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김윤주 지음 / 이숲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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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98


스물에 걷던 파리, 마흔에 걷는 파리
―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
 김윤주 글·사진
 이숲 펴냄, 2017.3.19. 13800원


  나이 마흔이란 재미있는 나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매우 풋풋하면서 싱그럽다고 하는 스물이라는 나이를 곱으로 살아낸 나날이거든요. 스무 살에 바라본 것을 마흔 살에 바라볼 적에는 어떤 마음이 될 만할까요? 그리고 스물에서 마흔을 지나 예순이 될 무렵, 스무 살에 바라본 것을 예순에 다시 바라본다면? 여기에서 스무 해를 더 살아내어 여든 살 무렵에 스무 살 적에 바라본 것을 새삼스레 바라본다면?

  이렇게 본다면 나이 쉰도 재미있는 나날이지 싶어요. 스물다섯이라는 나이를 곱으로 살아낸 나날이 쉰이니까요. 스물다섯이라는 나이에 바라보거나 겪은 일을 쉰이라는 나이에 바라보거나 겪을 적에는 어떤 마음이 될까요? 우리는 흔히 젊다고 하는 ‘스물, 스물다섯, 서른’이라는 나이를 곱으로 살아내고 나면 어떠한 눈길로 거듭나거나 삶을 짓는 사람으로 달라질 만할까요.


뜻밖에도 내가 만난 파리 사람들은 그 유명한 전설의 서점을 전혀 알지 못했다. 난감해 하는 젊은이 두어 명을 만나고 골목과 골목을 어지간히 헤매고 난 후에야 서점에 도착했다. (23쪽)

스물 몇 젊은 날의 헤밍웨이가 이 골목들을 이렇게 헤매 다녔다는 것 아닌가! 오늘 밤 나처럼. 백 년쯤 전이라지? 아, 가슴이 뛴다. 아마도 영화를 만든 감독 우디 앨런도 그랬을 것이다 (47쪽)


  대학교에서 이중언어와 다문화교육을 비롯해 ‘말’을 다루는 일을 하는 김윤주 님은 프랑스 파리를 새롭게 거닐었다고 합니다. 풋풋한 젊은 날에 거닐던 프랑스 파리를 스무 해가 지난 나이에 새삼스레 거닐었다지요. 그런데 지난날하고 오늘날은 좀 다른 마음이니, 오늘날 새삼스레 거닐 적에는 ‘헤밍웨이를 따라’ 거닐었다고 합니다.

  풋풋한 지난날에는 그냥 좋아서 거닐어 보고 싶던 프랑스 파리라면, 이 풋풋함에서 스무 해를 더 살아낸 오늘날에는 ‘길잡이별이 될 만한 사람을 마음으로 곁에 두면서’ 거닐은 프랑스 파리라고 합니다. 스무 해 사이를 두고 이 길을 거닌 이야기는 어느새 차곡차곡 모여서 《헤밍웨이를 따라 파리를 걷다》(이숲,2017)라는 책으로 태어납니다.


백여 년 전 파리의 이방인 말테가 그랬던 것처럼 국립도서관에 앉아 시를 읽겠다던 야무진 꿈은 끝내 이루지 못했지만, 도서관 앞 작은 공원, 파리8구 주민들 틈에 앉아 먹은 김밥과 대낮의 맥주 한 모금은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다. (73쪽)


  풋풋한 나이라는 스물 언저리에는 스물 언저리에 할 수 있는 몸짓이나 일이나 놀이가 있습니다. 풋풋함이 무르익은 마흔 언저리에는 마흔 언저리에 할 수 있는 몸짓이나 일이나 놀이가 있을 테지요. 스물 언저리에 바라보기에 덜 철들었거나 덜 무르익었다고 할 수 없어요. 스물 언저리는 스물 언저리에 느끼는 눈길이요 살림이며, 마흔이나 예순 언저리는 이러한 나이를 살아내고서 느끼는 눈길이요 살림이에요.

  마실길이란 우리가 여느 때에 두 다리를 디디는 보금자리에서는 미처 느끼거나 보지 못하던 모습을 마주하려는 길이지 싶습니다. 우리 보금자리를 더욱 새롭게 느끼거나 새삼스레 가꾸려고 하는 마음이 되고자 낯선 길을 나서고, 지난날 거닐어 보았던 길을 다시금 거닐어 보려고 하지 싶어요.


돌아오는 길에 착한 버스 기사를 만났다. 차비도 받지 않고 호텔까지 태워다 준 덕에 차가운 밤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주머니에 미처 현금을 챙겨 오지 못한, 추위와 피로에 지친 여행객은 그의 친절이 오래도록 고마웠다. 20년 전 첫 밤은 파리에서 유학 중인 인도 여학생의 도움으로 무사히 보낼 수 있었는데, 20년 지난 오늘 첫 밤은 파리의 버스 기사 덕에 따뜻하다. (191쪽)


  살가운 마음을 건넨 버스 기사는 낯선 곳을 거닐던 사람한테 따스한 기운을 베풀어 줍니다. 살가운 마음을 건넨 인도 유학생은 낯선 거리에서 헤매던 사람한테 따뜻한 손길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을 이어받거나 건네받은 사람은 이녁 보금자리로 돌아와서 살림을 짓고 삶을 가꿀 적에 이웃한테 새롭게 따사로운 숨결을 드리울 수 있겠지요.

