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은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 - 구글 vs 도요타, 자동차의 미래를 선점하기 위한 전쟁의 시작
이즈미다 료스케 지음, 이수형 옮김 / 미래의창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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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읽기 삶읽기 215



자가용 생각이 없는 사람한테 ‘자율운전 자동차’는?

― 구글은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

 이즈미다 료스케 글

 이수형 옮김

 미래의창 펴냄, 2015.11.20. 13000원



  나는 마흔 해 남짓 살며 아직 자동차를 안 몹니다. 다만, 나는 자전거를 몹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 스무 해 남짓 늘 자전거를 몰았습니다. 아이들을 낳아 돌보면서도 언제나 자전거를 몰고, 두 아이를 자전거에 태우고 함께 돌아다닙니다. 아이들이 크면 자전거에 못 태우지 않느냐고 묻는 이웃이 있으면, 아이들이 아버지 자전거에 함께 타고 달리기 힘들 만큼 자라면 아이들 스스로 자전거를 달릴 테니 그때에는 그때대로 즐거운 삶이 되리라 느낍니다.


  또 누군가는 묻습니다. 쉰 살이 넘고 예순 살이 넘어도 자전거를 몰겠느냐고. 나로서는 예순 살이 아닌 일흔 살이나 여든 살에도 자전거를 못 몰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자전거는 빨리 달리려고 몰지 않습니다. 내가 가려고 하는 데를 가려고 몹니다.


  여기에 누군가는 더 묻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자동차 없는 집이 어디 있느냐고. 그래요, 요즘 같은 세상에 텔레비전도 안 키우고 자동차도 안 거느리는 집은 몹시 드물 테지요. 아직 나는 자동차가 나한테 쓸모있으리라 느끼지 않으니 안 몰 뿐인데, 나한테 자동차가 생기더라도 ‘내가 손수 자동차를 몰’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자동차 제조사들에게는 자동차에 흥미를 잃은 젊은이들이 관심을 갖게 하는 것보다 자동차 운전이 어려운 고령자를 어떻게 줄여 나갈지가 더 중요한 과제일 수도 있다. (19쪽)


자율주행 자동차의 구동 플랫폼에서 동력원이 바뀌면 에너지 회사의 역할도 달라진다. 지금처럼 더 이상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지 않으면 석유회사의 사업 모델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33쪽)



  이즈미다 료스케 님이 쓴 《구글은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미래의창,2015)를 읽으면서 자동차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그야말로 두멧시골에서 살기에 우리 집에 자동차가 있으면 한결 수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되, 딱히 자동차가 삶을 북돋아 준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같은 살림에 자동차를 누군가 준다면, 또는 내가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자동차를 장만하여 굴리려 한다면, 나는 이때에 참말 내 손으로 자동차를 몰 생각이 없습니다. 따로 운전수를 두면 모르되, 내 손은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아이들을 어루만지고 살림을 가꾸는 길’에 쓸 생각입니다. 내 손을 ‘운전대를 잡는 손’으로 쓸 마음이 없습니다.


  《구글은 왜 자동차를 만드는가》는 ‘구글’이라는 회사가 꽤 예전부터 목돈을 들여서 힘을 쏟는 ‘자율주행 자동차’를 다룹니다. 다만, 이 책을 쓴 분은 일본사람이고, 일본에 있는 ‘도요타’라고 하는 큰 자동차 회사를 한복판에 놓고서 자율주행 자동차를 다루려 합니다. 구글은 자동차 회사도 아니지만 벌써 자율주행 자동차를 놓고 도요타보다 몇 걸음이 훌쩍 앞서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다룹니다.



구글은 수익률이 매우 높은 기업이지만, 현재 모습은 검색엔진을 축으로 한 인터넷 광고 기업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구글은 자신들이 강점을 지닌 ICT와 자율주행 자동차를 결합시켜 가까운 미래 사회를 움직일 시스템을 구축함으로써 주도권을 쥘 수 있다고 본다. (22쪽)


일본의 자동차 산업 관계자들은 그동안 전기자동차나 연료전지차에 대해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이는 다분히 기득권적 발상에 따른 것이다. (45쪽)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요? 무엇보다 사람들이 스스로 운전대를 잡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운전대를 안 잡으면 무엇이 바뀔까요? 첫째, 면허증이 사라지겠지요. 운전면허를 시험으로 치러야 할 일이 사라지겠지요. 어린이를 비롯해서, 몸이 아픈 사람이나 나이가 많이 들어 걷기도 힘든 사람까지 자동차를 걱정없이 타겠지요. 아이를 혼자 자동차에 태워도 ‘시스템’이 ‘프로그램에 넣은 대로’ 태울 수 있습니다. 앞을 못 보는 사람도, 걷지 못하는 사람도, 누구나 자율주행 자동차로 도움을 받을 만합니다.


  더욱이, 자율주행 자동차는 석유가 아닌 전기로 달립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면 주유소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할 판인데다가, 석유회사는 돈벌이가 하루아침에 사라집니다. 이러면서 ‘석유에 기대던 문명’은 그야말로 와르르 무너지면서 새로운 사회가 일어설 만합니다.


  여기에다가, 자율주행 자동차는 ‘면허증 있는 어른’이 몰지 않기 때문에 ‘자동차 사고’를 걱정할 일이 없기 마련입니다. ‘자가용을 모는 사람’한테는 아무 책임이 없기 때문에 보험회사는 돈벌이를 어마어마하게 잃겠지요. 다시 말하자면, 자율주행 자동차는 모든 보험회사한테 무시무시한 목숨앗이라 할 만합니다. 사람들은 보험료를 낼 걱정이나 짐이 없이 느긋하게 자가용을 거느릴 만합니다.



테슬라가 지향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운전자가 주체이며 자율주행을 할 때에도 운전자가 주체적으로 조작한다. 반면, 구글의 자율운전은 주체가 운전자라기보다 자율운전 시스템의 운영자다. 그리고 그 운영자는 당연히 구글이다. (60∼61쪽)


새로운 경쟁 영역에서 도요타의 경쟁사는 구글이나 테슬라다. 더 이상 폴크스바겐이 아니다. (121쪽)



  다만,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들어서 자리잡도록 하려는 구글 회사는 ‘자율주행 얼거리’를 구글이 다스리려고 생각합니다. 운전자가 모는 자동차가 아니라, ‘시스템이 모는 자동차’이기 때문에, 모든 정보와 기록이 ‘시스템 운영자’한테 넘어가지요. 이렇게 할 수 있으면, 구글은 이제껏 벌어들이는 수익을 훨씬 뛰어넘는, 그야말로 가없는 수익을 끝없이 거두어들일 만합니다. 자율주행 자동차는 ‘그냥 자동차’가 아니라 ‘자동차를 빌어서 누리는 삶’을 모두 손아귀에 쥐고서 움직일 수 있는 권력이라고까지 할 만합니다. 시스템 운영자가 ‘멈춰!’ 하면 모든 자율주행 자동차는 그 자리에 꼼짝없이 멈추어야 할 테니까요.



자율주행 시스템에서 사고가 났을 때 탑승자의 책임이 없다면 이는 보험사에게도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온다. 이 시스템에서 가동되는 자동차가 사고를 일으켜도 책임을 묻지 않는다면 자동차 보험에 가입할 필요가 없다. 보험사는 자율주행 시스템의 운영자와 보험 계약을 맺을 뿐이다. (140쪽)



  시골에서 사는 우리 집으로서는 자율주행 자동차는 까마득히 먼 이야기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오더라도 한동안 큰도시에서만 쓸 수 있을 테니까요. 자율주행 자동차가 자리를 잡는다면, 곧 자율주행 비행기가 나올 테고, 자율주행 자동차나 비행기는 ‘고속도로’를 가볍게 뛰어넘으리라 느낍니다. 공항까지 가야 타는 비행기가 아니라, 작은 역(지점)에서 다른 작은 역(지점)으로 가볍게 날아가면서 사고 걱정이 없는 얼거리가 자율주행 비행기가 될 터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오늘날 한국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대형 토목공사’도 부질없을 만합니다. 고속도로가 늘어나야 할 사회가 아니라, ‘자율주행 얼거리’를 제대로 갖추는 사회로 거듭나겠지요.


