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인권이다
이건범 지음 / 피어나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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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42


《언어는 인권이다》

 이건범

 피어나

 2017.9.15.



사전과 법률, 공문서에만 등장하는 어려운 한자어들, 그리고 각종 광고와 상품 이름, 사용 설명서에 실린 영어 낱말은 고등학교를 나온 일반인조차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된다. 국민의 알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이다. (41쪽)


새말을 표준어로 정하여 사전에 올릴 것이냐 말 것이냐도 국가에서 정하는 일이 아니라 민간의 사전 편찬자들 몫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한글학회 등 민간 학술단체와 학자들이 맡던 이 일이 1980년대부터 국가 주도로 기울었고, 1990년대부터는 국립국어원으로 거의 모든 권한이 옮아갔다. (78쪽)


일제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역사에 비춰볼 때 국한문 혼용과 실용파의 득세는 당연했다. (170쪽)


국어심의위원회에서 외래어 여부를 심의하여 결정해야 하는데, 1990년대 이래 단 한 번도 외래어를 심의한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즉 영어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와 한국어의 자리를 빼앗던 그 20여 년의 세월 동안 외래어와 외국어를 가르는 어떠한 책임 있는 사회적 결정도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센터’라는 말은 왜 표준국어대사전에 올라갔단 말인가? (218쪽)



  요 몇 해 사이에 인권 강의하고 인권을 다루는 책이 꾸준히 늘어납니다. 이런 인권 이야기를 보면 빠진 대목이 늘 한 가지 있지 싶습니다. 바로 ‘말’입니다. 인권을 거스르거나 인권하고 엇나가는 말이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아직 제대로 못 짚거나 못 다루지 싶습니다.


  공문서를 비롯해 인문책에 어렵게 나오거나 딱딱한 일본 한자말이나 영어도 ‘인권을 등지는’ 모습입니다. ‘어려운 말’이나 ‘외국말을 그냥 쓰는 말버릇’이나 ‘한자를 드러내어 자랑하거나 사자성어를 함부로 쓰는 말씨’로 인문 지식을 펴거나 정치나 문화나 예술을 하는 일도 민주나 평등하고 어긋난다고 할 만합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터느냐 마느냐 하는 대목을 떠나서, 우리가 참답고 슬기로우며 아름답게 민주와 평등과 평화를 누리려는 길에 어떤 말을 어떻게 쓰면 즐거울까를 이제부터 헤아려야지 싶습니다.


  《언어는 인권이다》(이건범, 피어나, 2017)는 말, 우리가 여느 때에 쓰는 말이 바로 인권을 보여주는 잣대라는 이야기를 찬찬히 짚습니다. 공문서뿐 아니라 인문학자나 지식인이 어렵게 쓰면서 지식을 자랑하는 말이야말로 ‘반인권’인 모습이라고 짚습니다. 그리고 국립국어원이 마치 독재처럼 한국말을 쥐락펴락하거나 주무르는 대목을 나무랍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아이 앞에서 아이가 알아듣기 어려운 말을 섣불리 쓰는 어른도 인권하고 어긋난 일이라 할 만합니다. 아이를 둘러싼 마을이나 터전에서 어른들이 거친 말씨나 막말을 쓰는 모습도 인권을 등진 일이라 할 만해요. 아이들이 거친 말씨나 막말을 쓴다면, 바로 어른한테서 배우기 때문이에요. 어른들이 찍은 영화나 연속극에서 듣고 배우기 때문이고요.


  앞으로는 인권 교육에서 말을 더 깊이 살피면 좋겠습니다. 어른으로서 어린이나 푸름이 앞에서 어려운 말이나 거친 말을 쓰지는 않는지, 교과서나 문학이나 인문책에 여느 사람들이 알아듣거나 읽기 어려운 말을 섞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돌아볼 노릇이라고 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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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사랑하며 간다 - 한중일 승려들의 임종게
박노자.에를링 키텔센 지음 / 책과함께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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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48


《모든 것을 사랑하며 간다》

 박노자·에를링 키텔센

 책과함께

 2013.6.25.



