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어제책

숨은책시렁 294


《중국의 딸》

 닝 라오 타이타이 이야기

 아이다 프루잍 엮음

 설순봉 옮김

 청년사

 1980.4.12.



  고등학교까지는 억지로 버텼다면 대학교에서는 버틸 마음이 없었습니다. 해마다 목돈을 쏟아붓는 그곳에서 삶이나 꿈이나 살림이나 사랑 가운데 어느 하나도 짚거나 가르치지 않는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대학교에 들어가 보려 했기에 서울에 발을 디딜 수 있었고, 대학은 스스로 버렸어도 서울 곳곳에 숱하게 깃든 아름다운 헌책집을 만났어요. 졸업장하고 바꾼 ‘헌책집마실’입니다. 중·고등학교를 다닐 적에는 알 길 없을 뿐 아니라, 어느 어른도 알려주지 않던 책을 헌책집에서 만납니다. 제가 태어날 무렵이나 어릴 적에 나온 책이며, 아직 안 태어나던 때에 나온 놀라운 책을 만납니다. 푹 사로잡혀서 ‘여태 나는 국·중·고에 이르도록 껍데기가 마치 껍데기가 아닌 줄 허수아비처럼 살았네’ 하고 깨닫습니다. 《중국의 딸》을 만나던 날은 손끝이 찌르르했습니다. 어떻게 1980년에 이런 책이 다 나왔나 싶으면서, 군홧발 쇠사슬이 친친 동여매도 들풀 같은 목소리는 피어나기 마련이로구나 싶었어요. 전태일 곁에 상냥한 대학생 벗은 없었는데, 닝 라오 타이타이 할머님 곁에 상냥한 글꾼이 한 사람 있었기에 빛나는 책이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오늘 누구 곁에서 누구랑 동무하거나 벗이 되면서 오늘을 사랑으로 담아내는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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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93


《하느님과 꽤 친한 아저씨》

 돈 덱커·테 티옹 킹 글·그림

 윤구병 옮김

 백제

 1979.5.20.



  어느 책이든 처음 찾아낼 적이 가장 아리송합니다만, 한 판 찾아내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이곳저곳에서 봅니다. 《하느님과 꽤 친한 아저씨》라는 책은 보리출판사 영업부 일꾼으로 들어가기 앞서 알았습니다. 헌책집을 함께 다니던 분이 “종규 씨라면 알 듯한데, 알지?” 하고 어느 날 불쑥 귀퉁이 책시렁에서 이 책을 끄집어내어 보여줍니다. “저라고 모든 책을 어떻게 다 알아요? 늘 새롭게 만나면서 배우는걸요.” 2000년으로 접어든 어느 날 어느 분이 묻습니다. “윤구병 샘님 책 가운데 도무지 하나를 못 찾는 게 있는데 찾아줄 수 있니? 다른 책은 다 찾았는데 그 책만 없더라.” “무슨 책이길래요? 얼마쯤 걸릴는 지 모르지만 윤샘 책이라면 이레쯤 훑으면 나올 듯싶네요.” “일 주일? 야, 나는 십 년도 넘게 찾고 물어보는데 못 찾았어.” 찾아주기 바라는 책은 《하느님과 꽤 친한 아저씨》였고 이틀 뒤에 찾아서 건넵니다. 열흘쯤 뒤에 또 하나 찾아서 건넵니다. 한 달쯤 지나서 또 찾아서 보여드리니 입이 쩍 벌어진 얼굴로 묻습니다. “넌 어떻게 내가 십 년 넘게 못 찾은 책을 자꾸자꾸 찾아내니?” “아직 오래된 책도 아니고, 어떻게 생긴 책인 줄 아니, 어느 책집 어느 시렁에 묻혔겠구나 하고 쉽게 어림할 만하거든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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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03


《Princess Sylvie》

 Elsa Beskow 글·그림

 Sessalatts aventyr

 1934.