  앞으로 언제쯤 자율주행 자동차가 나올는지 알 길은 없습니다. 다만, 구글 회사는 벌써 대여섯 해째 자율주행 자동차를 놓고 시험 운전을 했다고 하며, 구글 회사 개발직원은 이동안 자율주행 자동차로 출퇴근을 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자동차 제조사가 진짜로 도전해야 할 분야는 산업 인터넷 개념에 가까운 자동차 제어 영역이다 … 전 세계의 도시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고 있지만, 도쿄의 도시 디자인은 인구 감소를 전제로 실행되어야만 한다. 덧붙여 세계 최고 수준의 고령화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190쪽)



  곰곰이 더 헤아리면, 이 자율주행 자동차가 제대로 자리를 잡을 무렵 그야말로 모든 집에 자동차가 몇 대씩 생길 만합니다. 아니면, 이 자율주행 자동차 얼거리는 ‘혼자 타는 차’가 아닌 ‘여럿이 함께 타는 차’가 될 수 있을 테고요. 집집마다 자동차가 몇 대씩 있으면 그야말로 온 나라가 자동차로 뒤덮여서 오도 가도 못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혼자 타서 혼자 움직이기만 하는 자율주행 자동차라면, 크기를 한 사람 몸에 맞춘 아주 작은 자동차가 될 만하고, 이렇게 된다면 모든 사람이 ‘내 자동차’를 누리더라도 길이 자동차로 북적거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때에는 찻길로만 다니는 자동차가 아니라, 가볍게 하늘을 날면서 서로 부딪히지 않고 마음껏 어디로든 오갈 만하리라 느낍니다. 앞으로 이런 사회 얼거리가 된다면, 고속도로나 찻길 때문에 자꾸 숲을 밀거나 도시개발을 할 까닭이 사라지고, 우리 삶터는 참으로 새롭게 바뀔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 꿈 같은 일은 앞으로 나타날 테고, 그야말로 스스로 꿈을 꿀 때에 이 꿈을 이루리라 생각합니다.


  구글 회사는 더 높은 수익을 바라면서 자동차 사업에 뛰어들었을 테고, 일본 도요타 회사도 더 높은 수익을 꾸준히 거두기를 바라며 구글 뒤를 좇을 텐데, 이들 회사가 수익만 거두는 사업이 아니라, 삶을 곱게 살찌울 수 있는 길로 함께 나아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시스템 통제’ 권력을 거머쥐려는 흐름이 아니라, 삶을 밝히는 터전을 가꾸려는 손길이 자율주행 자동차를 만드는 사람들 마음속에 깃들기를 빕니다. 4348.11.20.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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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사 - 선사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까지
토마스 R. 마틴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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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8



전쟁으로 얼룩진 ‘옛 그리스’ 역사는 바보스럽다

― 고대 그리스사

 토머스 R.마틴 글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5.10.15. 2만 원



  오늘 하루는 앞으로 역사가 됩니다. 오늘을 살아낸 사람은 어제를 되새기는데, 어제가 바로 역사입니다. 어제를 돌아볼 줄 알면서 오늘을 씩씩하게 가꾸고, 오늘 하루 기쁘게 누린 살림을 모레에도 곱게 일구려는 마음이 됩니다. 오늘 하루 썩 기쁘지 못하거나 슬픈 살림이었으면, 이날을 차근차근 되씹으면서 모레에는 새로운 꿈이 자라도록 북돋우려고 하기 마련입니다.


  슬기롭게 보낸 하루는 앞으로도 슬기로운 발자국으로 남습니다. 어리석거나 바보스레 보낸 하루는 앞으로도 어리석거나 바보스러운 발자국으로 남습니다. 어느 발자국이든 모두 스스로 찍는 발자국이요, 스스로 내는 발자국입니다. 역사를 아는 사람이란,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냈는가를 아는 사람이요,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날을 슬기롭게 지으려는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자들은 정착촌에 매인 몸이 되었다. 그들은 점점 더 규모가 커져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영농을 지원하기 위해 아이들을 키웠다. 여자들은 또한 대구모 가축 떼들의 2차 생산품을 가공하는 노동 집약적 일을 떠맡아야 했다. (42쪽)



  토머스 R.마틴 님이 쓴 《고대 그리스사》(책과함께,2015)를 곰곰이 읽습니다. 글쓴이 토머스 R.마틴 님은 《고대 그리스사》뿐 아니라 《고대 로마사》도 썼다고 합니다. 《고대 로마사》는 ‘로물루스에서 유스티니아누스까지’ 적은 역사책이라면, 《고대 그리스사》는 ‘선사시대에서 헬레니즘 시대까지’ 적은 역사책이라고 해요.


  자, 그러면 이들 역사책에는 그리스나 로마에서 벌어진 어떤 이야기를 다룰까요? 우리는 그리스나 로마와 얽힌 옛 발자국에서 무엇을 읽을 만할까요? 아스라한 옛날, 그리스와 로마는 어떠한 삶을 꾹꾹 눌러서 발자국으로 남겼을까요?



고온에서 금속을 합금하는 혁신적인 방법을 고안한 에게 해의 금속공들은 더 치명적인 무기, 전투를 위한 새로운 사치품, 더 좋은 농업이나 건축용 도구들을 만들어냈다. 이 새로운 기술 덕분에 금속 무기는 훨씬 더 치명적인 살상력을 얻게 되었다. (56쪽)


아르카이크 시대의 그리스인들은 이 새롭게 획득한 기술을 이용하여 전승 문학을 기록하기 시작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호메로스의 두 장시이다. 근동의 이야기들이 많이 스며든 이 구전 서사시는 여러 세기에 걸쳐서 그리스의 후예들에게 자자손손 문화적 가치를 전달했다. (96쪽)



  《고대 그리스사》는 그리스를 둘러싼 정치와 사회와 문화를 다루는데, 이 가운데 정치는 거의 ‘전쟁 역사’라고 할 만합니다. ‘사회’를 살피면 ‘민주 제도’가 싹터서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흐름을 살핍니다. ‘문화’를 보면 아름다운 삶과 생각을 북돋운 슬기로운 사람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리스 옛 역사도 한국 옛 역사 못지않게, 정치권력을 쥔 이들이 서로 창이나 칼을 거머쥐고 땅을 차지하거나 뺏는 몸짓이 큽니다. 이른바 ‘영토 확장’이라든지 ‘노예 확보’를 노리려는 몸짓이요, 이웃한 ‘다른 지도자가 거느리는 땅’에 있는 자원에 군침을 흘리면서 가로채려는 몸짓이라고 할 만합니다. 옛 그리스에서 크게 꽃을 피운 멋지거나 놀라운 문화는, 바로 이웃에 있는 여러 나라를 쳐들어가서 땅과 사람과 자원을 빼앗았기에 이룰 수 있었다고 할 만합니다.



전쟁의 패배라는 참사로 자유를 잃어버린 그들은 그 이전에는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재 노예가 된 것은 이성의 능력이 결핍되어서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모든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전쟁 포로를 노예로 팔아넘기는 것을 인정했다. (140쪽)


스파르타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그들이 전쟁에서 정복하여 노예로 삼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가면서 정립되었다. 그들은 그 노예들을 경제적으로 수탈했는데, 노예의 수가 그들보다 훨씬 많았다. 정복당한 적대적 이웃들에게서 식량과 노동을 착취하고 또 그들에 대하여 우월성을 지키기 위해, 스파르타 사람들은 사회를 늘 경계 태세를 늦추지 않는 군인 사회로 만들어 나갔다. (158쪽)



  스파르타 사람들은 이녁 사회에서 노예 숫자가 훨씬 많아서 늘 ‘군대 집단’ 같은 얼거리였다는데, 스파르타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 얼거리가 즐거웠을까요? 누가 날 칼로 찔러서 죽이려고 한다는 두려움을 늘 품고서 노예를 더욱 짓누르는 삶이란 얼마나 재미날까요?


