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집이야기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이목 옮김 / 산처럼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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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1



수수한 것을 그러모으는 손길이 사랑스러워

― 수집 이야기

 야나기 무네요시 글

 이목 옮김

 산처럼 펴냄, 2008.6.5. 18000원



  나는 아이들하고 함께 살며 ‘재미난 모으기’를 한 가지 합니다. 무엇인가 하면, 아이들이 빚은 글조각이나 그림종이입니다. 두 아이가 꼬물꼬물 놀린 글씨가 깃든 작은 종잇조각을 모으고, 두 아이가 저마다 저희 마음을 담아서 신나게 빚은 그림종이를 모아요.


  큰아이가 여덟 살을 누리는 올해를 돌아보면, 두 아이가 내놓은 글조각하고 그림종이는 퍽 많습니다. 작은 상자로 여럿 됩니다. 앞으로도 글상자나 그림상자는 늘어날 테지요. 온누리에 오직 하나뿐인 ‘재미난 모으기’이고, 이웃집에서는 이웃 어버이가 이웃 아이한테서 이러한 글조각이나 그림종이를 모을 만하리라 느껴요. 저마다 그야말로 온누리에 오로지 하나 있는 멋진 모으기를 할 수 있을 테지요.



물건을 사 모으는 데에 돈도 힘이 될 테지만, 그 이상으로 뜨거운 마음이 힘이다 … 사물에 대한 사랑은 솔직해야만 한다. 사물은 사람과 사람의 훌륭한 중개자다. 마음과 마음을 조금이라도 기물을 매개로 해서 만나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8, 24쪽)


좋은 물건은 흠집이 있어도 좋고, 나쁜 물건은 완전해도 나쁘다 … 사물이 존재하니까 선택한다기보다는, 선택됐기 때문에 사물이 존재한다는 쪽이 맞다. (44, 54쪽)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수집 이야기》(산처럼,2008)를 읽습니다. 이 책은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민예품’을 모으면서 겪은 이야기를 다룹니다. 아직 사람들이 제 값어치를 알아보지 못하던 물건을 처음 만나던 이야기를 들려주고, 더없이 수수해서 아무도 문화재라고 여기지 않는 여느 사람들 옷감이랑 옷에 깃든 오래된 숨결과 손길이 얼마나 고운가 같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는 것은 곧 보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잘못이다. 물건을 보기 전에 지식을 움직이면, 대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이 방해받게 된다는 사실을 왜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 지식으로 무언가를 계산하면, 그 지식으로 측정 가능한 범위 이내의 요소로 말미암아 제대로 볼 수 없는 법이다. (71쪽)


부자들은 유명 작품이 아니면 사지 않을 만큼, 또는 살 수 없을 정도로 자유롭지 못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81쪽)



  일본사람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수집 이야기》라는 책에서 ‘일본 민예품’을 그러모은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러면, 한국에서는 ‘한국 민예품’을 그러모은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을까요? 아무래도 거의 없다 싶으나, 예용해 님은 ‘인간 문화재’ 이야기를 썼고,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가 ‘한국 민예품’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그러면 요즈음에도 이렇게 ‘한국 민예품’ 이야기를 다루거나 쓸 만한 사람이 있을까요? 가만히 헤아려 보는데, 아무래도 요즈음에는 ‘한국 민예품’ 이야기를 다루거나 쓸 만한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살림살이를 집집마다 손수 지어서 썼으나, 오늘날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게에서 물건을 사다가 써요. 집집마다 다 다르게 가꾸거나 보듬는 살림살이를 찾아보기 어려운 만큼 이제는 ‘한국 민예품’을 이야기하기는 몹시 어려우리라 느껴요.



우리가 내심 탄복했던 물건들을 수집해서 앞에 늘어놓고 보았을 때, 그 대부분이 지금까지 소중하게 다뤄지지 않던 민기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103쪽)



  가만히 보면, 요즈음에는 ‘명품’이나 ‘진품’ 이야기를 다루는 글이 퍽 많습니다. 그리고, 수수한 살림살이 이야기를 다루는 글은 몹시 드물 뿐 아니라, 여러 회사에서 나온 공산품을 견주어서 따지는 글이 아주 많아요. 이른바 ‘상품평’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벌이는 몸짓이나 모습을 놓고 ‘관전평’을 쓰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스스로 짓는 삶이나 살림이 사라지면서, 수수한 이야기가 사라지는 흐름입니다. 스스로 가꾸는 삶이나 살림이 자취를 감추면서, 수수한 사랑과 꿈을 노래하는 숨결이 잊혀지는 흐름입니다.


  그래도 인터넷과 사진기가 널리 퍼지기에, 텃밭을 가꾸는 사람들 이야기가 부쩍 늘어요. 지난날에는 누구나 흙을 일구었으니 굳이 이런 밭짓기 이야기를 사진으로 찍지도 않고 글로도 안 남겼다고 할 만한데, 오늘날에는 조그마한 텃밭에 씨앗을 심어서 손수 기르는 이야기를 사진으로도 찍고 글로도 남기는 사람이 많아요. 그리고, 이러한 이야기는 어린이책이나 어른책으로 두루 나옵니다.



잘못 보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빈손으로 사물과 접하지 않기 때문이다 … 직관이 고마운 까닭은 망설임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어떤 명성 따위에 의지할 필요가 사라진다. (152쪽)


나는 너무도 행복했다. 이런 책과 우연히 만날 수 있었다는 현실에. 멋진 책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그 아름다움을 감지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어졌다는 것에. 그리하여 그것을 원할 수 있고 신변 가까이에 둘 수 있을 만큼 좋은 환경에 있다는 것에. 더욱이 이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많은 친구들까지 있다는 것에. (223쪽)



  수수한 것을 그러모으는 손길이 사랑스럽다고 느낍니다. 이를테면, 젓가락이나 숟가락을 손수 나무를 깎아서 지을 수 있는 손길이 사랑스럽다고 느낍니다. 지난날에는 신 한 켤레도 손수 빚었어요. 옷이야 아주 마땅히 손수 지었고, 밥도 언제나 손수 지었지요. 집도 언제나 손수 지으면서 가꾸었지요.


  따로 전문가를 두지 않은 옛사람 삶입니다. 몇몇 전문가가 있는 삶이 아니라, 누구나 손수 삶을 짓는 삶이었기에, 참말 옛사람이 빚은 수수한 살림살이는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보든 모두 ‘멋지거나 사랑스러운 민예품’이 될 만했지 싶어요.


  어떤 솜씨를 뽐내려고 짓는 살림살이가 아니거든요. 뭔가 놀라운 재주를 부리려고 짓는 살림살이도 아니에요. ‘민예품’이란 수수한 사랑으로 수수한 손길을 뻗으면서 태어납니다. 여느 살림집에서 쓰는 살림살이는 수수한 꿈으로 수수한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하나하나 빚습니다.



자연에서 보자면 애초 그 같은 상하의 구별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 저마다의 특색이 있기 때문에 이 흙에 순종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어떠한 흙이라도 그 나름대로 소생할 것이다. (251쪽)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다기라고도 불리는 각발은, 발견됐을 당시만 하더라도 일반 농민 집에서 닭모이를 담아 두는 그릇이었다고 나카니시 씨한테서 직접 그 사연을 들었다. (256쪽)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수집 이야기》는 그야말로 수수한 사람들이 지은 살림살이를 만난 기쁨을 노래하는 책입니다. 멋부리지 않은 살림살이에서 노래가 흐르고, 꾀부리지 않은 살림살이에서 이야기가 자랍니다. 멋내지 않은 살림살이에서 외려 멋이 흐르고, 꼼수가 없는 살림살이에서 더없이 환한 숨결이 자랍니다.


