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은 말 - 시인의 일상어사전
권혁웅 지음, 김수옥 그림 / 마음산책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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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5



나이도 모르면서 “너 몇 학번이야?”라는 반말

― 외롭지 않은 말

 권혁웅 글

 마음산책 펴냄, 2016.3.25. 13000원



  오늘 나는 시골에서 살지만, 아직 도시에서 살던 무렵을 문득 떠올려 봅니다. 도시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으레 나한테 이렇게 묻습니다. “몇 학번이시지요?” 그러면 나는 언제나처럼 “저는 대학교를 안 나왔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런데 학번을 묻는 분은 다시 “아내 분은 몇 학번이시지요?” 하고도 묻기 마련입니다. 이때에 나는 다시금 “곁님은 고등학교를 그만두었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학번 숫자하고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 궁금해 하던 사람은 멋쩍은지 한동안 말이 없습니다. 이른바 ‘접점’이라고 하는 서로 이어질 만한 끈이 없는 이 사람들은 뭔가 하고 여기는 투입니다. ‘한놈은 대학교를 안 나왔고 한놈은 고졸도 아닌 고퇴라고?’ 하고 여길는지도 모릅니다.



귀요미도 이런 용어다. ‘그녀가 귀엽다’는 것은 그녀가 ‘예쁘고 곱고 애교가 있어서 사랑스럽다’는 뜻이지만, 그것은 사실 그녀에게 속한 속성이 아니라 그녀를 바라보는 내가 부여한 속성이다. (29쪽)


변한 건 당신이다. 기억은 마모 작용을 이기지 못하고 형상을 깎아낸다. (47쪽)



  시를 쓰는 권혁웅 님이 쓴 《외롭지 않은 말》(마음산책,2016)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책에는 ‘시인의 일상어사전’이라는 이름이 더 붙습니다. 권혁웅 시인 나름대로 ‘한국 사회 유행말’을 풀이해서 들려주는 이야기꾸러미예요. 이를테면 ‘교회 오빠’나 ‘친구 누나’나 ‘귀요미’나 ‘꿀벅지’나 ‘넘사벽’이나 ‘먹방’이나 ‘모태솔로’ 같은 말을 두고서 사회에서 주고받는 생각을 슬쩍 짚다가는 시인 나름대로 생각한 이야기를 곁들입니다. ‘네가 처음이야’나 ‘나 요즘 살쪘지’나 ‘너 몇 학번이야’나 ‘늙으면 죽어야지’나 ‘방법이 없네’나 ‘언제 밥 한번 먹자’ 같은 말이 겉뜻하고 속뜻이 얼마나 벌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짓궂거나 재미나거나 의뭉스럽게 건드립니다.



여자가 나 잡아봐라, 하고 외친다고 해서 남자가 아무 여자나 추격하는 것은 아니다. 여자가 빛일 때에만, 그러니까 빛의 속도로 달아날 때에만 남자는 슬로모션으로 그녀를 따르기 시작한다. (50쪽)


안타깝게도 ‘높임’이란 ‘낮춤’과 한 짝이어서 우리말에는 존대만큼이나 하대가 발달했다. 신분제 사회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 말싸움의 결론이 늘 “당신 몇 살이야?”인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며, 이것이 학벌과 결합해서 나온 말이 “너 몇 학번이야?”다. “학번이 깡패다”라는 단정과 짝을 이룬 말이지만 실은 이상한 질문이다. 몇 학번인지도 모르면서 왜 처음부터 반말일까? (62, 63쪽)



  여러 가지 이야기 가운데 ‘너 몇 학번이야’ 같은 말을 다루는 대목에서 쓰겁게 웃습니다. 권혁웅 님 말마따나 한국 사회는 아직 신분이나 계급으로 갈린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높임말 못지않게 낮춤말이 발돋움했어요. 이를테면 한자말 ‘변’은 높임말로 여기고 ‘똥’은 낮춤말로 여기지요. 한자말 ‘식사’도 높임말로 여기면서 ‘밥’은 낮춤말이라도 되는 듯이 여겨요. 회사나 공공기관 같은 곳에서 과장이나 부장이나 사장쯤 되는 분들은 ‘밥’을 먹지 않아요. 언제나 ‘식사’만 하시지요.


  그나저나 나이가 몇 살인지도, 학번이 얼마인지도 모르면서 “왜 처음부터 반말”로 “너 몇 학번이야?” 하고 묻는 사람이 많을까요? 왜 나이도 아닌 학벌까지 앞세우면서 목소리를 높이려고 할까요? 그나마 학번이라도 있으면 한숨을 돌리고, 학번조차 없으면 ‘대학교도 못 나온 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는지 모릅니다.



오, 각선미 죽이는데? 가슴이 좀 작군. 입술이 섹시해. 남자들은 늘 이렇게 여성들을 대상화해 왔다. 그런데 그 각선미 죽이는 아가씨가 고개를 돌려 말을 걸었던 거다. 난 루저라고. (96쪽)


‘요즘은 자꾸 빨간 게 좋아’서, 2016년 현재 여당마저도 빨간 옷을 입고 다닌다. 하지만 여전히 어떤 색맹들께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렇게 말한다. 종북, 종북, 종북. 정신의 딸꾹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131∼132쪽)



  재미나면서도 의뭉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권혁웅 님은 2016년 오늘날 ‘빨갛게 물든 옷’을 입고서 허리를 깊게 숙여서 절을 하는 여당 정치꾼 이야기를 살며시 섞습니다. 왜 한입으로는 ‘빨갱이’나 ‘종북’을 외치면서, 왜 한손에는 ‘빨갱이 옷’을 걸치고 ‘빨갱이 깃발’을 펄럭일까요? 참말로 “정신의 딸꾹질”이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런 딸꾹질은 어쩔 수 없는 우리 사회 모습일는지 몰라요. ‘차카게 살자(착하게 살자)’ 같은 말이라든지 ‘바르게 살기’ 같은 말은 착함이나 바름하고는 동떨어진 자리에서 흔히 쓰이거든요. 착하게 살기로 하지 않으면서 ‘착함’을 외치는 사회요, 바르게 살지 않으면서 ‘바름’을 사람들한테 윽박지른 정치이니까요.



