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아이 - 이와사키 치히로의 자연의 아이들, 초등학생 그림책 10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 다치하라 에리카 글, 백승인 옮김 / 달리 / 2005년 8월
평점 :
절판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하루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2] 이와사키 치히로·다치하라 에리카, 《가을 아이》(달리,2005)



 저녁이 깊어져 달빛이 환하게 비칠 무렵이면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를 부르기 앞서 으레 밖으로 나와 멧기슭 쪽으로 달려가서 쉬를 눕니다. 멧기슭 도랑에서 쉬를 눌 때면 아이는 아빠를 따라 바깥문을 열고 내다보면서 “아빠, 쉬?” 하고 묻다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빠, 달!” 하고 외칩니다. “그래, 달이지? 달이 환하지? 이제 들어가자.” 하고 말하며 아이하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방으로 들어갈 때에 그림책 두 권쯤 챙깁니다. 아빠가 먼저 이불을 뒤집어쓰며 눕습니다. 아이를 부릅니다. 아이는 그냥 혼자 뒹굴고 싶어 안 들어오기도 하지만, 아빠 팔을 베개 삼아 눕고 싶기도 합니다. 팔베개를 하며 그림책을 함께 봅니다. 이러다가 일어나고, 또 눕고 다시 일어나기를 끝없이 되풀이합니다.

 저녁에 그림책을 읽힐 때마다 느끼지만, 아이가 씽씽쌩쌩 놀 때에는 그림책을 읽히기 어렵습니다. 아이가 어느 만큼 신나게 논 다음 눈이 가물가물할 때에 읽혀야지 싶습니다. 그러나 눈이 가물가물거리다가도 어느 때에 번쩍 깨어나 다시금 놀곤 합니다. 불을 다 끄고 어른들이 모두 누웠다 해서 잠드는 아이는 아닙니다. 지난밤에는 세 시에 깨어나 두 시간 남짓 잠들지 않으면서 노래를 하고 아빠를 부르고 응가를 한다 하고(그러나 응가는 안 했습니다) 끝없이 놀아대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만큼 하루가 다르게 뛰놀고파 하는구나 싶고,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무엇인가를 찾아보고 싶어 한다고 느낍니다.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동안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픈 애 엄마에다가 씩씩한 아이 하나를 애 아빠 홀로 건사하기란 틀림없이 벅찹니다. 그런데 튼튼한 어른 두 사람일지라도 아이 하나 돌보기란 만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함께 살아가면 한결 수월하고, 다른 살붙이가 한둘쯤 있다면 제법 짐을 덥니다. 그리고, 집안 살붙이가 여럿일 때에는 일거리를 여럿이 나누어 맡는다기보다 ‘집안 살림을 하는 가운데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는 놀라운 모습’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즐겁거나 기쁘겠다고 느낍니다.


.. 실뜨기를 가르쳐 준 사람은 할마니였습니다. 리본 매기를 가르쳐 준 사람도 할머니였고, 세 가닥 땋기를 가르쳐 준 사람도 할머니였습니다. 할머니의 손은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 가을에 피는 꽃 이름과 나무 열매의 이름을 가르쳐 준 할머니. 도토리 팽이랑 억새 초롱을 만들어 준 할머니. 할머니는 모르는 것이 없었습니다 … 할머니는 이제 여자 아이처럼 뛰어오르거나 달릴 수 없습니다. 멀리 걸을 수도 없습니다. 너무 늙어서 다리가 약해졌기 때문입니다 ..  (15∼17쪽)


 어제는, 아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느 날처럼 신나게 놀아대다가 까무룩 잠들었습니다. 아빠가 껍질을 벗겨 준 귤 한 알을 들고 한쪽씩 뜯으며 쪽쪽 빨거나 아빠한테 먹여 주며 마지막 놀이를 하더니 그예 이 모양 그대로 곯아떨어졌습니다. 귀엽게 잠든 아이를 잠자리에 눕히며 아빠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요 며칠 아빠가 몸이 퍽 고단해 기운을 차리느라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읍내 장마당 마실을 다니지 못했는데, 이듬날 읍내 장마당에는 꼭 자전거수레에 태워 마실을 해야겠다고. 장마당을 휘 한 바퀴 돌며 아이한테 찐빵도 사 주고 까까이든 사탕도 사 주어야겠다고. 아이가 잘 먹는 도토리묵 한 모를 사고, 귤이랑 능금이랑 한 봉지씩 장만해야겠다고.

 그림책을 볼 때이든 길을 걸을 때이든 자전거만 보면 ‘자전거!’ 하고 외치는 이 아이는 자전거를 타고 싶어 몸이 달 텐데, 아빠가 튼튼하지 못하면 날마다 서운한 빛으로 하루를 마감하겠지요. 아빠이든 엄마이든 몸이 조금 더 튼튼해서 날마다 멧등성이도 타고 자전거도 타야 훨씬 즐겁게 하루를 보낼 테지요.

 여기에 할머니랑 이모랑 삼촌이랑, 또는 큰아빠까지 함께 살아간다면 여러 사람 손에 따라 여러 가지 놀이를 함께 즐길 수 있으니 더 신날 테고요. 시골집이라 또래 동무 만나기 더더욱 힘들지만, 이웃한 이오덕자유학교 언니 오빠들이랑 얼크러지는 날이면 밥먹기조차 잊으며 참 잘 뛰어다니며 놉니다. 놀려고 태어났으며, 놀고 싶어 하는 아이이니, 집안에서 논다며 이 책 저 책 이 물건 저 물건 마음껏 늘어놓을 때에는 함부로 꾸중하지 말아야지 싶습니다. 마음껏 놀도록 한 다음 다른 놀이를 하려 할 때에 ‘네가 어지른 이 물건들 치우고 놀아야지.’ 하고 한 마디를 하면서 함께 치워야지 싶습니다.


.. 다음날부터, 시오리는 (고양이) 미미에게 꼭 맞는 예쁜 조끼를 짜기 시작했습니다. “아무리 정성스럽게 짜도, 미미는 금세 누더기로 만들어 버릴 거야. 고양이는 조끼 입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엄마가 웃습니다. “입혀 보지 않고는 모르는 일이에요.” 시오리는 그렇게 말하며, 부지런히 뜨개바늘을 움직입니다. “조끼가 다 되면 장화도 만들어야지. 미미의 발은 네 개니까 장화가 두 켤레 필요하겠다. 예쁘게 만들어 줄게. 기다려, 미미야.” 시오리는 뜨개를 뜨면서 말했습니다. 아직 아무도 미미의 비밀을 모릅니다 ..  (30쪽)


 그림책 《가을 아이》를 아이랑 함께 읽습니다. 아이는 아빠 팔베개를 한 채 함께 드러누워 읽습니다. 《가을 아이》는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에 다치하라 에리카 님이 글을 붙여 《봄 아이》 《여름 아이》 《겨울 아이》가 나란히 함께 나온 그림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산골자락에서 가을을 보내는 아이하고 가을 이야기를 나누려고 네 가지 가운데 《가을 아이》를 먼저 뽑아 읽습니다. 이 그림책들은 이와사키 치히로 님이 숨을 거둔 다음 어린이문학을 하는 분이 이와사키 치히로 님 그림을 살피며 글을 붙였다고 합니다. 이와사키 치히로 님은 1974년에 숨을 거두었고, 이 그림책은 일본에서 1985년에 나왔거든요.

