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읽는 하루
― 가르치려면 배운다
《어린이 시》
요시다 미즈호 글
이오덕 옮김
온누리
1984.1.20.
하루아침에 글을 잘 쓰는 아이나 어른은 없을 만하지만, 따로 틀을 세우지 않으면 처음 붓을 쥐는 자리부터 눈을 밝히면서 마음을 고스란히 담아낸다고 느낍니다. 길잡이로 서는 어른으로서 “우리가 보내는 하루를 그대로 쓰면 됩니다” 하고 들려줄 수 있다면, 아이도 어른도 눈물과 웃음을 스스럼없이 밝히면 되는 줄 받아들인다면, 잔소리도 큰소리도 목소리도 노랫소리도 그저 즐거이 담으면 넉넉한 줄 알아차릴 수 있으면, 모든 글은 바로 내가 되읽고 새로읽을 밑글이라는 대목을 마주한다면, 길든 짧든 빛나는 글 한 자락을 쓴다고 느낍니다. 따로 보람(성과·결과)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쓰는 글이 아닙니다. 언제나 스스로 곁에 두면서 마음을 돌아보고 되새기면서 기운을 내는 밑동을 이루는 글이라고 봅니다.
저마다 누리고 짓고 그리고 가꾸고 일구면서 나누는 삶을 그리기에 틀(표준)을 잡을 수 없는 글입니다. 글뿐 아니라 말도 억지로 틀(표준)을 잡을 수 없어요. 살아가는 하루도, 살림짓는 보금자리도, 사랑하는 사람도, 따로 낫거나 나쁜 틀(표준)을 못 세웁니다. 모든 사람이 다 다르게 타고나는 몸이듯, 아이어른 누구나 다 다르게 하루를 살아가면서 스스럼없이 쓰는 ‘삶글’입니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빚는 꿈그림을 바라보면서 손수 여민 살림살이를 그저 수수하게 쓰는 ‘살림글’입니다. 밉거나 싫거나 좋다는 틀이 아니라, 스스로 샘솟거나 우러나오는 포근하면서 밝은 햇빛과 별빛과 같은 사랑을 티없이 쓰는 ‘사랑글’입니다.
책을 널리 읽기에 눈이 넓지 않다고 느낍니다. 종이로 묶은 책만이 아니라, 바람과 하늘이라는 책이 있어요. 바다와 샘과 냇물이라는 책이 있어요. 멧새와 들새와 바닷새와 철새와 텃새라는 책이 있어요. 온갖 풀벌레라는 책이 있고, 벌나비와 개미와 지렁이라는 책이 있어요. 연구소라는 곳에 깃들면서 딱정벌레를 오래오래 지켜본 바를 담아서 묶어야 ‘곤충도감·곤충학 논문’이지 않듯, 아이 눈으로 딱정벌레를 두고두고 살펴본 바를 담아도 알뜰살뜰 빛나는 ‘벌레이야기’를 이루게 마련입니다. ‘오늘’과 ‘하루’라는 책을 읽으면서 담아낼 수 있고, 서로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눈빛을 읽으면서 담아낼 수 있는 글이라고 봅니다.
노래하면서 놀이하는 아이 곁에서, 노래하면서 살림하는 어른으로 선다면, 서로서로 늘 즐겁게 빛나는 말 한 마디를 주고받으면서 이야기가 자랍니다. 이 이야기를 문득 옮기니 글일 테지요. 겨울 한복판이나 끝자락에도, 새봄 첫머리나 한복판에도, 우리를 둘러싼 푸른바람을 나란히 그리는 이야기를 누릴 수 있기를 바라요.
모든 글은 저마다 마음꽃일 테니까요. 모든 말은 스스로 생각씨앗일 테니까요. 모든 이야기는 서로서로 사랑길을 테고요.
