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와 이야기 할 수 있는 아이
정필화 지음 / 특수교육 / 1997년 12월
평점 :
품절


마음을 여는 이야기로 빚는 사랑
― 쇼지 사부로, 《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



- 책이름 : 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
- 글 : 쇼지 사부로
- 옮긴이 : 정필화
- 펴낸곳 : 특수교육 (1990.7.24.)


 아이는 새하고도 이야기를 나누고, 쥐하고도 이야기를 나누며, 나무하고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여느 어른은 새는커녕 쥐하고든 나무하고든 이야기를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나, 더 헤아리면 새나 쥐나 나무에 앞서 제 아이하고 옳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어른은 어른끼리도 살가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나하고 돈크기가 다르다거나 선 자리가 다르다거나 사는 집이 다를 때에 선뜻 스스럼없이 말문을 열지 못합니다. 아니, 집 바깥에서 마주하는 사람들에 앞서 집 안쪽에서 오순도순 지낼 살붙이하고 얼마나 깊고 넓게 이야기를 나눌까 궁금합니다.

 아이와 둘이서 읍내 장마당 마실을 다녀오는 길에, 아이는 버스에 타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인사를 합니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내릴 때에 조금만 걸으려고 문 가까운 자리에 앉습니다. 우리는 문 뒤쪽 자리에 아이가 발을 올릴 수 있는 바퀴가 튀어나온 데에 앉습니다. 아이 목소리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들리지 않습니다. 그래도 아이는 꾸준히 인사를 하고, 어르신들이 인사 소리를 못 들어도 씩씩하게 거듭 인사를 합니다.

 아이하고 길을 거닐 때, 아이는 낯모르는 할머니 할아버지한테도 즐겨 인사를 합니다. 낯빛 없이 걷던 할머니나 할아버지들 모두 아이 인사를 받지는 않으나, 꽤 많은 분들은 굳은 얼굴을 펴면서 인사를 받곤 합니다. 길을 걸어가면서 모든 사람한테 인사를 하자면 길을 못 간다 할 만하지만, 생각해 보면 길을 거닐 때에 마주하는 모든 사람하고 인사를 나누는 일이란 하나도 힘들거나 어려운 노릇이 아니에요. 제 어린 날, 동네에서 심부름 하나 하려고 달음박질을 하며 가게에 다녀올 때는 언제나 인사하느라 제대로 못 달리곤 했으나, 그래도 어른들 앞에서 뜀박질을 멈추고 “안녕하셔요!” 한 다음에 어른들이 지나가면 다시 달음박질을 했습니다.

 그런데 인사는 잘 한다지만 이야기는 잘 못하는 내 삶이 아닌가 돌아봅니다. 누구보다 내 어버이하고 형한테 안부 전화조차 자주나 가끔이나마 걸지 못합니다. 생각조차 않는다고 해야 하나요. 옆지기 어머님은 곧잘 안부 전화를 걸어 주시지만, 정작 저부터 옆지기 어머님이나 아버님한테 틈틈이 전화로 잘 지내시느냐 여쭙지 못합니다.

 동무들한테도 새해인사 같은 전화를 잘 안 걸며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도 옆지기한테 흔한 인사말 같은 이야기를 제대로 나누지 못합니다.

 아이하고도, 옆지기하고도, 살붙이하고도, 동무하고도, 마음과 마음을 나누면서 오붓하게 살아야 즐겁습니다. 우리 아이가 누구보다 똑똑하거나 예쁜 아이이든 몸이나 마음 한켠에 아픔이 있든 한결같이 사랑하며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울 고운 마음붙이입니다.


.. 일생 동안 신체상의 결함에 슬픈 일들이 끊이지 않을 이 아이가 걸어가야 할 운명을 생각하니 무척 마음이 아팠다. 이 아이의 행복했던 날은 언제였던가? 어머니 품에 안기고, 할머니 품에 안기던 시절이 이 아이에게 있어서는 가장 행복한 날이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성장해서 밖에 나가서 놀 수 있는 나이가 되니 바깥에는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걸을 수 없었던 때가 오히려 행복했던 것 같다. 성장하니까 이러한 곤욕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성장하지 말았으면’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가끔 떠올랐다. 모든 부모의 마음은 자기 아이가 하루빨리 성장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데, 커 갈수록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을 내 아이에게는 언제까지나 현 상태로 그대로 있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또 울고 돌아왔구나. 남자가 그렇게 약해서 어떻게 한담. 남자는 강해야 한다.”고 절규하듯 말하는 내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  (35쪽)