 《가을 아이》 마지막 쪽을 보면, 뜨개질을 하는 계집아이 그림이 나옵니다. 이제 고작 초등학교 낮은학년쯤 되어 보이는데 큼직한 뜨개바늘을 꽤 잘 놀립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 무렵에도 학교에서 남녀 가리지 않고 실과 공부를 하며 뜨개질을 익혔습니다. 2학년은 아니었지 싶고, 3학년부터 뜨개질을 했다고 느낍니다. 바느질은 2학년부터 했나, 바느질도 3학년부터 했나 싶어요. 저는 국민학교 다닐 때에 바느질을 하며 쓰던 반짇고리를 아직 잘 건사해 놓고 있습니다. 그때 무슨 마음이었다고 딱히 말할 수 없지만, 나중에 커서 내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가 되면, 내 아이 어버이로서 내가 어린 나날 바느질을 익히며 쓰던 이 반짇고리를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요즈막에 애 엄마는 한창 뜨개질을 하는데, 뜨개질을 하며 쓸 바늘을 ‘그럭저럭 좋은 녀석’으로 삼십만 원 웃도는 값을 치르며 장만했습니다. 그럭저럭 좋은 녀석이니 아직 바늘을 다 장만하지 않았어도 이만한 값이라 합니다. 꽤 좋은 녀석이라면 바늘을 다 장만하기까지 백만 원이 넘겠지요. 바늘 값을 치르느라 허리가 휘청휘청하는데, 애 엄마는 아무렇지 않게 말합니다. ‘이 바늘은 우리 아이한테 물려줄 만한 바늘이에요.’

 하기는. 500원짜리 값싼 바늘은 장마철만 되어도 곰팡이가 핍니다. 그럭저럭 좋은 녀석쯤 되면 장마철이고 뭐고 곰팡이 걱정이 없으며 바느질하는 손이 덜 아프답니다. 애 엄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곰곰이 되새깁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값싼 바늘을 너무 값싸게 다루기만 하지만, 나라밖에서는 뜨개바늘쯤 되면 ‘아주 좋은 녀석으로 알뜰히 장만해서 아이들한테 두고두고 물려주어 쓰도록 한다’더군요. 그래요.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로서, 우리들은 아이와 아름다이 즐길 좋은 책을 장만해 놓아야 하고, 아이가 나중에 기쁘게 물려받아 쓸 만한 뜨개바늘이며 냄비이며 수저이며 살림살이를 갖추어야겠지요. 한 번 쓰고 버릴 물건이 아니라, 쉰 해 백 해 즈믄 해를 보낼 만큼 튼튼하고 좋은 살림살이와 연장을 차곡차곡 건사해야겠지요. 더 많은 돈이 아닌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살림살이를, 더 큰 집이나 더 빠른 자동차가 아닌 한결 믿음직하며 참다운 연장을, 우리 조그마한 멧기슭 집에 하나둘 마련해야겠지요. 즐거이 살아갈 만한 터전을 곱게 일구어야지, 돈이 될 만한 땅을 잔뜩 사들이는 어버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림책 《가을 아이》를 빚은 이와사키 치히로 님은 인권운동가로 일하며 벌이를 못하는 남편에다가 병든 어머니에다가 나이든 시어머니랑 시아버지까지 모시는 가운데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독신이라면 보다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비록 몸이 고단할지라도 나는 번잡한 나의 가정 속에서 인간으로서 균형 잡힌 감각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속에서야말로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나는 소중한 인간관계를 뿌리치고서 어린이를 그릴 수는 없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그림책에 딸린 안내종이에 적힌 말).” 하고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고작 살붙이 둘을 돌보면서 글을 끄적거린다고 용을 씁니다. 이듬해에 둘째가 태어나면 살붙이 셋을 돌보며 글을 끄적거려야 하겠지요. 아픈 옆지기하고 신나게 놀고픈 어린이를 돌보는 나날이란 참 힘겹습니다. 퍽 벅찹니다. 그런데 이렇게 힘겹고 벅차기에 날마다 새로 기지개를 켜며 새벽 일찍 일어나 글 몇 자락 쓰자고 다짐을 하고, 아침부터 밥하고 찌개 끓이며, 설거지에 뒤치닥거리에, 아이하고 놀아 주기에, 집안 치우기에, 빨래에, 무엇무엇에 힘을 들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4343.11.20.흙.ㅎㄲㅅㄱ)


― 가을 아이 (이와사키 치히로 그림,다치하라 에리카 글,백승인 옮김,달리 펴냄,2005.8.5./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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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철학 그림책 1
홍성혜 옮김, 소피 그림, 라스칼 글 / 마루벌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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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잡고 나란히 길을 걷는 마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1] 라스칼·소피, 《문이》(마루벌,1995)



 “문이가 태어났을 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고 있었(2쪽)”다고 합니다. “마침내 먹을 것이 다 떨어졌(6쪽)”고, 문이를 낳아 기르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바다 저 멀리로 문이를 떠나 보내려(6쪽)”고 “사랑하는 아기 문이를 상자 안에 소중히 담(6쪽)”습니다. 상자는 큰 물결을 맞으면서도 멀디먼 바다를 건너는 동안 가라앉지 않습니다. 아이가 담긴 상자는 이웃나라에 얌전히 닿습니다. 또한, 이웃나라 바닷가에 닿은 상자를 알아본 사람이 있고, 이들은 이 상자에 담긴 아이를 고이 껴안으며 기르기로 합니다. 이웃나라에서 어린 문이를 받아들여 키운 어버이는 문이가 꽤 컸다고 느낀 어느 날, “어느 봄날 이른 아침(24쪽)”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를 들려줍니다. 이때 새 어머니와 새 아버지는 문이한테 “문이를 데리고 온 이야기와 사랑하며 살아온 지난 이야기 모두(24쪽)”를 들려줍니다. 이때부터 문이는 “더 자주 바닷가에 나가게 되(28쪽)”었고, “바다 저쪽 끝에 있는 아빠와 엄마도 문이를 사랑했었다(28쪽)”고 여깁니다.

 저를 낳아 기르던 어버이가 저를 버린 줄 알았을 때 어떤 마음일까요. 저를 낳아 기르던 어버이가 당신들은 굶주리다 못해 숨을 거둔다든지, 또는 싸움판에서 끔찍하게 숨을 거둔다든지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면 어떤 마음일까요. 제 어버이가 당신들은 숨을 거두면서 저 혼자 살아남도록 해 주었다는 이야기를 알았을 때에는 어떤 마음이려나요.

