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8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 8》

 준코 카루베

 김기숙 옮김

 서울문화사

 1999.12.20.



  대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으면서 앞날이 안 두려웠습니다. 둘레에서는 순 걱정투성이었습니다만, 저는 고졸 배움끈으로 어떤 재미난 살림길을 지을 만하려나 하는 생각에 부풀었습니다. 이제 대학도서관에 더는 드나들 수 없지만, 대학 구내서점에서는 자퇴생이어도 더 일해 주기를 바랐습니다. 정직원으로 써 주겠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신문을 돌리며 하루를 오롯이 스스로 가꾸며 누리고 싶었기에 손사래쳤어요. 신문나름이 일삯 32만 원 가운데 16만 원을 모둠돈으로 부었으니 살림돈은 16만 원이었지만 먼 앞날에도 건사하고픈 책을 요조조모 장만했습니다. 이때 만난 만화책 가운데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가 있어요. 일본에서는 1993년에 처음 나왔고, 한국에서는 1999∼2000년에 나왔으며, 2000∼2001년에는 《新·엄마손이 속삭일 때》가 더 나왔습니다. 따사로우며 고운 만화책이 언제 나오나 기다리면서 홍대 앞 〈한양문고〉를 틈틈이 찾아갔어요. 혼자 살면서 ‘나중에 아이를 낳아 이 아이가 열세 살쯤 되면 함께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눈물로 이 만화를 읽고 아꼈습니다. 만화책은 진작에 판이 끊어집니다. 2008년에 큰아이를 만났고, 2020년에 열세 살입니다. 바야흐로 손말 이야기를 함께 누리면서 손빛을 짓습니다. ㅅㄴㄹ




+++ 2020년 2월에 전자책으로 새로 나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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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8


《insect society》

 Berta Morris Parker·Alfred E.Emerson 글

 Row Peterson com

 1941



  총칼을 앞세워 이 나라를 짓밟고서 차지한 일본 제국주의는 학교를 세웁니다. 조선총독부에서 세운 학교는 이 나라 어린이가 아름답고 씩씩한 어른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일본 제국주의에 이바지하는 일꾼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조선이든 고려이든 이 나라 어린이를 슬기로우면서 아름답고 씩씩하게 가르친 적이 없습니다. 옛날 옛적에도 임금과 벼슬아치는 그들끼리 울타리를 쌓고서 사람 사이에 위아래를 매겨서 억눌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같은 책을 엮는 데에는 힘썼을는지 몰라도, 들풀 같은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에는 아무 마음을 안 썼어요. 이 나라 사람 스스로 학교를 세우기 어렵기도 했고, 아주 드문 터라, 이 나라 사람 스스로 이 나라 어린이·푸름이를 가르치는 책, 이른바 교과서를 손수 엮은 일조차 해방 뒤부터라 할 만합니다만, 으레 일본 교과서를 베꼈지요. 어린이가 읽고서 배울 이야기책에도 거의 아무 마음을 안 썼고요. 《insect society》는 미국에서 1941년에 나온 ‘생태·자연 그림책’입니다. 일본뿐 아니라 미국·유럽은 일찌감치 어린이·푸름이 배움길에 마음을 기울였습니다. 오늘날 이 나라는 학교에서 어떤 책으로 가르칠까요? 지식을 넘은 살림하고 숲을 얼마나 제대로 가르칠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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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7


《アルハ 寫眞大講座》

 北原鐵雄 엮음

 三宅克己·結城林藏·高桑勝雄·鈴木八郞·吉川速男 글

 アルハ

 1929(昭和 4).3.30.



