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400년의 산책 - 몬테베르디에서 하이든까지
이채훈 지음 / 호미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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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4



삶을 사랑으로 채우도록 북돋우는 노래

― 클래식 400년의 산책, 몬테베르디에서 하이든까지

 이채훈 글

 호미 펴냄, 2015.6.24. 15000원



  노래를 부를 적에는 힘든 일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한테는 힘든 일이 한 가지도 없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노래가 힘겨움을 살며시 털어내 주기 때문입니다. 군대 같은 곳에서 군인한테 억지스레 노래를 부르도록 시킵니다. 힘들어 죽을 마당에 노래까지 시키니 더욱 죽을 노릇이지만, 새삼스레 죽을 힘을 뽑아내어 노래를 부르다 보면 조금은 힘이 붙어서 한 걸음을 더 떼어낼 만하기도 합니다.


  예부터 들에서 누구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래서 들노래입니다. 들노래는 들일을 하며 부르는 노래입니다. 들일은 땡볕을 고스란히 쬐면서 하는 일이거나 비를 쫄딱 맞으면서 하는 일입니다. 무더위에 지치기도 할 테고, 자꾸 퍼붓는 비에 고단하기도 할 텐데, 이렇게 지치거나 고단할 무렵 슬금슬금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를 부르며 땡볕이나 비를 잊습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이에 새로운 힘이 솟습니다.


  아기를 낳아서 돌보는 어머니도 아기를 달래고 재우고 입히고 먹이고 씻기면서 으레 노래를 불러요.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프도록 일이 많거나 벅차다지만, 아기를 바라보면 새로운 사랑이 솟아서 노래가 흘러나오지요. 아기한테 들려주는 노래는 언제나 어머니 스스로 누리는 새 노래가 됩니다.



모든 클래식 음악은 당대의 청중이 향유하던, 그 시대의 ‘현대음악’이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작곡가들은 언제나 새로운 음악 언러를 모색했고 창조적인 실험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17쪽)


코렐리의 〈라 폴리아〉 변주곡은 아득한 그리움을 노래합니다. 저는 첫사랑에게 이 곡을 녹음해 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곡을 들으면 첫사랑의 추억이 떠오릅니다. (39쪽)



  이채훈 님이 쓴 《클래식 400년의 산책, 몬테베르디에서 하이든까지》(호미,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책이름으로도 밝히듯이 ‘클래식 400년’을 가볍게 돌아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려는 책입니다. 글을 쓴 이채훈 님은 이녁이 알려주는 클래식마다 유투브에서 이 노래를 찾아서 듣기 좋도록 열쇠말을 함께 밝힙니다. 글로만 읽기보다 노래를 함께 들으면서 이야기를 읽다 보면 클래식이 어떤 노래인가 하는 대목을 한결 즐거이 누릴 만하다고 해요.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선율이 참 따뜻합니다. 모든 파트가 피치카토로 반주하는데, 이 소리는 창 밖에 떨어지는 빗소리도 되고, 화로 속에서 나무가 불타는 소리라 해도 좋습니다. 아늑한 난롯가 풍경입니다. 멜로디가 쉽고 단순해서 휘파람으로 불기 안성맞춤입니다. (63쪽)


바흐는 바로크 시대 음악의 모든 자양분을 흡수하여 거대한 음악 세계를 이룬 ‘바다’와 같습니다. (79쪽)



  ‘클래식(classic)’이라고도 하고, ‘고전음악(古典音樂)’이라고도 하는 노래는 모두 맨 처음에는 ‘현대음악’이라고 했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바라보기로는 사백 해도 되었고 이백 해도 된 노래라 하지만, 막상 이 모든 노래는 맨 처음에 ‘가장 새로운 노래’였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노래는 그저 노래입니다. 늘 부르는 노래가 있고, 언제까지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한때 반짝이다가 사라지는 노래가 있고, 두고두고 부르는 노래가 있어요. ‘고전음악’이라는 이름이 붙기는 하지만, 이 노래는 두고두고 듣거나 부르는 노래입니다. 어느 한때에 반짝이는 노래가 아닙니다.


  가만히 보면, ‘요즈음 노래’라고 할 대중노래는 목숨이 길지 않습니다. 드문드문 ‘다시 부르기(리메이크)’로 나오는 ‘철이 지나간 노래’도 있습니다만, 방송을 가득 메우는 대중노래는 목숨줄이 아주 짧아요. 앞으로 백 해쯤 뒤에도 부르거나 들을 만한 노래가 있을는지 알 길이 없고, 사백 해나 천 해 뒤에도 부르거나 들을 만한 노래가 있을는지 알 길도 없습니다.



그는 12년 동안 이 곡을 연습한 끝에 스물다섯 살이 된 1901년, 드디어 공개 무대에서 연주했습니다. ‘학술적이고 기계적이며, 따뜻한 느낌이 없는 곡’으로 알려진 이 곡들은 카잘스의 손에서 ‘폭넓고 시적인 광휘로 가득 찬 곡’으로 거듭 태어났습니다. (131쪽)


따스한 햇살 한 줌이 마음 깊이 들어와 어루만져 주는 느낌이 드시나요? 바흐 음악이 위대한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은 ‘마음으로 마음을 위로하는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154쪽)



  삶을 사랑으로 채우도록 북돋우는 노래라고 느낍니다. 그래서 대중노래이든 고전음악이라는 노래이든 어느 한쪽이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아요. 더 뛰어나거나 훌륭한 노래가 없습니다. 사랑받는 노래가 있고 사랑을 못 받는 노래가 있을 뿐입니다. 널리 알려지면서 부르는 고전음악이 있고, 한때 반짝이지도 못하고 사라지는 대중노래가 있어요. 일찌감치 사라진 고전음악이 있으며, 오래도록 사랑받으리라 여길 만한 대중노래가 있지요.


  《클래식 400년의 산책》은 지난 사백 해 동안 꾸준히 사랑받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널리 사랑받으리라 보이는 노래를 이야기합니다. 뛰어난 노래이니까 사랑받을 만한 노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글쓴이 이채훈 님이 스스로 노래를 들으면서 마음이 어떻게 움직였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노래를 들으며 어떤 마음이 되었고, 저 노래를 들을 적에 어떤 마음이 되었나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하이든의 현악사중주는 모차르트에게 영감과 함께 새로운 도전의식을 주었습니다. 모차르트는 다른 사람의 성취를 제대로 볼 줄 알았고, 그것을 자신의 풍요로운 자산으로 소화하고 흡수할 줄 알았습니다. (246쪽)



  서양에서 널리 듣고 나누는 고전음악은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사랑받으리라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먼 옛날부터 함께 부르고 나누던 들노래가 있고 일노래가 있으며 놀이노래와 자장노래와 마당노래가 있어요. 그런데 한국사람이 예부터 누구나 부르거나 듣던 노래는 어느새 줄이 톡 끊어졌습니다.


  요즈음 시골에서 들노래를 부르며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을걷이가 한창인 시골에서는 콤바인 소리만 가득합니다. 봄에도 경운기와 트랙터 소리만 시끄러울 뿐, 들노래는 한 가락도 없어요. 깨나 콩을 털면서 ‘깨 터는 노래’나 ‘콩 터는 노래’를 부르는 할매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시골에는 아이들도 거의 없으니, 아이들을 달래면서 어버이가 사랑으로 들려주는 자장노래는 아예 없다고 할 만합니다.


  아이들은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놀이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거의 모두 텔레비전 대중노래를 따라서 부릅니다. 텔레비전 대중노래 가락과 춤사위를 똑같이 흉내내려고만 합니다. 마을마다 다 다르던 놀이노래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되었고, 아이들 스스로 새로운 놀이노래를 지을 줄도 모릅니다.


  바야흐로 전문가들이 노래를 짓고, 전문가들이 노래를 비평하는 사회라고 할까요. 시골마을뿐 아니라 회사나 공공기관에서도 ‘노래하며 일할 수 있는 터전’은 아닙니다. 신문사나 출판사 같은 데에서도 ‘노래하며 일하는 사람’은 없기 마련이에요. 운전 기사나 공장 일꾼은 대중노래를 흥얼거리기는 하되 ‘일하는 노래’를 부르지는 못합니다.



원숙한 하이든은 ‘질풍노도’ 운동과 거리를 두고, 대중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여러 방법을 구사했습니다. 평범한 청중들이 알아듣기 쉽게 배려한 탁월한 기교가 이 시절 하이든 음악에 섬세하게 깃들어 있습니다. (258쪽)



  꼭 ‘한겨레 일노래’나 ‘한겨레 놀이노래’를 모든 사람이 불러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일하는 어른들 마음을 달래면서 어루만지는 노래가 없다는 대목은 쓸쓸한 노릇입니다. 놀이하는 아이들 사랑을 가꾸면서 북돋울 만한 노래가 없다는 대목도 씁쓸한 노릇입니다.


