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48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

 조선어학회 엮음

 조선어학회

 1936



  1995년 가을날 서울 홍대앞에 있던 헌책집에서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을 보았습니다. 이런 책이 다 있구나 하고 놀라며 책자취를 보는데 알쏭합니다. 머리말에는 1936년에 내놓은 책이라 밝히는데, 책자취는 ‘朝鮮總督部’에서 ‘昭和 15년’에 찍은 책이라 나오고, ‘小學國語 九’라는 글씨까지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말로 된 책을 함부로 보거나 들고 다니지 못했을 테니 바꿔치기를 한 자국일 수 있습니다. 숱한 사람들 손을 타며 몰래 보느라 낡아버린 책이기에, 두툼한 겉종이를 찾아서 뒤에 대려다 보니 얼결에 일본 교과서 책자취가 찍힌 뒷종이를 대 놓았을 수 있고요. 이러구러 바로 그때 1930년대부터 ‘중류 사회에서 쓰는 서울말’을 표준말로 삼았습니다. 여러 고장에서 쓰던 다 다른 말씨는 그만 뒷전으로 밀려야 했어요. 이 말꾸러미를 보면 ‘텃말(한국말)’은 6000이 넘고, 한자말은 고작 100 즈음입니다. 그런데 ‘비슷한말’이라든지 ‘비슷하면서 결이 다른 말’을 이무렵 왕창 잘라내는 바람에 텃말이 확 수그러들어야 했고, 오늘날에는 마치 ‘한자말이 텃말보다 더 많은’ 줄 잘못 알기까지 합니다. 값지면서 슬픈 자국이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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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47


《氷河》

 신석정

 정음사

 1956.11.25.



  교과서에 나오는 시는 시큰둥했습니다. 이 시나 저 시나 글쓴이 이름을 가리면 누가 쓴 글인지 알기 어려웠어요. 1982∼1987년을 국민학교에서, 1988∼1993년을 중·고등학교에서 보냈으니 그무렵 교과서 시란 동시도 어른시도 틀박이였겠지요. 요즈음 교과서에 나오는 시도 어쩐지 예전하고 다르면서 닮은 틀박이입니다. 모든 글은 글쓴이 목소리인데, 어디에서 비롯하는 목소리인가를 좀 들여다보면 좋겠어요. 글멋을 부리는 소리인지, 몸은 집콕이거나 술자리에 있으면서 입으로만 부르짖는 소리인지를 봐야 하지 않을까요. 《氷河》를 퍽 자주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교과서에 이름이 오른 시를 쓴 분’치고 마음을 건드리는 글은 없다고 여기며 고개를 돌렸어요. 이러던 어느 날 어느 헌책집에서 책집지기님이 “다른 분은 이런 고서를 좋아하는데 왜 종규 씨는 쳐다보지도 않아요?” 하면서 “그래도 이분 시는 좋아요.” 하고 말씀합니다. “시가 좋다면 구경해 볼게요.” 하고 집어들어 폅니다. 얼추 한 시간쯤 서서 읽고는 주머니를 털어서 장만합니다. 교과서에 나온 시가 왜 재미없는가 알았어요. 교과서 엮은이는 아름다이 타오르는 시를 안 실었더군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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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46


《韓國鳥類名彙》

 남태경 엮음

 국립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동물학교실

 1950.1.



  살림돈을 조금 모은다 싶으면 어김없이 책값에 들였습니다. 어쩐지 다른 데에는 쓸 만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신문돌림이란 몸으로 살 적에, 출판사에서 달삯 받고 사전을 지을 적에, 제 살림돈은 모둠돈 모으기하고 책값으로 다 나갔습니다. 오늘 만난 오랜책을 건사하자는 마음 하나에다가, 앞으로 이 오랜책이 빛이 나도록 하자면 스스로 목돈을 품어야겠다고 느꼈어요. 1999년 가을이었나, 어린이 세밀화도감을 펴내는 분이 ‘한국조류명휘’란 책이름을 문득 읊기에 “그 책 헌책집에 가면 있던데요?” 하고 얘기하고서 이튿날 바로 사 드렸습니다. 이태 뒤에 사전지음이로 일하며 사전편찬실에 이 책을 하나 두어야겠다 싶어 헌책집 두 곳쯤 돌며 《韓國鳥類名彙》를 새로 장만했습니다. 이때에는 남돈으로 사서 남한테 주었지요. 2005년 6월 2일, 서울 연세대 맞은켠 헌책집에서 다시 이 책을 만나 품에 간수합니다. 그 뒤 두멧시골에 깃들며 헌책집마실이 뜸하면서 더는 만나지 못하는데, ‘찾을 수 없는 책은 없다’고 여깁니다. 찾으려는 마음이라면 몇 해이고 다리품을 팔면 다 만나요. 무엇보다도 오랜책이 아름다이 빛나는 숨결인 줄 알면 만나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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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45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 동경편》

