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헌책방 책갈래는 어떻게 나누는가


 책은 우리 손으로 펼쳐서 우리 눈으로 읽는 가운데 우리 머리로 새겨서 우리 마음에 받아들입니다. 다른 이가 책을 쥐어 펼쳐 줄 수 없습니다. 다른 이 눈으로 읽을 수 없습니다. 다른 이 머리로 새길 수 없습니다. 다른 이 마음으로 곰삭일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책읽기는 오로지 우리 스스로, 우리 힘만으로 하는 일이나 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즐겁게 어울려 놀 때는, 놀이규칙을 저희들끼리 잡습니다. 놀 곳도 저희들끼리 찾습니다. 놀 사람도 저희들끼리 부르고 모읍니다. 누가 시킨다고 놀 수 있지 않아요. 누가 시킨다고 더 잘 놀 수 있지도 않습니다. 스스로 내켜서 하는 놀이요, 스스로 신나기 때문에 즐기는 놀이입니다.

 반갑게 손에 쥐어 읽을 책이라면 우리 스스로 찾아낼 때, 신나게 뛰면서 이마에 땀이 맺힐 놀이라면 우리 스스로 뒹굴 때 가장 반갑고 좋지 싶습니다. 때때로 다른 사람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책이든 놀이든 늘 우리 힘으로 우리 스스로 즐길 때가 가장 재미나고 뿌듯하고 보람이 있다고 느낍니다.

 널찍한 큰 책방에 가든 도서관에 가든, 가만히 골마루를 누비며 책꽂이를 살피다 보면, 책갈래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우리 스스로 느낄 수 있습니다. 따로 누구한테 묻지 않아도 책이 저절로 보입니다. 꽂혀 있는 책에 따라 우리 몸이 맞춰지니까요.

 일본으로 나들이를 떠나거나 인도로 나들이를 떠나거나 이집트로 나들이를 떠날 때는, 일본을 느끼고 인도를 살피고 이집트를 부대끼고 싶기 때문입니다. 파리를 간다면 파리사람들을 만나고 파리밥을 먹고 싶기 때문입니다. 코펜하겐에서는 코펜하겐에만 깃든 모습을 보고 싶으며, 부다페스트에서는 부다페스트에서만 만날 수 있는 모습과 함께하고 싶겠지요. 책방 교보문고를 간다면 교보문고에서만 느낄 수 있는 책을, 책방 영풍문고를 간다면 영풍문고에서만 만날 수 있을 책을 느낄 수 있다면 가장 좋지 싶어요. 우리가 미국 모습을 느끼고 싶어 일본을 찾지 않잖아요. 이집트에 가서 프랑스밥을 먹을 생각은 아니겠지요. 헝가리에 가서 독일 문화를 찾을 수 있을까요.



 고향동무를 만날 때에는 고향에서 나고 자란 살가움을 나눕니다. 학교동무를 만날 때에는 함께 학교를 다니며 부대낀 옛이야기를 나눕니다. 일터동무를 만날 때에는 같은 길을 걸으며 느끼는 온갖 세상과 삶을 나눕니다. 사랑동무를 만날 때에는 서로한테 느끼는 애틋함을 부대낄 테고요.

 새책방을 갈 때에는 새책방 책을, 도서관을 갈 때에는 도서관 책을, 헌책방을 갈 때에는 헌책방 책을 만납니다. 부대낍니다. 손에 쥡니다. 찾고 살피고 헤아립니다. 자연스럽게. 같은 새책방이라지만 교보문고와 영풍문고가 다릅니다. 대전 대훈서적과 전주 홍지서림이 다릅니다. 인천 대한서림과 광주 충장서림이 다릅니다. 같은 도서관이라지만 국립중앙도서관과 사직동 도서관과 대학교 도서관은 다 다를 테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헌책방이라지만 서울 청계천과 부산 보수동이 다릅니다.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과 용산에 있는 헌책방이, 대전 원동에 있는 헌책방과 청주 중앙로에 있는 헌책방이 다릅니다. 제주시에 있는 헌책방과 춘천시에 있는 헌책방이 같을까요. 다 다르겠지요.

 꼭 찾아야 할 책이 있어서 쪽지에 책이름을 적어 놓고 찾아간다면, 책방마다 어떻게 다른 모습으로 책살림을 꾸리는지 살필 일이 없습니다. 그냥 책이름을 부르고, 그 책이 있으면 사고 없으면 안 사면 그만이니까요. 하지만 꼭 찾아야 할 책이 아니라, 내 마음을 움직이는 즐거움과 보람을 선사하는 책을, 그러면서 아직 내가 모르는 책을, 어렴풋이 스친 적은 있으나 제대로 속살을 맛보지 못한 책을 찾는 몸가짐이라면, 책방을 찾는 우리들 눈에 들어오는 책이 다릅니다. 책방 나들이도 한결 다릅니다. 널찍한 교보문고에서 서너 시간 또아리를 틀고 책을 살피겠지요. 조그마한 헌책방구석에서 네다섯 시간 쭈그리고 앉아서 책을 살피겠지요.