그 ‘길’이란 죽음을 두려워하지도 기뻐하지도 않는, 이미 가라앉은 마음속에 있지 않은가? (39쪽)


스님으로서 받아야 할 존경을 받기가 하도 싫어서 그랬단다. 비천한 일을 찾아 도맡아 하고, 비천한 옷을 입고, 비천한 음식을 먹고, 막노동꾼으로 살고……. 그는 ‘권위’를 갖게 될 것 같아 늘 도망 다녔다. (63쪽)


그의 장기는 시 외에 아이들과 숨바꼭질을 하는 것이었다. (79쪽)


손을 무릎에 얹어놓고 가만히 있으면서 계속 올라갈 수도 있다. 거리를 두지 않고, 그러고는 가지도 않고 계속 머물지도 않는 그 뭔가를 마음에 늘 간직하면 된다. 빛을 설명해 주는 것은 바로 그 그림자다. (136쪽)


한국에서 제2의 카프카가 태어난다 해도 ‘명문대’ 간판이 없는 한 그의 소설을 실어 줄 잡지조차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런데 궁극의 지점, 즉 죽음의 문턱에 가면 이 모든 간판이 다 우습게 보이지 않겠는가? (167쪽)



  한국말에 ‘중·스님’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불교라는 길을 가는 사람을 수수하게 가리킬 적에는 ‘중’이요, 중이라는 삶길을 슬기롭거나 사랑스레 가는구나 싶으면 ‘스님’이라 해요. ‘스님’은 때로는 달리 쓰기도 합니다. 슬기롭거나 사랑스러운 중뿐 아니라, 우리한테 삶길을 새롭거나 슬기롭거나 사랑스레 밝혀 주는 스승이 될 만한 분한테도 이 이름 스님을 씁니다.


  한국말 ‘중·스님’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기는 만만하지 않습니다만, 다른 길을 새롭게 가면서 깊이 배우고 넓게 깨달아 아름다운 사람이 되려는 마음을 이러한 낱말에 담았지 싶어요. 불교라는 틀을 넘어 목사나 신부 같은 믿음길을 걷는 사람도 어느 모로 보면 ‘중·스님’일 수 있습니다.


  예부터 시골사람은 불교나 천주교나 개신교 같은 이름을 따지기보다는, 믿음길을 가니 다들 ‘중’이요, 믿음길이 깊거나 넓으니 모두 ‘스님’으로 여겨 버릇합니다. 아마 어려운 말이나 경전은 알 수 없지만, 됨됨이와 매무새와 몸짓과 말씨를 살펴서 서로 마주하려 했지 싶습니다.


  《모든 것을 사랑하며 간다》(박노자·에를링 키텔센, 책과함께, 2013)라는 책은 믿음길을 배움길로 삼아서 삶길로 다스리려 한 옛어른 가운데 불교라는 자리에서 슬기로운 말씀과 몸짓을 남긴 분들 이야기를 갈무리합니다.


  어느 스님(또는 스승)은 말과 책을 남기고, 어느 스님(또는 스승)은 아이들하고 놀거나 흙일이나 막일을 하는 몸짓을 남겼다고 해요. 삶을 배우려고 삶길을 걷다가 깨달아 말이나 몸짓을 남깁니다. 삶길에 배운 아름다운 이야기를 수수한 살림살이에 녹여내어 여느 수수한 이웃한테 부드럽고 쉽게 들려줍니다.


  깨달으려는 길이란 스스로 배우려는 길이면서, 스스로 기쁘게 배워서 이웃하고 널리 나누려는 길이겠지요. 그러니 깨달은 스님(또는 스승)은 아이들하고 해맑게 뛰놀 줄 아는구나 싶습니다. 아이들하고 놀 줄 아는 마음, 아이들이 신나게 뛰놀도록 이끌 줄 아는 몸짓, 스스로 아이로 살아가는 어른인 하루, 이러한 나날을 오늘 우리도 즐겁게 누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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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내추럴 - 고대의 현자를 찾아서
그레이엄 핸콕 지음, 박중서 옮김 / 까치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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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40


《슈퍼내추럴》

 그레이엄 핸콕

 박중서 옮김

 까치 2007.7.25.



