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를 한다. 보일러를 돌려 따뜻한 물이 나오게 한 뒤, 먼저 머리를 감는다. 머리를 다 감을 무렵 비로소 물이 조금 미지근해진다. 머리는 찬물로 감았다. 하지만 빨래를 할 때에는 제법 따순 물이 나온다. 어제부터 담가 둔 긴소매 웃옷 한 벌과 긴바지 한 벌을 빤다. 긴소매 웃옷은 보름 앞서 서울에서 충주로 돌아갈 때 입던 옷. 그때 땀에 흠뻑 젖어서 이제 빨아 입어야 했는데, 시골집은 물이 얼어서 빨래를 못한다. 빨래도 못하고 씻지도 못한다. 그래서 이번 서울 나들이에는 빨랫감을 입고 지고 하며 가지고 왔다. 그제는 시골집에서 입는 두툼한 겉옷 하나를 빨고 면티 하나와 수건도 하나 빨았다. 시골집에서는 난방을 거의 안 하기 때문에 옷을 두툼하게 입는다.

 오늘 빤 빨래도 진작에 빨고 싶었지만 못 빨고 있던 옷들. 이제 면티 하나만 더 빨면 밀린 빨래는 다 하는 셈.

 문득 오랜만에 빨래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그렇구나. 겨울이 되어 물이 얼어붙은 뒤로는 땀에 전 옷도 말려서 다시 입곤 했다. 이렇게 입으니 몸이 근질근질 자꾸 가려웠는데, 자전거를 타고 신나게 달려 땀이 줄줄 흐르면 가려움은 이내 사라지곤 했다.

 빨래도 오랜만, 머리감기도 오랜만. 한 번 말끔하게 빨고 씻으니 몸이 개운. 씻은 뒤 가뿐하다는 느낌이 이러했던가.

 비누를 골고루 문지른 뒤 북북 비벼서 빤다. 홍제동 얹혀지내는 집 뒷간은 크기가 작은데다가 세탁기까지 자리를 차지해서 퍽 비좁다. 그래도 몸을 비틀어 쭈그리고 앉은 채 빨래를 한다. 잿빛 땟물이 줄줄줄 흘러나온다. 물을 틀어 빨래를 헹구고, 다 헹군 뒤 뒤틀어 물을 짠다. 다 짠 뒤 탁탁탁 턴다. 빨래를 털 때 자잘하게 일어나는 김 같은 물방울들. 여름철에는 이 물방울이 팡팡 일어날 때 참 시원하다고 느꼈다. 겨울에는 조금 차갑다고 느끼는데, 따순 물로 빤 다음 터니 따뜻하게 느껴진다.

 다 빤 옷을 벽에 박힌 못에 건다. 다 마른 옷은 걷어서 갠다. 월요일쯤 충주로 돌아갈 텐데, 가는 길에 땀에 흠뻑 젖는 옷이 또 하나 생길 테지. 그 옷은 다음에 서울 나들이를 다시 할 때 또 입어야지. 그리고 서울에 와서 다시 빨래를 해야지. (4340.2.2.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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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 바이크》라는 자전거 잡지가 있습니다. 이 잡지 2007년 2월호에 제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지난달에 이곳 기자와 만나보기를 했고, 이때 이야기가 사진과 함께 제법 크게 실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실렸을까 궁금해서 한 권 사려고 어제부터 동네책방을 다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 못 샀습니다.

 먼저 홍제동. 이곳 홍제동에는 책방이 딱 한 군데 남았습니다. 큰길가에 있는데, 이곳에는 자전거 잡지를 안 다룹니다. 다만, 자동차 잡지는 다섯 가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신촌에 하나 남은 홍익문고에 갔습니다. 이곳 또한 자전거 잡지를 아예 안 다룹니다. 다만, 이곳도 홍제동 책방과 마찬가지로 자동차 잡지를 여러 가지 다루고 있습니다. 홍대 전철역 지하에 있는 책방에도 가 볼까 하다가 또 실망할까 싶은 마음에, 여기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예전에 이곳에 갔을 때를 떠올려 보면, 그때에도 자전거 잡지는 구경을 못했습니다.

 내일은 어디를 가 보면 좋을는지. 불광동에 있는 불광문고에는 자전거 잡지를 다룰는지. 연신내에 있는 연신내문고는 다룰는지. 궁금한 한편, 걱정이 됩니다. 애써 먼길을 나섰는데, 가는 데마다 자전거 잡지를 안 다룬다면 어쩌지요?

 어쩔 수 없이 광화문 교보문고나 영풍문고나 반디앤루니스에 가야 할까요. 이렇게 큼직한 책방에만 자전거 잡지를 다룰까요? 이곳마저 자전거 잡지가 없지는 않겠지요?

 자전거 타는 사람이 나날이 늘고,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분들도 차츰 늘고 있습니다. 자전거 문화도 조금씩 퍼져 나갑니다. 그런데, 자전거 타는 분들 가운데 자전거 잡지를 정기구독하는 사람은 매우 적고, 가끔이나마 사서 보는 사람도 참 적다고 합니다(자전거 잡지 만드는 분 이야기를 들으니). 왜 그럴까요.

 괜히 저 혼자 마음이 무겁습니다. 슬픕니다. 그래서 술자리에서 소주 두 병을 쓰게 마십니다. 주량은 소주 두 병 안팎인데, 두 병을 마셨어도 술이 안 오릅니다. 취하지 않습니다. 술을 더 마시고픈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더 마시지는 않고 뚝 끊습니다. 신촌에서 홍제동까지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야 하니까요. 자전거를 타고 돌아가는 길에도 속은 활활 타오르고 자꾸만 눈물이 나오려고 합니다.

 얹혀지내는 홍제동 집으로 옵니다. 앞바퀴를 떼어 집으로 들어갑니다(자물쇠가 없어서 바퀴 한쪽을 떼어 집에 둡니다).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마실까 하다가 그만둡니다. 술을 마신다고 마음이 나아질 듯하지는 않아서. 멍하니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다가 새벽 네 시가 가까워서야 자리에 듭니다.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잠은 안 오고 자꾸자꾸 울컥울컥 치밀어 올라오는 무엇이 있습니다. 아. 하. 후아. 한숨을 몇 번 내쉬다가 벌떡 일어납니다. 오늘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골라든 책 몇 권을 집어들고 옆방으로 가서 불을 켭니다. 책을 조금 뒤적이다가 노트북을 켭니다. 인터넷을 엽니다. 즐겨찾는 자전거 모임 게시판에 글을 하나 남깁니다. 책읽기 모임 게시판에도 글 하나 남깁니다. 그래도 어딘가 텅 빈 듯한 느낌.