 넓은 새책방과 도서관이라 해도, 좁은 헌책방이라 해도, 이삼십 분 느긋하게 죽 둘러보면 책갈래를 어떻게 나누었는가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책은 여기에 있고 저런 책은 저기에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마음에 와닿을 책을 바라는 마음으로 둘러보면 온갖 책이 다 눈에 뜨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사려는 어떤 책이름 몇 가지만 머리에 넣고 있으면 책꽂이가 안 보입니다.

 요즘 사람들 책방 나들이 모습을 지켜보면, 다리품을 팔거나 시간을 들여서 자기가 읽을 책을 찾는 분들이 자꾸자꾸 줄어드는구나 싶습니다. 다른 이들이 추천하고 칭찬하는 책, 흔히 좋다고 하는 책을 찾아서 읽는 일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남들 말이 아닌 자기 말로, 그러니까 남들이 좋다고 하든 싫다고 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한테 가장 좋을 책을 찾는 눈매와 손길이 자꾸자꾸 사라집니다. 어쩌면, 유행 따라 살고 유행 따라 옷 갖춰 입고 유행 따라 머리 손질 하고 유행 따라 돈버는 일자리 바꾸는 요즘 사람들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큼직한 책방 교보문고를 찾아가는 까닭이, ‘교보문고가 갖춘 수많은 책을 두루 구경하기’가 아니라 ‘마일리지 쌓기’이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동네책방에서 얼마든지 살 수 있고 주문해서 받아 볼 수 있는 책을 구태여 먼 나들이를 하며 교보문고에서 사야 할 까닭이 있을까요. 컴퓨터를 켜서 인터넷책방에 주문한 뒤 택배로 며칠 뒤에 받아 보는 데에 걸리는 시간과, 동네책방에 전화한 다음 손수 책방을 찾아가서 찾아오는 데에 걸리는 시간을 견주면 어느 쪽이 더 알뜰할까요. 요새는 동네책방에 책 주문을 넣어도 하루나 이틀이면 책방으로 들어옵니다. 다만, 동네책방에 주문을 넣으면 자기 몸을 움직여야 할 뿐입니다. 그렇다면 동네책방이 어디 먼 외딴곳에 있나요. 가게에 장보러 오가는 길에, 일터에 오가는 아침저녁 길에, 동무를 만나러 나들이하는 길에 동네책방에 잠깐 들를 짬이 안 날는지요. 컴퓨터 자판 또닥거리며 주문을 넣는 시간이 참말로 ‘짧’을까요.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 같은 책을 사도 좀더 값싸게 살 수 있어 좋기도 합니다. 책을 값싸게 사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책값 싸게 얻는 일에만 마음을 쓴다면, 헌책방 나들이를 아무리 오래도록 많이 즐겨도 ‘싸구려’ 하나만 얻을 뿐입니다. 인터넷책방으로 책을 주문하는 일이 다리품을 덜어 준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마음을 써서 세상을 부대끼는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오로지 ‘손쉽게’ 살아가는 길만 느낄 뿐입니다. 헌책방 나들이는, 첫째,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먼저 알아본 책을 사는 일입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새책이지만, 이 모든 새책이 새책방 책꽂이에 고스란히 꽂히지 못합니다. 팔리면 살아남고 안 팔리면 곧바로 사라집니다. 언론매체에서 눈길을 두며 소개해 주는 책은 그야말로 몇 가지 안 됩니다. 그러면 이 책들은 ‘안 읽을’ 만하기 때문에 소개도 못 받고 팔리지도 못한 채 사라져야 할까요. 헌책방은 이런 모든 책을 푸대접하지 않고 모두 똑같은 대접으로 받아들여 주는 곳입니다.

 둘째,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사서 읽은 뒤 내놓은 책을 샛장수와 헌책방 임자 두 사람이 ‘다시 새숨을 불어넣어 팔 만한 값어치가 있구나’ 하고 느끼며 갖춘 책을 사는 일입니다. 사람마다 보는 눈길이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며 품은 생각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읽을 책이 다르고 읽어서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느낌이 다릅니다. 이 다름이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가로지를 수 있다면 헌책방 책꽂이에 살아남습니다. 쉰 해가 지난 책이라 해도, 책겉이 다 낡은 책이라 해도, 나라밖 말로 된 책이라 해도.

