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바퀴, 언어 - 유라시아 초원의 청동기 기마인은 어떻게 근대 세계를 형성했나
데이비드 W. 앤서니 지음, 공원국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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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4



앞으로 5000년 뒤를 생각해 본다면

― 말, 바퀴, 언어

 데이비드 W. 앤서니 글

 공원국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2015.11.20. 4만 원



  데이비드 앤서니 님이 빚은 인문책 《말, 바퀴, 언어》는 오천 해라는 발자국을 가로지르면서 이야기를 엮으려고 하는 땀방울을 알뜰히 보여줍니다. 지난 오천 해에 걸쳐서 이 지구별에서 살아온 사람들은 어떠한 살림을 가꾸고 어떠한 삶을 지으면서 ‘살림·삶’을 ‘문화’로 일구었는가 하는 대목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쉬운 일일까요? 조금도 안 쉽다고 할 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2000년대를 사는 사람들한테 기원전 3000년대 살림살이나 삶이란 너무 먼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무렵에는 숲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고, 그무렵에는 햇볕이나 바람이 오늘날하고 어떻게 달랐는지 알 수 없으며, 그무렵에는 어떤 생각을 어떤 말로 나타냈는가조차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말들이 정말로 약 5000년 전 사람들이 쓰던 어휘의 화석일까? (14쪽)


음의 변화가 규칙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마도 모든 인간이 본능적으로 언어 안에서 질서를 추구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의 뇌에 내장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41쪽)



  《말, 바퀴, 언어》라는 책이 아니더라도, 오늘 2000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한 가지를 헤아려 볼 만합니다. 앞으로 오천 해가 지난 7000년대라고 하는 때를 살아갈 먼 뒷날 사람들한테는 오늘 우리가 여기에서 일구는 2000년대 ‘문화’는 그야말로 동떨어지거나 아스라한 옛날 옛적 이야기가 될 테지요. 앞으로 오천 해쯤 뒤에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살아갈 사람들은 아주 다른 말을 쓸 테고, 아주 다른 살림살이와 삶이 되겠지요.


  오천 해 뒤가 아닌 오백 해 뒤만 헤아리더라도, 앞으로 오백 해 뒤에 이 지구별에 태어나서 살 사람들은 ‘석유 문명’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오백 해 뒤만 되더라도 ‘원자력 발전’은 안 쓰리라 생각합니다. 오백 해 뒤만 되더라도 전쟁무기와 군대하고 얽힌 실타래도 무척 다르게 풀리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현대 문명이나 문화는 거의 하루가 다르다 할 만큼 빠르게 바뀌거나 거듭나거나 새로워지니까요.



바퀴가 끼친 충격파의 명백한 증거는 네 바퀴 수레 기술의 전파 속도였다. 사실 너무나 빨리 전파되어 우리는 어디서 바퀴-축의 원리를 발명했는지조차 말할 수 없다. (112쪽)


길들인 소와 양은 인간이 흑해-카스피해 초원의 환경을 이용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소와 양은 사람처럼 길러졌기 때문에 야생 동물을 대할 때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상의 노동 및 걱정거리의 일부가 되었다. (206쪽)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앞으로 한두 세대 뒤만 되더라도 오늘날하고 아주 달라질 삶이 될 수밖에 없다는 대목을 엿볼 수 있습니다. 2010년대 한국 사회를 보면 ‘도시 거주민’이 90퍼센트를 웃돌고 ‘농업 인구’는 5퍼센트가 될 동 말 동합니다. 고작 5퍼센트 ‘농업 인구’가 95퍼센트를 먹여살리는 얼거리입니다. 이러니 한국에서 웬만한 곡식이나 열매는 이웃나라에서 사들일 수밖에 없지요.


  이런 ‘식량 수입 문명’은 언제까지 이어갈 수 있을까요? 영화에서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참말로 머잖아 ‘국가 계획 통제 정책’이 생겨서 ‘강제 농업 종사 인구’가 늘어나지는 않을까요? 머잖아 ‘식량 수입’은 꿈도 꿀 수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아 지구별 모든 나라는 다른 어느 대목보다 ‘농업 인구’를 다시 늘리려는 길로 돌아서지 않을까요? 석유를 태워서 쓰는 문명이 저물 즈음에는 이러한 흐름이 되지 않을까요?


  그러나 우리는 오천 해 뒤 역사나 문화라든지, 오백 해 뒤 역사나 문화뿐 아니라, 고작 쉰 해 뒤에 찾아올 역사나 문화마저 제대로 알기 어렵습니다. 2010년대를 사는 우리로서는 2060년대에 어떤 일이 생길는지조차 도무지 내다보지 못하니까요.



장거리 교역, 선물 교환 그리고 대중적 희생제와 연희를 요구하는 새로운 숭배 의식에 참여하는 것이 새로운 종류의 사회적 권력의 기반이 되었다. (282쪽)


우리는 네 바퀴 수레가 정확히 언제 처음 유라시아 초원으로 굴러들어왔는지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 남부 브로노치체에서 나온 점토 잔 위에 찍힌 네 바퀴 수레 이미지의 연도는 확실히 서기전 3500∼서기전 3300년으로 정해졌다. (451쪽)



  1960년대를 살던 사람으로서는 2010년대에 이렇게 ‘스마트폰과 인터넷 문화’가 퍼질 줄 알기 어려웠겠지요. 게다가 2010년대를 사는 우리가 쓰는 ‘말·글’은 1960년대 사람들이 쓰던 ‘말·글’하고 무척 달라요. 인문책 《말, 바퀴, 언어》는 오천 해라는 흐름을 가로지르면서 ‘인도·유럽 공통조어’가 어떻게 퍼지거나 태어나거나 바뀌었는가 하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합니다. 이런 고고학 연구나 언어학 연구를 하면서 되살린 ‘오랜 인도·유럽 공통조어’ 말소리(옛 음운)는 1500 가지 즈음 된다고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유럽과 인도와 터키와 몽골 언저리에서 태어난 문화와 문명을 살피지요.


  그런데 실타래를 풀고 실마리를 찾으려고 해도 안개에 갇힌 대목이 훨씬 많습니다. 1500 가지에 이르는 말소리는 되살렸어도 오천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쓰던 말은 ‘천오백 가지’가 아닙니다. 오천 해 앞서 살던 사람들이 ‘뜯거나 다룬 풀이나 나무’만 하더라도 수백 가지가 넘을 테고, 그무렵 사람들이 집을 짓고 옷을 지으며 밥을 지으며 쓰던 말만 하더라도 수백 가지뿐 아니라 수천 가지가 될 테지요. 생각을 나누고 사랑을 북돋우며 꿈을 키우면서 주고받은 말을 헤아리면 얼마나 많은 말을 널리 썼을까요?



