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 옛글 나들이
한희철 지음 / 꽃자리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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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1



시골에서 흙내음으로 태어난 ‘칠칠한’ 옛말

―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

 한희철 글

 꽃자리 펴냄, 2016.3.4. 15000원



  ‘속담(俗談)’은 “예부터 민간에 내려오는 쉬운 격언이나 잠언”이라고 합니다. ‘민간(民間)’은 “여느 사람들 사이”를 가리키고, ‘격언(格言)’은 “겪은 이야기”를 가리키며, ‘잠언(箴言)’은 “가르치는 말”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런데 곰곰이 살펴보면 옛날부터 여느 사람들 사이에 내려오던 말이란 ‘시골에서 살며 흙을 만지는 일을 하는 동안 내려오던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속담 = 시골말’인 셈이요, ‘시골 이야기’인 셈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진 말이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겪은 이야기예요.



칠칠하지 못해서 야단을 맞았다면 칠칠하면 되었을 텐데, 왜 우리는 칠칠하지 못하다는 야단만 맞았을 뿐 칠칠함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했던 것일까. (31쪽)


그가 돌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바위옷이 이쁘잖아요? 지금은 말랐지만 물을 주면 다시 살아날지도 몰라요.” ‘바위옷’이라고 했다. (58쪽)



  시골마을에서 목사로 일하는 한희철 님이 쓴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꽃자리,2016)를 읽습니다. 한희철 님은 ‘속담’이라는 말보다는 ‘옛글’이라는 말을 씁니다. 197가지 옛글을 놓고 오늘날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시골에서 살며 손수 시골일(흙일)을 하기도 하면서 옛글(속담)을 되새긴다고 합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한테 ‘살아가는 뜻’을 교회에서 들려주려고 옛글을 되읽는다고 해요.



한숨도 버릇되는 것이라면 절망도 원망도 슬픔도 버릇 아닐까? 웃음도 희망도 사랑도 버릇일지 모른다. 타고난 성품으로서가 아니라 순간순간 내가 가진 마음의 결과가 켜켜 쌓여 만든 결과일 것이다. (75쪽)


어느새 우리들의 삶은 농사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지만 그래도 비가 올 때마다 아름다운 우리말 몇 개쯤은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84쪽)



  ‘시루에 물은 채워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운다’라든지 ‘늘 쓰는 가래는 녹이 슬지 않는다’라든지 ‘호미 빌려간 놈이 감자 캐 간다’ 같은 말은 모두 시골말입니다. ‘썩은 감자 하나가 섬 감자를 썩힌다’나 ‘윗논에 물이 있으면 아랫논도 물 걱정 않는다’ 같은 말은 모두 시골말이에요. 시골에서 시골일을 하는 동안 시골사람이 스스로 겪은 삶을 짤막한 말로 남겨서 흘러온 이야기예요.


  오늘 우리는 흔히 ‘속담·격언·잠언’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곰곰이 따진다면 ‘시골말’이나 ‘시골슬기’나 ‘흙말’이나 ‘흙슬기’ 같은 새 이름을 붙여 볼 만하구나 싶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말은 시골에서 태어났고, 흙에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속(俗)’이나 ‘옛’이라는 이름하고는 사뭇 다른 자리에서 흐르는 말이지 싶어요.


  시골에서 살며 시골일을 하는 시골사람은 ‘논밭’이라 말합니다. ‘콩’하고 ‘팥’을 말합니다. ‘호미·낫·쟁기’를 말합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말합니다. ‘씨앗·가을걷이·설·한가위’를 말합니다. ‘도랑·고랑’을 말합니다. ‘날씨’를 말하고 ‘바람·하늘·비·눈’을 말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이런 시골말을 놓고 도시에서는 으레 ‘한자로 옷을 입힌 다른 말’을 쓰기 마련입니다. 흙을 만지지 않는 관청 일꾼도 시골말을 잘 안 써 버릇합니다.



‘돌이’와 관련된 말 중에 ‘돌이마음’이란 것이 있다. “사심을 돌려 바르고 착한 길로 들어서는 마음”이라는 뜻이다. “마음을 돌려먹는다” 해서 ‘돌이마음’이라 하지 않았을까 싶다. (136쪽)


‘옹달’이란 말이 들어가는 낱말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옹달솥’은 “작고 오목한 솥”이란 뜻이다. ‘옹달시루’란 “작고 오목한 시루”라는 뜻이요, ‘옹달우물’은 “작고 오목한 우물”이란 뜻이다. (146쪽)



  한희철 님은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라는 책을 빌어서 ‘돌이마음’이나 ‘바위옷’이나 ‘옹달’이나 ‘겉볼안’이나 ‘언구럭’이나 ‘도사리’ 같은 시골말을 새롭게 살려서 오늘날에도 넉넉히 쓸 만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흙을 가꾸면서 살림을 짓던 오래된 말마디마다 깃든 따사로운 슬기를 돌아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 매우 많이 살고, 흙을 만지기보다는 흙하고 멀어진 일을 하더라도, 누구나 밥을 먹는 살림인 만큼 ‘밥이 태어난 흙자리’를 되새기는 말(슬기로운 말)을 마음에 얹어 보자고 이야기합니다.