  앞으로 2050년이나 2500년 무렵이 되면 2000년대 첫무렵 요즈음 사람들이 쓰는 살림살이를 어떻게 바라볼 만할까요? 2000년대 첫무렵 요즈음 우리가 쓰는 살림살이는 참말 ‘살림살이’라고 할 만할까요, 아니면 어느 만큼 쓰다가 버릴 수밖에 없는 플라스틱 쓰레기라고 할 만할까요. 4348.10.3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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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어떻게 배우는가 - 인지과학이 발견한 배움의 심리학 하워드 가드너의 마음의 과학 1
하워드 가드너 지음, 류숙희 옮김 / 사회평론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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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13



오늘날 학교에서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 인간은 어떻게 배우는가?

 하워드 가드너 글

 류숙희 옮김

 사회평론 펴냄, 2015.9.3. 2만 원



  배우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면 누구나 늘 배웁니다. 학교를 다닐 때에만 배우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는 학교가 널리 퍼져서, 꼭 학교에 다녀야만 배울 수 있는 줄 여기지만, 사람은 먼먼 옛날부터 학교가 아닌 집에서 먼저 배웠고, 마을에서 배움을 넓혔고, 들과 숲과 바다에서 배움길을 한껏 펼쳤습니다.


  여느 때에 집에서 즐겁게 삶을 배울 줄 아는 사람일 때에, 나중에 학교에 가서도 즐겁게 지식이나 정보를 배웁니다. 여느 때에 마을에서 기쁘게 사랑을 배울 줄 아는 사람일 때에, 나중에 먼 고장 이웃이나 동무를 만나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새로운 꿈을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여느 때에 들과 숲과 바다에서 온누리를 배울 줄 아는 사람일 때에, 이 지구별을 넉넉히 품에 안으면서 사람으로서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배웁니다.



나는 세상을 이해하는 사람, 그 이해를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 열렬하고 지속적으로 이해를 개선하려는 사람을 간절히 바란다. (22쪽)


300년 전 학교에서는 엘리트만을 가르쳤고, 주로 종교적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그 다음 200년에 걸쳐서는 좀더 큰 집단을 가르쳤고, 주로 세속적인 성향을 보였다. 이렇게 변화한 이유는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읽고 쓸 수 있는 믿을 만한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뚜렷한 교육 계획과 권한을 가진 중앙집권적 교육담당 부서가 나타났다. (61쪽)



  하워드 가드너 님이 쓴 《인간은 어떻게 배우는가?》(사회평론,2015)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이 책은 ‘현대 사회 학교교육’은 사람한테 무엇을 가르칠 만한가를 다룹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학교를 다니면서 무엇을 배울 만한가를 찬찬히 짚습니다. 다만,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학교와 삶과 사람 사이에 맺는 실타래를 푸는 책인데, 한국 사회는 으레 미국 사회를 좇거나 따르기 마련이니, 한국 사회에서 학교교육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흐름인가를 읽는 데에도 길동무가 될 만하리라 느낍니다.


  그러면 한국 사회에서는 학교가 어떤 구실을 할까요.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사회 구성원을 이룰 아이들이 사회에 잘 길들도록(적응하도록)’ 교과서를 엮습니다. 사회를 고치거나 바로잡거나 갈고닦거나 새로 지을 만한 아이들이 아니라, 사회에서 시키는 일을 고분고분 잘 따르는 ‘사회 구성원’이 될 만한 교육을 시키려는 중앙정부예요. 요즈음 한국 중앙정부가 역사 교과서를 ‘국정교과서’로 바꾸겠다고 난데없이 나서듯이, 한국 중앙정부는 ‘정부가 시키는 대로 머릿속에 지식을 집어넣어서, 정부가 바라는 대로 사람들이 끌려다니’도록 학교교육 얼거리를 짭니다.



평범한 우리는 스스로의 생각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마음이 잘 작동하는 방식과 그렇지 못한 방식을 평가하고, 우리의 사고를 정립하기 위해 공부를 할 때 도움이 될 전략과 보완방법에 대해서도 가치를 평가할 수 있게 될 것이다. (113쪽)


인간은 그저 가르치고 배우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은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 왜 그것을 배우고 가르쳐야 하는지를 선택하고 결정하낟. (119쪽)



  왜 오늘날에는 ‘보통교육’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아이들을 학교에 넣으려고 할까요? 왜 오늘날에는 모든 아이들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학교에 가야만 할까요?


  말은 보통교육이지만, 오늘날 학교교육은 교과서 지식하고 정보만 달달 외워서 시험문제 풀이를 하도록 내모는 얼거리입니다. 허울은 의무교육이지만, 오늘날 학교교육은 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같은 교과서를 쳐다보면서 ‘교과서 밖 이야기’에는 눈을 감거나 등을 돌리도록 내모는 얼거리입니다.


  국정교과서가 아니더라도 아이들은 ‘교과서 밖’을 살피기 퍽 어렵습니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도 어린이책하고 청소년책이 꽤 많이 나옵니다만,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어린이책하고 청소년책이 교과서 진도 보조교재 구실’에서 크게 못 벗어납니다. ‘교과서 학습에 도움이 된다’고 하는 글월을 책에 버젓이 찍으면서 펴내는 어린이책하고 청소년책이라고 할까요. 교과서 진도에 맞추어서 어린이책이나 청소년책이 바뀌는 얼거리라고 할까요.


  그러니까, 어린이가 어린이답게 자라도록 북돋우려는 어린이책이 아직 드문 한국 사회요, 청소년이 청소년답게 꿈을 키우도록 도우려는 청소년책이 아직 모자란 한국 사회입니다.



학교교육의 실제 내용에 대해 생각해 보자. 많은 사회에서 중앙관료들이 교육과정을 결정하고 있고, 숙달해야 할 지식의 본질에 대해 공적인 논의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다. (155쪽)


수학에서 유클리드의 증명을 완벽히 체득하거나 모든 대수공식과 삼각비공식을 반드시 습득할 필요는 없다. 예술의 모든 형태를 공부하거나 역사적 사건을 다 알 필요도 없다. 그러나 학생들은 과학자, 기하학자, 예술가, 역사가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알 수 있도록 자신의 능력껏 사례들을 충분하고 깊이 있게 탐구해야 한다. (179쪽)



  역사 교과서를 중앙정부에서 쓰는 대로 아이들이 배워야 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배운 지식’이 ‘참’이라고 하는 대목에 길듭니다. 나라에서 가르치는데, 학교에서 가르치는데, 설마 거짓을 가르치겠느냐고 여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다른 교과서는 어떠할까요? 한국말은 중앙정부가 국정교과서로 슬기롭게 가르치는가요? 아이들이 한국말을 슬기롭게 배워서 사랑스레 쓰도록 북돋우거나 돕는 국정교과서인가요, 아니면 ‘기초지식’이나 ‘시험지식’에 얽매이는 한국말 교과서일까요? 영어 교과서는 어떠하고, 과학 교과서나 수학 교과서는 어떠할까요? 영어를 왜 어떻게 얼마나 배워서 이러한 영어를 어디에서 누구하고 어떻게 써야 즐거운가 같은 대목을 교과서로 슬기롭게 보여줄는지요?



