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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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음을 노래로 채울 수 있다면

― 우물에서 하늘 보기

 황현산 글

 삼인 펴냄, 2015.11.16. 13000원



  이 지구에서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 이녁 마음을 노래로 채울 수 있다면 이 별은 어떻게 달라질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마음 가득 흐르는 노래를 기쁘게 부르는 사람이 가득하다면 이 지구라는 별은 어떠한 모습이 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버스를 모는 일꾼도, 빗자루를 쥔 일꾼도, 기계를 다루는 일꾼도, 씨앗을 뿌리는 일꾼도,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도, 부엌에서 밥을 짓는 아버지도, 청와대에서 수첩을 쥔 일꾼도, 저마다 언제 어디에서나 노래를 부르는 삶이라면 이 나라는 어떻게 거듭날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노래를 부르지 않기에 서로 다툽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서로 다투지 않거든요. 웃지 않기에 서로 싸웁니다. 어깨동무를 하면서 웃는 사람은 서로 싸우지 않아요. 기쁘게 사랑하며 서로 아끼는 마음이 되지 않으니 전쟁이 터질 뿐 아니라, 전쟁무기와 군대가 자꾸 커져요. 서로 아끼는 마음이라면, 서로 사랑하려는 숨결이라면, 남북녘뿐 아니라 지구라는 별에서 전쟁이란 가뭇없이 사라지리라 느낍니다.



욕사가 조국의 광복이나 민족의 해방만을 염두에 두었다면 ‘천고’라는 말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은 압박하는 사람도 압박받는 사람도 없는 세상에서 저마다 인격이 완성된 인간들이 제 자유를 ‘목 놓아’ 구가하는 인류 전체의 미래를 생각했다. (22쪽)


몇 년 전에는 문인들의 육필전이 열린다고 해서 가 보았는데, 마치 ‘글씨를 못 쓰게 된 우리 역사 전시회’를 보는 것 같았다. 작고한 작가들은 글씨를 잘 썼고 생존 작가들은 서툴렀다. (26쪽)



  황현산 님이 쓴 《우물에서 하늘 보기》(삼인,2015)를 읽습니다. 황현산 님은 한국일보라는 신문에 ‘시를 노래하는 이야기’를 꾸준히 실었다 하고, 이 글을 차곡차곡 그러모아서 책 한 권으로 여미었다고 합니다.


  책 한 권으로 여민 ‘시를 노래하는 이야기’는 짧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간신문에서 ‘시를 노래하는 이야기’에 퍽 큰 자리를 내준 셈인데, 이렇게 신문이 ‘시를 노래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다면 신문에 싣는 기사가 찬찬히 달라질 만하리라 느낍니다. 신문이나 방송이 ‘삶을 노래하는 이야기’를 싣고, ‘삶을 사랑하는 이야기’를 실으며, ‘삶을 꿈꾸는 이야기’를 싣는 자리로 거듭날 수 있으면, 신문을 읽고 방송을 보는 사람들 마음도 함께 거듭날 만하리라 느껴요.



공부를 많이 해서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글을 잘 써야 하지만 글을 잘 쓴다고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작가는 문학과 인간에 대한 지식이 풍부해야 하지만 지식의 풍부함이 한 사람을 작가로 만들어 주는 것은 아니다. (37쪽)


우리는 또다시 아이들을 줄 세우고, 결국 따지고 보면 너는 줄을 잘 서야 한다는 뜻으로 요약될 말로 훈계를 할 것이다. 우리는 또다시 ‘예능’을 찾아 채널을 돌리며 우리가 잘 살고 있다고 흐뭇해 할 것이다. 천년 숲이 불도저에 형체도 없이 무너져도 다른 숲이 아직 많다고 말할 것이며. (101쪽)



  얼마 앞서까지 사람들은 편지를 쓸 적에는 누구나 손으로 썼습니다. 깨끗한 종이를 마련해서 또박또박 알뜰히 편지를 썼어요. 오늘날에는 거의 모두 글판을 두들기면서 편지를 씁니다. 오늘날에 사람들이 주고받는 편지는 모두 똑같은 글씨이거나 글꼴입니다. 기계를 다루어 기계에 뜨는 글씨이거나 글꼴이니까요. 줄거리는 다 다른 편지이기는 하되, 줄거리를 엮는 손길이 좀처럼 드러날 수 없는 편지만 흐릅니다.


  어쩌면 오늘날은 구태여 손으로 글씨를 써야 할 까닭이 없을 수 있습니다. 지난날에 아이들이 글을 익힐 적에 으레 깍뚜기공책에 하나하나 천천히 또박또박 쓰면서 익혔는데, 이제는 태플릿 같은 것을 콕콕 누르기만 해도 글씨가 뜨니 애써 글씨를 안 배워도 될는지 모릅니다.


  손으로 밥을 짓지 않는 사회가 되고, 손으로 살림을 가꾸지 않는 사회가 되며, 손으로 따스한 숨결을 나누지 않는 사회가 됩니다. 손길이 사라지고, 손놀림이 잊힙니다. 손수 움직이지 않으며, 손짓과 몸짓으로 살가이 어우러지는 노래가 사그라듭니다.



나는 〈공무도하가〉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내 동무들이 어린 시절 냇가에서 잠자리를 잡으며 부르던 노래가 떠오른다. (117쪽)


예술가의 일은 농부들의 세계에 선원들의 세계를 끌어들이는 것과 같다. (128쪽)


지금 광화문 광장에는 단식하는 사람들과 폭식하는 사람들이 있다. (161쪽)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읽다 보면 오늘날 사회를 안타까이 여기는 목소리를 쉽게 들을 수 있습니다. 참말 그렇지요. 그냥 생각없이 텔레비전을 켜고, 그냥 생각없이 숲을 밀며, 그냥 생각없이 재개발을 밀어붙입니다. 그냥 생각없이 바보스러운 정책이 나오고, 그냥 생각없이 공권력이 춤춥니다.


  청와대에 계신 분이 수첩에 시를 적어서 시골마을로 찾아가서 시골 할매랑 할배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4대강사업을 밀어붙인 분이 삽차가 아닌 자전거를 타고 서울에서 해남까지 천천히 달리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별을 바라보며 들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이러면서 스스로 노래를 부를 수 있다면 우리 삶터는 어떤 모습이 될까요.


