짓지는 않았으려나요.

 까치들이 곡식 씨앗을 파먹고 멧돼지가 밭뙈기를 파엎습니다. 이들이 살아가야 할 터전에 먹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멧짐승이 먹이를 얻을 만한 자리는 온통 사람들이 파헤쳤을 뿐더러, 나무열매이든 무슨 뿌리이든 사람들이 온 산과 들을 쑤석거리며 몽땅 캐 가려 하니까 멧짐승은 시골사람 밭뙈기에 뛰어들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사람들 밭뙈기에 들이닥치며 목숨을 잇는 멧짐승들은 더없이 꿋꿋하거나 씩씩하다 할 만합니다. 이들 멧짐승과 날짐승은 온몸뚱이로 사람들한테 무언가 이야기를 건넨다 할 만합니다.


.. 어느 때부턴가 마을 조무래기들도 개만 보면 아무렇게나 팔매질을 하며 쫓으려 했어. 어른들 작대기질을 아이들도 따라 배웠겠지 … 돌 던지는 아이 하나가 있으면 그 곁으로 재미있어 부추기는 아이들이 떼지어 모이곤 했어. 누구 하나 나서서 말리지 않았지. 그 개에게는 다들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여기는 것처럼 ..  (13, 14쪽)


 그림책 《미친개》를 읽습니다.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좋아하는 박기범 님이 글을 쓴 작품입니다. 글하고 어울리는 그림은 ‘개’ 아닌 ‘사람’이 그리니까, 또 여느 개 이야기가 아닌 ‘미친’개 이야기이니까, 어둡고 어수선하며 어지럽습니다. 어찌 보면 이 글에는 이 그림이 걸맞는다 할 만한데, 달리 보면 이 글에는 이 그림이 걸맞지 않습니다.

 눈망울을 들여다보고 털빛을 헤아리며 몸놀림을 살핀다면, 사람들이 개한테 그냥 개라는 이름이 아닌 ‘미친개’라는 이름을 붙이듯, 어떠한 이야기를 드러내거나 펼치는 그림이라 할 때에 ‘꼭 이래야 한다’는 틀에 사로잡힙니다. 좁은 울타리 안쪽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살아숨쉬는 목숨이고 살아서 펄쩍펄쩍 뛰는 목숨이며 살아가고파 몸부림치는 목숨을 살가이 얼싸안지 못하고 맙니다.

 살아내는 목숨은 풀처럼 푸릅니다. 이 나라 아이들은 어린이 때를 지나 푸름이 때를 맞이합니다. 푸른 사람 푸른 목숨 푸른 나무 푸른 개입니다. 푸른 들판과 푸른 마을과 푸른 나라를 꿈꾸는 고운 목숨입니다.

 무기를 든 손으로는 전쟁을 막아내지 못합니다. 쟁기를 든 손이 아니고서는 싸움이 끊일 수 없고, 호미와 낫이랑 붓이나 연필을 든 손이 아니고서는 전쟁이 그치지 않습니다.

 전쟁을 일삼는 어른들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 흉내를 내며 전쟁놀이를 합니다. 계급과 신분을 나누는 어른들인 탓에 아이들은 저희끼리도 대장이니 졸병이니 나누면서 놀이를 합니다. 사랑과 믿음과 평화를 아끼는 어른들이라면 사랑과 믿음과 평화를 돌보는 아이들로 크도록 손길을 내밀겠지요. 돈바라기로 흐르는 어른이라면 아이들 마음에 돈과 돈과 또 돈이 맴돌도록 몰아세우겠지요.


.. 개는 곧 쓰레기 봉지를 뒤지는 것만큼이나 흙에 코를 대고 킁킁대는 일이 좋다는 걸 알게 되었어 ..  (18쪽)


 개고기를 먹는다든지 개장수를 한다든지 하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개고기집을 공장처럼 꾸린다든지 개우리를 공장처럼 지어서 꾸릴 때에 나쁩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무엇이 나쁘겠습니까. 감옥처럼 꽉 막히고 틀에 박힌 교과서를 달달 외워 대학바라기만 하도록 내모는 제도권 학교가 되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아이들을 죽이는 꼴입니다. 아이들을 자가용에 태워 학교나 학원에 실어내는 일이 뭐가 나쁘겠습니까. 그러나 아이들이 두 다리로 동네를 사뿐사뿐 거닐며 사람들을 마주하고 삶터를 함께 느끼도록 돕지 못하는 일은 슬플 뿐더러, 어버이가 아이 손을 맞잡고 씩씩하고 신나게 걷지 않는 일은 더욱 슬픕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돈을 바라며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은 더 큰 이름이나 힘을 거머쥐려고 다툼질을 해대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 스스로 사람길을 걸을 때에 개들 또한 개들대로 개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조용히, 다소곳하게, 얌전히, 아름답게 살아갈 사람이며 개이고 목숨입니다.


.. 어쩌면 보이는 것 너머의 것까지 보느라 차가운 마음이 그대로 눈동자에 비추어졌는지도 몰라. 누구라도 한 번쯤 그 눈망울을 봤어야 했어 ..  (48쪽)


 오늘날 사람들은, 또 앞으로 죽 이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은 ‘동네 강아지’ 눈망울조차 들여다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웃집 아이들 눈망울조차 들여다보지 않거든요. 골목길에서 둘이나 셋씩 어울리며 공을 차거나 인라인을 타는 아이들 눈망울이나마 들여다볼는지요. 그냥 자동차를 들이밀며 빵빵하며 쫓아내는 어른들이 아닌지요. 붐비는 전철칸에서 옆사람 눈망울을 들여다보기는 하는지요. 그예 냅다 밀어젖히거나 발을 밟는 우리들이 아니온지요.

 그림책 《미친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떠돌이 들개’만큼이라도 맑거나 티없거나 싱그럽거나 예쁜 눈망울로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림책 이야기이니까 이렇다 친다면, 그림책 바깥 우리 터전에서는 어떠하려나요. 우리들 살아가는 이 나라 이 터전에서 우리들 눈빛과 눈망울과 눈자위와 눈매와 눈동자와 눈빛은 얼마나 밝거나 곱거나 착하거나 빛나거나 깨끗하거나 그윽한가요. (4343.12.20.달.ㅎㄲㅅㄱ)


― 미친개 (박기범 글,김종숙 그림,낮은산 펴냄,2008.2.1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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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벨 - 감성동화 3
예수스 발라즈 지음, 프란시스코 인판테 그림 / 푸른나무 / 200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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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좋은 삶을 찾는 길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7] 예수스 발라즈·프란시스꼬 인판떼, 《이자벨》(푸른나무,2000)