 내일은, 아니 밝아오는 오늘은 또 어디로 가면 좋을지. 헛걸음이 되더라도 불광문고에 가 볼는지. 싫어도 교보문고에 가 볼는지. 아니면 자전거 잡지사에 전화를 걸어 손수 찾아가서 그곳에서 사면 좋을는지. 아. 젊음과 문화가 넘친다고 하는 신촌과 홍대 둘레에서마저 자전거 잡지를 구경할 수 없다면, 어느 동네, 어느 마을, 어느 골목, 어느 곳에서 자전거 잡지를 구경할 수 있다는 말인지. 마른침만 꿀꺽꿀꺽 삼킵니다. 오늘 보름달이 떴는데, 달님을 보며 소원을 빌면 들어 줄까요. (4340.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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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2007-02-09 21:34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서 구입하시길 그리고 2월호 부터는 미국유명잡지 마운틴바이크액션지 제휴로 번역본이 실려 있습니다.
 

 

 딸꾹질이 나온다. 오랜만이다. 반갑구나. 딸꾹질이 멈추지 않으면 끅끅 하면서 다른 일을 하기 번거롭지만, 내가 아직 잘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으니, 딸꾹질 나오는 일도 나쁘지 않다.

 배고프다. 지금은 새벽 네 시 삼십칠 분. 밤새 필름을 스캐너로 긁는 한편 글을 쓰고 있다. 어릴 적부터 밤을 새워 본 적은 딱 한 번도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거의 밤을 새울 뻔했으나 새벽 다섯 시에 깜빡 잠들어서 못 샌 적이 있고, 할머님 돌아가셨을 때는 새벽 여섯 시까지 허드렛일을 하다가 딱 십오 분을 잔 적 있을 뿐이다. 그러다가 군대에 들어가 이등병 때 곧바로 뛴 겨울훈련 때 밤새워 18시간 행군을 한 적이 있고, 똘아이 중대장을 만나 36시간 동안 쉬지 못하고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으며 얼차려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니까 군대에서 두 번 밤샌 적이 있는 셈이로군. 이런 내가 지지난주에 한 번, 오늘 또 한 번 거의 밤샘으로 글을 쓰고 있다. 그런데 안 졸리다니. 참 놀라운 일이네. 하지만 배고프다. 밤새 깨어 있으니 배가 출출하다. 그래서 밥통에서 밥을 한 숟가락 퍼서 먹는다. 딱 한 숟가락만. 그리고는 한 시간쯤 다시 글을 쓰다가 다시 한 숟가락 먹고, 또 한 시간쯤 뒤 다시 한 숟가락을. 밥을 한 그릇 가득 채워 먹으면 배가 부를 테지만, 이렇게 배가 부르면 바로 졸음이 쏟아진다. 그런데, 어, 밥을 우물우물 씹고 있으니 딸꾹질이 멎네.

 어제 인터넷새책방 ‘알라딘’에서 편지가 왔다. 내가 쓴 글을 보고 ‘미안하다’면서 적립금 2000원을 보내 주었다는 줄거리를 담았다. 글쎄, 딱히 미안할 일이 있을까. 하지만 미안하다고 느꼈다면 고맙다. 얼굴 안 보고 인터넷으로만 돈을 주고받은 뒤 책을 보내는 마당에, 서로 믿을 수 있도록 하지 않은 잘못을 조금이나마 느꼈다면.

 노래 듣는 기계가 고장난 듯하다. 아니 맛이 갔나? 어제까지는 잘 돌아가더니 오늘은 영 삐리리하다. 테이프를 다 씹어먹을 듯 늘어진다. 기계가 퍽 오래되기는 했는데, 이렇게 삐리리하게 되다니. 심심하다. 그나마 혼자 지내는 시골집에 오직 하나 있는 말동무인데.

 새벽 두 시쯤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때 구름이 퍽 많이 끼었다. 달이 잘 안 보였다. 조금 앞서 나와 보니 구름이 하늘을 온통 덮었다. 아침부터 눈이 내릴라나? 눈이 내린다면 제법 큰눈이 올 듯한데. 날이 좀 풀릴까 싶더니 다시 꽁꽁 얼어붙을지 모르겠다. 한 달 넘게 물을 못 쓰고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봄까지는 이대로 지내야겠구나. 날이 밝으면 윗마을로 부리나케 올라가 물 한 동이 떠올까? (4340.1.3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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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다려도 아무도 오지 않는
전민조 지음 / 눈빛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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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5월, 전민조 선생 전시회를 보고 난 뒤 쓴 글입니다. 이래저래 검색을 해 보다가, 이 좋은 사진책 하나가 제대로 빛을 못 받고 있구나 싶어서, 예전에 써 두었던 소개글을 살짝 붙여 봅니다. 우리 마음을 따스하게 감싸고, 우리 삶터를 살가이 돌아보는 눈길을 쓰다듬어 주는 사진이 묻혀 버리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리 마음을 간직한 '섬' 사진
- 전민조 사진책 <섬>을 보다



<1> 고무신을 신은 사람들


1971년부터 1973년 사이에 서해안 백령도, 홍도, 소흑산도, 성남도, 진목도, 대마도, 소마도, 라매도, 조도, 관매도, 여서도, 우도, 연화도, 연대도, 수우도, 오륙도, 울릉도, 독도… 들을 두루 다닌 전민조 님 사진책이 나오고 전시회가 열렸습니다. 지난 15일에는 서울에 있는 전시장에서 조촐한 강연자리도 있었습니다.

사진책은 진작에 눈빛 출판사 인터넷 누리집에서 소식을 들었고, 성균관대 앞 <풀무질>에서 책방 아저씨와 함께 구경했지만, 아직 사 놓지 않았습니다. 전민조 님 강연자리에서 말씀을 들은 뒤, 그날 그 자리에서 사면 책에 서명을 해 준다고 해서요.