  《우물에서 하늘 보기》를 쓴 황현산 님은 신동엽 시집을 다루지는 않습니다만, 신동엽 님이 쓴 시가 문득 떠오릅니다. 신동엽 님은 저기 스칸디나비아 반도 어디쯤에 있다는 대통령 이야기를 시로 쓴 적이 있어요.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병을 꽂고서 시인을 찾아가는 그 나라 대통령 이야기를 시로 쓴 적이 있지요. 그러니까, 이 나라 대한민국 대통령이 경호원과 자가용을 버리고 자전거를 타거나 두 다리로 몸소 걸어서 시골자락에서 조용히 흙을 일구는 시인을 찾아가서 함께 막걸리를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이 골골샅샅 퍼질 수 있으면, 대통령뿐 아니라 수수한 이웃들 누구나 수수한 사랑으로 삶을 지을 수 있으면, 이 나라는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까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시의 기적이라고 말해도 좋을 만큼 신기한 시집이다. 한용운은 근대사에 관해서 특별히 또는 오랫동안 공부하지 않았지만, 그의 시집은 개항 이후 한 세기의 한국문학사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뜻깊은 성과다. (165쪽)


이 시를 읽으며 시인을 순진하다고 말해야 할 것인가. 오히려 어떤 폭압도, 어떤 잔혹한 고문도 그의 시를 깨뜨리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박정만은 그렇게 투쟁했다. 희망은 늘 그렇게 순진하게 밑바닥에 깔려 있다. (183쪽)



  시는 시인이 쓰지 않습니다. 아니, 시인만 시를 쓰지 않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시만 쓸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먼먼 옛날부터 이 나라 누구나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아스라한 지난날에는 이 나라 누구나 언제 어디에서나 시를 짓고 노래를 지었어요. 방아를 찧으며 노래를 불렀고, 기저귀를 빨면서 노래를 불렀으며, 낫질 호미질 괭이질을 하며 노래를 불렀어요.


  두레나 품앗이가 아니어도 혼자서 즐거이 노래를 부른 이 나라 사람들 수수한 삶입니다. 나무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지게를 짊어지며 노래를 불렀지요. 밥을 지으며 노래를 불렀고, 밥을 먹으며 노래를 불렀어요. 한겨레 삶은 언제나 노래로 흐르는 삶입니다. 하늘과 흙과 바람과 비와 구름과 숲과 꽃을 노래하는 수수하면서 사랑스러운 삶이 흐르던 이 땅입니다.


  그런데 시를 잊으며 삶을 잊어요. 노래를 잃으면서 사랑을 잃어요. 시랑 노래를 뒤로 젖히면서 경제개발이나 경제성장만 바라보면서 그만 꿈이나 사랑을 송두리째 까먹습니다.



(최승자는) 대학 중퇴 학력으로 인문학 대가들의 글에 붉은 볼펜을 휘둘러 자주 말썽을 일으키다가 시를 쓰기 시작했다. 한두 해 사이를 두고 같은 시기에 등단하여 훗날 저마다 한국 시단에 봉우리를 하나씩 이루게 되는 김정환, 이성복, 최승호, 김혜순, 황지우 사이에서 최승자는 자기 내장을 다 드러내는 사람의 선연한 말을 비수처럼 내던져, 한 번 귀 기울인 사람이라면 결코 잊어버릴 수 없는 목소리를 만들었다. (187쪽)


문학과 시가 헛된 것이 아니니, 약속은 아마 지켜질 것이다. 낡은 시간이 가고 맑고도 풍요로운 시간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시인들이 기대했던 모습으로 찾아올까? (258쪽)



  아이들이 대학교를 바라보며 시험공부에 목을 매지 않을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아이들이 대학교를 가든 안 가든 즐겁게 스스로 시를 짓고 노래를 지어서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할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꿈을 찾아서 노래를 부르고, 사랑을 헤아리며 시를 읊는 나라가 되기를 빕니다.


  우물가에서 하늘을 봅니다. 샘가에서 별을 봅니다. 냇가에서 구름을 봅니다. 바닷가에서 무지개를 봅니다. 못가에서 미리내를 봅니다. 물가에서 꽃잎을 봅니다. 시냇가에서 흐드러진 숲을 봅니다. 그리고, 밥상맡에서 따스한 웃음을 보고, 책상맡에서 즐거운 노래를 봅니다. 마당 한쪽에 나무를 심고, 텃밭 귀퉁이에 꽃씨를 심습니다.


  우리 마음을 노래로 채울 수 있는 하루가 되기를 빕니다. 내 마음부터 노래로 채우면서 활짝 웃는 삶이 되기를 빕니다. 이 별에, 이 지구라는 별에, 꿈결 같은 노래가 흐르고 사랑결 같은 이야기가 시 한 줄로 흐를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2.6.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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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의 연기, 담배 - 담배의 문화사
에릭 번스 지음, 박중서 옮김 / 책세상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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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19



‘평화와 두레’였던 담배가 ‘전쟁과 산업’으로 바뀌어

― 신들의 연기, 담배

 에릭 번스 글

 박중서 옮김

 책세상 펴냄, 2015.11.5. 25000원



  나는 담배를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둘레에서 누군가 담배를 피운다고 꺼리지 않습니다. 담뱃잎을 태우면서 하얀 연기를 내뿜으면 이 연기는 여러모로 재미있다고 느낍니다. 쑥을 태우는 느낌이랄까요. 잘 말린 풀잎을 태우면서 나는 냄새와 연기가 사람들 마음을 차분히 달랜다고 할까요.


  오늘날 담배 회사는 온갖 화학약품을 섞은 담배를 팔지만, 아무리 화학약품을 섞어도 담배는 담뱃잎을 바탕으로 만듭니다. 담배라고 하는 풀을 키우지 않는다면 담배가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담배를 태우든 밭에서 햇볕하고 바람하고 빗물을 머금으며 자라는 담배풀이 있기에 담배가 나옵니다.


  한국에는 1600년대 첫무렵에 일본을 거쳐서 담배가 처음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담배가 들어오기 앞서도 ‘말린 풀’이나 ‘말린 나무’를 태우면서 불과 연기를 으레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말린 풀잎에서 나는 연기는 언제나 우리 둘레에 가득했다고 할 만해요.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풀내음을 맡고, 콩깍지를 태운다든지 논둑을 태우면서 풀내음을 맡습니다.



마야인인 여러분은 단순히 연기를 마시고 뱉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도이며, 연기는 기도의 전령이다. 이 향에는 임무가 있다. (15쪽)


담뱃대는 평화와 협동을 상징했고, 미시시피 강 유역과 오대호 지역의 원주민들 사이에서는 특히 그러했다. (31쪽)


콜럼버스와 그의 함대는 더 서쪽으로 여행한 후에야 그들은 원주민들이 담뱃잎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처음으로 보게 되었다. (41쪽)