〈우정의 무대〉는 우리 사회의 모순들을 모아서 만든 이상한 극장이다. 프로그램 제목이 내세우는 덕목은 ‘우정’이며, 사회자가 경례할 때 내세우는 구호는 ‘충성’인데, 무대 위의 공연이 보여주는 콘셉트는 ‘섹시’이고, 하이라이트 장면에서 요구되는 감정은 ‘모성애’다. 거기에 홍보 영상 속 사병들이 내보이는 저 눈빛은 적의 어떤 도발에도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살기’다. (224∼225쪽)



  어제 낮에 큰아이하고 밭뙈기를 일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학교에서 반장 선거를 할 적에 으레 ‘1등이 반장’이라면 ‘2등이 부반장’을 맡습니다. 반장 선거는 다른 말로는 ‘부반장 선거’이기도 해요. 그리고, 이 선거에 나온 모든 아이들이 으레 ‘총무부장’이든 ‘청소부장’이든 뭔가 하나씩 맡기 마련이에요.


  이런 얼거리처럼 나라에서도 국회의원이나 대통령이나 시장이나 군수를 뽑을 적에 ‘1등만 뽑지’ 말고, 2등도 3등도 4등도 모두 나라살림을 함께 맡도록 자리를 나눈다면 어떠할까 싶더군요. 이를테면 51:49로 한 사람이 붙고 한 사람이 떨어진다고 생각해 보셔요. 51로 붙은 사람만 일을 하기보다는, 51인 사람은 ‘반장’ 노릇을, 49인 사람은 ‘부반장’ 노릇으로 서로 도우면서 일을 할 적에 나라살림이 아늑하면서 다툼도 가시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어요.


  가만히 본다면 오늘날 선거는 민주 제도이기는 하지만 다른 모습으로는 ‘1등 뽑기’이기도 합니다. 1등이 아니면 아무것도 안 되고 말아요. 우리 사회가 보이는 모습은 바로 ‘1등주의’에 ‘성적주의’에 ‘경제개발주의’이거든요.


  먼저 심은 씨앗도 나중 심은 씨앗도 함께 돋고, 오늘 심은 씨앗도 어제 심은 씨앗도 모두 돋아요. 어버이도 씨앗을 심고 아이들도 씨앗을 심어요. 함께 기쁨으로 짓는 살림이 되고, 서로 사랑으로 나누는 말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오늘도 아이들하고 밭을 더 일구려 합니다. 시골은 온통 봄일로 바쁜 사월 한복판입니다. 바쁜 봄철이라서 국회의원 뽑는 일은 ‘미리’ 느긋하게 했습니다. 2016.4.11.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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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쿠스 모르티스 -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
리 호이나키 지음, 부희령 옮김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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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4



‘주류 의학’이 아닌 ‘함께 죽는 삶벗’ 바라보기

― 아미쿠스 모르티스

 리 호이나키 글

 부희령 옮김

 삶창 펴냄, 2016.3.21. 22000원



  봄에 밭에서 남새를 뜯습니다. 이웃 할머니가 시금치밭에서 시금치를 솎으실 적에 살짝 거들면서 시금치를 뜯기도 하고, 갓김치를 담그려고 우리 집 밭에서 맨손으로 갓잎을 훑거나 뿌리까지 알뜰히 뽑기도 합니다. 통째로 먹을 남새나 풀이라면 뿌리까지 뽑습니다. 씨앗을 받을 생각이라든지, 나중에 잎을 더 훑을 생각이라면 잎만 뜯습니다.


  밭에서 시금치나 갓을 솎을 적에, 또 쑥을 뜯거나 봄나물을 할 적에, 우리가 먹을 만큼 솎거나 뜯는데, 다친 잎이나 벌레가 많이 먹은 잎은 그 자리에서 바로 흙바닥에 내려놓습니다. 이러면 이 잎은 며칠 뒤에 바짝 시들어 바스락거리고, 며칠 더 지나면 어느새 조각조각 부스러지면서 천천히 흙으로 돌아갑니다. 생생하고 통통한 잎은 헹구고 손질해서 나물이나 김치로 바뀌어 밥으로 삼고, 시들거나 벌레 많이 먹은 잎은 저희가 처음 태어난 흙으로 돌아가면서 새로운 흙으로 바뀝니다.



누군가의 아버지나 할머니 혹은 어떤 이름으로 불렸던 개인들이 이제 장수의 추상적인 표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통계 숫자들이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무도 이 잔인한 범죄들을 보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모두가 연루되어 있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부분적으로 눈이 멀었다. 대부분 산업에 의존해서 살아가야 하므로 죄책감을 나눠 갖고 있다. 산업이라는 과학을 믿고, 산업에 의해 만들어진 생산품을 사거나 먹고, 산업에서 얻어지는 이윤으로 부유해진다. (22쪽)



  리 호이나키 님이 쓴 《아미쿠스 모르티스》(삶창,2016)를 읽습니다. 미국에서 2006년에 “Dying is not death”라는 이름으로 처음 나왔다고 합니다. 리 호이나키 님은 1928년에 태어나서 2014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해요. 낯선 외국말로 붙은 책이름은 이반 일리치 님이 한 말에서 새로 따왔다고 하는데, ‘아미쿠스 모르티스(amicus mortis)’는 “죽음을 함께 맞이하는 친구”를 가리킨다고 해요.


  다시 말해서, “죽는 때는 죽음이 아니다(Dying is not death)”를 밝히는 도톰한 이 책은 “죽음을 함께 바라보고 함께 맞이하면서 함께 흙으로 돌아가는 벗(아미쿠스 모르티스)”이 어떠한 삶인가를 돌아보려고 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당신은 당신 앞에 있는 남자를 보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그는 환자라는, 일반화되고 단정적이며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30쪽)


이 특화된 현대적 형태의 악마성으로부터 어떻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킬 것인가? 나는 사랑이 가득한 친밀함의 실천에 그 해답이 있다고 믿는다. 이것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일이다. 보는 법과 듣는 법을 배워야 하는 일이다. 다른 사람에 대해 알고, 미묘한 의도를 알아차리는 습관이 필요한 일이다. (42쪽)



  리 호이나키 님은 《아미쿠스 모르티스》라는 책에서 여러 사람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리 호이나키 님을 둘러싼 아버지하고 동무를 이야기하고, 병원에서 마주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오랜 마음벗인 이반 일리치 님 이야기도 꽤 길게 다룹니다.