사진 전시장에 들어서니 맨 처음으로 우리를 반기는 사진은 어린 계집아이가 자기보다 어린 동생을 풀로 엮은 자리에 눕혀 놓고 재우는 모습입니다. 동생은 궁둥이가 트인 바지를 입고 있습니다. 풀자리(짚이 귀하고 가난한 집에서는 들과 산에서 나는 풀을 베어다가 자리를 엮었다고 합니다) 옆에는 누나가 신는 듯한 검정 고무신과 어린 동생이 신는 듯한 꽃신이 흩어져 있습니다. 둘이 있는 풀자리 앞 돌담 위에는 까만 돼지가 둘을 내려다보고 있습니다.

벽에 차례차례 걸린 사진을 봅니다. 하나같이 수수한 옷차림에 얼굴 까맣고 눈 맑은 사람들 모습입니다. 섬사람들 사진인 터라 사진이 찍힌 곳도 바다나 바닷가, 갯벌, 배 위나 배 둘레입니다. 섬에서는 텃밭 하나도 소중하기에 손바닥 만한 밭 하나도 일구려고 힘쓰는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발을 보니, 거의 다 고무신을 신습니다. 맨발인 사람도 참 많습니다. 운동화나 구두를 신은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는군요. 좀더 거슬러 올라간 옛날엔 고무신도 드물고 짚신이 훨씬 많았겠죠?

저는 지난해 가을부터 고무신을 신고 다닙니다. 처음에는 시골에서 일할 때만 신었는데 이제는 서울로 갈 때도 고무신을 신습니다. 한동안 고무신과 제 발이 맞지 않아 뒤꿈치가 긁히고 살갗이 벗겨졌지만, 이제는 하루 내내 고무신만 신고 다녀도 발이 긁히거나 아프거나 다치지 않습니다. 어느새 고무신과 제 발은 하나가 되었습니다.


<2> 야윈 소를 먹이는 아이


사진책 <섬> 겉을 수놓은 사진은 바다가 보이는 섬 들판에서 풀을 먹이는 아이 모습입니다. 등에는 자기 키 만한 지게를 진 아이도 고무신을 신었습니다. 소는 눈이 퀭해 보이는데 등이 칼날처럼 곧습니다. 갈비뼈도 보입니다. 배가 홀쭉하군요. 섬사람들도 배불리(또는 마음껏 많이) 먹기 어려웠을 테니, 이 섬사람들이 기르던 소도 마찬가지였겠죠?

그러고 보니 사진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넘겨보았을 때 '살이 찐 사람'이 하나도 안 보입니다. 모두들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합니다. 먹을거리가 많지는 않았어도 서로 나누며 살았기에 이렇게 고만고만하고 비슷비슷해 보일까요? 다시 사진책을 넘기며 옷차림을 주욱 살피니 입성도 비슷합니다. 옷도 신도 몸도 비슷한 이들은 마찬가지로 비슷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방에서 살아갑니다.

어린 계집아이가 홀로 툇마루에서 밥을 먹는 사진이 하나 있습니다. 아직 숟가락도 한 손으로 꼬옥 쥐지 못하는 어린 아이인데, 살이 통통합니다. 그렇다고 살이 찐 몸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라면 으레 그러하듯 살짝 통통한 편입니다. 보리밥에 물만 반찬으로 먹는 아이인데도 몸이 이러하군요. 먹는 밥은 넉넉하지 못해도, 넉넉한 바다와 공기와 물과 바닷것이 있기 때문일까요?

고깃배가 가득가득 넘쳐서 돌아왔습니다. 어른들은 부지런히 손을 놀려 잡은 고기들을 부려 놓습니다. 그 옆에 발가벗은 사내아이도 일손을 거듭니다. 이어지는 사진에서도 발가벗은 아이가 나옵니다. 반바지만 입은 아이하고 갯벌에서 놀다가 사진 한 장 찍혔습니다. 반은 발가벗은 채로 엄마가 일하는 시늉을 하는 아이도 보입니다. 어머니처럼 머리에 무엇인가를 이고 싶은지 텅 빈 바소쿠리를 이고 엄마 앞에서 길을 이끕니다. 그 뒤로는 엄마가 있고, 그 뒤로는 어린 누나가 머리에 짐을 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뭍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늘 섬 안에서 맴돌지만, 이 섬에서도 저희들끼리 즐겁고 놀고 즐겁게 어울리며 즐겁게 일을 합니다(그렇지만 늘 '즐겁다'고만 할 수 없습니다. 바쁠 때면 그지없이 고단하고 고달픈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이제 밥값을 할 만한 나이가 되었다고 할 때면 어김없이 자기 몸에 맞는 지게를 지고 땔감이고 풀베기고 무엇이고 해야 할 테니까요). 요새로 치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만한 나이에도 어른과 함께 일을 하고, 마땅히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3> 우리 삶터를 오롯이 들여다보기


전민조 님이 담은 '섬 사진'에 드러나는 모습은 섬사람들 삶만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들 삶입니다. 뭍이건 섬이건 가릴 것 없이 보통으로 우리가 살아온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들, 보통으로 살아온 사람은 우리 자신이 살아온 자취를 남기지 못합니다. 남길 틈도 없고, 남길 만한 장비(사진기, 필름 따위)도 없습니다. 어쩌면 전민조 님처럼 사진기자가 되어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사진을 찍은 사람들이 아니었다면 영영 잃어버리거나 잊혀진 모습이 되었을 '우리들 삶터 사진'이에요.

사진책 <섬>은 세월이 흐르고 흐르면서 빛이 바래는 한편, 도시사람들 구경거리와 놀이터로 무너져 버린 섬 모습을 아직은 깨끗한 채로 있을 때를 비추어 보여줍니다. 그야말로 고이 남은 몇 안 되는 소중한 발자취이자 생활문화 역사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섬사람들 삶으로 좀더 깊숙하게 들어가지 못했다는 대목. 전시회 사진과 사진책 사진에는 미처 들어가지 못했는지 모르겠는데, 섬사람들 살림살이, 집안 구석구석, 학교에서 공부하는 모습,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고된 일을 하는 모습이 좀더 낱낱이 드러나지 못했다는 대목이 아쉽습니다. 일하는 어른들 모습도 좀 멀찍이 떨어져서 살펴본 구경꾼 눈이라는 대목도 보입니다.