  바람과 비와 해님이 흐르는 결을 가락으로 지어서 담기도 했다는 고전음악인데, 수수한 사람들(평범한 청중)도 즐겁게 누릴 수 있도록 지어서 펼치기도 했다는 고전음악인데,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노래는 어떤 길을 걸어가는지 궁금합니다.


  노래가 있는 삶이 아름답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사랑스럽습니다. 노래를 듣는 아이들이 착하게 자라고, 노래를 부르는 어른들이 슬기롭게 어깨동무를 합니다. 4348.10.6.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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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5-10-0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이 그렇게 좋군요~^^
감사히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5-10-06 21:32   좋아요 0 | URL
읽는 동안에는 재미있고 포근하고 쉽네 하고 느꼈는데
다 읽고 나서 곰곰이 돌아보고 살피니
참 잘 빚은 책이더군요.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쓸 적에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고맙습니다 ^^
 
내가 제일 잘한 일
박금선 지음, 한국여성인권진흥원 성매매방지중앙지원센터 / 샨티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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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7



“넌 잘못한 일 없어. 넌 늘 아름답거든.”

― 내가 제일 잘한 일

 박금선 글

 샨티 펴냄, 2015.9.18. 15000원



  이틀 동안 가을비가 꽤 세게 내립니다. 올해에는 거센 바람이 거의 불지 않았고, 비를 이끈 드센 바람도 거의 불지 않았습니다. 올해에는 시월이 되도록 큰바람이 없었기에 들마다 나락은 샛노랗게 잘 익기만 했습니다. 이러다가 벼베기를 얼마 앞둔 막바지에 바람이 제법 세게 부는 비가 내리니 들녘에 드문드문 벼가 눕습니다. “나락이 다 눕겠소잉. 세워서 묶어야 하나.” “일없어. 기양 둬도 돼.” 군내버스에서 마을 할매 한 분이 걱정하는 말씀을 하고, 다른 마을 할매는 일없다면서 그냥 둬도 된다고 말씀을 합니다. 비가 그친 들을 살피니 군데군데 조금 벼가 눕기는 했지만 거의 다 멀쩡합니다. 알차게 맺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고는 씩씩하게 섭니다.



“나는 하루에 골백번도 더 사과하며 지낸 적도 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때리지만 마세요.’ 하면서 이렇게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싹싹 빌면서.” (16쪽)



  해가 따사롭게 비추는 아침에 평상 장판을 걸상에 걸쳐서 말립니다. 마당이 다 마를 즈음 빨래를 널 생각입니다. 비바람이 그친 아침부터 아이들은 마당에서 맨발로 뛰어놉니다. 이러다가 마루로 들어와서 유리문으로 해바라기를 하고, 느긋하게 하루를 엽니다.


  아이들이 마당에서 놀다가 마루로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당에 새로운 손님이자 우리 집에서 함께 사는 ‘다른 아이’ 셋이 찾아듭니다. ‘다른 아이’ 셋은 섬돌에 앉기도 하고, 종이상자를 벅벅 긁기도 하고, 자전거 밑에 벌렁 드러눕기도 합니다. ‘다른 아이’ 셋은 우리 집 광에서 태어난 새끼 고양이입니다.


  ‘다른 아이’ 셋은 우리가 마당에 물기를 말리려고 걸상에 걸친 장판도 긁고, 장판 밑으로 들어가서 숨바꼭질도 하며 평상을 오르내리거나 평상 밑으로 들어가서 놀기도 합니다. 사람 손을 타려고 하지는 않으나 늘 우리 집에서 가까이 지내는 ‘다른 아이’들은 쥐도 잡고 개구리도 잡으면서 이 집에서 저희 삶을 짓습니다.



“가끔은 자랑스러운데, 자랑할 수 없다는 게 흠이에요. 내가 성매매업소를 그만두었다고 길거리에서 자랑하면, 사람들이 날 어떻게 보겠어요? 자랑스럽지만 자랑할 수는 없지.” (32쪽)



  박금선 님이 빚은 《내가 제일 잘한 일》(샨티,2015)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비바람 몰아치는 소리를 들으면서 읽었고, 한가위 동안 시골집에 조용히 머물면서 읽었습니다. 다친 오른무릎이 다 낫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 나들이도 다니지 못하는 몸이기에 한가위에도 비바람 몰아치는 날에도 우리 시골집에서 조용히 해바라기를 하거나 비바라기를 하면서 읽었습니다.


  아침에 ‘우리 집 마을고양이’를 바라보며 문득 생각합니다. 이 아이들은 지난 이틀 동안 무엇을 했을까요. 비바람이 몰아치니 광에 깃들어 조용히 숨을 죽이면서 빗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었을까요. 비바람이 몰아쳐도 비바람을 맞으면서 먹이가 있는가 하고 살폈을까요.



잔소리쟁이 여자 2가 내게 말했지. 독립해야 한다고. 밖으로 나가야 한다고. 나 혼자 밥벌이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그럼 나의 과거를, 생판 모르는 사람들에게 홀딱 다 보여야 할 텐데, 그게 가능할까? 날 비웃고 손가락질할 텐데? 더럽다고 할 텐데? 위안거리를 찾자면 ‘오늘, 현재를 다르게 살면, 과거도 달라진다’는 뒷부분의 말이다. (93쪽)



  우리 곁에는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둘레에는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가 있습니다. 눈에 드러나게 보이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도 아름답고 반갑습니다.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도 아름답고 반갑지요. 그런데,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는 자리에 있는 이웃이나 동무를 생각하기는 어려워요. 눈에 드러나지도 않고 잘 보이지도 않으니까요.


  커다란 집에서 사는 사람은 작은 집에서 사는 사람을 못 보기 일쑤입니다. 높다른 집에서 사는 사람은 나즈막한 집이나 땅속으로 파고든 집에서 사는 사람을 못 보기 일쑤입니다. 커다란 도시에서는 자그마한 도시나 시골에서 사는 사람을 못 보기 일쑤입니다.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싱싱 달리면 창밖으로 스치는 시골마을 시골사람을 거의 쳐다볼 수도 없고 어떻게 지내는지 헤아릴 길도 없습니다.





내가 어릴 때 본 엄마 모습 가운데, 가장 많이 기억나는 건 아빠한테 매 맞는 모습이야. 그런데 이제는 나 때문에 애태우는 엄마도 보이고, 새로 일군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평범한 여자로서의 엄마도 보여. 엄마, 그런데 요즘 엄마가 나하고 동생한테, 너무 돈으로만 많은 걸 채워 주려고 하는 거 알아? 오래 떨어져 있었던데다가, 내가 이렇게 된 게 다 엄마 탓이라고 생각하고 미안해서 그러는 건 아는데, 나는 돈보다 대화가 필요해. (150쪽)



  이야기책 《내가 제일 잘한 일》은 성매매 여성 이야기를 다룹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낳아서 태어난 아이들’이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는 집’을 보금자리로 느끼지 못해 집을 뛰쳐나와야 했을 적에, 갈 곳도 머물 곳도 깃들 곳도 지낼 곳도 없어서, 또 이 아이들을 따스히 보듬거나 어루만지는 손길도 찾을 길이 없어서, ‘어떤 어른들’이 시키는 일을 하면서 잠을 자고 밥을 먹기는 하지만 ‘빚은 끝없이 늘어나’서 빠져나올 수 없는 굴레에서 쳇바퀴질만 하다가 가까스로 쳇바퀴질에서 빠져나온 여성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빠가 조금 불쌍하기도 해. 좋은 남편이 되는 법이나 좋은 아빠가 되는 법, 술 말고 다른 것으로 마음 푸는 법을 배울 기회가 아빠에게 있었다면, 우리 집이 달라질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아빠에게는 배움의 기회가 없었던 거야. (153쪽)



  어느 한때 성매매 여성으로 지내야 한 사람들은 모두 처음에는 ‘사랑받아 태어난 아이’입니다. 성매매 일을 해야 하는 동안 ‘사랑받는 삶’하고는 동떨어졌습니다. 보금자리가 없는 채 잠만 자고 밥만 먹으며 ‘누군가 시키는 일’을 해야만 하는 곳에 머물 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마음대로 나올 수 없을 뿐더러, 으레 ‘사내들 손찌검’에 휘둘려야 합니다.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왜 ‘아이를 낳는 사내(아버지)’는 ‘아이를 낳은 가시내(어머니)’를 때리거나 괴롭히거나 못살게 굴까요? 왜 아이를 낳은 사내는 이녁 아이를 사랑으로 보살피지 못할까요? 왜 사내라고 하는 사람은 가시내를 ‘성매매 욕구해소’를 하는 노리개로 바라볼까요? 왜 이 나라 사회 지도자나 정치 지도자나 교육 지도자는 이 같은 실타래와 굴레를 풀려고 하는 데에는 마음도 몸도 돈도 슬기도 안 쓸까요?