 《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라는 책을 생각합니다. 소아마비를 앓는 두 아이를 키우며 두 아이를 비롯한 모든 ‘아픈 아이’가 걱정없이 사랑스레 배우며 씩씩하게 자라날 보금자리이자 배움터이자 만남터를 꿈꾸면서 온힘과 모든 돈을 들여 학원 하나 마련한 쇼지 사부로 님 한삶을 담은 책입니다. 쇼지 사부로 님은, 또 쇼지 사부로 님네 아주머님은, 또 아이들은, 늘 누구하고도 마음과 마음으로 사귀거나 만나고 싶어 합니다. 대단하거나 훌륭한 이야기가 아닌 수수하거나 너른 이야기로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4343.12.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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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천상병 지음 / 영언문화사 / 1994년 5월
평점 :
절판


헌책방에서 자그마한 책 하나 찾아 읽기
― 천상병,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 책이름 :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
- 글 : 천상병
- 펴낸곳 : 영언문화사 (1994.4.28.)


 시쓰는 천상병 님 책은 새책방에도 있고 헌책방에도 있습니다. 저는 천상병 님 시모음을 1991년에 인천 인현동에 있는 새책방 〈대한서림〉애서 ‘미래사’에서 나온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로 처음 마주했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헌책방을 다니면서 퍽 묵은 천상병 님 글과 시를 곧잘 만났습니다. 한 해가 흐르고 열 해가 지나면서 천상병 님 책들도 새책방에서는 자취를 감추며 헌책방에 모습을 드러냅니다.

 새책방에서 새책으로 팔리면 천상병 님한테나 출판사한테나 한 푼 두 푼 돈이 되겠지요. 헌책방에서는 제아무리 많이 팔리더라도 돈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도서관에서 널리 읽힐 때에도 돈이 안 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다만,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책이 읽히고 시가 읽힌다면, 새책방하고는 또다른 결과 느낌과 빛깔과 내음입니다. 헌책방과 도서관도 사뭇 다른 맛입니다.

 새책방에서는 누구나 얼마든지 같은 책을 즐겁게 읽습니다. 도서관에서는 모든 사람이 골고루 맛보기는 힘들지만, 차례를 기다려 천천히 책을 맛봅니다. 헌책방에서는 이 책 하나 알아보는 꼭 한 사람만 책을 맛봅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책을 살 수 있는 새책방이요, 요사이는 인터넷으로 주문을 넣으면 택배삯마저 안 받으며 날아옵니다. 도서관에서는 기다리기만 하면 책을 빌려 읽습니다. 헌책방에서는 기다린다 할지라도 못 만나기 일쑤입니다. 찾아다니고 다리품을 오래 팔아도 못 보기 마련입니다.


..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방을 살펴 어머니를 찾았으나 눈에 띄지는 않고 부엌 쪽에서 연기가 나고 있었다. 웬일인가 하고 부엌으로 달려갔더니 어머니께서 무엇인가 태우고 계셨다. 나는 무엇인가 하고 내려다보았더니 이게 웬일인가! 내가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책들을 모두 부엌 바닥에 내려놓고 한 권 한 권 태우고 계시지 않는가! 나는 깜짝 놀라 어머니께 매달리며 “어머니, 왜 책을 불에 태우세요.”라고 다급하게 물었더니 어머니 말씀이 “상병아! 너는 몸도 약한데 책만 읽고 있으니 눈도 나빠질 것이고 이러다가는 너의 건강도 말이 아닐 것 아니겠느냐. 그래서 책이 없으면 읽지 않을 것이니 태워 버리기로 결심을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책을 빼앗아 울며 매달려 조금씩만 읽겠다고 애원했다. 내 생명과 같은 귀중한 내 재산은 바로 돈이 아닌 책이었으니 내 어찌 가만히 있었겠는가 ..  (46∼47쪽)


 천상병 님은 당신 어머님 마음과 사랑을 알았을까요. 옆지기와 아이가 함께 자는 방에서 소리내어 이 대목을 읽으며 내 어릴 적 어머니 모습을 떠올립니다. 우리 어머니가 당신 아들 만화책이며 놀잇감을 몽땅 긁어모아 내다 버린 일은 어떤 마음과 사랑이었을까 곱씹어 봅니다.