그러나 전민조 님을 다른 구경꾼하고 똑같이 여길 수 없습니다. 지금은 잠깐 들렀다 가지만 앞으로 다시 찾아올 뭍손님입니다. 섬에서 섬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은 아니지만, 살갑게 찾아와 부드럽게 손을 맞잡고 한 밥상에서 보리밥을 나눠 먹는 고맙고 반가운 뭍손님입니다. 섬에서만 사느라 뭍 소식을 모르고 뭍 세상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사람들한테 뭍 소식과 뭍 세상을 차근차근 일러 주는 이야깃손님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섬 소식과 섬 세상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 주는 사랑손님이 되기도 할 테고요.


.. 수평선을 바라보며 염소와 송아지를 모는 귀여운 아이들, 물동
이와 땔감을 머리에 이고 다니는 소녀들과 아낙네들의 표정은 너
무나 평화로웠다 .. <전민조 님 말>



강연자리에서 전민조 님은 "어린이를 천사로 봤어요. 꾸밈이 없어요. 그런데 세상에 훌륭한 사람들은 꾸밈이 많아요. 각색이 되고 조작이 되고… 어린이들이 어른한테 표정을 꾸미고 해서 만들 수 없잖아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섬사람들 얼굴에서 느낀 평화로움이란 바로 이런 모습이지 싶습니다. 남 앞에서 꾸미거나 가릴 것이 없이 착하게 사는 모습, 서로 살가운 이웃으로 여기며 길손한테도 밥상 하나 차려 주는 마음씀, 이런 평화로움이겠지요.

그런데 1970년대 첫머리만 하더라도 우리 사회는 두루 평화로움을 잃었습니다. 이 '평화로움을 잃음'은 바로 오래된 봉건통치 사회를 거쳐서 일제 강점기를 거치고 몇몇 독재정권까지 이어오는 동안 짓밟히고 짓눌리고 시달리느라 마음이 다치고 곪고 병들어 버린 가운데 어쩔 수 없이 생겨 버린 사회이자 삶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세상이 팍팍하고 사람들 마음씀도 거칠어질 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전민조 님이 찾아다닌 섬에서 만난 사람들한테서 느낀 수수함과 살가움은 사진마다 고이 남고 아름답게 이어질 수 있지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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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요, 찬드라 - 불법 대한민국 외국인 이주 노동자의 삶의 이야기
이란주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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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고쳤습니다. 살도 붙이고, 어색한 곳을 다듬어서 확 다시 썼습니다. (2007.12.9.)


 이 책 하나 7 ― 외국인노동자를 만나 보셨나요?
 : 이란주, 《말해요, 찬드라》를 몇 번 거듭 읽으며



 〈1〉 몽골에서 온 외국인노동자를 만나다


 책을 읽는다고 이 넓은 세상을 얼마나 알 수 있으랴 싶습니다만, 책읽기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요즘 읽는 책 가운데 《외국인 이주노동자 인권백서》(다산글방,2001)가 있습니다. 한 번 읽을 때 열 쪽이나 스무 쪽을 넘기기 어렵습니다. 펼치는 쪽마다, 이 나라에 어렵게 들어와서 온갖 차별과 괴롭힘과 따돌림을 받으면서 죽을 고생을 하는 사람들 모습이 환히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책을 조금 읽다가 덮습니다. 낮밥으로 찌개 하나 끓이면서 읽습니다. 기계가 잘못되어서 손가락이 잘려도 산업재해를 해 주지 않고, 더욱이 기계도 손보지 않아서 다른 외국인노동자가 그 기계를 쓰다가 똑같은 사고가 일어났는데, 공장주는 기계를 그냥 그대로 두며 다른 외국인노동자를 부려서 쓴다는 이야기를 봅니다.


.. 일도 잘하고 싹싹해서 공장식구들도 모두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노이’가 이듬해 가을에 프레스에 오른손을 찍혀 몽땅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손목 부근에서 잘렸으니 아예 손이 없어져버렸다. 노이는 그 회사에서 2년 가까이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장님이 알아서 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사장은 산재보험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세금을 내지 않아서 사업자등록이 말소된 상태였다.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계속 사고처리를 미루기만 했다. 그러다가 사고난 후 한 달 만에 회사를 팔아넘기고 달아나 버렸다. 더구나 상담소에서 합의를 보자고 연락했을 때는 일부러 자기 이름을 새로 바뀔 사장 이름으로 알려줘서 우리를 골탕먹이기도 했다. 외국인 친구들 중에는 자기가 일하는 회사 이름이나 사장 이름을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새로 온 사장은 ‘나는 아무 책임도 없다’고 모른 척했다 ..  〈17쪽〉


 한국땅에서 일어난 온갖 푸대접과 괴롭힘과 따돌림이 무엇인가를 낱낱이 밝혀서 보여주는 사례모음, 《외국인 이주노동자 인권백서》를 읽다가 덮고는, 《말해요, 찬드라》(삶이보이는창)라는 책을 펼쳐 봅니다. 벌써 두 번 읽었는데, 다시 한 번 집어들어 펼칩니다.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에서 일하면서 ‘왜 한국사람이 외국사람 편을 드느냐?’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아파하는, 그러면서도 이주노동자나 이 나라 노동자나 똑같은 사람인데, 모두들 똑같이 대접을 받으며 사람다운 꿈과 마음을 키워 나가야 하지 않느냐는 믿음을 나누는 사람인 이란주 씨가 발로 뛰면서 부대낀 이야기를 적어 내려간 책, 《말해요, 찬드라》.