교사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들에게 초기에 형성된 부적절한 표상과 오개념이 지속되는 데 가담하게 된다. 학생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정보를 사용하도록 장려하지 않고 단순히 교재와 수업내용을 암기했는지를 평가하는 필기시험 … 학생들이 단순히 교재와 수업내용을 암기했는지를 평가할 뿐 새로운 방식으로 정보를 사용하도록 도전할 의욕을 주지 않는 필기시험 환경 … (186쪽)


궁극적으로 진실, 아름다움, 선함의 문제에 대한 사회의 답이 중요하지만, 우리의 개인적인 질문과 답은 더욱더 중요하다. 진실, 아름다움, 선함 사이의 접점과 반향들은 그것의 독특한 특성만큼이나 중요하다. (327쪽)



  《인간은 어떻게 배우는가?》라고 하는 인문책은 제도권 학교교육에서 담아내어 아이들을 이끌 틀을 어떻게 세울 때에 알맞거나 올바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으려고 합니다. 아이들을 똑똑하게 가르치는 학교교육이 아니라, 아이들이 저마다 제 삶을 차분히 바라보면서 제 마음을 제대로 드러낼 수 있도록 이끄는 학교교육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짚습니다. 더 많은 지식을 학교에서 배우는 얼거리보다는, 한 가지 지식이라도 뿌리와 줄기와 잎과 열매와 꽃을 골고루 살펴서 제대로 생각하도록 이끄는 얼거리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얼마나 유연해질 수 있을까? 사람들이 반드시 합리적으로 일하지 않는다는 것을 심리학자들은 관찰하고 증명했다. 나는 사실 미국인들이 독특한 여섯 가지 경로들을 만들고 지킬 수 있을지 의심하고 있다. (353쪽)



  모든 아이는 학교에 다니기 앞서 집에서 배웁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기 앞서 어버이 스스로 먼저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보육원에 가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제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사랑을 받고, 제 보금자리에서 삶을 물려받으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따사로운 손길로 즐겁게 사랑을 베풀면서 가르쳐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제 어머니와 아버지가 일구는 삶을 지켜보면서 저마다 새롭게 삶을 짓는 꿈을 키우려고 태어납니다.


  아이들은 어느 만큼 나이를 먹은 뒤에 직업교육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떤 나이가 된 뒤에 직업훈련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하고 싶은 꿈을 찾아야 합니다. 아이들 스스로 꿈을 찾을 수 있으면, 이때부터 아이들은 스스로 배움길을 떠나지요. 꿈이 없는 아이들은 배움길을 나서지 못해요. 꿈이 없는 아이들을 학교에 몰아넣는다고 해서 교육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꿈이 없는 채 또래 무리가 좁은 울타리인 학교에 갇히니, 이러한 학교에서는 폭력과 따돌림 따위가 자꾸 불거질 수밖에 없습니다. 꿈이 없는 또래 무리는 아름다운 길보다는 바보스러운 짓으로 흐르기 마련입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말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들이야말로 정말 중요하다. (360쪽)


한 가지 방식으로 일하는 법만 배운 기관들은 힘이 들더라도 새로운 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해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363쪽)



  《인간은 어떻게 배우는가?》라는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생각합니다. 이런 책은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 같은 사람이 읽고서 배울 만한 책입니다. 교육부라든지 중앙정부 공무원이 책상맡에서 서류만 붙잡지 말고 이런 책을 읽을 노릇입니다.


  스스로 새롭게 배우지 않고서는 스스로 새로운 하루를 짓지 못합니다. 스스로 새롭게 사랑을 가꾸지 않고서는 스스로 새로운 삶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똑같은 몸짓은 똑같은 하루를 빚습니다. 새로운 몸짓은 새로운 하루를 빚습니다. 아이들이 저마다 어떻게 노는가 하고 물끄러미 지켜보셔요. 이렇게만 해도 ‘어른’들은 아주 쉽게 삶을 배울 수 있습니다. 기쁘게 웃고 차분하게 노래하는 아이들은 ‘똑같은 놀이’를 두 번 다시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훑는 눈길로는 아이들 놀이가 다 똑같아 보일는지 모르나, 아이들은 참말 똑같은 놀이를 안 합니다. 늘 조금씩 새롭게 바꾸어서 한결 재미나게 놀이를 누립니다.


  삶에서 배우기에 마을과 학교에서도 배웁니다. 삶에서 배우지 못하면 학교를 아무리 오래 다녀도 아무것도 못 배웁니다. 삶에서 배우기에 이웃사람하고 어깨동무를 하면서 즐겁게 배웁니다. 학교가 학교다우려면 중앙정부 손길을 되도록 덜 타거나 안 타면서, 마을이나 고장에서 조그마한 지역자치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학교를 마친 뒤에 졸업장을 받지 않는다면, 졸업장을 따지지 않을 수 있는 사회라면, 참말 학교는 슬기롭고 올바르게 학교교육을 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4348.10.30.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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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슈올레 - 놀멍 쉬멍 먹멍 일본 규슈 걷기 여행
손민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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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읽기 삶읽기 212



두 다리로 걸을 때에 비로소 여행이 된다

― 규슈올레

 손민호 글·사진

 중앙북스 펴냄, 2015.9.1. 15000원



  제주에서 ‘올레길’이 관광상품으로 생긴 뒤 크게 사랑받으면서 온 나라 곳곳에 ‘걷는 관광’이 널리 퍼졌습니다. 그런데, ‘제주 올레길’이 따로 없었어도 제주로 나들이를 다니는 사람 가운데 적잖은 이들은 두 다리나 자전거로 제주를 돌았습니다. 2007년에 관광상품 ‘올레길’이 생기기 앞서까지 사람들이 조용히 ‘걷는 나들이’를 즐겼다면, 2007년에 관광상품이 생기고 나서는 여러 가지 ‘코스’가 생겨서 이러한 코스를 따라서 움직이는 물결이 넘실거립니다. 이제는 예전처럼 조용한 ‘걷는 나들이’를 누리기 어렵다고 할 만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지난날에 여행을 다니던 사람들은 으레 걸었습니다. 때때로 버스나 기차를 타기도 했지만, 지난날에는 여행을 다니던 사람들은 걸어야 제대로 여행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걷지 않고서는 마을도 자연도 풍경도 도심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관광버스에 탄 채 이 지점에서 저 지점으로 달려서는 기념품 장만하는 일밖에 못 합니다. 관광버스에서 내려서 이곳부터 저곳까지 천천히 걷거나 빙글빙글 에돌아서 다닐 때에 비로소 마을도 자연도 풍경도 도심도 알 수 있습니다.



규슈올레를 처음 고안한 것은 일본의 관광 당국이었지만, 길에서 손님을 맞는 건 보통의 일본 사람이다. (8쪽)


도심 올레의 특징은 아기자기한 재미에 있다. 입이 떡 벌어지는 대자연의 위용 같은 건 없다. 대신,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다 보면 소소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26쪽)



  ‘제주올레’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규슈올레’를 태어나게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규슈올레》(중앙북스,2015)라고 하는 책에 찬찬히 담깁니다. 한국 제주에서 크게 사랑받는 관광상품을 일본에서 받아들인 셈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굳이 제주올레를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오랫동안 이어온 ‘걷는 나들이 문화’가 있습니다. 일본에서 애써 제주올레를 받아들이려 했다면, 일본 사회에서 오래도록 여러 사람들이 누린 수수한 문화를 넘어서, 이를 관광상품으로도 ‘개발’하려는 생각 때문이라고 해야겠지요. 오늘날에는 관광이 ‘문화상품’이기도 하니까요.