  그런데, 리 호이나키 님이 병원에 찾아가서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괴로워’ 보였다고 해요. 틀림없이 ‘가장 전문’이라고 할 의사와 간호사가 이들 ‘환자’를 다루는데, ‘사람’이 아닌 ‘환자’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누구라도 참으로 괴롭게 그곳에 머물면서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는 몸이 된다고 해요.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사람들은 ‘환자’이기 때문에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피뽑기 검사’도 날마다 으레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병원에서는 날마다 통계를 마련해야 하고, 병원에서 의사나 간호사가 이러한 통계를 마련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 환자가 죽고 나서’ 보험회사에서 따진다고 해요. 병원에서 첨단설비와 의약품으로 꾸준하게 ‘처방한 기록’이 있지 않다면, ‘환자가 죽은 뒤’에 의사는 고소나 고발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주류 의학은 암에 대해 오직 세 가지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것을 제거하거나(수술), 태워 버리거나(방사선 치료), 혹은 독살(화학 요법)하고자 한다. (81쪽)


나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라이시엄에서 걸어 다니면서 가르쳤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157쪽)


사람들 하나하나는 반드시 이렇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누가 나의 조상인가? 사람마다 대답이 다를 것이다. (180쪽)



  《아미쿠스 모르티스》는 죽음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되새깁니다. 리 호이나키 님을 비롯한 사람들이 병원에 찾아갈 적에는 ‘아버지’를 만나거나 ‘벗’을 만나러 가지만, 병원에서는 ‘환자’라는 이름만 쓴다고 해요. 다시 말해서, 병원에서는 ‘환자라는 이름으로 날마다 질병 상황을 통계로 정리한 몸뚱이’를 바라볼 뿐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이리하여, 리 호이나키 님은 “눈을 뜨고 귀를 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옛날부터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적에 ‘학생을 책상맡에 앉히’지 않고 ‘함께 걸어 다니면서 가르치고 배웠다’고 하는 대목을 떠올립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추고 생각에 잠깁니다. 오늘날 우리는 학교라는 곳에 ‘학생을 책상맡에 앉히’기만 합니다. 강의나 교육을 하는 자리도 으레 이와 같아요. 가르치는 사람 혼자 강단에 서서 떠듭니다. 학생이 되는 사람은 책상맡에 얌전히 앉아서 듣기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얼거리’가 아니라 ‘책상물림이 되는 얼거리’라고 할 만해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스스로 세계의 시스템을 통제하거나 변화시키는 활동을 하지 못하리라고 가정한다. 시스템은 단단히 자리를 잡은 채 보통 사람들처럼 충성하지 않으려면 묵인하라고 요구한다. (244쪽)


우리는 건강이라고 불리는 추상적 개념에 집중하게 하는 뉴스와 호소와 유혹과 요구의 공격을 받는다. 이러한 선동은 많은 부분 다양한 의료 시스템에서 나오며, 우리의 두려움과 허영심에 호소한다. 건강에 ‘필요한’ 것들은, 시험해 보니, 그저 더 많이 소비하도록 부추기기 위한 강매나 은근한 설득에 의한 판매 전략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263쪽)



  책상맡이 아닌 들판에서 함께 가르치고 배우는 얼거리가 아름다운 학교가 될 수 있을까요? 병원 침대맡이 아닌 ‘보금자리와 마을’에서 함께 돌보고 아끼면서 삶을 마감하는 길로 가도록 하는 ‘병 다스리기’를 할 수 있을까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처방’이나 ‘치료’라는 한자말은 현대의학이 나타나면서 쓰는 낱말입니다. 예부터 이 나라에서는 ‘돌보다’나 ‘보살피다’라는 말을 썼어요. 병을 앓거나 다친 사람을 ‘똑같은 한집안 사람’으로 두고 함께 먹고자고 지내면서 돌보거나 보살폈어요. 함께 바람을 마시고, 함께 햇볕을 쬐며, 함께 밥상을 받으면서 병을 다스리거나 달랬어요.


  리 호이나키 님은 이녁 벗님인 이반 일리치 님이 ‘병을 한몸으로 맞아들여서 지내는 삶’을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죽음하고 삶’이 얼마나 다른가를 생각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가까운 살붙이하고 동무가 ‘삶을 내려놓고 죽음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바라보면서 ‘죽음이 아닌 죽음’하고 ‘삶이 아닌 삶’은 무엇인가 하고 깊이 헤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일요일과 죽은 이를 추모하는 예배의식을 경험하면서 나는 찬양에서 중요한 것은 모든 감각들을 집중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달았다.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403쪽)



  배움은 무엇이 배움일까요? 아픔은 무엇이 아픔일까요? 돌봄이나 보살핌은 참뜻이 무엇일까요? 병원이나 의사가 잘못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병원이나 의사가 바라보는 곳이 너무 한쪽으로 좁게 쏠리지 않았느냐 하고 묻는 《아미쿠스 모르티스》이로구나 싶습니다. 겉치레를 벗고 속을 가꾸는 길일 때에 비로소 ‘삶’이고 ‘죽음’이지 않느냐 하고 묻는 《아미쿠스 모르티스》라고 느낍니다.


  날마다 아침저녁을 차리면서 밥찌꺼기는 으레 흙한테 돌려줍니다. 곧 매화 열매가 익어서 매화 열매로 효소를 담글 적에도 열매를 손질하고 남은 것은 모두 흙한테 돌려줍니다. 남새를 헹구며 나오는 흙물도 밭에다가 돌려줍니다. 밭에서 거둔 옥수수를 삶아서 먹은 뒤에도 옥수숫자루는 흙한테 돌려주어요. 흙에서 얻어서 몸을 살리고, 몸을 살리면서 몸밖으로 나온 것은 흙한테 돌려줍니다. 함께 살기에 함께 삶을 짓고, 함께 삶을 지으면서 이곳에서 서로 돌보는 사이로 지냅니다. 2016.4.8.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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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의 위대한 단독 비행 살림 YA 시리즈
로알드 달 지음, 퀀틴 블레이크 그림 / 살림Friends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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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3



하늘도 날고, 비행기와 휘발유까지 거저라니!

― 로알드 달의 위대한 단독 비행

 로알드 달 글·사진

 퀸틴 블레이크 그림

 최지현 옮김

 살림Friends 펴냄, 2016.3.30. 11000원



  하늘을 날아오를 적에 어떠한 느낌인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은 마당에서 두 손을 맞잡고 빙빙 돌려 주면 무척 좋아해요. 몸이 바닥에서 붕 뜬 채 ‘낮기는 해도’ 하늘을 날거든요. 어른이 어른 손을 맞잡고서 ‘하늘돌리기’를 하기는 쉽지 않지만, 어른이 아이 손을 맞잡고서 하는 ‘하늘돌리기’는 아주 가뿐해요.