 학예회이든 성탄절잔치이든 무슨무슨 놀이마당이든 왜 아이들을 무대에 올려놓고 구경거리로 삼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처음부터 아이들을 구경거리로 삼으려 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루 지나고 이틀이 가며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는 일을 으레 버릇처럼 삼습니다.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살피지 않고, 아이들 마음이 어떠한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무대에는 어른들이 올라야 합니다. 무대는 어른들이 꾸미고, 무대 안팎에서는 어른들이 구경하면 됩니다. 그러나 무슨무슨 행사를 할라치면 으레 아이들을 노리개처럼 삼아 구경거리로 여겨 버릇합니다. 올림픽이든 무슨 대회이든 똑같습니다. 축하공연이든 무엇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을 무대에 올리고 싶으면, 어른도 저마다 무대에 오를 노릇입니다. 모든 사람이 골고루 무대에 오를 때에, 아이들은 남우세스럽지 않다 여기며 무대에 오를 만합니다. 잘나고 못나고를 가리는 무대가 아니라, 서로서로 오붓하게 어우러지면서 얼싸안는 무대라 한다면 아이이고 어른이고 가리거나 손사래칠 까닭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무대란 쓸모없습니다. 우리한테는 무대가 아니라, 마당판이 있으면 넉넉합니다. 언제라도 들고 나면서 누구라도 들고 나는 마당판이 어울립니다. 다 함께 주인공이 되면서 서로서로 따숩게 바라보는 마당판이 알맞습니다.


..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에 파티가 열릴 예정이었습니다. 그때 모든 아이들이 나와서 노래를 불러야 했습니다. 이자벨은 점점 더 걱정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 학기에도 이자벨은 손톱을 물어뜯어 속살이 다 나올 지경이었지요. 이것은 이자벨이 걱정이 될 때 하는 버릇이었답니다. 방학이 다 끝나도록 손톱은 다 자라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자벨은 앞으로 다가올 파티가 걱정이 되어서, 또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습니다 ..  (16쪽)


 무대에 올린답시고 아이들을 몇 달 동안 길들이는 짓 또한 끔찍합니다. 저는 운동회라는 놀이잔치를 마련해서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는 일은 좋아했습니다. 그렇지만 ‘운동회 연습’은 신물이 나도록 싫었습니다. 남자는 기계체조 여자는 부채춤이라는 틀을 지어 봄부터 가을까지 날마다 몇 시간씩 연습을 시키니 죽을 맛입니다. 놀 겨를이 없고, 이 연습을 하며 숱하게 욕을 먹고 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누가 즐기라는 운동회이고, 누구한테 즐거우라는 운동회였을까요. 운동회 기계체조와 부채춤은 지난날 일제강점기 군대사열하고 다를 구석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군대사열을 했군요. 중·고등학교는 군대가 아닌 학교였으니 ‘교련사열’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아이들을 반듯하게 줄 세워서 노래에 맞추어 발소리 쿵쿵 내며 똑같은 모양새로 걷도록 하면서 교장 앞을 지나갈 때에 경례를 붙이도록 하는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틀리면 자꾸자꾸 뺑뺑이를 돌리다가는 얼차려를 베푸는 ……. 조금 더 헤아리니, 1982년에 국민학교에 들어가 1987년에 마칠 때까지, 국민학교에서도 한 주에 월요일과 토요일 두 차례 아침모임을 할 때면 으레 군대사열을 했습니다. 군대사열을 잘 못하면 운동장에서 발길질이 춤춘다든지 손찌검이 나부낀다든지, 교장이 마이크로 저기 아무개 학년 아무개 반 몇째 줄 아이 구령대로 나오라 부른다든지 하면서, 몹시 끔찍했습니다. 언제나 한 주 첫머리를 끔찍하게 열고, 한 주 마지막을 끔찍하게 닫았어요.


.. ‘파티가 열리는 날, 감기에 걸려 노래를 부르지 않아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자벨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봐, 아프기를 바란다고 당장 몸이 아파질 수는 없는 거 아냐?’ 그래서 이자벨은 노래 연습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  (20쪽)


 다른 군부대는, 또 요즈음 군부대는 어떠한지 모릅니다. 제가 군대에 끌려가서 짓밟혀야 했던 1995∼1997년에 제가 있던 군부대에서는 군대사열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군부대에서는 알통구보라는 이름으로 ‘웃통 벗고 새벽 달리기’를 시켰다지만, 제가 있던 군부대에서는 이런 달리기 또한 하지 않았습니다. 달릴 만한 연병장이 딱히 없는 깊디깊은 산골짜기이기도 했으나, 한여름에도 밤에 경계근무를 서는 사람은 두툼한 야상에 깔깔이를 입지 않으면 추위에 떨어야 했고, 겨울에 내린 눈은 부처님오신날이 되어야 비로소 녹으며, 겨울에는 영 도 밑으로 이십 도쯤 되는 날씨는 흔한 일이었습니다. 더구나 날마다 바람이 몹시 거세게 몰아치는 곳이었기에, ‘대대장 지시사항’으로 ‘아침점호 안 하는 날’이 꽤 잦았습니다. 영하 이십 도에 풍속 이십 미터에다가 둘레는 온통 눈더미인데 사람 잡을 짓을 섣불리 하지 않습니다. 겨울이면 아침부터 밤까지 으레 하는 일은 눈치우기였습니다. 여름이면 새벽부터 밤까지 흔히 하는 일은 물골내기였습니다.

 그러나 강원도 양구 가장 깊은 산골짜기 군부대에서 하나만큼은 모질게 했습니다. 추운 겨울날 하는 혹한기훈련을 비롯해, 산골짝에 있다가 주둔지로 내려오면 한 해 내내 시달리듯 이어지는 갖가지 훈련 때 대대장과 연대장이 번갈아 찾아오며 마련해 주는 군장검사.

 군대사열이란 쿵쿵 발소리를 내며 팔을 높이 올리며 걷다가 경례를 붙이는 일이지만, 군장검사는 40킬로그램짜리 완전군장을 꾸역꾸역 싸서 등에 짊어지고 소총과 탄약을 챙겨 든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꼼짝 할 수 없이 서 있는 짓입니다. 꼼짝 못하게 세워 놓고 아무나 콕콕 집어 군장을 끌르라 해서 물품을 빠짐없이 챙겨 들고 있는가를 살핍니다. 이동안 모두들 눈썹 하나 움직이지 못합니다. 완전군장을 한 채 열 시간 내리 쉬지 않고 멧자락 따라 길 없는 길을 걷는 일이 훨씬 쉽지, 무거운 짐을 잔뜩 짊어지고 꼼짝 못하게 세워 놓는 일은 피를 말리고 허리가 나가게 하는 짓입니다.