《어린이 시》(요시다 미즈호/이오덕 옮김, 온누리, 1984)는 1967년 6월에 처음 옮긴 꾸러미입니다. 1983년 10월에 이 묵은 꾸러미를 추슬러서 처음으로 바깥에 선보입니다. 이오덕 님 스스로 쓴 책이 있되 애써 이웃나라 책을 옮겼습니다. 옮긴 책 앞자락에 밝히듯이 ‘우리가 널리 배울 길’이 있기에 옮깁니다. 이오덕 님은 2001년에 《한 사람의 목숨》이라는 이름으로 일본 어린이와 푸름이가 쓴 노래(시)를 조촐히 옮겨서 선보인 적이 있습니다. 다만 여느 새책집에는 안 넣었습니다.
《어린이 시》를 애써 옮기셨는데 이 책을 알아보거나 살핀 손길은 매우 드물다고 느낍니다. ‘한국글쓰기연구회’ 길잡이도 이런 책이 나온 줄 까맣게 모르거나, 나온 줄 더러 알았어도 안 읽었다고 느낍니다. 전두환 등쌀에 시달린 탓도 있고, 들너울을 일으키는 데에 뜻을 두기도 했다지만, 막상 어린이 곁에 서려고 하지 않은 탓에 모르거나 안 읽었다고 느낍니다.
누가 어린이 곁에 있었을까요? 우리는 1987년에 드디어 우두머리를 끌어내렸습니다만, 그때 어린이 곁을 지키면서 어린이가 하루하루 새롭게 익히고 가꿀 살림살이를 이끌거나 가르친 어른은 누구였을까요? 지난날도 오늘날도 매한가지입니다. 아이들이 ‘손전화’에 지나치게 파묻힌다고 핀잔에 꾸지람을 하지만, 정작 아이들 곁에서 함께 일하고 살림하고 노래하면서 보금자리를 일구는 어른이 너무 드뭅니다. 아이들을 그만 나무라고서 아이들 곁에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아이들 핑계는 접고서 집안일과 집살림부터 찬찬히 돌보고 마을일과 마을살림을 바라보는 매무새를 일구는 작은걸음부터 내딛을 하루를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서로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으면서 함께 나아가려는 길을 일본 한자말로 ‘연대(連帶)’라 하고, 길을 나란히 걷는 사람을 반길 적에 일본 한자말로 ‘환대(歡待)’라 하더군요. 아직까지 일본 한자말을 그냥그냥 쓰기에 나쁠 일이 없지만, 손을 맞잡을 적에는 어린이도 알아듣도록 ‘손잡기’라는 우리말을 할 수 있고, 어깨를 겯을 적에는 어린이도 나란하도록 ‘어깨동무’라는 우리말을 할 수 있습니다. 함께 나아가니 ‘함께걷기’이고, 같이 걸어가니 ‘같이걷기’입니다. 너와 나를 아우르려고 하기에 ‘나란히’라 하지요.
밝게 웃으면서 맞이한다는 뜻으로 ‘반기다·반갑다’ 같은 우리말이 있습니다. 한결 품을 넓히면서 손을 잡거나 어깨동무를 하려는 길이라면 ‘나눔’을 바라볼 만합니다. ‘나눔’이라는 우리말을 멀리하면서 ‘분배·배분·공유·할당·부조·노블리스 오블리제·공존·안배·평등·자선’이나 ‘커머닝(commoning)’ 같은 바깥말에서 맴돈다면, 우리는 여태 손잡기나 어깨동무나 반가운 마음하고는 멀다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남(그들)하고 맞붙어서 이긴다거나, 남(저놈)하고 싸워서 꺾으려는 뜻이라면, 아무래도 손잡기나 어깨동무나 나눔하고는 멀구나 싶어요. 어느 누구도 이기거나 지지 않는 길이어야 비로소 ‘손잡기·어깨동무·나눔’이라고 느낍니다. 아이들은 뜻이 달라도 같이 놀아 왔고, 다른 마음이나 몸이어도 깍두기로 여겨 언제나 얼싸안았는데, 이제 아이들 사이에서도 손잡기가 잊히고 어른들 사이에서도 어깨동무가 매우 흐리다고 느낍니다.
참다우면서 착하고 아름다이 빛나는 어깨동무와 나눔이라면, “품 넓히기(연대 확장)”란 무엇인지 다시 짚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끼리끼리 갈라서 붙으려는 굴레가 아닌, 너나없이 자라는 들풀과 나무가 어울리는 ‘숲’을 바라보고서 배우는 길이 “품 넓히기”일 텐데 싶습니다.