내가 실장님에게 이런 일 하기 싫다고 하니 ‘빚 갚고 꺼져!’ 하고 소리치며 나를 때렸다. 그래도 실장님이 좋았다. 실장님 아이를 임신했다. 또 맞았다. 얼굴에는 멍이 많이 들고 머리에서 피가 콸콸 났다.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여자를 이렇게 때리는 경우가 어디 있냐?’고 했다. (179쪽)




  아이들은 잘못하지 않습니다. 잘못한 아이들은 없습니다. 아이들은 잘못을 모릅니다. 언제나 사랑을 오롯이 받는 아이들은 잘못할 일이 없고, 어떤 일을 ‘잘 하지 못하’더라도 다 괜찮습니다. ‘잘 하지 못했’으면 앞으로 잘 하면 되고, 앞으로도 또 ‘잘 하지 못하’면 다음에 잘 하면 되며, 다음에도 ‘잘 하지 못한다’면, 새롭게 다음으로 나아가면 됩니다.


  미운 아이하고 고운 아이가 따로 없이, 아이는 모두 곱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물려받고 싶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사랑을 배우고 싶습니다. 아이는 어버이한테서 물려받거나 배운 사랑을 온몸에 곱게 품고서 이웃하고 동무를 따스하고 넉넉하게 얼싸안으면서 손을 맞잡는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야기책 《내가 제일 잘한 일》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아직 사랑받지 못한 나날을 보냈다고 할 만합니다. 이제부터 즐거이 사랑받는 길을 걸어갈 사람들이라고 할 만합니다. 스스로 나를 사랑하고, 스스로 이웃을 사랑하며, 스스로 누구나 사랑하는 삶을 새롭게 지을 사람들이지 싶습니다.



귀여운 아이들. 나는 모든 여성이 다 성매매를 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성매매를 하지 않도록 사회가 지켜 주어야 한다. 갈 곳 없는 어린 소녀라면, 그 소녀가 성매매를 하지 않고도 살 수 있게 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219쪽)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는 언제나 어디에서나 누구나 한 마디를 합니다. “괜찮아. 일어서렴. 아프지 않아. 피가 나니? 괜찮아. 피는 곧 멎어. 조금 지나면 하나도 안 아파. 즐겁게 일어나서 다시 달리렴. 웃고 노래하면서 마음껏 뛰놀렴.”


  넘어졌으면 일어나면 됩니다. 또 넘어졌으면 또 일어나면 됩니다. 자꾸 넘어진다면 거듭거듭 일어나면 됩니다. 우리는 일어서면서 웃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씩씩하게 일어서면서 내 온 사랑을 이웃하고 나누는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너는 그야말로 아름답고, 너랑 동무인 나도 참말 아름답습니다.


  이야기책 《내가 제일 잘한 일》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할 일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까닭도 없습니다. 한국 사회에 아직 바보스러운 어른, 이 가운데 바보스러운 ‘사내’가 퍽 많다고 할 만합니다만, 씩씩하게 한 걸음씩 내딛으면 됩니다. 나를 기다리면서 언제든지 따스히 품어 줄 이웃이 있으니 당차게 한 걸음씩 새로 내딛으면 됩니다. 나를 아름다운 눈길로 바라보고, 나한네 “너 참 아름답네.” 하고 속삭일 이웃이 있으니, 아름다운 이웃을 생각하고 꿈꾸면서 내 마음속에 깃든 아름다운 숨결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됩니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이란 나를 꾸밈없이 바라보며 사랑하는 일입니다. ‘내가 가장 잘한 일’이란 우리 아이와 이웃 아이 모두 티없이 마주하며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내 가슴속에 기쁜 사랑을 담아서 ‘내가 나중에 어른이 된 뒤’에 이 땅에 새롭게 태어날 아이들한테 ‘내가 물려받고 배운 사랑’을 새로우면서 즐겁게 물려주고 가르치는 일입니다. 4348.10.2.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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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좌파 음식우파 - 음식으로 엿본 현대인의 정치 성향
하야미즈 켄로 지음, 이수형 옮김 / 오월의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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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2



‘바른 밥’을 먹기에 ‘좌파’ 아닌 ‘착한 넋’

― 음식 좌파 음식 우파

 하야미즈 켄로 글

 이수형 옮김

 오월의봄 펴냄, 2015.9.15. 13000원



  어릴 적에는 어머니가 차려 주는 밥이면 다 맛있고 좋았습니다. 다만, 아무리 어리다고 해도 한 가지는 알았습니다. 정부미는 맛없고 일반미는 맛있었어요. 정부미에는 늘 바구미가 끓었고 일반미에는 바구미가 드물었습니다.


  나는 어릴 적에 못 먹는 것이 아주 많았습니다. 이를테면 냉면이나 치즈나 요플레나 김치나 삭힌 것은 도무지 안 받았습니다. 달걀도 한 달쯤 안 먹다가 먹으면 어김없이 배앓이를 했고, 우유도 똑같았습니다. 이제 치즈나 요플레나 김치를 먹을 수 있는 몸이 되었으나 냉면은 아직 몸에서 안 받습니다.


  내 어린 날, 깨끗한 밥이나 제대로 된 좋은 밥을 생각하는 어른은 드물었다고 느낍니다. 그무렵에는 ‘깨끗한 밥’은 아주 마땅한 노릇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쪽에서는 인공감미료가 방송과 신문 광고로 엄청나게 퍼지기도 했어요. 어느 한쪽으로는 누구나 제대로 된 밥을 스스로 지어서 먹었습니다만, 끓는 국을 플라스틱 국자로 떠서 플라스틱 그릇에 담는 일을 아무렇지 않게 했습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원전 사고 이후 음식의 안전성을 둘러싼 갈등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사고 이후 아이들에게 주는 음식의 안전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엄마와 무관심한 아빠 사이의 갈등이 결국 이혼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 과정에서 ‘방사능 이혼’이란 신조어까지 생겨났을 정도다. (14쪽)


육류 1킬로그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곡물은 8킬로그램이다 … 육류 생산은 곡물 자체에 비해 훨씬 더 비효율적이다. (31쪽)


런던에서 가장 반정부적인 존재는 정부나 여왕을 비판한 펑크록 밴드였다. 하지만 지금은 오가닉 야채를 파는 이들로 완전히 대체되었다. (48쪽)



  먹을거리를 놓고 ‘좌파’하고 ‘우파’를 갈라서 바라보는 《음식 좌파 음식 우파》를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분은 ‘일본 남성’입니다. 글쓴이 하야미즈 켄로 님은 여러모로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밥이 태어나는 자리’를 제대로 살피지 않으면서 이론으로 섣불리 들이미는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옵니다. 이를테면, 유기농 푸성귀가 ‘상위 2퍼센트’가 바라는 먹을거리라고 되풀이하는 대목을 들 만한데,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로구나 싶습니다.


  이 책을 쓴 분이 아이를 낳아서 손수 길렀으면 이런 말을 안 하겠지요. 왜냐하면, ‘좌파’도 ‘음식 좌파’도 ‘우파’도 ‘음식 우파’도 아닌 무척 많은 사람들이 ‘유기농’이나 ‘자연농’을 찾습니다. 적어도 ‘친환경’을 찾으려 하고, ‘무농약’이라는 말이 눈에 뜨이면 덥석 집지요.


  왜 그러할까요? 아직 일본이나 한국도 남녀 성평등하고 동떨어진 채 ‘여성이 집안일을 도맡기 일쑤’입니다. 아기를 낳은 여성(어머니)은 아기가 먹을 밥을 챙기면서 오늘날 모든 아기한테 생기는 아토피 때문에 그야말로 죽을맛입니다. 아기는 가렵다고 자꾸 긁으면서 살갗은 피가 철철 흐르지만 긁기를 멈추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그저 옆에서 눈물을 흘릴 뿐 아이한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아토피에 바르는 연고는 아토피를 뽑아내거나 없애지 못하고 ‘살갗에 피가 더 흐르지 않고 아물도’록 할 뿐입니다. 좌파도 음식 좌파도 아닌 ‘아토피 아이를 둘 수밖에 없는 오늘날 모든 어머니’는 누구라도 ‘유기농·자연농·무농약·친환경’에 눈길을 두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약도 병원도 아토피를 고칠 수 없는 줄 온몸으로 느끼고 날마다 아기를 쳐다보면서 깨닫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유기농이나 자연농에 눈길을 두지만, 이내 ‘플라스틱 조리기구와 그릇과 물잔’마저 몸에 나쁜 줄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집안 살림을 싹 바꾸지요. 그리고, 아기한테뿐 아니라 ‘아무것이나 아무렇게나 먹는 어른(거의 남성, 아버지)’도 아기한테 생기는 아토피를 부채질하는 줄 깨닫습니다. 어른(남성, 아버지)이 아무것이나 먹으니 아기도 아무것이나 따라서 먹고 싶어 해요. 그래서 여성(어머니)은 집식구 모두 ‘밥을 바꾸어야 할’ 뿐 아니라 살림과 삶도 바꾸어야 한다고 깨닫습니다.