 길디긴 싸움판이 그치지 않을 때, 누구도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일자리를 찾기 어려울 테고, 시골에서는 애써 거둔 곡식을 자꾸 빼앗길 테지요. 돈도 밥도 집도 옷도 얻기 어려우며, 삶마저 괴롭겠지요.

 마지막 곡식이 떨어질 무렵이면 싸움이 끝나 주리라 믿다가 사랑스러운 아이를 떠나보내야 했는지 모릅니다. 마지막 곡식이 떨어지기 앞서 싸움판 나라를 아이와 함께 떠나 평화롭고 따사로운 터전을 찾아나서야 했는지 모릅니다. 굶어죽더라도 함께 굶어죽고, 싸움판에서 총이나 대포에 맞아 죽더라도 함께 죽어야 했을는지 모릅니다. 아이만 바다 너머로 보낼 노릇이 아니라 어버이 또한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널 노릇이었는지 모릅니다. 아이는 용케 좋은 어버이를 새로 만나 즐거우며 따사로운 나날을 보낼 수 있지만, 아이는 아무런 새 어버이를 만나지 못하면서 더 괴롭게 굶어죽을 수 있습니다. 아이는 새 어버이를 만났다지만 못된 어버이를 만나 아파 하고 슬퍼 하며 삶을 마감할 수 있어요. 아이를 떠나보내고 얼마 있지 않아 싸움이 끝났다든지, 뜻밖에 먹을거리를 넉넉히 얻을 수 있었다면, 이 어버이들 마음은 얼마나 찢어질까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로서 아이를 누군가한테 떠나보낸다 한다면, 더없이 벼랑 끝으로 내몰린 셈입니다. 도무지 할 수 없는 짓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누리는 아이 어버이들이 당신 아이를 더는 끌어안지 못하도록 내몰곤 합니다. 어버이와 아이를 갈라 놓고, 어버이와 아이한테 생채기가 남도록 짓누르곤 합니다.


.. 문이는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였습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전쟁이 미웠고, 문이를 낳아 바다에 띄워 보낸 바다 저쪽 끝에 있는 아빠와 엄마도 미웠습니다 ..  (26쪽)


 전쟁은 사람이 일으킵니다. 전쟁은 어른이 일으킵니다. 전쟁을 하는 어른들은 남자입니다. 전쟁을 일으키는 까닭은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더 많은 돈을 긁어모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이웃나라를 짓밟은 다음, 돈은 돈대로 거두어들이고 이웃나라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흥청망청 노닥거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은 싸우지 않습니다. 손수 제 밥거리를 얻으려는 사람은 이웃을 해코지하지 않습니다. 알맞게 일하여 알맞게 거두어 알맞게 먹고사는 사람은 다툼질을 할 까닭이 없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너무 큰 돈·이름·힘을 물려받는다든지, 얼마 일하지 않고도 지나치게 큰 돈을 얻어들이는 사람들이 다툼질을 하고 맙니다. 아무렇게나 쓰고도 어마어마하게 남는 사람들이 자꾸자꾸 이웃을 짓밟으며 더 가지려 하고 더 누리려 합니다.

 우리 삶터는 한결 발돋움하는 삶터로 나아가서는 안 됩니다. 우리 삶터는 서로서로 즐거우며 아름다운 삶터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고속도로가 더 생기거나 고속철도가 더 늘어난다고 우리 삶터가 좋아지지 않습니다. 큰물이 날 때에 물이 넘치니 ‘큰 물줄기 네 곳’을 손질해야 한다지만, 큰물이 나는 밑뿌리는 그대로 둔 채 토목건설만을 해댈 때에는 또다른 큰물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좋아하는 삶을 찾아야 합니다. 즐기는 삶을 느껴야 합니다. 고운 삶을 껴안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삶을 나누어야 합니다. 믿음직한 삶을 누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느긋하면서 튼튼하고 씩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착한 삶을 아끼고, 참다운 삶을 돌보아야 합니다. 기쁜 삶을 맞아들이도록 나와 내 살붙이와 내 아이와 내 이웃과 내 동무와 함께 기쁜 일손을 붙잡아야 합니다.


.. 어느 가을날 저녁, 문이는 어릴 때 좋아했던 모든 것을 작은 대나무 상자 속에 담았습니다 ..  (30쪽)


 그림책 《문이》를 읽습니다. 그림책 《문이》에 나오는 ‘문이’는 전쟁 때문에 모든 삶이 바뀝니다. 전쟁이 아니라면 제 어버이를 잃지 않았으며, 새 어버이를 만나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꼭 전쟁이 아니더라도 제 어버이를 잃는 아이는 많습니다. 교통사고 때문이든, 길에서 그만 어버이를 잃든 하면서 제 어버이를 잃는 아이가 많습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이 터지지는 않는 이 나라에서도 아이를 먹여살릴 길이 없어 아이를 누군가한테 맡겨야 하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다른 한켠에서는 넉넉히 먹고살 뿐 아니라 돈이 가득하거나 밥쓰레기가 흘러넘칩니다. 집에서 밥을 먹든 바깥에서 밥을 사먹든, 알맞게 밥을 먹어 밥쓰레기가 안 나오도록 마음쓰는 사람은 몹시 드뭅니다. 내 몸을 생각하며 밥을 먹는 사람들이지만, 내 이웃 몸과 삶을 헤아리며 밥을 나누는 일은 좀처럼 드뭅니다.

 새벽과 아침과 낮에 해를 느낄 수 있다면, 밤에 달과 별을 올려다볼 수 있다면, 구름이 흐르고 바람이 부는 결을 맞아들일 수 있다면, 들풀과 들꽃과 들새 이름을 하나하나 욀 수 있다면, 이웃사람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살아갈 수 있다면, 미움이나 다툼이나 겨룸이나 싸움이 아닌 사랑이나 따스함이나 믿음이나 너그러움으로 어깨동무할 텐데요. 서로를 벼랑 끝으로 내모는 삶이 아니라, 서로를 좋은 보금자리로 안아들이는 삶이 될 텐데요.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지고가 아닙니다. 많이 가졌어도 모자랄 사람이 있고, 적게 가졌어도 넘친다 여길 사람이 있습니다. 알맞게 가지고, 알맞게 나누며, 알맞게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너와 어깨동무를 하면서 서로 기쁘게 살자고 하는 곳이 사랑이면서 평화입니다. 나와 네가 어깨동무를 안 하고, 나와 네가 서로 기쁘게 안 살려 하는 모든 자리는 싸움판입니다. (4343.11.18.나무.ㅎㄲㅅㄱ)


― 문이 (라스칼 글,소피 그림,홍성혜 옮김,마루벌 펴냄,1995.5.15./76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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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쪽빛문고 2
가코 사토시 지음, 이태원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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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올레길·인천 골목길·우리 살림집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9] 가코 사토시,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청어람미디어,2006)



