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농사 이야기 - 사람 땅 작물 모두 돌보는 전통 농사살림 농부가 세상을 바꾼다 귀농총서 58
전희식 지음 / 들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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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27


‘비료·농약·새마을운동’은 독재정권 감시 정책?
― 옛 농사 이야기
 전희식 글
 들녘 펴냄, 7.28. 12000원


시골에서 자랐던 사람들이 요즘 고향으로 돌아와 보면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거나 곱씹고 추억할 만한 풍경이 다 사라지고 없다.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 농사의 목적이 자급자족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바뀐 데 있다. (6쪽)


  시골에서 흙살림을 짓는 전희식 님이 마음먹고 《옛 농사 이야기》(들녘, 2017)라는 책을 썼다고 합니다. 이 책은 오늘날 거의 모든 시골에서 자취를 감추는 ‘옛 흙살림’을 다루면서, 오늘날 시골은 흙살림 아닌 ‘농업’만 있다고 하는 대목을 짚습니다. 한 마디로 하자면, 옛날에는 흙을 살리면서 먹고살았으며, 오늘날은 흙을 죽이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얼거리라고 해요.


요즘 누가 분무기나 드론으로 제초제를 뿌리면서 ‘논매기노래’를 부르겠는가. 논일하면서 부르던 농요는 농기계가 등장하면서 사라져버렸다. (22쪽)

슬레이트 지붕 개량은 볏짚 길이가 짧은 통일벼 등 개량 벼가 등장하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동네마다 있던 삼밭도 사라졌다. (34쪽)

이때(1974∼1975)부터 화학비료와 농약이 농지를 점령하기 시작했는데 최근 학계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 농촌의 급격한 변화를 주도한 새마을운동은 미국의 동남아시아 개발 전략과 한반도 안보 전략에 따른 기획이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안보 취약지구에 건설된 ‘전략촌’이 그 효시다. 종적인 관의 주도성과 마을 단위의 감시 체제를 강화하는 전략이었다는 것이다. (77∼78쪽)


  전희식 님이 《옛 농사 이야기》에서 밝히는 이야기를 이제는 함께 곰곰이 따져 보아야지 싶습니다. 오늘날 시골에는 사람들이 애틋하거나 그립게 떠올릴 만한 모습이 참말로 거의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미꾸라지나 가재를 잡을 만한 흙도랑이 빠르게 사라지지요. 어쩌다 시멘트 아닌 흙으로 도랑이 남았어도 농약 때문에 섣불리 못 들어갑니다. 농약 때문에 논둑이나 밭둑에 섣불리 앉기 어려우며, 맨발로 들을 달리기 어렵지요. 연을 날릴 곳이 없고, 시골길에서도 자동차를 걱정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별이 쏟아지는 밤이었다지만, 요새는 그리 별이 안 쏟아집니다. 옛날에는 여름 밤을 반딧불이가 반짝거리며 날았으나, 요새는 반딧불이를 볼 만한 시골이 적고, 그나마 숫자도 매우 크게 줄었어요.

  더구나 요즈음 시골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트로트나 대중가요는 부르지만, 시골노래가 없어요. 논매기노래뿐 아니라 방아를 찧거나 콩바심을 하며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기계로 심고 기계로 거두니 심거나 거둘 적에 노래를 부를 일조차 없어요.


옛날에는 해충이 없었고 농장에 해로운 균이 번성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모든 촌로들이 똑같이 얘기한다. 비료를 주면 토양의 물리적 성질이 급격히 악화된다. 통기성과 배수성, 물리적 구조 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흙이 죽어버린다는 얘긴데, 흙 속에 사는 미생물을 포함한 다양한 생명체들이 사라지게 되니 결국엔 특정 개체의 벌레가 농장을 독점하게 된다. (110쪽)


  새마을운동은 안보 때문에 생겼다고 합니다. 독재정권이 시골을 감시하는 얼거리였다고 하지요. 이는 틀린 말이 아니라고 느껴요. 북녘은 북녘대로 주민을 감시하는 얼거리가 있었는데, 남녘은 시골에서는 새마을운동으로, 도시에서는 반상회로 주민이 서로 감시하도록 했습니다. “살기 좋은 새마을”이 아닌 “독재하기 좋은 새마을”이었다고 할까요.

  이러다 보니 서로 돕는 두레나 품앗이가 줄어들밖에 없어요. 게다가 기계로 심고 거둘 적에는 두레나 품앗이가 부질없어요. 기계가 널리 번지면서 농약하고 비닐도 널리 번졌고, 이러는 동안 시골에서는 장구를 치거나 꽹과리를 울리는 일이 사라지고 노래가 함께 사라졌어요.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노는 마을이 아닌, 집집마다 텔레비전을 들여놓고서 ‘위(서울)에서 내려보내는 방송에 목을 매는’ 얼거리가 됩니다. 시골 이야기는 가물에 콩 나는 만큼도 안 나오는 방송을 시골마을 사람들이 지켜보면서 ‘도시로 떠나기’를 꿈꾸고, 시골을 떠난 젊은 일꾼은 도시에서 값싼 공장노동자가 되었어요. 이는 1970∼80년대를 거쳐 1990년대까지 우리 시골 모습입니다.


