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움직이는 수학개념 100
라파엘 로젠 지음, 김성훈 옮김 / 반니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248



신문배달부가 ‘빠른 길’을 찾아서 다니기

―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개념 100

 라파엘 로젠 글

 김성훈 옮김

 반니 펴냄, 2016.3.29. 15000원



  얼마 앞서 나무 한 그루를 옮겨서 심으려 하면서 감나무 뿌리 곁에서 잠자던 굼벵이를 보았어요. 그 뒤로 당근을 심거나 옥수수를 심으려고 호미로 밭을 갈아서 골을 내는데 풀벌레 애벌레가 곳곳에서 나와요. 땅속에서 오래도록 꿈을 꾸는 이 아이들을 건드리지 말아야겠네 하고 생각하며 다시 흙으로 덮어 줍니다. 이러면서 또 한 가지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집 밭에 온갖 벌레가 참 많이 사는구나 하고. 이 많은 벌레들은 어떤 삶을 짓고 싶어서 이곳에 깃드는가 하고.



매미는 소수의 햇수를 바탕으로 하는 주기를 따르기 때문에 그 순간에 다른 동물의 새끼에게 잡아먹힐 확률이 줄어든다. 십칠년매미는 사실상 소수를 자신의 방어 메커니즘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263쪽)


종이접기놀이의 한 가지 매력은 이것이 전통 수학, 특히 기하학을 뛰어넘는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도구 없이 접은 종이만 갖고도 한 각도를 삼등분할 수 있으니까. (37쪽)



  돌돌 말아 놓은 한지를 장만합니다. 아이들하고 읍내로 마실을 가는 길에 읍내 문방구에서 장만합니다. 돌돌 만 한지는 ‘말린 모습’으로는 작고 길쭉하다고 할 만하지만, 말림새를 풀어서 바닥에 펼치면 꽤 널찍합니다. 큰아이가 펼친 한지를 들고 손을 위로 들면 몸이 모두 가려집니다.


  문득 생각해 보면, 예전에는 책을 이처럼 돌돌 말아서 엮기도 했어요. 이러다가 종이를 네모낳게 낱으로 잘라서 실로 묶었어요. 요새는 풀로 붙이는 책이 많이 나오는데, 저마다 수많은 사람들 슬기하고 생각이 모여서 태어나는 ‘새 모습’입니다. 종이를 둘둘 마는 책도 이대로 재미있고 볼 만하지만, 종이를 낱으로 잘라서 실이나 풀로 엮으면 읽기에 한결 나아요.



우리가 구축한 환경 구석구석에 삼각형이 자주 등장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삼각형은 대단히 안정된 형태라 강도 유지가 필요한 구조물에 이상적이다. (51쪽)


우편배달의 핵심은 우편배달 트럭운전사가 취할 수 있는 최단 경로를 결정하는 과정이다. (127쪽)



  라파엘 로젠 님이 지은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개념 100》(반니,2016)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이란 무엇인가 하고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 책은 수학을 이야기하되 수학 공식이나 이론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니, 수학 공식이나 이론을 이야기하되 ‘숫자와 기호’가 아닌 ‘말’로 이야기해요. 우리가 알거나 모르는 채 여느 삶에서 누리는 ‘수학’을 이야기합니다.


  우체국에서 편지나 소포를 나를 적에 언제나 ‘최단거리’를 따진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다가 생각합니다. 배달부 한 사람만 보면 아무것이 아니라 할 테지만, 전국을 도는 수많은 배달부를 헤아리면, ‘느슨한 배달거리’로 오토바이나 짐차를 몰면 기름값이 어마어마하게 들고 품도 엄청나게 들어요. ‘움직이는 길’을 알맞고 빠르게 줄이면 기름값도 줄어들 테고, 배달을 하는 일꾼도 품이 적게 들어요.


  나는 예전에 혼자 살며 살림을 꾸릴 적에 오래도록 신문배달을 했습니다. 신문배달을 처음 맡을 적에는 구역을 물려받아요. 마을 몇 곳에서 신문을 보는 집이 적힌 주소를 번호를 매겨서 적은 종이꾸러미를 받아서, 이 구역지도에 따라서 신문을 돌리지요. 그런데 이 구역지도는 그때그때 늘고 주는 독자에 따라서 바뀌기도 하지만, 성가셔서 예전대로 그냥 다니기도 해요. 이리하여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오래된 구역지도 그대로 다니면 배달 시간이 더 드는구나 하고요. 신문사 지국에 있는 지적도를 보고, 배달하며 다닌 길을 헤아리면서 나는 내 나름대로 새로운 구역지도를 그려 봅니다. 이렇게 구역지도를 마음속에 새로 그리고 종이로도 옮긴 뒤에 혼자 낮에 자전거를 몰며 이 길을 달리지요. 초시계로 재면서요. 한 구역에 넣는 신문 100부를 어떤 점과 점으로 잇느냐에 따라 때로는 20분이 더 들 수 있고 20분을 줄일 수 있더군요.



선택 가능성을 줄이는 것이 더 나은 교통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개념이 대한민국 서울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활용되고 있다. 2000년대 중반 도심을 관통하는 6차선 고속도로를 허물고 그 자리에 8km 길이의 공원을 만들자, 실제로 교통 흐름이 훨씬 효율적으로 변했다. (160쪽)



  공식을 풀고 이론을 세우는 일도 수학입니다. 공식하고 이론은 생각하지 않지만, 부엌에서 밥을 지으면서 ‘움직이는 길(동선)’을 줄이려고 생각을 기울이는 일도 수학이 된다고 합니다. 더 생각해 본다면, 무엇을 볶을 적에 무엇부터 볶는지, 얼마만 한 크기로 썰어서 볶는지, 불판은 어느 만큼 달구어서 볶는지 살피는 일도 수학이 되겠지요. 이와 함께 화학도 될 테고요. 빵을 구우려고 반죽을 할 적에 무게를 재어 소금하고 효모를 섞는 일도 수학과 화학이 되리라 느껴요.