 셋째, 어떤 책을 읽으면 좋다고 할 때, 모든 사람이 온돈을 주고 사서 보지 않아도 좋도록 나눔을 베푸는 일입니다. 도서관은 책 문화를 골고루 누릴 수 있도록 이어 주는 곳입니다. 문을 열어 주는 곳입니다. 책을 꼭 돈 주고 사서 읽어야 하지는 않으니까요. 참말 좋은 책인데 비싸서 버겁다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면 됩니다. 또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도서관에서 책 빌려 읽기가 참 어렵습니다. 모든 책을 두루 갖춰 놓고 있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도서관에서 버리는 책은 얼마나 많은가요. 이리하여 도서관에서마저 버리는 아까운 책을, 한 번 버려지면 다시 찾을 길 없는 책을, 새책방에서 판이 끊어진 뒤 자취를 알 수 없는 책을, 어디에서 만날까요. 어디에서 찾을까요. 바로 헌책방입니다. 헌책방이 없다면 ‘판이 끊어진 책’과 ‘도서관에서 버린 책’을 만날 길이란 영영 없어지는 우리 나라입니다. 도서관은 책 살 돈이 없는 우리들한테 고마운 나눔터 몫을 하는데, 헌책방은 마냥 빌려서 읽기만 하기에는 어려운 책을, 그리고 새책보다 눅은 값으로 살 수 있도록 해 주기도 합니다.

 넷째, 소중한 자연 자원을 덜 쓰도록 하며 ‘다시쓰기’ 마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책 한 권을 한 사람만 읽도록 만든다면 자연 자원은 너무나 많이 들어야 합니다. 책 한 권을 두 사람이 읽을 수 있다면, 열 사람이나 백 사람이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주머니돈을 털어서 사 읽는 책이라 해도, 나중에 다른 누군가가 읽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아끼고 돌볼 수 있으면 좋습니다. 우리가 죽은 뒤에는, 우리가 사들인 책이 누구 손에 갈까요. 우리가 살아 있는 날만 생각한다면 자연 삶터는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다섯째, 지역에 읽을거리가 돌고 돌도록 하면서 스스로 지역 문화를 가꾸는 일입니다. 헌책방은, 이 헌책방이 깃든 지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읽고 즐기는 책이 있는 곳입니다. 지역 헌책방을 보면 그 지역 사람들 책문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동네책방이 잘되는 곳은 헌책방도 잘됩니다. 동네책방이 죽을 쑤거나 사라지는 곳은 헌책방도 죽을 쑤거나 사라집니다. 동네새책방과 동네헌책방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라면 동네 문화, 곧 지역 문화도 따로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돈이 으뜸이요, 이름값 날리며 자기 혼자만 떵떵거리고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는 동네새책방과 동네헌책방이 발붙일 틈이 없습니다. 책읽기란, 언제까지나 자기를 낮추며 배우는 일이기 때문에, 책읽는 소리가 조곤조곤 마을을 감도는 곳에는 늘 싱싱한 기운이 감돌고 젊음이 무럭무럭 자라납니다. 책읽는 소리가 사라진 마을은 술주정 소리와 고기굽는 소리로 뒤덮일 뿐입니다.



 여섯째,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겉보다 속을 살피는 눈길을 가꾸며, 우리 스스로 자기한테 참답게 무게를 두며 돌보고 사랑하고 아낄 곳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가는 삶이 즐거운 삶인지 돌아보도록 하는 일입니다. 김치국물이 튀었다고 해서 책 줄거리에 김치국물이 묻지 않으니까요. 낡은 갱지로 찍은 책이라 해서 책 줄거리가 낡아 버리지 않으니까요. 빳빳한 종이에 찍은 책이라고 줄거리도 빳빳해지나요? 곱고 하얀 종이에 찍는 책이라고 줄거리도 곱고 하얗던가요.

 나눌 줄 아는 마음, 기꺼이 자기 것을 함께할 수 있는 마음, 언제라도 고개숙일 줄 알며 자기가 모르는 것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배울 수 있는 마음, 껍데기나 유행에 마음 빼앗기지 않고 곱다시 자기 줏대를 지키며 튼튼하고 다부지게 추스르고 매만질 수 있는 마음을 얻거나 나누는 곳이 헌책방이라고 느낍니다. 이런 헌책방들은 저마다 책갈래가 다릅니다. 크기도 다 다른 헌책방이고, 마을마다 책갖춤새도 다를 뿐 아니라, 헌책방 꾸리는 분들 마음과 생각도 다 다릅니다. 이리하여 그 작은 헌책방들도 책꽂이 매무새를 살피자면 느긋하게 이삼십 분 둘러보아야 합니다. 바삐 살피는 눈으로는, 건성으로 스쳐 지나가는 몸으로는, 쪽지에 적은 책이름만 읊으려는 입으로는, 조용히 우리들을 부르는 책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못하는 귀로는 헌책방 헌책을 느낄 수 없습니다.