어디에 사느냐 하는 것보다도 무엇을 바라보며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일러주는 말이다. (291∼292쪽)


다 같이 듣고 있어도 어떤 마음으로 듣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귓등’으로 들을 수도 있고, ‘귀담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314쪽)



  옛날부터 흔히 썼기에 ‘옛말’입니다. 옛말이라 해서 오늘날에 안 쓰는 말이 아닙니다. ‘삶(살다)·사랑·살림·사랑·슬기’ 같은 낱말은 아주 오래된 한국말인데, 이 말을 쓰면서 ‘오래된 말’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없지 싶어요. 예나 이제나 즐겁게 쓰고 새롭게 쓰기도 해요.


  그러나 어떤 말이든 오늘 이곳에서 새롭게 쓰지 않으면 쉽게 잊히고 쉽게 사라지지 싶습니다. 이런 뜻에서 ‘옛말(어제 말)’을 되새기면서 ‘새말(오늘 말)’을 짓는 살림으로 나아가는 슬기로 북돋우지 싶습니다. 어른이 아이한테 말을 가르치는 살림도 ‘옛말(어른 말)’을 듣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새말(아이 말)’을 가꾸어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라도록 이끌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늙은 개가 짖으면 내다봐야 한다》라는 책에서 첫머리에 다루는 ‘칠칠하다’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참말 ‘칠칠하지 못하다’나 ‘칠칠치 못하다’ 꼴로만 흔히 쓸 뿐입니다. “넌 참 칠칠하구나.”라든지 “우리 칠칠하게 살림을 지어요.”처럼 말하는 일이 매우 드물지 싶어요.


칠칠하다

1. 나무, 풀, 머리털이 잘 자라서 알차고 길다

2. 주접이 들지 않고 깨끗하고 얌전하다

3. 결이나 일 매무새가 반듯하고 야무지다


  “칠칠한 나무”나 “칠칠한 나물”이나 “칠칠한 머리카락”처럼 “칠칠한 차림새”나 “칠칠한 사람”이나 “칠칠한 나라”로 나아가는 길을 헤아려 봅니다. 칠칠하지 ‘못한’ 모습이 아닌, ‘칠칠한’ 아름다움을 기쁘게 찾는 길을 생각해 봅니다. ‘못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한다’는 생각으로 칠칠한 말과 넋과 삶으로 거듭나는 길을 걸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2016.3.2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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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맛이 사는 맛 - 시대의 어른 채현국, 삶이 깊어지는 이야기
채현국.정운현 지음 / 비아북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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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11



새롭게 배우지 않으니 썩고 마는 어른들

― 쓴 맛이 사는 맛

 채현국·정운현 지음

 비아북 펴냄, 2015.2.27. 13000원



  효암학원 이사장이면서 ‘참 어른’ 소리를 듣는 채현국 님이 있습니다. 정운현 님이 채현국 님을 만나서 들은 말을 사이사이 곁들이면서 채현국 님이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는 책 《쓴 맛이 사는 맛》(비아북,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채현국 님이 정운현 님한테 들려준 말을 한 대목씩 적은 뒤, 이 말을 정운현 님 나름대로 다시 풀어서 이야기하는 얼거리로 엮습니다. 그래서 ‘채현국 님이 들려주는 쓴소리’보다는 ‘채현국 님이 들려준 말을 들은 정운현 님이 생각하는 이야기’가 좀 길게 차지합니다.


  채현국 님이 ‘우리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들려주었다면 ‘말풀이’ 같은 이야기를 길게 붙일 수도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여러모로 아쉽구나 싶습니다. 채현국 님하고 정운현 님 두 사람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고스란히 살리는 얼거리로 책을 엮는 쪽이 한결 나았겠다고 느낍니다.



“자기 껍질부터 못 깨는 사람은 또 그런 늙은이가 된다. 저 사람들 욕할 게 아니라, 저 사람들이 저 꼴밖에 될 수 없었던 걸, 바로 너희 자리에서 너희가 생각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 (27쪽)


“지식을 가지면 ‘잘못된 옳은 소리’를 하기가 쉽다. 사람들은 ‘잘못 알고 있는 것’만 고정관념이라고 생각하는데 ‘확실하게 아는 것’도 고정관념이다.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 평생 그 해답을 찾기도 힘든데, 나만 옳고 나머지는 다 틀린 ‘정답’이라니, 이건 군사독재가 만든 악습이다. 박정희 이전엔 ‘정답’이란 말을 안 했다. 모든 ‘옳다’는 소리에는 반드시 잘못이 있다.” (33쪽)



  이를테면, “권력하고 돈이란 게 다 마약이라, 지식도 마찬가지고, 지식이 많으면 돈하고 권력을 만들어 내니까(29쪽).” 같은 말은 그대로 읽으면 됩니다. “내가 살아 있지 않고서야 무에 소용 있나. 그 다음은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느냐다(102쪽).” 같은 말도 따로 붙임말이 없이 알아듣고 새길 만하리라 느낍니다. “집착을 끊으려면 집착하는 그 마음을 속여야 한다. 다시 말해 무엇에 집착하지 않겠다는 마음부터 없애야 한다(106쪽).” 같은 말도 가만히 이 말을 곱씹으면서 생각을 기울일 만해요.


  다시 말해서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책은 ‘채현국 어록 해설집이나 감상평’ 같은 얼거리입니다. 가만히 듣거나 새기면서 저마다 제 삶을 새롭게 돌아보도록 북돋우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채현국 님이라 할 수 있는 만큼, 채현국 님이 우리한테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를 다른 붙임말이 없이 들려주는 ‘대화록’이나 ‘이야기마당’이라면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책이 한결 돋보일 만하리라 봅니다.