  우리가 사는 집도 수학이지 않을까요? 해가 떠서 지는 동안 햇볕이 듬뿍 들어오도록 짓는 집도 수학일 테지요. 못을 하나도 안 쓰고 나무를 켜고 잘라서 맞추어서 짓던 살림집도 수학이라 할 테고요. 논밭을 일구면서 열매를 어느 만큼 거두어 몇 사람이 먹을 만하면서 이듬해에 심을 씨앗을 얼마나 남길 수 있는가를 어림하거나 따지는 일도 수학이 되리라 느껴요. 민들레나 박주가리 씨앗이 바람을 타고 날도록 폭신한 날개를 매다는 일도 어느 모로 본다면 수학이지 싶습니다. 제비꽃이 씨주머니를 세 갈래로 터뜨리는 모습도 수학이지 싶고요.


  《세상을 움직이는 수학 개념 100》이라는 책이 들려주는 이야기처럼, 우리 삶은 수많은 수학 개념이 슬기롭게 녹아든 모습이라 할 만하리라 봅니다. 수많은 사람이 빚은 수학 개념이 녹아들고,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새로운 수학 개념으로 살림을 다스리면서 한결 낫거나 즐거운 길을 찾는다고 할 만하지 싶습니다. 2016.5.10.불.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
김태완 지음 / 호미 / 201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52



‘백 손가락 가운데 하나’가 되어 살기

―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

 김태완 글

 호미 펴냄, 2002.12.30. 13000원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은 경쟁이 없던 어린 시절, 배만 부르면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었던 시절, 오로지 앞날의 희망만 있던 시절, 때로 실수를 저지르고 잘못을 해도 너그러운 웃음으로 넘어가던 시절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아닐까? (17쪽)



  동양철학자인 김태완 님은 광주에 있는 지혜학교에서 아이들한테 ‘생각하기(철학)’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김태완 님이 쓴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호미,2012)도 ‘생각하기’를 다룹니다. 이 책은 김태완 님 나름대로 ‘한시 읽기’를 어떻게 하는가를 보여주기도 하는데, 시 한 줄을 놓고 어떤 ‘생각’을 어떻게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한시 번역이나 한시 소개나 한시 강좌는 아닙니다. 한문을 잘 알도록 이끄는 책이 아니고, 한시 역사를 짚도록 이끄는 책이 아닙니다. 문학이나 공부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서 ‘시를 쓴 옛사람 마음’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서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저마다 스스로 짓는 삶을 되새기도록 이끄는 책이라 할 만합니다.



가난에 대한 긍정적 저항정신이라 할까 이런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지금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나중에 내가 성취하는 바가 더 클 테니까! 그리고 내가 일구는 세계는 돈이나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정신의 세계이니까! (124쪽)


농사일을 할 때나 농촌에 살 때는 비가 가끔 성가시긴 해도 여간 반갑지 않다. 게다가 오래 가물다가 비가 오면 마음이 시원하고 상쾌하다. 모처럼 일을 쉬게 되니 한가롭기도 하고, 그래서 모자란 잠도 몰아서 낮잠으로 자기도 하고, 모여서 전도 부쳐 먹고 막걸리도 기울이며 한가로운 이야기도 나눈다. (195쪽)



  “시냇가로 물러나 사는 즐거움”이란 “서울로 가서 살지 않는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누군가는 시냇가에서 살고, 누군가는 바닷가에서 살아요. 누군가는 들판에서 살고, 누군가는 숲에서 살아요. 누군가는 멧골에서 살며, 누군가는 시골에서 살지요.


  다만, 오늘날 우리 사회를 헤아리면 서울에서 사는 사람이 가장 많습니다. 서울을 둘러싼 크고 작은 도시에서 사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시냇가에 사는 사람”은 열 손가락 가운데 하나를 꼽기도 어려워요. 아마 백 손가락 가운데 하나쯤 꼽을 수 있을까요?



버들가지 잎사귀 무성해질 때면, 멧새, 참새, 온갖 자그마한 텃새들도 날아들어 가지 사이를 들락거리며 짝을 찾고, 아이들은 버들가지에 물오르면 가지를 꺾어 틀어서 호드기를 분다. (213쪽)


봄은 모두의 봄이다. 비도 모두의 비이고, 바람도 모두의 바람이고, 꽃도 모두의 꽃이고, 모두가 봄을 만들고 봄을 꾸미고 봄을 일구는 것이다. (253쪽)



  ‘백 손가락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숫자를 생각해 봅니다. 이 숫자를 ‘등수’나 ‘차례’로 살핀다면, 99등이나 100등쯤 되겠지요. 한마디로 꼴등입니다. 이 숫자대로 살핀다면, 99등이나 100등은 아주 가난할 테고, 아주 뒤처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 손가락 가운데 하나’를 숫자가 아닌 삶하고 살림으로 생각해 봅니다. 등수도 차례도 아닌 ‘삶’하고 ‘살림’으로 살핀다면, 백 손가락 가운데 하나라 할 만한 삶이나 살림이란 ‘스스로 짓는 하루’라 할 만해요. 이른바 자급자족이지요. 자급자족이니 남한테 손을 벌리지 않고, 돈에 얽매이지 않아요. 주머니에 돈이 없다 하더라도 돈 때문에 살림이 쪼들리지 않습니다. 손수 지어서 거둔 것을 내다팔지 않아서 돈을 벌지 않더라도, 손수 지어서 거둔 것을 손수 가다듬어서 먹으니, 돈이 없어도 얼마든지 밥을 누리는 하루예요.


