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부랑 꼬부랑 할머니 비룡소 창작그림책 34
김기택 지음, 염혜원 그림 / 비룡소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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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장만하는 신나는 삶길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27] 김기택·엄혜원,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비룡소,2008)



 날마다 수많은 책이 새로 나오고, 나날이 숱한 그림책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꽤 큰 출판사에서 내놓는 책만 하더라도 한 사람이 다 읽을 수 없다 싶을 만큼 많습니다. 햇수가 오래되고 살림이 큰 출판사에서 엮는 도서목록이라면 두툼한 책 하나입니다. 그림책을 내놓는 출판사에서 만드는 도서목록은 아직 두툼한 책 하나만큼 되지는 않으나, 앞으로 열 해나 스무 해쯤 뒤라면 그림책을 내놓는 출판사에서 엮을 도서목록 또한 묵직한 책 하나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도서목록만 이러하다면, 이 출판사에서 내놓은 그림책을 집안에 갖추려 하면 자리를 많이 차지할 뿐더러 책값 또한 몹시 많이 써야 하겠지요. 그림책 천 권을 갖추려 한다면, 한 권에 줄잡아 만 원이라 할 때에 천만 원입니다. 한꺼번에 천만 원을 들여 그림책 천 권을 장만하기란 벅차다 할 테지만, 하루에 한 권씩 그림책을 장만한다 생각하면 다달이 삼십만 원입니다. 세 해에 걸쳐 그림책 한 권씩 사들여 즐기면 천 권을 거뜬히 그러모읍니다.

 그림책을 날마다 한 권씩 사들이자면 살림돈이 바닥난다 여길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느 집에서는 하루아침에 천 권이든 만 권이든 장만할 만큼 돈이 넉넉할 테지요. 그런데 돈이 많아 하루아침에 그림책 천 권을 장만하거나 만 권을 장만한들, 아이로서는 이 많은 책을 다 볼 수 없습니다. 하루에 한 권씩 세 해에 걸쳐 천 권을 본다든지, 날마다 세 권씩 한 해에 천 권을 볼 수야 있겠지요. 어쩌면 하루에 열 권씩 볼 수 있어요. 아이이든 어른이든 참 좋다고 여기는 그림책은 보고 다시 보며 거듭 봅니다. 같은 소설책 한 권을 100번이나 1000번 다시 보기 힘들 테지만, 같은 그림책이나 만화책이나 사진책은 100번이나 1000번은 가뜬히 다시 볼 만해요. 더없이 좋다고 느끼는 그림책이라 할 때에는 날마다 10번씩 되읽기도 하니까, 열흘이면 금세 100번을 되읽는 셈입니다. 아빠나 엄마는 같은 그림책을 날마다 10번씩 읽어 주면 며칠쯤 뒤에 아예 줄거리를 꿸 테고 한두 달 뒤라면 책을 펼치지 않고도 몇 쪽 어디에 어떠한 그림이 있다고 읊을 수 있어요.

 가만히 보면,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느라 다달이 학원삯을 꽤나 씁니다. 영어를 배우건 수학을 배우건 논술을 배우건 교과서 시험공부를 배우건, 학원에 바치는 돈이 꽤 커요. 대학교 학비가 한 해에 천만 원이라지만, 유치원에 아이들을 넣는 데에 들어가는 돈만 하더라도 한 해에 오백만 원 즈음 됩니다. 어버이가 아이들을 유치원에 안 넣고 집에서 함께 놀고 어울리면서 그림책을 읽어 준다면, 날마다 한 권은 못 될지라도 이틀이나 사흘에 한 권씩 사 줄 수 있습니다. 집에서 홀로 아이를 맡아 키우면 어버이라도 힘드니까, 이웃집 아이하고 함께 놀도록 하면 끼리끼리 어울리면서 한결 신납니다. 아이들은 놀려고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가지, ‘어버이가 밖에서 다른 일을 홀가분하게 하거나 바깥에서 돈벌이를 하자면’서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낼 수 없습니다. 피아노학원에 보낼 돈을 한 해치 모아 피아노 한 대 들여놓고 아이 마음대로 악보를 보면서 치도록 하면 한결 즐거워요. 악보 없이 마음 가는 대로 치라 해도 되고요.

 아이들 어버이는 자가용을 모느라 기름값을 다달이 제법 씁니다. 자가용을 조금 덜 몬다면, 또는 자가용을 안 몬다면, 기름값으로 댈 돈으로 그림책을 장만할 만하며, 문학책이나 인문책이나 사진책이나 마음껏 장만할 만합니다. 자가용 한 대 값이라 하면, 한 집안 아이랑 어른이 ‘죽는 날까지 읽을 책’을 걱정없이 사서 읽을 만한 값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 큰 아파트로 옮긴다든지 더 넓은 집으로 옮긴다든지 하면서 목돈을 모으기보다, 그때그때 좋은 책 사서 읽고 좋은 영화 찾아서 보며 좋은 노래 찾아서 듣고 부른다면, 하루하루 ‘더 돈 많은 부자’로 살아가지는 못할 테지만, ‘더 마음 너그러운 사람’으로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림책이란 아이들한테 ‘아이일 때에만 읽히는 책’이 아니라 ‘아이가 어릴 때부터 어버이와 딸아들이 함께 즐기는 책’인 만큼, 아이는 아이대로 어릴 때에 즐기고,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한 살 두 살 더 무르익는 가운데 즐기며, 나중에 아이들이 무럭무럭 커서 제금나서 혼인하여 아이를 낳아 키운다 할 때에 고스란히 물려주면서 읽히는 책이 됩니다. 이때, ‘내 아이’이자 ‘손자 손녀 어버이인 아이’는 제 아이들하고 저희하고 같이 이 그림책들을 읽힐 테니까, 바로 오늘 장만하여 우리 아이한테 읽히는 그림책은 오늘 읽고 그치는 책이 아니라 두고두고 오래오래 즐기는 책이에요.


..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시골길을 가다가 길가에 활짝 핀 코스모스를 만났어요. “할머니, 왜 저희 같은 꽃한테 자꾸 절하시는 거예요?” “바람이 불 때마다 한들한들 하늘하늘 너희들은 신나게 춤추지 않니? 나는 춤은 못 추지만 허리가 꼬부라져서 꼬부랑꼬부랑 절은 잘 한단다.” ..


 두고두고 즐기는 그림책은 아무 그림책이나 골라서 장만할 수 없습니다. 오래오래 즐기는 그림책은 새로 나온 그림책이라 해서 무턱대고 몽땅 사들일 수 없습니다. 그림결을 살피고, 줄거리를 돌아보며, 책에 깃든 말투를 짚는 가운데, 짜임새와 엮음새를 낱낱이 헤아립니다. 모든 대목이 아름답다면 아주 기쁘게 장만하겠지요. 한두 대목이 아쉽다면, 아쉽기는 하지만 괜찮게 즐길 만하다고 여기며 장만합니다. 모든 대목이 아쉽다면, 말끔히 잊고 책방 책시렁 제자리에 얌전히 꽂아 놓습니다.