 어머니들한테는, 또 아버지들한테는, 그러니까 어버이들한테는 돈이나 책이나 집이나 자동차나 보배덩어리는 하잘것없습니다. 어머니이든 아버지이든 어버이 누구한테든 당신 살붙이하고 아이가 가장 아름다우며 빛납니다. 돈이랑 바꿀 수 없는 짝꿍입니다. 집이랑 바꾸지 않는 아이입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가지, 돈으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사람은 사랑 담긴 밥을 먹으며 목숨을 잇지, 돈으로 사들인 밥으로 끼니를 채운다고 배부르지 않습니다.

 언젠가 누군가 헌책방마실을 하며 《한낮의 별빛을 너는 보느냐》를 읽으며 이 대목에 오래도록 눈길을 멎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한테 읽히지는 못할 테고, 더 많은 사람들이 속속들이 파헤치거나 꿰뚫어보지 못할지라도, 여리고 작은 가슴에 조용히 촉촉하게 스며들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는 헌책방 책시렁 헌책 하나 따순 손길로 어루만질 수 있으려나 궁금합니다. (4343.12.26.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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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박경리 / 현대문학북스 / 1995년 4월
평점 :
절판


내 하루를 빛내는 좋은 길
― 박경리,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 책이름 :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
- 글 : 박경리
- 펴낸곳 : 현대문학 (1995.4.20.)


 도시이거나 시골이거나 해는 똑같이 떨어집니다. 멧골은 해가 일찍 기운다고 하지만, 따지고 보면 도시에서든 멧골에서든 해가 기우는 때는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멧골에서는 이웃 멧자락에 해가 가린다 할 만하니 일찍 기운다고 느낄 만합니다. 또한, 멧골에는 도시가 이루어지지 않는 만큼 더 어둡고 더 추우며 더 쓸쓸합니다.

 시골에서 산다고 늘 자연이나 날씨나 바람이나 물이나 흙을 느끼지는 않습니다만, 도시에서 살아가며 언제나 자연이나 날씨나 바람이나 물이나 흙을 느낄 수 있으려나요.

 시골이 더 나은 터전이요 도시가 더 못난 터전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고운 목숨을 선물받아 꾸리는 내 하루를 얼마나 즐겁고 사랑스레 일굴 만한 보금자리인가를 생각하고 싶습니다. 잎이 모두 진 겨울나무 앙상한 가지를 느끼지 못하는 곳이라면, 찬바람 싱싱 불며 물을 꽁꽁 얼어붙도록 하지 못하는 곳이라면, 가랑잎이 썩어 흙으로 돌아갈 수 없는 곳이라면, 아침에 뜨는 해를 따스히 바라보고 저녁에 뜨는 달을 해맑게 올려다볼 수 없는 곳이라면, 이러한 곳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느끼거나 받아들이거나 헤아리며 살아가려나요. 이러한 곳에서 살아가며 쏟아내는 글에는 무슨 이야기를 담으려나요.


.. 문화는 삶을 위한 틀이며 본이지, 결코 죽음이나 칼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 어떠한 경우에도 이론이란 만들어진 그 순간부터 정체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며, 진행은 그 반대의 개념입니다 … 요즘 문학도 자본주의 식의 상품으로 간주하는 풍조이고 보면, 그러나 문학을 상품으로 생각하는 사람이면 구태여 창작강의를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 옛사람들은 일이 보배라는 말을 했습니다. 나는 일이란 인간에게, 아니 모든 생명에게 주어진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  (198, 243, 255, 301쪽)


 삶을 일구는 문학이고, 삶을 살찌우는 문화이며, 삶을 북돋우는 교육입니다. 삶을 돌보는 과학이고, 삶을 이끄는 운동이며, 삶을 사랑하는 철학입니다.

 삶하고 동떨어졌다면 문학도 문화도 교육도 아닙니다. 삶하고 어깨동무하지 않는다면 과학도 운동도 철학도 아니에요. 정치나 행정도 매한가지입니다. 한결같이 삶하고 나란히 걸어가야 합니다.

 삶은 돈이 아닙니다. 문학도 돈이 아닙니다. 책도 돈이 아닙니다. 사진 한 장 또한 돈이 아니에요.