  마당에서 두 아이를 하나씩 하늘돌리기로 바람을 가르도록 해 주면서 가만히 내 어릴 적을 돌아봅니다. 살갑고 상냥한 어른이 하늘돌리기를 해 주면 무척 신납니다. 찌릿찌릿 온몸이 새롭게 깨어나는 느낌입니다. 짧은 동안이지만 이렇게 바람을 가르면서 생각해 보곤 해요. 어른 손에 기대어 바람을 가르며 하늘을 날지 않고, 내 힘만으로 홀가분하게 바람을 가르면서 저 하늘을 날 수 있으면 얼마나 신날까 하고요.



“대머리인 게 나쁜 건 아니에요.” 내가 말했다. “난 네 생각을 묻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약속하라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게요. 약속해요.” (32∼33쪽)


“무솔리니가 아비시니아를 점령하려고 수십만의 군대를 그곳에 보냈죠. 이제 그 군인들을 즐겁게 해 주려고 이탈리아 여자를 배에 실어 보내는 거요.” “농담이시겠죠.” “저렇게 잔뜩 실어 날라서 일반 사병들 모두에게 여자 한 사람씩, 그리고 대령에게는 두 사람씩, 장군에게는 세 사람씩 배당하죠.” “제발 농담 좀 그만해요.” “정말 저들은 군인에게 보내지는 거예요. 아무 의미도 없고, 근거도 없는 전쟁이죠. 군인은 모두 전쟁을 싫어해요. 비참한 아비시니아 사람들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데 신물이 나 있어요. 그래서 무솔리니가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고 여자들 수천 명을 보내는 거요.” (39∼40쪽)



  로알드 달 님이 갓 스무 살을 넘길 즈음 겪은 일을 재미나면서 아기자기하게 담아낸 이야기책 《로알드 달의 위대한 단독 비행》(살림Friends,2016)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로알드 달의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2010)하고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발칙하고 유쾌한 학교》는 로알드 달 님이 1920∼30년대에 학교를 다니면서 영국 학교가 얼마나 무시무시하고 끔찍했는가 하는 대목을 ‘발칙·유쾌’라는 말마디로 에둘러서 그린 이야기라면, 《위대한 단독 비행》은 1930∼40년대에 아프리카로 가서 일을 하다가 전쟁통에 갑자기 군인이 되고 비행기 조종사가 되어 겪어야 했던 삶을 ‘위대·단독’이라는 말마디로 간추려서 그린 이야기입니다.


  그나저나 로알드 달 님은 왜 ‘위대’랑 ‘단독’이라는 이름을 넣어서 ‘공군 조종사’ 삶을 이야기했을까요? 이 이야기는 《천재 이야기꾼 로알드 달》(2012)이라는 평전에서 아주 낱낱이 다루는데, 영국에서 아프리카로 가는 배에서 겪은 일이라든지, 아프리카에서 처음 만난 ‘노예(하인)’라든지, 아프리카에서 마주친 뱀이나 사자라든지, 더욱이 독일하고 영국 사이에 전쟁이 불거지면서 ‘군사훈련을 한 번도 받은 적이 없이 총자루를 손에 쥐’고는, 그동안 그냥 이웃으로 지내던 독일사람을 ‘전쟁포로’로 사로잡아야 하는 일을 ‘위대’하면서 ‘단독’으로 해내거나 치러야 했습니다.



요리사가 아내에게 먼저 다다랐고 이어서 로버트 샌포드와 내가 차례로 도착했다. 난 도무지 내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자의 끔찍한 이빨이 여자의 허리와 배를 두 동강으로 찢어 놓았을 거라 생각했는데 여자는 땅에 앉아서 요리사 남편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던 것이다 … “없어요, 브와나. 사자는 제가 마치 새끼라도 되는 것처럼 가볍게 물고 여기까지 왔어요. 하지만 옷은 빨아야겠어요.” (61, 62쪽)


“모두 소탕해 버려. 기관총이 있지 않나? 기관총 하나가 소총을 가진 500명을 쳐부술 수 있지.” 나는 점점 긴장했다. 난 포르투갈령 동아프리카로 이어진 먼지 나는 연안도로에서 500명의 시민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여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있으면 어떻게 하죠?” “재량껏 처리해야겠지.” 대위는 논쟁을 피하고 있었다. (87쪽)



  로알드 달 님은 어찌저찌 독일 ‘시민’을 전쟁포로로 잡습니다. 죽을 고비까지 아슬아슬하게 넘기면서 ‘첫 임무’를 가까스로 마칩니다. 이런 뒤 공군으로 자원했고, 차근차근 훈련을 받아서 ‘공군 부대’로 갑니다. 그런데 로알드 달 님은 손수 전투기를 몰고 부대로 가는 길에 헤매지요. 아니, 길을 잃어요. 사막 한복판에 그만 처박힙니다. 전쟁터로 가서 싸우기도 앞서 그만 혼자 죽을 고비에 빠집니다.


  수술을 받고 몸을 다스리면서 여섯 달을 더 기다린 끝에 비로소 부대로 들어가는데, 공군 조종사 로알드 달이 간 곳에 있는 영국 전투기는 열 몇 대뿐입니다. 열 몇 대뿐인 영국 전투기는 수백 대나 수천 대에 이르는 독일 전투기하고 맞서서 싸워야 합니다. 전투기도 조종사도 워낙 적은 탓에, 하늘에서 그냥 죽든지 아니면 그냥 몸바쳐서 이슬로 사라지든지 해야 하지요. 열 몇 대뿐인 전투기로는 함께 작전임무를 하지 못합니다. 늘 혼자 움직이면서 여러 대나 수십 대에 이르는 독일 전투기하고 맞붙어야 합니다. 참말로 ‘위대’한 ‘단독’ 비행인 셈이지요.



단독 비행을 한 후 나는 허가를 받고 짧은 시간을 혼자 비행할 수 있었다. 정말 아름다운 비행이었다. 케냐 같은 아름다운 나라의 하늘을 씽씽 솟구쳐 오르며 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은 운 좋은 젊은이가 얼마나 있을까. 난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묻고 또 물었다. 심지어 비행기도, 휘발유도 공짜고 말이다! (122쪽)



  쉽게 헤아려도 으레 1:50으로 싸우는 셈인데, 로알드 달은 갓 스물 나이에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 ‘죽겠다는 생각’이 아니라 ‘이 멋지고 아름다운 하늘’을 혼자서 마음껏 날 수 있으니 얼마나 재미있고 기쁜가 하고 생각했다고 해요. 키가 몹시 커서 조종칸에서 늘 구부려 앉아야 했고, 때로는 다리에 쥐가 났다고 하지만, 홀로 하늘을 가르면서 바라보는 아프리카나 그리스 하늘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다고 해요.