내가 아야후아스카를 복용하고 본 환상들의 공통점은 한 가지 표현하라면 그것들이 지극히 ‘현실적’으로 느껴졌다는 점이었다. (60쪽)


오늘날 동굴미술을 연구하는 선사학자들 간에는 유력한 학술지의 지면을 서로 장악하려는 경쟁이 심하고, 상호간에 이른바 ‘근거 없는 반대’가 공공연히 일어나며, 현장 연구에서도 공동전선을 펴는 일은 거의 없고, 오히려 지연과 학연에 근거한 갈등이 번번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반드시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114쪽)


뛰어난 생물학 기술을 지닌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면, 그들로서는 DNA만큼이나 적절한 정보 저장매체가 또 없었을 것이다. DNA는 수십억 년에 걸친 진화에도 불구하고 불변한 채 남아 있고, 또한 그중 3퍼센트를 제외한 나머지 97퍼센트의 ‘정크 DNA’의 기능은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33쪽)


대부분의 종교에서 창시자가 겪었던 초자연적 체험과 계시는, 세월이 흐르면서 월급을 받는 성직자들의 관료주의로 완전히 대체되고 만다. (360쪽)



  꽃내음에 푹 빠질 때가 있습니다. 짙은 꽃내음이 온몸을 사로잡아서 무척 즐겁거나 들뜨거나 맑은 마음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한창 꽃내음에 빠져들다가 이곳을 잊고서 꿈나라를 누빌 때가 있어요.


  갖가지 풀하고 나무가 어우러진 깊은 숲에 깃들면 우리 몸을 어지럽히는 자잘한 소리가 확 사라지곤 합니다. 손전화가 터지지 않는 숲에서는 오직 숲소리가 우리 몸을 감도는데, 이 숲소리에 숲내음이 얼크러지면서 생각이 새롭게 열리거나 몸이 싱그럽게 트이곤 합니다.


  이와 달리 아파트라든지 지하상가라든지 도시 한복판이나 한길 가장자리 같은 데에서는 몸이나 마음을 사로잡는 즐겁거나 포근하거나 향긋하거나 느긋하거나 아름다운 냄새나 기운을 느끼기 어렵구나 싶어요. 시멘트와 쇠붙이와 플라스틱이 가득한 곳에서는 생각도 마음도 새로 깨어나기 힘들지 싶습니다.


  《슈퍼내추럴》(그레이엄 핸콕/박중서 옮김, 까치, 2007)은 옛살림하고 옛길을 캐내려고 하는 글쓴이가 중남미 아마존에서 마신 ‘아야후아스카’ 이야기로 책머리를 엽니다. 이제는 사라진 옛살림 자취를 좇는 글쓴이는 고고미술학이나 고고인류학을 비롯한 모든 고고학에서 자리다툼이 불꽃을 튄다고, 옛사람 삶길을 좇아서 알아내기보다는 저마다 줄다리기를 하느라 애먼 품을 들인다는 이야기도 잇달아서 폅니다.


  곰곰이 보면 이 책은 글쓴이가 두 가지를 깊이 살피려 합니다. 첫째, 오랜 문명을 지은 옛사람이 마셨다는 아야후아스카 같은 풀물이 우리 몸하고 마음을 어떻게 건드리거나 바꾸는가를 몸소 겪으면서 이야기를 풀어내려 합니다. 둘째, 오늘날 문명이 감추거나 잊거나 잃으면서 그만 옛살림을 읽는 자리에서도 깊은 눈썰미를 나란히 잊거나 잃는 나머지 옛살림을 제대로 못 읽지 않느냐고 하는 이야기를 짚으려고 해요.