  에릭 번스 님이 쓴 《신들의 연기, 담배》(책세상,2015)라는 책은 중남미에서 비롯한 담배가 어떻게 유럽으로 처음 퍼졌고, 유럽에서는 담배를 처음에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피우는 담배하고 씹는 담배하고 얽힌 ‘유럽과 미국에서 오래된’ 이야기를 들려주고, 영국에서 담배를 둘러싸고 일어난 재미나거나 우스꽝스럽거나 바보스럽다고 할 만한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담배 때문에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 있고, 담배로 어마어마한 돈을 챙긴 사람들이 있으며, 담배를 놓고 문화와 자유를 말하다가, 나중에는 담배와 얽혀 건강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담배가 ‘산업’이 되고, 나라에서는 ‘돈줄’로 삼는데, 이 담배가 비롯한 중남미에서는 ‘하느님을 만나는 징검다리’로 삼았습니다. 아무렇게나 피우던 담배가 아니었고, 돈줄로 삼아서 산업으로 다루는 담배가 아니었습니다. 《신들의 연기, 담배》가 이 대목을 조금 더 짚을 수 있다면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 텐데, 이 책은 유럽과 미국에서 담배를 어떻게 받아들여서 누렸는가 하는 이야기만 짚습니다. 아무래도 중남미에서 오랜 옛날부터 담배를 태운 이야기는 ‘글이나 책으로 남’지 않았을 테니, 이 대목까지 밝히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들(마야인)이라면 아마 이렇게 반문했을 것이다. 신이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을 거부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인간이 신의 호의를 기대한단 말인가? 전달 도구인 연기가 없다면, 도대체 어떻게 인간의 기도가 하늘에 닿는단 말인가? (87쪽)


1615년과 1616년에 아메리카인들은 모두 합쳐 2300파운드의 담배를 잉글랜드에 수출했다. 이듬해에 롤프가 씨름하던 문제를 대부분 해결하자, 식민지인들은 2만 파운드의 담배를 해외로 수출하게 되었다. (129쪽)



  중남미에서도 북미에서도 그곳에 뿌리를 내리며 살던 사람들은 담배를 ‘평화’와 ‘두레(협동)’로 여기면서 태웠다고 합니다. 전쟁이나 산업 따위로 담배를 태우지 않았다지요. 그러면, 오늘날에는 담배가 어떤 구실을 할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어디를 가든 금연구역입니다. 담배를 마음껏 태울 수 있는 자리는 차츰차츰 사라집니다. 그러나, 어느 가게를 가든 담배는 아주 손쉽게 장만할 수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담배로 세금을 무척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이러면서 다른 한쪽에서는 ‘담배한테서 건강을 지키도록 하는 새로운 산업’이 불거집니다. 이쪽에서는 담배를 팔아서 돈을 벌고, 저쪽에서는 담배를 끊도록 하면서 돈을 법니다. 이쪽에서는 담배를 많이 팔거나 비싸게 팔려 하고, 저쪽에서는 담배를 끊도록 하는 길에서 돈을 치르도록 합니다.


  문득 모깃불을 떠올립니다. 모기를 쫓으려고 풀을 태우곤 하는데, 모깃불은 모기한테는 나쁠는지 모르나 사람한테는 좋습니다. 모기는 모깃불(쑥불) 냄새를 싫어해도, 사람은 쑥불(모깃불) 냄새를 좋아합니다. 하얗게 피우는 쑥불은 집안과 마당을 거쳐 마을에 골고루 퍼집니다. 말린 풀잎에서 나오는 냄새와 연기는 싱그러운 바람으로 거듭납니다.



버지니아에서는 독립전쟁 직전까지만 해도 민병대원의 봉급을 담배로 지급했으며, 각자의 계급과 경험에 따라 적절한 개수의 담뱃잎을 잘 세어서 배급했다 … 독립전쟁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식민지인들은 담배로 값을 치르고 유럽에서 무기와 탄약, 그리고 각종 보급품을 사들였다. (150쪽)


아메리카인들은 승리자인 동시에 패배자이기도 했다. 수년 동안 그들이 생산한 담배를 해외에서 구할 수가 없게 되자 잉글랜드인들은 터키와 이집트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식민지의 생산품을 대체할 만한 제품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북아메리카산보다 오히려 그쪽 품종의 담뱃잎들을 더 선호하게 되었던 것이다. (189∼190쪽)



  모닥불을 가만히 그려 봅니다. 요즈음은 모닥불을 태울 만한 곳이 거의 없습니다. 시골에서도 모닥불을 피우는 일은 매우 드뭅니다. 나무로 불을 피우거나 때는 일이 사라지면서, 도시가스와 기름이 이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입니다.


  가스나 기름을 태우면 이 냄새가 매캐합니다. 가스나 기름 타는 냄새를 사람이 좋아할 만하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연탄가스를 맡고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모닥불 연기를 맡고 목숨을 잃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모닥불을 피우거나 아궁이 군불을 땔 적에는 따스한 기운뿐 아니라 ‘나무 타는 냄새’가 우리 몸으로도 스며들면서 새 기운이 나도록 북돋운다고 할 만해요.


  풀잎하고 나뭇가지가 사람을 새삼스레 살리는 구실을 한다고 할까요. 날푸성귀는 사람한테 밥이 되고, 마른 풀잎은 사람한테 약이 된다고 할까요. 굵은 줄기는 집을 세우는 기둥이 되고, 자잘한 나뭇가지라든지 잘게 썬 나무토막은 따스하면서 넉넉한 불과 연기를 사람한테 베푼다고 할까요.


  그러고 보면, 풀하고 나무를 이웃으로 삼으며 누린 삶은 오래도록 평화로우면서 따사로웠다고 할 만합니다. 화약 냄새가 흐르거나 쇠붙이 냄새가 퍼질 적에는 평화가 깨지면서 전쟁 불길이 퍼졌구나 싶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아끼면서 삶을 북돋울 적에는 숲하고 한몸이 되고, 사람들이 서로 다투거나 경쟁으로 치달을 적에는 숲하고 멀어지는구나 싶습니다.



씹는담배 1천 달러어치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력이면 무려 2만 달러어치의 지궐련을 시장에 내보낼 수 있었으며, 손으로 만든 제품과 달리 기계가 만든 제품은 맛과 외양 모두 균일했다. (265쪽)


흑자의 원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막대한 광고비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힐은 1946년에 사망할 때까지 럭키 스트라이크 지궐련의 홍보에 무려 2억 5천만 달러 이상을 소비했다고 하는데. (351쪽)



  《신들의 연기, 담배》를 읽으면, 미국이 영국한테서 독립하려고 전쟁을 벌인 까닭은 담배 때문이라고 합니다. 미국을 식민지로 삼은 영국이 ‘식민지 미국’에서 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려고 하면서 ‘식민지 미국’에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식민지인 굴레를 떨치’려고 ‘담배를 팔면서 무기를 갖추’어서 영국하고 맞서 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럽 사람들이 미국이라고 일컫는 그곳을 식민지로 삼지 않았다면, 또는 미국이라고 일컫는 그곳을 식민지로 삼은 뒤에 담배 산업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또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담배를 처음 받아들일 적에 이 담배를‘하느님을 만나는 징검다리’로 여기는 삶으로 나아갔다면, 지구별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요.


  담배를 처음 태웠다고 하는 중남미 사람들은 평화와 두레를 헤아리면서 담배를 태웠는데, 이 담배를 받아들인 유럽 사람들은 왜 평화와 두레가 아닌 전쟁과 산업으로만 담배를 받아들이고 말았을까요?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길에 담배를 곁에 놓을 수 있었으면 오늘날 사회에서도 담배를 바라보거나 마주하는 눈길이나 손길은 사뭇 다르지 않았을까요?