  ‘천재 이야기꾼’은 이런 바탕에서도 태어났겠구나 하고 느껴요. 소름이 돋도록 무섭고 끔찍한 학교에서 어린 나날을 보내야 한 뒤, 감옥 같던 학교에서 풀려나 아프리카를 누비고 ‘사람 잡는 사자’하고 ‘사람 잡는 큰 뱀’을 보다가 ‘전투기 조종사’로 혼자서 하늘을 가르는 동안 젊은이 가슴에는 어마어마한 꿈이 피어났으리라 느껴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던 로알드 달 님은 “심지어 비행기도, 휘발유도 공짜!”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대요. 얼마나 “운 좋은 젊은이!”인가 하고 외쳤대요.



난 아직 어리고 비현실적인 구석이 있어서 이 그리스에서의 탈출이 멋진 모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거다. 이 나라를 살아서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살아서 나가지 못할 거란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 와 돌이켜보니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173쪽)


독일 전투기들은 그 수가 너무 많아 종종 서로에게 방해가 되는 게 분명했다. 반면 우리는 수가 적어서 오히려 많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 햇살이 반짝이고 비행장 풀밭에는 야생화가 활짝 피어 있었다. 이 아름다운 땅을 다시 볼 수 있다니 얼마나 운이 좋은가, 난 생각했다. (205쪽)



  《로알드 달의 위대한 단독 비행》에 나오는 대로, 영국 공군은 전투기가 몇 대 없었습니다. 마지막 ‘하늘싸움’에서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리스 전선 영국 전투기’ 열 대 남짓이 오백 대가 넘는 독일 전투기하고 함께 맞붙었다고 합니다. 비행기 몸통에 총알 구멍이 수없이 박혔어도 로알드 달 님은 살아남았다고 합니다. 총알하고 기름을 다시 채우고 구멍을 새로 메운 뒤에 끝없이 다시 오르고 또 오르면서 하루 내내 하늘싸움을 했다는데, 이동안 독일 전투기를 몇 대 떨어뜨렸는지 알 길은 없지만(셀 겨를이 없었겠지요), 그 하늘싸움에서 용하게 살아남은 몇 사람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때 그 아슬아슬한, 살이 떨리는 고빗사위를 글줄로 찬찬히 풀어놓습니다.


  살아남았기에 쓸 수 있는 글입니다. 살아남았기에 그무렵을 떠올리면서 쓸 수 있는 글이에요. 무엇보다도 ‘그냥 살아남’지 않고, ‘위대한 단독 비행’을 언제나 기쁘게 맞아들이면서 눈부신 하늘과 땅을 마음껏 마주할 수 있었기에 쓸 수 있는 글입니다.


“뭔가를 간절히 원하면 그리고 뭔가가 간절히 필요하면 얻게 되는 법이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 일어서더니 내 등을 철썩 때렸다.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군요. 하지만 당신은 좋은 사람이에요. 당신은 자유를 위해 싸우고 있으니까요. 나도 마찬가지예요.” (268쪽)


버스는 아직도 100야드 밖에 있는데 어머니가 보였다. 어머니는 대문 밖에서 버스가 오기를 조바심 내며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아는 한 어머니는 아마도 한두 시간 전부터 버스가 지나는 것을 보며 그곳에 서 계셨을 것이다. 3년이나 기다렸는데 한 시간 아니, 세 시간이라 한들 뭐가 문제겠는가? (281쪽)



  아프리카에서 일하다가 공군 조종사가 되어 ‘어머니가 사는 나라’하고는 세 해 즈음 떨어져서 지냈다고 합니다. 이야기책 《로알드 달의 위대한 단독 비행》 마지막에는 어머니한테 찾아가는 모습이 흐릅니다. 세 해를 기다린 어머니한테 세 시간이 뭐가 대수롭겠느냐 하고 적는 글 한 줄이 덤덤합니다. 덤덤할 수 없을 테지만 덤덤합니다.


  스스로 연 꿈길이기에 덤덤하게 글로 풀어내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사자한테 잡아먹힐 뻔한 사람을 본 다른 사람이라면 ‘무서워서 아프리카에서 일 못 한다!’고 할 만해요. 커다란 뱀이 사람을 집어삼키려는 모습을 코앞에서 지켜본 다른 사람이라면 이때에도 ‘무서워서 그런 곳에 어떻게 있느냐!’ 하고 말할 만합니다. 어제까지 민간인이던 이웃을 총으로 윽박질러서 전쟁포로로 삼으라고 하는 명령을 받을 적에도, 1:50이라는 터무니없는 숫자로 싸워야 하는 공군 조종사 노릇도, 어느 눈길로 보면 ‘말도 안 되고 끔찍하며 괴로운 삶’으로 여길 만합니다.


  그렇지만 로알드 달 님은 이런저런 모든 일을 덤덤하게 받아들입니다. ‘새로운 길’로 여깁니다. 삶을 새롭게 겪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투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동안 ‘적군 비행기를 쏘아 맞히지 못하면 내가 하늘에서 떨어져 죽어야 하는 노릇’이지만, 로알드 달 님은 이런 생각보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하늘과 땅’을 먼저 보고 오래 생각하면서 마음에 담아요.


  꿈길을 걷듯이 하루하루 맞이하기에 새롭게 살아갈 수 있었다고 할 만합니다. 꿈길을 보듯이 하루를 ‘기쁨과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보았기에 언제나 씩씩하게 허리를 펴면서 활짝 웃는 몸짓으로 재미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조금이라도 ‘지겹거나 괴롭거나 고단한 눈’이었다면 천재 이야기꾼도, 《로알드 달의 위대한 단독 비행》 같은 책도 태어나지 못했으리라 하고 느낍니다. 2016.4.6.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 사진은 살림프렌즈 출판사에서 보내 주어서 함께 붙일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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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 영어는 없었다 - 영어와 프랑스어의 언어 전쟁
김동섭 지음 / 책미래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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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8



영국은 셰익스피어가 ‘새 영어’를 일으켰다면

― 영국에 영어는 없었다

 김동섭 글

 책미래 펴냄, 2016.3.10. 14000원



  영어로 된 책을 읽고, 영어로 된 노래를 듣습니다. 요즈음 들어서 아이들하고 함께 영어로 놀이를 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즐길 영화를 살피다 보면 한국에 있는 극장에 걸리지 못한 영화가 무척 많아서, 이런 영화는 영어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말로 나오지 않은 재미나며 훌륭한 그림책도 많아요. 한국말로 나온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아이들하고 보다가도 번역이 그리 알맞지 않다고 느끼기도 하기에, 아예 영어로 된 동화책이나 그림책을 따로 장만해서 읽기도 합니다. 이래저래 저절로 영어를 새로 배우는 어버이가 되면서, 아이들한테도 영어를 즐거운 놀이로 가르칩니다. 무엇보다 신나는 가락하고 섞어서 노래를 부르면 퍽 재미있습니다.