  사전을 쓰는 길을 가노라니 온갖 책을 끝없이 챙겨서 읽는다는 핑계를 댑니다. 큰아이가 태어난 조그마한 집도 책으로 가득했습니다. 곁님이 어느 날 “아이한테 우리가 손수 살림을 짓는 길은 안 가르치고 책으로 다른 사람 이야기만 들려줄 생각이냐?” 하고 묻는 말에 아무 대꾸를 못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맞는 말이에요. 온누리 모든 책은 ‘내가 아닌 남’이 스스로 살아내면서 아로새긴 사랑을 담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아이한테 삶을 슬기로운 사랑으로 알려주려면 ‘남이 아닌 어버이인 나’ 스스로 오늘을 새롭게 지어서 알려줄 뿐 아니라, 함께 짓는 살림자리가 될 노릇이에요. 이런 생각으로 하루하루 살다가 《펠레의 새 옷》이란 그림책을 만났고 《호기심 많은 물고기》 같은 책이 한국말로 나온 줄 알아봅니다. 글이며 그림이며 사진이라면, 이렇게 살림빛이 눈부시고 사랑빛이 아름다울 노릇이로구나 하고 깨달으며 눈물이 흘렀어요. 아이를 무릎에 앉혀 그림책을 읽어 주는데 주르르 눈물이 나더군요. 더없이 빛나는 그림책이에요. 새로 나오는 그림책도 볼만합니다만, 1934년에 나온 《Princess Sylvie》를 넘기면서 ‘스웨덴에는 이무렵에 이렇게 생각을 꽃피운 상냥한 아줌마가 다 있었구나’ 하며 놀랍고 반가웠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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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304


《McElligot's pool》

 Dr. Seuss 글·그림

 Random House

 1947.



  모든 책에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빌려서 읽은 책도, 사서 읽는 책도, 책집에 마실을 갔지만 주머니가 가볍기에 서서 읽은 책에도, 박물관 유리 진열장 너머에서 겉모습만 흘깃거린 책에도 온갖 이야기가 서립니다. 그런데 우리한테 책으로 보이는 이 읽을거리가 종이꾸러미란 모습이 되기까지 거친 길에도 숱한 이야기가 감돌아요. 지은이에 출판사 일꾼에 종이공장 일꾼에 인쇄소 일꾼에 싣고 나른 일꾼에, 무엇보다 숲에서 나무를 베어 손질하고 나른 일꾼에, 또 햇볕·비·바람·흙을 머금고 자란 나무라고 하는 이야기까지 두루 도사립니다. 《McElligot's pool》이란 그림책을 서울 홍대 건너켠에 있는 헌책집에서 처음 만나며 ‘닥터 수스’란 이름을 처음 만났어요. 이이는 ‘Geisel’이란 이름으로 태어났다지요. 1947년에 처음 나오며 ‘칼데콧상(Caldecott Honor)’을 받기도 했으며, 1974년에 새로 나오기도 했으나 무지갯빛 그림을 사이사이 까망하양 빛깔로 넣었어요. 책을 찍는 돈을 줄이려는 뜻이었을까요. 아주 작은 못에 낚싯대를 드리운 아이는 끝없이 생각날개를 펴면서 어떤 바다벗을 만날는지를 설레면서 기다려요. 좁은 못(pool)에서 낚시하는 아이가 바보(fool)라며 놀리는 마을 아저씨한테 엄청난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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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어제책

숨은책 290


《朝鮮人女工のうた》

 金贊汀 글

 岩波書店

 1982.8.20.



  서울 노량진에는 〈진호서점(책방진호)〉이 오래도록 텃책집으로 책사랑이라는 숨결을 나누는 길을 갑니다. ‘진호’ 책집지기님은 손님이 없을 적에는 먼저 책집이며 책시렁이며 깔끔하게 먼지를 떨고 갈무리하고는 책상맡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습니다. 모든 새책은 출판사 일꾼이 정갈하게 가다듬어 내놓는다면, 모든 헌책은 헌책집 일꾼이 깨끗하게 손질해서 건사합니다. 〈진호〉로 마실할 적에는 언제나 알찬 일본책을 만나는데, 《朝鮮人女工のうた》를 만나던 날은 적잖이 놀랐습니다. 1982년에 ‘うた(노래)’라는 이름을 붙여 “일제강점기 조선 여자 노동자”를 다룬 책을 일본에서 내놓은 대목도 놀랐지만, 이 책하고 꾸러미로 나온 다른 일본책도 하나같이 ‘한국에서 여태 거의 안 나오던 한국 들사람 이야기’였거든요. 《어느 돌멩이의 외침》이라든지 《서울로 가는 길》처럼 들사람 스스로 목소리를 내려 할라치면 으레 군홧발로 찍어 누르던 나라지기였습니다. 들사람이 부르는 들노래를, 들사람이 가꾸는 들살림을, 들사람이 짓는 들꽃을, 들사람이 펴는 들사랑을 벼슬아치나 나라지기는 등돌리려 했어요. 들사람은 울면서, 어깨동무하고 웃으면서, 아기 젖을 물리며, 고샅에서 뛰놀며, 숲에 드리운 바람을 먹으며 노래했어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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