.. 병원으로 가면서 나는 좀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이 부부는 또 어쩌려고 여기서 아기를 낳았을까 싶은 마음에 한편으로는 답답하기까지 했다. 다른 나라에서 외국인노동자로 살면서, 그것도 불법체류하면서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은 거의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더구나 한국이라는 나라는 남들과 다른 얼굴색을 하고는 절대 살 수 없는 나라가 아닌가. 아이들이 조금씩 자라면서 겪게 되는 따돌림과 상대적 빈곤감은 평생 큰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정부가 불법체류자의 아이들을 본국으로 순순히 보내주는 것도 아니다. 우리 정부는 부모의 불법체류를 묵인하고 아이들만 출국시킬 수 없다면서 아이들을 내보내 주지 않고, 온 가족이 다 같이 고통을 겪도록 묶어둔다 ..  〈29쪽〉


 저는 우리 말과 헌책방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을 한답시고 깝죽거리고 있습니다. 이런 일을 하면서 늘 듣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왜 그런 일을 하느냐?’입니다. 헌책방에 뭐가 있느냐고, 구닥다리 책이 쌓여 있는 허름한 헌책방 따위는 머잖아 사라져 버릴 곳이 아니냐는 말을 듣습니다. 사람들 다 잘 알아서 쓰는 한국말 아니냐고, 뭐가 깨끗한 말이고 뭐가 알맞는 말이고 뭐가 얄궂은 말이며 뭐가 틀린 말이냐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냥저냥 값싸게 사들일 수 있는 헌책방 전화번호만 있으면 되지, 무슨 헌책방 나들이를 따로 하고 그런 걸 글로 끄적이고 사진으로 찍느냐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세계화 시대를 거스르는 엉뚱한 짓을 하는 너는 고리타분한 민족주의를 불러일으키려고 하지 않느냐는 손가락질도 받습니다.

 참말, 저는 왜 이런 일을 할까요? 참말, 이란주 씨 같은 이는 왜 ‘외국인노동자 권리’를 찾아 주려고 애쓸까요?


.. 법무부 출입국에서 하는 일 중에 아주 웃기는 일이 많은데, 그 중 으뜸이 단속과 벌금에 관한 것이다. 불법체류자가 자진출국하겠다고 나서면 그 사람이 불법체류했던 기간을 계산해서 벌금을 내라고 한다. 대략 한 달에 10만 원 꼴이어서 1년이면 100만 원, 2년이면 200만 원 가량이 된다. 안 가겠다고 꼭꼭 숨어 있는 사람들은 억지로 붙잡아다 강제출국시키면서도 스스로 가겠다는 사람에게는 벌금 안 내면 못 간다고 도로 내보낸다. 벌금 낼 돈 없으면 가서 벌어 오라고 돌려보내는 곳이 바로 출입국사무소였다 ..  〈87쪽〉


 벌써 한 달도 더 지난 일입니다. 제가 일하는 시골에서 서울로 가려고 시골 버스역에 갔을 때 몽골 노동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그이가 몽골사람인 줄, 몽골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온 사람인 줄 몰랐습니다. 처음에는 퍽 멀찍이 떨어져 서 있었는데 그이 몸에서는 알쏭달쏭한 고약한 냄새가 났고, 마치 노숙자와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구나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기에, 낮부터 술을 마셔서 저러는가 싶었지요.

 아무튼, 그러려니 하면서 책을 읽으며 버스를 기다리고 있으니, 시골 버스역에서 표파는 일을 하는 아주머니가 저를 가리키면서 “저 사람이 서울 가는 버스 타니까, 저 사람이 타는 버스 타면 돼요!” 하고 말을 합니다. ‘뭐여?’ 하는 마음으로 그쪽을 쳐다봅니다. 표파는 곳 아주머니는 저를 보면서, “이 (몽골) 사람이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하는데 놓쳐서 한 시간을 더 기다리고 있어요. 다음 버스가 올 때 알려줘서 타게 해 줘요.” 합니다. “네, 그러지요.” 하고 대답합니다. 조금 뒤, 버스역에 함께 붙어 있는 택시 타는 곳에 있는 택시기사 한 사람이, “어이, 몽골! 택시 타고 가!” 하고 소리지릅니다. 그 소리를 들은 아저씨는 아무 말을 않고 손만 휘적휘적 내젓습니다. ‘아하, 몽골사람이었구나. 어쩐지. 그런데 저 사람들은 왜 저 아저씨한테 반말지꺼리야?’


.. 대한민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려 외국인력을 수입해서 저임금에 부리다가 쓸모없어지면 고장난 기계를 던져버리듯 본국으로 내쫓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권과 국제질서를 논하며 미국을 비난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자, 이래도 우리가 마음 편히 미국을 욕할 수 있겠는가? ..  〈103쪽〉


 서울 가는 버스가 들어옵니다. 몽골 아저씨는 어디로 갔는지 안 보입니다. 부랴부랴 버스기사한테 ‘잠깐만 기다려 주셔요’ 하고 차를 잡아 놓고는, 버스역 둘레를 두리번두리번 살핍니다. 이 몽골 아저씨는 어디로 갔담? 아이고, 저 구석에 서 있네. 헐레벌떡 뛰어갑니다. “아저씨, 이 버스 타야 해요. 또 놓쳐서 한 시간 기다리려고요? 어서 가요.”

 빈자리를 찾아서 몽골 아저씨가 앉습니다. 저는 짐보따리가 많아서 다른 빈자리로 가서 앉습니다. 책을 읽으며, 꾸벅꾸벅 졸며, 서울에 닿습니다. 이제 버스에서 내릴 때. 이제 서울에 왔는데, 몽골 아저씨는 어찌할는지?

 내릴 때 가만히 살펴봅니다. 몽골 아저씨는 버스기사한테 묻습니다. “동대문 어떻게 가요?” 버스기사는 “동대문? 동대문은 지하철 타고 가면 되지.” 하고 말합니다. 하지만 몽골 아저씨는 어리벙한 얼굴로 서 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던 다른 손님들은 모두 자기 갈 곳으로 갑니다. 버스기사도 버스를 빼려고 다른 곳으로 갑니다. 몽골 아저씨 혼자 남습니다. 아저씨는 어디로 갈까 망설이더니 사람들이 많이 걷는 쪽으로 따라갑니다. 몽골 아저씨 뒤를 따라갑니다. 어깨를 오른손으로 살짝 잡으면서 아저씨한테 묻습니다. “어디로 가셔요?” “동대문 가요.” “어떻게 가는 줄 아셔요?” “몰라요. 택시 타고 가면 되겠죠.” “네? 아이고, 택시 타고 가면 돈이 얼마나 나오는 줄 알아요?” “몰라요. 나 돈 있어요. 택시 타고 갈 돈 있어요.” “아무리 돈이 있어도 그러죠. 지하철 타면 800원인데, 택시 타고 가면 5000원도 넘게 나와요. 지하철 타는 것보다 거의 열 배나 비싸요.” “나, 길 몰라요. 그리고 택시 타고 갈 돈 있어요.” 에구, 택시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한국말도 잘 못하는데, 이러다가 바가지라도 쓰고 엉뚱한 데 내려주면 어떡하려고.