 그렇지만 엉터리로 그린 그림에 엉터리로 붙은 줄거리에 엉터리로 적바림한 말이 가득한 그림책도 제법 많습니다. 엊그제 경기문화재단에서 내놓는 소식지를 받아서 읽다 보니, 경기도 쪽에서 ‘골목동네 벽그림’을 그리는 어느 모임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이 모임에서 ‘가난하다는 골목동네에서 그린 벽그림’ 사진을 몇 장 보다가는 그만 쓸쓸하고 슬프며 답답했습니다. 예쁘장하다 싶게 그림을 그렸지만, 그림은 모두 엉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작은 동네 술집에 모여 앉은 사람들이 술상과 걸상과 몸크기가 도무지 안 맞습니다. 비례와 균형이라 하지요? 술상과 걸상이 딱 붙었는데 사람이 사이에 찡기도록 그렸습니다. 적어도 사진을 찍어 그림을 그린다면 이렇게는 안 그릴 텐데, 이나마도 못합니다. 예쁘장한 아가씨가 꽃을 바구니에 담아 치마를 나풀거리며 자전거를 달리는 그림은 아주 형편없습니다. 바퀴와 자전거 몸체가 안 이어졌을 뿐 아니라 페달이 붙을 자리가 없고, 안장과 자전거 뼈대는 나타날 자리조차 없으며, 손잡이하고 꽃바구니가 이어지지 않습니다. 자전거라고는 타 본 적 없이 자전거를 그렸다 할까요. 어린이책에 자전거를 그리는 그림쟁이치고 제대로 그리는 이를 거의 못 봅니다. 어떤 이는 ‘자전거 체인을 앞바퀴에 이어 놓’고는 버젓이 책으로 내놓는데, 그림책 출판사 전문편집인조차 이를 알아채지 못해요. 잘못된 그림을 알려주어도 나중에 2쇄나 3쇄가 나오면서도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그림책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를 읽습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읽습니다. 아이는 아빠가 들려주는 말투를 재미있어 합니다. 그런데 혼자서 “내가 볼게!” 하고 말하며 넘기지는 않습니다. 강아지랑 꽃이랑 할머니 모습을 보며 “멍멍이다!” 하고 “꽃이다!” 하고 “할머니다!” 하고 말할 뿐입니다. 몸져누운 할아버지 그림을 보며 “할아버지 아야 해?” 하고 묻지만 깊이 빨려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림책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를 즐겁게 장만했습니다. 아이가 썩 즐거이 읽을 만하지 못하는 줄 뻔히 알지만 기쁘게 장만했습니다. 우리 옛이야기 결을 살리며 그리는 그림책이 몹시 드문데다가, 제대로 그리는 그림책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가 아주 훌륭히 그렸다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애쓴 품이 반가울 뿐입니다.

 “자꾸 절하시는 거예요?”처럼 ‘것’을 지나치게 자주 쓰는 대목도 걸리적거립니다. 옛이야기라 한다면 ‘것’은 한 군데에도 나오면 안 되지요. 옛사람들 말투가 이러할 수 없으니까요. 말투를 굳이 예스러이 할 까닭은 없지만, 시골 할매 할배 이야기라 할 때에는 “자꾸 절하셔요?”나 “자꾸 절하셔유?”처럼 적바림할 때에 한결 구수합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걷는 길은 틀림없이 ‘시골길’일 테지만, ‘흙길’이라든지 ‘논둑길’이라든지 ‘짐수레길’이라 말한다면 한결 잘 어울릴 테고, 시골인데 ‘코스모스’를 들먹이는 대목은 매우 안타깝습니다. 코스모스는 시골꽃이 아닐 뿐더러, 코스모스로 시골꽃을 대표하기에는 너무 슬픕니다. 시골자락에는 숱한 꽃이 얼마나 많은데요. 이 그림책을 볼 아이들은 거의 다 도시 아이들이기는 할 테지만, 도시 아이들도 시골 자연과 터와 꽃을 조금 더 깊고 넓게 살피도록 이끌어 주어야 합니다. 허리를 잔뜩 구부린 할머니라 한다면 키 높이 자라는 코스모스를 보기는 힘들어요. 차라리 냉이라든지 씀바귀라든지 꽃다지 꽃을 이야기할 때가 한결 어울립니다. 어쩌면 할미꽃이 나오도록 했다면 더 나았겠지요. 찔레꽃이나 진달래꽃도 좋고요.

 어린이책은 어린이만 보는 책이 아니고, 그림책은 갓난쟁이나 코흘리개만 보는 책이 아닙니다. 어린이책은 어린이부터 누구나 즐겁게 보는 책이며, 그림책은 아주 어린 아이들부터 다 함께 신나게 보는 책이에요.

 어린이책이나 그림책은 ‘아주 작디작은 대목’ 하나를 더 마음을 기울여 아름답고 사랑스레 보듬어야 합니다. 그림책이야말로 ‘작은 이야기가 아름답다’는 느낌을 살리거나 살찌워야 합니다.

 한 가지 더 헤아린다면, 할머니가 몸져눕고 할아버지가 꼬부랑 꼬부랑 다니면서 할머니를 보살피며 온누리 흙과 바람과 햇볕을 아끼는 넋을 보여주어도 퍽 남다르며 좋겠구나 싶습니다. (4344.1.15.흙.ㅎㄲㅅㄱ)


― 꼬부랑 꼬부랑 할머니 (김기택 글,엄혜원 그림,비룡소 펴냄,2008.12.24./1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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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가 흙 똥을 누었어 자연과 만나요 3
이성실 글, 이태수 그림, 나영은 감수 / 다섯수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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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한테 ‘어떤 책’ 선물을 할까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9] 이태수·이성실, 《지렁이가 흙똥을 누었어》(다섯수레,2009)



 그림책은 어른들이 어린이들한테 내어주는 빛깔 고운 선물이라고 느낍니다. 그림책으로 지식을 익히도록 한다든지, 그림책으로 성교육을 한다든지, 그림책으로 과학을 더 깊이 알도록 한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그림책이 다루는 갈래는 자연도 있고 과학도 있으며 삶도 있거나 학교도 있는 가운데 성교육도 있을 테지만, 어떠한 갈래를 다루든, 그림책이란 아이들 마음을 따숩게 보듬는 이야기를 베풉니다. 아이들 마음을 따숩게 보듬는 이야기를 베풀지 못한다면 그림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판타지 그림책이라든지 옛이야기 그림책이라든지 자연 그림책이라든지 과학 그림책이라든지 철학 그림책이라든지, 갖은 이름을 붙이는 어른들이지만, 정작 아이들로서는 ‘그림책’이기만 합니다. 그림책은 그림책이지 ‘지식책’이나 ‘정보책’이나 ‘교육책’이 아닙니다. 어른들 또한 이런저런 갈래로 나누어 아이들한테 그림책을 읽히려는 생각을 털어야 합니다. 그림책에 글을 넣든 그림을 넣든, 그림책을 쓰거나 엮는 분들은 아이들이 따뜻한 넋과 착한 얼과 보드라운 품을 아낄 수 있게끔 땀을 흘려야 합니다. 아이들이 넉넉한 가슴과 참다운 마음과 싱그러운 눈빛을 사랑할 수 있도록 힘을 쏟아야 합니다.