(1066년) 윌리엄의 영국 정복은 문화적으로는 대륙의 프랑스 문화의 유입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정치적으로는 노르망디의 법률과 행정 제도가 영국에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45쪽)


윌리엄 정복 이후 1399년 리처드 2세가 왕위에서 내려올 때까지 프랑스어는 333년 동안 왕의 모국어였고, 헨리 2세(1152년)부터 헨리 6세(1445년)까지 300년 동안 모든 영국의 왕은 프랑스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했다. (57쪽)



  영어로 된 말을 듣다 보면 소릿값을 처음부터 알아차리기 어려운 낱말이 꽤 있습니다. 영어에도 사투리가 있으니 표준 영어가 아니라면 말소리도 다르기 마련일 테지만, 표준 영어에서도 소릿값은 글꼴하고 사뭇 다르다고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왜 이렇게 ‘글꼴하고 소릿값이 다를까’ 하는 수수께끼를 잘 풀지 못한 채, 이 낱말은 그저 이렇게 소리내야 하는구나 하고만 여겼습니다.


  김동섭 님이 쓴 《영국에 영어는 없었다》(책미래,2016)를 읽으면서 영어하고 얽힌 실타래를 찬찬히 돌아봅니다. 《영어의 탄생》(책과함께,2005)이라는 책을 읽으며 실타래를 조금씩 풀었고, 《영국에 영어는 없었다》를 읽으면서 이 실타래를 조금 더 환하게 풀어 봅니다.


  영어는 처음부터 영어였을 테지만, 이웃에서 여러 나라가 영국이라는 곳으로 쳐들어오면서 수많은 ‘다른 말’이 들어왔다고 해요. 영국이라는 곳으로 쳐들어온 ‘숱한 다른 겨레’는 ‘다른 겨레가 쓰던 말’을 영어에 남겼고, 이러한 흐름은 ‘프랑스말을 쓰는 겨레’가 11세기부터 수백 해에 이르도록 그곳을 정치 권력으로서 다스리면서 영어는 더욱 크게 달라졌다고 합니다.



노르만 정복 이후 노르만 방언을 통해 영어에 들어온 새로운 철자는 x, q, z였는데, 이 철자들은 고대 프랑스어에서 사용되던 철자였다. (66쪽)


영국 왕실에 시집을 온 프랑스 공주들은 많은 식솔을 데리고 도버 해협을 건넜다. 그중에는 요리사, 재단사, 유모, 침모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프랑스 하인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대개 영국 사회에서 상류 계층의 문화적 활동에 관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모국어, 즉 프랑스어 어휘들이 자연스럽게 영어에 들어갔을 것이다. (81쪽)



  1066년 뒤로 수백 해에 걸쳐서 영국이라는 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말이 두루 쓰였다고 합니다. 첫째, 이 나라를 이루는 바탕이 되는 여느 사람들, 이른바 땅을 갈고 시골살이를 누리는 수수한 사람들은 ‘그냥 영어’를 씁니다. 둘째, 이 나라에서 정치 권력이나 문화 권력을 거머쥔 사람들은 ‘프랑스말’을 씁니다. 셋째, 행정이나 종교나 법에서는 ‘라틴말’을 씁니다.


  이러한 얼거리가 무척 오래도록 이어졌다고 하는 영국이에요. 이러는 동안 수많은 프랑스말이 영어로 흘러들었다고 합니다. 영국하고 프랑스 사이에 백년전쟁이 벌어지면서 이 흐름은 수그러들었다는데, 백년전쟁이 끝난 뒤 영국이 바닷길을 뚫어 다른 여러 나라로 손길을 뻗는 동안, 이제는 ‘또 다른 새로운 나라와 겨레’에서 쓰는 말을 영어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영국은 백년전쟁을 통하여 귀중한 교훈을 하나 얻었다. 자신들은 브리튼 섬의 영국인이고, 자신들의 모국어가 프랑스어가 아닌 영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159쪽)


셰익스피어와 초서는 영어를 문학어로 부활시켰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초서는 수백 년 간의 프랑스 지배에서 영어를 독자적인 문학 언어로 독립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는 반면, 셰익스피어는 새로운 영어 어휘와 표현을 통해 ‘셰익스피어 영어’를 만들어 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164쪽)



  바깥으로 본다면, 영어는 어떤 말이든 저희 품으로 받아들이거나 껴안은 셈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도 그럴 까닭이 ‘영국에 없는 삶이나 살림’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영국에 없는 말’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나 겨레에서 쓰는 말’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렇지만 영국 영어는 ‘다른 나라 말’이나 ‘다른 겨레 말’을 무턱대고 받아들이기만 하지는 않습니다. ‘셰익스피어 영어’가 일어났듯이, 영국사람 스스로 ‘새로운 영어’를 지어서 ‘새로운 삶과 살림’으로 나아가는 길도 씩씩하게 열었다고 해요. 셰익스피어가 나타나기 앞서는 다른 나라나 겨레에서 ‘다른 말’을 곧이곧대로 영어로 받아들여서 썼을 뿐이라 한다면, 셰익스피어가 나타난 뒤에는 ‘새로운 삶과 살림’을 바로 ‘영어로 스스로 짓는 슬기로운 생각’을 빛냈다고 합니다.