“삶이란 끊임없이 묻고, 배우고, 깨우치는 과정이다. 처음엔 누구도 삶을 알 수 없다. 그저 그렇게 사는 것이 삶이다. 삶이란 삶을 사랑할 줄 알게 되는 과정이다. 다만 그저 아는 게 아니다. 수많은 갈등과 반복, 그 과정에서 피 터지게 싸운 결과, 우리는 삶을 사랑하게 된다.” (94쪽)


“지식이라는 것, 뭘 안다는 것 또한 삶을 분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명언이나 좌우명 같은 것들이 삶을 살아가는 데 효과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이런 것들이 결국에는 농약, 화학비료 같은 것이 되고 만다. (97쪽)



  우리는 모두 배웁니다. 다섯 살 어린이도 배우고, 열다섯 살 푸름이도 배웁니다. 스물다섯 살 젊은이도 배우고, 마흔다섯 살 아저씨도 배웁니다. 일흔다섯 살 할머니도 배우고, 여든다섯 살 할아버지도 배우지요. 왜냐하면 ‘삶’이기 때문입니다. 사는 동안에는 누구나 이 삶을 배워요.


  배우지 않을 적에는 고이거나 멈추지요.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는 옛말처럼, 배우지 않아서 그만 고이거나 멈출 적에는 삶이 아닌 죽음으로 치닫지 싶어요. 다시 말해서, 어여쁜 아이들은 날마다 늘 새롭게 배우면서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뛰고 달리면서 무럭무럭 자랍니다. 우리 어른들도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몸짓이나 마음이 된다면 늘 웃고 노래하고 춤추고 뛰고 달리면서 무럭무럭 자라는 ‘마을살이’나 ‘두레살이’를 이룰 만하리라 생각해요.


  농약이나 화학비료 같은 지식을 머릿속에 담는 삶이 아니라, 두 손으로 즐겁고 씩씩하게 일구는 삶이 될 때에 참으로 즐거워요. 비닐집이나 유리온실에서 고이 키우는 남새가 아니라 맨땅에서 비바람을 고스란히 쐬면서 다부지고 튼튼하게 키우는 살림이 될 때에 참으로 튼튼해요.



“모험심을 가져야 한다. 기존의 틀 속에 갇혀서는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세상을 바꾼 사람, 자유로운 삶을 산 사람들은 모두 모험가들이었다. 사람은 어떻게든 살아낼 수 있다. 제멋대로 살면 살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공포심부터 없애야 한다.” (108∼109쪽)


“공부를 하지 않으면 내가 썩는다. 공부를 하면 썩어도 덜 썩는다. 공부를 하면 남에게 쓰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115쪽)



  채현국 님이 우리한테 ‘쓴소리’랑 ‘단소리’를 고루 들려줄 수 있는 바탕이라면, 누구보다 채현국 님 스스로 늘 새롭게 배우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할아버지 나이에도 늘 새롭게 배우려 하는 몸짓이기에 우리한테 즐겁게 온갖 이야기를 들려줄 만하지 싶어요.


  졸업장이나 자격증을 잔뜩 갖추었기에 똑똑하거나 훌륭하지 않아요. 책을 많이 읽었기에 슬기롭거나 대단하지 않아요. 작은 한 가지라도 늘 새롭게 배울 때에 아름답거나 사랑스럽습니다. 훌륭하기보다는 아름다운 삶으로 가꿀 적에 웃음이 흐르고, 대단하기보다는 사랑스러운 살림으로 북돋울 적에 노래가 흐르리라 느낍니다.


  그러니까, 스스로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 홀가분하게 날갯짓을 할 적에 배워요. 스스로 틀에 갇히면 ‘읽은 책’만 또 읽고, ‘아는 책’만 다시 읽으며, ‘익숙한 책’만 거듭 읽고 말지요. 책을 읽더라도 ‘새로운 책’으로 손을 뻗지 못한다면, 슬기로운 책읽기나 재미난 책읽기하고는 차츰 멀어지리라 느껴요.



“지금 직업인들은 말만 직업인이지 임금을 받는 노예들인 경우가 많다.” (125쪽)


“일선 학교의 현실은 딴판이다. 좋은 학생을 키울 생각만 하지, 좋은 교사를 키워낼 생각은 별로 하지 않는다. 인식이 부족한 탓이다. 곡식을 키우는 농부가 시원찮은데 아무리 좋은 논밭인들 제대로 된 농작물이 나올 리 없다 … 학교는 좋은 학생만 길러내는 곳이 아니라 좋은 교사도 길러낼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181, 182쪽)



  채현국 님은 《쓴 맛이 사는 맛》이라는 책을 빌어서 우리가 ‘임금노예’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임금노예’를 키우는 학교교육이 아니라, ‘꿈날개’를 펴는 아이들이 자라는 너른 살림터를 가꿀 수 있기를 바라는 뜻을 보여주어요.


  학생이 아름답게 자라는 배움터라면 참말로 교사도 아름답게 자라겠지요. 학생이 기쁘게 배우는 터전이라면 참으로 교사도 기쁘게 가르치겠지요.


  학교뿐 아니라 여느 보금자리도 이와 같다고 생각해요. 아이를 사랑으로 보살피는 어른이 있는 곳에서는, 어른도 아이한테서 똑같이 사랑을 받습니다. 아이를 고운 손길로 돌보는 어버이가 있는 터에서는, 어버이도 아이한테서 똑같이 고운 손길을 받아요.