규슈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고속도로와 바투 붙은 교통의 요지를 한국 여행사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단 한 명도 이날 이전에 야메시에 들어온 적이 없었던 것이다. 시쳇말로 ‘일본 관광으로 먹고산다’는 여행사 사람에게도 야메는 지나치는 도시였다. (55쪽)


깊은 숲을 헤집는 소위 산중 올레가 아니어서 가라쓰 코스의 흙길은 반갑다. 가라쓰시 공무원들의 노고가 길에서 팍팍 느껴졌다. (96쪽)




  여러 가지를 한자리에 놓고 헤아려 봅니다. ‘관광상품’하고 ‘문화상품’하고 ‘관광산업’하고 ‘문화산업’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둘레를 구경하거나 삶을 짓는 이야기를 상품이나 산업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오늘날 사회를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그동안 상품이나 산업이라고 한다면 버스나 비행기나 기차나 배를 써서 사람들을 한꺼번에 싣고 나르면서 기념품을 사도록 이끄는 몸짓이었다고 할 만합니다. 이러다가 이러한 상품이나 산업이 ‘기념품은 없어도 되는’ 흐름으로 바뀌면서 ‘관광객 스스로 여러 시간을 걷거나 하루를 꼬박 걷는’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할 만합니다.


  여느 때에 잘 안 걷던 사람은 ‘아무리 멋진 올레길’이라 하더라도 두어 시간을 걷기 어렵습니다. 그저 수수하고 판판한 길이라 하더라도, 여느 때에 첨단 도시문명 혜택을 받으며 살던 사람들은 이 길을 잘 못 걷습니다.


  걷기가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걷다가 지치지요. 걷다가 지치면 ‘아무리 멋진 올레길’을 걷더라도 둘레를 살피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규슈올레》에 나오는 일본 규슈 올레길은 ‘가게 하나 나오지 않고 여러 시간 걷는 길’이 꽤 많다고 할 만합니다. 마실거리랑 먹을거리를 가방에 짊어지면서 여러 시간을 걷다가 마땅한 곳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도시락을 먹는 나들이가 될 텐데, 이러한 관광상품은 도시사람한테 얼마나 기쁘거나 새로운 나들이가 될는지 궁금합니다. 아니, 이런 나들이는 예부터 누구나 들놀이나 바닷놀이를 다니면서 수수하게 즐겼어요. 관광상품이 없었어도 다니던 들놀이요, 문화상품이 아니어도 누리던 바닷놀이입니다.



벳푸 코스는 흙을 밟는 길이다. 지난 계절의 낙엽을 밟는 길이고, 보드라운 흙을 디디는 길이다. 흙을 밟는 길이어서 발이 편한 길이다. 일행 중 일부는 오르내리는 구간이 많아서 힘들었다고 했지만, 나로서는 발이 편해서 힘든 줄을 몰랐다. (111쪽)


언제부터인가 사람들 사이에서 잊힌 마을, 외부인의 출입이 거의 없어 갇힌 마을, 젊은이는 떠나고 어르신만 남아 허전한 마을이 오쿠분고 코스가 거치고 들르는 마을이다. (118쪽)


  여느 때에 늘 매캐한 하늘과 우중충한 건물과 시끄러운 자동차한테 휩쓸려서 지내야 하니까, 모처럼 맑은 하늘과 푸른 숲과 싱그러운 새소리를 들을 수 있는 나들이가 참으로 재미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만, 새와 풀벌레가 노래하는 소리도, 이러한 소리가 익숙할 때에 노래로 받아들입니다. 흙내음이나 풀내음도 이러한 내음이 익숙할 때에 싱그럽다고 받아들여요. 방아깨비나 나비 애벌레조차 징그럽다고 여길 수 있으니까요.


  이리하여, 두 다리로 걸을 때에 비로소 여행이 됩니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두 다리로 걷지 않을 때에는 여행이 안 됩니다. 그리고, 두 다리로 걷다가 한참 가만히 서거나 앉을 때에 비로소 여행이 됩니다. 두 다리로 걷더라도 마땅한 때에 멈추거나 서거나 쉬거나 머무를 줄 모른다면 여행이 안 됩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고속도로를 타고 휭 달리는 일을 놓고 여행이라 하지 않아요.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비행기를 타고 쌩 가로지르는 일을 가리켜 여행이라 하지 않습니다. 걸어서 둘레를 살필 적에도 마냥 걷기만 하고 걸음을 멈추지 않으면 여행이 될 수 없습니다.


  여행이 아닌 삶자리에서도 이와 같다고 느껴요. 두 다리로 걸으면서 일할 때에 비로소 삶이 되지 않을까요? 두 다리로 걸으면서 놀 때에 비로소 기쁨이 되지 않을까요?


  바람을 마실 때에 여행이 되듯이, 바람을 마시는 자리가 즐거운 일자리가 아닐까요? 햇볕을 쬐고 풀내음을 맡으면서 숲을 바라볼 때에 여행이 되듯이, 햇볕이랑 풀내음이랑 숲이 어우러진 곳에서 일할 때에 기쁜 삶이 아닐까요?




길을 걷다 보면 구주연산 산마루가 눈앞에 펼쳐진다. 고코노에·야마나미 코스는 구주연산을 오르는 길이 아니라 구주연산을 바라보며 걷는 길이다. (135쪽)


야트막한 언덕을 내려오다 걸음을 멈췄다. 풍경에 눌려 걸음을 멈춘 적이 있으면 무슨 뜻인지 알 터이다. 문자 그대로 그림 같은 장면이 앞을 가로막았다. (168쪽)



  예부터 사람들은 누구나 늘 걸었습니다. 권력자는 걷기를 싫어해서 일꾼을 부려 가마에 탄다든지 뭐에 얹혀서 간다든지 했습니다만, 땅을 밟으면서 걷지 않는 사람은 땅을 알 수 없습니다. 두 다리로 땅을 밟아야 땅을 알고, 땅을 알 때에 땅을 일구는 슬기를 얻으며, 땅을 일구는 슬기를 얻기에 이웃을 사랑하는 기쁜 사랑을 압니다.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을 가꾸면서 삶을 짓습니다. 삶을 지으며 생각을 가꾸면서 다시 걷습니다. 부엌하고 마당을 오가면서 걷습니다. 뒷간에 볼일을 보러 갈 적에도 걷고, 텃밭에서 남새를 뜯을 적에도 걷습니다. 마을 한 바퀴를 걷고, 숲으로 나무를 보러 걸어갑니다.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면서 까르르 웃지요. 어른도 이와 같아요. 어른들도 날마다 새롭게 걸음을 떼면서 새롭게 일하고, 새롭게 살림을 보듬으며, 새롭게 이웃하고 오순도순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히라도 코스도 재미가 쏠쏠한 올레길이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한 거리를 거니는 재미도 있고, 가와치 언덕에 올라 바닷바람 맞으며 노니는 재미도 있다. (254쪽)



  올레길이 아니어도 걸으면 재미있습니다. 올레길이 생겼어도 굳이 올레길로만 걸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리고, 올레길도 걸어 보면 재미있지요.


  이 길도 걷고 저 길도 걷습니다. 올레길로 ‘뽑힌’ 곳만 재미있을 수 없습니다. 마을에 있는 여느 살림집에서 여느 마을 빵집 사이를 걷는 길도 재미있습니다. 이웃집으로 나들이를 가려고 걷는 길이 재미있습니다. 서로서로 천천히 걸어서 오가고, 마을사람 누구나 이 집 저 집 찬찬히 걸어서 만나는 길이 재미있습니다.


  손민호 님이 엮은 《규슈올레》를 보면, 규슈에 새로 생긴 여러 올레길을 길그림이랑 사진으로 꼼꼼하게 잘 알려줍니다. 규슈로 나들이를 간다면 이 올레길을 한 번쯤 걸을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올레길에 없는 여느 골목길을 느긋하게 걸을 만할 테고, 책이나 관광상품에 없는 수수한 마을길을 노래하면서 걸을 만하리라 생각해요. 우리가 걷기에 길이 되고, 우리가 길을 걸으며 노래하기에 기쁜 나들이가 됩니다. 4348.10.26.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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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시골
김선영 글.사진 / 마루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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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9



풀 한 포기도 이웃이 되어 오순도순 재미난 시골

― 가족의 시골

 김선영 글·사진

 마루비 펴냄, 2015.9.25. 15000원



  가을이 깊어 가는 시월입니다. 요즈음은 밤마다 별빛이 쏟아집니다. 여름에도 봄에도 또 겨울에도 별빛은 늘 쏟아지는데, 가을에 쏟아지는 별은 한결 초롱초롱하구나 싶습니다.