 사랑을 담는 책이 되어야 하는 그림책입니다. 믿음을 나누는 책이 되어야 하는 그림책입니다. 서로 좋아하면서 다 같이 즐길 그림책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수수하게 웃고 보배로이 울 수 있는 그림책으로 자리잡아야 합니다.


.. 지렁이는 땅속 농부야. 지렁이가 일구어 놓은 땅속에서 감자알이 실하게 여물어 가고 있어. 지렁이 똥은 스펀지 같아서 비가 올 때 물을 머금었다가 식물에게 물이 필요할 때 다시 내주어 잘 자라게 해 ..  (21쪽)


 ‘자연과 만나요’라는 이름으로 세 권째 나온 《지렁이가 흙똥을 누었어》를 읽습니다. 첫 권은 《개구리가 알을 낳았어》(2001)이고, 둘째 권은 《개미가 날아올랐어》(2002)입니다. 개구리와 개미와 지렁이 차례인데, 세 가지 목숨붙이는 우리 둘레에서 아주 흔하거나 너르‘던’ ‘흙’동무입니다.

 오늘날 한국 삶터에서 개구리이든 개미이든 지렁이든 흔하거나 너른 흙동무가 되지 못합니다. 첫째, 도시에서는 개구리이건 개미이건 지렁이이건 살아남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그나마 집에 ‘개미’들이 들어온다고도 하지만, 개미가 마음껏 살아가는 터전은 아닙니다. 거미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어요. 게다가 집에 개미가 있으면 꾹꾹 눌러 죽이거나 파리약을 칙칙칙 뿌리기만 하지요.

 개구리이든 개미이든 지렁이이든, 너른 땅에 흙이 소담스레 있어야 합니다. 흙이 없이는 개구리이든 개미이든 지렁이이든 살아가지 못합니다.

 생각해 보면, 이들 목숨붙이뿐 아니라, 어떠한 목숨붙이라도 흙이 있어야 삽니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벌레이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흙을 아끼지 않는다면 사람이라 할지라도 사람다이 살 수 없습니다. 흙을 밟거나 만지지 않으면서는 사람 목숨이 산 목숨이 아닙니다. 흙을 고이 여기면서 흙내음이 물씬 나면서 흙기운으로 밥을 차리며 일하지 않고서야 사람 넋이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울 수 없습니다.

 끔찍한 막공사라든지 막개발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오직 하나입니다. 정치꾼 몇몇 사람이나 언론매체 몇 군데 때문이 아닙니다. 재벌회사 몇몇이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일 꾐수를 부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흙하고 멀어진 채 돈만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나 스스로 흙하고 가까이 지내면서 조용하고 착하게 어깨동무하는 삶이라면, 그 어떤 막공사나 막개발이나 부정부패가 생길 수 없습니다. 동네에 커다란 할인마트가 들어서는 일을 법으로 막아야 한다고 나서지 않아도 됩니다. 동네 작은 가게를 즐겨 다니면 될 뿐입니다. 큰 할인마트에 안 가면 그만이에요. 몸에 나쁘지만 값이 싼 먹을거리를 안 먹으면 됩니다. 유행을 따지지 않고 상표를 가리지 않으면 됩니다. 시골 장터와 도시 저잣거리를 즐겨 다니면 됩니다.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라는 책이 아니라, 내 마음을 살찌우는 책이랑 내 넋을 보듬는 책이랑 내 눈길을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책을 즐겁게 읽으면 돼요.


.. 도시에서 시골로 옮겨 그림을 그리면서 마당 곳곳에 지렁이 똥이 새삼스럽게 보였어요. 아침에 마당이 있는 조그만 텃밭을 둘러볼 때마다 새로운 지렁이똥이 소복소복 쌓여 있었어요 ..  (그린이 말/이태수)


 흙을 밟고 살아가니 지렁이똥을 만납니다. 지렁이똥만 만나겠습니까. 멧기슭에 고라니가 산다면 겨우내 먹을거리를 찾아 사람집 둘레에 내려와서 똥 질금질금 눌는지 모릅니다(이럴 일이야 드물겠지만). 고라니똥을 볼 수 있겠지요. 버섯을 딴다든지 이냥저냥 멧길을 거닐면 고라니똥을 마주할 수 있어요. 염소를 풀어 기른다면 곳곳에서 염소똥을 볼 만합니다. 멧자락 어느 한켠에는 멧토끼똥이 있을 테지요. 사람 눈으로는 보기 어렵지만, 틀림없이 개미도 똥을 눌 테고, 개구리이며 뱀이며 똥을 누겠지요. 모든 목숨붙이는 흙에서 먹이를 얻고 흙에서 잠자리를 마련하면서 흙으로 똥오줌을 돌려줍니다. 사람들도 흙과 함께 살아갈 때에는 흙밥을 헤아리고 흙똥을 곱씹습니다. 내 삶이 어느 곳에서 어떻게 고울까를 돌아보면서 흙기운을 가득 품고 흙넋을 예쁘게 끌어안습니다.

 그림책 《지렁이가 흙똥을 누었어》는 앞서 나온 ‘자연과 만나요’ 두 권과 나란히 예쁘장한 그림책이기도 하지만, 앞서 나온 《개구리가 알을 낳았어》랑 《개미가 날아올랐어》랑 견주면 조금은 다른 결입니다. 한결 흙내음이 나는 그림책입니다. 이야기 결은 아직 ‘자연 지식 그림책’에 더 가깝지만, 차츰 ‘자연 이야기 그림책’으로 달라지면서, ‘자연 삶 그림책’으로 나아가겠다고 느낍니다. 한 걸음 두 걸음 찬찬히 걸어가노라면, 어느 때부터인가는 ‘자연 지식’이든 ‘자연 삶’이든 모두 내려놓고 ‘그림책’ 하나로 빛나겠지요. 지식도 삶도 이야기도 흙과 같이 수수하면서 투박한 가운데 보들보들 스며나는 그림책으로 거듭나겠지요.