.. 다른 한국인 직원들에게는 날짜가 되면 어김없이 돈을 주면서, 우리에게만 월급 줄 돈이 없어서 그러니 기다려 달라는 것이다. 한번은 참다 못한 우리들이 월급을 주지 않으면 일도 않겠다고 버텼다. 사장은 주먹을 코앞에 갖다 대고 일을 안 하면 당장 집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위협을 했다. 나중에 사장은 내가 너희들에게 줄 돈을 아껴서 다른 회사를 하나 샀노라고 자랑을 했다. 어이없어하는 우리들을 다 데리고 안산까지 가서 새로 샀다는 공장을 구경시키기도 했다 .. (올리) 〈164쪽〉


 “아저씨, 제가 가는 길에 내려 드리면 되니 지하철 타고 가요.” “택시 타도 되는데…” 아저씨를 달래어 지하철을 타기로 합니다.

 “지하철 타 본 적 있어요?” “한 번, 있어요. 처음 서울에 와서 의정부에 갈 때.” “한글은 읽을 줄 아셔요?” “(씩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며) 몰라요. 말은 조금 배웠어요.” “동대문에 가서는 아는 사람 있어요?” “네, 거기서 내려서 동생한테 전화하면 돼요. 동생이 한국사람한테 시집와서 서울에 살고 있어요.”


.. “예? 힘든 거요? 힘들지요. 그래도 월급만 잘 나오면 괜찮아요. 많이 일하면 돈 많이 받으니까…” 정말 끔찍한 일이었다. 가구공장 일은 어지간한 노동자들이면 피하는 일이다. 임금이 조금 높은 편이기는 하지만 일이 너무 고되 골병든다고들 한다. 그 일을 하루 열네 시간 반 동안, 그것도 한 달에 보름 이상이면, 일요일을 뺀 나머지 날은 거의 다 밤 한 시까지 일했다는 이야기였다. 몸이 무쇠라도 견디지 못할 노릇이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노동시간에 대해서는 절대 문제삼지 말아 달라고 했다 ..  〈196쪽〉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몽골 아저씨와 이야기합니다. 그나저나 이분이 ‘아저씨’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몽골에서 혼인을 하고 식구를 남겨 놓고 왔는지, 어쩐지 모르니까요. 그냥, 맘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기에 아저씨라고 할 뿐입니다.

 그렇지만 처음 봤을 때는 틀림없는 노숙자로 보였습니다. 왜 그럴까요? 아무래도 이분이 충북 음성에 있는 어느 공장에서 일할 때는 컨테이너 따위 움막에서 잠을 잤을 테고 씻을 곳이 넉넉하지 않았을 테니, 이런 차림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아저씨가 한국이 아닌 몽골 시골집에서 살고 있을 때에는 그예 시골사람으로만 보이는 수수한 차림이었을까요.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일 년, 일 년 됐어요. 처음엔 의정부 있는 데서 일했는데, 돈 안 줘서 여기로 왔어요. 그런데 여기서도 돈 안 줘서 다른 데 가려고 동생 아는 곳으로 가요.” “서울에 사람 참 많지요? 어지럽지 않아요?” “사람 많아요.”


.. “예? 불법체류자라구요? 불법체류자 주제에 무슨 학교요?” 교육청에 처음 문의를 했을 때 들었던 대답이다. “아무리 불법체류 상태라도 어린이는 교육받을 권리가 있지 않습니까?” “권리요? 그거야 내국인이거나 합법적인 경우를 얘기하는 거지, 불법체류는 규정이 없어요.” “정식 입학이 안 되면 청강생으로라도 받아 줄 수 없나요?” “우리 나라에는 청강 제도 자체가 없습니다.” 학교를 상대로, 교육청을 상대로, 이런 실랑이가 수도 없이 벌어졌지만 항상 결과는 마찬가지로 ‘안 된다’였다. 교육부에서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할 문제지만 지금으로서는 규정이 없어서 어쩔 수 없다’는 대답뿐이었다 ..  〈48쪽〉


 그런데 동대문에 내려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가 갈 곳은 ‘동대문’이 아니라 ‘동대문운동장’입니다. 몽골 아저씨가 동생하고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동생 사는 곳’을 잘못 들었나 봅니다. 하긴, 서울이 어떻게 생겨먹은 땅인지 하나도 모르는 몽골 아저씨한테는 ‘동대문’하고 ‘동대문운동장’하고 어떻게 다른 지 가리기 힘들겠지요. 또, 다 같은 동대문 아니냐고 생각할 테고.

 전철역에서 내려 주면 될까 싶었으나 그게 아니게 되니, 저도 시간 빼기가 빠듯해집니다. 어쩔까 어쩔까 하다가, 에라 모르겠다, 약속 늦는 일은 할 수 없지, 미안하다고 손전화 문자를 보내고, 아저씨와 함께 길을 찾기로 합니다. 여기까지 함께 왔는데 그냥 갈 수 없으니까요. 더욱이 몽골 아저씨로는 처음 발을 디뎌 보는 서울땅에서 길을 찾을 수도 없고요. 동대문운동장과 동대문이 어떻게 다른지 모르면서 “아무 데나 내려도 되지 않았나?” 하시는데, 참참참. ‘아저씨요, 그러다가 길 옴팡 잃고 동생도 못 만나면 어쩌려구요? 지금 어디에 있는지 말해 줄 수도 없으니 동생이 여기까지 찾아올 수도 없잖아요? 이궁.’