 우리들 살아가는 이곳 남녘나라는 평화가 아닌 전쟁이 감돌기 때문이겠지요. 남녘과 북녘은 누가 먼저 치느냐 누가 먼저 서로를 차지하느냐를 놓고 다투기 때문이겠지요. 군대힘이든 경제힘이든 남녘나라는 진작부터 북녘나라를 앞질렀을 뿐 아니라, 북녘나라는 가난과 굶주림에 허덕이는데, 이런 판에도 남녘나라이든 북녘나라이든 사회 얼거리는 차디차고 춥디춥습니다. 군부대 살림을 북돋우는 데에 더 큰 돈을 쏟아붓고, 젊은이나 어린이 모두 군부대 훈련이나 틀에 길들도록 내몰립니다. 제식훈련 교련훈련은 끊이지 않고, 살가우며 사랑스러운 어울림마당이나 놀이마당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축제이니 운동회이니 있지만, 막상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거나 즐기는 잔치마당이 되지 못합니다. 딱딱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홀가분한 만남터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올림픽이니 월드컵이니 있으나, 정작 사람들이 신나게 뛰어노는 운동경기가 아닙니다. 그예 구경만 하는 돈놀음판입니다.

 그림책 《이자벨》을 생각합니다. 《이자벨》에 나오는 이자벨이 두렵게 느끼는 ‘파티’는 오늘날 한국땅처럼 아이들을 구경거리로 삼으며 무대에 올리는 그런 어수룩한 학예회가 아닙니다. 신나게 즐기는 놀이마당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신나는 놀이마당일지라도 ‘의무처럼’ 노래를 꼭 불러야 한다면 무거운 짐이 됩니다. 부르고 싶으면 부르고, 부르기 싫으면 안 부르는 흐름이라면 이자벨이 두려워 하거나 걱정으로 짓눌리지 않겠지요. 가락을 못 맞추거나 높낮이가 엉터리라 하더라도 신나게 노래를 부르는 동무를 보면서, ‘어머나, 저렇게 노래를 부르네. 그런데 참 즐겁게 부르는구나. 나도 한번 불러 볼까.’ 하는 마음이 샘솟는다면 참 좋겠지요. 언제나 스스로 우러나도록 이끌 때가 즐거우면서 좋으니까요.

 학교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학교 공부이든 학원 공부이든 배우려 하는 아이들이 스스로 ‘배우고 싶어요’ 하는 마음이 우러나와야 참다이 배울 만합니다. ‘경쟁에 밀린다’는 말이나 ‘대학교 가야지’ 하는 말로 아이들을 닦달해서는 참다이 배울 수 없습니다.

 스스럼없는 삶이어야 하고, 거리끼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 살가운 삶이어야 하며, 사랑스러운 삶이어야 합니다.

 자랑하거나 내보이는 삶이 아닙니다. 뽐내거나 우쭐거리는 삶이 아닙니다. 1등이 되거나 2등으로 뽑히는 삶이 아닙니다. 등수도 숫자도 없는 삶입니다. 나한테 좋을 자리를 찾는 삶이요, 나한테 기쁠 꿈을 키우는 삶입니다.

 그림책 《이자벨》에서 이자벨은 마침내 맑으며 고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이자벨은 이자벨이 아끼고 사랑하는 멍멍이한테서 기운을 얻어 이자벨 노래결과 마음결과 삶결을 새삼스레 깨닫고는 씩씩하게 주먹을 불끈 쥡니다. 상을 탄다거나 우쭐댄다거나 콧대를 높인다거나 잘나 보인다거나 하려는 노래부르기가 아닌 줄 비로소 알아챘기에 다부지게 노래를 부릅니다. 내 좋은 삶을 찾으면 돼지 멱따는 소리로 노래를 부르든 꾀꼬리 소리로 노래를 부르든 한결같이 어여쁩니다. (4343.12.13.달.ㅎㄲㅅㄱ)


― 이자벨 (예수스 발라즈 글,프란시스꼬 인판떼 그림,유동환 옮김,푸른나무 펴냄,2000.10.29./5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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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손수건의 모험 - 꽃담사 아이손그림책 01
야마기시 사이코 지음, 황정순 옮김 / 꽃담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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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맞아들이는 즐거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6] 야마기시 사이코, 《하얀 손수건의 모험》(꽃담사,2009)


 새벽 네 시에 아이가 뒤척이면서 “아빠, 쉬.” 하고 나즈막하게 말합니다. 아이 아빠는 이 소리를 잠결에 얼핏 듣고는 곧바로 일어납니다. 눈이 잘 안 뜨였으나 억지로 뜨고는 “쉬 할래? 그래, 쉬 하자.” 하면서 아이를 일으킵니다.

 눈이 따갑고 방이 어둡지만 아이 있는 쪽을 가만히 더듬으며 안아서 일으키니 “젖었어. 기저귀 젖었어.” 합니다. 밤새 쉬를 한 번 누었군요. 아이가 쉬를 누고서 아빠한테 이야기를 했는지 모르나 못 들었을 수 있고, 아이는 쉬를 했어도 하도 고단했기에 못 느낀 채 그예 잤을 수 있습니다.

 아이를 걸려 큰방에 있는 아이 변기에 앉힙니다. 기저귀를 풉니다. 아이는 쉬를 조금만 합니다. 아이를 안아 방으로 들어와 자리에 눕힙니다. 새 기저귀를 채웁니다. 아빠는 밖으로 나가 텃밭 가장자리에 쉬를 합니다. 방으로 들어오니 아이가 “아빠, 손.” 하고 말합니다. 어서 누워 손 한쪽 달란 얘기입니다.

 아이가 까무룩 잠들면 기지개를 켜고 하루 일을 열까 생각했으나, 아이가 잠들지 않기에, 자칫 새벽 네 시부터 깨어날까 걱정스러워 나란히 눕기로 합니다. 아이는 한 시간 남짓 잠을 안 자고 뒤척이면서 손을 이리 잡고 저리 잡으면서 가끔 종알종알합니다.

 잠이 들었다가 깼다가를 되풀이하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나랑 아이랑 거꾸로라 할 때에, 나는 내 아버지한테 밤에 자다가 쉬를 누고프다며 말을 꺼낼 수 있을까 떠올려 봅니다. 아빠를 큰소리로든 작은소리로든 부를 때에 내 아버지는 벌떡 일어나 줄는가 헤아려 봅니다. 짜증스러워 하거나 귀찮아 하지 않으면서 스스럼없이 변기로 데려다줄는지 생각해 봅니다. 누워서 손을 달라고 말할 때에 기꺼이 내주면서 아이랑 똑같이 잠을 뒤척일 수 있는지 가누어 봅니다.