  사진기를 처음 지어낸 나라는 일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온누리 사진기를 주름잡는 나라는 바로 일본입니다. 일본사람은 사진기를 낱낱이 뜯어서 다시 짜는 길을 되풀이하면서 스스로 짓는 길을 밝혀냈다지요. 한국에서도 이처럼 애쓴 분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한국은 사진기를 북돋우거나 살찌우는 나라살림이 없었습니다. 누구는 ‘흉내·베끼기’라 말합니다만, 이보다는 ‘고개숙여 배우기 + 스스로 익히기’라고 해야 걸맞지 싶어요. 흉내만 내서는 ‘처음 지어낸 사람이나 나라’ 꽁무니조차 못 좇거든요. 일본은 사진기를 스스로 지어낼 뿐 아니라 사진책이며 사진잡지를 숱하게 엮어냅니다. 더구나 1920년대에 《アルハ 寫眞大講座》 꾸러미를 선보이기까지 합니다. 어쩌면 이 ‘사진대강좌(사진대백과)’보다 앞선 다른 꾸러미도 있을 수 있어요. 오늘날 한국은 아직 한국사람 손으로 ‘사진대백과’는커녕 ‘사진 사전’조차 못 엮습니다. 사진학과가 그토록 많아도, 사진가나 사진비평가가 그렇게 있어도, 정작 배움판이나 살림판을 살찌우는 밑거름이 될 이야기꾸러미에는 마음이 없는 셈이에요. 어려운 말을 쓰거나 서양 이론을 끌어들여야 예술이나 비평이 되지 않습니다. 삶을 수수하면서 아름답게 담는 즐거운 눈길이 빛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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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6


《르네상스》 53호

 편집부

 세화

 1993.3.1.



  고등학교 1학년이던 1991년까지는 한국에서 나오는 모든 만화잡지를 보았습니다. 제가 나고 자란 인천에는 ‘만화대여트럭’이 있었고, 대본소조차 없는 가난한 골목마을을 돌며 작은 짐차에 만화책·만화잡지를 가득 싣고서 300원·500원에 빌려주는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이레나 달마다 새 잡지가 나오기에 묵은 잡지는 값싸게 팔아 주셨고, 꼭 갖고 싶은 만화잡지는 만화짐차 아저씨한테서 장만했습니다. 빌린 만화잡지를 사흘 뒤에 돌려줄 생각을 하며 날마다 몇 벌씩 읽었는지 모릅니다. 이러다가 살림집이 옮기면서 더는 만화잡지를 빌려읽지 못했고, 1994년에 대학교에 들어가고서 《르네상스》가 더는 안 나온다는 이야기를 귓결로 들었습니다. 어쩐지 찡하고 슬퍼서 둘레에 이 얘기를 했더니 ‘르네상스라는 만화잡지’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만 수두룩했습니다. 만화잡지를 보면서도 대학교에 들어온 사람은 없는 셈일까요. 《르네상스》 53호를 보면 ‘knight & lady’ 알림글로 “이젠 당당히 일본 만화일러스트 책과 비교하세요!”를 적습니다. 몇 쪽 뒤에는 ‘겨울이 끝나는 날’, ‘유리가면’, ‘남녀공학’ 해적판 광고가 나옵니다. 예전에는 ‘해적판’이란 말도 몰랐어요. 그저 만화라면 좋았습니다. 만화는 새물결이었거든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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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65


《까만 새》

 이오덕 글

 최종규 엮음

 아리랑나라

 2005.5.25.



  이오덕 어른은 여린 분이지 싶습니다. 아무리 거짓말을 일삼는 이라 해도 눈물을 보이면 “에그, 됐소.” 하면서 넘어가기 일쑤였다고 느낍니다. 1970∼80년대에 참 많은 출판사가 글삯을 떼어먹거나 인지를 안 붙이고 몰래 팔거나 발행부수를 속이거나 했다더군요. 이오덕·권정생 님 책만 이렇게 했을까요? 이오덕 어른은 마지막으로 어느 출판사를 믿으려고 했으나, 이곳 편집자가 말없이 어른 글을 백쉰 군데 넘게 고치고는 알리지 않고, 바로잡으라 얘기했는데 바로잡지도 않고, 《일하는 아이들》도 어른 뜻하고 다르게 엮어서 몹시 슬퍼하셨다고 합니다. 믿을 출판사가 끝내 하나도 없다고 여긴 어른은 먼저 《일하는 아이들》부터 손수 펴내려고 생각하면서 ‘아리랑나라’란 이름을 지어 출판사를 냈습니다. 그러나 몸져누우며 끝내 ‘아리랑나라’ 책을 못 펴내셨어요. 사람들이 이오덕 어른을 ‘우리말 사랑이’로만 알기 일쑤라 ‘어린이문학 사랑이’라는 대목을 제대로 알리고 싶어 1974년에 처음 나오고 사라진 동시집 《까만 새》를 ‘아리랑나라’ 이름으로 살려냈습니다. “까만 새”는 멧골아이가 바라보는 멧새이면서 멧골아이 모습이요, 멧골아이를 사랑하는 멧골어른 눈빛이자 숨결입니다. 까만 새가 까만 밤을 밝힙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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