  요새는 크게 달라진 듯하지만, 예전에는 글이나 책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든, 목소리를 키우려는 사람이든, 길을 깨치거나 배움빛을 넓히려는 사람은 으레 서울(도시)을 떠나 깊은 멧골이나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숲에 깃들어 숲소리하고 숲내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려 하던 옛사람 뜻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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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쓰다 - 작가들의 고양이를 문학에서 만나다
나쓰메 소세키 외 지음, 박성민 외 옮김 / 시와서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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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39


《고양이를 쓰다》

 나쓰메 소세키 외

 박성민·송승현 옮김

 시와서

 2018.8.10.



새끼 고양이 네 마리를 대하는 아이들 네 명의 감정도 역시 서로 다른 데가 있었다. 그것은 어떻게 할 수 없는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애증은 나쁜 것이라고 하지만, 애증이 없는 세계가 혹시 있다면 그것은 얼마나 쓸쓸할까. (41쪽)


노인의 손이 부인의 손끝에서 은화를 긁어당기듯 낚아챘다. 그리고 새끼 고양이를 감싼 수건을 받자마자 잡동사니가 실린 짐 위로 내던지더니, 손잡이를 잡기가 무섭게 덜커덩덜커덩 수레를 끌기 시작했다. (88쪽)


“아!” 듣고 있던 고양이는 “정말 어리석은 말이로군” 하고 야생의 꼬리를 흔들며 습한 야생의 숲으로 혼자 걸어 돌아갔다. 하지만 아무한테도 말하지는 않았지. (221쪽)



  고양이가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 곁에서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만, 한국말에서 ‘고양이’는 개랑 더불어 무척 오래되었으면서 살가이 여기는 낱말입니다. ‘냐옹이’나 ‘나비’처럼 귀엽게 일컫는 이름이 따로 있는 고양이를 두고, ‘집고양이·길고양이’로 따로 가르기도 하고, ‘들고양이’가 있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먼 옛날부터 ‘마을고양이’도 있었겠지요.


  어미를 잃은 새끼 고양이 한 마리한테 밥을 준 지 어느새 한 달 즈음 되지 싶은데, 어미를 잃은 뒤에 다른 또래 고양이나 어른 고양이하고 사귀지 못한 탓인지, 이 새끼 들고양이는 자꾸 사람을 따르려 합니다. 사람 사는 집으로 자꾸 들어오려 하고, 사람 손이나 품을 자꾸 타려 해요. 아니 들고양이 가운데 이렇게 사람한테 다가오는 녀석이 있던가?


  《고양이를 쓰다》(나쓰메 소세키 외/박성민·송승현 옮김, 시와서, 2018)를 읽습니다. 고양이를 둘러싼 삶과 사람과 사랑과 살림이 촉촉히 묻어나는 여러 나라 여러 글을 묶었습니다. 좀 오래된 글이라 할 수도 있을 텐데, 달리 보면 고양이를 그만큼 가까이에 두고서 지켜본 이야기가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겠지요.


  어미를 잃고서 오랫동안 굶던 새끼 고양이는 처음에는 먹이를 앞에 두고 악다구니였습니다. 아직도 이 티를 다 씻지 못했습니다만, 조금씩 털어내지 싶어요. 이제 배를 곯지 않아도 된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이 새끼 고양이는 고양이로 살아가는 길에서 큰 실마리를 아직 못 배워요. 고양이가 고양이다우려면 스스로 사냥해야 합니다.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사람 손으로 먹이를 얻는 살림이 아닌, 스스로 먹잇감을 찾아서 누리는 몸짓이 되어야지요.