  스무 해 앞서 누린 따스함을 다시금 누릴 수 있던 프랑스 파리를 앞으로 스무 해 뒤에 또다시 거닐어 볼 수 있다면, 그무렵에는 어떤 따스함을 누리면서 이야기꽃을 피울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풋풋한 나이에 느끼는 따스함, 무르익는 나이에 느끼는 따스함, 한껏 깊어지는 나이에 느끼는 따스함, 여러 가지 따스함을 헤아립니다. 마실길에서도, 우리 보금자리에서도, 이야기꽃이 곱게 피어납니다. 2017.4.14.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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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7-04-14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꼭 따라해보고 싶게 만드는 책 담아갑니다. 좋은 아침이에요 숲노래님.

숲노래 2017-04-14 10:24   좋아요 0 | URL
우리 스스로
늘 즐거운 나이라는 생각으로
언제나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으면
저마다 아름다울 만하리라 생각해요.
오늘 아침도 하루도 아름답게 누리셔요 ^^ 고맙습니다
 
물고기는 알고 있다 - 물속에 사는 우리 사촌들의 사생활
조너선 밸컴 지음, 양병찬 옮김 / 에이도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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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87



물고기를 좋아해서 안 먹는 사람이 있어요

― 물고기는 알고 있다

 조너선 밸컴 글

 양병찬 옮김

 에이도스 펴냄, 2017.2.27. 2만 원



  물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고기를 안 좋아하기 때문에 안 먹는 사람이 있고, 물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고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안 먹는다’고 한다면 얼핏 ‘머리가 돈 사람’이 아닌가 하고 여길는지 모르겠네요. 물고기는 그냥 ‘고기’일 뿐인데 왜 고기를 안 먹느냐고들 하거든요.


  우리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여러 목숨한테 ‘고기’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를테면 닭고기라든지 돼지고기라든지 소고기라는 이름을 붙여요. 개한테도 개고기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말고기라든지 토끼고기라든지 고래고기 같은 말도 있어요. 그런데 한 가지는 살짝 아리송하다고 할 만해요. 닭이나 돼지나 소는 고기이기 앞서 ‘닭·돼지·소’ 같은 이름이 먼저 있습니다. 이와 달리 물고기한테는 그냥 ‘물+고기’라는 이름이에요.



물고기는 모래알과는 달리 살아 있는 존재인데, 이것은 결코 사소한 차이가 아니다. 물고기들을 ‘의식을 가진 개체’로 이해할 때, 우리는 물고기와의 관계를 새로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10쪽)


물고기들도 손가락을 만들 수 있는 준비가 갖춰져 있지만, 그 대신 지느러미를 진화시켰다. 왜냐고? 물속에서 수영하는 데는 지느러미가 손가락보다 더 편리하기 때문이다. (32쪽)



  조너선 밸컴 님이 쓴 《물고기는 알고 있다》(에이도스,2017)를 읽으면서 ‘물고기’를 새삼스레 생각해 봅니다. 한국에서는 민물이나 바닷물에 깃든 목숨을 가리키며 으레 ‘물고기(민물고기·바닷물고기)’라고 뭉뚱그립니다. 틀림없이 펄떡펄떡 뛰는 목숨이고, 사람처럼 피가 흐르는 목숨입니다만, 그냥 ‘고기’로 바라봅니다.


  가만히 살피면 꼭 ‘고기’라는 이름만 쓰지 않습니다. 개구리를 놓고 ‘물뭍짐승’이라고도 해요. 물과 뭍에서 살 수 있대서 ‘물뭍짐승’입니다. 곧 뭍에서 산다면 뭍짐승이요 물에서 산다면 물짐승이라 할 만합니다. 바다에서 사는 수많은 목숨을 이러한 결로 수수하게 마주하자면 ‘고기’가 아닌 ‘물짐승’이나 ‘물목숨’처럼 이름을 바꾸어서 헤아릴 수 있어야 하지 싶어요. 바다나 냇물에 사는 목숨은 그저 ‘사람 먹이’일 뿐은 아닐 테니까요.



물고기들은 다양한 음향기구를 갖고서 진정한 교향곡을 만들어내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타악기 부문이 압권이다 … 청각이 민감한 물고기들은 인간이 만들어낸 수중 소음에 취약하다. 예컨대, 해양 석유탐사에 사용되는 에어건에서 나오는 고강도 저주파 소리는 물고기의 내부 청각기관 내벽을 둘러싼 미세한 유모세포를 심각하게 손상시킬 수 있다. (58, 61쪽)


물고기가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생각은 최근까지도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논의들은 이른바 보상시스템의 생리학에 국한되어 왔다. (129쪽)



  《물고기는 알고 있다》라는 책은 물목숨도 사람하고 똑같이 아픔을 느끼고, 기쁨이나 슬픔을 안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목숨한테는 사람 같은 손이나 손가락은 없지만, 손이나 손가락이 있다면 물에서 헤엄을 치기에 대단히 나쁘다고 이야기합니다. 물밖에서는 손이나 손가락이 있어서 좋겠지만, 물속에서는 지느러미가 있어서 좋다지요.


  물목숨은 눈이 매우 밝을 뿐 아니라 뛰어나다고 합니다. 물목숨은 스스로 온갖 소리를 내거나 노래를 부른다고 해요. 물목숨은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 맞추어 매우 뛰어난 머리가 있고, 무리를 짓는 삶(사회생활)이라든지 뒷목숨한테 남기는 이야기(문화유산)가 있다고 해요.


  이 책이 다루는 ‘물목숨 사회생활과 문화유산’ 이야기를 읽다가 ‘도시에서 갈 곳을 잃은 비둘기’가 떠오릅니다. 오늘날 도시에서는 비둘기가 그만 닭둘기라는 슬픈 이름을 얻고 맙니다. 지난날 한때 무슨 행사를 벌일 적마다 비둘기를 한꺼번에 풀어서 날리는 일을 곧잘 했는데요, 사람이 주는 모이만 받아먹던 비둘기는 갑작스레 풀려난 뒤에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아야 할는지 하나도 모른다지요. 사람이 주는 모이에 길든 비둘기로서는 처음부터 닭둘기가 될밖에 없는 셈이라고 합니다.