 이케가야 이사오 글·그림

 박노인 옮김

 신한미디어

 1999.8.15.



  한창 서울에서 책일을 하면서 헌책집을 다니고 둘레에 ‘책집마실’을 퍼뜨리려고 용을 쓰면서 헌책집 길그림하고 소식종이를 내놓던 때에 《일본 고서점 그라피티, 동경편》이라는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을 꾀하며 한국말로 옮겨서 펴낸 분이 보여주셨습니다. 저더러 ‘한국 헌책집’도 이렇게 속모습을 그림으로 담고 단출하게 이야기하는 책을 엮으면 책집마실에 훨씬 이바지하지 않겠느냐고 하셨어요. 일본이 왜 책살림이 대단한가를 이 책을 만나며 새삼스레 느꼈고, 한국 헌책집 이야기를 글·그림으로 다룬다면 저는 좀 다르게 엮고 싶었어요. 박노인 님이 옮긴 책은 ‘헌책집 모습을 잘 담아낸다’고 할 만하지만, 막상 우리가 헌책집에 찾아가서 어떤 책을 만나고 무엇을 느끼며 오늘을 어떻게 새로 돌아보고 배워서 스스로 삶을 사랑스레 일구는가 하는 대목은 없거든요. 그러나 짜임새도 대단하고 엮음새도 훌륭한 이 책을 1999년에 만날 수 있었기에 스스로 더욱 담금질을 하며 헌책집 길그림을 꼼꼼하면서 살갑게 그리려 했고, 2004년에 《모든 책은 헌책이다》를 써낼 수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책집을 사랑하는 이웃이 곳곳에 많습니다. 아마 다들 서로 다르면서 사랑스레 이 삶이며 책터이며 마을이며 숲을 가꾸는 오늘을 짓겠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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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44


《눈고양이》

 에르빈 모저 글·그림

 명정 옮김

 온누리

 2001.3.20.



  출판사 영업부 막내일꾼으로 지낼 적에는 웬만한 책팔이에 다 나갔습니다. 국제도서전이나 유아전 같은 자리는 달포쯤 앞서부터 챙깁니다. 적어도 몇 만 자락을 뿌릴 새 도서목록을 엮고, 어떻게 하면 ‘우리 출판사 책’을 하나라도 더 알려서 팔도록 할 만할까를 살펴요. 책팔이는 해질녘에 마치는데, 얼른 갈무리를 하고는 이웃 출판사로 가서 살 만한 책을 돌아봅니다. 이웃 출판사 분은 “뭘 돈 주고 사요? 바라는 책이 있으면 그냥 드릴게요.” 하지만 “안 되지요. 우린 오늘 장사하러 나왔는데 그냥 안 받지요.” 하면서 책값을 치렀습니다. 그무렵 온누리 출판사 어린이책을 꽤 장만했으나, 일터를 옮기고부터 한동안 잊었습니다. 《눈고양이》를 비롯한 재미나며 알찬 ‘에르빈 모저’ 님 작은 그림책을 2018년에서야 알아보았어요. 2007년에 《얼음 거인》이란 이름으로 새로 나왔는데, 저는 ‘눈고양이’란 이름이 한결 마음에 들어요. 쥐돌이가 오붓하게 지내는 숲살림을, 여러 숲동무하고 사이좋게 어우러지는 하루를, 철마다 다른 바람을 상냥하게 맞아들이면서 노래하는 놀이를, 단출하면서 깊고 넉넉하게 그려내지요. 오스트리아에서 1988년 무렵에 나온 이만 한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쯤 푸른 빛깔로 그려낼 만할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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