  이 얼거리를 더 들여다볼 수 있다면, “시냇가에 물러나 사는 즐거움”을 누리려 할 적에는 바로 나 스스로 찾고 가꾸고 나누고 웃음짓고 노래하는 하루라 할 만합니다.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방송을 보아야 즐거움이 아니고, 손수 짓는 하루에서 스스로 웃고 노래하는 즐거움이라 할 만해요. 이리하여 《시냇가에 물러나 사는 즐거움》이 한시 하나를 놓고 펼치는 이야기는 ‘소재 파악’이나 ‘주제 분석’이 아닙니다. 시를 지어서 부른 사람들이 스스로 즐긴 꿈하고 사랑을 생각하면서 오늘 이곳을 아름답게 가꾸자는 숨결로 이어져요.



의식주를 모두 자급자족하던 농가에서 삼을 키워 실을 뽑고 옷감을 짜는 일은 여자의 일 가운데 가장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일이었다. 물론 삼을 심고 가꾸고 수확하여 삶는 일까지는 남자가 하지만, 쪄낸 삼베 껍질을 벗겨서 올올이 째고 끝과 끝을 이어서 실로 만들고 베틀에 올려 삼을 짜는 일은 오롯이 여자의 몫이다. (313쪽)



  김태완 님은 삼을 심고 가꾸어 거두어 실을 얻는 이야기를 ‘한시 풀이’가 아닌 ‘한시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서로 얽습니다. 어릴 적에 보았고 겪었으며 늘 하던 살림짓기를 한시 이야기로 버무립니다.


  한시를 읽고 시골 이야기를 읽다가 조용히 책을 덮습니다. 우리 집 마당을 둘러보고 밭자락을 살핍니다. 콩씨랑 옥수수씨랑 당근씨랑 무명씨 곁에서 자라는 여느 풀은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뽑습니다. 여느 때에 여느 풀은 여느 나물로 삼지만, 밭에 씨앗을 심으면 이 여느 풀을 아낌없이 뽑아서 밭둑에 두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합니다.


  백 손가락 가운데 하나가 되는 삶이라 한다면, 백 손가락이 저마다 다른 백 가지 손가락이 되는 길이 더없이 즐겁다는 뜻이리라 느낍니다. 다섯손가락을 놓고 보아도 그래요. 엄지는 엄지이면 될 뿐, 새끼일 까닭이 없습니다. 넷째는 넷째일 뿐 셋째여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다섯 사람이 있으면 다섯 갈래 삶하고 살림이 있을 때에 아름다우면서 즐겁지 싶어요. 백 사람이 있으면 백 갈래 삶하고 살림이 있을 때에 아름다우면서 즐거울 테고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다른 삶하고 살림을 배우면서 다 다른 아름다움을 나눌 때에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참말로 우리는 누구나 서로서로 다르면서 아름다운 숨결로 하루를 맞이할 적에 즐겁게 웃고 노래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2016.5.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 국민학교에서 역사교과서 파동까지
김한종 지음 / 책과함께 / 201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50



‘국가에 충성하는 국민’을 좋아하는 정치·사회

―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

 김한종 글

 책과함께 펴냄, 2013.10.4. 25000원



학교 교장실에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던 때가 있었다. 대통령의 국정지표를 받들어서 행정을 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478쪽)



  김한종 님이 쓴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책과함께,2013)를 읽다가 문득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대통령 사진’은 교장실에만 걸렸던가 하고 갸웃갸웃해 봅니다. 틀림없이 교장실에는 대통령 사진이 걸렸어요. 그런데 교장실에만 걸리지 않았다고 떠올라요. 때로는 교실에까지 대통령 사진을 걸곤 했어요. 그리고 ‘태극기’ 곁에 언제나 ‘새마을 깃발’을 걸었지요.


  어릴 적에 ‘국민학교’라고 하는 이름이 붙던 학교를 다닐 적에는 학교에 ‘대통령 사진’이 곳곳에 붙는 일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아니, 언제나 그 사진을 보며 경계를 하거나 반절을 하라고 배웠습니다. ‘국민학생’이던 우리는 길을 가다가 어디에서 대통령 사진을 보면 걸음을 멈추고 거수경례를 하라고도 배웠어요. 저녁이 될 무렵 마을방송처럼 시내 어디에서나 쩌렁쩌렁한 소리로 ‘국민의례 방송’이 나오면 걸음을 멈추라 했지요. 자동차도 멈추라 했어요. 모두 다 멈추어서 ‘국민의례 방송’이 나오는 쪽으로 몸을 돌려서 반듯한 ‘차려’ 몸짓을 하고 끝까지 기다리라고 했어요.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을 보면 ‘길거리에서 국민의례 방송 때문에 가던 길을 멈추어야 하는 사람들’ 모습이 나와요. 어느 학생은 이 방송 때문에 꼼짝없이 멈추느라 버스를 놓치고, 어느 학생은 이 방송이 나와도 헐레벌떡 달려서 버스를 타는 대목이 나오지요.


  이 국민의례 방송은 ‘유신’이라는 이름으로 서슬퍼렇고 무시무시한 정치권력이 칼춤을 추던 때에만 흐르지 않았어요. 내가 국민학생으로서 국민학교를 다니던 1980년대에도, 서울에서 올림픽을 한다던 그무렵까지도 어김없이 흘렀어요.



