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4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

 이오덕·권정생 글

 주중식 엮음

 한길사

 2003.11.5.



  이오덕·권정생 두 분이 나눈 글월을 이오덕 어른은 권정생 님한테 ‘둘 다 죽고 열 해쯤 뒤에 책으로 내자’고 얘기했습니다. 권정생 님은 ‘서른 해쯤 뒤’를 바라셨지만 열 해쯤 뒤도 나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이런 일을 알아낸 한길사 대표는 이오덕 어른한테 자꾸자꾸 찾아와서 두 분 글월꾸러미를 ‘구경만 하겠다’며 졸랐답니다. 숱하게 조른 한길사 대표한테 ‘보고 바로 돌려주라’ 했는데 한길사 대표는 반 해 넘도록 글월꾸러미를 돌려주지 않았지요. 이러더니 이오덕 어른이 눈을 감은 지 두 달쯤 지난 2003년 10월 끝자락에 《살구꽃 봉오리를 보니 눈물이 납니다》라는 책을 몰래 함부로 냈습니다. 구경만 하겠다던 글월꾸러미를 틀림없이 몰래 ‘입력·정리·편집’까지 해놓은 셈일 테지요. 계약서도 허락도 연락도 없이 책을 낸 한길사 대표는 ‘열 해 뒤에 내면 안 팔린다. 죽고 나서 바로 내야 팔린다’ 같은 말을 늘어놓았습니다. 뉘우치지 않고 거짓말에 장삿속만 밝히며 선보이는 책에 어떤 ‘마음빛’이 흐를까요? ‘판매중지’를 하라고 이오덕 어른 큰아들하고 권정생 님이 그렇게 밝혔어도 한길사는 이레 동안 귀를 닫고서 책을 신나게 팔더군요. 이런 책은 우리한테 어떤 숨결이 될까요? 별이 지면서 눈물을 맺습니다. ㅅㄴㄹ


* 이 책은 2015년에 《선생님, 요즘은 어떠하십니까》란 이름으로 새로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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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3


《少年》 第一年 第一卷

 최창선 엮음

 新文館

 1908(隆熙 2).11.1.



  헌책집은 아름터였습니다. 갓 나온 책은 신문사 보도자료로 맨 먼저 들어갔다가, 문화부 책상맡에서 날마다 숱하게 버려집니다. 이렇게 버려진 책은 우르르 고물상·폐지수집상으로 가는데, 헌책집 일꾼이 이 가운데 알찬 아이를 건져냅니다. 오래된 책은 여러 도서관에서 먼지를 먹다가 한꺼번에 버려집니다. 이처럼 버려진 책도 헌책집 일꾼이 먼지를 옴팡 뒤집어쓰면서 알짜를 캐냅니다. 이 나라 숱한 헌책집을 돌아다니면서 ‘투박하고 시커먼 헌책집 일꾼 손’이야말로 책밭을 가꾸고 책사랑을 펴며 책꽃을 피운 별빛이네 하고 느꼈습니다. 서울 용산 헌책집 〈뿌리서점〉에서 《少年》 第一年 第一卷을 만나며 깜짝 놀랐습니다. 깜짝 놀란 저를 본 헌책집지기는 “허허, 원본 같지? 그런데 원본이 아녀. 축쇄판이야. 감쪽같지? 그런데 자네도 《소년》 창간호가 갖고 싶나? 한 십만 원만 치를 수 있으면 원본을 찾아 줄 수 있는데.” 1995년 봄에 수원병무청에서 군입대신체검사를 받는데 군의관은 저더러 “이봐, 병원 가서 10만 원짜리 진단서 떼오면 자네는 면제야. 왜 안 떼오나?” 하고 타일렀어요. 1995년에 신문배달을 하며 한 달에 16만 원을 벌었습니다. 10만 원, 참 애틋한 값입니다. 그때 10만 원을 쥘 수 있었다면 전 뭘 했을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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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2


《萬葉集》

 高木市之助·久松潛一 엮음

 中興館

 1927(昭和 2).8.5.



