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돌멩이의 외침 전태일 50주기 공동 출판 프로젝트 '너는 나다' 5
유동우 지음 / 철수와영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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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2.5.

인문책시렁 164


《어느 돌멩이의 외침》

 유동우

 철수와영희

 2020.5.1.



  《어느 돌멩이의 외침》(유동우, 철수와영희, 2020)은 1978년에 처음 나왔고, 1984년에 다시 나왔으며, 2020년에 새로 나왔습니다. 해묵었다고 여길 분이 있을 테지만, 이 책을 1990년대랑 2000년대랑 2020년대에 새삼스레 되읽으며 돌아보노라니, 오늘날 우리 터전 민낯은 그대로이지 싶습니다. 일꾼은 그럭저럭 일삯을 제법 받을 만큼 나아졌습니다만, 벼슬자리에서 사람들을 깔보거나 억누르는 흐름은 걷히지 않았습니다. ‘일순이가 짓밟혀도 일두레(노동조합)가 먼저’라 여긴 지난날 그 사람들은 오늘날 ‘가시내를 괴롭히고 응큼짓을 일삼았어도 나라힘(정치권력)을 지키기가 먼저’라 여기지요.


  우리는 무엇을 바꾸었고, 아직 무엇이 그대로일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이란, 억눌리는 사람이 사라지는 터전일 뿐 아니라 억누르는 사람도 사라지는 터전입니다. 한켠에서 억눌리는 사람이 있다면, 한쪽에서 억누르는 사람이 있어요. 한구석에서 우는 사람이 있다면, 한복판에서 우쭐대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라힘을 거머쥔 이들은 몇 해째 ‘검찰 바꾸기’를 외칩니다만, ‘경찰 바꾸기·공무원 바꾸기’는 언제 하려나요? 갖은 잘못을 저질렀어도 국회의원이란 자리에 서면 배짱으로 밀어붙이는 이런 판은 언제 바꾸려나요? 눈먼돈을 돌라먹는 창피한 벼슬판·텃사람 고리(지자체·토착세력 유대관계)는 언제 치우려나요?


  우리는 모두 돌멩이입니다. 데구르르 구르는 돌멩이요, 아직 깨어나지 못한 돌머리입니다. 우리는 모두 돌더미입니다. 시키는 대로 굴러가는 돌이요, 아직 스스로 날개를 펼 마음을 깨지 못한 돌부스러기입니다.


  이리하여 《어느 돌멩이의 외침》 같은 책이 태어났습니다. 나쁜짓을 일삼는 이는 저쪽에만 있지 않다고, 우리 스스로 모든 고인물을 털어내고서 우리부터 깨끗하게 일어서서 어깨동무를 하고 아름길로 나아가는 사랑이 되자고 하는 피울음을 갈무리했습니다. 손을 잡아야 함께 살아갑니다. 주먹힘도 돈힘도 벼슬힘도 글힘도 아닌, 오롯이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마주할 적에 이 별이 푸르게 빛납니다.


ㅅㄴㄹ


오야지가 아침에 출근해서 주는 25원짜리 식권 두 장이 전부였다. 25원짜리 식권 한 장이면 회사 지정 식당에 가서 백반 한 그릇을 사 먹을 수 있었으므로 나는 하루 두 끼의 밥을 얻어먹는 것으로 12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밥 두 끼조차 제대로 사 먹을 수 없는 것이 내 처지였다. 왜냐하면 내겐 당시 잠잘 곳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서 내 수입의 전부인 식권 두 장으로 잠자리까지 마련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27쪽)


근로감독관은 “네가 뭘 안다고 근로기준법이니 뭐니 떠드느냐”고 호통을 치더니 “회사에서 요구하는 대로 도장을 찍어 주면 될 게 아니냐”면서 마치 내가 범죄자라도 되는 듯이 다루는 것이었다. (81쪽)


“우리들이 요구하는 것이라곤 항상 사람으로서 최소한의 요구일 뿐입니다.” (124쪽)


부분회장인 양 형까지도 “여자들이 남자한테 좀 맞았기로서니 뭐가 그리 큰일이라고 분회장까지 그럴 필요는 없었잖아! 안 그래도 노동조합을 깨려는 자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판인데 자꾸 적을 만들면 어떡해?” 하면서 화를 내는 것이었다. ‘약한 자의 편에 서야 한다는 기본적인 자세가 없다면 노동조합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기업주에 대해서는 약한 노동자들의 권리가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완력이 센 남성들에게 여성들의 인권이 유린당해도 상관없다는 그런 모순된 논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 (157∼158쪽)


담당 순경으로부터 지독한 손찌검을 당해야만 했다. 손에 가죽장갑을 끼고 주먹으로 얼굴을 마구 난타하는 바람에 내가 앞으로 거꾸러지자 그는 구둣발로 얼굴이며 허리를 마구 짓밟는 것이었다. “이 새끼, 네가 노조 분회장이면 다야! 죽여버릴 거야.”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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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직업 니시카와 미와 산문집 1
니시카와 미와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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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2021.2.5.