  사내로 태어나서 꽤 어린 나이부터 군사 훈련을 받고서 ‘적군’을 무찌르는 삶만 배워야 한다면, 이웃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마음은 배우지 못하고, 그저 전쟁무기를 가득 채우고, 전쟁훈련을 더 해야 하며, 자꾸자꾸 이웃하고 전쟁을 벌여야 한다면, 이러한 사회를 이룬 사람들은 삶에서 어떤 보람을 누릴 만할까요.


  그러고 보면, 오늘날 지구별에서 미국은 전쟁무기와 군대를 어마어마하게 거느립니다. 미국은 여러모로 과학이나 문화나 문명도 뽐내지만, 전쟁무기와 군대를 가장 크게 뽐냅니다. 러시아도 미국 못지않고, 중국도 미국 못지않아요.


  어쩌면, 미국이나 러시아나 중국은 이들 나라가 거느리는 전쟁무기와 군대를 앞세워서 이웃 땅이나 사람이나 자원을 가로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무기와 군대로 나라를 지킨다고 여길 만합니다만, 전쟁무기와 군대 때문에 자꾸자꾸 더 전쟁을 부추긴다고도 할 수 있어요.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에 대하여 타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하고 또 그 결혼의 타당성을 남들에게 설득할 수 있어야 하며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다른 사람이 자기의 이야기를 진실로 믿어 주기를 바랄 수는 없다는 사고방식이 초기 이오니아 사상가들이 이룬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다. (197쪽)


놀랍게도 아테네 민회는 페르시아와의 거래를 거부했다. 아무리 많은 황금 덩어리를 안겨 주고 아무리 아름다운 영토를 준다고 해도, 동료 그리스인들에게 ‘노예제’를 가져오는 일과 연관된 페르시아의 뇌물은 받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220쪽)



  정치를 다스리는 이들이 전쟁이나 군대에 돈과 힘과 품을 쓰지 않고, 오직 사람들이 아름답고 즐겁게 사는 길에 돈과 힘과 품을 썼다면 이 지구별은 어떤 모습이 되었을까 궁금합니다. 오늘날 미국과 러시아와 중국 같은 나라가 전쟁무기와 군대에 돈을 한 푼도 안 쓴다면, 한국 사회도 전쟁무기와 군대에 돈을 한 푼조차 안 쓸 수 있을 테고, 젊은이도 군대에 끌려가지 않아도 될 뿐 아니라, 전쟁무기와 군대에 들이던 어마어마한 돈으로 사회와 문화와 복지와 교육을 그야말로 훌륭하게 다스릴 만하리라 느낍니다.


  더군다나 한국 사회는 남녘하고 북녘이 갈린 채 다투지요. 남녘뿐 아니라 북녘도 전쟁무기와 군대 때문에 ‘가난하거나 괴로운 사람들’이 아주 많아요. 남녘과 북녘이 하나인 나라로 거듭난다면, 서로 총칼을 맞댄 채 으르렁거려야 하지 않으니, 전쟁무기와 군대에 바치던 돈을 아주 크게 줄이거나 아낄 만합니다.


  흔히 ‘통일비용’이 엄청나다고들 하지만, ‘통일이 된 뒤에는 전쟁무기와 군대를 크게 줄이면 되’고, 마땅히 전쟁무기와 군대를 크게 줄여야 할 터이니, ‘통일비용’은 오히려 얼마 안 들 뿐 아니라, 이러한 돈과 사람과 자원은 고스란히 ‘하나가 된 한국 사회와 문화’를 북돋우는 밑힘이 되리라 느낍니다. 곧 ‘분단비용’이 훨씬 어마어마합니다. ‘분단된 두 나라’가 전쟁무기와 군대에 수십 해째 치러야 하는 돈과 사람과 품은 그야말로 그악스럽도록 어마어마하지요.



아테네인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겪은 손실은 아테네 민회의 남자 투표자들이 거듭하여 적과 평화로운 협상을 거부한 태도에서 비롯된, 예기치 못한 참담한 결과였다. (306쪽)


그리스 중장 보병은 생존의 기술과 용기를 과시했다. 이 일을 알게 된 페르시아 왕은 그리스인들이 서로 힘을 합하면 제국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왕은 그리스인들을 서로 분할하여 자기들끼리 싸우게 만들어 자신의 제국과 부에 눈독을 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는 교훈을 명심했다. (363쪽)



  무척 아름답고 훌륭했다는 아테네였지만, 아테네는 식민지와 자원과 노예가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으리라고 잘못 여겼습니다. 전쟁을 그치지 않던 아테네는 그만 이 전쟁으로 얻은 엄청난 식민지와 자원과 노예를 고스란히 잃을 뿐 아니라, ‘나라’도 흔들거립니다. 아테네와 늘 맞수로 지낸 스파르타도 늘 ‘전쟁 사회’였지만, 무시무시할 만큼 씩씩하던 군대는 전쟁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어느새 힘을 잃고, 그동안 총칼로 끔찍하게 짓누르던 노예가 스파르타를 뒤집어엎으려고 하면서 이 ‘나라’도 흔들흔들하면서 그예 무너집니다.


  그리고, 이런 ‘그리스 내분’이라고 할 크고작은 다툼은, 이웃 다른 나라가 바란 일이라고도 해요. “그리스인들끼리 싸우면 이웃 나라는 가만히 앉아서 더 큰 이득을 얻는다”지요. 다시 말하자면, 한국 사회가 남녘하고 북녘으로 갈린 채 전쟁무기와 군대에 자꾸 힘을 싣는 일이란, 바로 중국이나 일본이나 러시아나 미국한테 더 크게 이득이 되는 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무기와 군대를 키우는 나라에는 아무런 ‘발돋움(발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대의 군대는 이처럼 물자를 필요로 했기에 그 군대가 지나간 곳의 주민들은 곧바로 기근과 파괴를 각오해야 했다 … 농부들이 식량 대신 받은 돈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는데, 다들 자급자족하는 터라 농촌에는 사들일 만한 물건이 없었기 때문이다. (402쪽)


적에게 충격 효과를 안겨 주는 데에는 그만인, 헬레니즘 시대의 애용 무기, 전쟁용 코끼리들을 유지하는 데에도 비용이 많이 들었다. (418쪽)


가난한 사람들은 헬레니즘 왕국의 경제를 떠받치기 위해 엄청나게 노동을 해야 했다. 농업이 경제의 기반이었고, 농민과 농업 노동자들의 삶은 시간이 지나도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423쪽)



  한국 사회를 이끄는 정치 지도자는 무엇을 생각할까요? 이곳이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라는 정책을 생각할까요? 토목공사를 벌일 적에 ‘더 많은 돈’을 바라는 마음일까요, 아니면 아름다운 나라를 이룩하는 길을 생각할까요? 발전소를 짓는다고 할 적에 ‘자급자족하는 전기’를 생각할까요, 그저 ‘돈이 되는 토목건설’로 흐를까요?


  아름답지 못한 정책을 펼치기에 사람들이 집회나 시위를 하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이 집회나 시위를 할 적에 정치 지도자는 전투경찰을 내세웁니다. 처음부터 아름다운 정책을 펼친다면 집회나 시위를 벌일 사람이란 없을 테고, 나라에서는 전투경찰을 꾸리느라 돈을 쓸 일이 없습니다.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기에 군대나 전투경찰을 키우고야 맙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길로 꾸준히 나아가면, 이리하여 군대나 전투경찰을 쓸 일이 없으면, 이 나라 사람 누구나 즐거울 테고, 군대나 전투경찰이 있을 까닭도 사라집니다.