유기농 생산비율을 높이면 건강하고 맛있는 야채를 원하는 상위 2퍼센트의 소비 만족도는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 세계 식량 사정 자체를 개선시켜 주진 않는다. 오히려 이 같은 생산 방식이 나머지 98퍼센트 사람들의 식생활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할지도 모른다. (160쪽)



  이 책을 쓴 일본 남성은 이런 대목을 몰라도 너무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방사능 이혼’이 ‘일본 여성(어머니)’으로서 얼마나 뼈맺히고 사무쳐서 나오는 힘든 결정인가를 알아채지 못합니다. ‘방사능 이혼’을 다짐하는 일본 여성은 좌파도 음식 좌파도 아니에요. 아기를 사랑하는 여성(어머니)일 뿐입니다. 아기를 사랑하는 살림을 꾸리면서 아기 어머니는 어느새 유기농을 공부합니다. 스스로 공부하여 ‘유기농 제품’을 사려고 찾다가 어느새 손수 텃밭을 지으려 합니다. ‘음식 좌파’로는 정의내리거나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유기농은 ‘나머지 98퍼센트하고 동떨어진’ 농사법이 아닙니다. 100퍼센트 모든 사람을 생각하려는 농사법이고, 유기농으로는 모자라기 때문에 ‘자연농’이 차츰 퍼지지요. 좌파뿐 아니라 우파도, 음식 좌파뿐 아니라 음식 우파도, 늘 먹고 마시는 밥과 물과 바람이 ‘깨끗하고 좋은’ 데에서 살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도시 문명을 차마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밥과 물과 바람이 깨끗하거나 좋은 데로 못 가기 마련입니다.



유전자조작작물은 우리가 이미 10년 이상 소비해 왔다. 그리고 의료 분야에서는 유전자조작으로 만든 인슐린을 이용해 몇 백만 명의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하지만 ‘유전자조작 인슐린이나 작물이 환경, 혹은 사람 건강에 유해한 부작용을 끼쳤다’는 사례 보고는 아직 한 건도 없다. (167쪽)



  《음식 좌파 음식 우파》를 쓴 일본 남성은 ‘유전자조작’ 인슐린과 작물이 어떤 사람한테도 나쁜 영향이나 부작용을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음식 좌파도 음식 우파도 아닌 ‘여느 어머니’ 가운데 이렇게 생각할 사람은 거의 없으리라 느낍니다. 왜 그러할까요? 아무런 나쁜 영향이나 부작용을 끼치지 않았는데 왜 오늘날 모든 아기는 아토피를 달고 태어날까요? 99.9퍼센트도 아닌 100퍼센트 모든 아기가 아토피를 달고 태어납니다. 주의력결핍장애라고 하는 이름이 붙는 아기는 왜 해마다 더욱 많이 늘어날까요?


  왜 오늘날에는 아이들한테 예방주사를 그렇게 많이 엄청나게 자꾸 자주 맞히려고 할까요? 그렇게까지 예방주사를 맞히지 않고서는 아이들 몸이 버틸 수 없다는 뜻이 아닐까요? 화학약품으로 지은 관행농 농사로 거둔 먹을거리를 먹기 때문에 화학약품으로 늘 처방을 해야 할 수밖에 없고, 다시 화학처리를 한 것들로 살림집을 뒤덮어야 하는 얼거리가 아닐는지요?


  한국이나 일본 모두 예방주사를 안 맞히려는 어머니가 무척 많이 늘어납니다. 예방주사를 안 맞히면서 아무 병에 안 걸리고 아토피를 씻어내는 슬기로운 길을 찾는 어머니가 매우 많이 늘어납니다. 이들 ‘어머니’는 음식 좌파일까요, 아니면 음식 우파일까요. 또는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저 ‘어머니’일까요.


  음식을 놓고 좌파와 우파를 갈라서 인문 지식을 펼치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다만, 밥은 삶하고 곧바로 이어집니다. 삶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지식과 철학과 이론으로만 밥을 다루려고 하면 그만 삶하고 동떨어집니다. 오늘날 ‘좌파도 우파도 아닌 그저 어머니’인 거의 모든 사람들이 유기농을 찾고 손수 텃밭을 지으려고 소매를 걷어붙일 뿐 아니라 생협 회원이 되고, 아예 도시를 떠나 시골로 삶터를 옮기려고 하는 까닭을 《음식 좌파 음식 우파》를 쓴 일본 남성은 하나도 못 헤아립니다.



음식 좌파가 가진 반과학주의는 세계의 인구 증가에 따른 식량난 가능성에 매우 냉담하다. 유기농법의 보급이 세계 기아에 치명적인 존재가 될 가능성, 그리고 음식 좌파가 자신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지키는 게 세계 빈곤층에게 위협이 된다는 음식 좌파의 딜레마에 대해 앞서 5장에서 다뤘다. (207쪽)



  ‘유기농이 세계 인구 증가를 위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터무니없습니다. 세계 인구와 식량에 위협이 되는 것은 유기농이 아니라 군부대와 전쟁무기입니다. 군부대와 전쟁무기는 얼마나 많은가요? 지구별 모든 정부는 군부대와 전쟁무기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도시나 시골을 깨끗하게 가꾸는 데에는 거의 돈을 한푼도 안 쓴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군사강대국은 끝없이 핵무기 실험을 합니다. 전쟁무기 실험을 하면서 방사능이 끝없이 지구별을 떠돕니다.


  게다가 대형 발전소와 원자력 발전소야말로 땅을 더럽히면서 ‘유기농이든 관행농이든’ 모두 위험한 먹을거리가 되도록 합니다. 몇 해 앞서 일본에서 터진 끔찍한 일 뒤로, 일본에서는 ‘일본에서 난 것’이 방사능에 얼마나 찌들었을까를 걱정하는 사람이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 퍼졌어요. 바로 이런 방사능 피해, 원자력 발전소와 대형 발전소, 군부대와 전쟁무기, 끝없는 막개발, 농약을 퍼붓는 골프장, 조용한 숲을 갈아엎는 대형 관광단지, 대형 발전소에서 이어지는 엄청난 송전탑, …… 이러한 것들 때문에 ‘깨끗한 바람이 태어나는 숲’이 망가지고 ‘깨끗한 먹을거리를 낳는 논밭’이 무너집니다.


  세계 빈곤층한테 위협이 되는 것은 유기농이 아니라 ‘철없이 멈출 줄 모르는 첨단과학 도시문명’과 ‘군부대와 전쟁무기’입니다.



내가 음식 우파에서 음식 좌파로 전향한 이유는 ‘맛과 재미’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건강에 대한 바람 때문도 아니고, 독을 몸에서 배출하고 싶다는 해독 작용과도 무관하다. 하지만 한번 신선한 유기농 식재와 자연식 레스토랑에 익숙해지면 패스트푸드를 섭취하는 데 일정 부분 혐오감이 생긴다. (212쪽)



  《음식 좌파 음식 우파》를 쓴 일본 남성은 ‘음식 우파’에서 ‘음식 좌파’로 돌아섰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음식 좌파’란 누구인가를 이 책에서 길게 펼쳐서 이야기하려고 했습니다. 글쓴이는 ‘맛과 재미’ 때문에 음식 좌파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유기농이나 자연농 먹을거리로 밥을 차려서 먹는 사람은 패스트푸드(음식 우파)와 공장 제품(음식 우파)으로 밥을 차려서 먹는 사람하고 사뭇 다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유기농이나 자연농을 먹는 사람은 ‘과식’을 안 합니다. 많이 안 먹습니다. 아니, 유기농이나 자연농으로 먹는 사람은 으레 ‘소식’을 합니다. 일부러 적게 먹지 않습니다. 유기농이나 자연농은 ‘무게나 부피로 먹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패스트푸드나 공장 제품은 ‘값싸고 양 많이’를 내세웁니다. 음식 우파라고 하는 밥차림은 더 적은 돈으로 더 많이 먹는 길을 간다고 하는데, 패스트푸드나 공장 제품은 더 먹고 또 먹어도 배가 제대로 차지 않습니다. 그래서 으레 과식을 하지요. 게다가 값이 싸다는 것 때문에 자꾸 과식을 합니다.


  유기농이나 자연농은 한결 더 맛있다고 할 테지만, 이보다는 ‘적은 부피와 무게’에도 영양소와 칼로리가 제대로 알차게 깃들기 때문에 조금만 먹어도 배가 찬다고 느낍니다. 유기농이나 자연농 먹을거리는 ‘값이 비싸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지만, 막상 유기농이나 자연농 먹을거리는 으레 ‘소식’을 하면서도 배가 부르면서 즐겁기 때문에 ‘패스트푸드나 공장 제품을 값싸게 많이 사서 먹을 때’보다 돈이 적게 들기까지 합니다.