  사람은 어떻게 먼먼 옛날부터 고양이를 가까이할 수 있었을까요? 때로는 사람 손을 타거나 따르기도 하지만, 언제나 제 결과 길을 지켜서 꿋꿋하게 설 줄 아는 몸짓이 바로 사랑스러운 들넋이 아닐까요? 네(사람)가 먹이를 준다면 고맙게 받지만 너희(사람)한테 종이 아니라고 하는, 너희한테 노리개 구실을 하지 않는다는, 나(고양이)는 언제나 나로서 이 땅에 네 발을 디디면서 삶을 노래하는 멋진 숨결이라는 대목을 보여주기에 고양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집에서 한동안 얹혀 지내는 새끼 고양이가 부디 씩씩하게 홀로서기를 할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으면서 먹잇그릇을 내놓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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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수련하러 갑니다
김재덕 지음, 김태훈 그림 / 스토리닷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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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38


《나는 오늘도 수련하러 갑니다》

 김재덕 글

 김태훈 그림

 스토리닷

 2018.9.9.



매서운 골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골굴사는 골짜기가 깊어서 추운 겨울 방 안에 있다 보면 바람이 내 방의 창문에 닫기 전에 저 멀리서 파도가 밀려오듯 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14쪽)


수련할 때 품새를 연무하면서 완급, 호흡, 동작, 힘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깨어 있는 연습을 하는 것과 같다. 지금 내 모습에 깨어 있지 못하고 주변 환경, 보고 있는 사람이나 지나간 동작들에 마음이 떠 있으면 내 흐름을 잃게 된다. (24쪽)


이때는 내 안에서 당혹감과 여러 가지 생각으로 복잡해지는데 그때 느낀 것은 내가 실천하지 않은 것들은 힘이 실리지 않아 나에게는 물론 상대에게도 공감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112쪽)


언젠가 아버지께서 겉멋 들지 말고 내면을 다지는 수련, 수련자가 되라는 말씀이 떠올랐다. (178쪽)



  날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듭니다. 가만히 보면 아침저녁 흐름은 늘 똑같이 흐른다 할 만할 테지만 우리 삶에서 똑같은 날이란 하루도 없습니다. 달력에 적힌 글씨는 1월 1일이나 12월 31일이 똑같을 테지만 늘 해가 다르지요. 같은 봄이라 해도 해마다 다른 봄이에요. 같은 낮이어도 날마다 다른 낮이지요.


  그러니 우리는 날마다 새롭게 깨어날 수 있는 몸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길을 간다고 할 만합니다. 하루하루 아침저녁 밤낮으로 차분한 몸이며 마음이 되도록, 즐거운 마음이며 몸이 되도록, 꿈꾸는 몸이며 마음이 되도록, 노래하는 마음이며 몸이 되도록 다스리고 갈고닦고 추스릅니다.


  《나는 오늘도 수련하러 갑니다》(김재덕, 스토리닷, 2018)를 읽으면, 글쓴이가 걸어오는 배움길 이야기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글쓴이가 어떤 무술이나 수련길을 닦는 일기로 여길 수도 있고, 날마다 똑같아 보이는 몸가꾸기를 하지만 막상 날마다 똑같지 않은 몸가꾸기를 하는 줄 차츰 알아차리는 이야기로 읽을 수 있습니다.


  숨을 쉬어도 똑같은 숨이 없습니다. 물을 마셔도 똑같은 물이 없습니다. 같은 지붕을 바라보며 사는 사이어도 날마다 다른 숨결입니다. 같은 마루를 걷고 같은 마당을 디뎌도 어제하고 오늘이, 아침하고 낮이, 아까하고 이제가 늘 다릅니다.


  늘 다르기에 늘 새로울 수 있고, 늘 다르기에 늘 거듭날 수 있어요. 늘 다른 줄 안다면, 조금 앞서 어긋나거나 어설펐거나 엉성하거나 바보스러웠어도 이를 말끔히 털고서 신나게 다시 할 만합니다.


  배우는 길이란 언제나 고이 흐르도록 살펴서 다스리는 삶길이지 싶습니다. 더 빈틈없는 몸짓을 선보이려는 뜻이 아닌, 몸짓 하나하나에 어떤 마음이 깃들어서 삶을 짓는지 돌아보려는 뜻이지 싶습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온삶을 이루는 걸음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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