인문책시렁 163


《고독한 직업》

 니시카와 미와

 이지수 옮김

 마음산책

 2019.4.30.



  《고독한 직업》(니시카와 미와/이지수 옮김, 마음산책, 2019)을 읽다가 멈추다가 읽다가 멈추다가 했습니다. 이러다가 한참 책상맡에 놓고 잊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 책을 못 읽는가 하고 갸우뚱하며 되읽으려는데, 글님이 속마음을 언뜻 털털하게 드러낸 듯한 책이지만 어쩐지 털털한 듯 꾸민 모습이 썩 와닿지 않아서 그렇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사진을 하든 영화를 하든 살림을 하든 이야기를 하든 모두 같습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간다는 대목에서 어느 자리 어느 때나 매한가지입니다. 어느 곳에서든 스스로 사랑하면 즐겁습니다. 어느 일을 붙잡든 꼭 끝까지 가야 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고독한 직업》은 글님 스스로 영화찍기가 “외로운 일”일밖에 없다고 못을 박고서 이 틀에 맞추려 하면서 어긋나지 싶습니다.


  외롭지 않은 일이 있을까요? 외로워야 할 일이 있을까요? 모든 일은 외로우면서 외로울 까닭이 없습니다. 즐거이 할 적에는 외로운지 아닌지를 안 살핍니다. 안 즐거울 적에는 어쩐지 뭔가 그럴듯한 이름을 붙이거나 내세우고 싶습니다.


  영화를 찍은 삶길을 퍽 부드러이 담아낸 듯하지만, 아무래도 허울이 꽤 짙습니다. 굳이 이런 허울을 붙여야 하지 않는다고 느껴요. 허울이 있다면 허울좋게 살아온 모습을 빙그레 웃으면서 달래면 될 테지요.


  영화를 찍는다면 무릇 여러 사람 앞에 선보여야 하기 마련이라, 속내나 민낯을 감추고서 ‘사람들 앞에서 다르게 보여주기’를 해야 할 테니, 그리고 어느 영화를 끝냈으면 다음길을 가려고 예전 영화를 까맣게 잊어야 할 테니, 여러모로 ‘허울벗기’를 바꾸는 길이 되지 싶은데, 허울을 벗기보다는 허물을 벗는다면 어떨까요? 애벌레가 나비로 깨어나는 ‘허물벗기’로 영화를 삶으로 받아들인다면, 글님이 펼 이야기는 이 책하고 확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ㅅㄴㄹ


“좀더 평범하게 행동했다면 좋았을 텐데.”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이 말했지만, 그 “좀더 평범하게”가 불가능했다. (25쪽)


영화감독이 천직인 타입이라면 또 모를까. 나 같은 기량의 사람에게 영화 촬영은 골치 아픈 일의 연속이어서, 그중 즐거웠던 추억을 내 안에서 곱씹지 않으면 앞으로 계속해 나갈 희망을 잃어버린다. (78쪽)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독실한 불교 가정에서 염불을 아침저녁으로 들으며 자란 나는 친척 언니가 다니던 기독교계 중학교를 동경해서 입시를 위해 보습학원에 다니겠다는 말을 꺼냈다. (202쪽)


떠올리기만 해도 구역질 나는 일이 나중에 돌아보면 본의 아니게 내 인생의 전기가 된 경우가 많다. 이후 나는 두 번 다시 흰종이 위를 나의 왕국으로 여기지 않게 된 것 같다. (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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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 - 사진으로 기록한 재일동포 1세들의 마지막 초상
이붕언 지음, 윤상인 옮김 / 동아시아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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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인문책시렁 161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

 이붕언 엮음

 윤상인 옮김

 동아시아

 2009.3.5.



