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75


《中國の朝鮮族》

 山本將文 사진·글

 東方出版

 1989.8.25.



  이 나라에서 태어난 이름 하나로 부끄러울 수 있을까요. 나라를 이끄는 우두머리가 저지른 짓 탓에 수수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부끄러운 이름을 받아야 할까요. 독재자 집안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눈길을 받아야 할까요. 몹쓸짓을 일삼은 사람이 낳은 아이는 어떤 손길로 마주해야 할까요. 아이한테 묻거나 따질 수 없습니다. 오직 한 가지를 생각할 뿐입니다. 저 집안에서 태어난 저 아이는 틀림없이 ‘저 못나고 막된 집안’을 앞으로 사랑으로 갈아엎거나 사랑을 모르는 채 똑같이 못나거나 막된 길을 가리라 하고. 《中國の朝鮮族》이라는 사진책은 더없이 애틋하며 눈물겹습니다. 이 사진책을 선보인 야마모토 야사후미 님은 ‘그저 일본에서 태어났’을 뿐이지만, 지난날 일본 우두머리가 이웃나라에 저지른 짓을 하나하나 알아차리고 나서 마냥 부끄러웠다고 합니다. 막상 부끄러워할 사람은 부끄러운 줄 모르는데,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살림을 짓던 사람은 하늘을 보기가 부끄러웠다지요. 이분은 혼자서 한국말을 익혔고, 갖은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더 고개를 숙이면서 ‘여러 나라에 흩어져서 살아야 하는 한겨레’를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남기려 했다지요. 한국 사진쟁이는 안 쳐다본 일을 일본 이웃 한 분이 했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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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74


《Frans handwoordenboek》

 Dr. F.P.H. Prick van Wely 엮음

 G.B.Van Goor Zones's U.M.

 1937



  1994년 한 해는 인천을 떠나 거의 서울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보냈습니다. 학과에서는 재미나 보람이 없었습니다. 둘레에서 “1학년 때에는 다 그래. 놀다가 3학년 때부터 학점 따서 졸업하면 돼.” 하고 말하더군요. “대학교에 학점하고 졸업장 따러 들어오나요? 배우려고 들어오지?” 하고 물으니 “대학교에 왜 비싼돈 내는 줄 아니? 다 졸업장 때문이야!” 하고 못을 박아요. 1995년을 맞이하면서 그만두고 싶으나 그만두지는 못한 채 학과 수업을 듣습니다. 언제나처럼 헌책집에서 마음을 달래다가 《Frans handwoordenboek》를 만납니다. ‘프-네’ 사전입니다. ‘프-네’ 사전에 앞서 ‘네-네’ 사전을 헌책집에서 찾았어요. 이제 저는 학과 교수한테도 없는 두툼한 ‘네덜란드말 사전’을 늘 챙겨서 수업을 듣습니다. 둘레에서 또 물어요. “어떻게 그런 사전을 다 찾았어?” “헌책집에 가면 있던걸요. 헌책집에는 네덜란드말 동화책하고 소설책도 있어요. 같이 가서 사실래요? 저는 벌써 사 놨습니다.” “아냐. 뭘 헌책방까지 가서 사니?” 1937년판 ‘프-네’ 사전은 언제 누가 사서 읽다가 한국 헌책집 한켠에서 고이 잠들었을까요. 어떤 배움길을 걸으며 꿈꾸던 숨결이 깃들었을까요. 배우며 꿈꾸는 곳이어야 비로소 배움터이지 싶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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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72


《농작물 따로풀이》

 문교부 엮음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54.3.31.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사람치고 책으로 흙살림을 배우거나 가르치는 사람은 없습니다. 먼먼 옛날부터 요즈음까지 매한가지예요. 흙살림은 흙을 만지면서 익힙니다. 집살림은 ‘살림책’이 아니라 온몸으로 이모저모 마주하고 부대끼면서 익혀요. 밥살림도 책이 없이 얼마든지 물려주거나 물려받지만, 때로는 ‘밥책’을 곁에 두고서 돌아보기도 합니다. 다만, 아무리 훌륭한 밥책이 있더라도 손끝으로 묻어나는 살림꽃이 있어야 해요. ‘흙책’이 없어도 흙살림을 얼마든지 갈무리하면서 이어온 터라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학교를 세워 ‘농업 교과서’로 가르치지 않았어도 스스로 살림을 다스렸습니다. 해방 뒤에는 어떠했을까요? 이 나라는 조선총독부 배움틀을 그대로 물려받아 농업학교를 꾸립니다. 이러면서 《농작물 따로풀이》 같은 흙책을 엮습니다. 이 책은 이럭저럭 쉬운 말씨로 풀어내려고 애썼는데, 줄거리는 모두 일본 교과서를 베꼈어요. 오늘날 ‘친환경·유기농·자연농’도 하나같이 일본 흙책을 옮기곤 합니다. ‘친환경·유기농·자연농’ 같은 이름조차 일본사람이 지었어요. 앞으로 새롭게 흙책을 엮는 살림을 지을 수 있을까요. 우리 사랑을, 삶을, 노래를, 하루를, 꿈을, 이야기를, 우리 손길로 여밀 때는 언제일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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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71