담배 업계가 46개 주와 맺은 합의문에 있는 또 다른 규정에 의해 모든 야외 광고가 사라졌다. 1999년 4월 22일 자정을 기해 미국 내에서 지궐련을 선전하는 모든 간판이 철거되었으며. (452쪽)


필립 모리스가 어느 날 갑자기 여론에 공감한 것은 아니었다. 의학적 자료를 해석하는 능력이 어느 날 갑자기 월등해진 것도 아니었다. 이 회사는 어디까지나 사업을 위해 그렇게 한 것이었다. 즉 자사 제품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함으로써, 흡연의 위험성을 미처 알지 못했기에 사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소송을 피할 수 있기를 기대한 것뿐이었다. (459쪽)



  아름다운 냄새는 석유나 화학약품에서는 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냄새는 숲에서 납니다. 오늘날에는 석유나 화학약품을 써서 모든 물건을 만들고, 집도 시멘트와 쇠붙이와 화학약품을 써서 세웁니다. 오늘날 도시는 숲을 가까이에 두지 않을 뿐더러, 시골에서도 숲이 자꾸 사라집니다. 도시나 시골에서 아름다운 냄새가 퍼지기 쉽지 않습니다. 정부는 원자력발전소나 군부대를 더 늘리려고 할 뿐입니다. 원자력발전소나 화력발전소를 줄이면서 숲을 북돋우려는 정책은 아직 없는데다가, 4대강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그나마 냇물과 냇가가 크게 망가졌습니다. 고속도로는 더 늘리려고 하지만, 숲을 더 가꾸려고 하는 손길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담배를 끊으면 우리 사회는 튼튼해질는지 궁금합니다. 담배 때문에 사람들 몸이 나빠진다기보다 오늘날 사회와 문명과 문화와 정치와 경제가 사람들 몸을 나쁘게 한다고 느낍니다. 담배에 나쁜 성분이 있다기보다, 담배를 전쟁과 산업으로 끌어들인 권력자와 기득권자한테 나쁜 마음이 있다고 해야 옳지 싶습니다.


  숲이 없고, 쑥불을 태울 수 없으며, 아궁이에 나무를 때서 고운 냄새를 맡을 만한 삶이 못 되는 도시사람으로서는 담배라고 하는 ‘말린 풀잎’이라도 태울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마음을 차분히 달랠 만하리라 느낍니다. ‘종이말음담배’에 아무런 화학약품 처리를 하지 않는다면, 오로지 풀잎 냄새와 성분이 흐르는 담배가 되도록 한다면, 참말 담배 한 개비로 ‘중남미 옛사람이 하느님을 만나’고 이웃하고 서로 평화와 두레를 나누던 삶을 느낄 만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4348.12.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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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죄 - 국가의 죄와 과거 청산에 관한 8개의 이야기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권상희 옮김 / 시공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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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18



전쟁범죄 같은 잘못은 누가 뉘우쳐야 하는가

― 과거의 죄

 베른하르트 슐링크 글

 권상희 옮김

 시공사 펴냄, 2015.10.30. 13000원



  독일사람 베른하르트 슐링크 님이 쓴 《과거의 죄》(시공사,2015)는 독일사람이 저지른 잘못과 얽혀서, 이 잘못이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져야 하는가를 헤아리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입니다. ‘한 번 저지른 잘못’을 ‘한 번 뉘우치거나 용서를 빌’면 될는지, ‘한 번 저지른 잘못’은 나한테서 그치지 않고 내 아이한테까지 이어지거나 ‘내 아이가 낳은 아이가 낳은 아이’한테까지도 이어질는지, 또는 내 이웃이 저지른 잘못을 나하고 내 아이도 물려받아야 할는지를 다룹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1900년대 첫무렵에 독일이라는 나라가 이웃 여러 나라로 쳐들어가서 저지른 잘못은 ‘모든 독일사람’이 저지른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에서도 전쟁에 반대한 사람이 있고, 독일에서도 전쟁이 안 터지도록 애쓰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이 있어요. 이와 달리, 독일 바깥에서 독일하고 손을 맞잡은 나라와 정치꾼과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저지른 잘못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1933년에서 1945년 사이에 범죄를 저질렀거나 범죄에 동참했던 사람들 이외에도 저항하고 반대할 수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도 죄를 지은 사람과 동일시된다. 왜냐하면 일상적 죄개념에는 규범을 인정하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고 동참하지 않으며 이에 저항하여 맞서야 한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13쪽)


저항과 반대를 하지 않은 피해자들은 공포스러운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범죄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확신이 없어 눈을 감아버리고 판단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34쪽)



  아이가 두 살에 어떤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다만, 아이로서는 잘잘못이 아니라 ‘그냥 움직이면서 한 일’이지만 어른 눈에는 잘못으로 비칠 수 있어요. 이를테면, 힘이 여리고 손놀림이 어설픈 아이가 물잔을 들다가 그만 미끄러뜨려서 깰 수 있어요. 이때에 두 살 아이더러 “너! 잘못했어!” 하고 나무라거나 윽박지를 만할까요? 여섯 살 아이가 문득 궁금해서 어떤 단추를 눌러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추가 어떤 단추인지는 모르지만 살짝 튀어나온 모습이 재미있구나 싶어서 살그마니 손가락을 대고는 가볍게 누를 수 있어요. 이 때문에 무언가 말썽이 나거나 일이 틀어질 수 있겠지요. 그러면 이 아이더러 “너 말이야! 잘못했어!” 하고 따지거나 꾸짖을 만할까요?


  아이뿐 어른도 이와 비슷한 일을 숱하게 겪습니다. 어떤 일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잘 하지 못할 수 있어요. 자동차를 마흔 살이나 쉰 살 나이에 처음 몰기에 운전이 서툴 수 있지요. 운전이 서툴어 다른 자동차를 콩 박거나 전봇대에 쿵 박을 수 있어요. 어른도 아이도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잘못을 놓고 언제까지 어느 만큼 뉘우치거나 ‘잘못한 값’을 치러야 할까요?