[2쪽] 굴을 파기 시작했어 → 굴을 파 / 굴을 파는구나
[5쪽] 피부로 숨을 쉬어서 → 살갗으로 숨을 쉬어서
[5쪽] 축축한 흙이 필요해 → 축축한 흙이 있어야 해
[6쪽] 지렁이는 스트레칭 선수야 → 지렁이는 쭉쭉이를 잘하지
[6쪽]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줘 → 앞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줘
[6쪽] 둥근 마디로 이어져 있지 → 둥근 마디로 이어졌지
[13쪽] 하지만 걱정하지 마 →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
[13쪽] 새살이 돋아날 거야 → 새살이 돋아나니까 / 새살이 돋아나거든
[15쪽] 지렁이는 안전하지 못해 → 지렁이는 느긋하지 못해 / 지렁이는 걱정스러워
[17쪽] 지렁이 똥이 쌓여 있어 → 지렁이 똥이 쌓였어
[21쪽] 감자알이 실하게 여물어 가고 있어 → 감자알이 알차게 여물어
[21쪽] 지렁이 똥은 스펀지 같아서 비가 올 때 물을 머금었다가
→ 지렁이 똥은 비가 올 때 물을 머금었다가
[21쪽] 식물에게 물이 필요할 때 → 푸나무가 물을 바랄 때
[22쪽] 더 깊이 굴을 파고 겨울을 준비해 → 더 깊이 굴을 파고 겨울을 맞이해
[24족] 농부가 쟁기질을 시작했어 → 농부가 쟁기질을 해
[24쪽] 흙을 뒤엎기 시작했나 봐 → 흙을 뒤엎는가 봐 / 이제 막 흙을 뒤엎는가 봐



 살가우며 구수하게 자연 이야기를 들려주는 《지렁이가 흙똥을 누었어》를 읽으며 여러 군데 손질할 곳을 살핍니다. 이 그림책은 여느 어른도 함께 읽을 만하지만, 누구보다 어린이 스스로 읽으며 즐기도록 마련한 책인 만큼, 몸글에서 고쳐야 할 대목을 열여섯 군데만 짚어 봅니다. 다른 어린이책에서도 이 대목을 어렵잖이 보는데, 어린이책을 쓰는 어른들은 ‘어린이 말’과 ‘어린이가 배울 말’과 ‘어린이가 쓸 말’을 한결 깊이 살펴 주면 고맙겠습니다. 이래저래 흔히 쓰는 한자말이건 여러모로 익숙하게 쓰는 말투이건, 다듬거나 손질해야 한다면 다듬거나 손질해야 합니다.

 “-하기 始作했어”나 “-이 必要해”는 한자 말투이기 앞서 일본 말투입니다. “-ㄹ 거야”처럼 ‘것’을 함부로 넣으면 우리 말투가 아닙니다. 우리 말투는 ‘그렇지만(그러하지만)’이지 ‘하지만’이 아니에요. 겨우나기란 겨울을 맞이하는 일이기에 “겨울을 준비해”라 해도 틀리지 않으나, 아이들 삶과 말을 헤아린다면 “겨울을 맞이해”로 적바림해야 알맞습니다. 감자알이든 씨알이든 굵거나 알차게 여뭅니다. 축구나 농구에서는 ‘도움주기’라는 낱말을 쓰기도 하지만 “도움을 주다”가 아니라 “도와주다”가 제대로 적는 우리 말입니다. ‘스트레칭’이나 ‘스펀지’ 같은 말마디야 흔히 쓰기는 하지만, 지렁이와 흙을 이야기하는 삶하고는 영 걸맞지 않습니다. 이런 말마디는 굳이 안 써도 되며, 글과 이야기에 소롯이 녹아나도록 풀어서 적으면 한결 낫습니다.

 어린이를 생각하는 그림책에는 그림부터 살가이 담아야 하고, 글 또한 살가이 여미어야 합니다. 말끝을 입말 투로 맞추는 데에 마음을 쓰는 일도 훌륭하지만, 입말 투 아닌 글말 투라 하더라도 옳고 바르며 참답다 할 우리 말투를 살릴 때에 비로소 글맛을 즐깁니다. (4344.1.13.물.ㅎㄲㅅㄱ)


― 지렁이가 흙똥을 누었어 (이태수 그림,이성실 글,다섯수레 펴냄,2009.3.20./9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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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의 그림책 - 오늘의 눈으로 읽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최석조 지음 / 아트북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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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김홍도 그림법’을 몰라도 즐겁다
 [책읽기 삶읽기 31] 최석조, 《단원의 그림책》


 제주섬 아래쪽에 조그마한 섬 마라도가 있습니다. 이 마라도로 찾아와 사진을 찍는 분이 제법 있습니다. 마라도를 사진감으로 삼아 내놓는 사진책이 더러 나오기도 하는데, 돋보인다 하는 사진책으로는 배병우 님이 담은 《마라도》(안그라픽스,1985)하고 김영갑 님이 담은 《마라도》(눈빛,1995)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담은 《마라도》는 사뭇 달라, 어느 한 가지만 본 사람이라면 마라도라는 섬을 어느 한 가지 빛깔로 한결 짙게 바라보거나 생각할 만합니다. 두 사람은 사뭇 다른 ‘사진 기법’으로 사진을 찍었다 할 만한데, 곰곰이 헤아린다면 ‘사뭇 다른 사진 기법’이라기보다는 ‘사뭇 다른 삶’으로 마라도하고 만나거나 사귀면서 마라도에서 지냈다고 해야 옳다고 느낍니다.

 이 사진은 이러한 기법으로 이러한 느낌이 우러나도록 찍었다느니, 저 사진은 저러한 솜씨로 저러한 느낌이 드러나도록 담았느니 하는 말은 부질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같은 ‘사진 기법’을 쓸 수 없습니다. 유행이나 사진 흐름에 따라 어느 기법이 더 사랑받기도 하지만, 유행으로 퍼지거나 사진 흐름으로 자리잡는 까닭이란, 이러한 기법이 더 쓸 만하거나 괜찮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행으로 퍼지든 사진 기법으로 자리잡든 아랑곳하지 않는 사람이 제법 있기 마련이에요.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내 삶에 걸맞게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릴 테니까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며 찍을 사진이 아니요, 다른 사람한테 잘 보이려 그릴 그림이 아닙니다. 나부터 나 스스로 흐뭇할 이야기를 담는 사진이며 그림입니다. 기법이든 수법이든 하나도 소담스럽지 않습니다. 소담스레 바라보거나 보배로이 여길 대목은 내가 즐거이 사진이나 그림이나 글을 즐겼느냐입니다.


.. 김홍도가 〈무동〉의 저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눈길은, 결국 ‘설움의 공유’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 음악 향유자의 대부분은 신분이 높았을 터였다. 듣는 쪽에 맞추어 예의를 갖추어야 했다. 천한 광대들이 갓 쓰고 도포 입은 건 자기들이 좋아서 한 일이 아니었다 ..  (30쪽)


 여느 제도권 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갖가지 기법과 수법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실기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보다 이론으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이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이론으로 가르치는 기법과 수법조차 시험문제 틀에서 맴돕니다.

 학교에서 시나 다른 문학을 배울 때에 은유법이니 활유법이니 비유법이니 하는 기법과 수법 이야기만 골이 아프도록 배웠습니다. 글을 읽으며 이 글을 쓴 사람 마음과 삶과 느낌이 어떠했구나 하고 느끼도록 배우지 못했습니다. 글을 즐기는 매무새란 한 번도 배울 수 없었고, 배우도록 이끌어 준 분 또한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글 즐기기’나 ‘그림 즐기기’나 ‘사진 즐기기’는 따로 학교에서 배울 수 없고, 어느 스승이라 해서 가르쳐 주지 못합니다. ‘노래 즐기기’라든지 ‘춤 즐기기’라든지 ‘영화 즐기기’라든지 매한가지입니다.