 사람이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 아이와 내 어버이가 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인생은 결코 장식이 아니며 문학도 장식이 아닙니다 … 문학은 학문같이 처음부터 체계적인 것으로 출발하지 않습니다. 삶이라는 외길을 나타내기 위하여 작가는 세상의 온갖 것을 다 수렴해야 합니다 … 문학은 공부하는 것이 아니며 느끼는 것이며 판단하는 것이며 온갖 것이 다 널려 있는 세상을 보는 눈에 의한 것입니다 ..  (302, 303, 306쪽)


 《토지》라는 작품을 읽으려는 분이나 읽은 분이라면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에게》를 함께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가만히 생각합니다. 문학을 바라는 젊은이란, 삶을 바라는 젊은이입니다. 삶을 바라는 젊은이란 언제나 내 넋을 젊게 보살피고픈 사람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고픈 사람들한테 박경리 님 스스로 당신 삶을 어떻게 사랑해 왔는가를 조곤조곤 살몃살몃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책 하나가 싱그러이 태어났으나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4343.12.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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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금지 - 구와바라 시세이 사진집, 눈빛의사진 4
구와바라 시세이 지음 / 눈빛 / 199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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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을 이야기하는 사진을 찍는다
― 구와바라 시세이, 《촬영금지》



- 책이름 : 촬영금지
- 사진ㆍ글 : 구와바라 시세이
- 옮긴이 : 김승곤
- 펴낸곳 : 눈빛(1990.9.3.)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지난 2003년, 《다시 보는 청계천, 1965―그 후 38년》(김영섭화랑》이라는 사진책을 펴냈습니다. 이때 ‘1965년에 찍은 청계천 모습’을 서울 인사동에 자리한 ‘김영섭화랑’에서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찍은 청계천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문득 ‘에드워드 김’이라는 분이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일하던 때 남녘땅으로 돌아와서 《민주복지의 길》(1980)이라는 두툼한 ‘새마을운동 찬양 사진책’을 냈던 일이 떠오릅니다. 두 사람 사진책에는 똑같이 ‘웃는 얼굴’이 자주 보이는데,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찍은 ‘나라님들이 생각하기에 꾀죄죄하다’고 하는 그 청계천 사람들도 ‘웃는 얼굴’이고, ‘새마을운동 지도자로 뽑히고 새마을모자를 꾹 눌러쓴’ 그 ‘박정희 각하 만세’를 외치던 사람들도 ‘웃는 얼굴’입니다. 더욱이 《민주복지의 길》에는 거수경례를 하는 전두환 얼굴이 큼직하게 실리기도 합니다.


.. 그러한 한국에 내가 강하게 이끌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한 마디 말로 얘기하는 것은 어쩌면 불손한 표현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이 시기의 한국에서는 한국인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치열하고 장대한 드라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한국이 남태평양의 산호초로 둘러싸인 평화로운 섬나라였다면 굳이 내가 취재하고자 마음먹지 않았을 것이다 … 한국은 분명 여러 가지 면에서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풍요로운 시기를 맞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격동의 시대가 종식된 것은 아니다 ..  (7쪽)


 한국을 이야기하는 사진을 찍는다고 하는 분들은, 으레 서울 남산에 올라가서 시내를 죽 내려다보는 사진을 싣고, 경주나 설악산이나 한라산에 가서 ‘아름다운 자연’을 담는 사진을 싣습니다. 같은 서울 하늘이라고 해도, 여느 사람들 살림집을 담는 일은 몹시 드뭅니다. 어쩌면, 사진쟁이 스스로 ‘여느 사람’이 아니라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여느 사람 살림집을 모를 수 있어요. 여느 사람 살림집이 어느 골목에 있는 줄 모를 수 있고, 골목길이 어떠한 곳인가, 아니 골목길이 어디에 있는가조차 모를 수 있습니다. 나라안에서는 김기찬 님만이 《골목안 풍경》을 담아서 사진책으로 묶었는데, 어쩌면 사진쟁이 스스로 ‘골목길을 안 다녔’거나 ‘골목길을 하나도 모르기’ 때문에, 아니 ‘골목동네에서 가난한 이웃이랑 가난하게 살아가지 않기’ 때문에, 여느 사람 살림살이나 삶터나 이야기는 조금도 사진책으로 꾸며지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 한국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찍은 몇 장의 사진은 본의 아니게도 주일 한국대사관이나 한국인의 긍지에 상처를 입히는 결과를 초래했다 …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피사체는 한국의 체제 쪽에서는 비판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는 것들이 대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체제의 치부를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랐다 … 나는 나의 표현이 사실을 왜곡하지 않았다는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당국의 부당한 주의에 불쾌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  (15쪽)


 ‘가난’이 무엇일까 하고 늘 생각해 봅니다. 오늘 제 삶이 가난한지, 제 동무들 삶이 가난한지 돌아봅니다. 돈이 얼마나 있어야 가난이 아니며, 돈이 얼마나 없어야 가난인지를 헤아립니다. 저처럼 통장에 남은 돈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가난한지, 통장에 남은 돈이 제가 보기에 무척 많다고 느껴지지만 그 통장 임자로서는 아직 한참 모자라다고 느낀다면, 그분이 가난한지요.