  조선총독부는 1924년에 ‘京城帝國大學(경성제국대학)’을 세웁니다. 일제강점기에 선 이곳은 일본 제국주의가 마음껏 이 나라를 거머쥐려고 하는 뜻을 가르친 터전입니다. 대학교에는 마땅히 도서관이 있지요.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은 일본사람·조선사람 모두 일본 우두머리를 섬기고 조아리도록 채찍질을 하는 책을 건사했을 텐데, 이 가운데 하나로 《萬葉集》이 있습니다. ‘경성제국대학 도서관’ 붉은글씨가 또렷한 이 책은 어떻게 ‘서울대 도서관’에 안 남았을까요. 일부러 버렸을까요. 서울대 도서관이 좁은 나머지 해묵은 일본책은 내다버렸을까요. 한국은 어느 대학교이든 도서관에서 책을 꽤 버립니다. 여느 도서관도 꾸준히 책을 버려요. 그동안 일제강점기 책을 참 많이 버렸던데, 이 가운데 헌책집 일꾼이 알아본 책은 고물상·폐지수집상에서 물벼락을 맞다가 가까스로 살아납니다. 1927년에 일본에서 나왔다가 경성제국대를 거치며 해방을 맞이한 책 하나는 2005년 2월에 노량진 헌책집 〈책방 진호〉에 들어옵니다. 책집지기님은 “허! 누가 이 책을 알아보나 했더니, 자네가 알아보고 사가는구만! 잘 배워 보시게!” 하면서 팔아 주었습니다. 옛적 일본 수수께끼는 옛적 한겨레하고 잇닿는다지요. 두 나라 앞길은 어찌 될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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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1


《파파라기》

 에리히 쇼이어만 글

 두행숙 옮김

 둥지

 1981.10.31.



  《빠빠라기》란 이름으로 1990년에, 또 2009년에, 마치 바람을 몰듯 다시 나와서 읽힌 책이 있습니다. 2020년 즈음을 맞아 새삼스레 읽힐 만할까 모르겠는데요, ‘현대 물질문명 돌림앓이’가 들불처럼 퍼지는 이곳에서 이 책을 곰곰이 되읽으면서 오늘 이 삶자리를 차근차근 짚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서, 쓰고, 버리고, 또 사서, 또 쓰고, 또 버리기를 되풀이하는 오늘날은 이 별을 망가뜨리면서 우리 스스로 죽음길로 내모는 짓이에요. 사람이 날마다 누는 똥오줌조차 땅한테 돌아가지 못하는 판이요, 사람이 날마다 버리는 쓰레기는 땅을 더럽히기만 합니다. 나라일꾼이나 살림일꾼은 이 얼개를 사랑으로 추스를 낌새가 없어 보입니다. 목돈을 더 들여서 더 때려짓고 더 때려부수려는 삽질로 자꾸 흘러요. 더구나 배움터라는 곳은 수업·입시 틀에 갇힐 뿐,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손수 하루를 지어 스스로 살림을 가꾸는 배움길하고 동떨어져요. 정치 우두머리도 그렇지만 교육부 벼슬아치도 ‘개학을 4월로 미뤘는데 더 미루느냐 마느냐’만 따질 뿐, ‘이제는 무엇을 배울 때인가’를 되새기지 않아요. 그나저나 1981년에 진작 《파파라기》란 이름으로 나왔습니다. ‘파파라기·빠빠라기’는 ‘하늘을 찢는 이·별을 부수는 이’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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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0


《spirit of the Korean Tiger》

 조자용

 에밀레박물관(Emille Museum)

 1972.10.30.



  2001년 1월 1일부터 사전 편집장·자료조사부장 노릇을 했습니다만, 사전 짓는 길에 곁에 둘 밑책은 2000년 11∼12월부터 장만해 놓았어요. 이즈음에는 책 살 돈이 없어 미리 백만 원쯤 받고서 헌책집을 돌며 이 책 저 책 사 놓았지요. 백만 원이라 하더라도 며칠쯤 책집을 돌며 온갖 사전이며 밑책을 살라치면 다 떨어집니다. 하루에 20∼30만 원은 거뜬히 썼거든요. 그렇게 사들인 밑책은 등짐에 손짐으로 이고 지면서 집으로 날랐고, 이튿날 일터로 다시 바리바리 챙겨서 날랐습니다. 어느 날은 《spirit of the Korean Tiger》를 장만해서 일터로 가져갔더니 사장님이 “어머나 어머나, 너 이 책 어떻게 알았니? 어디에서 샀니? 너 이 책 쓴 분이 누구인지 아니?” 하고 놀라십니다. 저는 시큰둥하게 “사진결이 썩 안 좋지만 한국사람 스스로 범 그림을 잘 간수해서 엮었구나 싶어서 샀어요. 웬만한 헌책집에 다 있는 책인데요?” 했더니, 지은이 조자용 님이 화곡동에 처음 미술관을 열어 꾸리던 이야기에 그분 따님 이야기를 한참 들려주었어요. ‘Korean Art Series vol.2.’라고 붙인 도록은 얼마나 더 나왔으려나요. 이름 안 남은 수수한 그림님이 빚은 익살스럽고 애틋한 삶그림을 눈여겨본 어른이 있기에 ‘민화’가 ‘문화’가 되었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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