이러한 역할에는 노동자도, 입안자와 관리자도, 재판관도, 의사도, 기술자도, 교사와 연구가도 동참했다. 그들 모두가 동참을 거부했더라면 동독은 어쩌면 훨씬 더 좋은 국가가 되었거나 아니면 벌써 예전에 붕괴되었을 것이다. (81쪽)


무관심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리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사람들을 무덤덤하게 만들어 그들을 불법행위의 공범자가 되게 한다. 기억은 무관심을 깨뜨릴 수 있고 불법행위의 결과에 대해 인식하게 하고 불법행위의 근원에 대해 민감하게 만들 수 있다. (104쪽)



  한국하고 이웃에 있는 일본은 지난날 한국으로 여러 차례 쳐들어왔습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한국사람을 몹시 괴롭힌 적이 있습니다. 한국하고 이웃에 있는 중국도 지난날 한국으로 여러 차례 쳐들어왔고, 매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온갖 전쟁 때문에 목숨을 빼앗기거나 보금자리를 잃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같은 옛 나라는 중국으로 거침없이 쳐들어가기도 했어요.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오늘 여기에 있는 아무개가 아니곤 합니다. 그리고 지구별 근현대사를 살피면, 머잖아 독일에서나 일본에서는 ‘전쟁범죄자’가 모두 목숨을 잃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전쟁범죄자뿐 아니라 ‘전쟁부역자’도 곧 나이가 들어서 모두 죽어서 이 땅에서 사라질 테지요. 그러면, 앞으로 스무 해쯤 뒤에는, 또는 쉰 해나 백 해쯤 뒤에는, 이러한 전쟁범죄나 전쟁부역을 놓고 어떤 눈길로 바라보거나 마주할 때에 슬기로울까 궁금합니다.


  오백 해가 지나도 잊을 수 없기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오백 해 앞서 다 죽고 없지만, 오백 해 뒤에 이곳에서 사는 ‘이웃나라 뒷사람’한테 ‘잘못한 값’을 따지거나 물어야 할까요? ‘어버이 몸에서 태어난 아이’는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에 ‘어버이가 저지른 잘못’을 고스란히 물려받아야 할까요?



피해자 측이 무엇을 하든 우리는 피해자 측이 하는 일을 무시하지 않고 그런 일에 대해 분개하지 않아야 하며, 피해자 측이 우리 독일로 인해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자신들의 과거를 힘겹게 다루는 것을 존중해야 할 의무가 있다. (133쪽)


우리가 애도를 건너뛰지 않고 애도했더라면 우리 연방헌법재판소의 실증주의가 이리 애매모호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156쪽)



  《과거의 죄》라고 하는 책은 ‘전쟁범죄 같은 잘못’은 누가 뉘우쳐야 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묻습니다. ‘전쟁부역이라는 잘못’은 누가 뉘우쳐야 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여기에 또 하나를 더 묻습니다. ‘전쟁범죄와 전쟁부역을 모르는 척하고 팔짱 끼며 살던 사람’한테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가 하고 묻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를 새삼스레 덧붙여서 물을 수 있어요. 역사는, 역사가는, 역사책은 지난날 일을 어떻게 적어서 아이들한테 가르치거나 물려주거나 알려주어야 하느냐 하고 물을 수 있습니다.



범죄자가 용서를 구하는 데 다른 사람이 중재하고 간청할 수는 있지만 대신 용서를 구할 수는 없다. (194쪽)


세대가 지난 후에도 용서, 특히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 압제, 착취, 노예화, 학살의 부당함에 대해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은 여전히 남아 있다. (198쪽)



  어떤 잘못을 한 번 저질렀다고 해서 그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잘못을 그만 한 번 더 저질렀다고 해서 그 잘못을 다시 저지른 사람이 목숨을 내놓아야 하지 않습니다. 어떤 잘못을 자꾸 저지르기에 그처럼 잘못을 자꾸 저지르는 사람더러 ‘넌 이제 죽어야겠네’ 하고 다그칠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이제까지 저지른 잘못은 고이 내려놓고서, 이제부터 아름다운 사람으로 거듭나야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이제까지 잘못을 저지른 까닭은 바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은 탓’인 줄 깨달아서 바로 오늘부터 ‘나와 이웃을 모두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야지 싶습니다.


  ‘잘못했으니 죽으라’고 해 본들 잘못을 뉘우칠 수 없고, 잘못한 값을 치르지 못하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잘못했으니 잘못을 되돌리는 삶으로 새롭게 태어나야지 싶습니다.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는 기쁨이나 보람을 모르는 채, 즐거운 웃음이나 밝은 노래가 없이 지낸 삶을 모두 내려놓고, 그야말로 스스럼없고 환한 사랑이 되어야 할 테지요. 지난 잘못을 짊어지는 굴레가 아니라, 새로운 꿈을 가꾸는 삶이 되어야 하고요. 4348.12.2.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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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 - 정치교육의 새로운 방법을 찾다
박종성 지음 / 인간사랑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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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상을 뿌리치는 영화가 가는 길이란

―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

 박종성 글

 인간사랑 펴냄, 2015.10.30. 2만 원



  아이들하고 영화를 보면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영화’는 아예 처음부터 볼 생각을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듭니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일 때에 비로소 나도 이 영화를 봐야지 하고 생각합니다. ‘아이들이 볼 수 없는 영화’이면서 아름다운 영화라고 한다면, 이 영화를 보려고 한밤에 잠을 쫓아야 하는데,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비로소 밤에 영화를 보노라면 이튿날 아침에 잠이 모자라서 허덕이기 일쑤입니다.


  모든 영화를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화’로 찍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나오는 영화를 가만히 돌아보면 ‘아이하고 어른이 함께 볼 만한 영화’는 뜻밖에 그리 안 많구나 싶습니다. ‘어른끼리만 볼 만한 영화’가 무척 많으며, ‘아이하고 함께 보도록 하는 영화’는 좀처럼 나오지 못하지 싶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누구나 한자리에서 모여 앉아서 함께 마음을 달래거나 적실 만한 영화가 드물다고 할까요.



영화는 사람을 움직인다. 때로는 눈물과 웃음으로 사로잡고 행위의 미래마저 단호히 이끈다. 덕분에 영화는 즐거움의 방편이거나 교육의 도구이며 정치수단까지 되었다. (19쪽)


사람들은 자꾸 잊는다. 생각보다 복잡한 영화의 역할을. 그것이 역사의 전달수단이자 정치의 교화도구이며 대표적인 사회교육 매체이자 국가의 문화발전 수준을 가늠하는 예술지표인 것을. (25쪽)



  박종성 님이 쓴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인간사랑,2015)을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박종성 님은 대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면서 ‘영화에 깃든 정치’가 무엇인가를 찬찬히 짚으려 합니다. 영화는 예술이 되기도 하고 상품이 되기도 하지만, 정치를 사람들한테 입히거나 씌우는 구실을 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이 책에서 들려줍니다. 사람들은 그저 재미 삼아서 영화를 볼는지 모르나, 영화마다 사람들을 어느 한쪽으로 넌지시 이끌려고 하는 속내가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영화가 ‘정치를 따돌리는 몸짓’이라고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이제껏 세상의 어느 영화도 마르크스의 삶에 주목했다든지, 적어도 아시아 필름이 모택동이나 전봉준 같은 존재에 깊은 애정을 퍼부었다는 얘길 들어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인물 좋고 대중적 인기를 동원했던 체 게바라 정도였다. (43쪽)


가장 뜨겁던 시절을, 그것도 야유와 조롱으로 유난스레 넘쳐나던 시기에 극단의 사례를 마무리하는 감독의 마음 역시 복잡하였을 것이다. 그것도 하필 확신에 가득 찬 자기변론이나 새로운 이론의 등장을 암시하기보다 작품을 관통한 악의 논리와 그 평범성을 갈무리해야 할 대목에서 무엇을 따로 강조할 수 있었으랴. (89쪽)



  가만히 보면, 천만 사람이 보았다느니, 오백만 사람이 보았다느니 하면서 여론몰이를 하는 영화가 여럿 있습니다. 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보았다고 하는 영화가 꽤 있습니다. 이와 달리 거의 눈길을 못 받는 영화가 있고, 얼마 안 되는 사람한테서 살짝살짝 눈길을 받는 영화가 있습니다.