 헌책방 한 곳 책꽂이를 느끼는 일은, 그 헌책방 한 곳을 꾸려나가는 책살림을 보는 일인 한편, 그 헌책방이 깃든 마을 문화를 헤아리는 일이며, 많은 사람들이 사서 읽는 책흐름을 짚는 가운데 자기한테 가장 알맞을 책 하나를 건져올려야 하는 몸바침이고, 먼저 임자-샛장수-헌책방 임자 이렇게 세 사람 손길을 느끼는 일입니다.

 헌책방 책갈래 살피는 일이란, 자기가 좋아하는 일거리를 찾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살필 때와 마찬가지입니다. 책을 읽으려면 자기 시간을 들여야 하는데, 아무 책이나 대충 고를 수 없겠지요? 적어도 한두 시간은 들여서 읽는 책인데, 대충대충 유행하는 책을 찾아서 읽어야 할까요? 그럴 바에는 아예 아무 책도 안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자기한테 반가울 책을 찾아서 읽어야 좋잖아요. 자기 삶을 가꿀 책을 찾아서 읽어야 좋잖아요. 자기한테 즐겁고 재미가 넘치는 책을 읽어야 좋잖아요. 남들이 읽어서 좋았다는 책이 아니라, 내가 읽어서 좋을 책을 찾아서 읽어야 좋잖아요. 그러자면, 헌책방 책갈래 나눔은 우리들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들 스스로 느껴야 합니다. 사람마다 좋아하거나 바라는 책이 다른 만큼, 자기가 좋아하거나 바라는 책은 어느 자리에 얼마만큼 꽂혀 있는지, 얼마나 갖추고 있으며 어느 때에 들어오는지 느껴야 좋습니다. 한편, 자기가 딱히 좋아하지는 않으나 자기 생각과 머리를 가꾸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어느 자리에 어떻게 있는가를 돌아볼 수 있겠지요. 내 이웃을 느끼듯이, 내 동무를 생각하듯이, 내 어버이와 내 딸아들을 헤아리듯이.

 헌책방 책갈래는 우리들이 사서 읽은 책을 중심으로, 그 다음으로는 우리가 사서 읽은 뒤 기꺼이 내놓는 책을 중심으로 갖추어 놓고 나누어 놓습니다. 헌책방 책갈래가 엉성해 보인다면, 또 흐지부지 어수선해 보인다면, 또 거의 나눔이 없어 보인다면, 이런 모습으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헌책방 책갈래가 퍽 꼼꼼하고 알뜰하며 재미있다면, 이런 모습으로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파리에는 파리 문화가 있고 도쿄에는 도쿄 문화가 있습니다. 헌책방에는 헌책방 문화가 있습니다. 신촌 ㅈ헌책방에는 ㅈ헌책방 문화가 있습니다. 노량진 ㅈ헌책방에도 ㅈ헌책방 문화가 있습니다. 인천 ㅇ헌책방에는 ㅇ헌책방 문화가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들은 대구 ㄷ헌책방을 찾아가면서도 ㄷ헌책방 문화를 느끼거나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맛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수원 ㅇ헌책방을 찾아가면서도 수원 ㅇ헌책방에만 있는 문화를 돌아보거나 만나거나 부대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만날 수 있는 책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어떤 책을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들이 헌책방 나들이를 해서 얻는 보람이나 즐거움이란 무엇일까요? (4340.1.2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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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가 왔어요 답장도 썼어요
모리야마 미야코 지음, 히로세 겐 그림, 양선하 옮김 / 현암사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 수수한 즐거움이지만, 책을 덮으니 아쉬운


책이름 : 편지가 왔어요, 답장도 썼어요
글 : 모리야마 미야코 / 그림 : 히로세 겐
옮긴이 : 양선하
펴낸곳 : 현암사(2006.11.15.)
책값 : 7800원