아이들은 배추 뿌리를 얻어먹기 위해 김장하는 어머니 곁을 얼쩡댔다. 오래전 기억으로나마 남아 있는 추억이다. (161쪽)

고구마잎은 나물도 해 먹지만 소여물로도 최고였다. 볏짚만 끓여 주다가 말린 고구마 넝쿨을 작두로 썰어 한 줌 넣어 주면 누워 자던 소가 벌떡 일어나 여물통으로 달려오곤 했다. (221쪽)


  요즈음 시골은 도시로 떠날 젊은 일꾼이 없습니다. 시골에까지 이주노동자가 들어와서 밭일을 하거나 김 공장에서 일을 합니다. 그러나 시골에는 아직 어린이가 있어요. 시골 어린이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얼른 도시로 떠날 생각을 합니다.

  이 흐름이 꺾이지 않는다면 참말로 시골은 한국에서 모조리 사라질 수 있습니다. 옛 흙살림 이야기만 사라지는 시골이 아니라, 사람 사는 마을이 사라질 수 있어요. 더욱이 사람이 크게 준 오늘날 시골에서 이 숫자마저 더 줄어들면 기계하고 농약하고 비료를 더 많이 쓰는 기업농만 불거지겠지요.


옛날에는 벼농사를 전년도 10월에 시작했다. 타작할 때를 1주쯤 앞두고 완숙 단계에 들어가는 벼를 베어내서 씬나락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아직 몇몇 겉잎사귀가 푸릇한 청장년쯤 되는 벼를 조심스레 베어서 천천히 말렸다. 그리고는 일일이 홀태를 이용해서 손으로 낟알을 훑어냈다. 탈곡기에 넣으면 요즘말로 스트레스 받을까 봐서다. (93쪽)


  씨로 삼는 나락 한 톨(씨나락)이 기계(탈곡기)를 거칠 적에 힘들까 봐 걱정했다는 지난날입니다. 오늘날에는 이 대목을 걱정하는 눈길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경운기가 지나갈 적에 소리가 대단히 크고, 헬리콥터나 드론으로 농약을 뿌리고 나면 마을 어디에서도 새나 풀벌레나 개구리가 노래하지 않아요. 모두 죽기 때문이지요.

  올봄에 저희 보금자리에 깃들던 제비는 유월 끝자락까지 튼튼히 잘 살았으나, 바로 이 유월 끝자락에 마을 곳곳에서 드론으로 농약을 뿌려대니 얼마 안 가서 모두 죽어서 사라졌습니다.

  제비 같은 작은 새 한 마리는 이 땅에서 한살이를 거치는 동안 한 마리마다 날벌레나 풀벌레를 1만 마리쯤 잡아먹는다고 합니다. 참새도 가을에 낟알을 얻어먹으려고 하기 앞서까지 한 해 동안 1만 마리가 훌쩍 넘는 날벌레하고 풀벌레를 먹고요.

  우리는 흙살림을 잊거나 잃으면서 무엇을 얻었을까요? 흙을 살리지 않는 농업이 춤추는 오늘날 우리한테 돈이나 기계나 비닐이나 농약이나 드론은 남는다지만, 돈·기계·비닐·농약·드론만 남은 시골에서 어느 어린이가 어떤 애틋한 이야기를 가슴에 품을 수 있을까요? 이런 것만 남는 시골에 나이든 분들이 시골을 떠올리거나 그리워할 만한 이야기가 있을까요?

  흙이 살고 숲이 살며 마을이 살아나는 자리에서는, 어른하고 아이가 함께 살아갈 수 있지 싶습니다. 흙이 죽고 숲이 죽으며 마을이 스러지는 자리에서는, 기계와 농약을 뺀, 그리고 이 기계와 농약을 시골에 끌어들인 새마을운동 깃발을 빼고는 남아나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가을이 저물려고 합니다. 2017.11.4.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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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려견 응급처치 매뉴얼 - 반려인 필독서 반려동물 응급처치 매뉴얼
사토 타카노리 지음, 김주영 옮김, 김주영 감수 / 단츄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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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16



사랑하는 ‘길벗개’가 아프지 않도록

― 반려견 응급처치 매뉴얼

 사토 타카노리 글

 김주영 옮김

 단츄별 펴냄, 2017.6.20. 15000원



  지난날에는 집에서 함께 지내는 짐승을 두고 ‘집짐승’이라 했습니다. 예부터 집짐승을 함부로 다루지 않았고, 집짐승을 함부로 다루는 사람한테는 손가락질을 했어요. 집짐승도 어엿한 ‘한식구’였어요. 삶터가 시골하고 서울(도시)로 갈리면서 서울이라는 곳에서 짐승을 따로 키울 적에 ‘애완동물’이라는 이름이 태어났습니다.