  처음부터 숲이나 들에서 살지 못한 채 태어난 비둘기로서는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까요? 이처럼 바다가 망가지거나 갯벌이 사라지는 바다에서 물목숨은 어떻게 살아남을 만할까요? 수많은 배가 바다를 가르고, 수많은 고기잡이배가 그물로 바다를 훑으며, 잠수함이라든지 핵실험(바다에서 하는 핵실험)이나 석유캐기 따위로 바다 터전이 송두리째 망가질 적에 물목숨은 어떻게 무엇을 할 만할까요?



물고기들은 유연하고 호기심이 많은데, 그 이유는 새로운 각도에서 바라보고, 새로운 사고를 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이다. (160쪽)


인간에 의해 붕괴된 문화는 복구될 수 없다. 문화란 유전자에 코딩되는 게 아니어서, 일단 상실하고 나면 문화정보를 다시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개체수를 다시 늘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이들은 집단기억을 이미 상실한 상태이기 때문”이라고 (227쪽)



  사람은 다른 목숨 아닌 바로 사람을 보아도 여러모로 알 수 있습니다. 커다란 댐을 짓는다면서 집이며 마을을 통째로 하루아침에 빼앗기는 사람은 ‘살아갈 기운’을 잃기 일쑤입니다. 돌아갈 집이나 마을이 없는 사람한테 ‘살아갈 기쁨’은 되찾기 어려워요.


  도시에서도 이른바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오래된 마을을 하루아침에 밀어 없애는 일이 끊이지 않습니다. 나고 자란 마을이 하루아침에 사라진다면, 나고 자란 마을에서 아이를 낳고 살다가 이 마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야 한다면, 이 마을에 이야기를 묻고 사랑을 묻으며 살림을 묻은 사람들은 앞으로 ‘무슨 삶을 어떻게’ 지을 만할까요.


  한국에서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하는 사내’도 이 같은 어리둥절을 겪습니다. 이태 안팎 군대에 갇힌 채 사회와 동떨어져 지내고 나면, 군대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뒤에 꽤 오랫동안 ‘사회에 몸을 맞추느라(적응하느라)’ 힘겹습니다. 그런데 이런 어리둥절을 물목숨은 늘 겪는다고 해요. 사람은 아주 가볍게 바다를 개발합니다. 바다에 쓰레기를 매우 쉽게 버리고, 바닷가에 핵발전소나 화력발전소가 숱하게 있어요. 공장도 바닷가에 많습니다. 수백만 수천만 수억만 해를 고이 잇던 바다 삶터가 하루아침에 바뀔 적에 이 바다에 깃들던 물목숨은 그야말로 얼마나 어리둥절할까요. 4대강 막삽질 때문에 냇물이 끔찍하도록 뒤틀렸는데, 이 냇물에서 살던 물목숨은 또 얼마나 그악스레 어리둥절할까요.



인간의 입맛에 맞는 물고기는 육식어류이므로 물고기 양식업자들은 육식어류를 키우며, 육식어류의 먹이로는 그보다 작은 야생 물고기가 사용된다. (294쪽)


바닷새의 경우에도 상황은 마찬가지다. 주낙에 주렁주렁 매달린 낚싯바늘과 트롤어선의 끝줄은 매년 10만 마리에 달하는 알바트로스와 바다제비의 목숨을 앗아간다. (304쪽)



  물고기를 좋아해서 안 먹는다고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 하고 헤아려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바다를 가없이 사랑한다는 ‘실비아 얼’이라는 과학자는 바다를 살피고 아끼는 길을 온삶을 바쳐서 걷는 동안 ‘이 사랑스러운 물목숨을 그저 고기로 삼아서 먹을 수 없다’는 생각을 굳혔다고 합니다.


  누구는 개나 소나 돼지나 그저 똑같은 고기로 여길 수 있습니다. 누구는 개도 소도 돼지도 그저 똑같이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누구는 물목숨을 저마다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여길 수 있고, 풀포기와 꽃송이와 나무도 사랑스러운 이웃으로 여길 수 있어요.


  바람이 부는 소리가 노래로구나 하고 들을 수 있으면 바람을 이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물목숨이 바다나 냇물을 가르는 힘찬 몸짓에서 기쁨과 웃음을 읽을 수 있으면 물목숨을 이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하고 따사로이 어깨동무할 수 있는 바탕을 ‘그저 옆집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웃이 어떤 마음인가’ 하고 곰곰이 되새기거나 헤아리기 때문이지 싶어요.


  바다에 이웃이 있습니다. 들에 이웃이 있고, 숲에 이웃이 있습니다. 우리 보금자리 둘레에 숱한 이웃이 있습니다. 사람도 이웃이며, 개구리하고 제비도 이웃입니다. 새도 물목숨도 모두 이웃입니다. 사랑스레 평화를 누리며 기쁨을 노래할 이웃입니다. 2017.4.10.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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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쉬르의 마지막 강의 - 제3차 일반언어학 강의(1910~1911)-에밀 콩스탕탱의 노트 현대사상의 모험 32
페르디낭 드 소쉬르 지음, 김성도 옮김 / 민음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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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94



책에 안 적힌 ‘말·이름’을 배우고 가르친다

―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

 페르디낭 드 소쉬르 글

 에밀 콩스탕탱 노트

 김성도 옮김

 민음사 펴냄, 2017.2.17. 35000원



  소쉬르라는 분이 있습니다. 1857년에 태어나 1913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분이 쓴 책과 남긴 말은 오늘날 ‘말이라는 학문(언어학)’에 크게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대학교에서 말을 가르치거나 배울 적에 이분 책을 으레 다루거나 읽는다고 합니다.


