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84


《'84 동아전과 4-1》

 동아출판사 편집부 엮음

 동아출판사

 1984.1.15.



  아버지가 국민학교 교사로 일하셨기에 우리 집은 아버지가 학교에서 들고 오는 문제집에 허덕였습니다. 아니 ‘우리 집’이 아니라, 저하고 형이 허덕였지요. 과목마다 웬 문제집이 이리도 많은지 질릴 노릇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내는 숙제만 해도 날마다 밤 열두 시를 넘겨도 마치지 못하는 판에 문제집까지 풀라니, 살맛이 하나도 없습니다. 시험공부를 많이 하는 동무는 “너희 집은 아버지가 문제집을 주신다면서? 좋겠다.” 하고 말하기에 “부러운 일이 아니야.” 하고 대꾸했습니다. 전과는 학교에 한둘만 받는다고 해서 매우 드물었는데 아버지는 용케 전과까지 어김없이 갖다 안겼어요. 지난날 학교는 숙제도 멧더미요 시험도 잦았는데, 어느 날 시험종이를 집에 가져와서 돌아보다가 전과에 나온 문제하고 똑같은 줄 깨닫습니다. 때로는 문제집에 나온 문제하고 똑같습니다. 숙제 짐에 버거운 아이들은 아이대로 전과를 베끼고, 뻔질나게 시험문제를 내야 하는 교사는 어른대로 ‘새로운 문제 짓기’가 골이 아파 문제집이나 전과를 베끼는구나 싶어요. 그렇다면 문제집더미에 전과를 수북하게 얻는 저는 시험점수를 잘 받았을까요? 이 슬픈 실타래를 눈치챈 뒤로는 문제집도 전과도 더 들여다보기 싫어 그냥 책상맡에 쌓기만 했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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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83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전태일 글

 돌베개

 1988.11.1.



  우리가 남기는 글은 우리가 살아온 발자국입니다. 기쁨슬픔이 어우러진 자국이고 웃음눈물이 얽힌 자취입니다. 스스로 걸어간 길을 갈무리하고, 스스로 지켜본 빛을 갈망하며, 스스로 사랑한 날을 그러모읍니다. 1970∼80년대에 숱한 공장이며 일터에서 공장지기나 일터지기는 일꾼이 땀흘린 값을 가로채기 일쑤였고, 두들겨패거나 막말을 일삼았습니다. 1950∼60년대도 그랬고, 1910∼40년대 일제강점기에도 마찬가지였는데, 조선 무렵에는 위아래 틀을 가르고 종·머슴이라는 굴레를 씌워서 사람을 함부로 부리곤 했어요. 오늘날 남은 글이란 누가 무엇을 쓴 자취일까요? 글을 아는 임금·벼슬아치·먹물은 얼마나 여느 사람들 살림살이를 찬찬히 아로새기거나 남겼을까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1960년대 어린이·푸름이·젊은이가 군사독재 서슬에서 얼마나 서럽게 살았나를 맨가슴으로 부둥켜안으면서 남긴 아프고 애틋하면서 아름다운 글자락이라고 느낍니다. ㅅㄴㄹ


“기준법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간으로써 어떻게 여자에게 하루 15시간의 작업을 강요합니까 …… 2만여 명 중 40%를 차지하는 시다공들은 평균 년령 15세의 어린이들로써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성장기에 있는 이들은 …… 하루에 90원 내지 100원의 급료를 받으며 1日 16시간의 작업을 합니다.” (137쪽/대통령과 근로감독관에게 쓴 진정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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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82


《사회과 지도》

 문교부 엮음

 문교부

 1964.8.15.