  《고대 그리스사》에 나오는 옛 그리스 모든 나라는 ‘전쟁 물자’를 대느라 사회가 휘청거립니다. 시골에서 흙을 짓는 사람들은 언제나 가난에 시달립니다. 군대가 휩쓸고 지나간 마을에는 먹을거리가 떨어집니다. ‘옛 그리스 도시’에서는 제 나라 시골에서 먹을거리가 떨어지면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먹을거리를 가로챕니다. 다시 말하자면, 전쟁은 자꾸 전쟁으로 이어지고, 전쟁은 전쟁으로 꽃피운다고 할 만합니다. 헬레니즘 시대에는 ‘전쟁용 코끼리’ 때문에 돈이 엄청나게 들었고, ‘전함’을 짓는 데에 돈을 또 엄청나게 들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전투기와 탱크와 잠수함과 온갖 전쟁무기를 만드느라 돈을 엄청나게 들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이런 외부의 영감들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 나름의 사상과 실천을 배양했고 그런 것들 중 일부는 수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사람들에게 공명을 일으키고 있다 … 사람들은 때때로 고대를 비판하면서 현대가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오만한 견해를 내놓기도 했으나, 근세사는 그런 견해를 조금도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16쪽)



  사회를 가꾸자면, 전투기를 갖추려고 수천억 원이나 수조 원에 이르는 돈을 써야 할까요? 아니면, 수천억 원이나 수조 원은 아름다운 살림을 짓는 데에 알맞게 써야 할까요? 사회를 가꾸자면, 젊은이한테 총을 쥐어 주고 군사훈련을 시켜야 할까요, 아니면 젊은이가 꿈과 사랑을 배워서 스스로 텃밭도 가꾸고 즐겁게 일하면서 땀흘리는 보람을 익히도록 이끌어야 할까요?


  《고대 그리스사》 첫머리에 나오는 이야기를 되새겨 봅니다. 오늘날 사회는 조금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예나 이제나 전쟁무기가 사라지지 않을 뿐 아니라, 옛날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전쟁무기와 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앞으로 이백 해나 오백 해 뒤를 살아갈 뒷사람이 ‘오늘 이곳’ 이 나라 역사를 어떻게 적바림할는지 헤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아름답게 살지 않는다면, 앞으로 ‘오늘 이곳’ 이 나라 역사는 그야말로 바보스럽거나 어리석은 발자국만 꾹꾹 찍을 수밖에 없겠지요. 4348.11.13.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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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공간, 일상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 - 제도와 규정, 억압에 균열을 낸 여성들의 반란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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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8



사내가 집안일을 하면 나라가 아름답다

― 해방공간, 일상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

 이임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11.7. 22000원



  이임하 님이 쓴 《해방공간, 일상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철수와영희,2015)라는 책은 일제강점기에서 막 벗어난 한국 사회에서 ‘가시내(여성)’가 어떤 삶을 누리면서 어떤 생각을 품었는가 하는 대목을 살그마니 들여다보려고 합니다. 크게 세 갈래로 나누어서 살핍니다. 첫째로는 지식 사회가 바라본 여성 이야기, 정부에서 마련한 ‘부녀국’ 이야기를 살핍니다. 둘째로는 해방 뒤에도 일제강점기처럼 똑같이 노동자를 짓누르거나 괴롭히는 제도와 노동조건을 고치자고 하는 목소리를 낸 여성 이야기를 살핍니다. 셋째로는 미군정이 이 나라 여성을 성폭행한 사건, 공창과 사창이 뿌리내리는 발자취, 정부가 여성 몸을 통제하는 이야기를 살핍니다.



대한제국기 계몽운동가들이 여성들을 국권운동에 참여시키기 위해 봉건적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제도적·관습적 조치를 요구했지만, 그것은 그때뿐이었다. 그 임무가 끝나면 여성은 언제든지 여성의 본성 또는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았다. (41쪽)



  여성이란 누구일까요. 남성이란 누구일까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앞서 여성하고 남성이란 어느 자리에 어떻게 있는 사람인가를 먼저 헤아려 봅니다. 남성은 여성을 짓누르거나 윽박지르거나 거머쥐어도 될 만한지요? 거꾸로 여성이 남성을 짓누르거나 윽박지르거나 거머쥐어도 될 만할까요?


  남성은 여성을 옭아매거나 괴롭히거나 두들겨팰 까닭도 권리도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성이 남성을 옭아매거나 괴롭히거나 두들겨팰 까닭이나 권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남성이나 여성, 또는 여성이나 남성이라는 두 갈래 성별이 있을 뿐입니다. 두 가지 성별인 사람들이 모이기에 집이 태어나고 마을이 생기며, 고을로 퍼져서 나라도 됩니다. 한 가지 성별인 사람들만 모인다면, 집도 마을도 고을도 없는데다가 나라도 없을 테지요. 한 가지 성별인 사람들만 모인 곳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늙어서 죽으면 가뭇없이 사라질 테니까요.


  그러니, 사람은 서로 아낄 때에 사람이 됩니다. 평등이나 평화나 민주라는 말을 모르더라도 서로 아낄 때에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사람을 계급이나 신분으로 갈라야 하지 않듯이,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도 계급이나 신분을 가르지 말 노릇입니다. 



국립경찰전문학교 제1기 졸업생들은 일선 경찰서에 배치됐지만 뚜렷한 업무를 맡기지 않아 전화 받는 일이 전부였다. 또한 “남성 경찰들이 여경의 존재에 분개하고 여성들을 요리 또는 관서 주위의 잡무를 보는 직위로 내쫓을 정도”였다고 주한미군사에 기록되어 있다. (84쪽)


부녀국의 활동은 여성이 국가 건설 과정에서 어떤 역할과 직분을 갖는지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해방공간에서 다양하게 전개된 ‘여성해방론’, ‘남녀평등’, 가정의 사회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세탁소와 탁아소 등의 정책 마련에 대한 요구, 여성 노동 조건의 개선과 대안의 요구 따위를 모두 제거해 버리고 ‘현모양처’ 역할만이 강조됐다. 이런 점에서 부녀국은 국가기구 안에서 여성들의 다양한 잠재성과 가능성의 확장이 아닌 하나의 역할만을 강제하고 규제하는 역할을 했다. (90쪽)



  해방 뒤 정부에서는 부녀국이라는 기관을 마련했다고 하는데, 이 부녀국은 여성 인권이나 권리나 문화에는 어느 한 가지도 눈길을 못 두었다고 합니다. 여성 경찰을 키우는 기관을 나라에서 마련했다고 하지만, 정작 여경은 경찰로 제 맡은 일을 할 수 없고, 경찰서에서 남자 경찰한테 밥을 지어 주느니, 헌 옷을 기워 주느니 하는 자잘한 뒷일을 할 뿐이었다고 합니다.


  여성 노동자는 공장 기숙사에 거의 갇히듯이 지내야 했답니다. 여성 노동자는 일을 쉬는 날에 ‘자유롭게’ 공장 밖으로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다고 공장장한테 말하지만, 공장장은 이를 딱 잘라서 손사래쳤다고 합니다. 그나마 남성 노동자보다 일삯을 적게 받는 여성 노동자이지만, 공장장은 이들 여성 노동자를 아주 손쉽게 해고했다고 합니다. ‘더 적은 돈만 주어도 될 다른 노동자’가 수두룩하게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947년) 대구 지역 신문기자들이 해고 이유를 묻자 총무과장은 “전원 해고 이유는 재정 곤란인데 현재 여공 전원을 해고시키고 형무소 죄수를 쓰면 1인당 임금 67원을 단 10원으로 절약하여 죄수 5백 명을 사용할 수 있는 까닭”이라고 대답했다. (161쪽)


(1946년) 종연방직에서 행해진 신체에 가해진 폭력은 대죽으로 구타하기, 걸상 들기, 나체로 신체검사 따위였는데, 이는 폭력 피해자에게 수치감과 모멸감을 불러오는 체벌이었다. 곧 남한 최대의 방직공장이었던 종연방직은 여성 노동자의 신체에 대한 규율과 폭력을 통해 이들을 자본에 순응하고 말 잘 듣는 노동자로 만들고자 했다. (182쪽)



  이 나라 사내는 왜 평등이나 평화나 민주로 가는 길하고는 동떨어질까요. 어릴 적부터 평등이나 평화나 민주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일까요. 나이가 든 뒤에도 평등이나 평화나 민주를 배울 생각을 스스로 안 했기 때문일까요.