  ‘애완(愛玩)’은 “동물이나 물품 따위를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귀여워하거나 즐김”을 뜻해요. 이른바 ‘귀염둥이(귀염둥이 짐승)’인 애완동물이에요. 이제는 짐승을 귀엽게만 볼 노릇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반려동물’이라는 말이 생겨요. ‘반려(伴侶)’는 “짝이 되는 동무”를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일본말은 ‘はんりょどうぶつ(伴侶動物)’요, 영어는 ‘companion animal’입니다.


  영어나 일본말을 옮기며 ‘반려동물’이라고 쓰는구나 싶은데, 말뜻을 가만히 짚으면, 길동무가 되는 짐승입니다. 이른바 ‘길동무짐승·길벗짐승·짝꿍짐승’이라고 할 수 있어요. 또는 ‘삶동무짐승·삶벗짐승’이라 할 수 있을 테고요.



반려견은 코를 풀게 하여 비즙을 배설시키는 것이 블가능하며, 구조상 코를 막고 있는 비즙을 밀어내서 배출시켜 주는 것도 곤란합니다. 비즙이 나와 있는 경우에는 거즈 등으로 부드럽게 닦아 주고 코막힘이 호전되는가를 관찰해야 합니다. (50쪽)



  《반려견 응급처치 매뉴얼》(단츄별, 2017)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우리 곁에 있는 귀엽거나 사랑스럽거나 길벗이 되는 짐승을 가만히 헤아립니다. 이 책은 여러 집짐승이나 귀염짐승이나 길벗짐승이나 삶벗짐승 가운데 개하고 함께 사는 분한테 길잡이가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사람하고 개가 서로 마음이 맞는다고 하더라도 말까지 섞지는 못하기 마련이라, 개한테서 느끼거나 살피는 여러 모습으로 개가 아픈지를 헤아리자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우리가 눈치 코치 마음치 모두 살펴야 우리 곁에 있는 고운 벗님을 잘 돌볼 수 있다고 해요.



반려견은 안정시 1분간 평균 18∼25회 정도의 호흡을 합니다. 물론 흥분하거나 운동 후에 호흡수가 증가하는 것은 정상이며, 개체마다 차이는 있으나 보통 때보다 분명히 호흡이 빠르고 횟수가 많을 때는 상처나 질병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184쪽)


호흡의 변화를 감지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상태일 때 반려견의 호흡 상태와 호흡수를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186쪽)



  개 한 마리를 집에 두고 함께 살기는 어렵지 않다고 느껴요. 고양이도 그럴 테고요. 우리가 이들 짐승을 곁에 두면서 애써 ‘반려동물(길벗짐승)’ 같은 이름을 쓰는 까닭이라면 마냥 귀엽게만(애완) 보려고 하지 않는 마음이지 싶어요. 그러면 무턱대고 개부터 집에 들이기 앞서, 개 한 마리는 여느 때에 어떤 몸일 적에 튼튼한가를 알아두어야 할 테고, 밥은 무엇을 얼마나 어느 때에 먹어야 좋은가를 알아두어야 할 테며, 똥오줌을 언제 얼마나 어떻게 누는가도 알아두어야 할 테지요.


  개가 좋아하는 보금자리나 터전을 살펴야 할 테고, 개가 왜 땅을 파기를 좋아하는가도 살펴야 할 테지요. 어미 개가 새끼를 낳도록 하고 싶다면, 어미인 개로서 새끼한테 삶을 어떻게 가르치거나 물려줄 수 있는 터전이 되어야 하는가까지 살필 줄 알아야 할 테고요.


  《반려견 응급처치 매뉴얼》은 때와 곳에 맞게 개를 잘 살피자고 알려주면서, 때와 곳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고 마주해야 하는가를 들려줍니다. 동물병원으로 가기 앞서 할 일, 개가 아플 적에 처음에 어떻게 다스리면 좋은가, 병원에만 맡길 수 없이 집에서 늘 할 일을 차근차근 짚어서 알려줍니다.



정상적인 반려견의 1일 소변량은 대체로 체중 1㎏당 25∼40㎖이므로 그 양과 비교해서 분명히 많은 경우는 이상이 있는 것입니다. (264쪽)


반려견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 하우스 트레이닝 유무에 따라 진찰의 원활함이 달라진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저는 모든 반려인들이 소중한 반려견의 건강한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하우스 트레이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21쪽)



  저는 《반려견 응급처치 매뉴얼》을 읽는 내내 어버이가 아기를 낳아 돌볼 적에 어떤 마음이어야 아기가 반기거나 좋아할 만한가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아기도 아직 말을 할 줄 모릅니다. 아기 티를 벗고 아이가 되어도 아직 제 뜻이나 마음을 제대로 알리기 어렵습니다. 아기랑 아이를 돌보는 어버이라면 더 깊이 아기랑 아이를 살필 줄 알아야 하고 마음으로 알아차려야 해요. 아기나 아이가 보이는 여러 모습을 바탕으로 몸이 어떠한가도 깨달아야 하지요.