  소쉬르 님이 손수 남긴 글이 아닌, 소쉬르 님이 강의로 들려준 말을 에밀 콩스탕탱이라는 분이 낱낱이 받아적은 공책을 바탕으로 나온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민음사,2017)가 한국말로 나왔습니다. 오늘날이라면 녹음기로 쉽게 목소리를 담아서 그리 어렵지 않게 말로 풀어낼 테지요. 그렇지만 1910년대 언저리에는 손으로 아주 빠르게 받아적어야 비로소 ‘강의’를 책으로 묶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정의하고, 자신의 영역 속에 존재하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언어학의 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78쪽)


시간 속에서 발생하는 언어의 변이는 관찰자의 바깥에 있다. 그러나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다채로움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 그 종족에게 언어라는 사실 자체에 대해 정신을 열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니라 다른 언어들과의 접촉인 것이다. (93, 94쪽)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는 여느 사람한테는 쉽게 다가서기 어려울 만한 책이라고 느낍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말로 가득합니다. 다만 이 ‘학문말’이란 ‘일본을 거쳐서 한국으로 들어온 일본 한자말’입니다. 아직 한국은 한국말로 제대로 학문을 하는 틀이 서지 못해요. 한자말도 한국말이 아니냐고 묻는 분이 있습니다만, 한국말은 오직 한국말일 뿐입니다. 한자권에서 받아들이는 말도 있고, 영어권에서 받아들이는 말도 있으나, 사람들이 ‘말밑을 안 따지고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말’일 적에 비로소 한국말이에요.


  이를테면 ‘버스’라고 할 적에 ‘bus’를 떠올리면서 알아차리는 사람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니 ‘버스’는 영어가 아닌 한국말입니다. 영어는 ‘bus’예요. 한글로 적는 ‘동해’를 보면 어떤 것을 떠올릴 만할까요? 아마 거의 모두 ‘동쪽 바다’를 떠올리겠지요. 그래서 ‘동쪽 바다’를 뜻하는 ‘동해’는 그냥 한국말입니다. 그러면 ‘凍害’나 ‘童孩’나 ‘銅海’는? 이 세 가지 한자말은 한글로 적으면 도무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한자를 밝혀도 못 알아들을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凍害’나 ‘童孩’나 ‘銅海’는 한국말사전에 실렸어도 ‘한국말이 아닙’니다. 한국말인 척하는 한자말, 곧 ‘외국말’입니다.



예컨대 mejo/medzo는 지리적 차이이다. 사람들은 결코 mejo에서 medzo로 이동했던 것이 아니며, 또는 그 반대로 medzo에서 mejo로 이동한 것도 아니다. (108쪽)


공식 사전들은 이 같은 문어를 위해 만들어진다. 학교에서는 책에 근거하여, 그리고 책의 세계 속에서 교육을 한다. 문자로 적힌 단어라는 관념에는 정확한 단어라는 관념이 결속된다. (137쪽)



  《소쉬르의 마지막 강의》를 읽으면, 소쉬르 님은 서양말을 바탕으로 ‘이 지구에서 말이 흘러온 자취’를 살핍니다. 아시아 쪽 말을 다룰 적에 아쉽게도 한국말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까지 건드리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빼어난 학자라 하더라도 아시아 세 나라 말을 모두 다루기는 벅찰 수 있겠지요.


  서양말을 바탕으로 ‘말이 흘러온 자취’를 다루는 이 책을 살피다 보면, 소쉬르 같은 분조차 ‘말이 흘러온 자취’는 ‘종이로 남은 글’이나 ‘책으로 남은 글’을 좇을 수밖에 없다는 대목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건 ‘책’에 적힌 낱말일 적에 “단어라는 관념에는 정확한 단어”로 여긴다고 하는 대목을 엿볼 만해요.



모든 문법 교과서들은 문자 표기에서 출발하며, 발화자의 발음에서 존재하는 실제적 가치를 우리에게 제시하기에는 매우 불충분하다. 사람들은 g가 특정 방식으로 발음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151쪽)


통속적인 방언들을 알고 싶기는 하나 현실적으로 중세 시기의 문헌들 속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는데, 사람들이 민간 방언을 문자로 옮기지 않갔기 때문이다. (248쪽)



  고장말이나 시골말(통속적인 방언이나 민간 방언)은 책으로 배우거나 알 수 없다고 해요. 한국에서도 이와 같지요. 한국에서 ‘남은 옛책’은 거의 조선이나 고려 적 책인데, 거의 한자로 적힙니다. 한국말이 아닌 중국말로 적혀요. 아주 드물게 ‘훈민정음이 적힌 책’이 나옵니다만, 이 훈민정음으로 적힌 책조차 ‘여느 시골사람이 주고받던 말’이 아닌, 임금이나 신하나 사대부나 지식인지 주고받던 말일 뿐입니다.


  이러다 보니 한국이든 서양이든 ‘말이 흘러온 자취’를 넓거나 깊게 살필 수 없다고 해요. 이런 좁은 틀이지만, 이 좁은 틀에서 어떻게든 길을 찾으려고 하는 학문이 언어학이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한 가지를 곱씹어 봅니다. 서울 표준말로 ‘부추’라고 일컫는 남새를 전라도에서는 ‘솔’이라 하고, 경상도에서는 ‘정국지’라고 해요. 세 낱말 ‘부추·솔·정구지’는 생김새도 소리도 달라요. 글잣수마저 다릅니다. 그렇지만 세 고장에서 이 말이 한꺼번에 태어났어요.