 지난 한 주, 자전거를 타고 충주부터 부산까지 달렸습니다. 부산으로 가는 길에 틈틈이 우체국에 들러 엽서를 한두 장 산 다음, 아는 분들한테 먼 곳 소식을 띄웠습니다. 상주에서 한 통, 대구에서 두 통, 부산에서 한 통 띄웠습니다. 피시방에 들러 인터넷에 들어가 또각또각 자판을 두드리면 몇 초 만에 편지가 가기는 하지만, 지역 우체국 도장이 쿵 찍힌 엽서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제가 이런저런 곳에 발을 내디뎠다는 자취를 남기고도 싶고, 제가 다니면서 부대낀 여러 가지를 엽서 한 장에 담아 함께 나누고도 싶었거든요. 편지쓰기는 소식을 알리는 구실을 하는 한편, 저마다 다른 삶터에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담습니다. 몸은 멀리 떨어져 있으나 마음은 가까이 있음을 느끼게 한달까요.

 사람 사는 이 세상입니다. 그런데 사람 사는 이 세상에서 사람 냄새를 느끼기 참 어렵습니다. 사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나, 자기 곁을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물결을 사람으로 느끼는 이는 아주 드문 듯합니다. 피붙이나 고향동무를 애틋하게 그리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일터식구들한테 마음쓰는 분은 또 얼마나 되지요? 입으로는 사람이 중요하다고 뇌까리지만, 정작 우리들 움직이는 몸놀림을 보면, 이웃사람한테는 조금도 마음을 안 쓰고 자기만 잘되고 잘살기를 바라지 싶어요.

 이야기책 《편지가 왔어요, 답장도 썼어요》는 이제 막 익힌 ‘글’을 어떻게 몸에 익히면 좋을지를, 또 내 둘레에 어떤 사람들이 살아가는가를 가만히 돌아보도록 이끕니다.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며 글을 배우고 셈을 배우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이들은 왜 책을 읽어야 하고 학교에서 동무들과 어울려야 하며 여러 가지 과목을 배워야 할까요. 아이들한테 한자며 영어며 마구마구 가르치려 하는 사람은 많아도 ‘아이들 스스로 왜 배워야 하나’를 느끼도록 먼저 길잡이 노릇을 하는 부모나 교사는 거의 안 보입니다. 또한, 부모나 교사 스스로도 ‘아이들한테 무언가를 가르치는 까닭과 보람’을 못 느끼지 싶어요.

 《편지가 왔어요, 답장도 썼어요》에 나오는 아기곰 뿌뿌는 어느 날 길에서 가방 하나를 주웠고, 이 가방 임자를 찾아 주면서 토끼 할머니를 알게 됩니다. 아직 자기 집 둘레 작은 삶터만 아는 아기곰이었는데, 퍽 멀리 떨어진 마을에 사는 할머니를 알게 되고 편지를 받으면서 세상 보는 눈을 넓히고, 맞춤법도 엉망이었던 자기 글도 차츰 가다듬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할머니한테 보내는 편지에 담을 이야기를 둘레에서 얻습니다. 그동안 대충 스치고 지나쳤을 법한 일들, 동무들과 어울리는 삶을 하나하나 되새기고 돌아봅니다. 이리하여 이웃을 걱정하는 마음, 아끼는 생각, 사랑하는 마음결도 하루하루 자라납니다. 겉치레가 아닌 속가꿈으로 이어지는, 그러니까 마음을 열고 나눈 편지 한 통이 아기곰한테 우리 세상이 살기 좋은 곳임을 깨닫게 한달까요. 아기곰은 아직 깊이 느끼지는 못할 테지만.

 글쓰기든 편지쓰기든 일기쓰기든, 너무 억지로 시키는 부모와 교사가 많은 우리 형편에서, 《편지가 왔어요, 답장도 썼어요》는 아이들한테 참말 있어야 하는 것, 아이들이 세상을 즐기면서 부대끼는 길을 어떻게 추스르면 좋은가를 나긋나긋 들려줍니다. 조용히 보여줍니다. 있는 그대로, 그러니까 꾸밈없이 자기 마음을 드러내고 서로 어우러지는 재미난 세상을 깨닫도록 합니다.

 다만, 이 이야기책에는 여러 가지 아쉬운 대목이 있습니다. 먼저, 남자와 여자 성구실을 틀에 박히게 나누었습니다. 어머니는 부엌데기로, 아버지는 바깥에서 회사 다니며 돈 벌고 궂은 일을 도맡는(이야기 끝에는 수해복구 지원에 나서기도 합니다)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일본에서 이 동화를 언제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이야기 짜임새는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성구실을 잘못 받아들이도록 할 걱정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아이들이 맞춤법을 엉망으로 쓰다가 올바르게 맞추게 된 다음에 쓴 편지에서 ‘틀린 맞춤법’으로 나오는 대목(34쪽, 56쪽을 보면,‘-예요’로 써야 하는데 ‘-에요’로 잘못 씀. 63쪽에서는 바르게 나옴)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볼 아이들(예닐곱 살∼초등학교 1ㆍ2학년) 눈높이를 헤아렸을 때 어울리지 않는 얄궂은 말과 말투가 많이 보입니다. 몇 가지를 들어 봅니다.