  첫가을에는 풀벌레 노랫소리를 꽤 크게 듣습니다. 한가을에는 풀벌레 노랫소리가 제법 누그러집니다. 늦가을에는 바람이 무척 차가울 테니 풀벌레 노랫소리가 모두 끊어질 테지요.


  풀벌레하고 개구리는 철에 맞추어 노래를 하지만, 멧새는 한 해 내내 노래를 합니다. 딱새나 박새나 참새처럼 조그마한 텃새는 한 해 내내 마을이나 시골집을 오가면서 부산스레 노래하는데, 세 해쯤 앞서부터 마을 참새 몇 마리가 겨우내 우리 집 처마에서 겨울나기를 합니다. 그러께에는 딱새 두 마리가 겨우내 빈 제비집에서 겨울나기를 함께 했습니다.


  이 작은 새들은 처마 밑이나 제비집에 살짝 깃들어 겨울을 나는 동안 새벽이며 아침이며 낮이며 저녁이며 노래를 들려줍니다. 함께 사니까 노래를 들려줍니다. 함께 살면서 기쁨이랑 즐거움을 노래로 들려줍니다.



남편은 안동에서 앞으로 우리가 살게 될 집을 수리하고 있다. 오늘은 집을 가로막고 서 있던 은행나무를 베어내니 햇볕이 잘 들어오게 되었고, 낡은 외벽을 보강하고 … (2012.8.12.)


안락하고 예쁜 나의 아파트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이렇게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을 운명이라 생각한다. (2012.8.15.)



  김선영 님이 이녁 시골살이 이야기를 다룬 《가족의 시골》(마루비,2015)을 읽습니다. 김선영 님은 도시에서 누리던 삶을 “안락하고 예쁜 나날”로 여깁니다. 아마 다른 도시 이웃도 김선영 님하고 비슷하게 생각하리라 봅니다. 참말 도시는 도시대로 아늑하거나 예쁘다고 여길 만합니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이녁 손으로 짓지 않아도 얼마든지 손쉽게 누릴 수 있는 것이 매우 많기 때문에, 손쉬우면서 아늑한데다가 예쁘다고 할 만하지요.


  그러면, 시골은 안 아늑하거나 안 손쉽거나 안 예쁠까요? 오로지 도시 눈길로 보자면 시골은 모든 것이 허술하거나 어수룩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시골은 도시하고 견주어 사람이 대단히 적어요. 그러니 버스도 드물고 택시를 타려면 택시삯마저 비쌉니다. 사람이 대단히 적은 시골은 ‘구매력’이 떨어지니까 물건값은 비싸면서도 가짓수가 적습니다. 사람이 대단히 적은 시골에는 극장이나 놀이기구가 들어설 턱이 없습니다. 시골에 백화점을 지으려고 하는 기업은 없습니다. 교통이 나쁘다고 하는 시골에는 공장조차 들어서기 어렵습니다.



노을 지는 초저녁, 자전거를 타고 마을 한 바퀴. 마을 수퍼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다. 환경이 바뀐 것뿐인데 물욕도 줄어드는 것 같다. 아침저녁으로 초겨울처럼 스산한 바람이 분다. 오늘 이사 떡을 돌리면서 아이는 마을 할머니들의 귀여움을 한몸에 받았다. (2012.9.16.)


얼마 전, 안동시청에 갔다가 우리가 사는 집이 지어진 지가 300년이 더 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되었다. 300년 된 흙과 300년 된 목재가 집 어딘가를 받치고 있다는 것이 경이로웠다. (2012.10.6.)




  김선영 님은 시골살이 여러 해에 무엇을 보았을까요? 김선영 님하고 살림을 함께 짓는 곁님은 시골에서 ‘스키니진’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느끼면서 무엇을 얻었을까요? 어버이를 따라 시골로 보금자리를 옮긴 아이는 시골에서 또래 동무를 사귈 수 없을 테지만 어떤 이웃이나 동무를 사귈 수 있을까요?


  시골이 삶터로 더 낫다고 할 수 없고, 도시가 삶자리로 더 훌륭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살고픈 데에서 살기 마련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살고픈 데에서 기쁜 하루를 짓기 마련입니다.


  다만 한 가지는 도시에서든 시골에서든 어렵잖이 헤아릴 만합니다. 몸이 아프거나 고단한 사람은 ‘물 맑고 바람 상큼한 시골’에서 넉넉하고 느긋하게 지내면 아픔을 씻고 고단함도 털 수 있습니다. 이 말은 도시에서나 시골에서나 똑같이 합니다. ‘흙을 밟고 흙을 만지면 아픈 데가 사라진다’고 하는 말도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똑같이 합니다. 그래서 도시에서 살면서 흙을 만지려는 사람이 부쩍 늘어요. 할매와 할배는 도시에서 골목집을 가꾸거나 아파트에서 살더라도 어떻게든 텃밭을 마련하기 마련입니다. 오랫동안 익숙하기에 흙을 만지려 할 수도 있으나, 흙을 만지면서 흙내음하고 풀내음을 맡는 동안 저절로 몸이 푸르면서 싱그러이 깨어나는 줄 느끼기 때문입니다.



마당에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치 특권이라도 얻은 듯이 저 쏟아질 듯한 별빛을 혼자 마주하고 있다는 게 이상하게도 벅차다. (2012.12.7.)


나는 쇼핑센터와 공원산책을 놓아주고 작업용 목장갑과 툇마루 사색을 얻었다. 아이는 단짝친구를 놓아주고 닭 두 마리와 밤하늘 별빛을 얻었다. (2012.12.31.)




  어느 모로 보면 시골은 사람이 없어서 좋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적기에 ‘더 많은 사람한테서 더 많은 돈을 뽑아내자’고 하는 다툼이 생길 틈이 처음부터 없는 시골인 터라, 도시하고 다르게 느긋하거나 넉넉한 마음이 될 만한 터전이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사람이 없거나 적거나 드문 시골에는 자동차나 버스가 지나갈 일조차 매우 드물거나 아예 없으니 대단히 조용하거나 고요합니다. 이리하여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조용히 공부하거나 고요히 마음을 다스리기에 아주 즐겁습니다. 제대로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시끄러운 데에서도 북새통에 휩쓸리지 않고 공부를 할 텐데, 새와 개구리와 풀벌레와 바람이 함께 들려주는 싱그러운 노랫가락이 흐르는 데에서 공부한다면 훨씬 느긋하면서 너그러운 마음이 될 만해요.


  가만히 보면, 도시에는 흙도 풀도 나무도 없기 때문에 돈을 엄청나게 들여서 공원을 마련해야 합니다. 서울에 있는 청계천 같은 곳은 물줄기가 흐르도록 하려고 전기를 어마어마하게 씁니다. 이와 달리 시골에서는 숲을 그대로 마주하거나 껴안으면 됩니다. 숲은 숲 그대로 두면 풀하고 나무하고 벌레하고 새하고 짐승이 서로 슬기로운 얼거리를 이루어 짙푸르며 아름다운 숨결을 이룹니다. 시골사람은 숲을 그대로 건사하면서 그냥 호젓하게 숲길을 걸어가면 됩니다. 시골에서는 공원이 따로 없이 어디나 공원입니다. 마당도 고샅도 바닷가도 숲도 모두 공원이지요.