  ‘집짐승·애완동물·반려동물’이라는 이름에는 우리 곁에 있는 여러 목숨을 새로우면서 한결 깊거나 넓게 돌아보려는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길벗짐승·삶벗짐승’ 같은 이름을 새롭게 지어 봅니다. 여기에 ‘한집짐승·한식구짐승’ 같은 이름도 지어 볼 만하지 싶어요. 꼭 ‘짐승’이라는 말을 넣지 않아도 될 테니, ‘한집벗’이나 ‘한집님’이나 ‘한집지기’ 같은 이름을 써도 잘 어울리지 싶어요. 새롭게 사랑하고 곱게 아끼며 즐겁게 한집을 이루며 살아가기에 서로 따사롭고 넉넉할 이름을 그리고 싶어요.


  아픈 곳 없이 함께 살면 좋겠어요. ‘길벗개’나 ‘길벗고양이’도, ‘한집개’나 ‘한집고양이’도, 튼튼하고 씩씩하게 뛰놀고 노래하면서 마음껏 삶을 꽃피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10.28.흙.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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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 있는 중심 - 미완의 시학
김정란 지음 / 최측의농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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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26


아직도 문학평론은 속없이 딱딱하기만 한데
― 비어 있는 중심
 김정란 글
 최측의농간, 2017.9.7. 17000원


내가 문학비평을 시작한 이유는 한국 문학비평가들이 시를 너무나 읽을 줄 모른다는 불만 때문이었다. 나는 단지 시를 잘 읽어 보고 싶었을 뿐이다. (6쪽)


  1980년대에 국민학교를 다니고, 1990년대 첫무렵에 고등학교를 다니기까지, 시나 소설이라고 하는 문학은 대학교수나 전문 평론가만 다룰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대학교수나 전문 평론가 아닌 사람 가운데 시를 말하거나 소설을 따지는 목소리는 들을 일이 없었어요. 국민학교라는 곳은 이곳대로 교과서 틀로 동시하고 동화를 재거나 따집니다. 중·고등학교라는 곳은 이곳대로 교과서나 참고서 언저리에서 시하고 소설을 가르거나 자릅니다.

  더욱이 매우 어려운 낱말, 거의 다 한자말이나 영어나 프랑스말을 섞은 비평이나 평론만 있어요.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수수하게 쓰는 쉬운 한국말로 시나 소설이라는 문학을 다룬 글은 지난날에 거의 찾아볼 길이 없었어요. 이는 오늘날에도 엇비슷하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을 수수한 삶말이나 살림말로 길어올리는 분은 손가락으로 꼽기 힘들다고 할 만하다고 느껴요.


언어란 얼마나 저절로 그 지시성 이상의 의미를 뛰어넘어 그것의 수천 년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일까. (18쪽)

여성성의 진정한 의미는 성적 에로티시즘이 아니다. (52쪽)

‘잘 먹고 잘 살기’의 신화는 절대적인 물질적 부족은 해결했지만, 그 대신 끝도 없는 상대적 결핍감과, 망가져 치유불가능한 환경을 인간에게 안겨 주었다. (58쪽)


  우리는 시를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요? 우리는 동시나 동화를, 소설이나 수필을, 숱한 문학을 어떻게 읽으면 될까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시집 앞뒤에 붙은 추천글은 숱한 일본 한자말하고 영어를 뒤섞은 전문 비평이나 평론입니다. 비평이나 평론은 도무지 이 땅에 발을 붙이려 하지 않아요. 집에서 마을에서 가게에서 논밭에서 바다에서 골짜기에서 주고받는 말로는 문학도 평론도 할 수 없다는 듯이 여기는 한국 사회 흐름이지 싶어요.

  어쩌면 이런 모습은 속 없는 모습일 만합니다. 알맹이는 없이 껍데기만 시끌벅적하다고 할 만합니다. 속살을 가꾸지 않고 쭉정이만 한들거리는 모습일 수 있어요.


고려 속요의 민중적 명랑성은 조선시대 유교 이데올로기 밑에서 질식해 버린다. 그러나 여성이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이 사회에서도 재능 있는 여성들은 숨어서 조용히 자신들의 문학세계를 가꾸어 왔다. (122쪽)

80년대에 우리는 지독히 불행했다. 그 불행한 시대에 우리는 다행히도 뛰어난 시인들을 얻었다. 그러면 80년대는 위대한 시대이다. 아니다, 이 말은 거짓이다. 80년대에조차 뛰어난 시를 쓴 시인들은 위대하다, 라고 고쳐 말해야 한다. (144쪽)


  김정란 님은 시를 시답게 읽고 싶어서 스스로 시를 비평하는 글을 써 보았다고 합니다. 숱한 교수하고 전문가는 도무지 시를 제대로 안 읽는구나 싶어서 ‘남 탓’을 멈추고서 스스로 시를 말해 보려고 했대요.