 영화평론 하는 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추켜세운다고 내가 즐거이 볼 영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림을 풀이해서 알리는 큐레이터 같은 이들이 입에 침이 닳도록 첫손꼽는다 해서 내가 눈을 빛내며 우러를 작품이 되지 않습니다.

 나는 내 가슴에 사무치도록 스며드는 영화를 보고 그림을 볼 뿐입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차분히 스며들다가는 용솟음치는 사진과 글을 마주할 뿐입니다.

 대형사진기나 중형사진기나 파노라마사진기를 썼다 해서 더 돋보일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슬라이드필름이나 흑백필름을 썼대서 더 눈여겨볼 사진이 되지 않아요. 천만 원짜리 사진기로 담은 작품이 더 빼어날는지요. 만 원짜리 1회용 사진기로 담은 사진은 작품이란 소리를 붙일 수조차 없을는지요.

 값싼 붓으로 그리면 못난 그림이 되나요. 비싼 붓과 종이를 쓰면 잘난 그림이 되나요. 스승이 이름난 분이면 이름난 그림쟁이로 되나요. 스승 없이 혼자 그림을 배워 나갔으면 어설픈 그림쟁이가 되려나요.


.. 모든 작품에서 숭늉처럼 구수한 여유가 끓는다 ..  (135쪽)


 최석조 님이 쓴 《단원의 그림책》을 읽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일군 그림을 찬찬히 살피면서, 그림마다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가를 곰곰이 풀이하여 들려주는 책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그림 풀이책(해설서)’은 어렵거나 딱딱한 말투에다가 갖은 외국말을 섞어 그들먹거렸다면, 《단원의 그림책》은 오늘날 여느 사람들 여느 말씨로 살가우면서 홀가분하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림을 굳이 어려운 말로 딱딱하게 읽을 까닭이 없으며, 그림이란 누구나 제 눈썰미와 깜냥껏 마음 가득히 즐기면 좋다는 이야기를 펼칩니다.

 참말 그렇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무슨무슨 기법이나 수법을 썼다는 대목을 훤히 꿰뚠다 해서 단원 김홍도 그림을 더 잘 헤아렸거나 즐겼다 할 수 없습니다. 선운사 지붕이나 대문이 어떠한 모습 어떠한 값어치 어떠한 시대유물임을 안다 해서 선운사 마실을 한결 즐거이 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골목길을 거닐면서 이 골목길 ‘정취’가 ‘몇 십년대 풍물’이라 읊으며 사진을 찍어야 골목마실이 한껏 빛난다 할 수 없습니다. 소나무를 바라보며 소나무 넋이 어쩌고 저쩌고 하고 떠들어야 소나무가 아름답다 여길 수 있지 않습니다.

 살아온 목숨을 꾸밈없이 껴안을 줄 아는 내 고운 목숨이면 넉넉합니다.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벗이며 이웃이라 느낄 줄 아는 따순 가슴이면 넉넉합니다. 서로서로 사랑스러운 숨결로 저마다 다른 자리에서 애틋하게 어우러지는 삶임을 깨닫는 너른 품이면 넉넉합니다.


.. ‘먹는’ 그림에서 아이들은 꼭 엄마 옆에 붙어 있다 ..  (162쪽)


 단원 김홍도 님 그림이든 혜원 신윤복 님 그림이든, 또 박수근 님이나 이중섭 님 그림이나 매한가지입니다. 당신들 그림이 어느 시대 어느 기법으로 빚은 작품이라는 풀이말은 덧없습니다. 당신들 그림이란 당신들 어떠한 삶이 소롯이 묻어난 이야기임을 읽을 수 있으면 됩니다. 당신들 그림에 당신들 삶을 어떻게 담아 우리들이 오늘날 어떠한 넋과 얼로 껴안으면서 흐뭇한가 하고 즐길 수 있으면 됩니다.

 다만, 《단원의 그림책》도 ‘김홍도 님 삶’보다는 ‘김홍도 님이 선보인 그림 기법’에 조금 더 눈길을 맞춥니다. ‘김홍도 님 그림 기법’ 이야기를 여느 사람들 말씨로 재미나게 풀어내는 일도 좋다 할 수 있으나, 이렇게 풀어낸다 하더라도 딱딱하거나 메마른 말투로 풀어낸 ‘그림 풀이책’하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을 읽고 나누어야지, 손재주를 기리거나 우러를 수 없어요. 자동차를 몰더라도 자동차를 모는 사람 매무새를 읽어야지, 자동차 기종이 무어요 ‘모퉁이 돌기(코너링)’를 얼마나 그럴싸하게 하느냐를 다룰 까닭이 없습니다. 단원 김홍도 님이 지난날 ‘어떤 붓으로 그림을 그렸느냐’라든지 ‘어느 종이에 그림을 그렸느냐’를 샅샅히 살피거나 훑는다고 단원 김홍도 그림을 더 잘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림을 그린 사람 삶과 그림에 그려진 사람 삶을 살가이 껴안으면서, 내가 꾸리는 삶을 톺아보고 내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가 복닥이는 삶을 그러안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4.1.11.불.ㅎㄲㅅㄱ)


― 단원의 그림책 (최석조 글,아트북스 펴냄,2008.5.13./1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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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꿍 바꿔 주세요! 웅진 세계그림책 109
다케다 미호 글.그림, 고향옥 옮김 / 웅진주니어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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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아이 바꿔 주셔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0] 다케다 미호, 《짝꿍 바꿔 주세요》(웅진주니어,2007)



 깊은 밤, 잘 자다가 깨어난 아이가 칭얼거립니다. 쉬가 마려우면 기저귀에 누든지 잠자리에서 일어나 변기에 누든지 하면 좋으련만, 아이는 깊은 밤이건 이른 새벽이건, 아직 때를 가리지 못합니다. 그저 눈빛 말똥말똥 빛내며 놀고파 합니다. 무거운 몸을 다시 일으켜 아이를 달래거나 토닥여야 하는가 싶어 한숨부터 나옵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힘들거나 고단할 텐데 어버이라는 사람 마음이 이렇습니다. 쉴 겨를 없이 집일과 아이돌보기로 하루를 꼬박 지새우다 보니, 잠자리에서는 기운을 더 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아직 아이가 하나인데 이런 몸이라면 아이가 둘일 때에는 어찌 되려나요. 아이를 셋 넷 다섯 여섯 키운 어버이들은 어떤 몸이거나 마음이었으려나요. 아이가 여럿이면 언니들이 동생을 잘 돌봐 주거나 놀아 주었으려나요.

 아이 어머니가 몸을 추스르며 아이를 안고 잠들어 줍니다. 몹시 고맙다고 느끼면서 귓결로 속삭임 한 마디를 듣습니다. “벼리가 이제 다 컸구나. 아빠가 다 키워 줬네.”

 다른 집 생각을 하고프지는 않으나, 여느 다른 집에서라면 이런 말은 으레 아빠가 할 테고, 이런 말을 들을 사람은 으레 엄마일 테지요.