국민학교와 국민과는 ‘황국신민교육’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전후 일본에서는 곧바로 국민과가 폐지되고 국민학교의 명칭이 이전의 소학교로 돌아갔다. 그렇지만 학국에서는 국민학교라는 이름이 계속 사용되었다. 종종 국민학교가 황국신민을 길러내는 학교라는 의미이므로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다. ‘국민’이라는 말 자체가 나쁜 의미가 아니며, ‘국민학교’를 다른 이름으로 바꿀 경우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등 사회적 비용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반론 때문이었다. (22쪽)


선거에 출마한 사람들은 “국민을 받들겠다”, “국민과 소통하겠다”, “국민을 무서워하겠다” 같은 말을 쏟아낸다. 여기에서 ‘국민’은 국가, 즉 권력자에게 충성하는 신민이 아니라, 국가, 즉 권력자가 받들어야 하는 존재이다. 역사에서 국민은 실제로 그런 존재가 아니었지만, 권력을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가장했다. 실제로는 ‘국가(권력)에 충성하는 국민’으로 길러내기를 원하지만 겉으로는 ‘권력자가 봉사를 하겠다는 국민’으로 포장하였다. (35쪽)



  1996년부터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내리고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고쳐서 써요. 학교 이름을 바꾸면 ‘사회적 비용’이 크다고도 했지만, ‘사회 비용’보다 ‘잘못 길든 사회의식’이 그대로 굳어버리는 생채기가 훨씬 크다고 여길 만하리라 느껴요. 생각해 보면, 큰 회사나 정당도 ‘꽤 많은 돈’이 들더라도 이름을 흔히 바꾸어요. 돈이 대수롭기보다는 ‘이름에 얽힌 숨결’이 대수롭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한국 정치나 사회는 여러모로 얄궂어요. ‘국민학교’라는 이름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은 바로 ‘황국신민’을 가리키는 그 ‘국민’이라서 학교 이름을 ‘국민’이 아닌 ‘초등’으로 바꾸었는데, 학교 이름 한 군데만 바꾸었을 뿐, 다른 자리에서는 그대로 ‘국민’이라는 이름을 쓰거든요.


  학교 이름에서만 바꿀 ‘국민’이었다면, 다른 자리에서는 도무지 ‘국민’이라는 이름을 떨쳐 버리거나 없애 버리지 못하겠다면, 차라리 학교 이름도 그냥 그대로 둘 노릇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국민’이라는 이름하고 얽힌 슬프고 끔찍하며 아픈 생채기가 있더라도, 오늘날에는 이 이름을 새롭고 아름답게 쓸 수 있다는 씩씩함하고 슬기를 보여줄 수도 있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를 쓴 김한종 님이 밝히듯이, 한국 정치와 사회는 ‘국가(권력)에 충성하는 국민(35쪽)’을 바라기 때문에 학교 이름은 어쩔 수 없이 바꾸었지만 이곳저곳에 아주 쉽고 흔하게 ‘국민’이라는 낱말을 쓰는 셈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를 나라에서 함부로 쥐락펴락하려는 뜻을 보이기도 할 테고요.



이승만은 서구적 합리성을 토대로 하는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한국식의 가주방제적 권위를 유지하려고 했다. 대통으로서 펼치는 적절한 정책보다는 ‘독립운동가’라는 권위로 국민의 지지를 받기를 원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라는 공식 직함보다 자신의 이름 뒤에 ‘박사’라는 직함을 더 즐겨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20쪽)



  인문책 《역사교육으로 읽는 한국현대사》는 한국 근현대사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정치와 사회’가 역사를 놓고 어떻게 ‘권력 지키기’를 하려고 했는가를 찬찬히 짚습니다. 정치와 사회를 쥐락펴락하는 ‘권력자’가 ‘역사교육’이라는 이름을 내세워서 어떤 꿍꿍이와 속셈을 드러내려 했는가를 차근차근 밝혀요.


  왜 ‘이승만 박사’라는 이름이 널리 퍼졌는지 짚고, 왜 ‘국민교육헌장’이 불거졌는가 밝히며, ‘홍익인간’이라든지 ‘신사임당·이순신 우상화’가 왜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실마리를 풀려고 합니다.


  참말로 ‘국민교육헌장’에도 ‘국민’이라는 이름이 나오네요. ‘국민연금’이라든지 ‘국민건강보험’이나 ‘국민신문고’ 같은 데에도 ‘국민’이라는 이름이 나와요.


  국민학교가 아닌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이가 어른들한테 “‘국민’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나쁜 뜻이 담겼다고 하는데 왜 자꾸 ‘국민’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써요?” 하고 물어본다면, 우리 정치·사회를 이루는 어른들은 어린이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한지 궁금합니다. 왜 우리 정치·사회를 이루는 어른들은 ‘국민’이 아닌 아름다우며 슬기롭고 사랑스러운 이름을 새롭게 찾아내거나 생각하지 못할까요? 2016.4.27.물.ㅅㄴㄹ



박정희 정부의 정책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국민교육헌장을 이용했다. 새마을정신이 국민교육헌장의 정신이라거나, 유신정신이 국민교육헌장의 정신이라는 식이었다. 국민정신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국민교육헌장이 정권을 유지하는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189쪽)


(최종규/숲노래 - 인문책 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제국사 - 고대 로마에서 G2 시대까지 제국은 어떻게 세계를 상상해왔는가
제인 버뱅크.프레더릭 쿠퍼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49



찔레무침 한 접시와 ‘식민지 제국’ 이야기

― 세계제국사

 제인 버뱅크·프레더릭 쿠퍼 글

 이재만 옮김

 책과함께 펴냄, 2016.2.5. 36000원



  사월은 삼월하고 다른 봄입니다. 겨울이 저무는 이월 끝자락부터 뒤꼍하고 마당에서 쑥이 돋기에 그무렵부터 쑥을 뜯어서 버무리나 부침개를 해서 먹었고, 때로는 밥에도 넣어서 쑥밥을 먹었어요. 삼월로 접어든 뒤에는 다른 나물을 훑어서 먹었고, 바야흐로 사월이 되면서 모시잎을 훑은 뒤 잘게 썰어서 모시밥을 지었으며, 무럭무럭 돋는 찔레싹을 신나게 훑어서 찔레무침을 합니다. 사월 한복판에 싱그러이 돋는 찔레싹을 잘 헹군 뒤에 한 줌은 그대로 고추장으로 무치고, 다른 한 줌은 살짝 데쳐서 된장으로 무칩니다. 무럭무럭 돋으려는 봄나물은 무럭무럭 자라려는 아이들한테 더없이 반가우면서 고마운 밥이 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아마 먼 옛날부터 새봄에 누구나 이 봄밥을 누렸으리라 생각해요. 이 땅에서는 이 땅에서 돋는 봄나물로 봄밥을 누렸을 테고, 일본이나 중국에서는 그 나라 땅에서 돋는 봄나물로 봄밥을 누렸을 테지요. 또 북중미나 남미라든지 유럽에서는 그곳 땅에서 돋는 봄나물로 봄밥을 누렸을 테고요.