  《재일동포 1세, 기억의 저편》(이붕언/윤상인 옮김, 동아시아, 2009)은 ‘일본에서 나고자란 한겨레’인 이붕언 님이 ‘일본에서 일하고 살아온 한겨레’인 할머니 할아버지를 찾아다니면서 이야기를 들은 자취를 갈무리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처음부터 일본에서 일하며 살아가지 않았습니다. 붙잡히거나 끌려가야 한 분이 있고, 이 나라에서는 입에 풀바를 길이 없어 떠나야 한 분이 있고, 시달리고 들볶이는 살림이 벅차 건너간 분이 있습니다.


  마을이 아름답다면 누구나 곱게 품습니다. 나라가 사랑스럽다면 누구나 반가이 안습니다. 마을이 아름답지 않기에 한켠에서 울며 괴로운 사람이 있고, 나라가 사랑스럽지 않아 한쪽에서 멍들며 슬픈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나라가 총칼을 벼린다고 할 적에는, 이 총칼로 으레 옆나라로 쳐들어갑니다. 총칼이란 옆사람을 이웃 아닌 밉놈으로 삼아 짓밟고 죽이려고 하는 싸움연모이거든요. 그런데 사람은 총칼로만 이웃을 짓누르거나 죽이지 않아요. ‘개밥도토리’란 말이 있듯 우리 겨레도 스스로 옆사람을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짓을 일삼았습니다. 아무래도 사람하고 사람 사이를 따순 마음이 아닌, 높낮이(신분·계급·돈·이름·힘)로 가르는 틀을 두었으니, 때리는 쪽하고 맞는 쪽이 있기 마련입니다.


  옆에 있대서 이웃이 되지 않습니다. 담 하나를 마주하는 사이라서 이웃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옆에 있는 나라하고 더없이 가까운 사이가 될 만하기에, 우리한테 넉넉한 살림을 나누어 주고, 우리한테 없는 살림을 나누어 받으면 서로 좋겠지요. 나라지기라면 나라하고 나라가 사이좋도록, 고을지기라면 고을하고 고을이 사이좋도록, 마을지기라면 집집이 사이좋도록, 슬기롭게 이끌 노릇입니다


  이곳에 있든 저곳에 있든 똑같이 사람입니다. 이웃나라에서 일거리를 찾아서 살림을 짓고 살아가기에 ‘재일조선인’이라면, 이 나라에서 그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재한조선인’일까요?


  서로 아끼는 가까운 사이는 ‘동무’입니다. 동글동글 어우러지고, 동글동글한 마음이에요. ‘동포(同胞)’란 한자말은 “1.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자매 2. 같은 나라 또는 같은 민족의 사람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이라 합니다만, 글쎄요, 참말로 따스하게 한겨레를 일컬으려고 이 이름을 붙인다는 생각은 터럭만큼도 안 듭니다. ‘우리하고 다르잖아?’ 하는 뜻으로 금을 그으려고 이 이름을 쓴다고 느껴요. ‘한배를 타는’ 사이라면, 한살림을 꾸리는 동무가 되자면, 한사랑으로 나아갈 이웃으로 살자면, 가장 수수한 이름인 ‘이웃·동무·마을’으로 돌아가서 바라보고 어깨를 겯어야지 싶습니다. 이제는 눈물을 닦고 웃음으로 가길 바라요.


ㅅㄴㄹ


“먼 길 오셨네.” “네, 조금요. 이런저런 옛날이야기 좀 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야기할 수야 있지만 한량이 없어서…….” 말문을 연 지 얼마 안 돼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려내렸다. 그 순간,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21쪽)


“일본에 와서 제일 힘들었던 건 그야 탄광이지. 그때가 열예닐곱 살이었으니 아직 어린애잖소. 느닷없이 데려와서는 처박은 거지. 탄광이란 게 어지간해서는 못 배기는 곳이오. 돌덩어리가 머리 위에서 데굴데굴 떨어지는 곳이니까.” 드디어 그는 탄광에서 도망쳤다. (42쪽)


“한국에는 가 보고도 싶다오 태어난 곳은 역시 그리운 법이거든. 그렇지만 생활하기는 어려워. 27년 만에 고향에 갔는데 아무것도 없었수. 저기에 내가 자란 마을이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멀리서 바라보며 울기만 했지.” (49쪽)


일본이 전쟁에서 지자,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으로 옷가지와 가재도구를 전부 팔아치우고 배를 기다렸지만 결국 돌아가지 못했다. (147쪽)


조선에 가면 목숨은 건진다. 인간답게 살 수 있다. 어떻게든 먹고는 산다. 일본에 있는 조선인은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1년 후 일본으로 되돌아오는 밀항선이 끊이지 않았다. “고향에서는 살 수 없어. 돌아가지 마!” 밀항으로 돌아온 조선인들이 목소리를 드높였다. (2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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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
박지웅 지음 / 마음의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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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61


《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

 박지웅

 마음의숲

 2020.11.9.