  새롭게 배우기에 새롭게 생각합니다. 새롭게 생각하기에 새롭게 살림을 다스립니다. 새롭게 살림을 다스리기에 새롭게 삶을 짓습니다. 새롭게 삶을 짓기에 새롭게 꿈을 꿉니다. 새롭게 꿈을 꾸기에 새롭게 길을 걷습니다. 새롭게 길을 걷기에 새롭게 사랑하는 숨결을 스스로 마음속에서 길어올립니다. 새롭게 사랑하는 숨결을 스스로 길어올리니, 새롭게 배우려 해요. 개구리 노랫소리가 차츰 커지는 기쁜 봄날입니다. 2016.3.19.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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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맛 나는 한국인의 문화
정경조.정수현 지음 / 삼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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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0



마을 빨래터를 신나게 치우는 작은 문화

― 살맛 나는 한국인의 문화

 정경조·정수현

 삼인 펴냄, 2016.2.29. 12000원



  정경조·정수현 두 분이 쓴 《살맛 나는 한국인의 문화》(삼인,2016)를 읽다가 문득 ‘신나다’라는 낱말을 떠올리면서 우리 한국말사전을 돌아봅니다. ‘신나다’라는 낱말은 2015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 낱말로 써도 ‘틀리지 않’습니다. 2014년 11월까지는 ‘신 나다’처럼 띄어서 적어야 했어요.


  재미있게도 ‘재미나다’는 예전부터 늘 한 낱말이었습니다. 이와 달리 ‘신나다’는 이제서야 한 낱말로 삼는 한국말사전이에요. 그런데 짜증이 난다고 할 적에는 아직 ‘짜증 나다’처럼 띄어서 적어야 옳다고 합니다. 똑같이 ‘나다’가 뒤에 붙는 말마디인데, 어느 말은 붙이고 어느 말은 띄어야 하는 한국말 맞춤법입니다. 이를테면 ‘화나다·성나다·뿔나다·골나다·성질나다’는 붙여야 하지만 ‘부아 나다·짜증 나다·신명 나다’는 띄어야 하지요. ‘제금나다’ 못지않게 ‘짜증이 나다’ 같은 말도 사람들이 널리 쓰는데 앞으로 언제쯤 되어야 ‘짜증나다’가 한 낱말로 한국말사전에 실릴 만할까요?



‘신바람’과 ‘신명’은 한국 문화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데 아주 중요한 단어다 … 신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놀이를 통한 공동체적 유대감이다. 신명은 혼자일 때보다 여럿일 때 더 빛을 발한다. (27, 31쪽)


한국 춤에서 가장 보편화된 동작은 어깨를 움직이는 춤이다. (52쪽)



  그러고 보면, 이 책에 붙은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이 ‘살맛 나다’처럼 적어야 오늘날 맞춤법입니다. ‘살맛’은 한 낱말이요 ‘맛나다’도 한 낱말입니다. 그렇지만 ‘살맛나다’는 아직 한 낱말이 아니에요. “살(살아갈) 맛이 나다”인 ‘살맛나다’를 한 낱말로 삼을 수 있는 한국말 살림살이라면, 우리 삶이나 살림이나 사랑을 한결 재미나면서 신나게 그릴 만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는 판을 벌이고 상호 작용을 하는 추임새 문화가 몸에 배었기 때문에 조용히 앉아서 공연 관람을 하려면 좀이 쑤셔 견디기 어렵다 … 예부터 사람들이 모여 함께 일하고 노는 공동의 자리를 ‘판’이라 불러 왔다. 씨름을 하는 곳은 씨름판, 노름을 하는 곳은 노름판, 윷놀이를 할 때조차 윷판이라 했다. (65, 69쪽)


추임새가 사라지면서 한국인들은 점점 남을 격려하는 데는 인색해지고 비난하는 데는 능숙해졌다. (84쪽)



  씨름판이나 노름판이나 윷판이라는 말마디를 듣다가, 일판이나 놀이판이나 살판이라는 말마디를 새롭게 떠올립니다. 어른한테는 일판이요 아이한테는 놀이판입니다. 어른과 아이 모두한테는 살판입니다. 그리고 살림판이요 사랑판일 테지요.


  글을 쓰면 글판이고, 그림을 그리면 그림판입니다. 사진을 찍으면 사진판이며, 밥을 지으면 밥판입니다. 빨래를 하는 빨래터는 빨래판이 되겠지요. 그러고 보니, 오늘 아이들하고 우리 마을 어귀에 있는 빨래터에 가서 물이끼를 걷으며 봄맞이 물놀이를 즐겼어요. 나는 신나게 물이끼를 걷고, 아이들은 신나게 물놀이를 합니다. 아이들로서는 신나게 노는 자리이니까 놀이판이면서 ‘신판’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신나게 논다고 할 적에는 ‘신놀이’라는 말을 새롭게 써 볼 수 있을까요?