영어 어휘 중에서 빈도수가 가장 높은 단어들은 대부분 영어 고유어에서 유래한 말들이라고 한다. 하지만 빈도수가 적을수록 프랑스어의 비율은 거의 절반에 이른다. 이런 현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용자도 일상생활에서는 대부분 고유어들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한다. 하지만 전문 분야, 특히 학문과 예술 등의 전문 분야에서는 한자어가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188쪽)



  《영국에 영어는 없었다》를 쓴 김동섭 님은 책 끝자락에서 한국말 이야기를 살짝 들려줍니다. 한국에서 한국사람은 ‘여느 말(일반 의사소통)’은 수수한 한국말로 쓰지만, 문화나 정치나 학문이나 교육이나 종교나 …… 이런저런 자리로 가면 으레 한자말로 쓴다고 이야기해요.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아이들한테 ‘어려운 한자말’을 쓰는 어버이는 드물거나 없다시피 해요. 그런데, ‘우리 집 아이’가 아닌 ‘학교에 있는 학생’ 앞에만 서더라도 말이 달라지지요. 회사에서 말이 달라지고, 가게에서도 말이 달라져요. 그나마 오래된 저잣거리에서는 수수한 한국말을 쓴다고 할 테지만, 경제나 유통이나 대형할인마트 같은 곳에서는 수수한 한국말이 사라집니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 영어’가 있다고 하지만, 한국에는 ‘어떤 한국말’이 있다고 할 만할까요? ‘박경리 한국말’이나 ‘홍명희 한국말’이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셰익스피어 영어’는 문학에서뿐 아니라 여느 삶자리에서도 두루 쓰는 영어로 퍼진다고 하는데, ‘한국 문학에 나오는 말’은 ‘문학말’을 넘어서 ‘삶말’이나 ‘살림말’로도 퍼진다고 할 만할까요?


  다른 문화나 사회를 일컫는 모든 바깥말을 ‘영국에서는 영어’로만 담아내거나 ‘한국에서는 한국말’로만 담아내야 할 까닭은 없다고 느낍니다. 바깥말도 즐겁게 받아들여서 재미나게 쓸 만합니다. 다만, 스스로 삶과 살림을 가꾸는 자리에서는 나 스스로 새로운 말을 슬기롭게 짓는 생각을 함께 펼칠 수 있어야지 싶어요.


  가만히 보면, 영국 정치를 이루던 이들은 영어가 아닌 프랑스말이나 라틴말을 오랫동안 썼다고 하더라도, 나중에는 ‘수수한 영국사람’이 쓰던 영어로 돌아갑니다. 한국 정치를 이루거나 한국 문화나 학문을 이루는 이들은 오늘날 어떤 말을 쓸까요? 이들은 한국에서 앞으로 어떤 말로 나아갈까요? 2016.3.31.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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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da 2016-03-31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어도 진화하고 변천한다는데 그렇군요. 괜히 세익스피어가 아니네요. 영국이 세익스피어를 높이 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네요. 좋은 소개 고맙습니다. ^^

숲노래 2016-03-31 09:57   좋아요 0 | URL
한국말도 아름답게 거듭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비는 마음이에요.
한국에서도 문학에서만 빛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이 널리 사랑하면서 살림을 북돋울 말이 태어난다면 참 아름답겠지요.
이 책을 pada 님한테 이어 주는 징검다리 구실을 했다면
제가 더 고맙습니다 ^^
 
만화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 만화 7일 만에 끝내기
후쿠에 준 지음, 목선희 옮김 / 살림Friends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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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42



양자역학을 ‘이레’ 아닌 ‘7분’ 만에 끝내기

―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

 후쿠에 준 글

 목선희 옮김

 살림프렌즈 펴냄, 2016.2.28. 9800원



  ‘만화 7일 만에 끝내기’ 가운데 하나로 나온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살림프렌즈,2016)를 읽기 앞서 생각합니다. 양자역학을 이레 만에 끝낼 수 있다고? 그런데 양자역학을 끝내는 데에 이레나 걸리나? 아니, 양자역학을 고작 이레면 끝낼 수 있나?


  양자역학을 다루는 책인 만큼, 나는 두 가지로 생각해 보려 합니다. 양자역학은 이레 만에 끝낼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다가, 양자역학은 이레 만에 끝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이레 만에 끝낼 수 없는 양자역학이라면, 이레가 아닌 일흔 날이 걸려도 끝낼 수 없을 테고, 이레가 아닌 일곱 해가 걸려도 끝낼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거꾸로, 이레 만에 끝낼 수 있는 양자역학이라면, 일곱 시간이면 끝낼 수 있을 뿐 아니라, 일곱 분, 그러니까 ‘7분’ 만에라도 끝낼 만하리라고 생각해 봅니다.



물질을 물리화학적으로 깊이 이해하게 되면서 점차 원자나 분자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26쪽)


지금까지 발견된 많은 증거로부터 내릴 수 있는 유일하게 정확한 관점은 ‘빛은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64쪽)



  사진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사진찍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사진읽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사진을 잘 찍는 데에는 얼마나 걸릴까요? 사진을 잘 읽는 데에는 또 얼마나 걸릴까요?


  어떤 사람은 사진을 마흔 해나 쉰 해를 찍었는데에도 ‘사진을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사진기를 손에 쥔 지 1분이 지났을 뿐인데에도 사진을 그냥 잘 찍습니다.


  살림은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살림을 배우기는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살림을 제대로 익히자면 스무 해나 서른 해는 걸려야 할까요? 두세 해쯤 걸려서 살림을 익히기는 어려울까요? 두어 달 만에 살림을 익힐 수는 없는 노릇일까요? 이틀이나 사흘 만에 살림을 다 익히는 사람은 없을까요?


  흔히 ‘과학’은 어렵다거나 ‘수학’은 괴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과학이나 수학뿐 아니라, 종교도 학문도 다 어렵거나 괴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과학이든 수학이든, 또 살림이든 사진이든, 또 아이키우기이든 밥짓기이든, 또 집짓기이든 뜨개질이든, ‘하루아침에 이루는’ 것은 없을 만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문득 깨달아서 즐겁게 하기도 합니다.



미시 세계에서 전자의 위치나 운동량은 처음부터 관측할 수 있는 물리량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이젠베르크는 원자핵의 주위를 전자가 ‘궤도운동을 한다’는 고전물리학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106쪽)


미시 세계에서는 모든 현상이 근본적으로 불황적적이고 확률적으로 일어나지만 우리가 ‘관측’을 하면 그때마다 무수히 많은 가능성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큰 상태가 결과로 표현된다. (138쪽)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는 일본에서 나온 ‘만화 7일 만에 끝내기’ 꾸러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 일본 한자말이 많이 나옵니다. 양자역학에서 가장 크게 헤아리면서 다루는 낱말인 ‘보다(바라보다)’를 이 책에서는 ‘관측’이라는 한자말로 나타냅니다.


  그러면, 양자역학에서 가장 크게 헤아리면서 다루는 낱말인 ‘보다·바라보다’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내가 보지(바라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거나 하나도 안 이루어진다’를 나타냅니다. 내가 보기에(바라보기에) 비로소 무엇이든 이루어집니다.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내가 볼 적에 어떤 것이든 다 이루어집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이 배울 수 있습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배울 수 없습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학교 문턱을 밟지 못했어도 스스로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수만 권에 이르는 책을 갖다 주어도 하나도 못 배웁니다.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돌이나 나무도 모두 책으로 삼고 스승으로 삼아서 배워요.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책이 아무리 많아도 이녁한테는 그냥 ‘돌이나 나무’와 똑같을 뿐입니다.



