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맛
전순예 지음 / 송송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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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57


미역을 처음 본 작은오빠, 잣 먹고 살아난 아지매
― 강원도의 맛
 전순예
 송송책방, 2018.5.28.


비닐하우스도 없고 냉장고도 없던 시절, 풋고추석박김치는 가을 고추를 거둘 때 고추를 섶째로 뽑아 그늘진 곳에 잘 보관해야 담글 수 있었습니다. (19쪽)


  1945년에 강원 평창 어두니골에서 흙지기 딸로 태어난 분은 어머니를 도와 여섯 살부터 부엌일을 했다고 합니다. 어릴 적 읽은 동화책 한 권은 ‘글 쓰는 길’을 가고 싶다는 꿈씨앗이 되었고, 어느새 《강원도의 맛》(전순예, 송송책방, 2018)이라는 책 하나를 내놓는 살림으로 이어집니다.


작은오빠는 동원훈련이 끝나는 날, 미역을 새끼줄로 꽁꽁 묶어 억지로 들어서 멜 수 있는 만큼 많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새벽마다 미역을 주워 말리느라고 훈련이 힘든 줄도 모르고, 한 달이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고 지냈다고 합니다. (26쪽)

삶아서 어린 손주까지 둘러앉아 먹으려고 다들 하나씩 알을 들고 깠는데 알이 꿩병아리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답니다. 할아버지는 꿩한테 너무 미안하고 손주 보기가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때부터 꿩고기는 절대 먹지 않고, 겨울이면 꿩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산속에 콩이나 곡식을 가끔씩 뿌려 준다고 합니다. (40쪽)


  《강원도의 맛》은 강원도 시골순이 삶을 고스란히 담는 맛책입니다. 강원도 시굴순이로서 어릴 적부터 어머니 곁에서 지켜보고 거들고 배우던 살림에 깃든 맛을 다루는 책이에요. 글에는 드문드문 강원말이 깃드는데, 아마 평창 어두니골이란 두멧자락에서 밥살림을 물려받는 동안 찬찬히 스며든 삶말일 테지요. 강원도 사투리라기보다는 손수 지어서 손수 누리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말인 삶말이나 살림말이라 해야 알맞지 싶습니다.

  그런데 《강원도의 맛》에는 어떤 밥이 더 맛있다든지, 어떤 밥짓기를 해 볼 만하다는 이야기는 잘 안 나옵니다. 맛에 얽힌 삶을 자분자분히 들려줍니다. 군사독재가 서슬퍼렇던 무렵 동원훈련에 끌려가야 했던 작은오빠가 바닷가에서 미역을 처음 보고는 놀라서 이 미역을 어떻게든 말려서 멧골집으로 가져가서 온식구한테 맛을 보이려는 마음으로 고된 나날을 견딘 이야기가 흐릅니다. 멧골에서 나는 나물로 떡을 해 먹으면서 몸이 살아난 이웃 할아버지 이야기가 흐르고, 꿩을 잡고 꿩알을 얻어서 좋다며 손주를 불러 함께 먹으려는데, 그만 꿩병아리가 거의 자란 알이라 너무 창피하고 미안한 나머지 이다음부터는 꿩고기나 꿩알은 안 먹은 어느 할아버지 이야기가 흐릅니다.


송기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너무 예뻐서 먹어버리기가 아깝습니다. 아주 부드러운 솔 향이 나는 달착지근하고 매끌매끌한 국수송기는 입안에서 살살 녹습니다. 세상에서 어떤 맛도 ‘송기 맛’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맛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송기는 ‘송기 맛’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73쪽)


  글쓴이 아버님이 온 하루를 다 쏟으면서 더러 삶아 주던 송기국수는 매우 값진 먹을거리였다고 해요. 솔껍질을 벗기고 솔속살을 찬찬히 벗겨서 삶는 송기국수는 더없이 품을 들여야 비로소 얻는 국수 한 그릇이었다고 합니다. 달리 어떻게 말로 그리기 어려워 ‘송기 맛’이라고만 말한다는 송기국수라고 해요.

  참말 그렇지요. 달걀이 맛있으면 ‘달걀 맛’입니다. 김치가 맛나면 ‘김치 맛’이지요. 달리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모든 나물은 저마다 맛이 달라 이 나물에 대고 다른 나물 이름을 따서 가리킬 수 없습니다. 곤드레는 곤드레 맛이요, 머위는 머위 맛이며, 달래는 달래 맛입니다.