  《살맛 나는 한국인의 문화》에서 밝히는 ‘판’이나 ‘추임새’라는 말마디를 헤아려 봅니다. 즐겁게 거드는 한마디는 언제나 추임새입니다. 기쁘게 주고받는 한마디는 새로운 이야기판으로 거듭납니다. 그러니 우리 겨레는 판소리를 즐겼고, 판놀이를 했을 테지요. 판소리는 마당소리요, 판놀이는 마당놀이였을 테고요. 그러고 보니 아예 ‘마당 + 판’으로 ‘마당판’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더할 나위 없이 신명이 나는 자리이기에 ‘마당판’이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예부터 여러 잔치 문화를 즐겨 왔다. 어렵고 힘들 때마다 음식을 나누고 즐거움을 나누며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던 문화가 바로 잔치였다. (162쪽)


젓가락을 쓰는 한·중·일 세 나라 중에서 특히 한국 사람들의 젓가락 사용 기술이 가장 뛰어나다. 그 이유는 쇠젓가락을 사용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259쪽)



  예부터 한겨레를 두고 흰옷 입는 겨레라고도 했지만, 흰옷 입은 발자취보다는 춤과 노래를 즐긴 발자취가 훨씬 길다고 느낍니다. 고려나 고구려나 신라나 백제나 가야나 발해나 부여 같은 예전에 입은 옷은 흰옷이 아닌 온갖 빛깔이 고이 어우러진 옷이라고들 해요. 그리고 어느 ‘나라 이름’으로 있던 삶이었어도 누구나 기쁘게 춤을 추고 노래하면서 삶을 북돋았다고 합니다.


  이와 달리 오늘날 우리 삶터를 들여다보면 기쁘게 춤을 추거나 노래하는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요. 따로 ‘지역 축제’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면 마을놀이나 마당놀이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요. 학교에서도 운동회나 무슨 축제를 열지 않으면 마음껏 춤추거나 노래할 만한 자리가 매우 드뭅니다. 아이들은 놀이마당을 누리지 못하고 학교랑 학원에서 시험공부에 너무 바빠요. 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돌보는 어른들도 놀이마당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고단한 일에만 얽매입니다.



한국인들이 등산복을 애용하는 까닭은 무엇보다 등산을 즐긴다는 데 그 원인이 있지만 실용적인 목적도 크다. 등산복은 기능성 원단으로 만들어 착용감이 편한 데다가 땀이 빨리 마르고 비가 와도 속은 젖지 않기 때문이다. (275쪽)



  《살맛 나는 한국인의 문화》는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사람들 사이에서 흐르던 문화를 짚으면서 우리 사회와 역사를 이야기합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다가, 이 이야기를 한 걸음 더 내디뎌서 새로운 생각으로 끌어올리면 어떠할까 하고 느끼기도 합니다. 이를테면, 이제는 예전과 달리 놀이판도 신명도 추임새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고 할지라도, 조촐하게 새롭게 짓는 놀이판이나 신명이나 추임새를 생각해 볼 만합니다. 마을마다 조그맣게 맺는 두레(협동조합)를 떠올릴 만하고, 뜻이 맞는 여러 사람이 모여서 조그맣게 동아리를 이루는 자리를 떠올릴 만해요. 어느 모로 본다면 녹색당 같은 정당도 틀에 박힌 제도권에서 벗어나서 삶과 살림을 새롭게 가꾸려는 조그마한 몸짓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흥군 같은 작은 시골을 보더라도 읍내에 ‘등산옷 가게’가 꽤 많아요. 해마다 새로운 ‘등산옷 가게’가 몇 군데씩 문을 엽니다. 사람 숫자는 몇 만이 안 되는 데에도 옷가게가 자꾸 문을 여니 알쏭합니다만, 그만큼 시골에서도 등산옷을 사랑하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로구나 하고 느껴요. 그런데 이렇게 눈에 뜨이는 유행 같은 등산옷이 아닌 작은 몸짓을 생각해 보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도시를 조용히 떠나서 시골로 가는 사람들 숫자는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가는 사람’보다 아직 훨씬 적습니다만, 차츰차츰 늘어납니다. 시골에서 조용히 논밭을 지으면서 살림을 짓는 사람이 꾸준히 늘어요. 이들 ‘새로운 시골사람’은 도시사람을 먹여살릴 만한 농사를 짓지는 못합니다만, 이녁 살림을 건사할 만큼 땅을 가꾸면서 웃음을 짓습니다.


  어쩌면 이런 작은 몸짓이야말로 우리 겨레가 예부터 이은 조그마한 추임새요 어깨춤이요 신명이요 노래요 두레요 모둠이요 마을살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오늘 아이들하고 마을 빨래터를 신나게 치우는 동안 마을 할매나 할배는 “안 춥노? 춥겠네.” 하고 걱정하는 눈치이면서도 빙그레 웃음을 짓습니다. 일흔이나 여든 나이가 넘은 할매나 할배는 마을 빨래터나 샘터를 치우기 어려워요. 우리 마을에서는 내가 아이들하고 늘 치웁니다. 대단한 몸짓이 아니더라도 즐겁게 웃는 살림을 지으면 바로 이 작은 손길에서 새롭게 ‘살맛이 나는 우리 이야기’, 그러니까 ‘조그마한 우리 문화’가 태어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2016.3.17.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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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주권이다
윤석원 지음 / 콩나물시루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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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8



미국은 쌀 농가소득에서 70%가 보조금?

― 쌀은 주권이다

 윤석원 글

 콩나물시루 펴냄, 2016.2.22. 13000원



  오늘도 언제나처럼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서 차립니다. 미리 쌀을 씻어서 불려 놓고, 국이랑 밥을 함께 끓이면서 다른 반찬을 마련합니다. 국이 제법 끓었다 싶으면 불을 여리게 맞춘 다음에 뒤꼍으로 가서 쑥을 뜯습니다. 봄에 실컷 누리는 쑥으로 국을 마무리지을 생각입니다. 앞으로 쑥이 더 오르면 밥에도 쑥을 넣어 쑥밥을 짓고, 쑥버무리도 빚으려고 해요.