- 감사(→고마움), 다행이구나(→잘 되었구나), 점점(→차츰), 간신히(→가까스로,겨우), 비하면(→견주면, 대면), 생각 중이었단다(→생각하고 있었단다), 당근 쿠키(→당근 과자), 그로부터(→그 뒤로), 할머니로부터(→할머니한테) 한 달만의 소식(→한 달 만에 온 소식), 할머니의 편지를(→할머니한테 편지를), 방망이질하기 시작했습니다(→방망이질을 합니다), 무사하단다(→괜찮단다,걱정없단다), 급히(→바삐,서둘러), 순순히(→얌전히,곱게), 식사(→밥), 정중하게(→다소곳하게), 계속(→꾸준히), 직접(→손수)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아쉽습니다. 이만한 줄거리를 담은 이야기책이라면, 굳이 나라밖 책을 우리 말로 옮기기보다는 나라안에서 창작을 하는 편이 낫습니다. 나라안에서 힘쓰는 어린이책 작가한테 이런 괜찮은 이야기책이 나라밖에 있음을 이야기한 다음, 우리 형편에 맞고 우리들 이야기에 어울리는 한편 이 나라 아이들이 좀더 재미나고 살갑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 지어내는 거지요. 그렇게 창작 동화가한테 기운을 북돋우고 좋은 이야깃감을 알려준 뒤, 더 즐겁게 우리 아이들이 즐길 작품을 빚어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일본 아이들만 즐길 만한 작품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이 즐겨도 좋은 작품이기 때문에 반가운 마음으로 번역을 해서 펴낸 책입니다. 그렇지만 책을 덮는 마음은 홀가분하지 못합니다. 이 나라 창작 동화가들 눈높이와 글솜씨로는 이만한 책조차 스스로 빚어내지 못하는가 싶어서요. 그리고, 책을 펼치기 매우 안 좋습니다. 어린아이들이 보면서 책이 다치지 않도록 양장으로 묶었다고 하겠지만, 어른이 보아도 책장이 잘 넘어가지 않는 한편, 종이결이 날카로와 손이 긁히기도 하며, 가운데가 잘 접히지 않고, 가운데를 접으려고 누르면 책이 북 하고 부서집니다. 펼쳐서 넘기기 힘들도록 되어 있는 제본 말썽을 아직도 풀지 못하는가요? 좀더 부드러운 종이로, 또한 가벼운 책으로, 그리고 ‘아이들이 보다가 책이 좀 망가지더라’도 단출한 꾸밈새로 묶어낼 수 있으면 좋겠군요.

 작품성으로는 별 넷을, 책 완성도로는 별 하나 반을 주겠습니다(별 다섯이 만점이라면). 그다지 추천하고 싶은 생각은 안 들고, 소개하고 싶지도 않지만, 잡지 《북새통》에서 다달이 ‘이달의 좋은 책 후보 다섯 권’ 가운데 하나를 골라서 소개해야 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을 적습니다. 내키지는 않는 책이지만, 저로서는 내키지 않더라도 이 책에서 엿볼 수 있는 좋은 대목과 아쉬운 대목을 남김없이 들려주면서 이 나라 어린이책 문화를 가만히 돌아보고 싶습니다. (4340.1.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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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님의 "<요코 이야기> 논란에 관한 몇 가지 단상..."