보슬보슬하고 촉촉한 흙을 만지는 것이 이렇게 기분 좋은 일인지 처음 알게 되었다. 밭은 작게 만들기로 했다. (2013.3.15.)


“엄마, 바람이 나한테 와서 지나가. 손가락 사이사이로 지나가. 엄마도 나처럼 이렇게 해 봐. 좋다.” (2013.4.28.)





  《가족의 시골》이라는 책을 쓸 수 있던 바탕을 돌아봅니다. 김선영 님이나 네 식구가 도시에서 그대로 머물렀다면 네 식구는 《가족의 시골》 같은 책을 쓸 수 없습니다. 뭐, “가족의 도시” 같은 책을 쓸 만했을 테지만, 도시사람이 쓰는 도시 이야기는 여행이나 쇼핑이나 관광이나 답사나 탐방 같은 이야기에서 머뭅니다. 도시에서 살며 ‘우리 식구가 날마다 웃고 노래하는 삶’을 들려주는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아주 드물어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작가’나 ‘시인’이 아니어도 저절로 글을 쓰고 저절로 사진을 찍으며 저절로 노래를 부릅니다.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면서 누리는 놀랍고 아름다우면서 기쁜 삶을 저절로 글이나 사진으로 갈무리합니다.


  아이는 도시에서도 ‘손가락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는 결’을 틀림없이 느꼈을 텐데, 도시에서도 이런 말이 문득 튀어나왔을까요? 도시에도 틀림없이 꽃밭이 있어서 흙을 보기는 했을 테지만, 도시에서 사는 사람으로서 흙이 얼마나 보슬보슬하거나 촉촉한가를 제대로 느낀 적이 있었을까요?



옥수수밭이 바람이 흔들려 솨아 소리를 낸다. 겁 없는 아이는 집으로 들어오라고 아무리 불러도, 저렇게 서서 바람이 휘몰아치는 마을을 보고 서 있다. (2013.8.10.)


마당을 쓸고 툇마루에 앉아 있으니 고양이 한 마리 다가와 마당으로 따뜻하게 내려쬐는 햇볕에 눕는다. (2014.1.2.)





  바람소리를 들으며 글이 흐릅니다. 바람소리는 그저 소리로 그치지 않고 노래가 됩니다. 이윽고 바람노래인 줄 깨닫습니다. 바람노래를 가만히 귀여겨듣다가 흥얼흥얼 콧노래가 흐르고, 이 콧노래는 어느새 연필을 사각이면서 새롭게 빚는 글로 태어납니다.


  봄에는 봄노래를 글로 씁니다. 여름에는 여름노래를 글로 써요. 가을에는 가을노래를 글로 쓰다가, 겨울에는 겨울노래를 글로 쓰지요.


  철마다 다른 노래가 내 손에서 태어납니다. 그리고, 다달이 다른 노래가 내 손에서 태어나요. 더욱이, 날마다 다르면서 새로운 노래가 바로 내 손에서 태어납니다. 이 두 손으로 모든 노래를 손수 짓습니다. 참말 내 손은 내 삶을 짓는 손이요, 그야말로 내 손은 내 사랑을 가꾸는 손입니다. 시골에서 살며 살림을 가꾸는 동안 내 손이 얼마나 고우면서 대단한가 하는 대목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아이가 수수밭을 지나며 이파리를 손바닥에 스치며 걷는다.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2014.9.15.)


앞마당에 핀 민들레잎을 떼어내 씹어 보았다. 쓰다. 은행나무 아래는 온통 쑥이 자라 있다. 조금 떼어와 뜨거운 물에 우려내 마시니, 향긋하다. 자연이 보이고, 그걸 쉽게 입에 가져가는 데까지 3년쯤 걸렸다. (2014.11.27.)




  시골에서는 버리는 풀이 없습니다. 아니, 풀은 버릴 수 없습니다. 남새 씨앗을 심었기에 남새 말고 다른 풀은 뽑아내기 일쑤라지만, 남새 아닌 다른 풀 가운데 나물이 되지 않는 풀은 없습니다. 나물로 삼지 않는 풀이라면 바구니를 짜거나 엮는 풀이요, 예부터 옷을 지으려고 실을 얻는 풀입니다. 또는 풀짐승이 즐겨먹으며 사람한테 이바지하는 풀이에요. 이밖에 약으로 쓰는 풀이 논밭자락 둘레에 흔히 돋습니다.


  먹거나 쓰는 풀이 아니어도 풀은 흙이 기름지도록 북돋웁니다. 풀이 자라면서 뿌리로 흙을 단단히 붙잡기에 큰비가 쏟아져도 밭둑이 안 무너지도록 지켜 줍니다. 풀을 베어서 밭고랑에 놓으면 온갖 풀벌레가 이 둘레로 찾아들어서 사느라 풀짚은 곧 새로운 흙으로 거듭납니다.


  풀이 있으니 나무도 튼튼히 서고, 풀이 없으면 나무는 뿌리가 허옇게 드러나서 괴로워하다가 때때로 쓰러지기까지 합니다. 그러니까, 시골살이란 풀살이라고 할 만합니다. 푸성귀도 풀이고 나물도 풀이거든요. 남새밭도 풀씨를 심어서 가꾸는 셈이요, 나락도 보리도 밀도 수수도 모두 풀알(풀 열매)이에요.


  꼭 도시를 떠나서 시골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도시를 즐겁게 여겨서 살더라도 ‘풀’이 무엇인지 바라보고 읽으며 어루만질 수 있다면, 우리 삶은 새롭게 피어나리라 느낍니다. 보리차는 무엇이고 녹차는 무엇이며 민들레차나 쑥차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마시는 차는 무엇을 끓일까요. 풀잎을, 그러니까 온 들과 숲과 마을에 돋는 풀잎을 제대로 마주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얼마나 멋없을까요.


  《가족의 시골》을 쓴 김선영 님네 밥상에 민들레나물이 오를까요. 이제는 오르겠지요. 고들빼기도, 씀바귀도, 소리쟁이도, 돌나물도, 비름나물도, 까마중도, 모시도, 유채도, 모두 나물이 되어 오르겠지요. 망개잎이나 하늘타리잎도, 콩잎이나 뽕잎도, 제비꽃 조그마한 잎사귀나 달개비 잎사귀까지 모두 맛나며 싱그러운 ‘이웃’이면서 나물로 우리 곁에 있는 줄 언제나 즐겁게 마주하겠지요. 4348.10.12.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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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남한강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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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8



‘아는 만큼’ 아닌 ‘사는 만큼’ 보는 문화

―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 편

 유홍준 글

 창비 펴냄, 2015.9.15. 18000원



  아침에 마당을 비로 씁니다. 가을잎이 날마다 톡톡 떨어지니 날마다 아침이면 가을잎을 씁니다. 가을잎은 비질을 마친 자리에 새롭게 떨어집니다. 그렇다고 새로 떨어진 잎을 다시 쓸지는 않습니다. 하루 동안 떨어진 잎은 마당에 그대로 두고 바라봅니다. 바깥일이 바쁘다면 이틀이나 사흘, 때로는 이레쯤 가을잎을 마당에 그대로 두기도 합니다. 가을잎을 날마다 쓸면 마당은 깨끗해 보일 테고, 가을잎을 그대로 두면 가을내음을 더욱 짙게 느낄 만합니다.


  비질을 마치면 모시잎을 뜯습니다. 가을에도 모시풀은 새롭게 돋습니다. 봄모시나 여름모시하고는 다른 가을모시는 봄하고 여름하고는 살짝 다른 냄새와 맛을 풍깁니다. 모시풀을 잘게 썰어 밥에 함께 넣고 끓이면 밥은 훨씬 반지르르하면서 고소합니다. 모시풀한테 둘러싸여서 살기 때문에 겨울이 찾아와서 모시풀이 모조리 떨어질 때까지 모시밥을 지어서 먹을 수 있습니다.