빛에너지가 연속적이라면 어두운 곳에서 장시간 노출해야 사진이 찍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별을 바라보아야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짧은 순간에도 별을 볼 수 있다. 이 현상이 바로, 별빛은 에너지 덩어리인 양자로써 아득히 먼 우주 저편에서 날아왔다는 증거이다. 빛이 양자가 아니었다면 우리 인간은 밤하늘의 별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146쪽)


우주와 시공간이 탄생했을 때 모든 입자의 질량은 제로0였다. 물질입자도, 매개입자도 모두 광자와 같았다. 우주가 팽창하고 온도가 내려가면서 시공간과 물질입자 그리고 매개입자가 나뉘어졌다. (200쪽)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는 양자역학이 태어나기 앞서 서양 과학이 어떻게 흘렀고, 고전물리학이 어떻게 퍼졌는가 하는 대목을 넓게 다룹니다. 그리고 이 책이 일본에서 나온 만큼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과학자’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서양에서 나오는 양자역학 책에서는 구태여 ‘일본 과학자’ 이야기를 이 책처럼 자주 길게 다루지는 않아요.


  그렇다고 일본 과학자를 몰라도 된다는 뜻이 아니고, 일본 과학자 가운데 훌륭한 이들 발자취를 몰라도 된다는 뜻 또한 아니에요. 이 책이 ‘일본에서 일본 어린이’ 눈높이에 맞추어서 나온 터라, 일본 물리학자 이야기가 자주 많이 나올 수밖에 없을 뿐입니다. 양자역학을 배우는 길잡이책으로서 알차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이 대목에서는 ‘그냥 번역만 하기’에는 좀 아쉽다고도 할 수 있어요. 왜 그러한가 하면, 일본 어린이는 이 책에서 다루는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과학자’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저 훌륭한 사람처럼 물리학자(과학자) 꿈을 키워야지’ 하는 생각을 북돋울 만합니다만, 부록이나 붙임말로 따로 ‘한국 물리학자’ 이야기라든지, ‘양자역학과 얽혀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온누리 모든 과학자’ 이야기를 알려주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관측하기 전에는 모든 가능성이 더해진 상태지만, 관측을 하면 무한한 가능성 중 각 상태의 확률 크기에 따라 단 하나의 상태만이 선택되는 것이다. (214쪽)



  그러고 보면, 이 책이 아무리 일본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일본 글쓴이 스스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과학자’ 이야기는 부록으로 밀고, 몸글에서는 ‘양자역학 알맹이를 더 깊이 다루는 데’에 마음을 쏟지 못했다고도 할 만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인슈타인이 끝까지 외친 말, “사랑하는 하느님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라는 말만 다룰 뿐, ‘고전물리학’을 버리고 새로운 물리학인 양자물리학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이 외친 말은 다루지 못합니다. 아인슈타인과 논쟁을 오랫동안 하면서 고전물리학을 버리고 양자물리학으로 나아간 이들은 1920년대부터 “하느님이 이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실 것인가를 지시하는 것은 우리들의 과제가 될 수 없습니다(하이젠베르크 쓴 《부분과 전체》 110쪽)” 하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머잖아 “하느님은 주사위를 던진다”는 대목을 깨닫지요. 오늘날 양자역학 이론에서는 “하느님은 주사위놀이를 매우 자주, 아니 늘 즐긴다” 하고도 말합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주사위놀이’에서 ‘주사위’란 ‘생각(이론)’입니다. ‘놀이’란 ‘삶(실험·경험)’이고요. 생각을 하나 내놓으면(주사위를 던지면, 또는 이론을 세우면), 이 생각(주사위·이론)에 따라서 어떤 일이 생기고(삶이 이루어지고, 또는 경험을 하고), 이 생각에 따라서 생기는 어떤 일을 보면(관측·관찰)서, 새로운 이야기(결과·실험결과)가 태어나요.


  이러한 양자역학 원리를 쉬운 말로 다시 간추리자면, ‘내가 어느 한 가지를 생각하기에 나는 스스로 내 삶을 새롭게 짓는다’입니다. 내가 어느 한 가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겪지 못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배울 수 있지만,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배울 수 없다고 해요. 배우려고 하는 사람은 ‘한 가지 생각’을 씨앗으로 심기에 삶에서 새로운 일을 겪고, 이 겪음이 바로 배움으로 나아가요. 그렇지만 배우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부터 아무 생각이 없기에 수많은 일을 겪더라도 그 수많은 일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자꾸 똑같은 일(경험)만 되풀이하는 얼거리가 된다고 합니다.



‘관측’이라는 행위를 할 때, 혹은 양자역학적인 ‘선택’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능한 모든 우주가 관측 시점으로부터 나뉘어, 이 모두가 실제로 존재하는 우주가 된다는 것이다. (220쪽)



  이제 《양자역학 7일 만에 끝내기》를 덮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양자역학을 이레 만에 떼든 안 떼든 대수로운 일은 아니라고 느껴요. 양자역학을 이레 만에 떼어도 좋고 안 떼어도 좋습니다. 다만, 양자역학에서 밝히면서 들려주려는 이야기는 깊고 넓게 곰삭이고 싶습니다. 우리 집에서 우리 아이들을 기쁘게 사랑하려는 숨결로 하루를 새롭게 짓자고 하는 생각을 씨앗으로 심고 싶어요. 그래서 나는 이 씨앗을 즐겁게 바라보면서 내 삶을 새롭게 겪고, 아이들이 씩씩하고 곱게 자라도록 곁에서 지켜보고 보살피면서, 이 결에 맞추어 새로운 이야기가 무럭무럭 태어나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러니까 마치 ‘주사위놀이를 하는 하느님’처럼 ‘삶을 짓는 바탕이 되는 생각을 늘 즐겁게 씨앗으로 심는 어버이’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관측하기에 결과가 생긴다’는 이론처럼, ‘생각하기에 삶이 태어난다’고 하는 얼거리를 슬기롭게 헤아리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마음이에요. 즐겁게 내 길을 고르고(선택), 즐겁게 내 삶을 바라보며(관측), 즐겁게 내 살림을 짓는(결과) 하루가 되기를 꿈꾸면서 아이들하고 웃음꽃을 피우려 합니다. 2016.3.30.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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