  시나 소설을 다룬 비평하고 평론이 어렵다거나 뜬구름을 잡는다거나 뭔 말인지 모르겠다고 느낄 분은 꽤 많을 수 있습니다. 또는 아예 비평이나 평론하고는 담을 쌓는 분이 많을 수 있어요. 비평이나 평론은 마치 ‘그들끼리 놀며 텃힘을 부리는 앞마당’일는지 모르지요.

  《비어 있는 중심》(최측의농간, 2017)은 문학은 있되 문학비평이나 문학평론은 좀처럼 없는 듯 보이는 한국 사회에서, 이제부터는 속·알맹이·속살을 밝히고 싶은 작은 몸짓을 드러내는 비평책 또는 평론책입니다.


양선희는 거침없이 세계를 벗겨 보인다. 그런데 그녀는 세계를 벗기면서 자기도 벗는다. 세계는 신비롭지 않다. 시인도 신비롭지 않다. (249쪽)

신화는 인간이 자연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인식을 소유하고 있었을 때 인간이 자연에 대해 알고 있었던 지식의 구조이다. (451쪽)


  비평이나 평론을 읽자면 먼저 문학을 읽어야 합니다. 문학을 읽지 않고는 누가 들려주는 비평이나 평론을 함께 느끼거나 헤아리기는 어렵거든요. 그런데 잘 쓴 비평이나 평론이라면, 이 비평이나 평론을 읽고서 ‘이 비평이나 평론을 받은 그 문학이 궁금한걸?’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아니, 비평이나 평론이 제자리를 찾으려 한다면, 아직 어느 문학을 만나거나 읽지 못한 이웃들한테 ‘이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멋지거나 사랑스러운 문학을 함께 읽어 보면 어떨까요?’ 하고 손을 내미는 글이어야지 싶어요.

  사람들이 다 읽거나 널리 읽은 작품을 놓고서 쓰는 비평이나 평론을 넘어서, 아직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거나 알지 못하거나 가까이하지 못한 문학을 비평가나 평론가 스스로 캐내어서 가장 쉬운 말과 아주 부드러운 말씨로 조곤조곤 속삭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비평도 글이에요. 평론도 글이지요. 시나 동화나 소설만 글이 아닙니다. 비평이나 평론도 글이면서 문학이에요. 낯선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는 좀 접어놓고서, 어렵거나 딱딱한 일제강점기 냄새를 풍기는 일본 말씨하고 번역 말씨는 부디 내려놓고서, 싱그러이 살아서 펄떡이는 수수한 삶말이나 살림말을 찾아서 쓰는 글이 비평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따사로운 손길로 보듬는 사랑말로 들려주는 글이 평론이 되어야지 싶어요.


일은 일어난다. 그대가 사물에게 영혼을 부여하는 방법을 알기만 하면.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를 조종하는 모든 끈들을 끊어버린다. 우리는 세계 앞에서 작은 초인들로서 일어선다. 배경은 여전히 좌절이다. 그러나 어떤 자들은 그것을 존재의 상승을 위한 도약대로 사용할 줄 아는 것이다. (467쪽)


  오랜만에 새옷을 입고 《비어 있는 중심》이 다시 태어납니다. 묵은 평론책이 다시 태어난다는 뜻이라면 새로운 평론책이 그다지 눈에 안 뜨인다는 소리일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아직 한국 문학에서 평론은 살아나지 못했다는 소리일 수 있어요.

  복판이라고 하지만 텅 비어 복판 구실을 못하는 문학이나 평론이 아닌, 복판에서는 복판대로 알맹이 구실을 하고, 바깥이나 언저리에서는 바깥이나 언저리대로 살가운 이야기꽃이 흐드러지는 문학이나 평론이 자랄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아이들 입이랑 몸에서 터져나오는 웃음노래 같은 어린이문학이 깨어나고, 어른들 손이랑 발에서 길어올리는 사랑노래 같은 어른문학이 피어나면 좋겠어요. 비평은 웃음노래를 먹으면서 자라고, 평론은 사랑노래를 마시면서 크겠지요. 2017.10.22.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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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여행하다 - 한복여행가, 히말라야에서 스페인까지
권미루 지음 / 푸른향기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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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22



우중충한 밀라노에서 해사한 한복 입는 즐거움

― 한복, 여행하다

 권미루 글

 푸른향기 펴냄, 2017.8.8. 15000원



“이탈리아에서 한복을 입으면 어떨까요?” “좋지! 우리 딸 한복 잘 어울리잖아.” 어머니의 대답은 매우 경쾌했다. (30쪽)



  지난날에는 이 지구별에서 겨레마다 스스로 땅을 일구고 숲이나 들이나 바다에서 먹을거리를 몸소 얻으면서 집을 지으며 살림을 가꾸었어요. 지난날에는 지구별 모든 사람이 집이나 밥이나 옷을 언제나 손수 지었지요. 이런 살림살이에서는 어느 겨레나 저마다 짓는 옷이 다르기 마련입니다.