  더군다나, 유기농이나 자연농으로 밥을 차려서 먹으면, 소식뿐 아니라 때때로 금식이나 절식을 합니다. 어느 때에는 단식을 하지요. 왜 이렇게 하느냐 하면, 유기농이나 자연농으로 밥을 차려서 먹으면 ‘몸과 마음이 부르는 소리’를 듣기 때문이에요. 몸이 바라는 대로 ‘적게 먹’고 ‘알맞게 먹’으며 ‘즐겁게 먹’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뱃속을 가볍게 비우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밥을 한두 끼니쯤 건너뛰고, 하루나 며칠쯤 가볍게 밥굶기(단식)를 하면서도 배고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사람은 사는 장소가 도시인지, 교외인지, 농촌인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 그리고 다니는 학교나 사는 동네에 따라서도 크게 다르다. (213쪽)



  유기농이나 자연농 먹을거리를 ‘관행농 먹을거리’하고 똑같은 부피와 무게로 먹어야 한다고 여기는 일은 그야말로 이론입니다. 삶으로 살림을 짓고 아이를 돌보며 살다 보면, 이론과 삶은 너무 동떨어지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패스트푸드나 공장 제품, 이른바 치킨이나 과자나 피자나 햄버거 같은 것을 밥상에 올리면 많이 먹었는데에도 손이 그치지 않아요. 자꾸 더 먹으려고 해요. 이와 달리 유기농이나 자연농 ‘식재료’로 지은 밥이나 주전부리를 주면, 배가 불러서 더 못 먹겠다고 남기기 일쑤입니다. 아이들은 이렇게 몸이 움직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삶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집니다. 살림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서 마음이 달라집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몸을 떠나서, 아이하고 어떻게 하루를 짓느냐 하는 몸짓에 따라 그야말로 모든 삶과 살림과 사랑과 꿈이 달라지지요.



전 세계 어디에서나 음식의 양극화는 존재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건 ‘공업 제품이 된 음식’이다. (64쪽)


유기농업이 지역 내 농가 한 곳만 나서선 큰 효과를 얻기 어렵다. 헬리콥터로 일제히 농약을 살포하는 과정 자체도, 규모 이점도 무의미해질 뿐이다. (93쪽)


그들이 야사토에 정착해 농업 설비를 갖추고 타파해야 할 대상으로 삼은 건 ‘근대 농업’이었다. ‘화학비료나 농약을 대량으로 살포해 효율을 중시하고, 규모를 확대하는 논리로 수확량을 늘리는 공업화된 농업’이 바로 근대 농업이다. (95쪽)



  좌파도 우파도 아닌 ‘수수한 여느 어머니’는 비료나 농약을 쓴 곡식이나 열매나 푸성귀를 아이한테 안 먹이려고 합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며 이 모습을 아주 재미있게 지켜봅니다. 전남 고흥 시골마을에서 지내며 가만히 둘러보면,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사는 분들은 하나같이 ‘아이 아토피’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데,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농약과 비료로 지은 곡식이나 푸성귀’를 반기지 않아요. 도시에서 사는 ‘시골 출신’으로서 어떻게 짓는지 뻔히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생협 매장을 따로 찾아가서 농약과 비료를 안 친 먹을거리를 아이들한테 먹이려고 애씁니다. 이러면서 시골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해요. 시골에 있는 늙은 어머니와 아버지도 이녁 손자를 생각해서 ‘농약과 비료와 비닐을 버리는 농사법’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냥 관행농으로 익숙한 대로 농약을 치고 비료를 듬뿍 뿌리고 언제나 비닐로 온 땅을 뒤덮습니다.


  도시에 있는 ‘시골 출신’은 ‘어머니 손맛’을 생각해서 먹을 뿐 다른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머니 손맛’만으로 이녁 아이한테 밥을 챙겨 줄 수 없는 줄 알기에, ‘시골 출신 도시사람’은 도시에서 생협 매장을 찾고 ‘깨끗한 유기농이나 자연농’을 찾습니다.



오가닉 가게는 도심에서만 가능하고 인구가 적은 지방에서는 성립되기 어렵다 … 인구가 밀집한 도시에서는 다양성이 보장되고 그에 따른 선택지도 많다. 하지만 지방에서는 이를 받아들일 인구 직접도가 낮기 때문에 선택지는 최저한의 획일적인 것만 제시되기 쉽다. (123, 125쪽)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근대 농법’이 나타나기 앞서, 한국도 일본도 지구별 어느 나라도 모두 ‘자연농’이거나 ‘유기농’이었습니다. 요즈음 갑자기 생긴 자연농이나 유기농이 아닙니다. 옛날에는, 그러니까 한국으로 치면 새마을운동 앞서까지, 햇수로 치면 1960년대까지 한국에서 지은 모든 농사는 자연농이자 유기농이었어요. 아무도 농약이나 비료나 비닐을 안 썼어요. 그리고, 그무렵에는 ‘흙 파서 먹는 아이’가 많았고, 온갖 풀을 골고루 잘 먹었습니다. 이무렵에는 기생충은 몸에 있더라도 아토피는 아무한테도 없었습니다. 기생충은 약이나 약초로 다스릴 수 있었고, 아토피란 아무한테도 없으니 가끔 과자나 공업 제품을 먹어도 큰 탈이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자연스러운 밥만 먹는 사람은 ‘공업 우유’조차 꺼리거나 몸에서 안 받았습니다.


  그러면 모든 사람이 자연농이자 유기농으로 땅을 일구던 지난날에는 모든 사람이 ‘음식 좌파’였을까요? 《음식 좌파 음식 우파》는 이러한 대목을 조금 더 깊고 넓게 차근차근 짚을 수 있어야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우리가 먹는 밥을 놓고 섣불리 좌파와 우파로 가르기 앞서, ‘바른 밥’과 ‘맛난 밥’과 ‘즐거운 밥’과 ‘사랑스러운 밥’과 ‘아름다운 밥’이 무엇인가를 헤아려야지 싶습니다. “맛과 재미” 때문에 음식 좌파가 되었다고 하는 글쓴이라면, 바로 이 대목을 더 제대로 짚거나 살폈어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보다도 지구별 빈곤과 기아를 낳는 것은 ‘유기농’이 아닌 ‘군부대와 전쟁무기와 막개발’ 따위 때문이라는 대목을 슬기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4348.9.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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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목소리들 - 섹슈얼리티, 가족, 노동, 삶…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18
안미선 지음 / 오월의봄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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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1



‘날개 옷’을 잃은 ‘여성’ 목소리를 들을 한가위

― 여성, 목소리들

 안미선 글

 오월의봄 펴냄, 2014.9.1. 13000원



  안미선 님이 쓴 《여성, 목소리들》(오월의책)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안미선 님은 2009년에 《내 날개 옷은 어디 갔지?》라는 책을 선보인 적 있고, 나는 이 책을 무척 뜻있게 읽었습니다. 그래서 《여성, 목소리들》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설렜습니다. ‘날개 옷’을 찾던 안미선 님은 ‘목소리’를 담아서 이웃한테 들려주려고 하는데, 온누리에 가득한 목소리 가운데 “여성 목소리”는 무엇일까 하는 대목을 가만히 헤아리면서 이 책을 천천히 읽습니다.


  나는 이 책을 저녁에 아이들을 재우는 자리에서 읽습니다. 두 아이가 책을 읽으면서 졸음을 하는 옆에 나란히 앉아서 읽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다가 틈틈이 읽습니다. 국이나 밥이 끓기 앞서 살짝 손이 비는 틈이 있는데, 이럴 때에 몇 쪽을 재빠르게 읽습니다. 빨래를 마당에 널고 기지개를 켜먼서 읽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을 시골집에 두고 혼자 바깥일을 하러 시외버스를 타고 먼먼 길을 달릴 적에 비로소 호젓하게 읽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마주보고 킥킥 웃었다. 복용 시간을 일러 주나 싶어, 곧이곧대로 대답한 것이 후회가 되었다. 아침부터 성관계를 해 놓고 부랴부랴 달려와 약을 타 가는 칠칠맞은 여자, 그들 눈에는 은민이 그쯤으로 보인 모양이다. 모욕을 지불하고 처방전을 쥐고 돌아서서 앞만 보고 걸었다. (17쪽)


몇십 년간 안전하다며 자국 여성들에게 먹여 온 경구피임약을 부작용이 우려되니 전문의약품으로 바꾸겠다고 했지만, 피임약의 위험에 대한 자세한 통계가 제시되지 않고, 얼마나 위험하다는 건지, 세대와 개인차를 고려해 여성들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약의 복용에서 얻는 이점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않았다 … 여성은 피임을 포함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알고 이를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 (22, 24쪽)



  이야기책이라고 할까, 인문책이라고 할까, 아니면 평화책이라고 할까, 또는 사랑책이나 삶책이라고 할까, 여러모로 여러 갈래에 들 만한 《여성, 목소리들》이라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는 한국이라는 사회에서 온갖 여성이 저마다 억눌리거나 짓눌리거나 아파하는 목소리를 담아요. 저마다 다르게 억눌리는 여성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고,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회읽기’를 하며, 한국 사회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을 밝히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여성 우위’나 ‘남성 우위’가 아니라, 여성과 남성이 서로 사랑하고 남성과 여성이 서로 아끼는 길을 찾으려 합니다. 여성과 남성이라는 이름을 넘어서 ‘사람’이라는 아름다운 숨결로 서로 새롭게 깨어나서 새로운 삶을 찾자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책 첫머리는 ‘여성 피임약’ 이야기를 다룹니다. 살을 섞는 자리에서 남성은 으레 피임기구를 안 쓴다고 합니다. 아기가 들어섰을까 걱정하는 여성은 아침부터 병원에 가서 의사와 간호사한테서 찬웃음이나 비웃음이나, 여러모로 웃음을 사는 창피나 부끄러움을 겪고서야 비로소 ‘여성 피임약’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여성 피임약이 ‘위험한지 안 위험한지’ 제대로 밝혀지거나 알려진 적이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를 가르치는 성 교육도 없고 의학 교육도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여성 피임약뿐이 아닙니다. 나라에서 아이들한테 맞히려고 하는 예방주사 성분을 제대로 공개한 적이 없고, 부작용을 알려준 적이 없으며, 예방주사를 맞지 않고도 병에 안 걸리는가 하는 대목을 밝힌 적이 없습니다.