.. 박 기자는 그때까지도 사무실에 있었던 모양이다. 본인이 우리 상담소 활동가가 아니라 기자라고 밝히니까 사장이 반색을 하더라고 했다. 자기들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으니 현실을 잘 살펴 달라고 하더란다. ‘월급도 많이 받는 놈들이 이제 벌 만큼 벌어서 아쉬울 게 없으니까 문제 일으켜서 벌금 안 내고 가려고 수작 부리는 거다, 월요일 오전까지 일 잘하던 애들이 왜 그러겠느냐, 저기 같이 온 단체에서 사주해서 파업까지 하는 것 아니냐, 나는 정말 동생들이라고 생각해서 뭐든 원하는 거 있으면 다 해 줬는데 정말 야속하다, 정말 솔직하게 말하면, 사업 좀 키워 보려고 이것저것 투자하다 보니까 임금 좀 못 줬다, 뭐 그게 그렇게 욕먹을 일이냐, 애들한테 욕도 좀 했다, 우리끼리도 욕 잘하지 않느냐, 그게 뭐 그렇게 잘못한 거냐, 그리고 애들이 일 잘 안하고 그러면 엉덩이 좀 걷어찰 수도 있는 거지 그게 뭐 대수냐, 다른 회사에서도 노무관리 다 그렇게 한다, 괜히 나라에서 외국인들 고용 못하게 하니까 한 오십만 원만 줘도 일 잘할 애들에게 우리는 백만 원씩이나 주고 있다, 그러니 우리 사업이 어려운 거 아니냐, 우리도 이 사업 정말 하기 힘들다’ 박 기자가 들은 이야기를 대충 추려 들어도 그 정도였다. 도대체 기대할 게 없는 사람들이었다 ..  〈234∼235쪽〉


 이마에 땀이 줄줄 흐르도록 골목을 걷고 헤매고 한 끝에 가까스로 ‘가야 할 곳’에 왔습니다. 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은 없습니다. 몽골 아저씨 말로는 “여기에 오라고 했어요. 여기 있으면 된대요.” 몽골사람다운 느긋함인지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대충 어디로 와 있으면(시간을 따로 잡지 않고), 언제가 되든 그리로 몽골 아저씨를 데리러 온다는 소리일까요? 저보고 ‘이제 가도 된다’고 하지만, 차마 그냥 갈 수 없습니다. 함께 서서 기다립니다. 가방을 열어 떡 한 봉지를 꺼냅니다. 참으로 먹으려고 챙겨 두었던 떡입니다. 반을 뚝 떼어서 한 덩이를 아저씨한테 건넵니다. “아저씨도 점심 못 드셨지요? 떡이라도 드셔요.”

 냠냠 우걱우걱. 한참 기다리는데 올 사람은 오지 않고. 아마 동생 분도 어디에서 일을 하는데, 마무리를 짓고 나와야 해서 늦는 듯. 동생 분과 몇 번 전화로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있다고 알려줍니다. ‘고맙다’는 말을 여러 차례 합니다.

 이제 저는 가도 될 듯. 동생하고 만나는 자리까지 지켜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지만, 손전화 너머로 들려오는 동생 분 목소리로는, 이제 괜찮겠구나 싶습니다. 아무쪼록, 부디, 제발이지, 아저씨가 동생을 잘 만나서 길에서 더 헤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이보다도 앞으로는 ‘일삯 떼먹지 않고 꼬박꼬박 챙겨 주면서 푸대접하지 않는 공장’을 찾아서 땀흘려 일하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저씨와 동생이 흘린 땀이 헛되지 않기를, 그리고 일하면서 몸이 다치지 않기를, 고향나라로 돌아가는 날 웃을 수 있기를, 한국땅까지 찾아와서 공장을 찾아서 일을 하면서 돈을 벌어서 이루려는 꿈을 잘 마무를 수 있기를…….


 〈2〉 ‘외국인’노동자가 아니라 똑같은 ‘노동자’이겠지요


.. “한국이 우리 사랑을, 우리 가족을 인정하고 받아 주었으면 좋겠어요.” ..  〈38쪽〉


 자전거를 달립니다. 시간 약속이 많이 늦었습니다. 이마에서 볼따구를 타고 목덜미로 내려와 등줄기에 줄줄 흐르며 젖어드는 땀을 느끼며 생각합니다. 아까, 몽골 아저씨와 지하철을 타고 동대문으로 갈 때였습니다. 아저씨는 갑자기 “사람 좋아, 사람 좋아.” 하고 웃으면서 말을 건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나 싶어서 “네? 네? 무슨 말씀이셔요?” 하고 묻는데, “사람 좋아, 사람 좋아.” 하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다들 뭘 물으면 ‘몰라 몰라’만 하는데, 사람 좋아, 사람 좋아.” 합니다. 아하, 아마도, 몽골 아저씨가 어디로 가려고 길을 물어 보면, 한국말이 서툰 이분 말을 대충 넘겨듣고는 “어디로 가셔요.” 하고는 휙 가 버리거나 아예 말대꾸도 않고 지나갔는가 보네요. 몽골 아저씨는 서툰 목소리로 “한국 좋은 나라예요.” 하고 이야기합니다.


.. 그 ‘천사 같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외국인에게 그처럼 마음을 닫아걸고 있는 것일까 ..  〈54쪽〉


 몽골 아저씨더러 “지하철 타고 가면 돼.” 하고 아예 말을 깐 채 이야기하던 고속버스 기사는 어릴 적부터 ‘외국인노동자를 보는 눈길’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겠지요. 충청도에서 서울까지 택시를 타고 가라며 반말 찍찍 내뱉던 그 택시기사도, 당신이 살아오는 동안 ‘외국인노동자든 한국인노동자든 사람을 사람 그대로 바라보는 눈매’를 다독이지 못했겠지요.

 몽골 아저씨가 아닌 미국사람이나 프랑스사람이었더라도 이렇게 반말로 함부로 이야기했을까요. 그때에도 귀찮다는듯이 대충 아무 말이나 내뱉았을까요.


.. 경찰은 사망사건 자체보다는 그 주변에 있는 불법체류자를 검거하는 일에 더 관심을 보였다 ..  〈112쪽〉


 문득, 몽골 아저씨 전화번호라도 하나 받아 적어 놓을 것을, 그냥 왔구나 싶어 아쉽습니다. 언제가 될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아저씨가 한국에서 고된 일을 마치고 몽골로 돌아가기 앞서 한 번쯤 더 만나서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도 듣고, 한국사람과 한국 사회와 문화와 부대끼면서 무엇을 생각했는지 들을 수 있다면 제 자신도 미처 못 느끼거나 모르고 있을 ‘치우치거나 얄궂은 생각’을 깨닫는 한편, 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른 몽골 아저씨이지만 서로서로 좋은 사람을 알게 되는 즐거움을 나눌 수 있을 테니까요.