대다수 제국처럼 로마도 처음에는 정복을 했다. 그러나 통제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과제는 폭력만이 아니라 인적·경제적 자원과 중앙권력을 계속 연결하는 일에도 달린 문제였다. (49쪽)


교육은 더 높은 신분과 더 많은 재물을 얻는 길로써 새로운 피와 사상을 끌어들였고, 사회의 상향 유동성을 상당히 높여 주었으며, 지방의 엘리트와 부유한 가문을 제국의 중앙으로 포섭했다. 그러나 교육은 이따금 폐단도 낳았다. 학식에 대한 특권적 접근, 시험과 관직 배정의 편파성, 등용 시험을 함께 통과한 관리들의 파벌, 도식적으로 통치하는 경향 등이 그것이었다. (89쪽)



  제인 버뱅크 님하고 프레더릭 쿠퍼 님이 함께 글을 써서 선보인 《세계제국사》(책과함꼐,2016)라는 두툼한 책을 봄날에 읽습니다. 봄바람을 마시면서 ‘세계제국’ 이야기를 돌아보고, 봄볕을 쬐면서 ‘세계제국’이 이 지구별에 남기려 했던 발자국을 되새깁니다.


  제국을 이루었다고 하는 나라들을 살피면 하나같이 ‘이웃나라로 쳐들어가’서 ‘이웃나라 사람들을 끔찍하게 죽이’고, 그 이웃나라에서 나오는 것들을 ‘함부로 가로채거나 훔쳐서 제 것으로 삼기 일쑤’였구나 싶습니다. 쉽게 말해서 ‘나한테 없으나 이웃한테 있는 것’을 가로채거나 빼앗아서 ‘내가 혼자서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마음’에서 전쟁무기와 군대를 일으키고, 이 전쟁무기와 군대를 바탕으로 자꾸자꾸 땅과 힘을 키운 제국 발자취라고 할까요.



전쟁의 주안점은 약탈, 전리품 분배, 더 많은 전리품을 얻기 위한 진격이었다. (156쪽)


몽골족은 상업 활동에 투자하고, 유라시아를 가로지르는 고속 운송 및 통신 체계를 유지하고, 상인과 장인을 보호하고, 관행으로 분쟁을 해결함으로써 장거리 교육을 실행하고 상상할 지평을 넓혀 주었다. 몽골족은 중국인과 달리 상인에 대한 양가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173쪽)



  《세계제국사》에서 다루는 수많은 ‘제국’을 헤아려 봅니다. 제국이 된 모든 나라는 참말로 전쟁무기와 군대를 늘리는 일에 돈과 힘과 품을 어마어마하게 쏟아부었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무기와 군대를 발판으로 삼아서 전쟁무기나 군대가 적거나 없는 이웃나라를 손쉽게 짓밟거나 무너뜨렸다고 해요. 그런데 전쟁무기나 군대는 엄청나게 거느린 제국은 모두 똑같이 ‘한 가지 골칫거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워낙 전쟁무기나 군대를 크게 키워 놓다 보니까, ‘전쟁무기와 군대를 유지하는 돈’도 엄청나게 들었다고 해요. 그래서 제국은 모두 ‘식민지 사업’을 멈출 수 없었고, ‘군대를 거느리는 장군’한테 더 많은 혜택을 줄 수밖에 없으며, 이러한 흐름이다 보니 자꾸자꾸 새로운 전쟁과 정복으로 나아갈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 번 다르게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제국이 된 모든 나라가 ‘전쟁무기와 군대’에 바친 돈과 힘과 품을 전쟁무기나 군대에 하나도 안 들였다면 어떠했을까 하고요. 그 엄청난 돈과 힘과 품을 ‘사람들 살림살이를 가꾸는 길’에 썼다면, 군대를 키워서 ‘군대 유지비’만으로도 나라살림이 거덜날 만한 경제가 되는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저마다 오순도순 즐겁게 마을살림을 가꾸도록 하는 경제’가 되는 길을 걸었으면 어떠했을까 하고 말이지요.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의 고립 영토, 대양과 대륙을 넘나드는 강압과 상업을 통해 획득한 자원과 경험을 바탕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커다란 영토를 정복하여 차지했고, 뒤이어 아프리카인의 노동, 아메리카의 토지, 유럽의 시장을 연계하여 이익을 얻었다. 유럽인의 관점에서 보면 실제로 노예를 생포하는 일은 무대 밖에서, 아프리카 정치체들이 전쟁을 벌이고 습격하는 와중에 일어났다. (241쪽)


영국 제국과 프랑스 제국에서, 그리고 포르투갈 제국과 에스파냐 제국의 일부 지역에서 제국에 이익을 가져다준 것은 노예제였고, 노예제를 가능하게 만든 것은 제국이었다. (272쪽)



  전쟁무기나 군대를 키우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제국’이 안 되었으리라 느껴요. 전쟁무기나 군대를 안 키웠다면, ‘제국 발자국’을 안 남겼을 테고, 우리가 세계사나 한국사에서 배우듯이 ‘땅을 넓히거나 빼앗기는 흐름’도 없었을 테지요. 전쟁무기나 군대를 키우지 않았다면, 서로 다른 나라 사이라 하더라도 서로 쳐들어가거나 쳐들어올 일이 없을 테니까 ‘국경이 없이도 평화로운 삶’을 이룰 만했을 테고, ‘국경이 없이 서로 즐겁게 교류를 하는 아름다운 살림’을 이룰 만했으리라 느낍니다.