  밥을 거의 다 지을 즈음 아이들을 부릅니다. 아이들은 방이나 마루나 마당이나 고샅이나 뒤꼍에서 놀다가 “밥 먹을 사람?” 하고 부르는 소리에 “야, 밥이래! 밥 먹으러 가자!” 하고 웃으며 소리칩니다. 나는 이 소리를 들을 적마다 괜히 더 즐겁습니다. 밥 한 그릇을 맞이할 적에도 기쁘게 웃으며 노래하는 아이들을 마주하면서 밥짓는 보람을 물씬 느껴요.



미국이나 유럽, 캐나다, 호주와 같은 소위 선진국들은 식량파동을 겪지 않고 있다. 이들은 탄탄한 재정을 바탕으로 막대한 투자와 보조정책으로 농업이라는 산업을 유지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쌀 농가소득의 약 70%가 보조금이고 EU농가 소득의 약 절반 이상이 각종 명목의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33쪽)


쌀 농가 소득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유지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고안해야 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 이러한 논의를 먼저 진행하면서 쌀시장 개방 문제에 접근하는 것이 순서이다. (79쪽)



  중앙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과 교수로 일하다가 정년을 두 해 반 남기고 미리 그만둔 뒤에 강원도 양양에서 올해(2016년)부터 ‘농민’으로 바뀐 삶을 누리려 한다는 윤석원 님이 쓴 《쌀은 주권이다》(콩나물시루,2016)를 읽습니다. 중앙대학교에서는 일곱 해 앞서 ‘농업경제학과(산업경제학과)’를 구조조정해서 경제학부로 통합했다고 합니다. 이때에 윤석원 님은 매우 크게 충격을 받았고, 강단에서 물러나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때부터 깊이 헤아렸다고 합니다.


  이제 강단에서 물러났으니 ‘교수’ 아닌 ‘농민’이라는 이름이지요. 앞으로는 ‘교수님’ 아닌 ‘시골 아재’나 ‘시골 할배’라는 이름이 익숙한 나날이 될 테고요. 글이나 책이 아닌 온몸으로 흙을 말하는 삶이 될 테며, 목소리나 학문이 아닌 땀방울하고 열매로 시골살이를 말하는 살림이 될 테지요.



현재 쌀 가격 기준으로 쌀 한 가마에 현재의 16만 원에서 3만 2천 원이 떨어져 12만 8천 원이 된다면 수입쌀과 가격경쟁력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는가. 10년 후 쌀 가격이 12만 8천 원이 된다면 그동안 물가는 오를 것이 뻔한데, 그 가격으로 농사나 지을 수 있다고 판단하는 것 자체가 지나치게 낙관적이다. (120쪽)


정부와 국회가 하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왜 이리 현장농민들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155쪽)



  《쌀은 주권이다》를 읽으면서 그동안 잘 몰랐던 대목을 새삼스레 배웁니다. 무엇보다도 ‘미국, 유럽, 캐나다, 호주’ 같은 나라는 정부가 농업보조금을 무척 많이 댄다고 하는 대목을 처음으로 배웁니다. 미국만 하더라도 농가수입에서 70%가 농업보조금이라 하니, 한국 농업하고 대면 한국은 도무지 ‘경쟁력’이 생길 수 없구나 싶습니다. 한국 농업에 보조금이라 할 만한 돈을 시골 농사꾼한테 주거나 베풀기나 할까요? 이런 생각을 하는 정치인이나 행정관료는 있기나 할까요?


  그래도, 한국에서 녹색당은 ‘기본소득’을 사람들이 누려야 한다고 말하면서, 시골에 사는 사람들은 ‘농업 기본소득’을 조금 더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골에서 땅을 부치는 사람도, 앞으로 시골에서 살며 땅을 부치고 싶은 사람도, 농업 기본소득으로 50만 원이나 70만 원을 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한국 농업은 크게 탈바꿈할 만하리라 생각해요.


  농업 기본소득이 보장된다면 시골사람 누구나 농약을 덜 쓰는 한결 정갈한 농업으로 바뀔 수 있고, 도시에서 고단한 나날을 보내는 이들도 시골에서 새로운 꿈을 키우는 살림으로 거듭날 만하리라 봅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한테도 농업 기본소득을 보장해 주면, 도시에서만 문화나 예술이나 교육을 펼치려 하는 젊은이도 시골로 하나둘 찾아가서 시골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새로운 꿈을 지피는 몫을 맡을 수 있을 테고요.



우리 사회는 어찌하여 전 농지의 약 50%, 수도권의 농지는 약 70∼80%가 부재지주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니 정작 농지가 필요한 농민은 농지가 없고, 농지가격은 엄청나게 비싸 농민이 소유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190쪽)


2005년에 도입한 쌀 정책은 한마디로 실패다. 실패한 정책을 지속한다는 것은 정책당국의 직무유기 아닌가. 얼마나 더 쌀 농업이 무너져야 깨닫겠다는 것인가 … 쌀 실질소득이 지난 8년여 동안 25%가량 줄었는데도 기껏 2∼3% 인상한다는 것을 쌀농업 포기정책을 넘어 쌀농업 말살정책이라 할 만하다. (222쪽)



  밥을 맛나게 먹은 아이들은 새롭게 기운을 내면서 즐겁게 놉니다. “오늘 밥은 무엇이야?” 하고 묻는 아이들한테 “오늘 밥은 맛있는 밥.”이라 말하거나 “오늘 밥은 즐거운 밥.”이라 말하거나 “오늘 밥은 신나는 밥.”이라 말합니다. 밥상맡에서 마지막 밥풀까지 삭삭 훑어먹으면서 “오늘도 고맙게 잘 먹었구나. 이 고마운 기운을 몸에 기쁘게 받아들여서 활짝 웃고 뛰놀자.” 하고 이야기합니다.