  한국에서 세 고장 사람들은 ‘똑같은 것’을 보면서 그야말로 다 다르게 ‘생각을 길어올려’서 참으로 다른 낱말을 지었습니다.


  우리는 부추가 먼저인지, 솔이 먼저인지, 정구지가 먼저인지 알 수 없어요. 또 알아야 할 까닭이 없을 수 있어요. 세 낱말은 그저 한꺼번에 다 다른 고장에서 나란히 태어나면서 한국말을 이루는 너른 바탕이라고 하는 대목을 엿볼 뿐입니다.



언어(랑그) 속에서 우리는 구체적 본질의 사실 즉, 대상을 갖는다. 이러한 기호들은 정신적인 것이기는 하지만 추상화 과정은 아니다. 언어(랑그)를 성립하는 사회적으로 비준된 연합들과 결합들의 총합은 두뇌 속에 자리하고 있다. (267쪽)


우리는 상태가 결코 의미들을 표시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구성 항들의 계약에 따라서 스며 있거나 그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하나의 우연적 상태가 주어진 것이며 그 상태를 낚아챈 것이다. (327쪽)



  여느 삶자리에서 여느 사람들은 책에 안 적힌 ‘말·이름’을 배우고 가르칩니다. 학문이라는 자리에서는 어쩔 수 없이 책에 적힌 말이나 이름을 배우고 가르치면서 발자취를 돌아봅니다. 여느 어머니가 여느 아이한테 물려주거나 가르치는 말하고 이름은 ‘책에 적힐 수도 있지만, 책에 적혔는지 안 적혔는지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문득문득 터뜨리는 말이나 이름도 ‘책에 적혔든 안 적혔든’ 그리고 ‘사전에 나오든 안 나오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아이도 어른도 스스로 저마다 생각을 말이라는 그릇(기호)에 담아내어 서로 주고받을 수 있으면 넉넉합니다. 이 봄에 시골에서 ‘냉이’를 캡니다. 아니 냉이철은 이제 지나갔다고 해야겠지요. 냉이꽃이 하얗게 흐드러지는 삼월 끝자락이거든요. 그런데 이 냉이를 놓고 여러 말이 있어요. ‘냉이’라는 서울 표준말이 있습니다만, ‘나싱개·나숭개·나생이’가 있어요. 이밖에도 온갖 고장말이 있어요.


  저는 우리 아이들하고 냉이꽃을 보다가 문득 이렇게 말해 봅니다. “어머나 여기 ‘나싱개꽃’이 피었구나” 하고요. 이때 아이는 ‘오잉?’ 하는 아리송한 얼굴로 저를 쳐다봅니다. 저는 다시 “어머나 여기 ‘나숭개꽃’이 잔뜩 있네” 하고 말해요. 이때 아이는 ‘아잉?’ 하는 더욱 알쏭하다는 낯으로 저를 바라봅니다.


  말로 생각을 나누다 보면, 우리가 보거나 느끼는 것마다 이름을 새롭게 붙이다 보면, 또 이러한 말을 아이들한테 들려주고 가르치면서 스스로 생각을 북돋우다 보면 참으로 재미있고 즐거운 말살림이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2017.3.24.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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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 웃음을 잃지 않고 세상과 싸우는 법
린디 웨스트 지음, 정혜윤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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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82



‘지나 데이비스’쯤 안 되는 여자는 ‘돼지’니?

―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

 린디 웨스트 글

 정혜윤 옮김

 세종서적 펴냄, 2017.2.21. 15800원



  3월 8일을 ‘세계 여성의 날’이라고 한답니다. 저는 이런 날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다만 하나는 생각해 보았어요. ‘세계 여성의 날’이 있다고 한다면 세계에서 여성은 아직 날갯짓을 마음껏 펴지 못한다는 뜻이요, 앞으로 갈 길이 멀다는 뜻이지 싶어요.


  이와 맞물려 남성 스스로 남성다운 살림을 슬기롭게 짓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고 느껴요. 왜냐하면 여성을 억누르거나 괴롭히는 이는 때때로 여성 스스로이기도 하지만, 언제나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거나 괴롭히는 사회 얼거리일 테니까요.



할리우드가 정해 놓은 미의 기준이란 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수준인가 하면, 지나 데이비스쯤 되지 않으면 자신을 완전히 쓰레기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정도이다. (26쪽)


부디 잊지 말기 바란다. 나는 내 몸이라는 사실을. 내 몸이 작아진다 해도 그것은 나고, 커진다 해도 그것 역시 나다. 내 안에서 날씬한 여자가 발굴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35쪽)



  린디 웨스트 님이 쓴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세종서적,2017)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갓난쟁이일 무렵부터 ‘가시내라 하기에는 너무 큰 덩치’로 태어나서 자란 린디 웨스트 님이 겪은 일이 찬찬히 흐릅니다. 다시 말해서 갓난쟁이일 무렵부터 ‘사랑’ 아닌 ‘손가락질’을 받느라 몸을 사리거나 어딘가에 숨느라 바빴던 삶을 낱낱이 드러내는 책입니다.


  한번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여느 아기보다 커다란 사내가 태어나면 사람들은 으레 씩씩하다느니 ‘장군감’이라느니 말합니다. 여느 아기보다 커다란 가시내가 태어나면? 가시내는 커다란 몸집으로 태어나면 안 될까요? 이를테면 키가 2미터가 넘는 가시내가 있고, 몸무게가 100킬로그램이 넘는 가시내가 있어요. 사내도 이와 마찬가지이지요. 키가 크면 그저 키가 클 뿐이고, 몸무게가 많이 나가면 그저 몸무게가 많이 나갈 뿐이에요.