학자들은 초원의 전차가 훌륭한 전쟁 수단이었는지, 혹은 단지 행진이나 의례에서 쓰는 상징적 수레로서 우수한 근동의 진품을 조잡하게 모방한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서로 다르다. (571쪽)


말은 값싼 겨울용 고기 공급원이었다. 왜냐하면 소나 양은 겨울 동안 꼴과 물을 제공해야 하지만 말은 겨울 초원을 돌아다니며 스스로 먹고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650쪽)



  땅속에 파묻힌 유물을 캐내면서 오천 해 발자취를 돌아보는 일은 아주 작은 조각을 매만지면서 아주 조그마한 그림을 그리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수레’를 누가 먼저 지어냈는지 알 길이 없고, ‘말’은 누가 먼저 썼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들판을 달리는 짐승을 누가 먼저 길들였는지도 알 길조차 없으며, 말고기이든 양고기이든 소고기이든 누가 먼저 먹었는지마저도 밝힐 길이 없어요. 이런 대목을 놓고 역사나 문화로 이야기하자면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동시다발)’라는 말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말, 바퀴, 언어》를 쓴 데이비드 앤서니 님은 고고학 유물자료를 꼼꼼히 살피고 유럽 학자들이 갈무리한 언어학 보고서를 찬찬히 헤아리면서 ‘유럽을 둘러싼 문화와 문명’이 오천 해 앞서 어떤 모습이었는가 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합니다. ‘여러 곳에서 한꺼번에’ 생긴 낱말(말소리)이요 수레요 말고기였다고 하더라도, 한꺼번에 생긴 ‘여러 곳’이 어디인가를 밝히려 합니다. 마냥 수수께끼로만 남길 수 없다고 여기는 지구별 문화와 문명을 새롭게 읽으려고 합니다.



목조 구조물은 불에 탐으로써 보존되고, 쓰레기 구덩이는 신전이나 궁전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금속의 부식은 함께 묻힌 섬유를 보존한다. 그러나 거의 인정받지 못하는 또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다. 그것은 바로 보이지도 않고 순식간에 사라지는 우리 말의 음성 속에다 우리는 미래 세대 언어학자를 위해 현재 세계의 수많은 세부 정보를 간직해 놓는다는 사실이다. (660쪽)



  오천 해를 가로지르는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기는 무척 어렵다고 합니다. 아마 오만 해에 이르는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연구나 학문을 하려고 든다고 여길 수 있을 테지요. 어느 모로 본다면 부질없는 몸짓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말, 바퀴, 언어》를 쓴 데이비드 앤서니 님은 이렇게 오천 해 발자취를 오래도록 돌아보면서 시나브로 깨달은 한 가지 이야기를 차분히 들려줍니다.


  먼저, 고고학은 ‘신전이나 궁전보다 더 오래 살아남은 쓰레기 구덩이’를 다칠세라 깨질세라 알뜰살뜰 캐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어학은 ‘옛말 자취는 오늘날 말에서 몽땅 사라졌어도, 아스라히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주고받은 정보(삶과 살림)는 고요히 깃든다’고 해요.


  2000년대에 오늘 우리가 쓰는 살림살이는 ‘쓰레기 매립지’에 파묻힐 텐데, 오천 해 뒤에는 어쩌면 ‘대단한 유물 구덩이’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2000년대 오늘 우리가 쓰는 말(낱말, 말소리)은 뿌리를 잊거나 잃은 채 흔들린다고 할 만하지만, 바로 이러한 말에도 한식구와 이웃과 동무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돌보는 살림살이와 삶을 고스란히 담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마디를 물려받으면서 새로운 삶을 짓습니다.


  까마득한 일이라고 할 테지만, 오천 해 뒤인 ‘칠천년대를 살 뒷사람’이 오늘(2000년대) 우리한테서 아름다운 꿈·삶·넋을 ‘쓰레기 매립지(유물 구덩이)’하고 ‘말(낱말, 말소리)’ 사이에서 기쁘게 캐낼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4349.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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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산책 - 우주와 지구의 탄생, 그리고 생명의 진화. 경이로운 시간과 함께 걷다
이정규 지음 / 이데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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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23



지구별에서 우주를 바라보는 나들이

― 우주 산책

 이정규 글

 이데아 펴냄, 2015.12.15. 14000원



  밤하늘에 올려다보는 뭇별이 ‘오늘 반짝이는 빛’이 아니라 아스라히 먼 옛날에 반짝이던 빛이라는 대목을 어릴 적에 학교에서 배웠습니다. 그래서 저 별에서 내뿜는 빛을 우리가 오늘 이곳에서 보지만, 막상 오늘 이곳 이때를 헤아리면 ‘저 별은 우주에서 사라지고 없을’ 수 있다는 대목도 배웠어요.


  이러한 이야기를 배우며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러면, 지구라는 별에서 저 별로 내뿜는 빛도 저 별에서는 아스라히 먼 앞날이 되어야 받을까요? 저 먼 별에서 지구빛을 받을 적에는 아스라히 까마득한 옛날 빛을 받는 셈일까요?



내가 저 산과 나무들을 볼 수 있는 건 바로 저 먼 우주 공간을 여행해 온 별들과 은하들의 빛 때문이었다. (33쪽)


우리가 이렇게 우주에서 생겨 나온 산물이라면, 우리 안에는 우주 진화의 특성이 있지 않을까? (160쪽)



  이정규 님이 쓴 《우주 산책》(이데아,2015)을 읽습니다. 지구를 둘러싼 여러 별을 비롯해서, 지구에서 한참 멀 뿐 아니라 새까맣게 먼 뭇별 이야기를 가볍게 나들이를 하듯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이정규 님은 호주 뉴사우스웨일즈 대학에서 천문학을 익힌 뒤, 더블린과 벨파스트에서 연구원을 지냈다고 합니다. 어린이와 청소년 눈높이를 헤아리면서 우주와 별 이야기를 오랫동안 들려주었다고 해요. 《우주 산책》은 어린이와 청소년한테(또 어른한테도) 들려준 우주와 별 이야기를 한결 쉽게 간추리면서 엮은 이야기책이라고 합니다.



세상의 점점 더 많은 모습을 이해하게 되자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동그라미의 세계관’이다. 동그라미의 세계관에서는 우리 인간은 자연과 분리되지 않고 자연 안에 있으며, 모든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고, 또 상호 의존적이라고 본다. (43쪽)



  별을 이야기하는 책 《우주 산책》은 ‘우리는 모두 우주에서 태어난 숨결’이라는 대목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잘난 사람도 못난 사람도 없이, 궂은 사람도 착한 사람도 따로 없이, 먼먼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면 그야말로 아주 작은 조각이나 티끌과 같다고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밝힙니다.