  아무리 아름다운 영화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꼭 보아야 하지는 않는다고 느낍니다. 아주 훌륭한 영화이기에 모든 사람이 반드시 보고 반드시 마음이 움직여야 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삶을 짓는 사람들은 다 다른 영화를 즐기면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사랑할 때에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아름다우면서 재미난 영화일 때에는 이 영화를 두고두고 다시 봅니다. 우리 집 아이들도 그래요. 본 영화이지만 다시 보고 싶다고 해서 디브이디를 다시 돌리고 또 돌립니다. 여덟 살 큰아이는 어느 영화를 벌써 백 번이 넘게 보기도 합니다. 보고 다시 보고 새로 보아도 언제나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이 샘솟으니 자꾸자꾸 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또 보고 싶다’고 말하는 영화는 으레 ‘어른인 나도 즐겁게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영화 한 편이 들려주는 아름다운 이야기는 삶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북돋우는 밑거름 같다고 느껴요.



고다르의 출구 찾기도 뜬금없는 인종주의나 은근한 반미주의로 기우는 건 영화적 무능의 면피용 핑계일까. 아니면 소외와 무력감에 젖어 있는 집단적 자화상을 가리기 위해서일까. (115쪽)


정치적 이익을 한껏 채우고도 또 다른 반대급부를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고 이를 왜곡·확장하면서 국가 내부의 분노와 증오 혹은 충성심을 자극하는 건 오랜 여론조작을 위해 사용해 온 술책 가운데 하나다. (150쪽)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은 ‘정치 이야기를 드러내는 영화’ 몇 가지를 놓고서, 우리 사회와 정치를 들여다보는 이야기를 맞물려 놓습니다. 민주란 무엇인지, 독재란 무엇인지, 평화란 무엇인지, 전쟁이란 무엇인지, 영화 하나를 앞에 놓고서 이 대목을 곰곰이 짚으려 합니다.


  한나 아렌트가 걸어온 길을 짚는 영화에서도 틀림없이 ‘정치란 무엇인가’ 같은 대목을 건드립니다. 셸키를 다루는 만화영화에는 따로 ‘정치란 무엇인가’ 같은 대목을 건드리지 않지만, 이 같은 만화영화는 삶과 사랑과 사람이 어떻게 어우러지면서 아름다운가를 밝히기 때문에 이러한 이야기로 ‘정치를 새롭게 읽는 슬기’를 어린이 눈높이에서 들려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다르 영화에서도 정치를 어떻게 볼 만한가를 헤아릴 수 있고, 메리 포핀스가 나오는 영화에서도 아이들이 어버이와 어우러지는 삶을 살피면서 정치가 여느 살림집에 어떻게 스며드는가를 헤아릴 수 있습니다. 어느 모로 보면 어른들은 정치를 너무 어렵게만 생각한다고 느낄 만합니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는 길로 간다면 어려울 일이 없지만 참말 이러한 대목을 헤아리려는 어른이 드물다고 느낄 수도 있어요.



감독은 끝내 자폭 순간을 스크린으로 끌어내지 않는다. 액션도 딕션도 아닌 단순한 기다림으로 자이드의 결행 의지와 거사의 순간을 대체한다. 그것만으로도 긴장하는 관객과 자이드 자신을 달래는 일은 충분하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184쪽)


관객에게 길을 물어 상황을 바꿀 수도 없고 그대로 놔둔들 그 다툼이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사태의 방임도 따지고 보면 감독의 계략이다. 분명한 건 상상의 남은 몫이 관객들 것이 된다는 점이다. (217쪽)



  매트릭스 같은 영화는 우리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할 만할까요? 더 놀라운 액션이 나와야 볼 만한 영화가 될까요? 아무런 액션이 없이도 사람들 가슴을 울리거나 머리를 건드리거나 마음을 바꿀 만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요? 영화에 나오는 여러 액션에 숨은 뜻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영화에서 액션만 보면 될까요, 아니면 여러 사람이 치고 박고 맞물리는 몸짓 사이에 숨은 이야기를 읽을 때에 영화가 즐거울까요? 영화에는 왜 사람들이 치고 박고 다투는 이야기가 자주 나올까요? 사람들이 서로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모습이 굳이 영화에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지구라는 별에서 서로 다투어야 밥그릇을 지키거나 챙길 수 있을까요? 전쟁이 아닌 평화로 가고, 전쟁무기가 아닌 살림살이를 북돋우는 길로 가면서 영화를 찍는다면 영화에는 어떠한 이야기를 실어서 보여줄 만할까요? 더 놀라운 액션을 찍으려고 하는 영화는 사람들을 어떻게 길들일까요?



오래도록 머무는 ‘울림’은 반드시 종교적일 필요도 없고 난삽하기만 한 추상의 메시지도 아니란 자각은 아렌트가 영화로 일깨워 준 또 다른 ‘놀라움’이다. 악마도 곁에 두면 한없이 익숙해지고 천사의 자유로움마저 시늉하게 만드는 아둔한 나날들 역시 모두의 ‘부끄러움’이다. (226쪽)



  아름다움을 그리려 하기에 영화에 아름다움을 살포시 실을 수 있습니다. 아름다움이 아닌 어떤 정치 목적을 담으려 하기에 영화에 아름다움이 아닌 정치 목적이 깃듭니다.


  역사 교과서를 정부 입맛에 맞게 바꾸려고 정치권력을 휘두르는 사회에서는 영화도 이러한 흐름을 타기 마련이고, 이러한 흐름을 타고 싶지 않아서 정치권력하고 맞서는 영화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권력은 언론도 교과서도 영화도 거머쥐려고 애쓸 뿐 아니라, 권력에 빌붙어서 언론이나 교과서나 영화를 엉망으로 망가뜨리는 사람도 나옵니다. 그리고 권력이나 정치는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으면서 ‘아이들하고 함께 삶을 누리는 기쁨’을 영화에 담으려고 하는 사람도 나오지요.


  어떤 영화를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생각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을 어떻게 읽는가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따라 사랑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으며, 어떤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마을이 달라진다고 할 수 있어요.