  키 큰 사람이나 키 작은 사람을 놀리거나 괴롭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몸무게가 많이 나가든 적게 나가든 몸무게로 사람을 놀리거나 괴롭혀야 할 까닭도 없습니다.



유일한 치료법이 굶고 극도로 절제하며 작아지도록 노력하는 일이라고 믿게끔 키워진다면, 또 우리 여성들끼리 서로 비교당하면서 흠잡힉고 … 우리가 줄기차게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퍼부을 수밖에 없도록 그런 압박을 받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세상은 어쩔 수 없이 그런 방향으로만 흘러갈 것이다. (41쪽)


지금까지 줄곧 내가 지녀 왔던 생각이 전부 다 틀린 거라면, 이 모든 게 마법이고, 그냥 ‘스스로가 가치 있는 존재라고 결정하기만’ 하면 실제로 그렇게 되는 건데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거라면? 대체 그동안 나는 무엇 때문에 날 미워하는 타인의 손에 그 결정을 송두리째 맡겨버렸던 걸까? (118쪽)



  《나는 당당한 페미니스트로 살기로 했다》를 쓴 린디 웨스트 님은 어릴 적부터 ‘크고 뚱뚱한 몸집’ 때문에 늘 놀림과 따돌림을 받았다고 밝히는데, 둘레에서 ‘여자를 보는 눈’은, 아니 방송이나 매체에서는 ‘여자는 이쯤 되어야 한다’면서 ‘지나 데이비스는 되어야 한다’고 떠들었다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지나 데이비스쯤 안 되면 린디 웨스트 님 같은 이들뿐 아니라 퍽 날씬하구나 싶은 여성도 살을 빼거나 굶거나 뭔가를 해야 한다는 짐덩이에 짓눌렸다고 합니다. 모든 여성이 똑같은 몸집에 몸매에 얼굴이 되어야 한다는 듯 내모는 사회 얼거리는 대단히 드세다고 해요.


  가만히 사회를 돌아봅니다. 사회뿐 아니라 문화나 예술이나 교육이나 정치에서도 ‘여성 = 긴머리’가 아직도 단단합니다. ‘여성 = 치마’라는 생각도 대단히 굳어요. 요새는 긴머리 사내가 제법 있습니다만, ‘남성 = 짧은머리’여야 한다고 여기는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도 꽤 많습니다. 초등학교 교과서는 여성을 그릴 적에 ‘짧은머리에 바지’차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요? 초등학교 교과서는 남성을 그릴 적에 ‘민소매 치마에 긴머리’차림으로 그릴 수 있을까요?


  틀을 깨고, 아니 처음부터 틀을 안 세우고서 자유롭게 남성과 여성을 바라보고, 평등하면서 평화롭게 여성과 남성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전 제 몸이 얼마나 멋지고 매력적이고 건강하고 유용한지에 대해 누구에게든 애써 정당화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몸은 제 것이니까요. 당신 게 아니고요. (149쪽)


하지만 뚱뚱한 사람들을 잔인하게 대하는 것이 여전히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탓에 우리는 해결책을 강하게 요구하지 못한다. (215쪽)


그런 말들은 농담에 불과한 게 아니에요. 그 말들이 세상 속으로 번져 들어가서 우리를 학대하는 사람들을 정당화해 주고 우리로 하여금 더더욱 침묵하게 만듭니다. (264쪽)



  린디 웨스트 님은 스물여덟이라는 나이에 이르도록 ‘뚱뚱한 내 몸’을 감추며 살았다고 합니다. 누가 둘레에서 ‘뚱뚱한 너 때문’에 버스나 기차나 비행기에서 자리가 좁다고 투덜대면 늘 죄인이 된 마음이 될 뿐이었다고 해요. 뚱뚱한 사람 탓이 아닌 줄, 사회 얼거리가 잘못되거나 뒤틀렸다는 대목을 따져야 하는 줄, 바꿀 것은 ‘뚱뚱한 사람’이 아닌 ‘사회 얼거리’인 줄 제대로 느껴서 말하기가 어려웠다고 해요.


  우리는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승강기나 자동계단은 ‘다리가 멀쩡한 비장애인’이 아닌 ‘장애인 복지와 평등’ 테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승강기나 자동계단은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한테도 크게 도움이 되어요. 뚱뚱한 사람한테 좁다는 비행기 걸상은 안 뚱뚱한 사람한테도 좁기 마련입니다. 버스 걸상도 이와 같지요.


  성평등이란 어느 한쪽 성만 헤아리는 길이 아니라고 느껴요. 성평등이란 내리누르거나 내리눌리는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 자리에서 서로 아끼면서 돌볼 줄 아는 따사로운 삶자리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느껴요. 1908년 3월 8일 미국에서 일어난 커다란 물결은 ‘여성 노동자 권리’만 외치는 목소리가 아니었다고 생각해요. 몹시 억눌린 여성 노동자 권리를 밝히려는 목소리는 ‘여성보다 덜 억눌린다고 하더라도, 남성 노동자 권리’를 함께 제대로 지키자는 목소리로 이어집니다. ‘어린이 노동 권리’를 짓밟지 말자는 목소리로도 이어지지요. ‘이주노동자 권리’를 지키자는 목소리로도 이어질 테고요.