  참말 그렇겠지요. 수십억 광년이나 수백억 광년쯤 떨어진 별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어떠할까요? 수십억 광년이 아닌 수만 광년 거리가 떨어진 다른 별만 생각해 보더라도 우주는 그야말로 ‘끝없이’ 넓고 ‘가없이’ 깊으며 ‘그지없이’ 대단합니다. 이 지구별에 73억에 이르는 사람이 산다고 하지만, 우주에 있는 별 숫자만 헤아려도 73억뿐 아니라 730억이 넘을 테고, 어쩌면 7300억이나 7조 300억이 넘을는지 몰라요.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의 크기가 커짐에 따라 우주 속의 우리 위치에 대한 이해도 달라져 왔다. (51쪽)



  어느 자리에 서서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려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고 느낍니다. 지구라는 테두리에서 보느냐, 태양계 테두리에서 보느냐, 지구에서도 아시아 테두리에서 보느냐,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도 경상도나 전라도 테두리에서 보느냐, 아니면 드넓은 은하나 더 큰 은하나 은하를 품는 더 큰 우주 테두리에서 보느냐에 따라 삶도 생각도 사랑도 달라지기 마련이겠지요.


  우리가 태양계 테두리에서만 생각할 수 있어도 삶이 크게 달라지리라 봅니다. 이 너른 우주에서 전쟁무기를 깨끗이 없애버릴 수 없을까요. 이 깊은 우주를 돌아보면서 입시지옥이나 비정규직이라는 굴레를 말끔히 털어낼 수 없을까요. 함께 나아가는 아름다운 길을 생각해 볼 수 없을까요. 서로 돕고 아끼는 길로 새로 걸어가는 삶을 헤아려 볼 수 없을까요.



5시 방향으로 토성의 고리 아래쪽에 보이는 작은 점 하나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다. 73억이 넘는 인구와 수백만 종이 넘는 생명체가 함께 살고 있는 우리의 집 지구가 바로 이 한 점으로 보인다. (73쪽)


은하들이 어느 방향에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3차원 공간상에 표시하는 연구가 198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는데, 여기에서 ‘거대장벽(Great wall)’이나 ‘보이드(Voids)’니 하는 구조들이 드러났다. (82쪽)



  밤마다 아이들하고 마당에 서서 놀다가 별바라기를 합니다. 처음 마당에 내려서면 아이들은 하늘에 별이 얼마나 있는지 잘 모릅니다. 불을 다 끄고 가만히 있으면 어느덧 밤눈이 트이면서 하늘 가득 별이 잔치를 벌이는 줄 알아차립니다. 별이 저렇게 많네, 하고 까르르 웃으면서 깜깜한 숨바꼭질을 하고 술래잡기를 합니다. 함께 노래하면서 춤을 추고, 다시 별바라기를 합니다. 달밤에 춤을 춘다는 옛말이 있는데, 나는 아이들하고 별밤에 춤을 춥니다.


  별 한 조각을 누리려는 삶이 되고 싶습니다. 쏟아지는 미리내를 온몸으로 받아들여서 꿈을 노래하는 사랑이 되고 싶습니다. 별도 보고 해도 보고 달도 보면서 언제나 내 가슴에 별빛과 햇빛과 달빛을 담고 싶습니다. 이 별빛처럼 시골마을 숲내음을 숲노래로 맞아들이고 싶습니다.



태양의 중심에서는 매초 400만 톤의 물질을 태워 빛을 내고 있다. 그 빛 중에서 우리 지구에 떨어지는 빛의 양은 정말 작지만, 그 덕분에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고 살 수 있는 것이다. (115쪽)


초신성 폭발은 엄청난 폭발력으로 주변의 물질을 한쪽으로 밀어서 다음 세대의 별들이 탄생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렇듯 새로운 세대의 별들은 그 이전 세대의 별들이 자기 몸을 불살라 만든 수많은 원소들로 더욱 풍성해진 터전에서 태어난다. (126쪽)



  《우주 산책》은 가볍게 ‘우주 마실’을 해 보자고 하면서 손짓을 합니다. 바쁜 일을 살며시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저 하늘을 기쁘게 올려다보자고 손짓을 합니다. 이웃집으로도 마실을 다니고, 별나라로도 마실을 다니자고 손짓을 해요.


  망원경을 써서 별마실을 할 수 있습니다. 눈을 감고 고요히 생각에 잠긴 채 별마실을 할 수 있어요. 문명으로 우주선을 지어 우주에 배를 띄울 수 있을 테고, 꿈나라를 헤매면서 마음으로 우주를 돌아다닐 수 있습니다. 또는 먼먼 우주에서 지구로 찾아오는 우주별 이웃이 있으면 그 우주선을 얻어타고 새로운 우주별로 마실을 다녀와 볼 수 있을 테지요.


  별을 바라보며 별을 가슴에 담습니다. 별을 마주하며 별을 두 손에 얹습니다. 나는 지구라는 별에 사는 지구사람이요 지구별사람이며 ‘별사람’입니다. 너도 나랑 똑같이 ‘별사람’입니다. 지구별에 깃든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이 어깨동무를 하면서 온 별이 가득한 누리 저 먼 곳에서 아름답게 삶을 짓는 ‘다른 별 사람(외계인)’을 이웃으로 맞아들일 수 있기를 꿈으로 꾸어 봅니다. 4348.12.29.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6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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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의 길 - 흔들림 없이 끝까지 함께 걸어간 동화의 길
손관승 지음 / 바다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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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2



‘동화·말·사전’을 이룩한 아이들 벗님

― 그림 형제의 길

 손관승 글

 바다출판사 펴냄, 2015.11.30. 16500원



  아이들하고 누리는 삶이란 무엇일까요? 아이들을 낳아서 돌보는 어버이로 지내지 않는다면 이러한 삶을 좀처럼 알거나 느끼거나 마주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들을 낳거나 돌보지 않으면 아이들을 마주할 길이 없으니 겉으로 스치는 모습만 훑을 뿐입니다. 이를테면, 자가용을 몰아 고속도로를 가로지르는 사람은 들길 한복판을 고속도로로 몇 시간을 달린다고 하더라도 들이나 논이 무엇이고 시골은 어떠한 삶터인지 알 수 없어요. 들이 있는 시골마을에서 살지 않고서 자가용으로 휙 지나친다면 들도 시골도 모르지요. 마을에서 아이들이 복닥거리며 오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보더라도 아이들을 알기 어렵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아이가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흐름을 함께 누려야 비로소 아이를 알 만하고, 아이를 입히고 재우고 씻기고 먹이고 할 뿐 아니라, 함께 놀고 함께 꿈꾸며 함께 생각하고 삶을 슬기롭게 물려주거나 가르치는 하루일 때라야 비로소 아이를 살짝 알 만하기 때문입니다.