 정치꾼들이 입에 올리는 ‘서민’이란 어떤 사람인지 되뇌어 봅니다. 어떤 집에서 살아야 서민이고, 어떤 일을 해야 서민이며, 어떤 살림을 꾸려야 서민일까요. 서민 경제는 무엇이고, 서민 문화는 무엇이며, 서민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요.


.. 그러나 덕수궁의 마당에서 사흘 간에 걸쳐 가면극이 벌어지고 있을 때, 광주에서는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남녘땅 빛고을에서 빚어진 피의 참사를 그 당시의 서울사람들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성스러운 선혈이 뿌려진 광주로부터 직선거리로 268킬로미터 떨어진 서울에 있으면서도 광주의 현상을 목격하는 일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장에 갈 것을 갈구하면서도 갈 수 없었던 보도사진가에게는 단 한 장의 사진조차 없다. 역사의 현장에 참가할 수 없었고, 그것을 기록할 수 없었던 분함은 패배감에서 오는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의 좌절이었다 … 보도사진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영상을 기록하는 일에 모든 정열을 바쳐야 한다. 현장을 밟지 않는 자는 그 역사를 말할 자격이 없는 한낱 패배자에 불과하다. 지금 한국의 사회는 열려 있지 않은가. 온돌방에 언제까지나 누워 있어서는 안 된다. 자! 밖으로 나가자 ..  (25∼26쪽)


 《촬영금지》라는 사진책을 처음 만나던 때, 《보도사진가》라는 사진책을 처음 만나던 때, 그리고 《다시 보는 청계천, 1965―그 후 38년》이라는 사진책을 만나던 그러께를 뒤돌아봅니다. 한국 사진쟁이가 안 찍으니까 일본 사진쟁이가 이런 사진을 찍는구나 싶습니다. 일본 사진쟁이가 1960년대부터 여태까지 부지런히 사진을 찍고 있지만 한국 사진쟁이는 예나 이제나 참 안 찍는구나 싶습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 사진이 뭐 대단한 작품이겠습니까만, 이만 한 사진조차 안 찍는 한국 사진쟁이 흐름임을 헤아려 본다면, 구와바라 시세이 님 사진 따위는 ‘사진이 아니야’ 하고 생각하는 한국 사진쟁이 얼굴이 아닐까 싶어요.

 가끔 생각이 나서 구와바라 시세이 님 사진책을 책꽂이에서 모조리 끄집어 내어 바닥에 펼쳐 놓고 하나씩 넘겨 봅니다. 다른 일본 사진쟁이 책도 하나둘 꺼내어 바닥에 함께 놓고 펼칩니다. 그렇지만 이런저런 일본 사진쟁이 사진책 옆에 나란히 놓을 만한 한국 사진쟁이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제 주머니가 가벼워서 몇 권 못 샀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제 가벼운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장만하고픈 한국 사진쟁이 책은 그다지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4341.7.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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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잠 속에 비 내리는데
이외수 지음 / 동문선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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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바나나·아쮸끄림
― 이외수,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


- 책이름 :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
- 글 : 이외수
- 펴낸곳 : 여원 (1988.4.1.)


 이름난 사람이 그리 이름나지 않을 무렵에 쓴 책이기에 새로운 출판사를 만나 새삼스레 다시 나오는 책이 있습니다. 썩 이름나지 않은 사람이 더욱 이름나지 않을 때에 쓴 책이라서 새로운 출판사는커녕 아무런 출판사를 다시 만나지 못해 오래도록 헌책방 책시렁 한켠에 묻히다가는 그예 사라지는 책이 있습니다.