  요즈음 이 지구별에서는 어느 나라 어느 겨레를 보아도 옷차림이 비슷합니다. 요즈음은 도시문명 사회가 되면서 집이나 옷을 손수 짓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돈을 벌어서 가게에서 옷을 사다가 입는 흐름입니다. 이러면서 이제는 어느 나라 어느 겨레라 하더라도 갖춰서 입는 옷이라든지 일하며 입는 옷이 엇비슷해요.



아무렇게나 입어도 괜찮은 면 한복과 맨발은 아주 잘 어울렸다. 무명저고리에 구김이 갔지만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갑자기 한복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86쪽)


한복여행을 하면서 가장 관심을 가졌던 것은 바로 그 나라의 전통옷이었다. 이상하게 전통옷을 보면 그 나라 사람들의 과거의 역사, 가치관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166쪽)



  《한복, 여행하다》(푸른향기,2017)를 쓴 권미루 님은 세계여행을 나서면서 일부러 한복을 챙겨 입었다고 합니다. 세계여행이 아닌 한국여행을 할 적에도, 또 골목마실을 할 적에도 부러 한복을 차려 입었다고 해요.


  권미루 님은 어릴 적부터 한복을 즐겁게 입었대요. 이녁 어머니도 권미루 님한테 한복을 즐겁게 입히셨을 테고요. 늘 입는 옷이다 보니 여느 때에 번거롭다는 생각을 안 한다고 합니다. 곱게 갖추거나 차려서 입고 나들이를 가는 길이라면 으레 한복차림이 되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고운 빛깔로 지은 한복을 입고 골목이나 마을이나 여러 나라를 누비면서 ‘날개처럼 입은 옷’이 참으로 날개옷이 되는구나 하고 느낀다고 해요.



밀라노의 하늘은 금세 비가 올 것처럼 우중충하고 어두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패션의 도시이지만 사람들 대부분 어두운 색감의 옷을 입고 있었다. 무채색으로 차려입은 사람들 속에서 보라회색의 풍성한 한복치마가 흔들릴 때마다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 와 닿았다. (35쪽)



  지난날 지구별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겨레마다 옷을 손수 지어서 입을 적에는 참으로 해사하거나 눈부신 빛깔이 어우러지는 옷을 입기 마련이지 싶습니다. 오늘날에도 조그맣게 모여서 문명하고 많이 떨어진 곳에서 살아가는 겨레는 해사하거나 눈부신 빛깔이 어우러지는 옷을 손수 지어서 입습니다.


  그래요, 옷을 손수 지어서 입는 겨레는 참말로 해맑고 환한 옷을 입어요. 이와 달리 도시문명으로 치달을수록 해맑거나 환한 옷하고는 퍽 동떨어지기 마련입니다. 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입히는 옷이든, 공공기관이나 공장이나 여느 회사에서 어른들이 입는 옷이든, 으레 무겁거나 딱딱하거나 어두운 빛깔이나 결이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아이들더러 ‘학교옷’을 아이들이 손수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해서 입어 보라고 한다면, 공공기관이나 공장이나 여느 회사에서도 어른들이 일하러 다닐 적에 입을 ‘일옷’을 손수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해서 입자고 해 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어쩌면 도시문명 사회에서도 새롭게 눈부신 옷물결이 일렁이지 않을까요?



자신의 문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의 스타일도 존중해 주었다. 우리는 서로의 공통점과 다른 점에 대해 토론하고 공감했다. (258쪽)



  《한복, 여행하다》를 읽으면서 글쓴이 발자국을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고운 옷을 입으며 고운 마음을 여러 나라 이웃하고 나누고 싶은 뜻을, 또 옷만 고운 날개옷이 되기보다는 마음이 함께 고운 날개넋이 되어 다 다른 겨레나 나라가 서로 어깨동무하기를 바라는 뜻을 돌아봅니다.


  겨레마다 고유한 옷(텃옷·전통옷)을 입을 적에는 제 겨레를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 겨레를 다 다른 아름다움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하는 마음을 키울 수 있겠구나 싶어요. 겨레나 나라마다 고유한 말(텃말·겨레말·나라말)을 아끼거나 북돋울 적에는 제 겨레나 나라를 사랑할 뿐 아니라 이웃 나라나 겨레가 서로 다른 대목을 높이 사면서 어깨동무하는 마음을 북돋울 만할 테고요.