  제가 국민학교를 다닐 무렵에는 ‘사회과 부도’란 이름을 썼어요. 《사회과 부도》는 값이 꽤 셌습니다. 여느 교과서 서너 자락 값쯤이었지 싶어요. 국민학교에서 다른 교과서는 나라에서 빌려주어 한 학기를 쓰고서 동생한테 물려주도록 했으나 《사회과 부도》만큼은 따로 사라고 했습니다. 이 책을 못 사는 동무가 많았어요. 저는 형이 쓰던 책을 물려받았기에 따로 안 사도 되었습니다. 한 반에 《사회과 부도》가 몇 없기에 으레 대여섯이나 열 어린이가 함께 보곤 했습니다. 늘 보는 길그림책일 텐데 ‘우리 고장’을 찾을 수 있는지, ‘우리 마을’도 나올는지 궁금했어요. 1964년에 나온 《사회과 지도》를 펴니 2쪽에 ‘지도 보기’부터 나오는데 여수 ‘이 충무공 동상’을 한복판에 놓고서 줄인자를 가릅니다. 그런데 여수 곁은 바로 고흥이에요. 얼결에 1960년대 첫무렵 고흥 모습을 덩달아 구경합니다. 나로섬·팔영산하고 여수 개섬 사이를 ‘봇돌바다’라 적은 대목이 돋보입니다. 지난 2011년 12월에 고흥군청은 ‘보들바다 별잔치’를 연 적 있는데, ‘봇돌바다’라는 멀쩡한 이름을 엉뚱하게 ‘보들’라 바꿔서 자리를 꾸몄다지요. 고흥서 나고 자랐어도 《사회과 지도》에까지 찍힌 고흥 길이름·땅이름을 모를 수 있겠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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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책 281


《그림일기》

 정경문 글·그림

 영북국민학교

 1977



  1982∼1983년에 국민학교 1∼2학년으로 살면서 그림일기를 썼습니다. 동무들은 글하고 그림을 거의 날마다 그려내야 하는 그림일기를 퍽 힘들어 했습니다. 저는 그림일기를 힘들다고 여기지 않았으나 놀고 심부름하느라 바쁜 나머지 일기쓰기를 미루고 보면 ‘아, 뭘로 채워야 하지?’ 싶었어요. 지난날 어린이는 어버이 일을 거들거나 함께하느라, 또 온갖 심부름을 도맡고 새마을운동에 맞추어 갖가지 치닥거리를 하느라 바쁘며 벅찼습니다. 이제 드는 생각입니다만, 그때 학교에서 ‘왜 일기를 빼먹느냐’고 다그치면서 두들겨패지 말고 날마다 10∼20분쯤 말미를 주어 학교에서 차분히 쓰도록 이끌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헌책집을 다니다 보면 《그림일기》처럼 어린이 일기꾸러미가 더러 나옵니다. 집을 옮기거나 나라를 떠나면서 일기꾸러미를 치웠을까요. 저승사람이 되었을까요. 그냥 묵은 종이뭉치라서 헌종이하고 함께 내놓았을까요. 1977년에 영북국민학교 2학년 어린이가 4∼5월에 쓴 그림일기를 넘기면 동무나 오빠하고 논 얘기, 숙제를 한 얘기, 어머니 심부름 한 얘기, 비오는 날 우산 들고 어머니 마중 다녀온 얘기, 소풀 뜯긴 얘기가 매우 투박하게 한두 줄로 흐릅니다. ‘돌치기’ 놀이를 ‘돌찌’라 적은 사투리가 애틋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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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책 280


《the Waverley novels》

 Sir. Walter Scott, Bart

 Edinburgh Adam and Charles Black

 1867



  책을 슬쩍 오리거나 찢는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 간직하겠다는 마음으로 오리거나 찢을 텐데요, 정 그 대목을 바란다면 손수 베끼거나 뜰 수 있습니다. 종이를 묶어 책으로 선보일 적에는 한 사람만 읽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종이가 바스라지거나 삭을 때까지 누구나 만지면서 새롭게 배우라는 뜻이에요. 2016년 겨울날 서울 노고산동에 있는 헌책집 〈숨어있는 책〉에서 《the Waverley novels》를 만났습니다. 1078쪽에 이르는 두툼한 소설책인데 532∼588쪽이 찢기고 없습니다. 헌책집에서는 ‘파본’이기 때문에 제값에 팔지 못하고 눅게 내놓았습니다. 언제 누가 이만큼 오렸는데 알 길이 없습니다. 1867년에 처음 태어나 오늘에 이르도록 뭇사람 손을 거치고 돌다가 오림질을 받았을 텐데, 헌종이로 버려질 즈음 ‘이 대목은 남기자’고 오렸을 수도 있겠지요. 월터 스콧(1771∼1832) 님은 ‘웨이벌리’로 이름을 드날렸다 하고 1814년에 이 얘기를 처음 선보였다지요. 〈Waverley〉, 〈Guy Mannering〉, 〈the Antiquary〉, 〈Rob Boy〉, 〈Old Mortality〉, 〈the Black Dwarf〉, 〈a Legend of Montrose〉, 〈the Bride of Lammermoor〉 같은 글을 하나로 묶은 이 책은 언제 이 나라에 들어왔을까요. 오림질 자리에 동백잎을 놓았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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