영월의 동강은 근래에 동강댐 반대운동 덕에 그 풍광이 수려하다는 사실이 새삼 세상에 널리 알려지면서 오늘날 어라면의 래프팅을 비롯하여 자연관광지로 크게 각광을 받고 있지만 이름도 낯선 서강은 아직도 사람들의 발길이 뜸하다. (17쪽)


4대강 사업으로 천연스런 강마을 정경을 많이 잃어버린 탓에 주청 강마을에 다다르면 누구나 이 안온한 풍광에 절로 가벼운 탄성을 발하며 잠시 머물다 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23쪽)



  유홍준 님이 빚은 문화유산답사 이야기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 편》(창비,2015)을 읽습니다. 유홍준 님은 여러 사람을 이끌고 ‘문화유산답사’를 다닙니다. 한국에 있는 문화유산이라고 한다면, 절집이나 산성이나 정자나 빗돌이나 기와집쯤 됩니다. 가까이는 일제강점기요, 조금 멀면 조선이고, 조금 더 멀면 고려이고, 한결 멀면 신라나 고구려나 백제쯤 됩니다.


  문화유산답사로 다룰 수 있는 이야기는 얼추 천 해까지 아우를 만하지만, 천 해를 아우르는 이야기보다는 오백 해나 삼백 해나 백 해 즈음을 아우르는 문화유산이 가장 많지 싶습니다. 남한강 둘레를 다닌 이야기책에 나오는 채석장이라든지 충주 곳곳에 있다는 역사문화공원은 모두 요즈음 ‘문화유산’입니다.


  유홍준 님이 답사를 다닌다든지, 여느 사람들이 관광을 다닌다든지, 두 가지 자리가 있습니다. ‘사람 발길이 잦은 곳’하고 ‘사람 발길이 뜸한 곳’입니다. 사람 발길이 잦은 곳은 ‘관광지’이고, 사람 발길이 뜸한 곳은 ‘두메’나 ‘시골’입니다. 사람들은 관광지를 즐겨 찾아갑니다. 사람들은 두메나 시골은 거의 안 찾습니다. 관광지에서는 놀거리·먹을거리·즐길거리에다가 잠자리나 밥집이 골고루 있습니다. 두메나 시골에는 편의점은커녕 구멍가게나 마을가게조차 없고 잠자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도시사람은 두메나 시골에 가서 ‘무엇을 하며 놀’거나 ‘무엇을 보며 즐기’거나 ‘무엇을 마주하며 생각을 살찌우’는가 같은 대목은 거의 알지 못합니다. 올레길은 걸어도 숲길은 못 걷고, 답사코스는 걸어도 여느 골목길은 못 걷습니다. 이런 흐름을 헤아린다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는 ‘나들이 동무’로 삼을 만한 책입니다.



아, 전국을 포클레인으로 파헤쳐 버린 대한민국 천지에 이런 옛길의 잔편이 남아 있는 것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222쪽)


답사 다니면서 민폐나 관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창비 답사 때는 단양군청에 연락해 성신양회 채석장 안에 들어가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특청했다. (175쪽)



  문화유산답사를 하려면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른바 ‘사전 지식’이라고도 하는데, 역사책이나 인문책에 나온 지식을 먼저 알아두어야 비로소 문화유산답사를 할 만합니다. 지식을 먼저 갖추지 않으면 빗돌이나 절집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기 어렵기 마련이에요. 지식이 있어야 알아보는데, 다시 말하자면 ‘아는 만큼 본다’고 하겠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찾아가거나 학자가 찾아가는 문화유산이란 무엇일까요? 오늘날 남은 문화유산은 무엇일까요? 지자체나 중앙정부가 다스리거나 가꾸려 하는 문화유산이란 무엇일까요?


  문화유산을 살필 적에는 문화유산이라는 이름이 붙는 커다랗거나 뜻깊은 건물이나 유물을 살핍니다. 이러한 건물이나 유물을 짓거나 빚은 ‘여느 수수한 사람’ 이야기는 살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옛책이든 오늘날 역사책이나 인문책이든, ‘큰 절집이나 건물을 짓도록 시킨 임금님이나 부자나 지식인’ 이름은 알아서 이들 발자취는 적바림하지만, 정작 ‘집을 짓고 유물이나 장신구나 물건을 지은 장이’는 누구인지 이름조차 적바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온달산성을 지은 시골사람 이름은 아무 데에도 없지요. 온달산성을 지킨 시골사람 이름도 어느 곳에도 없어요. 온달산성을 둘러싸고 땅을 부쳐서 곡식을 거두어 마을을 지킨 사람들 이름마저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지자체나 중앙정부는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서 ‘돈을 들여서’ 꾸미려 합니다. ‘이야기가 될 만한 것’이나 ‘마을에서 사람들이 오순도순 즐길 만한 것’을 헤아리면서 ‘돈이나 품이나 마음을 들여서’ 보듬는 손길은 아주 드뭅니다.



나는 부여에 작은 집을 짓고 주말이면 내려가서 지내는데 4월이면 봄꽃에 취하고 오뉴월이면 새소리 듣는 것이 큰 낙이다. 꾀꼬리와 휘파람새의 소리는 참으로 곱고 높고 아련하다. 낮에는 먼 산에서 우는 뻐꾸기 소리가 짙은 향수를 일으키고, 밤새 우는 소쩍새는 애수의 감정을 절로 일으킨다. (83쪽)



  우리가 무엇을 ‘본다’고 할 적에는 두 갈래가 있다고 느낍니다. 먼저, “아는 대로 본다”고 할 만합니다. 그리고, “사는 대로 본다”고 할 만합니다.


  유홍준 님은 서울에서 살며 주말에는 부여 시골집에 깃드시는 듯합니다. 유홍준 님은 부여 시골집에 주말마다 찾아와서 지내는 동안 꾀꼬리와 휘파람새와 뻐꾸기와 소쩍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들 멧새가 지저귀는 노랫소리는 어떤 책에도 안 적힙니다. 아스라한 옛책에도 안 적히고, 오늘날 도감이나 사전이나 인문책에도 안 적힙니다. 멧새 노랫소리는 스스로 숲이나 시골에 깃들어 두 귀로 들어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스스로 숲이나 시골에서 살기에 비로소 ‘새소리’나 ‘새노래’를 알아차리지요.



향산리는 삼층석탑도 아름답지만 마을 자체가 정겹다. 여전히 농사를 짓고 살아가는 농민들이 있다는 것이 여간 고맙지 않다 … 지금처럼 고향을 지키고 있는 농민들이 국토의 지킴이이고 무형의 문화유산 지킴이라는 생각을 나는 지금도 갖고 있다. (226, 228쪽)



  문화유산답사는 ‘아는 지식’을 머리로만 가두는 정보로 삼지 않는다는 데에 뜻이 있다고 느낍니다. ‘아는 지식’을 두 눈으로 살피고, 두 귀로 들으며, 두 손으로 만지면서, 새롭게 맞아들이는 삶으로 삼기에 비로소 문화유산답사가 되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책만 읽어도 어느 고장에 어느 유물이나 유적이 있다는 지식이나 정보쯤 훤히 꿸 수 있습니다. 책상맡에서 인터넷만 살펴도 ‘문화역사 지식’은 박사님만큼 꿰찰 수 있어요.


  문화유산답사를 다니는 까닭은 ‘책으로 얻는 지식’으로는 삶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지식이나 정보를 ‘책으로만 얻지 말’고 ‘온몸으로 부대끼면서 배울’ 때에 비로소 참다운 문화 지식이나 역사 지식이 된다고 여기는 마음으로 문화유산답사를 다닌다고 느껴요.