2006년 5월 1일부터 이레에 걸쳐 제주섬 마실을 했습니다. 2010년 11월 13일부터 제주섬 마실을 합니다. 네 해 만에 제주섬 마실을 하면서 들뜨는 마음이고 벅차는 가슴입니다. 옆지기랑 제주마실을 처음 하니 즐겁고, 아이하고도 제주마실은 처음이기에 기쁩니다. 아이는 제가 제주를 밟는지 울릉을 밟는지 알까 궁금합니다. 오늘 밟는 이곳 이 느낌 이 이야기를 앞으로 언제까지 고스란히 이을 수 있을는지 궁금합니다. 함께 제주마실을 하는 동안 아빠가 찍어 놓은 사진을 돌이키면서 ‘아, 내가 어렸을 때 제주섬은 이런 모습 이런 삶 이런 이야기 깃든 곳이었네.’ 하고 되새겨 줄는지 궁금합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문화나 역사나 예술이라 할 때에 으레 ‘예전 사람들이 해 놓은 무언가’를 들춥니다. 서른 해가 되었다든지 쉰 해가 되었다든지 백 해가 되었다든지 이백 해나 오백 해가 되었다든지 이야기합니다. 어제 서귀포로 넘어와 이중섭거리 한켠에 자리한 삼만 원짜리 잠집에서 하루를 묵습니다. 이곳은 예전부터 이중섭거리는 아니었고, 이중섭 님을 기리는 집이나 등불이나 바닥돌 또한 생긴 지 그리 오래되지 않습니다. 새롭게 마련한 기림집이요 기림돌이요 기림길입니다.


이중섭 님이 살던 동안이라든지, 이중섭 님이 바지런히 그림을 그리던 동안이라든지,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중섭 님을 기리는 일이란 없었습니다. 박물관이든 전시관이든 도서관이든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누는 이야기를 곱다시 건사하는 일 또한 거의 없습니다. 이제는 제주섬 현무암 돌담길이 멋스러운 문화유산인 듯 여기지만, 제주섬 여느 살림집마다 현무암을 쌓아 돌담을 이룬 모습은 그예 ‘삶’이었습니다. 남달리 보이려 한 모습이 아니요, 무슨무슨 문화를 이루고자 이룩한 모습이 아니에요. 한때 새마을운동 바람이 불면서 현무암 돌담길은 시멘트블록 돌담길로 바뀝니다. 띠를 이은 살림집은 슬레트나 개량기와 지붕으로 바뀝니다. 흙벽에는 시멘트를 바르고 페인트를 바르다가, 이제는 물감으로 갖가지 그림을 그려 놓습니다.


제주 시내 뒤켠 골목을 걷습니다. ‘올레길’ 아닌 ‘여느 살림집 이어진 골목길’을 걷습니다. 웬만한 살림집마다 문패가 붙은 모습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나무로 새긴 문패, 돌로 빚은 문패, 플라스틱 문패 들이 골고루 어우러져 있습니다. 나무로 만든 대문을 보고 쇠로 만든 대문을 봅니다. 나무 대문이며 문고리이며 오래도록 닳고 낡은 대문이요 문고리입니다. 모두들 얌전히 붙어 있습니다. 저 문고리를 들어 대문을 탁탁 치면 ‘울림 종’ 노릇을 했지, 하고 떠올립니다. 예전에는 여느 살림집에 누름단추 따위란 따로 없었고, 누름단추가 처음 생길 때에는 ‘삐이이!’ 하는 시끄러운 소리가 참말 시끄러웠습니다. 그런데 이 시끄러운 소리를 ‘더 발돋움한 모습’이라거나 ‘현대 물질문명을 누리는 모습’처럼 여겨, 나무대문에 쇠문고리 있는 집조차 누름단추를 비싼값 치르며 달곤 했습니다. 우리 애 엄마도 알까 궁금한데, 지난날에는 우체부 일꾼이 편지를 갖다 주면서 쇠문고리를 탁탁 나무대문에 치면서 “편지요!” 하고 외쳤습니다. 그러면 나무대문을 다 열지 않고, 나무대문 한쪽에 작게 낸 쪽대문을 열어 편지를 받았어요. 안에서 “네!” 하며 나오지 않으면, 대문 밑으로 살짝 낸 틈에 편지를 밀어넣지요.



.. 우리는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걷기도 하고, 달리기도 하고, 놀기도 하고, 일도 하면서 우리는 지구에서 살고 있습니다 .. (2쪽)



제 고향마을인 인천에서도 올해 가을부터 ‘제주 올레길을 닮은 걷는 마실’ 길을 마련했습니다. 인천은 예부터 ‘서울로 올려보낼 물건’을 바닷가에서 받아 수레에 실어 나르는 곳이었습니다. 개항기라고 하던 지난날에는 서울로 들여보낼 ‘새로운 서양 문물’을 언제나 맨 처음으로 풀어 놓고 ‘시험을 해 보며 잘잘못을 살피는’ 곳이었습니다. 한국땅에서 ‘맨 처음이라 손꼽는 새 문물’은 거의 모두 인천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철도라든지 극장이라든지 운동경기라든지 종교라든지 ……. 가장 오래된 야구장 또한 인천에 있었으나 하루아침에 사라졌어요. 뭐, 다 재개발 때문입니다.


인천에서 뜻있는 분들이 마련해 보았다는 ‘두 다리로 걸으며 문화와 역사를 헤아리는 길’이 어디부터 어디까지 걷는 길인가를 가늠해 보면서 마음이 몹시 무거웠습니다. 문화와 역사란 죽은 유물이나 굳은 박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머나먼 옛날이나 까마득한 지난날이 문화와 역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오늘과 살아낼 글피가 문화와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어른들은 어른들 눈썰미로 오늘 삶터를 바라봅니다. 아이들한테 오늘 삶터가 어떠한 오늘 삶터요 어떠한 글피 삶터가 될는지 깨닫지 못합니다. 어른들로서는 ‘예전과 견주어 오늘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데, 아이들한테 오늘은 오늘입니다. 아이들한테 오늘이 어제일 수 없고 글피이지 않아요. 언제나 오늘은 오늘이에요.


아이들은 오늘을 즐기려고 놀이를 합니다. 오늘을 즐기는 놀이를 하지, 어제를 돌아보는 놀이라든지 글피를 맞아들이는 놀이를 하지 않습니다.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가장 즐거울 놀이를 함께 나누는 아이들입니다.


옆지기하고 아이가 손 잡고 제주 골목을 걷거나 이곳저곳 다니는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며 생각합니다. 아빠 눈썰미로 보자면, 이 모습이건 저 모습이건 그닥 새롭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아이한테는 모든 모습이 처음이요 모든 이야기가 오늘 이 자리 이야기입니다. 아이한테는 앞으로 다섯 해 뒤이든 열 해 뒤이든, 또 고작 한 해 뒤이든, 바로 오늘 이곳에서 함께 일군 이야기가 더없이 새로우면서 빛나는 이야기가 됩니다. 아이는 새 삶을 일구며 새 이야기를 긷고, 새 나날을 맞이하며 새 꿈을 키웁니다.