  공공기관에서 높은 자리를 맡기는 까닭은 일을 잘 하라는 뜻입니다. 뒷돈을 빼돌리라고 높은 자리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높은 자리에 앉은 이들을 비롯해서 낮은 자리에 앉은 이들까지 온갖 정책이나 사업이나 공사에서 뒷돈을 으레 빼돌렸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은 멈추지 않고, 일제강점기나 해방 언저리나 1970년대 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때에도 이러한 흐름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곰곰이 돌아볼 노릇입니다. 사내들이 집안일을 할 줄 안다면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고. 사내들이 집 바깥만 나돌면서 지내기만 하지 않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함께 맡았어도 이런 짓을 일삼았을까 하고.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일을 가시내한테만 맡긴 사내입니다. 아버지 자리에 서는 사내는 으레 집 바깥에서 돈만 버느라 바쁩니다. 아버지로서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거나, 삶을 보여주거나, 사랑을 물려주는 일이 아주 드뭅니다. 어쩌면, 아버지 자리에 설 사내는 말도 삶도 사랑도 모르는 탓에 ‘아이가 태어난 뒤’에도 아이 곁에서 아이를 따스히 돌보면서 살림을 가꾸는 일을 못 하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이리하여, 삶을 모르기 때문에 사회에서도 삶과 동떨어진 일을 할는지 모릅니다. 삶도 사랑도 모르는 탓에 사회에서도 자꾸 엉뚱한 짓을 벌일는지 모릅니다.



미군정기 당시 미군 범죄는 총상, 강도, 절도, 주택 침입, 폭행, 상해, 교통사고, 밀매 따위로 다양했다. 그 가운데 성범죄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 미군 성범죄는 조선인 통역을 낀 채 대개 2∼3명이 무리를 지어 여성들을 차에 태워 다른 곳으로 이동하거나 납치하는 방식이거나 새벽에 민가를 침입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246쪽)


법령 제70호인 인신매매 금지령의 이중성이 오히려 ‘사창’을 증가시켰던 것처럼 법령 제72호 제70조 역시 성매매에 대한 미군정의 이중적 태도를 분명하게 드러냈다. 곧 미군에게 성병만 감염시키지 않는다면 성매매는 얼마든지 인정됐다. (303쪽)



  주한미군 범죄는 미군정 무렵부터 그치지 않습니다. 미군정기에 미군이 벌인 성폭력을 놓고 제대로 재판을 벌인 일이 드물다고 합니다. 재판장에 미군을 세웠어도 ‘성폭력’이 아닌 ‘폭력’으로만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나마 재판장에 섰어도 거짓말만 하는 미군 손을 들어 주기 일쑤였다고 합니다.


  해방 언저리 한국 재판장에서 미군 범죄를 똑똑히 다스렸으면 그 뒤로 이 나라에 미군 범죄가 함부로 발을 붙이지 못했으리라 느낍니다. 미군 범죄뿐 아니라 다른 범죄도 그렇지요. 나라는 식민지에서 벗어났지만, 정치와 사회와 문화와 교육이 모두 식민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일제강점기에 스며든 일본 말투는 아직도 한국 말투를 어지럽히기도 하지만, 이를 못 깨닫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 군대 같은 얼거리가 한국 군대와 사회에 아직도 또아리를 틉니다.


  바야흐로 평화를 헤아리지 않는다면 평화와 먼 모습이 됩니다. 평화와 함께 평등을 살피지 않는다면 평화도 평등도 뿌리를 내리기 어렵습니다. 평화와 평등을 가꾸면서 민주를 싹틔워서 자라도록 북돋우지 않는다면, 정치와 사회뿐 아니라 문화와 교육도 참다이 일어서기 어렵습니다.




여성의 직분이 현모양처라고 주장한 우익의 담론에는 여성해방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 않았으며, 여성해방에 대한 전망 또한 없었다. 그것은 여성해방을 주장하면서도 오히려 남녀 불평등을 온존시키는 기능을 했다. 여성해방은 뒤로한 채 국가 건설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여성들을 다시 가정에 묶어 두려는 담론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담론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가 내세운) 총력전 체제 아래에서 여성 지식인의 현모양처론과 닮아 있다. (376쪽)



  《해방공간, 일상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라는 역사책은 새로운 역사책입니다.

 

  정치 지도자 몇 사람 발자국으로만 역사를 살피던 틀을 깨고서, 자료나 신문이나 문헌에 이름이 거의 안 남은 사람들 몸짓으로 역사를 읽자고 하는 책입니다. 역사를 수수한 사람들 마음과 꿈과 사랑을 바탕으로 읽자고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여성사’라고 할 적에도 몇몇 이름난 여성운동가 발자국으로 돌아보자고 하지 않고, ‘몇몇 운동가’를 넘어선 ‘모든 여성’이 선 자리에서 다시 헤아리자고 하는 책입니다.



고루한 전통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단발을 찬성한 김활란과, 대중들과 만나 여성운동을 하기 위해 단발을 반대한 정종명. 한국 사회에서 김활란은 잘 알려져 있지만 정종명은 흔적조차 없다. (25쪽)



  오늘날에도 ‘집에서 밥 짓는 가시내’ 이야기는 역사책에 안 실립니다. 집에서 아기를 낳아서 돌보는 어머니 이야기는 역사책에서 안 다룹니다. 대통령이 된 여성 이야기는 머잖아 ‘새로운 국정 교과서’ 같은 역사책에서 다루겠지요. 그러나, 이 나라를 밑바탕에서 일구고 가꾸면서 ‘새로운 나라’가 아름답게 태어나서 자라기를 바라던 ‘수수하면서 사랑스러운 가시내’ 이야기는 국정 교과서에 실리지 않을 듯합니다.


  아마 나라에서는 ‘대통령이 된 여성’을 드높여야 여성 지위가 높아진다고 말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수수한 집과 수수한 마을에서 수수한 살림을 가꾸는 가시내와 사내가 즐겁게 살림을 지을 때라야 비로소 여성 지위도 높아지고 남성 지위도 높아집니다. 가시내와 사내가 함께 살림을 지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서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으로 거듭납니다.


  밥짓기나 옷짓기는 가시내한테 떠넘길 일이 아니라, 사내와 가시내가 함께 즐기면서 누릴 일입니다. 집안일은 사람으로서 누구나 기쁘게 맡는 일입니다. 아름다운 보금자리가 있는 마을이기에 아름다운 나라가 섭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아름다운 꿈과 사랑을 짓습니다. 인문책 《해방공간, 일상을 바꾼 여성들의 역사》는 바로 ‘여느 자리’에서 삶을 바꾼 여성이 ‘나라’도 문화도 정치도 모두 바꿀 수 있다고 하는 이야기를 나즈막한 목소리로 야무지게 외칩니다. 4348.11.12.나무.ㅅㄴㄹ


(최종규 / 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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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찾아서 - 어느 무신론자의 진리를 향한 여정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7



내가 ‘나를 찾는 길’에서 ‘하느님(신)’을 본다

― 신을 찾아서

 바버라 에런라이크 글

 전미영 옮김

 부키 펴냄, 2015.10.16. 14800원



  내 어릴 적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나는 어릴 적에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모습’을 늘 보았습니다. 도깨비인지 귀신인지 알 수 없는 허옇거나 속이 다 비치는 무언가를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줄 만한 어른이 둘레에 없었고, 이러한 것을 보는 내 눈이 무엇인가를 밝힐 만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아침이고 밤이고 가위에 눌린 몸짓이었습니다.


  귀울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귀울음이라기보다는 어떤 소리가 늘 들리곤 했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다스릴 적에 이 소리는 한결 크게 들립니다. 이 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나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아닙니다. 달리기를 해도, 뜀박질을 해도, 수다를 떨어도, 늘 내 귀로 듣는 이 소리가 무엇인가를 알려줄 만한 책이나 지식이 곁에 없는 채 어린 나날을 보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쩐 종말을 향해 가는가? (17쪽)


백화점에는 내 관심을 끌 만한 것들이 없었다. 내 옷은 어머니가 손수 지은 것 아니면 통신판매사 시어스의 카탈로그에서 주문한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인공적인 환경은, 막 형성되기 시작한 교외의 모습이라 해도, 게나예나 한 가지라 지루할 뿐이었다. 어딜 가나 벽돌 한 장, 지붕 판자 하나까지도 판박이였다. 그러나 자연은 차원이 다르다. 나뭇가지 하나, 구름 한 덩이, 바다의 파도 하나도 같은 게 없어 제각각 눈길을 끈다. (32쪽)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이 쓴 《신을 찾아서》(부키,2015)를 읽습니다. 이 책을 쓴 바버라 에런라이크 님도 어릴 적에 ‘무엇인가’를 늘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녁이 본 ‘무엇인가’가 무엇인가를 알려준 사람은 없었다고 해요. 예배당에 나가라고 하는 사람은 많고, 성경을 가르치려는 학교는 있어도, 눈에 보이는 모습과 귀에 들리는 소리를 제대로 밝혀 주는 길잡이나 어른은 없었다고 할 만합니다.