  《당신은 시를 쓰세요, 나는 고양이 밥을 줄 테니》(박지웅, 마음의숲, 2020)를 읽었습니다. 글님이 짐차를 처음 몰다가 그만 꽈당 부딪힌 이야기를 거듭 돌아보았습니다. 저는 씽씽이를 몰지 않지만, 몇 판쯤 씽씽이한테 치였습니다. 저를 치고 간 씽씽이는 모두 뺑소니였고, 모두 서울에서 겪었습니다. 새벽에 자전거를 몰며 새뜸을 다 돌리고서 이제 쉬러 돌아가는 길에 뒤에서 들이받힌 적이 있고, 헌책집에 책을 사러 자전거를 몰고 가는 길에 또 뒤에서 들이받힌 적이 있습니다.


  한자말로는 ‘자동차’라 하지만, 찻길에서 으레 바람을 가르며 씽씽 달리니 ‘씽씽이’일 텐데, 그야말로 씽씽 물결치는 이 쇳덩이는 어쩐지 자전거를 대단히 미워하거나 싫어합니다. 자전거를 좋아하거나 아끼는 쇳덩이도 더러 있습니다만, 갑자기 뒤에서 아슬아슬하게 밀어붙이며 거님길 턱에 걸리도록 한다든지, 사납게 빵빵거리거나 앞등을 켰다 끄며 괴롭히는 이들이 수두룩했어요. 이들은 짐자전거 아닌 ‘천만 원이나 일억 원짜리 자전거’한테도 이런 짓을 했을까요?


  글님은 글을 씁니다. 글님이니 글을 쓸 텐데, 글님이 쓰는 글은 가늘게 퍼지는 노래입니다. 살아온 길 그대로 쓰고, 살아가려는 길 그대로 씁니다. 사랑하는 삶 그대로 쓰고, 사랑하려는 삶 그대로 쓰지요.


  겨울이 저물려는 1월 끝자락은 매우 포근하다가도 바람이 칼처럼 하늘을 찢으려 합니다. 볕이 잘 드는 풀밭에는 몽실몽실 봄까지꽃이 무리를 이루어 보랏빛 꽃송이를 터뜨립니다. 높바람이 문득 속삭입니다. 아직 겨울이라고, 이제 높바람이 떠나고 마파람이 흐르겠지만, 이 높바람이 할 일이 남았기에 쌩쌩 구름을 날리고 앙상한 가지를 흔든다고, 춥다고 웅크리면 언제나 추위에 떨 테니 어깨를 펴고 높바람을 듬뿍 가슴에 안으라고 …… 합니다.


  바람은 노래합니다. 우리는 춤을 춥니다. 바람이 춤춥니다. 우리는 노래를 부릅니다. 이렇게 이슥하여 별빛이 너울너울합니다.


ㅅㄴㄹ


누가 붙잡아둔다고 가능한 일도 아니다. 스물다섯 사람은 모두 자기가 선택한 시간과 공간을 지킴으로써 자기 자신과 한 화요일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38쪽)


그렇게 서울을 떠난 지 21일째, 고향 부산에 도착했다. 샌들을 신고 대나무 작대기를 짚으며 들어간 고향 집. 어머니는 새까맣게 탄 아들을 보고 “아이고” 소리만 내셨다. 그리고 아들이 짚고 온 대나무 작대기를 몇 년 동안 집에 보관하셨다. (77쪽)


사랑의 유통기한도 갈수록 짧아지고 있습니다. 거대 운석과 충돌하는 순간이 아니라,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인류를 종말을 맞이할 것입니다. (120쪽)


동래 옛집을 떠나 서울로 돌아온다. 서울은 나에게 있어 문명의 대명사처럼 쓰인다. 이 거대 도시에서 살아가면서 내가 가진 생태적 삶이라고는 흙 한 줌뿐이다. (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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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신경림 감수 / 비채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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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58


《사과에 대한 고집》

 다니카와 슌타로

 요시카와 나기 옮김

 비채

 2015.4.24.