 나 스스로 아이 눈높이가 될 때에는 아이가 웃는 삶을 반가이 맞아들입니다. 나부터 아이랑 눈을 맞출 때에는 아이가 칭얼거리는 까닭을 금세 읽습니다. 아버지 된 사람으로서 내 일만 살피거나 내 몫만 따진다면 아이가 웃든 울든 아랑곳하지 않을 뿐더러 쉬 손찌검을 한다고 이맛살을 찌푸리겠지요. 아비 된 주제에 내 그릇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아이가 칭얼거릴 때에 밥이 되든 놀이가 되든 알뜰히 챙기지 못하면서 더 고단하거나 힘겨운 나날을 되풀이하겠지요.

 요즈음, 아이는 퍽 자주 칭얼거렸습니다. 착하며 사랑스러운 아이 모습보다 골 부리며 소리지르는 미운 아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는 아버지는 더욱 힘겹고 지쳤습니다. 그런데 그예 내 자리에서만, 그러니까 어른 자리에서만, 게다가 아버지 눈높이에서만 볼 때에는 힘겹고 지칠밖에 없습니다. 아이랑 눈을 맞출 뿐 아니라 마음과 삶을 가만히 맞춘다면 힘겹거나 지칠 일이 없습니다. 아버지부터 아이 앞에서 착하며 사랑스러운 어버이다울 때에, 아이 또한 스스럼없이 시나브로 착하며 사랑스러운 아이로 자라니까요.


.. 높은 하늘은 파랗게 아주 아주 맑았고, 해님은 반짝 반짝 따스하게 보두를 감싸 주고 있었어요. 정말 평화롭고 포근한 오후였어요. 그리고 모두가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하얀 손수건은 왠지 따분해서 재미가 없었어요. ‘아아, 매일 매일 너무 심심해! 어디 재미있는 일은 없을까?’ 하얀 손수건은 골똘히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여기를 떠나 신나게 모험을 하는 거야!’ 하얀 손수건은 빨래집게에게 부탁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빨래집게 님! 빨래집게 님! 저를 자유롭게 놔 주세요. 정말 정말 신나는 모험을 하고 싶어요.” ..  (4∼7쪽)


 그림책 《하얀 손수건의 모험》을 펼칩니다. 두 번쯤 찬찬히 읽고는 이 그림책이 얼마나 사랑받는가 궁금해서 인터넷을 켭니다. 뜻밖에 이 책은 일찌감치 판이 끊어졌습니다. 이 책을 내놓은 출판사는 2008년부터 2010년 올해까지 꼭 두 권만 내놓았는데, 두 권 모두 판이 끊어졌습니다. 혼자서 책을 만들어 내는 출판사인 듯한데, 출판사가 문을 닫았으려나요. 두 해도 세 해도 목숨을 잇지 못한 채 그만 한 해 만에 책방에서 사라지는 그림책이라니.

 그림책 《하얀 손수건의 모험》에 나오는 하얀 손수건은 갖은 모험을 겪거나 치르면서 한결 씩씩하고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외톨이가 되거나 버려지거나 뒹굴면서 기운을 잃을 만하지만, 이때마다 새롭게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한결 튼튼하며 빛나는 넋을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그림책을 내놓아 준 출판사 일꾼 또한 하얀 손수건마냥, 힘들거나 어려운 일이 닥친다 할지라도 당차게 맞서거나 슬기롭게 헤쳐 나가면서 하루하루 한결 싱그러우면서 시원스러운 책삶을 일군다면 좋을 텐데요.

 생각해 보면, 하얀 손수건은 ‘너무 심심하’기 때문에 모험을 찾으러 길을 떠나지는 않습니다. 하얀 손수건이 대롱대롱 걸리며 보송보송 마르는 포근한 집 포근한 빨래줄에 그대로 있어도 즐겁겠지요. 하얀 손수건을 사랑하는 집임자 앞주머니나 뒷주머니에 꽂힌 채 온누리를 함께 마실하는 기쁨을 나눌 만하겠지요.

 그러나 하얀 손수건은 ‘내 길을 내 힘으로 걸어 보고 싶다’는 꿈을 품습니다. 이 길이 거칠든 메마르든 힘들든 괴롭든, 한번 스스로 맞서 보고 싶다고, 부딪혀 보고프다는 꿈을 키웁니다. ‘자유롭게’ ‘신나는’ 삶을 꿈꿉니다.


.. “물고기 님! 물고기 님! 헤엄을 잘 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나도 물고기가 되고 싶어요.” “하하하! 그랬구나. 잘 봐. 이렇게 지느러미랑 꼬리를 흔들면서 헤엄치는 거야. 자, 이제 연못 속으로 들어오렴.” 이렇게 해서 하얀 손수건은 물고기가 되었습니다. 하얀 손수건은 물 속에서 즐겁게 헤엄을 쳤습니다. “정말 멋있는데! 진짜 마음에 들어! 비둘기보다 몇 백 배 더 좋아!” ..  (14쪽)


 자유(自由)로움이란, 우리 말로 하자면 홀가분함입니다. 누구한테도 얽히지 않을 뿐더러 매이지 않는 삶입니다. 누구한테도 얽히지 않으니, 누군가 나를 돕지 않으며 나 또한 누군가한테 도움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를 지킨다거나 나한테 비빌 언덕이 될 사람이 따로 없는 삶입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아야 하고,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용을 써야 합니다. 바야흐로 밑바닥부터 새로 열어젖힐 삶입니다.

 아무것도 없으니까 무엇이든 손수 해야 합니다. 밑천이 없으니 어느 일이든 몸소 해내야 합니다. 밥도 없지만 밥그릇도 없고 수저며 밥상이며 하나도 없습니다. 쌀도 없고 찬거리도 없습니다. 어딘가 일자리를 얻어 빨리 일을 해서 돈을 벌지 않는다면, 나무열매라든지 풀잎이라든지 푸성귀라든지 갈무리해서 배를 채우지 않는다면 굶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없기에 아무것한테도 매이지 않으나, 그 어느 것도 나를 보살피거나 돌보지 않아요. 하나같이 고달프거나 괴로울 수 있으며, 한결같이 신나거나 새로울 수 있습니다.

 하얀 손수건은 맨 처음, 새한테서 ‘나는 법’을 배웁니다. 다음으로 물고기한테서 ‘헤엄치는 법’을 익힙니다. 이윽고 꽃한테서 ‘서는 법’을 물려받습니다.

 날고 헤엄치며 서기. 그러고 보면, 우리들은 이 세 가지를 어릴 때부터 제 어버이한테서 하나하나 이어받아요. 어버이가 하나씩 찬찬히 가르쳐 주기도 하고, 어버이가 살아가는 매무새를 아이들이 바라보며 받아들이곤 합니다. 따스한 말씨를 아이들 또한 따숩게 맞아들이고, 거친 말투를 아이들은 언제나 거칠게 아로새깁니다.