  밥심으로 놀고, 밥심으로 일하지요. 고기를 더 먹든 풀을 넉넉히 누리든 모두 밥입니다. 빵을 먹든 떡을 먹든 우리는 언제나 ‘밥을 먹는다’고 말해요. 몸을 살리는 밥이요, 마음을 새롭게 일으키는 바탕이 되는 밥입니다.


  경제발전이라는 틀에서는 논이 아닌 공장이나 관광단지나 발전소나 고속도로나 골프장이나 아파트가 들어서야 돈이 된다고 하지만, 삶과 살림이라는 눈길로 바라본다면, 논을 둘러싸고 조촐한 마을하고 아름드리 짙푸른 숲이 있을 적에 아름답습니다. 잘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어요. 돈이 있어도 쌀이 없으면 밥을 못 먹어요. 돈이 있어도 숲이 없고 냇물이 망가져서 바람이 깨끗하지 못하면, 사람들이 다 아프지요. 돈이 있고 자동차가 있고 고속도로가 있어도, 맑은 바람과 따스한 햇볕과 싱그러운 냇물과 빗물이 있는 터전이 없으면, 삶이 삶답기 어렵습니다.


  중앙정부와 지역정부에서 정치와 행정을 맡은 일꾼들이, 그러니까 우리 삶을 아름답게 북돋우는 일을 맡은 ‘심부름꾼’들이 《쌀은 주권이다》를 함께 읽으면서 한손에는 호미나 쟁기나 괭이를 쥘 수 있기를 빕니다. 손수 흙을 일구어 보지 않는다면 흙과 쌀과 풀과 숲과 나무와 냇물과 바람과 햇볕이 우리 삶을 어떻게 북돋우는가를 제대로 알기 어려울 테니까요. 2016.3.13.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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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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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39



‘엄마는 이 몸을 타고 여행을 했구나.’

― 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글

 요시토모 나라 그림

 김난주 옮김

 민음사 펴냄, 2007.4.6. 8000원



  나는 아직 사람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숨을 거두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넋이 몸에서 고요히 빠져나가는 모습을 못 보았다고 할 만합니다.


  나는 넋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모습을 못 보았지만, 이 모습을 본 사람은 꽤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면서 몸뚱이가 그야말로 텅 빈 껍데기가 된 모습을 보았다면, 이때 일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테지요. 죽음을 지켜본다는 일은 ‘죽지 않고 삶을 잇는 사람’한테는 무척 큰 아픔이나 슬픔이 될 테고, ‘앞으로 이을 삶’을 바꿀 만하리라 느껴요.



엄마가 죽었을 때, 내게서 평범한 세계는 사라졌다. 그 대신 지금까지 커튼 너머에 있던 어떤 굉장한 것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냈다. (7쪽)


엄마의 몸에서 엄마의 혼이 떠났을 때, 나는 그 싸늘한 몸을 보면서 몇 번이나 생각했다. ‘아아, 엄마는 이걸 타고 여행을 했던 거야.’ (12쪽)



  요시모토 바나나 님이 쓴 소설 《아르헨티나 할머니》(민음사,2007)를 읽습니다. 이 소설책 첫머리를 보면, 주인공으로 나오는 아이 어머니가 몸져눕다가 그만 죽는 이야기가 흐릅니다. 주인공 아이는 어머니가 숨을 내려놓을 적에 옆에서 지켜봅니다. 그런데, 이때에 어머니 몸에서 넋이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았다고 해요. 이때부터 주인공 아이는 ‘삶을 마주하는 몸짓’이 크게 달라졌고, 사람을 마주하는 몸짓도 사뭇 달라졌구나 하고 느낍니다.



엄마가 죽고 어느 정도 지나,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아빠가 아르헨티나 할머니의 건물에 드나든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17쪽)


이상해진 아빠를 우선은 잠자코 지켜볼 생각은 못 하고, 왜 뜬금없이 알지도 못하는 시설부터 상상한 것일까? (20쪽)





  어머니 죽음을 지켜본 아이는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곁님 죽음을 지켜보지 못한 채 곁님을 떠나 보내야 한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 되었을까요?


  넋이 빠져나간 빈 몸은 ‘옷’이라고 할 만합니다. 넋이 입은 옷이 몸이라고 할까요.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 주인공 아이는 “엄마는 이 몸을 타고 여행을 했”다고 느낍니다. 어디를 여행했느냐 하면 바로 이 지구별을 여행한 셈이지요. 지구별 여행을 마친 어머니 넋은 빈 몸뚱이를 내려놓고 새로운 곳으로 가지요. 다만 주인공 아이는 어머니 넋이 앞으로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주인공 아이는 죽음이 아닌 삶이라는 자리에서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가니까요.


  그리고,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도 곧 새로운 삶으로 나아갑니다. 곁님이 없는 자리에서 ‘아르헨티나 할머니’ 품에 안겨요.