  아름다운 삶하고 등돌린 채 오로지 예술이나 상업으로만 흐르는 영화는 짐짓 ‘정치 목적이 없는’ 듯 보일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영화는 ‘무서운 정치 목적이 숨는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정치 나팔수가 되고 마는 영화가 있고, 사람들한테 꿈과 사랑을 새롭게 비추어 보이려는 영화가 있어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영화를 즐길 때에 삶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하고 돌아봅니다. ‘사람들이 많이 봤다’는 영화를 보아야 할는지요, 아니면 ‘내 삶을 기쁘게 가꾸는 밑거름’이 될 만한 영화를 보아야 할는지요?


  《영화가 뿌리친 정치사상》을 덮으며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정치사상을 뿌리쳤다고 하는 영화일수록 오히려 ‘어떤 정치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정치에 눈감도록 이끄는 영화일수록 도리어 ‘어떤 정치 꿍꿍이’가 있을는지 모릅니다. 영화도 책도 교과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삶도,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흐를 때에 비로소 빛이 나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우리 아이들하고 어떤 영화를 함께 보면서 다 같이 즐거운 하루를 보낼까 하고 생각에 잠깁니다. 4348.11.24.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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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 낯선 생각을 권하는 가장 따뜻한 사진
강윤중 글.사진 / 서해문집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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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16



yaja.khan.kr

‘기계 아닌 사람’으로 이웃을 만나는 기자

―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강윤중 글·사진

 서해문집 펴냄, 2015.11.10. 13900원



  흔히 말하기를 ‘기자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하고, ‘기자는 객관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어느 한쪽 자리에 서서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을 신문이나 방송에서 다룬다면 다른 한쪽 자리에 서는 사람이나 모임을 깎아내리거나 헐뜯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자라고 한다면 두 쪽에 있는 사람이나 모임을 모두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두 쪽에 있는 사람이나 모임이 어떤 뜻을 밝히는가를 차분히 적어야 한다고도 합니다. 이를테면, 가해자하고 피해자가 있으면 가해자하고 피해자 목소리를 고루 듣고 고루 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는 아주 마땅한 소리라고 느낍니다. 다만, 이는 한 가지 대목에서만 마땅하리라 느낍니다. ‘사실 보도’라는 대목에서는 중립과 객관을 지켜야지요. 그러면, 신문이나 방송은 ‘사실 보도’만 해야 할까요? 어쩌면 오늘날 신문이나 방송은 ‘사실 보도’조차 제대로 안 하지는 않나요?



장애인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은 없다’는 것을 딱히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카메라를 들고 장애인에게 좀더 깊이 다가가려 했을 때 비로소 내 안 구석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닫힌 생각들’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4쪽)


막장의 소음 속에서 백승호 씨는 소리 질렀다. 그는 이어 물었다. “가장 정직하고 깨끗한 일이지 않습니까?” 웃어도 웃는 게 아닌 그런 웃음으로 ‘네, 그렇습니다.’라는 말을 대신했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진 두어 장을 찍은 채 갱도 밖으로 나왔다. (22쪽)



  경향신문 사진기자인 강윤중 님이 선보인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서해문집,2015)를 읽으면서 ‘기자는 어느 자리에 서서 어떤 일을 할 때에 기자다운가?’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기자는 어떤 글을 쓰거나 어떤 사진을 찍어서 신문이나 방송을 엮을 적에 기자로서 제몫을 다하는가를 헤아립니다.


  사실 보도라고 한다면, 이를테면 대통령 담화문을 옮기거나 대통령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뒤 고스란히 적는 일쯤 될 만합니다. 기자 자리에 있는 이들은 이때에 으레 대통령이나 여러 정당 관계자를 더 만나서 느낌을 묻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여느 사람들은 잘 만나지 않습니다. 온갖 곳에서 일하거나 살림을 짓는 수많은 사람을 두루 만나서 ‘대통령이 펼치려는 정책을 어떻게 느끼거나 생각하는가’ 같은 이야기를 매체에 담지 못합니다.


  사실 보도라는 테두리에서 보자면, 대통령 한 사람이 자리에서 물러난 뒤에 이르러 모든 신문과 방송이 ‘4대강사업에 부질없이 쏟아부은 돈’이 얼마나 어마어마한가를 밝힙니다. 이제 모든 신문과 방송은 사실 보도를 합니다. 다만, ‘진실 보도’까지 하는 신문과 방송은 아직 그리 안 많습니다. 왜 4대강사업을 그토록 부질없이 밀어붙였는가 같은 ‘참(진실)’을 안 밝힌다고 할까요? 그도 그럴 까닭이 적잖은 매체가 어느 대통령 한 사람이 밀어붙인 4대강사업 같은 정책을 두 손 들고 반기면서 널리 알리는 나팔수 구실을 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로 떠드는 ‘까만’ 아이들에게 물어보았다. “너희들은 한국인이라고 생각하니?” 답이 금세 돌아왔다. “한국에서 태어났으니까 한국사람이죠.” (56쪽)


“왜 커밍아웃을 합니까?” 반사적으로 명료한 답이 돌아온다. “행복하려구요.” (132쪽)


한국 생활 4년째라는 이도 간단한 우리말 대화가 되질 않았다. 음식 얘기가 이어졌다. “한국 식당에는 메뉴가 너무 많아요. 그중에 삼겹살과 김치찌개만은 먹을 만해요.” (143쪽)



  나팔수 노릇을 하는 기자도 어느 모로 보면 ‘사실 보도’를 합니다. 다만 한쪽 자리에 서서 한쪽 자리에 있는 이들이 읊는 말만 옮겨적는 ‘편견에 가득 찬 사실 보도’입니다. 이리하여, 기자다운 기자로 사람들한테 이야기를 들려주려고 한다면 ‘사실 보도’에 그치지 말고 ‘진실 보도’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진기자 강윤중 님이 빚은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는 바로 기자로서 사실만 다루지 않고 진실을 다루겠노라 하는 다짐을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진기자 강윤중 님 스스로 ‘기자라는 이름표’는 살짝 내려놓고 ‘사실을 넘어선 진실’을 마주하려고 하는 몸짓을 보여주는 책이라고도 할 만합니다. 사진기자로 온갖 곳을 뛰어다니면서 미처 못 본 모습을 바라보고, 아직 깨닫지 못한 모습을 배우며, 섣불리 파고들지 않았던 자리에 씩씩하게 나아가려는 마음을 책 한 권으로 여미었구나 싶습니다.



이제 ‘그림이 될까, 또 어떤 얘기로 풀어갈까?’를 다시 고민하는 내게 오 교사는 가만히 말을 건네 왔다. “여기 있는 동안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세요.” 내 속이 들켜버린 듯 화끈거렸다. 나는 목적을 가지고 왔고 그것이 여의치 않을 때 내가 갖는 조바심이 아이들에게 친구가 되어 줄 마음의 공간을 허락할 수 있을까. (163쪽)



  기자도 사람입니다. 기자가 만나는 이들도 사람입니다. 기자는 어디 별나라나 달나라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다. 기자가 만나는 사람은 모두 이웃입니다. 아직 이름도 낯도 모를 뿐이었던 수많은 이웃을 만나서, 이들 이웃이 가슴으로 삭이거나 새긴 눈물과 아픔을 차분히 듣고서, 이를 다른 이웃한테 알리는 몫을 맡는 기자입니다. 수많은 이웃이 피어내는 웃음과 기쁨을 가만히 듣고서, 이를 새롭게 수많은 이웃한테 알려주는 구실을 맡는 기자입니다.