네가 나를 만나고 싶다면 내 감정에 귀 기울이라, 내 침묵을 들어라, 내 목소리를 들어라, 내가 너의 집이 아니고 다른 사람임을 받아들여라. (39쪽)


그들은 집이 더 이상 자신들을 보호하는 공간이 아니어서 가출했다가 거리에서 성폭력을 당했고, 성매매를 했고, 임신중절을 했거나 출산을 했다. (41쪽)


여자는 결혼 제도를 통하지 않고도 어머니가 될 수 있다. 안전하게 임신과 출산을 하고, 어머니 노릇을 선택할 수 있는 환경을 사회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 또한 여자는 성관계를 할 뿐 아이를 낳지 않을 수도 있다. 여자는 피임을 준비하고 요구해도 된다. (50쪽)



  한국 사회에는 ‘미혼모’라는 말은 있어도 ‘미혼부’라는 말은 없습니다. 미혼모가 되는 여성을 차갑게 보거나 불쌍하게 보는 눈길은 있어도, 미혼부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은 아예 없습니다. 젊은 사내가 들어가는 군부대에서는 어떤 일이 있을까요? 젊은 사내는 군부대에서 무엇을 보고 배울까요? ‘남자가 된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고, ‘남자다운 남자’란 무엇일까요?


  여성을 아낄 줄 모르는 마음으로는 같은 남성을 아낄 줄 모릅니다. 여성도 남성도 아낄 줄 모르는 마음으로는 어린이와 어르신을 아낄 줄 모릅니다. 여성도 남성도 어린이도 어르신도 아낄 줄 모르는 마음으로는 사람을 아낄 줄 모릅니다. 사람을 아낄 줄 모르는 마음으로는 숲도 시골도 나무도 풀도 흙도 냇물도 하늘도 바다도 이 지구별도 아낄 줄 모릅니다.


  전쟁 역사를 더듬어 살피면, 전쟁을 일으킨 ‘여성 지도자’는 없습니다. 있을까요? 어쩌면 몇 사람 있을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여성 지도자가 되어 전쟁을 일으키려는 사람이 참말 있을까요? 아마 독재자 아버지한테서 정치권력만 물려받은 사람이라면 ‘여성’이기 앞서 ‘독재자’이기 때문에 전쟁 소용돌이로 권력을 휘두르리라 느낍니다. 다시 말하자면, 모든 전쟁은 ‘남성’이 일으킵니다. 권력자 남성이 전쟁을 일으키고, 사회를 이르는 바탕인 수수한 여느 남성이 군대로 끌려가서 총알받이나 칼받이가 되어 수만 수십만 수백만이 ‘숫자놀이’처럼 목숨을 잃습니다. 권력자 남성은 전쟁무기를 휘두르면서 지도에 나타나는 땅빼앗기를 즐깁니다.



떠나면서 비로소 의문이 든다. 폭력이 지배하는 집에서 우리 노동은 왜 그렇게 이름이 없었고 우리 고통은 어째서 그 어느 사업장의 산재보다 철저히 은폐되었는지. (95쪽)



  전쟁은 언제나 폭력입니다. 폭력은 언제나 전쟁처럼 흐르고 전쟁이 됩니다. 폭력을 사랑하기에 전쟁무기를 손에서 놓지 못합니다. 폭력에 휘둘리기에 전쟁무기가 있어야 평화를 지키는 줄 잘못 알고 맙니다.


  전쟁무기로 평화를 지킨다는 생각에 휘둘리는 남성은 ‘여느 살림집’에서도 여성한테 주먹을 휘두르는 폭력이 있어야 ‘가정 평화’를 이룬다고 잘못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공장이나 회사에서 다치는 사람이 ‘산업재해(산재)’이듯이, 가사노동을 도맡아야 하면서 ‘한 집안 남성’한테서 두들겨맞거나 걷어차이는 여성도 모두 ‘산업재해’입니다.



보육교사는 거의 다 여성이다. 그들은 민간이나 개인이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최저임금을 받는다. 6∼7세 같은 경우 아이들 스무 명에 배당된 교사는 한 명이다. (153쪽)


해고는 끝이 아니었다. 2010년 10월 14일,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데 현대자동차의 정직원 관리자와 경비들이 달려들어 폭행했다. 자신들의 하청 여성 노동자가, 말 한마디 못하고 희롱을 당하고도 쥐죽은 듯 있어야 마땅할 ‘저년’이 감히 정문 앞에서 시위를 하고 서 있다고, 그들은 우우 덤벼들었다. 입을 막아야 했다. (161쪽)



  아이를 낳아서 돌본 적이 없는 사람으로서는 보육교사 한 사람이 스무 아이를 맡는 일이 어떠한 ‘삶과 일’인지 조금도 알 길이 없습니다. 아이를 어머니(짝꿍)하고 함께 낳은 아버지라고 하더라도 집 바깥에서 돈 버는 일에만 매달리느라 정작 아이를 하루 내내 보살피면서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보육교사 한 사람이 스무 아이가 아닌 열 아이를 맡는다고 하더라도 이 일이 어떠한 ‘삶과 일’인지 하나도 알 노릇이 없습니다.


  정치를 맡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는 무엇을 얼마나 알까요?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나 시장이나 군수 자리를 맡는 이들은 ‘아이키우기’를 얼마나 해 보았을까요? 아침 일찍 일터로 가서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공무원도 ‘아이키우기’를 얼마나 해 보았을까요? 정책을 결정하거나 집행하거나 세우는 모든 ‘정부·공공기관 일꾼’은 ‘아이키우기’를 하나도 모릅니다. 저마다 아이를 낳은 적이 없든, 아이를 낳았어도 ‘한집 여성이 도맡도록’ 하든, ‘아이 돌볼 일꾼을 돈으로 써서 맡도록’ 하든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혼자 아이를 돌보면서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살림하고 하는 일이 어떠한가를 제대로 아는 ‘남성’이나 ‘아버지’나 ‘정치인’이나 ‘공무원’은 매우 드뭅니다. 아이 하나만 맡아서 돌보더라도 하루가 어찌 가는가를 알 길이 없지요. 그런데 열 아이라면? 스무 아이라면? 보육교사는 아직 코흘리개인 아이들을 하나하나 오줌가리기나 똥가리기라도 해 줄 수 있을까요? 보육교사는 스무 아이한테 날마다 한 마디씩 차근차근 말을 섞을 수라도 있을까요?



“자고 싶다.” 다른 설문지를 넘겨 본다. “육아를 하고 싶다.” “여행을 가고 싶다.” 굳은 몸에서 문득 흘러나온 한마디가 햇빛 아래서 꿈틀거리는 것 같다. 일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하거나 하루에 12∼13시간을 일하고 나머지 10시간 안에 가사 노동과 가족 돌봄과 수면까지 다 해내야 하는, 그 대가로 최저임금 정도를 받는 여성들의 바람이다. (174∼175쪽)



  한국 사회에서 여성 목소리는 언제나 억눌립니다. 여성인 교사는 많아도 여성인 지식인이나 인문학자는 드뭅니다. 여성인 가정주부는 많아도 남성인 가정주부는 드뭅니다. 여성은 교사나 지식인이나 인문학자로 일하더라도, 집에서는 ‘가정주부’ 몫을 함께 맡아야 하기 일쑤입니다. 남성은 교사나 지식인이나 인문학자로 일하면, 집에서는 ‘두 다리 뻗고 놀거나 쉬면서 밥상을 받고 텔레비전을 켜고 신문을 펼치는 사람’이기 일쑤입니다. 아니, 남성은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만 일해도 ‘집에서 집안일을 거의 안 하거나 아예 안 합’니다. 여성은 회사원이나 공무원으로 일해도 ‘집안일 도맡는 가정주부’로도 일해야 합니다. 남성은 집에서도 아이하고 보내는 겨를이 짧고, 아이하고도 잘 안 놀아 주기 마련이며, 아이가 똥오줌을 아직 못 가릴 적에 기저귀조차 제대로 못 채우기 마련입니다. 집에서 천기저귀를 쓰면서 아기 똥기저귀를 손수 빨아서 햇볕에 말리거나 폭 삶아서 말리는 남성이나 아버지는 몇이나 있을까요? 아기한테 젖떼기밥을 끓여서 먹일 줄 알거나, 아이한테 밥을 차려서 먹일 줄 알거나, 아이가 크면서 배우고 살면서 익힐 슬기나 사랑을 기쁘게 물려주거나 알려주는 남성이나 아버지는 얼마나 있을까요?