이 나라 언론매체는 <요코 이야기>에 어떤 문제가 있다는 기사를 쓴다고 해도, 이 책을 안 읽고 쓰기 마련입니다. 참말로 이 책을 잠깐이나마 펼쳐 본 뒤 문제를 다룬 기자가 있었는지... 그리고 나라밖에서 말썽이 되면 대문짝 만하게 기사로 다루지만, 나라안에서 말썽이 되는 이야기는 기사로 안 다루지요. 한젬마 문제만 해도 <한국일보> 말고는 다들 싹 입 씻고 넘어가고 있는 걸 보면.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이런 언론보도가 나오면 외려 <요코 이야기>가 더 잘 팔린다는 겁니다. 대리번역 말썽이 일어난 <마시멜로 이야기>는 이제, 신문잡지에 광고 안 때려도 베스트셀러 순위를 아주 단단히 지키는 한편, 예전보다 더 잘 팔리잖아요. 제 짐작입니다만, 이번 <요코 이야기> 말썽은, 이 책을 펴낸 출판사에서 사람들 눈길을 끌어 책 팔아먹으려는 장삿속으로 보입니다만. 출판사에서 낸 보도자료와 논평을 보면 그런 느낌이 짙습니다. 사실, 이 책이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가 많다면 우리 나라에서 번역을 하지도 말아야 했거나, `팔아먹을 생각'으로 번역하지 말고, `일본사람들 역사인식을 살피는 참고자료'쯤으로만 쓰도록 번역을 했어야 옳습니다. 그러나 출판사는 이 책을 아주 허벌나도록 잘 팔아치우고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요코 이야기>는 베스트셀러 순위에서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책방마다 품절이 되어 줄서서 사려고 기다리는 독자들이 늘어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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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의 길
구로사와 아키라 지음 / 민음사 / 1994년 10월
평점 :
품절



(알라딘에서는 `품절'이 되었다고 뜨기에
제가 가진 책을 긁어서 올려놓습니다.)

 

- 책이름 : 감독의 길
- 글쓴이 : 구로사와 아키라
- 옮긴이 : 오세필
- 펴낸곳 : 민음사(1994.10.27.)


 1960년, 박정희는 《지도자도》라는 얇고 노란 책자를 펴내 전국 곳곳에 수없이 뿌립니다. 그러나 이내 이 노란 책자를 거두어들였고, 전국 곳곳에서 불을 지펴 집어던져 태워 버립니다(이 책자를 저한테 팔았던 헌책방 주인과 다른 책손이 들려준 이야기). 자신이 내세운 혁명공약 가운데 마지막 것,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때문입니다. 그 뒤 ‘혁명공약’은 다섯 가지만 적어서 세상에 내놓습니다. 그러면서 펴낸 책은 《지도자의 길》. 독재자 박정희한테 ‘지도자’란 어떤 사람이고, 지도자라는 사람이 걷는 길이란 무엇이었을까요.


.. 단지 법이 규정한다는 이유만으로 지진아들을 강제로 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끔찍한 일이다. 어린이들의 성장은 제각기 다르다. 일부 다섯 살 아이는 일곱 살 아이의 지능을 가질 수도 있고, 반대로 다섯 살 아이 수준의 지능도 안 되는 일곱 살 아이도 있다. 지능은 아이마다 다른 속도로 성장하는 것이다. 1년의 성장이 더도 덜도 아닌 정확한 1년 동안의 기간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규정한다면 잘못이 아닐 수 없다 ..  〈31쪽〉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길’은 사람이 다니라고 뚫습니다. 자동차가 오가는 찻길은 자동차가 다니는 길이 아닙니다. 자동차에 탄 사람이 다니는 길입니다. 찻길에 자전거가 다닌다면, 자전거가 다니는 게 아니라 자전거를 탄 사람이 다닙니다. 그러나 찻길을 달리는 자동차꾼은 찻길에 함께 있는 자전거꾼을 못마땅해 합니다. 자전거에 탄 ‘사람’이 자기와 마찬가지 ‘사람’임을 느끼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도자도》와 《지도자의 길》을 낸 독재자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다스리려는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사람 위에 올라서서 권력을 누리’려는 마음이었을까요. 자기와 마찬가지로 ‘사람’인 이 나라 백성들을 굽어살피고 헤아리고 보살피는 ‘길’이었을지, 이 나라 백성은 ‘사람이 아니라’고 느끼며 자기 앞에 굽실거리거나 무릎꿇게 하려는 ‘길’이었을지.


.. 나는 내 눈으로 자세히 볼 수 있는 것들에 관해서만 언급할 수 있다. 또한 나는 물증이 있는 것들만 믿는다 ..  〈103쪽〉


 사람이 다니는 길이 아닌 자동차만 다니는 길이 되어 버린 찻길입니다. 그래서 이 찻길을 걸어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수없이 차에 치여 죽습니다. 사람을 친 차는 어디론가 내빼도, 차에 치인 사람은 어디로 가지도 못합니다. 사람이 아늑하게 다닐 수 없게 된 길에서는, 사람 아닌 목숨도 목숨 대접을 받지 못합니다.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이 오가는 길은 네 다리로 걷는 들짐승과 멧짐승도 오갈 수 있었습니다. 열 다리나 스무 다리로 기어다니는 벌레도 오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찻길을 건너는 짐승들은 그 자리에서 개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꼬물꼬물 기어가는 지렁이나 벌레는 자국도 못 남기고 사라집니다. 더욱이, 사람만 다니라고 하는 거님길(보도블럭)까지 치고 올라서는 자동차입니다. 길이 길 구실을 못하는 우리 삶터이고, 길을 마음놓고 다닐 수 없는 우리 형편이라고 할까요. 이런 세상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 아마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힘은 기억력일지도 모르겠다 ..  〈63쪽〉