  《신을 찾아서》를 쓴 분은, 또 이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신(神)’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한국말에는 ‘님’이 있습니다. ‘지기’라든지 ‘지킴이’도 있고, ‘하느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한겨레 발자취를 돌아보면, 이 땅에 서양 종교가 들어오기 앞서부터 ‘하느님’을 늘 말했습니다. 그리고, 해님·달님·별님·꽃님·숲님처럼, 모든 목숨이나 숨결한테 ‘님’을 붙였지요.


  개님이나 고양이님이나 닭님이나 범님처럼 쓰기도 합니다. 사람을 둘러싼 수많은 목숨붙이가 어떤 넋인가를 헤아리면서 ‘님’이라는 말을 붙여요. 그래서, 풀님이나 나무님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말은 풀과 나무를 고이 아끼는 몸짓이 됩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밥님’이라 말하고, 가문 땅을 적시는 비를 바라보며 ‘비님’이 오신다고 외치지요.



학습 친구들은 아무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들에게 경고하고 싶었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허수 같은 개념을 받아들이면 앞으로 남들이 무엇을 목구멍에 쑤셔넣든 그대로 삼키게 될 거라고. (52쪽)


생명의 목적은 죽음일까, 아니면 계속 살아 있는 것일까? (64쪽)


우리는 지상에서 짧은 삶을 살다 죽지만, 대신에 의미라는 영예로운 보상을 받는다는 것. 이때 의미는, 찾으려고만 들면 누구의 눈에도 보이는 것이고, 죽음의 순간에 저 높은 하늘에서 북극광처럼 빛나면서 그간의 모든 하찮음과 고통을 상쇄해 준다는 것. (76∼77쪽)



  사람은 살려고 태어납니다. 사람은 죽으려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람은 살려고 태어나기에, 살면서 할 일을 할 때에 삶이 즐겁습니다. 사는 동안 죽음만 걱정하다 보면, 정작 스스로 할 일을 놓치거나 멀리하고 말지요. 돈을 버는 까닭이 오로지 돈벌이를 하려는 뜻이라면 죽는 날까지 돈은 실컷 벌 만하리라 느껴요. 돈벌이에만 뜻을 두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오직 돈벌이만 뜻이라면 말이지요.


  학교를 오래 다닌다든지 책을 많이 읽는 일도 이와 같아요. 왜 학교를 오래 다녀야 할까요. 왜 대학교나 대학원을 가야 할까요. 책은 몇 권이나 읽어야 할까요.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얼마나 보아야 할까요. 사랑하는 짝은 몇 사람이나 사귀어야 할까요. 밥은 하루에 몇 그릇을 먹어야 배부르거나 넉넉할까요. 자동차는 얼마나 몰아야 하고, 잠은 얼마쯤 자야 할까요.


  얼핏 보기에 너무 마땅할 수 있지만, 곰곰이 따지면 우리 삶을 이루는 모든 것을 늘 하나하나 되짚으면서 새롭게 바라볼 때에 비로소 삶이 새롭게 열리지 싶습니다. 이를테면, 숨을 쉬지 않으면 누구나 죽지만, 숨쉬기를 생각하며 숨을 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숨을 쉴 적마다 ‘아, 난 숨을 쉬지’ 하고 생각할 까닭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마시는 숨이 얼마나 달콤하거나 고마운가를 문득 생각할 만해요. 맑거나 싱그러운 바람을 마시고 싶다는 꿈을 품을 만해요. 오늘은 매캐한 배기가스가 가득한 도시에서 살지만, 언젠가는 따스하고 시원한 바람이 사랑스러운 숲집에서 살겠노라는 꿈을 품을 수 있어요.



동생들은 일기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고, 텔레비전 앞에만 붙어 있었으므로 내 시야에도 잘 들어오지 않았다. 새로 등장한 텔레비전 앞으로 끌려간 동생들이 어리석게만 보였다. (90쪽)


나는 무엇에 반기를 들었던가? 내가 맞선 건 고등학교의 집단주의적 기획이었다. (103쪽)



  나는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집단주의가 끔찍하게 괴로웠습니다. 끔찍하게 괴롭다 보니 못마땅했습니다. 군대에 가서도 집단주의가 모질게 고달팠습니다. 모질게 고달프다 보니 싫음을 넘어 미움에 이르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집단주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고, 군대도 없어질 낌새가 아직 없으며, 회사나 공공기관 얼거리는 군대하고 닮습니다.


  평등을 말하려면 평등은 어디에서 이루어야 할까 생각해 봅니다. 신분과 계급에 따라 척척 갈리는 얼거리가 있는데 평등을 말할 수 없겠지요. 직책에 따라 시키는 사람과 심부름하는 사람이 갈리는 곳에서 평화를 말할 수 없겠지요. 그러니까, 대통령은 가장 위에 앉은 사람이 아니라 심부름꾼이라는 소리요, 으뜸 심부름꾼이 대통령이 되는 셈입니다.


  그러면, 집단주의란 무엇일까요? 집단주의는 집단에 따르라고 하는 주의입니다. 집단에 따르려면 ‘스스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생각해서 스스로 움직이면 ‘집단이 안 되’거든요. 나는 이쪽으로 가고 싶어서 이쪽으로 가면 집단이 깨지지요. 그래서 집단에서는 ‘전체주의’로 흐르기 마련이고, 어떤 지도자 한 사람 뜻에 따라 한꺼번에 움직이는 흐름이 됩니다.


  함께 움직이면서 슬기롭게 힘을 쓸 수도 있어요. 이른바 두레와 품앗이가 있어요. 이때에는 함께 뜻을 세워서 어떤 일을 합니다. 다만, 두레와 품앗이는 어느 일을 할 적에는 함께 움직이되, 여느 때에는 늘 저마다 제 삶을 지어요. 그리고, 두레와 품앗이에서도 저마다 몫이 다릅니다.



아메바에게도 의도가 있을 수 있다고, 산소 원자는 수소 원자에게 실제로 욕망을 느낀다고 과학이 시인했다면, 나는 아마도 덜 외로웠으리라. (119쪽)


나는 동생에게 솜사탕을 안기고 앉힌 뒤 너는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뭐든지. 자기에게 그럴 힘이 있다는 것만 알면 누구나 뭐든지 할 수 있다고. (178쪽)



  《신을 찾아서》라고 하는 책은 무엇을 말하려 할까요? 이 책은 ‘신’이나 ‘님’이나 ‘하느님’을 말하는 책일까요? 어느 모로 보면 이 책은 신이나 님을 말하지 않으려는 책이면서, 다른 모로 보면 이 책은 신이나 님은 하늘 꼭대기나 땅 깊은 곳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있다는 이야기를 말하려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보라’고 이야기하려는 책이라고 할까요. 내 마음속에서 싱그럽게 살아서 춤추고 꿈꾸고 노래하고 사랑하는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삶을 즐겁게 지어서 아름다운 길을 가자고 하는 책이라고 할까요.