제주시 골목을 거닐며 사진을 찍다가 자꾸자꾸 느낍니다. 제주라 해서 더 남다르거나 나을 수 없는 셈이지만, 이런 이야기를 얼마나 깨닫거나 헤아릴 수 있는지는 모를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곳곳에 ‘제주를 드러내는 상징물이나 조형물’을 애써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이렇게 세워 놓은 상징물이나 조형물하고 나란히 있는 ‘여느 살림집 살림살이’야말로 애써 목돈 들여 마련한 상징물이나 조형물보다 훨씬 멋스러우며 곱다고 느낍니다.



.. 우리는 지표면 위에 있는 잎이나 꽃, 줄기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흙 속에 묻혀 있는 뿌리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풀이나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숨어 있어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 (5쪽)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를 읽습니다. 이 그림책은 일본에서 1975년에 나왔습니다. 저는 이 그림책을 1975년에 일본에서 나온 판으로 즐겁게 보았습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가코 사토시 님 다른 그림책도 일본판으로 알뜰히 갖추어 놓았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1975년 책이니 자그마치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그림책이군요. 책으로 치면 서른다섯 살이고, 사람으로 치면 서른여섯 살입니다. 제 나이 서른여섯하고 똑같은 그림책이에요.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는 2006년에 한글판이 나옵니다. 일본에서는 진작에 1975년부터 이 그림책을 즐겼으나, 한국에서는 고작 2006년에 이르러 비로소 이 그림책을 즐기는 셈입니다. 일본 어린이와 어버이는 1975년부터 이처럼 놀랍고 알찬 그림책을 맞아들이며 마음밭을 한껏 살찌웠습니다만, 한국 어린이와 어버이는 2006년이 되어 가까스로 이 그림책을 맛보기라도 하는 셈입니다.


2010년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보자면, 1975년에 빚은 그림책을 오늘날 즐기는 모습이란 참 ‘낡은’ 이야기에 매인 모습이라 여길 만합니다. 2010년이라면 2010년 이야기를 나눌 노릇이라 여길 수 있겠지요. 그렇다면 2010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1975년을 살아가던 이웃나라 일본사람보다 무엇이 더 발돋움했거나 무엇을 더 아름다이 여민다고 말하려나요. 2010년 한국 그림책이나 어린이책이나 어른책은 얼마나 2010년다운 이야기와 맛과 멋과 깊이와 꿈과 뜻과 보람과 사랑을 담았다 말할 만한가요.


가코 사토시 님은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첫머리에서 말합니다. 우리들은 이 지구에서 살아가며, 사람들은 지구 겉껍데기는 잘 알지만 속알맹이는 잘 모른다고.


곰곰이 곱씹어 봅니다. 우리들은 이 지구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지구에서 살아간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사람들은 지구 속알맹이는커녕 겉껍데기조차 거의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문화니 역사니 예술이니 하지만, 문화나 역사나 예술을 얼마나 잘 아는 우리들이라 할 만하겠습니까. 어제 발자취를 말하는 우리들이라지만, 어제 발자취는커녕 오늘 발자취조차 제대로 모르는 우리들이 아닌가 모를 일입니다.


이 땅 사람들은 문화와 역사와 예술을 말하기 앞서 ‘삶’을 모르거나 잊거나 등돌립니다. 오늘 삶, 여느 삶, 어제 삶, 고른 삶 들을 두루 모르거나 잊거나 등돌립니다.


성냥공장 터를 찾거나 백 살이 넘은 초등학교 건물을 돌아보거나 외국 선교사 잠집을 찾아다니며 역사가 이러하고 문화가 어떠하며 예술이 어찌저찌 하다고 읊는 이야기 또한 얼마든지 ‘인천 골목 올레’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냥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어떤 집에서 어떻게 살았으려나요. 백 살이 넘은 초등학교에 다니던 사람들은 어느 동네 어느 살림집에서 어떤 골목터를 이루며 살았을까요. 외국 선교사가 외국 종교를 이 나라에 퍼뜨리려고 마주하던 이 나라 사람들은 어떠한 삶 어떠한 살림 어떠한 모습이었을까요. 동일방직에서 똥물을 마셔야 했던 언니들은 어느 동네 어느 집에서 어떤 살림을 누구랑 꾸렸을까요.


그림책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는 ‘1975년 오늘을 살아가는 일본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 지구 삶터 이야기를 몹시 알뜰히 일구어 냈습니다. 참으로 몹시 알뜰히 일구어 낸 예쁜 그림책이기 때문에 2006년에 한글판으로 나와 2010년에 우리 집 책시렁에 곱게 꽂아 놓아도 빛이 납니다. 2075년을 맞이하든 2175년을 맞이하든 이 그림책은 사람들한테 아리따운 이야기를 쉼없이 길어올리리라 생각합니다. (4343.11.15.달.ㅎㄲㅅㄱ)

- 지구 속은 어떻게 생겼을까? (가코 사토시 글·그림,이태원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6.4.15./9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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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사벅슨
바바라 쿠니 그림, 앨리스 맥레란 글, 아기장수의 날개 옮김 / 고슴도치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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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삶터가 가장 좋은 놀이터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8] 앨리스 맥레란·바바라 쿠니, 《록사벅슨》(고슴도치,2005)



 그림책 《록사벅슨》을 보았습니다. 부드러운 그림결에 따스함 감도는 이야기가 좋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집 아이도 이 그림책을 좋아할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에는 온통 언니랑 오빠랑 그득그득 쉴새없이 나오거든요.