  ‘국경 분쟁’ 같은 일은 제국이라는 틀로 정치를 꾸리기 때문에 생긴다고 할까요? 제국이라는 틀이 따로 없다면, 작은 마을 사람들은 어느 정치권력자가 나라를 세운다 하더라도 대수롭지 않아요.


  왜 그러한가 하면, 작은 마을 사람들은 봄에는 봄나물을 훑고 땅을 갈아서 씨앗을 심어요. 작은 마을 사람들은 대문을 걸어 잠그지도 않으면서 지내요. 작은 마을 사람들은 오순도순 아기자기하게 살지요. 총이나 칼이 없어도 평화롭기 마련인 작은 마을이요, 싸움이나 다툼조차 없이 서로 돕고 아끼는 두레와 품앗이가 이루어지는 작은 마을이에요.


  무엇보다도 작은 마을은 언제나 자급자족을 이루어요. 정치나 경제가 어떠하더라도 작은 마을에서는 스스로 삶과 살림을 지으니, 스스로 심고 거두어서 밥을 먹고 옷을 지으며 집을 가꾸어요. 작은 마을일 적에는 이웃으로 쳐들어가지 않아요. 작은 마을이기에 ‘이웃으로 그릇을 들고 가’지요. 그릇에는 집집마다 맛나게 지은 밥을 담아서 다 함께 즐겁게 나누려고 이웃을 사귀어요.



군대를 강화하기 위해 노예를 필요로 한 것은 제국들의 역사에서 별반 새롭지 않은 일이었다. (344쪽)


아이티의 독립은 세계의 제국들에게 새로운 문제를 제기했다. 아아티는 해방과 탈식민지화의 선봉일까? 아니면 아프리카 노예들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할 위험의 상징일까? (346쪽)



  나는 《세계제국사》를 읽으면서 ‘제국’을 이룬 나라는 이웃을 모른 채 살았구나 하고 느낍니다. 옆에 있는 나라나 마을을 ‘이웃’으로 여겼다면 이 ‘이웃’한테 전쟁무기나 군대를 이끌고 들어갈 일이 없으리라 느껴요. 참말로 옆에 있는 나라나 마을을 이웃으로 여긴다면, 총칼을 앞세워서 윽박지르는 짓이 아니라 ‘맛난 밥을 그릇에 담은 사랑스러운 손길’로 찾아가겠지요.


  나한테 있는 넉넉한 것을 이웃한테 줄 때에 ‘교류’가 됩니다. 너한테 있는 넉넉한 것을 받으면서 하하하 웃을 적에 ‘이웃사랑’이 됩니다. 《세계제국사》라는 책에서는 ‘일본 제국’ 이야기도 조금 나오지만, ‘식민지 조선’ 이야기는 몇 줄 안 나옵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일본이 제국이 되어 이웃 여러 나라를 괴롭힌 발자국’은 ‘유럽 여러 나라가 제국이 되어 지구별 여러 나라를 괴롭힌 발자국’에 대면 아주 작다고 할 만하거든요. 중국이나 몽골이 제국이 되어 수많은 나라를 괴롭힌 발자국에 대어도 아주 작다고 할 만하고요.


  그렇지만, 한국이 일본한테 식민지가 되어 겪어야 한 아픔이나 생채기는 작지 않습니다. 지구별 모든 ‘식민지 나라’는 그야말로 끔찍하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야 했어요. 곧 《세계제국사》라는 책은 ‘여러 제국 역사’뿐 아니라 ‘여러 식민지 역사’를 함께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 제국이 일어나면서 무시무시한 전쟁무기와 군대를 뽐낸 발자국이란, 평화롭고 작은 수많은 마을이 아프게 짓밟힌 발자국이기도 하다는 이야기예요.



그런데 국가를 재형성하거나 형성할 때 누구의 권리를 중요하게 고려했을까? (495쪽)


군대와 관료제의 수준을 높이려면 새로운 교육 기준이 필요했다. 행정을 훈련시키는 과제는 재상이나 명사의 가정에서 교육기관으로 넘어갔으며, 교육기관은 인구와 중앙을 더 효과적으로 연결할 새로운 부류의 관료층을 길러내고자 했다. (511쪽)



  봄날 아침에 나는 우리 집 뒤꼍에서 찔레싹을 훑었습니다. 쑥을 훑을 적에는 아이들이 돕지만, 찔레싹을 훑을 적에는 혼자 합니다. 아무래도 찔레 가시 때문에 아이들한테 찔레싹을 함께 훑자고 말하기는 쉽지 않아요. 아직 작고 여린 아이들은 가시에 찔리지 않으면서 찔레싹을 훑기는 만만하지 않아요.


  커다란 소쿠리로 찔레싹을 잔뜩 훑은 뒤에 한 소쿠리는 살짝 데칩니다. 다른 한 소쿠리는 날찔레를 고추장으로 무칩니다. 아이들은 새봄 찔레무침을 맛나게 먹어 줍니다. 아이들 입에서 ‘맛있어!’ 하는 말이 터져나올 적에 ‘찔레 가시에 찔리며 새싹을 훑은 보람’을 느낍니다. 찔레무침을 넉넉히 했기에 큰 접시에 가득 담아서 마을회관으로 가져갑니다. 마을 할머니들은 마을회관에 도란도란 모여서 낮밥을 함께 드셔요. 할머니들도 한 젓가락씩 자시라고 찔레무침을 드립니다.