  겨레마다 옷차림이 달랐습니다. 겨레는 어느 한 터에 뿌리를 내려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아우르는 이름이니, 아무래도 어느 한 터에 뿌리를 내릴 적에는 이 터마다 날씨가 다르고 철이 다르며 숲이나 살림이 달라서 옷차림이 모두 달랐겠지요.


  다른 이웃을 헤아리면서 우리 스스로 사랑하는 길에 서는 걸음걸이로 한복을 입는다는 마음이란 한복처럼 곱겠지요.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이웃을 아끼고 싶은 마음으로 한복을 갖추어 입는 몸짓이란 한복마냥 따사롭겠지요. 옷을 곱게 갖추면서 마음이며 생각을 곱게 가꾸는 살림살이가 피어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2017.9.12.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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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브 아프리카
월레 소잉카 지음, 왕은철 옮김 / 삼천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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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19



책만 읽어서는 아프리카를 알 수 없다

― 오브 아프리카

 월레 소잉카 글

 왕은철 옮김

 삼천리 펴냄, 2017.2.3. 16000원



  우리는 우리가 살지 않는 고장을 놓고서 잘못 알거나 엉성하게 알거나 엉뚱하게 알 때가 있습니다. 서울에서 사는 사람이 전남 고흥이나 경북 봉화 같은 고장이 어떠한가를 제대로 짚거나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부산에서 사는 사람이 인천이나 광주 같은 고장이 어떠한가를 낱낱이 살피거나 헤아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한국에 살면서 막상 한국이 크게 보아 어떠한 고장이 모인 나라인가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학교에서 교과서로 가르치는 사회나 역사 과목으로만 한국을 알 수 있고,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여러 고장을 그저 책이나 교과서나 방송이나 인터넷 지식으로만 어렴풋하게 짚을 수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한국하고 이웃한 일본이나 중국이라는 나라를 얼마나 알까요? 일본이나 중국에 몇 차례 여행을 다녀왔다면 일본이나 중국을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 해를 살아 보았다면, 스무 해쯤 살아 보았다면, 그 나라를 제법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두 나라 사이에 벌어진 살인적인 갈등 탓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자원이 고갈되어 갔다. 소년병으로서 온갖 잔혹 행위를 저지르며 성장한 젊은 세대의 윤리적 파멸은 말할 것도 없었다. (25∼26쪽)


아프리카에는 배타주의와 맞물린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다. 바로 국경 문제다. 국경은 배타성을 의미한다. 대륙에서 미래에 발생하게 되어 있는 갈등의 오염된 씨앗이 1884년의 악명 높은 베를린회의에서 뿌려졌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7쪽)



  《오브 아프리카》(삼천리,2017)를 읽는 내내 아프리카라는 땅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책을 다 읽고 나서도 한참 동안 아프리카라는 곳을 헤아려 보았습니다. 그러나 도무지 무엇이 무엇인가를 종잡기 어렵더군요. 저는 아프리카라는 곳을 가 본 적이 없습니다. 가 본 적이 없으니 아프리카라는 데에서 산 적조차 없어요. 아프리카라고 하는 무척 넓은 땅에서 태어난 사람을 만난 일도 없을 뿐 아니라, 그곳 사람들이 쓰는 말도 모릅니다.


  제가 아는 아프리카란, 《오브 아프리카》 같은 책처럼, 참말로 책으로 읽어서 아는 아프리카입니다. 때로는 영화로 보아서 알고, 때로는 유튜브 같은 곳에서 보아서 아는 아프리카예요. 두 다리로 밟아 보지 않은 지식이고, 두 눈으로 지켜보지 않은 그야말로 겉훑는 정보만 제 머리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아프리카를 ‘안다’거나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저 책 몇 권 읽은 지식으로 아프리카를 섣불리 말해도 될까요?



설상가상으로, 외국 열강과 초국적 기업들은 독재정권과 상대하기를 좋아한다. 기관을 통한 감독이 느슨해서 계약이 훨씬 더 빨리 진행되기 때문이다 … 아프리카 대륙을 근대 세계의 주된 흐름에 합류시키려면 ‘강력한 인물’이 필요하다는 신화가 만들어지고, 그것은 통상 사절이 떠받드는 복음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주의 신봉자들은 이단자이자 변절자로 매도되고 만다. (32, 33쪽)


선구적인 진보 인사들이 인종적인 경험이 있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안에서조차 수단 정부의 인종 정책에 대해 침묵을 지키거나 변명하는 이유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37쪽)



  《오브 아프리카》를 읽는 내내, 또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수많은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제가 아는 아프리카란 그저 한 줌짜리입니다. 게다가 손수 밟거나 다니거나 살펴본 지식마저 아닙니다.


  이 책을 쓴 월레 소잉카 님은 1934년에 태어났고, 1986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는데, 이는 아프리카에서 글을 쓰는 사람으로는 처음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이 책을 읽을 무렵에야 이 대목도 처음으로 알았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고 하는 월레 소잉카 님 문학이나 책을 본 적도 만난 적도 읽은 적도 없습니다.