유로화 이전 라인 강의 기적을 상징하는 독일 화폐는 마르크였다. 이 화폐의 최고 단위는 1000마르크였는데, 그 지폐의 얼굴을 장식한 영광의 주인공이 바로 그림 형제였다. (48쪽)


그림 형제도 마음이 어지럽거나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산책을 했다. 마음이 무거우면 숲으로 갔다. 숲에는 그런 힘이 있다. (55쪽)



  손관승 님이 쓴 《그림 형제의 길》(바다출판사,2015)을 읽으면서 ‘아이’란, 또는 ‘어린이’란 어떤 숨결인가를 새삼스레 되새깁니다. 우리가 아는 그림 형제는 야코프 그림하고 빌헬름 그림 두 형제라고 합니다. ‘그림(Grimm)’이라는 이름을 함께 쓰는 형제는 이들 둘 말고 여럿이 더 있으며, 여러 그림 형제 가운데에는 ‘두 그림 형제’가 빚은 《그림 동화집》에 그림을 그린 동생도 있다고 해요. 형 야코프는 내내 혼자 살며 아이가 없고, 동생 빌헬름을 짝을 맺으면서 아이를 셋 두었다고 합니다. 두 형제는 아직 ‘독일이 아닌 독일(하나가 아닌 여러 연방이 저마다 독립된 얼거리로 지내던 나라)’에서 살면서 옛이야기를 그러모으는 일을 했고, 도서관 사서로 일했으며, 오래된 책을 손으로 옮겨서 필사본을 빚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두 사람이 함께 빚은 《그림 동화집》은 바로 ‘독일 아닌 독일’이지만, 여러 연방으로 나뉜 나라에서 예부터 어른이 아이들한테 들려주고 물려던 이야기를 엮은 꾸러미입니다.


  한국은 일본을 거쳐서 “그림 동화집(메르헨)”으로 옮겼는데, 그림 형제가 그러모은 이야기는 ‘옛이야기’입니다. 한국말로는 ‘옛이야기·옛날이야기·옛말’이거나 그냥 ‘이야기’예요. 어머니 말을 안 들은 개구리 이야기라든지, 나무꾼 이야기라든지, 범하고 할머니 이야기라든지, 달이랑 해 이야기라든지, 예부터 한겨레에도 오래도록 입에서 입으로 들려주고 물려준 이야기가 있어요. 그림 형제 두 사람은 바로 이 같은 이야기를 그러모은 일을 한 셈입니다. 이러한 이야기(옛이야기)를 그러모아서 ‘독일다운 독일’이 되기를 바랐다고 해요.




그는 오직 도서관에서만 행복했다. 야코프에게 여행이란 곧 옛 필사본을 복사할 수 있는 도서관에 가는 길을 의미했다. (82쪽)


병약한 빌헬름에게 고대 문헌을 파헤치고 민간에 전승되어 오던 옛 노래를 편찬하는 작업은 힘들었지만 형이 앞에서 끌면 동생은 뒤에서 밀었다. (103쪽)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이야기밥을 얻어서 먹습니다. 한쪽에서는 몸으로 밥을 먹고, 다른 한쪽에서는 마음으로 밥을 먹어요. 몸으로 먹는 밥으로는 몸이 무럭무럭 크면서 튼튼하게 설 테며, 마음으로 먹는 밥으로는 마음이 슬기로우면서 야무지고 똑똑하게 거듭나게 할 테지요.


  어버이가 할 몫이란 바로 아이들한테 밥을 주는 일이라 할 만해요. ‘몸밥’이랑 ‘마음밥’을 함께 주지요. 어버이 아닌 둘레 어른도 이러한 일을 함께 맡아요. 어버이가 자리를 비운다든지, 어버이가 아이들을 이끌고 나들이를 가면, 둘레 어른은 이 아이들을 어여삐 여기면서 주전부리도 주고 나들이밥도 줍니다. 새로운 마을에서 내려온 새로운 이야기도 들려주고요.



그림 동화는 이데올로기나 프로파간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먹이가 된 시절도 있었다. 나치 정권은 〈빨간 모자〉를 사악한 유대인 늑대로부터 보호하는 독일인의 상징으로 삼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서 연합군은 그림 동화가 나치 이데올로기에 동조하는 것이라며 독일에서의 출판을 금지했다. (143쪽)


파리 출장을 통해 야코프는 외교관이라는 직업을 그만두겠다는 최종 결심을 굳히고 본국에 돌아온 후 사직서를 보낸다. 일이 싫은 게 아니라 비효율적이고 관료적인 사람들 밑에서 간섭받기 싫었을 뿐이다. (186쪽)






  독일이라는 곳에서 이야기를 그러모은 그림 형제가 이 다음으로 한 일은 ‘말’을 찾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이때에도 아직 독일은 여럿으로 나뉜 나라이기에 ‘독일다운 독일에서 쓸 말’을 살폈다고 해요. 이 일은 거의 형 야코프가 맡아서 했고, 형 야코프 그림이 이룬 ‘독일말 새롭게 세우기’는 독일이라고 하는 나라에서 ‘문법과 문학과 어학’을 처음으로 갈고닦은 밑틀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그러모으면서 삶을 돌아보는 길을 걸은 그림 형제로서는 더없이 마땅한 삶길이요 꿈길이었구나 싶어요. 왜냐하면 모든 이야기는 말로 빚기 때문입니다. 책에 적는 글이 아니라 입으로 읊는 말로 이야기를 나누지요. 독일이라는 나라에서 시골마을 작은 보금자리를 이루며 아이들을 낳고 돌본 여느 어버이라면 ‘책을 읽지’ 않고 ‘책을 모릅’니다. 오직 삶으로 삶을 짓고, 오직 사랑으로 사랑을 가꾸면서 아이들을 돌보아요. 그렇기에 그림 형제는 이야기를 그러모으는 동안 ‘독일말’을 새삼스레 헤아렸을 테고, 이러한 마음이 이어지고 깊어지면서 ‘독일말 새롭게 세우기’로 나아가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독일어 문법》은 점차 연구가 확장되어 1837년까지 거의 20년에 걸쳐 총 4권으로 발간된다. 야코프는 이로 인해 언어학자로서 새로운 학문의 경지를 이룩하게 되고, 독일어 문법과 독어독문학의 창시자가 된다. (210쪽)



  이윽고 그림 형제는 또 다른 새로운 길로 갑니다. 이야기(동화) 다음으로 말(독일말)이라면, 이제 사전(독일말 사전)입니다. 이야기를 묶어 책이 되고, 말을 세워서 문법하고 어학이 된다면, 바야흐로 이야기와 말을 알뜰살뜰 가다듬어 사전을 빚는 동안 시나브로 ‘삶을 노래하는 길’이 마무리될 테니까요.