솔향기같이 향긋한 잣송이 향기가 집안에 가득합니다. 다듬잇돌에다 잣송이를 놓고 작은 망치로 때려 바수었습니다. 잣을 까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잣알이 터져 껍질과 섞인 것을 한 움큼 골라서 찹쌀을 조금 넣고 죽을 끓였습니다. 그동안 입맛이 없어 맛이라고는 몰랐는데, 아주 고소한 맛이 씹을 것도 없이 입에 떠 넣으면 술쩍 넘어갑니다. 오랜만에 배가 벌떡 일어났습니다. (309쪽)


  입맛이 없어 끙끙 앓던 이웃 아지매 한 분은 어느 날 ‘청설모가 가지를 뚝뚝 끊어 놓은 잣방울’을 보았다고 해요. 다른 밥은 도무지 안 넘어가던 무렵인데, 잣내음이 코를 찔러 잣방울가지를 알뜰히 이고 집으로 가져가셨다는데, 이날 밤부터 청솔모가 집을 에워싸면서 창호문을 갉고 시끄럽게 울었대요.

  청설모가 끊어 놓은 잣방울가지였으니 웬만큼 다시 마당에 던져 놓으니 청설모가 부리나케 도로 물어 갔고, 남은 잣방울가지에서 날마다 쉬잖고 잣방울을 바수어 잣으로 죽도 하고 알맹이만 따로 씹어서 먹기도 했답니다. 이렇게 겨울을 나니 이듬해 봄에 아픈 데가 말끔히 사라졌대요.

  어쩌면 《강원도의 맛》은 강원도 멧골마을에서 살던 사람들이 달리 약도 병원도 학교도 없는 터전이라 하지만, 손수 짓고 가꾸면서 밥 한 그릇 나누고 이야기 한 자락 주고받던 살림을 고이 품은 책일 수 있습니다. 숲살림을 품으면서 밥살림을 천천히 익힌 나날을 그러모았다고 할 만해요. 오늘 우리는 어떤 터전에서 어떤 살림을 품으면서 어떤 밥 한 그릇을 지어서 나누는 하루일까요? 2018.7.17.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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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 씨의 말 1 - 하하하, 내 마음이지 요코 씨의 말 1
사노 요코 지음, 기타무라 유카 그림, 김수현 옮김 / 민음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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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56



내가 못생겼다고? 거울이나 보고 얘기하시지!

― 요코 씨의 말 1 하하하, 내 마음이지

 사노 요코 글·기타무라 유카 그림/김수현 옮김

 민음사, 2018.4.20.



못생겨도 쾌활하게 남들 눈을 똑바로 봐 가며 살아온 나. “못생겼으니 이쪽 보지도 마.” 소리를 들어도, “거울이나 보고 얘기하시지!” 하고 받아쳐 주던 나. (사람들이 성형) 수술 후에는 다들 애매하고 비슷한 얼굴이 된다. 아아, 세상이 밋밋해진다. 요철이 있고 그래야 비로소 세상살이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마음에 안 들어. (32∼34쪽)



  여기 못생긴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못생긴 사람이 아닌, 둘레에서 못생기다고 놀리는 말을 듣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 이때에 못생긴 사람은, 아니 둘레에서 못생겼다며 놀리는 말을 듣는 사람은 어떻게 대꾸하면 좋을까요?


  그림책을 그리던 사노 요코 님은 이제 이승에 없지만, 사노 요코 님이 남긴 이야기는 있어서, 이 이야기에 그림을 새로 붙인 《요코 씨의 말》(사노 요코·기타무라 유카/김수현 옮김, 민음사, 2018)이라는 책이 1·2권 나란히 나왔습니다. 두 권 가운데 첫째 권을 펴면 글쓴이가 얼마나 스스로 씩씩하게 삶을 지어 왔는가를 새삼스레 엿볼 수 있습니다.



숙모에게 “요코, 나이도 그만큼 먹고 아이도 있으면서 엉덩이 딱 붙는 옷이 뭐니. 차도 튀는 노란색. 좀 평범한 색으로 하지 않고.” 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하하하, 내 마음이지. 누구 피해라도 준대?” 하고 웃었답니다. 듣는 말은 똑같았는데 어째서 이때는 “하하하, 내 마음이지.”라고 대답할 수 있었던 걸까요. 저는 언제나 “하하하, 내 마음이지.”라고 말하고 싶어요. (54∼55쪽)



  사노 요코 님은 할머니로서 저승으로 가셨으니 저는 “사노 요코 할머니”라 이릅니다. 사노 요코 님 그림책을 좋아하는 우리 집 아이들한테도 이녘은 “사노 요코 그림책 할머니”입니다. 그러니까 사노 요코 할머니는 젊거나 어릴 적부터 둘레 눈치나 눈길이나 말은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대수로운 눈이나 말이란 바로 스스로 마음에서 길어올릴 노릇이라고 여겼대요.


  이리하여 ‘못생겼다’라는 말은 남이 나한테 할 수 없고, 내가 스스로 미워하는 마음일 적에 스스로 하는 말이라고 합니다. 누가 아무리 “넌 참 못생겼어!” 하고 혀를 쪽 내밀든 말든 쳐다볼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저 하하하 웃어넘기면서 “너야말로 거울이나 보시지!” 하고 대꾸하면서 제 할 일을 하면 된다고 합니다.