 널리 읽힌다고 다 좋은 책이 아닙니다. 한 사람이 알아본다고 해서 모두 좋은 책이 아닙니다. 책은 그저 책입니다. 새롭게 되읽히면 새롭게 되읽히는 대로 좋고, 한 사람이 알아보는 아름다운 넋이면 이와 같은 넋 그대로 좋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자세(293쪽)”를 당신 글 어디에나 고이 담고 싶다는 뜻을 밝히며 적바림한 책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는 끊일 듯하면서 끊이지 않고 새옷을 입으며 새로운 책손을 만납니다. 아마, 이외수 님은 나날이 더 이름을 얻고 날마다 새로 책손을 사귀겠지요. 《내 잠속에 비 내리는데》이든 다른 소설이든 수필이든 오래도록 사랑받을 만하리라 봅니다.

 그러면 이외수 님 문학에서 무엇을 들여다볼 만하기에 이외수 님 책을 뒤적일 만할까요. 이외수 님 문학을 읽는 내 삶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넉넉히 거듭날 만하기에 굳이 헌책방 책시렁을 뒤적여 먼지를 탁탁 털어 장만할 만할까요.


.. 가격을 물으니까 참외 한 개의 값이 거의 연탄 스무 장 값과 맞먹는 액수였다. 하지만 나는 냉방에서 자는 한이 있더라도 마누라에게 참외만은 사다 주고 싶었다. “봉투에 넣어서 깨끗한 종이에 포장해 주십시오.” 나는 세 개를 샀다. 돈이 모자라서였다 … 솔직이 말해서 한 개 정도는 나도 먹고 싶었으나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  (85쪽)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즐거이 살고, 가면 살림이면 가면 살림대로 기쁘게 살아갑니다. 가난하다 해서 이웃하고 사랑을 못 나누리란 법이 없습니다. 가면 살림이어야 비로소 이웃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지 않습니다. 가멸게 살아가며 이웃사랑 한 줌 없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요. 가멸게 살면서 ‘아직 배고프다’ 하고 말하는 사람이 몹시 많습니다.

 저는 이외수 님이 가난을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아 반갑습니다. 자랑하거나 뽐내지 않을 뿐더러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고 느껴 고맙습니다. 가난하던 이외수 님은 가난하던 결 그대로, 없는 주머니를 털거나 동무한테서 돈을 빌었습니다. 입덧하는 옆지기한테 연탄 말고 참외를 사다 줍니다. 정갈한 종이봉지에 참외 세 알을 담아 대접합니다.

 아이 밴 옆지기를 돌보며 살림을 꾸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렇게 살아갑니다. 아픈 옆지기를 보살피며 살림을 일구는 사람일 때에도 언제나 이처럼 살아갑니다.

 어른 버스표가 110원 하던 때에 바나나는 한 송이가 아니라 한 알이 500원이었습니다. 그무렵 어머니는 당신 아이가 썩은이 때문에 이를 뽑거나 고쳐야 하면 당신 버스표 다섯 장어치 값이 되는 바나나 한 알을 아낌없이 사 주었습니다. 당신 아이는 바나나 한 알을 눈물 글썽이며 고맙게 받아 아주 오래도록 아주 천천히 씹으며 먹었습니다.


.. 눈치 빠르신 분들은 대번에 알아차리셨겠지만 결코 낙관적인 안목에서 표현되어진 말은 아니다. 대학생이 국화빵이라면 대학은 그 국화빵을 찍어내는 빵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개성이라는 것을 찾아보랴. 한결같이 똑같은 모양, 똑같은 무늬, 똑같은 크기를 가진 것이 바로 국화빵이다 … 잘 아시겠지만 지성이란 지식과는 달라서 많은 법칙을 기억하고 많은 공식을 기억하고 많은 단어를 기억하고 많은 인명이나 연대를 기억한다고 해서 절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지성은 지식을 통한 깨달음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두뇌에 있지 않고 가슴에 있다 ..  (231∼232쪽)


 스물아홉 달째 함께 살아가는 우리 딸아이는 ‘아쮸끄림’ 노래를 부릅니다. 시골집에서는 얼음과자를 사 주지 못합니다. 읍내에 나가야 비로소 사 주지요. 어쩌다가 읍내에 마실을 가서 얼음과자를 사 주면, 아이는 거의 한 시간쯤 걸려 먹습니다. 겨울이라 더디 녹으니 오래오래 먹는데, 여름에는 그만 녹아 줄줄 흐릅디다. 그래도 아이는 얼른 먹으려 하지 않습니다. 맛난 고마운 먹을거리를 천천히, 아주 더디게 즐기려 합니다. (4343.12.2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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