  《사과에 대한 고집》(다니카와 슌타로/요시카와 나기 옮김, 비채, 2015)은 어떤 글을 묶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글님은 스스로 노래님이기를 바라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에 묶은 글은 노래일 테지요. 노래꽃 한 자락을 쓰며 글삯을 얼마를 받든, ‘직업사전’이란 책에 ‘노래님(시인)’이란 일이 실리든 안 실리든, 스스로 노래님입니다.


  저는 우리말꽃을 짓는 사람이니 ‘우리말꽃지기(사전편찬자)’일 텐데, ‘직업사전’이란 책에 ‘사전편찬자’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있을까요? 아마 없지 않을까요? 날개를 타고 나라밖으로 나가야 할 때면 으레 ‘일(직업)’도 적어야 하는데요, 저는 ‘Korean-Dictionary writer’나 ‘Korean-Dictionary editor’로 적습니다. “하는 일”이란 바깥으로는 낱말책 쓰기요, 집에서는 집안일입니다. 그래서 곧잘 ‘살림지기’나 ‘살림꾼’으로 적기도 합니다.


  이렇게 적으면 으레 눈살을 찌푸려요. 틀에 안 맞는다고 하면서요. 그러나 일을 어떻게 틀에 맞추나요? 일이 ‘회사원·공무원·노동자·교사’만 있나요? 은행이란 곳에서 일을 볼 적에도 “하는 일”을 적어야 할 때가 있는데, 아무리 보아도 ‘흙지기(농부)’는 안 보입니다. 우리 터전은 삶을 두루 품거나 고루 아우르는 길하고 자꾸만 멀어지지 싶어요. 틀에 맞추거나 가두거나 옭매어서 생각까지 틀박이로 얽어 놓는다고 느낍니다.


  이웃나라 일본이 우리나라를 총칼로 짓밟던 무렵에 ‘한글’이란 이름을 새로 지어서 총칼에 맞선 이들은 일본뿐 아니라 이 나라 임금틀에도 맞섰습니다. 총칼나라가 물러난 뒤에도 매한가지예요. 사람들을 굴레에 가두려는 나라지기나 벼슬아치하고 맞서는 ‘말길’입니다. 배움터에서 달달 외우도록 가두는 그 배움수렁판에서 쓰는 말이 재미나나요? 배움터에서는 글(시·소설·수필)을 글맛이 나게 가르치나요?


  다시 《사과에 대한 고집》으로 돌아와 보면, 아니 내내 이 책을 놓고 빗대어 말했습니다만, 글님은 스스로 재미나고 즐겁게 글빛을 지으려고 했구나 싶은데, 자꾸자꾸 ‘안타깝고 안쓰러운 일본 터전에 시나브로 젖어든’ 빛이 제법 드러납니다. 밥을 먹고서 보임틀에 푹 빠져도 나쁘지 않지만, 밥을 먹고서 맨발로 풀밭을 거닐면 이녁 글빛이 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둘레에 나는 풀을 그때그때 조금 훑어서 밥으로 삼고 해바라기를 하면 이녁 글결이 새로우리라 생각합니다.


  능금은 능금이지요. 배는 배예요. 딸기는 딸기입니다. 언제나 그뿐입니다. 글은 글이요, 사람은 사람이고, 사랑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사랑’ 아닌 다른 낱말로는 나타낼 길이 없습니다. 하늘은 ‘하늘’일 뿐이기에, 창공이나 창천이나 상공 같은 낱말로는 도무지 못 그려요.


ㅅㄴㄹ


빨강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색이 아니라 사과다. 동그라미라고 말할 수는 없다. 모양이 아니라 사과다. 신맛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맛이 아니라 사과다. 비싼 가격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값이 아니라 사과다. 아름다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미가 아니라 사과다. (34쪽)


고구마 먹고 푸 / 밥 먹고 포 / 안 그런 척 헤 / 미안해요 파 // 목욕하며 뽀 / 남 몰래 스 / 당황해서 뿌 / 둘이 같이 뽕 (39쪽)


나쁘지 않다고 책은 생각했다 / 내 마음을 모두가 읽어준다 / 책은 책으로 있다는 게 / 조금 기뻤다 (69쪽)


저녁은 밖에서 먹을 때도 많다. 이제는 조식粗食이 체질에 맞아서 집에 있을 때는 채소를 쪄서 현미밥과 함께 먹는다. 식후는 당연히 텔레비전을 보게 된다. (1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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