나는 아코와 둘만 있을 때 “왜 테루랑 각각 떨어져 살지 않아?” 하고 물었다.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있지, 그 애가 없으면 살아가는 데에 소소한 탄력 같은 게 없어져서 허전할 것 같아.” 게으른 사람만 있거나 성실한 사람만 있다면 세상은 완벽해지지 않는다. (100∼101쪽)



  일본사람은 흔히 수수한 차림새를 좋아한다고들 말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본 살림살이를 못마땅히 여기는 일본사람이 제법 있다고 합니다. 성형수술을 하면서 사람들이 다들 비슷비슷한 모습이 되기보다는, 저마다 다르게 태어난 얼굴이나 모습 그대로 스스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길을 바라는 사람들이 있다지요.


  사노 요코 할머니도 이런 이웃 가운데 한 분이지 싶습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맞추어 주지 않고, 스스로 꿀 꿈을 그립니다. 남들이 가는 길대로 좇지 않고, 스스로 짓고 싶은 살림을 생각하면서 한 걸음씩 내딛습니다. 게다가 씩씩하게, 또 노래하고 춤추는 신나는 걸음으로, 또 까르르 하하하 활짝 빙그레 웃는 몸짓으로.



“나는 네 큰어미 간병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단다.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진심으로 네 큰어미에게 감사하고 있단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사람의 일생을 관통하는 모순에 혼란을 느꼈다. 소박한 생활을 해 온 큰아버지가 다다른 경지가 나를 동요시켰다. (172∼174쪽)



  《요코 씨의 말》을 읽다 보면, 예쁜 우표를 모으는 맛에 푹 빠졌다가, 이 예쁜 우표를 침을 발라서 글월을 띄우는 기쁨에 푹 빠진 이야기도 흘러요. 그런데 어느덧 할머니 나이가 되어 머리가 가물가물한 나머지, 그만 사노 요코 할머니는 이녁 스스로도 모르게 ‘사노 요코가 사노 요코한테 편지를 썼다’지요. 우체국 일꾼은 그저 빙그레 웃으며 ‘사노 요코가 사노 요코한테 쓴 편지’를 가져다주었다 하고요.


  이런 일을 놓고 언뜻 보기에 ‘건망증도 대단하구려!’ 하고 여길 수 있지만, 사노 요코 할머니는 이 또한 대수로이 여기지 않으면서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 뒤로도 더러 ‘나도 모르게 내가 나한테 편지를 썼다’고 해요. 나도 모르게 내가 나한테 쓴 편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을까요? 아마 그 이야기는 《요코 씨의 말》이라는 책에 알게 모르게 깃들었지 싶습니다. 2018.7.1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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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 늘리는 법 -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땅콩문고
박일환 지음 / 유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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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55



살림을 짓는 삶터에서 말꽃이 핍니다

― 어휘 늘리는 법

 박일환

 유유, 2018.3.24.



말을 안다고 할 때는 말에 담긴 문화나 정신의 뿌리까지 알아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보니 잘못 쓰거나 쓰지 말아야 할 말까지 마구잡이로 쓰는 일이 발생한다. (138쪽)


성희롱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까지는 여성 앞에서 외모에 관해 성적인 표현을 하거나 음담패설을 하는 것,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 정도는 짓궂은 장난일이언정 범죄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26쪽)



  일본 지식인은 1800년대에 서양을 배우려고 무엇보다 말을 곰곰이 살폈다고 합니다. 일본사람한테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독일말을 그대로 책에 찍어서 읽힐 수 없을 테니, 이런 바깥말을 제 나라 사람들이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낱말 하나에 온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태어난 ‘일본 한자말’ 가운데 하나로 ‘문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를 어느 자리에서나 흔히 쓰지만, 이 낱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하고 살핀 끝에 일본 지식인이 지었는지를 가늠하지는 못합니다.


  《어휘 늘리는 법》(박일환, 유유, 2018)을 읽으면 “말을 안다”고 하려면 “말에 담긴 문화나 정신”이 어떤 뿌리인가를 함께 알아야 한다고 밝힙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문화나 정신, 그러니까 살림하고 넋을 모르고서야 말을 안다고 할 수 없어요. 한 나라나 겨레뿐 아니라, 한 고장이나 마을이 살아온 결이나 넋을 모른다면 껍데기로만 말을 안다고 하겠지요.