 그림책 《록사벅슨》에 나오는 언니랑 오빠는 그림책에서는 언제까지나 어린이입니다. 그림책에서는 어린이인 이분들은 ‘살아 있다’면 아흔을 훌쩍 넘기거나 백 살 즈음 되겠구나 싶습니다. 퍽 까마득한 옛날 옛적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이라 할 텐데, 그림책을 찬찬히 넘기는 동안, 이 그림책 이야기는 그리 머나먼 지난날을 다루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모두들 어린이요, 어린이로서 다 함께 오순도순 놀이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이 즐기던 놀이는 제가 1970∼80년대에 즐기던 놀이하고 그리 다르지 않는데다가, 애 엄마가 1980∼90년대에 즐기던 놀이하고도 썩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제 어린 날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든지 애 엄마 어릴 적 모습을 담은 사진이라든지, 이런 좀 지나간 사진을 아이가 들여다볼 때, 우리 아이는 그냥 ‘어린이’라고 생각하며 바라봅니다. 사진으로 보는 아이들은 그저 사진에 담긴 그 나이 그대로 언니이거나 오빠이거나 동생이거나 동무입니다. 구태여 예전 모습이라 토를 달 까닭이 없고, 예전 모습이라 하지만 굳이 금을 그어 갈라 놓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림책을 찬찬히 넘기고, 다시 넘기며, 거듭 넘기는 가운데 조용히 생각합니다. 이 그림책을 그린 분은 이 그림책에 담긴 이야기 같은 삶을 다시는 만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이 그림책을 장만하여 스스로 읽거나 아이한테 읽힐 어버이 또한 ‘되찾거나 마주하기 어려운 지난날 발자취와 이야기’라고 여길 만하다고 봅니다. ‘옛날에는 다들 이렇게 놀았지.’ 하는 말마디를 겨우 들려줄 만하구나 싶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날 도시 자본주의 삶터에서는 ‘골목놀이’이든 ‘숲속놀이’이든 누리거나 즐길 수 없어요. 오늘날 도시 자본주의 삶터에는 자동차하고 건물하고 아스팔트만 있습니다. 마음껏 뛰놀 논밭이 아이들 보금자리 둘레에 없습니다. 신나게 물장구를 칠 도랑이나 개울이나 냇물이 아이들 삶자리 가까이에 없습니다. 살가이 찾아가서 함께 놀 이웃집이 아이들 사는 집하고 맞닿아 있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모조리 쪼개어졌습니다. 언니랑 오빠가 동생한테 골목놀이나 숲속놀이를 물려주지 못합니다. 진작에 골목놀이와 숲속놀이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아이들 웃음소리 울음소리가 사라졌다’ 하는 말을 하는 어른들은 으레 잊습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안 놀고 숲속에서 못 놀기 앞서, 어른들부터 골목에서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어른부터 골목에서든 숲속에서든 동무를 사귀거나 어울리지 않아요. 어른들이 먼저 골목에서나 숲속에서나 사귀지 않습니다. 물레방앗간이라든지 갈대밭이라든지 수수밭이라든지 밀밭이라든지 대나무숲이라든지 …… 애틋한 서로가 몰래 만나 사랑꽃을 피우는 일이란 어느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도시이든 시골이든 어디에나 흔해빠지도록 널린 모델에 방 하나 얻으면 그만인 사랑놀이입니다. 가까운 벗끼리 느릅나무 밑에서든 느티나무 밑에서든 미루나무 밑에서건 막걸리 사발 주고받는 조촐한 술잔치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품앗이이든 울력이든 하지 않습니다. 도르리나 도리기란 잊힌 지 오래입니다. 아이들이 골목이나 숲속에서 놀지 않는다거나, 아이들 문화가 슬프다고 섣불리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을 이 모양으로 만든 사람은 바로 어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얄딱구리한 정치꾼이 아닌 바로 나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학원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입시지옥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고속도로를 만드나요? 아이들이 자동차를 만드나요? 아이들이 높은 건물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4대강사업을 만드나요? 아이들이 대통령을 뽑나요? 아이들이 교대나 사범대를 나와 교사가 되나요? 아이들이 체벌을 하나요? 아이들이 돈빨래를 하나요?

 모조리 어른들이 저지르는 잘못 때문에 아이들이 시름시름 앓습니다. 몽땅 어른들 말썽거리 때문에 아이들이 아파 합니다. 된통 어른들이 엉터리 바보 멍텅구리인 탓에 아이들이 놀이뿐 아니라 일하고 삶과 마음하고 믿음이랑 눈물에다가 웃음을 잃습니다.


.. 매리안은 그곳을 록사버슨이라고 불렀어. (매리안은 언제든지 모르는 이름이 없었으니까.) 길 건너편에 있는 그곳은 그냥 흔한 바위언덕처럼 생긴 곳이었어. 모래와 바위가 있고, 낡은 나무 상자들이 조금 있고, 선인장과 덤불, 그리고 가시 많은 오코틸로가 자라고 있을 뿐이었지 ..  (6쪽)


 이제 ‘록사벅슨’에서 노는 어린이는 없다고 합니다. 록사벅슨에서 놀던 아이들은 거의 다 도시로 나왔다고 합니다. 도시 삶터에서 시골 록사벅슨으로 돌아가는 사람은 없답니다.

 한국땅에서도 도시 삶터를 떠나 시골 삶터로 옮기는 사람은 손에 꼽도록 드뭅니다. 드문드문 시골 삶터로 옮기는 사람이 있으나,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훨씬 많습니다. 도시는 사람이 꾸역꾸역 늘고, 시골은 사람이 눈에 띄게 줄어듭니다. 게다가 어린이와 푸름이와 젊은이 숫자는 크게 줄어듭니다.

 시골에서 사람들 숫자가 줄어드니까, 서로서로 가까이 사귀기 힘듭니다. 서로서로 가까이 사귀지 못하니까 ‘록사벅슨’처럼 ‘무너미마을’이나 ‘학다리마을’이나 ‘숯고개’나 ‘못고개’ 같은 놀이터가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든다지만,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면서 ‘서로 사이좋은 이웃으로 지낼 마음’이 아닙니다. 저마다 돈을 더 많이 벌어들일 뜻으로 도시로 몰려듭니다. 사람들이 참 많으며 북적거리는 도시입니다만, 이 많은 사람이 서로서로 따사로이 어깨동무하지 않습니다. 서로서로 돈다툼과 자리다툼을 할밖에 없습니다. 다들 말다툼과 성적다툼을 해야만 합니다. 도시에서조차 골목동네는 뿌리내리지 못합니다. 골목동네 값싼 땅과 집은 개발업자한테 통째로 팔려 비싼 땅 아파트로 다시 올려세우도록 떠밀립니다. 오순도순 고즈넉히 사귈 수 없는 도시 터전 사람들입니다. 알뜰살뜰 너나들이가 되어 가지 못하는 도시 터전 우리들이에요.

 아이들이 골목과 숲속에서 자취를 감추기 앞서 어른들부터 골목과 숲속에서 자취를 감추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이들 놀이가 사라지기 앞서 어른들 놀이가 사라졌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 사랑과 믿음이 말라비틀어지기 앞서 어른들 사랑과 믿음이 벌써 말라비틀어지고 말았음을 깊디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 말을 타면 바람처럼 빠르게 달릴 수 있었어. 말 타기에는 속도 제한이 없고, 꼭 길로 다닐 필요도 없었거든. 그저 긴 막대기 하나와 고삐로 쓸 끈 같은 것만 있으면 다가닥 다가닥 어디든 신나게 말을 달릴 수 있었지 ..  (22∼23쪽)


