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89


《知慧의 말씀》

 법정 글

 교학사

 1974.3.30.



  스님 한 분이 숨을 거두고 저승길을 갈 적에 그 스님을 큰스님으로 여기면 그분이 남긴 책이 날개 돋힌듯 팔리곤 했습니다. 헌책집 나들이를 다니노라면 헌책집지기님이 “허허, ○○라는 분이 돌아가셨나? 그분 책을 찾는 사람이 갑자기 늘어나네? 허허.” 하고 말씀했어요. “그분 책 좋지. 그런데 그분 책 말고도 좋은 책 많은데.” 하는 말을 으레 살짝 보태셨어요. 둘레에서 《무소유》란 책을 읽어 보았느냐고 참 좋더라고 물어보곤 합니다. 이때마다 저는 “저는 그 책이 그리 재미있지 않았어요. 다만 그분은 손수 쓴 글보다 불경을 한국말로 옮기려고 한 책은 마음에 들더군요.” 하고 얘기합니다. 《知慧의 말씀》은 ‘법구경·백유경’을 법정 스님이 옮긴 책인데, 두 가지 이야기를 옮길 적에 영어책하고 일본책을 곁에 두었다고 머리말 끝자락에 밝힙니다. 법정 스님이 옮기거나 쓴 책을 읽으면서 문득문득 뜬금없는 일본 한자말을 만나곤 했는데 불교에서 쓰는 말씨일 수 있지만, 다른 까닭도 있었구나 싶어요. 조선어학회에서 불경을 한글로 옮길 적에는 ‘슬기롭다·어질다·참하다·참되다’란 낱말을 알맞게 가려서 썼습니다. 법정 스님은 ‘지혜’를 ‘知慧’로 적었습니다. 그리고 ‘지혜 + 의’ 얼개인 일본 말씨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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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88


《월간 축구 76호》

 김재호 엮음

 월간축구사

 1976.10.1.



  국민학교에 들어가던 1982년에 프로야구가 생겼고, 이듬해에 프로축구, 다음해에 프로씨름이 생겼습니다. 인천에는 ‘삼미 슈퍼스타즈’가 있었습니다. 집에서 야구터까지 걸어가면 삼십 분, 달려가면 십 분이 채 안 되었습니다. 방송에서는 축구에 권투에 갖가지 운동경기를 한창 보여주었습니다. 어릴 적에는 ‘대통령배’ 무슨무슨 대회가 참 많았고 ‘무슨무슨 컵’을 걸고 겨루는 일도 잦았습니다. 어릴 적에는 ‘배·컵’이 뭔지 몰랐습니다. 둘레 어른은 곧잘 1970년대 ‘박스컵’을 이야기했습니다. 국민학생 꼬마는 ‘상자랑 컵’이 어떤 이음고리인지 알 길이 없다고 여겼는데, 알고 보니 ‘박 대통령 이름을 건 우승컵’을 놓고 여러 나라 축구선수를 불러서 벌인 대회였더군요. 《월간 축구》라는 잡지가 있습니다. 독재라는 얼굴을 감추며 사람을 길들이는 세 가지(sex·sports·screen) 가운데 하나를 나라지기는 크게 일으키며 부추겼고 신문·방송에 영화로 이 물결을 메웠습니다. ‘대통령하사기 쟁탈 전국 새마을축구대회’나 ‘문교부장관기 쟁탈 전국고교축구대회’를 꾀한 속뜻은 무엇일까요. 왜 마을하고 고을이 서로 이를 갈며 다투도록 내몰았을까요. 스포츠가 춤출 적에는 놀이터가 사라지고 어린이는 놀지 못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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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87


《거위의 생일》

 우량어린이 도서 편찬회 엮음

 대한출판사

 1966.9.10.