 어버이 된 몸으로서 마지막 기운을 더 뽑아낼 수 없을 듯하면서도 어찌저찌 움직이면 또 마지막 기운을 한 번 더 쓸 수 있고, 여기에서 다시금 또 어찌저찌 하노라면 마지막 기운을 두 번 더 쓸 수 있곤 합니다. 한 사람 몸이란 워낙 이러한지, 어버이가 되면 누구나 이러한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내 생각에 머문다면 이렇게 하지는 못하고, 아이 생각을 한다면 이렇게 움직입니다. 나를 키워 온 어머니도 이렇게 움직이셨을 테고, 내가 내 아이한테 이렇게 움직일 테며, 내 아이도 나중에 커서 아이를 낳으면 이렇게 하겠지요.

 해가 바뀌어 아이는 네 살로 접어듭니다. 달수는 서른한 달. 아이 나이를 한 달 두 달 헤아리면서, 아이 나이 한 달을 함께 보내는 동안 한 달은 마치 한 해와 같다고, 아니 열 해와 같다고 느낍니다. 아이와 보내는 하루는 꼭 한 해와 같겠지요. 아이 나이는 서른한 달이라지만, 이 아이하고 서른한 해나 삼백열 해를 살아온 듯합니다.

 갓 태어났을 무렵에는 아이 옹알이나 아이 마음을 거의 못 읽었으나, 이제는 아이가 뒤돌아서 옹크릴 때에도 요 녀석이 뭘 생각하나 하고 읽습니다. 거짓으로 우는 소리를 내거나 놀이 삼아 칭얼거려도 고개 한 번 안 돌리며 알아챕니다. 아빠는 도마질을 하면서 아이를 타이르고, 아이는 말로도 제법 알아들으며 움직여 주곤 합니다. 그러나 말로 스무 번이나 쉰 번쯤 해야 비로소 몸을 움직여요.

 답답하고 갑갑하며 고단한데다가 힘겨운 아빠는 홀로 생각합니다. ‘난 오늘 아무것도 못할 듯해. 그러나 아무것도 못할 수 없어. 그러면 우리 집 식구들 모두 굶을 테니까. 머리가 아프든 손이 다쳤든 허리가 삐끗하든 집살림을 꾸려야 해.’ 말 안 듣는 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네가 우리 아이 맞니? 왜 이렇게 미운 짓만 골라서 하니? 같이 놀아 주지 못해서 그러니? 그렇다고 너하고만 내내 놀아 줄 수는 없잖니?’ 문득, ‘우리 아이 바꿔 주셔요.’ 하는 생각이 몽실몽실 떠오릅니다. 그렇지만 우리 아이를 바꿔 달랄 수 없고, 바꿀 수조차 없습니다. 밥 먹으며 온갖 곳에 흘리고 입 둘레가 지저분해지는 모습을 보면서, 한창 칭얼거리다가 제풀에 곯아떨어진 모습을 보면서, 놀이에 빠져 오줌 마려운 줄 잊다가 바지에 싸는 모습을 보면서, 조그마한 손으로 뭔가를 만지작거리거나 꼬물거리는 모습을 보면서, 이 꼼틀꼼틀 살아숨쉬는 여린 목숨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길 말고 무엇이 있겠느냐고 곱씹습니다.


.. 난 오늘 학교 못 갈 것 같아. 머리가 아픈 것 같아. 배가 아픈 것 같아. 열이 나는 것 같아 ..  (1∼3쪽)


 그림책 《짝꿍 바꿔 주세요》를 읽습니다. 지난 2007년 3월에 한글판이 나온 일본 그림책입니다. 우리 식구는 이 그림책을 일본판으로 먼저 읽었습니다. 일본글은 모르면서도 그림이 예쁘고 줄거리가 살갑다고 느껴 헌책방에서 기쁘게 장만했습니다(우리 식구가 장만한 일본책은 1991년에 1쇄를 찍고 1996년에 20쇄를 찍었습니다. 2007년에 이 그림책을 옮긴 웅진출판사는 보도자료에 이 그림책이 2007년까지 일본에서 50만 부 넘게 찍었다고 밝혔습니다). 우리 아이 또한 제 어버이처럼 일본글을 모를 뿐더러 아직 한글조차 모르지만, 아이도 이 그림책을 몹시 좋아합니다. 아빠는 그림책 그림만 보면서 아이한테 이야기를 지어서 읽어 주곤 합니다. 아이는 아빠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알 노릇은 없지만, 무릎에 앉히고 한 장씩 넘기며 따순 목소리를 들려주는 ‘이야기보따리’나 ‘이야기꽃’을 즐기는구나 싶어요.

 그림책 얼거리로 본다면 《짝꿍 바꿔 주세요》는 그림이 예뻐 한눈에 사로잡힐 만하지만, 그저 그림만 예쁘지 않습니다. 예쁜 그림에 걸맞게 예쁜 이야기를 펼칩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어린이 마음과 눈높이와 삶결에 따라 나즈막하면서 싱그럽고 보드라운 결을 곱게 보살핍니다. 짓궂은 짝꿍한테 시달리는 괴로움이 고스란히 담기고, 짓궂은 짝꿍한테 크게 성을 내는 마음풀이를 곱게 담으며, 짓궂던 짝꿍이 속으로는 제 여자 짝꿍하고 더 살가이 지내고픈 마음이었으나 이렇게 짓궂게 굴어서는 살가울 수 없음을 뒤늦게 깨달아 부드러운 사이로 발돋움하는 흐름을 아리땁게 담는 가운데, 이 모두를 놓고 힘들어 했으면서도 너그러이 받아안는 조그마한 여자 아이 커다란 가슴을 흐뭇하게 담습니다.

 남자 아이든 남자 어른이든 참 어리석습니다. 짓궂게 군다고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바둥거린들 무엇 하나 예뻐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어리석은 남자들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대로 살면서 참사랑을 놓치곤 할 테지요. 여자 아이나 여자 어른이 남자들 어리석은 바보짓을 언제까지나 참아내거나 보아주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어리석은 바보짓은 그만두고 따숩고 너른 손길을 나누거나 따사로우며 넉넉한 어깨동무를 해야 합니다.

 이를테면, 밤샘 밤일 몰아붙여 돈을 더 벌어들인다고 집안이 더 즐거울 수 없습니다. 그저 돈만 더 번다고 집식구가 좋아할 수 없습니다. 집안에 자가용이 꼭 있을 까닭도 없으며, 자가용을 갖춘다 했을 때에 더 크거나 빠른 자가용을 갖출 까닭이란 없습니다. 꼭 있어야 하면 조그마하거나 값싼 자가용이어도 넉넉합니다. ‘내 살림집’이라면 굳이 아파트여야 하거나 넓은 집이어야 하지 않아요. 호젓하거나 아리따운 시골집에서 논밭 작게 일구며 조용히 살아도 참으로 기쁩니다. 군대를 크게 일으킨다고 나라 지키기를 할 수 없습니다. 미사일이며 탱크며 전투기며 군함이며 만들거나 꾸릴 돈으로 온누리 평화로우며 사랑스럽게 일구어야 아름답습니다.