그림 형제는 자신들의 필생의 업으로 삼았던 《독일어 사전》을 온전히 마무리짓지 못하고 눈감았다. 그토록 소망했던 독일 통일도 지켜보지 못했다. (281쪽)


그림 형제가 구상을 가다듬고 생각을 공표한 후 마지막 항이 출판될 때까지 122년의 세월이 흘렀다. 《독일어 사전》은 1971년 연표까지 합해서 모두 33권이었다. 최종 모두 3만 3872쪽에 이르렀다. (282쪽)



  그림 형제가 걸어온 길이라면 ‘이야기(동화)·말·사전’을 이룩한 아이들 벗님으로 살아온 나날이지 싶습니다. 이리하여 예전에 독일에서 쓰던 ‘가장 높은 돈’에 그림 형제 모습이 멋지게 깃들 만했구나 싶어요. 한 나라나 겨레를 이루는 바탕은 바로 이야기하고 말에 있다고 할 만하고, 독일은 이 대목을 슬기롭게 헤아렸으니까요.


  아이들은 어버이가 낳은 사랑이고, 사랑으로 무럭무럭 자라는 숨결은 곧 새로운 보금자리하고 마을하고 나라를 세우는 바탕입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된 아이는 새로운 아이를 낳지요. 새로 어른이 된 사람(아이)들은 새로운 꿈으로 새로운 삶을 지을 만하고, 새로운 삶이 우뚝 서면 이곳에서 아름다운 노래가 흐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어버이와 어른은 아이들을 슬기롭게 가르치고 아름답게 돌볼 수 있어야 해요.


  한국에서도 한겨레가 예부터 곱게 누리고 즐긴 이야기가 차곡차곡 서면서, 한겨레가 예부터 기쁨과 사랑으로 주고받은 말이 튼튼하게 설 뿐 아니라, 한겨레가 예나 이제나 앞으로도 아름답게 나눌 말을 담는 사전(한국말 사전)이 알차게 태어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4348.12.1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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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로드 - 문명에 힘을 실어준 닭의 영웅 서사시
앤드루 롤러 지음, 이종인 옮김 / 책과함께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1



‘띠’로 섬기던 닭이 ‘고기’가 되기까지

― 치킨로드, 문명에 힘을 실어 준 닭의 영웅 서사시

 앤드루 롤러 글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5.11.5. 19500원



  한겨레는 태어난 해를 살펴서 띠를 이야기합니다. 이를테면, 토끼띠라든지 범띠라든지 잔나비띠라든지 개띠가 있어요. 말띠가 있고 소띠가 있으며 용띠가 있지요. 여기에 닭띠가 있습니다.


  닭띠는 닭을 섬기는 띠라고 할 만합니다. 사람 곁에 있는 뭇짐승 가운데 닭을 고이 섬기기에 띠 가운데 하나로 넣어요. 쥐띠나 뱀띠나 돼지띠도 쥐나 뱀이나 돼지라고 하는 짐승을 섬기려는 뜻입니다. 이러한 짐승을 섬기려는 뜻이기 때문에 띠 가운데 하나로 삼아요.


  그러니까 함부로 다루려는 짐승이라면 섬길 수 없어요. 아무렇게나 다룬다든지 하찮게 여기는 짐승이라면 섬길 수 없어요. 사람 곁에 있는 짐승이요, 사람하고 삶을 함께 누리는 짐승이며, 사람하고 이 보금자리와 마을과 집에서 오순도순 지낼 만한 짐승이기에 열두 띠에 열두 짐승을 넣어서 찬찬히 돌아봅니다.



어느 순간이 되었든 지상에는 200억 마리가 넘는 닭이 살고 있으며, 이 숫자는 인간의 세 배에 달한다. (9쪽)


닭은 은근하면서도 가차없이 생활의 필수 품목이 되었다. 닭은 잘 날아다니지 못하지만, 국제적인 수출입을 통하여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를 이동하는 철새가 되었다. (13쪽)



  곰곰이 돌아보면, 제가 어릴 적에(1980년대) 둘레 어른들은 ‘무슨 띠’인가를 물으셨습니다. 둘레 어른들은 나이가 ‘숫자로 몇 살’인가를 말씀드려도 좀처럼 알아차리지 못하셨습니다. 나이로 다섯 살이라느니 일곱 살이라느니 아홉 살이라느니 열한 살이라느니 말씀을 여쭈어도 ‘숫자’가 아닌 ‘띠’로 얘기하라고 이르셨어요. 그러면 둘레 어른들은 제가 무슨 띠인가를 헤아리면서 ‘그러면 몇 년에 태어났겠구나’ 하고 말씀하십니다.


  어릴 적에는 띠 가운데 왜 ‘쥐’나 ‘뱀’을 섬기는 띠가 있는지 아리송했습니다. 한국에는 양이나 잔나비를 찾아보기 어려운데 왜 양이나 잔나비도 있을까 하고 궁금했습니다. 이러면서 돼지나 소 같은 짐승은 어떻게 띠 가운데 하나일까 하는 대목도 알쏭달쏭했어요.


  아무래도 오늘날 사회는 도시 물질문명 사회이기 때문에 어린 나로서는 이 수수께끼를 풀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 어버이는 도시에서 나를 낳으셨고, 나는 도시에서 테어나서 자랐습니다. 온 골목을 누비면서 어린 나날을 보내기는 했지만, 흙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를 마주하면서 자라지는 못했어요.



게르만의 무덤에서 일본의 사원에 이르기까지, 닭은 1세기 초에 아시아와 유럽을 통틀어서 빛, 진리, 부활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한편 티베트 불교 신자들은 닭이 탐욕과 욕정의 상징이라고 생각하여 피했다. (81쪽)


세계적인 전염병은 아마도 닭에서 시작하여 돼지로 옮겨갔다가 다시 인간에게 전염되었을 것이다. 유행성 독감은 인간이 동물들을 길들이는 데 따르는 대가로 보인다. (92쪽)



  앤드루 롤러 님이 쓴 인문책 《치킨로드, 문명에 힘을 실어 준 닭의 영웅 서사시》(책과함께,2015)를 읽습니다. 이 책 《치킨로드》는 작은 이름으로 붙인 “문명에 힘을 실어 준 닭의 영웅 서사시”라는 말처럼, 닭이 지구별 사람들한테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도록 힘’이 되었는데, 왜 이 같은 대목이 차츰 잊히면서 ‘짓밟히고 시달리는 고기닭’으로 바뀌었는가 하는 대목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보면, 닭만 이와 같지 않습니다. 닭을 비롯해 돼지나 닭도 감옥이나 공장 같은 곳에서 지내요. 몇 달 살지 못하고 목숨을 빼앗긴 뒤에 고기가 되지요. 닭은 지구별에 ‘늘 200억 마리가 넘는 숫자’가 감옥이나 공장하고 똑같은 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데, 이 닭은 고기가 되려고 ‘알에서 깨어 한 달 남짓 되면’ 목숨을 잃고 대형마트나 마을가게에 ‘고기닭’으로 들어간다는데, 여느 사람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알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신문이나 방송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일이 없고, 교과서에도 이런 이야기가 적히지 않습니다. ‘닭고기’를 요리하는 이야기는 책이나 신문이나 방송이나 인터넷에 넘치지만, ‘고기닭’으로 죽는 짐승을 찬찬히 살피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아볼 길이 없어요.