“강간이나 당해버려, 돼지야!”가 건설적인 대화로 나아가는 길이라 여기는 이들과 자신들이 동급으로 취급되는 건 자기 홍보에 재앙이 된다는 사실을 유명 코미디언들이 깨달았을 때, 그들의 아첨쟁이 추종자들은 자기네 두목 말을 따르는 것 외의 다른 걸 선택할 여지가 없었다. (294쪽)



  미국 사회에는 “강간이나 당해버려, 돼지야!” 같은 우스갯소리를 ‘남성 코미디언’이 방송이나 무대에서 버젓이 읊는다고 합니다. ‘돼지야’ 하고 이죽거리는 말도 몹쓸 말이지만, ‘강간당하라’고 비아냥거리는 말도 대단히 몹쓸 말입니다. 그렇지만 ‘남성 코미디언’은 이 같은 말이 왜 잘못인가를 생각하려 하지 않을 뿐더러, 고치거나 없애려고도 안 했다지요.


  한국 사회에도 이와 비슷한 ‘씹할 년’이나 ‘씨발’이라는 거친 말씨가 있습니다. 이런 말씨를 어른도 아이도 사내도 가시내도 아무렇지 않게 내뱉습니다. 방송에서는 이 말씨를 ‘식빵’으로 걸러서 쓰기도 한다지만, ‘식빵’으로 바꾼다고 해서 이 말씨에 깃든 끔찍한 성차별이 사라질 수 없습니다.


  이런 말을 안 할 수 없을 만큼 사회가 어지럽거나 엉망이라 하더라도, 왜 어지럽거나 엉망인 사회를 나무라거나 탓하는 말이 아닌 ‘여성을 깎아내리는 뜻’이 담긴 말을 써야 할까요? 왜 한국사람은 이런 대목은 생각을 안 할까요? 우리한테 버릇처럼 단단히 박힌 못을 언제쯤 빼낼 수 있을까요?



그 모든 자기반성이 있었음에도 그는, 어째서 한 여자에 대한 분노가 여자들 전체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는지를 묻는 내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남자들은 자기 자신이 미울 때 여자를 그 화풀이의 대상으로 삼는 걸까? (356쪽)



  여성은 어머니이자 할머니이자 누나이자 언니이자 딸이자 동생입니다. 남성은 아버지이자 할아버지이자 형이자 오빠이자 아들이자 동생이에요. 여성도 남성도 서로 아름다운 숨결입니다. 여성도 남성도 함께 사랑받고 사랑할 사람입니다.


  딱 하루 ‘세계 여성의 날’에만 여성 권리를 헤아리거나 마음을 쓰는 정책이나 사회가 아니기를 빕니다.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일하고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나라가 되고 마을이 되며 보금자리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부드럽고 따사로이 흐르는 마음에서 사랑이 태어나고 삶이 자랍니다. 부드럽고 따사로이 헤아리는 마음으로 사회와 나라를 바꿀 수 있습니다. 2017.3.8.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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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통이 트인다 - 녹색 당신의 한 수
황윤 외 지음 / 포도밭출판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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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87



대통령 자리는 권력자 아닌 심부름꾼

― 숨통이 트인다

 황윤, 이계삼, 김주은, 구자상, 신지예, 김은희, 남우근, 이유진, 장서연, 하승수, 한재각 글

 포도밭 펴냄, 2015.12.21. 1만 원



  새로운 대통령을 뽑아야 합니다. 대통령 자리에 있는 사람을 아직 끌어내리지 않았습니다만, 이녁은 그동안 여러 사람과 저지른 숱한 말썽거리만으로도 더는 대통령 구실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서면 이 자리에서 대통령으로서 일할 수 있도록 꽤 많은 일삯을 받는다 하고, 경호원이라든지 연금이라든지 집이라든지 어마어마하게 받는다고 해요. 작은 일을 하는 자리가 아니니 엄청난 권리와 이익을 받는 대통령일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권리와 이익을 ‘일한 보람’으로 누리려 하지 않는다면 그만 ‘권력’으로 치닫습니다. 심부름꾼 대통령이 아닌 권력자 대통령이 되려 할 적에는 숱한 말썽거리를 일으키는 얼룩진 모습이 되고 맙니다.



기득권을 가진 정치세력들은 투표율이 낮아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투표율이 낮을수록 고정표를 많이 가진 쪽이 유리하기 때문입니다. (10쪽)


이 불공정한 현상에 대해 제가 침묵할 수 없는 것은, 침묵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동의의 표현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30쪽)



  녹색당에서 ‘녹색 정책’을 밝힌 《숨통이 트인다》(포도밭 펴냄)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지난 2015년에 나왔습니다. 녹색당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의원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대통령을 뽑는 자리에 후보를 내놓을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녹색 정책’ 그러니까 ‘이 나라를 푸르게 가꾸려는 슬기로운 마음’을 내놓을 뿐 아니라 몸소 삶으로 옮기는 이가 대통령이 되기를 바랍니다.


  ‘살림살이를 푸르게 가꾸려는 슬기로운 마음’은 대통령뿐 아니라 장관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벼슬아치도, 여느 공무원도 품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느 자리에 있는 여느 회사원이나 여느 살림꾼도 ‘살림살이를 푸르게 가꾸려는 슬기로운 마음’으로 살아야 할 테고요.


  대통령을 비롯한 몇몇 사람만 슬기로워야 하지 않아요. 우리 누구나 슬기로울 노릇이라고 생각해요. 우리 스스로 슬기로울 적에 대통령이 되어 보겠노라 나서는 사람들이 엉뚱한 짓을 일삼지 않아요. 우리 스스로 슬기로울 적에는 어떤 사람이 대통령 자리에 서더라도 말썽을 일으키지 못하도록 우리가 지켜보거나 다스릴 수 있어요.