아아, 고요하다. 발을 들여놓고 보니, 모든 것이 아주 평화롭다. 아빠가 왜 여기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다. (36쪽)


주문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내 머리를 살며시 쓰다듬었다. 그 옷에서 곰팡이와 태양과 먼지와 인간의 기름 냄새가 났다. 나는 숨이 막힐 것 같고 역겨웠는데, 어째서인지 눈물이 나왔다. (39쪽)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리지 못하기에 마음을 차분하게 다스릴 수 있는 곳을 찾습니다. 마음을 고요하게 가누지 못하기에 마음을 고요히 가눌 수 있는 자리를 찾습니다. 소설책에 나오는 주인공 아이는 주인공 아이대로 차분한 마음과 고요한 숨결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도 새로운 일을 찾고 새로운 사람을 찾으면서 새로운 삶을 찾고 싶습니다.


  참말로 삶이란 무엇이고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몸뚱이를 내려놓고 넋이 떠나면 죽음이라 하는데, 죽음을 맞이한 사람한테는 이 땅에서 했던 여러 가지 일이 어떤 뜻이 될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무슨 일을 할 때에 보람이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서 살면서 어떤 놀이를 누리면서 살림을 지어야 기쁨이 될 만할까요?


  어차피 맞이할 죽음으로 한 걸음씩 나이를 먹는 삶일까요? 죽을 때는 죽더라도 삶을 누리는 오늘 이곳에서 언제나 새로운 웃음을 지으면서 이야기꽃을 피우는 하루가 될 수 있을까요?




“사위를 들여도 되고. 덤으로 귀여운 돌고래 무덤에 묻힐 수 있다고 하면서 말이다.” 비석을 씻고 있는데 엄숙한 기분이 들지 않고, 마치 돌고래를 씻는 기분일 수 있다니, 멋진 일이다. 더구나 돌고래는 웃으며 기뻐하고 있다. (73쪽)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 나오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막상 쉰 언저리 나이라고 합니다. 할머니까지는 아닌 셈이지만, 마을에서는 그분을 가리켜 다들 ‘할머니’라고 말한다고 합니다. 소설책에서 아르한테나 할머니는 주인공 아이네 아버지하고 한집살이를 하면서 아기를 낳습니다. 쉰 언저리 나이에 아기를 낳지요.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그 뒤 몇 해 못 살고 죽음길로 간다고 해요. 주인공 아이는 저를 낳은 어머니 죽음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했는데, 이제 ‘마음으로 어머니 같은 분’까지 죽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호적으로는 새어머니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아이로서는 ‘두 어머니’가 죽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한 셈입니다.


  아마 살면서 이렇게 ‘두 어머니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흔하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아직 열 몇 살 여린 나이에 이렇게 두 죽음을 곁에서 마주해야 하는 일은 만만할 수 없으리라 봅니다. 그렇지만, 소설책 《아르헨티나 할머니》에서 주인공 아이는 이 죽음을 맞딱뜨리면서 ‘엄청난 일’로 받아들입니다. 이제껏 누린 ‘수수한 삶’은 끝이 나고 ‘커튼 뒤쪽에 있던 놀라운 일’을 맞이해야 하는 삶으로 바뀌었다고 여겨요.




이 인생에서, 나는 나를 위한 유적을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아무튼 내가 살던 곳을 떠날 마음은 없다. 설사 떠난다 해도 돌아오리라. (83쪽)



  소설책에 나오는 아이네 아버지는 빗돌을 깎는 일을 한다고 합니다. 이 아이네 아버지는 아르헨티나 할머니네 집에 깃들면서 ‘곁님 무덤에 세울 빗돌’을 ‘그냥 여느 빗돌’로 깎지 않고 ‘돌고래 모습 빗돌’로 깎았다고 해요. 소설책 주인공 아이는 돌고래 빗돌을 몹시 마음에 들어 합니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하지요. 앞으로 이 아이가 스스로 헤치거나 걸어갈 길을 스스로 새롭게 짓겠노라고.


  얼추 100쪽이 안 되는 짤막한 소설인 《아르헨티나 할머니》인데, 청소년이 곁에 있는 살가운 사람을 죽음으로 떠나 보내야 하는 삶을 차분하면서도 속깊이 다루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러면서 우리가 스스로 지을 살림살이를 어떻게 가다듬을 적에 이 삶에 기쁨을 손수 일으킬 만한가 하는 대목도 짚는구나 하고 느껴요.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죽음으로 흔들릴 수 없습니다. 너도 나도 우리도 모두 흔들릴 수 없는 삶을 짓습니다. 흔들려야 하는 일이 있다면 흔들리되, 다시 일어서면 됩니다. 흔들리다가 그만 고꾸라지거나 자빠지거나 쓰러져야 한다면, 씩씩하게 새로 일어서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삶을 누리고 싶거든요.


  마음으로 다가서는 이웃이 반갑고, 마음으로 손을 맞잡는 동무가 사랑스럽습니다. 그냥저냥 한집에서 밥상을 마주하는 사이로 지낼 때에는 서로 아무 기쁨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이와 어버이 사이에서, 나와 이웃 사이에서, 동무와 동무 사이에서, 마음으로 아끼고 보듬을 수 있는 숨결이 된다면 얼마나 고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손수 짓는 고운 살림살이를 생각하면서 자그마한 소설책을 덮습니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 곁에 다가서서 이마를 쓸어넘기고 이불깃을 새로 여밉니다. 아이들은 자다가도 어버이 손길을 느꼈는지 길게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 뒤 입맛을 짭짭 다시고는 다시 꿈나라로 깊이 빠져듭니다. 2016.3.1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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