 착하며 곱게 살아가는 어버이와 함께 있는데, 어느 아이가 착하지 않을 수 있으며 곱지 않을 수 있나요. 너그러우며 포근히 살아가는 어버이가 곁에 있는데, 어느 아이가 너그러움이나 포근함하고 동떨어질 수 있겠어요.

 아이들은 교과서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원이나 학교에서 배우지 않아요. 아이들은 집에서 배웁니다. 아이들은 마을에서 배워요.


.. 하얀 손수건은 따스한 햇살을 가득 받으면서 아름다움을 뽐냈어요. 걸어가는 사람들에게 칭찬도 많이 들었습니다. “와아! 너, 정말 예쁘구나!” 하얀 손수건은 정말 행복했어요. “모두가 나를 보고 예쁘다고 하니까 진짜 기분이 좋은데!”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요? 튤립들이 점점 말라 가기 시작했습니다. “튤립 님! 튤립 님!” 아무리 불러도 누구 하나 대답하지 않았어요. 하얀 손수건은 또 다시 외톨이가 되었습니다 ..  (20∼21쪽)


 그림책 《하얀 손수건》을 세 번째 읽으려 할 무렵, 스물여덟 달째 함께 살아가는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어, 어, 책이네.” 하면서 아빠 무릎에 궁디를 척 디밀며 콩 하고 앉습니다. 같이 보잡니다.

 아빠는 이 그림책을 읽은 다음 느낌글을 끄적거리려 했으나, 아이가 그림책 읽어 달라 하는 바람에 글쓰기는 미루고 맙니다. 아이한테는 아직 그림책 줄거리대로 다 들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림책에 나오는 모습들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이름을 말하고, 그림책에 나오는 줄거리는 한두 줄로 간추려서 이야기합니다. 옆지기가 ‘아이가 말을 배우고 싶어 한다’고 했던 말을 되씹으면서, 아이가 한 번에 알아듣고 따라할 만한 길이로 줄거리를 간추립니다.

 이오덕 님이 쓴 어린이문학 비평에서 ‘어린이문학은 글을 짧게 써야 한다’고 했던 대목이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마구 짧게만 써서는 안 되고 ‘이야기(할 말)를 살포시 담으며 알맞도록 짧게 쓸 줄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잘 엮은 그림책은 이런 말마따나 아이들이 한달음에 외워서 따라할 만한 길이로 글을 담곤 합니다. 지나치게 길다든지, 아이들한테 너무 어려운 말을 함부로 넣지 않아요. 얄궂다는 말투라든지, 안 좋다는 일제식민지 말씨라든지, 섣부른 한자말이나 영어 말마디에 앞서, 아이 삶을 곱게 헤아리며 따숩게 보듬는 말결로 알뜰살뜰 일구어야 하는 그림책이고 어린이책입니다.


.. 하얀 손수건은 또 다시 슬퍼졌습니다. “지금 나는 아무에게도 도움을 줄 수 없는 낡은 헝겊 조각이구나. 정말 못났어.” 하얀 손수건은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하얀 손수건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주 작고 그렇게 멋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는 하얀 손수건이었을 때가 제일 행복했어.’ ..  (24∼27쪽)


 《하얀 그림책》을 다섯 번 넘게 아이랑 읽습니다. 이제 그만 읽자 하며 내려놓으니 다른 그림책을 읽자며 다리를 굴립니다. 히유, 그러자, 아빠 일은 네가 깊이 잠든 다음에 해야겠네, 그럼 뭐를 읽을까, 그래, 《꼬마 인형》(가브리엘 벵상 글·그림)을 읽자.

 아버지 무릎에 앉아 그림책을 읽는 아이 눈이 말똥말똥합니다. 눈빛이 예쁘게 살아숨쉽니다. 아버지는 제 일을 제때에 해낼 겨를이 없지만, 아이 눈을 보고 눈빛을 느낍니다. 그래요, 일이야 어른들끼리 복닥이는 삶자락이니까, 전화 한 통 걸어 “저기요, 아이하고 그림책 읽느라 하루만 미루어도 될까요?” 하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정 안 되면 그만두고 다른 일감을 찾을 수 있어요. 그러나, 스물여덟 달을 살아가는 아이하고 그림책을 함께 읽는 때는 바로 오늘 이곳에서만 이루어집니다. 오늘을 놓치면 이듬날은 없고, 이듬날을 붙잡지 않으면 글피 또한 찾아오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반가이 맞아들일 삶이고, 언제나 곱게 어루만질 삶입니다. 한결같이 어여쁜 삶이며, 어제 오늘 글피 모두 사랑스러운 삶입니다. 이제 아이는 새 하루를 연다며 종알종알 조잘조잘 노래를 부르며 깨어납니다. 참말 아이는 아침마다 노래를 부르며 깨어납니다. 엊그제 삶아 놓은 고구마 하나를 아이한테 쥐어 줍니다. 쌀을 씻어 불립니다. 미역을 손으로 끊어 불립니다. 슬슬 밥에 불을 넣어야겠습니다. 아침을 먹고 오늘은 오늘 몫만큼 아이하고 제대로 부대끼며 웃고 떠들어야겠습니다. (4343.12.7.불.ㅎㄲㅅㄱ)


― 하얀 손수건의 모험 (야마기시 사이코 글·그림,황정순 옮김,꽃담사 펴냄,2009.5.14./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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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섬 이야기 비룡소의 그림동화 110
요르크 뮐러 그림, 요르크 슈타이너 글, 김라합 옮김 / 비룡소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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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벌레 삶은 즐겁지 않아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4] 요르크 뮐러·요르크 슈타이너, 《두 섬 이야기》(비룡소,2003)



 좋은 이야기라 할는지, 훌륭한 이야기라 할는지, 놀라운 이야기라 할는지, 아픈 이야기라 할는지, 따스한 이야기라 할는지, 여러모로 뒤엉킨 그림책 《두 섬 이야기》를 펼칩니다. 그림책 《두 섬 이야기》는 처음에는 ‘세 섬’이었으나 ‘한 섬’은 사람들이 끝없이 돈벌레 짓을 하다가 그만 물속으로 꼬르륵 가라앉고 말아, ‘두 섬’이 되었을 때 이야기를 담습니다. 아마, 맨 처음 세 섬이던 때에는 세 섬 모두 어슷비슷 조촐한 모양새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어느새 한 섬하고 두 섬이 다른 모양새가 되고, 이 다른 모양새로 흐르고 흐르던 어느 날 한 섬이 무너졌으며, 남은 두 섬이 비슷한 모양새로 다시금 제자리를 찾았으나, 끝내 다른 한 섬마저 예전 섬이 걷던 길을 되풀이하면서 물속으로 가라앉을 뻔하는구나 싶어요.