제게 새로운 의문이 조금씩 자라났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오늘날 한국의 학교교육이 학생들의 삶에서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62쪽)


어둠을 저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한 자루 촛불을 켜는 일입니다. 캄캄한 밤길에 주저앉은 이가 더듬어 길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거대한 조명탑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한 자루 촛불이면 넉넉합니다. (80쪽)



  대통령 자리에 선 사람이 스스로 심부름꾼이라 생각한다면 뜬금없는 독재 미화 역사교과서를 함부로 밀어붙이지 않으리라 봅니다. 대통령 자리에 선 사람이 스스로 권력자라고 여긴다면 바보스러운 막개발을 일삼으면서 뒷돈을 챙기는 어리석은 짓을 자꾸 일으킬 테고요.


  탄핵 심판을 앞둔 사람은 심부름꾼 노릇을 했을까요, 아니면 권력자 노릇을 했을까요? 새로운 대통령 자리에 들어서겠노라 밝히는 이들은 심부름꾼이 될 마음일까요, 아니면 새로운 권력자로 떵떵거리고 싶은 마음일까요?


  권력자 아닌 심부름꾼으로서 대통령 일을 맡으려 한다면 입시지옥 학교교육을 그대로 놓아 둘 수 없습니다. 참말로 심부름꾼인 대통령 일을 맡으려 한다면 시멘트로 때려짓고 때려부수는 짓이 아닌, 손수 밭을 일굴 줄 알면서 살림짓기를 즐기는 하루를 보내리라 생각합니다. 책상맡이 아닌 너른 마당에서 일하고 크고작은 마을에서 이웃을 헤아리면서 일하겠지요.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1인당 국민소득의 증가라는 표현으로 제시되고 있는 ‘경제성장’이 아닙니다. 1인당 국민소득이 증가한들, 정작 소득이 필요한 사람들에게는 소득이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120쪽)



  《숨통이 트인다》라는 책에서 밝히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제 경제성장이나 국민소득 같은 숫자놀이는 내려놓아야지 싶습니다. 권력하고 권위를 모두 내려놓으면서 어깨동무를 하는 숨결로 거듭나야지 싶어요. 위에서 아래로 시키는 일이 아니라, 한자리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쉬며 함께 놀고 함께 노래하며 함께 웃을 수 있는 살림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한줌뿐인 재벌이 거머쥔 돈으로 줄잡는 국민소득이 아닌, 사람들 누구나 꿈을 꾸고 키우면서 살림을 짓도록 북돋우는 기본소득으로 나아갈 적에 시나브로 평등하고 평화를 이루리라 느껴요. 작은 마을자치로 나아가고, 작은 마을살림을 보아야지 싶어요. 순위와 경쟁을 걷어내고 차근차근 걸어가면서 서로 돕는 길을 열어야지 싶습니다.



국내 주택의 평균 수명은 약 27년으로 미국 72년, 프랑스 80년, 일본 54년에 비해 매우 짧습니다. 주거 공급율이 100%가 넘은 지금까지도 부동산신화, 아파트 불패신화는 아직도 사람들 마음속에 남아 있습니다. (166쪽)



  아파트를 때려짓는다고 해서 집 없는 사람이 집을 누리지 않습니다. 보금자리를 가꾸어 아이들이 물려받을 수 있도록 할 적에 집 문제는 저절로 풀립니다. 막개발을 한판 벌여 일자리를 만들려고 한들, 이런 일자리는 곧 사라져요. 작은 보금자리에서 누구나 손수 나무를 심고 밭을 돌볼 수 있다면, 또 먹을거리뿐 아니라 전기를 자급하는 얼거리가 집집마다 마을마다 튼튼히 서도록 한다면, 우리가 바라볼 앞길은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일자리’가 아니라 ‘스스로 꿈을 지어서 이루는 살림자리’로 바뀔 만합니다.


  그러니까 새롭게 대통령이 되려고 하는 이라면 ‘일자리 만들기·부동산 잡기·입시지옥 바꾸기’가 아니라 ‘보금자리 가꾸기·살림짓기·슬기롭게 가르치고 배우기’를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어야지 싶습니다. 돈을 들여서 하는 정책이 아닌 마음을 들여서 스스로 바꾸어 나가는 길을 열어야지요. 이러면서 세금이 엉뚱한 데로 빠지지 않도록 다스려 기본소득을 마련해야 할 테고요.



우리에게는 더 많은 개발, 더 많은 파괴가 아니라 더 많은 녹색이 필요합니다. 기본소득은 녹색 미래로 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111쪽)



  얼마 앞서 ‘유치원 운영비 횡령’ 이야기가 불거지기도 했습니다만, 어린이가 어린이집에 가면 ‘나라에서는 어린이집에 꽤 큰 돈을 육아보조금을 줍’니다. 왜 이렇게 할까요? 참다운 육아복지 정책이라면 ‘어린이집’이 아닌 ‘아이 어버이’한테 육아보조금을 바로 주어야 맞습니다. 아이 어버이 스스로 그 돈으로 유치원에 보낼는지, 아니면 아이하고 집에서 여러 체험놀이를 할는지, 아이하고 여행을 다니며 삶을 더 돌아보도록 할는지, 책을 사서 읽히든지, 이렇게 하도록 해야 옳을 뿐 아니라, ‘유치원 운영비 횡령’ 따위가 생길 수 없어요.


  부디 ‘대통령이 되려고 대통령 선거에 나오는 사람’은 사라지기를 빕니다. 대통령이 아닌 심부름꾼이 되려고 이 길에 나서기를 바랍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려는 심부름꾼이 되려는 뜻이 아니라면, 제발 ‘권력자 대통령 욕심’은 고이 접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2017.2.24.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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