아버지가 평생 싸웠던 대상은 가난도, 실패도, 종교도, 지적 퇴행도 아니었다. 그것은 따분함이었다. (239쪽)


나는 과거의 나에게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제대로 배우지 않았다고. 배우는 것 근처에도 못 갔다고. (314쪽)



  요즈음도 나는 맨눈으로 무엇인가를 보고, 맨귀로 무엇인가를 듣습니다. 이 모습과 소리가 무엇인가를 똑똑히 말하기는 어렵지만, 허깨비를 본다고는 느끼지 않고 헛소리를 듣는다고도 느끼지 않아요. 아마 나는 마음에 있는 눈으로 무엇인가를 볼는지 모르고, 마음에 있는 귀로 무엇인가를 들을는지 몰라요. 그리고, 나뿐 아니라 우리들 누구나 마음에 있는 눈으로 서로 사귀면서 사랑을 속삭일 수 있다고 느껴요. 우리들 누구나 마음에 있는 귀로 서로 아끼고 보듬는 꿈을 나눌 수 있다고 느껴요.


  삶으로 사랑을 짓고, 삶으로 꿈을 노래합니다. 삶으로 사랑을 들려주고, 삶으로 꿈을 주고받습니다. 《신을 찾아서》는 바로 이 대목을 느즈막한 나이에 비로소 찾은 발자국을 들려주는 책이라고 느낍니다. 암 선고를 받고, 이제 죽음 문턱에 선 나이라고 느끼는 글쓴이가 그동안 수수께끼처럼 가슴에 품었던 실마리를 풀려고 하는 기나긴 삶길을 보여주는 책이로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신을 찾아서”란 “나를 찾아서”입니다. “나를 찾아서”란 “삶을 찾아서”입니다. “삶을 찾아서”란 “꿈을 찾아서”이고, “꿈을 찾아서”란 “사랑을 찾아서”이지 싶어요. 나를 찾으면서 삶을 찾고, 바야흐로 꿈과 사랑을 찾으면서, 오늘 하루도 아침부터 노래하는 웃음꽃을 피우는 이야기가 바로 ‘하느님’ 이야기이지 싶습니다. 4348.11.11.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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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의 문화 인문과학 코스모스 4
이로카와 다이키치 지음, 박진우 옮김 / 삼천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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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36



권력자는 왜 ‘국정 교과서’를 들이미는가?

― 메이지의 문화

 이로카와 다이키치 글

 박진우 옮김

 삼천리 펴냄, 2015.10.16. 25000원



  ‘역사(歷史)’라는 낱말을 어른이 보는 한국말사전에서 살펴보면,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으로 풀이합니다. 어린이가 보는 한국말사전에서는 “인간이 사회와 국가를 이루면서 살아온 지난날의 자취. 또는 그 기록”으로 풀이합니다. 어느 한 가지로 보자면 사회와 나라가 걸어온 길을 역사라 하는 셈이고, 다른 한 가지로 보자면 지난날 발자취라 하는 셈입니다.


  역사책에 남는 이야기를 보면 으레 ‘정치 권력자’ 발자취를 갈무리하는 일에 힘을 쏟습니다. 사회를 이루는 바탕인 ‘수수한 사람들’ 모습이나 삶이나 이야기를 갈무리하는 역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역사를 책으로 쓰는 분들이 가르는 ‘시대 구분’은 언제나 ‘정치 권력자 역사’입니다. 조선, 고려, 발해와 신라, 세 나라와 가야, 옛 조선처럼, 정치 권력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이 나라 발자취를 살피지요.



일본이 단 한 번도 대륙의 강대국에 정복당하지 않았던 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우연이나 대담한 무사도 정신 덕분이 아니다. 그것은 다분히 몬순 아시아 풍토의 평화로운 국제 환경 덕분이다. 특히 중국과 조선 민족이 장대한 방벽 역할을 해서 천 수백 년 동안 끊이지 않은 호전적인 기마민족의 침략에서 일본을 지켜 준 덕분인 것이다. (18쪽)



  앞으로 쉰 해나 백 해쯤 뒤에 역사를 갈무리할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2010년대 오늘날 역사를 ‘정치 권력자’인 대통령을 한복판에 놓고 발자취를 살피리라 느낍니다. 이제껏 역사를 갈무리한 흐름을 그대로 좇는다면, 쉰 해나 백 해 뒤뿐 아니라 이백 해나 오백 해 뒤에도 똑같은 틀로 나아가겠지요.


  그런데 이제는 역사를 좀 새롭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지 싶습니다. 정치 권력자가 무엇을 했느냐를 따지는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를 되새기는 역사를 읽고 써야지 싶습니다. 정치 권력자가 어떤 훌륭한 일을 하거나 멍청한 일을 했느냐를 적는 역사보다는, 수수한 여느 자리에서 즐겁게 삶을 지은 사람들 이야기를 아로새길 수 있는 역사로 거듭나야지 싶어요.


  왜냐하면,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역사 지식을 넓히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까닭은 옛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오늘 이곳에서 삶을 아름답게 지을 슬기를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배우는 우리는 앞으로 이곳에서 지을 삶을 씩씩하고 참다우며 사랑스레 가꿀 때에 하루하루 즐겁기 때문입니다.



메이지는 일본 민족의 재능을 해방시켜 아시아 최대의 군사력과 공업력으로 발전시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절망적인 농촌과 도시 빈민의 비문화적 상황, 그리고 구조로서의 천황제를 불러왔다. 그 병폐는 민중의 체내를 돌아 뿌리 깊은 노예 구조로 정착했다. (35쪽)



  이로카와 다이키치 님이 쓴 《메이지의 문화》(삼천리,2015)라는 책을 읽으면서 일본 사회와 역사뿐 아니라 한국 사회와 역사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일본 사회에서는 일본 역사를 어떻게 가르칠까요? 일본도 한국처럼 ‘임금님 이름’을 외우도록 시키거나 ‘임금님마다 어떤 업적을 남겼는지’를 가르치거나 ‘정치 권력자마다 어떤 전쟁을 벌여서 땅을 얼마나 잃거나 빼앗았는가’를 알려줄까요? 아니면, 일본 사회는 사람들한테 슬기로운 삶을 북돋울 만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줄까요?



메이지 시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이러한 일본의 도회지에 절망하고 있다. 거기서 보이는 것은 악취 나는 권력 의지와 이권을 챙기려는 욕심, 노골적인 돈벌이 근성이 벌이는 추악한 투쟁이었다. (51쪽)


우리가 여태 이름조차도 몰랐던 헌법초안 작성자와 마을 지도자가 모두 한 집안의 가장이자 농민이요 초등학교 교원이며 민중 생활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평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59쪽)



  일본 정치나 사회는 자꾸 군국주의로 치닫습니다. 일본이 지난날 역사를 뉘우치지 않는 모습은 일본 정치·사회 권력자한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일본도 한국 못지않게 역사를 제대로 안 가르친다고 할 만하고, 삶을 슬기롭게 가르치거나 알려주는 바탕이 제대로 안 섰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이런 뿌리는 어디에서 비롯할까요. 이런 뿌리를 찾아낸다면 어떻게 고치거나 가다듬을 만할까요. 일본은 앞으로 아름다운 나라로 거듭나서 아시아뿐 아니라 이 지구별에 평화로운 길을 여는 이웃이 될 만할까요. 한국은 앞으로 아름다운 나라로 다시 태어나서 남북녘 사이뿐 아니라 이웃 아시아 나라들하고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는 평화로운 나라가 될 만할까요.


  다른 나라 눈치를 보면서 평화를 헤아려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 평화를 생각해서 평화라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저 나라에서 전쟁무기 한 가지를 줄이니 우리도 줄이자는 생각이어서는 평화를 이루지 못해요. 저 나라에서 새 전쟁무기를 늘였으니 우리도 새 전쟁무기를 늘이자는 생각에 갇히면 앞으로도 평화가 아닌 전쟁에 사로잡힙니다.



봉건 지배 아래에서는 그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야말로 인민은 무학무지의 상태로 방치되었던 것이 아닌가. 그것이 이제는 180도 전환이다. 사회의 폐풍을 교정하여 참된 문명을 낳고 국가의 영광을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인민이 배우느냐 배우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기도 다카요시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69쪽)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로 하늘을 난 것은 1903년이었지만 일본은 이러한 발명, 발견을 거의 군사적인 측면에 이용하고 민간에서 자동차 시대나 비행기 이용은 반세기나 늦어진다. (82쪽)



  《메이지의 문화》는 오늘날 일본 사회가 되도록 발판 구실을 했다는 ‘메이지’ 언저리에 정치 권력자가 아닌 ‘시골 지식인과 젊은이와 여느 마을사람’이 어떤 마음과 생각으로 새로운 나라를 꿈꾸었는가, 라고 하는 대목을 짚으려 합니다. 정치 권력자 발자취로 읽는 문화나 역사나 사회가 아니라, 밑바닥에서 밑바탕을 다스리면서 샘솟거나 터져나오려고 하던 문화나 역사나 사회를 읽어서 ‘일본이 앞으로 나아갈 길은 어디인가?’를 밝히려고 하는 책입니다.