  2000년대로 접어들 즈음 적잖은 출판사는 어른책만 내던 틀에서 벗어나 어린이책을 함께 내는 틀로 갑니다. 바야흐로 어린이책이 짭잘한 장사가 되었습니다. 2020년대로 들어서고 보니 참 많은 출판사가 어린이책을 내놓습니다. 학교마다 도서관을 꾸리고, 그림책이나 동화책으로 숲·어깨동무·마을살이를 들려주는데, 숱한 어린이책이며 푸른책은 갈 길이 멀다고 느껴요. 어린이가 마음을 살찌울 만한 이야기를 수수하고 상냥하면서 고운 말씨로 풀어내지 못하는데다가, 너무 어른 눈높이에 머물면서 서울살림에 기울거든요. 이제 어른도 어린이도 거의 다 큰고장에 살고, 일거리도 큰고장에 맞추어 얘기하며, 삶자리도 큰고장 아파트랑 자가용으로 흐르니 어쩌는 수 없는지 모릅니다만, 바람을 안고 하늘을 품으며 풀밭이며 숲을 사랑하는 숨결로 시나브로 나아가기를 바라요. 1966년에 태어난 《거위의 생일》은 일본 그림동화를 슬그머니 베끼고 훔친 판입니다. 해방, 한국전쟁, 군사독재란 길을 거치는 동안 ‘어린이를 어떻게 북돋우고 아낄까?’ 하고 생각한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어린이한테 어린이책을 읽히고 같이 읽으며 새롭게 아름나라를 꿈꾼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비록 베낀 그림동화였어도 ‘대한 그림동화 문고’는 알뜰합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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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86


《Animal babies by Ylla》

 Ylla 사진

 Arthur Gregor 글

 scholastic

 1959.



  부산에 〈고서점〉이라는 헌책집이 있습니다. 이곳 책집지기님이 어느 날 “최종규 씨가 헌책방 업계를 북돋우려고 한 일을 생각하면 모든 책을 거저로 드려도 아깝지 않지만 막상 그럴 수는 없고, 사진을 좋아하시니 이 사진책 하나를 선물로 드릴게요.” 하면서 《Animal babies by Ylla》를 내밀었습니다. 아직 한국에 ‘이일라(Ylla)’ 님 사진이 거의 안 알려지다시피 하던 무렵입니다. 그런데 이 해묵은 사진책은 어떻게 부산 한켠에 깃들었을까요. 1960년대에 일본책을 사서 읽으며 혼자 사진을 익히던 분이 즐겁게 장만해서 마르고 닳도록 읽다가 시나브로 흘러나왔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따로 ‘한일 문화교류’를 하기 힘들던 지난날이었지만 두 나라 사이를 오가는 무역배나 여객배를 거쳐서 일본책하고 ‘일본에 들어온 여러 나라 책’이 꾸준히 부산으로 들어왔다고 해요. 이일라 님은 오롯이 짐승 사진을 담아낸 분입니다. 마음으로 아끼며 동무로 사귀려는 몸짓으로 다가서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귀엽게 보거나 억지를 쓰지 않고서 마음동무라는 눈빛으로 마주하려 했다고 느껴요. 일본에 내로라하는 이와고 미츠아키(岩合光昭) 님이 있는데, 이분은 이일라 님 사진을 가장 아름다이 받아들여서 사랑스레 담아내지 싶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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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85


《휘파람, 신한새싹만화상 현상공모전 수상작 모음집》

 유승하와 열여덟 사람 글·그림

 홍성균 엮음

 신한은행

 1994.5.3.



  1990년대가 무르익으며 만화판이 크게 춤추었습니다. 지난날에는 일본만화를 버젓이 베껴서 이름만 한국사람인 듯 꾸몄다면, 바야흐로 일본만화가 일본사람 이름 그대로 밀려들었어요. 몰래 일본만화를 흉내낸 적잖은 만화쟁이가 꾸지람을 들었고, 이제야말로 한국다운 한국만화를 열 때라고 여긴 만화님이 있습니다. 다만 만화는 아직 찬밥이자 손가락질을 받는 흐름이었는데, 신한은행에서 ‘신한새싹만화상 현상공모전’을 폈습니다. 무척 놀라웠지요. 더구나 이 만화공모전을 거쳐 만화밭을 새롭게 일군 사람들을 살피면 고단한 1990년대 한복판에 단비 같은 노릇을 했다고 느껴요. 1993년 첫판에서는 백우근 님이, 1994년 둘째판에서는 유승하 님이, 1995년 셋째판에서는 최호철 님이 으뜸을 거머쥐었습니다. 1994년 둘째판에서는 윤정주·박시백·오영진 님 만화도 버금이나 딸림으로 붙었습니다. 은행에서 만화공모전을 꾸준히 이었다면 우리 만화밭이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만, 석 판이나 좋은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니 이만큼으로도 고맙지요. 만화는 글이랑 그림으로 어우러진 아름다운 이야기꽃입니다. 만화는 글하고 그림으로 빚은 사랑스러운 꿈길입니다. 만화는 어린이하고 어른이 어깨동무하는 수다판입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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