.. 큰 섬에는 부자와 가난뱅이, 주인과 머슴이 살았습니다. 또 큰 섬의 배들은 으리으리했어요 … 그와 달리 작은 섬에는 주인도 머슴도 없었습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모든 일을 함께 했지요. 그런 까닭에 부자도 없고 가난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 역시 없는 탓에, 노래하고 춤추고 연을 날리며 즐겁게 놀 시간이 많았습니다 ..  (4∼5쪽)


 그림책 첫머리에 적힌 이야기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첫머리부터 이 그림책 마무리가 어떻게 될는지를 환히 보여줍니다. 부자와 가난뱅이가 갈린 섬은 앞날이 어찌 되겠습니까. 주인도 머슴도 없는 섬은 앞날이 어떠할까요. 부자와 가난뱅이가 있는 섬은 오늘날로 친다면 경제성장률이 꽤 높고 국민소득 또한 제법 될 테지요. 주인도 머슴도 없는 섬은 경제성장률이 아예 없을 뿐더러 국민소득 또한 숫자로 잴 수 없을 테고요.

 생각해 보셔요. 국민소득이 몇 만 달러라 하는 나라에 거지나 떨꺼둥이가 없는가요. 국민소득이 2만 달러라 하는 이 나라 사람들 살림살이는 어떠한가요. 줄잡아서 2만 달러라 하지만, 2만 달러를 웃도는 사람하고 이 숫자를 밑도는 사람들 살림살이는 얼마나 어떻게 벌어졌는가요.

 이런 숫자를 따지면서 살아야 할 우리들일는지 궁금합니다. 이런 숫자가 아니요 숫자로 따질 수 없는 사랑과 믿음과 나눔을 헤아려야 할 우리들일는지 스스로 잘 가눌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버는 삶을 바라지 말고, 더 즐겁게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이 지낼 삶을 꿈꾸며 가꿀 노릇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붉은 사금석 밑에서 묵직한 순금이 나왔다는 소식은 눈 깜짝할 사이에 온 섬에 퍼졌습니다. 큰 섬 사람들은 너도 나도 황금을 찾아나섰습니다. 농부들은 이제 밭을 돌보지 않았어요. 어부들은 더이상 바다로 나가지 않았고요. 하인들과 머슴들은 몰래 일터를 빠져나갔지요 ..  (14∼16쪽)


 그림책 《두 섬 이야기》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책입니다. 아이들이 서로서로 따스히 아끼거나 사랑하도록 이끌려는 책입니다. 착한 마음과 참다운 넋과 고운 몸가짐을 익히도록 도우려는 책입니다. 이 나라이든 이웃한 나라이든 어른들은 도무지 제 마음을 차리지 못하는 탓에, 앞으로 우리 누리를 가꿀 아이들한테 슬기로운 얼을 북돋우고 싶어 하는 책입니다.

 틀림없이 적잖은 아이들은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금이니 돈이니 이름이니 힘이니 하는 부질없는 뜬구름잡기를 달가이 여기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그림책에 나오는 큰섬 임금님이 지나치게 엇나갔기 때문에 이렇게 무너졌다고 생각하며, ‘돈을 긁어모으더라도 좀 알맞게’ 긁어모았어야 한다고 생각할 아이들 또한 꽤 있으리라 봅니다. 비바람이 몰아칠 때에는 일을 쉬게 해 준다든지, 사금석 밑에서 나온 금붙이를 사람들한테 나누어 준다든지 하면 ‘투덜거리는 목소리’를 얼마든지 잠재울 수 있지 않느냐 생각할 수 있어요.

 어느 한편으로는 《두 섬 이야기》 같은 그림책이야말로 어른들이 먼저 읽고 깨우쳐야 한다 여길 만합니다. 아이들하고 사랑스레 어울리는 삶을 사랑하는 마음을 기르도록, 어른들이야말로 이 그림책을 읽으며 당신 삶을 곱씹고 뉘우칠 노릇이라 할 만합니다. 아이들한테 읽히는 그림책이라기보다 어른들한테 읽히는 그림책이라 할 수 있어요.

 아이들 스스로 돈벌레처럼 구는 일이란 없습니다. 아이들 둘레에 있는 어른들이 하나같이 돈벌레처럼 굴 때에 아이들 또한 이런 버릇을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을 거느리거나 키우는 어버이가 돈벌레 삶에 얽매여 있을 때에는 아이들은 시나브로 돈벌레 삶에 젖어듭니다. 아이들이 대학입시에 일찍부터 목 매달도록 내모는 어버이와 교사란, 아이들이 돈벌레 삶에서 허덕이도록 내모는 꼴하고 마찬가지입니다.


.. 눈먼 할아버지는 섬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워 주었습니다. 눈먼 할아버지는 자기가 같이 갈 것이며 주민들을 외롭게 버려두지 않겠다고 했지요. “큰 섬 왕은 틀림없이 우리에게 조개껍데기를 품삯으로 줄 거요. 하지만 우리가 조개껍데기를 무엇에 쓰겠소? 그러니 이제는 큰 섬 사람들에게 쓸모없어진 흙을 품삯으로 달라고 합시다. 큰 섬 사람들이 훔쳐갔던 우리 섬의 흙을 말이오.” ..  (21쪽)


 《흙, 문명이 앗아간 지구의 살갗》(삼천리 펴냄,2010.11.)이라는 책이 새로 나왔습니다. 흙을 다루는 그림책이며 이야기책이며 인문책이며 제법 많습니다. 흙을 밟거나 만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흙을 다룬 책’을 읽을까 궁금한데, 논밭을 일구거나 텃밭을 돌보거나 꽃그릇을 가꾸는 사람은 당신이 늘 만지는 흙이 바로 ‘좋은 책’입니다. 흙을 다룬 책은 ‘흙을 만지는 사람이 날마다 느끼는 삶’을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으로 풀어서 책 하나로 엮습니다. 사랑스레 살아가는 사람은 굳이 책 하나를 더 읽을 까닭이 없고, 믿음직하게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애써 책 하나 더 쥐어 주지 않아도 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자꾸자꾸 사랑을 읽으니까 ‘흙을 다루는 책’을 내놓을밖에 없습니다. 요즈막 사람들이 하나같이 믿음을 버리니까 《두 섬 이야기》 같은 그림책이 나올밖에 없습니다.