 언제부터 우리가 걷는 길이 이렇게 팍팍하고 메마르게 되었을까요. 어느 때부터 우리가 걷는 이 길이 이렇게 사람은 다닐 수 없는 길이 되었을까요. 사람 발길이 끊어지고 매캐한 차방귀만 가득한 길, 사람 냄새도 손길과 발길도 움직임도 뚝 끊어지는 길이 되었을까요. 우리들은 우리들이 걸어갈 이 길을 엉망으로 망가뜨리면서, 우리들이 참답게 살아가는 길마저도,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길마저도 엉망으로 흐트러뜨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 1930년 토키 영화가 등장하고부터, 우리는 옛 무성영화의 너무도 훌륭했던 점을 놓치고 잊어버렸다는 것이 나의 느낌이었다. 나는 미학적 손실을 끊임없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 독특한 아름다움을 다시 발견하려면 영화의 기원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성이 있다고 느꼈다. 나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  〈321쪽〉


 길이 길다움을 잃었을 때, 이 길을 오가는 모든 것도 자기다움을 간직하기 힘들다고 느낍니다. 지도자든 백성이든 관리든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든 사람 아닌 목숨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오붓하게 어울리며 살아가는 길이 아니니까, 서로서로 돌보고 마음쓰면서 보듬는 길이 아니니까, 서로 따스함을 나누며 사랑하며 믿고 살아가는 길이 아니니까, 이런 길에는 돈-이름-힘, 이 세 가지만 남는구나 싶어요.

 자서전 《감독의 길》을 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돈으로 걷는 길도 아니고 이름으로 걷는 길도 아니며 힘으로 걷는 길도 아닌, 한 사람으로 걷는 길을 걸어서 감독이 되었다고 느낍니다. 사람다움을 간직하고 사람다움을 키우면서 사람다운 아름다움을 찾아나서면서 감독으로 길을 걸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 나라 영화감독 가운데 돈-이름-힘이 아닌 ‘사람으로서 걷는 감독이 갈 길’을 걷는 사람은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4340.1.1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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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책방 아저씨 말 3

 
 “헌책방 장사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정년퇴직 걱정 없이 내가 죽는 날까지 평생 할 수 있는 즐거운 일이야. 그래서 난 죽을 때까지 여기서 헌책방 장사를 할 거야.”


 충북 청주에 있는 헌책방 〈보문서점〉 아저씨, 아니 이제는 할아버지. 당신 또래 동무들은 모두 딸아들한테 눈치보며 용돈 타서 쓰지만, 당신은 헌책 팔아 손주 과자도 사 주고 용돈도 쥐어 줄 수 있으니, 남은 삶도 즐거우시리라 믿습니다. (4340.1.4.나무.ㅎㄲㅅㄱ)

 

헌책방 아저씨 말 4


 “네? 무슨 책이요? 아, 그런 책은 지금 없는 것 같네요. (전화 끊음. 그리고 저를 보면서) 요즘은 다 이렇게 전화로만 물어 봐요.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가 오는데, 전화만 하지 말고 이런 데 한 번 와서 죽 돌아보면 좋으련만. 태영이가 그러잖아. 전화상으로만 묻는 손님들은 우리들하고 무관하니까 물어 봐도 그냥 책 없다고 그러라고. 하하하.” - 서울 홍제동 〈대양서점〉 1매장 아저씨

 
 ‘헌책’을 찾는 사람이 줄기는 줄었지만, 찾는 사람이 줄었다기보다 ‘손수 찾아다니는’ 사람이 줄었다고 느낍니다. 인터넷 헌책방이 늘어나고 인터넷으로 책 사고파는 일이 늘어나는 숫자를 보면, 이 숫자가 예전에는 손수 헌책방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던 숫자와 비슷하거든요.

 느긋하게 살피고 둘러보면서 책 하나 고르지 못한다면, 자기가 사들인 책을 느긋하게 헤아리면서 읽을 수 없지 싶습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찾아들고 집어든 책 하나가 아니라면, 책에 담긴 줄거리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깊은 알맹이는 더더구나 맛을 못 보지 싶습니다. 기꺼이 다리품을 팔지 않을 때에는 헌책방마다 다 다르게 간직한 모습을 볼 수 없을 테고요. (4340.1.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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