《한국 지명 총람 15 전남편 3》

 한글학회 편집부

 한글학회

 1983.8.15.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을 떠나 서울에서 혼자 배우고 살림하며 지내다가 한글학회에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펴내는 《한글새소식》이란 잡지 묵은판을 대학교 학생회관 쓰레기통에서 잔뜩 주워서 건사한 적이 있는데, 예전 잡지에 실린 글을 더 읽고 싶기도 했고, 이 잡지에 푸른바람 같은 글을 싣고 싶기도 했습니다. 이때 《한국 지명 총람》을 한글학회 책시렁에서 처음 보았습니다. 저런 책이 다 있구나 싶어 놀랐지요. 아무리 나라가 차갑고 어지러워도 꿋꿋하고 조용히 한길을 걸으며 알뜰한 사전을 엮은 일꾼이 있군요. 한글학회에서는 책시렁에 꽂은 ‘땅이름 사전’이 모두라며,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헌책집을 뒤졌지요. 헌책집에서는 곧잘 나옵니다. ‘인천편’을 드디어 찾아내어 제가 어린 날 뛰놀던 ‘신흥동’ 옛이름을 알아보니 ‘꽃골’로 나옵니다. 그런데 꽃골은 온나라 곳곳에 흔한 이름이에요. “아, 뭐 이렇게 흔한 마을이름이야?” 하며 입을 비죽 내밀었습니다. 1995년 일입니다. 이러고서 숱한 해가 흐르고 흐른 2020년에 이르니 ‘전남편’도 찾아내어 읽는데요, ‘꽃골’이란 이름이 흔하다면, 그만큼 예부터 마을에 꽃을 곁에 두었다는 뜻이며, 사람들이 이 수수한 이름을 사랑했다는 뜻이었다고 깨닫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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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70


《분식》

 편집부

 한국제분공업협회

 1972.1.28.



  국민학교란 이름인 곳을 여섯 해 다니며 참으로 갖가지 노래를 따라불러야 했습니다. 무슨 날만 되면 온 학교 어린이를 너른터에 줄지어 불러세우고는 ‘○○의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습니다. 스승날에 스승을 기리는 노래야 그렇다 치더라도 어린이날에 어린이가 스스로 어린이를 기리는 노래를 목놓아 불러야 하는 일은 지겨웠습니다. 어린이를 기리는 노래는 어른이 불러 줄 일 아닐까요? 달력에 적힌 기림날마다 무엇을 기리는 노래가 어김없이 있습니다. ‘혼분식의 노래’에 ‘분식의 노래’까지 있는데요, 총칼로 윽박지르는 우두머리는 바로 ‘노래’가 사람들 넋을 빼앗는다고 여겼지 싶어요. 이는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 벼슬아치가 했던 짓 그대로이며, 군대에서 군대노래를 그토록 시키는 뜻이기도 합니다. 1970∼80년대에 나라가 앞장서서 ‘밀가루 많이 먹자’고 외쳤습니다. 바로 이 물결에 맞추어 일본책을 슬쩍슬쩍 훔쳐서 엮은 《분식》이요, 반상회나 동사무소를 거쳐서 뿌렸습니다. 밥살림까지 구석구석 건드린 우두머리랑 벼슬아치였습니다. ㅅㄴㄹ


“오늘날 선진국의 식생활이 주로 분식과 더불어 변화하고 있는 현재 우리 국민들의 식생활은 의연히 곡물 특히 쌀밥 편식으로 인하여 건강 유지에 결함이 많으며 그 섭취 열량도 다른 선진국가에 비하여 월등히 낮아…… (1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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