 딸아이 하나와 함께 살아가는 한편, 이듬해 2011년 봄에 둘째를 낳아 함께 살아갈 우리 식구 살림살이를 곰곰이 헤아립니다. 아이 아빠인 저랑 아이 엄마인 옆지기는 어린 날 동네에서 신나게 놀던 일을 머리뿐 아니라 가슴과 손발에 곱게 아로새겨 놓았습니다. 언제라도 어렵잖이 떠올릴 만한 어릴 적 놀이요 삶이며 생각입니다. 이 어릴 적 발자국 또한 앞으로 쉰 해쯤 지나 “한국판 록사벅슨” 그림책으로 내놓아야 할까 모를 노릇인데, 인천 골목동네에서 살던 무렵이든 충주 산골마을로 옮겨 살아가는 요즈음이든, 아이가 놀이동무를 마주하기는 퍽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골목마다 자동차로 꽉 찼으며, 시골에서는 너른 들판과 산자락마다 공장이 자꾸 들어서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아이들은 얼마나 동무를 사귀면서 놀 만한가 궁금합니다.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며 ‘우리 아이들 나름대로 멋지게 이름붙이며 놀 록사벅슨’은 어디에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놀이터 록사벅슨은 박제가 되어야 할 유물이 아닌, 낡고 닳으며 새롭게 빛나는 구슬인데, 그저 ‘옛날엔 이랬단다(너희는 요로코롬 못 놀았지? 메롱!)’ 하고 노래하며 아이들 놀이터를 활짝 열어젖히지 않고 그림책만 쥐어 주는 이 나라 어른들 굴레가 이어지기만 할는지 궁금합니다. 좋은 이야기는 바로 삶입니다. 사랑스러운 이야기는 곧 내 삶입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는 하루하루 일구는 우리 삶입니다. (4343.11.14.해.ㅎㄲㅅㄱ)


― 록사벅슨 (앨리스 맥레란 글,바바라 쿠니 그림,아기장수의 날개 옮김,고슴도치 펴냄,2005.6.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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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 베틀북 그림책 68
데이비드 맥키 글 그림, 민유리 옮김 / 베틀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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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깔 고운 자연은 도시에도 있습니다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6] 데이비드 맥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베틀북,2005)



 여느 도시에서는 겨울을 코앞에 둔(또는 겨울날) 저녁 여섯 시 무렵이면 한창 일할 때이거나(아니면 한창 일을 마무리짓고 일터를 나설 때이거나) 슬슬 놀 때이지 싶습니다. 여느 시골에서는 겨울이 눈앞에 이른(또는 겨울 한복판) 저녁 여섯 시 즈음이면 하루 일을 마감하며 잠자리를 추스를 때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동안 아이는 참 늦게 잠들었습니다. 저녁 여섯 시이든 여덟 시이든 아랑곳하지 않으며, 밤 열 시나 열두 시까지 뛰어놀려 했습니다. 골목동네 작은 2층집 불을 다 꺼 놓아도 길거리에는 등불이 환하게 켜 있습니다. 하나도 어둡지 않고 조금도 어두울 수 없습니다.

 시골로 처음 옮겨 왔을 무렵, 아이는 도시에서 살듯이 저녁 여덟 시이든 열 시이든 잠을 안 자려 합니다. 한여름이라 하더라도 일곱 시 무렵이면 어둑살이 내려요. 집 바깥은 온통 깜깜하지만, 아이 몸은 도시에서처럼 일찍 깨고 늦게 자는 데에 버릇이 들었으니, 아이 엄마나 아빠로서는 몹시 고단합니다.

 한 달을 지내고 두 달을 지내며 석 달을 지내니, 아이는 차츰 시골 어두움에 익숙해집니다. 까까를 사러 동네 구멍가게에 손쉽게 찾아갈 수 없을 뿐더러, 멧기슭에 자리한 살림집 둘레에서 가까운 이웃집조차 까마득합니다. 한두 시간에 한 번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타는 데까지 이십 분은 넉넉히 걸어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여러모로 읍내로 마실 갈이 잦았으나, 하루이틀 지나며 딱히 읍내로 마실 갈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지내는 나날이 길어지니, 저녁에 불을 켜고 아이 엄마가 뜨개질을 하거나 아이 아빠가 책을 읽지 않는다면, 아이 또한 곱게 잠들어 줍니다.


.. 옛날에 어떤 장군이 다스리는 큰 나라가 있었습니다. 큰 나라 사람들은 자기들이 사는 나라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했어요. 그 나라에는 전쟁이 나가기만 하면 이기는 힘센 군대랑 커다란 대포도 있었으니까요 ..  (4쪽)


 아침과 낮과 저녁, 새벽과 밤, 비와 눈, 바람과 햇살, 물과 하늘, 바다와 흙, … 모든 자연은 시골에만 있지 않습니다. 모든 자연은 시골과 도시에 나란히 있습니다. 도시라 해서 자연이 없을 수 없고, 자연이 없지 않아요. 다만, 도시라는 곳은 도시사람 스스로 자연을 느끼거나 살피거나 받아들이지 못하게끔 울타리가 놓여 있습니다. 도시에서는 자연이 아닌 돈을 보고 이름값을 거머쥐며 힘을 누리도록 하는 데에 사람들 눈길이 쏠리게끔 짜여 있습니다.

 느긋하게 살아갈 때에,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자연을 느낍니다. 넉넉하게 사랑할 때에,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자연을 살피어 껴안습니다. 스스로 곱게 살아가고픈 꿈을 키울 때에, 도시와 시골 어디에서 살더라도 자연을 맑고 밝게 받아들입니다.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을 읽습니다. 아이는 이 그림책을 퍽 즐겨 펼칩니다. 아이 스스로 혼자 자주 펼치곤 합니다. 책에 나오는 그림이 재미있는지, 책 얼거리가 재미난지, 혼자 그림책을 볼 때에 고양이 그림책이랑 린드그렌 할머님 그림책이랑 이 전쟁 얘기 그림책을 으레 펼칩니다.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에 나오는 ‘싸움꾼 장군’은 언제나 싸움을 벌입니다. 왜냐하면 ‘싸움꾼 장군’이 할 일이란 ‘싸움’이거든요.

 군대라는 곳은 ‘싸우라’ 있습니다. ‘싸우지 말라’며 있는 군대는 온누리에 한 군데도 없습니다. 군대를 마련한 까닭은 ‘나라 지키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웃나라 넘보기’를 헤아리며 군대를 추스릅니다.

 이리하여, ‘싸움꾼 장군’은 자꾸자꾸 이웃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이웃나라가 ‘싸움꾼 장군’이 다스리는 나라를 해코지하거나 괴롭히거나 들볶거나 못살게 굴지 않지만, ‘싸움꾼 장군’은 싸움을 그치지 않습니다. 더 싸우고 싶으니 쳐들어갑니다. 이 양반이 할 일이란 싸움이니까 싸움을 자꾸자꾸 벌입니다. 마지막까지 모든 나라를 군대힘으로 짓밟을 때까지 칼을 들고 대포를 쏩니다. 사람을 죽이고 식민지로 삼습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담은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이라 할 만합니다. 참말 전쟁이란, 싸움이란, 그지없이 끔찍한데, 어떻게 전쟁이라는 낱말 앞에 ‘행복한’ 같은 꾸밈말을 붙일 수 있는지 소름이 돋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사람들은 총이나 칼이나 대포를 들지 않으면서 싸우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컴퓨터로 싸웁니다. 서류로 싸우고 행정과 정책으로 싸웁니다. 정치꾼은 늘 싸우고, 기자와 지식인과 교수 또한 노상 싸웁니다. 대통령은 사람들하고 싸우고, 생채기를 입거나 아픈 사람들 또한 못된 사람들과 맞서 싸워야 합니다. 권리를 빼앗겨서 싸우고, 집과 삶터를 앗겨서 싸웁니다. 돈을 더 벌려 싸우기도 하고, 모든 돈을 혼자 차지하려 싸우기까지 합니다. 버스와 전철 같은 데에서 빈자리를 차지한다든지 먼저 타거나 내리려고 싸웁니다. 자동차를 몰며 더 빨리 달리고픈 마음에 싸웁니다. 물건을 하나라도 더 팔려고 싸우며, 내 가게 장사가 조금 더 잘 되도록 하려고 싸웁니다.