방과 후에 모든 학생이 학교에 남아서 학습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 자율이라는 말에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타율 학습’이 아닌 ‘자율 학습’이라는 말을 사용한 까닭은 그렇게 해야 자신의 부당한 처사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40쪽)


학생 보호자로 아버지와 형을 올려놓은 ‘학부형’이라는 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다. 학부형을 버리고 ‘학부모’를 쓰는 것은 단순히 낱말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낡은 인식과 결별하는 행위이다. (52쪽)



  ‘성희롱’이라는 말이 태어나고, ‘성추행’이라는 말이 태어나며, ‘성폭력’이라는 말이 태어납니다. 이런 말이 태어나기 앞서 가부장제가 휘두르는 폭력이나 권력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어려웠습니다. 말을 새롭게 지어서 쓰면서 우리 마음이 자라고, 우리 삶이 거듭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 갇히거나 묶인 사슬이 단단합니다. 《어휘 늘리는 법》이 찬찬히 짚듯, ‘자율 학습’은 자율이 아닌 타율로 하는 일입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라 해야 옳지, ‘학부형’은 옳지 않습니다. 교사는 ‘교사’일 뿐, 스스로 ‘선생님’이라는 ‘-님’붙이 말을 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얄궂다 싶은 말이 안 사라질까요? 외려 얄궂다 싶은 말은 왜 더 불거지기도 할까요? 지난날 ‘민주정의당’이 민주나 정의를 지켰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명박·박근혜를 내세운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은 참말로 이 나라가 한나라 되도록 하거나, 새로운 누리가 되도록 하거나, 자유로운 한국이 되는 길을 걸었을까요? 정당이 한 일을 섣불리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만, 이름하고는 동떨어진 길을 걸은 발자국이 짙다고 말할 수 있어요. 스스로 잘못하는 일을 가리거나 숨기려고 ‘보거나 듣기 좋은 말’이라는 껍데기를 쓴다고 할 만합니다.



수입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을까?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차원에서 일본말 몰아내기 운동은 열심히 했지만 서양말을 우리말로 바꾸려는 노력은 그에 비해 한가한 편이었다. (117쪽)


어휘 누락은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이 매우 심한 편인데, 전문가도 알기 힘들 것 같은 어려운 전문어는 시시콜콜 찾아 올린 반면 일상어나 생활어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외면하고 있다. (120쪽)



  중국을 섬기던 봉건계급 조선에서 쓰던 중국 한문,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 군홧발로 퍼진 일본 한자말, 뒤이은 군사독재에서 억눌리면서 퍼진 영어, 이렇게 세 갈래 말이 한국말에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치우려는 데에는 조금 애썼지만, 중국 한문은 높임말로 여기는 버릇을 아직 걷어내지 못하며,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영어를 알맞고 쉬우며 즐거운 한국말로 옮기는 일’은 엄두조차 못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휘 늘리는 법》이라는 책은 우리가 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전을 달달 외우는 길로 말을 알지 말고, 말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면서 퍼지는가 하는 살림자리를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생각해 보아야지요. 어린이가 중국 한문 말씨를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푸름이가 일본 말씨를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그리고 우리 어른이 갖은 영어를 한국말로 안 옮기고 그대로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우리한테 우리 삶이 제대로 뿌리를 박는다면,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웃이 되는 말을 상냥하면서 쉽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즐겁고 사랑스레 쓰리라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말살림은 저절로 넉넉하게 펼 테고요.



청년이건 기성세대건 어휘를 늘릴 필요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휘를 늘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양과 질을 늘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상은 대부분 언어 행위를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2쪽)



  1800년대 일본 지식인이 서양말을 ‘문화’나 ‘사회’로 옮겼다면, 2000년대를 사는 한국사람으로서 이 일본 한자말을 곰곰이 살펴서 새롭게 한국말로 옮겨 보고 싶습니다. 영어 ‘culture’하고 ‘society’를 여러모로 살피면, 또 이를 한자에 담은 ‘文化’하고 ‘社會’를 곰곰이 따지면, 새 한국말로는 ‘살림’하고 ‘삶터’라고 할 만하지 싶습니다. 스스로 지어서 가꾸는 모든 것이니, 이때에는 ‘살림’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이룬 자리이니, 이때에는 ‘삶 + 터’인 삶터가 될 테고요.


  그래서 음식문화·의복문화·거주문화는 ‘밥살림·옷살림·집살림’처럼 쓸 수 있습니다. 언어문화는 ‘말살림·말글살림’이라 할 수 있어요. 책문화라면 ‘책살림’으로, 교육문화라면 ‘배움살림’이 됩니다.


  그나저나 《어휘 늘리는 법》을 읽으며 몇 군데는 좀 바로잡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ㄱ. ‘봄까치꽃’이라는 말도 소개하고 싶다. 이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 누군가가 ‘봄까치꽃’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고, 꽃을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이 새 이름이 알음알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67쪽)

ㄴ.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지은이(최종규)는 이오덕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여 20여 년 동안 우리말 지킴이로 일해 왔다. 그런 지은이가 우리말을 제대로 살려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전을 펴냈다. (148쪽)