백신, 항생제, 비타민, 기타 보조 의약품은 모두 현대 싸움닭 생활의 필수품이다. 닭의 항문에다 고춧가루를 집어넣는 전통적인 방식은 사라지고 대신 값비싼 스테로이드와 다른 체력 강화제가 자리를 잡았다. (141쪽)


1835년에 7200만 개의 달걀이 (아일랜드에서) 잉글랜드로 운송되었다. 이 수치는 기근을 겪던 1840년대 내내 증가하여 1850년대 초반이 되자 추정치로 1억 5천만 개에 이르렀다. (190쪽)



  어미 닭이 알을 낳으려면 적어도 여섯 달이 넘게 자란 뒤라야 합니다. 여섯 달이 채 안 된 암닭은 알을 낳지 못합니다. 암탉이 알을 낳으면 이 가운데 씨가 깃든 알에서 새로운 목숨이 자라고, 새로운 목숨으로 깨어날 알은 스물하루, 곧 세이레(21일)가 되면 병아리가 깨지요. 알에서 깬 병아리가 햇볕과 바람과 빗물과 흙과 풀과 벌레를 골고루 누리면서 ‘어른 닭’으로 자라기까지 적어도 여섯 달이 걸립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닭고기’를 먹고 싶다면, 알에서 깬 병아리가 어른 닭이 되기까지 여섯 달은 넉넉히 기다려야 하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가 ‘고작 서른 날을 살다가 죽은’ 닭을 고기로 먹는다고 할 적에는 뭔가 아주 잔뜩 뒤틀린 셈입니다. 여섯 달은 살아야 비로소 ‘어른 닭’이 되는데, 여섯 달도 다섯 달도 넉 달도 석 달도 두 달도 아닌 한 달밖에 안 된 ‘살덩어리’를 닭고기로 여기면서 먹는 셈이거든요. 부화기라는 기계를 써서 고작 닷새 만에 알에서 병아리가 까도록 하고, 이 병아리는 스물닷새 만에 성장촉진제하고 항생제하고 사료만 먹으면서 햇볕 한 줌 쬐지 못하고, 어미 닭 품을 느끼지 못하며, 아주 좁은 우리에 빼곡하게 갇혀서 살점만 빠르게 키워야 하는 얼거리인데, 이러한 얼거리라면 우리는 무엇을 먹는 셈일까요?


  우리는 ‘고기’를 먹을까요, 아니면 ‘성장촉진제’하고 ‘항생제’하고 ‘사료’를 먹을까요?



식량으로서의 닭은 나중에야 생각해낸 것이었다. 오래전 사람이 숲에서 닭을 데려오거나 꾀어냈을 때, 닭은 값싼 점심 식사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닭은 신비하면서도 실용적인 동물이었던 것이다 … 개, 고양이, 소와 같은 친숙한 포유동물과는 다르게 닭은 거의 외계인 같은 특성을 간직했다. (226, 227쪽)


식민지 시절에 미국 남부의 넓은 농장들에서 흑인들은 취향에 맞게 닭을 사육하고 매매하고 또 식용으로 쓰기도 했다. 당시 노예는 일반적으로 채소를 키울 수 있었고, 닭은 정원에서 남는 재료, 밥찌꺼기, 간 옥수수로 만든 조악한 음식 등을 주어 키웠다. (297쪽)



  《치킨로드》를 읽으면 ‘아일랜드 대기근’하고 얽힌 다른 이야기를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굶주리면서 죽느냐 사느냐 하던 때에 감자조차 잉글랜드(영국)에서 거의 다 가져갔고, 여기에 달걀까지 거의 다 가져갔다고 합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굶어죽고,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배가 부르면서 노닥거립니다. 지난 일제강점기에 일본이 이 나라에서 쌀이며 물고기이며 나무이며 석탄이며 샅샅이 긁어모아 빼앗은 얼거리하고 같습니다. 이웃을 식민지로 삼는 나라는 이웃이 굶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아요.


  유럽에서 한창 큰 싸움이 벌어지던 때에는 싸움터 군인한테 소고기와 돼지고기를 보냈고, 미국에 남은 사람들은 닭고기만 먹을 수 있었다고도 합니다. 소와 돼지는 싸움터에 나간 사람한테만 주고, 싸움터에 나가지 않은 사람(아마 거의 여자와 어린이였을 테지요)한테는 닭만 먹어도 된다고 했다는데, 미국에서는 이런 나날을 보내면서 비로소 ‘닭고기 요리’가 퍼질 수 있었다고 하는군요.



자동차처럼, 닭도 새로운 모델이 정기적으로 발표된다. 2007년 처음선보인 코브 700은 코브 500보다 조금 더 성능이 향상된 모델이었다 . 이 닭은 최대한 낮은 가격으로 최고의 생산량을 요구하는, 빠르게 성장하는 남아메리카 시장을 겨냥하며 만들어졌다 … 2010년, 47일 만에 닭은 약 2.6킬로그램의 무게에 도달했고 450그램을 찌우기 위한 사료는 900그램도 들어가지 않았다. (330쪽)


“저는 산업 닭으로는 절대로 요리하지 않습니다.” 블랑은 프랑스인 특유의 분노하는 표정을 지으며 오로지 최상의 재료만을 자신의 요리에 사용한다고 말했다. (359쪽)



  집에서 밥찌꺼기를 주거나 다친 남새 잎을 주거나 풀벌레를 스스로 잡아서 먹도록 하면서 기른 닭을 잡아서 먹는 고기 맛은, 공장에서 척척 찍든 나오는 닭고기 맛하고 사뭇 다릅니다. 집에서 함께 살던 닭을 잡아서 고기로 먹으면 뼈까지 폭 고아서 밥을 함께 넣고 닭죽을 얻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함께 살던 닭한테 성장촉진제나 항생제나 사료를 줄 일이 없으니, 집닭은 튼튼한 닭이요 싱그러운 숨결이 깃든 닭이거든요.