  월레 소잉카 님은 ‘아프리카 바깥에서 아프리카를 가리키며 읊는 말’이 얼마나 아프리카 삶이나 터전이나 사람하고 동떨어지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프리카가 떠안은 짐이나 굴레를 아프리카에서 스스로 풀거나 짊어질 수 있어야 할 텐데, 아프리카 바깥에서 너무 ‘섣부른 말’이 넘친다고 이야기해요. 게다가 아프리카라는 곳에서도 나라 우두머리(정치 지도자) 사이에 말썽거리가 툭툭 튀어나온다고 합니다.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 아주 쉽게 독재정치가 불거지고, 이 독재정치는 끔찍한 싸움으로 번지며, 이 끔찍한 싸움은 이른바 ‘인종청소·소년병’ 따위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당시 흑인들에게 매독 균이 주입되었고, 일부에게는 치료도 해주지 않았다. 그것은 북반구에서 행해진 의학적 연구에서 가장 잔인한 사건 중 하나였다. 그렇게 마음대로 쓰고 버릴 수 있는 대상은 당연히 노예의 자손들이었다. (107쪽)


잔자위드 습격자들이 저지른 인종청소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이 거듭 증언했듯이, 그들이 즐겨 외치던 소리가 역사적인 혐오의 소리인 “노예들을 죽이자!”였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지적할 필요도 없겠다. 미국의 깊숙한 남부에서 KKK 단원들도 밤에 돌아다니며 비슷한 소리를 질렀다. 그들이 “검둥이들을 매달아 죽이자!” “노예들을 모조리 죽이자!”라고 소리를 질렀다는 사실은 …… (119쪽)



  우리는 《오브 아프리카》 한 권을 읽는다고 해서 아프리카를 알거나 읽을 수 없습니다. 아주 작은 조각을 살짝 맛보거나 엿본다고만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아프리카를 아주 조금 훑는다고 할 수 있듯이, 한국에서 사는 동안 우리 이웃 고장이 어떠한가를 놓고도 아주 조그맣게 들여다본다고 할 수 있을 테지요.


  평택을, 강정을, 밀양을, 성주를, 우리는 얼마나 살갗으로 느끼면서 생각할 만할까요? 핵발전소나 핵폐기물처리장 예정지로 뽑혔다가 그 고장 사람들 손사래질로 겨우 물리친 일을 놓고서, 그 고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는 분들은 이러한 삶과 살림을 어느 만큼 살갗으로 느끼면서 생각할 만할까요?


  제가 사는 전남 고흥에서는 요즈막에 ‘경비행기 실험장 유치 강행’이라는 행정 때문에 힘겹습니다. 다른 고장에서는 드넓은 갯벌을 메워 땅으로 바꾼 데에 다시 바닷물이 흐르도록 해서 예전 같은 갯벌로 되돌리는 정책을 꾀합니다. 갯벌을 메워 논으로 쓰는 보람보다는, 갯벌 그대로 있을 적에 경제가치를 비롯한 모든 대목에서 훨씬 나은 줄 이제서야 깨닫거든요. 그렇지만 전남 고흥에서는 바로 그 ‘갯벌을 메운 땅’을 다시 갯벌로 돌리려는 정책이 아닌, 경비행기 실험장을 유치하려는 행정이 갑자기 나타나요.


  이런 일을 놓고도 고흥이라는 고장에 사는 사람이나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은 너무나 다르게 느낄 수밖에 없어요.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시달릴 마을사람 삶을 다른 고장에서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드넓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갯것을 언제나 잔뜩 얻어서 넉넉한 살림을 이루던 지난날을 되찾지 못하는 아픔을 다른 고장에서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책만 읽어서는 아프리카를 알 수 없습니다. 신문만 읽어서는 이웃 고장 이야기를 알 수 없습니다. 몸으로 부대끼기도 하고 어깨동무도 해야 하고, 말을 섞으면서 오래도록 지켜보기도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서로 이 땅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대목을 헤아릴 수 있어야지 싶어요.


  여기에 아프리카가 있고, 아시아가 있으며, 한국이 있습니다. 여기에 작은 시골 군이 있고, 그 군에서도 더 작은 읍과 면이 있으며, 그 읍과 면에서도 더 작은 마을이 있습니다. 서울이고 시골이고 작은 마을이 작으면서 평화로울 적에 아름답고, 이 아름다움이 바탕이 되어 사이좋은 민주와 평등이 싹틀 수 있으리라 느껴요. 마을을 알려고 할 적에, 마을을 바라보려고 할 적에, 마을에서 사는 이웃하고 손을 맞잡으려고 할 적에, 우리는 사람됨을 되찾는 착한 마음결로 삶을 지으리라 봅니다. 2017.9.3.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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