 ‘봄까치꽃’이라는 풀이름은 이해인 님이 쓴 시 때문에 퍼졌는데요 ‘봄까지꽃’이라는 이름을 잘못 받아들여서 퍼지고 말았습니다. 겨울이 저물 무렵 피어나서 봄이 저무는 철에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해서 ‘봄까지꽃’입니다. 다른 봄풀이나 봄꽃은 여름으로 저물어도 한동안 꽃을 피우거나 살지만, 봄까지꽃만큼은 봄이 끝나며 함께 숨이 끊어져요. 이런 결을 살피며 붙은 ‘봄 + 까지 + 꽃’이란 이름인데, 이를 ‘지’ 아닌 ‘치’로 잘못 붙인 시가 퍼지면서 ‘봄하고 까치는 아무 얽힌 일’이 없는데 꽃이름도 얄궂게 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오덕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여”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이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저는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갈무리해서 새로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제가 한 일은 “이오덕 유고·원고 정리”이니, 제가 이오덕 어른 제자일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우리말 지킴이”가 아닌 “사전 집필자”로 살았습니다. 2001년 1월부터 세 해 즈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자료조사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는데요, 이 일에 앞서 한 일도 ‘앞으로 새 한국말사전을 쓰려는 길’이었습니다.



  다음 두 대목을 놓고는 박일환 님이 보태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댓글’하고 ‘옆지기’라는 낱말을 다룬 꼭지가 있는데, 두 낱말이 퍼진 까닭을 글쓴이가 잘 모르시는 듯해서 살을 보태려고 합니다.



ㄷ. 언젠가부터 ‘댓글’이라는 말이 쓰이더니 이제는 ‘리플’을 완전히 밀어냈다. 단순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지금 이 순간도 댓글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이 처음 ‘댓글’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66쪽)

ㄹ. 요즘에는 ‘배우자’라는 한자어를 풀어 쓴 옆지기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늘고 있다. (141쪽)



  1990년대 첫무렵에 처음 피시통신이 피어났어요. 그때에는 업체마다 하나같이 ‘re’라는 영어를 알파벳으로 썼습니다. 요즈음도 여러 포털은 누리글월에 답장을 쓸 적에 ‘re’가 뜨도록 하는데요, 하이텔·천리안은 좀 더디었지만 나우누리라는 곳은 그때에 사람들 뜻을 널리 받아들여서 ‘댓글·덧글·답글’ 가운데 어느 말을 써야 좋은가를 살폈고, 나우누리가 하이텔·천리안 못지않게 사랑받으면서 포털 이름도 ‘나우누리’처럼 한국말로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게시판에 붙이는 이름도 훨씬 쉽고 부드러우면서 재미있게 붙일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느껴요. 나우누리 운영관리자는 모임지기라든지 글지기를 퍽 자주 만나서 이름을 어떻게 고치거나 붙여야 좋은지 물었고, 이를 바로 받아들여 주었는데,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그무렵 다른 분들은 으레 ‘re’만 쓰셨지만 저는 ‘덧’이나 ‘덧글·댓글’이라고 붙여서 덧글·댓글을 적었습니다.


  나우누리 운영관리자는 ‘댓글’이 ‘對’라는 한자를 넣은 글이냐고 묻기도 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국말에 ‘대꾸하다’가 있습니다. 대꾸하는 글이 댓글이고, “무엇에 대한 글”이 아니니, 한글이자 오롯한 한국말로 ‘댓글’이라 하면 되고, 다른 이가 덧붙이는 글이라는 뜻으로 ‘덧글’을 쓸 수 있다고도 보태어 말했어요.


  ‘옆지기’가 ‘배우자’라는 한자말을 풀어서 쓴 말이라고 《어휘 늘리는 법》이라 나오지만, 풀어서 쓴 말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부부가 그저 서로 가리키는 말일 뿐입니다. ‘옆지기’는 옆에서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새로 지은 낱말이고, 이 낱말을 누가 처음 지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그물코 출판사 대표님이 2004년에 이 말을 저한테 들려주었을 적에 참 어울리는구나 싶어서, 그때부터 제가 쓰는 글이나 책에 이 낱말을 잔뜩 써서 퍼뜨렸습니다.


  이러다가 ‘옆지기’도 좀 길구나 싶었고 새롭게 말을 지어야겠다고 여겨서 2013년에 ‘곁님’이란 말을 제 나름대로 처음으로 써 보았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서로 지킨다기보다 서로 아름다운 님으로서 사랑한다는 뜻으로 곁님이라 지었어요. 옆지기라는 낱말을 널리 퍼뜨린 사람으로서 한결 낫구나 싶은 낱말을 새로 지었기에 이제는 옆지기는 안 쓰고 곁님만 씁니다. 2018.7.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말넋/말삶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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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10-0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도 나쁘지 않지만 저도 곁님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

숲노래 2018-10-11 14:44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곁님‘이란 말을 지은 보람이 있네요 ^^
 
일상에서 생각 깨우기 연습 - 인생을 바꾼다. 작은 생각 하나가
안성진 지음 / 타래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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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53



회사원 아저씨가 잔잔히 들려주는 이야기

― 일상에서 생각 깨우기 연습

 안성진

 타래, 2018.3.15.