어쩐지 우리는 스스로 어린이였던 나날을 너무 쉽게 잊는 듯합니다. 어른이란 몸을 입은 뒤에는 어린이와 손을 잡거나 어깨를 겯을 뿐 아니라, 이웃하고 나란히 걸어가는 길도 그만 잊는 듯합니다.
ㅍㄹㄴ
앞의 생각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민간 교육운동으로서의 글짓기 교육의 성과가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때문이겠고, 뒤의 생각은, 수난의 역사만을 거듭한 우리 민족에 비해, 그래도 그들은 매우 행복한 자리에 놓여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우리는 어린이들의 시에서 가장 솔직한 모양으로 그 나라 그 민족의 생활과 호흡을 느낄 수 있읍니다. 그러니 우리의 어린이들의 시에 우리의 역사적힌 현실이 솔직하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짓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과, 참된 시 교육을 하여 우리의 어린이들을 불행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어린이를 구하는 것이 나라와 민족을 구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 아닙니까? 요시다 씨가 서문에서 말한 것같이 시 교육은 “언어로서 세계를 창조해 나가는 일”임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겠읍니다. (5쪽)
일본 어린이의 시는 동요→아동자유시→생활시→생활행동시, 이렇게 발전해 왔읍니다. 그리고 생활시 이후의 시 지도는 생활적이고 사회적인 가치가 있는 제재를 찾도록 장려하여, 거의 40년 동안 그 방향이 변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인 토대 위에 올라서서 여러 가지 개성이 나타나는 작품 지도를 주장하는 요시다 씨로서는 마땅히 할 만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전통도 아무것도 없고, 더구나 사회 형편이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아주 다른 우리나라에서는, 이 요시다 씨의 방법을 그만한 자리에서 그만한 거리를 두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더더구나 우리나라에서는 10여년 전부터 작문 교육이라면 시고 산문이고 그저 덮어놓고 어린애들의 귀여운 재롱만을 흉내내게 하는 우스꽝스러운 교육이 성행하여 왔으니, (5∼6쪽)
교육이란 것이 허울좋은 상품이 아니고, ‘관리’하는 것도 아니고, 뒤숭숭한 푸닥거리는 물론 아니고, 진실로 그것이 과학이라면, 우리는 동서고금()의 모든 인간의 땀과 결정을 받아들이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참된 시 교육의 기운이 일어날 것을 기대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6쪽)
+
후지산은 / 한 번 폭발했다. / 우리들같이 / 불의 심장이 있다. / 선생님과 동무들은 / 이렇게 말한다. / “후지산은 이제 죽었다.” / 한다. / 그러나 나는 / 후지산은 / 살아 있다고 / 믿고 있다. (20쪽/사하꾸 후시꼬. 도꾜 2년 여)
순자야, / “바다에 안 빠지게 조심해!” / “아버지, 어머니 말 잘 듣고 훌륭한 사람이 돼야 해!” / “빨리 한국말 배워라!” / “1학년 2반 동무들 잊지 말고!” / “이따금 편지 보내 줘!” / 모두 / 차례 차례 말했다. / 순자는 / 기차 창문에서 눈물을 흘리며 / 꾸벅, 인사를 했다. / 찌리링……하고 벨이 울린다. / “잘 가거라!” / “잘 가!” 하고 / 모두들 달렸다. / 순자 아버지도 /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 칙 칙 칙 / 커덩 커덩, 하고 / 기차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 결국 가 버렸다. (49쪽/나구이 이찌로오. 아오모리 1년 남)
길을 간다. / 좋은 꽃 냄새가 난다. / 머리를 들면 / 높다란 오동나무 꽃이다. / 저녁해에 물들어 / 자주빛으로 향기를 풍기고 있다. / 벌들이 꽃가루를 온 배에다 묻히고 / 꽃 속에 뛰어들어갔다가 / 나왔다가 한다. / 오동꽃은 마치 / 어머니처럼 / 말 없이 꿀을 먹이고 있다. (101쪽/오까모도 마스모리. 오까야마현 5년 남)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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