 예쁜 어린이로서 예쁜 어린 나날을 보내며 예쁜 짝꿍이랑 예쁜 꿈을 꾸는 가운데 예쁜 이야기로 꽃을 피우는 삶을 일굴 때에, 예쁜 어른으로 무럭무럭 크면서 예쁘게 일을 하고 놀이를 즐깁니다.

 겉만 예쁜 말이 아니라, 속으로 예쁜 말입니다. 겉만 예쁜 옷이 아니라 온몸이 예쁜 삶이어야 합니다.


.. 학교 가기 싫다 ..  (21쪽)


 싸움터에서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싸움터에는 가기 싫습니다.

 시뻘건 피가 튀며 총알이 비오는 곳만 싸움터가 아닙니다. 출퇴근과 통학을 한다는 아침길부터 지옥철이거나 지옥버스라 한다면 싸움터입니다. 알맞춤한 벌이와 배움을 즐기는 알맞춤한 일터와 배움터가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로 복닥이며 싸움터로 바뀌어 버린 도시란 바로 싸움터입니다. 우리는 싸움터 아닌 일터와 배움터에서 서로 맑게 웃을 노릇입니다.

 밭을 갈고 싶다거나 눈밭을 걷고 싶다거나 장작을 패고 싶다거나 나물을 캐고 싶다고 생각하는 삶일 때에 아름답습니다. 착한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꿈을 꾸면서 나부터 착한 사람으로 살아갈 때에 아름답습니다.

 이리하여 날이면 날마다 아이랑 복닥이며 요 개구진 말괄량이랑 어떻게 놀며 어떻게 하루를 또다시 복닥여야 할는지를 놓고 아침부터 해롱해롱입니다만, 새삼스레 새힘을 내자고 다짐합니다. 서른한 달이 되는 아이는 엊그제부터 ‘어머니 전은경’과 ‘아버지 최종규’라는 소리를 똑똑히 말하는 한편, 제 이름 ‘사름벼리’도 똑부러지게 말합니다. 드디어 서른한 달 만에 식구들 세 사람 이름을 또박또박 익혀서 말합니다.

 하루에 한 가지씩 좋은 모습 좋은 꿈 좋은 삶을 빛내면 되는 아이입니다. 아이는 아이인 만큼 아이한테 애늙은이가 되라 바랄 수 없어요. 어버이는 어버이인 만큼 어버이답게 아이하고 부둥켜안는 나날을 보내야지요. 《짝꿍 바꿔 주세요》에 나오는 어린이는 매우 괴롭고 힘든 나머지 “짝꿍 바꿔 주세요!” 하고 속으로 외치고 외쳤습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떼며 학교에 다시 나갑니다. 아니, 날마다 학교에 빠져 공원이나 길가 어디에서든 떨어져 지내고 싶지만, 눈물을 꾹 삼키며 다시 학교로 갑니다. 이윽고 못된 짓 일삼던 짝꿍은 제 잘못을 뉘우치며 “짝꿍 바꿔 주세요!”라 외치고파 하던 아이한테 모진 손길이 아닌 여린 손길을 내밉니다. 우리 집 돼지 한 마리도 고단한 나날 보내는 제 아버지가 너무 지쳐 드러누우면 고 조막만 한 손으로 이마며 볼을 쓰다듬어 줍니다. 짝꿍도 아이도 바꿀 수 없습니다. 함께 살아내고 함께 살아갑니다. (4344.1.6.나무.ㅎㄲㅅㄱ)


― 짝꿍 바꿔 주세요 (다케다 미호 글·그림,고향옥 옮김,웅진주니어 펴냄,2007.3.30./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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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마 인형
가브리엘 뱅상 지음 / 별천지(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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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 맞잡고 다 같이 노는 겨울에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5] 가브리엘 벵상, 《꼬마 인형》(열린책들,2003)



 아침에 두 손이 꽁꽁 얼어붙을 때까지 눈을 쓸다가 들어옵니다. 더 쓸어야 하지만 손가락이 아린 데다가 아침을 차려야 하기에 나중에 더 쓸기로 하고 들어옵니다. 우리 식구한테는 자동차가 없으니 굳이 길을 신나게 쓸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이 걸을 자리만 쓸어도 돼요. 우체국 일꾼하고 택배 일꾼이 오간다거나 이오덕학교 자동차가 움직일 때에 미끄럽지 않도록 눈길을 씁니다. 그러나 애써 눈길을 쓸어 놓아도 택배 일꾼은 지난 한 주 동안 아무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우체국 일꾼은 꼭 한 번 들렀습니다.

 눈을 쓸면서 생각합니다. 우리 딸아이가 두 살쯤 더 먹는다면 아빠 곁에서 겨울날 눈을 함께 쓸지 않겠느냐고. 앞으로 이태는 아빠 혼자서 눈쓸기를 도맡고, 이동안은 아빠 곁에서 눈밭을 마음껏 밟으면서 놀라 하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면, 내 어릴 적 살던 동네에서 큰눈이 내리면 저랑 또래 아이들은 눈밭에서 신나게 놀았고, 어른들은 주섬주섬 모여 눈을 치웠습니다. 우리들한테 눈을 쓸라느니 무어라느니 하지 않았다고 떠오릅니다. 어린이가 밟아도 눈 발자국이 나서 눈을 쓸기에 조금 까다롭지만, 어른이 밟을 때만큼 까다롭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눈밭에서 뒹굴며 놀아야 합니다. 손이 시린 줄을 모르도록 놀고, 볼이 발개지도록 놀아야 해요. 눈싸움은 누가 가르쳐야 하는 놀이가 아닙니다. 눈을 어떻게 뭉쳐야 하는가를 애써 어른들이 가르칠 까닭이 없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놀며 동무한테서 배우고 언니나 오빠나 형한테서 배웁니다. 눈을 굴러 눈사람 빚기 또한 구태여 어른한테서 배우지 않습니다. 스스로 익히거나 형제 자매 남매끼리 눈누리에서 뒹구는 동안 시나브로 익힙니다.

 겨울이기에 겨울나라 눈밭에서 놉니다. 봄이 새롭게 찾아오면 봄누리 꽃밭에서 놉니다. 여름을 다시금 맞이하면 여름철 물가에서 놉니다. 가을을 새삼스레 맞아들이면 가을녘 들판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일놀이를 하겠지요.