‘나’라는 한 개인의 존재는 우주적 관점에서 보면 하찮을 정도로 미미하다. 하지만 내가 무엇인가를 하면 이 세계는 내가 중심이 되어 돌아가기 시작한다. (56쪽)


내가 집에서 나오기 전부터 비가 쏟아졌다면 분명 날씨를 핑계로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서 그렇게 비를 맞아 보니 비는 핑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35쪽)



  경기도 고양시에서 여느 회사원으로 일하는 아저씨 한 분은 어느 날 꿈을 품었다고 합니다.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하기를 되풀이하는 삶이 아닌, 스스로 무언가 지어 보고 싶은 꿈을 품었다지요. 이 꿈을 가슴에 새기면서 하루하루 애쓴 끝에 책을 한 권 내놓습니다. 책을 쓰는 꿈을 이룬 뒤에는 한 권으로 그치기보다 한 권 더 내겠노라는 꿈을 품었고, 참말로 다음 책을 써냅니다.


  회사원 아저씨는 꿈꾸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집하고 일터 사이를 오가느라 몸이 지치기 일쑤이지만, 아침에 달리기를 하기로 해요. 더 튼튼한 몸을 바라면서, 날마다 몸을 꾸준히 다스리기를 빌면서 달리기를 했다지요. 이러한 새길은 만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꼭 이루겠어’라는 굳센 다짐보다는 ‘이렇게 삶을 바꾸어 보면 즐겁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지내면서 이다음 책까지 내놓아요. 바로 《일상에서 생각 깨우기 연습》(안성진, 타래, 2018)입니다.



아내도 내가 일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전화를 한 것이다. 뭔지 모를 이유로 폭발 일보 직전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급히 전화를 끊었다면 저녁밥을 얻어먹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203쪽)


그날 나는 평소 아이에게 보내는 눈빛이 어땠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늘 아이에게 관심의 눈빛, 사랑의 눈빛을 보냈다면 아이가 이런 투정을 했을까? (242쪽)



  일터에서는 회사원이요 집에서는 아버지인 안성진 님은, 이웃한테는 아저씨입니다. 몸은 하나이나 얼굴은 여럿인 셈이지요. 그리고 책을 여러 권 냈기에 작가이기도 해요. 또한 다부진 읽음이입니다. 새벽마다 따로 짬을 내어 날마다 글을 쓸 뿐 아니라 달리기를 하는 하루로 열고, 조각조각 작은 틈을 꼭 내어서 책을 읽습니다. 스스로 할 일하고 나아갈 길을 바라보는 왼손이라면, 이웃한테서 배울 이야기를 살피는 오른손이라 할 만해요.


  어느 모로 보면, 이렇게 여러 일을 해내는 회사원은 드물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아무나 글을 못 쓸 테고, 아무나 책을 못 낼 테며, 아무나 새벽달리기를 못 할 뿐 아니라, 아무나 곁님이랑 아이하고 눈을 맞추며 마음을 나눌 이야기를 하기 어렵다고 여길 수 있어요.


  그런데 《일상에서 생각 깨우기 연습》은 빈틈없이 모든 일을 해내는 모습을 다루지 않습니다. 책이름에서도 드러나듯, 회사원 아저씨이자 작가 이웃님은 글쓴이는 “깨우기 연습”을 어떻게 했는가를 밝혀요. 그리고 이 “깨우기 연습”은 다른 곳이 아닌 “일상에서 생각 깨우기”입니다. 넉넉한 휴가를 누리면서 고요히 잠기는 명상이 아닌, 바쁘거나 부산한 하루하루를 더 길고 알뜰히 살리겠다고 하는 “일상 생각 깨우기”라고 합니다.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시골에서 책을 읽으면 뭐가 다를까? 시골에서 책을 읽는 즐거움은 무엇일까? 제목이 주는 의문이다. 그래서 이런 제목을 가진 책이 있다고 가정해 봤다. 《도시에서 빠르게 책 읽기》 이렇게 놓고 보니 알겠다. (40쪽)



  그저 바쁜 하루라면 틈이 없어요. 그저 바쁜 하루여도 1분이나 5분쯤 조각틈을 내면 참말로 틈이 있습니다. 누구는 이 5분쯤 되는 틈에 눈을 붙이고 담배를 태우지요. 누구는 이런 조각틈에 손전화를 만지작거릴 텐데, 안성진 님은 이런 틈에 책을 읽는다지요. 게다가 책읽기로 그치지 않고, 애써 읽은 책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이녁 누리집에 느낌글을 바지런히 올립니다.


  여느 날에는 집하고 일터를 오가면서 늦게 돌아와서 아이들하고 어울리기 힘든 줄 느끼기에 주말이 되면 되도록 다른 약속을 안 잡고서 아이들하고 눈을 맞추며 말을 섞으려고 한대요. ‘아버지로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기보다는 ‘시가늘 낼 수 있을 적에 즐겁게 제대로 시간을 내자’는 마음으로 살려 한대요.