  싱그러운 봄나물을 훑고 무쳐서 먹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세계제국사》에 나오는 ‘제국이 된 나라’를 보면, 하나같이 ‘남쪽으로 내려가서 식민지를 넓히려고 했구나’ 싶습니다. 이 책뿐 아니라 다른 역사책에 그런 얘기는 없습니다만, 어쩌면 ‘제국 권력자’들은 추운 고장에서 봄나물이 너무 그리워서 자꾸자꾸 남쪽으로 손길을 뻗으려고 하지는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어떤 제국 권력자라고 하더라도 이 봄에 싱그러운 봄나물 한 접시를 받고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눌 수 있었으면, 모든 전쟁무기는 내려놓고 호미랑 가래랑 괭이를 쥐고서 밭을 일구며 씨앗을 심는 즐거운 두레살림으로 나아가지는 않았을까 하고도 생각해 봅니다. 2016.4.15.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
조조 모예스 지음, 송은주 옮김 / 살림 / 201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읽기 삶읽기 246



‘값나가는 그림’이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아요

― 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

 조조 모예스 글

 송은주 옮김

 살림 펴냄, 2016.3.14. 15000원



  나는 아이들이 그린 그림을 늘 가방에 둡니다. 아이들하고 늘 시골집에서 하루 내내 붙어서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혼자서 멀리 바깥일을 보러 다녀와야 할 적에는, 미리 가방에 둔 ‘아이들 그림’을 만지작거리면서 새삼스레 들여다봐요. 아이들이 기쁜 마음으로 그려서 아버지한테 선물한 조그마한 그림은 언제나 나한테 새롭게 기운을 북돋아 준다고 느낍니다.


  나도 아이들한테 때때로 그림 선물을 합니다. 큰아이 모습도 작은아이 모습도 조그맣게 종이인형으로 오려서 건네요. 소꿉놀이를 할 적에 쓰라고 선물로 줍니다. 여느 때에도 늘 싱그러이 웃고 노래하는 고운 숨결로 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즐겁게 건넵니다.



그가 램프를 들어 올렸을 때 희미한 불빛 속에 빛나는 것은 결혼 초기에 에두아르가 그려준 내 초상화였다. 탐스러운 머리숱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화사하게 피어난 맑은 피부에 사랑받는 사람의 차분한 태도로 앞을 응시하는, 결혼 첫 해의 내가 있었다. (16쪽)


독일군에게 요리를 잘해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일부러 망치기도 겁이 났다. 오븐에서 구운 닭을 꺼내 육즙을 끼얹으면서 언젠가는 이 음식을 눈으로만 보면서도 즐길 수 있게 될지 모른다고 혼잣말을 했다. (48쪽)



  조조 모예스 님이 쓴 소설책 《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살림,2016)를 읽었습니다. 이 책에는 여러 사람들이 나오고, 여러 나라가 나옵니다. 줄거리를 놓고 보자면, ‘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 한 점을 둘러싼 사람들이 나온다고 할 텐데, 소설이 들려주려고 하는 이야기는 ‘그림을 둘러싼 사람들 이야기’ 하나하고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 이야기’ 둘이지 싶습니다.



처음 한 달이 지나면서 사령관을 다른 이들에 대해 생각하듯이 짐승, 독일놈으로 치부해 버리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독일인들은 전부 다 야만적이라는 믿음 때문에 그들에게도 아내와 어머니, 아기가 있다고 상상하기 힘들었던 것 같다. (86쪽)


“그림과 남편의 자유를 맞바꿀 수 있을까요? 아니면 …… 저와 남편의 자유를 맞바꿔야 하나요?” (147쪽)



  먼저, 그림을 둘러싼 사람들로는 프랑스 시골마을에 있는 사람들하고, 이 프랑스 시골마을로 쳐들어온 독일 군인들입니다. 작은 시골마을 사람들은 어느 날 문득 ‘독일 점령지’가 된 마을에서 숨을 죽여야 합니다. 젊은 사내는 프랑스 군대로 끌려가든 독일 부역병으로 끌려가든 해야 합니다. 마을에는 아이랑 가시내랑 늙은 할배가 남을 수 있을 뿐입니다.


  첫째 세계대전이라 하는, 유럽에서 터진 커다란 싸움판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중앙집권을 이룬 나라는 군대를 키워서 이웃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왜 이웃나라로 쳐들어가느냐 하면, 돈을 더 얻고 싶기 때문입니다. 지하자원을 가로채고, 사람들을 종처럼 부리며, 땅(나라땅·국토)을 넓히겠다는 뜻이에요.


  소설책에 흐르는 줄거리를 돌아봅니다. 점령지가 된 프랑스 시골마을에서 사람들은 독일 군인 눈치를 살펴야 합니다. 누군가는 독일군한테 빌붙으면서 한결 나은 살림을 이루는 듯합니다. 누군가는 독일군이 시키는 대로 따르면서 한숨을 짓습니다. 누군가는 독일군 앞에서 씩씩하게 삿대질을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두려움이 쿵쾅거립니다.


  군대를 키워서 이웃나라로 쳐들어간 독일은 참말로 가난한 나라였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나라살림은 군대나 전쟁무기가 아닌 ‘사람들 살림살이 가꾸는 길’에 썼다면, 중앙집권 권력을 키우지 말고 수수하게 오순도순 짓는 고운 나라살림이 되도록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지하자원을 더 얻어서 경제를 북돋우는 길 말고는 살림살이를 펴는 길이 없었을까요?