― “나랑 놀자 ……. 그런데 놀러 나가면 주인 할아버지한테 혼나겠지!” (25쪽)


 온통 눈누리가 된 시골집에서 바깥마실은 꿈을 꾸지 않습니다. 용하게 눈이 살짝 멎은 날 낮에 읍내 장마당 마실을 하면서 먹을거리는 장만해 놓았습니다. 애 아빠가 잘못하는 바람에 그만 집안 물이 얼어붙어 멧중턱 이오덕학교를 오르내리며 물을 길어 써야 하지만, 그런대로 지낼 만합니다. 바보스러운 애 아빠 때문에 집식구가 애먹지만, 그만큼 애 아빠는 물이 얼마나 대수로우면서 고마운가를 다시금 느낍니다. 요사이는 멧골자락에서도 땅을 파서 땅속물을 뽑아올려 쓰거나 수도물을 이어서 쓰는데, 아득히 먼 옛날까지도 아닌 우리네 어머니 아버지랑 할머니 할아버지 적 시골마을과 멧골마을에서는 겨울날 물을 어떻게 썼으려나요. 우물물은 겨울에도 녹지 않았으려나요. 겨울에 우물마저 얼어붙으면 어찌해야 하나요. 눈 덮인 길에 우물물을 길어올 때에 손은 얼마나 시렸을까요. 겨우내 빨래는 어찌 하고 설거지랑 밥하기는 어떻게 했으려나요.

 아이가 스물아홉 달 나이에 집안에 물이 얼어붙어 애먹는 삶을 헤아리는지 모르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아예 모르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는데, 왜냐하면 예전에는 집에서 빨래하고 씻기고 했으나 이제는 집에서 빨래를 못하고 씻기지도 못해요. 멧길을 터벅터벅 걸어 올라가서 빨래하고 씻긴다든지, 어제처럼 읍내 마실을 가서 읍내 목욕탕에서 씻긴다든지 하면 몸으로 알아채겠지요.


― “가질래?” (63쪽)


 눈누리가 된 집이다 보니 집안에서 퍽 오랫동안 지냅니다. 이오덕학교 언니 오빠들은 겨울방학을 맞이했습니다. 눈오는 날 눈쓸기를 하면 아빠 따라 아이도 눈밭에서 뛰어다닙니다. 그렇지만 집에 있을 때라면 아빠가 밥하는 곁에 찰싹 달라붙어 불가에서도 두려움 없이 놉니다. 불가에서 놀다가 아빠나 엄마한테 꾸지람을 듣지만 달리 놀거리가 없습니다. 밥하는 아빠가 아이를 더 살피면서 자그마한 일거리라도 주어야 합니다. 밥을 먹이고 나서는 밥상을 치울 때에 밥상 닦기 같은 일거리를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노래를 부르며 아이랑 함께 춤을 춘다든지, 종이를 펼쳐 놓고 아이는 그림을 그리도록 하고 아빠는 글을 쓴다든지,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어 주다가 아빠는 아빠대로 아빠 책을 읽고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 책을 읽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아 주고 저렇게 놀아 주다가도 아이는 혼자서 종알종알 떠들면서 잘 놀기도 합니다. 망가진 사진기를 들고 사진을 찍어 준다 하기도 하고, 요 인형 조 인형을 집어들고 놀기도 하며, 볼펜이나 크레파스를 들고 이곳저곳에 그림을 그리며 놀기도 합니다.


― “또 오려무나.” “그럴게요.” (75쪽)

 

 ‘말’이 거의 안 나오는 그림책 《꼬마 인형》을 펼칩니다. 아이는 아빠나 엄마가 이 그림책을 펼쳐 이야기 살결을 붙여 읽어 주어도 좋아하고, 저 혼자 펼쳐서 읽으면서도 좋아합니다.

 그림이 따사로우면서 보드랍거든요. 그림결이 포근하면서 너그러워요. 하나도 투박하지 않은 굵직한 금으로 이루어진 그림이요, 수수하면서 살가운 손길로 이루어진 그림이야기입니다. 할아버지가 작은 ‘어린이 손인형’을 꼬물거리면 어린이 손인형은 살아숨쉬는 놀이동무가 되고, 할아버지가 작은 ‘늑대 인형’을 쪼물딱거리면 늑대 인형은 무시무시한 이빨로 어린이 손인형을 잡아먹을 듯 무섭습니다. 그림책을 넘기는 아빠랑 아이는 함께 웃고 함께 울며 함께 손을 잡습니다.


― “드디어 꼬마 손님이 하나 왔군.” (9쪽)


 《꼬마 인형》에 나오는 ‘사람 어린이’는 혼자서 ‘할아버지 손인형 연극’을 보러 찾아오고, 할아버지는 딱 한 사람인 관객인 어린이 앞에서 즐겁게 손인형 연극을 선보입니다. 사람 어린이는 할아버지 연극에 빠져들면서 어린이 손인형하고 놀고파 하고, 늑대 손인형한테서 어린이 손인형을 살려내려고 하는데, 그림책 《꼬마 인형》 마지막 쪽을 덮을 무렵, 어린이도 할아버지도 서로 손을 맞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면서 골목길에서 마음껏 뛰놉니다.

 두 사람한테는 손인형 연극도 재미나겠지만, 무엇보다 서로서로 마주 바라보면서 웃고 떠들고 달리며 춤추는 놀이가 가장 재미납니다. 우리 집 딸아이가 온갖 놀잇감을 보여줄 때보다 엄마나 아빠가 함께 손을 맞잡고 놀 때에 가장 즐거워하듯, 《꼬마 인형》 어린이 또한 살가운 눈빛과 따뜻한 손길로 함께 놀 벗이 가장 고마워요.

 집식구들 둘러앉아 아침을 먹고 밥상을 치우니 어느새 열두 시를 넘고 한 시 가깝습니다. 오늘도 하늘에는 흰구름 가득하지만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쬡니다. 한 시를 넘고 두 시쯤 되면 우리 집 마당에도 햇볕이 넓게 드리우겠지요. 아침나절 쓸어 놓은 길은 눈이 말끔히 녹을 테고요. 이 즈음 해서 아이랑 손 잡고 밖으로 나와 아빠는 눈길을 마저 쓸고, 아이는 눈밭을 더 뛰어놀라 해야겠다 싶습니다.

 겨울이라고 날마다 눈이 오지 않으며, 어쩌면 한 해 두 해 뒤틀리는 날씨 때문에 앞으로는 눈 구경 하기 몹시 힘들는지 몰라요. 큰도시에서는 큰눈 때문에 길이 막힌다고 시끄러운데, 멧골자락에서는 큰눈이든 작은눈이든 눈쓸기를 할 때에는 손가락 아리며 고달프지만, 아이하고 신나게 뒹굴며 놀 수 있어 호젓합니다. 아이랑 아빠 숨소리와 목소리만 멧골에 울려퍼집니다. 때때로 눈산에서 먹이를 찾는 작은 새들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바람이 살랑 불면 바람결에 나뭇가지에서 호도독 떨어지며 날리는 눈소리를 들어요. 집안 물은 얼었으나 골짜기 냇물은 졸졸 흐릅니다. 가느다란 냇물 소리를 듣는 가운데, 아이가 눈 밟으며 내는 뽀도독 소리를 듣습니다. 화학방정식 소금이든 흙이든 연탄재이든 뿌리지 않는 길에서 놀 수 있어 좋은 시골마을 겨울 하루입니다. (4343.12.30.나무.ㅎㄲㅅㄱ)


― 꼬마 인형 (가브리엘 벵상 글·그림,열린책들 펴냄,2003.4.20.(2009.10.30. 다시 나옴)/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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