  이리하여 《일상에서 생각 깨우기 연습》을 읽다 보면 ‘연습’을 하느라 스스로 깨지거나 넘어지는 이야기가 곧잘 흐릅니다. 곁님한테 깨지거나 지청구를 듣는다든지, 아이한테 핀잔을 듣거나 투정을 듣는 일이 으레 있다고 해요. 그리고 이런 일을 마주할 적마다 ‘왜 이 같은 일이 나한테 찾아오는가?’ 하고 스스로 묻고, 곁님하고 아이들하고 얘기를 하려 하고,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는 한결 달라진 모습이 되겠노라 하고 다짐한다고 해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삶은 질적으로 달라진다. 그것은 그렇게 살아 본 사람만이 깨닫는 것이다. 거창한 목표에만 집착하다 보면 오히려 일상은 공허해진다. (231쪽)



  대단한 꿈을 이루려는 길이 아닌, 아주 작은 일을 해내면서 웃고 싶다는 뜻을 조곤조곤 글로 옮깁니다. 아이한테 엄청난 꿈을 심어 주는 어버이가 아닌, 아이하고 주말에 즐겁게 어울리며 함께 놀거나 쉬고 말을 섞는 어버이요 동무로 지내려고 한다는 뜻을 찬찬히 적습니다.


  참 맞다고 느낍니다. 대단한 일을 해야 하지 않아요. 작은 일을 하면 되어요. 처음부터 대단한 일을 이루려 할 까닭이 없어요. 한 걸음씩 꾸준히 내딛으면서 웃으면 되어요. 오늘 하루를 즐겁게 맞이하면서 아침을 열면 되고, 저녁에 가벼운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와서 ‘오늘 어떻게 보냈어?’ 하고 물으며 ‘난 오늘 이렇게 보냈지.’ 하고 말하면 됩니다. 회사원 아저씨가 들려주는 잔잔한 이야기가 상냥합니다. 2018.6.4.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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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두 사람 - 나의 모든 이유가 되어 준 당신들의 이야기
김달님 지음 / 어떤책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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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211


온누리 포근히 비추는 달님을 돌본 사랑
― 나의 두 사람
 김달님
 어떤책, 2018.4.30.


60대 중반이 될 때까지 공사장을 다녔던 할아버지는 좋은 날엔 삼겹살, 졸업식엔 새 신발을 잊지 않고 챙겨 주고 싶어 했다. 내가 끝내 불행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이 아끼지 않고 주었던 사랑 덕분일 것이다. (7쪽)

할아버지는 내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무렵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고 내 이름을 지었다고 했다. 우연히 올려다본 밤하늘의 달이 어찌나 밝은지, 그 달처럼 세상을 환하게 비추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고 한다. (166쪽)


  차분히 이야기가 흐르는 《나의 두 사람》(김달님, 어떤책, 2018)을 읽는데 글쓴이 이름을 보고 살짝 고개를 갸웃했습니다. 이름에 ‘님’이 들어가거든요. 이름에 ‘님’이 들어간 동무가 있기에 아주 낯설지는 않지만 새삼스럽습니다. 더욱이 ‘달님’이라는 이름이라니.

  사람들이 이름에 한자를 쓰지 않던 때를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한자로 지은 이름이 어느새 익숙할 수 있지만, 노비문서를 불사르며 신분이 무너지던 무렵 언저리까지만 해도 거의 모든 여느 사람은 수수한 겨레말로 이름을 지어서 불렀어요. 백 해쯤 앞서까지만 하더라도 달님뿐 아니라 해님이나 꽃님 같은 이름이 제법 흔했으리라 느낍니다. 그만큼 아이가 이쁘며 사랑스러우니까요. 그만큼 아이한테 기쁨과 사랑을 물려주고 싶으니까요.


할아버지는 무엇을 ‘심는다’고 하지 않고 ‘숨군다’고 말한다. “고추를 숨궜다”거나 “배추를 숨굴 거다”라거나. ‘숨구다’는 말은 땅속에 숨긴다는 말에서 온 걸까. 어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숨’이라는 말 덕분에 땅속에 숨을 불어넣는 말처럼 느껴진다. (63쪽)

할아버지의 눈빛에서 ‘소중하고 중요한 무언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할아버지는 손녀의 첫 책을 감싸 줄 ‘책꺼풀’을 만드는 중이었다. 반듯하게 오린 달력의 흰색 면을 바깥으로 향하게 해 책을 감싸고, 앞표지와 뒤표지의 위아래 옆 부분을 남는 길이만큼 안쪽으로 접었다. (80쪽)


  《나의 두 사람》은 할아버지 할머니 품에서 자란 아이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두 사람인가를 찬찬히 풀어내어 들려줍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만한 이야기가 아닐 수 있지만, 기다가 서다가 걷다가 달리면서 무럭무럭 자라, 어느새 학교에 들어 글을 읽고 책을 외며 스스로 삶길을 찾은 한 사람이, 두 사람 곁에서 배우거나 누린 포근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에 흐르는 수수한 이야기는 저도 어릴 적에 겪곤 했습니다. 이를테면 달력 종이로 책꺼풀을 싸는 일을 어머니 곁에서 지켜보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책꺼풀을 오려서 대었습니다. 작은 손으로 책꺼풀을 처음 쌀 적에는 엉성했지만, 새 학기를 맞이하고 새 학년을 거듭거듭 맞이하면서 제 작은 손은 조금씩 자랐고, 나중에는 어머니 못지않게 책꺼풀을 스스로 쌀 수 있었어요.