  더 생각해 보면, 집에서 닭을 키운다면 집닭은 집 둘레에서 돋은 풀을 스스로 쪼고, 풀밭에서 풀벌레를 찾으려 할 테니, 집 둘레에 농약을 칠 수 없습니다. 집에서 닭을 키우는데 텃밭이나 풀밭에 농약을 치면 자칫 ‘농약 맞은 벌레’나 ‘농약에 절은 풀’을 먹고 죽을 수 있으니까요.


  닭을 비롯해서 돼지나 소를 공장이나 감옥 같은 얼거리인 곳에 잔뜩 가두어서 키운 뒤에 고기를 얻는 오늘날 사회에서는 ‘축산업’을 하는 곳마다 항생제와 촉진제와 사료만 쓰기 마련이고, 이런 닭이나 돼지나 소가 누는 똥은 온통 항생제덩이인 터라, 이런 똥으로는 거름을 쓸 수 없습니다(유기농을 못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집닭을 키우고 집돼지를 키우며 집소를 키울 수 있을 때에는, 집과 마을과 시골 모두 농약이 없이 맑고 깨끗하며 싱그러운 터전이 됩니다. 이러면서 가장 맛있고 좋은 고기를 얻는 길이 새롭게 열립니다.



평범한 미국인들에게는 가격이 모든 것을 말한다. 닭이든 당근이든 기준은 같다 … 항생제를 남용하고, 소화를 증진하기 위한 알제닌 화합물을 사료에 첨가하고, 도축한 닭들을 염소 처리한 오염된 물에 담그고, 그 뒤 화학 물질을 투입하여 위험한 세균을 제거하는 일은 전부 더 낮은 비용의 실현이라는 무자비한 압박의 결과였다. (362쪽)


실상을 보고 충격 받은 한 텍사스의 동물학자는 미국의 일반적인 산란장을 이렇게 요약했다. “여긴 닭 정신병원입니다.” (378쪽)


치엥 응안이라는 작은 공동체의 지역 공무원은 소규모 커피 농장을 하며 애완 야생닭 한마리를 기르는 한 농가로 우리를 안내했다. “닭은 20년도 살 수 있죠.” (406쪽)



  스무 해를 살 수 있는 닭이라면, 닭 한 마리를 스무 해 동안 기르면서 꾸준하게 달걀을 얻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스무 해에 걸쳐 어미 닭은 꾸준히 새끼를 낳을 테며, 새끼는 어른 닭으로 자라서 다시 새로운 새끼를 낳을 테지요.


  다만, 집닭을 키워서 고기를 얻는 얼거리라면 오늘날처럼 ‘대량생산·대량소비’는 되지 않습니다. 이른바 ‘더 많은 돈’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닭고기를 ‘대량생산·대량소비’ 해야 할까요? 맛있고 튼튼한 닭고기를 누리면서 아픈 데가 없이 즐거운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맛없고 안 튼튼한 닭고기를 값싸게 먹는 길이 도시사람한테 즐거운 삶일까요? 오늘날 우리는 닭고기나 돼지고기나 소고기를 ‘너무 싸게’ 먹는 길을 걷는 바람에 외려 더 아프고 더 고되며 더 따분한 삶이 되지는 않을까요?


  인문책 《치킨로드》는 닭 한 마리가 이 지구별에서 사람들하고 어떻게 어우러지면서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러면서 책 끝자락에서 ‘닭 농장’은 ‘닭 정신병원’이라 할 만하다는 얘기를 살며시 비추고, ‘스무 해를 살 수 있는 닭’ 이야기를 가만히 보탭니다. 닭고기를 먹고 싶은 이웃한테 어떤 닭을 어떻게 먹을 때에 즐거운 노래가 흘러나올 만한가 하고 조용히 묻습니다. 4348.12.15.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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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농반X의 삶 - 자연 속에서 자급자족하며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다
시오미 나오키 지음, 노경아 옮김 / 더숲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책읽기 삶읽기 221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아름답게 사는 길이란

― 반농반X의 삶

 시오미 나오키 글

 노경아 옮김

 더숲 펴냄, 2015.11.24. 14000원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모두 회사원이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살기에 흙을 안 만지면서 살지도 않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탓에 숲하고 동떨어진 채 살지도 않아요. 그리고, 시골에서 사는 사람이 모두 흙을 만지는 일꾼으로 살지 않습니다. 시골에서 살기에 흙이나 풀이나 나무를 잘 알지도 않습니다. 시골에서 나고 자랐기에 앞으로도 시골에서 살아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지구별에서는 시골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하루 빨리 도시로 나가고 싶어 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에는 도시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가운데 도시를 떠나겠노라 하고 생각하기는 몹시 어려울 수 있어요. 아니, 도시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한테 ‘너희는 앞으로 도시를 떠나렴.’ 하고 가르치는 어른은 찾아볼 수 없다고 할 만해요. 그도 그럴 까닭이 아이들한테 ‘자, 너희는 시골을 배우고 숲을 노래하면서 도시를 떠나렴.’ 하고 가르치려면, 이렇게 말할 어른들 스스로 먼저 도시를 떠나서 시골에서 아이를 낳았을 테니까요.



반은 자급적인 농업에 종사하고 나머지 반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병행하는 삶 … 이는 쌀과 채소 등 주요 농작물을 직접 길러 안전한 식재료를 확보하는 한편, 자신의 개성을 살린 자영업에 종사함으로써 일정한 생활비를 벌어들이는 균형 잡힌 삶을 말한다. (19쪽)


데루오 씨는 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꼬박 한 해를 정성을 쏟아 가며 벼와 채소를 기르는 농사일, 그리고 유화를 그리는 과정은 서로 닮았어요. 둘 다 단숨에 완성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도시의 좁은 공간에서 분주하게 그리면 마치 공업 제품 같은 그림이 되고 말죠.” (36쪽)



  시오미 나오키 님이 쓴 《반농반X의 삶》(더숲,2015)을 읽습니다. 글을 쓴 시오미 나오키 님은 ‘반농’하고 ‘반X’를 말합니다. 여기에서 ‘반농’하고 ‘반X’란 삶을 둘로 나누어서 바라본다는 뜻이요, ‘반농’은 우리 삶에서 반은 농사를 짓는 삶으로 가꾸고, 다른 반이 될 ‘반X’는 저마다 가슴에 품은 꿈대로 삶을 짓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시골에서 살되 오로지 시골일만 하는 삶이 아니라, 시골일은 하루 가운데 반쯤으로 삼고, 다른 반은 ‘꿈을 찾자’고 이야기하는 셈입니다.