  《메이지의 문화》를 읽으면, 일본 정치·사회 권력은 무척 오랫동안 ‘일본 인민(또는 민중 또는 백성 또는 사람들)’이 못 배우도록 배움길을 가로막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다가 메이지 사회 언저리에 이르러 ‘일본 인민이 학교교육을 밟아야 나라에서 시키는 일을 잘 해내는 심부름꾼(또는 톱니바퀴 또는 부속품 또는 노예)’ 구실을 할 만하다고 깨달아서, 비로소 ‘국민 교육’을 펼친다고 이야기합니다.


  일본 정치·사회에서 ‘인민 무교육’으로 오랫동안 흐르다가 ‘인민 교육(또는 국민 교육)’이 되었을 적에, 정치 권력자는 ‘국정 교과서’를 사람들한테 내밀었다지요. 나라에서 교과서에 적은 대로 배워서, 나라에서 가르치는 대로 머릿속에 집어넣으라는 뜻이었을 테지요. 나라에서 가르치는 것만 옳고, 다른 것은 머릿속에 담지 말라는 뜻이었을 테지요.



온화하고 금욕적이며 참을성 강하고 무엇보다도 ‘관리’를 무서워하던 산촌의 인민이 어떻게 다년간의 소극주의를 넘어서 의기양양하게 권력에 맞서 대항할 수 있었을까. 이 비밀은 그들이 자신의 내면적인 도덕관념으로서 민중 도덕을 극한 상태까지 관철하고 그 한계까지 파고들었을 때 비로소 열릴 수 있었던 것이다. (194쪽)


일본인의 지식인도 대중도 어느새 그 네 모서리가 보이지 않는 어두운 상자에 갇혀, 왜 자신이 이렇게까지 고통 받아야 하는지도 모른 채 탄식하면서 죽어 갔다. 그러한 황상의 상황, 더구나 그러한 모든 상황의 대상화를 용납하지 않는 속박의 논리가 대중 측에 있다는 사실이 바로 가공할 만한 일인 것이다. (264쪽)



  정치 권력자가 ‘국정 교과서’ 하나로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 까닭은 ‘국정 교과서가 가장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국정 교과서가 안 아름다울 뿐 아니라, 아름다움하고 동떨어진 책’이기 때문에 오직 이런 교과서로 아이들을 길들이려고 한다고 느낍니다. 나라에서 엮은 교과서가 ‘아름다운 책’이라면, 나라에서 그 교과서로 배우라 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스스로 나서서 배우려 하기 마련입니다. 나라에서 엮은 교과서가 ‘안 아름다운 책’이기 때문에 마치 독재권력을 휘두르려는 몸짓으로 ‘국정 교과서’ 하나로 사회와 역사와 문화와 얽힌 지식을 가두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이리하여, 한국 정치·사회에서도 ‘국정 역사 교과서’를 펴내겠다고 하는 흐름이 불거집니다. 학교에서 참다운 가르침을 베풀려고 하는 정책을 내놓지 않고, 좀 엉뚱한 정책을 밀어붙입니다. 아이들이 입시지옥에서 벗어나도록 돕는 정책에는 등을 돌리면서, 아이들을 ‘한쪽으로 치우친 지식’에 옭아매려고 하는 독재 몸짓이 나타납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이치라도 지배 이데올로기의 핵심으로 이용되고 메이지 43년(1910년)의 국정교과서에 채용되어, 이미 존재하던 메이지 민법의 ‘이에’와는 무관했던 이름도 없도 재산도 없는 대중 가족의 마음속까지 침투해 들어갔다. (307쪽)


러일전쟁은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를 대중심리 속에 남겼다. 그것은 조선과 만주의 전쟁터로 갔던 수백만의 일본인이 거기서 직접 중국 민중을 접하고 그들에 대한 확실한 멸시 의식을 남겼다는 점이다 … 민권운동을 탄압한 후 정부는 학교령을 개정하여 ‘교육칙어’를 반포하고 반체제 교육을 단속하는 동시에 교과서를 비롯한 교과과정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체계화에 착수한다. (314, 317쪽)



  책 하나를 놓고 헤아려 본다면, 이른바 베스트셀러나 스테디셀러만 책이 아닙니다. 천 부가 팔릴 동 말 동하는 책도 ‘책’입니다. 이천 부나 삼천 부밖에 안 팔렸대서 이러한 책이 ‘안 아름다운 책’일 수 없습니다. 십만 부나 백만 부쯤 팔려야 ‘아름다운 책’이 되지 않습니다.


  많이 팔린 책은 그저 ‘많이 팔린 책’이고, 적게 팔린 책은 그저 ‘적게 팔린 책’입니다. 첫판도 다 팔지 못하고 사라져야 하는 책은 ‘잘 안 팔린 책’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라에서 교육이나 문화 행정을 맡은 일꾼이라면, 국정 교과서 같은 굴레에 스스로 갇히려 하는 몸짓이 아니라, ‘아름다운 책’이 골고루 나올 수 있는 길을 여는 몸짓이 될 수 있어야 비로소 아름답습니다. 사람들이 한두 가지 책만 읽고 책을 더 안 읽는 바보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람들이 ‘아름다운 책’을 꾸준히 골고루 읽으면서 스스로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슬기를 보듬도록 이끄는 참다운 정책을 펼칠 수 있어야 합니다.


  교과서는 여러 가지가 있어야지요. 너무 마땅합니다. 정당도 여러 곳이 있어야지요. 아주 마땅합니다. 대통령은 한 사람이어도 장관이나 국회의원은 지역이나 정당마다 골고루 있어야 할 테고, 공무원도 지역마다 부서마다 골고루 있어야지요. 참으로 마땅한 일입니다.



고토쿠 등이 몸을 던져 제시한 것은 천황제가 자애에 가득 찬 무한 포용의 체계가 아니라 이단 배제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포학한 것이며, 그 화기애애한 그늘에 사람들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는 가혹함을 숨기고 있는 모순 덩어리라는 진실이었다. (327쪽)



  ‘고른 삶’하고 동떨어질 적에 독재가 되거나 군국주의가 됩니다. ‘나누는 삶’하고 멀어질 적에 반민주가 되거나 제국주의가 됩니다. 일본 사회를 들여다보는 인문책 《메이지의 문화》는 일본이라는 나라가 ‘독재 아닌 평화’로 나아가고, ‘반민주 아닌 민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정치·사회 권력자가 할 일이란 참 많을 텐데 역사 교과서 하나를 바보스레 엮는다고 하는 데에 이렇게 힘을 기울이는 일이란 얼마나 부질없는지 부디 알아차릴 수 있기를 빕니다. 먼 뒷날 역사를 내다볼 수 있기를 빌어요. 오늘날 정치·사회 권력자는 평화와 평등을 이루는 길을 살펴야 하고, 에너지와 식량을 슬기롭게 자립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지 싶습니다. 이런 데에 힘을 쏟아야지요.


  평화와 엇나가거나 민주를 등돌리는 정치 권력이나 사회 권력은 ‘오늘 이곳’에서는 온갖 권력을 휘둘러 저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듯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고작 다섯 해 뒤에도, 열 해 뒤에도, 스무 해나 서른 해 뒤에도 역사가를 비롯한 ‘생각 있는 사람들’은 바로 오늘 이곳에서 권력자가 저지른 어설픈 몸짓을 환하게 알아채면서 ‘새 역사를 쓰리’라 느낍니다. 어제와 모레를 함께 바라보면서 오늘을 곱게 일구는 삶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4348.11.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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