할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밭에 냉이가 좀 자랐어?” 하고 물어봤다. 그러자 할머니는 말했다. “냉이가 뭐냐?” 다음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 수화기 너머 할머니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정말 잊어버렸구나. (141쪽)

어느 날 할머니는 말했다. “엄마를 미워하지 마. 안 그럼 네 삶이 힘들어져.”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고 나는 할머니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들었다. 처음부터 내게 없던 사람이니 미워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195쪽)


  《나의 두 사람》에 나오는 두 사람은 저물려고 하는 꽃송이 같은 두 사람입니다. 할아버지는 예순 한복판을 지나면서 일자리를 더는 얻기 어렵습니다. 할머니도 깊은 나이로 접어드니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할 뿐 아니라 잊어버리는 일이 늘어납니다. 글쓴이 김달님 님은 이러한 삶을 차분하게 적어 놓습니다.

  어쩌면 잊지 않으려고 적어 놓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잊지 않으려는 마음보다는, 내(김달님) 삶길에 든든한 디딤돌이 되어 주었고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기쁜 노래를 들려준 두 사람한테 바치고 싶은 선물로 적어 놓을 수 있습니다. 두 분이 흘린 땀방울하고 눈물방울은 얼마든지 책 하나로 여밀 만하다는 글쓰기입니다. 두 분이 지은 웃음하고 살림은 얼마든지 책 하나로 고이 담아서 가만히 건네드리고 싶다는 글쓰기입니다.


“어느 날엔 네가 날아가는 나비를 보고 그랬지. 할머니, 나비는 날개가 있어서 좋겠다, 나도 날개가 있으면 훨훨 날아갈 텐데. 그래서 내가 그랬어. 너는 두 다리가 있으니까 자유롭게 뛰어가면 돼. 그 말을 듣고선 네가 저 멀리 뛰어가더니 금세 다시 돌아오더라.” (208쪽)

“너는 항상 나인테 기쁨을 줬고, 그랬지. 제일 기억나는 거는 울산 공장에서 일할 때, 네가 국민학교도 들어가기 전이었는데 학원에 보낸 네가 없어졌다고 해서 정신없이 너를 찾으러 다녔지. 근데 나중에 파출소에서 연락이 오더라고. 가 보니 네가 쪼그려 누워 자고 있어. 그때 내가 제일 행복했지. 너를 다시 찾았으니까.” (210쪽)


  온누리를 포근히 비추는 달님을 돌본 사랑이 책 하나로 태어납니다. 예나 이제나 온누리를 따스히 감쌀 달님을 보살핀 숨결이 책 하나로 여기에 섭니다. 할머니한테 가장 기뻤던 날은, 길을 잃어 사라진 아이를 되찾은 때였다고 해요. 그 기쁨을 두고두고 가슴에 품으며 글쓴이를 고이 안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사랑을 받으며 자란 아이가 사랑으로 새롭게 살림을 짓습니다. 사랑으로 새롭게 살림을 짓는 아이가 앞으로 새로운 아이를 이웃을 동무를 마주하면서 넉넉히 헤아릴 수 있습니다.

  날개가 있어 좋은 나비는 훨훨 날고, 다리가 있어 좋은 아이는 바람을 가르며 달립니다. 손이 있고, 이 손에 연필을 쥐어 좋은 어른은, 어느새 어른으로 자란 아이는, 기쁘게 꿈꾸는 마음으로 글을 써서 할아버지 할머니 곁으로 달려갑니다. 2018.6.3.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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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나 2018-06-04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읽기‘에 올린 글 읽고 주문하여 기다리고 있답니다.
자세하게 올려 주시니 더욱 기다려집니다.

숲노래 2018-06-04 21:21   좋아요 0 | URL
애틋하면서 아프지만,
그만큼 사랑스럽고 따사로운 이야기예요.
할아버지가 아이 이름을 ‘달님‘으로 지었다고 들려주는 대목에서
참 뭉클했습니다.
고운 사랑을 받으며
고운 이야기를 책으로 여미었구나 싶더군요.

어쩌면, 아사나 님이 보시기에 모자란 대목도 있을 텐데,
모자란 만큼 더 애틋한 이야기일 수 있으리라고도 생각해요.
넉넉히 누려 보시기를 바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