  이 이야기는 달리 보면 도시에서도 똑같이 말할 만합니다. 도시에서 살더라도 반만 ‘도시 일자리’를 붙잡고, 나머지 반은 ‘꿈을 찾자’고 할 수 있어요. 또는, 도시에서 붙잡은 일자리에서 ‘꿈을 찾는다’면, 다른 반으로는 시골에서 손수 먹을거리를 지어서 누리는 살림으로 나아가자는 이야기가 될 만합니다.



전원에서 반농 생활을 하려면 ‘생활 수입은 적게, 마음의 수입은 넉넉하게’라는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한다 … 우리 집은 큰 길에서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우리 가족은 쇼핑을 자주 가지 않는다. 쇼핑 횟수가 줄어들면 지출액과 쓰레기 발생량도 줄어든다. (50∼51쪽)


딸은 TV 시청보다는 그림을 그리거나 무언가 만들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종종 아이와 함께 바닥에 누워 그림책을 읽는다. (57쪽)



  오늘날 학교 얼거리를 돌아보면 모두 ‘도시 교육’이라 할 만합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똑같습니다. 서울이나 해남 모두 똑같은 교과서를 써요. 부산이나 통영이나 모두 똑같은 시험문제를 풉니다. 도시에서도 시골에서도 ‘도시에 있는 회사나 공공기관이나 무대’에서 일거리를 찾아서 돈을 벌도록 북돋우기만 합니다. 흙을 만지는 일을 가르치는 학교 얼거리는 아예 없습니다. 뜻있는 교사 몇몇 사람이 학교 귀퉁이에 텃밭을 마련하기는 하지만, ‘밭일’이나 ‘논일’은 어느 학교에서도 교과 과정으로 안 삼습니다. 더군다나 ‘농업고등학교’도 거의 모두 사라졌어요. ‘농업중학교’는 찾아보기 매우 어려우며 ‘농업초등학교’란 아예 있지도 않습니다. 그나마 숲유치원은 있으나, 숲중학교라든지 숲고등학교나 숲대학교는 없어요.



요즘은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쓸쓸한 논이 많다. 독한 농약을 쓰다 보면 그렇게 되기 십상이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숲에 가 본 사람은 알 테지만, 그런 숲은 그저 나무가 울창할 뿐 생동감이 없다. (77쪽)


옛날 시골에서는 어린아이도 귀중한 노동력이었다. 그래서 아이들도 자신이 가족에게 소중하고 필요한 존재임을 느낄 수 있었고, 가족애는 그렇게 자라났다. (88쪽)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아름답게 사는 길이란 무엇일까요? 도시만 떠나면 아름답게 살 수 있을까요? 도시만 떠나면 꿈을 찾을 수 있을까요?


  시골로 가기만 해서는 삶이 즐겁지 않습니다. 시골로 가서도 땅을 넓게 장만해서 큰 기계를 부리고 비닐하고 농약하고 비료를 듬뿍 써서 ‘농업(농사)’을 해야 한다면, 도시하고 똑같지요. 흙을 파서 돈을 잘 벌어야 ‘시골살이(귀촌·귀농)’가 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지을 수 있는 살림으로 나아갈 때에 시골살이가 비로소 즐겁습니다. 돈을 들여서 땅이랑 기계를 장만하고 시설을 갖추어서, 돈을 더 벌어들이려고 하는 농업(산업 가운데 하나)이 된다면, 애써 시골로 가서 살려고 하는 뜻은 흐려지고 맙니다.



관광이란, 한자를 풀어 보면 ‘빛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빛은 어쩌면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의 친절함 또는 따스함이 아닐까? (113쪽)


월급 생활자라면 한 주에 3∼4일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가정과 지역사회 활동에 할애하는 것이다. 자신이 만족하는 생활을 최우선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입은 줄어들고 승진도 늦어지겠지만 생활의 만족도는 높아진다. (136쪽)



  시골에서든 도시에서든 저마다 가슴에 꿈을 품어야 합니다. ‘직업 계획’이 아닌 꿈을 품어야지요. 어떤 삶을 이루고 싶다는 꿈을 품을 노릇입니다. 어떤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꿈을 펼칠 노릇입니다. 어떤 사람으로 거듭나겠노라 하는 꿈으로 나아갈 노릇이에요.


  나는 아이들을 오롯이 돌보면서 이 대목을 늘 되새깁니다. 아이들을 시설이나 학교나 학원에 넣는다면, 아이를 돌보지 않아도 되니까 ‘틈이 많이 납’니다. 그러나, 아이를 시설이나 학교나 학원에 넣으면, 아이 삶에서 오직 한 번만 있는 ‘한 살’이나 ‘두 살’이나 ‘세 살’이나 ‘네 살’이나 ‘다섯 살’이 어떠한 나날인가는 하나도 알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집에서 놀리면서 이 아이들이 저희 나이에 어떤 마음이 되고 어떤 놀이를 누리면서 어떤 하루를 짓는가를 낱낱이 들여다보고 껴안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을 집에서 돌보고 가르치고 품으면서 ‘나 스스로 내가 이 아이만 하던 어린 날에 받은 사랑’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도시에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어 받기에만 익숙해진 탓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스스로 무언가를 생각하는 능력을 잃은 것이다. (164쪽)


필요한 것을 필요한 만큼만 생산하면 된다는 것이다. 풀을 스스로 벨 수 있는 정도의 규모를 유지하면 자연스럽게 가족이 먹을 만큼의 쌀이 생산된다. 그것보다 크면 노동력이 모자라서 무리를 하게 되는데. (205쪽)



  《반농반X의 삶》이라는 책이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아주 쉽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려면 시골에서 살 때에 길을 잘 열 수 있으니 시골로 가자고 말하지요. 다만, 전원주택을 짓는 시골이 아니라, ‘내 삶을 가꾸는 살림살이’가 될 시골을 찾자고 말해요. ‘대규모 농업’으로 돈을 벌 시골이 아닌, 손수 먹을 밥을 땅에서 손수 지어서 얻는 홀가분하면서 재미난 시골이 되도록 하자고 말합니다.


  이러한 흐름을 살필 수 있다면, 도시에서 살 적에도 ‘모든 날을 돈 버는 일에 가두지’ 말고, 이레 가운데 나흘을 돈을 번다면 다른 사흘은 새로운 삶과 꿈과 사랑으로 나아가는 길에 쓸 수 있습니다.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더라도 나흘만 맡기고 사흘은 오롯이 아이하고 어울릴 수 있어요.


  스스로 삶을 찾을 적에 스스로 사랑을 깨닫습니다. 스스로 삶을 누리려 할 적에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4348.12.8.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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