노동시간이 가정을 유지하는 시간, 삶을 지탱하는 시간을 삼켜버렸다. 최장 노동시간이지만 생산성은 되레 떨어지는 이상한 구조 속에서 사람들은 가족을 희생해야 제대로 일할 수 있는 노동자로 취급받고 있다. (237쪽)


“저는 앞으로도 선택하면서 살고 싶은데 어떤 작업이든 내가 하는 선택은 나에게서 나온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재능은 별로 없지만 건강한 힘으로 사람들을 만나고 찾고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항상 있어요.” (취업준비를 하는 ‘하람’이 들려준 말/287쪽)



  안미선 님은 《여성, 목소리들》이라는 책에서 이 나라 여성 목소리만 들려줍니다. 어쩌면, 볼멘소리로 ‘꼭 그렇지는 않다구!’ 하고 부아가 나는 남성이 있을는지 모르지요. 어쩌면, 성난 소리로 ‘여자 주제에!’ 하고 한마디 내뱉을 남성이 있을는지 모르지요. ‘여성 노동자’나 ‘노동자’가 아닌 ‘하청’이나 ‘비정규직’라면서 고개를 돌릴 남성이 있을는지 모르지요. ‘가사노동자’가 아닌 ‘가정주부’일 뿐이라면서 등을 돌릴 남성이 있을는지 모르지요.


  참말 얼마 앞서까지도, 또 아직도 곳곳에서, 차례상이나 제삿상에서 여자가 절을 하면 ‘여자가 어딜 함부로!’ 하고 외치는 남성이 많았습니다. 젊은 사내나 아들이 부엌으로 가서 물을 만지려고 하면 매섭게 나무라는 남성 어르신이 많았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왜 남성과 아버지는 왜 그리 바보스러울까요? 몸으로만 보면, 남성은 여성보다 힘이 세거나 튼튼하다고 할 만합니다. 남성은 여성하고 몸으로 대면,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일을 더 많이 할 줄 압니다. 작고 가녀린 여성이 아기한테 젖도 물리고 기저귀도 갈고 밥도 하고 빨래도 하고 설거지도 하고 ‘남자 어른 수발’까지 다 하고 ‘술상 차리기’도 하고 심부름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란 무엇일까요? 여성이 남성보다 ‘힘이 없으니까’ 온갖 일을 다 시키면서 힘으로 억누르면 된다고 여기는 마음일까요?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여성‘쯤이야’ 주먹 한 방이나 발길질 한 차례로 가볍게 ‘누를’ 만하다고 여기는 마음일까요?



우리는 설문지에 새로운 질문을 넣었다. ‘일주일에 몇 번 가족과 같이 식사를 해요?’ 결과를 보니 5명 중 1명 꼴로 ‘없다’고 답변했다. 가장 많은 답변은 주 1∼2회였다. 일주일에 단 한 번도 가족과 같이 식사를 하지 못하면서 남의 밥상을 차려야 하는 속마음을 그려 본다. (181쪽)



  함께 차리는 밥상이 맛있습니다.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꽃피우는 밥상이 즐겁습니다. 함께 차리고 함께 치우는 밥상이 아름답습니다. 함께 먹을 밥을 함께 짓고 함께 가꾸며 함께 손질하여 함께 다스리는 하루가 사랑스럽습니다.


  논일하고 밭일을 서로 어깨동무하면서 하면 힘이 덜 듭니다. 서로서로 돕고 아끼면서 일을 하면 언제나 흥얼흥얼 노래가 나옵니다. 일하면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힘들지 않아요. 일하면서 웃고 춤추고 노래할 수 있다면 고단하거나 고달픈 일은 없습니다.


  한가위나 설날에 온 집안 사람들이 둥그렇게 밥상맡에 앉아서 ‘삶을 아름답게 짓는 길’을 이야기할 수 있으면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한가위나 설날이 아니어도 한집 사람들이 다 같이 동그랗게 밥상맡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생각을 살찌우고 사랑을 키울 수 있으면 그야말로 기쁜 하루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이분법은 아니지만, 우리가 사는 길은 으레 두 갈래입니다. 하나는 아름다운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안 아름다운 길입니다. 하나는 사랑스러운 길이고, 다른 하나는 안 사랑스러운 길입니다.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는 길은 안 아름답고 안 사랑스럽습니다. 거꾸로 여성이 남성을 억누른다면(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이 또한 안 아름답고 안 사랑스럽겠지요. 그러니까, 우리는 굳이 안 아름답거나 안 사랑스러운 길로 가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함께 아름답고 함께 사랑스러운 길로 가면 됩니다.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삶을 지을 수 있을 때에, 우리 보금자리부터 새롭게 피어나고, 우리 사회도 차근차근 새롭게 거듭나리라 봅니다. 4348.9.27.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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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몰이
조에 부스케 지음, 류재화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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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6



‘전쟁 불구자’가 침대맡에서 길어올린 삶

― 달몰이

 조에 부스케 글

 류재화 옮김

 봄날의책 펴냄, 2015.9.1. 12000원



  유럽에서 전쟁이 터지자 1916년에 스스로 군인이 되었다고 하는 조에 부스케 님은 1918년에 총알에 맞아 아랫몸을 쓸 수 없는 채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이때가 스무 살이었다고 해요. 전쟁통에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습니다. 프랑스 젊은이도 독일 젊은이도 영국 젊은이도 죽고 다쳤습니다. 미국 젊은이도 죽고 다쳤으며,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노예로 끌려간 뒤 어렵게 자유를 찾은 사람들 피를 물려받은 젊은이도 죽고 다쳤습니다.


  전쟁은 참으로 수많은 젊은이를 그예 죽음으로 내몹니다. 목숨을 빼앗기지 않았더라도 끔찍한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면서 마음을 다치기 마련입니다. 목숨은 잃지 않았어도 몸이 크게 다치고 말아 늘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기도 합니다. 아랫몸을 쓸 수 없어 늘 누워서 지내야 했다는 조에 부스케 님은 1950년까지 삶을 잇습니다. 서른두 해라는 삶을 침대에서 보냈습니다.



스무 살에, 나는 포탄을 맞았다. 내 몸은 삶에서 떨어져 나갔다. 삶에 대한 애착으로 나는 우선은 내 몸을 파괴하려 했다. 그러나 해가 가면서, 내 불구가 현실이 되면서, 나는 나를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상처받은 나는 이미 내 상처가 되어 있었다. (11쪽)



  산문책 《달몰이》(봄날의책,2015) 첫머리는 ‘포탄에 맞은’ 이야기로 엽니다. 스무 살에 받은 아픔과 슬픔을 첫머리로 꺼냅니다. 삶에서 떨어져 나간 몸을 이야기합니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삶에 헤매던 나날을 이야기하고, 아랫몸을 쓸 수 없는 삶을 ‘안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을 이야기합니다.


  아프지 않고서 아픔을 알 수는 없습니다. 아픈 나날을 보낸 적이 없는 사람은 아픔을 알 수 없습니다. 기쁘지 않고서 기쁨을 알 수는 없습니다. 기쁜 나날을 보낸 적이 없는 사람은 기쁨을 알 수 없습니다. 짓눌리거나 짓밟힌 나날을 보낸 적이 없으면 짓눌리거나 짓밟힌 삶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남을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못살게 굴어 보지 않았으면, 남을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못살게 구는 삶이 어떠한가를 알 수 없어요.



우리들 각자는 자기 개성 속에 감추어져 있다. 각자 삶에 대한 개념이 있지만 정작 없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시각이다. (14쪽)


우리는 우리 안에 이미 표명된 모든 시를 지니고 있다 … 시간이 생을 품으면 바로 우리 자신이 감미로운 곳이 되는 것이다. (22, 23쪽)


전에는 한 번도 탐험된 적 없는 어둠이 그 비밀스러운 세계에서 너를 당겼으며, 네 고유의 시선에 둘러싸여 네가 나타난다. (26쪽)



  산문책 《달몰이》는 서른 해 남짓 침대살이로 삶을 보내야 했던 사람이 남긴 이야기 꾸러미입니다. 창밖을 보기 싫어서 창문을 늘 가린 채 살았다는 젊은이가 겪은 삶을 적은 이야기 꾸러미입니다.


  걸을 수 없고, 밖에 나갈 수 없는 몸이라면, 창밖을 보기 싫을 수 있습니다. 만질 수 없는 창밖을 쳐다볼 마음이 조금도 안 들 수 있습니다.