가만히 보니 충주는 역사유적을 공원으로 많이 만들었다. 중앙탑공원과 관아공원이 그렇고, 탄금대공원이 그렇다. 역사유적을 보존하는 차원이 아니라 현대작가의 조각품을 많이 설치한 조각공원이라는 인상이다. (332쪽)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남한강 편》을 읽으면 앞선 문화유산답사기하고 비슷한 얼거리입니다. 여러 가지 책에 나오는 자료와 이야기를 많이 따옵니다. 아무래도 답사를 다니는 동안 ‘책에 나온 이야기’를 ‘코앞에서 눈으로 마주하’면서 다시 들여다보고 맞대면서 새롭게 헤아리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다른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굳이 이 답사기에 다시 옮겨서 싣거나 되풀이하기보다는, ‘온몸으로 마주하고 새롭게 바라보는 코앞에 있는 삶’ 이야기를 더 넉넉히 답사기에 쓸 수 있으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이를테면, 은행나무와 얽혀 마을 할배가 유홍준 님을 넌지시 나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하는데, 이런 생생한 목소리와 ‘마을 이야기’를 답사기에 담을 수 있으면 훨씬 돋보이리라 생각합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이 은행나무는 수나무인지라 은행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번은 내가 답사객들에게 그것을 아쉬움으로 말하자 곁에서 내가 하는 말을 귀 기울여 듣던 동네 어른이 내 말을 가로채면서 나섰다. “이 은행나무가 수나무라는 건 맞는 말이여. 그래서 은행을 맺지 않는다는 것도 맞는 말이여. 그러나 이 은행나무가 있어서 사방 10리 안에 있는 은행나무 암컷 100여 그루가 실한 은행을 맺고 있으니 그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감. 서운키는 뭐가 서운하단 말이여!”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동네 신목에 와서 흠을 잡느냐는 호통이었다. (405쪽)



  마을 할배가 유홍준 님을 나무란 대목을 잘 살펴보면, 유홍준 님은 ‘몸으로 배우는 삶’을 느끼려고 문화유산답사를 다니지만, 막상 ‘책으로 얻은 지식’을 되풀이하는 몸짓에서 덜 깨어났구나 하고 느낄 만하리라 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해남은 해남이어서 사랑스럽고, 담양은 담양이어서 사랑스러우며, 영월은 영월이어서 사랑스럽습니다. 은행나무는 은행나무여서 사랑스럽고, 느티나무는 느티나무여서 사랑스럽지요. 암나무는 암나무여서 사랑스럽고, 수나무는 수나무여서 사랑스럽습니다.


  오늘날까지 비바람에도 또렷하게 남은 빗돌은 이러한 빗돌대로 사랑스럽습니다. 비바람하고 햇볕에 바스러진 빗돌은 이러한 빗돌대로 사랑스럽습니다.


  시골마을 할배는 ‘남의 동네 신목에 와서 흠을 잡느냐는 호통’을 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시골마을 할배는 ‘수나무인 은행나무는 수나무인 은행나무 결 그대로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구나 싶습니다.


  다만, 서운하다고 느끼는 마음은 나쁘거나 틀리지 않습니다. 서운한 마음은 그저 서운함이지요. 그런데, 예부터 짐승 앞에서조차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 널리 알려진 옛이야기가 있어요. 소 두 마리를 본 어느 양반이 시골지기더러 ‘어느 소가 일을 잘 하느냐’ 하고 물으니, 시골지기는 부랴부랴 논 밖으로 나와서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손사래치면서 귀엣말로 소근소근 속삭였다지요. 짐승도 말을 다 알아듣는다고 하면서요.


  나무도 말을 다 알아듣습니다. 나무 앞에 서서 나무더러 “너는 수나무라서 서운해!” 하고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말한다면, 은행나무는 어찌해야 할까요? 수나무인 은행나무는 말라죽어야 할까요? 아닐 테지요. 은행나무도 사람이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듣는 줄 알아야 합니다. 문화유산답사는 지식을 다시 살피는(재확인하는) 나들이가 아니라, 온몸으로 삶을 새롭게 마주하려는 ‘이웃걷기(이웃을 찾아서 걷는 나들이)’가 되어야지 싶습니다.



정산초등학교는 정말로 아담한 학교였는데 1995년에 마침내 폐교되고 지금은 어느 공장에 불하되었다. 학교 운동장 한쪽 화장실 건물 앞에는 거돈사를 알리던 덩치 큰 당간지주 한 짝이 심드렁히 누워 있다. 짝을 잃고 누워 있던 이 9.6미터의 긴 당간지주는 그동안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쉴 때면 20명 정도는 넉넉히 앉을 수 있는 의자 구실을 하여 윤이 반지르르하게 났다. (350쪽)



  나는 오늘 낮에 두 아이를 데리고 마을 어귀 빨래터와 샘터를 치울 생각입니다. 어제 마을 앞을 지나가며 들여다보니 마을 빨래터에 물이끼가 꽤 많이 끼었습니다. 마을에 모두 일흔 여든 자신 할매와 할배뿐이니, 마을에서 가장 어릴 뿐 아니라 ‘이웃마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젊은이’로서 우리 식구가 늘 샘터·빨래터 치우기를 합니다.


  우리 시골마을 빨래터는 얼마나 오래된 곳인지 잘 모릅니다. 시멘트로 틀을 잡은 지는 서른 해이든 마흔 해이든 될 수 있을 테지만, 한겨울에도 안 얼고 흐르는 골짝물 샘터요 빨래터는 아주 오랜 나날 고이 흐른 물줄기라고 느낍니다. 지역문화재로든 무슨무슨 문화재로든 이름이 오른 적이 없으나 언제나 곁에 두고 누리는 삶자리입니다.


  빨래터를 치우면서 무척 오래되어 보드랍게 닳은 빨랫돌을 쓰다듬습니다. 아이들은 빨래터에서 물투성이가 되어 놉니다. 한겨울에도 옷을 잔뜩 적시면서 놉니다. 오늘날에는 시골에서 살려는 젊은이도 어린이도 거의 없으니, 빨래터에서 빨래를 할 사람도 없습니다만, 고작 스무 해쯤 앞서만 해도 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는 집은 드물었기에 으레 빨래터를 썼습니다. 서른 해쯤 앞서라면 어느 집이든 이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고 곁에 있는 샘터에서 물을 길었어요. 마흔 해쯤 앞서라면 모든 집이 이 빨래터와 샘터에 모여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아이들도 여름 내내 이곳에서 놀았으리라 봅니다.


  아마 수백 해도 아닌 수천 해를 이은 고즈넉한 시골살이요 시골노래요 시골놀이이자 시골일이고 시골사랑이라고 느낍니다. 유홍준 님은 “지금처럼 고향을 지키고 있는 농민들이 국토의 지킴이이고 무형의 문화유산 지킴이(228쪽)”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말마따나 이 나라와 이 땅과 이 삶터와 이 문화와 이 사랑을 지키고 가꾸고 돌보고 아끼는 투박하고 수수한 시골사람들 손길하고 발자취를 살가이 더듬는 문화유산답사로 이어갈 수 있기를 빕니다. 책에 나온 이야기는 책으로도 얼마든지 읽을 수 있으니, 문화유산을 답사할 적에는 ‘책은 좀 덮고’ 나서 ‘온몸과 온마음으로 껴안는 삶’을 마주하면서 사랑할 수 있기를 빌어요. 가을에 나락을 거두고 겨우내 새끼를 꼬던, 이러면서 아이들한테 이야기를 두런두런 물려주던 시골 할매와 할배 숨결을 문화유산답사에서도 조촐히 나눈다면 참으로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4348.10.8.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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