.. 오마이뉴스에 띄웠던 파업 동영상과 아침신문에 보도된 내용 때문에 언론에서 엄청난 취재경쟁을 벌였다. 기자들은 타결 소식을 듣고 자신들이 너무 늦게 온 것을 안타까워했다. 언론에서 관심을 갖는 이유는, 이것이 ‘불법체류노동자들의 첫 파업’이라고 보기 때문이었다. 이미 작년에도 한 차례 파업이 있었으니 첫 번째가 아니라고 알려줘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여튼 내용이 뭐든지 선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언론은 말릴 수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언론이 ‘이런 파업이 앞으로는 일반화될 것이다’라고 섣부른 전망을 내놓는 통에 영 거북스러웠다 ..  〈240쪽〉


 퍽 많은 사람들이 몽골이라는 나라에, 또 티벳이라는 나라에, 또 인도라는 나라에, 또 파키스탄과 네팔이라는 나라에, 성지순례라든지 여행이라든지 영혼을 찾는 나들이라고 하면서 비행기를 타고 찾아갑니다. 이때 몽골로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제가 한국땅에서 만난 몽골 외국인노동자와 똑같은 차림과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을 보며 ‘참 평화롭구나, 수수하고 고와 보이는구나.’ 하고 말할까요.

 네팔에서는, 파키스탄에서는, 인도에서는,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버마에서는, 필리핀에서는, 베트남에서는 어떠할까요.


.. ‘한국이 얼마나 원망스러우냐, 한국인이 얼마나 미우냐’ 언니를 취재하러 온 기자가 제발 그런 대답을 좀 해 줬으면 싶은지, 자꾸 그렇게 물어 봤다. 그러나 언니는 딱 잘랐다. “경찰은 미워. 다른 사람들은 아니야.” 그 한 마디뿐이었다. 더 이상 캐내기를 단념한 기자가 이번엔 사진을 찍어도 좋으냐고 물었다. 언니는 머리를 다시 매만져 깔끔하게 뒤로 묶었다. 옷매무새를 단정히 하고 활짝 핀 라일락꽃 아래로 가서 섰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꽃잎이 날리고 있었다 ..  〈178쪽〉


 저마다 제 고향나라에서는 평화롭고 수수하고 곱게 살아갈 사람들이라고 느낍니다. 한국땅에 와서 ‘가장 푸대접받고 일삯도 싼 거친’ 일을 하기 때문에 이 사람들이 마치 ‘낮은 사람’인 듯, ‘못사는 사람’인 듯, ‘가난한 사람’인 듯 잘못 알거나 느끼지 싶습니다.


.. ‘외국인이주노동자’에게만 특별한 배려를 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바라는 것은 이해관계와 상관없이, 국적이나 인종과 상관없이, 체류자격과 상관없이 모든 법과 사회규범 적용이 ‘상식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나 국가권력이 ‘민족차별 행위는 곧 범죄행위라는 상식’을 지녔더라면 ..  〈125쪽〉


 남녀를 차별하는 눈길은 장애인을 차별하는 눈길이기도 하며, 장애인을 차별하는 눈길은 자연 삶터와 짐승을 차별하는 눈길이기도 하고, 자연 삶터와 뭇 짐승을 차별하는 눈길은 학력이 낮은 사람을 차별하는 눈길이기도 할 테고, 학력이 낮은 사람을 차별하는 눈길은 못생긴 사람을 차별하는 눈길이 되기도 하고, 못생긴 사람을 차별하는 눈길은 시골사람이나 농사꾼과 공장노동자를 차별하며, 이렇게 차별하는 눈길은 우리 문화를 업신여기는 한편, 고유한 자기 삶을 못 찾고 돈-이름-힘에 끄달리면서 흔들리고 헤매이는 몸가짐이기도 하지 싶습니다.


.. 영세사업주들은 모두가 노동허가제가 실시되어 합법적인 외국인 고용의 길이 열리기를 바라고 있다. 결국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주장은, 실제와는 전혀 다르며, 연수제도 운영을 통해 나오는 온갖 이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술책임이 분명하다. 위에서 말한 연수생 사례에서 보듯이, 대한민국은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려 외국인력을 수입해서 저임금에 부리다가 쓸모없어지면 고장난 기계를 던져버리듯 본국으로 내쫓는 방법을 쓰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인권과 국제질서를 논하며 미국을 비난하는 우리들의 모습이다. 자, 이래도 우리가 마음 편이 미국을 욕할 수 있겠는가? ..  〈103쪽〉


 아이들을 어른과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자 인격체로 생각한다면 함부로 반말로 대꾸하거나 손찌검을 할 수 없겠지요. 장애인을 비장애인과 똑같은 사람으로 여긴다면 비장애인도 버스를 타고 건널목을 마음놓고 건너며 도서관이고 극장이고 느긋하게 찾아갈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놓겠지요. 남녀차별이 아닌 남녀평등 사회라면 뒷간 크기만 남녀 똑같이 할 것이 아니라, 여자가 볼일 볼 자리를 좀더 많이 마련해 놓을 수 있겠지요. 사람들이 우리 말과 글을 아끼지 않으니, 맞춤법과 띄어쓰기를 올바르게 쓰는 일을 떠나서 깨끗하고 알맞고 손쉬운 말과 글을 안 쓰면서 서양말과 한자말에 그토록 빠져들며 어려운 글을 쓰지 싶습니다.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높은학교 졸업장이 없으면 일삯을 차별해서 주니까 해마다 입시병이 도져도 고쳐질 낌새가 없어요. 이런 우리 사회이니, 이런 나라 이런 땅에 돈을 벌겠다며 찾아오는 외국인노동자는 어쩔 수 없이 푸대접을 받고 괴로워하며 가슴아픈 일을 겪는구나 싶습니다. (4339.5.22.달./4340.12.9.고쳐씀.ㅎㄲㅅㄱ)


- 책이름 : 말해요, 찬드라
- 글쓴이 : 이란주
- 펴낸곳 : 삶이보이는창(2003.5.15.)
- 책값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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