 목숨을 살리는 길을 걷는다면, 이와 같이 걷는 내 삶이 곧바로 좋은 책 하나입니다. 목숨을 사랑하는 길을 걷는다면, 이처럼 걷는 내 삶으로 이웃하고 살가이 어깨동무합니다. 목숨을 보살피는 길을 걷는다면, 이렇게 걷는 내 삶으로 나부터 한껏 즐겁기에 내 둘레 벗과 이웃과 살붙이 모두 즐거울 길을 함께 걸을 수 있습니다.

 그림책 《두 섬 이야기》 끝자락을 보면, “작은 섬 사람들은 큰 섬 사람들에게 앙갚음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히려 작은 섬 사람들은 도망 온 큰 섬 사람들이 뭍으로 올라오도록 도와 자기네 집으로 데려갔습니다(29쪽).”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처음부터 주인과 머슴이 없던 자그마한 섬 사람들은 ‘주인과 머슴’에다가 ‘부자와 가난뱅이’가 갈린 채 툭탁질을 하던 커다란 섬 사람들이 제 고향 터전을 잃고 찾아들었을 때에 ‘언제나 그러하듯’ 똑같은 벗이나 이웃이자 살붙이로 맞아들입니다. 마땅한 일입니다.

 싸움이 아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니 평화로이 서로를 맞아들입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한테는 ‘내 편’이니 ‘네 편’이니가 없습니다. 평화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적군’과 ‘아군’이 나뉘어요. 다 함께 골고루 일놀이를 즐기는 삶일 때에는 밥 한 그릇 넉넉히 나눕니다. 내 밥그릇에서 반을 덜든 얼마를 덜든 내 몫을 기꺼이 덜어 이웃한테 건넵니다. 이웃돕기를 할 마음이 아니라, 마땅히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이웃사랑이 아니라, 으레 이처럼 살아왔어요. 겉치레로 붙이는 이름이 아닌 삶입니다. 사진을 찍느니 방송을 찍느니 할 ‘봉사’나 ‘자선’이 아닌 여느 나날입니다.

 가만가만 이 나라 삶터와 삶자락과 삶무늬를 헤아려 봅니다. 이 나라에는 국민소득과 경제성장률과 대학입시라는 숫자놀음이 판칩니다. 날이면 날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에다가 이주노동자 다툼과 아픔이 불거집니다. 따숩거나 넉넉한 이야기가 불거지거나 샘솟는 일은 몹시 드뭅니다. 신문이고 방송이고 책이고 따숩거나 넉넉한 여느 사람들 수수한 삶은 좀처럼 안 다룹니다. 아무래도, 이쪽 사람이건 저쪽 사람이건 목청 높이는 금긋기를 할 뿐이지, 서로를 내 동무나 이웃이나 살붙이로 여기지 못하는 탓입니다. 삶을 바로세우면서 《두 섬 이야기》를 읽는다면 이 그림책을 ‘지식 교훈 그림책’이 아닌 ‘사랑 믿음 그림책’으로 받아들여 살포시 껴안겠지만, 삶을 바로세우기 앞서 ‘좋은 책’이라는 껍데기만 붙잡으며 그림책을 아이들한테 휙휙 던져 주거나 읽히는 어버이랑 교사만 많은 이 나라가 아닐까 근심스럽습니다.

 책은 안 읽어도 되니까 부디 착하게 살아가면 고맙겠어요. 좋은 책일지라도 애써 안 읽거나 몰라도 괜찮으니까 제발 고운 넋 사랑스레 나누며 살아가면 반갑겠어요. (4343.12.5.해.ㅎㄲㅅㄱ)


― 두 섬 이야기 (요르크 뮐러 그림,요르크 슈타이너 글,김라합 옮김,비룡소 옮김,2003.11.7./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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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 3~8세 세계의 걸작 그림책 지크 39
주디스 커 지음, 최정선 옮김 / 보림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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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주기’는 바보짓이요 못난 자랑놀음
 [즐기는 그림책 23] 주디스 커,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보림,2000)



 큼직한 범 한 마리가 문을 똑똑 두들기고는 말합니다. “저기요, 저는 지금 배가 아주 고프거든요. 들어가서 간식을 같이 먹어도 될까요(8쪽)?” 아이가 문을 빼꼼 열며 내다 봅니다. 어머니가 말합니다. “그럼요, 얼른 들어오세요.”

 큼직한 범 한 마리는 ‘간식을 같이 먹’고 싶다며 들어와서는, 아이랑 어머니가 먹는 새참에다가 저녁에 아버지가 집에 돌아와서 먹을 밥을 비롯해 집식구가 쓸 물(수도물)까지 모조리 마셔 버립니다.

 저녁에 바깥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아버지한테 아이랑 어머니는 이 얘기를 들려줍니다. 아버지는 이런 말을 믿을 수 있으려나요.

 아버지는 가만히 이야기를 듣더니 말합니다. “그랬구나. 그럼 이렇게 하자. 아주 좋은 방법이 있거든. 먼저 코트를 입고 나서, 다 같이 식당에 가는 거야(27쪽).”

 세 식구는 모처럼 바깥마실을 하면서 바깥밥을 먹습니다. 어쩌면 세 식구는 바깥밥을 사먹은 지 오래되었을 수 있습니다. 바깥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돌아오는 아버지는 집식구들이 ‘오늘 하루 겪은 이야기’를 들려주든 말든 귀담아듣지 않거나 번거롭다며 손사래를 치고는 얼른 씻는방에 들어가 씻고 나서 술과 저녁을 바랄는지 모르지요. 텔레비전을 켜 놓고 술잔을 들든지요. 아마, 우리 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다고 한다면, 그나마 마음 좋은 아버지는 전화로 튀김닭이든 피자이든 무어든 시켜서 먹자고 하겠지요.

 그나저나 큼직한 범이 새참을 얻어먹자며 여느 살림집에 찾아갈 일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범이라면 새참이 아닌 사람을 냠냠짭짭 아구아구 잡아먹을 노릇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사람들이 먹는 케이크이든 차이든 빵이든 배가 찰 만하겠습니까. 더구나 날고기를 먹는 들짐승이 불에 익히거나 구운 먹을거리를 어떻게 먹겠어요.

 하나하나 따지면 더할 나위 없이 말이 안 될 뿐더러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다루는 그림책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이런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그리다니, 그림쟁이는 참 한갓진 사람이구나 할 만합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로 아이들을 홀리려 하나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뭐, 큼직한 범이 아닌 조그마한 생쥐가 새참 얻어먹겠다며 찾아올 수 있습니다. 콩새나 박새나 참새가 새참을 나누어 먹자며 찾아들 수 있겠지요. 범이 아닌 골목고양이가 찾아온달지, 오소리나 너구리나 토끼가 찾아올 수 있을 테고요. 누구이든 손님입니다. 누구나 길손이고 밥손이에요. 집 없어 한뎃잠을 자는 사람인 떨꺼둥이라든지 밥을 얻으려는 거지라든지 얼마든지 새참을 함께 먹을 수 있습니다. 오래된 이웃이나 동무한테만 문을 열어 주고 “얼른 들어오세요”라 해야겠습니까. 조금만 더듬어 보면, 그리 멀지 않은 옛날부터 우리 겨레 어머님들은 배고픈 이한테 따순 밥 한 그릇 넉넉히 나누었다고 했어요. 굳이 서양나라 그림책 이야기를 빌지 않더라도 이 나라 어머님들은 ‘배고픈 이웃하고 밥 한 그릇을 나누든 밥 한 숟깔을 나누든’ 포근하며 너그러운 품을 이어왔습니다.