 온통 싸움판인 나라입니다. 운동경기 가운데 싸움이 아닌 운동이 없습니다. 운동을 한다면서 안 싸우는 사람이 없어요. 문학이든 예술이든 서로서로 겨루거나 다투거나 맞섭니다. 어디에서나 피가 튑니다. 어느 곳에서나 등수를 매깁니다. 학교에서마저 아이들을 싸움판으로 내몰며 등수를 매기는데요. 슬기롭게 일구면서 아름다이 북돋우는 문화나 문학이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학문을 마주하기란 꽤 힘듭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싸움나라라 할 만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움판입니다.


.. 장군은 집에 돌아와서 무척 기뻤어요. 비록 큰 나라가 예전과는 조금 달라 보였지만 말이에요. 밖에 나가면 작은 나라의 거리에서 맡았던 음식 냄새가 풍겨 왔어요. 작은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던 놀이를 하는 사람들도 보였지요. 어떤 사람들은 작은 나라 사람들의 옷을 입고 있었어요. 장군은 웃으며 생각했지요. “그래, 이게 다 전쟁에서 이긴 덕분이지!” ..  (25쪽)


 ‘싸움꾼 장군’은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한 나라를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예 쳐들어갑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남은 한 군데 나라는 참말 작은 나라라서 ‘싸움꾼 장군’으로서는 딱히 쳐들어가서 얻을 만한 무언가가 있으리라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남았겠지요. 다른 나라들은 ‘싸움을 일으켜 쳐들어가’면 ‘빼앗거나 거머쥐거나 사로잡을’ 만한 보배가 많았겠지요. 싸움을 일으키는 까닭은 그냥저냥 싸움이 재미있기 때문이겠습니까. 싸움이 즐거워 싸움을 자꾸 벌이기도 했겠지만(참 두려운 일입니다), 이웃사람이 알뜰히 누리는 삶을 빼앗는 즐거움(이 또한 몹시 무섭습니다) 때문에 끝없이 싸움을 벌입니다.

 싸움이란, 나한테 돈이나 이름이나 힘이 대단히 크거나 많이 있다 할지라도 더 갖고 싶거나 더 누리고 싶거나 혼자만 차지하고 싶기 때문에 일으킵니다. 서로서로 어깨동무를 하거나 사랑을 나누고 싶은 사람은 싸우지 못합니다. 아니, 싸움이라는 낱말부터 몰라요. 사랑을 하고 싶은데 무슨 싸움을 하나요. 믿음을 섬기는 사람이 싸울 수 있을까요. 믿음을 참다이 섬기는 사람은 ‘교회 크기 싸움’을 하지 않을 뿐더러 ‘예배당에 나와서 하느님 믿으셔요’ 하는 다툼을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을 섬기는 아름다운 삶을 조촐하며 나 스스로 고즈넉하게 꾸릴 뿐입니다. 그저 내 삶이 나와 내 이웃한테 따사롭게 펼치지도록 마음을 기울일 뿐입니다.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에서 ‘싸움꾼 장군’은 마지막 한 나라로 무시무시하며 어마어마한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갑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나라에는 군대가 없습니다. 무시무시하며 어마어마한 군대가 쳐들어왔으나 따로 맞서 싸우며 ‘나라 지키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싸움이란 모르고, 싸울 무기란 없기도 하니까요. 총이나 칼이 아닌 낫과 호미가 있고, 대포가 아닌 쟁기가 있는 작은 나라입니다. ‘지키는 군대’가 아닌 ‘싸우는 군대’는 이웃나라로 쳐들어가거나 군대를 이어가자며 ‘군량미’라고 하는 먹을거리를 무척 많이 갖추어야 합니다. 작은 나라는 군대가 없으니 따로 군량미 같은 먹을거리를 챙기지 않을 뿐더러, 무기를 만드느라 돈이나 품이나 틈을 쓰지 않기 때문에, 무시무시하며 어마어마한 군대가 쳐들어왔어도 이들을 총칼로 때려잡으려 하지 않습니다. 당신들한테 ‘조금 더’ 있는 밥과 옷을 나누어 줍니다. 잠자리를 나누어 주고 함께 놀이를 합니다. 이맛살을 찌푸리며 ‘요놈한테서 무얼 빼앗거나 요놈을 어떻게 괴롭히다가 죽일까?’ 하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이는 어떤 삶을 꾸려 왔을까?’ 하고 생각하며 살가이 마주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이라는 그림책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아이를 바라보며 곱씹어 봅니다. 어쩌면 우리 아이는 그냥저냥 그림만 보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 그림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에 나오는 군인들은 군인이라고는 하나 그림으로 보기에는 그저 짜리몽땅 귀여운 인형처럼 보이거든요. 무시무시한 군대가 대포를 쏘아대며 이웃나라 사람들을 죽이는 모습을 보면 피를 흘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널브러져 있습니다. 아이가 보기에 ‘넘어진’ 모습이기만 합니다.

 그림책을 옆으로 밀쳐 놓습니다. 가만히 헤아립니다. 싸움꾼 나라에서 싸움꾼 사람들이 되도록 다스리는 싸움꾼 장군은 당신 삶에서 무엇이 아름답거나 무엇이 참답거나 무엇이 착한 일인지 하나도 깨닫지 않습니다. 깨달을 가슴이 없고, 깨달으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싸움꾼 장군이 살아가는 나라에도 나무는 자라며 새는 지저귀고 바람이 붑니다. 싸움꾼 장군이 군대를 거느리는 나라에도 농사짓는 사람이 있으며 옷을 깁거나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가 있습니다. 맑고 밝게 뛰어노는 아이들이 있으며, 파란하늘과 푸른숲이 있겠지요.

 바닥에 쌓인 그림책들을 책꽂이에 하나하나 꽂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이라는 그림책을 다시 쥡니다. 아무래도 이 그림책은 이름을 잘못 붙였습니다. “온누리에서 가장 어리석은 싸움”쯤으로 이름을 고쳐 붙여야지 싶습니다. “가장 바보스러운 싸움”쯤으로 이름을 다시 달아야지 싶습니다. 내 곁에 있는 사랑스러운 사람을 몰라보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내 둘레에 서린 아름다운 터전을 몰라보는 사람은 바보스럽습니다. (4343.11.9.불.ㅎㄲㅅㄱ)


―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전쟁 (데이비드 맥키 글·그림,민유리 옮김,베틀북 펴냄,2005.1.25./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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