모가 그녀의 어깨 위에 손을 얹는다. “남자들은 참 이상해요. 당신이 전혀 문제없다는 말은 아니지만요. 아, 제기랄. 시간 좀 봐. 당신은 미친 달릭하러 나가야지요. 3시에 돌아와서 레스토랑에는 전화로 아파서 못 간다고 할게요. 우리 변덕이 죽 끓는 사내새끼들 욕이나 실컷 해 주고 그놈들한테 어룰릴 중세 형벌이라도 생각해 봐요.” (297쪽)



  다음으로, 그림을 바라보는 사람들로는 독일군 사령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설책 《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에서 두 겹 얼거리를 이루는 2010년대 사람들이 있어요. 1910년대 프랑스 시골에서는 ‘아내와 아이를 고향에 두고’ 프랑스에서 군인으로 일해야 하는 독일군 사령관이 ‘그림에 깃든 멋과 꿈’을 사랑스레 알아차립니다. 2010년대 영국 런던에서는 ‘남편을 일찍 여읜 아주머니’가 이 그림을 더없이 사랑합니다. 남편이 선물한 뜻깊은 그림일 뿐 아니라, 돈값이 아닌 그림결로 마음을 사로잡아서 언제나 이 그림을 바라보지요. 2010년대 런던에서 사는 아주머니는 그림을 그린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그림에 나오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저 이 그림이 마음에 깊이 남습니다.


  그런데 백 해를 사이에 둔 두 나라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어떤 일 하나가 불거집니다. 1910년대 프랑스 시골마을에서는 ‘교화소에 갇혔다는 남편’을 찾고 싶은 아주머니가 독일군 사령관한테 이 그림을 주고, 이 그림뿐 아니라 ‘다른 것’도 줄 테니 남편을 찾을 수 있도록 해 달라고 빕니다. 2010년대 영국 런던에서는 ‘뒤늦게 그림값이 치솟은 어느 무명화가였던 사람이 남긴 작품’을 찾아내어 목돈을 손에 쥐려고 하는 ‘유족이라고 밝히는 사람들’이 그림을 찾아내려고 해요.



“그 사람들은 그 전까지는 소피 고모에 대해 관심도 없었어요. 이제 와서 왜 그들이 고모를 팔아서 이득을 봐야 합니까? 에두아르의 가족은 자기들 말고는 아무한테도 관심이 없어요. 오로지 돈, 돈, 돈뿐이지. 그들이 소송에서 졌으면 좋겠소.” (371쪽)



  500쪽 남짓 되는 소설책은 백 해라고 하는 틈을 어느 만큼 채울 수 있을까요. 이 소설책은 그림 하나를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 마음과 삶과 사랑과 생채기와 꿈과 슬픔을 얼마만큼 달랠 수 있을까요.


  총칼하고 군홧발을 내세운 서슬퍼런 군인들 앞에서 시골사람은 무엇을 할 수 있을 만할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목숨이 날아간다고 하는 마당에 누가 ‘부역자’라고 할 만한가 하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경매에서 사고팔리는 값’이라든지 ‘그림을 그린 사람이 드날리는 이름값’은 하나도 따지지 않고 그저 그림을 사랑하는 숨결을 우리는 어느 만큼 받아들일 만한가 하는 대목을 생각합니다. 전시관이나 미술관이나 박물관이나 갤러리에 걸려야 ‘훌륭하거나 아름다운 그림’일까요? 여느 살림집 한쪽 벽에 걸어서 늘 바라보는 그림은 ‘안 훌륭하거나 안 아름다운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점령지 군인이 가로챈 유물이나 그림이라면, 이 유물이나 그림을 되찾으려고 하는 몸짓은 매우 마땅하다고 느낍니다. 그러면, 점령지 군인이 휘젓거나 짓밟은 자국 때문에 생긴 생채기를 씻으려고 하는 몸짓도 매우 마땅해야 하겠지요.



그의 팔을 잡은 손아귀 힘이 놀랄 만큼 억세다. “맥캐퍼티 씨, 당신에게 그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요, 인생에는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게 잔뜩 있다는 거예요.” (482쪽)



  사람은 누구나 예술가라는 이름을 얻으려고 태어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삶을 사랑하는 고운 숨결로 살림을 지으려는 마음으로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누구나 군인이나 ‘돈에 마음을 빼앗긴 채’ 태어난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서로 아끼고 보살피려는 따사로운 사랑을 곱게 품은 채 태어난다고 느낍니다.


  우리 아이들이 늘 그리는 아기자기한 그림을 다시 바라봅니다. 잘 보이려는 뜻도 없고, 돈을 받고 내다 팔려는 뜻도 아닌, 그저 즐거워서 그리는 그림을 바라봅니다. 내가 아이들한테 밥을 차려서 줄 적에도, 아이들하고 함께 텃밭을 일구어 씨앗을 심을 적에도, 우리는 늘 즐거운 살림과 삶을 생각합니다. 소설책 《당신이 남겨두고 간 소녀》에 나오는 사람들도 모두 ‘마음에 심을 따스한 사랑’을 되새기려고 하는 몸짓이리라 하고 헤아려 봅니다. 비록 어느 한때에는 돈에 눈이 팔릴 수 있고, 어느 한때에는 그만 남이 시키는 대로 휘둘린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아갈 길이란 서로 아끼면서 보살필 줄 아는 따스한 사랑이리라 생각합니다.


  군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이 소설책에서 2010년대 주인공으로 나오는 ‘리브’라는 아주머니는 아주 뜻있는 일을 한 가지 합니다. 1910년대를 살던 ‘소피’라는 아주머니가 남긴 자취 가운데 두 가지를 불로 태워서 없애 주어요. ‘소피’라고 하는 아주머니가 1910년대에 ‘그런 사람으로 살지 않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두 가지 자취를 불에 태우지요. ‘리브’는 이 일을 하고 나면 남편이 남겨준 집에다가 그림까지 몽땅 빼앗기고 마는 줄 알지만, 그래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2016.4.13.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시골에서 책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