 포근하며 너그러운 품으로 이웃이나 길손을 맞이하는 어머님들은 당신 아이한테 포근하며 너그러운 품을 물려주겠지요. 다만, 어머님들은 당신 아이한테 가르치지는 못합니다. 따로 말로 가르치지 않아요. 책으로 이끌지 않아요. 그저 말없이 몸으로 보여줍니다. 말없이 몸으로 보여주되 길손한테 밥그릇을 내어준 일을 자랑하거나 떠벌이지 않습니다. 추운 날 몸 좀 녹이고 배를 뜨뜻하게 채우라면서 마음을 씁니다. 더운 날 몸 좀 식히면서 다리를 쉬라고 마음을 쏟습니다.

 사랑은 겉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사랑은 잘난 척하지 않습니다. 콩 한 알을 나누고, 열 사람 한 숟가락으로 밥 한 그릇을 마련하여 나눕니다.

 이제 그림책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네 어머니는 아예 이듬날 ‘먹을거리를 잔뜩’ 살 뿐 아니라 ‘호랑이 먹이’까지 장만합니다. 언제라도 호랑이가 찾아왔을 때에 ‘더 내어줄 먹을거리’가 떨어지지 않게끔 마음을 기울입니다. 어머니는 흐뭇하게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아이 또한 어머니가 혼자 물건을 다 못 들 테니 곁에서 호랑이 먹이를 들고 집으로 나릅니다.

 생각해 보자니, 이렇게 하다가는 살림살이가 거덜나겠구나 싶고, 바깥일을 하며 돈을 더 벌어야 할 아버지는 등허리가 휠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어머니랑 아이는 웃음꽃이 핍니다. 웃음꽃이 피는 살가운 보금자리에서 하루하루 따사로우며 느긋하게 어울릴 아버지라면 살림돈이 더 나간들, 등허리가 조금 더 휜다 한들, 이쯤이야 거뜬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나중에는 바깥일을 좀 쉬고, ‘우리 집으로 찾아오는 호랑이 손님’하고 한번쯤 마주하고 싶어할는지 모릅니다.

 밥을 얻어먹는 범은 남우세스러워 하지 않으며 찬장까지 싹싹 뒤집니다. 수도물마저 마지막 한 방울을 핥아먹습니다. 언뜻 보자면 뻔뻔한 노릇입니다. 요 녀석 참 짓궂다 할 만합니다. 그러나 배고프다는데 어찌하겠습니까. 더구나 범은 덩치가 커서 아주 많이 먹어야 겨우 배가 찬다니까, 낯을 차린다든지 가린다든지 할 수 없습니다.

 하기는, 주는 손이 고마운 손이라고도 하지만, 주는 손보다 받거나 얻는 손이 한결 고마운 손이라고 했습니다. 받아 주거나 얻어 주는 손이란, 내놓거나 베푸는 손이 사랑을 느끼도록 이끈다고 했습니다. 주는 손이 대단하다면 받는 손은 훌륭하고, 주는 손이 놀랍다면 받는 손은 거룩하다 했어요. 돈푼 한 닢 동냥하는 손이 착하다면, 돈푼 한 닢 동냥받는 손은 아름다워요.

 자칫 주는 쪽이 손해를 본다거나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곤 합니다. 자꾸만 퍼주기를 하면서 되레 뒷통수를 맞는다고 여기곤 합니다. 그런데 퍼주기란 있을 수 없습니다. 얼마나 주었기에 함부로 ‘퍼주기’라는 말을 쓰나요. 받는 쪽이 넉넉하다고 느끼도록 마음껏 준 적이 있어 퍼주기라 할는지요. 주는 쪽이 가난에 쪼들리면서까지 받는 쪽이 넉넉하도록 퍼주는 가운데 이런 말을 하는가요. 주는 쪽은 고작 ‘간식’하고 ‘수도물’하고 ‘저녁밥’만 내어준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입니다. 은행통장을 내주었다든지 살림집을 내주었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자가용이라든지 컴퓨터라든지 텔레비전이라도 하나 내주지 않았어요. 이듬날 얼마든지 다시 살 만한 몇 가지 먹을거리를 내주었고, 이렇게 다시 먹을거리를 장만한들 살림살이가 기울거나 흔들리지 않아요.

 남녘과 북녘 사이 흐름을 곱씹어 봅니다. 남녘땅에서 가난한 사람과 가멸찬 사람 사이를 떠올려 봅니다. 남녘땅 서울과 다른 지역을 헤아려 봅니다. 남녘땅 서울에서도 돈이 더 많다는 곳하고 돈이 더 적다는 곳을 가누어 봅니다. 우리들은 서로서로 얼마나 도우면서 살아가나요. 우리들은 다 같이 얼마나 아끼면서 어우러지나요. 나한테 더 있는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나부터 어떻게 쓰거나 부리는가요. 내 돈이랑 이름이랑 힘은 어디에 어떻게 쓰거나 부리는지요.

 그림책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에 나오는 어머니랑 아이는 낮때와 저녁때 즐길 몇 가지 먹을거리를 모두 내어줄 뿐더러, 이듬날 새 먹을거리를 장만하는 동안 줄곧 빙그레 웃습니다. 마음속으로 살가이 걱정하고 바라면서 기다립니다. 배고파 하는 범이라면 이듬날에도 배고파 할 테고, 어디에서고 끼니나 잘 때울는지 근심스럽습니다. 한 번이나 두 번 도와주었다든지 돈푼을 내어주었다든지 밥을 차려 주었대서 ‘도움받은 쪽’이 튼튼하게 우뚝 서거나 힘차게 다시 일어나 살림을 알뜰살뜰 잘 꾸릴 수 있지 않아요. 우리들이 할 일이란 ‘퍼주기’도 ‘도와주기’도 아닙니다. 그예 ‘함께살기’랑 ‘어깨동무’입니다. (4343.11.29.달.ㅎㄲㅅㄱ)


― 간식을 먹으러 온 호랑이 (주디스 커 글·그림,최정선 옮김/보림,2000.3.25./8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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