  걸을 수 없고 밖에 나갈 수 없는 몸이기에, 오히려 창문을 크게 내어 창밖을 바라보면서 살 수 있어요. 언젠가 어떻게든 이 창밖으로 나가서 걷든 기든 바깥바람을 온몸으로 쐬어야겠다고 다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창문을 가리든 열든, 삶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아랫몸을 쓸 수 없는 삶은 늘 같아요. 이리하여 조에 부스케 님은 생각에 잠깁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는 나날이 참말 삶다운가를 생각하고, 사람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합니다. 끔찍함과 미움과 슬픔과 아픔이 고스란히 되풀이되는 하루일 수 있는데, 이런 하루라면 이 모든 끔찍함과 미움과 슬픔과 아픔을 더욱 낱낱이 파고들면서 생각합니다.



신이 자기 안에 있다고 느끼지 못하면서 사랑을 느끼는 것도 끔찍하다 … 우리 내면은 한계가 없으며, 명명하는 것을 해방시킨다. 우리 언어는 결코 단 한 사람의 언어가 아니다. 내 안에 두 존재가 있다고 내가 말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나’라고 말할 줄 모른다. 우리 의식은 말을 하면서 우리를 생존하게 하려는 시도에 다름 아니다. (30쪽)


그 이튿날 나는 깊이 생각하며 전율했다. 내 몸과 나는 한갓 흙 부스러기이며, 사는 것이야말로 은혜로운 것이라는데, 내 부서진 몸 앞에서 삶은 벽에 불과하다 … 네 말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을 줄 모르면 신에게 말을 걸지 마라. (80쪽)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은 거의 생각을 안 하면서 삽니다. 너무 바쁘기 때문입니다. 몸이 성해서 이곳저곳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사람은 오히려 ‘이곳저곳 마음대로 가지 않’고 쳇바퀴처럼 ‘늘 가는 곳만 가면’서 살기 일쑤입니다. 출퇴근만 하느라 똑같은 길을 똑같은 때에 오가는 사람이 대단히 많아요. 출퇴근을 하면서 제 삶을 가만히 돌아보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몸은 틀림없이 성하지만, 마음은 아주 좁은 데에 갇혀서, 아무런 생각이 피어나지 않는 사람이 몹시 많아요.


  서른 해 남짓 침대에서만 지낸 조에 부스케 님은 생각으로 삶을 꽃피웁니다. 생각으로 지을 수 있는 삶을 스스로 가장 높고 깊은 데까지 끌어올리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구별 한쪽에 ‘몸은 홀가분하지만 마음은 막힌’ 사람이 있고, 지구별 다른 한쪽에 ‘몸은 갇혔지만 마음은 활짝 연’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어느 쪽에 서는 삶일까요?



전쟁의 출구가 어디 있는지 나는 모른다. 전쟁에 나갈 것을 강요받은 자들이 전쟁의 근원을 더 많이 아는 것도 아니다. 전쟁의 근원은 전쟁인가? 아니면 이 시대의 불행인 전쟁 세대인가? (88쪽)


우스운 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너. 누군가를 생각해라. 삶이라는 게 네 관대함 안에만 있으면, 네 사랑 안에만 있으면 그 누군가는 위대하다. (104쪽)




  나는 요 스무 날 가까이 거의 못 걸으면서 지냅니다. 구월 첫머리에 논둑길에서 자전거가 미끄러지면서 오른무릎을 크게 다쳤고, 오른무릎을 다친 뒤 사흘 동안 몸져누워 끙끙 앓기만 했으며, 그 뒤 닷새 즈음 일어서지도 못하며 기어다니기만 했습니다. 겨우 일어서서 걸음을 뗄 수 있어도 몇 걸음 옮기지 못해 주저앉아야 하고, 무릎을 다친 지 스무 날이 지난 요즈음은 마을을 한 바퀴 걸어서 돌아다닐 수는 있으나 걸을 때마다 무릎이 쑤시고, 이렇게 걸은 뒤에 한참 드러누워서 쉬어야 합니다.


  《달몰이》를 쓴 조에 부스케 님처럼 서른 해 남짓 침대에 드러누워 사는 몸은 아니지만, 요 스무 날 남짓 나한테 찾아온 자전거 사고와 생채기와 몸져눕기와 기어다니기와 새롭게 걸음마 떼기를 겪으며 가만히 돌아봅니다. 무릎에 고인 피고름을 짜며 온몸이 찌릿찌릿 아플 때마다 이 아픔은 뭔가 하고 조용히 되새깁니다. 무엇보다 한 가지를 또렷하게 느낍니다. 아파서 드러눕지 않고서야 아픈 채 드러누워 지내는 사람이 어떤 마음인가를 읽을 수 없습니다. 아파서 드러누운 동안 ‘내가 언제 튼튼한 몸으로 씩씩하게 걷거나 달리거나 자전거를 탔는가?’ 하고 까마득하게 생각했습니다. 걸을 수만 있어도 삶이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가를 새롭게 느낍니다. 그저 걸음마를 새롭게 떼려고 용을 쓰는 동안 ‘삶에서 가장 대수롭게 살필 대목은 무엇인가?’ 하고 온몸으로 아로새깁니다.



세계는 세계 속에서보다 내 속에서 더 크다. 그러나 나는 내 가슴속에서 펼쳐지는 현실로부터 몰려나왔다. (164쪽)


널 보지 않는다 해도, 신은 이미 네 안에 들어 있다. (181쪽)


인간은 이미지일 뿐 표현된 게 아니다. (189쪽)



  우리는 누구나 스스로 해야 할 일을 하며 살아야 즐겁습니다. 남이 시키는 일을 할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마음속에 지은 꿈을 이루며 살아야 할 사람입니다. 언제나 내 마음속 꿈길로 달릴 수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쳇바퀴를 돌거나 톱니바퀴가 되는 삶이어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을 제대로 읽고, 내 마음에 깃든 고운 님을 읽으며, 내 마음에 고운 님이 눈부시게 피어나도록 사랑을 가꿀 수 있어야 합니다.


  《달몰이》를 쓴 조에 부스케 님은 “신은 이미 네 안에 들”었다고 말합니다. ‘신’이란 ‘하느님’일 테고, 하느님이란 바로 내 숨결이자 넋일 테지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꿈을 품을 수 있고, 이 꿈을 제대로 바라보면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의 모두라 할 만큼 아주 많은 사람들은 마음에 미처 꿈을 못 품기 마련입니다. 마음에 꿈을 품지 못했기에 꿈으로 나아가는 길을 모릅니다. 아니, 꿈으로 나아가는 길이 없지요.


  오늘날 학교에서는 꿈을 배우지 못합니다. 오직 시험공부만 배웁니다. 오늘날 학교에서는 꿈을 가르치지 못합니다. 오로지 직업만 가르칩니다. 학교를 다닌 아이들은 시험공부만 하다가 이런 직업이나 저런 일자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를 다니면서 마음속에 꿈을 심거나 품는 아이들은 매우 드뭅니다. 스스로 어떤 사람이요 숨결이며 넋인가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매 순간 성 안으로, 네 안으로 들어가라. 네가 관여하는 행위가 허깨비 같은 행위에 불과해도 해라. 네 영혼 안에서 본질적으로 완수하는 것이 있는 법이다. 그것을 해라. 비밀 속에서 작용하는 것만이 실제이다. 네가 하는 것은 그 이미지에 불과하다. (138쪽)


인간은 모두 나처럼 상처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 상처 덕분이었다. (172쪽)



  아랫몸을 쓸 수 없는 채 침대에서만 지내야 했던 젊은이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나날을 끔찍하게 괴로워 합니다. 괴로움에 시달리던 어느 날 생각을 바꿉니다. 침대맡을 떠날 수 없다면 침대맡에서 살기로 합니다. 침대맡에서 죽을 수밖에 없다면 침대맡에서 살고 살다가 죽기로 합니다. 이리하여, 침대맡에서만 지내야 하는 ‘전쟁 불구자 젊은이’는 온 기운을 ‘생각짓기’에 쏟고, 생각으로 지은 삶과 사랑과 꿈을 ‘글’로 옮기기로 합니다. 침대맡에서 쓴 글은 책이 되어 새롭게 태어나고, 때로는 잡지가 되어 새로운 숨결이 됩니다. 침대맡에서 빚은 생각은 날개를 펼쳐 온누리 곳곳으로 훨훨 날아갑니다. 글을 빚는 ‘전쟁 불구자 젊은이’는 이녁 몸을 어디로도 보낼 수 없지만, 이녁 마음을 글이라고 하는 그릇에 생각을 심으면서 어디로든 훨훨 날려 보낼 수 있습니다.


  달을 몰고 갑니다. 달을 몰려고 갑니다. 달을 몰면서 스스로 달이 되고, 달을 몰다가 스스로 달님이 됩니다. 달빛이 어리는 이야기가 글 한 줄로 태어나고, 달무리가 지는 이야기가 책 한 권으로 거듭납니다.


  삶을 이루는 고운 님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우리를 기다립니다. 불러서 깨워 주기를, 일으켜 세워 주기를, 걸음마를 뗄 수 있게 해 주기를, 어깨에 날개를 달아서 훨훨 날도록 해 주기를 기다립니다. 4348.9.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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