  기자는 기계가 아닌 사람입니다. 기자가 그저 기계일 뿐이라면 ‘사실 보도’만 하고 그칩니다. 기자가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면, 참말로 ‘기계 아닌 사람’으로 이웃을 만나는 기자라고 한다면, 어느 매체에서 일하더라도 이들은 모두 ‘진실 보도’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봅니다.




“지금 용역들이 비닐집을 둘러쌌어요. 지금 와 주실 수 있나요?”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망설였다. 내 안의 변명은 이랬다. ‘내가 현장에 가서 강제 철거를 막을 수는 없다. 나는 기록하는 자여야지 개입자여서는 안 된다.’ … ‘기사 게재라는 목적을 위해 철거민들은 그저 이용할 수단일 뿐인가, 이 취재에 진정성이 있는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철거 현장으로 가야 했다. (190쪽)



  사진은 기계질로 찍지 않습니다. 사진기는 틀림없이 기계입니다만, 이 기계를 만지고 움직이고 다루는 손길은 ‘사람 손길’입니다. ‘기계 손길’이 아닌 사람 손길로 사진을 찍습니다. 연필이나 볼펜이나 노트북은 모두 연장이나 기계입니다만, 글은 기계로 쓰지 않습니다. 연필이든 볼펜이든 노트북이든 모두 사람 손길로 다루어요.


  사람이 취재를 해서, 사람으로서 보고, 사람으로서 느끼며, 사람으로서 생각한 끝에,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엮습니다. 기자라는 이름표에 앞서 사람이라는 숨결로 이웃을 마주합니다. 아픈 이웃을 마주하고, 기쁜 이웃을 마주합니다. 눈물짓는 이웃을 만나고, 웃음짓는 이웃을 만납니다. 이리하여, 사진기자 강윤중 님은 강원도에 있는 작은 분교로 찾아가서 ‘다큐 취재’를 할 적에 다큐도 취재도 아닌 ‘아이들 놀이동무’로 한동안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늦깎이에 한글을 익히고 검정고시 졸업장도 따고 싶은 아주머니와 할머니가 다니는 야학에서도 사진기는 저만치 안 보이는 데에 숨기고서 말동무가 될밖에 없습니다.



어르신들을 만난 이후 얼마간 사천 원짜리 커피 한 잔 마실 때면 ‘최 할아버지의 점심 스무 끼구나.’ 만 원을 지불할 때면 ‘야, 이건 쉰 끼네.’ 하고 따지게 되고, 회사에 가득 쌓인 신문을 보면, ‘저 정도면 김 할머니 천 원 벌이네. 이천 원 벌이쯤 되겠지.’ 하고 가늠하는 버릇이 생겼다. (251쪽)



  기사 한 번 썼으니 이제 끝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기자도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기사 한 번 썼으니 ‘후속 취재’를 안 해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자도 취재원도 모두 사람이요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보도에서 그치지 않고 진실 보도를 하려는 매체라고 한다면, 대통령 담화문이라든지 대통령 소식이라든지 대통령 일정쯤 며칠 동안 한 마디도 안 쓸 만합니다. 정치 이야기는 며칠 동안 아예 한 줄로도 기사를 안 써도 됩니다. 이러면서 봄에는 기자들도 시골로 모내기를 하러 가고, 가을에는 또 시골로 가을걷이를 하러 가면서, 적어도 봄가을에 다문 며칠이라도 시골살이 이야기를 몸소 겪으면서 시골 이야기를 머릿기사로 두고두고 다룰 만합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나올 주인공을 대통령이나 정당 지도자가 아니라, 수수하고 투박한 시골 할매와 할배로 삼아서 여러 날 재미나게 엮을 만합니다. 참말로 모든 매체는 ‘사실 보도’에서 ‘진실 보도’로 한 걸음 나아갈 적에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입니다.




“소진이 누나 사랑해.” 엄마는 솟는 눈물을 찍어 냈다. 소진이 방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 뒤에 선 엄마의 흐느낌이 전해졌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 엄마를 눈물짓게 한 것이 내 탓이라 어쩔 줄 몰랐다. (262쪽)



  아이들이 동화를 읽고, 어른들이 동시를 씁니다. 삶을 곱게 가꾸면서 밝히려는 뜻으로 아름다운 동화가 꾸준히 나오고, 사랑스러운 동시가 잇달아 태어납니다. 기자 자리에 있는 이들이 빚는 신문이나 방송은 어떤 이야기가 될 만할까요? 하루치 이야기를 다루면서 하루가 지나면 이내 잊혀지고 말 기사를 엮으려 하는가요, 아니면 두고두고 되읽거나 되새기면서 삶을 새롭게 마주하도록 북돋우는 기사를 엮으려 하는가요?


  사진기자 강윤중 님이 다리품을 팔아서 이웃을 만나고 귀를 기울였기에 《카메라, 편견을 부탁해》 같은 책이 태어났으리라 느낍니다. 그때그때 사실 보도 취재만 했다면, 사실 보도 취재 이야기는 책으로 태어나지 못하리라 느낍니다. 글도 사진도 이웃을 헤아릴 적에 비로소 빚습니다. 신문도 방송도 책도 언제나 이웃을 생각할 적에 비로소 짓습니다.


  사진기자 한 사람은 우리 사회에서 그늘진 자리를 취재하려고 ‘다큐 취재’를 했을 수 있습니다만, 누구보다도 기자로서 ‘중립·객관’이라는 틀을 넘어서 ‘이웃을 가까이에서 사귀면서 알려는 몸짓’이 되려고, 다시 말하자면 ‘편견을 깨려는 편견’을 스스로 배우려고 하면서, 이 같은 책을 꾸몄구나 하고 느낍니다. 탄광에 가 보지 않고는 탄광을 알 수 없고, 작은 분교에서 지내 보지 않고는 작은 분교를 알 수 없습니다. 낫을 들고 풀을 베어 보지 않고는 시골을 알 수 없고, 숲에 깃들어 맑은 바람을 들이켜지 않고는 숲이 얼마나 사람한테 고맙고 아름다운가를 알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쳐서 참을 비트는 ‘바보스러운 편견’이 아니라, 이제껏 우리 사회에서 구석자리로 내몰리는 곳으로 찾아가서 ‘잊혀진 한쪽 이야기를 더 귀담아듣는 예쁜 편견’일 수 있을 때에, 너와 나는 기쁘게 어깨동무할 수 있습니다. 낮은 곳에 낮은 몸짓으로 찾아가서 귀와 눈과 마음과 입을 여는 예쁜 기자가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4348.11.21.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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